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3일 만에 자신이 적폐로 규정했던 국정 역사 교과서의 폐기를 전격(電擊) 지시했다. ‘획일적(劃一的) 역사관 강요’라는 것이 그 이유다. 역사 교과서가 하나면 획일화된 역사관을 강요하는 것이며, 여러 종류면 다양성이 보장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국정은 국가 권력이 역사 해석을 독점하는 것이며, 검정은 국가 권력의 개입 없이 역사학자들이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보장 받는 가운데 편찬된 교과서라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논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현행 7종 검정 교과서가 국정 교과서와는 달리 집필자의 자주성과 전문성이 충분히 보장되었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사 해석의 다양성이라는 목적이 교육 수요자인 학생들에게 실현되어야 한다. 과연 그럴까?
 
삼국사기나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서를 비롯한 수많은 역사자료를 대상으로 역사 전문가들이 저마다의 역사적 관점과 연구 목적에 따라 다양한 역사 해석을 제시하여 축적된 학설 중에서 정설이나 통설 위주로 학생들 수준에 맞는 내용을 엄선하여 편찬한 것이 교과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과서 집필자가 이들 학설 중에서 자신의 학문적 소신과 양심에 따라 자율적으로 취사선택(取捨選擇)하여 집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과서 집필에는 교육부에서 제시한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이 있어 반드시 그에 따라 편찬한 후 교육부 장관의 검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현재 초‧중등교육법 제29조(교과용 도서의 사용) ①항에는 ‘학교에서는 국가가 저작권을 가지고 있거나 교육과학기술부장관이 검정하거나 인정한 교과용 도서를 사용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검정 교과서와 관련된 모든 권한은 교육부장관이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교육부장관의 위임을 받아 집필기준을 마련하고 출판사는 집필자를 구성하여 그 기준에 따라 교과서를 집필한 후 검정을 거치게 된다. 당연히 검정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에 충실해야 하며 집필자의 소신에 따라 집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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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2018.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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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2018. 2. 5.

교과서를 어떤 관점과 시각으로 쓸 것인지 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에 대해 안내한 것이 교육과정으로 교과서 집필의 근간이 된다. 이번에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발표한 교육과정 시안을 보면 지금까지 전근대사와 근현대사가 대략 5:5 수준이었던 것이 2.5:7.5 수준으로 수정되어 근현대사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만약 집필자가 전근대사의 비중이 높아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7.5:2.5로 바꾸어 편찬할 수 있을까?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교육과정 다음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 집필 기준으로 이는 더 구체적이고 세세하다.<표 참조> 집필자는 이 기준에 따라야 하며 이 모든 것이 검정 심사의 대상이 된다. 이윤을 창출해야 할 민간 출판사에서는 편찬 과정에 투자한 많은 자금을 회수해야 하고, 또 교과서를 출판하여 이윤을 창출해야 한다. 당연히 집필자에게 교육과정과 집필 기준을 지켜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할 수밖에 없다. 집필자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자신이 집필한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당연히 집필기준을 떠나 자신의 학문적 소신에 따라 집필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다. 집필자는 더 이상 자율적 편찬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라도 덜 틀리고, 좀 더 보기 좋게 꾸밀 것인지 고민해야 하는 편집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이번 집필기준 시안 공청회에서 나온 아래 언급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은 교과서 집필자에게는 금과옥조로 여겨져 내용에 있는 한 글자 한 글자의 의미와 심지어 행간의 의미까지도 세세하게 살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에 따라 교과서의 방향, 내용, 분량들이 결정되고 이는 대다수 학교의 역사교육을 지배하게 된다.”<2017. 12. 27. 중학교 역사・고등학교 한국사 교육과정 및 집필기준 시안 개발 2차 공청회 중에서>
 
이 글은 현행 7종 한국사 교과서 중 채택률이 가장 높은 교과서의 대표 집필자가 현장에서 경험한 소회(所懷)를 솔직하게 언급한 것이다. 교육부의 집필 기준은 과거 군사정권에서 언론사에 내려진 보도지침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필자에게 자주성과 전문성 그리고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된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는 곧 현행 검정 교과서도 아무리 여러 종류로 발행한다 하더라도 국정 교과서의 편찬 과정과 전혀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자율성이 제한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는 검정이나 국정이나 마찬가지다. 
 
아무튼,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가 발행된 하더라도 교육수요자인 학생들에게 역사 인식의 다양성 실현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설령 발행된 교과서 중에 다소의 미묘한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학생들은 학교에서 정해주는 하나의 교과서로 공부한다. 역사 인식의 다양성 실현은 7종 교과서를 모두 읽고 비교 검토할 때나 가능하다. 하지만 학생들은 자신이 공부하는 교과서 외에는 어떤 교과서가 있는지조차도 모른다. 그렇다고 교사가 여러 종류의 교과서를 종합하여 친절하게 가르쳐주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결국 국정 교과서나 검정 교과서나 학생들 입장에서 하나의 교과서로 공부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며 검정의 차별성이나 우월성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번 토론 과정에서 자주 등장하는 언급이 자유발행제다. 자유발행제라는 것은 집필 기준 없이 집필자의 뜻에 따라 자유롭게 편찬하여 학교에 보급한다는 제도다. 이는 검정제가 안고 있는 자율성 침해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솔직한 고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발행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수학능력시험을 비롯한 모든 국사 시험의 폐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출제의 기준으로 삼을 교과서를 특정할 수 없고 학설 문제가 제기될 경우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시험에도 출제되지 않는 국사 교과서를 일선 학교에서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의 방대한 우리의 역사를 학생들 수준에 맞도록 편찬하기 위해서나 교육정책의 일관성과 안정성을 위해서 집필 기준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국정 교과서나 검정 교과서는 1종과 7종의 숫자 차이 외에 아무런 차별성이 없다. 결국 국정 국사 교과서를 반대한 수많은 지식인과 국민들이 국정은 획일적 역사관을 강요하는 것인 반면 검정 교과서는 역사 해석의 다양성을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한 주장은 진실을 호도한 거짓 선동 구호였다. 이것이 곧 대국민 사기(詐欺)라는 것이다.
 
교과서는 학술서가 아니다. 검정이든 국정이든 집필 기준에 의해 편찬되는 현실에서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을 보장하고 역사 인식의 다양성을 실현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역사학자들과 교육감을 비롯한 수많은 지식인들이 성명서를 발표하여 국정교과서는 악(惡), 검정교과서는 선(善)으로 낙인(烙印)하여 마침내 국정 국사 교과서의 명줄을 끊어 놓았다. 그들은 과연 학술서와 교과서를 구분할 수나 있는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국정 국사 교과서를 반대한 지식인들 중에 교과서를 단 한 줄이라도 읽어본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지식인은 자신이 읽고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8종 검정 교과서와 국정 교과서를 다 읽고 나서야 검정과 국정의 차별성이 눈에 들어온다. 교과서를 읽지 않고 교과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춘향전을 읽지 않고 춘향전에 대해 떠드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니, 교과서 한 줄 안 읽고 교과서를 반대한 지식인들의 행동은 부화뇌동(附和雷同)이라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참으로 낯 뜨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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