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나인 이븐 이스하끄, 아바스조 칼리프 밑에서 일했던 네스토리우스교도 의사
⊙ 후나인,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 등을 그리스어에서 아랍어로 번역
⊙ 후나인이 아랍어로 번역했던 고대 그리스 문헌들이 서구에 전해지면서 르네상스 시작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 이슬람학 박사 / 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저술
고대 그리스의 문헌들을 아랍어로 번역한 후나인 이븐 이스하끄.
이슬람을 이야기할 때마다 과거 이슬람 문명이 서구보다 앞섰고, 무슬림들이 전해준 과학・철학・의학 지식이 없었다면 서구의 르네상스는 불가능했다고 한다. 이슬람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거의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단골메뉴처럼 읊조리는 얘기다. 이슬람 세계가 서구에 전한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스인들이 성취한 뛰어난 학문이었는데,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선진 그리스 의학・철학・과학을 아랍어로 옮긴 곳이 아바스 칼리프조(朝)의 칼리프 알마문(al-Ma’mun·재위 813~833)이 세운 ‘바이트 알히크마(Bayt al-Hikmah)’, 곧 ‘지혜의 집’이었다.
 
  알마문은 ‘지혜의 집’ 또는 ‘지혜의 책 창고’로 불리던 아버지 하룬 알라시드(Harun al-Rashid·재위 786~809)의 도서관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늘려 일종의 국립번역소로 만들고 명저를 아랍어로 옮기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그리스 서적을 비롯하여 외국어로 된 학문서적이 제국의 공용어 아랍어로 번역되고, 이를 바탕으로 아랍 학자들이 지식을 전수하고 연마하여 새로운 사실을 밝혀 찬란한 이슬람 문명을 이루었다.
 
  무슬림들의 지식은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중세 서구에 전해져 서구인들이 배우고 익히면서 더욱 발전시켜 더 뛰어난 과학문명을 이루었다. 서구인은 무슬림들을 통해 고대 그리스의 학문을 재발견하고 자극을 받아 그리스 원전을 직접 라틴어로 옮기면서 지식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이처럼 무슬림들은 서구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럽이 잊고 지낸 그리스 학문을 전해줌으로써 서구의 자각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에 서구 이슬람학자들은 이슬람 문명을 중간자 문명(Intermediary civilization)이라고도 부른다.
 
 
  네스토리우스교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구분하자고 주장한 네스토리우스.
  사실이 이러하다 보니 우리 주변에는 이슬람 문명이 서구보다 앞섰었는데, 현대 서구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배은망덕하게 이슬람과 무슬림만 비난한다고 비분강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슬람 문명이 없었다면 오늘날 서구가 감히 이렇게 앞선 문명을 지니고 존재할 수 있었겠냐는 훈계와 함께 말이다. 무슬림들이 만든 책이나 온라인 페이지는 서구보다 훨씬 앞섰던 이슬람 문명을 강조하면서 무슬림이 서구인의 스승이었다고 자부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한 가지 꼭 하고 싶은 말은 서구를 일깨운 스승이 된 이슬람 문명이 무슬림이 혼자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슬람 세계의 진보와 발전에 기틀이 된 그리스도교인과 유대인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선진 그리스 지식을 아랍어로 옮겼던 그리스도교인 후나인 이븐 이스하끄(Hunayn ibn Ishaq·808~873)를!
 
  아바스 칼리프조의 쿠파에서 조금 떨어진 알히라(al-Hirah)에서 태어난 후나인 이븐 이스하끄는 이바드(Ibad)라는 아랍부족 출신이라서 알이바디(al-Ibadi)라고 불렸다. 이바드족은 그리스도교를 따르던 부족인데 이슬람이 성립된 후에도 개종하지 않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지하였다. 이들이 따른 그리스도교는 이른바 네스토리우스(Nestorius·386~450)파 그리스도교다.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는데,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신(神)의 어머니(Theotokos)’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라고 불러야 한다고 하였다가 예수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한다고 하여 431년 에페소 공의회와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배격되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회는 네스토리우스에 동정적인 사람들이나 교회를 네스토리우스파로 불러왔다.
 
  중동에서 네스토리우스파는 예수의 모국어였던 아람어(Aramaic)의 시리아 지역 방언, 즉 시리아어(Syriac)를 전례용어로 사용해 왔는데, 로마의 박해를 피해 페르시아제국에서 건재하였다. 7세기 당나라에도 전파되어 한자문화권에서는 경교(景敎)라고 불렸다. 오늘날 서안비림박물관(西安碑林博物館)에 보존되어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가 중국 전래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 등 아랍어로 번역
 
후나인 이븐 이스하끄가 아랍어로 번역한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
  서구에 요하니티우스(Johannitius)로 알려진 후나인 이븐 이스하끄는 시리아어와 아랍어를 모두 하는 이중 언어 구사자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아랍어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리스어는 어떻게 배웠을까? 유수프 이븐 이브라힘에 따르면 후나인은 바그다드에서 역시 그리스도교인이자 유명한 궁정의사로 ‘지혜의 집’ 책임을 맡고 있던 유한나 이븐 마사와이흐 아래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후나인은 스승에게 그리스 의학에 대해 물었지만, 유한나는 불필요한 질문으로 간주하였을 뿐 아니라 잦은 질문에 화를 내면서 후나인을 쫓아낸다. 지식욕이 강한 후나인은 약 2년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곳에서 머물렀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른다. 비잔티움 제국 어디에선가 체류하였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어디에 있었든 간에 다시 바그다드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후나인은 호메로스의 작품을 암송할 정도로 그리스어에 능통한 상태였다. 스승이었던 유한나와도 화해하여 유한나는 후나인이 그리스어로 쓰인 작품을 번역하도록 장려하고 후원하였다. 무타와킬(Mutawakkil·재위 847~861) 칼리프 시대에 후나인은 궁정의사로 임명됐지만, 변덕스러운 칼리프의 성격과 그리스도교인인 동료의 시기로 궁정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후나인은 성화공경(聖畵恭敬)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궁정에서 꾐에 빠져 성화에 침을 뱉는 바람에 네스토리우스 총대주교와 칼리프 무타와킬의 분노를 사 태형(笞刑)을 받고 투옥된 후 도서관을 비롯하여 전 재산을 몰수당하였다가 6개월 후 다시 복직되어 죽을 때까지 궁정에서 일했다고 한다.
 
  번역가로서 후나인이 남긴 업적은 의학・철학・천문학・수학뿐 아니라 주술, 꿈 풀이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현란하다. 아들 이스하끄와 조카 후바이쉬를 포함한 제자들과 함께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의학서,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 디오스코리데스의 《약물론(藥物論, De Materia Medica)》 등을 아랍어로 옮겼다. 《70인 역 히브리 성경(Septuagint)》을 아랍어로도 옮겼는데, 당시 최고의 성서 번역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갈레노스의 의학서 번역
 
그리스의 갈레노스가 쓴 눈병에 대한 의학서의 아랍어 번역본. 후나인 이스하끄가 번역했다.
  후나인은 갈레노스의 책을 번역하면서 갈레노스가 쓰지 않았지만 필자로 전해오는 몇몇 작품이 갈레노스의 것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는 놀랍게도 오늘날 학자들의 판단과 다르지 않다.
 
  후나인은 그의 저서에서 자신이 번역한 갈레노스의 책이 129권이라고 집계했는데, 이 중 100권은 그가 혼자 시리아어나 아랍어, 또는 두 언어로 모두 옮겼다. 후나인이 번역했던 갈레노스의 책들은 11세기 말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구 학자들이 그리스 의학을 재발견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후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관찰과 실험을 중시한 갈레노스의 정신을 본받아 그리스어 원문에서 직접 번역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깨달았는데, 이는 결국 현대 의학 발전에 든든한 기틀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후나인의 학문적 열정은 지치지 않고 그리스 필사본(筆寫本)을 찾으러 다닌 집념에서 잘 드러난다. 갈레노스의 《논증에 관하여(De Demonstratione)》를 찾아다니면서 그는 이렇게 심정을 토로하였다. “나는 그것을 간절히 찾길 원하면서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돌아다녔고 알렉산드리아까지 갔지만, 다마스쿠스에서 반만 찾은 것 외에는 소득이 없었다.”
 
  이처럼 열정적이었던 후나인의 필사본 수집은 오늘날 그리스 원문(原文)을 확정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가 모아 번역한 필사본이 오늘날 존재하는 것보다 더 이른 시기의 작품인 데다가 현재 유실된 것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문은 이처럼 돈이나 명예는 생각하지 않고 가슴으로 지식을 찾고자 세상을 주유한 이들의 순수한 열망이 있기에 발전하고 계승되는 것이다. 후나인이 그리스 원전(原典)에 대한 탐구욕 없이 그냥 자신이 아는 언어에 만족하였더라면 중세 서구인들은 그리스 학문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플라톤의 저서 등 번역
 
  후나인은 열심히 모은 필사본을 서로 대조하면서 번역 작업을 진행하였다. 번역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정확한 텍스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후나인의 작업은 오늘날 학자들이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후나인이 그리스도교인의 정체성(正體性)을 번역 작업에서 완전하게 배제하지 못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도교와 같은 유일신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 신화가 잘 보여주듯, 여러 신이 존재한다. 후나인은 이 점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교도 신들이 나오면 이를 그리스도교적인 용어로 대체하였다. 특히 신화적 요소가 강한 아르테미도로스(Artemidoros)의 《해몽서(解夢書)》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다.
 
  후나인은 선학(先學)들이 갈레노스의 책을 번역하면서 범했던 오류를 지적하고 비판하면서 교정하기도 하였다. 바이트 알히크마에서 번역 작업을 하였지만, 개인적으로 부탁받은 책 또한 다수 시리아어나 아랍어로 옮겼는데, 갈레노스의 작품의 경우 그가 그리스어에서 아랍어나 시리아어로 번역을 하면 조카인 후바이쉬와 제자 이사가 시리아어나 아랍어로 옮겼다.
 
  후나인이 이끈 번역단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그리스 철학서도 번역하였다. 후나인은 플라톤의 《국가》 주석서를 썼다. 아쉽게도 현재 전해지지는 않지만, 선학 이븐 알비트리끄가 번역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개역(改譯)하고 《법률》을 번역하였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해석론》을 시리아어로 번역하고, 아들 이스하끄가 이를 아랍어로 옮겼다. 이스하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나올 때까지 천문학을 지배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Almagest)》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아랍어로 새로운 용어 만들어내
 
번역 작업을 하는 후나인과 그의 제자들. 오스만제국 시대 세밀화.
  번역의 중요성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지적 작업이 발전한다. 일본이 동아시아의 한계를 넘어 근대화에 성공한 것도 난생처음 보는 네덜란드 서적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잡고 투혼을 발휘하면서 번역한 학자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번역을 통해 난학(蘭學)을 배워, 새로운 어휘와 개념을 습득하고 사유(思惟)가 발전했다.
 
  후나인은 9세기 이슬람 문명이 한 차원 더 높게 도약할 수 있는 튼튼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래서 그를 서구 르네상스의 에라스뮈스(Erasmus)에 빗대어 ‘아랍 르네상스의 에라스뮈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히 아직 학문적인 용어가 부족하였던 아랍어에 새로운 용어를 더한 것은 아랍어 사용자에게 준 위대한 선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후나인은 아랍어가 시리아어나 그리스어에 비해 어휘가 부족하다는 것을 통감하였다. 대체로 이러한 경우 번역자는 외래어를 음사하는데, 후나인은 아랍어로 된 용어를 만들고자 최선을 다하였다. 우리 말의 조어(造語)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탓하는 우리 학자들이 배워야 할 점이다. 일본 학자들은 한자로 개념을 만들고 있는데 말이다. 후나인은 9세기에 이를 극복했으니 몹시도 부끄러운 일이다.
 
  이슬람 문명의 건설자는 무슬림들만이 아니다. 후나인 이븐 이스하끄와 같은 비무슬림 또한 있었기에 풍요로워진 아랍어로 학문을 할 수 있었다. 아랍 철학자들은 그리스어를 몰랐기에 모두 아랍어로 번역된 철학책을 읽고 철학을 하였다. 후나인이 아니었더라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닌 보석과 같은 사유를 이슬람 문명도, 서구 문명도 쉽게 공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번역은 때때로 마술과 같이 우리의 학문을 지배한다. 플로티누스의 철학이 9세기에 아랍어로 번역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으로 잘못 알려졌다. 그 결과 플로티누스의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위대한 철학자로 존경한 아랍 철학자들은 신(新)플라톤주의 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믿은 것이다. 원전을 읽을 줄 알았더라면 이런 일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일 때문에 후나인은 그리스어를 배워 번역을 하려고 그리 노력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븐 이스하끄를 기억하라
 
아바스왕조의 칼리프 알마문이 만든 도서관이자 번역소였던 ‘지혜의 집’.
  이제 서구 문명이 과거에 이슬람 문명으로부터 배운 것이 많았고, 그 결과 오늘날 선진 문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설명할 기회가 있다면 꼭 후나인 이븐 이스하끄를 언급하면서 무슬림들만 이슬람 문명을 훌륭하게 만든 공헌자가 아님을 강조해 달라. 그리스어를 배우고 필사본을 구하여 번역하고자 온 힘을 다한 후나인이 아니었더라면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그리스 원전을 라틴어로 번역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서구의 발전도, 보편적 인류문명의 진보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 아닐까? 지나친 비약이라고 비판해도 좋다. 그런데 솔직히 그렇게라도 후나인 이븐 이스하끄를 독자들의 머리에 각인시키고 싶다. 그의 순수한 학문적 열정과 집념에 존경을 표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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