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금동관음상이 국내에 들어온 지 6년여 시간이 지났다. 한국과 일본의 외교 갈등과 일본 내 극우세력의 험한 행위, 국내 일부의 소탐대실 주장, 2심 재판부의 복제품 논란 등 여러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소유권을 주장하는 부석사는 2013년 가처분 신청 승소와 2017년 1심 재판 승소 등을 거치면서 차분하게 2심 재판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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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8 YTN 보도 : “일본의 한국문화재 반환 전문가가 쓰시마에서 도난당한 뒤 우리나라에 보관중인 불상 2개를 돌려 달라는 일본 정부는 무책임하다고 비판했습니다. 한일 양국이 협력해 유출 문화재의 반환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 했습니다”라고 보도한 내용을 토대로 지난 3월 26일 2심 재판부에 제출한 문화유산회복재단의 탄원서에 대해, 최근 일본의 한 단체 관계자가 “사실과 다르다”며 재판부에 요망서를 제출하였다. 사진: ytn 캡처

이런 가운데 11월 24일에는 부산에서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이 논의를 시작한다. 토론회는 히로세 유이치(전 부산여자대학교교수)와 김문길(부산외대 명예교수)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한국 측 발표자로는 김문길 교수가 나서며 일본 측 발표자로는 이가라시 아키라(五十嵐彰) 도쿄도매장문화재센터 연구원이 참여한다. 지정토론자로는 한국 측에서는 김병구 변호사, 김경임 前 튀니지 대사가, 일본 측에서는 모리모토 가츠오(森本和男) 오사카 경제법과대학 교수, 저널리스트 칸노 도모코(菅野朋子) 씨가 참여해 토론하며 종합토론 발표는 이상근 문화재환수국제연대 상임대표와 안효돈 서산시의원이 참여한다.
 
토론회는 6년여가 경과하는 동안 ‘사건 불상의 행방’에만 몰두하고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이 ‘문화재에 대한 연구와 역할, 방향’ 등에 공동의 노력이 부족하였음을 성찰하면서 진지한 토론과 연구를 위해 마련되었다. 진지한 연구와 토론을 위해 그동안 제기되었던 몇 가지 오해와 진실에 대해 밝혀두고자 한다.
 
■ 금동관음보살좌상의 ‘명칭’은 무엇안가?
 
불상의 명칭은 한국과 일본이 가장 극명하게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한국은 서산부석사금동관세음보살좌상(瑞山浮石寺金銅觀世音菩薩坐像)이라 한다. 반면 일본은 관음사의 관세음보살좌상(觀音寺の觀世音菩薩坐像)라 한다. 불상이 조성된 곳은 고려국 서주이고 서주는 현재 서산이다. 또한 불상은 결연문을 통해 “부석사에 봉안하고 영원토록 봉안, 공양하고자 서원합니다”라고 불상을 조성한 32인의 시주자들이 조성 이유를 밝혔으니 출처내력에 근거하면 ‘서산부석사금동관음보살좌상’이 맞다. 이는 1973년 일본 나카사키현 교육위원회가 문화재 지정할 때도 고려국 서주 부석사를 과거 내력을 표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에서 “대마도의 불상, 쓰시마의 관음상, 관음사의 불상” 등으로 표기하는 것은 ‘기원내력’을 의도적으로 무시했거나, 혼동을 줄 수 있다.  
 
■ 불상을 조성한 곳은 ‘어디’인가?  
 
대마도 관음사 입구에는 불상과 관련하여 두 개의 안내 표지판이 있다. 하나는 1973년 세운 것이고 표지석은 2000년에 세웠다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이 표지판에는 부석사의 위치를 ‘충남 서산’이 아닌 ‘경북 영주’로 표기하고 있다. 결연문에도 분명 고려국 서주 부석사로 표기하였는데 어찌 된 일인가? 이와 관련하여 부석사 주지 원우스님은 “고려시대 서주(瑞州)는 잠시 사용한 지명이고 대부분 서산(瑞山)을 사용했다. 그래서 서주와 영주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또한 “부석사가 있는 도비산에는 야철지(冶鐵址)가 있다. 아마 불상이나 범종의 주조를 이곳에서 한 것으로 보인다.” 서산에 야철지가 존재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보원사지의 거대 철불(鐵佛)이나 가야산에 100여개에 이르는 사찰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가까운 곳에서 철물을 주조했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검찰은 항소이유서에서 고려국 서주 부석사와 현재의 부석사가 동일하다는 증거가 없음으로 원고로서 자격이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에 부석사는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한 지표조사결과와 지형도, 조선시대 고지도를 통해 동일 사찰임을 증명하고 있다.
 
■ 현재 소송 현황은?
 
부석사불상인도청구소송은 소유권을 주장하는 부석사가 형사사건의 증거품인 불상의 처분권을 가진 한국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이뤄졌다. 즉 원고는 부석사이고 피고는 한국정부로 정부의 법률적 기관으로 법무부, 검찰청이 수행하고 있다. 장물의 환부를 주장하는 일본 측은 소송의 참가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일부에서는 부석사와 관음사와의 소송으로 오인하고 있다. 이에 일본정부의 반환요청에 한국정부는 사법부의 판단에 따르겠다는 입장을 수차례 표명한 바 있다. 2심 재판부는 일본 측에 소송 고지를 피고 측에 요청하였으나 수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 측의 재판 참여의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결국 불상은 법원의 판결에 의해 행방이 결정되거나 원고나 피고의 소송취하로 마무리될 것이다. 
 
■ 유네스코협약 때문에 일본으로 돌려줘야 한다?  
 
1970년 유네스코협약(문화재 불법 수출입 및 소유권 이전 금지 및 방지 협약)으로 도난품을 일본으로 돌려줘야한다는 주장이 있다. 일견 타당한 주장이나 협약의 구체적 내용을 보면 금동관음상은 관련이 없다는 것이 학계의 입장이다. 우선 협약의 실효성에 대해 한국(1983년 가입), 일본(2002년 가입)하여 국제협약의 상호주의에 따라 일본 측은 반환요구를 할 수있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의 국내 입법이 미약하여 제7조(b)(ii)에 기초해 회수 및 반환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즉 2012년 10월 대마도로부터 도난당한 두 불상 중 신라여래입상은 법률 제2조 2. 항상의 ‘국내문화재’의 정의에 부합하여 2012년 11월 관보 제5937호에 게재되었다. 금동관음상은 국가에 의해 지정된 중요문화재가 아니므로 관보 게재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였고 따라서 게재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금동관음상은 유네스코 협약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유네스코 협약 7조 (a)에 따라 소장품 취득에 관한 국내입법이 적용되지 않는 사립박물관 및 소규모 문화기관 등은 이 협약상의 취득 금지 의무는 지지 않게 될 것이고 유네스코 협약의 해석에 있어 7조 (b) (ii)의 반환대상은 “정당한 소유권(valid title)을 가진 자”라는 점에서 대마도 관음사가 정당한 소유권을 지녔는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협약에 의한 반환요청은 적용되기 어렵다.
 
아울러 만일 원고가 소유자라고 인정된다면 한국 정부로서는, 일본정부로부터 부석사가 공정한 보상을 받거나 아니면 부석사에게 지급할 금원을 한국 정부가 수령하기 전에는 반환을 거부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 대마도 관음사가 선의 취득할 가능성은?  
 
2013년 2월 대전지방법원은 “일본 관음사가 정당하게 취득하였다는 점을 소송을 통해 확정하기 전에는 한국 정부는 일본으로 돌려주지 마라”고 판결하였다. 부석사도 정당한 취득을 입증하면 언제든지 일본으로 돌려주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 대마도 관음사의 취득경위 소명은 없다. 막연하게 부처님이 알아서 바다를 건너왔다느니, 조선의 숭유억불시기에 구해 왔다는 등의 주장만 있어왔다. 
 
반면에 부석사측은 1.1375년 9월로 특정되는 시점에서 왜구의 서산 침구 등 6회 이상의 침탈 사례 2. 1526년 대마도 관음사의 창건기에 나오는 왜구 수장 고노씨의 행적 3, 대마도를 포함한 나가사키현, 사가현 일대의 한국기원 불상의 화흔(火欣)을 보고한 2004년 마이니치신문사의 불교예술 내용 4. <대마의 미술>에 수록된 기쿠다케 준이치 규슈대 교수 등 일본 학계의 “왜구에 의한 일방적 청구(請求)” 5,불상을 옮겼다는 이운기록의 부재(不在) 6. 부석사의 지리적 특성과 역사 등을 보고한 향토사학자의 증언 등으로 왜구에 의한 약탈을 소명하였고 1심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나가사키현 교육위원회는 1973년 금동관음상을 지정하면서 관음사를 소유권자로 지정하였으나. 취득사유 등은 불명(不明)으로 처리함으로 일본 학계의 보고마저 무시하였다. 1951년 불상의 호적과도 같은 복장물이 밝혀지고 결연문에 과거내력이 드러났음에도 나가사키현 교육위원회는 이에 대한 회의내용이나 처분결과 자료 등을 재판과정에서 요청했음에도 밝히지 않고 있다.  
 
■ 왜구의 침탈과 문화재 약탈은? 
 
왜구의 대규모적이고 조직적인 침탈은 1350년대부터 1400년까지 530여회 이상이었다는 것이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계의 대체적인 인식이다. 왜구는 정복자가 아닌 약탈자이다. 처음에는 조운선(漕運船)을 약탈하다가 점차 내륙 깊숙이 심지어 개성까지 침범, 수개월씩 주둔하면서 인근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왜구는 곡식, 보물, 사람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였다. 대표적인 약탈 문화재로 사가현 가가미신사의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와 대마도 다꾸즈다마 신사의 ‘청동반자(쇠북)’가 있으며, 대마도 일원에 있는 한국기원불상이나 범종의 대다수도 왜구에 의한 약탈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 소탐대실? 
 
부석사금동관음상의 환수운동과 관련하여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주장이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중심으로 한동안 강조되었다. 일본에 소재하는 한국기원 문화재가 7만 4점여 점 인데 부석사와 한국 재판의 영향으로 7만여 점이 반환되지 않는 듯이 주장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마치 상당수의 유물 반환 협의가 되었는데 부석사 때문에 안 되었다고 푸념한다. 사실일까? 우선 주장이 성립되려면 1. 2015년 7월 일본으로 ‘환부’한 신라여래입상 이후 일본 측이 어떠한 성의를 보였는지 밝혀야 한다. 더구나 신라여래입상은 일본이 국보로 지정한 것으로 가치가 높다. 그러나 일본 측은 재판과정에서 제기된 “취득경위 소명”“ 관음사 소유권 지정 사유” 등에 대해 일체의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65년 한일문화재협정에서 합의한 “양국 국민 간의 문화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가능한 한 협력(제1조)”조차 지키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2, 누가 작은 것을 탐하고 누가 큰 것을 잃는지 주체가 없다. 설마 금동관음상을 부석사에 봉안하자는 지역민들과 불자들이 사리분별도 못하고 작은 것(?)에 눈이 멀었다는 비난을 정부 기관의 종사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주장을 하려면 단 한번이라도 불상의 조성 내력과 관련 있는 지역민들에게 먼저 이해를 구하고 정부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3. 대마도에서 금동관음상이 반입된 이후인 2013년 이후 일본에서 환수한 문화재는 17건 119점이다. 환수 경로는 기증(8건), 구입(7건),협상(1건, 덕혜옹주 유품)이다. 이전 시기와 비교하여 환수의 경로와 대상이 다면화되고 사례가 많아졌음을 보여준다. 결국 일부의 대실(大失)한다는 주장보다는 소장자의 세대교체와 문화재에 대한 인식의 변화 등으로 환수활동이 확산되는 시대적 흐름을 잘 이해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 절도행위를 정당화?  
 
간혹 한국은 절도범을 비호하고 있다고 한다. 험한 시위자중 에는 ‘강도국가 한국’이라는 글귀도 보인다. 2012년 10월에 발생한 한국 절도단에 대해 한국 정부나 부석사, 불교계에서 단 한번도 ‘애국심에 의한 행위’라고 내세운 바 없다. 오히려 절도범은 문화재절도로 인해 특수절도죄로 중형을 선고받았다. 다른 피해사례와 같이 ‘애국심’을 이유로 죄(罪)을 감면하지도 않았다. ‘과거 약탈당한 것이라고 훔쳐도 좋다’라는 주장을 한 바도 없음에도 이들은 끊임없이 허위사실을 유포한다. 지금 사건의 본질은 절도죄는 형사사건으로 중형으로 처벌하였고, 불상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민사소송을 하는 중이다.  
 
명백하게 고려국 서주 부석사에서 조성된 관음상에 대해 원소유자인 부석사와 지역민들은 아무런 주장이나 사실 관계 확인, 연구 조사도 없이 권리를 포기하라는 것은 불상을 역사적 유산이 아닌 그저 장물(贓物)로 취급하라는 것이다. 이는 문화재의 역사성, 특수성을 무시하는 주장이다. 중국 푸첸성의 주민들은 헝가리에서 전시되던 ‘등신불’이 지역의 대표적인 유산이라고 소장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자, 선의 취득하였다는 소장자가 푸첸성에 돌려 준 사례도 있듯이 서산 부석면민들에게 금동관음상의 공동체의 기억이자 조상의 유산인 것이다.  
 
■ 한일관계 악화와 연구 피해?  
 
대마도에서 불상이 반입된 이후 여러 변화가 있었다. 2013년 당시 대마도를 방문하던 한국인은 약 10만 명, 2017년은 26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대마도에 진출하는 한국인과 기업도 대폭 증가하여 한국인의 토지 구입을 제한해야한다는 보도가 나오는 정도이다. 부산시와 대마도가 추진한 ‘조선통신사’의 유네스코등재도 2017년에 이뤄졌다. 
 
오히려 문제는 일본 정부가 한국기원 문화재의 과거 내력조사 책임을 방기하고 “부석사불상” 사건을 악용함으로 마치 약탈국가에서 피해국가로 이미지 세탁을 하고 있다는 점이 더 문제이다. 오히려 강제징용 피해자나 일본군 성노예 피해사례와 같이 65년 한일협정으로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에 대해 일본정부가 인정하지 않고 있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 공동의 유산으로 가능한가?  
 
1심 판결에서 부석사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최종심전이라고 부석사로 옮기라는 강제집행명령이 나오자 아사히신문의 한 기고자가 ‘한일 공동유산’을 주장하였다. 또 한편에서는 ‘한·일불교계의 화합적 해결’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문화재환수는 유물의 특성, 과거 이력, 취득 경위, 소장자와의 상황, 외교적 관계, 국제사회 입장 등에 따라 해결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부석사 불상의 경우도 ‘재판’이라는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과거 이력’을 밝히기 않고 ‘미래’만 말할 수 없다. 문화유산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역사와 정체성’의 뿌리이다. 
 
사실 유럽이나 미주는 지역 내 협력이 더욱 강화되고 ‘공동의 유산’으로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일례로 유럽평의회 (Council of Europe)의 틀 내에서는 문화재관련 범죄에 관한 유럽협약(1985 European Convention on Offences Relating to Cultural Property), 유럽의 건축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1985 Convention for the Protection of the Architectural Heritage of Europe) 등 많은 지역적 조약들이 체결되었다. 
 
미주국가들도 1976년 고고학적, 역사적 그리고 예술적 유산의 보호를 위한 협약(1976 Convention for the Protection of the Archaeological, Historical and Artistic Heritage for the American Nations)을 체결하였다.
 
반면 중국, 한국, 일본의 고대(古代)이래로 상호 수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음에도 역내 협력은 멀기만 하다. 부석사불상이 그 기원을 열 수 있다면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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