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은 배우에게 ‘변신’을 기대하지만, 모든 작품에는 변수가 있다. 변신을 위해 선택한 작품이 기존에 쌓아올린 신뢰마저 무너뜨릴 수도 있다. 안정을 택할 것인가, 모험을 택할 것인가는 인류의 고민이자 배우의 고민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일은, 모험이 안정이 되고 안정이 위험이 된다는 변수다. 이미지를 고수하기 위해 안정되고 비슷한 역할을 연달아 하면 돌아오는 건 찬사가 아닌, 찬바람이다.

대중은 쉽게 열광하지만 또 쉽게 싫증낸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게 상대의 마음이다. 그 때문에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오랜 시간 붙들어 둘 수 있는 건 분명 능력이다. ‘변신’에 대한 기대를 채우면서, 모험도 성공한다는 건 외줄 위에 외발자전거를 타고 오르는 일 만큼이나 어렵다. 여자인 배우가 할 수 있는 작품의 외연이 넓지 않았던 지난 몇 년간 한국 영화계의 풍토에선 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걸 해낸다. 그러면 다시 또 놀랄 수밖에 없다. 찬사와 찬사, 그 사이에 손예진이 또 작품을 들고 나왔다.

올해 그가 등장한 작품은 화이트 데이에 개봉한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봄날을 채운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그리고 가을에 찾아온 영화 〈협상〉이다. 찍은 순서는 〈협상〉이 제일 먼저였지만, 개봉은 가장 나중에 했다. 그 사이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선방과,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라는 쾌거가 있었다. 〈협상〉을 선택했을 당시, 그는 변신에 목말라 있었고, 새로운 역할을 위해 머리도 단발로 잘랐다. 그 머리가 다시 긴 생머리가 된 뒤에야 작품이 공개됐다. 앞선 두 작품의 성공은 명예인 동시에 멍에였다. 높아진 기대감을 채울 수 있을까. 손예진은 긴장된 얼굴이었다.

“일단은 한 해에 세 작품을 선보이는 셈이 되어서, ‘으잉? 또 나와?’ 이런 반응일까 봐 제일 걱정돼요. 그리고 제가 경찰 역할을 하는 것을 믿고 봐주실 수 있을까가 다음으로 걱정되고요. 저조차도 그랬으니까요. 과연 나에게 제복 입은 경찰이 어울릴까. 사실은 그래서 더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안 어울릴수록 해보고 싶다


그가 그런 선택을 한 게 처음은 아니다. 〈클래식〉과 〈내 머릿속의 지우개〉 등으로 ‘순정의 아이콘’으로 등극했을 때 그가 돌연 선택한 건 〈작업의 정석〉이었다. 클럽 천장에서 쏟아지는 물을 온몸으로 맞으며 춤을 추는 장면은, 관객의 환상도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그의 선택은 영화 〈무방비 도시〉의 살벌한 백장미, 〈아내가 결혼했다〉의 4차원 주인아, 〈백야행〉의 미스터리한 유미호까지 이어졌다. 어떤 장르 하나로 못 박아 둘 수 없다는 건 그만큼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라는 증명이었다. 그 사이 어떤 작품은 그에게 뼈아팠고, 어떤 작품은 또 한 번 흥행의 기쁨을 안겨 주었지만 결국 그에게 남은 건 책임과 선택이었다.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다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나쁜 결과였을 때도 마찬가지고요. 다만 선택에 책임을 지기 위해 늘 노력했어요. 그렇게 책임지는 법을 배워왔던 것 같고요.”

영화계에서도 손예진이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기 시작한 건 2014년 〈해적〉의 성공이 분기점이 됐다. 당시 〈명량〉 〈군도〉 등 내로라하는 대작들 사이에서 〈해적〉은 선방했다. 해적단의 단주인 여월로 분한 손예진은 짙은 화장을 하고, 줄 하나에 몸을 의지해 바다를 호령했다. 이후 〈비밀은 없다〉에서의 호연, 〈덕혜옹주〉의 뜻깊은 궤적은 그를 ‘대체 불가한’ 배우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관객의 마음과 배우의 마음이 자주 손뼉이 맞았다. 그가 한 해에 세 편의 작품을 들고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됐다.

“작품을 고를 때 배우의 입장에서도 보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도 보려고 해요. ‘내가 관객이라면, 이런 장면이, 이런 인물이 이해가 될까?’라고 거리를 두고 생각해보죠. 이해되지 않으면 이해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해요. 캐릭터에 변화를 준다든지, 호흡에 변화를 준다든지 하는 방법으로요.”

그러니까 그가 관객의 마음속에 깊이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보여지는 만큼이나 보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이 인물이,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과 행동을 하는 게 보는 이들에게 납득이 가야 한다’는 게 손예진이 인물을 해석하는 첫 번째 단추다.

“작품에 따라서 나를 완전히 그 인물 안에 대입시키는 경우가 있고, 나와 거리를 두고 만들어가는 인물이 있어요.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전자였죠. 아주 자유로운 환경이었고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해볼 수 있었어요. 〈협상〉은 후자예요. 현장에서의 제약도 있었고, 저 스스로도 자신을 시험하는 느낌이었어요.”

〈협상〉은 일종의 1인극이다. 협상가와 인질범이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말을 한다. 실제로 촬영은 협상가인 채윤(손예진)의 공간과, 인질범인 태구(현빈)의 공간에서 이원 촬영으로 진행됐다. 좁은 공간에서, 같은 옷을 입고, 감정을 소화해야 하는 일은 낯설었다. 고립되고, 외로운 기분이었다고 했다.

“덕분에 더 날것의 느낌이 난 것 같아요. 저는 정말 화면에 나오는 현빈 씨의 연기에 집중해야 했고, 현빈 씨도 화면을 통해 저와 호흡을 주고받아야 했으니까요.”

이종석 감독은 “협상가가 가진 냉철하고 이성적인 모습과, 인질범과 공감하는 인간적이고 뜨거운 모습을 함께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은 손예진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협상가는 정의를 구현하고 불의를 꾸짖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인질범과 마음을 교감하고 그를 범죄 바깥으로 끌어낼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심리적으로 인질범과 가까이 있는 인물이다. 자기 안으로만 몰입해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조승우, 조인성과의 ‘클래식 매치’

“〈협상〉은 인질범과의 싸움이기도 했지만, 저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어요. 인질범의 마음을 알아내야 하고, 그 마음을 움직여 인질을 구출해야 하는 게 제 역할이었으니까요. 상대와 호흡을 주고받을 수 없으니 손발이 묶인 기분이었죠. 하지만 배우가 고생한 만큼 관객이 보기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실지는 모르겠지만요.(웃음)”

현빈의 고생도 그에게는 귀감이 됐다. 스크린으로 봤는데도, 그의 연기에서 미세한 떨림과 호흡을 느꼈고 ‘준비를 엄청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책임감의 무게를 함께 지고 있는 이가 있어 든든했다.

“어깨가 점점 무거워지는 건 사실이에요. 매번 변신할 수는 없지만,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고민하는 거죠. 고민하면서 영화도 보고, 고민하면서 여행도 가고요.(웃음)”

손예진은 10년째 아침마다 필라테스를 하고 있다. 먼저 스스로 에너지가 채워져야 에너지를 나눌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아침 일찍 운동을 하고 나왔다. 매일 같은 스튜디오에서, 매일 같은 운동을 한다. 함께 개봉한 〈명당〉의 조승우, 〈안시성〉의 조인성과는 2003년 영화 〈클래식〉을 함께 했던 이들이다. 15년이 지난 지금 이들의 영화가 함께 개봉해 ‘클래식 매치’라고 불리기도 한다.

“저는 반가워요. 이렇게 15년을 같이 버텨왔다는 게 자랑스럽기도 하고요. 다 잘됐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요.”

15년 동안, 작품으로 받은 상처를 또 작품으로 치유해왔다고 했다. 대중의 마음을 오래 붙들고 있는 힘은 어쩌면 그런 ‘한결같음’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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