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태영

미국은 1776년 건국 이후 무수한 전쟁을 치러왔다. 나라를 세운 것도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결과이다. 미국은 그 후 국내에서 남북전쟁을 치뤘으며, 국외에서는 1,2차 세계대전 등을 승리로 이끌면서 역사상 가장 강력한 나라로 떠올랐다. 소련과의 냉전 시기에 치룬 한국전쟁은 초강대국 미국으로서도 쉽지 않은 전쟁이었다. 베트남전쟁에서는 패전의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소련 붕괴 이후 유일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세계의 보안관이라는 평가를 듣게 되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벌인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공격하였으며, 지금도 아프가니스탄과 시리아 등에서는 여전히 전쟁을 하고 있다.   미국 건국 이후 올해 2017년까지 241년이 흘렀다. 이 241년 가운데 224년 동안 전쟁을 치뤘다. 미국의 전쟁관련 온라인 매체인 워히스토리는 최근 미국이 투입한 전쟁비용을 기준으로 미국의 10대 전쟁을 다음과 같이 선정하였다. 괄호 안은 전비(戰費)이다. 이 액수는 그동안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하여 현재의 기준으로 평가된 금액이다.   10. 미국-멕시코 전쟁 (24억 달러)   멕시코군 진영을 돌파하는 미군 1846-1848년 동안 멕시코와의 벌인 전쟁. 미국이 텍사스를 병합하여 시작된 전쟁. 텍사스는 원래 멕시코영토였으나, 1836년 멕시코혁명 이후 분리되었다. 미국은 처음에는 텍사스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40년대에 들어 입장이 바뀌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9. 독립전쟁 (24억 달러)   1776년 롱아일랜드에서 영국군과 전투중인 미군 독립전쟁은 실제로는 1775년 4월에 매사츄세츠 주의 민병대가 영국군과 교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13개월 후인 1776년 7월4일 미국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이 전쟁은 1783년까지 지속되었다. 미국 측 전사자만도 5만~7만명으로 수준으로 추정되고 있다.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등이 미국을 도왔다. 전비는 멕시코와의 전쟁 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8. 미국-스페인 전쟁 (90억 달러)   스페인과의 전쟁에 참가한 미 해군의 전함 아이오와 함의 모습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은 4개월간 지속되었다. 당시 스페인은 독립을 선언한 쿠바와 1895년부터 전쟁 중이었다. 미국은 쿠바를 돕기 위하여 전쟁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전장은 쿠바로 한정되지 않았으며, 태평양의 필리핀과 괌으로 확대되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푸에르토 리코, 필리핀, 괌을 확보하게 되었다.   7. 남북전쟁 (800억 달러)   남북전쟁에 참전한 북군의 해군 병사들 링컨 대통령이 노예제 폐지를 추진하자 노예제를 옹호하는 남쪽 주들은 이에 반대하며 별도의 연방을 구성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1861년 전쟁에 돌입하였다. 이 남북전쟁은 1865년까지 지속되었으며, 75만명이 전사하였다.    6. 걸프전쟁 (1,020억 달러)   걸프전쟁에 투입된 미 공군의 F-117 스텔스 전폭기. 이 첨단 기종은 미 공군에서 이미 퇴역했다. 1990년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 점령하면서 촉발된 전쟁이다. 미국은 50여개국으로 다국적군을 구성하여 이라크 군을 몰아내고 쿠웨이트를 해방하였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점령한 직후,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병력을 배치하는  ‘사막의 방패’ 작전을 시작하면서부터 전비를 쏟아부었다. 이라크군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인 ‘사막의 폭풍’ 작전은 1991년 1월에 시작되어 42일만에 끝났다. 값비싼 첨단무기와 화력이 총동원되다시피했기 때문에 단기간의 전쟁이지만 천문학적인 수준의 전비인 1,020억 달러가 들었다.    5. 제1차세계대전 (3,340억 달러)   1차 대전에 참전한 미군   1914년 시작된 제1차세계대전에 미국은 1917년이 되어서야 참전하였다. 미국이 전쟁에 참가한 것은 18개월뿐이지만 당시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14%인 3,340억 달러나 들었다.   4. 한국전쟁 (3,410억 달러)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1950년 북한의 침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아직 종전되지 않았다. 남북한은 휴전상태이다. 이 전쟁에 미국이 들인 비용은 3,410억 달러이다.  3. 베트남전쟁 (7,380억 달러) 북베트남을 폭격하는 미 공군의 B-52 폭격기북베트남의 남베트남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 북베트남은 당시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았다. 이 전쟁은 1975년 북베트남이 당시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현재 호지민)을 점령함으로써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미국이 들인 비용은 무려 7,380억 달러나 된다.   2. 테러와의 전쟁 (1조6천억 달러)   아프가니스탄에서 전투중인 미군 테러와의 전쟁은 2001년 9.11 테러 사건 직후 시작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이 싸우는 장소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으로 바뀌었다. 미국의 상대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조직 알 카에다, 이라크 정규군, IS 등으로 바뀌었다.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제거했지만 테러와의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에 추가 파병을 지시하였다. 2010년 현재까지 미국이 들인 비용은 1조6천억 달러이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들지는 알 수 없다.   1. 제2차 세계대전 (4조 달러 이상)   노르망디에 상륙하는 미군 마국이 치룬 가장 값비싼 전쟁은 역시 제2차세계대전이다.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 직후에 전쟁에 참가하였다. 4조 달러가 넘는 비용이 들었으며, 전사자만도 40만명이 넘는다.

박승준

▲ 지난 3월 28일 영국 런던 내셔널리버럴클럽에서 열린 중국어본과 영어본 ‘시진핑 사상’ 출판기념회에 주영 중국대사관 직원들과 일부 국가 외교관들이 참석했다.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에 수립됐고, 헌법은 5년 후인 1954년에 제정됐다. 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을 시작했고, 1983년에 헌법 개정이 이뤄졌다. 그 헌법 전문(前文)은 다음과 같이 흘러간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국가 중의 하나다.… 1911년 쑨중산(孫中山) 선생이 이끄는 신해혁명이 봉건제를 폐지하고 중화민국을 창립했다.…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을 영수(領袖)로 하는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했다.… 중국의 각족 인민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鄧小平) 이론과 ‘3개 대표’의 중요 사상 인도 아래… 부강하고 민주적이며 문명스러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해왔다.”      중국공산당 당장(黨章·당 강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鄧小平) 이론과 ‘3개 대표’의 중요 사상에다가 ‘과학발전관’을 지도사상으로 추가해놓았다. ‘3개 대표’ 이론이란 덩샤오핑이 발탁한 장쩌민(江澤民) 총서기가 주도하는 당 중앙이 ‘중국공산당이 생산력과 문화, 전 인민을 대표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결과 생겨난 부유층 부르주아들도 당에 입당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은 이론이다. 즉 중국공산당이 더 이상 계급투쟁을 목표로 하는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아니라 전 인민의 대표라고 규정한 것이다. ‘과학발전관’은 장쩌민의 후임 총서기 후진타오(胡錦濤)가 주도한 당 중앙이 ‘중국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추구한다’는 방침을 확립한 이론이다.      중국의 정치 이론은 마르크스레닌 ‘주의’와 마오쩌둥의 ‘사상’, 덩샤오핑의 ‘이론’, 그리고 과학발전 ‘관’이라고 지도사상의 등급을 구분해놓았다. ‘주의’는 국가를 초월해서 적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라는 뜻이고, ‘사상’은 중국 내에서 시대를 초월해서 적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말하고, ‘이론’은 특정 시대에만 적용 가능한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관’은 특정 지도자가 제시한 이데올로기라는 뜻이다.      요즘 중국 관영 매체들은 ‘시진핑(習近平) 사상’이라는 용어의 사용 빈도를 높이고 있다. 개혁개방 시대를 이끌어온 당의 지도사상이 그동안 덩샤오핑 이론, 장쩌민의 3개 대표론, 후진타오의 과학발전관 세 가지였으나 여기에다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2021년까지 중진국을 달성하고 중화인민공화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는 선진국을 건설한다는 시진핑의 민족부흥 이론을 추가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공산주의 청년단의 온라인 뉴스 ‘중청재선(中靑在線)’은 지난 3월 28일 “중국어본과 영어본 책자 ‘시진핑 사상(習近平思想·Xi Jinping Thought)’이 영국에서 출판됐다”고 타전했다. 이 책자는 시진핑이 당서기를 지낸 저장(浙江)성 자싱(嘉興)시의 구시원(求是園) 문화전파공사가 출판해서 영국으로 수출한 것으로, 런던의 내셔널리버럴클럽에서 열린 출판기념 행사에는 영국 주재 중국대사관원들과 일부 국가 외교관들이 참석했다고 전했다. 중청재선은 중국어본 ‘시진핑 사상’과 영어본 ‘Xi Jinping Thought’의 사진도 함께 게재했다.      홍콩의 시사주간지 아주주간(亞洲週刊) 8월 27일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올해 말에 열릴 중국공산당 제19차 당 대회에서 시진핑 사상이 마오쩌둥 사상과 덩샤오핑 사상에 이어 세 번째 중국공산당의 지도사상으로 당 강령에 삽입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민족부흥을 골자로 하는 ‘시진핑 사상’이 장쩌민 이론과 후진타오의 과학발전관을 제치고 마오쩌둥·덩샤오핑의 지도사상급으로 격상되어 ‘사상’이라는 이름을 달고 당 강령에 등장하게 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아주주간은 지난 3월 영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한 ‘시진핑 사상’이라는 책의 내용 중에 “마오쩌둥 사상은 20세기 전반부 전쟁과 혁명 시대의 지도사상이었고, 덩샤오핑 사상은 20세기 후반부의 평화와 발전 시대 지도사상이었으며, 시진핑 사상은 21세기 전반부 개혁과 창조의 시대에 지도사상이 될 것”이라는 서술도 있었다는 점을 소개했다. 시진핑 사상이 덩샤오핑 이론과 장쩌민 이론, 후진타오의 과학발전관에 이어 네 번째 지도사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마오쩌둥 사상과 덩샤오핑 사상에 이은 세 번째 지도사상으로 격상돼 등장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영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한 시진핑 사상의 저자로 중국 국방대학 교수인 류밍푸(劉明福)는 “1945년 중국공산당이 ‘마오쩌둥 사상’을 당 강령에 써넣을 때 마오는 ‘당 활동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며, 나는 당의 집단지도체제를 대표해서, 아울러 당의 이익을 고려해서, 마오쩌둥 사상이 당 강령에 삽입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했다”고 강조했다. 시진핑 사상이라는 말 역시 시진핑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당 집단지도체제를 대표한 용어라는 주장이다.      아주주간은 이와 함께 중국공산당이 오는 19차 당 대회에서 그동안 7인으로 구성돼 있던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5인 위원회로 축소하면서 시진핑 시대의 국가전략 수립을 주도해온 왕후닝(王滬寧·62) 당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을 새로운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할 것이라는 예상도 곁들였다.       아울러 시진핑의 오른팔로 그동안 반(反)부패 활동을 주도해온 왕치산(王岐山·69)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주임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유임할 것이라는 예상도 덧붙였다. 왕치산의 유임은 당 간부의 연경화(年輕化)를 위해 67세까지는 당 간부에 임명 가능하지만 68세부터는 불가라는 덩샤오핑 개혁개방 시대에 수립된 중국공산당의 ‘칠상팔하(七上八下)’ 원칙을 무너뜨리는 모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무려 70여년 전인 1945년 제7차 당 대회에서 있었던 마오의 언급까지 되살려가며 ‘시진핑 사상’을 당 강령에 써넣으려는 시도는 중국공산당 내에서는 이해가 될 일일지 모르지만 미국과 유럽 등 외국의 시각으로는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을 듣지 않을지 궁금하다. 70여년 전의 중국과 21세기에 G2로 자라난 중국은 국가의 위상이 너무나 달라졌는데 중국공산당 내에서 시대착오적인 일이 벌어진다면, 분위기에 따라서는 중국공산당 내부에 이번 제19차 당 대회를 치르면서 일진광풍(一陣狂風)이 불지도 모를 일이다.

박승준

▲ 일대일로 정상회의에 참석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영부인 펑리위안 여사(가운데).“계속되는 중국의 굴기(崛起·rise)로 권위주의적인 독재정치가 부활하고 있는 반면에 미국과 유럽에서는 민주주의적 가치가 약화되고 있다. 중국은 상하이 협력기구를 통해 권위주의적인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정권들과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적인 정치 기술과 도구를 서로 교류해가며 발전시키고 있다. 그런 가운데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은 ‘악에 대한 독재’를 선포했으며, 몽골에서는 몽골 유도협회장을 오래 지내던 칼트마 바툴가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두테르테와 바툴가는 필리핀과 몽골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민주주의 이론의 세계적 권위자인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래리 다이아몬드(Larry Diamond) 교수는 8월 8일 한국고등교육재단(KFAS) 초청으로 방한해 ‘민주주의의 위기: 그 현상과 원인, 정책 대응’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해서 흥미를 끌었다. 지난 10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나타난 민주주의의 후퇴와,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포퓰리즘, 소셜미디어 때문에 확대되고 있는 양극화와 관용적인 정신의 쇠퇴, 중국의 부상과 군사력 투사, 권위주의 정치의 부활 등에 대한 강연이었다.      “물론 아직도 많은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고,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서는 민주주의가 강화되고 있으며, 한국과 대만에서도 민주주의가 더욱 단단해지고 있어 희망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중국 내에서 민주주의가 자라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야 할 것입니다.”      래리 다이아몬드 교수의 강연은 한동안 잊고 있던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다시 떠올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지난 10년 넘게 계속된 중국의 빠른 경제 성장, 갈수록 덩치가 커져가는 GDP, 날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군사력, 그리고 우리에 대한 사드 배치 반대 압력 등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중국의 근육만 쳐다보고 위기감을 키워가며 살아왔다. 중국이 중국공산당이 주도하는 당국가(party state)로 민주주의를 향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깜박 잊고 있었다.      정확히 9년 전인 2008년 8월 8일 오후 8시에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개막을 선언한 베이징올림픽은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라는 고대 그리스의 정신과는 전혀 거리가 먼 개막식 모습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천제가 거처하는 황궁이라는 뜻의 ‘자미(紫薇)’에서 가져온 자금성(紫禁城) 한가운데에는 남북을 관통하는 축선이 그려져 있다. 그 자금성의 축선을 북쪽으로 12㎞ 연장한 곳에 지어올린 냐오차오(鳥巢·Bird Nest) 스타디움에 중국 전설에 나오는 불사조 봉황이 하늘로부터 되돌아온다는 줄거리를 형상화한 개막식은 오후 8시에 시작해서 밤 12시 넘어까지 계속됐다.      안 그래도 더운 베이징의 8월 8일 밤 8시에 새 둥지 모양의 스타디움 안은 40도가 훨씬 넘는 더위였다. 초대된 100여개 국가의 대통령과 총리, 정치 지도자, 세계의 중요 기업 대표들은 부부 동반으로 일반 관중석과 별로 다르지 않은 좌석에 앉아 말 그대로 고구마나 감자처럼 푹푹 삶아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과 후진타오 당시 국가주석, 그리고 8명의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널찍한 책상과 편안한 등받이 의자에 앉아 다리 밑에서 나오는 에어컨의 냉기를 쐬며 의젓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물론 이명박 대통령과 동서양의 국가원수급 지도자들은 부부 동반으로 겨우 엉덩이만 붙일 수 있는 조그만 의자에 앉아 온몸에 땀을 흘리다가 살아남기 위해서 화장실을 연신 드나들었다. 유일하게 그곳에서 나오는 에어컨의 찬바람을 쐬어 정신을 차리고는 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좌석이 화장실 근처였다는 점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화장실을 드나드는 전 세계 지도자들을 볼 때마다 연신 자리에서 일어나 땀이 흘러내리는 얼굴 만면에 웃음을 띠고 “하이!”라고 친근한 인사를 건네 “역시 미국 대통령…”이라는 찬사를 듣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날 밤 100여개 국가의 지도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중국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의젓함을 유지한 것은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영남이었는데 놀랍게도 김영남이 앉은 자리, 김영남의 뒤통수 바로 뒤에서는 에어컨 바람이 뿜어나오는 구멍이 있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다.      2008년 8월 8일 밤 8시에 개막된 베이징올림픽 개막행사에 참석했던 100여개 국가의 국가원수와 지도자들은 모두 다 그런 중국 지도자들의 ‘암수(暗手)’ 때문에 분노와 불안감에 치를 떨어야 했을 것이다.       시진핑(習近平)을 비롯한 중국 지도자들은 그런 황제놀음에 재미를 붙였는지 지난해 항저우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나 올해 베이징(北京) 외곽의 옌치후 국제회의장에서 개최된 일대일로(一帶一路) 국가지도자 회의 때 외국 정상들을 문 밖에 모여 기다리게 했다. 외국 정상들이 먼저 입장한 시진핑에게 차례로 다가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악수를 하는 광경을 연출했다.      그런 흐름을 타고 베이징 인민대학의 자오팅양(趙汀陽)이란 철학교수는 “주권국가들 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미국과 유럽의 베스트팔렌 체제는 지난 300년간 강대국들의 약소국에 대한 침해로 불평등한 국제사회를 만들어놓았다”고 주장하면서 “과거 2000년 동안 계속된 중국의 천하체계는 힘 있는 중화국가가 약소국을 보호하는 체제로, 천하체계가 부활되어야 국제사회가 비로소 진정한 평등사회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담은 ‘천하체계론’이라는 책까지 출판해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 ‘천재’라는 말을 듣는 웃기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중국은 비록 식민지이기는 하나 민주정치를 하던 홍콩과 마카오를 접수한 뒤에 민주적 선거제도 대신 중국공산당이 후보를 제시하는 비민주를 정착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북한의 김씨 왕조 독재체제에 대해서도 겉으로 말은 안 하지만 끝내 원유 수송파이프 닫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은근한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런 중국에 대해 “중국 때문에 아시아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는 래리 다이아몬드 교수의 강연은 새삼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특히 “한국이 중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지원을 해야 한다”는 촉구는 수교 25주년을 썰렁한 분위기에서 맞는 한·중 관계의 미래에 특별한 의미를 던져주는 말이었다.

엄상익

호주의 골드코스트에서 만났던 칠십대쯤의 노인이 있었다. 그는 오십대 부도가 나서 이민을 갔다고 했다. 그는 늦은 나이에 식당에서 접시 닦는 일부터 시작했다. 얼마 후 작은 편의점을 차렸다. 구석에 작은 방을 만들어 거기서 밥을 해먹고 밤이면 침낭 속에 들어가 잤다. 들어오는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돈이 쌓이기 시작했다. 쌓인 돈은 어느새 스스로 눈 더미 같이 불어났다.   돈에 한이 서렸던 그는 해변가에 화려한 저택을 샀다. 집안에서 낚시는 물론이고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요트장까지 설치된 집이었다. 고급 승용차를 사서 주차장에 세워 놓았다. 망해서 도망쳐 왔던 그가 이제 다시 부자가 됐다는 알리는 상징이었다. 그래도 그는 그냥 편의점에 있는 어둠침침한 작은 방이 편했다.   어느 날 기침을 하는데 핏덩어리가 섞여 나왔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았다. 폐암이었다. 죽음의 사자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가자고 손짓을 하는 것이다. 그는 남은 시간 뭘 할까 생각해 보았다. 그는 자기가 사서 빈집으로 놔둔 해변가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생전처음 널찍하고 깨끗한 방에서 바다를 내다보며 잤다.   그 다음은 고급물품을 파는 백화점으로 갔다. 그동안 한국에서 수출한 싸구려 청바지와 티셔츠만 입고 살았다. 자신을 위해서는 한 번도 돈을 써보지 못했다. 그는 신사용 고급 정장을 사서 입어 보았다. 그는 생일 케익도 잘라보고 싶었다. 그런데 함께 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는 항상 사람들을 경계하면서 살아왔다. 급하다고 돈을 꾸어달라고 손들을 벌려도 절대 돈은 꾸어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뒤에서 그를 얼음 같이 찬 인간이라고 욕을 했다. 그는 이따금씩 가게에 찾아와 부서진 진열장을 고쳐주는 베트남인을 불러 생일을 자축했다. 사실 그가 가장 해보고 싶었던 것은 사랑이었다. 이민을 와서 도중에 만났던 여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정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돈만 챙기려고 거짓말을 하다가 가 버렸다.   아이도 없었다. 그는 곰곰이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그의 편의점 단골인 열 살쯤 아래의 여인이 있었다. 수더분한 인상이었다. 그가 바쁠 때면 보고 있다가 대신 주문도 받아주었다. 그가 구석방에서 혼자 사는 걸 보고 설거지를 해 주고 간 적도 있었다. 그 여인이 기억의 벌판 저쪽에서 그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다.   그는 교민들에게 수소문해서 그녀의 행방을 알아보았다. 나이먹은 그녀를 자식들이 양노원으로 보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양복을 차려입고 그 양노원을 찾아갔다. 치매증상이 있다고 하는데도 그녀는 그를 알아 보았다. 그녀는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감사하다고 했다. 그의 삶에 활기가 돌았다. 그는 매주 꽃과 케이크를 사들고 양노원을 찾아갔다. 죽음의 날이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저택과 편의점을 팔았다. 그리고 그 돈을 그녀가 있는 양노원에 기부했다. 그리고 그도 그 양노원의 호스피스 병동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는 얼마간 남긴 돈을 주변의 혼자 늙어가는 노인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마음이 후련했다. 평생 겨울들판에 서 있는 것처럼 춥고 외로웠다. 그는 평생 소중하게 보관했던 어머니의 백금반지를 꺼내 보았다. 가난 속에서도 팔지 않고 간직했다가 부도가 나서 도망가려는 아들에게 준 반지였다. 혼자였던 그에게 의지가 되었던 반지였다. 그는 그 어머니의 반지마저 남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저 세상을 향해 걸어갔다.   호주의 골드코스트에서 우연히 칠십대의 한 남자를 만나 그의 신산스런 지난 삶의 얘기를 들었다. 그가 빨간 세타를 소포로 붙여주었다. 바람결에 그가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변 사람은 그가 얼음같이 차고 인색한 면을 얘기했다. 죽음이 다가오는 그의 마지막 장면에 나의 희망과 상상을 조금 덧붙여 보았다.

배철현

▲ 베히스툰 비문세계 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왕은 누구인가? 우리는 흔히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고대 페르시아제국의 다리우스 대왕(기원전 550~486년)이 인류 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왕이다. 그는 기원전 550년경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파르티아 통치자 히스타스페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세 번째 왕으로, 기원전 522년부터 기원전 486년까지 36년간 통치하였다. 그는 서쪽에서 새롭게 등장한 아테네와 기원전 490년 마라톤전쟁을 치렀던 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다리우스 대왕은 제국에 필요한 경제구조, 도로망, 통화 등을 정비하여 인류 최초의 제국을 만들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다리우스에 관한 자료를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저작 ‘역사’에 의존해왔다. 페르시아에 관한 사료를,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그리스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해온 셈이다. 헤로도토스의 해석이 객관적 사실을 표방하고 있지만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시작된 ‘오리엔트 르네상스’로 페르시아 쐐기문자가 판독되기 시작했다. 쐐기문자는 19세기 초 판독될 때까지 1500년 이상 사람들에게 장식으로만 여겨져왔다.      1618년 피구에로아가 고대 페르시아 다리우스 대왕과 그의 후손들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에서 수많은 유적지의 흔적을 보았다. 그리스, 로마의 저자들이 자신들의 작품에서 숱하게 언급했던 바로 그 왕이었다. 그는 이 유적지에서 새로 발견한 알 수 없는 문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문자들은 아람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혹은 아랍어도 아니다. 이들은 삼각형으로 피라미드나 오벨리스크 모양과 거의 유사하다.”      1657년, 필사한 쐐기문자가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당초 쐐기문자는 이집트의 성각문자와는 달리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1700년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히브리어와 아랍어 교수였던 하이드는 이 문자들이 쐐기처럼 생겼다 하여 설형문자(楔形文字·cuneiform)라 불렀다. 영어의 cuneiform은 cuneus(쐐기)+forma(모양)의 합성어다. 1712년 네덜란드의 의사이며 고전학자인 캠퍼가 1686년 유적지를 방문해서 그린 쐐기문자 문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1770년대까지 쐐기문자 판독에는 진전이 없었다. 그러다가 덴마크의 여행가였던 니부르가 페르세폴리스에 써 있는 문자는 모두 세 종류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 세 종류의 문자는 후에 인도-유럽어인 고대 페르시아어, 고립어인 엘람어, 그리고 셈어인 아카디아어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니부르의 작업은 18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쐐기문자 판독의 기초를 놓은 셈이다.      쐐기문자 판독에 첫 진전을 본 사람은 독일 괴팅겐의 고등학교 라틴어 교사였던 그로테펜트였다. 그는 중기 이란어와 산스크리트어, 그리고 고전문헌 등에서 반복되는 관용어구를 대입시켜 1802년 고대 페르시아어를 거의 판독하게 된다. 그가 만든 음절표에 실수가 있었고 그가 대학교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그가 쐐기문자 판독의 선구자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베히스툰 비문의 발견      쐐기문자 판독이 진행되면서 단문보다는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장문의 쐐기문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란의 자그로스산맥의 서쪽 베히스툰산에는 한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영국의 장교이자 외교관인 로린슨(1810~1895)은 1826~1833년까지 인도에 장교로 머물면서 힌디어, 아랍어, 현대 이란어를 배웠다. 그 후 이란 국왕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해 베히스툰산이 속해 있는 케르만자 지방의 책임자로 부임했다. 그는 탁월한 체력과 동네 양치기 소년의 도움으로 1100행 이상이 되는 베히스툰 비문을 모두 베끼는 데 성공하여 판독하였다. 이 베히스툰 비문에 바로 다리우스 대왕의 족적이 남겨져 있었다.       기원전 522년 페르시아 전체는 정치적 혼란기였다. 키루스 대왕의 아들 캄비세스 왕이 이집트 정벌에 나서자 페르시아는 내분에 휩싸였다. 캄비세스의 동생이라고 자칭한 가우마타는 스스로를 왕이라 칭했다. 이 소식을 들고 페르시아로 돌아오는 도중 캄비세스가 시리아 부근에서 죽는다. 베히스툰 비문에 의하면 캄비세스가 말을 타다 칼집이 실수로 벗겨지면서 칼에 허벅지가 찔려 그 상처로 죽었다고 기록한다.      캄비세스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페르시아제국의 10개 속국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이 정치적 혼란기에 페르시아제국 전체의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이가 바로 다리우스다. 그는 페르시아제국의 속국이었던 파르티아 태수의 아들이었으며 캄비세스 왕과 함께 이집트 원정을 갔던 페르시아의 일만용사 중 한 명이었다. 다리우스는 고대 이란인들이 오래전부터 ‘거룩한 산’이라고 불리는 베히스툰산에 자기의 등극 과정을 자세히 새기기로 결심한다. 그는 고대 이란의 아후라마즈다 신에게 비문을 헌사하여 신으로부터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성산에 비문을 새긴 이유      다리우스 대왕은 인류 최초로 제국을 건설하였다. 좌우로는 터키에서 인도, 상하로는 박트리아에서 이집트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박트리아는 힌두쿠시산맥과 아무다리아강 사이에 고대 그리스인이 세운 나라다. 그는 자신의 공적을 이란 중부 베히스툰산 절벽에 새겨놓았다. 베히스툰산은 이란 케르만자로부터 30㎞ 동쪽에 위치한 산이다. 베히스툰산은 독립적인 산이 아니라 케르만자 지역을 감싸며 북쪽으로 계속되는 산맥 중의 일부이다. 하마단 쪽에서 보면 베히스툰산은 평원에 갑자기 생겨난 500m 정도의 산이다. 다리우스가 이곳에 베히스툰 비문을 남긴 이유는 뭘까.      다리우스 왕이 이곳을 고른 이유는 우연이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실제적인 것이었다. 비문과 부조석상을 새기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평평한 바위가 필요했다. 왕의 대로(大路)를 따라 있는 여느 자그로스산맥의 산들과는 달리 베히스툰산은 메데 왕국의 목초지를 포함한 매우 평평한 절벽을 지닌 산으로 쐐기문자를 정으로 새기기가 용이했다. 둘째, 베히스툰산 아래에 메소포타미아나 이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몇 개의 샘터들이 있었다. 왕의 대로를 지나간 수많은 행상들과 병사들이 지친 몸을 달래던 쉼터였다. 이곳을 지나는 모든 군인이나 대상들이 다리우스 부조물과 비문들을 보았을 것이다. 셋째,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러스에 의하면 베히스툰산은 ‘바가스타나’로 불렸다. 바가스타나를 직역하면 ‘신들의 장소’다. 즉 이곳은 오래전부터 성스러운 곳으로 이 근처에서 가로 10m, 세로 10m의 제단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다리우스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신들에게 제사드릴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네 번째, 다리우스 대제가 등극하면서 최고의 정적인 가우마타를 잡아 처형한 곳이 바로 베히스툰산 근처이다. 다리우스에게 페르시아제국의 왕권을 가져다준 결정적 사건인 가우마타 처단을 기념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베히스툰 비문 안에는 그 처단 장소를 ‘메데 지방, 나사야 지방의 시카유바티’라고 말하는데, 그곳이 바로 베히스툰산 뒤로 10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이런 이유들로 베히스툰산은 다리우스 왕이 자신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한 최적지였다.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된 비문    ▲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다리우스 대왕 부조. 베히스툰 비문은 엘람어, 아카드어, 그리고 고대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삼중 쐐기문자 문헌이다. 이 비문은 고대 페르시아제국 왕들이 남긴 비문들 중 가장 길며 역사학적·문헌학적으로 가장 중요하다. 베히스툰 비문은 서양인들이 쐐기문자를 판독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학자들은 이 비문을 ‘고대 비문의 여왕’이라고 부른다. 베히스툰 비문은 바빌론, 수사, 그리고 엑바타나(현재의 하마단)를 잇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연결되는 고대의 중요한 무역로에 위치해 있었다. 이 길을 따라가는 대상무역상들은 지상으로부터 60m 높이의 절벽 위에 새겨진 다리우스의 부조물과 비문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베히스툰산에 다리우스는 자기가 왕으로 등극한 과정을 쐐기문자로 상세히 기록했다. 베히스툰산의 중턱에 비문과 부조물이 있는데 지상으로부터 69m 위의 경사면에 가로 18m, 세로 7m의 크기로 새겨져 있다. 워낙 험한 곳이라 사람이 이를 보려면 지상으로부터 고작 40m 위까지밖에 접근하지 못한다. 1839년 영국 학자 헨리 로린슨은 베히스툰산 정상에서 자일을 타고 내려와 공중에 매달린 채 쐐기문자를 일일이 베꼈다고 한다. 이 비문과 부조물이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이와 같이 난공불락의 지점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베히스툰 비문의 상단 중심에 부조물이 있는데, 실물 크기(173㎝)인 다리우스 대왕과 두 신하인 인타파르나스와 고르바야스, 그리고 다리우스가 정복하여 처단한 10명의 왕들이 새겨져 있다. 이 부조물 위에는 조로아스터교 최고의 신인 아후라마즈다가 강복하고 있다. 이 부조물들의 위아래로는 반란군들의 이름과 행적을 적은 설명문이 세 가지 쐐기문자로 새겨져 있다. 이 부조물의 오른편으로는 다리우스 왕의 등극 과정을 새긴 엘람어 비문이 손상된 채 있고, 왼편으로는 같은 내용이 아카드어로 적혀 있다. 밑은 고대 페르시아어로 적혀 있다. 당초 다리우스 왕도 ‘왕위 찬탈자’에 불과했지만 현란한 업적으로 결국 키루스가 창건한 페르시아제국을 완성하는 왕이 되었다.      베히스툰 비문에서 다리우스 대왕은 캄비세스를 둘러싼 정치적 혼란기를 설명하고 있다. 다리우스 대왕에 따르면, 캄비세스가 그의 친동생 바르디야를 살해했지만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그때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인 가우마타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한다. 즉 자신이 바르디야라고 속이고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받기에 이르렀다.      그때 이집트를 정벌 중이던 캄비세스는 가우마타가 반란을 일으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페르시아로 돌아오다가 자기가 찬 칼에 찔려 실수로 죽게 된다. 이 모든 사건을 감지했던 다리우스는, 자기가 페르시아제국의 패권을 잡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6명의 경호대원과 함께 신속히 가우마타와 그의 군대에 대한 정벌에 나선다. 그는 곧 가우마타를 죽이고 6명의 경호대원의 추대로 페르시아의 왕으로 등극한다.      이러한 기록은 베히스툰 비문 이외의 사료에서는 증명될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캄비세스가 죽은 후 반란이 일어나 페르시아가 혼란에 빠졌고, 다리우스는 그것을 이용하여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페르시아에서의 반란은 도화선처럼 번져 페르시아제국의 모든 나라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다리우스 대왕은 즉위 후 1년간 이런 반란들을 진압하는 데 전력투구하였다.      다리우스는 베히스툰 비문과 부조상의 구성을 고대 근동의 아주 오래된 예술사적 전통에 따라 재현하였다. 그의 부조상과 구성, 그리고 비문들은 이라크와 이란의 국경 지역인 ‘사리-폴리-주합’에서 발견되는 룰루비의 왕 아누바니니의 부조물과 아키드 왕족의 나람신 왕의 비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다리우스 왕은 파르티아의 왕 히스타스페스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이러스나 캄비세스처럼 아케미니드 왕조의 정통성이 결여돼 있었다. 그런 다리우스가 성산 베히스툰에 조로아스터교의 가장 위대한 신 아후라마즈다에게 인정받아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면서 자기의 정통성을 천명하게 될 때, 당시 고대 근동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사적 자료를 이용한 것은 당연하다. 특히 아누바니니 비문은 아누바니니 왕이 새벽별의 여신 이난나로부터 왕권을 상징한 원형을 받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 부조에서 이난나는 2명의 발가벗은 포로를 포승줄로 묶고 있다. 아누바니니 왕은 헬멧을 쓰고 왼손에는 활과 화살을,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이 비문의 배열은 베히스툰 비문의 배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이 없다.         고대 페르시아어를 창제한 다리우스      베히스툰 비문에서 다리우스 왕은 두 명의 신하들과 서 있다. 왼쪽의 신하는 고르바야스로서 페르시아 창을 들고 서 있고, 오른쪽 신하는 인타파르나스로 활을 들고 있다. 아누바니니처럼 다리우스 왕은 왼발로 그의 정적 가우마타를 밟고 있고, 그 뒤로 8명의 포로를 포승줄로 목을 감은 채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다리우스 왕은 스키타이 정벌에서 ‘스쿤카라는 고깔모자를 쓴 반란군’을 잡은 후에는 본래 새겼던 글씨 부분을 삭제하고 스쿤카의 부조상을 첨가했다. 이 모든 일이 아후라마즈다의 허락으로 이루어짐을 강조하기 위해 날개 달린 아후라마즈다가 손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원형을 달고 다리우스 왕을 축복하고 있다. 이처럼 다리우스 왕은 왕권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베히스툰 비문이 계속하여 뭔가를 새겼고, 같은 내용이 당시에 국제 공용어인 아람어로 쓰여져 23개의 페르시아제국의 속국에 보내지게 되었다.      다리우스 왕은 왕으로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문자를 창제한다. 조선의 세종대왕과 더불어 문자를 창제했다고 확실하게 기록을 남긴 유일한 왕이다. 그는 당시 학자들을 동원하여 쐐기문자로 고대 페르시아어를 창제한다. 하지만 다리우스 왕은 페르시아제국의 공식문서에는 당시 고대 근동에서 널리 쓰이던 전통적인 문자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제국의 속국들 간의 원활한 통신을 위해서 이란어가 아닌 셈어인 아람어를 국제공용어로 사용한 것이다. 아람어는 이미 레반트, 이집트, 동부 이란 지역에 통용되고 있었다. 아람어 알파벳은 엘람어나 아카드어의 쐐기문자보다 배우기가 쉬웠다. 베히스툰 비문에 쓰인 또 다른 언어인 엘람어는 페르시아제국의 행정수도 수사를 중심으로 모든 행정·경제 문서에 사용되었고, 아카드어는 지난 1000년 이상 고대 오리엔트의 외교문자로 쓰였다.      페르시아제국은 처음부터 다문화주의와 다언어주의를 표방하였다. 고대 근동의 긴 역사 가운데 처음으로 다언어 비문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페르시아제국의 원동력은 페르시아제국을 창건한 키루스의 다종교주의와 다문화주의, 그리고 다리우스가 표방한 다언어주의에 있었다.

장상인

뜨거운 바다 아타미(熱海)-   일본의 아타미(熱海)는 예로부터 섭씨 90도에 가까운 뜨거운 온천물이 솟아나왔다. 그래서, ‘뜨거운(熱) 바다(海)’라고 명명됐던 것이다.   이처럼 소문난 일본의 유명 온천 지대이지만, ‘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일반인들이 쉽게 가기 어려운 곳으로 인식돼 있다.   필자는 슈젠지(修善寺) 온천에서 일박을 하고서 같은 이즈(伊豆) 반도에 있는 아타미(熱海)행 기차를 탔다. 점심은 역에서 산 도시락(驛弁). 후지산은 언제나처럼 보일 듯 말 듯 모습을 드러냈다가 눈을 맞추면 사라지곤 했다. 약 50분 만에 아타미(熱海)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빠른 시간이었다.   아타미(熱海)역은 열기가 넘쳐났다. 온천의 열기가 아닌 관광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인구 4만 명도 안 되는 곳에 이토록 사람들이 많이 모일까.’   관광객들은 외국인보다는 일본인들이 많았다.   재래시장에서 접한 ‘곤지키야샤’의 이벤트   온천숙 일번지 역에서 나오자 곳곳에 온천이 있었다. 민박, 호텔 공히 온천이 나오는 곳이다.  먼저 관광센터에 들러서 이것저것을 묻고서 가까운 재래시장으로 갔다. 언덕길 시장에는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아타미(熱海)가 해안이라서 알 수 없는 어종(魚種)들이 많았고, 볼거리와 먹거리도 많았다.   복복(福福)의 수욕 온천이곳저곳을 돌아보다가 시장 통에서 아주 작은 온천 하나를 발견했다. 일상적인 족욕(足浴)이 아닌 수욕(手浴)이 특이했다. 이름도 귀여운 ‘복복(福福)의 탕(湯)’. 필자는 어느 관광객에 이어서 그곳에 손을 담갔다. 손가락으로부터 온 몸에 전해지는 온기가 무더위 속에서도 따스하게 느껴졌다. 온천수 옆에는 ‘온천물에 적신 손으로 동자승의 머리를 만져주면 복이 온다’는 재미있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있었다.   깔깔 웃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리자 색상이 화려한 모형 뒤에서 포즈를 취하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일본 근대 문학의 선구자인 오자카 고요(尾崎紅葉, 1868-1903)의 소설 곤지키야샤(金色夜叉)의 테마가 아닌가.’   소설 속 주인공 간이치와 미야가 되어 한 컷- 필자는 벌떡 일어서서 염치불구하고 한 관광객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필자가 소설의 남자 주인공인 ‘간이치(貫一)’가 됐고, 여자 주인공 ‘미야(宮)’ 역은 동행한 아내가 했다.   사진 촬영을 마친 필자는 이정표를 보면서 내리막길을 따라 해안으로 갔다. ‘간이치(貫一)’와 ‘미야(宮)’의 기념비를 찾기 위해서다. 언덕길을 내려가자 멀리 태평양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바닷가의 작은 공원에 ‘곤지키야샤(金色夜叉)’의 주인공 간이치(貫一)와 미야(宮)의 동상(기념비)이 있었다.   간이치와 미야의 동상과 관광객들- 사람들은 동상 앞에서 기념 촬영하기에 바빴다. 필자 역시 카메라 렌즈를 돌리면서 나이가 지긋한 일본인 할머니에게 물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지만 참으로 애절한 사연이지요?”“네. 그렇습니다. 그래도...애절하면서도 아름답지 않아요?”   할머니는 그 옛날의 첫사랑을 생각하는 듯(필자의 추측) 살포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기념 촬영을 하는 할머니들- 이곳은 남자 주인공 간이치(貫一)가 변심한 미야(宮)를 발로 찬 장면이 그려졌던 곳으로 유명하다. 여기에 동상이 세워진 이유이기도 하다.   ‘곤지키야샤(金色夜叉)’는 어떤 소설인가. 1897년부터 1902년까지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의 연재소설이다.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본다.   소설 속으로 한걸음   작가 오자키 고요   소설 속 주인공 간이치(貫一)의 노래도 슬프기 그지없다.   아타미(熱海) 해안 산책(...)동행도 오늘만큼 함께, 이야기도 오늘만큼 함께   내가 학교 끝날 때까지왜? 미야(宮)는 나를 기다리는 것일까.   (중략)   다이아몬드에 눈이 어두워타서는 안 될 가마를 타고 말았구나.   사람은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이 첫째요돈은 이 세상에 돌아다는( 하찮은) 물건이거늘.   한국판 ‘이수일과 심순애’   ‘이수일과 심순애’는 일제 강점기 시절 조중환(1863-1944)이 번안한 장한몽(長恨夢)의 주인공이다. 소설의 원조인 ‘곤지키야샤(金色夜叉)’는 일본의 뜨거운 온천 아타미(熱海)를 배경으로 했으나, 장한몽의 주인공 ‘이수일과 심순애’는 아타미가 아닌 대동강 변 부벽루를 산책하면서부터 전개된다. 부모님의 권유로 이수일과 헤어지는 심순애의 마음도 아프기는 마찬가지다.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본다.   심순애의 이미지(관광객 사진) “어머니, 어떻게 하면 나는 좋아요?”“어떻게 하면 좋아가 다 무엇이냐?...네가 처음부터 그리로 가겠다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일을 지금 와서 또...”“어머니, 수일 씨는 다시 보지 아니하고 바로 그리 갈 터 이야요. 그러하니 그렇게 하여 주시오. 나는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어요.”     그러나, 우리에게 기억되는 것은 배신을 때린 심순애에 대한 이수일의 일갈(一喝)이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토록 좋았단 말이냐?”   원본 ‘곤지키야샤(金色夜叉)’ 속의 명대사도 지금까지 일본인들의 사이에서 회자(膾炙)되고 있다.   “다이아몬드에 눈이 멀어 잘도, 잘도, 나를 배신했구나.” “미야(宮)! 내년 오늘의 달도, 내 후년 그날의 달도, 10년 후의 그날의 달도, 나의 한(恨)맺힌 눈물로 흐리게 해 주겠다.”   여성들의 동상 철거 요구 없어   필자는 아타미 시청 관광과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몇 바퀴 돌더니 담당 직원 구리야마(栗山)씨와 연결됐다. 필자의 질문이다.   “해외에서 관광 온 여성들이 ‘건장한 남자가 연약한 여자를 발로 차는 모습이 흉하다’면서 동상 철거를 요구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런 적이 없습니다. 이메일이나 팩스가 온 경우는 있었습니다. 이 동상은 여성 폄하(貶下)가 아니라 문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 당시 시대 상황이기도 하고요.”   맞는 말이다. 문학은 문학적 가치로 봐야 한다. 자기만의 고정된 생각으로 작품에 내재된 틀을 흔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타미의 날씨는 더욱 뜨거워졌다. 하지만, 태평양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더위를 식혀주었다.   관광지 아타미에서 ‘이수일과 심순애’ 원조와의 짧은 만남이 ‘여행의 백미(白眉)였다’는 생각을 하면서 언덕길을 올라 다시 시장 통의 인파 속에 파묻혔다.  

김승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필자.한독(韓獨) 법률학의 상호 교류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블라우(Blau) 박사의 초청으로 변호사가 120명 정도 되는 독일로펌의 방문 변호사(Visiting Lawyer)로 초청을 받아 차제에 독일 법대를 살펴보고, 또한 가능하면 현지 법대 교수들과 간단한 토론과 세미나 등을 하기 위하여 대망의 프랑크 푸르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록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는 아니하였으나, 글로벌 시대의 도전적인 프로젝트인 스마트 워크시스템의 자체적 점검의 목적도 있었다.   그런데 출발 당일 서울부터 날씨가 좀 흐리더니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리니 비가 제법 왔다. 독일은 기후조건이 좋지 않아 우울증에 걸리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 갑자기 현실감 있게 나타났다. 실제로 비극적인 선택을 한 한국 유학자의 사례는 꽤 유명하다.   그간 세계 여러 국가를 돌아보았지만 정작 법대학문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독일은 생전처음이다. 이는 필자가 독일어를 거의 할 수 없는 점도 원인이지만 독일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시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프랑크푸르트 전철과 지하철 안내판. 그러나 최근에 독일과 프랑스를 비교하면서 의외로 독일이 깔끔하고 조용하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또한 EU의 가장 주도적인 국가이고 제4차 산업혁명의 선도적인 국가로 알려진 독일을 이해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절실하다는 느낌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통독 후의 독일의 시너지효과 등등에 대하여도 한 번 피부에 느끼고 싶었다. 또한 프랑크푸르트가 브렉시트(Brexit)이후에 EU의 가장 촉망받는 금융의 중심도시로 부각되고 있어서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라고 느꼈다. 이런 기회를 제공하여 주시고 조언을 아끼지 아니하신 권대우 한독법학회 회장님를 비롯한 여러 관계자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이번 출장일정은 비교적 장기간이어서 비용절감과 현지 숙소에서의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또한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다는 유럽 배낭여행을 경험하지 못한 필자로서는 종전의 출장과는 혁신적인 변모를 시도하였다.   전철 티겟 구입 기계.모처럼 시간을 내었으니 여러 도전적인 삶을 경험하고자 에어비앤비(AIRBNB)에서 숙소를 정하고 나아가 기차 여행을 통하여 유럽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마음을 먹었다. 이에 따라 먼저 공항에서 현지 SIM카드를 구입하고 전철을 통하여 숙소로 가기로 정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전철 티겟을 사는 것부터 조차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영어로 변환을 겨우하여 일일권을 구입하여 S7과 U7의 노선을 번갈아 탔다. 이 과정에서 본 독일 지하철은 뉴욕보다는 상당히 깨끗하지만 우리 지하철과 비교하여서는 상당히 낙후되어 있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짐을 들고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에스컬레이트가 설치가 되어 있지 아니하여 끙긍거리며 가방을 들고 이동할 수 밖에 없어서 상당히 힘이 들었다.   또한 의외로 표지판이 많지 아니하였고 나아가 필자 역시 이에 익숙하지도 아니하여 연결편의 전철을 찾는 데에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집나가면 고생”이라는 마누라의 충정어린 조언(?)이 새삼 새롭게 와닿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독일 사람들은 의외로 영어 구사력이 뛰어나서 영어로 물어보거나 의사소통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어서 다행스러웠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가 독일에서 범죄 발생률이 가장 높다는 통계를 접하고 내심 긴장을 하였는데 생각보다는 그리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숙소는 다행스럽게도 주택가에 위치하여 조용한 느낌이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주택 등의 모습이 마치 군대의 막사처럼 너무 네모지고 미각적으로 마무리되지 아니한 것 같아 역시 독일병정이라는 고정관념을 되새기게 하기도 하였다.   에어비앤비(AIRBNB)를 통해 구입한 숙소.튼튼하고 실용적인 느낌은 강렬하나 다소 예술적인 느낌은 와닿지 아니하여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있었다. 순간적으로는 베토벤과 같은 세계적인 음악가의 탄생이 신기로울 정도로 까지 확대되어 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물론 건물의 경우에 다소 실용적인 부분이 강조되었으나, 도시 전반의 전체적인 느낌은 목가적이기도 하여 고전음악의 잠재적인 동력을 암시하는 분위기역시 동시에 부분적으로 느낄 수는 있었다.   에어비앤비(AIRBNB)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이어서 신기롭기도 하고 다소 두려움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위험성에 대한 안전장치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과는 달리 독일에서는 에어비앤비(AIRBNB)가 다소 불법적인 영업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아니한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대중이 이용하는 숙박시설이므로 안전 등에 대한 일정한 기준을 충족시키느냐하는 부분에서 다소 미흡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가정집 등이 숙박시설 등으로 사용하게 되면 개인숙박이 아니라 대중의 숙박시설이기 때문에 안전 등의 여러 시설기준의 충족 내지 지속적인 관리부분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데 이 부분이 아무래도 문제점으로 노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째든 일단은 머무르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로 하였다. 밋밋하고 통상적인 호텔의 경험보다는 색다른 느낌이 있는 것 같아 한번 느껴보기로 하였다. 숙소의 호스트가 “일요일은 모든 상점이 문을 닫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오늘 사라”고 하면서 친절하게 자신이 슈퍼마켓에 가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탁하라고 한다.   숙소에서 바라본 공개 키친 모습. 친절에 감사하면서도 이를 정중하게 사양하고 내가 직접 걸어서 한번 방문해보기로 하였다. 걸어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달리 살만한 것은 없어서 대신에 주위에 새로 생긴 점포에서 다양한 맥주를 샀다. 카드로 결제하고자 하였더니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신용카드를 받을 수 없다고 한다.   다소 엉성한 운영을 보니 새로 오픈한 집은 맞는 것 같기도 하면서 한국에서는 이런 현상을 감히 상상할 수 도 없어서 독일의 결제 등 사회지원시스템보다는 한국의 사회지원시스템이 좀 더 잘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호스트로부터 와이파이의 비밀번호를 받아 컴퓨터를 시작하니 이제서야 한국을 비롯한 세상과 소통을 하고 있구나하는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다. 독일의 사용 전압이 230v여서 한국제품을 그대로 사용하는 데에 큰 불편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평소 동경해오던 독일 특히 새로운 금융중심도시로 발전할 프랑크 푸르트에서의 좌충우돌의 새로운 도전과 소중하고 감동적인 추억을 창조할 것을 다짐하면서도 또한 기대해 본다.

박승준

▲ 어린 나무를 페어웨이에 심어둔 베이징의 십삼릉골프장.골프를 중국어로는 가오얼푸(高尔夫)라고 한다.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은 1980년 개혁개방과 빠른 경제발전을 시작하면서 중국의 대도시 부근에 골프장을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골프장이 있어야 외국으로부터 FDI(외국인직접투자)를 순조롭게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그런 덩샤오핑의 지시에 따라 수도 베이징(北京) 근교 명나라 황제들이 묻힌 십삼릉 근처 야산 중턱에 1986년 베이징 국제 가오얼푸클럽이 중·일 합자로 건설됐다. 광둥(廣東)성 중산(中山)시에 이어 중국 내 두 번째의 골프클럽이었다.      베이징에 거주하는 외국인들 사이에 이른바 ‘십삼릉골프클럽’으로 불린 이 국제골프클럽은 건설과 관리가 일본 최고급 골프장 수준으로 이뤄져 조니워커 클래식을 비롯한 국제적 골프대회도 여러 차례 열렸다. 덩샤오핑은 혁명 동지 룽가오탕(榮高棠·1912~2006)을 중국 골프협회 회장으로 앉혀 중국 전역의 골프장과 골프대회 관리를 맡겼고, 자신의 오른팔이던 자오쯔양(趙紫陽·1919~2005) 당 총서기에게 골프를 배워서 주말에는 베이징 근교의 골프장에 나가 골프를 치는 모습을 보여주도록 배려했다. 골프를 개혁개방을 상징하는 스포츠로 양성하려는 것이 덩샤오핑의 생각이었다. 덩샤오핑의 그런 생각에 따라 중국 전역에는 수많은 골프장들이 문을 열었고, 베이징 근교에도 2012년 시진핑(習近平) 당 총서기가 선출되기 직전까지 50여개의 골프장이 문을 열었다. 광둥성 선전(深圳)에는 216홀짜리 세계 최대 골프장이 생겨나기도 했다.      중국의 골프장 건설붐은 시진핑 당 총서기가 반(反)부패운동을 벌이면서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반부패운동의 세부 항목에는 “당 간부와 정부 관료들이 술을 파는 클럽이든 골프클럽이든 호화판 클럽에는 출입하지 말라”는 내용이 포함됐고, 외교부 관리들조차 외국인과 골프장에 나가는 일을 삼가면서 중국 내 골프장들에는 중국인들의 발길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2014년에는 부실 골프장에 대한 조사를 구실로 전국 66개 골프장의 영업을 중단시켰고, 베이징 근교에 있는 3개의 골프장도 영업을 중단했다. 2015년에는 12개의 골프장이 조사 대상으로 추가 발표됐는데, 이때 전국 최우수였던 베이징 십삼릉골프장도 포함돼 영업을 중단했다.      문제는 중국 내 골프장 영업 중단이 회원들에게 제대로 된 설명이나 통보 없이 갑자기 이뤄졌다는 점이다. 십삼릉골프장의 경우 회원권 가격이 한창 때는 210만위안(약 4억원)까지 올라갔는데 그런 회원권을 보유하고 있던 회원들이 어느 날 골프를 치러갔다가 골프장 출입문이 잠겨 있어 놀라는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은 골프장 영업 중단이 풀렸는가를 알아보려고 차를 타고 진입로에 들어가는 동안 페어웨이에 어린 나무가 촘촘하게 심어져 있는 광경을 보고 또 한 번 놀라기도 했다.       화가 난 회원들은 수소문을 해서 골프장 관계자를 찾아내 항의했지만 들을 수 있는 말은 “골프장 소재지의 구청(區廳)이 나무를 심으라는 지시를 내려 할 수 없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었다. 회원들은 창핑(昌平)구 구청을 찾아가 항의를 했지만, 구청 당국은 “그런 지시 내린 일 없다.… 골프장 일은 골프장 측에 물어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골프장이 영업을 중단한 지 1년 반이 넘도록 회원권 보상은 물론 아무런 공식 설명 없이 “골프장 영업이 중단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일본인과 한국인 회원들이 자신이 아는 정부 관리나 중국공산당 간부에게 물어보자 희한한 대답이 돌아왔다. “골프장 진입로가 폐쇄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 골프장 클럽하우스로 진입하는 철문이 잠겨 있는 상태이고 페어웨이에는 어린 나무들을 심어놓았지만 골프장 측이 철문에 내건 안내문에는 ‘잠정(暫停·일시 영업중단)’이라고 되어 있지 않느냐. 폐업과는 다른 개념이다. 조급해 하지 말고 기다리면 영업이 재개될 날이 올 거다. 페어웨이에 심은 나무야 뽑아버리고 다시 정리하면 될 것이니 큰 문제가 아니다.”      무려 4억원에 가까운 회원권을 사서 묵혀두라는 말에 중국 내 외국인들의 마음은 편치가 않다.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이라던 골프가 “개혁개방을 심화시키겠다”고 외치고 있는 시진핑 정권에서 찬바람을 맞고 있는 현실에 회원들은 마주 앉으면 불평을 한다. 외교부 관리가 외국인과 함께 골프를 치러가는 것은 유일하게 허용한다지만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 선뜻 골프를 치려는 외교부 관리는 없다. 개혁개방의 바람을 타고 너도나도 골프를 배워 주말이면 골프장에 나가던 주한 중국대사관 외교관들도 요즘은 골프 이야기조차 입밖에 꺼내지 않는 분위기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들이 있었다. 우리의 경우도 골프를 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미군들과의 사교를 위해, 경제발전에 필요한 개방적인 분위기를 위해 골프를 배워 치기 시작하면서였고, 이와 함께 골프장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우리의 골프는 아이러니하게도 문민 대통령임을 자부하던 김영삼 대통령 취임과 함께 찬 서리를 맞기 시작했다. 김영삼 대통령 집권 초기인 1993년 4월 13일자 조선일보 사설은 ‘골프 불협화음’이란 제목으로 대통령과 총리, 그리고 집권당을 질타했다.      “골프 치는 문제를 둘러싼 청와대와 총리실과 민자당의 3각 혼선을 보면서 우리는 새 정부의 사정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며, 동시에 이 나라에 신권위주의가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골프가 도대체 무슨 중요한 국사이길래 한 나라의 대통령과 총리와 집권당 대표가 서로 쳐도 좋다, 아직 안 풀렸다, 누가 치라고 그랬느냐는 따위의 지극히 비생산적인 화제에 휘말려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국가 중대사도 아닌 골프 따위의 문제로 한 나라를 운영하는 책임자들이 우왕좌왕하며 눈치 보기 급급한 요즘의 상황은 한마디로 우습고 언짢고 불유쾌하기 그지없다.”      우리에게는 언론의 자유와 정부에 대한 비판이 허용되지만 중국은 다르다. 헌법에 보장된 언론자유는 있지만 “혁명의 완성은 총과 펜을 다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마오쩌둥(毛澤東)의 교시에 따라 국내 정치 비판이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중국 내 외국인들의 경우 비싼 회원권 가격에 대한 보상 없이 무기한 계속되는 골프장 영업중단으로 불평의 소리가 높지만 그런 외국인들의 불만을 보도해주는 매체는 없는 실정이다.

우태영

CNN은 지난 22일 월가 출신으로 트럼프 대통령 경제 자문역을 했던 앤서니 스카라무치가 러시아 국영은행이 운용하는 러시아투자펀드에 투자했다고 보도했다. CNN은 그러나 이 보도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자, 철회했으며 3명의 기자는 사임했다.    CNN은 26일 "지난 22일 나갔던 해당 기사는 삭제됐고 기사와 관련됐던 세 명의 사의를 받아들였다"고 발표했다.  내부 조사 결과 이 기사는 단 한 명의 '익명의 정보원'을 인용해 썼고, 규정상 필요한 '사실 확인'(fact check)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기사를 쓴 토마스 프랭크, 탐사보도팀장 에릭 리치블라우와  총괄책임자 렉스 해리스가 회사를 떠난다고 CNN은 발표했다.   사라 허커비 샌더스 보좌관은 27일 백악관기자회견에서 "이번 일은 모든 언론매체와 모든 기자들의 수치다. 언론의 뉴스 보도를 믿지 못하는 나라라면 미국은 위험한 나라일 수 밖에 없다. 특히 위에서부터 시청률만 의식해서 가짜 뉴스를 만들어 내는 언론사라면 그건 더욱 무서운 일이다"라고 주장하다 기자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CNN 등 진보적인 언론들과 대립관계에 있던 트럼프 대통령은 사건 직후 관련된 트윗을 3편이나 올렸다.    - 와우, CNN은 “러시아”에 관한 중요한 기사를 철회해야만 했습니다. 직원들 3명은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모든 다른 가짜 기사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할 건가요? 가짜뉴스들(FAKE NEWS)!    - 가짜뉴스 CNN (Fake News CNN)은 지금 대규모의 경영진 교체를 모색중입니다. 러시아에 관련된 허위기사를 밀어붙이는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CNN의 시청률은 하락하고 있습니다.   - 가짜뉴스 CNN (Fake News CNN)은 곤경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NBC, CBS, ABC 방송은 어떤가요? 저물어가는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요? 그것들 모두가 가짜뉴스들입니다!   CNN의 트럼프-러시아 밀약 관련 기사는 모두 허위라고 주장하는 CNN의 PD   한편 트럼프의 트윗 등에서는 지지자와 반대자들 간의 토론이 뜨겁게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허위보도를 일삼는 CNN을 공항 등 공공시설에서 퇴출시키라고 주장한다. CNN의 트럼프-러시아 관련 보도는 모두 허위라는 CNN의 한 PD의 주장도 있다.   반면에 언론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면 권위주의 체제가 될 우려가 있다는 주장도 올라온다. 트윗내용을 옮긴 페이스북에는 1만개 이상의 댓글이 달렸다.

유슬기

    “이 지역은 더워질 것이고, 또 저 지역도 더워질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모두 더워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구의 미래는 어떻게 되나요?” “지구에 미래는, 없습니다.” 배우 브래드 피트가 기상캐스터가 됐다. 6월 8일 ‘짐 제프리 쇼’에 출연한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파리기후 협정 탈퇴’를 이렇게 풍자했다. 배우이자 환경문제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 온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지구의 생존력은 위협당하고 있고, 우리의 미래는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고 SNS에 남겼다.   전기차 테슬라와 스페이스X 프로젝트 등을 운영하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트럼프 경제 자문회의 위원직을 내놓겠다고 했다. 마크 주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도 “이는 아이들의 미래를 해치는 일”이라고 반발했다.   지구의 이익 vs 미국의 이익   “파리기후변화협약은 미국에 불이익을 가져다줍니다. 저는 피츠버그(미국의 제조업 도시)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대통령이 됐습니다.” 지난 6월 1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파리기후협약 탈퇴를 선언하면서 한 말이다. 기후협약을 찬성하는 사람이든 반대하는 사람이든 ‘이익’에 대해 말한다. 전자는 지구의 이익이고, 후자는 나라의 이익이다.   파리기후협약은 2020년 만료되는 ‘교토의정서’의 뒤를 잇는 국제 환경 협정으로 2015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체결됐다.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를 줄여서 지구 온난화를 막자는 의미에선 교토의정서와 같다. 파리협약은 당시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북한을 포함해 서명국이 195개국이나 된다는 점에서 37개국에 불과한 교토의정서와 다른 무게감을 지닌다. ‘2030년까지 서명국들이 감축할 ‘온실가스 목표량’과 ‘이행 강제성’을 담았다는 점에서도 파리협약은 진일보했다.   미국 뉴욕 UN본부에서 열린 '파리협정 고위급 서명식'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한 윤성규 환경부 장관이 22일(현지시각) '파리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다. 단일 국제협약에 하루 동안 가장 많은 국가(175개국)가 서명한 기록을 남긴 이 날 서명식에서 한국의 윤성규 장관은 139번째로, 북한 리수용 외무상은 76번째로 서명했다. 교토의정서를 대체하며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지난해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196개국이 합의한 파리 기후변화협정은 55개 이상의 국가가 비준하고 비준국의 국제기준 온실가스 배출량 총합 비중이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55% 이상이 되면 발효된다. 이 협정은 예상보다 빠른 2020년 전에 발효될 전망이다._뉴시스 마침내 지난 11월 발효된 파리협약은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혁명 전보다 섭씨 2도 이상 오르지 않도록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내용을 담았다. 중국에 이어 온실가스 배출순위 2위인 미국은 2025년까지 온실 가스 배출량을 26%에서 28%까지 줄이기로 했다. 트럼프는 이 합의를 거부했다. 세계기상기구(WMO)는 미국의 협약 탈퇴로 인해 이번 세기 안에 지구 평균 기온이 0.3도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0.3도가 오르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지구의 온도가 0.3도 오르는 것은 체감온도와 다르다. 평균기온이 1도 오르면, 생물종의 25%가 멸종한다. 마이클 만이 쓴 누가 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가>의 저자는 “지구 온난화란 집에 불이 났다는 것이다. 경보음이 누차 울리는데 관련 정책은 마비상태다”라고 썼다.   지구 온도가 0.3도 오르면 일어나는 일   그렇다면 파리기후협약 탈퇴는 ‘미국의 이익’에 도움을 줄까. 미국 국민의 59%는 기후협정탈퇴를 반대했다. 미국 내 12개 주 정부는 ‘미국 기후 동맹’을 결성해 독자적인 대응에 나섰다. 이 중에서는 트럼프가 지켜주겠다고 공언한 ‘피츠버그’도 포함돼 있다. 피츠버그는 미국에서 석탄생산량이 가장 높고 교통망이 좋은 ‘제조업의 도시’였다. 1940~1950년대는 이 도시의 전성기였다.   1980년대 철강산업이 무너지면서 도시도 하락세를 걸었다. 실업률이 20%를 넘어섰고 환경문제로 인한 질병 감염률도 높았다. 피츠버그는 도시의 재건을 위해 청정에너지의 투자를 확대하고, 무너진 자연의 복구를 위해 ‘녹색 지붕’을 만들었다. 도심의 숲은 도시를 되살리는데 심장역할을 했다. 2000년 이후 피츠버그는 미국에서 가장 살기좋은 도시가 됐다. 피츠버그의 페두토 시장은 트럼프의 “나는 피츠버그의 대통령”이라는 발언에, “피츠버그는 파리협정을 따르겠다”고 대응했다.   애플, 구글, 페이스북 등의 28개 기업은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에 반대했다. ‘청정에너지 사업에 투자하는 것이 더 많은 일자리를 지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메이저 석유기업도 난색을 표하고 있다. 엑손 모빌 등은 협약탈퇴와 규제완화가 화석연료산업에 도움을 줄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어려움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규제가 풀리면 중동 산유국 등이 생산량을 늘릴 것이고, 이 경우 가격이 폭락하는 악순환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보호하려던 석유, 가스, 석탄 기업에도 난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미국의 탈퇴 소식에 웃음 짓는 나라는 중국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가 버린 ‘기후 리더’의 자리를 시진핑이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앞으로 클린 에너지 산업인 수상 태양광 발전소 등에 397조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IT전문지 ‘매셔블’은 “클린 에너지의 리더가 되려는 중국의 야심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대형 프로젝트”라며 “미국이 차버린 리더의 자리를 중국에 차지하려 한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반전카드, 중국의 승리? 실제로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최근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 환경 장관 회의에서 중국은 클린 에너지 국가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했다. 세계 석탄 소비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은 여전히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의 최대 배출 국가다. ‘오염국가’의 오명을 쓰고 있는 중국 정부는 올 해 1월 100개의 석탄 화력 발전소 건설 계획을 폐기했다. 피츠버그를 비롯해 ‘러스크 벨트’는 트럼프와 공화당의 유력 지지기반이었다. 미국 중서부의 쇠락한 제조업 지대다. 일자리를 명분으로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것은 최근 ‘러시아 스캔들’, ‘코미의 폭로’ 등으로 수세에 몰린 트럼프의 반전카드라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공화당 일부 의원과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은 “미국과 산업을 위한 상식적인 결정”이라는 성명을 냈다.   트럼프의 반전은 미국의 반전이 될까. 미국의 반전은 지구의 반전이 될까. 복잡한 방정식에 제프리 삭스는 이런 해석을 내놓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이슈에 대해서 내가 아는 가장 무지한 사람이다. 중국은 기후변화와 싸우고자 하는 의향을 재확인하고 다른 나라들과 협력할 것으로 기대한다. 지정학적으로, 미국은 협약에서 탈퇴함으로써 약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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