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 시즌이 다가왔다. 빛 공해가 심하다 보니 요즘 사람들은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기 힘들지만, 마음먹고 오지를 찾아 나서면 아직도 선명한 은하수를 볼 수 있다. 나 또한 날씨가 좋은 날이면 밤마다 ‘별사냥’을 나간다. 일찍 저녁을 먹고 나의 흑마 모터사이클 시동을 건다. 낮에 미리 봐둔 산정의 나무를 찾아 간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야생화와 별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니 휘발유값이며 타이어 등 소모품 값도 만만치 않다. 그동안 나의 전천후 바이크 R1200 GS를 타고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이 바이크를 처음 만난 2011년 10월부터 올해 4월 9일 오후 2시30분까지 마침내 20만km를 돌파했다. 한반도 남쪽에서만 야생화와 별을 찾아다니며 만 6년 6개월 동안 지구 5바퀴의 거리를 달린 셈이다. 아마도 기간대비 R1200 GS 계열의 롱텀 한국 신기록일 것이다.

2012년 공·유냉(공냉식+유냉식) 단종 직전의 바이크여서 매우 완성도가 높은 ‘우주명차’임을 확인한 셈이다. 그동안 무사고는 당연한 일이고 변속기며 엔진 등 모터사이클의 트러블 또한 거의 없었다.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지리산 흑마’를 쓰다듬으며, 도로와 비포장길, 임도 등 바람 불고 비가 와도 그 먼 길을 함께 해준 ‘내 영혼의 동반자’가 더없이 고맙다.

자동차 운전을 하지 않는 대신 35년 동안 100만km 이상을 달렸으니, 그 이후의 마일리지는 사실 큰 의미가 없어졌다. 어차피 남은 생에 200만km를 돌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닥다리 할리데이비슨과 그 이전의 바이크들, 2005년 전의 여러 바이크를 제외하고도 ‘마지막 기마족’처럼 참 많은 기종들을 타보았다.

그동안 BMW의 K1200 LT(21만km), R1200 RT(8만5000km), S1000 XR(1만km)과 혼다의 아프리카 트윈(8만km), 스즈키의 DR400(5만km)과 DR650(2만km) 등 19대 정도의 다양한 바이크를 갈아탔으며, 1200GS의 20만km와 더불어 실로 엄청난 거리를 달렸다.

어릴 때 어머니의 무거운 짐을 실어주기 위해 시작된 나의 바이크 인생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탈것’이 되었다. 처음엔 바이크를 타는 것만으로도 좋았지만, 사진에 빠지면서부터는 바람과 야생화와 별들과 함께했다.

바이크는 잘 달리는 것보다 잘 설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언제나 첫 번째 바이크 교본 1장 1절이다. 잘 달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서야 할 때 잘 서지 못하면 큰 사고로 이어진다. 집중과 예측, 방어 운전만이 최고 최선의 라이딩 기법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함께 잘 달려준 ‘우주명차’에게 물 세차를 제대로 해주고 잠시 휴식을 주기로 했다.

지리산에 청학동 있다면 백운산엔 백학동


▲ 형제봉 철쭉꽃과 섬진강 파노라마. 멀리 남해바다도 보인다.

▲ 봄비 내리는 솔숲에 안개가 자욱하다.

▲ 짙은 안개 속의 산철쭉꽃.

섬진강 건너 백운산으로 이사를 온 뒤부터 지리산을 더 자주 바라본다. 지리산에 살 때는 아침저녁으로 백운산을 바라보았다. 지리산에 청학동靑鶴洞 전설이 있다면 섬진강을 두고 마주하는 백운산엔 백학동白鶴洞이 있다.

옛말에 ‘쌍계청학 실상백학’이란 말이 있다. 실상사 화림원 근처가 백학동이고, 쌍계사 근처의 청학동은 전설로만 남았다. 지금의 청학동은 담양에서 유불선을 공부하던 사람들이 전쟁 이후에 들어와 만든 마을이다.

백두대간 마지막이자 처음인 지리산에 청학동이 있었다면, 호남정맥의 끝인 백운산에는 실제로 백학동이 있다.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갈라진 호남정맥은 내장산~무등산~조계산~백운산~망덕포구로 천리 이상 이어진다. 백두대간과 호남정맥 사이로 섬진강이 흐르는데 훨씬 더 먼 거리를 달려온 호남정맥의 백운산이 섬진강을 두고 지리산을 마주 보고 있다. 그래서 일부 풍수가들은 백운산의 기운이 더 세다고도 한다.

우리집에서 2km 정도 떨어진 토끼재에 오르면 어치계곡 입구 백학동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날마다 수어저수지와 더불어 한 폭의 그림을 보여 준다. 매주 목요일 순천대 강의하러 갈 때마다 빠른 길을 마다하고 굳이 토끼재를 넘어 백학동을 지나간다.

봄비 내리고 안개가 슬슬 몰려오는 백학동이 환하게 내려다 보였다. 사실 풍수지리로 터만 좋다고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닐 것이다. 지수화풍에 사람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수처작주의 자세로 어떻게 잘 사느냐가 길지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겠는가. 날마다 우리가 사는 바로 그곳이 청학동이요 백학동이라면 그 얼마나 좋을까.

오래 마음을 주면 결국 몸이 가듯이 자주 바라보고 꿈꾸면 그곳으로 가게 돼있다. 3박4일 동안 산복사꽃 피는 경주와 상주를 다녀왔다. 박혁거세의 ‘금자와 은자 전설’이 서린 곳이다. 경주 금척고분의 느티나무 아래 오래 앉아 있었다. 잘 늙어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 더 여유롭고 지혜로워져야 할 터인데 몸이 늙어가니 마음마저 조급해져서 편견과 아집만으로 세상을 보기 십상이다. 천년 고분에 뿌리 내린 신목, 저 나무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산다는 일이 훨씬 더 명징해질 것이다.

슬프고 아프고 힘들고 외로워도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대문 밖이 아수라지옥인가 하면, 세상도처가 복사꽃 피는 무릉도원일 수도 있다. 올해 봄날은 유난히 봄다웠다. 지난 설날에 바이칼호수 알혼섬에서 천고제를 잘 올렸는지 아주 예감이 좋았다.

북상하는 봄기운이 삼팔선을 넘었다. 전쟁 먹구름을 걷어내는 유례없는 훈풍이었다.

남북정상 간 직통전화가 연결되고 4월 27일엔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비무장의 두 남자가 비무장지대 습지의 풋브리지를 걸어갔다. 연초록 버드나무 그늘에 앉아 못다 한 속마음을 고백하는데, 이따금 새가 울고 어미갈대가 새끼갈대를 일으키며 힐끔거릴 뿐 경호원도 없이 봄날 오후가 무장무장 고요해졌다. 길동무가 좋으면 먼 길도 가깝다더니 안경 쓴 두 남자의 데이트가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가. 아무 걱정 없이 산복사꽃이 피고 군사분계선 101 앞에서 70년 전쟁이 끝난 셈이다.

지난 10년 동안을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만한 일이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첫 악수가 군사분계선 위에서 이뤄졌다. 한 맺힌 70여 년을 넘어 판문점은 분단이 아니라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 남북정상이 ‘통 크게’ ‘허심탄회하게’ 한반도 꽃길을 열었다.

봄비 그치고 산빛이 연초록으로 환했다. 어절씨구 어깨춤이 절로 났다. 오래 전에 쓴 절망의 시, 절규의 시가 아닌 한반도 봄날의 시를 쓰고픈 날들이다.

어치계곡과 구시폭포에 수달래 활짝

▲ 백운산 구시폭포와 수달래꽃.

수달래가 연초록 백운산의 어치계곡과 구시폭포에 화룡정점을 찍었다. 북상하는 봄기운이 삼팔선 철조망을 아지랑이 솜사탕으로 만들었다. ‘디테일에 악마가 있을 수 있다’지만 70여 년 동안의 아수라지옥에서 벗어나는 일이라면 그 무엇을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한국현대사의 대역사가 바로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동안 같은 말을 하면서도 다른 시간을 살았다. 5월 5일부터 다시 서울과 평양의 시간이 같아졌다. 노동신문 1면에 ‘정령’이 나왔다. 2년 8개월 동안 그 30분의 오차는 실로 엄청난 벽이었다. 그 벽을 무너뜨리는 실질적인 조처로서 표준시 통일은 곧 ‘통일시계’를 의미한다.

같은 말, 같은 시간은 축복이다. 우리는 동시간대에 같은 해와 달과 별과 나무를 보며 해와 달과 별과 나무라 부른다. 아직도 다른 말, 다른 시간을 사는 이들도 있지만 해와 달과 별은 그들마저 외면하지 않는다. 거듭해서 부정하고 부인하겠지만 속수무책일 것이다.

3년 전 이맘때 봉황이 내려앉는다는 연보랏빛 오동나무 꽃 위로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지난해와 올해는 달빛 때문에 다시 못 보지만, ‘하늘의 시간天時’과 인간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한반도에도 비로소 때가 왔으니 우주자연과 인간의 시간이 딱 마주치는 날들이 왔다. 남과 북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같은 시간이 겨레의 얼과 조국의 몸을 처음처럼 재생할 것이다. 행여 내 마음속에, 내 몸속에도 다른 시계가 없는지 5월 연초록의 산빛을 보며 고장난 시계를 맞춰야겠다고 다짐했다.

지리산 남부능선 형제봉에 올랐다. 높은 곳에 오르면 잘 안 보이던 너머가 보인다. 형제봉에 오르니 철쭉과 산철쭉꽃 너머로 평사리와 섬진강과 백운산이 보이고, 그 너머 광양과 남해와 여수가 환하게 보였다. 강 건너 산기슭에는 칠레처럼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모양의 다압면이 강 따라 흐르고 그 아랫자락에 우리 집도 들어앉았다.

올해는 내가 지리산행복학교 지리산길 걷기반을 맡았다. 지난 4월에는 전북 남원시 주천면의 구룡폭포 계곡길을 걸었다. 5월 마지막 주에는 어디로 갈까 고민했는데, 학생들과 형제봉 철쭉꽃밭을 다시 찾아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언제나 너머는 궁금하지만 막상 그 너머를 가보면 심드렁해지기도 한다. 베일에 싸인 것도 때로는 매력적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안과 밖이 똑 같을 수야 없겠지만, 이따금 차안과 피안이 만나고 내면과 외면이 자주 마주치기를 바랄 뿐이다.

오뉴월 신록의 산빛에 눈 시려


▲ 황매산 은하수. 텐트 빛과 잘 어울린다.

봄비가 내리면 산에 가고, 별빛이 빛나면 산에 올랐다. 오프로드 바이크를 타고 봄비 내리는 임도를 달렸다. 안개숲에 들어가니 굳이 꽃이 아니어도 좋았다. 이미 져버린 봄꽃들을 보며 ‘어찌 날마다 꽃이기를 바라겠는가’ 하고 절감했다. 1년 365일 중에 길어야 겨우 열흘 정도만 꽃일 뿐이니 꽃 아닌 날들이야말로 일상사 아닌가.

돌이켜보니 나 또한 한사코 꽃이기를 바랐다. 꽃 피우는 일과 지는 일, 꽃 피기 전과 꽃 진 뒤의 일, 묵묵부답의 겨울을 등한시했다. 나의 그 누구에게도 언제나 꽃이기를 바랐다. 꽃 아닌 얼굴들을 외면했다. 안개숲에 들어가 촉촉한 얼굴로, 꽃 다 지워버린 맨얼굴로 오래 서성거렸다.

오뉴월 신록의 산빛은 그 얼마나 눈 시리게 환한가. 하지만 때로는 불을 꺼야 보이는 것들도 있다. 휴대폰을 끄고, 전조등을 끄고, 실내등을 끄고, 외등을 끄고, 도시를 꺼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반딧불도, 별빛도, 은하수도, 그리운 얼굴과 고향도 불을 꺼야 비로소 더 잘 보인다. 봄바람 소리, 밤새와 개구리 울음 소리 또한 그렇다.

봄비가 그치고 별 총총 떠오르면 밤마다 산철쭉 꽃이 핀 황매산으로 출근했다. 나흘 밤 내내 ‘별사냥’을 다녔다. 해질 무렵 산에 올라 새벽 5시에 하산했다. 텐트를 치고 사나흘 머물고 싶었으나 대학 강의다 뭐다 일정이 잡혀 있으니 야근하듯이 출퇴근했다. 미리 ‘별나무’ 모델을 찾아놓고 캄캄한 그늘 아래 쪼그려 앉아 밤을 지새웠다.

첫째 날은 새벽 1시부터 겨우 50분 정도만 별빛 얼굴을 보여 주더니 짙은 산안개에 가려져 달이 떠오를 때까지 묵묵부답이었다. 둘째 날은 기상예보와는 전혀 다르게 새벽이 다가오도록 내내 구름 속에 갇혔다. 이틀 연속 허탕을 쳤으니 슬슬 오기가 생겨 다시 사흘 째 밤을 노렸다.

기상청보다 나의 예감을 믿으며 산정에 천천히 올랐더니 밤 11시부터 새벽 4시까지 별 총총, 빛 세례를 받았다. 넷째 날에는 별빛이 더 좋았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피곤하지만 그래도 생기가 돌았다. 마침내 은하수 시즌이 다가왔으니 당분간 나의 일터는 밤 깊은 산정일 수밖에 없다.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이 부럽지 않았다. 꼭 한 번 ‘별이 빛나는 밤’에 가보고 싶은 곳이었으나 굳이 그 먼 곳에 가지 않고도 잠시 ‘은하수 소년’으로 한껏 분위기를 내보았다. ‘별나무’ 대신 은하수 아래 내 몸을 밀어 넣었다. 은하수가 희미해지는 새벽 4시까지 20초씩 한밤의 춤을 추고 또 추었다.

올해 여름에는 다시 시베리아 바이칼호수 알혼섬에 갈 예정이다. 한여름 피서지로 시베리아와 바이칼호수를 다녀온다. ‘남북철도, 대륙을 품다!’ 슬로건으로 오래 활동해 온 (사)희망래일 주관으로 마련된 <지리산 시인 이원규와 함께하는 시베리아 철도 인문기행>이다. 동행하는 분들에겐 ‘음유시인’ 이지상 가수의 <스파시바 시베리아>(삼인출판) 사인본을 드리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사)희망래일 홈페이지 http://www.railhope.com/com에 들어가 신청하면 된다.

8월 3일(금)부터 12일(일)까지 8박10일 동안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보고, 바이칼호수 알혼섬과 극동지역의 중심 하바로프스크에도 간다. 이번 인문기행의 백미는 바이칼호수의 은하수일 것이다. 음력에 맞춰 별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날로 잡았다. 별 사진에 관심 있는 분들도 대환영이다. 별빛 아래 단체 기념촬영도 해보고 싶다. 7월에는 소설가 조선희씨와 함께하고, 8월에는 나와 함께 열흘간 시베리아를 누빈다.

한반도 종단열차가 열리기 전에 미리 가보고, 바이칼호수 알혼섬에서 은하수를 보며 보드카 한 잔 마셔보고 싶다.


별빛 한 짐


이원규

두 눈이 나빠져도 별은 보인다
빗점골에 쏟아지는 별빛들이 아까워
늦가을 다람쥐가 도토리 줍듯이
한 자루 가득 채웠다
이역천리 서울 가는 길
깡마른 몸 지게에 별빛 한 짐을 지고 갔더니
와 이리 캄캄하노?
철 지난 노래라며 슬슬 눈길을 피했다
인사동 뒷골목에도 내다버릴 곳이 없었다
그래, 서울이 좀 더 밝아졌을 뿐이야
노안의 두 눈을 질끈 감고
풀이 푹 죽은 별빛 한 자루를 둘러멨다
지하철 3호선 심야고속버스 갈아타고
까무룩 섬진강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다람쥐 꼬리를 감추며 말했다
에휴, 쌀자루에 쌀은 안 담아오고
전기밥솥 코드를 뽑아버렸다
조금 굶는다고 아무데나 거미줄 치랴
자정 넘어 섬진강 백사장에 나가
풀죽은 별자루를 열자마자
호르르 반딧불이들이 날아올랐다
쥐나도록 쪼그려 앉았다 일어서는데
어찔비칠 현기증이 일었다
생각보다 아주 가까이 별들이 빛났다

출처 | 월간산 584호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조선pub 모바일 웹 이용방법
메일 보내기 닫기
보내는 사람
보내는 사람 메일
받는 사람 메일
제목
메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