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규

 2012년 말~2013년 초 동양 3국에 새 지도자들이 등극했다. 박근혜(朴槿惠) 전 대통령·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아베 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다. 이들은 집권시기가 몇 개월 차이로 비슷했고 나이도 한두 살 차이다(1952년·53년·54년생). 모두 과거 정치 명문가의 자녀들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으로 물러났지만, 아베는 일본 총리로서는 드물게 장기 집권을 하고 있다. 노자키 미쓰히코(野崎充彦) 오사카 시립대 교수는 “경제정책 덕으로 대학생들 취직이 잘돼 한국인 유학생들까지도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서 취업을 할 정도”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직접 본 바로는 대체로 일본인들은 아베에게 만족해하는 분위기였다.    시진핑 주석은 2017년 말 집권 2기에 들어가면서 강력한 ‘천자(天子)’ 체제를 굳히면서 세계 강국 미국에 도전하고 있다. 필자가 시진핑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그가 말하는 ‘황토의식(黃土意識)’과 풍수관과의 관계 때문이다. ‘황토의식’이란 무슨 뜻인가?      시진핑의 ‘황토의식’  시진핑이 7년간 생활했던 량자허로 가는 길은 ‘황토’가 계속되는 곳이다.  시진핑이 주석에 오르기 전인 2002년 그는 《전국신서목(全國新書目)》이란 잡지에 〈나는 황토땅의 아들이다(我是黃土地的儿子)〉라는 회고문을 발표했다. 중국 개국공신인 시중쉰(習仲勛) 전 부총리의 아들로서 부족한 것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는 15세 때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상산하향(上山下鄕)을 당한다.    상산하향이란 1968년 12월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지식청년[知靑]은 농촌에 내려가 가난한 농민의 교육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시한 후 1600만명의 중・고등생이 농촌으로 내려가 노동에 종사했던 것을 말한다. 15세 소년 시진핑도 1969년 1월 산시성(陝西省) 북부 량자허(梁家河)라는 오지에서 7년 동안 토굴[야오둥·窑洞]에서 생활하며 농민과 일체화가 된다.    〈나는 황토땅의 아들이다〉는 이 7년 동안의 생활을 5,000여 자로 서술한 회고문이다. 처음 그곳에 내려갔을 때 득실거리는 이[蝨]·조악한 음식·힘든 노동 등을 견디지 못하였으나, 시진핑은 7년 동안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농민과 그것을 키워주는 황토와 하나가 되어 간다.    “나는 농민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배웠고… 그들 속에서 생활하였고, 그들 속에서 노동을 하여 그들과 나 사이의 구분이 없어졌다… 20세 때 그들은 나를 서기로 뽑아주어 그들과 함께 우물과 방죽을 팠고 도로를 수리했다… 그곳은 나의 제2고향이 됐다… 15세 나이로 이곳 황토땅에 왔을 때 나는 미망(迷妄)에 빠져 방황했으나 22세 나이로 이곳 황토땅을 떠날 때 나는 이미 견고한 인생목표를 가졌고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이어서 그는 옛 시인 정판교(郑板桥 ·1693~1765)의 시 “청산은 소나무를 꽉 물어 놓아주지 않으니 본디 바위틈에 뿌리를 내렸네[咬定青山不放松,立根原在破岩中]”를 인용, 22세 자신의 의식 상태를 표현했다. 민중 속에 굳건히 뿌리를 내려 확고한 인생관과 국가관을 세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황토땅이 자신의 뿌리이고 영혼이며 인생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이 시 주석의 ‘황토의식’이다.      풍수의 동기감응론    필자가 여기서 ‘의식’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풍수의 동기감응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소년 시진핑과 량자허라는 황토땅과 그곳에 사는 농민은 전혀 별개의 대립적 관계였다. 베이징(北京)이라는 도시와 황토땅 량자허와도 대립적 관계로 설정된다. 그러나 7년 동안의 그곳 생활에서 시진핑은 이전의 자아(自我)와 베이징을 버리고 농민화(農民化)・황토화(黃土化)된다.    헤겔(Hegel)의 “타자(他者・여기서는 황토땅과 농민)가 진정으로 자기 자신으로 자각되는 과정”이다. 타자화(他者化)된다 하여 자기 자신을 폐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곳 농민들은 처음에 경원시하던 그에게 다가와 베이징이라는 세계와 새로운 지식을 구한다. 상호 교호작용 속에 농민 역시 계몽되어 새로운 의식세계로 진입한다.    풍수는 태어난 생가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 그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다는 양택(陽宅) 풍수와 조상의 무덤이 후손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음택(陰宅) 풍수로 대별된다. 현재 시중의 술사(術士)들이 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좋은 땅(주택과 무덤)에 살면 무조건 잘되고 나쁜 땅에 살면 재앙을 받는다’는 오해가 그것이다.    풍수의 동기감응론과 비슷한 관념은 서구 철학자들에게서도 종종 드러난다. 말파스(J. Malpas) 호주 태즈메이니아 대학 철학과 교수는 “인간의 정체성(正體性)은 장소와 일정한 관계가 있다”면서 “(땅이란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자연이며 인간화되고 인간화하는(humanized and humanizing) 것”이라고 파악한다. 인간 스스로가 땅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감수성(affectivity)’을 대지에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땅과 인간 서로 간의 대화와 감응을 전제한다.    풍수에서 말하는 동기감응론도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땅에 자신의 마음을 열어두어야 함을 전제한다. 어린 시진핑은 처음에는 ‘황토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석 달 만에 베이징으로 도망쳤다가 반 년 만에 다시 돌아온다. 처음에 시진핑과 량자허에 온 지식청년은 모두 15명이었지만 그들은 여러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 모두 떠나고 시진핑 혼자 남았다. 시진핑에게 그가 태어난 베이징보다 이곳 ‘황토땅’이 그의 심령(心靈)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시진핑 주석의 ‘황토땅’은 풍수상 어떤 곳일까? 풍수고전 《탁옥부》는 “1년 현장 답사가 풍수서적 10년 읽은 것보다 낫다[遍觀一年勝讀十年]”라고 현장 답사를 중시한다. 그에 따라 필자는 시진핑의 ‘제2의 고향’ 량자허·부친 시중쉰의 생가와 초장지(初葬地)·이장지(移葬地) 등을 답사했다.    황토땅과 풍수  시진핑이 하방되어 7년간 생활했던 량자허의 토굴집. 시진핑은 ‘황토의 아들’이라고 자부한다.  시안(西安)에서 옌촨현(延川縣) 량자허를 향해 출발했다. 시안에서 400km. 가는 길이 협곡과 시골길이어서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침 6시30분에 자동차로 출발해 오후 2시 넘어서 도착했다. 황토고원으로 끝없이 일자문성(一字文星・산정상이 아주 길게 일자 모양으로 이루어짐)의 산들만 보였다. 일자문성의 산들이 하늘과 맞닿아 있어 ‘산평선(山平線)’이란 단어를 연상케 했다. ‘저런 산 아래 협곡에 사람이 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도로 옆 곳곳에 “토양 수분을 보존함이 국가와 인민에게 이익[水土保持 利國利民]”이라는 표어가 보였다. 절대적으로 물이 부족하기에 생겨난 표어이다. 황토고원은 물이 귀하여 이곳 사람들은 평생 딱 두 번, 즉 태어나서 그리고 결혼하기 전날 목욕을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량자허도 황토협곡에 자리하고 있다. 집들은 황토협곡의 절벽에 굴을 판 동굴 집[窯洞・야오둥]들이다. 황토는 본디 진흙에서 모래까지 골고루 포함된 양토(良土)로서 물과 섞이면 비옥해져 경작에 좋은 땅이 된다. 반면 물이 없는 황토땅은 단단하고 척박해져 만물의 서식이 불가능한 황량한 땅이 된다. 바람 또한 드세다. 나무는 흙을 얻어야 뿌리를 내리고, 흙은 물을 얻어야 만물을 키울 수 있는데 이곳은 물도 부족하고 바람 또한 드셌다.     15세 시진핑은 이곳에서 ‘샘과 방죽을 파야 하는’ 실존적 이유를 터득했다. 사람 하나가 대지 위에 발을 딛고 살고자 할 때 얼마나 많은 환경요소가 필요한지를 알았고, “자기 위주가 아닌 사람들과의 단결만이 생존의 유일한 수단”임을 몸으로 터득한다. 드센 바람[風]을 잠재워 갈무리[藏]하고 부족한 물[水]을 얻는[得] ‘장풍득수(藏風得水)’, 즉 풍수행위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체득한다. 풍수지리가 말하는 동기감응의 핵심 내용이다.    풍수상 이것만으로 시진핑을 주석의 자리에 오르게 한 요인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시진핑 말고도 수많은 지식청년이 상산하향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결정적 풍수 요인이 있었다.      시진핑, 부친 묘 이장    2002년 5월 24일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이 향년 89세로 사망한다. 시중쉰은 중국 공산당 개국 원로였다. 5월 30일 베이징 서쪽 바바오산(八寶山) 혁명공묘(革命公墓)에 안장된다. 바바오산은 ‘여덟 가지 보물이 나는 산’이란 지명이 암시하듯 명·청(明・淸) 두 왕조 이래 길지(吉地)로 알려진 곳이다. 평지돌출(平地突出)의 낮은 언덕으로서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다 조망된다. 죽은 자도 그 후손들도 이곳에 안장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이곳은 혁명열사와 고급 간부들의 묘원으로 지정되었다. 주더(朱德)·취추바이(瞿秋白)·둥비우(董必武)·천이(陈毅)·천윈(陈云)·리셴녠(李先念)·런비스(任弼時) 등 중국 혁명의 주역들뿐만 아니라, 6·25 때 중국군 지원군 총사령관과 부사령관으로 참전하였던 펑더화이(彭德懷)와 양융(楊勇)의 무덤도 보인다. 한때 ‘중국천자’ 자리를 두고 시진핑과 라이벌 관계였던 보시라이(薄熙來)의 아버지 보이보(薄一波) 전 부총리 부부의 무덤도 여기에 있다. 혁명 과정에 주요 역할을 하였던 인물들의 무덤을 볼 수가 있어 마치 한 권의 ‘중국혁명사’가 페이지를 펼치는 느낌이다.    그런데 사회주의 중국에서 드문 일이 발생했다. 이러한 천하의 길지를 버리고 시진핑은 아버지 시중쉰 묘를 이장한다. 정확하게 세 번째 기일인 2005년 5월 24일 아침 유족들이 시중쉰의 유골을 들고 시안역에 도착한다. 미리 와 있던 아들 시진핑이 아버지의 유골을 푸핑(富平)현 타오이촌(陶藝村)에 안장했다. 푸핑현은 시안에서 약 75km 떨어진 거리이다. 이날 이장식에서 시중쉰 부인 치신(齊心)은 다음과 같은 유족대표 인사말을 한다.    “시중쉰 동지가 마침내 광활한 황토땅(黃土地)인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그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각자의 업무에 최선을 다하며 혁명 후손을 양성할 것입니다.”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것이 ‘황토땅’과 ‘혁명 후손 양성’이란 단어이다. ‘황토땅’은 시진핑 주석이 자주 언급했던 말이다. ‘혁명 후손 양성’에서 그 ‘후손’은 누구를 지칭할까?      “장안(시안)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  바바오산혁명열사릉. 중국 공산정권 수립의 공신들이 묻힌 곳이다.  왜 시안으로 이장을 했을까? 시중쉰 부총리가 나서 자란 고향이기도 하지만, 1926년 13세의 나이로 혁명운동에 참가하여 1952년 베이징 중앙정부로 가기 전까지 활동하던 정치적 고향이다. 그는 이곳에서 ‘서북왕(西北王)’으로 불렸다. 죽어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시안은 그의 고향이자 정치적 근거라는 물리적 공간 그 이상의 장소성(場所性)을 갖는다.    ‘장안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得長安得天下]’는 말이 전해진다. 장안은 시안(西安)의 옛 이름으로, 풍수고전 《감룡경》은 “시안(장안) 일대가 태미원(太微垣)의 정기가 서려 있기에 천자의 도읍지가 되었다”고 말한다. 태미원이란 자미원·태미원·천시원의 삼원(三垣) 가운데 하나로서 천제(天帝)가 정치를 펼치는 곳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가장 선호하였던 도읍지 3개가 있다. 베이징과 난징(南京) 그리고 시안(장안)이다. 난징은 이곳에 도읍을 세운 왕조마다 망했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홍무제)이 난징에 도읍을 정했지만 후계자이자 손자인 주윤문(건문제)은 재위 4년 만에 삼촌인 주체(영락제)에게 천자 자리를 빼앗긴다. 난징에서 망한 것이다. 3대 천자 영락제는 도읍을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겨 버린다. 진시황이 천자의 기운이 난징에 서린 것을 보고 맥을 잘라 버렸기에 그렇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시안에 부친 묘를 이장한 뒤 8년 후 시진핑은 ‘중국의 천자’로 등극했다. 풍수상 시중쉰의 이장된 묘는 어떠할까? 시 주석 부친 묘는 푸핑현 중심지에서 2km쯤 떨어진 외곽에 자리하는데 가는 길목마다 ‘산시성 애국주의 교육기지’라는 안내판이 있다. 시중쉰 묘역을 가리키는 안내판이다.      시진핑 부친 묘 풍수 독법(讀法)    평지에 자리하기에 땅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후덕한 내룡(內龍・지맥)이 어슴푸레 평원 위에 뻗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이나 언덕조차 없는 허허벌판에 숨어 있던 용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현룡재전(見龍在田)’의 땅이다. ‘나타난[見] 용(龍)이 밭에 있음[在田]’이란 ‘지도자[龍] 자격을 인정해 주는 세력이 있어 나타났지만[見], 아직 전 사회적 지지를 얻지 못하는 낮은 단계에 있으므로(밭에 있음) 자기를 후원해 줄 큰 어른[大人]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역》 건괘는 이어서 말한다. “나타난 용이 밭에 있음[見龍在田]은 덕의 베풂을 널리 하는 것이다[德施普也].”    ‘널리 덕을 베풀어 대중을 제도하겠다[博施濟衆]’는 뜻과 ‘자신의 소문을 듣고 함께 일어나주기를[聞風與起]’ 염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군자의 덕[君德]인데,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통치자를 말한다. 제왕지지(帝王之地)이다.    묘역 조경 또한 예사롭지 않다. 바바오산 혁명공묘에 안장된 시중쉰 동지들의 무덤과는 규모와 질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여준다. 시중쉰의 묘는 단순 조경 작업이 아니라 고도의 풍수 행위가 드러난다.    우선 시중쉰의 유골과 석상이 안치된 뒤쪽에 나무를 겹겹이 심어 주산을 돋우었다. 일종의 비보(裨補) 숲이다. ‘산은 인물을 주관하고 물은 재물을 주관한다[山主人水主財]’는 풍수 격언이 있다. 중국인들이 풍수에서 선호하는 물은 보이지 않는다. 재물보다 명예를 추구하는 자리임을 말해준다. 주산 뒤로는 용이 머리를 들이민 입수(入首)의 흔적을 뚜렷하게 살린다. 주산 좌우로 또 숲을 조성하여 청룡·백호를 만들었다.    안치된 유골과 석상 앞은 평평한 공간, 즉 명당(明堂)을 만들었다. 본디 명당은 제후가 천자를 알현하는 공간인데, 지금은 수많은 방문객이 이곳에서 참배를 한다. 필자가 이곳을 답사하던 날도 수많은 참배객이 줄을 이었다. 명당 앞으로 주작대로(朱雀大路)가 길게 펼쳐진다.    조성된 비보 숲에 식재된 수종을 살펴보면 묘 주인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이곳은 소나무·향나무·측백나무 등이 묘역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 모란 밭이 조성되어 있다. 소나무는 뭇나무의 어른[宗老]이다. 거북 등처럼 뚝뚝 갈라지는 소나무 껍질은 현무(玄武)를 상징한다. 향나무는 예부터 사당이나 왕릉에 한두 그루씩 심는 나무이다. 측백나무는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신선의 나무이고, 모란은 꽃의 왕[花中之王]이다. 묘역의 공간 구성이 역대 황릉의 작은 축소판이다(참고로 2013년 5월 이곳을 답사하였을 때는 묘역 안을 자유롭게 참배할 수 있었고, 사진 촬영도 자유로웠으나 2년 후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는 외국인에게는 참관이 허용되지 않았다. 아울러 중국인에게조차 묘역 촬영이 금지되었다).    시진핑이 부친 묘를 이장할 때 몇 년 후 중국의 천자가 될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2005년 저장성 서기 → 2007년 정치국 상무위원 → 2008년 부주석 → 2012년 11월 주석).      운명인가, 풍수인가?  시안에 있는 시중쉰의 생가. 시안은 시중쉰이 태어난 곳이자 ‘정치적 고향’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한 사람의 흥망성쇠에는 다섯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고 믿는다. 그 다섯 가지를 중요도에 따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일명(一命)·이운(二運)·삼풍수(三風水)·사적음덕(四積陰德)·오독서(五讀書).    첫째는 명(命)이다. 필자처럼 산촌에서 태어난 것도, 여자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도 명이다. 금수저·흙수저로 태어난 것도 명이다. 시진핑이 1953년 베이징에서 태어났을 때 아버지 시중쉰은 중국 중앙선전부장이었고 시진핑이 여섯 살이었을 때는 부총리였다. 권력의 핵심층이었다. 시진핑의 명은 참으로 좋았다.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것은 그의 명이었다.    둘째는 운(運)이다. 같은 명으로 태어났어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좋고 나쁨이 달라진다. 가는 길이 다르면 훗날 삶의 결과는 달라진다. 1965년 아버지 시중쉰이 부총리에서 뤄양(洛陽)의 기계공장으로 내쳐졌을 때 시진핑의 운은 험난한 길을 예고한다. 1969년 15세의 시진핑이 량자허로 하방되고 부모형제와 뿔뿔이 흩어져 가난한 농민들과 힘든 노동을 해야 했을 때 그의 운은 최악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하나의 반전이었다.    한 개인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주는 세 번째 요인이 풍수(風水)이다. 어느 곳에 터를 잡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 시진핑이 ‘지식청년’으로 량자허로 갔을 때 그의 운은 최악이자 가장 나쁜 터에 처해졌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그곳에서 7년 동안 농민과 함께하면서 ‘황토의 아들’로 거듭난다. 함께 왔던 다른 14명이 여러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떠났지만 그는 끝까지 남아 ‘황토땅의 아들’이 된다. 중국전문가 정영록(서울대 국제대학원·전 주중공사) 교수는 “7년 동안 량자허에서 최후의 1인으로 견뎌낸 점, 바로 이 부분에서 시진핑이 주석이 되는 데 다른 라이벌들, 특히 보시라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절대적 강점을 확보했다”고 말한다.    시진핑은 다른 라이벌과 달리 아버지의 무덤을 베이징에서 시안으로 이장을 하는데 이 점 역시 사회주의 중국에서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었음을 앞에서 소개했다. 시진핑의 부친 묘소는 풍수의 전통을 그대로 수용한 곳에 자리했다.    인간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주는 네 번째 요소는 음덕 쌓기이다[積陰德]. 인맥 쌓기의 다른 말이다. 이 부분은 시진핑의 다른 라이벌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성공에 영향을 주는 마지막 다섯 번째 요인은 공부이다[讀書]. 공부를 잘하면 인생 초반에는 분명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나이 50쯤 되면 공부를 잘했던 사람이나 못했던 사람 모두 평준화되거나 역전되기도 한다.    시진핑은 15세 이후 공부할 기회를 놓쳤다. 22세인 1975년 칭화(淸華)대학에 농민 자격으로 입학을 하지만 공부에 애를 먹었다. 그에게 있어 학교 공부는 그리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가 칭화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농민자격’ 덕분이었다. 그가 량자허라는 오지에서 농민으로 거듭난 덕분이었다. 따라서 이 역시 세 번째 요인, 즉 풍수 덕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G2의 첫 번째 지도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실용적 풍수를 통해서 세계적인 부동산 재벌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이 되었음을 지난달 《월간조선》에서 소개했다. 시진핑 주석은 전통적 풍수를 통해 그 음덕으로 ‘중국의 천자’가 되었다. 정녕 풍수는 제왕지술(帝王之術)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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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목

비트코인 기념주화.일본 정부가 암호화폐에 대해 중립적 태도를 취하는데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부 주도 경제의 성격이 강한 나라가 개입보다는 방관을 택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는 한국 정부보다 한 수 앞을 내다보고 뭔가 대단한 비젼과 구상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들도 있다.   내 생각은 이렇다. 일본은 원래 그런 나라이다. 일본이 국가주도 경제체제라는 이미지는 한국 또는 외국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일뿐 일본은 국가의 민간 개입이 두드러지는 나라가 아니다. 전쟁기에 국가의 강제적 자원 배분을 위한 동원체제나 전후 회복기 국가 주도의 리스트럭쳐링은 일시적 또는 과도적 현상일뿐 그것이 일본 경제의 본질이나 실체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사회적, 철학적으로 인간의 욕망에 관용적이다. 돈을 벌 수 있으면 금지된 것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벌도록 놔둔다. 도덕적으로 비난의 소지가 있어도 최소한의 규제만 가한다. 그 규제도 눈가리고 아웅식이 많다. 포르노를 금지한다면서도 일본식 AV 산업이 엄청난 규모로 존재한다든지 도박을 금지한다면서도 빠칭코업이 1, 2위 매출을 다투는 산업이 된다든지 하는 현상은 외부의 눈으로는 잘 이해가 안가는 일본식 방임주의이다.   일본 경제의 민간 주도 연원은 깊다. 일본의 기업은 정부의 종속물이 아니다. 그들의 자치 질서는 정부의 규제 이상으로 시장의 질서를 좌우한다. 일본 정부는 팔요최소한도의 범위 내에서 그 자치 질서에 공익성과 공평성의 주문을 넣음으로써 전체적인 조화를 도모하는데 역점을 둘 뿐이다. 일본 내에서는 관료나 학자들 사이에서 정부 주도의 R&D 투자나 혁신 유발 리더쉽이 구미국에 비해 너무 약해서 국가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이다.   일본에는 정부가 있기 전에 금융회사가 존재했다. 정부가 나서기 전에 이미 거래소가 운영되었다. 정부는 민간 주도의 시장 형성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사회적 공론이 형성되기 전에 독단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시장의 진화는 예단할 수 없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일부 부작용이 있더라도 새로운 부의 생태계가 창출될 수도 있음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정부는 민간의 경제 활동은 놔두고 그 부작용만 예의 주시한다.   암호화폐 열풍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2, 3년전만 해도 극히 미미하던 현상이다. 갑자기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 이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일본 정부는 아직 판단하기에는 이르다고 판단하는 것일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 정부의 성향에 비추어 하등 신기할 것이 없어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미국이나 유럽 정부의 성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시장에 대한 이해의 역사적 맥락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대척점에 있는 것이 중국이다. 모든 결정권이 국가에 있는 중국으로서는 항상 정부가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다. 여차하면 바로 규제부터 들어간다. 크립토커런시에 대한 대책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면 한국은? 글쎄 어느 쪽일까?

이춘근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1월 9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photo AP2017년 6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1개월여 만에 미국을 방문했다. 반미주의자로 알려진 바와 달리 대통령 취임 후 가장 빨리 미국을 방문한 대통령의 기록을 세웠다. 11월 초순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서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한·미 양국의 우의와 동맹을 과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정부의 환대를 “Amazing Welcome(놀라운 환영)”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감동받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12월 중순, 중국을 국빈방문하고 돌아왔는데 중국에 가서는 역시 중국의 마음에 드는 말을 잔뜩 하고 돌아왔다.       많은 전문가들이 대한민국 대통령의 국빈방문 때 보인 중국의 오만 방자한 외교적 결례를 비판하고 있다. 조금 과장한다면 중국은 마치 과거 명나라나 청나라 황제가 조선의 사신을 대하듯 무례한 태도를 많이 보였고 이 같은 사례들을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다. 한국 정부의 변명도 구차하기는 마찬가지다.      작금 야기되고 있는 문제의 본질은 현재의 국제질서가 한국이 미국의 비위도 맞추는 동시에 중국의 비위도 맞출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중국과 미국은 세계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위치에 있으며, 미국과 중국은 각각 한국을 자기 편에 엮어 두는 것이 패권 경쟁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한국의 식자(識者)들 중에는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취함으로써 두 나라 모두로부터 이익을 취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불행하게도 이 같은 전략은 ‘양다리 걸치기’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경우 해당 사항이 없는 정책 대안이다.      대부분 국제정치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균형자’ 혹은 ‘양다리 걸치기’는 강대국의 행동을 설명하고 강대국에 제시하는 정책 방안 중 하나다. 약한 나라에 균형자 혹은 양다리 걸치기는 가랑이만 찢어질 뿐 아니라 양 강대국 모두로부터 불신과 포기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정책이다.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는 한편에게 매달려 가는 것, 즉 밴드왜건(Bandwagon)이 안전한 정책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강대국에 매달릴 것이냐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적 정답은 ‘이길 편’에 붙는 것이다. 문제는 누가 이길지를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힘이 강한 편이 이길 것이다. 국제정치학은 궁극적으로 힘의 측정을 여하히 잘할 수 있느냐를 고민하는 학문이다. 국제정치학의 이론을 빌려서 미국과 중국 중 누가 패권 경쟁의 최종 승자가 될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주제다.         미국 패권의 역사      미국과 중국은 경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경쟁을 벌이는 이유는 두 나라가 각각 종합 국력 서열 세계 제 1위와 2위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제력은 1870년대에 이미 세계 1위의 자리에 올라섰지만 정치와 군사력 면에서도 세계 1위가 된 것은 2차 대전 이후의 일이며, 패권국의 지위를 확보하게 된 것은 소련이 멸망한 1990년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이 또 하나의 초강대국 지위를 가지고 미국과 경쟁을 벌이던 시절 이미 미국을 패권국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냉전시대 미국의 패권은 지구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아니었다.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주의 진영 국가들의 정치·경제·생활까지 미국이 압도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지프 나이 교수는 냉전시대 미국의 패권을 ‘반쪽짜리 패권(Half Hegemony)’이라고 부른다.      소련이 붕괴된 후 미국은 자신의 정치·경제 이념을 전 지구에 강요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정치·경제 이념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시장경제인데 소련 몰락이 시작된 1980년대 후반 이후 전 세계 수많은 나라들이 민주화의 물결을 거스를 수 없었고 전 세계가 하나의 경제 단위로 변모했다. 소련이 붕괴될 무렵부터 미국은 반공(反共)의 동지들인 미국 진영 내 독재국가들에 민주주의적 개혁을 요구했다. 남미의 수많은 국가들이 민주화되었고 1987년 이룩된 한국의 민주화도 거시적인 맥락에서 보면 미국의 패권 강화와 맞물리는 시점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소련 및 공산 진영이 몰락한 후 미국은 자신의 자유주의 시장경제 이념을 세계에 확산시켰다. 1990년대 이후를 ‘세계화의 시대(Age of Globalization)’라고 부르는데 이를 ‘미국화의 시대(Age of Americanization)’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을 정도다. 미국은 자유주의 경제이념과 민주주의 정치이념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체제, 즉 미국의 패권 체제를 확대해 나갔다.       미국의 패권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그동안 어정쩡하게 자본주의를 운용했던 국가들은 미국의 강압에 의해 경제 체제를 보다 더 자유주의의 원칙에 합당한 체제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과정 중에 일본식 자본주의가 붕괴되었고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도 경제위기를 겪지 않을 수 없었으며 우리나라도 1997년의 외환위기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식 자유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서서, 세계화시대의 과실을 가장 잘 챙긴 나라가 중국이었다. 이미 1978년 개혁개방을 시작한 중국은 세계화 시대를 맞이해서 더욱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며, 2010년에는 일본을 앞질러 세계 2위의 GDP 대국으로 성장했다. 인구가 14억에 이르는 나라가 30년 이상 9%대의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한 결과, 국제구조에 변동이 야기되었다. 중국은 곧 미국을 앞질러 세계 1위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나돌았고 21세기 어떤 시점에서 중국이 세계의 패권국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유명한 국제외교 전문지인 ‘포린폴리시(Foreign Policy)’는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국제정치를 지배했던 화두는 ‘중국의 부상(Rise of China)’이라고 분석했다. 성미 급한 분석가들은 2000년대 초반 중국이 미국을 앞설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중국의 경제력이 미국을 앞설 시점으로 가장 많이 이야기되던 해가 2016년이었다. 그러나 2016년에도 중국의 명목GDP(Nominal GDP)가 미국을 앞서지 못하자 ‘구매력(Purchasing Power)’ 기준으로 계산해서 중국의 경제가 미국을 앞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즉 중국 사람들은 1달러로 미국 사람들이 가진 1달러보다 더 많은 것을 구매할 수 있으니 계산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돈을 적게 벌었다 해도 물가가 비싼 서울에 사는 사람보다 물가가 싼 시골에 사는 사람이 돈을 더 벌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중국의 도전장 접수한 미국      아무튼 2016년 중국의 14억명 인구가 벌어들인 돈의 총액은 11조3916억달러로 미국의 18조5619억달러에 이어 세계 2위가 되었다. 중국은 이미 오래전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미국을 앞질러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 될 것을 꿈꾸었다. 중국이 세계 1위 국가를 꿈꾸는 것은 당연하고 정상적인 일이다. 어떤 나라도 더욱 강해지고 싶고 웬만한 강대국들의 궁극적인 꿈은 패권국이 되는 일이다. 강대국 국제관계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분석한 미어셰이머 교수는 “중국이 패권을 추구하는 것은 중국 문화가 본질적으로 공격적이라든가, 중국의 지도자들이 잘못된 길로 인도되기 때문이 아니다. 중국이 패권을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국가의 생존을 위해 가장 좋은 보장 장치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중국의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은 ‘도광양회(韜光養晦)’ ‘절부당두(絶不當頭)’, 즉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 절대로 패권이 되겠다고 선언하면 안 된다며 자세를 낮추었다. 재미있는 일은 미국의 전략가들은 중국의 대(大)전략이 기만전술, 즉 남을 속이는 것임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8년 미국이 금융위기를 겪고 미국 경제가 엉기는 모습을 보이자 중국은 보다 공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2017년 5년의 임기를 다시 확보하고 더욱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된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중국몽(中國夢)’을 보다 공개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어떤 강대국의 꿈도 본질적으로 패권국이 되는 것이다. 시진핑은 비록 자신의 치세 이후에야 가능한 일일지 모르지만 중국 국민에게 중국을 세계 제1의 국가로 만들자고 선언한 격이다. 중국은 공개적으로 미국에 도전장을 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미국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많은 수의 한국 사람들이 미국은 결국 중국에 밀려 2위 혹은 그 아래 순위로 밀려날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의 시대가 다가올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이미 패권국이 된 미국의 꿈은 당연히 패권을 영원토록 유지하는 것이다. 미어셰이머 교수는 앞에서 인용했던 같은 글에서 “물론 미국은 중국이 아시아에서의 패권국이 되는 것을 저지하려 할 것이다. 미국은 세계무대에서 미국에 근접한 도전국의 존재를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결국 중국과 미국 사이에는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의 관계와 유사한 심각한 안보 경쟁이 야기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과 미국은 패권국의 지위를 놓고 심각한 경쟁을 벌일 것이라는 말이다.      2017년 12월 18일(미국시각) 트럼프 행정부는 새로운 ‘국가안보전략 보고서’를 공개했는데 이미 예상했던 바처럼 중국을 적대적 경쟁국가로 인식하고 대처할 것임을 확인했다. 즉 미국은 중국의 도전장을 공식적으로 접수한 것이다. 본격적으로 한판 붙어 보자는 말이다.         공식적으로 시작된 패권 경쟁      미국과 중국이 패권 경쟁을 공식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마당이다. 누가 이길 것이냐는 세계 모든 나라의 관심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운명을 가를 정도로 중요한 일이다. 이미 박근혜 정권 시절부터 중국에는 쩔쩔매던 굴종적인 나라가 된 한국일진대 만약 중국이 미국을 압도하고 세계의 패권국으로 등극한다면 그때 한국은 중국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아직도 세계 1위인 미국의 동맹이면서도 중국에 쩔쩔매는 한국의 현재 모습을 보면 중국이 1위가 되고 한·미동맹이 강제 폐기당한 후 우리의 처량한 모습이 상상된다. 이미 몇 년 전 천안함 사건 당시 한국의 행동이 자신의 비위를 건드린다고 본 중국 사람들은 우리에게 “미국만 없다면 손봐 줄 것”이라는 악담도 서슴지 않았다. 지난 12월 중순 우리 대통령의 중국 방문 시 중국이 보인 한국 기자 폭행 등등 수많은 무례가 중국이 아니라 미국에 당한 것이었다면 아마 서울 광화문 미국대사관 앞은 시위 군중으로 뒤덮였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이미 중국을 대단히 무서워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 대해서는 굴종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아니라면 사상·이념적으로 중국과는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런가. 아무튼 중국이 정말 1등이 된다면 그 경우 한국의 처지가 얼마나 딱하게 될지 우울하다.      그러나 필자는 중국이 패권국이 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즉 미·중 패권 경쟁의 승자는 미국일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고 보고 있는 편이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지가 궁금할 것이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동안 미·중 패권 경쟁에 관한 한국 사람들의 분석은 좋은 국제정치 이론과 정확한 자료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 전혀 아니었음을 우선 지적해야 하겠다.       한국 사람들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잘 모른다. 미국은 절대로 패권적 지위를 평화적으로 양보할 나라가 아니다. 미국은 전쟁을 통해 만들어지고 발전한 나라다. 1776년 독립선언을 한 미국은 이를 막으려는 당시 세계 패권국 영국과 전쟁 끝에 1783년 겨우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그후 6년이 지난 1789년 조지 워싱턴 장군은 초대 대통령에 취임할 수 있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은 전쟁터에서 뼈가 굵은 장군이었던 것이다. 전쟁으로 독립을 쟁취한 미국은 건국 이후 수많은 전쟁을 통해 강대국이 되었고 패권국이 되었다. 그런 미국이 전쟁에서 패하지도 않았는데 중국에 패권의 자리를 물려줄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국제정치 이론을 모르는 사람들의 공허한 이야기가 될 뿐이다. 미국뿐 아니었다. 지구 역사를 보면 어떤 패권국도 도전자에게 평화적으로 패권적 지위를 물려준 경우가 없었다. 하물며 미국과 같은 ‘전쟁의 나라’가 평화적으로 중국에 패권적 지위를 양보하리라고 보면 오해다.      미국과 중국의 국력 격차가 아직도 대단히 크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미국의 군사력은 현재 2위보다 약 10배 강하다고 평가된다. 동맹국을 제외하고 계산할 경우 그렇다는 말이다. 미국은 45개의 동맹국을 보유하고 있고 중국은 북한 한 나라가 동맹국이다. 미국 해군은 2014년 현재 미국 다음으로 강한 나라 17개국의 해군을 합친 것만큼 강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면서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해군을 대폭 강화할 계획을 수립했다.      우리는 G2라는 용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중국을 미국에 버금가는 막강한 국가로 생각하고 있지만 G2라는 용어를 쓰는 나라는 한국 외에는 거의 없다는 사실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세계의 최첨단 과학기술을 장악, 매년 노벨 과학상 분야 수상을 휩쓸고 있으며, 200년 이상 사용 가능한 석유와 100년 쓸 천연가스를 확보하고 있고, 한 번 농사를 지으면 세계를 먹여살릴 수 있으며,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은 2014년 이래 셰일석유 혁명을 통해 경제 상황도 대폭 호전되고 있다.      지면 관계상 자세한 분석은 곤란하지만 중국 경제는 지금 서서히 몰락하고 있다고 보아도 될 정도다. 사실상 광정(匡正)이 불가능한 중국의 인구통계학적 재앙은 금명간 중국의 사회·경제적인 안정성이 현재 상태를 유지할 수도 없게 만들 것이다. 소련과의 패권 경쟁에서 힘겨운 승리를 거둔 미국은 일본·유럽의 패권 도전은 아예 그 싹을 잘라 버릴 정도로 신속하게 처리했다. 즉 경제적 수단으로 일본·유럽의 도전을 막은 것이다. 미리미리 경제적 수단을 활용해서 도전자들을 견제할 수 있다면 현존 패권국은 군사적 수단으로 도전자에 대응해야 할 필요가 없다.      미국은 이미 ‘경제’라는 수단으로 중국의 도전에 맞서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對)중국 경제정책, 즉 중국이 빼앗아간 직업을 찾아오겠다는 정책은 단순한 경제정책이 아니라 미·중 패권 경쟁의 맥락에서 보아야 그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은 차후 주먹으로 싸우기보다는 지금 돈으로 싸우는 것이 패권 유지를 위해 훨씬 더 쉽고 좋은 방법임을 잘 알고 있다.

장상인

-법을 어기지 않아야 선진국   “2층 참사, 3층 무사 비상구가 갈랐다”(조선일보).“1시간 살아 있었는데 유리 외벽을 못 깼다”(중앙일보).“이 비상구만 보였더라면...”(동아일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문이 지난 23일 1면 톱기사로 일갈(一喝)한 충북 제천의 스포츠센터 참상에 대한 보도다.   하지만, 이러한 보도는 과거에도 많았다. 그런데도 고쳐지지 않고 반복되고 있는 것이 문제다.   ‘무엇 때문일까.’   우리는 언론의 보도가 잠잠해지면 ‘언제였던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거기에는 정부·지자체·건물주·건설회사... 심지어 국민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어 보인다. 항상 ‘나와는 관계없는 남의 일이다’는 생각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나라 일본의 아파트의 베란다     오쿠다 히데오(奧田英郞)의 소설 에 나온 글이다. 필자는 이러한 글을 접하면서 생각에 잠긴다. 쓸데없는 망상일 수도 있지만... 업무차 일본의 고베(神戶)로 향했다.   필자를 태운 비행기는 좌우로 몸집을 흔들면서 해협을 건너 항공모함처럼 바다에 떠 있는 간사이(關西) 공항에 내려앉았다. 입국 수속을 마친 후 공항에서 고베 행 페리를 탔다. 배에 오르자 안전에 대한 매뉴얼이 눈에 들어 왔다.   구명동의 착용법의 매뉴얼. 페리의 이름이 일본어로 ‘가제(風: 바람)’. 실제로 바람이 거칠었다. 여기저기서 뱃멀미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만(灣)을 가로 질러 질주한 덕택으로 30분 만에 고베 항에 다 달았다. 셔틀버스로 이동해서 다시 모노레일과 지하철을 번갈아가며 고베 역에 내렸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키가 큰 아파트들을 쳐다봤다. 일본의 아파트 베란다들은 한결 같이 열려 있었다. 화재나 지진 발생 시 대피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불이나 옷가지 등을 말리는 것 외에는 어떠한 물품도, 장식물도 없었다. 이웃집은 널빤지 하나로 경계선 표시일 뿐, 콘크리트 벽이나 철판으로 된 국경선(?)도 없었다. 확장이 금지된 일본의 아파트 베란다(1)   확장이 금지된 일본의 아파트 베란다(2)우리나라의 아파트는 준공 검사만 마치면 바로 ‘베란다 확장 인테리어’에 돌입한다. 비용도 많이 든다. 입주자 입장에서는 응접실(마루)과 방이 덤으로 들어오니 환상적일 수밖에. 그러나, 이것은 합법적이라 해도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일본의 골목길   불법 주차가 없는 고베의 도로.   도쿄 신주쿠의 골목길.일본은 골목길에는 주정차를 못한다. 사람이나 차량이 다니기도 불편하지만, 화재나 지진 발생 시 좁은 도로에 차량들이 버티고 서 있으면 소방차가 진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살고 있는목동의 주상 복합도 31층이다. 이번의 사태를 접하고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20년 동안 소방훈련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고베 방재 센터의 건물 안전 진단 시뮬레이션. ‘천정에 붙어 있는 스프링클러는 거의 장식품. 주방에 놓여있는 소방 기구는 맵시만 뽐낼 뿐...’   아무리 생각해도 어떠한 기능도 역할도 못할 것 같다. 고민 끝에 관리인에게 물어봤다. “아저씨! 저희 아파트의 소방 훈련은 언제 하나요?” “네. 일 년에 한 번씩 합니다.” “그럼 훈련 참가자들은요?” “간부들만 합니다.”   한심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에 나와 있는 짤막한 문장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바벨탑(Tower of Babel)을 쌓고 있는 듯싶다. 어리석게도.

장상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1600)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했던 선봉장이었다. 그는 사카이(堺) 무역상 고니시 류사(小西隆佐, ? -1592)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전국 시대부터 아즈치 모모 야마 시대에 걸쳐서 이름을 날렸던 사카이(堺) 지역 호상이었다. 부호(富豪)이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측근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의 집안은 열렬한 크리스천이었다. 유키나가(行長)의 어머니 ‘막달레나’는 여걸 중의 여걸이었다. 그녀는 수시로 히데요시(秀吉)의 공문서를 대필하기도 했다. 필자는 이러한 상식을 바탕으로 지난 10일 고베(神戶)에서 업무를 마치고 잠시 시간을 내어 사카이(堺)를 향했다.   사카이(堺)를 향해서 달리다   고베(神戶)-오사카(大阪)를 거치는 동안 기차를 세 번 갈아타고서 사카이(堺)역에 내렸다. 역(驛) 직원에게 관광 안내소를 물었다. “여기 관광 안내소가 어디에 있나요?”   “없습니다. 이 전화로 물어보시면 답을 해줄 것입니다.”   우리의 간이역과 흡사한 사카이역 역원은 ‘안내소는 없고 전화로 알려주는 시스템만 있다’고 했다. 필자가 전화기를 들고서 용감(?)하게 물었다. “관광 안내소입니까? 혹시, 고니시 류사(小西隆佐)가 살았던 곳이나 가족들의 흔적, 그리고 그들이 무역 거래를 했던 곳을 아시나요?” “??? 관광 안내 책에 나와 있는 내용 외에는 모릅니다만...” “그래요? 실례했습니다.”   필자는 관광 안내 책자를 집어들고 역에서 나와 우동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우고서 택시를 탔다. 택시 운전사 역시 고개를 좌우로 흔들 뿐 동문서답만 했다.   ‘아! 헛고생이런가. 오래전부터 찾고자 했던 곳인데...’   기왕에 택시를 탔기에 관광 안내서에 나와 있는 다인(茶人) 센노리큐(千利休, 1522-1591)의 생가터로 방향을 틀었다. 센노리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천박한 사람으로 결론내린 실존 인물이다. “센노리큐 생가터로 갑시다.” “오케이. 좋습니다.” 신이 난 운전사는 ‘요미우리 신문사 오사카 지사 사회부 전속 운전사였다’면서 으스댔다. ‘신문사 물을 먹었단 말이렷다?’   대로변에 서있는 고니시의 흔적   택시 운전사는 20분 쯤 달리더니 센노리큐의 생가 터 앞에서 차를 세웠다. 필자가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나이 지긋한 사람에게 묻자 ‘고니시 유기나가의 흔적이 시내에 있다’고 했다. 운전사는 열심히 커닝을 하더니 “아! 저도 알 수 있습니다”하면서 씽긋 웃었다.   운전사는 할아버지가 그려준 약도를 들고서 거리를 몇 바퀴 돌더니 큰 길 옆에 차를 세웠다. “여기 있습니다.” 대로변의 고니시 유키나가 집터 그곳에는 외로운 표지석 하나와 안내판이 서 있었다. 안내판에 쓰여 있는 글을 요약해서 옮겨본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1560-1600)’ 편에 서서 싸웠으나, 동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패해서 교토에서 참수 당했다.>   그렇다. 교토에서 태어나 사카이에서 자란 유키나가(行長)- 태어난 곳에서 참수당한 것도 고약한 운명이로다. 필자는 안내판과 표지석을 카메라에 담고서 상상의 나래를 폈다.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 의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본다.   실제 역사와 소설 속으로 “진영 막사 앞에 상인이 와서 나으리를 뵙겠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여드리면 아실 것이라고 합니다만...” 시종이 내놓은 것은 은으로 된 십자가와 검은 표시가 되어 있는 나무 표찰, 오와리 고오리 마을의 이코마 저택에서 쓰이던 예금표였다. “그들은 고니시라고 하는 약장사 부부가 아니더냐?” “맞습니다. 서른이 넘은 남자에 스물예닐곱 정도의 부인, 그리고 열 살 정도의 남자 아이를 데리고 있습니다.” '줄리아 오다'의 모습을을 그린 포스터 “당장 들여보내라.” 히데요시는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부인께서는 글씨도 잘 쓰시지만 조선이나 남만(南蠻)의 말도 하실 수 있다고 했지요?” “예. 이 아이에게도 조선 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니시 부인은 옆에 있는 열 살 가량의 남자 아이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인사시키며 대답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모의 소개로 이렇게 히데요시를 만났던 것이다. 1565년 8월 초의 일이다. 어머니로부터 조선 말을 배운 고니시 유키나가. 그는 1593년 1월 평양성을 후퇴하면서 길에서 울고 있는 여자 아이(3세)를 일본으로 데리고 가서 양녀로 키웠다. 아이는 양 할머니로부터 신앙심을 배웠고, 약재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다. 이름은 '줄리아 오다.' '줄리아 오다'는 지금도 일본에서 성녀(聖女)로 추앙받고 있다. 필자가 사카이에 간 것은 그녀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표지석 하나로 결론이 났지만.   가을이 한창인 오사카 성 필자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흔적(표지석)을 찾은 것으로 만족하고서  ‘조선의 원수’로 일컫는 히데요시의 본거지였던 오사카 성(城)으로 이동했다. 오사카 성은 역사적 사실을 망각 속에 던져버린 듯 아름다운 단풍에 둘러싸여 있었다. 순간 야마모토 겐이치(山本兼一)의 소설 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홍익희

알파고 제로, 인공지능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지난 10월 ‘알파고 제로’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생각보다 빨리 왔다.”는 느낌이었다. 일반적으로 ‘초지능’ 인공지능의 탄생은 2045년~2060년이라야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지금의 인공지능 발전 속도를 보면 그 시기가 훨씬 앞당겨질 것 같다. 현재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어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본격적인 ‘이륙’을 시작한 느낌이다.    한마디로 ‘알파고 제로’는 인공지능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전 버전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기존 알파고 버전들은 인간의 기보를 통해 바둑을 배웠다. 그런데 ‘알파고 제로’는 말 그대로 제로베이스에서 바둑을 스스로 깨우쳤다. 그래서 이름도 알파고 제로로 붙인 것 같다. 인공지능이 ‘스스로 깨우쳤다’는 게 실로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알파고 제로는 기존 버전들과는 달리 그냥 바둑판에 검은 돌과, 흰 돌을 놓는 방법만 알려줬을 뿐인데 바둑 원리를 혼자서 ‘스스로 깨우쳐’ 단기간에 경이적인 성취를 보여줬다. 인간이 기초 데이터를 입력하지 않아도 이제 인공지능이 인간 지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스스로 학습하고 스스로 진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알파고 제로는 처음 36시간에는 바둑 초심자처럼 돌을 포위하여 잡아먹는 것에 집중했으나 이후 고급전략을 스스로 깨우쳐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아니 인간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정석과 수를 발견해내기 시작했다. 알파고 제로는 바둑을 독학한 지 불과 3일 만에 이세돌 9단을 이긴 ‘알파고 리’의 실력을 넘어섰다. 그 뒤 커제 9단을 이긴 ‘알파고 마스터’마저 추월했다.    관심이 쏠리는 건 이런 대국 결과가 아니라 기존 지식과 데이터 없이 스스로 깨우쳐 실력을 길렀다는 부분이다. 편견과 아집에 갇혀있을 수 있는 인간 지식의 도움이 없어지자 오히려 훨씬 더 창의적이고 강해졌다는 사실이다. 알파고 개발책임자 데이비드 실버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 교수는 알파고 제로가 기존 버전들보다 강한 이유는 “인간 지식의 한계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알파고 제로는 인간 지식 도움 없이 스스로 깨우쳐 특정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제 더 큰 관심은 알파고 제로의 '확장 가능성'이다. 비단 바둑 게임뿐 아니라 다른 영역에도 응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각종 연구개발 분야는 물론 주식, 의료, 법률, 에너지, 로봇 등 무궁무진하다.     인공지능, 인류의 친구인가, 적인가?    인공지능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찬사와 우려가 극명하게 갈리는 기술이다. 인공지능이 인류의 친구가 될 것인지 적이 될 것인지에 대해 실리콘밸리 리더들 간에 뼈있는 논쟁이 붙었다.    전자 곧 찬성편에서는 인공지능(AI, Aritificial Intelligence)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 구글의 ‘레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그리고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가 있다.    구글은 2014년에 영국 인공지능회사 ‘딥마인드’를 인수하여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Alpha Go)를 개발했다. 올해 5월에는 구글의 모든 인공지능 관련조직들을 ‘Google.AI’라는 하나의 조직으로 묶어 연구와 개발의 효율성을 높였다.    페이스북은 구글보다도 빠른 2013년에 인공지능 연구조직 ‘FAIR’(Facebook Artificial Intelligence Research)를 설립했고 이듬해 딥러닝 기술을 이용해 세계 최고수준의 안면인식기술을 개발해 상용화에 성공했다. 금년 3월 기준, 페이스북의 안면인식 정확도는 97.25%를 넘어섰다. 인간의 97.53%와 비슷하다. 사진을 보고 당신과 당신 친구들을 알아맞출 확률이 백발백중은 아니더라도 97% 이상 이라는 이야기이다. 딥러닝은 사람의 신경망을 참조해 만들었기 때문에 서로 다른 각도와 모습에서도 사람을 구별할 수 있다. 그 뒤 페이스북은 자사의 개발자 회의인 ‘F8’에서 인공지능의 장기전망과 그 중요성을 밝히고, 인공지능을 활용한 챗봇을 메신저에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반대편 곧 인공지능이 인류에게 매우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견해를 주도하는 쪽에는 우주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와 스페이스 X와 테슬라의 엘론 머스크’가 있다. 호킹박사는 “완전한 인공지능의 개발이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엘론 머스크 역시 ‘터미네이터’ 영화에서 기계들이 자기인식 능력이 생겨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악당 인공지능의 사례가 충분히 현실성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는 “인공지능은 인류에게 핵무기보다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며 인공지능 개발을 ‘악마를 소환하는 행위’에 비유했다. 2015년에 스티븐 호킹, 엘론 머스크, 노엄 촘스키, 스티브 위니악 등 1000명이 공동서한을 발표, “인공지능을 활용한 로봇의 개발은 재앙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엘론 머스크는 딥마인드가 구글에 인수되기 전에 이미 딥마인드에 투자한 선구자다. 그가 투자한 이유는 이윤이 탐나서가 아니라 내부자로 참여함으로써 딥마인드 인공지능 발전상황을 가장 빨리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인공지능 발전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가속화되자 2015년 말 일론 머스크는 실리콘밸리 최고 인큐베이터인 ‘와이콤비네이터’ 대표 샘 알트만과 함께 인공지능연구 비영리단체 ‘OpenAI’를 설립했다.      인공지능 관련 상반되는 두 견해의 충돌   엘론 머스크가 공식적으로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처음 경고한 것은 2014년 MIT 연설에서 “인공지능은 인류 멸망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듬해 자신에 대한 전기를 쓴 애슐리 반스의 책에서 그는 재차 자신의 친구이자 구글의 창업가인 레리 페이지에게 “인공지능에 대한 의도는 선할지라도, 예기치 않은 실수로 악당을 만들 수 있다”고 일침을 놓았다. 2016년 두바이에서 열린 ‘월드거버먼트서밋’에서 그는 또 다시 “가끔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에 너무 심취되어 자신들이 하는 일이 가져올 파문을 보지 못한다.”고 경고했다.    이에 대한 마크 저커버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독일에서 인터뷰 중에 ‘일론 머스크의 최근 경고들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오바라고 보느냐’는 물음에 ‘신경질적’(hysterical)이라고 답해 큰 입장 차이를 보였다.    결국 이러한 입장 차이는 올해 7월에 또다시 충돌했다. 반복된 경고에 대해 별 변화가 없자 엘론 머스크는 목소리를 더 높였다. 미국 주지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인공지능에 대한 정부차원의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인공지능에 일자리를 뺏긴 사람들로 인해 사회가 극도로 불안정해지고,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가짜뉴스’ 때문에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인공지능이 길거리에서 인간을 살육하는 상황을 지켜보고 난 뒤 위험을 자각한다면 너무 늦다”고 말했다. 그는 빠르면 2030년쯤에 ‘초지능’ 인공지능이 현실화될 수 있어 인류가 지금부터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 주에 마크 저커버그는 ‘Facebook Live Q&A’ 페이스북 라이브 공개방송을 진행하다 시청자가 엘론 머스크가 주장한 인공지능의 위험성에 대한 의견을 묻자, 그는 “이에 대해 내 의견은 확실하다”며 “앞으로 5년에서 10년 후 인공지능은 인간의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인공지능에 대해 지구 멸망 시나리오를 그리는 사람들은 매우 부정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무책임한 행동인 것 같다”고 답했다. 이 답변이 순식간에 트위터로 퍼지자 엘론 머스크 역시 바로 트위터로 응대했다: “(인공지능 주제에 대해) 마크와 얘기를 나누어본 적이 있다. 이 주제에 대한 그의 이해도는 제한적이었다.”      예상치 못한 인공지능의 돌발행동    마크 저커버그와 엘론 머스크가 서로의 견해에 대한 비판을 주고받은 지 채 일주일이 지나지도 않아 상황은 더욱 재미있게 전개되었다. 페이스북이 주최한 인공지능 시연회가 있었다. 인공지능이 탑재된 챗봇 두개가 서로 흥정하는 시연이었다. 원래 이 시연의 목적은 챗봇이 인간처럼 자신의 의도를 숨긴 채 최대 이익을 챙기기 위해 흥정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자리였다. 그런데 시연 도중 챗봇들은 자신들만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 대화내용은 프로그램을 만든 개발자들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인공지능 챗봇들은 서로를 잘 이해하는 듯 대화를 이어나갔다. 주최 측이 당황해 두 챗봇의 전원을 꺼 급하게 중단시켰다. 두 챗봇이 만들어낸 언어는 그들 간의 효과적인 소통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예상 못했던 결과였음은 분명했다.    인공지능이 예상치 못한 행동을 보인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페이스북이 개발한 두 인공지능 간 대화에서 방언 비슷한 언어를 선보인 적이 있었다. 작년 11월 구글번역기 인공지능이 예상치 못하게 자신만의 중간 언어를 만들어내 번역한 적도 있었다. 올해 3월에는 엘론 머스크의 ‘OpenAI’에서 개발한 인공지능들도 자신들만의 언어를 만들어 소통했다.    비록 장기적으로 인공지능이 위험한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현재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가 예상 밖으로 빠르다는 데는 모두 동의하고 있다. 특히 지난 1~2년 사이에 발전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인공지능 발전사    1950년에 이미 인공지능을 내다본 사람이 있었다. 컴퓨터의 아버지라 불리는 유대인 수학자 ‘존 폰 노이먼’은 ‘기술적 특이점’(Technological Singularity)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이는 인간이 만든 기계들이 인간보다 훨씬 똑똑해져서 초인간적 지능을 갖게 되는 시점을 말한다. 이 시점은 인류에게 되돌릴 수 없는 기점으로써, 노이먼은 이 기점을 지나면 인간사회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고 했다.    기계가 인간보다 똑똑하다는 기준은 모호하지만 차츰 기계가 인간보다 잘 하는 것들이 많아지면서 기술적 특이점이 다가오고 있는 징조들이 보인다. 이 가운데 세계적 주목을 받은 사건은 지능 대결을 보인 보드게임 종목에서였다.    1990년 인간 대 컴퓨터의 첫 경기가 열렸다. 종목은 체스판에 말을 놓고 움직여, 상대방의 말을 모두 따먹으면 이기는 게임 ‘체커’였다. 미국 수학교수이자 체커챔피언 ‘마리온 틴슬리’가 ‘치눅’(Chinook)이라는 컴퓨터프로그램과 대결했다. 치눅은 앨버타대학 ‘조나단 셰퍼’ 교수가 1989년부터 준비한 체커 프로그램이었다. 첫 시합에서는 마리온 틴슬리가 4-2로 치눅을 이겼으나 4년 후 재시합에서는 치눅이 이겼다.    그 뒤 1996년에는 ‘체스’로 다시 인간과 기계가 맞붙었다. 당시 체스챔피언 ‘개리 카스파로브’와 IBM에서 개발한 ‘딥블루’ 간의 시합에서 4-2로 개리 카스파로브가 승리했으나 다음 해에는 딥블루가 승리했다.    비록 치눅 프로그램은 체커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랐으나, 실질적인 기술은 아직 인공지능이라고 부르기에는 미비했다. 하지만 ‘딥블루’부터는 현재 인공지능의 바탕 기술인 ‘머신러닝’(Machine Learning)이 도입되었다. 머신러닝은 기존 경기들에 대한 데이터를 시스템에 주입시킴으로써 이를 활용하여 스스로 학습하는 기술이다. 여기에서 학습의 의미는 단순히 특정경우에 어떻게 대응하라는 수동적 학습이 아니라 수많은 경우들을 보여줌으로써 거기에서 패턴을 도출해내어 스스로 법칙을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딥블루 이후 지난 10년 사이 인공지능의 핵심기술은 ‘뉴럴 네트워크’(Neural Network) 곧 인공신경망이다. 이는 인간 뇌의 신경세포를 구성하는 뉴런과 시냅스의 연결을 본 따 만든 여러 노드(Node)들 망으로써 인간 뇌와 유사한 방식으로 정보를 분류하고 학습할 수 있다. 이러한 뉴럴 네트워크들을 여러 층으로 활용하여 규칙을 제시받지 않고도 스스로 데이터를 이해하고 이를 이용해 학습하도록 한 ‘딥러닝’ 기술이 현재 인공지능의 핵심기술이 되었다.    1990년대에 컴퓨터가 체커와 체스 챔피언을 이겼으나 여전히 넘지 못한 종목이 하나 있었다. 바로 바둑이었다. 바둑은 다른 보드 게임들에 비해 경우의 수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 바둑의 경우의 수는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의 수를 원자의 수로 곱한 수보다도 많다고 한다.    최신 딥러닝과 뉴럴 네트워크 기술을 도입하여 바둑에 도전장을 내민 것은 구글이었다. 구글의 딥마인드에서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Alpha Go)가 지난해 3월 1백만 달러 상금을 걸고 이세돌과 승부를 다투었다. 여기서 알파고가 이기면서 드디어 바둑에서조차 기계가 인간을 앞섰다.      인공지능을 만드는 인공지능    "알파고 쇼크"라고 불리며 세계를 놀래킨 이 인공지능은 무서우리만치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지난 5월 구글은 더욱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구글은 개발자컨퍼런스를 통해 인공지능을 만드는 인공지능, ‘오토ML’(Auto Machine Learning)을 발표했다.    오토ML은 현존하는 방대한 데이터를 인공지능이 분석한 뒤 분석결과를 활용해 새로운 형태의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방식이다. 이미 오토ML이 만든 이미지 인식 프로그램은 전문가들이 만든 프로그램에 필적하는 정확도를 보였으며, 언어 번역에 있어서는 오토ML의 수준이 오히려 인간이 만든 기술수준을 능가했다.    인공지능이 인공지능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인공지능에게 몇 가지의 핵심 키워드만 주어진다면 스스로 프로그램을 설계할 수 있기 때문에 장차 컴퓨터 언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오토ML에게 주문하면 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주게 된다. 구글은 5년 내로 컴퓨터 언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원하는 프로그램을 주문제작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제 인간이 만드는 인공지능과 더불어 인공지능이 만드는 인공지능이 어느 정도 발전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간보다 우수한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을 공격하는 모습은 SF영화에 단골로 등장한다. 영화 에선 미래의 인공지능이 현재의 인간을 공격하고, 에선 인간의 기억마저 인공지능이 조작한다. 최근 급속히 발전하는 인공지능 기술을 보면서 영화에서처럼 인공지능이 스스로 자기복제도 가능해지고 또 자기 결점을 보완해 자기보다 우월한 인공지능을 만드는 날도 머지않을 수도 있다.     알파고 제로의 의미    이제 인공지능은 인간이 제공하는 지식 없이 스스로 학습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지금까지의 알파고 버전들은 바둑을 학습하기 위해 인간이 제공한 10만개 이상의 기보와 3천만번 이상의 가상경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번에 딥마인드에서 개발한 알파고 제로는 바둑에 대한 어떠한 사전 데이터도 제공받지 않은 채 스스로와의 대국을 통해서만 바둑을 익혔다. 이렇게 인공지능이 백지에서부터 스스로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고, 이전 실수들을 통해 더욱 똑똑해지는 학습방식인 '강화학습’(reinforcement learning)을 활용했다.    알파고 제로는 이런 방식으로 백지상태에서 시작해, 자신과 49만 번의 경기를 단 72시간 내에 학습한 뒤 이세돌을 꺾었던 '알파고 리'와 맞붙어 100전 100승을 거두었다. 3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40일에 걸쳐 2900만 판을 혼자 둔 뒤, 이전까지의 모든 '알파고' 버전을 압도하며, ‘스스로 깨우치는’ 강화학습의 놀라운 힘을 입증했다.    이 과정에서 알파고 제로는 높은 승률을 보였을 뿐 아니라 지금껏 인간이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수를 창조해냈다. 인간 지식의 한계와 편향을 극복한 것이다. 구글 딥마인드는 이에 대해 "우리는 인공지능의 이런 창조력을 보고, 인류가 해결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의 발전은 인공지능이 더 이상 인간의 지식에 속박되지 않으며, 오히려 지적인 모든 영역에서 인간을 뛰어넘는 초지능 단계로 다가가고 있다. 여기서 초지능이라 함은 인간 전체의 지성을 합한 것보다도 우월한 지능을 의미한다. 과학자들은 인류가 초지능이라는 기술적 영역에 도달할 것이라는 데는 거의 모두 동의하고 있다.      인류의 삶을 바꾸는 인공지능    인공지능은 이제 단순히 바둑이나 체스 같은 게임 상대가 아니라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으며,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일례로 구글의 통번역시스템이 있다. 과거 단어와 문구 기반의 번역에서 이제는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를 활용해 문장 전체를 한 번에 번역하는 방법이다. 이로써 의미 전달이 훨씬 정교해졌다. 구글 어시스턴트의 알고리즘도 날로 정교해서 대화 맥락을 이해할 정도로 똑똑해졌다. 이미지 인식기능을 추가해 각종 사물 인지능력도 갖추었다. 알파고가 빠르게 바둑을 습득했듯, 구글 어시스턴트의 한국어 습득 속도도 정식 서비스 시작 후 더욱 빨라질 것이다.    주식투자 시장도 인공지능으로 인해 크게 변하고 있다. 세계 최대 투자은행인 미국 JP모간은 최근 인공지능 로봇을 주식거래에 전면 도입했다. 지난 1분기부터 유럽의 증권 알고리즘 사업부에서 LOXM이라는 이름의 인공지능을 활용한 결과, 사람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주식을 사고파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주식투자뿐 아니다. 인공지능이 자산관리 분야에서도 각광을 받고 있다. 그동안 상위 1~3%의 고액 자산가에만 제공됐던 전문가의 자산관리 서비스가 인공지능을 활용하면 일반 대중들에게도 가능해질 전망이다. 글로벌 금융회사들이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해 서비스, 상품, 조직을 완전히 바꾸고 있다. 세계적인 투자회사인 골드만삭스는 지난해 인공지능 자료분석 회사인 '켄쇼'를 인수해 방대한 금융데이터를 분석해 투자자 자산을 관리하고 있다. 골드만삭스 측은 연봉 50만 달러 받는 전문 애널리스트가 40시간에 걸려 하는 작업을 켄쇼는 몇 분 내에 처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인공지능은 인간 노동력에 비해 훨씬 적은 비용으로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으며, 감정에 이끌리지 않아 위기상황에도 효과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자율주행 자동차도 빼놓을 수 없다. 구글과 테슬라 이후 GM, 아우디 등이 인공지능을 내세운 자율주행차를 앞 다투어 선보이고 있으며 그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아우디는 4세대 A8의 상징성을 아예 인공지능으로 잡았다. 현대자동차 또한 완전 자율주행 구현 단계를 충족하기 위해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가장 크게 기대되는 분야는 헬스케어 분야이다. 구글이 지난 해 선보인 스트림스는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병을 조기에 진단하는 시스템이다. 환자의 몸 상태를 스스로 학습해 위험한 상황이 오기 전에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도록 개발됐다. 이러한 기술은 인간의 평균수명을 늘리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제 인공지능은 사람과 친구도 되고, 심리상담자도 되고, 멘토도 되고, 교사도 되고, 심지어 애인도 될 수 있다. 미국에서는 1만 5천 달러에 인공지능 섹스로봇을 주문받고 있는 회사도 있다. 올해 말 출시 예정이다.      인공지능과 인류의 미래    인공지능은 이제 인류의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구글은 이미 “AI first company” 전략을 발표했다. 지난 두 달 사이에도 흥미로운 발전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우리 삶 거의 모든 분야를 바꿀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인공지능 미래에 대해 경계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일론 머스크는 미국 로드아일랜드에서 열린 전미 주지사협의회 하계총회에 참석해 "인공지능은 인간 문명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 위협이 될 것"이라며 “인공지능은 유례없이 선제적이고 능동적인 규제가 필요한 매우 드문 영역”이라고 주장했다.    인공지능이 앗아갈 일자리에 대한 걱정도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은 2020년까지 미국, 영국등 주요 15개국에서 사무직과 생산직 분야에서 총713만 개 일자리가 사라지는 반면, 경영/재무/운영, 컴퓨터/수학 등 분야에서 총196만 개 일자리가 늘어나는데 그칠 것으로 보았다. 517만 개의 일자리 축소가 불가피 하다는 이야기이다. 한국고용정보원도 2025년까지 국내 일자리의 60% 이상이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또한 인공지능의 생산성을 일부 자본가나 일부 대기업이 독점함으로써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부작용이 속출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결국 대다수 국민은 소비여력을 상실하게 되어 결국 시장경제 시스템이 붕괴될 것이라는 우려다.    다행히 세계 지도자들은 빠른 속도의 인공지능 발전이 부정적 결과로 이어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지난 해 유럽연합(EU)은 ‘로봇 시민법’을 제정했다. 공상과학 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1942년 발표한 ‘로봇 3원칙’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곧 “로봇은 사람을 해치면 안되고, 인간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할 권리가 있다.”    학계와 재계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버클리 대학과 옥스포드 대학 등에서 ‘인공지능 윤리’를 연구하고 있으며, 구글에서도 이들을 지원하고 있다. 아마존, 페이스북, 애플 등 글로벌 기업들은 인공지능의 책임 있는 개발과 인류와 사회에 이익을 주는 인공지능 협력체 ‘Partnership on AI to Benefit People and Society’에 참여하고 있다. 전기전자공학 연구소(IEE)는 인공지능에 대한 윤리적 기준을 제안했으며, 구글의 딥마인드는 최근 인공지능의 도덕적, 윤리적 의미에 중점을 둔 조직 창설을 발표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혁신에는 불안정이 따랐다. 하지만 이 불안정 속에서 발전이 이루어졌고 인류는 과학 발달로 날개를 달 수 있었다. 이제 인공지능은 피할 수 없는 미래이다. 그 발전 속도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이제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방법과 더불어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할 때이다. (주: 이 글은 아들 홍기대와 공동 집필임을 밝혀둡니다)

조갑제

하버드 대학을 창립하기로 결의했던 1636년 매사추세츠만(灣)회사의 이사회는 그 의의(意義)를 이렇게 설명했다.   [하느님이 우리를 뉴 잉글랜드에 안전하게 인도해주신 뒤에 우리는 집을 짓고 일용품을 만들었으며 신을 찬양하기 위한 적당한 처소도 마련했다. 그리고 자치기구도 설립했다. 이제 우리가 다음에 할 일은 교육을 발전시키고 이를 후손들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우리의 성직자들이 흙으로 돌아갈 때 글을 모르는 목사들한테 교회를 맡겨 놓는 일이 벌어질까 염려한 나머지 이 학교를 설립하기로 했다.]   이 대학은 일종의 신학교로 출발한 셈이다. 하버드의 첫 번째 교수직도 신학교수였다. 필자가 니먼 펠로우로서 연수를 하고 있던 1997년 통계에 따르면 재단의 기금이 110억 달러였는데 지금은 300억 달러를 넘는다. 하버드 기금관리 회사(Harvard Management Company)는 이 현금을 효율적으로 투자하여 한때는 年평균 이자수익이 26%나 되었다. 이는 미국 기업의 평균 수익률보다 네 배쯤 높은 것이다. 하버드 대학의 학보(學報)인 크림슨紙에는 가끔 기금관리회사가 독재국가들에 투자하고 있다는 폭로기사가 실리기도 한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상과대학원)을 비롯하여 돈벌이에 관해서는 최고의 두뇌들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금증식이 이처럼 경이적으로 잘되고 있는 것은 철저한 돈 본위의 대학경영 때문이다.   기금을 운영하는 회사는 직원들이 수백 명이나 되는 금융회사이다. 기금운용 책임자의 연봉은 400만∼600만 달러 수준이다. 미국 메이저 리그의 일류선수와 비슷한 봉급이다. 기자가 청강한 케네디 스쿨(정치행정대학원)의 [역사로부터의 추론] 강좌를 가르친 老교수는 대통령학의 태두(泰斗) 리처드 뉴스타트였는데 그의 공식직함은 [더글러스 딜런 행정학 교수]이다. 더글러스 딜런이란 사람이 낸 기금으로 운영되는 교수직이란 뜻이었다.   하버드란 대학 이름도 젊었을 때 죽은 존 하버드란 목사가 도서를 기증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붙여준 것이다. 돈을 기부한 사람이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철저하게 돈값을 매겨주는 것이다. 하버드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일 뿐 아니라 가장 부자 대학이다. 미국에서 가장 부자이니 세계에서 가장 부자 대학일 것이다. 기금과 500여 개소의 건물 값을 보태면 하버드 대학의 자산가치는 1000억 달러에 육박하지 않을까? 여기에는 90개가 넘는 도서관에 소장된 1300만 권의 책과 특수자료,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7대 박물관과 미술관에 소장된 희귀(稀貴)유물, 예술품, 동식물 표본 같은 것은 포함되어 있지도 않다.   기금을 기준으로 미국에서 두 번째로 부자인 대학은 예일, 세 번째가 텍사스 대학, 이어서 李承晩이 박사학위를 받았던 프린스턴 대학, 캘리포니아주에 있어 서부를 대표하는 명문 스탠포드 대학)이다. 이 다섯 대학 중 텍사스 대학을 제외한 나머지 네 대학은 주간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가 매년 실시하는 미국 대학 순위 매김에서 늘 10등 안에 든다. 명문대학을 만드는 두 요소는 돈과 시간이다. 기금(基金)과 역사란 얘기이다. 기금은 급조할 수가 있지만 역사는 그럴 수가 없다.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 전체 학생은 약 1만8천명이다. 하버드 대학(Harvard College)의 학생수는 그 3분의 1인 6천여 명이고 나머지는 대학원생들이다. 교수들은 약 2천1백 명이다. 그들 중 정교수는 약 8백 명이다. 정교수들만이 항구적 고용이 보장되어 있다. 부교수, 조교수는 계약제이므로 항상 불안하다. 미국에서 이혼율이 매우 높은 편에 속하는 것이 이들 조, 부교수 직종이다. 정교수가 되기 위하여 휴일도 없이 공부에 열중하다 보니 가정을 제대로 돌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버드의 행정직원들은 9천3백여 명이다. 여기에 하버드 의과대학 부속병원들에 속해 있는 의사들 약 7천4백명을 보태면 하버드 대학교의 고용인원은 약 1만9천명이다. 학생수를 더하면 약 3만5천명이 하버드라는 작은 지구촌을 형성하고 있다. 학부 학생들의 약 70%가 장학금이나 수업료 대출, 또는 부업의 혜택을 학교로부터 받고 있다.   하버드가 가진 이 시간의 무게, 역사가 단절되지 않고 쌓여갈 때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맛이 우러나는가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하버드 야드라고 불리는 중앙 교정(校庭)이다. 이 교정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은 중앙도서관 와이더너의 정면 계단이다. 이 계단은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는 장소로 애용된다. 아침에 이 앞을 지나칠 때 자주 부딪치게 되는 것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사진을 찍는 한국인 부모들이었다. 부모로부터 '너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 대학에 들어오도록 해봐'란 말을 듣고 있을 저 아이들이 자라서 하버드에 다닐 때쯤 다시 시간을 내어서 이 너그러운 대학에서 한 일년을 더 보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와이더너 도서관   이 와이더너 도서관은 다른 대부분의 건물들처럼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다. 인물과 건물에 신화나 전설을 붙이기를 좋아하는 미국 사람들. 이것이 바로 역사가 짧은 그들의 역사 만들기 수법이다. 이 도서관의 이름은 1912년 처녀 항해에서 유빙(流氷)과 충돌하여 침몰했던 영국의 호화여객선 타이타닉號에 탔다가 죽은 하버드 졸업생 해리 엘킨스 와이더너에서 딴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잊지 못해 2백만 달러를 하버드에 기부하여 도서관을 신축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 어머니는 기부금을 내면서 두 가지 조건을 붙였다고 한다.   하나는 모든 학생들에게 수영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기숙사 식당에서 하루에 한번씩은 아이스크림(아들이 좋아했다고 한다)을 내놓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두 가지 조건은 잘 준수되지 않고 있으나 이 도서관은 3백만 권을 소장한 미국 제2의 도서관(1위는 의회도서관)이 되었다. 아무 책이나 읽다가 거기에 적혀 있는 참고 도서나 논문을 구해보려고 이 도서관에 오면 거의 틀림없이 찾아낼 수가 있다. 이 하버드 야드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구경거리는 존 하버드 동상이다. 워싱턴에 있는 링컨 기념관의 링컨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 다니엘 체스트 프렌치의 작품이다.   이 동상은 세 가지 거짓말로 유명하다. 1884년에 제작된 이 동상에 적혀 있는 '존 하버드, 창립자, 1638'이 다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하버드의 초상화는 남아 있지를 않아 조각가 프렌치는 셔먼 호어라는 학생을 모델로 삼아 조각을 했다. 하버드는 창립자가 아니고 기부자일 뿐이다. 창립년도도 1636년이다. 그래도 이 존 하버드의 구두코를 잡고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 도금이 허옇게 벗겨져 있을 정도이다. 하버드의 이름이 붙은 건물이 하버드 야드에는 하나가 남아 있다. 하버드 홀이 그것인데 두 번 불이 나 지금 건물은 같은 장소에 세워진 세 번째 건물이다.   두 번째 건물시절에 여기에는 물리학 실험실이 있었다. 미국 독립의 한 주역(主役)으로서 피뢰침을 발명했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 건물에서 실험을 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 건물에는 하버드가 기증했던 도서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이 나는 바람에 다 타버렸다. 다만 한 학생이 슬쩍하여 가지고 나왔던 한 권의 책만 남게 되었다. 이 학생은 이 귀중한 책을 총장에게 자진신고 형식으로 돌려주었다. 총장은 감사를 표한 뒤에 즉각 그 학생을 제적해버렸다고 한다. 건물의 크기에서 와이더너 도서관과 쌍벽(雙壁)을 이루고 있는 것이 맞은편에 보이는 전몰자 추모교회이다. 1932년에 세워질 때는 1차세계대전에서 전사한 하버드 출신들을 추모하기 위한 건물이었다. 그 뒤에 치러진 2차대전, 한국전쟁, 월남전쟁 전사자도 함께 추모한다. 매일 추모기도회가 열리고 매주 예배가 있어 일반 시민들도 참여한다. 이 추모교회의 뒤편에 있는 성당처럼 보이는 높은 건물은 추모당(Memorial Hall)이라 불리는 건물이다. 이것은 남북전쟁 때 북군편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하버드 출신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1878년에 건축한 것이다. 하버드 교정(校庭)의 대표적인 두 건물이 戰死者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은 이 대학의 성격을 말해준다. 청교도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으로서 또 미국의 건국과정과 궤(軌)를 함께 하면서 발전해온 이 대학은 지금 세계를 내려다보면서 미국의 국익을 수호하는 엘리트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애국심을 깔고서 진리를 추구하는 국가주의적인 교육기관이다. 국가 국민 국익을 떠난 보편적 지식의 추구가 전무(全無)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쪽은 소수파이며 다수파를 깨어 있게 하는 역할로 존재할 뿐이다. 하버드 학풍의 주류는 어디까지나 미국을 중심으로 하고 미국적 가치관을 기준으로 한 보편성의 추구인 것이다. 와이더너 도서관의 계단에 서서 교정을 내려다보면 건물들을 통해서 전달되는 이미지가 神, 국가, 진리이다. 이 이미지를 나는 [진리=교양에 기초한 전문지식, 국가=애국심, 신=보편적인 인류애]로 해석해보았다. 개인 국가 세계를 관통하는 교양, 지식, 애국심, 인류애라는 이 단어들을 하나의 행동윤리로 내면화할 수 있는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 하버드의 목표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개인과 국가와 세계가 서로 싸우지 않고 교양과 애국심과 인류애가 서로 질투하지 않으면서 하나의 논리로써 연결되고 통합되는 그런 인간과 국가와 세계를 우리는 선진(先進)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버드 학부 신입생들은 고교 졸업생 5백만명 중 최상층부에 속한 1천8백명으로 보면 된다. 2000년 졸업생이라 하여 관심을 끌었던 1996년 신입생의 경우 1만8천2백명이 입학 신청을 하여 10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신청자 중 1백64명은 미국판 수능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들이었다. 1987년 이후 [USA 투데이]가 매년 선정한 최우수 고교 졸업생 1백99명 중 1백1명이 하버드에 입학했다. 대학의 명성을 상징하는 로드 장학생 선발수에 있어서도 하버드는 5년 연속 전국 1등을 하고 있었다. 1996년에는 한국교포 학생이 명단에 들어있었다. 하버드 교정에서 한국인들이 기가 죽지 않는 이유는 신입생들의 민족구성 통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신입생들의 19%가 아시아인들이다. 그들 중 3분의 2가 동양4개국(중국, 대만, 일본, 한국)이다. 학부, 대학원생을 다 포함한 통계에 따르면 한국 학생수는 캐나다, 일본, 중국, 대만, 영국 다음의 제6위이다. 인구 비율로 치면 대만 다음으로 2위가 된다. 일류 지향의 한국인들이 국내를 벗어나 세계에 도전하다가 이런 성적을 남기게 된 것 같다. 밥 돌의 농담 1997년 4월 하버드 대학의 정치행정대학원인 케네디 스쿨의 초청연사로 나온 밥 돌 前 공화당 대통령후보는 농담을 몇 번 했다. 하버드가 있는 케임브리지市의 전화번호부에서 1백명을 무작위로 뽑아 미국을 통치하라고 해도 클린턴보다 더 잘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하버드 대학 덕분에 21세기에 가면 내 주소가 워싱턴 DC의 펜실베이니아街 1600번지가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돌은 미국적십자사 총재로서 하버드 법대 출신이다. 차기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후보가 되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하버드는 케네디,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여섯 명의 미국 대통령을 배출했다. 교수진에서는 34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다. '하버드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란 책은 이 대학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하버드 출신들을 람보에 비교했다. 냉전의 지휘자들이 주로 하버드 출신이고 특히 월남전을 망친 많은 고관들이 하버드 출신이라고 지적했다. 1997년 6월5일의 하버드 대학 졸업식은 이런 하버드의 국가주의적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이날 행사는 마셜 플랜 발표 50주년을 기념하여 매들린 K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졸업식 기념연설을 했다. 1947년에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조지 마셜이 하버드의 졸업식 기념연설에서 西유럽의 경제재건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西유럽을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원대한 구상을 발표하였다. 이 마셜 플랜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덕분에 서방 자유세계가 냉전에서 소련에 승리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날 졸업식에서 하버드 총장 닐 L 루딘스틴은 [하버드는 미국 대학이다]는 말로써 연설을 시작했다. '많은 학자들과 학생들이 하버드로 오는 이유는 우리가 미국 대학이기 때문이다. 하버드는 뚜렷한 국가적 개성을 가진 사회에 뿌리를 둔 대학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버드의 미래가 국제화의 추세를 넓혀갈 것임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런 국제화를, 확립되어 있는 우리의 가치관과 정통의 틀 안에서 추진해갈 것이다.' 요컨대 미국 중심의 국제화를 하버드의 진로(進路)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국익과 미국적 가치관의 수호 및 확산이 하버드의 대명제인 것이다. 하버드의 뿌리를 찾아서 하버드가 구현하고 있는 미국 사회 주류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건국정신의 이해이면서 동시에 오늘날 이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英美계통 가치관의 본질을 이해하는 길이다. 1517년 독일의 가톨릭 승려 마르틴 루터가 [95개 명제]를 발표하여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 교황과 성당의 부패를 고발함으로써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루터가 주장한 핵심은 인간은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지 가톨릭처럼 권위주의적인 계급구조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인간과 절대자 사이에 있는 교황의 중계역할을 부정한 것이다. 이 주장에 동조하는 봉건영주와 국가들이 생겨나면서 유럽은 백년을 넘게 종교분쟁에 휩싸였다. 이 종교 분쟁에서 어느 쪽에 섰느냐에 따라서 나라의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대체로 영국 독일 스칸디나비아 같은 투톤族 나라들이 루터 편을 들어서 개신교(改新敎) 국가가 되었고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라틴系 국가들이 가톨릭 국가로 남았다.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나라들에서는 그 뒤에 산업혁명과 민주화가 상대적으로 잘 진행되어 이 나라들이 제국주의 시대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스위스에서도 종교혁명을 받아들여 많은 州가 로마 교황의 지도력을 거부하게 되었다. 제네바市는 프랑스 신학자로서 종교박해를 피해서 망명한 존 칼빈을 종교개혁의 지도자로 모셨다. 칼빈은 이 도시를 자신의 신학에 따라서 통치하게 되었다. 그의 유명한 저작인 [그리스도교의 원칙](1536년)은 아주 주목할 만한 구원관(救援觀)을 내놓았다. 그는 인간이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하느님이 창세기(創世記) 때부터 이미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를 결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인데 칼빈은 무궁한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구원이 예정되어 있지 않다면 천국에 갈 수가 없다. 그러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타락한 생활을 할 것인가. 칼빈은 누가 구원을 받을지는 알 수 없으나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인가 하는 사실은 확실히 알 수가 있다고 했다. 타락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확실하게 지옥으로 떨어질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지옥행(地獄行) 열차를 타지 않으려면 평소 사회생활과 신앙생활을 건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엄격한 도덕률과 근면성을, 그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는 인간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 인간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건실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절묘한 논리가 탄생했다. 칼빈의 淸富사상 이 윤리는 그 때 유럽에서 형성되고 있었던 시민계층의 행동철학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적합하였다. 말하자면 역사의 흐름과 맞는 神學이 되었다. 이 사상은 그 뒤에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로 확대되고 자본주의의 정신으로 연결되었다. 돈을 버는 행위를 천한 것으로 보는 종교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달리 칼빈주의는 인간의 경제활동은 신성한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파악했다. 돈벌이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신성한 가치를 지니려면 돈을 벌고 특히 쓰는 행위가 정당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인간이 돈을 버는 것은 개인의 부(富)를 증식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몫을 잘 관리하여 크게 키우는 행위이다. 그리하여 그 富를 사회에 환원하여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빛내는 행위이다. 이러한 칼빈주의의 경제관은 청부(淸富)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활동을 경멸했던 주자학의 청빈(淸貧)사상과 정반대이다. 청빈사상은 위선적이고 선언적이며 패배적인 생각이라면 청부사상은 적극적이고 실용적이며 실천적이다. 이 칼빈주의는 개신교의 주류(主流)신학이 되어 프랑스의 위그노派, 독일과 네덜란드의 개혁교회, 스콧랜드의 장로교, 그리고 영국 청교도의 신학적 근거가 되었다. 미국의 건국정신은 이 영국 청교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게 된 데는 재미있는 역사의 우연이 있었다. 16세기 초 영국왕 헨리 8세는 원래 로마 교황과 사이가 좋았다. 헨리 8세는 루터의 영향을 차단하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란 칭호까지 받았다. 그런데 헨리 8세와 결혼한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 캐서린 공주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남아(男兒)를 출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에게 이혼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보통 때 같으면 이런 요청은 허락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는 사정이 묘하게 꼬이게 되었다. 헨리 8세의 왕비 캐서린은 스페인의 전성시대를 연 카를로스 5세의 숙모였다. 카를로스 5세는 합스부르그 왕조(王朝) 출신으로서 스페인왕뿐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하고 있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의 일부도 통치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은 세속적인 권력은 카를로스 5세가, 정신적 권위는 로마 교황이 나누어 갖고 있는 형국이었다. 로마 교황은 카를로스 5세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숙모 캐서린과 영국왕 헨리 8세가 이혼하는 것을 허용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화가 난 헨리 8세는 영국 교회와 로마 교황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는 앤이라는 여자와 결혼해버렸다. 이 사건은 유럽에서 로마의 교황권이 약화되는 중대한 계기가 된다. 하나 재미있는 것은 헨리 8세가 아들을 얻기 위해서 맞아들였던 앤은 딸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이 딸이 커서 엘리자베스 1세가 되고 그의 치세(治世)에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극단적인 개혁파 청교도 그런데 영국 교회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로 논쟁이 일어났다. 칼빈주의의 원칙을 도입하여 영국 교회에 남아있는 가톨릭적인 잔재를 청소하자는 개혁세력을 퓨리턴(Puritan)이라고 불렀다. 영어로 퓨리파이(Purify), 즉 청소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이 퓨리턴, 즉 청교도 중에는 영국 교회자체를 부정하고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개혁파가 있었다. 이들을 분리교도(Separatists)라고 부르게 되었다. 미국에 건너간 이들이 이 분리주의자들이었다. 당시로서는 가장 개혁적인 기독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미국으로 건너가 이상향을 건설하려고 했다는 이 점이 미국의 국가적 성격을 상당 부분 규정했다. 영국의 동쪽 스크루비에 있던 분리주의 집단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1607년에 네덜란드로 이주하였다. 여기서 10여 년 살다가 보니 문제가 생겼다. 네덜란드의 칼빈주의 신도들은 이 분리주의자들에게 종교의 자유는 허용했으나 일자리는 하층민 수준으로 제한하였다. 선원, 병사로 나아가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네덜란드의 습관에 동화되어 조국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이 영국을 떠난 것은 조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인데 이곳에 오래 살다가는 후손들이 동화되어버리겠구나 하는 걱정이 생겼다. 그렇다고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기는 싫고, 그리하여 이 분리주의자들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새로운 영국,  즉 뉴 잉글랜드를 건설하자는 꿈을 키우게 되었다. 그때, 즉 1620년 무렵 워싱턴 남쪽에 있는 지금의 버지니아 지방에서도 영국인들이 식민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버지니아 회사라는 식민지 회사가 개척민을 데리고 와서 농사를 짓고 담배를 재배하고 있었다. 분리주의자들 35명은 이 버지니아 회사로부터 토지사용권을 얻어서 주식회사를 설립한 뒤에 이 회사소속으로서 총 1백2명의 이주자들을 모집하여 1620년 9월 영국의 플리머스항(港)을 떠나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이들을 태운 1백80t짜리 메이플라워호(號)가 대서양을 건너 그해 12월에 도착한 곳이 지금 매사추세츠州에 속하는 해변으로서 플리머스라고 이름지었다. 이들은 원래는 버지니아로 가려고 했으나 폭풍 때문에 이곳에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메이플라워는 다음해 4월까지 머물면서 겨울에는 이주민들의 피난처로 쓰였다. 혹독한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순례자(Pilgrims)로 불리게 된 이들 중 반이 죽었다. 근처에 있는 인디언들에게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시체를 묻어도 표시를 남기지 않았다. 다음해에는 근처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로부터 옥수수 재배법을 배워서 풍작을 이루었다. 이를 기념하여 추수감사절이 생겼다. 보스턴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달리면 도착하는 플리머스港에는 메이플라워號의 복제품과 최초의 상륙자가 밟았다는 돌, 그리고 민속촌으로 재현된 농장이 있다. 이 플리머스 농장에는 청교도 복장을 한 사람들이 영국 억양의 중세영어를 써가면서 관광객들을 즐겁게 한다. 비행기가 상공으로 날아가는 것을 가리키면서 '무슨 새가 저렇게 크지'라고 능청을 떨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코리아, 코리아, 그런 나라도 있나'라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청교도들이 건설한 이 농장에는 교회, 감옥, 요새가 있다. 인간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시설인 것이다. 종교적인 열정으로써 뭉쳤다고 해도 질서를 유지하면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감옥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순례자들은 영국의 보호로부터도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당시로선 어느 나라의 주권 아래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규율을 잡지 않으면 공멸(共滅)할 것이라는 공포에서 자신들이 선출한 대표자들이 만든 법에 복종하겠다는 서약을 하게 되었다. [메이플라워 맹약]이라고 불리는 이 약속을 기초로 하여 자치기구를 설립했다. 교회의 간부들이 자치기구의 간부를 겸하였다.

장상인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설립한 금오공대의 제7대 총장 취임식을 다녀오다   지난 22일 이른 아침 집을 나섰다. 금오공과대학교 신임 총장의 취임식 참석을 위해서다. 가을과 겨울의 경계선이어서 일까. 바람결이 제법 차가웠다. 낙엽들도 무리지어 바람에 흩날렸다. 구미역에 내리자 고(故)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마중 나온 금오공대 직원이 역사(驛舍)를 한 바퀴 돌아서 학교로 가는 동안 금오산(977m)과 새마을운동 등 구미와 관련된 사항에 대해 시시각각 정보를 제공했다. 필자는 구미시의 인구가 42만 명이라는 것에 놀랐다. 의외로 큰 도시였기 때문이다. 역 주변과 시장통, 버스 정류장...사람들로 붐볐다. 낙동강을 가로지른 큰 다리를 건너자 신시가지가 나왔고, 금오공과대학교의 정문이 눈에 들어왔다. 캠퍼스를 한 바퀴 돌아 본관 로비에 내렸다. 로비 오른 편에 학교의 역사관이 있어서 들여다봤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과 휘호가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1976년에 쓴 박정희 대통령의 건학이념과 사진 ‘정성(精誠) 정밀(精密) 정직(正直)’   공과대학의 설립의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함축된, 부연설명이 필요 없는 단어였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은 '우수한 인력 확보만이 신흥공업국가 건설로 직결된다'는 생각에서 ‘정성(精誠) 정밀(精密) 정직(正直)’을 건학이념으로 특화된 공업 계열 중심의 금오공대를 설립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0년 3월 기계공학과와 전자공학과를 만들어 문을 열었다. 당시 학생 수는 320명. 이 대학은 10년 후인 1990년에 국립대학으로 개편되어, 진리(眞理) 창조(創造) 정직(正直) 제2의 건학이념으로 설정하면서 ‘특성화된 종합공과대학교의 실현’이라는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지금의 학생 수 6,000여명. 이 학교는 ‘한국의 MIT로!!’라는 슬로건을 힘차게 내걸고 있었다.   미래형 공학교육 선도대학 꿈꿔   제7대 총장의 취임식은 내외귀빈과 교수, 직원, 학생 등 500여 명이 꽉 메운 본관 강당에서 오후 세시에 시작됐다. 사회자는 교무처장인 김희준 박사. 행사 시작의 멘트와 함께 ROTC(학군단) 후보생들의 축하 의식이 눈길을 모았다.   ROTC학생들의 신임총장 영접 취임식 행사는 국민의례와 연혁보고, 신임 총장의 약력 소개에 이어서 이상철(61) 신임 총장의 취임사가 있었다. 그의 취임사가 차분하면서도 또렷하게 전달됐다.   취임사를 하는 이상철 신임 총장 “친애하는 금오가족 여러분! 대한민국 공과교육 역사의 중심, 금오공과대학교 제7대 총장직을 맡아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1979년에 설립된 금오공과대학교는 머잖아 불혹(不惑)의 나이를 맞게 됩니다. 그동안 양적, 질적인 성장의 시기를 거쳤고, 창의적인 도전과 도약의 시기도 보냈습니다.”   신임 이상철 총장은 '과거의 성과에 만족하지 말고 미래를 향해 매진하자'고 역설했다.   “제가 제시하는 금오의 비전은 미래형 공학교육의 선도대학입니다. '교육'은 대학의 가장 근본적인 존재 이유이며, 대학에서의 모든 사업과 활동은 결국 '교육'으로 집약되어야 합니다. 과거를 답습하고 현재에 안주하는 교육이 아닌, 끊임없이 줄기차게 미래를 준비하는 교육,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할 목표하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맞은 오늘에 있어서 공과대학의 미래는 곧 국가의 미래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총장의 4대 키워드도 제시 돼   조원호 서울대 명예교수의 축사 이상철 신임총장의 지도교수이자 은사인 조원호(67) 서울대 명예교수는 축사에서 '대학 총장 자격의 키워드(keyword)'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미래지향적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자둘째, 교육에 대한 지식과 연구 실력을 겸비한 자셋째, 학생·직원·교수를 한 마음으로 묶을 수 있는 리더십의 보유자넷째, 펀드 레이징(fund-raising) 즉, 대학 발전을 위한 재정확보의 능력자   조원호 명예 교수는 “수 십 년 동안 지켜본 결과 신임 이상철 총장이야말로 위에서 열거한 네 가지 모두를 갖춘 적임자이다”라고 강조했다. ‘대학의 총장은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자인 동시에 조직을 이끌어가는 리더의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인 듯싶었다.   가족대표의 축하 연주회 이어서 색다른 축하 연주가 있었다. 신임 총장의 누님 두 사람과 조카며느리가 피아노·첼로·바이올린 연주를 위해서 무대에 올랐다. 곡명은 ‘사랑의 인사’와 ‘세레나데’. 이들은 서울에서, 춘천에서, 인천의 송도에서 구미까지 무거운 악기를 들고 와서 축하 무대를 꾸몄단다. 가족 연주로 인해서 공식적이고 학구적인 공과대학의 신임 총장의 취임 행사가 유연해 지기 시작했다. 참가자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는 당연지사.   교가(校歌)로 마무리 해     힘차게 밀고 가는 우리들의 젊은 모습   세계로 뻗어가는 참된 일꾼 부를 때  힘과 능력 갖추어서 앞장설 이 여기에 있다>   신임 총장의 취임식 행사는 이은상 작사, 이흥렬 작곡의 로 40여분 만에 마무리 됐다.   자연과학·응용과학·공학·생산기술 등을 총칭하는 과학기술(Scientific Technique)은 역사의 수레임에 틀림없다. 우수한 젊은 공학도들이 많이 모여야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1979년 故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서 설립되고, 1980년 13명의 교수와 학생 320명으로 개교한 금오공과대학교-   이상철 신임 총장의 포부대로 ‘지역이 자랑하는 대학, 국가와 국민이 신뢰하는 대학, 세계가 인정하는 대학’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남기고 정문을 나섰다. 멀리 산봉우리를 넘어가는 태양이 구름 속에서도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내일의 태양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까?’   밝은 미래를 열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찬란한 빛을 발할 것이다. 역동적으로...

김동연

문재인 정부는 출범이후 약 6개월이 지나는동안 여러 차례 외국을 방문하고 외국의 정상들을 만났다. 대표적으로 미국, 중국, 독일,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이다. 특히 미국의 경우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미국 워싱턴 D.C.의 백악관을 방문했고, 11월 초에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다.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도 지난 7월에 이어 세 번째 정상회담을 가졌다고 알려졌다. 이런 정상회담이 있을때마다 청와대는 물론, 언론에서는 정상회담을 주제로 여러 기사 등을 다룬다.  이때 양국을 지칭하는 국가명을 붙여 양국의 관계를 표현하게된다. 가령 한미관계, 한미동맹, 한중관계 등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표현은 한국뿐 아니라 한국의 정상을 만난 상대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해당 국가에서는 자신들의 국가를 앞에두고 양국의 관계를 표현하는게 일반적이다. 이는 앞에 표기된 국가명이 자국중심적 표현이기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미동맹이나 한미관계를 미국에서는 미한동맹, 미한관계라 표기하고, 중국도 한중관계를 중한관계로 표현한다. 이런 표현은 정부의 공식발표에서는 그 의미가 더 크다. 왜냐하면 우리국민을 대변하는 정부의 스탠스와 정부의 외교적 지위를 가늠하는 것으로 단순히 우리나라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그 말과 표현이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유엔연설에서 북한을 지칭할 때 국가라는 “state”이라는 단어대신 정권이나 왕조의 의미인“regime” 이라는 표현으로 북한을 표현했다. 이것은 북한을 정식 국가보다는 김정은 정권에 집중된 비정상적인 조직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즉 북한의 국제적 지위를 미국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가의 공식발언에 사용되는 상대국에 대한 표현은 신중하게 검토되고 있다. 자칫 잘못된 표현은 심각한 외교적 결례를 범할 수 있고, 특정국가와의 관계마저 깨뜨릴 수 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과 중국 리커창 총리와의 만남이 성사된 직후 나온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의 발언이 눈길을 끈다. 지난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의 한중간 정상회담에 이어 문 대통령은 중국의 서열 2인자로 알려진 리커창 총리도 만났다. 연거푸 두차례 중국측과 접촉을 하며, 최근 사드배치로 얼어붙은 양국의 관계를 복구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 만남이후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은 기자들 앞에서 공식 발언에서 여러 차례 한중외교를 “중한관계”라고 지칭했다. 윤 수석은 “중한 관계는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추운 겨울이 지나고 훨씬 따뜻한 봄을 맞을 수 있게 됐다.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라고 말했다.  국가와 국민을 대변하는 국민소통수석이 대한민국보다 중국을 먼저 지칭한 것이다. 이 발언이 리커창 총리의 발언 내용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나온것이라고 하더라도 한중관계를 중한관계라 표현한 것은 전례가 없다. 이는 다른 국가와의 전례를 살펴봐도 그렇다. 트럼프 대통령의 입에서 “미국과 한국 관계, 미한 관계”라는 말이 나왔어도, 이 내용을 전달할 때 우리정부는 줄곧 “한국과 미국관계, 한미관계”라고 표현해왔기때문이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일한 관계”라는 표현을 쓴 전례가 없다. 그런데 유독 중국과의 외교 이후에만 왜 청와대의 공식발언에서 중국을 자국인 한국보다 먼저 배치하여 부른 것인지 의도를 알 수 없다. 청와대의 친중외교 스탠스를 드러내는 것인지, 중국에 대한 외교적 저자세인지 해명이 필요해보인다.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은 대통령 취임이후 진행된 지난 첫번째 브리핑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이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한다는 전화 내용을 받았다는 내용을 기자들 앞에서 발표한 바 있다. 당시 중국측과의 통화내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줄곧 한중관라고 표현해왔던 것과는 대비되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번 표현은 국민소통수석 개인적 표현 실수라기보다는 청와대의 친중 스탠스를 의도적으로 드러냈을 가능성도 있어보인다.  참고로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은 과거 네이버 부사장을 지낸 인물이다. 네이버 포털에서는 여러가지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가령 자동차, 테크와 같은 여러 콘텐츠가 있는데 그 중 유일하게 국가를 콘텐츠한 ‘중국’이라는 콘텐츠도 제공중이다. 해당 콘텐츠에서 미국이나 여타 국가는 없다. 

엄상익

 1991년 4월경 미국의 콴티코에 있는 FBI 아카데미에서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가 백여 명의 수사관이나 각국의 안보분야 관리들을 놓고 강연을 하고 있었다. 변호사인 나는 그 자리에 나이가 지긋한 일본의 공안 조사청 사무관과 함께 참석했었다. 영어실력이 짧은 나는 미국의 중견관리들만 모이는 그 자리에서 주눅이 들었다. 그래서 세미나장의 맨 구석을 은근히 찾았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든 일본 관리는 영어발음조차 나보다 못한 것 같았다. 나 같은 마음으로 함께 구석에 앉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였다. 그는 강연장 맨 앞쪽 줄에 앉아 연사인 엘빈 토플러와 시선을 마주칠 수 있는 곳에 앉는 것이다.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가 이런 말을 했다.    “제가 일본의 동경에 갔었습니다. 일본은 우리 미국의 핵무기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더군요. 미국은 그런 일본의 숨겨진 무기를 주시해야 합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일본은 미국의 핵무기에 의해 죄 없는 국민이 한순간에 도시가 날아가고 수십만이 타 죽었다. 동경을 비롯한 도시가 벽 하나 남은 것 없이 초토화된 패전국이었다. 미국의 사령관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못 들고 있는 나라로 알고 있었다. 패전직후에 제작된 일본영화나 소설을 보면 동경의 노상에서 일본여자가 미군에게 강간을 당하는 모습도 자주 등장한다. 오히려 위안부를 자청하며 미군에게 몸을 바친 경우가 많았다.     핵무기로 엄청난 일본 사람들을 살해한 행위는 선이고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악이라는 이분법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일본 사람들은 우리가 친일파나 일본에 대해 원색적인 감정을 표현하듯 그렇게 해 오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더 철저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모습이었다. 그런 일본에 어떤 핵무기보다 더 무서운 무기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미국의 석학 엘빈 토플러가 미국의 관리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그때 맨 앞줄에 앉아있던 유일한 동양인 일본관리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엘빈 토플러 교수가 그에게 말을 하라고 기회를 주었다.     “일본에는 핵무기가 없습니다. 개발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숨겨놓은 병기가 있다고 하는 것인지 답변해 주셨으면 합니다.”    더듬거리는 일본 관리의 영어실력은 형편없었다. 그러나 그는 잘하려고 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그러나 겸손하게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전하는 모습이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엘빈 토플러 교수가 빙긋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동경에 가서 서점들을 들려봤습니다. 일본의 미래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 서적들이 넘쳐났습니다. 인내하고 연구하며 기술을 축적하고 경제를 부흥시켜 국가를 부강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백 년 앞을 보고 이백 년 앞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패전국이고 미국에 대한 원망이 있었을 텐데도 전쟁에 진 후 바로 미국의 석학들을 동경의 대학에 초청해 강의하게 하며 일본의 미래를 다지고 있는 것도 봤습니다. 저는 그런 일본의 미래에 대한 계획과 연구가 미국이 가지고 있는 많은 핵무기보다 무섭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드린 겁니다.”    한국인인 나는 일본 관리의 당당한 태도와 비교하면서 자존감이 없는 내가 부끄러웠다. 앞으로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국제사회에서도 내 틀 안에서 머물면서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철저한 지혜로 대응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미국에 사는 김평우 변호사가 방송에 나와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미국 등 강대국들은 자기네들이 핵을 보유하고 그룹을 이루고 있지만 다른 작은 나라가 핵을 보유하는 건 절대 인정하지 않아요. 탈레반이나 이슬람 원리주의자처럼 테러조직 취급을 해서 바로 쳐서 무력화시켜 버리는 거죠. 저는 트럼프가 북한을 반드시 공격할 거라고 봅니다. 만약 한국이 북한 김정은과 대화를 하고 관계를 유지하면 무역을 해서 먹고 사는 남한을 세계적인 왕따로 만들어 버릴지도 몰라요.”    조선일보의 김대중 고문은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사이에서 장기판의 졸 같은 신세라고 한다. 그리고 그건 모든 약소국의 공통된 운명이라고 탄식하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느 쪽에든 붙어야 한다고 한다. 그건 이념의 문제도 자존심의 문제도 아니고 생존의 문제라는 것이다. 산다는 게 무엇일까. 쓰러져도 중심은 잃지 않는 그런 삶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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