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

▲ 베히스툰 비문세계 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왕은 누구인가? 우리는 흔히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고대 페르시아제국의 다리우스 대왕(기원전 550~486년)이 인류 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왕이다. 그는 기원전 550년경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파르티아 통치자 히스타스페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세 번째 왕으로, 기원전 522년부터 기원전 486년까지 36년간 통치하였다. 그는 서쪽에서 새롭게 등장한 아테네와 기원전 490년 마라톤전쟁을 치렀던 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다리우스 대왕은 제국에 필요한 경제구조, 도로망, 통화 등을 정비하여 인류 최초의 제국을 만들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다리우스에 관한 자료를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저작 ‘역사’에 의존해왔다. 페르시아에 관한 사료를,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그리스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해온 셈이다. 헤로도토스의 해석이 객관적 사실을 표방하고 있지만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시작된 ‘오리엔트 르네상스’로 페르시아 쐐기문자가 판독되기 시작했다. 쐐기문자는 19세기 초 판독될 때까지 1500년 이상 사람들에게 장식으로만 여겨져왔다.      1618년 피구에로아가 고대 페르시아 다리우스 대왕과 그의 후손들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에서 수많은 유적지의 흔적을 보았다. 그리스, 로마의 저자들이 자신들의 작품에서 숱하게 언급했던 바로 그 왕이었다. 그는 이 유적지에서 새로 발견한 알 수 없는 문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문자들은 아람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혹은 아랍어도 아니다. 이들은 삼각형으로 피라미드나 오벨리스크 모양과 거의 유사하다.”      1657년, 필사한 쐐기문자가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당초 쐐기문자는 이집트의 성각문자와는 달리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1700년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히브리어와 아랍어 교수였던 하이드는 이 문자들이 쐐기처럼 생겼다 하여 설형문자(楔形文字·cuneiform)라 불렀다. 영어의 cuneiform은 cuneus(쐐기)+forma(모양)의 합성어다. 1712년 네덜란드의 의사이며 고전학자인 캠퍼가 1686년 유적지를 방문해서 그린 쐐기문자 문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1770년대까지 쐐기문자 판독에는 진전이 없었다. 그러다가 덴마크의 여행가였던 니부르가 페르세폴리스에 써 있는 문자는 모두 세 종류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 세 종류의 문자는 후에 인도-유럽어인 고대 페르시아어, 고립어인 엘람어, 그리고 셈어인 아카디아어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니부르의 작업은 18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쐐기문자 판독의 기초를 놓은 셈이다.      쐐기문자 판독에 첫 진전을 본 사람은 독일 괴팅겐의 고등학교 라틴어 교사였던 그로테펜트였다. 그는 중기 이란어와 산스크리트어, 그리고 고전문헌 등에서 반복되는 관용어구를 대입시켜 1802년 고대 페르시아어를 거의 판독하게 된다. 그가 만든 음절표에 실수가 있었고 그가 대학교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그가 쐐기문자 판독의 선구자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베히스툰 비문의 발견      쐐기문자 판독이 진행되면서 단문보다는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장문의 쐐기문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란의 자그로스산맥의 서쪽 베히스툰산에는 한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영국의 장교이자 외교관인 로린슨(1810~1895)은 1826~1833년까지 인도에 장교로 머물면서 힌디어, 아랍어, 현대 이란어를 배웠다. 그 후 이란 국왕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해 베히스툰산이 속해 있는 케르만자 지방의 책임자로 부임했다. 그는 탁월한 체력과 동네 양치기 소년의 도움으로 1100행 이상이 되는 베히스툰 비문을 모두 베끼는 데 성공하여 판독하였다. 이 베히스툰 비문에 바로 다리우스 대왕의 족적이 남겨져 있었다.       기원전 522년 페르시아 전체는 정치적 혼란기였다. 키루스 대왕의 아들 캄비세스 왕이 이집트 정벌에 나서자 페르시아는 내분에 휩싸였다. 캄비세스의 동생이라고 자칭한 가우마타는 스스로를 왕이라 칭했다. 이 소식을 들고 페르시아로 돌아오는 도중 캄비세스가 시리아 부근에서 죽는다. 베히스툰 비문에 의하면 캄비세스가 말을 타다 칼집이 실수로 벗겨지면서 칼에 허벅지가 찔려 그 상처로 죽었다고 기록한다.      캄비세스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페르시아제국의 10개 속국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이 정치적 혼란기에 페르시아제국 전체의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이가 바로 다리우스다. 그는 페르시아제국의 속국이었던 파르티아 태수의 아들이었으며 캄비세스 왕과 함께 이집트 원정을 갔던 페르시아의 일만용사 중 한 명이었다. 다리우스는 고대 이란인들이 오래전부터 ‘거룩한 산’이라고 불리는 베히스툰산에 자기의 등극 과정을 자세히 새기기로 결심한다. 그는 고대 이란의 아후라마즈다 신에게 비문을 헌사하여 신으로부터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성산에 비문을 새긴 이유      다리우스 대왕은 인류 최초로 제국을 건설하였다. 좌우로는 터키에서 인도, 상하로는 박트리아에서 이집트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박트리아는 힌두쿠시산맥과 아무다리아강 사이에 고대 그리스인이 세운 나라다. 그는 자신의 공적을 이란 중부 베히스툰산 절벽에 새겨놓았다. 베히스툰산은 이란 케르만자로부터 30㎞ 동쪽에 위치한 산이다. 베히스툰산은 독립적인 산이 아니라 케르만자 지역을 감싸며 북쪽으로 계속되는 산맥 중의 일부이다. 하마단 쪽에서 보면 베히스툰산은 평원에 갑자기 생겨난 500m 정도의 산이다. 다리우스가 이곳에 베히스툰 비문을 남긴 이유는 뭘까.      다리우스 왕이 이곳을 고른 이유는 우연이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실제적인 것이었다. 비문과 부조석상을 새기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평평한 바위가 필요했다. 왕의 대로(大路)를 따라 있는 여느 자그로스산맥의 산들과는 달리 베히스툰산은 메데 왕국의 목초지를 포함한 매우 평평한 절벽을 지닌 산으로 쐐기문자를 정으로 새기기가 용이했다. 둘째, 베히스툰산 아래에 메소포타미아나 이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몇 개의 샘터들이 있었다. 왕의 대로를 지나간 수많은 행상들과 병사들이 지친 몸을 달래던 쉼터였다. 이곳을 지나는 모든 군인이나 대상들이 다리우스 부조물과 비문들을 보았을 것이다. 셋째,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러스에 의하면 베히스툰산은 ‘바가스타나’로 불렸다. 바가스타나를 직역하면 ‘신들의 장소’다. 즉 이곳은 오래전부터 성스러운 곳으로 이 근처에서 가로 10m, 세로 10m의 제단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다리우스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신들에게 제사드릴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네 번째, 다리우스 대제가 등극하면서 최고의 정적인 가우마타를 잡아 처형한 곳이 바로 베히스툰산 근처이다. 다리우스에게 페르시아제국의 왕권을 가져다준 결정적 사건인 가우마타 처단을 기념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베히스툰 비문 안에는 그 처단 장소를 ‘메데 지방, 나사야 지방의 시카유바티’라고 말하는데, 그곳이 바로 베히스툰산 뒤로 10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이런 이유들로 베히스툰산은 다리우스 왕이 자신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한 최적지였다.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된 비문    ▲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다리우스 대왕 부조. 베히스툰 비문은 엘람어, 아카드어, 그리고 고대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삼중 쐐기문자 문헌이다. 이 비문은 고대 페르시아제국 왕들이 남긴 비문들 중 가장 길며 역사학적·문헌학적으로 가장 중요하다. 베히스툰 비문은 서양인들이 쐐기문자를 판독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학자들은 이 비문을 ‘고대 비문의 여왕’이라고 부른다. 베히스툰 비문은 바빌론, 수사, 그리고 엑바타나(현재의 하마단)를 잇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연결되는 고대의 중요한 무역로에 위치해 있었다. 이 길을 따라가는 대상무역상들은 지상으로부터 60m 높이의 절벽 위에 새겨진 다리우스의 부조물과 비문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베히스툰산에 다리우스는 자기가 왕으로 등극한 과정을 쐐기문자로 상세히 기록했다. 베히스툰산의 중턱에 비문과 부조물이 있는데 지상으로부터 69m 위의 경사면에 가로 18m, 세로 7m의 크기로 새겨져 있다. 워낙 험한 곳이라 사람이 이를 보려면 지상으로부터 고작 40m 위까지밖에 접근하지 못한다. 1839년 영국 학자 헨리 로린슨은 베히스툰산 정상에서 자일을 타고 내려와 공중에 매달린 채 쐐기문자를 일일이 베꼈다고 한다. 이 비문과 부조물이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이와 같이 난공불락의 지점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베히스툰 비문의 상단 중심에 부조물이 있는데, 실물 크기(173㎝)인 다리우스 대왕과 두 신하인 인타파르나스와 고르바야스, 그리고 다리우스가 정복하여 처단한 10명의 왕들이 새겨져 있다. 이 부조물 위에는 조로아스터교 최고의 신인 아후라마즈다가 강복하고 있다. 이 부조물들의 위아래로는 반란군들의 이름과 행적을 적은 설명문이 세 가지 쐐기문자로 새겨져 있다. 이 부조물의 오른편으로는 다리우스 왕의 등극 과정을 새긴 엘람어 비문이 손상된 채 있고, 왼편으로는 같은 내용이 아카드어로 적혀 있다. 밑은 고대 페르시아어로 적혀 있다. 당초 다리우스 왕도 ‘왕위 찬탈자’에 불과했지만 현란한 업적으로 결국 키루스가 창건한 페르시아제국을 완성하는 왕이 되었다.      베히스툰 비문에서 다리우스 대왕은 캄비세스를 둘러싼 정치적 혼란기를 설명하고 있다. 다리우스 대왕에 따르면, 캄비세스가 그의 친동생 바르디야를 살해했지만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그때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인 가우마타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한다. 즉 자신이 바르디야라고 속이고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받기에 이르렀다.      그때 이집트를 정벌 중이던 캄비세스는 가우마타가 반란을 일으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페르시아로 돌아오다가 자기가 찬 칼에 찔려 실수로 죽게 된다. 이 모든 사건을 감지했던 다리우스는, 자기가 페르시아제국의 패권을 잡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6명의 경호대원과 함께 신속히 가우마타와 그의 군대에 대한 정벌에 나선다. 그는 곧 가우마타를 죽이고 6명의 경호대원의 추대로 페르시아의 왕으로 등극한다.      이러한 기록은 베히스툰 비문 이외의 사료에서는 증명될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캄비세스가 죽은 후 반란이 일어나 페르시아가 혼란에 빠졌고, 다리우스는 그것을 이용하여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페르시아에서의 반란은 도화선처럼 번져 페르시아제국의 모든 나라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다리우스 대왕은 즉위 후 1년간 이런 반란들을 진압하는 데 전력투구하였다.      다리우스는 베히스툰 비문과 부조상의 구성을 고대 근동의 아주 오래된 예술사적 전통에 따라 재현하였다. 그의 부조상과 구성, 그리고 비문들은 이라크와 이란의 국경 지역인 ‘사리-폴리-주합’에서 발견되는 룰루비의 왕 아누바니니의 부조물과 아키드 왕족의 나람신 왕의 비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다리우스 왕은 파르티아의 왕 히스타스페스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이러스나 캄비세스처럼 아케미니드 왕조의 정통성이 결여돼 있었다. 그런 다리우스가 성산 베히스툰에 조로아스터교의 가장 위대한 신 아후라마즈다에게 인정받아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면서 자기의 정통성을 천명하게 될 때, 당시 고대 근동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사적 자료를 이용한 것은 당연하다. 특히 아누바니니 비문은 아누바니니 왕이 새벽별의 여신 이난나로부터 왕권을 상징한 원형을 받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 부조에서 이난나는 2명의 발가벗은 포로를 포승줄로 묶고 있다. 아누바니니 왕은 헬멧을 쓰고 왼손에는 활과 화살을,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이 비문의 배열은 베히스툰 비문의 배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이 없다.         고대 페르시아어를 창제한 다리우스      베히스툰 비문에서 다리우스 왕은 두 명의 신하들과 서 있다. 왼쪽의 신하는 고르바야스로서 페르시아 창을 들고 서 있고, 오른쪽 신하는 인타파르나스로 활을 들고 있다. 아누바니니처럼 다리우스 왕은 왼발로 그의 정적 가우마타를 밟고 있고, 그 뒤로 8명의 포로를 포승줄로 목을 감은 채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다리우스 왕은 스키타이 정벌에서 ‘스쿤카라는 고깔모자를 쓴 반란군’을 잡은 후에는 본래 새겼던 글씨 부분을 삭제하고 스쿤카의 부조상을 첨가했다. 이 모든 일이 아후라마즈다의 허락으로 이루어짐을 강조하기 위해 날개 달린 아후라마즈다가 손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원형을 달고 다리우스 왕을 축복하고 있다. 이처럼 다리우스 왕은 왕권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베히스툰 비문이 계속하여 뭔가를 새겼고, 같은 내용이 당시에 국제 공용어인 아람어로 쓰여져 23개의 페르시아제국의 속국에 보내지게 되었다.      다리우스 왕은 왕으로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문자를 창제한다. 조선의 세종대왕과 더불어 문자를 창제했다고 확실하게 기록을 남긴 유일한 왕이다. 그는 당시 학자들을 동원하여 쐐기문자로 고대 페르시아어를 창제한다. 하지만 다리우스 왕은 페르시아제국의 공식문서에는 당시 고대 근동에서 널리 쓰이던 전통적인 문자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제국의 속국들 간의 원활한 통신을 위해서 이란어가 아닌 셈어인 아람어를 국제공용어로 사용한 것이다. 아람어는 이미 레반트, 이집트, 동부 이란 지역에 통용되고 있었다. 아람어 알파벳은 엘람어나 아카드어의 쐐기문자보다 배우기가 쉬웠다. 베히스툰 비문에 쓰인 또 다른 언어인 엘람어는 페르시아제국의 행정수도 수사를 중심으로 모든 행정·경제 문서에 사용되었고, 아카드어는 지난 1000년 이상 고대 오리엔트의 외교문자로 쓰였다.      페르시아제국은 처음부터 다문화주의와 다언어주의를 표방하였다. 고대 근동의 긴 역사 가운데 처음으로 다언어 비문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페르시아제국의 원동력은 페르시아제국을 창건한 키루스의 다종교주의와 다문화주의, 그리고 다리우스가 표방한 다언어주의에 있었다.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장상인

뜨거운 바다 아타미(熱海)-   일본의 아타미(熱海)는 예로부터 섭씨 90도에 가까운 뜨거운 온천물이 솟아나왔다. 그래서, ‘뜨거운(熱) 바다(海)’라고 명명됐던 것이다.   이처럼 소문난 일본의 유명 온천 지대이지만, ‘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일반인들이 쉽게 가기 어려운 곳으로 인식돼 있다.   필자는 슈젠지(修善寺) 온천에서 일박을 하고서 같은 이즈(伊豆) 반도에 있는 아타미(熱海)행 기차를 탔다. 점심은 역에서 산 도시락(驛弁). 후지산은 언제나처럼 보일 듯 말 듯 모습을 드러냈다가 눈을 맞추면 사라지곤 했다. 약 50분 만에 아타미(熱海)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빠른 시간이었다.   아타미(熱海)역은 열기가 넘쳐났다. 온천의 열기가 아닌 관광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인구 4만 명도 안 되는 곳에 이토록 사람들이 많이 모일까.’   관광객들은 외국인보다는 일본인들이 많았다.   재래시장에서 접한 ‘곤지키야샤’의 이벤트   온천숙 일번지 역에서 나오자 곳곳에 온천이 있었다. 민박, 호텔 공히 온천이 나오는 곳이다.  먼저 관광센터에 들러서 이것저것을 묻고서 가까운 재래시장으로 갔다. 언덕길 시장에는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아타미(熱海)가 해안이라서 알 수 없는 어종(魚種)들이 많았고, 볼거리와 먹거리도 많았다.   복복(福福)의 수욕 온천이곳저곳을 돌아보다가 시장 통에서 아주 작은 온천 하나를 발견했다. 일상적인 족욕(足浴)이 아닌 수욕(手浴)이 특이했다. 이름도 귀여운 ‘복복(福福)의 탕(湯)’. 필자는 어느 관광객에 이어서 그곳에 손을 담갔다. 손가락으로부터 온 몸에 전해지는 온기가 무더위 속에서도 따스하게 느껴졌다. 온천수 옆에는 ‘온천물에 적신 손으로 동자승의 머리를 만져주면 복이 온다’는 재미있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있었다.   깔깔 웃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리자 색상이 화려한 모형 뒤에서 포즈를 취하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일본 근대 문학의 선구자인 오자카 고요(尾崎紅葉, 1868-1903)의 소설 곤지키야샤(金色夜叉)의 테마가 아닌가.’   소설 속 주인공 간이치와 미야가 되어 한 컷- 필자는 벌떡 일어서서 염치불구하고 한 관광객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필자가 소설의 남자 주인공인 ‘간이치(貫一)’가 됐고, 여자 주인공 ‘미야(宮)’ 역은 동행한 아내가 했다.   사진 촬영을 마친 필자는 이정표를 보면서 내리막길을 따라 해안으로 갔다. ‘간이치(貫一)’와 ‘미야(宮)’의 기념비를 찾기 위해서다. 언덕길을 내려가자 멀리 태평양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바닷가의 작은 공원에 ‘곤지키야샤(金色夜叉)’의 주인공 간이치(貫一)와 미야(宮)의 동상(기념비)이 있었다.   간이치와 미야의 동상과 관광객들- 사람들은 동상 앞에서 기념 촬영하기에 바빴다. 필자 역시 카메라 렌즈를 돌리면서 나이가 지긋한 일본인 할머니에게 물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지만 참으로 애절한 사연이지요?”“네. 그렇습니다. 그래도...애절하면서도 아름답지 않아요?”   할머니는 그 옛날의 첫사랑을 생각하는 듯(필자의 추측) 살포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기념 촬영을 하는 할머니들- 이곳은 남자 주인공 간이치(貫一)가 변심한 미야(宮)를 발로 찬 장면이 그려졌던 곳으로 유명하다. 여기에 동상이 세워진 이유이기도 하다.   ‘곤지키야샤(金色夜叉)’는 어떤 소설인가. 1897년부터 1902년까지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의 연재소설이다.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본다.   소설 속으로 한걸음   작가 오자키 고요   소설 속 주인공 간이치(貫一)의 노래도 슬프기 그지없다.   아타미(熱海) 해안 산책(...)동행도 오늘만큼 함께, 이야기도 오늘만큼 함께   내가 학교 끝날 때까지왜? 미야(宮)는 나를 기다리는 것일까.   (중략)   다이아몬드에 눈이 어두워타서는 안 될 가마를 타고 말았구나.   사람은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이 첫째요돈은 이 세상에 돌아다는( 하찮은) 물건이거늘.   한국판 ‘이수일과 심순애’   ‘이수일과 심순애’는 일제 강점기 시절 조중환(1863-1944)이 번안한 장한몽(長恨夢)의 주인공이다. 소설의 원조인 ‘곤지키야샤(金色夜叉)’는 일본의 뜨거운 온천 아타미(熱海)를 배경으로 했으나, 장한몽의 주인공 ‘이수일과 심순애’는 아타미가 아닌 대동강 변 부벽루를 산책하면서부터 전개된다. 부모님의 권유로 이수일과 헤어지는 심순애의 마음도 아프기는 마찬가지다.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본다.   심순애의 이미지(관광객 사진) “어머니, 어떻게 하면 나는 좋아요?”“어떻게 하면 좋아가 다 무엇이냐?...네가 처음부터 그리로 가겠다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일을 지금 와서 또...”“어머니, 수일 씨는 다시 보지 아니하고 바로 그리 갈 터 이야요. 그러하니 그렇게 하여 주시오. 나는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어요.”     그러나, 우리에게 기억되는 것은 배신을 때린 심순애에 대한 이수일의 일갈(一喝)이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토록 좋았단 말이냐?”   원본 ‘곤지키야샤(金色夜叉)’ 속의 명대사도 지금까지 일본인들의 사이에서 회자(膾炙)되고 있다.   “다이아몬드에 눈이 멀어 잘도, 잘도, 나를 배신했구나.” “미야(宮)! 내년 오늘의 달도, 내 후년 그날의 달도, 10년 후의 그날의 달도, 나의 한(恨)맺힌 눈물로 흐리게 해 주겠다.”   여성들의 동상 철거 요구 없어   필자는 아타미 시청 관광과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몇 바퀴 돌더니 담당 직원 구리야마(栗山)씨와 연결됐다. 필자의 질문이다.   “해외에서 관광 온 여성들이 ‘건장한 남자가 연약한 여자를 발로 차는 모습이 흉하다’면서 동상 철거를 요구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런 적이 없습니다. 이메일이나 팩스가 온 경우는 있었습니다. 이 동상은 여성 폄하(貶下)가 아니라 문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 당시 시대 상황이기도 하고요.”   맞는 말이다. 문학은 문학적 가치로 봐야 한다. 자기만의 고정된 생각으로 작품에 내재된 틀을 흔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타미의 날씨는 더욱 뜨거워졌다. 하지만, 태평양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더위를 식혀주었다.   관광지 아타미에서 ‘이수일과 심순애’ 원조와의 짧은 만남이 ‘여행의 백미(白眉)였다’는 생각을 하면서 언덕길을 올라 다시 시장 통의 인파 속에 파묻혔다.  

김승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필자.한독(韓獨) 법률학의 상호 교류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블라우(Blau) 박사의 초청으로 변호사가 120명 정도 되는 독일로펌의 방문 변호사(Visiting Lawyer)로 초청을 받아 차제에 독일 법대를 살펴보고, 또한 가능하면 현지 법대 교수들과 간단한 토론과 세미나 등을 하기 위하여 대망의 프랑크 푸르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록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는 아니하였으나, 글로벌 시대의 도전적인 프로젝트인 스마트 워크시스템의 자체적 점검의 목적도 있었다.   그런데 출발 당일 서울부터 날씨가 좀 흐리더니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리니 비가 제법 왔다. 독일은 기후조건이 좋지 않아 우울증에 걸리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 갑자기 현실감 있게 나타났다. 실제로 비극적인 선택을 한 한국 유학자의 사례는 꽤 유명하다.   그간 세계 여러 국가를 돌아보았지만 정작 법대학문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독일은 생전처음이다. 이는 필자가 독일어를 거의 할 수 없는 점도 원인이지만 독일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시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프랑크푸르트 전철과 지하철 안내판. 그러나 최근에 독일과 프랑스를 비교하면서 의외로 독일이 깔끔하고 조용하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또한 EU의 가장 주도적인 국가이고 제4차 산업혁명의 선도적인 국가로 알려진 독일을 이해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절실하다는 느낌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통독 후의 독일의 시너지효과 등등에 대하여도 한 번 피부에 느끼고 싶었다. 또한 프랑크푸르트가 브렉시트(Brexit)이후에 EU의 가장 촉망받는 금융의 중심도시로 부각되고 있어서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라고 느꼈다. 이런 기회를 제공하여 주시고 조언을 아끼지 아니하신 권대우 한독법학회 회장님를 비롯한 여러 관계자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이번 출장일정은 비교적 장기간이어서 비용절감과 현지 숙소에서의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또한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다는 유럽 배낭여행을 경험하지 못한 필자로서는 종전의 출장과는 혁신적인 변모를 시도하였다.   전철 티겟 구입 기계.모처럼 시간을 내었으니 여러 도전적인 삶을 경험하고자 에어비앤비(AIRBNB)에서 숙소를 정하고 나아가 기차 여행을 통하여 유럽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마음을 먹었다. 이에 따라 먼저 공항에서 현지 SIM카드를 구입하고 전철을 통하여 숙소로 가기로 정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전철 티겟을 사는 것부터 조차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영어로 변환을 겨우하여 일일권을 구입하여 S7과 U7의 노선을 번갈아 탔다. 이 과정에서 본 독일 지하철은 뉴욕보다는 상당히 깨끗하지만 우리 지하철과 비교하여서는 상당히 낙후되어 있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짐을 들고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에스컬레이트가 설치가 되어 있지 아니하여 끙긍거리며 가방을 들고 이동할 수 밖에 없어서 상당히 힘이 들었다.   또한 의외로 표지판이 많지 아니하였고 나아가 필자 역시 이에 익숙하지도 아니하여 연결편의 전철을 찾는 데에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집나가면 고생”이라는 마누라의 충정어린 조언(?)이 새삼 새롭게 와닿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독일 사람들은 의외로 영어 구사력이 뛰어나서 영어로 물어보거나 의사소통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어서 다행스러웠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가 독일에서 범죄 발생률이 가장 높다는 통계를 접하고 내심 긴장을 하였는데 생각보다는 그리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숙소는 다행스럽게도 주택가에 위치하여 조용한 느낌이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주택 등의 모습이 마치 군대의 막사처럼 너무 네모지고 미각적으로 마무리되지 아니한 것 같아 역시 독일병정이라는 고정관념을 되새기게 하기도 하였다.   에어비앤비(AIRBNB)를 통해 구입한 숙소.튼튼하고 실용적인 느낌은 강렬하나 다소 예술적인 느낌은 와닿지 아니하여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있었다. 순간적으로는 베토벤과 같은 세계적인 음악가의 탄생이 신기로울 정도로 까지 확대되어 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물론 건물의 경우에 다소 실용적인 부분이 강조되었으나, 도시 전반의 전체적인 느낌은 목가적이기도 하여 고전음악의 잠재적인 동력을 암시하는 분위기역시 동시에 부분적으로 느낄 수는 있었다.   에어비앤비(AIRBNB)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이어서 신기롭기도 하고 다소 두려움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위험성에 대한 안전장치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과는 달리 독일에서는 에어비앤비(AIRBNB)가 다소 불법적인 영업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아니한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대중이 이용하는 숙박시설이므로 안전 등에 대한 일정한 기준을 충족시키느냐하는 부분에서 다소 미흡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가정집 등이 숙박시설 등으로 사용하게 되면 개인숙박이 아니라 대중의 숙박시설이기 때문에 안전 등의 여러 시설기준의 충족 내지 지속적인 관리부분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데 이 부분이 아무래도 문제점으로 노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째든 일단은 머무르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로 하였다. 밋밋하고 통상적인 호텔의 경험보다는 색다른 느낌이 있는 것 같아 한번 느껴보기로 하였다. 숙소의 호스트가 “일요일은 모든 상점이 문을 닫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오늘 사라”고 하면서 친절하게 자신이 슈퍼마켓에 가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탁하라고 한다.   숙소에서 바라본 공개 키친 모습. 친절에 감사하면서도 이를 정중하게 사양하고 내가 직접 걸어서 한번 방문해보기로 하였다. 걸어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달리 살만한 것은 없어서 대신에 주위에 새로 생긴 점포에서 다양한 맥주를 샀다. 카드로 결제하고자 하였더니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신용카드를 받을 수 없다고 한다.   다소 엉성한 운영을 보니 새로 오픈한 집은 맞는 것 같기도 하면서 한국에서는 이런 현상을 감히 상상할 수 도 없어서 독일의 결제 등 사회지원시스템보다는 한국의 사회지원시스템이 좀 더 잘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호스트로부터 와이파이의 비밀번호를 받아 컴퓨터를 시작하니 이제서야 한국을 비롯한 세상과 소통을 하고 있구나하는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다. 독일의 사용 전압이 230v여서 한국제품을 그대로 사용하는 데에 큰 불편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평소 동경해오던 독일 특히 새로운 금융중심도시로 발전할 프랑크 푸르트에서의 좌충우돌의 새로운 도전과 소중하고 감동적인 추억을 창조할 것을 다짐하면서도 또한 기대해 본다.

박승준

▲ 어린 나무를 페어웨이에 심어둔 베이징의 십삼릉골프장.골프를 중국어로는 가오얼푸(高尔夫)라고 한다.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은 1980년 개혁개방과 빠른 경제발전을 시작하면서 중국의 대도시 부근에 골프장을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골프장이 있어야 외국으로부터 FDI(외국인직접투자)를 순조롭게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그런 덩샤오핑의 지시에 따라 수도 베이징(北京) 근교 명나라 황제들이 묻힌 십삼릉 근처 야산 중턱에 1986년 베이징 국제 가오얼푸클럽이 중·일 합자로 건설됐다. 광둥(廣東)성 중산(中山)시에 이어 중국 내 두 번째의 골프클럽이었다.      베이징에 거주하는 외국인들 사이에 이른바 ‘십삼릉골프클럽’으로 불린 이 국제골프클럽은 건설과 관리가 일본 최고급 골프장 수준으로 이뤄져 조니워커 클래식을 비롯한 국제적 골프대회도 여러 차례 열렸다. 덩샤오핑은 혁명 동지 룽가오탕(榮高棠·1912~2006)을 중국 골프협회 회장으로 앉혀 중국 전역의 골프장과 골프대회 관리를 맡겼고, 자신의 오른팔이던 자오쯔양(趙紫陽·1919~2005) 당 총서기에게 골프를 배워서 주말에는 베이징 근교의 골프장에 나가 골프를 치는 모습을 보여주도록 배려했다. 골프를 개혁개방을 상징하는 스포츠로 양성하려는 것이 덩샤오핑의 생각이었다. 덩샤오핑의 그런 생각에 따라 중국 전역에는 수많은 골프장들이 문을 열었고, 베이징 근교에도 2012년 시진핑(習近平) 당 총서기가 선출되기 직전까지 50여개의 골프장이 문을 열었다. 광둥성 선전(深圳)에는 216홀짜리 세계 최대 골프장이 생겨나기도 했다.      중국의 골프장 건설붐은 시진핑 당 총서기가 반(反)부패운동을 벌이면서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반부패운동의 세부 항목에는 “당 간부와 정부 관료들이 술을 파는 클럽이든 골프클럽이든 호화판 클럽에는 출입하지 말라”는 내용이 포함됐고, 외교부 관리들조차 외국인과 골프장에 나가는 일을 삼가면서 중국 내 골프장들에는 중국인들의 발길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2014년에는 부실 골프장에 대한 조사를 구실로 전국 66개 골프장의 영업을 중단시켰고, 베이징 근교에 있는 3개의 골프장도 영업을 중단했다. 2015년에는 12개의 골프장이 조사 대상으로 추가 발표됐는데, 이때 전국 최우수였던 베이징 십삼릉골프장도 포함돼 영업을 중단했다.      문제는 중국 내 골프장 영업 중단이 회원들에게 제대로 된 설명이나 통보 없이 갑자기 이뤄졌다는 점이다. 십삼릉골프장의 경우 회원권 가격이 한창 때는 210만위안(약 4억원)까지 올라갔는데 그런 회원권을 보유하고 있던 회원들이 어느 날 골프를 치러갔다가 골프장 출입문이 잠겨 있어 놀라는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은 골프장 영업 중단이 풀렸는가를 알아보려고 차를 타고 진입로에 들어가는 동안 페어웨이에 어린 나무가 촘촘하게 심어져 있는 광경을 보고 또 한 번 놀라기도 했다.       화가 난 회원들은 수소문을 해서 골프장 관계자를 찾아내 항의했지만 들을 수 있는 말은 “골프장 소재지의 구청(區廳)이 나무를 심으라는 지시를 내려 할 수 없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었다. 회원들은 창핑(昌平)구 구청을 찾아가 항의를 했지만, 구청 당국은 “그런 지시 내린 일 없다.… 골프장 일은 골프장 측에 물어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골프장이 영업을 중단한 지 1년 반이 넘도록 회원권 보상은 물론 아무런 공식 설명 없이 “골프장 영업이 중단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일본인과 한국인 회원들이 자신이 아는 정부 관리나 중국공산당 간부에게 물어보자 희한한 대답이 돌아왔다. “골프장 진입로가 폐쇄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 골프장 클럽하우스로 진입하는 철문이 잠겨 있는 상태이고 페어웨이에는 어린 나무들을 심어놓았지만 골프장 측이 철문에 내건 안내문에는 ‘잠정(暫停·일시 영업중단)’이라고 되어 있지 않느냐. 폐업과는 다른 개념이다. 조급해 하지 말고 기다리면 영업이 재개될 날이 올 거다. 페어웨이에 심은 나무야 뽑아버리고 다시 정리하면 될 것이니 큰 문제가 아니다.”      무려 4억원에 가까운 회원권을 사서 묵혀두라는 말에 중국 내 외국인들의 마음은 편치가 않다.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이라던 골프가 “개혁개방을 심화시키겠다”고 외치고 있는 시진핑 정권에서 찬바람을 맞고 있는 현실에 회원들은 마주 앉으면 불평을 한다. 외교부 관리가 외국인과 함께 골프를 치러가는 것은 유일하게 허용한다지만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 선뜻 골프를 치려는 외교부 관리는 없다. 개혁개방의 바람을 타고 너도나도 골프를 배워 주말이면 골프장에 나가던 주한 중국대사관 외교관들도 요즘은 골프 이야기조차 입밖에 꺼내지 않는 분위기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들이 있었다. 우리의 경우도 골프를 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미군들과의 사교를 위해, 경제발전에 필요한 개방적인 분위기를 위해 골프를 배워 치기 시작하면서였고, 이와 함께 골프장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우리의 골프는 아이러니하게도 문민 대통령임을 자부하던 김영삼 대통령 취임과 함께 찬 서리를 맞기 시작했다. 김영삼 대통령 집권 초기인 1993년 4월 13일자 조선일보 사설은 ‘골프 불협화음’이란 제목으로 대통령과 총리, 그리고 집권당을 질타했다.      “골프 치는 문제를 둘러싼 청와대와 총리실과 민자당의 3각 혼선을 보면서 우리는 새 정부의 사정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며, 동시에 이 나라에 신권위주의가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골프가 도대체 무슨 중요한 국사이길래 한 나라의 대통령과 총리와 집권당 대표가 서로 쳐도 좋다, 아직 안 풀렸다, 누가 치라고 그랬느냐는 따위의 지극히 비생산적인 화제에 휘말려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국가 중대사도 아닌 골프 따위의 문제로 한 나라를 운영하는 책임자들이 우왕좌왕하며 눈치 보기 급급한 요즘의 상황은 한마디로 우습고 언짢고 불유쾌하기 그지없다.”      우리에게는 언론의 자유와 정부에 대한 비판이 허용되지만 중국은 다르다. 헌법에 보장된 언론자유는 있지만 “혁명의 완성은 총과 펜을 다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마오쩌둥(毛澤東)의 교시에 따라 국내 정치 비판이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중국 내 외국인들의 경우 비싼 회원권 가격에 대한 보상 없이 무기한 계속되는 골프장 영업중단으로 불평의 소리가 높지만 그런 외국인들의 불만을 보도해주는 매체는 없는 실정이다.

우태영

CNN은 지난 22일 월가 출신으로 트럼프 대통령 경제 자문역을 했던 앤서니 스카라무치가 러시아 국영은행이 운용하는 러시아투자펀드에 투자했다고 보도했다. CNN은 그러나 이 보도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자, 철회했으며 3명의 기자는 사임했다.    CNN은 26일 "지난 22일 나갔던 해당 기사는 삭제됐고 기사와 관련됐던 세 명의 사의를 받아들였다"고 발표했다.  내부 조사 결과 이 기사는 단 한 명의 '익명의 정보원'을 인용해 썼고, 규정상 필요한 '사실 확인'(fact check)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기사를 쓴 토마스 프랭크, 탐사보도팀장 에릭 리치블라우와  총괄책임자 렉스 해리스가 회사를 떠난다고 CNN은 발표했다.   사라 허커비 샌더스 보좌관은 27일 백악관기자회견에서 "이번 일은 모든 언론매체와 모든 기자들의 수치다. 언론의 뉴스 보도를 믿지 못하는 나라라면 미국은 위험한 나라일 수 밖에 없다. 특히 위에서부터 시청률만 의식해서 가짜 뉴스를 만들어 내는 언론사라면 그건 더욱 무서운 일이다"라고 주장하다 기자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CNN 등 진보적인 언론들과 대립관계에 있던 트럼프 대통령은 사건 직후 관련된 트윗을 3편이나 올렸다.    - 와우, CNN은 “러시아”에 관한 중요한 기사를 철회해야만 했습니다. 직원들 3명은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모든 다른 가짜 기사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할 건가요? 가짜뉴스들(FAKE NEWS)!    - 가짜뉴스 CNN (Fake News CNN)은 지금 대규모의 경영진 교체를 모색중입니다. 러시아에 관련된 허위기사를 밀어붙이는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CNN의 시청률은 하락하고 있습니다.   - 가짜뉴스 CNN (Fake News CNN)은 곤경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NBC, CBS, ABC 방송은 어떤가요? 저물어가는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요? 그것들 모두가 가짜뉴스들입니다!   CNN의 트럼프-러시아 밀약 관련 기사는 모두 허위라고 주장하는 CNN의 PD   한편 트럼프의 트윗 등에서는 지지자와 반대자들 간의 토론이 뜨겁게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허위보도를 일삼는 CNN을 공항 등 공공시설에서 퇴출시키라고 주장한다. CNN의 트럼프-러시아 관련 보도는 모두 허위라는 CNN의 한 PD의 주장도 있다.   반면에 언론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면 권위주의 체제가 될 우려가 있다는 주장도 올라온다. 트윗내용을 옮긴 페이스북에는 1만개 이상의 댓글이 달렸다.

유슬기

    “이 지역은 더워질 것이고, 또 저 지역도 더워질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모두 더워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구의 미래는 어떻게 되나요?” “지구에 미래는, 없습니다.” 배우 브래드 피트가 기상캐스터가 됐다. 6월 8일 ‘짐 제프리 쇼’에 출연한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파리기후 협정 탈퇴’를 이렇게 풍자했다. 배우이자 환경문제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 온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지구의 생존력은 위협당하고 있고, 우리의 미래는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고 SNS에 남겼다.   전기차 테슬라와 스페이스X 프로젝트 등을 운영하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트럼프 경제 자문회의 위원직을 내놓겠다고 했다. 마크 주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도 “이는 아이들의 미래를 해치는 일”이라고 반발했다.   지구의 이익 vs 미국의 이익   “파리기후변화협약은 미국에 불이익을 가져다줍니다. 저는 피츠버그(미국의 제조업 도시)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대통령이 됐습니다.” 지난 6월 1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파리기후협약 탈퇴를 선언하면서 한 말이다. 기후협약을 찬성하는 사람이든 반대하는 사람이든 ‘이익’에 대해 말한다. 전자는 지구의 이익이고, 후자는 나라의 이익이다.   파리기후협약은 2020년 만료되는 ‘교토의정서’의 뒤를 잇는 국제 환경 협정으로 2015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체결됐다.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를 줄여서 지구 온난화를 막자는 의미에선 교토의정서와 같다. 파리협약은 당시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북한을 포함해 서명국이 195개국이나 된다는 점에서 37개국에 불과한 교토의정서와 다른 무게감을 지닌다. ‘2030년까지 서명국들이 감축할 ‘온실가스 목표량’과 ‘이행 강제성’을 담았다는 점에서도 파리협약은 진일보했다.   미국 뉴욕 UN본부에서 열린 '파리협정 고위급 서명식'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한 윤성규 환경부 장관이 22일(현지시각) '파리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다. 단일 국제협약에 하루 동안 가장 많은 국가(175개국)가 서명한 기록을 남긴 이 날 서명식에서 한국의 윤성규 장관은 139번째로, 북한 리수용 외무상은 76번째로 서명했다. 교토의정서를 대체하며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지난해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196개국이 합의한 파리 기후변화협정은 55개 이상의 국가가 비준하고 비준국의 국제기준 온실가스 배출량 총합 비중이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55% 이상이 되면 발효된다. 이 협정은 예상보다 빠른 2020년 전에 발효될 전망이다._뉴시스 마침내 지난 11월 발효된 파리협약은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혁명 전보다 섭씨 2도 이상 오르지 않도록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내용을 담았다. 중국에 이어 온실가스 배출순위 2위인 미국은 2025년까지 온실 가스 배출량을 26%에서 28%까지 줄이기로 했다. 트럼프는 이 합의를 거부했다. 세계기상기구(WMO)는 미국의 협약 탈퇴로 인해 이번 세기 안에 지구 평균 기온이 0.3도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0.3도가 오르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지구의 온도가 0.3도 오르는 것은 체감온도와 다르다. 평균기온이 1도 오르면, 생물종의 25%가 멸종한다. 마이클 만이 쓴 누가 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가>의 저자는 “지구 온난화란 집에 불이 났다는 것이다. 경보음이 누차 울리는데 관련 정책은 마비상태다”라고 썼다.   지구 온도가 0.3도 오르면 일어나는 일   그렇다면 파리기후협약 탈퇴는 ‘미국의 이익’에 도움을 줄까. 미국 국민의 59%는 기후협정탈퇴를 반대했다. 미국 내 12개 주 정부는 ‘미국 기후 동맹’을 결성해 독자적인 대응에 나섰다. 이 중에서는 트럼프가 지켜주겠다고 공언한 ‘피츠버그’도 포함돼 있다. 피츠버그는 미국에서 석탄생산량이 가장 높고 교통망이 좋은 ‘제조업의 도시’였다. 1940~1950년대는 이 도시의 전성기였다.   1980년대 철강산업이 무너지면서 도시도 하락세를 걸었다. 실업률이 20%를 넘어섰고 환경문제로 인한 질병 감염률도 높았다. 피츠버그는 도시의 재건을 위해 청정에너지의 투자를 확대하고, 무너진 자연의 복구를 위해 ‘녹색 지붕’을 만들었다. 도심의 숲은 도시를 되살리는데 심장역할을 했다. 2000년 이후 피츠버그는 미국에서 가장 살기좋은 도시가 됐다. 피츠버그의 페두토 시장은 트럼프의 “나는 피츠버그의 대통령”이라는 발언에, “피츠버그는 파리협정을 따르겠다”고 대응했다.   애플, 구글, 페이스북 등의 28개 기업은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에 반대했다. ‘청정에너지 사업에 투자하는 것이 더 많은 일자리를 지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메이저 석유기업도 난색을 표하고 있다. 엑손 모빌 등은 협약탈퇴와 규제완화가 화석연료산업에 도움을 줄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어려움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규제가 풀리면 중동 산유국 등이 생산량을 늘릴 것이고, 이 경우 가격이 폭락하는 악순환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보호하려던 석유, 가스, 석탄 기업에도 난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미국의 탈퇴 소식에 웃음 짓는 나라는 중국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가 버린 ‘기후 리더’의 자리를 시진핑이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앞으로 클린 에너지 산업인 수상 태양광 발전소 등에 397조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IT전문지 ‘매셔블’은 “클린 에너지의 리더가 되려는 중국의 야심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대형 프로젝트”라며 “미국이 차버린 리더의 자리를 중국에 차지하려 한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반전카드, 중국의 승리? 실제로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최근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 환경 장관 회의에서 중국은 클린 에너지 국가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했다. 세계 석탄 소비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은 여전히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의 최대 배출 국가다. ‘오염국가’의 오명을 쓰고 있는 중국 정부는 올 해 1월 100개의 석탄 화력 발전소 건설 계획을 폐기했다. 피츠버그를 비롯해 ‘러스크 벨트’는 트럼프와 공화당의 유력 지지기반이었다. 미국 중서부의 쇠락한 제조업 지대다. 일자리를 명분으로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것은 최근 ‘러시아 스캔들’, ‘코미의 폭로’ 등으로 수세에 몰린 트럼프의 반전카드라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공화당 일부 의원과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은 “미국과 산업을 위한 상식적인 결정”이라는 성명을 냈다.   트럼프의 반전은 미국의 반전이 될까. 미국의 반전은 지구의 반전이 될까. 복잡한 방정식에 제프리 삭스는 이런 해석을 내놓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이슈에 대해서 내가 아는 가장 무지한 사람이다. 중국은 기후변화와 싸우고자 하는 의향을 재확인하고 다른 나라들과 협력할 것으로 기대한다. 지정학적으로, 미국은 협약에서 탈퇴함으로써 약해질 것이다”  

장상인

도리쓰 료지 씨“조선반도의 남단 부산의 서쪽에 웅천(熊川)으로 불리는 장소가 있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축성한 성(城)을 한국에서는 왜성(倭城)이라고 부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왜성을 축성하고 2-3년 체재 했습니다. 분로쿠(文祿) 2년(1593년) 12월 나가사키로부터 사제 세스페데스(Cespedes)와 일본인 수사 한칸 레온(Hankan Leon)을 불러 그곳에서 미사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규슈의 야쓰시로(八代) 시립박물관 학예원 도리쓰 료지(鳥津亮二·40)씨가 ‘시리즈 재검증,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강연회에서 발표한 내용이다(小西行長/ 구마모토 우도시 발행).   세스페데스 신부(神父)의 나이는 불혹을 넘긴 42세였고, 한칸 레온은 신부보다 12-3세가 더 많았다.   한국판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   도리쓰(鳥津)씨는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에 최초로 발을 디딘 사람으로 한국판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 일본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래한 인물)이다”고 했다. 그리고,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제1군에 고니시(小西)를 비롯해서 규슈의 아리마(有馬)와 오무라(大村) 등 크리스천 다이묘(大名)들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웅천왜성의 잔재 사실이다. 고니시 부대에는 크리스천 다이묘들이 많았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는 웅천왜성 완공을 눈앞에 둔 시점에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스페인 출신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를 웅천왜성에 초청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1593년 12월27일 웅천에 상륙해서 1595년 6월 초순까지 1년 6개월가량 머물며 웅천왜성과 주변성에 있던 왜군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미사 집전과 교리 강론을 하고 이교도(異敎徒) 병사들에게도 세례를 주는 등 목회활동을 했다.   도리쓰(鳥津) 씨는 세스페데스의 조선 방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조선 최초의 미사 집전지('고니시유키나가'에서 발췌)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에도 필히 그리스도교를 포교하고 싶다’는 열의를 가지고 몇 번이나 웅천왜성을 벗어나 조선 사람들에게 접근하려고 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도리쓰 씨는 실제로 조선 최초로 미사가 집전된 곳을 방문해서 그 사진을 책에 실었다. 그의 말이다.   “세스페데스의 미사에 대한 내용은 프로이스(Luis Frois, 1532-1597)의 기록에도 확실하게 쓰여 있습니다. 역사학자 입장에서 보면 종교를 떠나 중요한 팩트(fact)입니다.” 그리고, 그는 ‘고니시의 행동이 여기에 이르기까지 국경과 시간을 초월해서 영향을 미친 것은 대단한 일이다’고 했다. ‘조선을 침략한 부분은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하면서.   종군(從軍) 신부라고 할 수 없어   세스페데스 신부와 한칸 레온(창원의 세스페데스 공원) “세스페데스와 그의 동반자 한칸 레온을 소위 종군(從軍) 사제로 부르는 것은 성격적으로 맞지 않는다. 자신의 의사와 반해서 가정과 가족으로부터 무리하게 격리되어 전쟁터로 끌려 나간 병사(兵士)들에게 목회를 하기 위해서 초청된 것에 불과하다.”   ‘루이스 메디나(Juan G. Ruiz de Medina)’ 신부의 저서 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이 책은 그 당시(1566-1784)의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역사학자들에게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의 방한 활동은 그와 친분이 두터운 고니시 유키나가 등 다이묘들의 요청에 따라 비밀리에 취해진 것이었으나,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의 방해에 의해서 ‘조선을 넘어 명나라에서 선교 활동을 하겠다’는 큰 뜻이 좌절되고 말았다. 결국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을 떠나게 되었다.   이는 필자가 (1)편에서 제시한 외국어대 박철 교수의 주장과도 맥(脈)을 같이한다. 그 후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 땅을 다시 밟지 않았다.   고쿠라(小倉)에서 쓰러져   세스페데스 신부-   60평생 중 일본에 머무른 기간만 34년이다. 그는 죽는 날까지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다녔다. 1611년 12월 어느 일요일 아침, 나가사키(長崎)에서 관구장 신부를 알현하고 고쿠라(小倉: 현 北九州)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중 나온 사람들의 영접을 받으면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유명하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필자는 오쓰보 시게타카(大坪重隆)씨의 안내로 후쿠오카에서 기타규슈로 갔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 ‘오래된 교회가 있었다’는 기억을 더듬으면서 차를 몰았다.   골목길을 돌고 돌아서 천신만고 끝에 교회를 찾았다. 가톨릭 고쿠라(小倉) 교회였다. 필자는 반가워서 ‘바로 여기로다’ 하고 교회로 들어갔으나 신부님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혹시, 세스페데스 신부님 묘지가 여기에 있나요?”“없습니다.”   세스페데스 신부가 생을 마감한 1611년은 암운(暗雲)의 시기였다. 성당이 파괴되고 사제들은 추방됐다. 1614년에는 크리스천 금교령이 내려졌으며 교회도, 관계자들의 묘지도 모두 파괴됐다.   세스페데스 신부의 흔적...묘지도 사라져   “제가 생각했던 대로 세스페데스 신부의 흔적은 모두 말살(抹殺)되었을 것입니다.”   오쓰보(大坪)씨도 숨을 길게 내쉬면서 말했다.   세스페데스 신부의 유해는 크리스천을 탄압하던 막부(幕府)에 의해서 바람 처럼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또 다른 사실. 그곳은 고쿠라 교회 소속의 ‘가가야마 하야토(加賀山準人)’의 순교(殉敎)를 기리는 곳이었다. 그는 1576년 10세의 어린 나이에 예수회의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디에고(Diego).   가톨릭 고쿠라 교회의 역사에 대한 안내문 막부의 기교(棄敎)를 거부하던 ‘가가야마(加賀山)’는 1619년 10월 15일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다섯 번 부르면서 참수 당했다. 54세의 나이에.   17세기 전반 막부의 크리스천 탄압에 의해 순교한 일본인 신도 188명이 바티칸에 의해서 ‘복자’로서 인정됐다. 그들은 오랜 세월 어둠 속에 묻혀 있다가 빛을 볼 수 있게 됐다. 2008년 11월 24일의 일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가가야마 하야토(加賀山準人)가 세스페데스 신부와 관련이 있는 기록을 찾은 것이다. 가가야마(加賀山)가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세스페데스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모범적으로 젊은 고쿠라 교회 공동체 만들기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래도 헛걸음은 아니였다’는 생각을 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가가야마 하야토의 송덕비 교회 앞의 순교 송덕비(顕彰碑)에 새겨진 ‘바다의 사랑에 부쳐(寄海戀)’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가가야마 하야토(加賀山準人)’가 작은 배로 처형장 아래에 도착해서 개종(改宗)을 요구하는 관리에게 자신의 마지막 심경(心境)을 토로한 일수(一首)로 알려지고 있다.   “천길 만길 깊은 사랑의 바다는 저기로다.이 마음 전하면 좋으련만 말조차 떠오르지 않도다.”

조성관

지난 5월 8일 이후 세계인의 화제는 단연 프랑스 대통령 부부의 러브스토리다. 대통령 당선자 에마뉘엘 마크롱(40)과 퍼스트레이디 브리지트 트로뉴(64).      두 사람의 인연은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크롱이 지방의 고교 재학 시절 트로뉴는 문학 담당 교사였다. 트로뉴는 연극동아리 지도교사로 있으면서 고교 2년생인 마크롱을 만났다. 트로뉴는 당시 은행원 남편과의 사이에 자녀 셋을 두고 있었다. 마크롱과 트로뉴는 서로에게 끌려들어갔다. 학생과 교사 간의 사랑은 흔한 일이지만 두 사람 사이의 교감은 차원이 달랐던 것 같다. 마크롱은 자서전에서 “우리는 서로의 지적인 매력에 압도됐고, 점차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했다”고 썼다. 마크롱이 부모의 권유에 못 이겨 파리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잊지 못했다. 트로뉴가 2006년 남편과 이혼하면서 두 사람의 만남은 다시 이어졌고, 2007년 두 사람은 결혼했다. 트로뉴 나이 쉰네 살.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였다.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인들은 이 러브스토리를 한국에서처럼 특별하게 받아들이진 않는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선 충격 그 자체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마크롱의 사랑을 한국 남성의 관점에서 보자. 인터넷 우스개 중에 이런 게 있다. 20대 남자가 여자를 선택하는 최우선 기준은 ‘예쁜 여자’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이 기준은 변하지 않는다. 50대 남자 역시 ‘예쁜 여자’다. 한국처럼 여성을 겉모습, 즉 외면(外面)으로만 평가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 없다. 그 증거는 헤아릴 수도 없다. TV 뉴스 여성 앵커는 30대를 넘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뉴스앵커만 그런가. 기상캐스터 역시 외모가 최고의 선발 기준이다. 대놓고 외모로 차별한다. 그러다 물광 피부의 윤기가 마르면 어느 순간 팽(烹)당한다.      마크롱을 보면서 떠오른 사람이 프랑스 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 마크롱은 “아내가 없었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발자크에게 트로뉴 같은 여성이 베르니 부인이었다. 표절·짜깁기 삼류 소설이나 써대던 스물두 살 발자크 앞에 마흔다섯 베르니 부인이 나타났다. 베르니 부인은 자녀가 일곱 명이나 되었고 손주까지 있었다. 발자크와 베르니 부인은 나이 차를 뛰어넘어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했고 이것이 발자크를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두 사람은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베르니 부인은 죽는 순간까지 작가를 격려하고 보살폈다. 발자크는 위대한 소설가가 되고 나서 베르니 부인을 이렇게 상찬했다.      “그녀는 내게 어머니, 여자친구, 가족, 동반자, 충고자였다. 그녀는 나를 작가로 만들었고, 젊은 나를 위로해주었으며, 내게 취향을 마련해주었고, 누이처럼 함께 울고 웃었다.… 그녀는 내게 자부심을 일깨워주었다. 내가 살아있는 한 이 점에 대해 그녀에게 감사한다. 그녀는 내게 모든 것이었다.”      두 사람이 특별한 관계로 발전한 곳이 파리 교외의 빌파리시스시(市). 발자크 가족이 살던 집터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기념비의 플라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의 문학적 영혼이 이곳에서 싹터서 프랑스 소설의 아버지가 되도록 했다.’      마크롱은 여성의 깊은 내면(內面)을 볼 줄 아는 남자다.

신상목

예로부터 지도는 권력의 상징, 부의 원천, 문명의 척도였다. 서구는 ‘cartographer(지도제작자)라는 단어가 별도로 존재할 정도로 지도 제작에 의미를 부여한 문명이었다. 대항해시대 탐험대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새로운 루트를 발견하고 그 정보를 그래픽으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발견의 시대(age of discovery) 또는 탐험의 시대(age of exploration)로 일컬어지는 15~17세기, 서구 문명의 지도는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나침반, 망원경, 육분의(六分儀 ; sextant)의 등장으로 관념과 추정을 배제한 실측에 의한 정교한 작도가 가능해졌고, 지동설에 기반한 지구(地球) 개념 확립으로 경도, 위도의 좌표(coordinates) 시스템과 삼차원 정보를 이차원 평면에 옮기는 투영법(投影法)이 발전하였다. 이는 지구의 지리공간 정보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발상의 전환을 의미한다. 지도가 정교해질수록 서구 문명은 세계로 뻗어 나갔고, 세계로 뻗어 나갈수록 서구 문명의 지도는 더욱 정교해졌다. 근대 지도의 발전은 서구 문명의 전세계적 확산의 원동력인 동시에 결과물이다.     지도는 천문, 지리를 포괄하는 과학적 사고의 집약체이다. 어떠한 나라의 각 시대별 지도를 살펴보면 그 나라의 과학기술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지도는 단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이다. 19세기말에 근대 작도법이 아닌 자체 방식으로 상당한 수준의 지도를 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은 (유럽 문명을 제외하면) 조선의 과학기술 수준이 당시 세계적 수준에 비추어 보아 손색이 없었음을 시사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조선에 〈대동여지도〉가 있다면, 에도시대의 일본에는 〈이노즈(伊能圖)〉가 있다. 〈이노즈〉란 에도 후기 측량가인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가 제작한 일본 최초의 실측 지도이다. 정식 명칭은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圖)〉이다.       은퇴 후 시작한 천문학 공부    제작자인 이노는 본래 지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상인이었다. 1745년 출생 당시 본래 이름은 진보 산지로(神保三治郞)였다. 양친의 사망으로 17세 때인 1762년 작은 양조장을 운영하는 이노(伊能) 집안에 서양자(壻養子)로 입적되어 이노라는 성을 얻는다. 이노는 영민하고 수완이 좋은 사업가였다. 망해 가는 조그만 양조장을 궤도에 올려놓고 땔감(장작) 도매상, 미곡 중개상 등 사업 영역을 확장하여 거부(巨富)를 쌓는다.    이노는 50세가 되는 해에 장남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은퇴한다.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그는 평소에 관심이 있던 천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에도(江戶)로 거처를 옮긴다. 에도로 간 그는 당시 천문학의 1인자이자 천문방(天文方·막부의 공기관으로 천문 관측 및 역(曆) 제작을 담당)을 맡고 있던 다카하시 요시토키(高橋至時)의 문하생이 된다. 30대 초반의 다카하시는 50대 이노의 청을 듣고 노인의 도락(道樂)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입문 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형설지공으로 천문학을 공부하는 이노에게 크게 감복한 다카하시는 이노를 ‘스이호센세이(推步先生·推步는 별의 움직임을 관측한다는 말)’라 부르며 연령을 초월한 돈독한 사제 관계를 맺는다. 천문학에 심취한 이노는 거액을 들여 관측 도구를 구입, 에도의 자택을 아예 천문관측소로 개조하였다. 그의 천문 관측은 취미 생활을 넘어 전문가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일본 최초로 금성이 일본의 자오선을 통과하는 것을 관측하여 기록하는 개가(凱歌)를 올리기도 했다.     당시 천문방은 기존의 역(曆)을 개정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책임자인 다카하시는 새로운 역인 ‘간세이레키(寬政曆)’를 완성하였으나 스스로 불만이 있었다. 당시 지식으로는 지구의 크기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역을 계산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과학자들은 네덜란드로부터의 전래를 통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으나 자오선(子午線 ; 북극과 남극을 지나는 가상의 선) 1도의 거리를 확정하지 못하고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었다. 보다 정확한 역 제작을 위해서는 지구의 크기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이 천문연구자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었다.    이노는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 평소 측량이 제일 관심사이자 취미였던 이노는 거리를 알고 싶다면 측량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구상 두 지점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북극성이 관찰되는 각도를 측정한다. 두 각도의 차를 비교하면 위도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측정 지점 간의 거리를 정확히 알면 위도의 차이를 대입하여 지구의 외주(外周)를 계산할 수 있다.”    이노의 발상에 당대의 최고 과학자 다카하시도 동의했다. 다만, 이 구상은 한 가지 난점이 있었다. 북극점 관측 지점 간 거리가 관측의 오차를 줄일 수 있도록 상당히 멀어야 하며, 또한 그 거리가 정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리는 주어졌지만 실행이 문제였다. 이대로라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로 끝나 버릴 탁상공론이지만, 이노는 생각이 달랐다. 측량 마니아 이노는 직접 에도에서 일본의 북쪽 끝단인 에조치(蝦夷地·홋카이도의 옛 명칭)까지 걸어서 그 거리를 실측하겠다고 결심한다. 이 결심이 인류 문명사에 남을 위대한 지도의 탄생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이노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했다.      17년에 걸친 10차례의 측량 여행  이노즈의 대지도 214장을 합친 모습. 이노즈 원본은 1873년 황거(皇居)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것은 미국 의회도서관 등에서 발견된 사본이다.  당시 홋카이도는 금단(禁斷)의 땅이었다. 막부의 허가 없이는 발을 들일 수 없다. 다카하시, 이노 사제(師弟)는 지도 제작을 명분으로 떠올린다. 18세기 말 이래 홋카이도 지역은 러시아의 접근으로 막부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였다. 홋카이도 동단에 위치한 네무로(根室)에 러시아 특사가 찾아와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고, 북쪽 연안 일대에 러시아인들이 무단 상륙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국방의 관점에서 홋카이도 일대의 정확한 지도 제작 필요를 느끼던 막부는 다카하시와 이노에게 홋카이도 측량을 허락한다.     1800년, 이노는 에도에서 홋카이도를 목표로 측량 여행에 나선다. 이노가 55세 되던 해였다. 총 9인으로 구성된 측량대가 4월 에도를 출발하였다. 5월에 홋카이도에 도착하여 8월까지 해안 일대의 측량을 마치고 10월 에도로 복귀하는 총 6개월의 여정이었다. 측량 기간 동안 낮에는 하루 평균 40km씩 이동하며 측량을 하고 밤에는 천문 관측 기록을 남기는 강행군이었다. 이노는 측량 여행 중 매일같이 일기 형식의 기록을 남겼다. 귀경 후 3주에 걸쳐 측량 데이터를 기초로 지도를 제작, 12월에 막부에 제출하였다.    이노 지도의 정확성과 치밀함에 감탄한 막부는 이노의 공을 치하하고 동(東)일본 전체에 대한 지도 제작을 이노에게 의뢰한다. 지구의 크기 계산을 위해 나섰던 실측 여행이 이노도 알지 못하였던 천부적 지도 제작 능력을 끌어낸 셈이었다. 이를 계기로 이노는 본격적인 전일본 해안선 측량 여행에 나선다. 1800년 제1차 측량부터 1816년 제10차 측량에 이르기까지 총 17년에 걸친 집념의 대여정이 계속되었다. 마지막 여행인 10차 실측에서 돌아왔을 때 이노의 나이는 고희(古稀)를 훌쩍 넘은 71세였다.       봉인된 지도  에도 막부는 이노 다다타카의 업적을 기려 이노 부자(父子)를 칼을 차는 무사로 신분을 높여 주었다.  1817년, 이노가 1차 측량에서 수집하지 못한 홋카이도 해안의 측량 데이터를 제자의 도움으로 마저 확보한 이노는 그동안 모은 데이터를 기초로 전일본지도 제작에 착수한다. 각 데이터에 기초하여 지역별 지도를 제작하고 이를 하나로 연결하는 작업이다. 이노의 관심사는 일본열도의 해안선을 최대한 정확히 지면(紙面)에 표시하는 것이었다. 정확한 해안선은 정확한 일본의 모습과 크기의 구현을 의미한다. 이노는 이를 위해 곡면의 위치 정보를 평면으로 옮기는 오차 보정 계산법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근대 유럽 지도의 투영법에 필적하는 발상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노는 일본 전도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818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였다. 나머지 작업은 이노와 함께 호흡을 맞추던 제자들에 의해 계속되었다. 이노 사거(死去) 3년 뒤 대망의 〈대일본연해여지전도〉가 완성되었다.    1821년 7월 에도성에서 막부의 고위 관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도의 공개식이 거행되었다. 이노가 풍찬노숙을 마다 않고 한발 한발 걸어 측량한 일본의 해안선이 살아 꿈틀거리듯 담긴 지도가 펼쳐지자 보는 이들은 눈을 의심하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1/36000 축척 대지도 214장, 1/216000 축척 중지도 8장, 1/432000 소지도 3장으로 구성된 지도는 규모와 정확성에 있어서 당대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너무나 정확한 지도의 제작에 놀란 막부는 이노 지도를 막부의 공식 문서보관서인 모미지야마문고(紅葉山文庫)에 비장(秘藏)하고 외부 유출을 금지하였다. 지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막부로서는 이러한 상세한 지리 정보가 일반에 유통되도록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후 이노의 지도는 서양 세력의 서세동점(西勢東漸)이 거세지는 1860년대까지 막부 외의 일반 사용이 봉인되었다.    지도의 공개 여부와 관계없이 막부는 이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고 합당한 대우를 하였다. 막부는 1차 에조치 측량 이듬해 이노 다다타카(忠敬), 가게타카(景敬) 두 부자(父子)에게 ‘묘지타이토’(苗字帶刀·무사계급 신분의 상징으로서 성(姓)을 사용하고 칼을 휴대할 수 있는 권리)를 허가, 신분 상승을 공인하였다. 이노가 측량 여행을 떠날 때마다 막부는 공무여행 통행증을 발급하고 소정의 여비를 지급하였다. 지도가 완성된 후에는 그 손자인 다다노리(忠誨)에게 봉록이 지급되고 에도에 사택이 제공되었다. 이노의 공적에 대해 막부는 대를 잇는 영예와 포상으로 보답하였다.       천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지도 제작    이노 지도의 정확성은 놀랍다. 그 정확성에는 비결이 있다. 첫째, 이노의 천문학 지식이다. 이노 지도가 동시대 여타 동양 지도와 가장 비교되는 점은 정확성이 아니라 기저에 깔려 있는 지도에 대한 인식이다. 당시 중국과 조선의 지도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과 사방을 일정한 구획으로 나누어 지리 정보를 표시하는 방격법(方格法)에 기초하였다. 지리는 철학, 사상, 관념과 분리되지 못하였다. 근대 지도의 요체인 위경도(緯經度) 좌표 개념도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이노의 지도는 동양의 관념적 지도를 배제한 과학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었다. 최초 측량 여행의 동기가 자오선호(弧) 길이의 계산에 있었던 만큼 이노는 구체(球體)로서의 지구와 위경도 좌표 개념 등 근대 천문·지리학에 입각하여 지도를 제작하였다. 군대에서 독도법(讀圖法)을 배운 사람은 알겠지만, 현대 지도 사용의 첫 번째 단계는 현 위치 파악이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지도 제작자가 각 지점의 위치를 파악하면서 지도를 제작하였다는 말과도 통한다. 이노는 지표면에서 실측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측량 결과가 정확한지를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노는 이를 위해 천문학 지식을 동원하였다. 태양과 주요 천체의 고도 및 운행을 관측하고 지표면의 주요 지형지물(주로 높은 산봉우리)을 통해 현 위치를 확인하는 삼각측량 방식을 고안하여 측량 결과를 지속적으로 검증하고 보정하는 한편, 이를 위도와 경도의 좌표로 설정하여 지도에 반영하였다.    이노의 일기에는 총 3754일간의 측량 기간 중 1404일에 걸쳐 하루 수회에서 수십 회에 이르는 천문관측 결과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과학적인 방법에 의한 측량의 결과, 이노가 실측을 통해 계산한 위도 1도의 거리는 현대의 측정치와 오차가 1/1000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노가 고안한 천체관측을 통한 지도 제작의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설명을 읽었지만, 사실 문과 출신인 나로서는 전부 소화하기 어려웠음을 고백한다. 이노의 천문학에 대한 지식과 지도 제작에 대한 이해는 현대의 일반인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발달된 측량기술이 뒷받침돼  이노 다다타카가 사용했던 양정거(量程車: 거리측정기·왼쪽)과 반원방위반(半圓方位盤·오른쪽).  둘째 비결은 일종의 사회적 공공재로서 일본 사회에 발전된 측량 기술이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에도시대 들어 경제가 번성하면서 일본에는 각종 도로, 운하, 성, 수도 건설 등의 대규모 토목공사가 빈번하였고, 이러한 사정은 각종 지형지물의 거리, 각도, 높이 등을 측정하는 고급 측량 기술의 축적으로 이어졌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노는 전문 지도제작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심을 하자마자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이노가 상인 시절부터 마을의 제방이나 도로 건설 등 공공 토목사업에 참여하면서 측량의 기초를 접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노는 도선법(導線法)이라는 측량법을 사용하였다. 도선법이란 측량 지점에 폴(pole)을 꽂아 두고 다음 지점에 폴을 꽂아 양자 간의 거리와 각도를 기록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서는 측정 지점 간의 거리, 각도, 방위, 경사도 등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당시 일본에는 이러한 용도의 계측 기구의 실용화, 상용화가 진전되어 있었다. 이노는 이러한 기구들을 구입하거나 필요에 따라 일부 개량하여 사용하였다. 에도 장안의 유능한 전문 기술자들과 협업하여 필요한 도구를 구입하거나 제작하여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노 지도 제작을 가능케 한 도구적 기초가 되었다.       3만3889km를 답사  〈대일본연해여지전도〉의 부분도. 천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놀랍도록 정밀하게 일본 국토를 그려냈다.  셋째 비결은 이노 자신의 집념이다. 아무리 천문학 지식이 풍부하고 뛰어난 측량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직접 현장에 가서 측량을 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일본은 큰 나라는 아니지만, 해안선이 엄청나게 길고 복잡한 형상을 하고 있다. 현대 기술로 측정한 일본 해안의 총연장은 3만3889km로 이는 지구 외경(약 4만km)의 85%에 이르는 거리이다. 이러한 해안선의 전모를 한 사람이 오로지 두 발에 의지해서 현장에서 실측을 하여 지도를 제작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평균 수명이 40세이던 시대에, 이노는 쉰이 넘은 나이에 전일본 해안선 실측이라는 도전에 나섰고, 누구도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그 도전에 성공했을 때 그는 일흔이 넘은 나이였다.    나이는 숫자일 뿐임을 증명한 이노의 집념과 생애는 어찌 보면 100년 인생이 주어지는 현대인들에게 더욱 큰 울림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와 관계없이 끊임없이 배움에 정진하고 스스로 부여한 사명감으로 위업을 이룬 이노의 생애는 메이지 시대에 과학적 사고, 근면, 끈기의 스토리로 초급 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어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졌고, 지금도 이노는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하나이자 본받고 싶어 하는 삶의 귀감으로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노즈는 〈대동여지도〉보다 수준이 낮은 지도?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한국의 서적이나 인터넷 블로그 등에는 이노 지도와 〈대동여지도〉를 비교하는 글들이 종종 보인다. 상당히 많은 글이 〈대동여지도〉와 이노 지도를 우열의 관점에서 비교하고 있다. 일례로 어떤 지리공간 계측 전문가의 블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노 지도는 당시의 측량술인 거리와 방위에 의한 도선법으로 해안선과 도로를 따라 계측해서 작성한 지도이기 때문에 지도에 표기된 성과(成果)는 해안선과 도로, 전답, 호소, 섬 등에 그친 데 비해 대동여지도는 한반도 전역의 지형과 도로를 비롯하여 22종에 달하는 지형지물을 표기하고 있어 명실상부한 지형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 혼자의 힘으로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 등 3대 지도를 만들고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 등 3대 지지를 편찬한 김정호와 단지 측량에만 전념한 이노를 비교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겠다.〉    이런 글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 옴을 느낀다.⊙

장상인

-포르투갈人 ‘루이스 데 알메이다’   일본의 구마모토(熊本)현 아마쿠사(天草)에 크리스천관(館)이 있다. 언덕 위에 있는 기념관은 혼토성(本渡城)이 있었던 곳이다. 기념관 내부의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기에 눈으로만 확인하고 외관을 카메라에 담았다.   아마쿠사의 크리스천 기념관 기념관 아래에는 크리스천 묘지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에서 좀처럼 보기드문 십자가를 많이 만날 수 있다. 거기에서 필자는 한 서양인에 대한 기념비를 찾았다. ‘루이스 데 알메이다(Luis de Almeida, 1525년-1583년)’라는 인물의 비(碑)였다. 간단명료하게 정리돼 있는 그의 생애를 그대로 옮겨본다.   아마쿠사에 있는 크리스천 묘지       여기에서 말하는 시키(志岐)씨는 크리스천 다이묘(大名)인 시키 시게쓰네(志岐 鎮経)이다. 그는 아마쿠사에 알메이다를 초청해서 포교를 허가했다. 이를 계기로 아마쿠사에 기독교가 널리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시키(志岐) 자신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오이타의 알메이다 병원 필자는 지난 달 25일 오이타(大分)에 간 김에 ‘루이스 데 알메이다(Luis de Almeida)’의 흔적을 찾았다.   그는 기념비에 쓰인 대로 전국(戰國)시대 말기 일본을 방문한 포르투갈인 이다. 상인(商人)이었지만 의사 면허를 지니고 있어서 일본 최초의 서양 병원을 만든 인물이다.   알메이다(Almeida)는 1525년 유태교에서 가톨릭으로 바꾼 콘베르소(converso:개종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546년에 포르투갈 왕이 부여하는 의사 면허를 취득한 후 세계를 향한 웅비를 꿈꾸면서 인도의 고아(Goa)를 거쳐서 마카오((Macau)에 갔다. 1552년 무역을 목적으로 일본을 첫 방문했고. 일본과 마카오를 왕래하면서 제법 많은 부(富)를 쌓았다. 알메이다는 일본의 야마구치(山口)에서 예수회 선교사 ‘코스메 데 토레스(Cosme de Tones)’ 신부를 만난다. 신부는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의 사업을 계승해 일본에서 포교를 계속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알메이다는 1557년 외과·내과·한센병과(Leprosy)를 갖춘 종합병원을 세웠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병원이며, 그 장소가 바로 ‘분고의 나라(豊後國)’ 오이타(大分)인 것이다.   “알메이다 병원으로 갑시다.”   운전은 아베 유이치(阿部祐一·63)씨가 했고, 오이타 의회 의장 이노우에 유코(井上裕子·66)부인이 뒤를 따랐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서 병원을 찾았다.   알메이다를 기리기 위해서 명명한 병원   알메이다 병원 외관 병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일단, 로비에 있는 알메이다의 흉상에 카메라의 렌즈를 맞췄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했던 동상과는 달라서 안내원에게 물었다. 안내원은 잘 모르는 눈치였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자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알메이다 병원의 사무부 차장 안도 마사요시(安東雅由)씨였다. 필자의 설명을 듣던 그는 미소를 띠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병원 내의 알메이다 흉상(좌 : 이오우에 부인) “그 동상 말씀이십니까? 오이타 현청 앞에 있습니다.” “그래요? 제가 거기에서 왔습니다만....”   안도(安東)씨는 지도를 펼치면서 동상이 서 있는 지점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병원의 연혁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 병원은 1969년 4월 1일 이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지상 6층, 지하 1층의 건물에 100개의 병상을 갖춘 종합병원입니다.”   필자의 궁금증이 더해갔다.   “이 병원이 알메이다씨가 세운 병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세운 병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60년 전의 일이 아닙니까? 그가 오이타에 일본 최초의 서양병원을 세운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이 병원에 ‘알메이다’씨의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 아닌가. 동행한 아베(阿部)씨와 이노우에(井上) 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상업을 해서 번 돈으로 병원에 투자했고 만성적인 재정적자를 감수해야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우러나서 한 것이다.   필자 일행은 다시 차를 돌려 출발점인 오이타 현청으로 갔다. 현청 앞 작은 공원에서 비를 맞고 있는 동상을 발견했다. 무척 반가웠다.   기업인이 만들어 시민들에게 기증한 동상   서양의술발상 기념상 동상(銅像)은 환자를 돌보는 ‘알메이다’씨의 모습을 재현한 조각품이었다. 동상의 이름은 ‘서양 의술 발상(發祥) 기념상’-그 옆에 있는 설명문을 중복된 부분을 빼고 옮겨본다.     이 기념비는 1972년 한 기업인이 일본의 유명 작가인 ‘고가 타다오(古賀忠雄, 1903-1979)’씨에 의뢰해서 만들어졌다. ‘알메이다’의 훌륭한 업적이 사람들로부터 잊히는 것이 안타까워서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필자는 알메이다의 기념상 앞에서 비를 맞으면서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외국인의 신분으로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하면서 서양의술을 전파한 알메이다 씨의 훌륭한 업적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귀감이 되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후세에 길이길이 남기려고 동상을 세운 기업인도 훌륭한 사람이다.’   봄비를 맞은 동상(銅像)의 색깔이 더욱 짙어졌다.
10개더보기

TODAY`S 칼럼

TODAY`S FUN

TODAY`S 뉴스&이슈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