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인

-영원한 '아시아 선교의 아버지'   시모노세키(下關)의 가라토(唐戶) 정류장에서 내리면 붉은 벽돌의 서양식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1906년에 지어진 舊영국 영사관 건물이다.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옛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거기에서 육교를 건너면 가라토 시장으로 이어지는 해변이 나온다. 아침 이른 시각인데도 국적불문, 가라토 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필자는 그들과 섞이어 시장으로 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아니? 여기에 하비에르의 기념비가?’   하비에르 상륙 비(碑)필자가 평소 관심이 많았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1506-1552)의 기념비가 있어서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했다.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1550년 가을 시모노세키(下關)에 이방인(異邦人)이 상륙했다. 그의 이름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좌측 기념비의 글   짧은 글속에 그의 업적과 신앙심 그리고, 인간미가 녹아 있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49년 8월 15일 일본의 가고시마(鹿児島)에 첫발을 내딛었다. 동행자는 코스메 드 토레스(Cosme de Torres)신부와 후안 페르난데스(Juan Fernandez)수사 등이었다. 9월 29일 사쓰마(薩摩)의 다이묘(大名)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 1514-1571)를 알현했으나 포교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듣지 못했다. 2개월 정도 머물다가 나가사키(長崎)의 히라도(平戸)에 갔고, 거기에서 육로로 규슈의 부젠(豊前)으로 갔다. 그리고, 간몬해협을 거쳐서 시모노세키에 상륙했다. 1551년 4월 말 야마구치(山口)의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大內義隆, 1507-1551)를 만나서 선교 허가를 받는데 성공했다.   야마구치에서 500여 명 세례 해   역사학자 고노이 다카시(五野井隆史·78) 박사는 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 책은 ‘하비에르가 2개월여 만에 야마구치에서 500여 명에게 세례를 주는 커다란 성과를 도출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 당시의 상황에서 보면 놀라운 성과였다. 특히, 하비에르는 ‘설교보다는 성덕과 모범을 보이며 선교에 힘썼다’고 한다. 시모노세키 상륙 450주년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에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위대한 정신과 행동력에 의해서 덕(德)을 봤던 것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고노이(五野) 박사의 저서에는 1552년 1월 29일자 유럽의 동료에게 보낸 하비에르의 편지가 소개돼 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의 생에 있어서 이만한 정도의 기쁨과 영적인 만족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하비에르 성(城)의 돌   하비에르 성의 돌기념비의 오른쪽에 작은 돌 하나가 받침대 위에 놓여있었다. 타이틀은 ‘하비에르성(城)의 돌.’ 돌 하단에는 마태(마태오)복음 16장 26절이 새겨져 있었다.   “만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하비에르 성의 돌은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왔을까?’   하비에르는 1506년  나바라(지금의 스페인)왕국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돌은 그가 태어난 스페인의 하비에르 성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는 파리대학교와 성 바르브학교(1530년 입학) 학생시절 예수회 창립 7인 멤버가 됐다.  성직자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게 된 하비에르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1542년 5월 6일 인도의 고아(Gôa)에 가서 가톨릭 교리 해설서와 성가를 현지말로 번역하는 등 활발한 선교활동을 했으며,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고아(Gôa)대학교를 설립했다.   1550년 시모노세키에 상륙해서 야마구치에서 5개월간 선교 활동을 하던 하비에르는 중국인들의 전도를 위해 1551년 뱃길에 올랐다. 1552년 11월 21일 중국에서 장례 미사 집전 후 열병으로 쓰러져 그해 12월 3일 세상을 떠났다.   필자는 ‘만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의 성경 구절이 기념비에 새겨진 이유에 대해서 고개가 끄덕여 졌다.    그는 세상을 떠난 70년 후인 1622년 3월 성인으로 시성됐다. 야마구치를 비롯헤서 가고시마, 나가사키, 오이타 등 일본의 곳곳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도자키(堂崎)의 나루터 흔적   나루터의 흔적을 알리는 비(碑)   여기는 일본 최초로 그리스도교와 서양문화를 전한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나가사키에서 순교한 26성인, 막부(幕府)의 사상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과 지사(志士)  다카스기 신사쿠(高彬晉作, 1839-1867) 등 많은 유명무명(有名無名)의 사람들이 이 나루터의 돌계단을 밟으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것이다.>   유명무명의 사람들 중에는 강제적으로 이 나루터의 돌계단을 밟아야 했던 억울한 조선의 무명인(無名人)들도 많았을 것이다.   *참고문헌:  

장상인

-복어의 본고장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윙윙)울리는 스크루(screw)-간몬해협(關門海峽)/ 나의 배(腹)에 두른 빛바랜 천이 젖는구나/ 나와 네가 히레자케(鰭酒)를 마시도다/ 간장에 얼어붙었는가, 진눈개비 눈(雪)인가/ 아-아-아- 바라보는 남자끼리 눈(目)이 젖도다.”   시모노세키(下關) 출신 가수 야마모토 죠지(山本讓二·68)의 노래 을 흥얼거리며 가라토(唐戸)에 갔다. 10년 만의 발걸음이다. 노래에서 나오는 히레자케(鰭酒)는 복어의 마른 지느러미를 태워서 넣는 따끈한 사케(酒)를 일컫는다.   해협에 접해 있는 가라토 지역은 예로부터 교통의 중심지였고, 메이지(明治, 1868-1912)시대에는 해외 무역의 거점이었다. 그 시절 각국의 영사관과 외국 무역 기관·은행들이 속속 들어섰다.   1909년 가라토의 길거리에서 야채·과일 등 식료품을 판매하기 시작했고, 1924년 어시장(魚市場)이 생겨났다. 1933년 지금의 가라토 시장의 기반인 어류와 야채시장이 개장했다. 1976년 식료품 유통 센터가 문을 열었고, 1979년 현지 생산자를 중심으로 하는 아침(새벽) 시장이 열렸다.   가라토 시장의 외관2009년 개장 100주년을 맞아 수족관·해향관(海響館)·가몬와후(Kamonwafu)와 함께 시모노세키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발돋움했다. 100여 개의 가게가 들어서 있는 가라토 시장(市場)은 시모노세키 시(市)가 건물 등 시설물을 직접 관리하고 있다.   복어는 생선의 왕자로 최고의 맛   복어의 독과 맛에 대한 안내문“독소(毒素)를 밝혀내는 지식과 기술의 향상에 의해 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담백한 맛은 생선 중의 왕자로 일컬어지는 최고입니다. ‘복어(河豚)를 드시지 않는 사람과는 통하지 않습니다.’ 복어의 시모노세키(下關).”   ‘복어의 독(毒)에 대해 불안해하지 말고 마음껏 먹으라는 것’과 ‘시모노세키에서 복어를 먹지 않는 사람과는 통하지 않는다’는 진지하면서도 익살스러운 협동조합의 안내문이다.   “복어는 먹고 싶으나 목숨이 아깝구나.”   복어에 대한 일본의 속담이다. 일본에서도 복어를 잘못 먹고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복어의 내장과 혈액 등에 함유된 테트로도톡신(tetrodotoxin)때문이다. 테트로도톡신(화학식: C11H17N3O8)은 신경에 작용하는 독의 일종이다. 테트로도톡신이라는 이름은 독성 물질을 지니고 있는 복어류의 학명에서 따왔다.   복어의 독은 ‘복어 자신이 독을 생성한다’는 설(説)이 우세하다. 하지만, 먹이 등 외부에서 받아 들여 지는 것으로 보는 외인설(外因説)도 만만치 않다. ‘바다의 세균에 의해 만들어지고, 먹이 사슬을 통해 복어의 체내에 축적된다’는 것이다. 독성이 있는 조류 등 유독 플랑크톤이나 슈도모나스(pseudomonas)의 일부 세균, 먹이가 되는 조개와 불가사리 등이 농축돼 체내에 축적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아무튼, 복어의 체내에 들어있는 독을 제거하는 전문 기술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렇게 독이 제거된 복어는 시장에서 얇고 예쁘게 포장돼서 판매되고 있다. 가격은 다양하다. 2인분이 13,000엔(한화 13만원), 3인분이 20,000엔(20만원), 5인분이 26,000엔(26만원)이다. 복어를 사는 것보다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복어의 익살스러운 캐릭터 인기 만점   인간복어의 캐릭터가 걸려있는 어시장 내부가라토 어시장에는 곳곳에 복어의 캐릭터가 걸려 있다. 하나같이 귀엽다. 그 중에서 ‘복어 인간’ 캐릭터가 시선을 끈다.   ‘그는 누구일까.’   주인공은 아역배우 스즈키 후쿠(鈴木福·14)군이다. 2006년 NHK 예능으로 데뷔해서, 2010년 동(同) 방송의 TV소설에 이어 영화에도 출연한 인기 아역 배우가 됐다.   “후쿠입니다.”   가라토 해변에 있는 '후쿠'의 캐릭터 시모노세키의 ‘후쿠(복어)’와 그의 이름이 ‘후쿠(福)’인 점이 맞아 떨어진 듯싶다. 그의 얼굴과 복어의 몸통인 캐릭터는 해변은 물론 복어를 파는 가게의 입구에도 어김없이 붙어 있다. 그는 언제부터 복어의 모델이 됐을까.   음식점 입구의 문에 붙어 있는 '후쿠'의 캐릭터“유명 아역배우인 후쿠(福)군은 2018년 9월부터 복어 캐릭터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기 때문에 시모노세키의 복어가 더욱 유명해지고 있습니다.”   시모노세키 시청 직원 이노우에 야쓰히로(井上康博) 씨의 말이다.   최근에 제작된 파격적인 동영상과 후쿠(福) 군이 직접 부른 노래도 인기 만점이다. 제목은 .   “복어 복어 뻐끔뻐끔 천국의 맛 복어 복어 뻐끔뻐끔 행복의 맛 맛이 있으나 있거든요. 복어에는 독이 그래도 역시나 먹고 싶어요.(생략)”   복어 식해금(食解禁) 130년을 알리는 포스터이 노래에는 맛뿐이 아니라 복어에 대한 역사와 문화까지 담고 있다.     실제로 시모노세키의 곳곳에 ‘복어 식용 해금 130년’이라는 안내문이 걸려 있다. 백화점과 기차역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매달려 있는 캐릭터들도 바람 따라 흔들리며 사람들을 반긴다.   거짓말은 복어의 독(毒)과 같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등 많은 작품을 남긴 메이지(明治) 시대의 유명 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가 한 말이다. 단순히 복어의 독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 생(生)의 철학이 담겨 있다. 작가 ‘아지마 유키히코(失島裕紀彦·62)’는 이를 정치인에 비유해서 의미 있게 풀이했다.   “거짓말은 복어의 독(毒)과 같은 것이라고 소세키(漱石)가 말했습니다. 거짓말이 때로는 괴로운 피를 토하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뱉은 거짓말을 덮으려고 하면할수록 구멍이 생기고 파탄(破綻)으로 이어집니다. 돌이킬 수 없는 추태도 노출하게 됩니다.”   아지마(失島) 씨는 일본에서 벌어진 일부 정치인들의 정무 활동비 비리(非理)를 예(例)로 들었다.   ‘허위와 속임수로 공금에서 경비의 지급을 받으면서 뻔한 괴로운 변명을 한다.’ ‘숨기고 있던 작은 불씨가 뜻밖의 장소에서 피어오른다.’ ‘변명과 거짓말을 거듭하다보면 마침내 자리에서 물러나고 만다.’   어찌 일본만의 일인가. 복어의 독과 같은 거짓말이 우리의 주변에서도 번번이 일어나고 있다.   2019년 새 해는 ‘거짓말이라는 독(毒)’에 중독되지 않는 투명한 한 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장상인

지난 주말, 영하의 날씨를 뒤로하고 시모노세키(下關)에 갔다. 인구 26만 명 정도의 소도시이다. 역(驛)에 내리자마자 복어(河豚)들이 날라 다녔다. 하나같이 귀여웠다. 실물이 아니라 캐릭터 내지는 인형들이었다.   시모노세키역연말연시(年末年始)인지라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많았고, 시장에도 설 준비를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양력과 음력의 차이일 뿐 모습들은 설을 맞아 고향을 찾아가는 인파들이었다. 시모노세키는 예로부터 서부 일본의 육해교통의 십자로 였다. 그런 연유로 교통·상업 중심지로 번창했다. 1905년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 항로가 개설돼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대륙침략의 문호이기도 했다.   간몬항 간몬항(關門港)은 기타큐슈(北九州)의 모지항(門司港)과 시모노세키(下關)를 나란히 하고 있는 건너편 항구다. 아무튼,시모노세키는  일본 제1위의 어획량을 자랑하는 곳이다. 수산가공·냉동·통조림·어망·선구·조선 및 화학·금속·목재 공업이 왕성했다.   1894년 4월 청·일전쟁의 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이 슌판로(春帆樓)에서 체결됐다. 1864년에는 시코쿠 함대가 미국 선(船)을 공격했다가 시모노세키 포대가 한 때 미군에 점령되는 사건도 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   복어는 약 120종의 물고기다. 그중에서 식용으로는 참복 등이 유명하다. 식용 가능한 부위는 복어의 종류와 어획 장소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아마추어 요리사에 의한 복어 취급이 금지돼있다. 실제로 일본의 식중독의 원인의 대부분이 버섯과 복어이다.   이러한 복어를 식용으로 금지한 사람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6-1598)였고, ‘먹어도 좋다’고 한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였다. 두 사람 모두 조선을 침략한 사람이다. ‘참으로 이상한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가라토 시장은 점입가경. 복어가족 인형들이 있었고, 시장 안에는 거대한 복어 인형이 있었다. 건너편 언덕의 신사(神社)에는 세계 최대의 복어 인형이 있었다.   복어인형 가족   시장안의 거대한 복어 형상 세계 최대의 복어동상일본인들이 일컫는 복어는 ‘후구(ふぐ)’이다. 하지만, 시모노세키사람들은 ‘후쿠(ふく)’라고 한다. 이유인즉 ‘후구’는 ‘불우(不遇)’와 발음이 같고, ‘후쿠’는 ‘복(福)’을 가져다주는 물고기라서 이렇게 부르고 있을 뿐, 특별한 의미는 없다.   2019년 우리에게 복(福)을 가져다 줄 생선이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호텔로 돌아갔다. 기온은 영상이었으나, 바닷바람이 거셌다. 불현듯 주강현(朱剛玄) 선생의 저서 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바닷가 변방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것 역시 ‘생각의 반란’이 필요한 일이다. 섬을 거느린 바다는 대개 변방이다. 그런데, 종종 그 변방들이 중심을 들이치고 새로운 중심으로 전환됨을 자주 본다."   이렇게 우리네 인생 지난 한 해를 과거로 흘러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향해서 달리고 있는 듯싶다.

장상인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일본인 이야기   “조선일보 근처로 장소만 알려주시면 어디라도 좋습니다.”“네. 코리아나 호텔 로비 5시 어떨까요?”“좋습니다.”   한국을 찾은 일본인 기무라 히데토(木村英人·73) 씨와 문자메시지로 주고받은 대화 내용이다. 필자는 시간에 맞춰서 약속 장소로 갔다. 지난여름 나가사키(長崎)에서 만난 이후 반년만인 지난 22일의 일이다. 그는 ‘나가사키 평화의 집’에서 봉사자로 일하고 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면서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이 부러워   광화문 네거리에서의 기무라 씨광화문은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시민단체들이 무리지어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북과 꽹과리를 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단체도 있었다.   “일본에서 볼 수 없는 살아 있는 모습입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면서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일본을 보세요. 아베 신조(安倍晉三) 수상이 아무리 잘못해도 일본인들은 입을 꽉 다물고 있지 않습니까?”   기무라(木村) 씨는 필자가 우려하는 것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민단체나 노동조합 구성원들이 길을 메우고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 거리로 뛰쳐나오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다’는 것이다.   시민단체들의 성난(?) 목소리들을 뒤로하고 광화문교보문고로 갔다. 거기에도 사람들이 북적됐다. 기무라 씨는 서점에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놀랐다. 인터넷이 발달한 한국은 ‘책을 사는 사람들이 소수일 것’으로 생각했단다.   “놀랍습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저도 독서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만, 서점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을 줄 몰랐습니다.”   서점 일본소설 코너에서의 기무라씨기무라 씨가 서점에 간 이유가 있었다. 의사이면서 유명작가인 ‘하하키기 호세이(帚木蓬生)’ 씨의 의 번역본(해협)을 사기 위해서였다. 그가 일본 책 번역본을 사는 것은 소설이 한국어 선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되고 없었다.   기무라 씨는 일본 소설 코너에 일본 작가들의 책이 즐비하고, 일본 소설을 사는 젊은이들이 많은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일본에는 한국 소설을 일본어로  번역한 책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일본소설만 별도로 진열한 코너가 있군요.”   그는 교보문고에서 임진왜란과 관련한 책을 한 권 사고서 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이미 어둠이 깔리고 있었고,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각종 네온들이 낮과 밤의 경계선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기무라 씨가 ‘한국에 자주 오는 관계로 매운 음식도 좋아한다’고 해서 광화문에 있는 평범한 식당으로 갔다. 메뉴는 낙지볶음.   “보통 맛으로 해 주세요.” “네. 중간(매운)맛으로 준비하겠습니다.”   필자가 주문한 낙지볶음에 대해 기무라 씨와 식당 종업원이 우리말로 주고받은 대화다. 그가 한국의 문화와 언어에 친숙해져 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남북사진전 참가를 위해 한국에 오다   남북사진전에 참가한 기무라(좌) 씨와 이재갑(우) 작가기무라 씨가 이번에 한국에 온 것은 남북사진전 ‘통일의 꽃이 피었습니다’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22일은 이시우 작가가 ‘금강산 통일 미학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강연이 있었다. 그는 필자도 알지 못하는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 한국을 찾은 것이다.   “대단하십니다. 저도 모르는 행사에 참가하셨군요.”“아닙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서입니다.”   기무라 씨가 내민 자료를 보자 사단법인 통일의 길과 한반도 경제문화포럼에서 주최한 행사였다. 그는 “남한과 북한 작가의 사진 30점이 전시되어 있었다”면서 “사진예술을 통해서 한민족의 동질성을 찾으려는 의지가 엿보였다”고 말했다.   기무라 씨는 한국 소설을 좋아한다. 조정래 선생의 장편소설 을 읽고서 지리산을 찾기도 했다. 그는 한국 드라마도 무척 좋아한다. 오래전에 방영된 ‘과 이 특히 인상 깊었다’고 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날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기무라 씨는 ‘형제의 강 드라마에서 어린 배우들이 밀양아리랑을 부르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강제노동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일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 중공업의 손해배상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 이후 한일 관계가 급격하게 냉각됐다. 이 판결 이후 양국 정부 간 국장급회의 가 열린다는 보도만 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보인다. 필자는 기무라 씨의 생각이 궁금해서 그 부분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한다’고 했다.   미쓰비시의 강제노동에 대해서 말하다가 잠시 침침묵하는 기무라 씨“제가 법률전문가도, 정치인도 아닌 평범한 시민에 불과하기 때문에 뭐라고 평가하지 않겠습니다...그러나,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합니다.”   이어서 기무라 씨는 필자가 가지고 간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펴낸 (박수경·전은옥 옮김)의 183쪽을 펼치면서 말했다. “여기 있군요. ‘일본 패전 당시 징용공을 포함해 약36만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거대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이 나가사키와 그 주변의 산하 및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시켰던 조선인의 수가 13,156명이 넘는다’고 쓰여 있지 않습니까? 강제노동은 사실입니다.”   이 책에는 강제노동자에 대한 숫자를 구체적으로 나열돼 있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본다.     필자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과거사 문제를 취재하는 자리가 아니라,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과의 개인적인 만남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필자와 기무라 씨는 “양국의 관계가 과거사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미래를 향한 발전적인 일에 협력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를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서울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효창동에 있는 복지재단의 숙소로 돌아간다’고 했다. 마치 자기 집을 찾아가는 사람처럼.   필자도 지하철을 탔다. 집에 도착하자 둥근달이 중천에 떠있었다. 40년이라는 긴 세월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퇴임하고서도, 쉬지 않고 평화를 위해 헌신(獻身)하고 있는 기무라 씨의 얼굴이 둥근달 속에 들어 있는 듯했다.

김승열

지난 9월 유럽의회에서 통과한 유럽저작권법 제11조와 제13조가 논란을 낳고 있다. 이 법안으로 당장 타격을 입게 되는 사업자는 플랫폼 사업자인 구글과 유투브 등이다. 유투브의 회장은 이 법안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구글은 이 법안이 시행되면 유럽에서 뉴스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사태가 심각하다. 그리고 보니 ‘링크세’는 과거 스페인에서 시행하였으나 구글의 반격(스페인에서 뉴스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했다.)으로 중단된 바 있다. 그러다 보니 구글에서는 더욱 더 적극적인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EU는 스페인과는 달리 인구가 5억 이상이어서 만만찮은 싸움이 될 것으로 보여 진다. 누가 이길까. 먼저 유럽저작권법 지침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쉽게 말해 미국과 같은 연방제 국가에서 시행되는 ‘모델법’을 가정하면 이해하기 쉽다. 각 주(州) 사정에 따라 모델법을 변형하여 각 주 마다 법제화하여 시행한다. 유럽저작권법지침은 모델법과 같다. 내년 1월에 지침안이 최종 확정되더라도 EU 각국의 사정에 따라 개별국가법을 제정한다. 따라서 이후 각 나라별로 어떻게 변형될지 알 수 없다.   제11조는 구글이나 유투브 등 플랫폼 사업자가 언론 기사 등을 링크할 때마다 일정한 세금을 부과하도록 링크세를 규정하고 있다. 즉 언론사 등이 만든 정보를, 링크를 통하여 제공하는 경우에 콘텐츠 제공자에게 그 대가를 지불토록 한 것이다. 이는 구글 등 사업자의 기본적인 사업구조의 변경을 가져 오게 할 정도로 중요한 입법이다. 구글 등은 발끈할 수밖에 없다. EU의 5억 인구를 고려하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위키피디아 같은 사이트에는 이 조항이 면제된다. 또 단순하게 하이퍼링크를 공유하는 경우도 이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   필자가 독일의 한 연구소에서 초빙연구원으로 있을 때도 미국과 유럽의 기본적인 시각차를 느꼈었다. 즉 미국은 플랫폼 사업자에게 친화적이라면 유럽은 콘텐츠 제공자에게 친화적이다. 미국은 알권리 및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고 EU는 개인의 프라이버시 권리를 존중한다. 또 EU는 구글과 같은 ‘빅 브라더’의 출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어쨌든 각자의 논리는 나름대로 합리성이 있어서 함부로 어느 편을 들기가 어려워 보인다. 좀 더 추이를 봐서 논평하고자 한다.   제13조도 논란이다. 구글 등 서비스 제공자가 저작물을 전달하기 위하여서는 권리자와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여야 하며 권리자가 계약체결을 원하지 않은 경우 해당 저작물이 제공되지 않도록 협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저작물의 권리자와 플랫폼 사업자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부분이다. 이 문제는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립할 것으로 보여진다. 즉 플랫폼 사업자가 많은 미국은 이 지침에 기본적으로 반대하지만, 상대적으로 콘텐츠 사업자가 많은 EU는 이 지침에 호의적이기 때문이다.   위 지침 안에 대한 논란을 접하면서 세계는 국경이 허물어지고 진정 글로벌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우리나라도 미국과 EU의 입장 중 어느 입장을 가질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에 다다른 느낌이다. 아니면 우리나라가 미국과 EU의 절충적 중도안 내지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혁신적인 안을 마련해 전세계 시장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길 기대한다.

장상인

어느새 12월 중순이런가. 기온이 지난주에 비해 다소 올랐으나 바람결은 차가웠다. 16일 오후 5시 경- 올림픽 공원 주변에 많은 차량들이 모여들었다. 가수 조용필의 50주년 콘서트 때문이었다.   지체와 서행을 반복하면서 어렵게 정문을 통과하는 동안 공원 내의 주차장은 이미 차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차요원의  안내를 받아 가까스로 차를 세우고 공연장인 체조경기장 입구로 갔다. 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고, 대중교통을 이용한 사람들이 무리지어 모여들고 있었다. 대부분이 나이가 지긋했으나, 젊은 층도 많아 보였다.   공연장 입구의 모습공연장 입구에서는 ‘빨리 입장하라’는 안내 방송이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반복됐다. 필자도 서둘러서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7개월 동안 전국 순회공연...16일 대미를 장식해   이 공연은 지난 5월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을 시작으로 7개월 동안 대구, 부산, 광주, 수원 등에서 펼쳐졌다. 16일의 체조경기장 공연은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행사였다.   땡큐! 조용필공연장 내부의 뒤편에는 ‘조용필 팬클럽 연합회’가 게시한 과 의 대형 포스터가 걸려있었다.   공연 시작 전 영상으로 나온 배우 안성기, 싸이, 배철수, 김구라 등의 짤막한 멘트에서도 조용필 가수의 반세기 역사가 그대로 전해졌다.   “땡큐! 조용필.”   정각 6시가 되자 어둠 속에서 광명의 세계가 열리듯 형형색색의 조명들이 은하수처럼 쏟아졌다. 그러한 빛을 한 몸에 받으며 하얀 수트(suit)를 입은 조용필이 무대에 등장했다. 1만 여명의 관객들은 LED 야광봉과 피켓을 흔들며 환호했다. 첫 번째 노래는 ‘땡스 투 유(Thanks to You)’-    가수 조용필의 등장공연 시작부터 성급한 남성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선 상태였고, ‘오빠’를 외치는 여성 팬들도 조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이불문, 조용필은 여성들의 ‘영원한 오빠’였던 것이다.   “행운과 영광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여러분은 잠깐이었겠지만, 저는 길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대로인데 저만 변했습니다(웃음)...음악이라는 길은 멀고도 험해서 제 경험으로는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이 계시기에 제가 존재했습니다. 배움의 길을 계속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팬클럽 연합회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짧은 인사말이었지만, 50년 세월 가수로 살아온 인생역정과 겸손함이 담겨 있었다. ‘가수 생활 50년, 아직도 배움의 연속이다’는 말이 특히 그러했다.   조용필이 “제가 이야기를 잘 못해서요”하자, “말보다는 노래로 하세요!”라는 외침이 ‘와’ 웃음을 자아냈다.   친구여, 창밖의 여자, 그 겨울의 찻집, 잊혀진 사랑 등 귀에 익은 노래들이 메들리로 이어졌다. 관객들의 환호는 공연장의 높은 천장을 뚫을 듯 했고, 쏟아지는 조명은 눈이 부시도록 현란(絢爛)했다.   ‘돌아와요 부산항’을 부를 때는 갈매기들이 무리지어 나는 영상이 가세했다. 노래와 반주와 영상과 레이저쇼가 한데 어울리는 멋진 연출을 한 것이다.   반전도 있었다. 노래 ‘비련’은 애절하게 관객들의 가슴을 겨울 추위처럼 파고들었다.   “기도하는 사랑의 손길로 떨리는 그대를 안고/.../돌고 도는 계절의 바람 속에서 이별하는 시련의 돌을 던지네.”   2시간 동안 30곡을 소화해   “돌아서던 그 사람은 무정했던 당신이지요.” “가지말라고 가지말라고 잊을 수는 없다했는데” “나는 떠날 때부터 다시 돌아올 걸 알았지” 등의 자막이 화면에 나올 때는 대형 노래방 같았다.   공연장 모습(1) 공연장 모습(2)  공연 후반부에 울려 퍼진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압권이었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조용필이 대사를 읊어나갈 때는 객석이 고요했다. 하지만,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순 없잖아...” 노래가 시작되자 관중들의 목소리와 흔들림이 다시 강렬해지면서 삽시간에 대형 클럽(?)으로 급변했다.   공연 끝부분의  ‘모나리자’는 환상의 도가니.   “내 모든 것 다 주어도 그 마음을 잡을 수는 없는 걸까/ 미소가 없는 그대는 모나리자.”   앙코르 곡은 ‘여행을 떠나요’였다.   공연장 모습(3)가수와 관객들이 한꺼번에 거대한 배를 타고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나도 될 듯싶었다(체조경기장을 움직일 수 있는 힘센 선장이 있다면).   가수는 언제나 관객과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필자의 옆자리에 앉은 노부부(73)는 “사위가 표를 사줘서 이토록 좋은 구경을 했다”면서 “조용필은 살아 있는 전설이다”고 칭찬의 말을 쏟아냈다.   양천구에서 온 한 관객(66)은 “인기 아이돌 가수의 공연으로 착각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면서 “관객들의 환호가 요즈음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한 장면 같았다”고 극찬했다.   필자도 같은 생각을 했다. 조용필은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관객과 호흡을 같이 하는 가수이기 때문이다.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겠네.”   조용필의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삶의 지혜일 것이다.

장상인

-세 아이의 죽음을 계기로 처벌 강화   “뛰어난 술을 가진 국민은 발전된 문화의 소유자라고 해도 좋다. 개인의 경우에도 어떤 술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각자의 교양의 깊이를 나타내고 있음과 동시에 인생의 크나큰 즐거움의 하나이기도 하다.”   일본의 술 전문가 사카구치 긴이치로(坂口謹一郞) 박사의 저서 은 이렇게 시작된다. 참으로 좋은 말이다. 하지만, 즐거움을 넘어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가 발생한다면 당사자는 물론 피해자의 인생이 불행하기 그지없다.   ‘윤창호법’의 국회 통과로 음주운전자에 의한 사망사고 발생 시 무기징역 또는 3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게 됐다. 종전보다는 강화됐지만, 여론의 기대치에는 못 미친다. 불문곡직 음주운전은 일벌백계(一罰百戒)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나고야의 이자카야 거리일본의 경우도 우리보다 술의 종류가 많고 술을 즐기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음주운전 문제는 우리보다 훨씬 엄격한 잣대로 처벌한다.   일본은 음주운전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음주 운전과 취기 상태로 운전을 하는 경우다. 물론, 두 가지 모두 음주 운전에 해당된다. 일본은 오래 전부터 음주 운전에 대한 혈중 알코올 농도를 0.03%로 시행해 왔다.   2007년 음주운전 제재 대폭 강화해   일본은 2007년 9월 19일 도로교통법의 개정을 통해 음주문제에 대한 제재를 대폭 강화했다.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2006년 8월 25일 22시 50분 경 규슈(九州)의 후쿠오카(福岡) 우미노나카미치(海の中道)대교에서 발생한 음주운전 사고로 일가족이 탄 승용차가 다리 아래 바다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이 사고에서 부모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나, 안타깝게도 장남(4세), 차남(3세), 장녀(1세) 세 아이가 모두 죽음을 맞고 말았다.   후쿠오카의 우미노나카미치 대교일본 열도는 들끓었다. 더구나, 사고를 낸 음주운전자가 후쿠오카시청 소속의 공무원(남, 당시 22세)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운전자 자신뿐만 아니라 음주 운전자에게 차량을 제공하거나, 술을 판 가게, 동승자도 엄벌에 처하도록 법을 강화했다. 관련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음주자에게 차량을 제공을 하는 경우 ·5년 이하의 징역과 100만 엔(한화 1,000만원) 이하의 벌금   ▴음주 운전자에게 주류를 제공하는 경우 ·3년 이하의 징역과 50만 엔(500만 원)이하의 벌금 ▴음주 운전자와 동승한 경우(음주사실을 인지하고 동승) ·3년 이하의 징역과 50만 엔(500만 원)이하의 벌금   ‘술을 팔아 매상만 올리면 된다’는 장삿속의 가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기준이 애매할 수 있지만, ‘음주운전을 부추기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보편화됐다.   스스로 관리 책임을 물은 간부들...20년 형을 선고한 일본의 최고 법원   당시의 사고차량(사진: 야후재팬)야마사키 히로타로(山崎廣太郞) 당시 후쿠오카 시장은 스스로 자신의 급여 20%를 감액했다. 음주운전자가 소속된 시청 동물관리센터의 보건복지 책임자도 스스로 10%의 급여를 반납했으며, 인사부장 등 관련자들이 줄줄이 징계처분을 받았다.   그 후 필자가 수차례 후쿠오카를 방문했다. 사고 전(前)과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랐다. 필자의 지인들은 무알콜 맥주로 건배를 하는가 하면, 아예 집에 차를 놓고 택시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뒤늦게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이와 더불어 학교관계시설을 중심으로 주류 판매를 하지 않았다.   공무원 신분의 사고자(남, 당시 22세)는 2011년 대법원에서 20년의 징역형을 받고 현재 오이타(大分) 형무소(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후쿠오카지방법원은 1심에서 업무상 과실치사상죄만을 인정해서 징역 7년6월을 선고했으나, 검찰이 항소했다. 더불어 A씨도 형량에 불복해서 항소했다. 사고자는 1심 재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후회해도, 후회할 말이 없습니다.”   “검은 바다에서 많은 물을 마시고 고통을 받으며 죽어간 어린아이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까?’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반성의 말을 하면서도 판결에 불복한데 대해 비판 여론이 비등(沸騰)했다. 2심인 후쿠오카고등법원은 위험운전치사상죄를 인정하고, 도로교통법 위반과 병합해서 징역 20년 판결을 내렸다. A씨가 판결에 불복, 상고했으나 최고 법원이 기각함으로써 형이 확정됐던 것이다.   일본 최고법원(재판장 寺田逸郞)의 최종 판결문을 옮겨 본다.         와타나베 아키라씨지난 3일 한국을 방문한 후쿠오카의 와타나베 아키라(渡邊章·71)씨는 그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고자의 형량이 높아진 것은 당시 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쳤기때문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골프장 등에서 맥주 한두 잔은 마셨지요. 하지만, 그 사고 후 운전을 할 경우 아예 술을 입에 대지 않습니다. 피워보지 못하고 꽃봉오리채로 하늘나라로 떠난 어린 세 아이가 ‘도로교통법 개정’을 통해 준엄한 벌칙을 남겼습니다.”   연말에는 이런저런 모임이 많다. 그래도 음주운전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음주운전 뺑소니로 ‘30대 가장이 의식불명 상태다’는 뉴스도 겨울 추위만큼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한다.  

장상인

-나고야 성(城)의 국화 대회를 다녀오다 나고야의 가을이 무르익었다. 필자는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면서 길을 걸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들도 꽃 송이였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를 읖조렸다.  나고야 성의 역사와 부부 이야기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는 160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의 세력들을 막기 위해서 나고야(名古屋) 성(城)을 세우기 시작했다. 다음해인 1610년 ‘이에야스(家康)’는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 등 성(城) 쌓기 전문가들을 불러서 완성했다.   단풍에 둘러싸인 나고야 성초대 번주(藩主)는 ‘이에야스’의 아홉 번째의 아들 ‘요시나오(義直)’였다. 그의 부인은 ‘하루히메(春姬)’. 두 사람의 결혼식이 나고야의 호화 웨딩의 뿌리이기도 하다. 매년 4월 ‘하루히메 길(道)’이라는 그 당시의 결혼식을 재현한 이벤트가 나고야 성 주변에서 행해지고 있다. 나고야 성은 봄철 벚꽃이 아름답지만, 저 멀리 단풍 숲 위에 우뚝 선 천수각도 멋이 있었다.   성(城) 입구에서 국화꽃으로 단장한 두 부부를 만났다. 초대 번주 ‘요시나오’와 그의 정실 ‘하루히메’였다. 그들(인형)의 옷은 생화였다. 불현 듯, 우리의 유행가 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요시나오와 하루히메   ‘요시나오’와 그의 정실 ‘하루히메’는 ‘아-얄미운 국화꽃 당신은 아니었을까?’   71년 째 이어지는 국화(菊花) 대회 겸 전시회   성(城)안에 들어서자 크고 작은 국화꽃들이 전시돼 있었다. 이 정도로 키우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듯싶었다.   전시된 작품들나고야 최대급의 국화 대회는 대국(大菊)·산국(山菊)·절화(切花) 등 약 450 점이 전시돼 있었다. 10월 6일부터 개최된  전시회는 11월 23일 종료되며, 나고야 성에 입장하는 사람은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더불어, 국화 재배에 대한 무료 상담도 한다.   안내를 하는 시청 직원 나카무라(中村·46)씨는 이 대회는 올해도 71년 째 이어지는 행사라고 자랑했다.   “이 전시회는 올해로 71년이 됐습니다. 나고야 최대 이벤트입니다. 성에 입장하는 사람은 무료 관람합니다.” 일본인에 있어서의 국화의 의미는?   특별 출품작‘일본인에 있어서 국화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1948)의 저서 에 담긴 글을 빌어본다.   적절한 표현이다. 베네딕트(Ruth Benedict)는 일본에 살아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태어나서 미국에서 자란 일본인들을 많이 접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는 것’을 알아냈다. 그 후 도서관을 뒤지면서 연구와 연구를 거듭한 끝에 저서을  완성했던 것이다.   찬조 출품작 일본인 스스로는 국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언론인 이토 슌이치(伊藤俊一·65)씨의 말을 들어봤다.   “일본인들은 벚꽂과 국화를 다 좋아합니다. 벚꽃개화시기에 대해서는 뉴스가 많지만 국화에 대한 뉴스는 없습니다. 국화는 일년내내 일본인들의 가슴 속에 담겨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라가 법적으로 정한 국화(國花)는 없습니다" 이토(伊藤)씨는  “벚꽃을 더 좋아하는가?, 국화를 좋아하는가?의 질문에 의미가 없다”고 했다.   우리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일본인들의 국화(國花)는 다른 형태로 각자의 가슴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김회권

지난 11월 5일,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MBS)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는 예멘 내전에 참전했다 부상을 입은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수도 리야드의 한 병원을 방문했다. 왕세자의 얼굴을 보고 감동한 일부 병사들은 그에게 달라붙어 껴안기도 했다. 부상 군인들과 친밀하게 스킨십을 나누는 왕세자의 모습은 방송국 카메라를 타고 사우디 전국에 퍼졌다. 사우디의 절대권력이라던 왕세자의 권위는 여전히 빛나는 듯 보였다.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터키 이스탄불에 위치한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살해된 게 10월 2일이었다. 그리고 MBS는 이 잔혹한 살인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다. 사우디의 설명을 믿지 못하는 이들의 의문은 계속되지만 사우디 미래권력은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병사와 껴안은 왕세자는 보란듯이 텔레비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교체냐 권력 분담이냐 죽음이냐      MBS의 미래는 그의 웃음처럼 앞으로도 문제 없을까. 전문가들의 견해를 모아보면 크게 네 가지 시나리오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카슈끄지 사건 이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시나리오다. 카슈끄지 사건은 결국 정리될 것이고 MBS는 왕세자로 1인 권력을 유지하며 사우디의 미래를 자신의 뜻대로 끌고 나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미국대사를 지낸 투르키 알 파이살 왕자는 이런 의견을 대변하고 있다. 원로 정치인인 그는 “권력 승계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잘못 판단했다. 왕세자에 대한 비판이 서구에서 많을수록 그는 사우디 내부에서 더 많은 인기를 얻는다”고 말했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교체’다. 왕세자 자리를 다른 왕자에게 맡길 수 있다. 선례도 있었다. 살만 빈 압둘아지즈 현 국왕은 2015년 1월 권좌에 오른 뒤 두 번이나 권력승계자를 해임했다. 형제 상속을 원칙으로 삼던 2015년 1월, 살만 국왕의 다음을 잇는 자는 배다른 동생인 무크린 빈 압둘아지즈(72) 왕세제였다. 하지만 3개월 뒤인 4월, 그는 자리에서 밀려났고 조카인 무함마드 빈 나예프 압둘아지즈(59)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 역시 2017년 6월 그 자리를 내려놓아야 했다. 이때 등장해 왕세자 자리를 받은 이가 국왕의 아들인 MBS다.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정보관리책임자를 지낸 브루스 리델은 “많은 왕자들이 MBS 대신 다른 왕자나 가족이 그의 자리에 앉을 때가 됐다고 국왕에게 귀띔하고 있다”고 말했다. 왕을 설득하는 논리는 단순하지만 명확하다. “MBS가 사우디 왕국에 큰 위험이 되고 있다.”      물론 교체라는 선택지가 실현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사우디 전문가인 텍사스A&M대의 그레고리 고스 교수는 “많은 사우디 내 왕족들이 MBS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를 막을 만한 능력이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MBS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필요한 건 왕실 내 지배적 여론이다.      국부이자 초대 국왕인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 국왕이 낳은 40여명의 자녀는 이제 수천 명 규모의 왕족을 이뤘다. 그러다 보니 왕가의 의견을 모을 시스템이 필요했다. 2006년 현 국왕은 왕실충성위원회(Allegiance Council)를 만들었는데 35명의 고위 왕족들은 여기에서 차기 왕권 계승자를 뽑을 수 있다. MBS도 2017년 이들이 뽑았는데 당시 반대표를 던진 왕족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스 교수는 “왕족들은 MBS의 억압적인 방식에 대해서 내게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 세력의 힘을 모아 도전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MBS의 권력을 분담하는 방법이다. 고스 교수는 칼리드 알 파이살 왕자가 사우디의 외교를 담당할 수 있다고 본다. MBS와 다른 파벌에 속한 인물로 카슈끄지 사건이 벌어지자 국왕은 터키에 보낼 특사로 파이살을 선택했다. 국왕의 친동생이자 유일한 생존 형제인 아흐마드(76) 왕자가 10월 30일, 수개월 만에 런던 생활을 정리하고 사우디로 돌아온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아흐마드는 MBS의 통치에 불만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로이터통신은 “아흐마드는 2017년 MBS를 왕세자 자리에 앉힐 때 반대했던 인물이었다”고 전했다. 국왕과 정치적 갈등을 빚어왔지만 왕실의 신뢰는 두터운 편으로 경험이 많은 왕족이 균형추 역할을 하면서 ‘앞으로는 MBS가 혼자 결정하지 않는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 지난 10월 2일 워싱턴에서 열린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추모식. photo 뉴시스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세계가 알게 됐다      네 번째 시나리오는 있어서는 안 될 가장 비극적인 일이다. MBS의 죽음이다. 이미 파이살 국왕(1964~1975 재위)에게 한 번 벌어진 일로 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1965년 텔레비전 방송 송출을 시작하고, 사우디 여성을 위한 교육시설을 만들면서 개혁적 국왕으로 평가받던 파이살은 와하비즘(이슬람 복고주의) 신봉자들과 자주 충돌했다. 1975년 파이살 국왕은 총에 맞아 사망했는데, 총구를 겨눈 이가 개혁정책에 반발한 왕가의 일원으로 그의 조카였다.      제시한 시나리오 중 어떤 것이 현실이 될지는 모른다. 다만 ‘변화’가 동반되는 쪽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사우디 왕가와 가까운 한 자문관은 파이낸셜타임스(FT)에 “사우디 왕가의 원로들이 지금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변화는 독단적 결정을 배제하고 그동안 사라졌던 사우디식 ‘합의’를 재등장시키면서 이뤄진다.      사우디 왕족인 사우드가에서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 합의를 중요하게 여겨왔다. 하나는 왕가의 합의, 다른 하나는 종교계와의 합의다. 그런데 MBS는 이 모든 걸 배제해왔다. 지난해 11월 초 사우디 왕자 11명 및 전·현직 장관 수십 명을 부패혐의로 체포한 ‘리츠칼튼 사태’는 왕가의 일원을 숙청의 대상으로 삼았던 사례로 왕가의 합의를 무시한 경우다. 종교계 역시 여성의 운전과 스포츠 관전을 허용하는 왕세자의 개혁 정책으로 인해 철저히 배제당했고 침묵했다. 두 축의 합의를 무시한 채 이뤄졌던 MBS식 사우디 통치는 소멸시기가 다 된 셈이다. 고스 교수는 “왕세자는 이제 1개월 전처럼 사우디를 다스릴 순 없다. 이는 결국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는 걸 뜻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사우디를 지지해온 미국 등 서방국가에 생긴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작업도 진행해야 한다. 카슈끄지 사건을 계기로 개혁적인 이미지를 덧씌웠던 MBS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세계가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과거 권력교체기마다 왕좌의 난을 겪은 사우디는 외부의 우려 속에 변화를 꾀하며 조용히 갈등을 조정해온 경험이 있다.

장상인

-11월 16일 500여명의 시민들과 첫 만남 가져   깊어가는 가을-빌딩 숲 사이로 불어오는 인천 송도의 바닷바람은 거셌다. 하지만, ‘아트센터인천(Art Center Incheon)’의 앞마당은 열기가 넘쳤다. 지하 2층, 지상 7층, 1천 727석 규모로 세계적 수준인 ‘아트센터인천’의 그랜드 오픈행사에 참여한 500여 명의 시민들 때문이다.   아트센터인천의 외관 2천 6백 억 원이 투입된 ‘아트센터인천’은 기부채납 등 사업시행사간의 복잡한 문제로 오랫동안 문을 열지 못했었다. 그런 가운데 포스코건설이 NSIC(송도국제도시개발회사)의 게일(GALE)사의 지분을 인수함에 따라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문을 열게 됐다.   ‘문화예술은 우리 삶의 일부다.’   박남춘 시장 이러한 아픔을 감안한 듯 박남춘(60) 인천광역시장은 인사말을 통해 ‘아트센터인천’의 오픈에 대한 의미를 심도 있게 설명했다.   “오랜 기다림과 노력 끝에 내딛는 첫 걸음이라서 그 의미가 참으로 각별하게 다가옵니다...그래서 오늘 이 자리는 ‘아트센터인천’이 첫 문을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자리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면서 박남춘 시장은 “문화예술은 우리와 떨어질 수 없는 중요한 삶의 일부분으로 자리잡았다”면서 “아트센터인천이 인천 시민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빛나게 할 것을 믿는다”고 강조했다.   맞는 말이다. 문화예술은 이제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일부다. 우리와 함께할 훌륭한 공연장이 탄생한 것은 인천 시민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축하할 일이다.   인천 교육청 도성훈(58) 교육감의 인사말도 미래 지향적인 의미를 담았다.   “건물외관은 지휘자의 ‘손(手)의 모양’을 착안해서 설계했다고 들었습니다. 참으로 창의성이 돋보입니다. ‘학교 건물도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미래형으로 공간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술과 교육으로 행복한 인천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트센터인천’은 건물 외관이 독특해서 보는 것만으로 예술성이 느껴졌다.   박남춘 시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테이프 커팅 박남춘 시장을 비롯해서 도성훈 교육감 등 주요 인사들의 테이프 커팅은 시민들의 카운트다운에 맞춰서 했고, 동시에 폭죽이 터져서 축제 분위기를 돋우었다. 이어서 관객들이 우르르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형태의 디자인과 조명에도 예술적 분위기에 빠져들게 했다.   유리창 밖의 푸른 하늘과 바닷물은 ‘바다와 하늘, 땅을 잇는 도시 인천의 글로벌’이라는 슬로건과 맞아떨어졌다.   포도밭(Vineyard) 형태로 설계·시공 된 공연장 내부   공연장의 내부 ‘아트센터인천’은 외관 못지않게 내부의 건축음향 설계를 포도밭(Vineyard) 형태로 한 것이 특징적이다. 즉, 낮은 곡면의 무대 천정 반사면은 연주자에게는 무대 음향을 향상시키고, 객석의 청중들에게는 고른 음향을 제공해주도록 설계한 것이다. 공연장의 건축음향 설계를 총괄한 한양대 전진용(60) 교수의 말을 들어봤다.   “이 공연장은 포도밭(Vineyard) 형태입니다. 모든 객석에 시각적·음향적 친밀감을 제공하도록 설계했습니다. 콘서트 홀 내부 벽체는 모두 객석을 향해 음이 반사되도록 하기 위해서 다양한 기울기를 주었습니다. 내부 벽체는 ‘화이트 오크(White Oak)’라는 아주 단단한 나무를 깎아서 제작했습니다. 음향 확산을 고려한 비정형 기하학적 형상으로 설계된 것이지요. 보기보다는 설계적·시공적으로 고난도의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것입니다.”   한양대 전진용교수 전진용 교수는 10여 년 동안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 계절마다 강화도와 송도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연구원들과 현장에서 땀을 흘렸다. 남다른 감회가 서린 듯 그동안의 희로애락을 길게 털어놨다.   “강화도 시험동(試驗棟)에 ‘아트센터인천’의 공연장 형상을 1:10의 축소모형으로 만들어서, 시뮬레이션(Simulation) 작업을 수없이 많이 했습니다. 이를 현장에 적용하기 위해서 강화도와 송도를 제법 많이 왕래했습니다. 저보다도연구원들이 고생을 아주 많이 했습니다. 오늘 대망의 오픈을 맞아 감개무량합니다.”   ‘아트센터인천’ 공연장은 중후한 음악을 느끼도록 음량·잔향·공간감 등 기본에 충실하면서, 어느 좌석에서도 지휘자와 연주자가 의도하는 소리를 공유하도록 설계됐다.   포도밭(Vinyard) 형태는 슈박스(Shoebox)보다는 더 많이 열려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무대를 둘러싸고 있는 객석의 관객과 연주자가 호흡을 함께 하는 것이다. 2,250석 규모의 ‘베를린 필하모니(Philharmonie)’가 포도밭(Vinyard) 형태의 대표적인 공연장이다.   개관 기념 연주는 인천시립교향악단이 해   개관 기념 음악회는 인천시립교향악단(단장 이병욱)의 연주로 시작됐다. 첫 연주곡은 엘가(E. Elgar)의 위풍당당 행진곡 1번. 역시 울림이 좋았다. 첫 곡의 연주만으로도 관객들의 박수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협연은 바이올리니스트와 성악가 두 명이 했다.   개관기념 음악회의 모습 첫 번 째는 2015년 시벨리우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우승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 시킨 크리스텔 리(Christel Lee)가 연주했고, 두 번째는 독일 신문 ‘아벤트 차이퉁’에서 ‘금주의 스타’로 두 번이나 선정된 바 있는 소프라노 이명주가 했다. 마지막 협연은 중앙대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테너 김동원이 했다. 인천시립교향악단은 드보르작(A. Dvorak)의 제9번 ‘신세계로부터’ 4악장을 끝으로 이날의 행사를 마감했다.   특히, 올해 10월에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제8대 음악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취임한 이병옥 씨는 관객들과 호흡을 같이 하는 재치 있는 지휘로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개관 기념 음악회에 참여한 관객들은 얼굴에서도 행복 지수가 높아 보였다. 연주회에 참가한 한 시민은 “많은 공연장을 다녀봤지만, 무대의 연주자와 관객이 지근거리에서 호흡할 수 있는 따뜻한 분위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아주 신선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라고 목소리의 톤을 높였다.   “좋은 향(香)은 멀리가고 오래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술이 주는 감동과 여운(餘韻)은 종종 ‘향기’에 비유되기도 합니다”라는 박남춘 시장의 인사말을 되새기며 공연장을 나섰다. 송도의 갈대들도 ‘아트센터인천’의 역사적인 오픈을 축하하는 듯 바람 따라 ‘윙윙’ 소리를 냈다. 갈대의 생물학적 수명은 1,000년이라고 한다. ‘아트센터인천’도 천년, 아니 그 이상의 세월 시민들과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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