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 명복을 비는 대방광원수다라요의경은 프랑스에
부인 신씨가 조성한 묘법연화경은 일본으로
흩어진 유물, 탄신 600주년인 2025년 국내 전시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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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평대군의 명복을 기린 대방광원수다라요의경 앞에선 방문단. 사진 문화유산회복재단>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 그 자손들의 모임인 광평대군파종회 이택종 회장, 이규용 사무국장, 세종의 영해군파종회 이주화 회장과 함께 프랑스 국립기메박물관을 찾은 것은 10월 25일 이른 아침이었다.
 
쾌청한 하늘에는 부서 질 것 같은 하얀 구름이 조각조각 흐르고 있다. 모처럼 참 좋은 날씨라고 파리에 사는 이들이 말한다. 이틀간 강행군한 문화유산탐방일정으로 피로가 깊었음에도 팔순을 앞둔 이택종회장은 설레는 기색이 역력하다. 
 
“할아버지의 유품을 직접 만날 수 있다니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참 기쁩니다.”  
 
박물관 큐레이터 삐에르 깜봉(Pierre Cambon)씨는 개관 시간 전부터 기다리는 우리 일행을 미리 나와서 인사한다. 그는 한국 문화재와 관련하여 전문가이며, 한국어도 잘하는 편이다. 조상의 유품을 찾아 이역만리에서 찾아 온 일행을 맞이한 그는 존경스럽다면 반갑게 안내한다.  
 
“이렇게 찾아 온 여러분들이 존경스럽습니다. 특별한 열람을 준비했습니다. 충분히 보아 주세요” 
 
다소 두툼한 책 뭉치가 열리는 순간, 일행은 숨을 멈춘다. 박물관 도록이나 사진으로 알려진 것보다 변상도와 발원문의 분량이 상당하다. 하지만 변상도(變相圖)와 일부 발원문은 심하게 손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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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지에 금니로 쓴 불경, 원각경 물에 젖어 일부 글씨가 지워져 있다. 사진 문화유산회복재단

 “70년대 홍수로 인해 기메박물관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당시 습기에 젖어 일부 그림과 글씨가 훼손되었습니다. 1987년 국립 도서관의 무슈 기샤의 지휘 아래 마담 기샤와 모네, 그리고 아담이 복원했지만 현재 같은 상태라 너무 안타깝습니다” 깜봉씨의 말이다. 
 
“2025년이 광평대군 탄신 600주년입니다. 일찍 세상을 뜬 광평의 유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대군의 부인 신씨가 대군과 사별한 이후 불교에 귀의하고 조성한 묘법연화경 목판본도 일본 미에현 쓰시의 세이라이지(西來寺)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600주년을 맞이하여 유품 특별전을 할 수 있게 한국 내 전시, 가능할까요?”
 
“특별한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정식으로 요청하십시오. 저는 일본에 있는 유품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잠시 조상의 유품 앞에서 명복을 비는 의식을 하고 싶습니다. 마침 파리 길상사의 주지 혜원 스님도 오셨고, 유품이 불경이고 특별히 후손의 대표가 왔습니다.” “물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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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길상사 주지 혜원스님의 집전으로 명복을 비는 의식. 사진 문화유산회복재단

\일행은 혜원스님의 집전에 따라 반야심경을 나직하지만, 묵직한 마음으로 봉송하였다.
깜봉씨는 박물관 내 한국관도 안내하면서 일행들과 유물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특히 경북 상주 동방사에서 조성된 천수천안관음보살상이 전시되지 않은 점에 대해 물으니 다른 나라 전시회에 대여했다고 한다.
 
세종의 광평대군 사랑 유독 깊어
 
세종임금과 소헌왕후는 금술이 좋았다. 슬하에 8남 2녀를 두었다. 태조 6남 2녀, 태종 4남 4녀, 세조 2남 1녀를 두었으며 후대로 갈수록 후사가 없어 대를 잇기가 어려웠으니 역대 세종임금 시기는 모든 면에서 태평성대라 할 수 있다. 그 중에 다섯째 광평대군을 끔찍하게 사랑했음은 세종실록에도 있다.
 
≪왕비가 광평대군 이여의 집으로 이어하였다.(세종23년, 1441년, 윤 11월 16일)
 임금이 광평대군 이여의 집에 거동하였다가 돌아왔다.(11월 22일,23일,25일,27일,28일,12월 1일) 왕비가 경복궁으로 환어하였다.(12월 2일)≫
 
위 내용을 보면 왕후는 대군의 사가에서 보름여를 지냈고, 임금은 6번을 방문하였다. 물론 자녀의 사가 방문은 같은 해에 여러 번 있었다. 9월 6일 임금이 부마 연창군 안맹담 집과 9월 29일과 10월 2일, 10일, 13일 임금이 금성대군 이유의 집에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광평대군의 사가에 임금과 왕후가 장기간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광평은 특별한 존재였을 것이다. 대군에 관한 기록에도 “성품과 도량이 너그럽고 넓으며, 용모와 자태가 탐스럽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효제(孝悌)하여 비록 노복이나 사환이라도 일찍이 꾸짖지 아니하매,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였다.”라고 한다.   
 
그런 광평이 20살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신자수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영순공 하나를 두고 세상을 뜬 것이다. 세종임금과 소헌왕후의 슬픔은 한없이 컸다.
 
≪처음 여의 병이 위독할 때 임금이 밤을 새워 자지 않았고, 끝내 죽으매 종일토록 수라를 들지 아니하니, 도승지 이승손 등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오랜 병환이 있으신데 애통하심이 예절에 지나치십니다. 청하옵건대, 수라를 드시옵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내 마땅히 그리 하겠노라.” 하였으나, 날이 저물어서야 죽만 조금 마실 뿐이었다.— 세종실록 26년(1444년 12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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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 국립기메박물관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김수온은 발문에서
『 大君靈駕永脫塵勞超登樂利
聖壽萬年邦家永利此大夫人擧擧誓願之音也
正統丙寅十二月日守副司直金守溫敬跋
대군 영가께서 티끌로 가득한 험한 세상을 영원히 벗어나시어 기쁨이 넘쳐나는 극락으로 가시고, 아주 오래도록 나라와 백성이 영원히 번성하는 이것이야말로 대부인께서 진실로 바라시는 바다. 정통 병인(1446년, 세종 28) 12월 어느 날 부사직 김수온은 삼가 발문을 쓰다.』
여기서 대부인(大夫人)은 광평의 양모인 개성부부인 왕씨(開城府夫人 王氏, 1377~1449)로 광평 사후 왕부인은 며느리 신씨와 함께 출가. 대군의 명복을 빌었다.
간절한 염원을 담은 유물들의 귀환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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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기메박물관 앞에서 깜봉씨와 방문단 일행. 사진 문화유산회복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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