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정체불명의 소포가 도착했다. 뜯어보니 제임스 코미 전 연방수사국(FBI) 국장이 쓴 ‘더 높은 충성심(A Higher Loyalty)’이었다. 언젠가 아마존에서 예약주문을 받길래 나중에 급히 기사 쓸 일이 있을까 싶어 주문했었다. 그러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코미 전 국장은 지난해 5월 트럼프의 대선캠프와 러시아 간의 내통 의혹 수사를 놓고 대통령과 갈등을 빚다 해임됐다. FBI 국장이 워낙 강력한 자리라 트럼프가 코미를 해임했을 때 워싱턴이 떠들썩했다. 아무리 “너는 해고야(You are fired!)”라는 말로 인기를 얻은 방송스타 출신 대통령이라지만 FBI 국장을 가볍게 잘라버리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런 사례가 이례적이고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트럼프식 인사’는 워싱턴에서 오래 통용되던 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기업인 출신인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오랜 불화 끝에 트위터 메시지로 잘렸고, 1년 가까이 검증을 받은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는 영문도 모른 채 주한 미대사 지명 직전 낙마했다.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트럼프와의 불화설 끝에 짐을 쌌다. 대통령에게 ‘강의’하며 가르치려 들었던 게 문제였다고 한다. 백악관 군기반장으로 영입된 존 켈리 비서실장 낙마설도 끊이지 않고 돌고 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거의 1년 전 코미 해임 사건을 기억할 리가 없다.
   
   코미는 이 책에서 트럼프가 비윤리적이고 충성심에 집착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트럼프에 대한 비난과 비판이라면,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된 ‘화염과 분노’의 저자 마이크 울프가 거칠고 화려하게 훑고 지나갔다. 코미의 방식으로는 트럼프를 간지럽히지도 못할 것 같았다.
   
   워싱턴에서 진정한 뉴스의 중심이 되려면 워싱턴 사람들끼리 만났을 때 ‘그 얘기 들어는 보았나’ 식으로 화제가 돼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뜨겁게 불이 붙진 않았다. 트럼프가 “코미는 허약하고 믿을 수 없는 더러운 인간이며 형편없는 FBI 국장이었다”고 트위터로 공격했다.
   
   취임 이후 하루도 바람 잘 날 없고 늘 언론에 두들겨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트럼프 지지율은 안정적이거나 오히려 올라가고 있다. 러시아 스캔들이나 성추문 등 온갖 악재도 트럼프를 근본적으로 흔들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워싱턴의 한 정치학자는 “트럼프의 생존력과 돌파력은 예상을 뛰어넘는다”고 했다.
   
   트럼프의 지지율이 ‘역대 최저’ 기록을 갈아치우며 바닥을 친 시기도 있었지만, 최근 워싱턴포스트·ABC 방송 조사에선 40%였다. 취임 직후를 제외하면 최고 수준이다. 4월 초 라스무센 조사에선 지지율이 51%였다. 지난해 4월 이후 최고 기록이다. 놀라운 건 오바마 전 대통령의 집권 2기였던 2010년 같은 시기의 지지율보다 높다는 점이다.
   
   트럼프 지지율의 비밀은 공화당 지지자들이 쥐고 있다. 대선 때 트럼프에 비판적인 언론 보도는 외면한 채 트럼프를 밀었던 지지자들은 여전히 트럼프를 지키고 있다. 무엇보다 경기가 좋아지고 있다는 게 중요한 이유로 꼽힌다. 트럼프가 꿋꿋하게 밀고 가는 ‘미국 우선’도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다.
   
   워싱턴의 지인 중 드물게 트럼프 지지자인 한 친구는 “미국 일자리 몇 개 더 만들겠다고 다른 나라와의 무역협상을 다시 하고 중국에 압력을 넣고, 그렇게 뒤흔들어 조금이라도 미국에 유리하게 해보겠다는 트럼프의 노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북한 김정은과의 정상회담 수락 등 트럼프의 과감한 행보가 어떻게든 변화를 가져올 것 같아서 속시원하다는 사람들도 있다. 절대로 이전 대통령처럼 하진 않겠다는 트럼프의 성향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과를 기대하게 한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금세기 최고의 정치 이벤트가 될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에 많은 것을 걸었다. 미국과 세계를 북한 핵 위협으로부터 구한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성공하기만 하면 중간선거 승리와 재선과 같은 선물이 덤으로 딸려올 것이다.
   
   트럼프의 인기는 민주당 성향 유권자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워싱턴에선 이해하기 힘들다. 아마 나도 2016년 대선 유세 때 격전주를 돌아다니며 트럼프 유세의 현장을 보지 않았다면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여름 땡볕에 서너 시간씩 기다리고, 때로는 밤늦게 산길을 걸어 유세장을 찾아오던 트럼프 지지자들의 열기는 무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들은 트럼프를 분석하지 않았다. 그냥 좋다고 했다. 트럼프에 대해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워싱턴의 학자나 선거 전문가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난해 12월 트럼프의 감사 유세를 따라 미시간주의 그랜드 래피즈에 갔다가 제럴드 포드 대통령 기념 도서관에 들렀다. 포드는 미국의 가장 아픈 정치 스캔들인 ‘워터게이트’로 사임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 시절의 부통령이자 후임 대통령이었다. 그는 아마도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존재감이 약한 대통령 중 한 명일 것이다. 포드가 닉슨의 잔여임기를 채우고 재선에 도전했을 때 미국민들은 땅콩농장 주인 출신인 지미 카터를 택했다. 기념관에서 포드의 눈으로 해석한 미국 현대사의 한 장면을 둘러보고 나니 문득 어려운 시절 미국인들의 지도자 선택은 대부분 ‘외부자(outsider)’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인들은 위기가 닥칠 때면 늘 워싱턴 바깥에서 치유와 개혁의 동력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미국 중부의 무너져가는 경제 속에서 일자리를 잃고 희망과 자부심도 잃은 미국 백인들은 그래서 워싱턴 정치의 아웃사이더인 트럼프를 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미국 대선 때가 되면 다시 한 번 읽는 책이 있다. 문화인류학자 클로테르 라파이유가 쓴 ‘컬처 코드’이다. 그는 미국인들이 원하는 대통령상을 ‘반란군의 지도자’로 정의했다. 미국이란 나라가 영국 지배에 대한 반란을 통해 태어난 나라라서 그런지, 미국인들은 ‘반란을 이끄는 강인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원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반란의 본질은 변화이다. 트럼프는 이 틀에 딱 맞는 대통령이다. 워싱턴 기득권층과 기존 정치를 공격하는 반란을 이끌면서 ‘미국 우선’이란 약속의 땅으로 미국인들을 이끌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트럼프의 예측불가능성이다. 강인함에 예측불가능성이 더해지면 여파는 더 가늠하기 어렵다. 워싱턴 사람들은 트럼프의 상상을 상상하느라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다. 트럼프 변수가 존재하는 한 모든 예측과 전망은 무의미해진다. 어쩌면 그 점이 트럼프 지지율의 또 하나의 비밀인지도 모른다. 트럼프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에게서 결코 눈을 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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