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비트코인 탄생 비화
 
암호화폐는 그 자체만으로는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힘들다. 명색이 화폐임에도 화폐의 본원적 기능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우선 변동성이 심하다보니 교환매체로서의 안정성이 턱없이 부족할 뿐 아니라 가치척도와 가치저장 수단으로서도 적당하지 못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암호화폐는 사기다.”라고 단정하기도 한다. 또 비트코인 같은 경우 아직까지는 전혀 실용적이지 못하다. 결재 때 10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든가, 처리용량이 형편없이 적다든가, 소액지불에도 많은 수수료가 드는 것 등은 굉장히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며 심지어 부당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왜 많은 사람들이 암호화폐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 것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암호화폐는 어느 날 불쑥 튀어나온 게 아니다. 1944년 케인즈가 브래튼우즈 회의에서 세계화폐의 사용을 주장한 이래 지난 40년간 개인의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려는 암호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연구되어온 결과의 총합이다. 
 
인류사에서 화폐는 세 번에 걸쳐 전환기적 변화를 맞았다. 첫 번째는 ‘실물’화폐의 등장이고, 두 번째는 ‘신용’화폐(명목화폐)의 탄생, 특히 그 가운데 달러는 사상 초유의 글로벌 신용화폐에 해당한다. ‘신뢰’ 프로토콜을 기반으로 하는 암호화폐는 세 번째 화폐혁명에 해당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만큼 의미 있는 변화다.

달러와 세계화폐의 대결
금융위기 속에 탄생한 비트코인
 
2008년 9월15일, 자본의 탐욕이 만들어낸 투기 버블이 터지던 날, 세계 4대 투자은행 가운데 두 개가 침몰해 세계를 경악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신청을 냈으며 메릴린치가 뱅크오브아메리카에 팔린 날이다. 이를 기점으로 예금주들이 은행을 못 믿고, 은행이 은행을 못 믿는 신용위기의 공포가 세상을 덥치며 전 세계가 글로벌 금융위기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로부터 3개월 여 뒤인 2009년 1월 3일 비트코인이 탄생했다. 
 
1990년대 초부터 정부나 중앙기관으로부터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려는 ‘사이퍼펑크 운동’에 가담한 암호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돈 거래에도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 일환으로 그들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암호화폐를 개발하고 있었다. 
 
서로를 못 믿어 돈이 돌지 않는 신용위기를 맞자 암호학자들은 개발하고 있던 암호화폐 발표 계획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보았다. 그들은 현대 통화제도의 모순과 금융자본주의의 적폐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 나라의 화폐인 달러의 신용경색이 전 세계를 얼어붙게 만들고 많은 사람들을 고통의 늪으로 떨어트리는 이러한 화폐제도는 이제 변해야 된다고 그들은 믿고 있었다.
 
암호학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사토시 나카모토는 이러한 공포와 혼란 시기가 암호화폐 발표의 적기라 생각했다. 그래서 리먼 쇼크 다음 달인 10월 말에 비트코인 백서를 암호화폐 마니아들을 대상으로 공개했다. 여기서 그는 "나는 신뢰할 만한 제3의 중개인이 전혀 필요 없는, 완전히 당사자 간 일대일(P2P)로 운영되는 새로운 전자통화 시스템을 연구해오고 있다"라는 문구와 함께 9쪽짜리 백서를 다운받을 수 있는 링크를 보냈다. 그리고 그 통화시스템을 비트코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두 달 후 2009년 정초(1월3일)에 사토시는 비트코인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무료로 다운 받아 누구나 쓸 수 있도록 공개했다. 사토시는 그가 채굴한 첫 번째 비트코인 일부를 할 피니에게 전송했다. 은행을 거치지 않고 P2P(peer-to-peer network) 방식으로 비트코인을 보낸 것이다. 
 
원래 P2P는 인터넷에서 개인과 개인이 직접 연결되어 파일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주로 대학생들이 즐겨 사용했던 자료공유 방법이었다. 미국의 냅스터(napstar), 토렌트(torrent), 한국의 소리바다 등이 대표적으로 P2P방식을 이용해 개인과 개인을 직접 연결하고, 중간 서버 없이 파일 공유가 가능하며, 비용도 발생하지 않는다. 
 
사토시는 첫 비트코인을 채굴해 세상에 내놓으며, 제네시스(창세기) 블록이라 불리는 첫 블록에 메시지를 담았다. “The Times 3 January 2009 Chancellor on brink of second bailout for banks.” (《더 타임스》 2009년 1월 3일 재무장관 은행에 두 번째 구제금융 임박) 이는 그가 비트코인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발표한 날인, 2009년 1월3일 영국 더 타임스지에 실린 영국 재무장관이 은행들을 살리기 위해 수십억 파운드의 긴급 구제자금을 추가로 투입할지를 고려중이라는 기사의 제목이었다. 사토시는 이처럼 기존화폐의 문제를 첫 블록 속에 영원히 기록해두었다. 
 
이렇게 해서 개인 간에 은행을 거치지 않고 자유롭게 금융거래를 할 수 있는 화폐, 이른바 중앙 집중방식에서 탈피한 ‘탈중앙화’ 화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한 나라, 어느 한 은행에 귀속되지 않은 ‘세계화폐’가 탄생한 것이다. 그 뒤 동료개발자 할 피니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버그를 수정한 후, 할 피니는 1월 9일 제네시스 블록 다음의 1번 블록을 만들어 비트코인을 채굴했다. 그때부터 평균 10분에 하나씩 새로운 블록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세계화폐에 대한 생각을 한 사람은 비트코인을 만든 사토시가 처음은 아니었다. 20세기 중반에 이미 세계화폐의 개념을 이야기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유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다. 
 
케인즈의 무서운 선견지명
 
1차 대전 직후인 1918년에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케인즈는 독일에 과도한 배상금을 물려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으나 거부되었다. 그는 회의에 참가한 각국 정치인들이 이기적인 자국 정치논리를 앞세워 경제를 무시하는 무지한 행태에 충격을 받고 분노했다. 그는 독일에 물린 혹독한 배상금이 전무후무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이며, 이는 독일국민들을 빈곤으로 내몰아 ‘극단적인 혁명’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파시즘 혁명과 새로운 전쟁을 예감한 것이다. 
 
그는 이듬해에 쓴 <평화의 경제적 결과>라는 책에서 연합국 지도자들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치가 아니라 금융과 경제라는 사실을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흐름을 이로운 쪽으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인즈의 예견은 그의 표현 그대로 현실화되었다. 결국 독일에 대한 거액의 전쟁배상금은 화폐발행량 증가→ 초인플레이션→ 히틀러의 등장으로 연결되어 2차 대전을 불러왔다.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은 인플레이션이었다. 2차 대전이라는 참화는 케인즈의 선견지명이 거부된 결과였다.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은 정부의 화폐발행량 증가와 은행들의 과도한 신용창출의 결과물이었다. 독일정부는 과도한 전쟁배상금 지급과 경기진작을 위해 수출을 늘려야 했다.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는 마르크화 평가절하로 수출상품 가격경쟁력을 높이는 게 유리해 결국 화폐발행량 증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독일 초인플레이션의 진정한 막후 조종자는 사실 거대한 신용창출을 일으킨 금융자본세력들과 그들에 의해 움직여진 민간 중앙은행이었다.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될 기미를 보이자 여기에 마르크화 투기 금융세력들이 가세해 막대한 대출을 일으켜 부동산과 기업들을 헐값에 사들이고 돈값이 휴지조각이 됐을 때 대출을 갚았다. 1923년에는 이틀에 한 번 꼴로 물가 2배씩 폭등했다. 이러한 방법을 연속적으로 사용해 독일 최고의 거부가 된 사례가 휴고 스티네스였다. 그는 역사상 인플레이션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으로 대출로 1,535개의 기업과 그에 딸린 2,888개의 공장을 사들였는데 그 가운데 신문사도 60개나 있었다. 
 
그는 언론조차 입맛에 맞추어 조종하며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신문을 통해 인플레이션율이 10,000%에 이르던 1922년 중에도 "유통되는 통화가 부족하다. 산업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통화량이 더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경제학자들도 동원되었다. 유럽 최고의 작가였던 슈테판 츠바이츠에 의하면 그의 재산은 독일 국부의 1/4이었다고 한다. 1923년 <타임>지는 그를 '독일의 새로운 황제'라고 칭했다. 
 
이러한 행태에 분노한 독일 국민들의 파렴치한 투기꾼들과 이를 조장한 유대인 금융가들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는 상상을 초월했다. 결국 이러한 시중은행들의 과도한 신용창출과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화폐의 유통속도를 가속화시켜, 유동성 곧 시중의 화폐 유통량을 급속도로 늘려 초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1921년 1월에 0.3마르크 하던 신문 한 부 값이 1922년 11월에는 7000만 마르크가 됐으니 2억 배 오른 것이다. 건전한 시민들이 생활비를 아껴 평생 저축한 돈이 휴지조각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참담함을 겪었다. 시민들은 항의의 표시로 기존 화폐를 길거리에 버리거나 불쏘시개로 썼다.
 
시민들은 두 눈 멀쩡히 뜨고 화폐 발행량을 터무니없이 늘린 정부와 금융세력에 의해 무자비하게 수탈당한 것이다. 특히 부동산 없이 현금만 보유했던 빈곤계층 서민들이 발가벗겨졌다. 부자들은 부동산, 토지, 주식, 귀금속 등으로 자신의 재산을 포트폴리오 해놓아 어느 정도 피해갈 수 있었지만 저소득층일수록 피해가 컸다. 금융투기세력이 화폐가치 폭락 과정에서 벌어들인 거대한 이익은 바로 국민들이 몇 십 년 동안 힘들게 저축해 얻은 부였다.
 
 케인즈의 예견대로, 이 틈을 파고들어 대중을 선동해 집권한 사람이 히틀러다. 그가 이끄는 나치의 지지율은 1928년 총선에선 2.6%에 불과했으나 2년 후엔 37.4%의 득표율로 원내 1당이 되어 히틀러는 총리에 올랐다. 1934년 대통령이 서거하자 히틀러는 본인이 총리와 대통령을 겸하는 ‘총통’이 되겠다고 국민투표에 붙였다. 그는 무려 88.1%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최고 권력자가 된다. 이어 홀로코스트와 2차 대전이라는 세계 최대의 비극이 일어난다. 정치를 앞세우고 경제와 금융을 무시한 결과였다. 
 
그 뒤 헝가리에서는 1946년 역사상 최대의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났는데 0이 29개나 있어 읽기조차 어렵다. 이러한 일은 과거에 국한된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내가 1990년대 초 브라질 근무할 때도 초인플레이션은 일어났으며, 러시아도 1992년 2,600%의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엘친 정부 8년 동안 러시아 인플레이션은 608,000%에 달했다. 2007년 나이지리아의 월 796억% 인플레이션을 비롯해 2009년 짐바브웨이는 무려 100조 달러 지폐를 발행하기도 했다. 지금도 베네주웰라는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나라 사람들은 봉급을 받자마자 뛰어나가 카트 가득이 물건 사기에 바쁘다. 나도 그 대열의 한 명이었다. 조금만 늦으면 지폐가 휴지조각이 되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초인플레이션은 개발도상국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화폐적 현상’이다. 제로금리와 양적완화정책으로 인해 화폐발행량이 최대로 늘어난 요즘의 현실이 위태로운 이유이다. 
 
케인즈의 세계화폐와 달러의 대결
 
2차 대전이 마무리되던 1944년, 새로운 국제통화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45개국 700여명의 고위 경제 관료들이 미국 뉴햄프셔 주 브래튼우즈에 모였다. 이 회의에서 미국대표 화이트 재무차관과 영국대표 케인즈 간의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달러와 세계화폐 ‘방코르’ 가운데 무엇이 더 기축통화에 적합한지를 놓고 다툰 것이다. 
 
케인즈는 우리에게 <고용, 이자및 화폐의 일반이론>으로 유명하지만, 그는 그 이전에 <통화개혁론>(1923)과 <화폐론>(1930) 등 화폐문제를 심도 있게 연구한 화폐경제학자였다. 케인즈가 이런 저서를 집필한 것은 사실 통화교란의 무서움을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인플레이션을 자본주의의 파괴자로 여기고 혐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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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메이너드 케인즈

케인즈의 화폐관은 명료했다. 특정국가에 의해 임의로 발행량이 증가하거나 축소되는 일이 없는, 곧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이 없는 세계화폐가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인플레이션은 부당하고 디플레이션은 비효율적이다. 독일의 경우처럼 극단적인 인플레이션을 제외하면,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중에 디플레이션이 더 안 좋다. 빈곤한 세계에서 임대인을 실망시키는 것보다 실업을 유발하는 것이 더 안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중 하나를 꼭 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두 가지가 모두 안 좋고, 모두 피해야 한다.” 
 
케인즈가 디플레이션이 더 안 좋다는 데는 이유가 있다. 다음 달에 물가가 더 싸질 것이라 생각되면 사람들이 소비를 미루어 경기침체에 빠지기 때문이다. 소비가 줄어들면, 기업이 생산을 줄이고, 그러면 결국 실업이 유발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럼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은 왜 일어날까? 초인플레이션이란 물가상승이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상태로 월 50% 이상의 인플레이션율을 뜻한다.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만연되면 사람들은 돈이 들어오는 즉시 재화로 바꾸려 든다. 이렇게 되면 통화의 유통속도가 갈수록 빨라져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으로는 통화팽창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시중 유동성은 갈수록 증폭되어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것이다. 
 
케인즈는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는 세계화폐가 개발되어야 한다고 믿고 스스로 수년 전부터 그런 화폐의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패권 국가가 극단적인 무역수지 적자를 볼 경우, 무역 분쟁은 물론 환율전쟁을 일으킬 우려가 있고 또한 이는 세계경제를 불경기에 빠트릴 염려가 있어 이를 ‘예방’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마침내 그는 세계화폐 ‘방코르’(Bancor)를 고안해 냈다. 방코르는 금을 비롯해 30개 상품가격을 기초로 가치가 산정되며 각국은 자국 화폐를 일정한 고정환율로 방코르와 교환할 수 있게 했다. 
 
케인즈는 브래튼 우즈 회의에서 그의 학문적 연구를 토대로 달러 체제에 대항하는 세계화폐 ‘방코르’와 이를 청산해줄 ‘국제청산동맹’을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세계 각국이 무역에서 각 나라 통화를 사용하지 말고, 이 세계화폐를 공통으로 사용하자는 주장이었다. 
 
케인즈는 방코르의 발행량은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거래되는 상품과 서비스의 량에 비례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제안은 각 나라의 과거 3년 간 무역액의 75%를 기준으로 방코르를 미리 각국의 보유자금으로 할당하고, 각 나라는 수출과 수입의 차액을 이 세계화폐를 사용해 조정하자는 것이다. 곧 방코르는 금을 사용하지 않고 무역결제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화폐였다. 
 
방코르는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는 없지만 세계 중앙은행들끼리 결제할 수 있는 화폐로 각국 화폐의 가치는 방코르와의 상대 환율로 표시된다. 케인즈는 무역전쟁과 환율전쟁 예방에 필요한 세계화폐를 고안한 것이다. 
 
여기에 케인즈의 천재적인 면을 볼 수 있는 환율조정시스템을 더했다. 케인즈는 무역수지 적자국의 경우 적자액만큼의 방코르 초과인출(OVERDRAFT)를 계상할 수 있게 하되 각국의 초과인출 상한액은 무역규모에 비례해 설정하도록 고안했다. 각국의 연간 무역수지 적자액이 사전 설정된 방코르 초과인출 상한액의 50%에 달하면 그 나라 화폐는 평가절하를 실시하는 동시에 적자액의 10%를 벌금으로 내게 했다. 벌금제도는 무역흑자 국가에도 적용했다. 벌금을 피하려면 각국이 자연스럽게 사전에 환율을 조정해야 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케인즈가 우려했던 것은 ‘금과 태환됨으로써 달러의 신용을 유지한다.’는 제도가 미국의 금 보유량이 고갈되면 붕괴될 수밖에 없는 체제라는 점이다. 만약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세계 경제 역시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걱정한 것이다. 
 
케인즈가 세계화폐를 주장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통상 분쟁과 환율 문제로 3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케인즈의 생각은 세계화폐는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도록 고안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특정국가의 위기가 다른 국가로 전이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달러가 기축통화일 경우, 미국 내에서 유동성 위기가 일어나면, 경제 위기는 전 세계적으로 전이되지만 세계화폐를 활용할 경우, 경제 위기의 전이는 제한적인 수준에 그친다는 게 케인즈의 생각이었다. 
 
케인즈는 국제청산동맹의 자본금을 260억 달러로 하자고 제안했다. 미국 1년 GDP보다도 많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케인즈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거부되었다. 달러를 기축통화로 만들어 세계경제의 패권을 잡으려 했던 미국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방코르와 국제청산동맹의 꿈은 무산되었지만 절충이 이루어져 85억 달러 규모의 국제통화기금(IMF)이 설립되었다.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 부부의 막내로 태어난 화이트는 집안이 가난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차 세계대전 때 군에 자원입대했다. 전쟁이 끝나자 화이트는 참전용사 지원프로그램 덕에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는 받은 후 잠시 교수생활을 한 뒤 재무부에 취직했다. 당시 재무부장관이었던 모겐소가 그의 능력을 알아 봤다. 유대인끼리 통하는 면도 많았을 것이다. 화이트는 모겐소 장관 보좌관을 거쳐 승승장구해 차관보에 오른 뒤 브레턴우즈 회의에 미국 대표로 참석했다. 화이트는 케인스에 밀리지 않았다. 화이트의 적극적인 공세는 미국이라는 힘과 유대금융자본의 파워를 배경으로 압도적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참가국들도 2차 대전의 후유증으로 미국의 도움이 절실할 때였다. 결국 회의는 여러 나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뜻대로 마무리되었다. 
 
미국은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환본위제도를 실시키로 했다. 금 1온스(31.1g)를 35달러로 고정시키고, 그 외에 다른 나라 통화는 달러에 고정시키되 1%의 범위 내에서 조정할 수 있는 재량을 부여했다. 이것이 이른바 브래튼우즈 체제이다. 
 
드골, 세계화폐 역할 할 수 있는 특별인출권 제안하다
 
2차 대전 이후 세계 외화자산 결제는 주로 달러로 진행되었는데 브래튼우즈 체제의 금환본위제임에도 미국은 암암리에 달러발행을 남발했다. 당연히 달러의 실질가치가 많이 떨어졌다. 이에 따라 달러에만 모든 결제를 맡기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1964년 국제통화기금(IMF) 연례총회에서 달러의 독점적 위상을 반대하던 프랑스는 세계화폐 역할을 할 수 있는 ‘특별인출권’(SDR, Special Drawing Rights)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에 의해 즉각 거부되었다. 그러자 드골은 세계화폐 개념은 새로운 게 아니라 역사 속에서 통용되던 금이 바로 세계화폐라며 국제체제의 평등성 회복을 위해 금본위제로 복귀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미국의 금과 바꿀 의향을 밝혔다. 
 
이러한 협박은 미국의 공식입장을 변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달러의 위상이 더 이상 난공불락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입장을 바꿔 드골의 특별인출권 창출에 동의했다. 결국 IMF가 케인즈의 세계화폐 아이디어를 차용해 1969년 새로운 국제 준비자산을 만든 것이 특별인출권이다. 특별인출권은 IMF 회원국의 국제수지가 악화되었을 때, 담보 없이 필요한 만큼의 외화를 인출해 갈 수 있는 권리이다. 쉽게 말해 특별인출권은 IMF에서 사용하는 가상의 준비통화로 달러를 보완하기 위한 세계화폐이다. 
 
달러의 구조적 한계, 트리핀 딜레마
 
인플레이션의 근본원인은 재정적자이다. 그런데 미국은 재정적자가 일어나야만 달러가 발행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고 경상수지적자가 되어야 달러가 해외로 공급된다.
 
1950년대 수년간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이어지자 이러한 상태가 얼마나 지속가능할지, 또 미국이 경상수지 흑자로 돌아서면 누가 국제 유동성을 공급할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됐다. 1960년에 이미 방만하게 공급된 달러는 외환시장에서 평가절하 압력에 시달렸다. 그러자 미국 경제학자이자 예일대 교수 로버트 트리핀은 미국의 방만한 재정운용정책이 지속될 경우 금태환이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심각해진 1960년 트리핀은 미 의회에서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구조적 모순을 설명했다. “미국이 경상적자를 허용하지 않아 국제 유동성 공급이 중단되면 세계 경제는 크게 위축될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적자상태가 지속돼 달러화가 과잉 공급되면 달러가치가 떨어져 준비자산으로서의 신뢰도를 잃고 고정환율제도도 붕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달러화의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태생적 모순을 가리켜 ‘트리핀 딜레마’라고 한다.
 
세계가 달러를 의심하다
 
브레튼 우즈 체제 초기인 1947년까지만 해도 미국정부는 전 세계 금의 70% 이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서독과 일본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무역 증대로 세계 무역에서 미국의 위상은 점점 축소되었으며, 베트남 전쟁으로 늘어난 국가채무, 통화팽창 등으로 달러 가치는 1960년대 들어 심각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1966년에 이르러 미국의 금 보유는 전 세계 금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미국 이외 나라들의 중앙은행들이 140억 달러 만큼의 금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미국의 금 보유는 단지 132억 달러 만큼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1971년 들어 달러 통화량은 10%나 늘어났다. 이에 불안을 느낀 서독이 그해 5월 브레튼 우즈 체제를 탈퇴했다. 그러자 달러 가치는 마르크 대비 7.5% 하락했다. 다른 나라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제 각국은 달러를 의심하기 시작하며 보유 달러를 금으로 바꾸기 원했다. 스위스가 가장 먼저 7월에 5천만 달러를 미국의 금으로 태환해 갔다. 이어 프랑스도 1억 9100만 달러를 금으로 바꾸어갔다. 그러면서 1억5천만 달러를 더 태환할 계획이라 발표했다. 드골은 미국에 해군 함대를 보내 프랑스로 금 운반하는 걸 대내외적으로 과시까지 하며 미국을 압박했다. 이어 스페인도 6천만 달러를 금으로 교환해 갔다. 
 
이를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수백억 달러어치의 금을 교환해 간 것이다. 이로써 미국의 금 보유고는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달러 가치가 유럽의 통화들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자 8월에 스위스도 브레튼 우즈 체제를 떠났다. 
 
1971년 8월 9일, 영국의 경제대표가 재무부에 직접 와서 자그마치 30억 달러를 금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미국정부는 잘못하면 국가 부도사태를 불러올지도 모르는 비상 국면에 직면한 것이다. 그 다음 주 13일 금요일, 닉슨 대통령은 돌연 행정부 주요 경제정책 담당자 16명에게 헬리콥터를 타고 자신과 함께 캠프데이비드 군사기지로 가자고 명령을 내렸다. 대통령은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모든 길을 차단함으로써 이 모임에 대한 정보가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금 고갈에 직면한 미국이 자신만 살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출처; 화폐혁명, 홍익희 홍기대. 엣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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