잉여는 말 그대로 여분의 것이다. 필수품이 아니라 부차적인, 쓸모없는 것이다. 요즘 청년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잉여라 자칭한다. ‘지금 20대가 가장 힘든 세대’라는 말까지 나오는 현실에서 비롯된 자조적인 모습이다. 잉여로 대표되는 청년들의 자기 비하는 자존감 하락으로 귀결됐다. 이 현실 속에서 청년들의 자존감 향상을 미션으로 삼은 사람이 나타났다. 트렌디하고 낭만적인 벽화로 작가 지망생의 희망으로 떠오른 사회적기업 데이그래피의 박희정(27) 대표다.
박희정 대표는 대학에서 영상디자인을 전공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에는 모든 게 좋았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것도 좋았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좋았다. 심지어 과제도 재미있었다. 1년 동안 행복하게 대학을 다녔다. 그러나 2학년 때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당시 ‘디자이너가 취업을 해봤자 좋지 않은 대우만 받는다’라는 말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만화가 좋아서 영상디자인과에 진학한 그는 답을 찾고자 휴학을 결심했다.


“휴학을 하고 처음에는 디자인 관련 스타트업에 들어갔습니다. 동아리에서 만난 회장이 저를 꼬드겨서 같이 디자이너로 들어가게 됐죠. 스타트업에 들어가면서 코워킹 오피스(Co-working Office)에 입주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만난 사람들이 다들 꿈이 넘치는 거예요. 직장을 그만두고 나와서 창업을 한 분들이 대부분인데 그분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까 여기서 계속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꿈을 발견한 느낌? 이 일을 하면서 저도 힘을 얻고 그 힘을 바탕으로 파티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사실 파티를 사업적으로 키울 수 있었어요. 파티가 돈이 많이 돌아가는 아이템이라 그랬습니다. 대학생들끼리 이걸 하면서 사람들한테 수익을 얻고 그 수익으로 파티를 열고 이런 식의 파티 동아리를 했었는데 엄청 잘됐죠. 그걸 하면서 친구들이랑 계속 이런 식으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희정아 넌 잉여가 아니야”


이 파티 동아리가 데이그래피의 시작이다. 박희정 대표는 코워킹 오피스의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사회적기업에 대한 열망을 품었고 파티 동아리 구성원 중 몇 명과 함께 데이그래피를 창업했다. 그는 데이그래피의 미션을 ‘청년들의 자존감 회복’으로 삼았다.

“데이그래피를 창업할 무렵, 《잉여사회》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가장 공감했던 내용이 요즘 청년들은 자기 비하를 많이 한다는 거예요. ‘너는 나를 까지 마. 나는 내가 깐다’ 이런 거죠. 예를 들면 요즘은 자기한테 돼지라고 우스갯소리로 하잖아요. 욕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같이 일했던 어른들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더라고요. 제가 한번은 ‘저’ 요즘 잉여예요’ 했더니 ‘희정아 넌 잉여가 아니야. 잉여라는 뜻이 뭔지 아니?’ 이러면서 심각하게 바라보는 겁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생각했죠. 청년들이 자존감이 없다는 답을 얻었습니다.

자존감은 무언가 하나를 설정해 놓은 다음에 그것을 성취해 나가면서 커지는 거잖아요. 저는 우리나라 청년들이 정해진 틀 안에 살기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이 설정해준 틀인 고등학교까지 모범적으로 다니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누구나 아는 대기업, 공기업, 공무원이 되기. 이 틀이 자존감이 낮아지는 첫째 요소라 여긴 거죠. 그래서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 누군가 조금이나마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해서 청년들의 자존감 회복을 위한 사회적기업을 만들었습니다.”


데이그래피는 일기 애플리케이션으로 시작했다. 일기를 통해 자존감을 높인 박희정 대표의 경험 때문이다. 하지만 비즈니스 모델 구축에 실패했다. 그다음에는 3D 프린터를 이용한 얼굴 도장 만들기 사업을 진행했다. 창업경진 대회에서 대상을 받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뒀지만 이 또한 수익을 창출하기엔 부족했다. 연달아 사업에 실패한 그는 자신이 잘하는 것으로 사업을 펼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아이템은 1학년부터 아르바이트로 해오던 ‘벽화’였다.

“당시 진행하던 독서모임에서 청년문제에 관해 토론을 했습니다. 그때 느낀 게 결국 좋은 일자리가 답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일기 쓰기를 전파하는 것보다 한두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는 게 더 사회적으로 가치 있겠다고 느낀 거죠. 사실 제가 자존감 만렙도 아닌데 몇 만 명의 자존감을 높인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성장하는 단계니까. 그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으로 자존감 키워주기를 해야겠다! 그래서 독서모임 회원 몇 명을 꼬드겨 벽화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미대생들의 워너비 회사를 꿈꾸다


데이그래피는 ‘사이벽’이라는 벽화 사이트에서 클라이언트들의 주문을 받는다. 그다음 디자인을 하고 장소를 섭외하는 등의 조율을 거쳐 벽화를 그리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데이그래피의 구성원은 박희정 대표를 포함해 총 9명이다. 1명 빼고 모두 벽화 디자이너다.

“디자이너들에게 회당으로 페이를 주고 있습니다. 보통 한 달에 10회 이상 벽화 작업을 해요. 그분들은 다 정직원입니다. 프리랜서 신분이면 실업자로 분류되잖아요. 각종 제한이 많기도 하고요. 프리랜서는 그냥 알바일 뿐 좋은 일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데이그래피 소속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작가 지망생이다. 이 시스템에는 박희정 대표의 뜻이 담겨 있었다. 작가 지망생들이 진짜 작가가 될 때까지 일자리를 제공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정식 작가가 되기까지의 기간이 통계적으로 3년에서 1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 기간 동안 재료 구입비 등이 없잖아요. 저희는 그 단계의 친구들을 뽑고 있습니다. 횟수제는 저희가 처음이에요. 횟수제로 하면 여기서도 벽화를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보호장치 역할을 하는 거죠.”

데이그래피의 벽화는 기존의 벽화들과 다르다. 기존 벽화들이 대부분 순수하고도 깨끗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면, 데이그래피의 벽화는 젊은 감각을 품고 있다. 창의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많은 클라이언트의 사랑을 받는다. 카페나 교육, 숙박시설 등 다양한 분야의 클라이언트가 데이그래피를 찾는 중이다.


여러 길을 헤매고 헤매서 자리를 잡은 박희정 대표. 그는 청년들의 자존감 회복을 위해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명문대에 들어가면 좋은 기업에 갈 수 있다’고 말하잖아요. ‘미대생들이 졸업 후 데이그래피에 들어가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다’라는 말을 만들고 싶습니다. 미대생들의 워너비 회사, 전설 같은 느낌이죠. 그래서 최근 회의를 통해 ‘기존의 팀 분위기를 바꿔 제대로 된 회사로 만들어 가면 좋겠다. 저희를 통해 꿈을 이루는 수혜자가 많아졌으면 좋겠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과감하게 3명을 더 뽑았어요. 앞으로도 계속 회사를 발전시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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