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몽마르뜨 언덕 화가의 거리 / photo by 이경희
매우 바쁜 남자가 있다. 자신의 삶만으로도 24시간이 모자란 남자다.
그래서 그에게 사랑이란 가끔은 사치다. 연인은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위안을 주는 대상이지만 그녀와 모든 일상을 공유하기에는 자신의 일이 너무도 소중한 남자.
영화 ‘이프온리’의 주인공 ‘이안’의 이야기다.
 
이안은 사만다를 사랑한다. 사만다도 이안을 사랑한다. 하지만 사만다에게 이안의 사랑은 언제나 모자란다. 사만다가 런던에 머무는 이유는 오로지 이안 때문이지만, 이안은 사만다가 인디아나 출신인지 오하이오 출신인지조차 깜박깜박 잊어먹는다. 사건 당일인 ‘그날’, 사만다의 졸업콘서트가 있다는 것조차 이안은 잊어버린다. 다만 자신이 투자자에게 브리핑을 해야하는 날이 ‘그날’이라는 것만 중요하다.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오래 준비해온 까닭이다.
사만다는 그날, 졸업콘서트를 마치고 바로 미국으로 떠나야 한다. 어머니의 재혼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와 2주간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 싫다. 함께 가자고 청해 보지만 그는 자신의 일에 매달려 그 말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다. 그가 그녀에게 몰두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만다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의 삶에 있어 자신은 항상 두 번째라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모든 걸 다 바치는 자신의 사랑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그가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알아줄 거라 믿기 때문이다.
 
영화의 전개단계에서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사만다는 왜 저토록 이안에게 열중할까? 지독하게 자신의 일에만 매달린, 바쁘고도 나쁜 남자인 그가 뭐 그리 매력이 있다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만다는 보란 듯이 오로지 그에게 마음을 다 바친다. 그녀의 모든 것은 일제히 그와 연결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무엇도 그와 떨어뜨려 놓고는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사만다.
 
그런데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난다.
콘서트 이후 두 사람은 마주 앉았지만 사만다와 이안의 생각은 서로 달랐다. 사만다는 혹 이안이 함께 여행을 떠나줄까 부푼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낮의 브리핑에 실패한 그는 내내 둘의 관계가 잘될까 고민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렇지만 끝까지 버텨보기로 했어. 너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안의 말에 실망한 사만다는 결국 서운함을 털어놓는다.
“더이상 버티고 싶지 않아. 넌 내게 너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한 적도 없고, 내 일에 깊이 관심을 가진 적도 없어. 너에게 나는 늘 2순위니까. 그게 속상해. 더 비참한 건 거기에 익숙해진다는 거야.”
“정말 모르겠어.”
“이제껏 단 하루라도 다 제치고 우리만 생각한 적 없지.”
“널 좋아한다고 하잖아.”
“좋아한다고? 난, 사랑을 받고 싶어.”
 
더 이상은 못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미국행은 이미 예고된 것이므로, 이렇게 헤어진다는 것은 영영 이별이라는 것을 두 사람이 모를 리 없다. 사만다는 택시를 잡는다. 그녀가 차에 오른 뒤 열린 문을 잡고 이안은 잠시 갈등한다. 운전사의 재촉에 울고 있던 사만다가 문을 닫지만 이안은 그저 바라볼 뿐이다. 이렇게 가면 다시 못 보는 거 아니냐고 소리도 쳐봤지만 정작 택시를 타지 않기로 마지막 결정한 사람은 이안 자신이었다. 떠나는 모습을 보며 서 있는 그의 눈앞에서, 사만다를 태운 택시는 교차로로 뛰어든 자동차와 크게 충돌한다. 사만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며 이안은 오열한다.
 
이렇게 영화가 끝났다면 이 글을 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두고두고 회자될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영화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사만다의 일기장을 찾아낸 이안은 일기장을 읽다 잠이 든다. 다음 날 아침, 비참한 기분으로 눈을 떴을 때 이안은 자신의 품에 고이 안겨있는 그녀의 일기장을 발견한다. 가슴이 쓰리고 아파 어쩔 줄 모르는 그에게 누군가 소리친다.
“그거 읽기만 해봐, 아주 죽음이야!”
 
이미 오래된 영화라,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스토리가 이제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하루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

꿈인지 생시인지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안은 알 수 없지만 오늘이 어제와 같은 내용으로 흘러가지 않게 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제의 일들은 시간과 상황이 조금 다를 뿐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안은 자신이 무언가를 변경시켜 놓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어제와 달리 브리핑을 성공시킨 이안은, 사만다를 데리고 자신의 어린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짧은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특별한 하루가 만들어진다. ‘이제껏 단 하루라도 다 제치고 우리만 생각한 적 없지.’ 라고 말한 사만다에게 그 답을 주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에서 단 하루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뭘 하고 싶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특별한 하루의 시간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이안의 질문에 사만다는 답한다.
“너와 함께 할 거야, 지금처럼. 둘이 아닌 하나의 느낌으로... 사소한 것부터 심오한 것 까지... 내 소망처럼 그렇게만 된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아...”
이안은 자신이 마련한 그 특별한 시간이 사만다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시간이라는 걸 깨닫는다. 삶이 지속된다 해도 진정한 사랑을 놓친다면 그게 얼마나 허무할 것인가. 이안은 자신이 품고 살았던 아픈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직장을 잃은 뒤 술로 생을 이어갔던 아버지를 보면서, 자신은 남들에게 좌지우지되지 않고 살아야겠다 다짐했 고 했다. 하지만 그뿐, 아버지 고통을 이해하거나 위로가 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한다고 했다.
“하지만 정말 사랑했다는 그 마음을 아버지가 알아주시면 좋겠는데...”
“하늘에 계셔도 그 마음 다 알아. 죽음도 사랑을 갈라놓진 못하거든...”
이제 두 사람 사이에 갑과 을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갑과 을의 좌표는 이미 바뀌었을지 모를 일이다.
 
결국 저녁이 되고 졸업콘서트가 끝났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어제와 비슷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영화가 결말로 치닫는 동안 우리는 생각했을 것이다. 오로지 두 사람만을 위한 특별한 시간도 선물했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도 들려주었으니 이안은 이제 마음의 빚 없이 그녀를 보내 줄 수 있겠구나... 어제 보단 좀 덜 쓰리고 아픈 결말에 이르겠구나..
빗속에서 택시를 잡고 어제처럼 사만다가 택시에 올랐다. 이안은 주저 없이 사만다 옆자리에 올랐다. 이제껏 벌어진 상황으로 미루어 어제와 다른 결말은 예상할 수 없었다. 예상대로 교차로로 뛰어든 자동차와 두 사람이 탄 택시는 크게 충돌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사만다의 친구 로티가 울며 놀란 채로 병원으로 달려왔다. 전날 이안은 그녀의 위로 속에서 오열했었다. 하지만 정작 로티의 품에 안겨 우는 사람은 전날과 달리 사만다였다. 두 사람의 운명은 바뀌게 된 것이다.
 
이안이 사만다 대신 자신을 죽음으로 내던진 이유가 무얼까,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별한 하루의 시간 동안 이안은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어떤 욕심도 없이 바쳤던 사만다의 사랑을 보상해주고 싶어 그런 선택을 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사랑에 갑과 을은 존재한다. 둘 중 누군가는 더 사랑하고 누군가는 좀 덜 사랑한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을이고, 그 을이 항상 손해본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이 영화를 예로 들어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사랑은... 더 많이 사랑한 자가 주인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포기해야 그 사랑이 끝나는 것이다. 결국, 이별을 통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사람이 누굴까. 갑일까, 을일까. 갑이다. 모든 걸 다 바쳐 자신을 사랑해준 자를 잃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더 많이 사랑한 자의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사랑의 주인이 누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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