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연

Mig-29 미그 29 전투기. 북한의 최신예 전투기다. 사진-wikimedia 북한 김정은의 서울 답방을 두고 여론이 시끄럽다. 김정은이 올해 안에 답방할 것인지, 아니면 내년초에 올 것인지 등을 두고 정부와 여론의 해석이 분분하다. 또 김정은이 답방할 경우 제주로 올 것인지 서울로 올 것인지를 두고도 여러가지 안을 북한과 정부가 조율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김정은의 서울답방이 항공편으로 올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이는 김정은의 보안상 차를 타고 육로로 이동할 경우, 이동하는 중 보수진영 등의 반대와 집회가 있을 수 있고 김정은의 차량에 대한 공격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극도의 보안을 고려해 북한 평양에서 바로 서울 성남 공군기지로 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타 기지는 VIP 대응에 대한 경험 등이 서울공항대비 떨어지기 때문에 다른 공항을 고려할 가능성이 적다. 뿐만 아니라 미군이 운영하는 오산이나 군산 기지에 김정은이 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미국이 국제사회로부터 김정은의 이동을 도와줬다는 비판과 미국내 여론의 반발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제주로 가는 경우에는 제주 공항을 사용할 것이다. 특히 제주까지 가는 경우에는 항공편 외에는 별다른 이동편이 없기 때문에 제주행을 택하면 항공편은 당연한 것이다.   김정은 답방시 공중에서 모세의 기적 일어난다?   그런데 현재 국내 여론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이는 바로 VIP 항공편에 대한 의전과 관련 내용이다. 국가 정상을 포함한 외국 국빈 등이 국내로 항공편으로 입국하는 경우 공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일반인들은 잘 모르고 있다. 공중에서도 지상과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의전과 경호가 진행된다. 여기에는 항공 에스코트 (Air Escort)와 전투공중경비(CAP, Combat Air Patrol) 등이 기본적으로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VIP가 사용하는 항공로 주변 수십마일 주변에는 그 어떠한 항공기의 비행도 허락되지 않는다. 쉽게 표현하자면 공중에서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격이다.   국내 일일 항공기의 운항횟수 등에 대해서 일반인들은 잘 모르고 있다. 공중에 얼마나 많은 비행기들이 뜨고 내리는지 모른다. 인천공항공사에 따르면 2017년 1년동안 인천공항을 드나든 민항기의 수가 약 2800만대에 달한다.같은해에 130만톤의 항공수하물이 인천으로 들어왔다. 사실상 공중은 인간의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고도에 상상할 수 없는 수의 항공기들이 뜨고 내리고 있다. 공중에서도 지상의 대도시와 유사한 만큼의 교통량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항공수는 민항기이며, 여기에 공중에서 훈련과 임무를 위해 뜨고 내리는 군용기의 수를 더하면 그 수는 더 증가한다. 앞선 자료는 인천공항만 해당되며 여타 공항을 포함하면 항공량은 더 많다. 마치 하늘에 후추를 뿌린듯이 많은 항공기가 뜨고 내리는 셈이다.   이렇게 수많은 항공기들이 오가는 대한민국의 영공 위를 김정은이 통과한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비행은 멈추고 지연되어야 한다. 또는 우회항로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김정은 항공기가 비행하는 주변 20~40마일 가량은 비워줘야 한다. 이것은 필자가 임의로 정한 것이 아니라 실제 국제항공교통법 등에 의거하여 시행되는 VIP 항공 의전방법이다. 그런데 보안에 극도로 민감한 북한이 군용기의 비행을 전면 금지시키고, 민항기의 비행도 금지 혹은 40마일보다 더 먼 거리 밖으로의 비행만 허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평시에는 보통 남한의 전투기와 미군의 전투기가 임무를 위해 무장을 달고 뜨고 내리는데, 이 때 김정은의 VIP 항공기가 지나간다면, 해당 무장이 자신의 항공기에 발사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군용기의 비행은 금지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우리 공군과 미군의 무장은 모두 첨단 무장으로 사이드와인더 미사일 AIM-9 이나, 암람 AIM-120의 무장은 앞서 말한 20~40마일 밖에서 발사해도 충분히 격추가 가능한 사거리권이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김정은이 항공편으로 내려오면 국내 그 어떠한 군용기도 비행을 할 수 없다고 보는게 합리적인 추론이다.   북한 무장한 전투기 달고 올 가능성 농후해…   그런데 여기서 큰 문제가 하나 있다. 북한이 남하할 때 VIP 항공기 혼자 오는 일이 없다는 점이다. 반드시 VIP 항공기에는 에스코트가 따라 붙는다. 이는 지상에서도 경호를 위한 오토바이나 차량들이 따라붙는 것과 같다. 이 경우에는 무장을 장착한 전투기가 최소 1편대 이상이 비행하는데 이 경우 2대의 전투기에 최소무장인 공대공 미사일 2발씩을 전투기당 장착, 총 4발을 장착하고 남하하게 된다.   이것은 유사시 VIP 항공기로 돌진하는 항공기를 제압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VIP 항공기와 함께 남하할 가장 유력한 북한의 전투기는 북한의 입장에서 최신예 전투기에 속하는 MIG-29 가 될 가능성이 있다. 미그-29는 군사적인 분석으로 국내 KF-16 급과도 비교되는 전투기로 비교적 성능이 우수한 축에 든다.   그럼 북한의 김정은은 최소한 전투기 2대가 미사일 4발을 장착한 채로 함께 남하한다. 이 때 남한에는 아무런 군용기가 날지 않는다. 이 경우는 최소한의 경호를 국제 항공의전법 등에 의거하여 계산 것이다. 만약 북한이 이보다 강한 의전을 한다면 전투기의 대수는 2편대(4대) 이상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장착하는 무장도 공대공뿐만 아니라 공대지 미사일도 함께 장착할 수 도 있다. 이것은 대공 공격을 대비한 북한의 계산이 깔려 있을 수 있다.   공중 경비용 전투기는 답방기간동안 국내 영공에 있을 수 있어…우리 민항기 안전은?   에스코트용 항공기 외에 앞서 언급한 공중경비용(CAP) 전투기까지 함께 올 경우에는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김정은 항공편 외에 여타 북한의 전투기가 공중 경계(경비)를 목적으로 무장을 장착하여 함께 남하한 뒤, 국내 영공에서 계속 경비하듯이 공중 순찰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중경비는 보통 김정은의 비행이 있을때만 진행되는게 아니라, 김정은이 남한에 머무는 동안 계속 지속되는게 일반적인 항공경비의전이다. 즉 국내에 김정은이 머무는 동안 우리 상공에는 항상 북한 전투기가 무장을 달고 비행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기간동안 우리 전투기의 비행이 금지된다면, 우리 영공은 김정은 답방기간중 북에 완전히 넘어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북한의 경비용 전투기들을 국내 군 공항에서 급유를 지속 지원해줘야한다. 이러한 급유는 UN을 비롯한 제재 위반행위다.   답방중 중국이 영공 침범하면 문제 복잡해져…   여기에는 한가지 더 큰 위협이 있다. 바로 중국이나 러시아의 항공기가 방공식별구역(KADIZ)을 침범할 가능성이다. 최근 중국의 장거리 폭격기가 단기간에 수차례 우리 영공에 침범하여 경고를 받은 바 있다. 만약 김정은 답방기간 중 우리 공군 전력이 지상 대기 상태에서 중국이 영공을 침범한다면 우리 영공은 북한뿐 아니라 주변 적국에 동시에 뚫릴 수 있다. 이 경우 우리 공군이 대응 차원에서 출격하는 것을 우리 영공에서 공중 경계하던 북한의 전투기가 위협으로 간주하여 무장을 발사하는 도발을 하면 상황은 매우 복잡해진다. 특히 국내 주요 행사가 있을때마다 우리 영공을 침범한 중국과 러시아의 전례로 보면 침범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국내 연합훈련이나 국제 행사때마다 영공을 침범한 전례가 있다.   이 기간중 국내 인천공항 등을 뜨고 내리는 민항기들도 북한의 전투기 주변으로 오가게 되는데, 그 안전을 무엇으로 담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김정은은 이미 앞선 1차 판문점 회담에서도 과하다 싶을정도의 강한 경호를 주문했다. 당시 김정은의 벤츠 풀만가드 주변에 약 12명의 경호원들이 함께 구보를 한 바 있다. 또한 국정원은 과거 김정은이 극도로 보안에 민감하다고 분석한 바 있다.   제주까지 갈때는 남한 전체 영공 뚫리고 항공사진 찍을 기회 북에 제공해…   답방지가 제주라면 어떨까? 북한의 VIP 항공기가 제주로 가는 경우에는 한반도 전체를 비행하게 된다. 이 때, 한반도 전역의 군용기와 민항기 비행이 전면 일시적으로 금지되고, 이 상황에서 북한은 김정은 항공기와 함께 MIG-29 전투기 편대가 완전무장을 한 채로 한반도를 가로지르게 된다. 이런 경우는 전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다. 대한민국 영공이 통째로 적(북한)에게 뚫리는 꼴이다.   북한의 김정은이 정상적인 의전을 따른다면, DMZ 부근에서부터는 북한의 전투기가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 공군의 전투기가 제공하는 의전을 따라야 한다. 하나, 앞서 설명했듯이 의전에 투입되는 전투기는 최소 2발의 공대공 미사일을 장착한다. 이 미사일이 VIP 항공기 보호용인 것은 자명하지만, 김정은의 의구심을 떨쳐낼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의 답방이 서울이건 제주이건, 항공편으로 온다면, 남한의 영공이 북한의 전투기에 눈뜨고도 뚫리는 상황을 목격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겪게 될 것이며, 우리의 영공을 수호하는 전투기들이 북한의 행진을 지상에서 지켜만 보게 될 것이다.   이번 답방에 대해서 항공의전의 세부사항을 정부가 밝히지 못한다면, 이번 답방은 안보적으로 위협이 될 수 있다. 김정은 항공편에 동행하는 항공기들의 무장 안전을 우리가 담보할 수 없고, 유사시 해당 전투기들을 상대로 우리의 전투기들이 반격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북한의 에스코트용 전투기들이 장착할 무장을 우리 정부는 반드시 확인해야 하며, 우리 공군의 전투기들도 함께 무장한 상태로 공중에서 경계할 필요가 있다. 지상에서도 대공경계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답방기간중 남한 상공을 비행하는 북한의 항공편은 이동하는 중 남한 상공에서 모든 남한의 지상 시설물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게 된다. 북한에게 정보 정찰 감시(ISR)의 기회를 고스란히 제공하는 셈이다.   2014년 북한은 무인기를 청와대 상공 위로 날렸고, 추락한 잔해에서 발견된 카메라 안에는 항공에서 촬영한 청와대와 주요 시설의 사진들이 담겨 있었다. 북한이 그토록 바라던 항공 사진을 찍을 기회를 손에 쥐어 주는 답방은 재고되야 한다.   이번 답방을 지난 싱가포르 회담과 같은 형식으로 추진한다면 중국이 나서서 맡을 수도 있다. 중국이 김정은 전용기를 제공함과 동시에 공중 에스코트를 중국 전투기가 수행해 할 수도 있다. 이 경우라면 중국에 우리 영공이 뚫릴 수도 있는 셈이다. 이를 염두에 둔 중국이 최근 우리 영공을 수차례 침범한 배경이 사전 답사차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북한을 대신하여 항공 루트와 공중 경계 구상을 파악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장원재

안전원은 안전하게 먹고  당원은 당당하게 먹고  보위부는 보이지 않게 먹고  군대는 군데군데 먹고  검사는 검소하게 먹는다.    북한 전역에 널리 퍼진 말이다. 거의 국민가요 수준이라고 한다. 정말 모든 사람이 다 아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배나무 배나TV에 출연하는 탈북자분들께 ‘안전원은 안전하게…’라며 말을 건네는 실험을 했다. 돌아오는 반응이 거의 일정했다. 바로 후렴구가 따라나왔다. 그리고 ‘이 말을 도대체 어떻게 아시느냐?’라고 깜짝 놀랐다.    북한은 뇌물공화국이다. 걸린 것을 봐달라거나, 기타 개인의 민원을 뇌물로 무마하는 정도가 아니다. 사회 전체가 뇌물로 작동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뇌물을 뇌물이라 하지 않고 ‘사업비’라고 한다.      뇌물의 경제학    예를 들어 보자. A라는 공장이 있다. 중앙에서 원자재를 대주지 않으니 생산은 불가능하다. 아예 공장을 돌릴 수 없는 지경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책임 할당 생산량은 채워야 한다. 그래야 처벌을 받지 않는다. 위에서는 ‘자력갱생’의 정신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무슨 수를 쓰든 너희들끼리 알아서 만들어 내라’는 강요다.    직원 B는 공장장에게 뇌물을 고인다. ‘이 돈을 받고 출근한 것으로 해 달라’는 뜻이다. 조금 더 뇌물을 고이면 공장 명의의 출장서를 발급받아 합법적으로 다른 지방을 오갈 수 있다. 거주이전은 물론이고, 여행의 자유조차 없는 북한에서 합법적 여행증명서는 상당한 이권이다. 마음 편하게 넓은 지역을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신경을 쓰고, 단속에 걸려 뒷돈을 찔러 주느니 차라리 이 편이 싸게 먹힐지도 모른다.    B가 하는 일은 개인 장사일 수도 있고 되거리(도매)일 수도 있다. 국내 소도매, 유통 등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중국과의 밀무역에 나서기도 한다. 취급 물품도 약초·버섯·잣 등 덜 위험한 것부터 금·파철·구리·마약·골동품·한국 드라마 CD·USB·스마트칩 등, 걸리면 생명에 지장을 주는 것까지 다양하다. 때로는 해외동포들의 의뢰를 받아 그들의 친인척을 중국까지 안내한다. 북한으로 돌아오는 민간 이산가족 상봉 용역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취급 품목은 시류를 타기도 한다. 미군 유해발굴이 시작된 뒤에는 (미군)군번표가 고가(高價)에 거래되는 상품이 되었다. 이런 개인 활동을 통해 B는 가족의 생활비와 다음달에 공장장에게 고일 뇌물, 그리고 장사하는 도중에 사방에 틈틈이 찔러 주어야 하는 사업비를 마련한다.    공장장 C는 직원들에게 받은 뇌물을 4등분한다. 하나는 개인 수입이다. 두 번째는 상급기관에 올려 보내는 상납금이다.    세 번째는 정치일꾼들에게 바치는 돈이다. 북한의 모든 기관은 2중 명령체계다. 고유한 업무계통 지휘체계와 사상을 담당하는 정치적 지휘체계가 공존한다. 공장이라면 생산을 담당하는 라인과 직원들의 사상을 관리감독하는 라인이 있고, 군(軍)이라면 전투를 담당하는 라인과 군인들의 사상을 담당하는 라인이 공존하는 식이다. 당연히 정치 쪽 파워가 강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특정인에 대한 비판적인 보고서를 위에다 올리면, 실적이 아무리 좋아도 숙청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능력은 중요하지 않다. 김씨 일가에 얼마나 충성하느냐가 출세의 기준이다. 개인의 충성도를 평가하고 위에다 보고하는 것이 바로 정치라인이 담당하는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다. 말하자면, 정치라인이 출세와 처벌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모든 기관에는 그래서 실무와 정치 양대 라인의 보이지 않는 갈등과 고급인력들인 전문가들의 불만이 내재되어 있다.    C가 유능한 공장장으로 평가받으려면, 해야 하는 일이 하나 더 있다. 직원들이 고인 뇌물을 모아 장마당으로 가서 ‘생산품’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렇게 마련한 생산품을 ‘납품’하면, 서류상으로는 모든 직원이 출근해서 책임할당량을 차질 없이 생산한 것이 된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외화로 돌아가는 경제’  북한의 고급 음식점 옥류관. 돈 이외에 ‘배급표’도 있어야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다.  뇌물은 뇌물을 고이고도 그 이상의 이익 실현이 가능할 때 작동한다. 어느 경제학자는 “국민소득이 1000달러인 나라의 소비 수준이 3000달러라면, 2000달러 규모의 지하경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 북한의 공식환율은 2018년 현재 1달러당 북한 돈으로 약 108원이다. 암달러 시장에서는 8000원이다. 공식환율과 시장환율에 무려 80배나 차이가 난다.    이 차이를 비집고 뇌물이 작동한다. 배나무 배나TV 김주성 이사에 의하면 평양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4000원이다. 암시장 환율로 50센트다. 그런데도 한 잔에 몇 달러나 받는 커피숍이 평양에 여러 군데 성업 중이고 한 끼에 1인당 100달러가 넘는 호텔 만찬도 자리가 찬다. 고객 중에는 외국인뿐 아니라 북한인 손님도 상당수라고 한다. 이 알다가도 모를 상황의 배경이 바로 ‘외화로 고이는 뇌물’과 ‘외화로 돌아가는 경제’다.    북한 당국이 북한 돈의 가치를 강제해도 주민들은 ‘국돈’을 믿지 못한다. 북한 돈은 엉터리 화폐라는 것을 모두가 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외화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은 이미 자국 화폐 대신 달러를 화폐로 쓰는 달러라이제이션(dollorization)을 시행 중인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 보자. 북한의 쌀값은 상황에 따라 1kg에 3700~4500원을 오간다. 배급이 끊긴 지는 이미 오래 전이니, 월급만 가지고는 먹고살래야 살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론상으로는 먹고살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정가격으로 생필품을 조달하면 된다.    문제는 국정가격 배급표를 타기도 어렵고, 뇌물을 고이고 배급표를 받아도 상점에 물건이 없다는 점이다. 배급표는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증서다. 북한에서는 돈이 있다고 물건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돈으로 물건을 사더라도, 당국으로부터 ‘구입을 허락받아야’ 즉 배급표를 얻어야 비로소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식당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옥류관 냉면을 사 먹을 수 없다. ‘옥류관 식권’, 다시 말해 ‘옥류관에서 냉면 사 먹는 것을 당국이 허락하는 증서’ 없이는 아예 옥류관 출입을 할 수가 없다. 이 식권을 위조하여 유통했다가 걸린 사람이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예외는 외화다. 달러나 엔화, 중국 위안화는 프리패스다.      장마당에서는 외화로 거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북한 건설 노동자들. 해외 파견 노동자들은 북한의 주된 외화수입원이다.  배급표는 또 다른 이권이다. 시세의 20분의 1 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물건이 없다는 것이다. 물건이 없다면 배급표는 휴지나 마찬가지다. 그나마 가물에 콩 나듯 국정 상점에 물건이 들어와도, 미리 뇌물을 고인 경로를 통해 물건은 다른 곳으로 빠져나간다. 물론 서류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을 터이다.    북한 당국도 외화의 위력을 안다. 과거에는 ‘외화와 바꾼 돈표’가 있었다. 재일동포 귀국자나 러시아 벌목공, 중동 노무자 가족들이 외화를 만지는 사람들이었다. ‘외화와 바꾼 돈표’는 ‘외화와 바꾼 돈표’ 전문상점에서 물건을 살 수 있는 또 다른 화폐였다. 그곳에는 국정상점에서 볼 수 없는 제품들, 예컨대 가전제품이나 고급 의류가 늘 진열되어 있었다고 한다. 북한 스스로가 자국 화폐를 2부리그 화폐라고 인정했던 셈이다.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 경제의 거의 모든 체계가 무너지고 재편되는 과정에서, 북한 주민들은 더 효율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장마당에서는 배급표 없이 자유롭게 물건을 직거래한다. 그리고 거래는 믿을 수 있는 화폐로 한다. 지금은 북한 전역의 장마당에서 달러, 엔화, 위안화로 물건을 사고 판다. 달러로 셈을 치르면 장사하는 할머니가 암산으로 환율계산을 마치고 위안화로 잔돈을 거슬러 주는 식이다. 위안화 소액권이 잔돈 거스름돈 용도로 북한에서 인기라는 기사도 있었다. 이런 풍경은 더 이상 신기한 일도 아니다.      ‘노동당 최대의 敵’ 장마당    장사하는 사람들이 매기는 물건 값을 북한에서는 ‘협정가격’이라고 부른다. 협정의 주체는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다. 당국이 모든 것을 지시하고 지정하는 ‘국정가격’은 이미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가격이다. 정치권력은 북한 주민들 스스로가 매기는 ‘협정가격’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협정의 주체에 당국은 없다. 이 점이 중요하다. 장마당을 통해 권력 밖에서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힘이 생겼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전체주의 권력자들은 언제나 거의 하나의 예외도 없이, 그것이 어떤 종류의 힘이든, 내부에서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난 힘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했다. 노동당 최대의 적(敵)은 그래서 장마당이다.    북한의 ‘국돈’은 장마당에서 찬밥 신세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다. ‘당비(黨費) 납부’ 말고는 국돈을 받는 곳이 없다.    ‘국돈’을 믿지 못하는 건 일반 주민만이 아니다. 고위 공직자들도 다들 뇌물이나 부수입으로 연명하는데, 핵심계층인 그들조차 현물이나 외화로만 뇌물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위아래를 막론하고, 모든 주민이 북한 돈을 엉터리라고 생각한다는 증거다.    북한 주민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노동당이 아니라 장마당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지 오래다. 그래서 노동당이 장마당을 물리칠 가능성은 거의 없을 터이다. 장마당이 누구를 더 신뢰하는지는 이미 판가름 났다. 장마당이 어느 방향으로 진화하며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향후 변화의 속도와 크기가 어떨는지 궁금한 이유다.⊙

정광성

지난 11월 15일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끝났다. 매년 11월이면 전국에서 60만명에 가까운 학생이 대학 입학을 위해 시험을 치른다. 북한에도 수능이 있다. 물론 ‘수능’이라는 용어는 쓰지 않는다. ‘대학입학 예비시험’이라고 한다. 대입시험도 남북한이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남한에서는 국어, 영어, 수학 등 주요 과목이지만 북한은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혁명역사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북한에서도 국·영·수학 시험을 본다. 또 남한에서는 수능시험이 하루에 끝나지만 북한에선 이틀에 걸쳐 치러진다. 하루에 과목당 3개의 논술식 문제로 45분씩 3과목을 본다.    과거에는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다. 현재 북한도 12년제 의무교육이지만 과거에는 11년제였다. 유치원 1년, 소학교(초등학교) 4년, 고등중학교(중고등학교) 6년이었다. 2012년 들어서 유치원 1년, 소학교 5년,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교 3년으로 개편됐다. 대학 진학 방법도 바뀌었다. 학제개편 이전에는 일반 고등중학교에서는 대학을 가지 못했다. 그러면 어떤 학생들이 대학에 갈까? 북한은 도·시·군들에 제1고등중학교라는 명칭의 특수학교를 새로 만들었다. 한마디로 수재학교다. 소학교 졸업과 동시에 시험을 통해 이 학교에 입학한다. 북한 교육성에서 출제한 시험에 통과하게 되면 제1고등중학교에 갈 수 있다. 대학에 가기 위해선 필수로 이 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고난의 행군’의 경제난 속에서 생겨난 불법 과외    제1고등중학교가 생긴 이후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북한에도 과외가 생긴 것이다. 제1고등중학교의 입학시험은 난도(難度)가 높은 편이다. 천재적 재능을 가진 학생이 아니면 대부분 학교 공부 이외 다른 교육을 받아야 한다. 과외를 부모들이 따로 시키는 것이 아니다. 소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따로 선발해 공부를 시킨다. 이 교육은 소학교 3학년인 10살부터 시작된다. 이 학년에서 공부깨나 한다는 친구들을 선발해 정규교육 이외 따로 공부를 시킨다.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북한 교육체계의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나도 당시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해당 소조(공부모임)에 들어갔었다. 처음에는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뻤다. 열정도 대단했다. 수업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소조에서도 열심히 공부했다.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공부만 했다. 부모님들도 열정이 대단했다. 소조 공부 이외 개인적으로 선생님을 구해 개인과외를 받게 했다. 물론 당시 개인과외는 불법이었다. 부모님들은 자식의 수재학교 진학을 위해 몰래 과외를 시킨 것이다. 물론 나만 한 것은 아니다. 소조에 들어간 친구들은 몰래 과외를 하고 있었다. 북한이 경제난으로 제일 어려웠던 시절인 1990년대 말 불법과외가 시작됐다. 당시에는 돈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식량으로 과외비를 대신했다.    과외 선생님들은 대부분 은퇴한 교사들이거나 경제사정이 어려워 학교를 그만두신 분들이었다. 나의 과외선생님은 소학교 2학년 담임이셨던 강모연(가명) 선생이었다. 강 선생님은 결혼과 동시에 학교를 그만두셨다. 집에서 가정주부로 생활하시면서 나의 공부를 도와주셨다. 개인적으로 과외를 해 줘서가 아니라 내 인생의 가장 기억에 남는 스승이시기도 하다. ‘고난의 행군’ 시절 학생들의 생일이면 연필과 공책 등 다양한 학용품들을 선물로 주셨다. 또 학생 개인의 사정을 파악하시고 도움을 주려고 애쓰셨다. 같은 반에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친구가 있었다. 강 선생님은 이 학생을 자신의 집에까지 데려가 밤새 공부를 도와주셨다.    나는 과외를 시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만둬야 했다. 북한 정권의 대대적인 단속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정부는 북한 전역에 과외 열풍이 불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루빠(TF)’를 조직해 검열에 나섰다. 몇몇 분들은 그루빠에 적발돼 노동단련형(북한에서 강도가 약한 처벌 6개월~1년 정도 강제노동을 시킨다)을 선고 받기도 했다. 어떤 분은 시범케이스에 걸려 시골로 추방당하기도 했다. 당국의 대대적인 단속으로 인해 공부 열풍은 한풀 꺾이고 말았다. 이때부터 나도 어영부영 공부를 포기했다.    당국의 지속적인 단속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과외가 더욱 성행하고 있다. 2012년 북한의 학제가 11년에서 12년 의무교육으로 바뀌면서 제1고등중학교에 대한 인기는 사라졌다. 과거 제1고등중학교에서만 대학 입학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일반 고급 중학교에서도 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북한도 남한의 과외 열풍을 따라가고 있다. 현재 국어, 영어, 수학은 기본이고 물리, 화학, 컴퓨터, 피아노, 글쓰기 과외까지 등장했다. 특히 과거와 달리 과외비도 현금으로 준다.    특히 과거에는 소학교 졸업 전 과외를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소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다양한 과목과 이과 과목, 피아노, 관현악기 등 예체능까지 과외가 이뤄지고 있다. 물론 집안의 재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과외비용은 과 거에 비해 2배 수준으로 올라갔다. 지역에 따라 차이도 있다. 가장 비싼 지역은 역시 평양이다. 평양의 경우 1인 평균 100~200달러 정도 한다. 물론 과외교사에 따른 차이도 있다. 고급 중학교 교사인지 대학교 교수인지도 중요하다. 이 밖에도 함흥과 청진은 50달러, 회령은 중국 화폐 100위안이다.      공부가 아닌 강제노동의 현장이 된 학교  소학교 2~3학년으로 보이는 북한 학생들이 손수레에 흙은 싣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 사진=인터넷 캡처  북한에서 대학교 입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은 한 학교에서 10%도 되지 않는다. 과거에는 집안이 가난해도 공부만 잘하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집에 돈이 많거나, 아버지가 간부인 아이들만 대학 입학을 꿈꿀 수 있다. 이외 학생들의 미래는 정해져 있다. 남자인 경우 학교를 졸업한 후 10년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노동부에서 직장을 잡아 준다. 취업하기 힘든 요즘 청년들이 이를 부러워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이유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그리고 한 기업소(회사)에 배정을 받는다고 해도 월급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 대부분의 제대 군인들은 직장을 배정 받고도 일을 나가지 않는다. 여학생의 경우 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역시 노동부에서 직장을 배정해 준다. 하지만 대부분은 학교 졸업과 동시에 시집을 가거나 장사의 길로 들어선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은 공부를 포기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교사들도 열심히 가르치지 않는다. 이들은 오전 7시 반에 등교를 한다. 등교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 장소에 모여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줄을 맞춰 노래를 부르며 학교에 들어선다. 8시에 수업이 시작해 4교시를 하고 모두 집으로 간다. 남한의 경우 점심시간이면 식당으로 이동해 밥을 먹는다. 하지만 북한은 그런 급식소가 없다. 점심시간이면 모든 학생이 식사를 하기 위해 집으로 간다. 집이 먼 친구들은 도시락을 싸 오곤 했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 이후 도시락을 싸서 다니는 친구가 없어졌다.    점심을 먹고 다시 학교로 복귀하는 시간은 오후 2시다. 보통 학교로 돌아와 2교시를 더 하면 학교가 끝난다. 이후 하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하러 나간다. 매일매일 다르다. 농사철이면 농장으로, 그 외에는 건설장으로 나간다. 봄과 가을이 되면 주변 농장에 나가 일을 한다. 그에 대한 보상은 당연히 없다. 말 그대로 강제노동이다. 농사일은 조금 쉬운 편이다. 시에서 건물을 짓는데 일손이 부족하면 학생들을 동원해 일을 시킨다. 보통 하는 일은 강에서 모래를 담아 공사장까지 나르는 일이다. 강가와 공사장이 가까우면 쌀자루에 모래를 담아 등짐으로 날라야 한다. 이 역시 노동에 대한 보상은 없다. 이런 일들이 늘어나면서 대부분 오후 수업도 하지 않은 채 학생들을 노동의 현장으로 내보낸다. 이 밖에도 작업이 없는 날이면 담임선생님의 개인 농사를 도와주러 가기도 한다. 물론 모든 선생님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봄이나 가을 농사 일손이 부족하면 자신이 맡고 있는 반의 학생들을 몇몇 뽑아 농사일을 시키는 경우도 있다.      김정일 “밥을 먹는 사람은 모두 다 동원하라”  북한의 학생들이 ‘모두 다 모내기 전투에로!’라고 쓰인 구호를 들고 농촌동원을 나가고 있다. 사진=인터넷 캡처  남한에서는 기계로 농사를 짓는다. 그러나 북한은 기계를 거의 쓰지 않고 인력이나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다. 그러다 보니 항상 일손이 부족하다. 이를 채우기 위해 고등중학교 4학년(17살)부터 6학년 학생들을 한 달간 농촌에 파견해 농사일을 돕게 한다. 남한으로 말하면 농활이다. 남한에서는 농활이 의무가 아니지만 북한에서는 의무이다. 1년에 봄, 가을 두 번이다. 학교는 한 달간 휴교를 한다. 각자 자신이 한 달분 식량을 챙겨야 한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농장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생활을 하면서 농사일을 돕는다. 첫 농촌지원은 우리 모두를 설레게 했다. 나는 몇 시간 후 닥쳐올 시련을 생각하지 못한 채 마냥 즐거웠다. 17살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한 달 동안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내에서 차로 3시간 달려 농장 마을에 도착했다. 수십 명의 학생들이 2인 1조로 농장원 집에 숙식하게 됐다. 나는 다행히 제일 친한 친구와 한방을 쓰게 됐다. 첫날 우리는 짐을 풀고 놀 거리를 찾아 주변 탐색에 나섰다. 물과 공기는 좋았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조금 실망했다.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당시 할 수 있는 것은 강에서 고기를 잡아 어죽을 쒀 먹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한 달 동안 이마저도 몇 번 해 보지 못하고 죽어라 일만 했다. 농장에서의 생활은 거의 군대 수준이었다. 아침 6시 기상해 7시까지 식사와 모든 준비를 끝내고 논밭으로 나가야 한다. 7시30분부터 시작해 모내기, 밭 김매기 등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한다. 중간에 점심과 새참 시간 이외 거의 일을 한다. 끝나는 시간은 따로 있지 않다. 날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야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다. 이것이 매일 반복됐다. 도시에서 고된 농사일을 하지 못한 우리들에게는 버티기 힘든 일이었다. 이로 인해 앓아 누운 친구도 있었고, 집으로 도망가는 친구도 생겨났다.    전쟁 속에서도 사랑의 꽃은 핀다. 힘든 노동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은 더욱 애틋하다. 보통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에 비해 일을 잘하는 편이다. 몇 천 평 되는 옥수수 밭에서 김을 매게 되면 상대적으로 남자들이 먼저 끝낸다. 먼저 끝낸 남학생들은 평소에 자신의 마음에 들었던 여학생을 도와준다. 주변에서 부러움 반 질투 반의 목소리로 그 친구들을 놀려댄다. 하루 일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면 그 여학생은 맛있는 간식을 가지고 남학생에게로 간다. 두 사람의 관계는 잘될 수도 있지만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끝날 때도 있다. 농촌지원은 남녀뿐만 아니라 학급 전체를 단결시켜 준다. 힘든 일을 함께 겪으면서 새로운 우정도 발견하기 때문이다.    가을 농촌지원은 봄에 비하면 쉬운 편이다. 또 상대적으로 먹을 것도 많다. 봄의 경우 농촌에서는 식량 사정이 어렵다. 그렇다 보니 학생들의 식탁도 풍족하지 못하다. 물론 학생들이 식량을 가져가긴 하지만 그것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농장들에서 조금씩 도와줘야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다. 가을 농촌지원은 주로 옥수수 수확과 벼 베기다.      北 학생이 가져야 할 중요한 마음 ‘충성심’  함경북도 회령시에 있는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의 동상 앞에 주민들이 꽃다발을 놓고 있다. 사진=인터넷 캡처  북한 당국에서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충성심’에 대한 요구가 가장 크다. 충성심의 시작은 ‘정성사업’이다. 매일 아침 등교 이후 교실에 김일성·김정일 초상화 먼지를 닦아야 한다. 이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다. 그리고 학교에 걸려 있는 김 부자의 대형 사진과 교시판을 학급별로 돌아가면서 청소를 해야 한다. 북한 학교들에는 교실에 있는 김씨 일가의 초상화 이외에 학교와 관련된 대형 사진들이 걸려 있다. 또 김씨 부자가 학생과 관련해서 내린 지시들을 대리석에 새겨 벽에 붙여 놓은 것들이 수십 개가 된다. 이것을 모두 닦아야 한다. 청소가 끝나면 담당 교사가 흰 천을 들고 다니면서 청소가 제대로 이뤄졌는지 검사한다. 여기에 통과되지 못하면 다시 또 청소를 해야 한다. 그래도 통과하지 못하면 다른 친구들이 모두 하교한 이후 청소를 해야만 한다. 이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끓어오르는 증오는 선생님이 아니라 김씨 일가에 대한 원망으로 번진다. 이런 날이면 가끔 몰래 들어와 사진과 교시판들을 훼손하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만약 나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다 걸리면 그날로 우리 가족은 끝장난다.    정성사업으로 학교뿐만 아니라 시 곳곳에 있는 김씨 일가의 동상과 관련 대형 조형물을 쓸고 닦아야 한다. 특히 회령은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의 고향이다. 이 때문에 다른 도시보다는 쓸고 닦을 곳이 더욱 많다. 먼저 김정숙이 태어났다는 고향집과 주변 동상, 역사박물관, 어릴 때 뛰어놀았던 곳 등등 여러 곳이 있다. 특히 우리 학교가 시내 중심이어서 김정숙 관련 모든 곳을 청소해야 한다. 눈이 오면 눈을 치우고, 비가 오면 나뭇잎 등을 쓸어내야 한다.    명절이면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 우리 반 담당 구역은 김정숙의 고향집이다. 아침이면 이곳에 모여 청소를 한 다음 다 같이 모여서 학교로 들어온다. 만약 겨울이면 거의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 고향집 주변에 눈이 쌓이면 안 된다. 눈이 오면 고향집으로 나가 눈을 치워야 한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할 때도 있었다. 비가 오면 우비를 입고 나가서 나뭇잎을 쓸어 내곤 했다.    이와 관련,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소학교 시절 우리 반 친구 중 한 명이 중앙당으로부터 표창장을 받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솔직히 소학교 학생이 시도 아니고 중앙당 표창을 받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웬만해서는 중앙당 표창을 받지 못한다. 얼마 후 그 친구는 표창을 받게 됐고 이유도 알려졌다.      김씨 일가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족쇄가 된 조선소년단    이 친구에겐 누나가 2명 있었다. 이들 남매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아침 김정숙 동상 주변을 청소했다. 하루는 중앙당 간부가 회령에 내려왔다가 이 모습을 보게 됐다는 것이다. 이 간부는 아침 일찍 김정숙 동상을 청소하는 이들을 불러 세워 자초지종을 물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1년 365일 하루도 빠짐 없이 김정숙 동상을 청소했다. 이에 감동을 받은 간부는 중앙당으로 올라가 곧바로 이들에 대한 표창을 준비했다. 이 일로 친구의 가족들은 표창을 받고 평양 견학도 다녀왔다. 이후 학교에서 우수학생으로 좋은 일에 항상 맨 앞에 섰고, 조선소년단에도 제일 먼저 가입했다.    지난 9월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자 빨간 스카프를 두른 소년·소녀가 문 대통령 내외에게 꽃다발을 전달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이들은 조선소년단원들이다. 조선소년단은 1946년 6월 6일에 창립된 북한의 소년 단체다. 남한의 보이·걸스카우트와 비슷한 단체라고 볼 수 있다. 흰색 상의와 붉은색 넥타이가 이들 조선소년단의 상징이다. 조선소년단은 구소련, 공산권 국가에 있는 소년단 조직 ‘피오네르(pioneer)’의 일종이다. 손을 머리 위로 들어 경례를 하는 모습과 빨간 스카프를 두른 모습이 피오네르 소속 소년·소녀들의 모습과 같다.    조선소년단 가입은 소학교 2학년(9살)이다. 소년단엔 4차례 걸쳐 가입 기회가 주어진다. 제일 처음은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이고 그 다음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 조선소년단 창립절인 6월 6일, 김정숙 생일인 12월 24일 순이다. 시기를 놓고 학생들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도 벌어진다. 순전히 담임선생님의 추천을 통해 조선소년단 조직에 명단이 올라간다. 부모들은 자식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 위해 선생에게 뇌물을 바치기도 한다. 뇌물에 따라 이름이 몇 번째 올라가는지 결정이 된다. 물론 모든 것이 비밀스럽게 진행된다. 이를 통과하면 소년단원이 알아야 할 원칙들을 외워 검사를 받는다. 한마디로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충성 맹세다. 이후 6년간 소년단원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것은 어릴 때부터 조직생활을 통해 김씨 일가를 위해 충성을 강요하는 족쇄다.⊙

정광성

사랑은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이다. 남한에서 살면서 친구들에게서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북한 연애다. “북한에서도 연애를 하니?” “데이트는 하니?” “소개로 만나니, 아니면 자연스럽게 만나니?” 등의 질문이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조금 당황스럽긴 하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반문한다.    “왜 북한에서는 연애를 안 할 거라고 생각하니?”    질문을 하는 친구들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북한은 많은 것이 제한되어 있다. 이동의 자유,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이 없다. 북한 정권은 주민들에게서 기본적인 권리를 박탈할 수 있었지만 사랑만큼은 막지 못했다.    북한은 1990년대 식량 문제로 경제가 거의 파탄 났다. 이로 인해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그중 하나가 연애다. 20~30대 청년들은 기존 기성세대와 달리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갔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은 연애를 통한 결혼보다 중매결혼을 했다. 정권에서도 ‘연애는 자본주의의 썩어빠진 퇴폐문화’라며 중매결혼을 종용했다.    북한 젊은이들의 생각을 바꿔놓은 것은 남한 드라마와 영화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중국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두만강과 압록강을 통해 밀수가 성행했고, 그 속을 통해 외부 정보들이 북한 내부로 들어왔다.      어렵게 한 약속  평양 주체사상탑 밑에서 남녀가 나무 뒤에 숨어 몰래 키스를 하고 있다. 사진=인터넷 화면 캡처  나에게도 10대 시절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이 있다. 탈북을 몇 개월 앞두고 연애를 시작했다. 물론 당시 나도 탈북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의 이름과 사는 곳은 개인의 신상 문제가 있어 밝히지 않겠다. 나보다 2세 어린 연하였다.    탈북 전 시골 할머니 댁에서 살았다. 그때 그녀를 만났다. 처음 본 순간 나의 이상형이었다. 주변 친구들을 통해 그가 어디에 살고 누구인지를 파악했다. 이후 그녀를 찾아가 고백을 하려 했지만 정작 용기가 나지 않았다. 며칠을 고민하다 그의 집 앞까지 가긴 했지만 한마디 말도 못하고 돌아왔다.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아 쪽지로 나의 마음을 표현하기로 했다. 정성스럽게 한 장 정도 내용의 편지를 썼지만 그 역시 전해주지 못했다. 나 자신이 조금 한심해 보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길에서 그녀를 마주하게 됐고,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    나: “저기… 잠깐 말 좀 할 수 있겠니?”    그녀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것이 더 이상했다. 그녀가 보고 싶어 계속해서 그의 집 주변을 서성이다 보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 “나 지금 바쁨다. 나중에 합시다.”    나: “그럼 저녁 7시까지 운동장 앞으로 나와라. 내 기다린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하고 급하게 돌아서 도망치듯이 걸어갔다.    그날 저녁 약속 장소에 나갔다. 북한의 경우 가로등이 없어 밤이면 손전등을 들고 다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넘어지거나 해 큰 사고를 당할 수 있다.    약속 장소에 거의 도착하니 앞에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물론 어두워서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손전등을 사람에게 비추면 큰 실례가 된다. 나는 속으로 그녀가 나왔길 바라며 긴장되는 마음으로 다가갔다. 그녀였다. 순간 나는 너무 좋아 소리치고 싶었다. 우리는 서로임을 확인하고 나서 앉을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가 먼저 입을 뗐다.    그녀: “왜 보자고 했슴까?”    나: “지금 친한 사람 있니?”    북한에선 ‘사귄다’는 표현을 ‘친한다’라고 말한다.    그녀: “그건 왜 물어봄까?”    나: “있니 없니 그것만 말해라.”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막무가내였다. 친구 데이트하는 것을 보긴 했지만 정작 내가 하자고 하니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15세부터 연애를 시작한 친구도 있었다. 남한에선 이 나이면 어린 편이다. 그러나 북한에선 17세에 학교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시작하기 때문에 결코 어리지 않다.      “만년필 잉크가 떨어졌다”    고등중학교 4학년이 되자 친구들은 이성(異姓)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나도 친한 친구가 6명 있었는데 그중 2명이 연애를 했다. 공교롭게도 2명의 여자친구 모두 같은 반 친구였다.    당시 우리는 휴대폰이 없는 상태였다. 순수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참으로 북한스러운 방식으로 연락했다. 암호였다. 쪽지를 써서 연락을 취해도 됐지만 그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오늘 저녁 데이트를 하자’라고 할 경우 “어… 만년필 잉크가 떨어졌네. 오늘 저녁 8시 잉크 사러 가야겠다” 등의 방식이다. 첩보영화에서 간첩들에게 보내는 암호 같았다. 무슨 의미로 이 같은 암호를 만들었는지는 생각이 나질 않는다.    우리는 종종 친구의 부탁으로 암호를 날렸다. 교실에서 친구의 여자친구가 들리게 큰 소리로 말하거나, 길을 가다 마주치면 조용히 “어… 만년필 잉크가 떨어졌네. 오늘 저녁 8시 잉크 사러 가야겠다”라고 암호를 전달했다.    가끔 교실에서 큰 소리로 말하게 되면 이를 모르는 친구들은 한마디씩 했다.    “머저리 아니야? 저녁에 잉크 어디서 파니?”    그것을 아는 우리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날 저녁은 어김없이 둘이 데이트를 한다. 가끔 전달이 안 될 때가 있다. 이럴 때면 친구들이 여자친구 집으로 찾아가 불러낸다. 이도 위험이 따른다. 만약 집에 부모님이 계시면 우리의 행동이 그대로 선생님 귀에 들어가 큰일을 치르게 된다.    한번은 A친구의 여자친구 집으로 갔는데 그녀의 어머니에게 걸렸다. 우리는 당황했고, 선생님이 지금 학교로 부른다고 둘러댔다. 그런데 화(禍)는 쌍으로 온다고 담임선생님이 그 집에 있었다.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음날 학교에서 우리는 호되게 혼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성스러운 김정숙 동상 앞에서 애정 행각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우리는 몰래 친구의 데이트를 훔쳐보기도 했다. 데이트 장소는 주로 김일성의 부인이자 김정일의 어머니인 김정숙의 동상 근처 조용한 곳이었다. 모든 데이트는 해가 떨어진 밤에 했다. 만약 고등학생이 낮에 데이트를 하다 어른들 눈에 띄게 되면 아마도 한마디씩 했을 것이다.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것들이…’ 사람 이마에 피가 마르면 죽는데 말이다.    우리는 저녁 8시 전에 미리 김정숙 동상 앞에 가서 전망 좋은 자리를 잡고 숨어 있었다. 물론 데이트하는 친구는 다 알고 있었다. 시각이 되면 서로 만나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 대화를 들어보면 솔직히 의미 있는 대화는 아니다. 손을 잡고 얘기하다가 가끔 서로 뽀뽀를 하는 정도가 데이트의 끝이다. 정말 순수했다.    하지만 장소는 순수하지 않았다. 성스러운 김정숙 동상 앞에서 10대들이 이러한 애정 행각을 한다는 것이 만약 걸리게 되면 남녀 모두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이곳을 선호하는 이유는 2가지다. 첫째는 매일 3번 정도의 청소가 진행되니 우선 깨끗하다. 둘째는 보안원들이 24시간 지키고 있어 안전하다. 대신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드라마 〈가을동화〉 원빈, 북한 여성들 마음 사로잡다  북한 대학생들이 거리에서 남녀가 함께 춤을 추고 있다. 사진=인터넷 화면 캡처  북한은 2000년 초반을 기점으로 남한 드라마와 영화가 물밀 듯이 흘러들어왔다. 물론 김정일 정권은 이를 막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끝내 막지 못했다.    당시 〈올인〉 〈천국의 계단〉 등 여러 드라마와 영화들이 북한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 몰래 유통됐다. 특히 2000년 9월 KBS2 드라마 〈가을동화〉가 북한 젊은 남녀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12회에서 태석(원빈)이 은서(송혜교)에게 한 “사랑 웃기지 마. 이젠 돈으로 사겠어. 돈으로 사면 될 거 아냐!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냐?”는 대사는 북한의 젊은 여성들의 마음을 녹여버렸다.    북한 젊은 남녀 중 남한 영화나 드라마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다. 이성 간에 프러포즈와 말투, 행동까지도 변화했다.    2년 전에 탈북한 지인의 증언에 따르면 방영하는 드라마의 경우 남한에서 방송된 후로 7일 만에 북한 전역에 뿌려진다. 20~30대 젊은 청년들은 남한 드라마를 보고 자신의 남자친구나 여자친구와 함께 그것을 그대로 따라 하는 유행이 불고 있다고 한다.    북한의 연인들은 드라마에서 나오는 ‘키스신’에 열광을 한다. 북한에서는 그동안 연애문화를 퇴폐로 규정했기 때문에 영화나 연속극에서 키스신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남한 드라마에서는 키스신 등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청년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연애 감정을 공감할 수 있어 남한 드라마에 더욱 열광한다는 전언이다.      〈별에서 온 그대〉 도민준 보려 탈북하기도…    요즘 북한의 젊은 연인들은 말투도 남한화되어 간다. 외부 영상이 유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연애를 하게 되면 서로의 호칭은 동무나 동지였다. 남자는 여자에게 동무라고 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동지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드라마를 통해 ‘○○○씨’와 ‘자기야’라는 호칭이 유행하고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북한의 20~30 대는 변화하고 있다. 최근 북한의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는 SBS에서 방영한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다. 극 중 도민준(김수현)은 북한 여성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심지어 이 드라마를 보고 탈북한 사람이 있을 정도로 북한에서는 인기가 많았다. 20대 중반인 탈북민 A씨는 〈별에서 온 그대〉를 보고 남한에 가면 김수현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탈북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 정도로 남한 드라마가 북한의 20~30대를 변화로 이끄는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다.      1960년대까지는 당 허락 받고 결혼  결혼식을 올린 부부가 바닷가 모래 위에 ‘행복’이라고 쓰고 즐거워하고 있다. 사진=인터넷 화면 캡처  6·25전쟁 이후 김일성은 빠르게 권력을 장악하며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당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물론 지금도 북한 노동당의 권력은 무소불위(無所不爲)다.    그러나 1950~1960년대는 더 심했다. 자식의 결혼을 당 비서나 세포비서에게 허락을 받은 다음에야 혼인을 승낙하는 시대였다. 실제로 북한 당국은 연속극에도 이런 장면을 넣어 사람들을 세뇌했다. 2000년대 초반 방영한 〈민족과 운명〉 노동계급 편에 한 어머니가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세포비서를 찾아가 사위가 될 사람에 대해 평가를 해달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세포비서가 적극 추천하자 그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 딸의 결혼을 승낙한다.    이후 1970~1980년대는 중매를 통해 결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때부터 당에 대한 의존도는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당시에는 당의 추천보다 서로의 집안의 토대(출신)를 중요시했다. 토대가 좋은 집에 시집이나 장가를 가게 되면 간부가 되는 데 걸림돌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토대가 좋은 집안과의 결혼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워졌다. 토대가 좋은 집에서도 상대방 집안에 문제가 있으면 결혼 당사자가 마음에 들어도 결혼을 시키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자연히 계층이 나뉘었다. 자식들도 토대가 좋은 집에서 태어나서 자라면 당연히 좋은 대학이나 직장을 얻을 수 있고 승진도 빠르다.      리설주가 가져온 변화    1990년대 말을 기점으로 북한 결혼 문화도 많이 바뀌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토대보다 돈이 많은 집과 혼사가 성사되길 원했다. 이때부터 중매보다는 당사자들의 연애를 통해 결혼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북한의 식량 기근이 북한 사회를 바꾼 것이다. ‘고난의 행군’을 통해 외부 사회에 대해 알게 됐고, 1980년대까지 상상도 못했던 탈북이 이뤄지고 남한과 서구 사회의 정보와 문화가 조금씩 유입됐다. 외부 영상 등을 통해 그동안 금기시해 왔던 서방 세계를 보게 됐고, 이로 인해 북한의 젊은 세대가 변화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김정은이 등장하면서 젊은 세대들은 더욱 자유롭게 연애를 하고 있다. 김정은이 TV에 나올 때면 리설주와 함께 등장한다. 이때마다 리설주가 김정은의 팔짱을 끼고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젊은 남녀가 함께 낮에 팔짱을 끼고 거리를 다니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뜻하지 않은 이별 그리고 결혼    나는 그날 운동장에서 처음으로 그녀를 만났지만 남자친구가 없는 것만 확인한 채 헤어졌다. 여러 차례 구애 끝에 우리는 연인이 됐다. 이후 우리는 그 누구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어른들의 눈을 피해 낮에는 만나지 못하고 해가 지면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할 수는 없었지만 만나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3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러고 아무 소식도 남기지 못한 채 탈북을 하게 됐다. 당시 나는 중국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그녀와 결혼까지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간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그녀와 이별을 했다.    처음 남한에 와서 그녀의 소식을 듣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12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그녀의 소식을 듣게 됐다. 2~3년 전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는 소식이었다. 탈북을 하는 것도 모르고 두만강을 넘었지만, 만약 미리 그 사실을 알고 “그녀에게 데리러 오겠다”고 했더라면…. 그녀는 아마 혼자의 힘으로라도 남한으로 왔을 것이다. 미안함과 북한 정권에 대한 야속함이 남지만 그래도 10대의 나의 행복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내가 선택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북한에서 태어난 죄로 사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하루빨리 북한의 20~30대들도 자유롭게 데이트를 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길 소망한다.(계속)⊙

정광성

  ‘자유를 찾아가는 죽음의 길 탈출’ 연재가 나가고 나서 글을 잘 읽었다는 전화가 왔다. 나보다 더 힘들게 온 사람들을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연재를 그만둘까 생각도 했다. 그럼에도 연재를 계속하는 이유가 있다. 18살의 어린 소년의 북한 삶을 통해 조금이라도 북한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걸로 나의 연재는 성공했다고 본다.    지난달에 이어 두 번째 연재다. 이번 호에는 기억에 대해 써 볼까 한다. 누구나 태어나서 첫 기억이 있다. 사람마다 기억하는 시기는 다르지만 대부분 행복·불행·충격적인 사건이 기억에 남을 것이다. 나의 첫 기억은 1994년 7월 9일 김일성의 죽음이다.    이날 우리는 휴가 중이었다. 아버지가 다니던 수송반(자동차 회사) 직원들과 가족들이 모두 소풍을 떠났다. 80년대 후반부터 북한의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했지만, 김일성 사망 전까지는 주민들의 생활이 괜찮은 편이었다. 90년대 초반까지 배급이 나왔고, 노임(월급)도 정상적으로 지급됐다.      심각한 표정의 안전원 “당의 중대발표 있다”    이른 아침 우리는 다른 가족과 함께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그날은 유난히 날씨가 좋았다. 소풍 가는 길은 언제나 즐겁다. 2시간 남짓 달려 함경북도 회령시 창효리에 도착했다. 그곳엔 넓은 저수지가 있어 가까운 다른 지역 사람들이 소풍을 자주 오곤 했다.    우리는 강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남자들은 배를 타고 낚시하러 나갔고, 여자들은 불을 피워 고기를 구울 준비를 했다. 아이들은 물가에서 뛰어놀았다. 정말 즐거웠다. 오랜만에 나온 소풍이었고, 맛있는 고기를 먹을 생각에 더욱 신났다. 그러나 그 달콤한 시간도 얼마 가지 못했다.    저 멀리에서 사람 하나가 헐레벌떡 우리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모습이 선명하게 보일 때 쯤 우리는 놀랐다. 창효리 안전원(경찰)이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동무네 어디서 왔네?”라고 물었다. 우리 중 누군가가 답했다. 안전원은 숨을 가다듬고 “지금 당장 짐 싸서 돌아가라. 당에서 중대발표가 있다. 그러니 빨리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9살 소년 ‘안전원’이라는 꿈을 포기하다  북한 안전원.  북한에서 안전원이라는 직업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물론 국가안전보위성이 그 위에 있긴 하지만 직접적인 주민 통제는 안전부에서 한다. 나도 어린 시절 안전원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9살에 그 꿈을 접었다. 북한에서는 개인의 능력보다 그 집안 출신 배경을 우선시한다.    당시 꿈을 포기해야만 했던 이유는 이랬다. 1997년 추석으로 기억한다. 군복무 중이던 막내 삼촌이 휴가를 받고 집에 왔다. 제대를 앞둔 삼촌은 입당(조선노동당 가입)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음식을 준비해 산소에 갔다. 성묘를 마치고 둘러앉아 준비해 온 음식을 먹었다. 어른들은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 중 삼촌이 머뭇거리면서 할아버지에게 질문을 했다.    삼촌: “아버지 우리 집안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할아버지는 놀란 표정으로 삼촌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할아버지는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그거이 갑자기 왜 물어보네?”    삼촌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입당을 앞두고 하루는 부대 정치지도원(북한 군부대에서 당 비서 역할을 하는 사람) 호출로 사무실로 갔다. 그가 삼촌에게 문서 하나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 문서에는 우리 집안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고, 위에 빨간 글씨로 ‘적대계층’이라고 적혀 있었다. 북한에선 주민들을 계층별로 분류한다. 크게 3가지 계층이 있다.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 순이다. 핵심계층은 해방 전 김일성과 함께 싸운 사람들과 그 자녀들, 6·25 전쟁 당시 북한을 위해 큰 공을 세운 사람들로 나눌 수 있다. 동요계층은 일반 주민이라고 보면 된다. 적대계층은 지주나 자본가의 자녀나 월남 인사가 있는 가족, 또는 김일성과 북한 정권에 반대되는 사람들이다. 적대계층에 들어가게 되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과 그 자손들까지 출세를 하지 못하고 평생 힘든 노동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집안이 적대계층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담배를 말아 피우시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시던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얘기는 이랬다. 집안 대대로 평양 중심부에서 살았지만 할아버지 동생, 즉 나의 작은할아버지로 인해 함경북도 산골짜기로 추방당했다. 1950년대 김일성이 반대세력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시기 작은할아버지는 친구들과 몰래 소련(러시아)을 다녀왔다. 당시 작은할아버지의 친구들은 소련파에서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다. 작은할아버지와 친구들은 무사히 다녀왔다. 이후 친구 중 한 명이 북한 정권에 발각되면서 작은할아버지도 감옥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모진 고문에 시달리던 작은할아버지는 감옥에서 운명을 달리하셨다. 그 일로 인해 당시 평양중앙검찰소(한국의 검찰청)에서 고위직에 종사하시던 할아버지는 직위를 박탈당하고 온 가족이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로 몰려 추방당했다.      ‘8월 종파사건’에 연루된 집안    작은할아버지는 ‘8월 종파사건’에 연루된 것이었다. 1955년 4월,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은 자신이 주도하고 있던 대부분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것을 주문 받았다. 귀국한 김일성은 노선을 수정하지 않았다. 곧이어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난한 연설이 공개되자 김일성은 3차 당대회를 앞두고 비공개 석상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 일부가 과도한 행보를 보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발언을 해야만 했다. 개인숭배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에둘러 시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을 벗어나 동유럽과 이른바 비동맹 외교를 추진하려는 계획을 확정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연안파와 소련파는 김일성이 위기에 몰려 있다고 판단하고 망설였던 계획을 꺼내 들었다.    김일성이 동유럽을 순방하는 동안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를 통해 김일성의 당 위원장 자리를 박탈하고 내각총리만을 유지하도록 한다는 것이 연안파와 소련파의 계획이었다. 김일성을 실각시킨다는 것도 아니고 권한을 일부 제한한다는 계획을 합법적인 방법, 즉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결정한다는 대목에서는 실소를 자아낼 수밖에 없다.    우선, 연안파와 소련파가 합작을 했지만 중앙위원회서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김일성의 만주파와 그에 우호적인 위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적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면서 김일성이 외유 중일 때 자신들의 계획을 밀어붙이면 중앙위원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이 연안파와 소련파의 정세인식 수준이었다.    1956년 8월 2일로 계획되어 있던 중앙위를, 김일성이 급거 귀국하자 강행하지 못하고 8월 30일로 연기한 것은 치명적이었다. 전원회의에서 연안파의 윤공흠이 안건에도 없는 정치연설을 통해 김일성의 경제정책 오류와 개인숭배를 비판했지만 강제로 끌려 나가고 말았다.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8월 중앙위 전원회의)이라고 부르는 이 반나절의 에피소드로 연안파와 소련파는 영원히 사라졌다.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우리 집안이 평양에서 살다 내려온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로 몰려 추방된 것은 모르고 있었다. 삼촌도 적지 않게 놀란 표정이었다. 이후 할아버지는 명예회복을 위해 중앙당에 상소 편지도 보냈고, 여러 차례 평양을 방문해 직접 소명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북한정권은 할아버지를 평양으로 들여놓지도 않았다고 한다.    얼굴도 보지 못한 작은할아버지의 잘못 아닌 잘못으로 인해 한 소년은 꿈을 포기해야 했다. 적대계층의 집안은 대대손손(代代孫孫) 출세를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북한 사회 원리를 너무 일찍 알게 된 나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부모님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자식에게 공부를 시켜 좋은 학교에 들어간다고 해도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가족이 탈북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남한에 정착해 아버지는 “니들 때문에 이곳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당신이 겪은 수모와 고통의 고리를 자식들 대에 끊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위대한 령도자 사망  김정은 사망 소식을 들은 북한 주민들이 평양 만수대 김일성·김정일 동상 앞에서 통곡을 하고 있다.  우리는 안전원의 명령에 따라 짐을 챙겨 돌아왔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길에 다니는 사람들 모두가 울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우리는 도착하기 바쁘게 각자 집으로 향했다. TV에서는 이미 김일성 사망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리춘희: “우리의 전체 노동계급과 협동농민들, 인민군 장병들과 청년학생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와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와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인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1994년 7월 8일 2시 급병으로 서거했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온나라 전체 인민들에게 알린다.”    충격적이었다. 어머니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 가족은 서둘러 옷을 차려 입고 분향소를 찾았다. 극장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추모객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들은 모두 통곡을 하며 김일성을 불러댔다.    나는 극장 앞에 놓인 김일성 사진 앞에 꽃을 놓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앞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슬퍼서 운 것이 아니라 옆에서 어른들이 우니까 나도 운 것 같다. 한참을 울다 보니 눈물이 나지 않았다. 엎드린 채 옆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나를 꼬집었다.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으나 우는 시늉이라도 내야 했다. 나는 분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추모는 여러 날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어린 나의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선물’이었다. 북한 정권은 매년 김일성·김정일 생일에 아이들에게 사탕 과자 등 간식을 선물했다.    나를 비롯한 북한 어린이들은 이 선물을 김일성이 준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이 죽으면 선물을 더 이상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김일성의 죽음이 슬픈 것이 아니라 선물을 줄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에 더 눈물이 났다. 선물은 태어나서 출생신고를 하는 순간부터 11살까지 모든 어린이에게 제공된다. 이것이 북한의 선물정치다. 아니 세뇌교육의 시작이다. 이렇게 태어나서부터 세뇌교육을 시키면서 김일성에게 충성을 하게 만든다. 이 같은 세뇌교육이 북한주민들로 하여금 김일성을 신(神)으로 믿게 만들었다. 북한 주민들에게 신의 죽음은 충격 그 자체였다. 당시 충격에 심장마비로 인해 죽은 사람도 여럿 있었다. 1994년 여름엔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 북한정권은 이것을 이용해 김일성의 죽음을 하늘도 슬퍼 울고 있다고 선전했다. 나는 그 선전을 믿었다.    북한 정권은 김일성 사망 이후 3개월을 애도기간으로 정해 놓고 유희, 오락, 술, 노래 등을 금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숨어 몰래 술을 마시다 걸려 정치범 수용소에 간 경우도 있다. 특히 인민무력부 간부들 중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적발돼 공개처형당한 사례도 있다.      김일성 사망 미스터리… 김정일 암살설까지  북한 김일성·김정일 부자.  김일성이 죽은 뒤 북한에서는 이상한 소문들이 돌았다. 김일성이 치료만 받았으면 살 수 있었으나 김정일이 아버지를 죽음의 길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처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유언비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한에 와서 보니 그것이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다. 물론 정말 김정일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는 본인만 알 것이다.    당시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버지의 죽음을 방치하고 있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물론 주민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돌았다. 만약 이것이 알려지게 되면 관련자들은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소문은 이랬다. ‘김일성이 묘향산 휴양소에서 쓰러졌는데 그때라도 직승기(헬기)를 띄워 평양으로 이송했다면 김일성은 살았을 것이지만 김정일의 지시로 직승기는 뜨지 않았다’는 것이 소문의 전말이다. 근거는 없다. 그냥 당시 북한에서 떠돌아다니던 소문일 뿐이다.    남한에 온 뒤 우연히 2016년 1월호 《월간조선》 ‘김일성 심장 주치의 “김정일(金正日)은 김일성의 죽음을 유도, 방치했다”라는 기사를 보고 놀랐다. 북한에서 소문으로 돌았던 이야기를 기사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기사의 내용을 일부 인용한다.     김일성의 죽음에는 사망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늘 ‘의혹’이라는 말이 따라다닌다. 그 의혹의 중심에 아들 김정일(金正日)의 이름이 항상 따라다니는 것도 마찬가지다. 당시 사실상 북한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의 권력 전면 재(再)등장을 두려워해 모살(謀殺)했다는 것이다. (중략) 김정일은 1974년 2월 13일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위 정치위원이 된다. 김일성의 후계자가 된 것이다. 김정일은 1980년 10월 개최된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위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이 됨으로써 김일성의 후계자로 확정되지만, 대부분의 북한 전문가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추대된 1974년부터 사실상 실권을 행사해 왔다고 보고 있다. 이런 상황을 근거로 북한 관련 정보 소식통들이나 전문가들은 김일성 사망의 배경으로 김일성 사망 때까지 20여 년간 사실상 북한을 통치해 오던 김정일이 아버지의 재등장이 가시화하자 자신의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죽음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주장을 제기해 왔던 것이다.    기사에 보면 김정일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말에 신빙성이 있다. 특히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 직후 빠르게 자신에 대한 우상화를 시작했고, 곧바로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해 신이 됐다. 여러 가지 정황을 놓고 보면 김정일이 권력에 대한 야욕으로 인해 김일성을 죽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날의 기억…    1994년 7월 8일 한 독재자의 죽음. 지금도 가끔 이날의 일들로 인해 악몽을 꾼다. 24년 전 그곳에선 아직도 한 소년이 커다란 영정사진 앞에 엎드려 억지로 울고 있었다. 울어야 했다. 울지 않으면 나로 인해 가족이 피해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를 꼬집으면서까지 울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슬프지 않지만 슬픈 척해야 하고, 울지 않았다고 처벌하는 사회. 그곳이 북한이다.    2011년 12월 김정일도 죽었다. 북한은 또 다시 특별방송으로 이 소식을 알리고, 남한 언론들은 대서특필했다. 김정일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북한 전역이 또 다시 울음바다가 됐다. 길거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통곡하는 주민, 평양 만수대 김일성·김정일 동상 앞에서 김정일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친구가 물었다.    친구: “자기들을 억압하던 사람이 죽었는데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니야? 근데 왜 저렇게까지 우는거야? 저게 가능해?”    가능하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배웠다.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사는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북한에서는 가능하다. 설령 슬프지 않아도 울어야 한다. 울어야 산다. 그리고 즐겁지 말아야 하면 즐겨서도 안 된다. 또 김씨 일가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서슴없이 바치라고 강요한다. 그곳이 북한이다.(계속)⊙

김동연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전용차량, 캐딜락 원. 사진=구글 검색   지난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렸다. 남과 북의 양 정상은 차량을 타고 회담장인 판문점으로 이동했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의전용 차량으로 벤츠를 애용해 왔다. 이미 김정일은 벤츠 애호가로 알려졌을 만큼 여러 대의 벤츠를 보유하고 있다. 이번 판문점회담에 김정은이 타고 나타난 차량은 벤츠의 최상위급에 방호기능을 더한 차량이다.    이 차량은 2010년경 북한으로 수입된 차량으로 알려졌다. 당시 북한은 미화로 약 310만 달러어치, 우리 돈 약 35억원에 달하는 외제차량을 북한으로 수입해 갔다. 이 차량 목록 중에는 독일 아우디의 최고급 수퍼카인 R8도 포함됐다. R8은 미드십엔진(Midship engine)의 차량으로 엔진이 차량 중앙에 장착된 고성능 차량이다. 당시 수입된 모델은 기존 R8의 엔진인 V8을 V10으로 업그레이드한 모델로 추정된다. 일각에서는 아우디 R8 외에 아우디의 최상급 스포츠세단인 RS6 내지는 스포츠쿠페 RS5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종합하자면, 북한이 당시 유럽의 최고급 사양의 차량을 대거 수입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10년 수입된 차량 중 하나가 바로 이번 판문점 정상회담과 싱가포르 미북정상회담에 등장한 벤츠 S600 풀만가드(Pullman Guard)다. 풀만가드에서 풀만(Pullman)은 벤츠의 롱바디 타입의 세단을 의미한다. 일반 세단보다 더 길게 만든 것이다. 가드(Guard)는 총격 등을 막아내는 방호능력을 탑재함을 의미한다. 즉 풀만가드란 리무진 형태의 세단에 방호능력을 갖췄다는 말이다.      김정은 벤츠의 성능과 김정은의 휘장   미국은 대통령 전용 마크를 자동차의 측면에 부착한다. 사진=구글 검색  김정은이 판문점에 타고온 벤츠 풀만가드는 사용자 주문 형태의 차량으로 옵션 등에 따라 값이 달라진다. 기본급 차량의 가격은 12억~15억원 정도다. 김정은의 차량은 2011년형 정도의 차량으로 벤츠가 마이바흐 라인업을 구축하기 이전 모델로 W221 기반이다. 김정은의 벤츠 풀만가드는 최상위 모델인 S클래스 롱바디의 리무진을 베이스로 만든 차량이다. 따라서 차량의 길이부터가 6356mm로 6m에 육박하는 초대형 세단이다. 엔진은 V12 트윈터보다. 최대출력은 510마력으로 웬만한 수퍼카에 달한다. 실린더가 12개이니 당연히 고배기량인 5500cc다. 엔진의 최대 RPM은 6000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토크밴드는 1900~3500RPM에 맞춰져 있다. 의전차량의 특성상 중저속 주행이 많아서 비교적 중저속 구간에서 최대 토크를 낼 수 있게 엔진을 설계한 것으로 보인다. 차량의 크기도 크기지만 방탄으로 설계되다 보니 차량의 무게만 5톤에 가까운 4500kg이다. 해외 벤츠 관련 포럼 등을 통해 확인해 본 바에 따르면 제로백은 약 7.9초로 알려졌다. 시속 0km에서 80km까지 가속은 5초대로 알려졌다.    이 차량의 독특한 점은 전륜부 브레이크에는 트윈 캘리퍼(twin-caliper)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캘리퍼는 브레이크 디스크를 움켜쥐어 마찰로 차량의 바퀴를 멈추게 하는 역할을 하는 부품이다. 일반적인 차에는 바퀴당 1개의 캘리퍼가 장착된다. 그런데 이 풀만가드에는 전륜 바퀴당 두 개의 캘리퍼가 장착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류부에는 총 2쌍의 캘리퍼가 있다. 그만큼 무거운 무게를 감당해 낼 제동력을 가졌다는 뜻이다.    방호 측면에서는 웬만한 권총부터 돌격소총까지 막아낸다. 또한 수류탄 공격이나 급조폭발물(IED)도 막아낼 수 있다. 폭발물에 의한 화재가 발생하지 않도록 연료탱크는 특수 보호막으로 싸여 있다. 심지어 외부 폭발 등으로 연료탱크가 관통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연료탱크가 폭발하지 않도록 설계됐다. 연료탱크가 유사시 폭발되지 않고 감싸지는 물질로 제작됐다.    차량 내부에는 비상용 안전장치가 탑재되어 있다. 비상버튼을 누르면 차량 외부로 위험을 알리는 알람이 작동되고 차량 외부에서 침입하지 못하도록 잠금장치가 작동된다. 차량의 창문을 내리는 전원은 차량의 중앙전력장치에서 분리된 별도 시스템으로 작동되어 VIP가 유사시 언제든지 창문을 내리고 올릴 수 있다. 차량 내부의 인터폰을 통해 외부로 연락을 할 수도 있다.    이 차량의 측면에 북한 김정은 위원장 전용 휘장이 장착됐다. 금색 내지는 구리색으로 보이는 휘장인데 이것은 북한 최고지도자를 상징하는 마크다. 김정은의 차량에는 이 마크가 장착된다. 국내 언론에서는 이 휘장을 특별하다며 여러 차례 보도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휘장의 원조는 미국이다. 미국 대통령의 차량인 캐딜락에도 장착된 것이다. 캐딜락의 측면에는 미국 대통령을 상징하는 휘장, ‘Seal of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를 장착한다. 날개를 펼친 독수리 그림을 따라 이 영문이 동그랗게 둘러싼 모양이다. 북한이 미국의 의전차량을 흉내 내어 장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오래전부터 이런 휘장을 의전차량에 장착해 왔다. 북한은 이런 휘장을 김정일 시대에는 부착하지 않다가, 김정은 집권하에 자신의 의전차량에 부착하기 시작했다.      남북회담에 나온 김정은의 새로운 벤츠, 지바겐   지난 4월 27일 판문점에 등장한 북한측 벤츠 SUV, 지바겐. 사진=방송 캡처  지난 1차 판문점 남북회담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김정은이 타고 온 차량이 아니라, 김정은을 수행하기 위해 함께 온 차량들이다. 특히 김정은의 벤츠 앞에서 길을 터주는 호위하는 차량이 눈에 띈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SUV 인 지바겐(G Wagon)이다. 이 차량에는 김정은이 차에 오르고 내릴 때 문을 여닫는 역할을 맡은 수행원이 탑승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이 탑승한 벤츠 풀만가드의 앞에서 길을 먼저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해당 지바겐은 전면부 디자인에 주간등(LED)이 탑재되어 페이스 리프트를 거친 모델로 2012년 이후에 생산된 것이다. 따라서 차량의 연식은 2014년식 정도로 추정된다. 차량의 등급(Trim)은 G클래스 중 G500으로 보인다. 5500cc 8기통 가솔린 엔진을 장착하여 최고출력 약 390마력(2014년식 북미형 기준)을 뿜어낸다. 차량의 무게는 약 3톤이다. 몸집에 비해 비교적 날렵하여 제로백은 약 6초다. G500은 북미형 기준으로 환산하면 가격이 약 1억4000만원 정도다. 국내에서는 이 모델보다 상급 모델인 G63 AMG가 약 2억원 정도에 판매되고 있다.    G500의 연비는 약 5~6km/L정도로 그리 좋지 않다. 차량의 목적이 험로주파 등을 위해 개발되어 강한 힘을 토대로 거구의 몸집을 움직인다, 북한이 가져온 지바겐에 방호능력을 탑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북한은 장기적인 대북제재를 받고 있는 와중에도 벤츠의 최상급 SUV를 가져왔다는 것은 그동안 김정은의 호화생활에는 문제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북한이 보유한 지바겐이 어느 국가에서 구매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국시장에서 판매하는 모델을 북한으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싱가포르에 나타난 김정은의 새로운 벤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것과 동일 차량   싱가포르에 도착한 김정은 전용차 행렬, 뒤에 마이바흐 62가 보인다. 사진=방송 캡처  지난 미북회담에서 김정은은 자신의 전용 벤츠를 수송기까지 동원해 싱가포르로 가져갔다. 그런데 미북회담에 앞선 남북회담에서는 공개된 바 없는 새로운 벤츠 1대가 추가로 공개됐다. 북한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싱가포르에서 숨겨 두었던 새로운 벤츠를 공개함으로써 북한의 경제력 등을 과시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미북회담에 앞서 국내외 언론은 북한이 경제적으로 상황이 좋지 않아 모든 회담 비용 등을 다른 국가에 부탁하고 있다는 식의 보도가 이어졌다. 북한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 만한 내용이 연거푸 나온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만회하고자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전용기를 대여받기는 했어도 항공기를 무려 3대나 가지고 싱가포르로 갔다. 이것은 미국의 규모에 준하는 것이다. 즉 북한도 미국과 대등한 수준임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숨겨 뒀던 벤츠의 최고급 모델인 마이바흐(Maybach)62를 공개했다.    이 차량은 미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의 S600 풀만가드 차량 바로 뒤에 따라붙었다. 이 차량은 2002년부터 2013년까지 생산된 차량으로 김정은의 차량은 2011년 모델로 추정된다. 이 차량은 벤츠가 마이바흐를 별도의 프리미엄 브랜드로 구축하여 판매를 하던 시절 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름조차 벤츠가 붙지 않고 단독으로 마이바흐로 불린다. 차량에 부착된 엠블럼도 벤츠가 아니라 전통적인 마이바흐 엠블럼을 부착한다. 이 마크는 영문 M자를 겹쳐 만든 형상을 하고 있다.    차량 가격은 기본형의 시작가가 약 5억원이며 실제 옵션 등을 추가하면 7억원에 육박할 수 있다. 마이바흐는 출시 당시 영국의 롤스로이스 등과 경쟁하기 위해서 모든 사양을 구매자가 주문하며, 대부분의 공정이 수작업으로 진행된다. 마이바흐만의 특이점은 지붕이다. 지붕에는 파노라마 선루프가 장착되어 있어 탁 트인 하늘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적용된 유리는 스마트 글래스로 평상시에는 반투과 형태지만 스위치를 눌러 전력이 흐르면 곧장 빛이 투과되는 투명으로 바뀐다. 마이바흐 62는 5500cc 자연흡기 V12 엔진을 탑재하여 제로백은 4초대에 불과하다.    안타깝게도 이 마이바흐는 너무 고가이기 때문에 판매량 저조로 2013년을 끝으로 단종됐다. 미국을 기준으로 2010년 판매된 마이바흐는 60여대에 불과했다. 이후 메르세데스 벤츠는 마이바흐를 흡수하여 최고급 라인업에 특화시켰다. 김정은이 가져온 이 마이바흐도 김정은이 직접 타고 다니는 S600 풀만가드와 마찬가지로 김정은 전용 휘장이 부착됐다. 이 차량의 방호능력은 파악되지 않았지만, 방호능력은 없는 것으로 추정한다. 회담에서 이 차량에는 김정은의 수행원 등이 탑승했다.    이 차량과 동일한 모델을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과 영화배우 배용준도 구매했다고 알려졌다. 국내에서는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대기업 및 중소기업 오너 중에서도 이 차량을 구매한 사람이 제법 있다. 한때 인터넷상에서 이 차량이 유명세를 탄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이 마이바흐와 접촉사고를 낸 경차 운전자의 사진이 온라인에서 퍼져 나가면서다. 당시 네티즌들은 댓글로 ‘저 경차 오너는 앞으로 평생 저 차 수리비를 물어줘야겠다’는 등의 내용이 올라왔다.      2차 남북회담에 등장한 문재인 대통령의 새로운 은색 벤츠   제2차 남북회담때 문재인 대통령이 타고간 은색 벤츠. 사진=방송 캡처  반면, 문재인 대통령이 타고 간 벤츠는 김정은의 벤츠보다 신형인 W222 기반의 차량으로 메르세데스 마이바흐 S600 가드(Guard)다. 이 차량은 풀만(Pullman)이 아니라 그냥 가드 모델로 차량의 길이가 풀만가드보다는 짧지만 우수한 방호능력을 갖춘 차량이다. 길이가 짧기 때문에 실내 공간이 적어 편의성 면에서는 김정은의 의전차량보다 떨어지지만, 무게가 상대적으로 가볍고 기동성이 우수하다는 장점이 있다. 차량의 가격은 7억~12억원 정도다. 문재인 대통령은 다소 기습적이라고 볼 수 있었던 제2차 회담에서는 새로운 벤츠를 타고 갔다. 이 차량은 지금까지 청와대의 의전행사에서는 노출되지 않았던 차량이다. 차량의 색상이 은색이었는데, 의전용이라 보기 힘들고 긴급 투입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이 차량에 대한 언론의 노출도 최소화시켰다.    앞선 1차 회담에서는 두 정상이 차량을 타고 회담장에 들어오는 모든 장면을 보여줬지만, 이번에는 수초에 불과한 매우 짧은 영상만 공개됐다. 아마도 언론의 분석 등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공개된 모습을 토대로 분석해 본 결과, 문재인 대통령의 차량은 앞선 검은색 벤츠 마이바흐 가드와 동일한 차량이며 색상만 은색으로 차이를 보인다. 방호능력 면에서도 동일하다. 방호능력은 문재인 대통령의 벤츠가 VR10급이며 김정은의 벤츠는 VR9급으로 남측 차량이 한 단계 위급이다. 방호 면에서 둘의 차이는 7.62X54mm 저격용 탄을 막을 수 있는지 여부다. 문 대통령이 갑자기 은색 벤츠를 타고 간 배경에는 여러 추측이 있으나, 일각에서는 국내외 여론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사전에 두 정상이 만난다는 사실을 모르게 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두 차례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벤츠를 고수했다. 청와대는 벤츠 외에도 에쿠스(제네시스 EQ900) 등이 있지만, 벤츠를 타고 간 것이다. 이는 북한측이 벤츠를 타고 오기 때문에 급을 맞춘 것이다. 과거 고 노무현 대통령도 판문점을 지나 북한을 갈 때 평소 애용하던 BMW의 최상급 의전차량인 BMW 7 시리즈 시큐리티 모델을 벤츠 S클래스로 바꿔 타고 간 바 있다.      트럼프의 파격 제안, “내 차 타 볼래?”   캐딜락 원의 조수석 문이 열린 모습에서 문 두께가 보인다. 사진=방송 캡처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로 공수해 간 전용차량, 리무진 원은 캐딜락 원(Cadillac One)으로도 불린다. 전용기인 에어포스원처럼 차량을 부르는 것이다. 이 차량의 방호능력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정확한 제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꾸준히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이번 행사에서 미국은 북한과 달리 방송을 의식하여 트럼프 대통령이 차에서 내리는 장면을 다 찍지 못하게 통제했음을 알 수 있다. 김정은이 차에서 내리는 장면은 다 공개되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내리는 장면은 카메라의 각도상 문이 열리는 안쪽을 잘 찍지 못했다. 아마도 보안 등의 이유로 사전에 통제한 것으로 보인다. 차량의 문 두께 등을 보면 김정은 위원장의 풀만가드보다도 더 두꺼워 보인다. 성인 남성의 허벅지 두께는 되어 보인다.    탱크킬러라 불리는 RPG-7 정도의 대전차 로켓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장갑(裝甲)이 상당히 두껍다. 공개정보를 토대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장갑은 티타늄과 강철 등을 섞어 만들었고, 심지어 세라믹도 함유됐다. 세라믹을 장갑에 섞은 이유는 로켓포를 비롯한 대구경 탄환이 탄착 후 열을 발생시켜 장갑면을 뚫고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차량 내부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혈액형과 동일한 피도 가지고 다닌다. 유사시 긴급 수혈을 위한 것이다. 특히 트럼프의 혈액형은 구하기 어려운 Rh- 인 이유도 있다. 이외에도 차량 운전자가 사용하는 선바이저 등에는 실시간으로 통제센터로부터 각종 정보를 받고 연락을 취하는 기능도 탑재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전장의 탱크 운전사가 가지는 기능과 유사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다. 이 때문에 이 차량의 조수석 등에는 경호원이 유사시 사용할 수 있는 중화기가 상시 탑재되어 있다. 따라서 휴대하고 있던 권총이 여의치 않으면 즉각 문에서 기관총을 꺼내 쏠 수 있다. 이 기관총이 발사할 수 있는 무장은 유탄과 최루탄으로 알려졌다. 차량의 무게는 김정은의 벤츠보다 무거운 약 5톤에서 6.5톤에 달할 것으로 추정한다.    이번 회담에서 김정은이 트럼프의 차량에 관심을 보이자,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차를 타 볼 것을 권유하는 듯한 장면도 나왔다. 다소 즉흥적인 성격의 두 정상이 예정에 없던 문답이 오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정은이 실제 차에 오르지는 않았다. 만약 김정은이 차에 올랐다면, 자신이 탑승 후 차에 남길 지문 등 신체정보를 염두에 둔 것일 수 있다. 참고로, 트럼프가 타고 다니는 의전차량은 트럼프 당선 이후인 2016년경 백악관이 교체한 것으로 기존 모델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한 것이다. 앞서 오바마 정부에서 사용하던 캐딜락은 한 행사에서 턱이 높은 지역을 지나다 차가 걸려 차를 긴급히 교체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 장면을 사람들이 SNS에 올리면서 한때 백악관이 체면을 구긴 바 있다.       김정은 전용차 주변 경호원들이 함께 뛰는 이유는?    김정은 전용차와 트럼프 전용차의 가장 큰 차이는 디코이(Decoy)다. 디코이는 동일한 차량, 항공기, 헬기 등에 사용하는 것으로 의전 및 경호용 유인물(誘引物)을 뜻한다. VIP가 탑승하는 탈것과 동일한 물체를 하나 더 준비함으로써 유사시 공격자의 입장에서 어느 차량에 실제 VIP가 탑승했는지 헷갈리게 하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대부분의 대통령 전용 탈것은 1대 이상 만든다. 보통은 3~5대까지 만들고 한 번에 보통 3대 내외를 운용한다. 이번 미북회담장에 등장한 트럼프 대통령도 2대가량의 캐딜락 원으로 이동했다. 어느 차량에 트럼프가 탔는지 구분이 어렵다.    반면, 김정은은 이러한 디코이를 구비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 김정은 전용차량이 12억원 이상을 호가하는 고가인 탓이다. 이 때문에 항시 1대의 김정은 차량이 다른 벤츠 차량과 이동하는데 생김새가 달라 구분이 쉽다. 즉 김정은이 탄 차는 항상 노출되어 있고 어느 차에 탔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런 점을 알고 있는 북한이 경호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김정은 차량 주변에 10여명의 경호원이 함께 뛰는 형태로 방어하는 것이다. 공격자의 입장에서 고속으로 주행하는 차량은 공격이 어렵지만 저속에서는 차량에 대한 사격 등이 용이해진다. 이때 북한은 경호부대를 투입한다. 결국 이것은 최고의 경호법이 아니라 똑같은 차를 2대 굴리지 못하는 김정은의 어쩔 수 없는 최고의 차선책인 셈이다.⊙

정광성

  선배와 점심을 먹게 됐다. 선배가 물었다. “자유와 평등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할래?”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유’를 선택했다. ‘자유’, 참으로 친근하면서도 낯선 단어였다. 10여년 전까지 ‘자유’라는 단어조차 몰랐던 나다. 그러던 내가 자유를 처음 맛본 것은 탈북과정에서다.    2006년 3월이었다. 중국 기차 내부는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각종 음식물 쓰레기들과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난 몸이지만 차마 쓰레기 더미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는 나의 귀에 “꼴에 자존심은 있나 보네”라는 말이 날아와 꽂혔다. 브로커의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린 마음에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북송되면 18살 어린 내가 겪게 될 온갖 수모와 창피를 생각하니 오금이 저렸다. 순간 어떠한 장면이 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탈북과정에서 처음 맛본 ‘자유’의 달콤함    중학교 3학년(15세) 때로 기억한다. 2교시가 끝나고 전체 집합 종이 울렸다. 반 친구들과 나는 조금 놀랐다.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쉬는 시간에 학교 전체가 모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전체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왔고, 뒤에 한 학년 선배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뒤를 따랐다. 교장은 연단에 올라서서 화난 목소리로 연설을 했다. 정확한 말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충 이랬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만들어 준 좋은 나라에서 학생에게 맡겨진 공부는 하지 않고 자본주의 썩어빠진 사상에 물들어 자신의 부모와 학교 친구들을 버리고 중국으로 도주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자리에 모인 교사들과 학생들은 모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한 학년 선배가 몰래 중국으로 넘어갔다가 잡혀 북송돼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고 나와 학교로 돌아온 것이었다. 북한은 살인죄와 체제 비판죄가 아니면 미성년자들은 감옥에 보내지 않는다. 그 선배도 미성년자여서 풀려났지만 감옥보다 큰 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장은 연단 밑에 있는 선배를 위로 불러 세웠다. 그 뒤로 교장은 해당 선배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교장은 교육자로서의 체통을 버리고 이성을 잃은 듯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교장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북한에서 교장이라는 직책의 권위는 높았다. 그런데 학생 한 명으로 인해 시내 중심가 학교 교장에서 시골 학교 교장으로 좌천되게 생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교장은 그 사건으로 인해 600여 명이 재학하던 학교에서 100명도 안 되는 시골 학교 교장으로 내려갔다.      호상비판  탈북자를 막기 위한 북한측의 경계가 삼엄해지고 있는 가운데 신의주 근교의 압록강 둑을 걸으며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북한 병사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인다.  교장의 비판이 끝나자 선배는 전교생 앞에서 자기비판을 시작했다. 그 선배는 고개를 숙인 채 울면서 1시간 남짓 자신의 잘못에 대해 자기비판을 했다. 이어 학급별로 한 명씩 연단에 나와 그 선배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먼저 같은 반 친구가 나왔다.    “먼저 같은 반으로서 동무가 이렇게 되기까지 잘 이끌지 못했던 저와 담임선생님 이하 반 친구들은 깊이 반성 중에 있습니다. 평소에 동무의 잘못을 보고도 눈감아 줬던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충호 동무를 악의 구렁텅이에 빠뜨렸습니다. 깊이 반성합니다. 호상(互相)비판을 하겠습니다. 충호 동무는 당과 수령님의 말씀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나라와 가족을 배반하고 중국으로 도강을 했습니다. 이것은 반역행위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학교 청년동맹(15세부터 가입할 수 있는 북한의 조직) 차원에서 큰 벌을 내릴 것을 제기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 식량을 구하러 갔던 발걸음이 반역으로까지 번졌다.    후배들은 더 심했다. 1학년 학생이 연단에 올라가 이렇게 말했다. “동생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선배가 미국과 남조선 놈들의 책동에 놀아나 나라와 가족을 배신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선배로 보지 않고 반역자로 보겠다. 이렇게 머릿속이 썩어빠진 사람은 우리 학교에 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 당장 학교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학년생뿐만 아니라 다른 후배들도 선배를 비판하기에 열을 올렸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가능하다. 학교 선배가 아니라 자신의 부모까지도 대중 앞에서 비판할 수밖에 없는 곳이 북한이다. 성(姓)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름은 ‘충호’였다. 외모가 출중해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선배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 선망의 대상에서 증오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그 선배의 얼굴이 생각나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나는 브로커의 지시에 따라 의자 밑으로 들어갔다. 의자 밑은 생각보다 더 한심했다. 쓰레기와 먼지에 고약한 냄새까지 났다. 참아야 했다. 선양(瀋陽)을 출발해 4~5시간 정도를 그 상태로 이동했다. 브로커는 우리가 화장실을 자주 간다는 이유로 물도 주지 않았다. 쓰레기 더미 위에 누워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지금 내가 처해 있는 현실에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마치 사람이 아닌 동물이 된 것 같았다. 고향에 있을 때 부모들을 잘 만난 덕에 힘든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잘살지는 않았지만 하루 세끼 밥은 굶지 않고 조금이었지만 부족함 없이 자랐다. 그러다 어느새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끝내는 탈북길에 올랐다. 아니, 정확히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넘어왔다.      아빠 찾아 삼만리    북에서 운전기사로 일하시던 아버지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일을 그만두고 장사의 길에 오르셨다. 오직 북한 정권을 위해 일하시던 아버지가 장사를 시작한 것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2004년 돌연 장사를 하기 위해 어딘가로 떠난다는 말씀을 하시고 집을 나선 이후 한동안 아버지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야 아버지 소식을 알게 됐다.    중국에 계신다고 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2년 전 다른 지역으로 장사를 떠나신 아버지가 중국에 있다니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이후 아버지가 보낸 브로커를 따라 두만강을 건넜다. 이것이 탈북의 이유였다.    순간 중국 공안의 발소리가 났다. 신분증 검사를 위해 우리 일행들 쪽으로 다가왔다. 신분증 검사는 선별적으로 이뤄졌다. 나는 긴장되어 몸을 더욱 움츠렸다. 그곳에서 발각되면 100% 북송된다. 돌아가면 감옥에는 가지 않겠지만 한 학년 위였던 충호 선배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죽기보다 더 싫었다. 다행히 공안은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칸으로 이동했다. 안도의 한숨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소리 내어 울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더욱 서러운 것은 배고픔이었다. 점심이라곤 빵 두 개로 해결하고 기차에 올랐다. 저녁 때가 되자 기차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그러나 우리를 인솔하는 브로커는 잠을 잤다. 자는 척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다음 목적지까지 우리를 무사히 안내하는 책임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돈을 최대한 아껴 자신들의 마진을 남기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다.    우리 일행 중에는 아기 어머니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이 어머니에게까지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았다. 일행 중 한 분이 참다못해 밥을 먹자고 말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기차에선 위험하니 베이징에 도착해서 먹자고 했다.    그렇게 밥도 먹지 못한 채 4시간을 의자 밑에서 버텼다. 몸이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 화장실이 급해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브로커에게 화장실이 급하다고 신호를 보냈지만 그는 조금만 참으라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참아 보기로 했지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무작정 기어가 의자 밑을 탈출했다. 그곳을 나오는 순간 나는 다른 세계를 보았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 지를 뻔했다. 같은 기차 안이지만 음식물 쓰레기 썩는 냄새와 먼지투성이로부터의 탈출은 환희 그 자체였다. 특히 좁은 의자 밑에서는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지만 그곳을 나온 순간 나의 몸은 자유를 찾은 것이다. 그때 그 감정과 느낌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나라 잃은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  2007년 11월 17일 중국에서 라오스로 밀입국하던 성룡이가 힘에 겨워 울고 있다. 8살 성룡이에게는 장장 18시간의 산행길이 힘겹기만 하다. 사진=한용호 AD  화장실에 다녀온 후 브로커는 다시 들어가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북한에서 억압받고 살아온 한 소년이 중국으로 탈출해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자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은 다시 그곳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됐다. 나의 투쟁으로 인해 다른 일행들도 의자에 앉아 편히 갈 수 있었다. 의자 밑과 위는 천국과 지옥 그 자체였다. 2시간 정도 의자에 앉아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원해서 한반도 북쪽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태어나 보니 김일성·김정일이 통치하고 있는 북한이었다. ‘나라 잃은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는 속담이 있다. 당시 내 처지가 그랬다. 전쟁으로 인해 나라를 빼앗기거나 잃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켜 줄 나라가 없었다.    우리는 늦은 밤이 돼서야 베이징에 도착했다. 도시는 불빛들로 화려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일행은 역사 근처에 방을 잡고 식사를 했다. 꿀맛이었다. 그날 밤 나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기차에서 겪은 일부터 태어나 북한에서 받은 교육들, 내가 본 중국의 모습 등 많은 생각을 했다. 내 머릿속을 가장 지배했던 것은 북한 체제에 대한 반감이었다. 태어나서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우상화 교육, 즉 세뇌교육을 통해 당에 충성하는 소년으로 자라 왔다. 하지만 내가 수년을 배워 온 것이 모두 거짓임을 알게 되자 더욱 화가 났던 것 같다. 뒤에 자세히 얘기를 하겠지만, 북한을 탈출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국이나 제3국에서 북한의 진실을 마주하면 내가 느꼈던 감정을 한 번씩은 느껴 봤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2006년 3월 북한을 출발해 같은 해 8월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중국과 제3국에서 보냈던 5개월은 50년보다 더 길었던 것 같다. 그동안 목숨을 잃을 아찔한 순간도 많았지만 또 행복한 날도 있었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일 것이다.    처음 아버지가 보낸 브로커와 두만강을 건너면서 중국에 계시는 아버지를 만나 함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북한 정권이 가장 싫어하는 탈북을 했다. 중국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이동하면서 창밖을 보게 됐다. 별천지였다. 북한에서 갓 넘어온 촌놈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브로커를 따라 개인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곳에서 아버지와 통화를 했다. 아버지는 한국에 계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중국 어느 지역에 있으니 그 아저씨(브로커)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 다음 날 나는 다른 브로커에게 넘겨졌다. 누군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를 따라가야 했다. 그 사람의 집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나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북한 출신들이 있었다. 신변상 그들의 이름을 밝힐 수는 없다. 그들도 나와 함께 무사히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꿈을 향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5개월간의 탈북  2009년 12월 9일 오후 제61차 세계인권선언일을 맞이하여 북한인권단체연합회 회원들이 서울 시청광장에서 한국정부와 UN의 북한 인권개선을 위한 적극 노력을 촉구하며 탈북 여성들이 중국에서 공안들에 잡혀 강제 소환되는 모습을 재현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검은 두건을 쓰고 밧줄에 묶여 공안과 북한 인민군에게 폭행당하는 모습을 재현한 사람들은 실제 북한에서 탈북한 여성들이다.  7일 뒤 나는 그들과 탈북 길에 올랐다. 우리는 브로커와 함께 옌지(延吉)의 한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선양까지 이동해야 했다. 3월 중순이지만 옌지 쪽에는 눈이 내리며 추웠다. 특히 우리는 다른 사람들 눈에 들지 않는 게 좋다. 특이한 행동을 해서도 안 되며 말을 많이 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거의 벙어리 수준이었다.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이동하는 중간중간엔 중국 공안들의 초소가 있다. 이곳에서 신분증 검사를 하게 되는데 이때 신분증이 없으면 잡히는 것이다. 나는 출발하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만약 공안에게 잡히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도 도망칠 것이다. 그러다 총에 맞아도 좋다. 북송은 절대 당할 수 없다는 각오인 것이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얘기지만 어떤 분들은 몸에 독약을 품고 떠난다고 했다. 만약 공안에 잡히면 약을 먹고 죽겠다는 각오인 것이다. 북송에 대한 탈북민들의 생각은 한결같다.    버스가 한참을 달리다 갑자기 멈췄다. 당황했다. 혹시 벌써 신분증 검사를 하나 싶어서 긴장감이 돌았다. 손에 땀이 나면서 입술이 말라 가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들도 긴장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공안은 오지 않았다. 창문을 통해 밖의 상황을 살펴보니 빙판길에 버스가 뒤집어져 있었다. 이로 인해 뒤의 차들이 발이 묶인 것이다. 상황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일행들에게 알려줬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공안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라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30분 지나서야 사고 차량을 치우고 다른 차들도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더 큰 산이 있었다. 3시간가량 달렸을까. 버스가 갑자기 또 멈췄다. 순간 ‘사고 때문인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하늘이 나의 기대를 질투라도 하듯 창밖으로 공안 초소가 보였다. 그것을 본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까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 꼼짝없이 잡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안은 버스에 올라탔고 앞쪽에서부터 신분증 검사를 시작했다. 어쩔줄 몰라 브로커 쪽을 보니 자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자는 것처럼 보였지만 긴장한 모습이 보였다. 공안은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 왔다. ‘만약 잡히면 뛸 수 있는 데까지 달아나 보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심판의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공안이 내 두 번째 앞쪽을 검사하던 중 버스 기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뭐라고 했다. 물론 중국어로 말했고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던 공안이 우리 쪽까지 오지 않고 버스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공안이 내리고 버스가 출발하자 온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나도 모르게 잠들고 말았다. 나중에 브로커에게 버스기사와 공안이 나눈 대화를 물어봤다. 이랬다.    버스 기사: “아까 오다가 버스가 사고 나서 1시간 지체됐다. 빨리 가야 하니까 대충 하고 보내 달라.”     공안: “대충하면 어떻게 하나. 제대로 해야 한다.”    버스 기사: “도착 시간 늦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냐?”    공안: “알았다 내릴 거다.”    대충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갔다.      ‘자유는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    이후 무사히 선양에 도착했고, 선양에서 기차로 베이징, 베이징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했다. 옌지를 떠난 지 꼬박 3일 만에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 도착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다른 브로커에게 인계됐다. 참으로 거래 물건 같았다. 둘이 전화로 만나 우리를 인계하는 순간 받는 사람은 위안화를 상대에게 건넨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 광경이 펼쳐진다. 참담하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우리는 또 다른 브로커에게 이끌려 그의 집(아지트)으로 갔다. 우리는 그곳에 15일 정도 묵은 뒤 제3국으로 가기 위해 중국 국경마을로 이동했고, 태국으로 입국했다.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까지 오는 과정은 다양하다. 내가 왔던 경로인 중국-태국-대한민국으로 오는 경우와 몽골을 거쳐 오는 과정, 캄보디아로 오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이 중에 어느 것 하나 쉬운 경로가 없다. 모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지금은 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얘기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벅차고 힘든 길이었다. 우리는 무사히 중국 국경을 빠져나와 태국으로 탈출했다. 태국에서 본격적인 대한민국 입국 절차가 시작됐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여권을 소지하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불법 입국했다는 의심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태국의 수도 방콕 난민수용소에서 3개월간 수용소 생활을 할지도 모른다. 방콕 난민수용소에 도착하면 유엔(UN)에서 나와 북한사람인지를 확인한다. 간혹 중국 조선족 사람들이 북한인으로 가장해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다음 절차는 대한민국 대사관 직원들이 나와 추가 신원조회를 하면 절차는 끝이 난다. 모든 인터뷰가 끝나면 여권이 만들어지고, 여권이 발급되면 대한민국으로 입국하게 된다.    한국에 와서 12번째로 맞는 여름 서울 상암동 사무실에서 글을 쓰고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소중한 것들을 잠시 잊고 산다. 나도 마찬가지다. 바쁘다는 핑계로 내가 소중하게 얻은 자유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던 것 같다. 내게 항상 있으니까. 언제라도 누릴 수 있으니, 나도 언젠가부터 자유가 당연한 것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자유는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각종 음식물 쓰레기와 먼지투성이 속에서 얻은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계속)⊙

도희윤

미·북 회담이후 북한의 비핵화 논의에 대한 본말이 전도되어 오히려 북한의 종전선언, 평화협정에 대한 공세가 더욱 가열차게(?) 진행되는 형국이다. 숨죽여 정세를 살펴보던 국내 종북 세력의 본격적인 행동도 북의 공세에 적극 부응하여 돌격대를 자처하려는 분위기가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제법 신바람이 난 낌새도 느껴지는데 점점 공세의 수위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종전선언, 평화협정은 사실 북한과 종북 세력의 전유물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유 진영은 내적으로는 통일선언, 다시 말해 6.25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한반도내 공산침략세력을 제압하고, 對 中共, 對 蘇聯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되어 남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작금의 과정이 너무나 개탄스럽지만 결코 원하는 바가 아닌 것은 아니다. 자유진영이 개탄스럽다고 하는 것은, 2천만 북한노예주민을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들과 같이 세계사에 유례없는 자유인으로 함께 번영할 기회를 놓쳐, 통일의 완수로 나아가지 못한 게 못내 안타까운 것이다.   또한 원하는 바라는 것은, 전쟁으로 인한 이산가족의 아픔, 전쟁 국군포로, 민간인 납치피해자등 전쟁의 종료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우리국민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는 기회로 여기기 때문이며, 전쟁이라는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면죄부를 주고자하는 것이 결코 아니기에,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진정으로 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말끝마다 내세우는 미군철수 등의 전제조건이 있듯이, 자유진영은 전제조건으로서가 아니라 반드시 해결 짓고 가야만 하는 국가적 책무로써 전쟁의 시작과 끝이 명확히 정리되기를 바랄 뿐이다.   구 소련의 기밀문서와 중국 공산당의 비밀자료에 모두 언급되어 있듯이, 6.25전쟁은 김일성의 치밀한 사전준비에 의해 야기된 민족적 비극이었다는 것은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다. 북침이니 남침유도설이니 이 모든 거짓선전은,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이 3일 만에 자신의 수도를 빼앗기는 전쟁을 미치지 않고서야 저지를 리가 만무하다는 차원에서도 이미 답은 나와 있지 않은가.   그리고 전쟁 수년전부터 ‘남조선에서 인텔리들을 데려올 데 대하여’라는 담화문을 통해, 공산정권의 잣대만으로 사유재산 몰수, 지주, 종교인, 친일파 등의 죄명으로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하여 부족한 전문 인력을 충원하려는 전시 납치계획까지 만들어둔 것을 보면, 얼마나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실행했는가는 명백히 드러난다.   실제 전쟁 시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납치된 인원들이 10만 여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유엔 인권조사위원회 보고서를 통해서도 익히 알려져 있는 바, 이들 납치피해자의 남아있는 가족들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6.25 전쟁을 끝내려면, 민간인 납치피해자 10만 여명에 대한 소재 파악과 생사여부, 북한에서의 생활, 남은 가족, 유해 송환 등이 모두 이루어져야하고, 납치로 인한 피해보상을 비롯한 가족들에 대한 위로와 사죄 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절규한다.   또한 북한에 억류된 전쟁 국군포로 가족들은, 아오지 탄광 등을 연연하며 죽지 못해 살아야했던 아버지의 원혼을 조금이나마 달래드릴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나서줄 것을 간곡히 호소하고 있다.   이런 자국민의 아픔들이 종전선언 협상과정에서 제대로 다뤄질 때, 비로소 새로운 화해와 협력, 평화로 나아가는 시작점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래의 글은 1950년 10월 피랍치인사가족회 대표단이 평양형무소 내벽에서 발견한 납북자의 무명시(無名詩)다. 이를 읽고서도 죄스러움이 남아있지 않는다면 ‘이게 나라냐’ 라는 비판으로부터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자유여, 그대는 불사조 우리는 조국의 강산을 뒤에 두고 홍염만장(紅焰萬丈) 철의 장막 속 죽엄의 지옥으로 끌려가노라 조국이여 UN이여 지옥으로 가는 우리를 구출하여 준다는 것은 우리의 신념이라...

도희윤

평북 동창리 서해미사일발사장, 평양인근 ICBM 발사장 해체의 소식과 미군 유해 55구의 송환으로 온 세계가 난리다.  그동안 꿈쩍 않던 김정은이 비핵화의 행동에 본격 돌입했다는 것이고, 그와 동시에 미국은 종전선언(終戰宣言)에 나서야한다고 연일 압박하는 형국이다.   필자가 느끼기엔 왠 뜬금없는 호들갑인가 여겨지는데, 우선 비핵화의 시작은 풍계리 핵실험장,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 등의 해체에서부터가 아니라, 신고부터 해야 하는 게 기본이다.   해체로 호들갑을 떠는 그곳은 말 그대로 실험장 내지 발사장이기 때문에, 실험이 끝났으면 치우는 건 당연한 것이고 이동식 발사대까지 모두 갖춘 마당에 외부 폭격에 노출된 발사장은 있어나 마나 한 게 아닐까.   문제는, 비핵화에 대한 자신들의 신고서를 먼저 작성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에 따라 구체적인 로드맵을 명확히 제시하는 게 순서일 것이다. IAEA의 복귀도 긍정적인 행동의 하나일 테고 말이다.   핵무기를 몇개나 어떻게, 어디에, 어느 정도의 성능으로 만들어 은닉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실체를 우선 보여주고, 향후 이를 국외 반출, 폐기 등을 어느 시기에, 어떤 방식으로, 어디에서 진행한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국제사회에 제시부터 해야 그때서야 비로소 비핵화의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 김정은은 영변의 냉각탑 폭파쇼와 똑같이 진짜 해야 할 일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온갖 보여주기 쇼로 자신들이 얻을 종전선언이라는 목표에만 집착하며 시간 끌기에 매달려있는 모습인데,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순서상 정확한 신고가 우선임에도 이를 뒤로 미루고, 현란한 해체쇼나 유해 송환 등의 생색내기에만 몰두하는 것은 분명 감춘 의도가 있을법하다.   결국 신고서를 제출하면 미국과 국제사회는 그동안 확보하고 있던 내역들과 비교 분석 할테고, 그러면 국제사회를 기만하려고 작정한 자신들의 속내가 빤히 드러날테니 그것이 무서워 이런 쇼로 덮어 보려는 게 아닐까.   여기에 놀아나는 한국은 더욱 가관이다. 핵무장한 적을 코앞에 두고 최전방인 비무장지대(DMZ) 내 감시초소(GP)의 철수 추진에서부터, 지휘부의 보신주의적 거짓말과 기회주의적 하극상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밑바닥을 보는 느낌이다.   북한은 내부 비밀강연에서 '핵은 선대 수령들이 물려준 우리의 고귀한 유산으로 우리에게 핵이 없으면 죽음'이라고 강조했다는데, 이것은 결코 핵 포기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한가지 우리가 명심해야하는 것은, 북한이 줄곧 주장하는 종전선언(終戰宣言)의 함의(含意)다. 지금 대한민국의 여론은 종전선언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출발한다.   세계사의 어떤 전쟁도 반드시 그 시작과 끝은, 누가 전쟁을 일으켰으며 얼마나 많은 피해가 발생했고, 이의 재발방지와 책임소재를 따져 그에 상응한 전후 배상 등의 대가가 따랐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은 지금도 6.25 전쟁의 침략당사자임을 부인하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미국을 비롯한 UN군의 참전이 애초부터 잘못된 내정간섭, 즉 한반도의 내전(內戰)에 부당 개입한 것으로 오히려 미국과 UN에게 6.25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려는 파렴치한 전략을 감추지 않고 있지 않은가.   비핵화의 순서가 잘못되면 모처럼 조성된 북한 핵무기의 폐기라는 절호의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며, 그릇된 종전선언(終戰宣言)은 6.25 전쟁의 국가유공자들과 UN참전국의 명예를 실추함과 동시에, 모든 전쟁의 책임을 공산세력의 침략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지킨 자유진영이 그대로 받아오게 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김동연

미국 재무부 산하 해외재산통제국(OFAC)이 적발한 북한 선박에 대한 공해상에서의 선박 대 선박 교류 행위. 사진=미국 재무부 캡처 지난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을 판문점에서 만났다.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었다. 두 정상은 시종일관 웃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 한반도의 평화무드를 만들었다. 회담중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을 위해 평양냉면을 가져왔다”며 “맛을 좀 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후 국내에서는 냉면이 불티나게 팔리는 진풍경이 연출되는 등 주적인 북한에 우호적인 평가가 쏟아져 나왔다.   당시 판문점 선언을 살펴보면 남북간 철도사업부터 시작하자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남북간 경제교류 및 지원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가령 어떤 방식으로 대북지원을 할 것인지, 언제부터 지원을 시작할지, 어느분야부터 지원 및 교류의 물꼬를 터야하는지에 대한 가이드 라인은 없었다. 또 남북회담을 성사했다는 이유만으로 곧장 북한을 지원하기에는 국내뿐 아니라 미국 등 해외 여론의 분위기도 살펴야 했다. 따라서 섣부른 대북지원은 특히 미국의 대북제재 속에서 미국 수뇌부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었다.    판문점 선언이후 곧장 대북지원한 한국정부?    그런데 실제 우리정부의 계획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계획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행동으로 대북지원을 보여준 듯한 장면이 포착된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지 며칠 지나지 않은 5월 3일, 남한이 북한에 기름을 직접 제공해주는 정황이 포착된 사실을 미국의 외교안보 소식통을 통해 기자가 단독으로 확인했다. 1차 남북정상회담이 있고 약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북한에 기름을 지원해 준 것이다.     그동안 대북지원의 역할은 줄곧 중국이 도맡았다. 육로를 통한 물자지원은 물론, 해상에서의 기름 지원 등도 모두 중국의 몫이었다. 실제로 과거 중국의 선박이 해상에서 북한 선박 옆에 나란히 서서 기름을 옮겨주는 장면이 여러 차례 포착된 바 있다. 2017년 11월 미국 재무부 예하 해외재산통제국(OFAC)은 중국 선박이 해상에서 북한 선박에 물건을 선적하는 모습을 공중에서 촬영한 사진 여러장을 공개했다. 이 사진과 함께 미국은 새롭게 북한의 선박들을 제재 대상에 올렸고 그 명단도 공개됐다. 금성 5호, 소백산, 릉라 1호 등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국 국적의 선박이 해상에서 북한 국적 선박에 급유해주는 장면이 일본의 해상자위대에 포착, 미국 등에 이 사실이 보고됐다. 한국 선박이 북한 선박에 기름을 제공한 최초의 사건이다.   지난 4월 27일 판문점에서 만난 남북 정상. 사진=화면 캡처   대북제재 명단에 이름 올린 북한선박과 옆구리를 맞댄 한국선박    2018년 5월 3일, 밤 12시, 상하이에서 동쪽으로 약 330km 가량 떨어진 해상에는 두 척의 선박이 불을 켠채로 옆구리를 맞대고 있었다. 두 배 위에서는 분주한 움직임이 있었다. 남산 8호(MAN SAN 8)와 제이홉(Jey Hope)호였다. 전자인 남산 8호는 북한 국적 선박이고, 후자인 제이홉은 한국 국적의 선박이다.    북한의 남산 8호는 1982년 일본 키시모토 조선사에서 제작된 유조선(Crude oil tanker)이다. 적재 가능한 최대중량은 3150톤이다. 즉 기름 3000톤 가량을 싣고 이동이 가능하다. 소속은 북한 합장강 해운사이며, 이 해운사는 2018년 2월 미국 재무부가 추가로 제재를 가한 북한의 해운사 중 한 곳이다. 해운사의 주소지는 북한 평양으로 등록되어 있다. 당시 이 해운사가 미국의 제재명단에 이름을 올리면서 이 해운사 소속 선박도 함께 제재 대상이 됐다. 제재 선박명단을 살펴보면, 남산 8호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남산 8호는 북한 서해지역에 있는 남포항을 기점으로 드나드는 배다. 만약 급유를 했다면 약 3천톤 가량의 기름이 북한에 전달되었을 수 있다. 선박 대 선박 물물교류 문제 제기한 일본    한국 국적의 제이홉은 2008년 국내 광성조선소에서 제작된 유조선(oil/chemical tanker)이다. 이 배의 이동 경로를 살펴보면 동중국해 지역을 자주 이동하는 배이다. 국내에서는 제주와 여수 등으로 입항한다. 민간에서 운영하는 선박기록 등을 살펴보면 이 배의 국적을 북한으로 표기하는 사례도 발견됐다. 이 두 선박의 수상한 움직임을 일본 해상자위대가 포착한 것이다. 일본은 즉각 이 사실을 미국 등에 알리고 한국정부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일본은 해당 행위는 유엔 대북제재(UNSCR) 위반 행위인 선박 대 선박 교류 (Ship-to-Ship-Transfer)라고 주장했다.    미국 외교 소식통을 통해 확인해본 결과, 일본측으로부터 질의를 받은 한국 외교부는 해당 사안에 대해 진위를 확인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뒤 해당 행위는 선박 대 선박 물자교류 행위가 아니며 단순 오해로 보인다는 식의 주장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일본측이 그럼 왜 선박 두척이 서로 옆구리를 맞대고 있느냐고 반문하자, 잘못 본 거 같다는 식으로 사실자체를 완강히 부정했다고 한다. 보통 이런 사안이 포착되면, 외교부는 조사단을 꾸려 심층 조사에 들어간다.   그후 보통 수주에서 수개월의 조사를 통해 사실 여부를 확인한 뒤 질의한 일본정부와 유엔 등에 사실을 확인해준다. 가령 해당 선박들이 왜 해상에 있었는지, 물자를 교류했는지 여부의 결과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질의를 받은 뒤 한국 정부의 태도는 외교관례상 적법한 절차도 아니었고, 논리적 근거없는 부정만 거듭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한국 정부의 태도는 한국의 국제무대에서의 위상을 스스로 깎는 결과를 초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미국과 일본 등에서 한국정부가 직접 대북지원을 지원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고 전해진다.  일본 내에서 확산된 한국정부의 대북지원 의혹    이와 관련된 내용이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외교부장관)과 오노데라 방위상(국방부장관)의 발언에서도 이어졌다. 기자회견장에서 있었던 일문일답이다. 한국 선박의 의심스러운 행위가 적발된지 약 2주만인 5월 15일 외무성의 기자회견장에서 고노다로 외무상에게 한 기자가 질의한다.    일본기자: “선박 대 선박 교류의 대책마련과 관련하여 질문이 있다. 일각에서 한국 선박이 (북한 선박에 대한) 선박 대 선박 교류에 대한 연루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사실관계를 알려달라.”    고노 외무상: “일본 자위대가 대한민국(한국)국적의 유조선이 북한 선박에 가깝게 다가간 상황을 확인했다. 이후 이 내용이 한국측에 보고됐다. 이에 한국정부가 조사를 한 뒤 해당 국적 선박을 확인해본 결과 선박 대 선박 교류가 아니었다는 답변을 한국정부로부터 받았다.”    일본기자: “그럼 이 말은 우리(일본)정부가 한국정부는 이 사안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인정(확인)해준 것인가?”    고노 외무상: “우리(일본)는 한국정부가 관여하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일본기자: “현재 대북대화(빈도)가 증가하고 있는 상태다. 일본정부는 앞으로도 선박 대 선박 교류에 대한 대응방안(countermeasure)을 강구할 것인가?”   고노 외무상: “가데나 공군기지 관할이 아닌 우방국 소관의 선박 대 선박 교류에 대한 저지활동(measure)은 부드럽게 진행되고 있다. 또한 다양한 국적의 선박들이 이 선박 대 선박 교류 저지를 위한 대응 활동에 도움을 제공중이다. 국제사회가 대북제재에 저촉되지 않기 위한 단호한 활동에 동참하고 있다.”    마지막 외무상의 발언은 동북아의 우방국인 한국을 제외한 국가들은 유엔 대북제재 이행을 위한 강한 노력을 하는 반면, 한국은 남북대화 분위기 조성 등을 위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마나 전투지원함(좌)이 미국 군함(우)과 훈련 중이다. 사진=위키미디어 일본 해상자위대 제1해상대대 소속의 하마나 전투지원함이 불법적인 선박 대 선박 교류활동 포착    방위성에서도 같은날 기자회견이 있었다. 방위성에서는 보다 더 심층적인 문답이 오갔다.    일본기자: “선박 대 선박 교류에 대해서 질문하겠다. 지난 5월 3일 북한 유조선이 한국 유조선과 공해상(international water)인 동중국 해상에서 나란히 서 있었다. 의심스러운 선박 대 선박 교류활동이 있었다. 이 행동은 남북회담 직후에 있었는데 이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향후 일본 국방성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가지 덧붙여 묻자면, 한국 정부로부터 들은 답변이 있는가?”    방위상: “북한의 대북제재 회피를 막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은 지속 추진되어 왔으며, 선박 대 선박 교류 저지활동도 여기에 포함된다. 앞으로 유엔안보리 결의안을 통해 보다 더 효과적인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   이 결의안에 부합하고자 일본자위대는 정기적인 감시 및 경보 활동을 지속, 유엔안보리 결의안 위반행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특히 이런 감시 활동 등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해상자위대 제1해상대대에 하마나 전투지원함(토와다급, 사세보항 모기지)을 투입하여, 지난 5월 3일, 한국 선박과 북한 선박이 동중국해상에서 선박 대 선박 교류 행위를 적발해냈다. 해당 내용은 관계부처에 공유했다. 심층분석을 통해 우리 일본정부는, 이 행위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위반 행위인 선박 대 선박 교류 활동으로 결론지었다.   곧장 일본정부는 신속하게 한국정부에 이 사실을 알렸음은 물론 조사를 요청했다. 이에 한국정부로부터 한국정부 주도의 조사에 착수했다는 내용을 전달받았고, 한국 국적의 선박이 불법적인 선박 대 선박 교류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조사결과를 전달받았다. 일본은 향후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통해 유엔 안보리 결의안 및 CVID 이행을 포함한 대북압박 활동에 지속 기여할 것이다.”    일본기자: “선박 대 선박 교류 사건과 관련하여, 방금 국방상께서 한국정부측으로부터 한국 선박은 불법적인 선박 대 선박 교류활동이 없었다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그럼 선박끼리 서로 맞댄 상황에서도 아무런 물물교환이 없었다는 말인가?”    방위상: “일단 우리 일본정부는 북한 국적 선박과 한국 국적 선박이 함께 공해상에 나란히 있었음을 확인했고, 이것은 의심스러운 선박 대 선박 교류 행위임을 확인(confirm)했다. 이후 우리는 이 행위에 대해 한국정부에도 확인을 받고자 한국정부에 사실을 알린 것이다. 한국정부는 외교채널을 통해 우리(일본)에게 알려오기를 의심스러운 선박들의 선박 대 선박 교류가 있지 않았다는 내용을 전달받은 것이다.”  선박 대 선박 급유 의심을 받고 있는 한국의 제이홉 호. 사진=구글 검색 일본 방위상, “공해상에 두 선박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은 보기 드문일”    일본기자: “만약 이것이 불법적인 선박 대 선박 교류행위가 아니라면, 이와 관련된 세부 자료가 있는가? 가령 왜 선박끼리 나란히 서 있었는지에 대한 이유 말이다.”    방위상: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공해상에서 선박끼리 나란히 서 있는 행위가 흔한일(ordinary act)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본기자: “언제 한국측으로부터 이 답변을 들은 것인가?”    방위상: “한국정부는 외교 채널을 통해 일본에 조사결과를 전달했다. 하나, 이 내용의 시점을 상세히 밝히는 것은 외교적 상호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어 밝힐 수 없다.”    일본기자: “일본 정부는 이 내용을 유엔 안보리의 제재위원회에 보고할 것인가?”   방위상: “일단 나란히 서 있던 선박끼리 무슨활동을 했는지에 대해 일본측은 한국측에게 선박 대 선박 교류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다. 이에 한국측은 선박 대 선박 교류가 없었다며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아직 유엔 안보리에 해당 문제를 보고하지는 않은 상태다.”    일본기자: “방위상께서 언급했듯이 공해상에서 두 선박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은 흔치않은 일이다. 이에 대해 지속적으로 일본은 한국정부에 사실 확인을 요청할 것인가?”   방위상: “이 문제에 대해 한국측으로부터 상세한 보고서는 받지 못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한국측이 선박 대 선박 교류를 완강히 부인한다는 사실이다.”    일본기자: “그럼 이말은 현재 국제사회의 선박 대 선박 교류활동 감시공조체계에 불협화음(misalignment)이 있다고 봐야하나?”    방위상: “그런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  일본의 분석, “선박간 물자교류 할 때 선박은 해수면에서 움직임 없다”    일본기자: “그럼 일본정부는 이 의심스러운 선박 대 선박 교류 활동에 대한 스탠스를 뒤집을수도 있나?”    방위상: “우리의 시각은 공해상에서 두 선박이 함께 나란히 서 있는 것이 흔한일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한국측의 설명은 의심스러운 두 선박이 선박 대 선박 교류를 했다는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일본기자: “이와 관련된 정보가 이미 있다. 당시 두 선박의 움직임을 보면 선박이 해수면에서 위 아래로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런 특성은 화물을 실을 때 나타나는 특성이다. 한국이 선박 대 선박 교류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당시 선박간 물자 교류가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인가?”    방위상: “나도 모르겠다. 한국 정부는 선박 대 선박 교류가 없었다고 확인했다는 것이다.”   일본기자: “내 생각에 한국정부의 답변은 그 의심스러운 선박이 주장하는 내용을 그대로 전달한 것처럼 보인다. 향후 일본정부는 이와 관련된 답변을 한국측에 추가로 요청할 것인가?”    방위상: "이 부분은 외무성이 외교 채널을 통해 처리해야할 사안으로 생각한다."    앞서 문답에서 방위상은 정확한 한국정부측의 답변 시점은 언급하지 않았다. 하나, 기자가 일본과 미국의 외교소식통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한국은 일본의 확인 요청이후 불과 수일만에 답변을 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외교가에서는 한국이 한반도 평화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 빨리 불을 끄는 형태의 성의없는 조사를 했다는 분석도 있다.    일본 여론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심층조사 등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상태다. 이미 미국에서도 이런 내용을 감지했으며, 싱가포르 미북회담전 일본의 아베총리와 트럼프의 만남에서 이런 내용이 언급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한국의 이러한 불법적 대북지원 사실을 인지한 뒤 싱가포르 회담에서 한미연합훈련 폐기라는 카드를 내놓고, 한국에 대한 군사적, 외교적 기대를 저버렸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대신 일본에 대한 동북아 책임론이 향후 힘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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