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사회 초년생으로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데 국사는 어떤 책으로 공부하면 좋을지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고등학교에는 8종 검정 교과서가 있고 시중에는 수험서가 넘쳐나지만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는 하소연이었다. 그런데 막상 추천하려고 하니 교과서든 수험서든 떠오르는 책이 없다.
 
우선 ‘한국사’라는 이름의 고등학교 검정 교과서는 분량으로 보나 서술 출입(出入)으로 보나 너무나 다양하다. 분량 면에서는 가장 많은 것과 적은 것의 차이가 무려 1백 쪽이나 된다. 내용으로 들어가면 어느 교과서에는 있고 어느 교과서에는 없는 서술, 모든 교과서에 실려 있으나 역사를 왜곡한 서술, 일부 교과서에 있으면서도 없는 것만 못한 엉터리 서술, 교과서마다 서로 다른 서술 등 한마디로 중구난방(衆口難防)이다. 이런 교과서를 두고 하나로 공부하자니 불안하고 8종을 다 보자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시중에 나와 있는 수험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8종 교과서와 앞서 출제된 내용들을 모두 담다 보니 대부분의 수험서가 1천 5백 쪽을 오르내린다. 의지할 곳 없는 수험생들은 결국 학원을 찾게 되고, 덩달아 국사 사교육 시장은 날로 커져만 가고 있다.
 
이 모든 문제는 고등학교 수준의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이 믿고 볼 수 있는 통일된 국사(國史)가 없기 때문이다. 국사 교과서 편찬을 위한 집필 기준이 있기는 하나 이는 집필의 방향을 정한 것이지 내용을 서술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집필 기준 마련에 참여하는 인사는 누가 어떤 기준에 의해 선정하는지도 알 수 없다. 전문성은 갖추었는지, 좌우 균형은 이루었는지, 시대별 전문가가 골고루 참여하였는지 등 모두가 오리무중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담당자가 몇몇 지인에게 전화로 참여를 요청하는 것인지, 아니면 공지를 통해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것인지 알려진 게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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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원에서 지난 12월에 시행한 3차 집필기준 시안 공청회 순서를 보면 평가원 소속 담당자와 현직 교사가 발제자 명단에 올라 있다. 교사는 지식 전달자이지 전문가가 아니다. 집필 기준은 비전문가인 교사가 마련하는데 교과서의 대표 집필자는 정작 대부분이 교수다. 교수가 집필한 교과서를 교사가 마련한 집필 기준을 근거로 평가하여 합격과 불합격을 판정한다.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집필 기준 마련 이후에 진행되는 교과서 편찬 과정은 또 다른 문제다. 집필 기준에 따라 교과서를 편찬할 때 어떤 자료를 근거로 편찬하는지 알 수 없다. 대체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우리역사넷’에 수록된 자료를 기본으로 편찬할 것이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역사넷’의 자료는 그 분량이 방대한데다 애초에 잘못된 서술, 새로운 연구 성과가 반영되지 않은 서술, 논문으로 써서 수정하기 곤란한 사소한 오류 등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역사넷’의 내용은 수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모든 고등학교 교과서에 1873년 최익현의 흥선 대원군 탄핵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이 하야하고 고종이 친정을 선포했다고 서술되어 있으나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최익현의 상소에는 흥선 대원군의 탄핵을 요구한 내용도, 고종의 친정을 요구한 내용도 없다. 흥선 대원군은 하야(下野)라는 말이 어울리는 자리에 있지도 않았으며, 승정원일기나 고종 행장(行狀)을 보더라도 고종의 친정은 1866년 2월 13일에 이미 시작되었다. 또,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고부 민란이 일어나기 전인 1893년 말에 배포했다고 소개한 사발통문(沙鉢通文)도 실상은 통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잡기(雜記)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모두가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는 오류들이 수정되지 않은 채 교과서에 수록되어 학생들에게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오류가 한 둘이 아니라는 점과 현행 교과서 편찬 체제에서는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문제는 심각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방법은 ‘국사 교육 표준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국립국어원에서 우리 국민이면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표준국어대사전을 편찬하듯이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에 등재된 자료를 비롯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고등학교 학생들 수준에서 알아야 할 내용을 선별하여 ‘국사 교육 표준안’을 하련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전담 부서를 설치하고 각 시대별 전문가들을 모아 안정적이고도 지속적인 연구와 편찬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표준안을 마련하기 위해 구성된 담당 연구자들은 학계의 통설과 정설을 위주로 현행 고등학교 교과서 분량의 2~3배에 이르는 대략 1천 쪽 내외의 표준안을 마련하도록 한다. 연구자들은 기존 자료를 수합하여 별 논란이 없는 부분은 바로 정리하고, 이설(異說)이나 소수설이 필요한 경우 부기(附記)하여 참고할 수 있도록 하며, 새로운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수정하거나 추가하되, 학설의 대립이 첨예한 부분은 해당 분야 학회나 연구자 등에게 연구를 의뢰하여 결과를 도출하도록 하면 된다.
 
이렇게 정리된 표준안을 별도의 홈페이지에 공개하여 누구나 열람하며 문제를 제기할 수 있도록 하여 지속적으로 수정하고 보완한다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표준안이 될 것이다. 현행 검정 교과서의 오류는 출판사마다 일일이 문제 제기하는 것도 어렵지만 출판사 입장에서 재량권을 넘어서는 부분도 적기 않기 때문에 잘못된 서술임에도 수정이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표준안이 마련될 경우 문제 제기와 수정이 모두 표준안으로 일원화되기 때문에 효율적인 수정과 관리가 가능해진다. 
 
이렇게 국사 교육 표준안이 마련된다면 초‧중‧고 국사 교과서 편찬의 토대가 되고, 각종 시험 출제의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검정 교과서를 발행하는 출판사에서는 굳이 대학 교수가 아니더라도 교과서를 제대로 아는 능력 있는 교사와 출판사 전문 인력만 투입해도 좋은 교과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며, 잘만 운용하면 수험생들의 고충을 덜어줄 뿐만 아니라 사교육비 절감의 효과도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무엇보다 모든 내용이 역사 전문가에 의해 관리되기 때문에 비전문가인 특정 세력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 특히 국사 교과서 개정 때마다 반복되는 국론 분열과 갈등도 당연히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더 욕심을 부린다면 이를 축약 또는 재편집하거나 영어 또는 일본어를 비롯한 외국어로 번역하여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외국에 알릴 수 있는 기본적인 자료가 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국사 교육 표준안’은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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