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하다, 여리다, 곱다. 그를 떠올리면 ‘연성’ 단어만 생각난다. 아역배우로 데뷔해 연기 경력이 벌써 40년을 훌쩍 넘겼는데, 그간 맡은 수많은 배역 대부분이 ‘부드러운’ 캐릭터였기 때문. 이번엔 다르다. 좀 세다.
한 아이의 부모지만 부부 사이는 아니다. 학창시절 만난 정민과 연옥은 연인이자 천적이자 친구였다. 어느새 중년이 된 둘. 역사학자인 정민은 국제분쟁 전문기자로 은퇴한 연옥에게 “목요일마다 만나 토론하자”고 제안한다. 역사, 비겁함, 죽음 등이 주제다. 그렇게 다시 만난 둘. 매주 새로운 토론 속에서 활력과 안정을 찾는다. 그러다 오랜 세월 묵혀둔 복잡 미묘한 감정을 쏟아낸다.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 이야기다.
 

2017년에 이어 ‘연옥’ 역을 맡았어요. 했던 건데 또 엄청 긴장되더라고요. 연옥은 뭐랄까, 쌈닭 같은 여자예요. ‘건드리기만 해, 터질 준비가 돼 있으니까’처럼 시한폭탄 같고, 핀 빠진 수류탄 같고, 고슴도치 같고요. 저는 그런 면이 없어서 연옥을 이해하기 위해 연구를 많이 했어요. 연옥처럼 소리 지르고 화내기 위해서. 대사, 특히 방백이 많은 작품이라 첫 공연 때는 부담이 컸습니다. 작년에 공연이 끝나고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죠. 연옥을 좀 더 이해하고 깊은 곳까지 표현하고 싶었거든요. 다시 해보고 싶다, 했는데 기회가 왔어요.

그간 맡았던 캐릭터와, 실제 성격과도 다르다니 몰입하는 데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겠어요. 무대에서 내려오면 기운이 쏙 빠져요. 영양제를 많이 챙기고 있죠.(웃음) 일을 계속했는데도 저한테 일하는 여성의 느낌이 별로 없는 편이에요. 오히려 주부 이미지가 강해서 일하는 여성, 게다가 기자라는 직업군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어요. 몇몇 기자들 자료도 찾아보면서 연구를 많이 했죠. 기자 출신 앵커였던 조정민 목사님께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고요. 그중에서 “시비 걸 것을 찾는다, 틈을 파고든다”는 설명이 연옥이와 잘 맞을 것 같았어요.

여자 대 여자로 연옥의 삶은 어떤가요? 안타까워요. 소소한 행복을 많이 놓치고 산다 싶죠. 성취 지향적이다 보니 목표만 보고 치열하게 달려가거든요, 자존심도 세고요. 결혼도 안 하고 정민과 아이를 낳고 살잖아요. 사랑하는 대상을 자존심 때문에 놓친 건데, 그렇지 않았더라면 딸하고도 조금 더 공감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있죠. 가족과의 상처, 남녀 간의 사랑과 인생을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20대에서부터 50대까지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든 작품이에요.

대중에게는 착하고 참한 이미지예요. 실제로 보니까 결이 고운 분 같아요. 하하. 그런가요? 까칠할 때도 많은데…. 불의를 본다거나 부당한 일이 있을 때 의외로 ‘그건 아니지 않아?’ 하면서 얘기해요. 드라마 <사랑밖엔 난 몰라>(1998) 때 윤여정 선생님이 저한테 ‘윤다르크’라고 하셨어요. 쟤는 안 그렇게 생겨가지고 그렇다면서, 윤여정 혼내는 윤유선이라고 그러셨어요.(웃음) 선생님이 굉장히 합리적이고 의견을 다 받아주셔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간 비슷비슷한 이미지의 배역만 한 게 아쉽진 않나요? 착한 이미지의 역할 너무 좋죠. 제가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는 것이 아이를 사랑하며 생기는 여러 가지 감정이거든요. 실제로 그런 감정을 가장 많이 느끼면서 살고요. 그런데 배우로서 익숙한 것만 계속하기엔 좀 그렇고, 의욕과 기운이 있을 때 여러 가지를 도전해보고 싶어요. 제 안에 또 다른 모습도 찾고요. 연옥도 그렇지만, 최근 <구해줘> <그냥 사랑하는 사이> <의문의 일승>에서의 캐릭터도 저한테는 새로운 도전이었어요. 설렘이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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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 엄마

세상의 때가 하나도 묻지 않은 사람 같았다. 베테랑 배우인데 포즈를 취하면서도 소녀처럼 수줍어하고, 작은 말 한마디도 몸을 기울여 경청했다. 차분하고 가는 어조에는 기본적으로 배려심이 스며 있었다.
 
 
도전 의식을 자극할 만한 배역에는 뭐가 있을까요? 역할은 가리지 않지만 영화 장르는 가려요. 스릴러를 안 좋아해요. 굳이 영화를 보고 기분 나쁘고 싶지 않아서요.(웃음) 예전에 스릴러 영화 제안이 왔는데, 하지 않았어요. 물론 아역 때 데뷔작은 <너 또한 별이 되리라>라는 영화로 <엑소시스트> 같은 거였는데, 그건 어릴 때니까 차치하고요. ‘도전’이라고 해서 너무 극으로 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엄청난 막장이고 잔혹한 건 아니면 좋겠어요. 요즘은 서정적인 콘텐츠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전 기본적으로 행복한 걸 좋아하거든요. 요즘은 뭐라 그래야 하지, 다들 치열하고 바쁘잖아요. 성공하고 성취하는 과열경쟁 시대잖아요. 저는 그게 별로더라고요. 살짝 쉬어 가도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말하고요.

부군이 ‘치열하고 바쁜 사람’의 상징인데요(그의 남편은 이영학 사형선고 등으로 화제가 된 이성호 부장판사다). (잠시 머뭇거리다 웃음) 남편이 자기 얘기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옆에서 보면 확실히 부모 입장에서 권할 직업은 아닌 것 같아요. 스스로 사명감에 하겠다면 모르겠지만요.

국민 입장에서 ‘정의로운 판결’을 많이 내렸죠. 자랑스러울 것 같아요. 재판이라는 게 그 결과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거잖아요. 단 한사람이라도. 그게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남편을 보면, 자신의 일을 직업적 습성으로 하려 하지 않아요. 당사자에게는 일생일대의 일일 수 있다는 걸 항상 인지하고, 그 입장을 공감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써요. 실제로 되게 마음 아파 할 때도 있고…. 그걸 단순히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렇다고 집에까지 일이나 스트레스를 가지고 오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평소에는 되게 재밌어요. 완전 개구쟁이고, 전혀 위엄이 없으십니다.(웃음)

아이들이 많이 컸죠. 아들은 고2고, 딸은 중3이에요. 다행히 사춘기를 심하게 겪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서 허심탄회하게 잘 얘기하는 편이에요. 하고 싶은 게 뭔지, 자기 의견이 뭔지. 저희는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라는 편이고, 공부나 성적에는 크게 터치하지 않아요. 시험지를 보면, 변별력을 위해 틀리라고 낸 문제가 많거든요. 그거 틀렸다고 혼내고 싶지 않아요. 아이들이 배운 내용과 생각을 점검하는 게 아니라 하나라도 더 틀리게 만들려는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것도 원하지 않고요. 교육문제와 관련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 토론회 한번 열어야 될 것 같아요.(웃음) 돌이켜보면 가장 후회되는 게 애들을 서울에서 키운 거예요. 흙 밟으면서 자연과 함께 키웠어야 하는데…. 아이들이 아직 같이 다녀줘서 짬짬이 가족여행을 다니거든요. 지난여름엔 강원도 최북단 쪽을 갔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얼마 전에 남편과 둘이서도 평창, 강릉을 다녀왔는데 강원도 정말 좋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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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이 여행을 다니는군요. 그즈음이면 어색하다는 분도 많던데. 큰애가 어릴 때였어요. 아이는 유치원에 갔고, 우리 둘은 모처럼 쉬는 날이었죠. 남편도 육아에 적극적이어서 아이 낳고 처음 둘만 있는 시간이 반가웠나 봐요. ‘와, 잘됐다! 데이트하자’ 하면서 나갔는데, 점심 먹고 나니까 할 일이 없는 거예요. 밥 먹으면서도 아이 얘기 말곤 할 말이 없고. 하하. 그래서 그냥 ‘빨리 애 데리고 오자’면서 유치원에 데리러 갔는데, 말은 안 했지만 충격이었어요. 이렇게 되는구나, 하면서요. 다행히 둘 다 부부애가 우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날 이후 많이 노력했죠. 그 결과죠.(웃음)

배우가 되고 싶다고 꿈꾼 기간 없이 평생을 배우로 지냈어요. 감사한 일이죠. 별 다르게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이만큼 재밌는 일도 없다고 생각해요. 한때 다른 일 할 거 없나 두리번거리기도 했는데, 할 게 없더라고요. 어떤 모험이나 도전이나 그런 걸 못 해봐서 이제야 그런 걸 자꾸 찾나 봐요.(웃음) 실은 20대 때는 그리 열심히 하지 않았거든요. 하던 일이니까, 하면서 적당히 했어요. 그래서 지금 더 잘하고 싶은 에너지가 생긴 건지도 몰라요.

어떻게 나이 들고 싶은가요? 지금처럼 소소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고 싶어요. 배우로서는, 제가 기획자가 아니니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하고요. 꼭 1등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젊은 친구들에게도 기회가 되면 ‘너무 1등 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얘기해요. 실제로 제가 1등이었던 적도 없고요. 그런데 그러면서 얻은 가치가 많아요. 가족과 누릴 수 있는 소소한 행복들…. 내가 행복해야 주변 사람도 돌볼 수 있고요. 부부 차원에서는, 아직 실천하지 못하고 있지만 여백을 갖고 싶다고 서로 얘기해요. 일이든 뭐든, 한 발짝 떨어져 사는 시간이요. 제 또래에서 귀농을 가장 많이 생각한다면서요?(웃음) 혹은 요즘 ‘한 달 살아보기’ 같은 것들로요.

사람에게 소소한 행복이 켜켜이 쌓이면 온화함이 된다는 걸 느꼈다. 그런 그가 ‘시한폭탄’ 같은 연옥을 연기한다니, 못내 궁금하다. 공연은 2019년 2월 10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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