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漢 成帝, 반백이 에둘러 말하는 걸 듣고 기뻐했지만, 잘못을 고치지는 않아 한나라 멸망의 遠因 제공
⊙ “기뻐하기만 하고 실마리를 찾지 않으며, 따르기만 하고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내 그를 어찌할 수가 없다” (《논어》 자한편)
⊙ 조헌, 과격한 상소 일삼아 史官조차 “위태로운 말과 준엄한 비난은 고금을 통해 없던 것”이라고 비판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조헌은 과격할 정도의 직간을 많이 올려 여러 번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예(禮), 즉 사리(事理)에 밝았던 자유(子遊)는 《논어(論語)》 이인(里仁)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임금을 섬기면서 자주 간언(諫言)하게 되면 욕을 당하게 되고, 붕우 사이에 자주 충고를 하면 소원해진다.”
 
  속유(俗儒)들은 공자의 말을 자주 오해하여 임금에게 직언(直言) 직간(直諫)만이 바른 도리인 듯이 말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거기에는 사람의 미묘한 심리에 대한 통찰이 숨어 있다. 이 점을 송나라 유학자 호인(胡寅)은 이렇게 풀어낸다.
 
  “임금을 섬김에 있어 간언하는 말이 행해지지 않으면 마땅히 그 곁을 떠나야 하고, 벗을 인도함에 있어 좋은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마땅히 중지해야 하니, 번거로운 지경에 이르면 말하는 자는 가벼워지고 듣는 자는 싫어한다. 이 때문에 영화를 구하다가 도리어 욕을 당하고 친하기를 구하다가 도리어 소원해지는 것이다.”
 
정약용은 “의리로 서로 맺은 사이라고 삼감이 없으면 오래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군신(君臣)이나 붕우(朋友)는 부모나 형제처럼 피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의리로 맺어진 것이다. 공자는 부모에게도 조심스럽게 간언하다가 듣지 않으면 자신을 돌아보라 했다. 하물며 남남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만나 의리로 맺은 임금과 신하나 벗 사이에는 더욱 조심함이 있어야 한다. 정약용의 풀이는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의리로 서로 맺은 사이라도 삼감[敬]이 없으면 오래가지 못한다.”
 
  사실 정약용의 이 말은 원래 공자가 《논어》 공야장(公冶長)편에서 안평중(晏平仲)이라는 사람이 벗을 잘 사귄다며 그 비결이 “오래가는데도 삼간다[久而敬之]”고 말한 데서 온 것이다. 《한서(漢書)》 서전(敍傳)은 주로 반고(班固)가 자기 집안의 내력을 적고 있는데 그중에 반고의 큰할아버지 반백(班伯)이 성제(成帝)에게 지혜로운 간언을 올리는 장면이 담겨 있다.
 
 
  반백과 성제
 
  〈때마침 허(許)황후가 폐위됐고 반(班)첩여는 동궁(東宮·성제의 어머니)을 봉양했으며 가까이에서 모시던 이평(李平)은 첩여가 됐고 조비연(趙飛燕)은 황후가 됐는데 백(伯)은 마침내 위독해졌다. 상이 대궐을 나와 백을 문병하니 백은 일어나 일을 보았다.
 
  대장군 왕봉(王鳳)이 훙(薨)한 뒤부터 부평후(富平侯) 장방(張放)과 정릉후(定陵侯) 순우장(淳于長) 등이 비로소 총애를 받아 성제가 외출하여 미행하게 될 때에는 밖에 나아가서는 같은 수레를 타고 고삐를 잡았으며 궁중에서 입시할 때나 잔치를 거행할 때에는 조비연이나 이평 그리고 여러 시중들이 다 가득 찬 잔을 비우며 담소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이때 한번은 제(帝)가 그림 병풍을 펼쳐 보이니 술에 취한 주왕(紂王)이 달기(妲己)를 타고 앉아 밤을 새우며 즐기는 그림이었다. 상(上)은 백을 일으켜 입궐하게 하고서 여러 차례 눈짓으로 예를 표했고 그림을 가리키며 백에게 물었다.
 
  “주(紂)의 무도함이 이 지경이었는가?” 백이 대답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마침내 부인의 말을 썼다’라고 했지만 어찌 조정에서 이렇게 방자하게 했겠습니까? 이른바 온갖 악(惡)이 다 (하류로) 몰린다고 했지만 이렇듯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상이 말했다.
 
  “만일 실제로 그와 같지 않았다면 이 그림은 무엇을 경계하는 것인가?”
 
  백이 말했다.
 
  “술에 깊이 빠진 것이 미자(微子)가 떠나간 까닭입니다. ‘고함치고 소리치도다(《시경》 대아(大雅) 탕(蕩)편에 나오는 구절)’라는 것은 대아에서 시인이 눈물을 줄줄 흘린 까닭입니다. 《시경》과 《서경》에서 음란함에 대한 경계의 원천은 다 술에 있습니다.”
 
  상은 마침내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오랫동안 반생(班生)을 만나보지 못하다가 오늘에야 다시 바른말[讜言·直言]을 듣는구나!〉
 
  엄격히 말하면 반백은 직언을 한 것이 아니라 에둘러 간언하는 풍간(諷諫)을 올린 것이다. 다행히 성제는 풍류를 좋아하면서도 바른 도리의 중요성은 이해할 줄 아는 귀 밝은[聰] 군주였다. 그랬기에 반백의 완곡한 간언에 담긴 속뜻을 간파한 것이다. 간언하는 이치[禮]와 간언을 받아들이는 이치[禮]와 관련해 공자는 《논어》 자한(子罕)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바르게 타이르는 말[法語]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잘못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완곡하게 에둘러 해주는 말[巽言]을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실마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기뻐하기만 하고 실마리를 찾지 않으며, 따르기만 하고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내 그를 어찌할 수가 없다.”
 
  반백이 했던 말이 손언(巽言)이다. 그런데 성제는 분명 기뻐하기만 했지 그 실마리를 찾아 고치지는 않았다. 한나라의 멸망의 원인(原因)이 아닌, 원인(遠因)을 찾을 때 성제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유도 그가 결국은 좋은 말을 듣기만 했을 뿐 따르고서 고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巽言을 내팽개친 조헌의 상소
 
  조헌(趙憲·1544~1592)은 여러모로 공자의 제자 중에 우직했던 자로(子路)를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집이 몹시 가난해 추운 겨울에 옷과 신발이 다 해어졌어도 눈바람을 무릅쓰고 멀리 떨어진 글방 가는 것을 하루도 쉬지 않았으며 밭에 나가 농사일을 도울 때나 땔감을 베어 부모의 방에 불을 땔 때에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한다. 24살 때인 1567년 문과에 급제했고 1568년(선조 1년) 관직에 올라 정주목·파주목·홍주목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사풍(士風)을 바로잡았다는 평을 듣는다.
 
  조헌은 서인(西人)의 입장을 강경하게 유지해 이이와 성혼을 지지하면서 고비고비에서 강경한 상소를 많이 올렸다. 1587년 서인에서 동인(東人)으로 전향한 정여립(鄭汝立)의 흉패함을 앞장서 논박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지어 5차에 걸쳐 상소문을 올렸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시 일본 사신을 배척하는 상소와 동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가 나라를 그르침을 논박하는 소(疏)를 대궐문 앞에 나아가 올려 선조의 진노를 샀다. 그리고 1589년 4월 그는 전(前) 교수의 신분으로 지부상소(持斧上疏), 즉 목숨을 내놓는다는 의미에서 도끼를 들고 소를 올렸다. 그의 소는 바로 손언(巽言)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신이 변변치 못하나 또한 혈기가 있으니 어찌 겸손한 말[巽言]로 몸을 보전하는 것이 의리가 된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나라를 근심하는 한 생각이 시골에 있으면서도 환하기 때문에 성주(聖主)께서 위망(危亡)한 지경으로 들어가는 것을 신은 차마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어 조헌은 조정을 이끌고 있던 반대당 동인 대신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비판을 가한다.
 
  “정언신(鄭彦信)은 편견만을 고집해 밀가루 없이 수제비를 빚어내도록 기필하여 만백성이 모두 죽게 만들었으니 무슨 방책으로 백성들을 안정시켜 국운을 계속 연장시킬 수 있겠습니까?”
 
  “김귀영(金貴榮)은 전에 재물을 부당하게 모았다는 탄핵이 있었고 뒤에는 어진 이를 해쳤다는 논의가 있어 공론이 허여(許與)하지 않자 이에 백유양(白惟讓)의 당여(黨與)와 결탁하여 정권을 잡고 은총을 독차지하려는 계책을 세웠습니다.”
 
  “유전(柳㙉)은 장수를 천거함에 있어 오로지 뇌물만을 숭상하였으므로 심암(沈巖)이 패하여 군사가 몰살되었고 상벌(賞罰)을 내림에 있어 오직 성세(聲勢)만을 보았으므로 서예원(徐禮元)이 적병을 불러들였습니다. 약방(藥房)의 제조(提調)로 있으면서는 군부(君父)의 병환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으며,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는 군부의 명을 크게 욕되게 하고도 벼슬의 제수에는 사양하지 않았으니 나라를 망치고 집을 패망시킨 뒤에야 그만두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를 만민이 모두 우러르는 정승의 지위에 앉혀두고 반드시 뛰어난 이를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시니 자못 원신(遠臣)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일입니다.”
 
 
  유성룡도 맹비난
 
  유전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조헌의 포화에 유성룡(柳成龍)도 피해가지 못했다.
 
  “유성룡 같은 자는 평생 한 일이 일체 뛰어난 이를 해치는 일만 힘쓰고서도 뉘우쳐 깨닫고 애처롭게 여기는 단서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어찌 전하를 위하여 다 말하려 하겠습니까?”
 
  이어 동인(東人)이 장악한 조정으로 인해 생겨나는 폐단들을 열거한다.
 
  “이러하니 당하(堂下)의 관료들은 이 사람들에게 붙은 뒤에야 시종(侍從)이 될 수 있고, 무인이나 남반(南班)으로서 버림을 당한 자는 오직 이들의 논의에 붙은 뒤에야 외직에 승진될 수 있습니다. 말할 만한 선비를 찾아내어 하나하나 멀리 배척하고 하집중(河執中) 계가(季可) 같은 무리들만을 취해다가 요직에 배치하였기 때문에 번갈아가며 간사한 속임수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요로에 있는 간악한 대신은 논하지 않고 오직 작은 고을 수령이나 말단 관원만을 논박하며, 나라가 위망해지는 상황은 걱정하지 않고 오직 그 당여들의 소굴에 대한 안전만을 도모할 뿐입니다. 그 가운데 청론(淸論)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름난 자도 오직 좀도둑만 논할 뿐 큰 도둑은 감히 지척하여 논하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대신과 언책(言責)의 반열에 있는 자를 보실 적에 누가 주운(朱雲)처럼 난간을 부러뜨리면서까지 극력 간언할 자이겠습니까?”
 
  주운은 한나라 성제(成帝) 때의 사람으로 당시 권세를 마음대로 하던 무리를 배척하였는데 특히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를 참(斬)하도록 주장하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어사(御史)에게 끌려가게 되었을 때 붉은 난간을 붙잡고 버티면서 극언(極言)을 계속하다가 난간이 부러진 것으로 이름났다.
 
  그러나 조헌의 상소는 그 실상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미 도를 넘고 있었다. 무엇보다 조정 신하들이 정말 이런 소인배들이라면 그들을 쓴 장본인 선조가 결국은 눈 밝지 못하다[不明]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조헌의 마지막 칼날은 역시 동인의 영수 이산해를 향했다.
 
 
  같은 서인도 조헌의 극단성 비판
 
충남 금산 칠백의총 경내에 있는 종용사. 임진왜란 때 전사한 조헌과 700 의병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산해(李山海)가 정승이 되어서는 국사가 중대함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사당(私黨)만을 끌어들이려는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현인을 해치고 일을 그르치는 사람을 나라를 근심하는 노성(老成)한 사람보다 먼저 등용하고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은 일체 이조와 병조에 달려 있는데도 곧 나라를 좀먹는 간사한 자를 그 지위에 나누어 배치시키고 공심(公心)을 가진 사람을 배척하였습니다. 전곡(錢穀)의 관리에 이르러서도 사인(私人)이 주관하게 하고 관각(館閣)의 선임(選任)도 항상 아첨하는 소인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언책(言責)과 시종(侍從)의 반열에도 그의 심복이나 앞잡이가 아니면 온갖 계책으로 은밀히 배척하여 고매하고 방정(方正)한 선비로 하여금 일체 왕의 처소에 가까이하지 못하게 합니다. 아, 이산해의 마음은 어느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기필코 전하를 무함하고 속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 글은 누가 보아도 서인은 군자, 동인은 소인이라는 극단적 이분법에 기초한 것이다. 공자가 보았다면 한마디로 부지례자(不知禮者), 즉 예를 모르는 사람이라 했을 것이다. 당시 실록 사관의 평이다. 특히 이 글은 서인이 훗날 수정한 《선조수정실록》에 실려 있다는 점에서 사관의 평은 눈길을 끈다.
 
  〈인물의 본품(本品·바탕과 자질)을 논하지 않고 오로지 재위(在位)한 자를 그르다 하고 실지(失志)한 자를 옳다 함으로써 감동시키기를 바란 것으로서 자신의 말이 과도한 것은 미처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헌의 위태로운 말과 준엄한 비난은 고금을 통해 없던 것이었는데도 유배에 그쳤으니 아마도 밝은 임금이 위에 계시어 거칠고 우직한 것을 포용하지[包荒容直] 않았다면 중형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쟁 초기여서 그런지 같은 서인이라도 조헌의 이런 모습까지는 옹호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조헌은 이 상소로 인해 길주 영동역(嶺東驛)에 유배됐으나 이해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 명(明)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하여, 조정의 상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조헌은 옥천에서 상경, 또 다시 지부상소로 대궐문 밖에서 3일간 일본사신을 목벨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李瑀) 김경백(金敬伯) 전승업(全承業) 등과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했다. 그러나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 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의 승군과 합진해서,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했다. 자로를 닮은 조헌다운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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