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聖者)에게 영원한 삶을 달라고 했더니 손바닥에 가시를 주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또 한번 필자에게 깨달음을 주신 ‘가시’는 이번에도 역시 아프게 와 닿았다. 필자는 그저 일상에 일희일비 하는 나약한 소시민인 모양이다.
 
그래서 그간 뜸하였던 필자의 영원한 조언자이며 스승(?)이기도 한 후배(내과 전문의)에게 모처럼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니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친구는 항상 제때 전화를 받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 그러려니 하였다. 그런데 오늘 따라 유난히 그 친구와 술 한잔하면서 위안을 받고 싶어서 재차 수화기를 들었다.
 
한참 지나서 전화 너머로 “여보세요”라는 소리가 들리는데 낯설었다. 이상하여 “○○씨 핸드폰이 아니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후배가 일하던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벌써 1~2년 전에 사망했다는 것이 아닌가.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지만 병원 관계자는 잘 모른다고만 했다. “그냥 몸이 안 좋아서 병원을 그만두었고 그 후 돌아가셨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묘지가 어디냐고 물어도 모른다고는 것이었다. 아는 사람을 좀 알려달라고 해도 모른다고 할 뿐….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 줄곧 전교 1등을 한 수재였다. 대학은 자연대학으로 갔으나 학과가 적성에 안 맞았던 모양인지 신나게 놀고 동물학과를 전공으로 택하였다. 돌이켜 보면, 정의감에 불타고 표현이 직설적이며 대담한 행동을 스스럼없이 하는 멋진 후배이자 친구였다. 다만 성격이 다소 괴팍하여 주위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였다. 주변에 친구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필자와는 죽이 잘 맞아 비교적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정말 신나게 같이 놀았던 기억이 난다. 후배는 세속적인 면도 강해, 돈도 잘 벌고 아주 멋진 삶을 살고 싶어 했다.
 
의사가 되었다. 의대 교수가 못 되어...
 
이후 필자가 유학을 다녀오고 로펌을 거쳐 서초동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는 동안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알고 보니 늦깎이 의대생이 되었다고 했다. 비록 의과대학에 늦게 들어갔지만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생활해 전문의 과정도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교수로 임용될 가능성이 높았는데 문제는 후배의 성격이었다. 불의를 못 참고 워낙 직설적이어서 주변사람 대다수가 그를 싫어하였다는 것이었다. 물론 주위에는 그를 숭배하는 마니아도 많았다.
 
이런 사정으로 교수진들의 격렬한 토론 끝에 후배는 끝내 교수가 되지 못했고 그는 크게 낙담했다고 한다. 부조리한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서초동에 와서 고용의사 생활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의사를 공격하는 의료과오 소송의 자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필자에겐 의료소송의 자문이 주된 직업으로 보일 정도였다. 필자는 그의 탁월한 능력이 안타까워 “서초동 주변에 얼쩡거리지 말고 직업인 의사로서 본연의 정도를 걸으라”고 간곡하게 조언한 일도 있다.
후배는 막무가내였다. 실력으로 자신이 우리나라 최고 대학병원의 교수가 되고 싶었는데 부조리한 의사사회 탓에 억울하게 교수가 못 됐으니 복수(?)하겠다고 생각한 듯하였다. 그리고 전해 듣기로는 후배 아버지가 수위로 넉넉하지 않게 살면서 사회에 다소 반감도 있었고 또한 이러한 가정환경이 콤플렉스로 잠재했던 모양이었다. 나름 상류층 인맥으로 뭉쳐진 의과대학에서 교수가 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가 자신의 가정적인 배경이 작용한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처가 쪽은 지방 굴지의 부잣집이었다.
 
필자가 기억하기로 후배는 가족과 같이 지내지 않고 병원에서 숙식하면서 야간 당직도 보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어니 자신의 환자에게 갑자기 응급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 병원에서 숙식이 불가피하고 자신도 그것이 마음에 편하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자신의 일에 너무나 철저히 집중하고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성격이었다.
그러다 보니 같은 동네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 친구와 같이 저녁식사와 술을 하면서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한때는 의사와 변호사가 함께하는 법률서비스를 기획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 후배가 직업인 의사로서가 아니라 서초동에서 이방인처럼 생활하는 모습이 더 없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급여 전부를 집으로 보내는 것이 아닌가. 그만큼 한 가정의 가장(家長)으로 나름 최선을 다했던 것이었다.
 
이후 필자는 서초동 법조타운을 떠나게 되면서 왕래가 뜸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1년에 1~2번은 저녁자리를 같이 했다. 후배는 필자가 어떤 고민을 풀어놔도 너무나도 예리하게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책마저 시원하게 제시했다. 평소에는 잘 만나지 않다가 고민이 있으면 그제야 연락하곤 했다. 그런 면에서 필자에게 인생의 너무나 큰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능력은 너무 뛰어났으나 시대와 사회가 이를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여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 너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술을 얼굴에 뿌리던, 밉지 않던 그... 
 
지금도 기억나는 부분이 있다. 필자 사무실의 회식에 그 후배를 초대했더니 무슨 일인지 갑자기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갑자기 필자의 얼굴에다 포도주를 사정없이 뿌렸다. 직원들은 당혹스러웠지만 필자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 내면의 불만과 고통, 그리고 분노를 표출한 것 같아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까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필자의 눈과 가슴으로는 그 친구의 모든 행동이 이해가 되고 어떠한 돌발적인 행동 역시 그렇게 밉지가 않았고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런 친구가 이 세상을 떠났다니…. 그는 환자에게 올인하는 의사로서 충실했으나 개인적인 삶은 상당히 힘들어 보였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 부족해서일까. 세상에 작별을 고할 때까지 사회에 대한 불만을 제대로 승화시킬 대안이나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일까. 필자는 인생의 큰 스승을 잃은 아픔과 함께 몰려드는 텅 빈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세상을 하직한 그 친구를 생각하니 필자의 삶은 그냥 ‘덤’으로 느껴졌다. 돌이켜 보면 아무 것도 아닐, 일 때문에 지나치게 고민하고 고통 받아온 필자가 부끄러웠다. 이제라도 좀 더 긍정적으로 삶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해 보았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 왔다가 혼자 조용히 가는 모양 아닌가.
 
이제 필자 나이쯤이 되면 서서히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문구를 추상적인 글이 아니라 생활에서 또한 현실에서 체험한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삶은 DNA가 우연히 모인 상태이고 다시 풀어지는 것이 죽음이니, 그냥 사는 동안 각자 DNA의 춤사위를 멋지게 펼치는 데에 충실하고자 한다. 이제 필자의 마음은 벌써 평소에 꿈꾸어 온 ‘글로벌 시대의 온라인 사무실’을 실현하기 위하여 바닷가 근처의 조용한 전원주택 겸 사무실로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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