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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 타당한 의미를 담고 있다면, 그 반대도 마찬가지여야 마땅하다. 어느 쪽이든 그 타당성은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산을 나무에, 숲을 산줄기에 빗대어 말하자면, 계곡산행이나 암벽등반은 ‘나무’에, 종주산행은 ‘숲’에 집중하는 형태의 등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중반, 두 번의 백두대간 종주를 한 바 있다. 그때마다 ‘부봉’을 스쳐 지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었다. 대간종주가 지나치게 목표 지향적인 산행이 아닌가, 하는 약간의 회의가 들 정도로 부봉은 매력적인 암릉이었다.

부봉은 조령(문경 새재) 북쪽에 솟은 마폐봉(922m)에서 남동쪽으로 흘러내리다 다시 포암산(961.7m)을 향해 북동쪽으로 오르는, 역세모꼴의 백두대간 꼭짓점에서 서쪽으로 뻗은 암릉이다. ‘부봉은~ 암릉이다’ 하고 주어와 술어가 호응하지 않는 요령부득의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부봉은 하나의 봉우리를 일컫는 이름이 아니다.

동쪽에서부터 6개의 바위 봉우리가 연이어 몽글어졌다. 높이 또한 제1봉 917m, 제2봉 934m, 제3봉 911m, 제4봉 923.9m, 제5봉 916m, 제6봉 916m로 고만고만하다. ‘釜峯’이라는 한자 표기가 일러 주듯 첨봉이 아니라 솥처럼 생긴 봉우리다. 엎은 시루 모양으로 보이기도 하는 모양이다. 부봉 동쪽 문경읍 상초리 사람들은 지금도 이 봉우리를 ‘시루봉’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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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매화나무가 슬며시 내민 가지에 성기게 핀 꽃

(지리산에서 설악산으로)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 춤추는 불꽃같은 암릉을 지날 때가 있다. 그 처음이 속리산인데, 그 모습은 타오르는 불꽃같다. 이 불꽃은 대야산에서부터 잉걸불로 바뀐다. 단단한 그 불덩이는 희양산~조령산~깃대봉~마폐봉~포암산으로 이어진다. 백두대간 전 구간에서 가장 아기자기하면서도 범상치 않은 암릉미를 보여 주는 곳이다. 이 암릉들 가운데로 뻗은 부봉의 모습은 늙은 매화나무가 슬며시 내민 가지에 성기게 핀 꽃 같다. 조령산을 지나면서부터 얼굴을 보여 주는 그 꽃은 포암산을 지날 때까지 눈에 향기로 어린다.

앞서 얘기했듯이 조령산에서 포암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은 암릉으로 이루어진 성채 같은 산줄기인데도, 이름 높은 고개가 셋이나 있다. 조령산 남쪽의 이화령, 깃대봉과 마폐봉 사이의 조령, 포암산 남쪽의 하늘재(계립령)가 그것이다.

옛 사람들은 왜 이 우렁찬 등성마루를 고개로 삼았을까? 자연적인 성벽이었던 이곳은 백제와 신라,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이었고 요새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도계였고, 영남에서 한양을 잇는 ‘영남대로’가 이곳을 넘었다. 그 고개가 바로 ‘조령’이다. 왜 이 성벽 같은 고개를 넘었는지는, 인공위성의 눈을 빌릴 것도 없이 잠깐 지도만 펼치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낙동강 수계와 한강 수계를 잇는 가장 가까운 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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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3봉 남쪽 벼랑의 소나무. 배경은 조령산 동쪽 기슭이다. ②5봉에서 본 월악산.

부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옛 영남대로와 백두대간 등성마루를 걷지 않을 수 없다. 문경 쪽을 들머리로 삼으면 조령 제1관문(주흘관)에서 영남대로를 걸어올라 조령 제2관문(조곡관)에서 부봉을 오르게 된다. 하지만 이 길은 선호도가 높지 않다. 부봉의 암릉은 안전 로프 없이는 오르내릴 수 없는데, 안전 로프는 1봉에서 6봉으로 가기에 편하게 걸려 있다. 따라서 1~6봉으로 가는 것이 안전에 유리하고, 대부분 그렇게들 한다. 이 경로를 따르는 가장 쉬운 접근로는 조령 북쪽(조령산자연휴양림)에서 조령 제3관문(조령관)을 지나 동화원에서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백두대간 능선에 서는 것이다.

조령산자연휴양림에서 조령으로 오르는 영남대로 옛길에 선다. 자동차를 실어 나르는 현대의 ‘도로’는 여기까지다. 여기서부터는 오로지 두 다리가 이동 수단인 ‘옛길’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걷는 길은 전근대의 그 옛길과는 다르다. 더 이상 교통로로서의 길이 아닌 것이다. ‘레저(?)’로서의 걷기가 목적인 사람들을 위한 길.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탈근대’의 길이다. 개념상으로 보자면 고속도로보다 더 현대적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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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봉 제1봉에서 본 백두대간과 주흘산. 화면 왼쪽으로 포함산에서 대미산으로 백두대간이 이어지고, 오른쪽으로 주흘산의 능선이 흐른다. 2 부봉 제3봉의 남쪽 기슭. 부드러운 바위, 단단한 나무. 둘 사이의 경계는 없다. 3 3봉 오름 길. 4 동화원에서 백두대간으로 능선으로 향하는 계곡 숲길.

황톳길 위로 떨어지는 여름 햇살은 상냥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다소곳하다. 햇빛도 초록에 물든 궁륭 같은 숲길이다. 30분쯤 숲의 궁륭을 지나자 하늘이 열리고 성벽 위로 팔작지붕이 웅장한 문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조령관鳥嶺關’이라는 편액을 단 문경 새재의 세 번째 관문인데, 백두대간의 능선이자 영남대로의 고갯마루인 조령이다.

조령관을 지나 내리막길을 10분쯤 미끄러지면 ‘동화원東華院’이다. 조선시대에 관원들이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하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산장으로 바뀌었다. 고려 태조가 남쪽을 칠 때 이곳을 행재소行在所로 삼았고,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행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한때 이곳은 화전민이 마을을 이루기도 했었다. 1972년에는 조령국민학교 동화원분교장까지 생겼다. 하지만 1975년 정부의 화전민 이주 계획에 따라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고 동화원분교는 1985년에 폐교되었다.

동화원 뒤편의 산길로 든다. 계곡을 따르는 숲길이다. 가뭄 탓에 물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공기의 결은 서늘하다. 울창한 숲의 나뭇잎들이 뿜어내는 투명한 물 알갱이들이 속 깊은 강을 만든 것이다. 숲길은 백두대간의 기슭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편안하다. 거의 평지를 걷는 기분으로 천천히 걸었는데도 1시간이 채 되지 않아 동암문에 닿는다. 백두대간 등성마루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백두대간은 허리를 곧추세운다. 가파른 계단을 시작으로 조금씩 키를 높이며 400m를 오르자 부봉 갈림길이다. 이곳에서 백두대간은 동쪽으로 휘어 돌고, 부봉 능선은 서쪽으로 껑충 뛰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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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봉 능선에서 만난, 한몸을 이룬 단풍나무와 소나무. 빛을 탐내어 다투지 않는다. 그래서 숲. 2 백두대간과 부봉 능선 사이의 숲.

부봉 오르면 백두대간이라는 숲의 진경 보여

부봉 등성마루는 시작부터 암릉이다. 몇 걸음 옮기지 않아 바위가 가로막는다. 로프에 의지하지 않고는 오르기 힘든 층암이다. 살짝 긴장하며 로프에 의지해 키 높이의 바위를 오르자 직벽처럼 느껴지는 슬랩이 기다린다. 하지만 그리 길지는 않다. 두세 번 긴장된 호흡만으로 충분하다. 이어지는 눈의 황홀. 긴장감에 비해서는 과분한 안복眼福이다. 북동쪽으로 포암산의 바위벼랑이 신선의 옷자락인 양 펄럭이고, 대미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이 첩첩이 너울진다. 남쪽으로는 주흘산의 능선이 하늘을 떠받친다.

1봉에서 2봉까지는 기복 없는 암릉이 이어지는데, 바위로 지은 집 같은 재미있는 바위를 지나면 곧 2봉(935m)이다. 부봉의 여섯 봉우리 가운데 가장 높지만 사방으로 활짝 시야가 열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봉우리를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능선 서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면 소나무와 어우러진 3봉의 남쪽 사면을 마주할 수 있다. 신선의 실재를 믿어 본 적은 없지만, 누구라도 이런 곳에 살 수만 있다면 신선이 될 것이라는 믿음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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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봉 아래 조령천으로 이어지는 계곡의 숲.

3봉에서 4봉은 곧장 이어지지만 까다로운 구간이기도 해서 암릉 아래로 우회하는 길이 있다. 적설기만 아니라면 굳이 피해야 할 만큼 위험하지는 않다. 가능하면 능선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유순한 듯하면서도 결기가 옹골찬 부봉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5봉은 오르내리는 길 모두 짜릿한 긴장을 느끼게 하는 곳이지만 그래서 가장 재미있는 봉우리이기도 하다. 6봉은 고개를 젖혀야 할 정도로 곧추선 능선으로 이어지지만 계단이 놓여 있다. 정상에 오르면, 마지막 봉우리답게 월악산의 출렁이는 바위 능선과 백두대간의 너울을 따라 마음이 춤추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6봉을 내려설 때, 백두대간은 역광 속에서 한 폭의 수묵화로 깊어지고, 조령천으로 흐르는 계곡의 숲은 녹음으로 깊어진다.

부봉은 백두대간이라는 숲이 키운 한 그루 나무다. 그 나무에 오르면 백두대간이라는 숲의 진경이 보인다.
출처 | 월간산 5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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