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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전 대통령 / 사진출처=조선DB

지난 한 세대의 세월을 돌이켜보면 한국 경제는 1980년대 중반까지 고도성장의 시기를 구가하다가 80년대 후반부터 길을 잃었다. 당시 전국의 산업 공단에는 사무 기술직이든 현장직 근로자든 불문하고 몇 년 열심히 일하면 집도 사고 또 자동차도 장만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일은, 대졸 사무 기술직 직원들은 수년 후 서울 본사로 올라갈 생각에 집 장만을 늦췄지만, 현장직 직원은 자신이 근무하는 공장이 평생직장이라는 판단에 따라 서둘러 집을 샀는데, 부동산 가격이 계속 오르던 때라, 몇 년 지나고 보니 사무 기술직 출신보다 현장직 직원들이 더 부자가 되어 있더라는 이야기도 많았다.
 
이렇게 산업이 별 규제 없이 활발한 가운데 현장직 직원이라 하더라도 열심히 일하면 얼마 후 중산층이 되던 그 당시야말로 대기업으로부터 시작되는 낙수효과가 명확히 드러나던 시기였다. 낙수 효과는 분배보다 성장을 우선시하는 경제철학으로, 성장을 통해 부의 절대적인 크기를 늘리면, 자연스럽게 누구나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기대한다. 국민 대부분이 장래에 대해 희망을 품고 젊은이들이 취업 걱정이 없던 그때가 바로 한국에 자유가 꽃피었던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대기업 법인이 자유롭게 운영될 때 그 사회는 자유롭다
 
피터 드러커의 말대로, 현대 산업사회의 대규모 열린 경제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대기업 그리고 그 지배 주체인 기업인과 전문경영인이다. 국가 경제는 대기업이 창조하는 부에 의해 영위된다. 정부든 가계든 크게 보면 기업체가 창출하는 부를 소비하는 경제 주체다. 그렇다면 현대 산업사회의 중추 기관인 대기업 법인이 자유롭게 운영될 때 그 사회는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국가 경제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생산 수단이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것이야말로 재산권의 존중이라는 자유의 조건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영역이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에 있어서 80년대 중반까지 대체로 대기업은 정부와의 우호적 관계 속에 자율적으로 운영되었고 그에 따라 국가 경제도 좋았으며 특히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계층이 급속히 중산층이 되었다. 이런 사회가 바로 자유 경제체제이며 선진 근대국가가 향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말부터 한국경제가 길을 잃기 시작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의 정권을 문민정부라 칭하고는 취임 첫마디로 ‘7천만 동포’를 찾음으로써 국가 위에 민족이라는 관념을 씌웠다. 근대국가로 한 걸음씩 향해 가며 쌓았던 전통과 유산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인 양, 국민교육헌장을 폐지하고 교육목표를 창의와 인성이라는 모호한 말로 바꾸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 건물이라며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이기도 한 중앙청 건물을 헐어버렸다. 건물을 없애는 행위는 오히려 과거 역사에서 반성하고 배우는 것보다는 그저 부정하고 짐짓 없던 일처럼 꾸미는 것이다. 이렇게 전통을 파괴하는 분위기 속에서 과거의 성취는 평가받지 못하고 모두 개혁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되면서, 노조운동이 거세어지고 반기업 정서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 후 수십 년에 걸쳐 기업들은 투자나 고용의 자율성이 점점 옥죄어지는 국내에 투자하기보다는 공장을 뜯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로 탈출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기업이란 자유 속에서만 생존이 가능한 존재다. 경쟁 때문에 남다른 혁신을 이루어내고 그 결과 더 나은 제품과 서비스를 더 싸게 제공해야만 소비자의 선택을 받고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은 점점 경쟁을 억제하고 평등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기업을 경영하는 자유가 점점 억압되었다. 경쟁은 싫고, 개인의 자유보다는 평등 분배를 주장하고, 그리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도 아닌 시민단체들이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정부의 지원을 요구하는 풍조가 생겼다. 한마디로 反 자유적인 풍조라 할 이런 분위기의 일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한국에서만 유독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베스트셀러가 된 열풍을 들 수 있다.
 
대기업을 억제하고 중소기업을 지원해야 한다는 ‘경제 민주화’ 풍조
 
또 다른 예는, 대기업을 억제하고 중소기업을 지원해야 한다는 ‘경제 민주화’ 풍조를 들 수 있다. 올바른 길을 말하자면, 정부는 기업 간의 거래에 사기나 기만이 있다면 법치로써 바로 잡는 일이지 인위적으로 어떤 그룹은 지원하고 어떤 그룹은 억압하는 일이 아니다. 전체 국민을 똑같이 대하지 않으면 법치가 망가진다.
 
어떤 그룹은 인위적으로 규제하고 다른 그룹은 각종 지원을 하는 것은, 정부가 인위적으로 어느 그룹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하여 자원을 재분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계획 주도적 경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사회주의 경제의 실패를 통해 입증된 사실이다.

어쩌면 이들 철학자와 같이 분배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따뜻한 공동체’니 하는 정신적 자유는 중요하고, 사유재산권이나 계약권의 보장과 같은 행동의 자유는 천시하고 있다. 그래서 분배정의를 강조하는 철학자의 글을 읽을 때는 그들의 직업 특성상 공리공론적인 정신세계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아닌지 살필 필요가 있다.
 
정의론의 저자로 유명한 롤스의 이론도 바로 그런 점에 유의해야 한다. 롤스의 정의론에서 개인의 재주와 능력, 용모, 출신 배경은 우연히 타고 난 로또 복권과 같은 것이므로 이런 요인들이 분배를 결정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적 로또를 못 받고 태어난 서민층, 최소 수혜자에게 보상하는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롤스는 사고실험의 방법을 써서, 나와 타인의 출신 배경이나 현재 상황 같은 것을 서로 간에 전혀 모르는 ‘무지의 장막’ 속에서 어떤 원칙에 따라 분배가 이루어져야 할 것인지를 제안했다.
 
롤스 정의론의 제1원칙은 “먼저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 양심의 자유, 정치적 자유를 공평하게 분배해야 한다.”는 것인데, 제1원칙에 나오는 자유의 항목에는 생산재를 소유하고 계약하는 경제적인 자유가 빠져 있다. 롤스의 정의론에서 자유의 평등원칙에 따라 보호받을 수 있는 자유는 정신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이다.
 
반면에 생산수단의 사유재산권이나 계약의 자유같이 기업을 경영하는 자유 같은 것은 정신적,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면 보호받지 않아도 큰 문제 없는 것처럼 취급된다. 이것은 실사구시적이지 않다. 예컨대 사유재산권이 없으면 출판사, 방송사 같은 기관을 소유할 수도 없고,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언론, 출판의 자유와 같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을 것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롤스의 제2원칙의 차등원칙은,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여 차등분배를 해야 할 때는, 그 차등으로 인해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더 나아지는 조건에서의 차등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제1원칙에서 기본적 자유를 공평하게 배분했으므로 롤스가 보기에 덜 중요한 경제적 자유는 사회적 최소 수혜자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 말했듯이 그렇게 해서 생산재의 사유재산권이 손상을 받으면 모든 기본적 자유까지 열악해지므로 경제적 자유를 덜 중요하다고 취급한 것은 문제가 있다. 또한 서로 부대끼며 오랜 협동 관계 속에서 전통과 관습을 만들어 오는 존재인 사람 간의 관계를 무지의 장막 속의 원자적인 존재로 가정하면서 논의를 전개하는 것도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자유주의 전통의 초석을 놓은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사유재산제도는 건물의 대들보와 같다. 롤스나 샌델이 말하는 최소 수혜자의 보호나 공동체적 연대감 같은 이타심은 중요하긴 하지만, 이는 가족이나 작은 커뮤니티에 필수적인 것이고, 열린 거대 사회에서 이런 덕목은 대들보가 아니라 실내 장식품 같은 보조적인 가치라고 말한다. 장식품 없이는 살아도 대들보 없이는 건물이 무너진다.
 
자유주의 전통은 경제적 자유와 정신적 자유를 동시에 균형 있게 취급한다
 
자유주의 전통은 경제적 자유와 정신적 자유를 동시에 균형 있게 취급한다. 경제적 자유는 생산할 자유, 소비할 자유, 투자할 자유 등 행동의 자유를 말한다. 정신적 자유는 언론, 출판, 신앙, 사상, 표현의 자유 등이다. 그러나 실상을 말하자면, 자유주의는 타인의 무원칙에 의한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자의적 강제’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 정의의 규칙이 필요한데, 이는 개인의 사적 영역 특히 재산과 생명을 침해하는 행동을 금지하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의의 규칙이 지켜지는 가운데, 누구나 보호된 범위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이해관계를 마음껏 추구할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창의, 지식의 활용, 다양한 행동 가능성 속에서 개인은 정신적 자유를 포함하여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키워갈 수 있게 된다. 즉 사유재산제도가 철저히 보호되어야 롤스가 말하는 정신적 자유도 확립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생산수단에 대한 사유재산권이 없는 체제에서는 우리의 육신은 무엇을 창조하고 발견하는 일을 할 기회조차 없다. 더욱이 사유재산권이 없으면 가격이 없고 가격이 없으면 경제계산이 불가능하여 낭비와 불합리가 만연한 관료주의만이 남을 뿐이다.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은 기업하는 자유로 통한다고 볼 때, 기업을 경영하는 자유가 제약 당하는 사회는 무슨 말로 포장하더라도 자유주의 체제가 아니다. 귀족 노조니 경제민주화니 하는 반 기업적 현상이 없었던 1980년대는 지금보다 기업하는 자유가 많았고 결과적으로 산업이 활발하여 청년들이 취업 걱정이 없었으며 더 희망에 차 있었다.
 
그렇다면 권위주의 시대라고 일컫는 그때와 민주화의 절정이라 일컫는 현재를 비교하면 어느 때가 더 자유가 꽃피었다고 할 수 있을까? 자유와 민주화는 별개인 것인지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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