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인

지난 주말 광화문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정당과 시민단체들의 모임이었다. 각자 확성기를 들고 북과 꽹과리를 치면서, 정반대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모습들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는 외국 관광객들은, 카메라에 열심히 그 모습들을 담고 있었다. 그들이 실체(實體)를 안다면, 그리 감동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밖의 소리와는 달리 지하의 대형서점은 분위기가 달랐다. 누구의 부름도 없이 순수하게 모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책과 대화하고 있었다. 아예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서, 외부의 소리와 담을 쌓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 떼의 무리들이, 어느 작가의 사인회에 모여 들었다. 그래도, 소란이 없는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      책 표지 제목만으로도 장편소설이었다. 그러나, 함축된 의미가 담겨 있었다. 노란 은행잎 같은 표지를 열자, 김은주 저자의 사진과 이력이 적혀 있었다.      책 속으로...여자에게 포기를 권하는 사회   “학생은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하나?”   대학에서 영어 강의를 수강하던 어느 날, 영어강사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해외영업을 할 거예요.”   김은주 대표 강사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여자의 몸으로?”   그 말은 마치 내가 뭔가를 크게 착각하거나,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사회는 다양한 이유로 여자에게 포기를 권한다.   그러나, 김 대표는 포기하지 않고 본인의 길을 걸었다.   “세상을 향해 뛰어라.”   그녀는 대학 도서관에서 여덟 글자의 포스터를 보고서 심장이 박동했다. 그 자리에서, 글로벌 비즈니스맨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풋내기 대학생인 스무 살의 나이였다.   ‘대한민국 법률로 재해석한 ‘검사의 삼국지(三國志)’    저자 양중진(부장검사)   “평균인...‘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평균적인 생각’이라는 의미다.”   양중진 검사의 책 는 이렇게 ‘평균인’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면서, 저자는 ‘법(法)은 굉장히 쉬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법이 쉽지 않으면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이란다. 저자가 책을 쉽게 쓴 이유이기도 하다.   책 는 고전 를 우리나라의 법률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책장을 열면 맨 먼저 도원결의(桃園結義)가 나온다. 도원결의는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나관중의 에서 유비(劉備)·관우(關羽)·장비(張飛)가 도원(桃園)에서 의형제를 맺은 것을 말한다. 세 사람이 의기투합(意氣投合)을 한 것이다.   도원결의에 대한 저자의 법률적 해석이 압권이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본다.   “유비·관우·장비는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기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의형제가 되기로 맹세한다...이런 경우 호형호제(呼兄呼弟)를 넘어 법적으로도 형제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내가 죽으면 적토마는 유비에게, 청룡언월도는 장비에게 주라”라고.   나아가 부부간의 부양의무도 우리 모두가 눈여겨 볼만하다. 부부관계가 남보다 못한 경우가 많아서다. 는 부부간의 부양의무를 명쾌하게 해석한다.   “유비와 아내인 미부인이 조조에게 신야성을 빼앗기고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길이다 보니 먹을 것이 턱없이 부족했다. 유비는 마지막 식량으로 주먹밥 한 덩이를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전쟁을 해야 하는 유비가 주먹밥을 혼자서만 먹어도 되는 것일까? 결론은 ‘혼자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즈음 ‘졸혼(卒婚)’이라는 애매모호한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필히 알아야 할 듯싶다.   이 책은 도원결의부터 공명의 죽음까지 43화로 구성돼 있다. ‘삼국지’라는 친근한 고전을 통해서다. 관련사건 및 실제 판례를 소개함으로써 깊이를 더했다. 우리 모두가 반드시 잘 알아야 할 법에 대해 상세히 소개한 것이다.   오직 한길을 걸은 ‘오카 마사하루(岡正治, 1918-1994)’ 목사’   오카 마사하루 목사의 책 사람은 책을 만나고, 그 책으로 인해서 더 좋은 사람을 만나고, 이렇게 새로운 인연이 맺어진 듯했다. 우리는 늘, 이렇게 상처를 받고 살아간다. 그래도 고통과 슬픔을 겪어본, 그런 사람들이 늘 영혼이 향기로운 것 같다.   "오카 마사하루 목사님은 재일동포들을 위해서 헌신했던 분입니다."   “오카 마사하루 목사님의 자서전(전은옥 번역)은 '오직 한길로' 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향기이다. 책을 통해서 만나고, 저자와 만나고, 그것이 진정한 만남의 향기라는 것이다.

장상인

-진실을 알리려는 일본인들의 작은 외침을 듣다.   나가사키(長崎) 역에서 언덕길을 오르면 26성인(聖人) 순교지가 나온다.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에 의해 가톨릭 신자 26명이 화형을 당한 곳이다. 거기에서 오고가는 자동차와 마주치며 소로(小路)를 따라 50미터쯤 가면 건물 사이에 끼여 있는 작은 건물과 만날 수 있다. 다름 아닌 나가사키평화자료관이다. 공식 명칭은 ‘오카마사하루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이끈 ‘오카 마사하루(岡正治, 1918-1994)’ 목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자료관의 설립 취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평화자료관   설립 취지만 읽어도 ‘오카 마사하루’씨의 숭고한 뜻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필자가 오래 전 수박 겉핥기식으로 스쳐간 적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이 자료관을 둘러봤다. 자원봉사자 기무라 히데토(木村英人·74)씨를 만났기 때문이다. 기무라(木村)씨의 말이다.   “오카 마사하루님은 목사로서도, 시 의원으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언제나 약(弱)한 사람들의 편에 섰습니다...이 자료관은 기적적으로 세워졌습니다. 당시 토지도, 건물도 없었지만, 그분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마치 오카(岡)님이 하늘나라에서 이끌고 있는 것처럼 요.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인 1995년의 일입니다.”   ‘일본 침략역사 제대로 청산 못해 죄송합니다’   부산일보 기사 필자는 자료관에 전시된 2010년 5월 6일자 부산일보 기사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나가사키대학 명예교수이자 평화자료관 이사장인 다카자네 야스노리(高實康稔)씨가 합천에서 특강을 하기 위해 방한했을 때, 인터뷰한 기사였다. 신문기사와 함께 일본어로 번역된 글도 나란히 부착돼 있었다. 일본정부의 냉대에 대한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다카자네 야스노리씨는 뒤를 이을 ‘양심들’에게 바톤을 넘기고, 지난해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우리겨레하나되기울산운동본부’의 현수막도 있었다.   ‘역사의 진실을 지켜온 다카자네 선생님을 존경합니다.’‘조선인의 인권을 지켜온 선생님의 삶을 기억하겠습니다.’   다카자네(高實)씨는 군함도가 조선인 강제 동원의 역사를 배제한 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비판한 사람이다. 그의 뒤를 이어서 나가사키대학 명예교수인 소노다 나오히로(園田尙宏·73)씨가 이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좁디좁은 이 자료관은 ‘일본은 아시아에서 무엇을 했을까’란 테마로 대동아전쟁도(大東亞戰爭圖) 등을 전시하고 있었고, 조선인과 중국인에 대한 피폭(被暴)에 대한 내용을 상세하게 알리고 있었다. 일본의 황민화, 위안부, 남경대학살, 731부대 등에 대한 사진과 자료도 많았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필자는 일본어판 군함도에 관련한 책을 사려다가 한글판이 있어서 한 권 구입했다. 제목은 (선인). 저자는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번역 박수경·전은옥 譯)이었다.   군함도와 조선인 강제 연행에 대해서 설명하는 기무라씨 필자는 번역서 을 들고서 기무라(木村) 씨를 따라갔다. 그는 군함도(端島) 탄광에 대해서 설명한 후에 희생자 명단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기를 보세요. 그 당시 사망한 사람들의 명단이 이렇게 다 있습니다. 황옥수 경상남도 20세 익사, 김용우 27세 강원도 외상에 의한 척추 마비, 노치선 황해도 16세 리졸(Lysol) 음독...”   그 당시 사망자에 대해서 조목조목 설명하는 기무라씨 기무라(木村)씨는 서정우(徐正雨, 1928-2001)씨의 증언에 대해서도 길게 설명했다.   “서정우씨의 증언은 1983년 7월 군함도(하시마)에서 밝힌 내용입니다. 제2집과 에 자세하게 쓰여 있습니다.”   자료를 통해서 그의 증언을 들여다봤다.     서정우씨는 결국 미쓰비시(三菱)조선소로 이동해서 피폭을 당했고, 병든 몸으로 차별대우를 받으며 일본에서 살다가 54세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증언에는 평화에 대한 갈망이 짙게 깔려 있었다.   “저는 건강이 많이 나쁘지만 차별 없는 세상,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운동을 하고 싶습니다.”   기무라 히데토(木村英人) 자원봉사자와의 일문일답   필자는 73세의 나이에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기무라(木村)씨에게 질문을 했다. 일본인으로서 자국의 과거 역사를 들춰내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평화주의자 기무라씨 ▴ 어떤 연유로 이곳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계시고, 언제부터 하고 계시나요?   “자료관에서 한국인의 안내 등을 부탁한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자료관의 회원이기도 했고요. 2007년에 ‘스톤 워크-코리아(Stone Walk Korea: 1톤의 돌을 끌면서 평화 순례를 하는 모임)과 함께 한국에서 평화 행진을 했습니다. 부산-합천-하동-지리산-정읍-군산-평택-서울-임진각까지 갔습니다. 한국의 코디네이터가 ‘목이 약해서 오래도록 말을 못한다’고 해서 통역을 부탁했습니다. 대단한 한국어 실력은 아니었지만, 독학으로 소설을 읽으면서 터득한 지식으로 서투른 통역을 했습니다. 그런 일을 계기로 지금과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 소설을 통해서 한국어를 익히신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어떤 소설이고, 언제부터 한국어를 하셨나요?   “제 나이 55세 때부터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선생님은 일한(日韓)사전이었습니다(웃음). 소설의 제목은 김진명 선생의 였습니다. 그 후 조정래 선생의 을 읽었습니다. 2007년 지리산을 갔을 때 소설의 내용이 더욱 실감났습니다.”   ▴ 대단한 열정이십니다. 원래 어떤 직업을 가지셨고, 한국어에 어려움이 없으셨나요?   “저는 그리 대단한 일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40년 가르쳤습니다. 유학도 가본 적이 없어서, 영어 때문에 40년 내내 고생했습니다. 영어 듣기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잘 때도 단파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외국어에 대한 긴장감이 많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한국말을 공부하면서부터 그 스트레스가 없어졌습니다. 한국어와 일어가 비슷한 점이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주변에 영어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한국어를 해요. 그러면 영어도 쉬어질 것이다’라고 합니다.”   ▴ 여기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시면서 한일관계에 대해서 느끼신 점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판문점 선언이 발표됐을 때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뻐했습니다. 일본은 향후 아시아의 고아(孤兒)가 될 것 같아서 두렵습니다...한국이 보다 민주적이고 멋진 나라가 되면, 일본 사람들도 본받지 않을까요? ‘한일 관계 개선은 가해자의 진실 된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이 일을 하시면서 보람을 느끼신 점은 무엇입니까?   “무직인 제가 최근 한국의 ‘(사)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로부터 위촉패와 명함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기무라씨가 받은 겨레하나 위촉장 기무라 히데토(木村英人)씨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위촉패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자기 나라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면서 진실을 알리는 일에 앞장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용기 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더 밝은 미래가 열릴 것이다. 영화 군함도의 류승완 감독이 의 번역서(추천사)에서 밝힌 것처럼 그 날을 기다려본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의 미래가 보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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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에 핀 꽃’ · ‘세 번 건넌 해협’   '눈 속에 핀 꽃'의 표지 8월 27일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도에서 필자의 사무실로 소포가 왔다. 발신자는 고려대 명예교수이자 작가인 김민환(73)씨였다. 내용물은 소설 (중앙 books)이었다. 수줍듯 미소 짓는 매화 두 송이와 눈을 맞추며 책장을 열었다. 작가의 친필 사인이 있었다. 필자가 만난 적도, 전화 통화를 한 적도 없는 관계이기에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했다.   소설속으로   소설의 첫 장 ‘1월 1일 0시 5분’은 다음과 같이 시작됐다.   “가을비가 스쳐갔다. ‘영운’은 마당으로 나갔다. 햇살이 비에 젖은 구절초 꽃잎을 어루만지자, 구절초는 얼른 보라색 꽃잎 뒤로 눈물을 감추고 해를 향해 싱긋 웃었다.”   화초에 물을 주면서 일상을 여는 김민환 작가 소설이 사랑이야기를 바탕에 깔고 있을 듯싶었다. 구절초의 꽃말이 ‘순수·모성애(母性愛)·우아한 자태’이기 때문이다. 잠시 구절초(九節草)에 대해 들여다본다. 이 화초가 구절초로 이름표를 단 이유는 ‘아홉 번 꺾인다’는 설(說)과 ‘9월 9일(음력)에 약효가 가장 좋다’는 설에서 기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도 자생하는 국화과의 다년생풀로 약재(藥材)로도 쓰인다.   소설은 필자가 예상한 대로 대학 시절 영운의 첫사랑 윤희가 치매로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고, 오지랖이 하늘을 찌르는(?) 딸이 어머니(윤희)의 과거를 들춰서 첫 사랑의 남자(영운)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두 사람이 연애시절 주고받은 편지를 막무가내 소포로 보낸다.   영운과 윤희는 어떻게 만났을까. 대학 시절 독서 팀에서 만났다. 책으로 맺어진 인연이다. 인연의 끈이 너무 팽팽해서 끊어진 것일까. 두 사람의 인연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각기 다른 인생을 살아간다.   소설에는 그 당시 우리 모두가 겪어야 했던 시대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난, 학생운동, 노동운동, 이념, 저항...그런 것 들이다. 작가가 소설에서 내린 사랑의 정의도 남다르다.   사랑은 그리움이다?     김민환 작가(사진: 중앙 books) 소설을 통해서 참된 사랑은 ‘그리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가는 언론의 인터뷰에서 자전적 실연 소설이라고 하지만.   아무튼, 민주화 투쟁을 하던 영운은 선언문을 쓰는 역할을 했다. 작가 지망생이라서 글을 잘 썼기 때문이다.   “독재는 망한다. 민중이 반드시 망하게 한다.”   어머니의 죽음을 뒤늦게 영운에게 알리는 윤희의 딸 수민의 말도 가슴을 저미게 하다.   “우리 집 가훈이 뭔지 아세요? ‘가난하게 산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산다’입니다.”   서슬이 시퍼런 시대(엄동설한)에 꽃을 피운 사람들의 이야기. 작가는 치매를 앓다가 훌쩍 저 세상으로 떠나버린 윤희도, 탁탁한 현실 세계에서 힘들어하고 괴로워하고 분노한 시인(詩人)들도 ‘눈 속에 핀 꽃, 매화(梅花)’로 마무리했다.   일본 소설 의 아픈 이야기   해협(한글판)의 표지 2012년 대한해협을 ‘세 번이나 건넌 사나이’의 억울하고 서러운 스토리(story)인 소설 (나남)을 접했다. 원제는 으로 일본에서 유수의 문학상을 휩쓴 하하키기 호세이(帚木蓬生)의 소설이다. 이 작품 역시 팩션(fact+fiction)이다. 사실을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허구)을 보탠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하시근(河時根)’이다. 그는 17세 때 아버지를 대신해서 일본의 탄광으로 끌려간다. 첫 번째 건너는 해협이다.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한국이 해방의 날을 맞는다. 하시근은 배가 부른 일본 여인을 대동하고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가까스로 고국으로 가는 배를 탄다. 두 번째 건너는 해협이다. 그리운 고향의 집.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반기지만 형은 두 눈을 부릅뜨고 호령한다.   “너, 이놈아! 우리 집안이 일본에 의해 그토록 핍박을 받았는데도, 일본 년을 데리고 집에 들어오다니...”   당시 일본의 탄광으로 끌려간 광부들의 루트(사진, 일본의 평화자료관) 훗날 일본에서 그녀의 아버지와 삼촌이 와서 아이와 함께 일본으로 데려간다. 하시근은 다른 여인과 결혼을 하고 자식을 둔다. 재벌 회장이 된 하시근은 탄광촌의 폐석더미를 없애려는 N시장의 개발정책을 반대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간다. 세 번째 건너는 해협(海峽)이다.   하시근이 본연의 임무를 마치고 일본의 아들과 만나는 장면도 눈물겹다.   “아버지! 연락하려 해도 한국과 일본이 너무 멀었습니다. 어쩌면, 두 나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먼 나라일지도 모르지요.” “어머니는 어떻게 살다가 돌아가셨느냐?” “홀로 행상을 하시면서 저를 교사로 만들었습니다. 북으로는 돗토리(鳥取)현, 남으로는 구마모토(熊本)현까지 일본 전국을 돌면서...”   하시근은 이 세상에 없는 ‘사토 치즈(佐藤千鶴)’와 눈앞에 앉아 있는 일본의 아들 ‘도키로’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울음보를 터뜨린다.     하시근과 ‘사토 치즈’의 사랑은 의 영운과 윤희 보다는 몇 걸음 더 나갔지만 시작과 끝은 매한가지다.   “사랑은 그대들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햇빛에 떠는 가장 여린 가지들을 어루만져주기도 하고, 뿌리까지 내려가 대지에 엉켜 붙은 뿌리를 흔들어대기도 하기에.”라는 시인이자 철학자인 칼린 지브란(1883-1931)의 정의처럼.   하하키기 호세이(帚木 蓬生) 작가와의 만남도 책을 통해서   하하키기 호세이 선생의 친필 사인필자는 내친 김에 의 작가 하하키기 호세이(帚木蓬生)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 해협을 건넜다. 2014년 1월 29일이다. 그는 소설가이면서 ‘모리야마 나리아키라(森山成杉木)’라는 이름의 의사(병원장)로 살고 있었다. 서로 시간이 없기에 질문에 돌입했다(필자 칼럼 2014. 2. 19일자 참조).   ▶ 아버지를 대신해서 일본의 탄광에서 생(生)과 사(死)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주인공 하시근(河時根)의 스토리는 눈물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테마로 소설을 쓰시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으시나요?   “이 지역은 본디 탄광촌입니다. 제가 의사가 돼서 이 마을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환자 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재일교포 등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토록 아픈 사실자체를 까맣게 몰랐습니다. 묻힌 역사적 사실을 발굴해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소설가이자 의사인 하하키기 호세이 선생▶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에 대해 다른 시각을 내보입니다만, 굳이 이토록 밝힌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생의 을 많은 한국 사람들이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요. 반대로 일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지는 않으셨나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이 소설로 제14회 요시가와 에이지(吉川英治) 문학신인상을 받았습니다. 어떤 일본 독자는 오히려 ‘자신의 인생사와 흡사하다’고 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소설화했을 뿐 거짓으로 꾸민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한 역사는 잠깐 그럴듯해 보일 뿐 진정한 생명력을 얻지 못합니다.”   병원 앞까지 나와서 작별 인사를 하는 선생의 얼굴은 따스한 햇볕을 받자 더욱 생기가 돌았다. 나이를 잊고 병원을 운영하면서 소설을 쓰며 살아가는 하하키기 호세이(현 71세) 선생의 인생이 즐거움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책을 통해서 일본의 유명 작가와 만난 것도 특별한 인연의 끈이 있는 것일까.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김민환 작가와는 일면식도 없으나, 필자가 알 수 없는 인연의 끈이 있을지 모르겠다. 소설의 주인공 ‘영훈’과 ‘윤희’의 인연에는 턱없이 못 미치겠지만.

장상인

-음악·춤·먹거리...시민들의 발길 이어져   주말에 어디로 갈까? 우리가 가끔씩 생각해본다. 그렇다고 해서 날이면 날마다 해외나 산과 바다로 갈 수 없는 일. 필자는 지난 토요일(25일) 모처럼 서울 서초동에 있는 예술의 전당을 찾았다. 교통수단은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 단 1분도 오차 없이 예정 시각에 도착했다.   싹 페스타 안내문 예술의 전당은 품격 있는 건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언제나처럼 기분이 좋았다. 전당 안으로 들어가자 ‘싹 페스타(SAC FESTA)’란 안내문이 많았다. 지난 5월 5일(토)부터 시작된 축제였다. 그런데, ‘싹(SAC)’의 어원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궁금증이 증폭했다. 잠시 후 필자 혼자서 껄껄 웃었다. ‘싹(SAC)’이 ‘Seoul Arts Center’의 머리글자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예술의 전당(SAC)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대부분 가족단위나 연인, 친구들이었다. 때마침 세계음악분수에서 쇼(show)가 펼쳐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여기가 바로 천국이로다.’   하늘도 파랗고, 하얀 구름들도 유유자적. 바람은 가을을 알리는 듯 살랑거렸다.   앙상블 서울아트의 색소폰 연주로 무대 열어   17회 째인 이날의 무대는 앙상블 서울아트(Ensemble Seoul Art: 단장 성세경)의 색소폰 연주부터 시작됐다. 진행은 피아니스트 박선화 교수가 맡았다. 곳곳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계단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텅 비어있던 계단이 삽시간에 메워졌다.   앙상블 서울아트 연주(1) 앙상블 서울아트의 첫 연주곡은 ‘소스타코비치(D. Shostakovich)’의 왈츠(no. 2)였다. 잠시 전 음악분수에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던 곡(曲)이 눈앞에서 생음악으로 연주돼서 기쁨이 더했다.   사람들의 박수 속에서 한껏 들뜬 앙상블 서울아트는 영화 주제곡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 연주에서 절정을 이뤘으며, 앙코르 송 ‘엘 빔보(El Bimbo:영화 올리브의 목걸이 OST)’를 끝으로 관중들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연주 시간은 약 40분.   앙상블 서울아트 연주(2) 2010년에 창단된 앙상블 서울아트는 순수 아마추어 모임이다. 단원은 모두 21명. 건전한 색소폰 문화 정착 및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 활동하고 있다.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면서 ‘아마추어를 넘어 프로’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소프라노 윤나리씨의 무대 ‘더 좋은 연주를 사회와 나누고자’하는 순수한 마음이 시민들에게 다가간 것이다.   앙상블 서울아트는 국내를 넘어 2011년 3월 타이완의 KHS홀에서 정기 연주회를 가졌으며, 2012년 3월 일본 도쿄(東京) 연주, 올해 5월 교토(京都)에서 연주회를 가지기도 했다. 물론, 요양원이나 호텔, 교회 등 자선연주였다. 앙상블 서울아트의 색소폰 연주에 이어서 소프라노 윤나리의 노래, 주혜림의 피아노연주, 팝페라 그룹 ‘메노스옴무’의 무대가 계속적으로 펼쳐졌다.   ‘토요 축제-싹 페스타(SAC FESTA)’는 오는 9월 29일(토) 아카펠라 그룹의 ‘솔리스츠 앙상블’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즐거움을 선사한 인기 프로그램으로 시민들이 스스로 찾아   ‘도시 생활은 항상 시간에 쫓기고 치열하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생각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 시시각각 필자에게 ‘좋은 말’을 날리는 지인이 보내온 글을 소개해 본다. 도시 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공유해도 좋을 듯싶어서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마음을 지나치게 좁히다 보면 스스로 설자리를 잃고 만다. 아무리 각박한 삶일지라도 마음의 여유를 찾으면서 ‘가족·친지·주변 사람들과 자주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다.   ‘박학다식(博學多識)한 사람은 음(音)의 파편들이 서로 난립하기 때문에 저음(低音)이 들리지 않는다’는 말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시대는 강물처럼 굽이치면서 흘러가기 때문이다.   다양한 먹거리 포장마차도 인기 예술의 전당은 바쁘게 살고 있는 도시인의 마음을 넉넉하게 해주는 풍요로움이 있었다. 야외 공간을 활용해서 우면산 자락의 상쾌한 공기, 음악, 맛있는 먹거리...하나하나가 시민들이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숨소리를 죽이며, 사진 촬영도 못하는 엄격한(?) 공연장보다는 자유자재로 활동하면서 음악을 즐기는 ‘계단광장’이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듯 했다.   그래서일까. 공연이 끝났는데도 사람들의 발걸음은 계속 이어졌고, 형형색색 ‘빛의 향연’이 펼쳐졌다. “우리들의 즐거움이란 늘 기대에 못 미치며, 고통은 실제보다 훨씬 더 괴롭게 느껴지는 법이다.”는 쇼펜하우어(Schopenhauer,1788-1860)의 말을 떠올리며 예술의 전당을 벗어났다.

강인선

최근 다른 주에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이 외진 지역을 돌아다니다 ‘진짜 트럼프 지지자’를 마주쳤다고 한다. 턱수염이 더부룩한 이 중년 남자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언급하면서 “지난번 대통령, 이름이 뭐더라? 케냐에서 온…” 이런 식으로 얼버무렸다고 한다. 오바마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거나 아예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90%가 넘는 워싱턴에선 자신이 트럼프 지지자라고 떠벌이는 사람을 만나기 힘들다. 그래서 일상에서 진짜 트럼프 지지자의 생각을 들어볼 기회는 드물다. 동시에 그들이 오바마나 기득권층에 대해 갖는 반감에 대해 솔직하게 들어볼 기회도 별로 없다.      2016년 대선 때부터 화제를 모았던 책 ‘힐빌리의 노래(Hillbilly Elegy)’를 보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 책은 미국 백인 노동자 계층의 실상을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이 책이 지금도 베스트셀러인 이유는 미국 안의 어떤 지역이 경제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허물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같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에서 미국 중부 가난한 마을 사람들이 오바마에게서 받는 느낌을 언급한 부분을 읽다가 내심 놀랐다. 먼저 저자에 대해 조금 소개하자면, 그는 쇠락해가는 ‘러스트벨트’에 속하는, 가난한 애팔래치아 지역인 오하이오주에서 자랐다. 그는 자신이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백인 노동자 계층의 자손’이며, 어린 시절을 보낸 집안 환경은 ‘가난이 가풍이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미국에선 이런 사람들을 ‘힐빌리’ ‘레드넥(rednecks)’ ‘화이트 트래시(white trash)’라고 부른다.      저자는 그가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 사람들이 오바마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되는 것은 피부색과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대신 아이비리그 명문학교를 나온, 화려한 스펙을 가진 초엘리트의 느낌 때문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가난한 지역 사람들 눈에 완벽한 발음과 논리를 가진 오바마는 너무 낯설어서 오히려 거리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직장도 없고 가정은 파괴되고 약물에 중독된 미국 중부 노동자 계층의 눈에 법학교수처럼 논리적이고 우아한 오바마는 연대감을 느끼기 힘든 지도자일 수 있다. 거꾸로 자신들과 비교할 수 없이 큰 재산을 가졌으되 겉으로는 어쩐지 막 사는 것 같은 트럼프에게서 오히려 더 친근감을 느낄 수도 있다.      오는 11월 미국 중간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중간선거가 가까이 오면 모든 현안들이 ‘중간선거’란 렌즈를 통해 재해석된다. 이번 중간선거에선 하원의원 435명 전원, 상원의원은 3분의 1이 조금 넘는 35명, 그리고 주지사는 36명을 다시 뽑는다. 대통령 임기 딱 중간지점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현직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도 갖고 있다.      요즘 트럼프 대통령은 마치 대선 유세 때처럼 유세장을 돌고 있다. 펜스 부통령도 트럼프 정부의 경제 성과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가짜 뉴스’라고 맹공격하는 주류 미디어가 아무리 트럼프를 공격해도 지지층은 여전히 그에게 열광한다. 중간선거는 정당 간의 균형을 재조정하는 선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간선거는 여당에 불리하다는 게 상식처럼 돼 있다. 국민들은 야당에 힘을 실어주어 여당을 견제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제나 예외는 있다. 어찌 됐든 트럼프는 이번 선거에서 집권 2년에 대한 성적표를 받을 것이다.

장상인

-나가사키(長崎) 평화 기념상 이야기   “거리가 보인다.” “Tally ho! 구름사이로 제2의 목표 발견!”   1945년 8월 9일 오전 10시 58분. 9,000미터 상공에서 투하된 원자폭탄은 4분 뒤인 11시 02분 나가사키시를 강타했다. 인구 24만 명 중 7만 4천 여 명이 숨지고, 건물 36%가 전소 또는 파괴됐다. ...피폭(被爆) 10년 만에 평화를 추구하는 의미에서 기념상이 세워졌다. 남성미 넘치는 청동 기념상   멀리 보이는 평화 기념상 얼마 전 필자는 나가사키(長崎) 마쓰야마초(松山町)에 있는 평화공원을 찾았다. 그동안 여러 번 방문했으나, 예전보다 더 정갈해진 느낌이었다. 공원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서 편하게 오를 수 있었다. 관광객들의 노고를 도와주기 위한 배려인 듯했다. 공원에 오르자 시원한 분수대가 반겼다. 무더울 때라서 물줄기만 봐도 시원했다. 물줄기 사이로 멀리 커다란 동상이 보였다. 평화 기념상이었다. 이 기념상은 1955년 8월 8일 완성됐다. 작가는 기타무라  세이보(北村西望, 1884-1987). 나가사키 출신의 조각가로 도쿄미술대학 졸업생이다.   공원에는 많은 조각품들이 있었다. 대체로 평화를 상징하는 것과 인간애를 주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화 기념상은 다른 조각품들과 다른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자료를 토대로 조각품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정리해 본다.   평화공원의 조각상   조각품의 표정에서 사랑과, 자비심이 느껴졌다. 인자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이 조각품의 높이는 9.7미터. 이를 받치고 있는 좌대를 포함하면 13.4미터가 된다. 무게는 약 30톤.   동상에 대한 찬반론도 만만치 않아 동상의 모델에 대한 뒷이야기도 분분하다. 우리가 잘 아는 프로레슬러 역도산(力道山)이라는 설과, 유도선수이자 지도자인 요시다 고이치(吉田廣一)라는 설이다. 또한, ‘서양의 원폭이라는 구극적 무력의 피해 장소에 건장한 서양 남자를 상징하는 동상이 평화 기념비에 부합되는가?’하는 의견도 분분했다.   조각상의 얼굴 하지만, 작가는 “조각의 모습이 특정 인종(人種)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며 “인종을 초월한 인간으로, 때로는 부처, 때로는 신(神)으로 단지, 희생자의 명복을 빌 뿐이다”고 했다. 이글은 동상의 후면 작가의 말로 새겨져 있다.   평화 기념상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시인도 있었다.  후쿠다 스마코(福田須磨子, 1922-1974). 그녀는 나가사키 사범대학에 근무하던 중에 피폭됐다. 부모님과 언니는 피폭으로 사망했다. ‘평화 기념상 설치에 부쳐서’ 시인의 이라는 시(詩)가 그녀의 심정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무엇이든 싫어졌어요.원자폭탄이 떨어진 땅에 우뚝 솟은 거대한 평화상그건 좋아요, 좋다하여도그 돈으로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요?돌로 만든 상(像)은 먹을 수도 없고, 배를 채울 수도 없어요. (중략)   평화! 평화! 싫증이 나도록 들었습니다. 평화 기념상은 그 당시 총 5,000만 엔(한화 약 5억 원)을 들여서 4년에 걸쳐서 제작됐다. 이 중 3,000만 엔은 국내외의 모급으로 충당했고, 2,000만 엔은 나가사키시의 예산으로 집행됐다.  ‘그 돈으로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돌로 만든 상(像)은 먹을 수도 없고, 배를 채울 수도 없어요.’라는 피폭자 시인의 독백이 와 닿는다.   라는 시(詩)에도 피폭자로 살아가는 절절함이 배어 있다.   새해 첫날에절실히 내 생명을 사랑하노라원폭의 상흔(傷痕) 가슴에 안은 채절망과 고뇌의 가운데숨이 끊일락 말락 10년실로 살아서 왔도다.슬픔과 고뇌의 십자가를 좆아서... 피폭자의 상처, 누가 치료해주나?   당시 징용으로 끌려와서 나가사키 조선소 등에서 일하다가 피폭된 한국인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약 2만 명의 조선 사람들이 피폭됐으며 약 1만여 명이 폭사(爆死)했다. 비문의 내용을 다시금 옮겨본다. 일본인들이 세운 관계로 맞춤법이 잘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조선인 추도비(碑) 그 후, 일본에 강제연행으로 끌려와 강제노동을 당한 조선 사람은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패전당시에는 실로 2,365,263명에 이르렀으며, 나가사키(長崎)현에도 약7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가사키(長崎)시 주변에는 약 3만 수천 명의 조선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은 미쓰비시 계열의 조선소·제강소·전기·병기공장과 도로·방공호·군수공사장 등 토목공사장들에서 강제노동을 당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9일. 미군의 원자폭탄투하에 약 2만 명의 조선 사람들이 피폭됐으며, 그 중 약 1만여 명이 폭사(爆死)했다.   우리들 이름 없는 일본사람들이 얼마간의 돈을 모아, 이곳 나가사키에서 비참한 생애를 보낸 1만여 명의 조선 사람을 위해 이 추도비를 건설했다. 지난 시기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그 민족을 강재로 끌고 와 학대혹사하며, 강재노동 끝에 비참하게도 원폭을 맞아 죽게 한 전쟁책임을 그들에게 사과함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 핵무기의 완전철패와 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염원하여 마지않는다.>   세월이 흘러도 상처는 씻어지지 않는 듯싶다. 그래도, 이름 없는 일본인들이 사과하고, 진정으로 그들의 명복을 비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내년 4월 퇴위를 앞둔 아키히토(明仁) 일왕(일본인들은 천황이라고 함)은 4년 연속 ‘깊은 사죄를 한다’고 술회했다고 일본 언론들이 보도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아베신조(安培晉三) 수상 등 약 7,000명이 참가했다. 하지만, 일본 언론들은 아베(安培) 총리가 6년 연속 ‘가해와 고통’ ‘깊은 반성’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반성과 사죄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평화가 이룩될 것이다.

장상인

-메이지 정부의 기독교 금제(禁制) 해제로 탄생한 시쓰(出津) 교회를 가다     일본의 유명 역사학자 고노이 타카시(五野井隆史·77)의 저서 에 쓰여 있는 메이지(明治) 초기의 일본 그리스도교의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선교사들은 10리 밖을 벗어나지 못하고 정해진 구역에서만 활동하도록 했다. 구역을 벗어날 때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 무렵 나가사키(長崎)현 소토메(外海) 지역 시쓰(出津)라는 산골마을에 부임한 프랑스 신부가 있었다.   마르코 마리 드 로(Marc Marie de Rotz) 신부   시쓰 문화촌 입구 소토메(外海) 지역 시쓰(出津)는 고대 유적지이기도 하지만, 프랑스 출신 ‘마르코 마리 드 로(Marc Marie de Rotz, 1840-1914)’ 신부와 인연이 깊은 곳으로 이름나 있다. 그가 1880년 이곳 시쓰(出津) 교회의 주임 신부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독자적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일본인들이 말하는 나가사키(長崎)현 ‘소토메(外海)’에 대한 설명이다. 적절한 표현이다. 이곳은 아름다움 속에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가 내재해 있다.   '마르코 마리 드 로' 신부의 동상 시쓰(出津) 마을은 교통이 편리한 지금도 나가사키 역 앞에서 시외버스로 1시간 30여분 달려야 다다를 수 있다. 필자가 인적이 드문 한적한 정류장에 내려서 안내판을 따라 언덕길을 오르자 아름다운 바다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지도를 펼쳐들고 시쓰(出津) 교회를 바라보면서 발길을 옮겼다. 다시 언덕길을 내려가자 유럽풍의 가옥이 하나 나왔다. 다름 아닌 ‘마르코 마리 드 로’ 신부가 살던 집이었다. 그에 대한 짤막한 기록만 있을 뿐, 안내하는 사람도, 방문 목적을 묻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의 손이 가지 않은 듯 한 거친 정원을 지나자 신부의 동상과 옛 구조원(救助院) 건물이 나왔다. 이 구조원은 '마크 마리 드 로'신부가 가난한 주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건설한 시설로, 메이지 16년(1884)부터 18년(1886)에 걸쳐 완공됐다. 허름한 가옥 앞에 ‘국가 지정 주요 문화재’라는 안내문도 있었다. 사진 몇 장을 찍고서 멀리 언덕 위에 자리한 ‘시쓰(出津) 교회’를 향해 길을 걸었다.   신부가 구조원과 교회를 오가던 길   '역사의 길' 안내문 필자는 담벼락 아래에 외롭게 서있는 작은 안내판을 발견하고서 발걸음을 멈췄다. 타이틀은 ‘역사의 길’이었다. 안내문을 그대로 옮겨 본다.     신부가 걸었던 소로-멀리 시쓰 교회가 보인다. 지금도 넓혀지지 않은 채 신부의 발자취만 전설처럼 담긴 좁디좁은 시골길-후세 사람들은 신부가 걸었던 소로(小路)를 ‘역사의 길’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평범한 시골길이 아니라 ‘역사의 길’이다. 프랑스 신부가 이토록 외진 농어촌에 와서 역사적 사명을 다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방인이 외롭게 걸었던 길을 걸으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가난한 농부들과 어부들을대한 그의 인간애(人間愛)를 생각해 봤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줄줄 흐르는 땀을 닦으며 언덕길을 오르자 교회 앞에도 신부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고, 그의 이력과 업적이 새겨져 있었다.   ‘마르코 마리 드 로’ 신부는 농업이나 어업 기술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연고지를 방문하면 한결 같이 건축·제분·빵·마카로니 등의 제조방법과 농기구·어망 공장 등 여러 분야에 대해 기술 지도를 했다. 그가 개간한 농경지와 사재를 털어서 판 우물, 농민들을 위해 지은 작은 가옥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래서 그가 ‘종교를 넘어 위대한 선각자’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신부의 동상 옆에 마태(마태오)복음 25장 40절이 있었다.   시쓰 교회 앞에 있는 성경의 한 구절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일본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교회를 나가사키(長崎) 지역에서는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만큼 크리스천이 많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오래 전 저희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 신부님이 사용하던 오르간을 여동생과 함께 연주하면서 그 분의 업적을 기린 적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분이셨지요. 그 오르간은 지금도 시쓰(出津) 문화관에 잘 보존돼 있어요.”   오이타(大分)에 살면서도 소토메를 자주 찾는  이노우에 유코(井上裕子·67)씨의 말이다. 일본인들이 ‘도 로’라고 부르는 ‘마르코 마리 드 로’ 신부는 이렇게 지역민들의 뇌리 속에 각인된 인물인 것이다.   영화 ‘게게(解夏)’ 촬영지로도 유명해   이곳은 영화 ‘해하(解夏)’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이 영화(2004)는 나가사키 출신 ‘사다 마사시(佐田雅志·66)’의 단편 소설(2002)이 원작이다.   어떤 영화일까.   초등학교 교사인 주인공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고향인 나가사키로 돌아간다. 시력을 잃어가는 젊은이의 고뇌. 약혼자와의 갈등...일어날 수 있는 인간의 삶을 절절하게 그린 영화이다. 시쓰 마을이 영화에도 등장한 것은 종교와 무관하게 자연 환경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해하(解夏)’는 스님들이 여름철에 하안거(夏安居)를 할 때에 수행의 마지막 날을 일컫는다. 소설이 의미하는 ‘해하(解夏)’는 하안거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뜻일 수도 있어 보인다. 일본어로는 ‘게게(げげ)’로 표기해야 되지만 편의 상 ‘해하(解夏)’로 했다.   무더운 날씨 탓에 시스 교회에 오래 머물지 못한 필자는 다시 발길을 돌렸다. 한 시간에 한 대씩 지나가는 버스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다.   성지 순례단의 모습 때마침 많은 사람들이 수녀를 따라서 길을 걷고 있었다. 모습으로 봐서 성지 순례를 하는 한국 사람들임에 틀림없었다. 카메라 렌즈로 인사를 가름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아름다운 바다와 눈을 맞췄다. 태풍 소식이 있었으나 바다는 여전히 푸르렀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낮은 지붕의 어촌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시쓰 마을의 어촌 순간, 일본의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다치바라 마사아키(立原正秋, 1926-1980)’의 수필 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바다를 바라보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리고 산책길로 되돌아와서 바다를 따라 걷는다...어부들의 가난한 생활에는 가슴에 스며드는 생활의 냄새가 있다. 고기잡이에서 돌아온 남편과 정(情)을 나누던 젊은 아내에게도, 그런 생활의 냄새가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 냄새가 더욱 가치 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하면서 버스를 탔다. 버스에도 가난한 사람들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장상인

- 표지석(石碑)에 담긴 항구(港口)의 역사   우리에게는 추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나가사키(長崎)는 아직도 노면 전차가 달리고 있다. 요금은 성인 기준으로 120엔(한화 1,200원)이나, 일일 회수권을 500엔(5,000원)에 사면 하루 종일 마음대로 타고 내릴 수 있다. 대부분의 역이 주요 관광지와 인접해 있어서 이용에 불편이 없다.   필자는 얼마 전 나가사키 역 앞에서 전차를 탔다. 데지마(出島) 전역(前驛)인 오하토(大波止)에서 내려서 니시하마(西浜)를 향해 언덕길을 올랐다. 날씨가 더워서 걸음을 멈추고 땀을 닦던 중 나가사키 현청(縣廳) 제3별관 건물 벽면에 서 있는 작은 표지석(石碑) 하나가 필자의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생소한 글이 쓰여 있었다.   ‘남만선(南蠻船) 내항(來航)의 부두(波止場)가 있었던 곳’   '남만선 내항의 부두' 표지석 표지석의 글은 ‘남만선(南蠻船) 내항(來航)의 부두(波止場)가 있었던 곳’이었다. 아주 먼 옛날에는 정취어린 바닷가였으나 매립공사에 의해서 지형이 달라진 것이다. 표지석 옆 안내판의 짧은 글속에 나가사키 항구의 희망과 굴절, 비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1582년 ‘이토(伊東)만쇼’, ‘지지와(干干石)미게루’, ‘나카우라(中浦)줄리안’, ‘하라(原)마르치노’라는 4명의 덴쇼(天正, 1573-1591) 소년사절단이 로마를 향해 출발한 곳이었다.   1614년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과 나이토 조안(內藤如安) 등 가톨릭 신자들이 마닐라와 마카오로 추방된 곳도 이 부두였다.>   일본에서 일컫는 남만선(南蠻船)의 개념은 중국과 다소 차이가 있다. 일본에서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등 유럽에서 오는 선박을 ‘남만선’이라고 했으나, 중국은 남방에서 오는 모든 선박을 총칭해서 ‘남만선’이라고 했다. 표지석의 글을 따라 역사 속으로 돌아가 본다.   나가사키를 개항한 오무라 스미다테(大村純忠)   1563년 ‘코스메 데 토레스(Cosme de Torres, 1510-1570)’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오무라 스미다테(大村純忠, 1533-1587)는 일본 최초의 크리스천 다이묘(大名)이다. 토레스(Torres)는 스페인 출신으로 프란시스코 하비에르(1506-1552)와 함께 일본에 입국한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이다.   남만선의 모형(아마쿠사 콜레지오 박물관) 오무라 스미다테는 1570년 나가사키의 개항을 승인했다. 그 결과 나가사키에 포르투갈 배가 정기적으로 내항하게 됐다. 나가사키가 세계를 향한 뱃길을 활짝 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에게 평탄대로의 길을 걷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1572년 다른 성주(後藤·松浦·西鄕)들의 공격이 계속됐고, 나가사키 최초의 교회가 화염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오무라(大村)는 신념을 잃지 않고 예수회의 부강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그의 영지에는 6만 명이 넘는 신자가 있었다. 이는, 일본 전체 신자의 절반에 이르는 엄청난 숫자였다.   지병으로 인해 몸이 쇄약해진 그는 1587년 6월 23일 ‘신부 추방령’이 내려진 전날 생을 마감했다. 죽기 하루 전 ‘새 장에 키우던 새 한 마리를 하늘로 날아가게 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새를 함부로 다루는 시녀를 꾸짖었다’는 말도 감동적이다.   “새는 제우스님이 만든 것이므로 항상 가엾게 생각해라. 앞으로는 애정을 가지고 대하도록 하라.”   모두가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1532-1957)의 에 수록된 내용이다. 그의 종교관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로마로 떠난 덴쇼(天正) 소년사절단   오무라 스미다테(大村純忠)는 일본의 미래를 위해 소년들을 유럽에 보내는 일을 착수하기도 했다. 그 결과 자신을 비롯해서 지역 영주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오토모 소린(大友宗麟)과 협의해서 4명의 소년을 선발했다. 이 중에서 3명은 오무라(大村)의 연고자였다. 4명의 소년들은 1582년 나가사키 항에서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희망의 나라 로마로 떠났다.   소년들은 로마에서 교황 접견 등 환대를 받으며 8년의 세월을 체재한 후 1590년에 귀국했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그리스도교가 융성(隆盛)한 것을 직접 목격한 그들은 신부가 되려고 했다. 1591년 7월 25일 아마쿠사(天草)에 있는 콜레지오(Collegio) 부속 수련원에 입교했다. 이들의 유럽 파견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알레산드로 발리나뇨(1539-1606)’ 신부는  아마쿠사(天草)에 있는 콜레지오의 감사를 거쳐 두 번째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아마쿠사 콜레지오 박물관 입구에 그려져 있는 덴쇼소년사절단의 모습 안내판의 그림은 그들이 파견 당시 독일에서 발행된 신문기사다. 원본은 교토(京都)대 부속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하지만, 이들의 꿈은 당초대로 펼쳐지지 못했다. 막부의 크리스천 탄압 정책에 의해서다. 아마쿠사 콜레지오 박물관(관장: 本多康二)에 근무하는 우와쿠치 히로코(上口浩子·56)씨의 말이다.   “이토(伊東)씨는 1612년 병사(病死)했고, 지지와(干干石)씨는 1633년 사망했습니다. 하라(原)씨는 1629년 마카오에서 병사했고, 나카우라(中浦)씨는 1633년 나가사키에서 순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꿈꿨던 세상을 만나지 못하고 각기 다른 길을 걷다가 하늘나라로 간 것입니다. 먼 옛날의 일이지만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다. 슬픈 일이다. 안내판 상단에 쓰여 있는 ‘유구(悠久)의 시대를 넘어’라는 문구가 함축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필리핀으로 추방당한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 1552-1615)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버리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가 숨어 지내던 가가(加賀)현에는 1,500명의 신자들이 몰려들었다.   마닐라에 있는 다카야마 우콘의 동상 다카야마 우콘은 1614년 막부의 선교사 추방령에 의해 여러 나라의 국적을 가진 기독교인 350명이 필리핀의 마닐라로 추방됐다. 그들이 단체로 추방된 곳이 바로 표지석이 서있는 나가사키 항구였던 것이다.   그해 12월 중순에 마닐라에 도착한 다카야마 우콘은 열병으로 도착 40일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350명 중에 조선인 수사(修士) ‘가이오(Caius)’가 있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사람이다. 본명은 알려지지 않고 세례명 ‘가이오’로만 알려져 있다. ‘가이오’는 필리핀에서의 꿈이 좌절되자 1616년 일본으로 돌아와 선교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옥살이를 하는 신자들을 위문하러 갔다가 붙잡혀서 나가사키에서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 1624년의 일이다.   필자가 지난 해 필리핀 마닐라에서 다카야마 우콘의 동상을 찾은 적이 있었다. 고속도로 공사로 인해 보호대를 감고 있는 그의 동상을 보면서 역사의 무상함을 느꼈다.   다카야마 우콘의 동상은 1977년 11월 17일 일본과 필리핀의 합의에 의해 세워졌다. 그 과정에서 많은 반대도 있었으나 세우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 또한 ‘유구(悠久)의 시대를 넘어서’ 벌어진 애절한 사연이다.   지금은 아스라이 잊힌 400여 년 전의 일들이지만, 그들의 궤적은 기록에 의해서 소곤소곤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한 것이다.

장상인

-日, 잠복(潛伏) 크리스천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보며   “잠복(潛伏) 크리스천이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군요.”   일본의 지인 와타나베 아키라(渡邊章·71)씨가 짤막한 문자 메시지와 함께 니시니혼신문(西日本新聞) 기사 하나를 필자에게 보내왔다. 지난 3일자의 조간신문에 게재된 기사였다. 기사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엔도 슈사쿠(문학관 사진) ▼ “종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두 형태가 있다”고 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는 썼다. 하느님 아버지가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분노·심판·처벌하는 것과, 이에 반해 어머니처럼 인간의 실수를 용서하고 슬픔에 손을 내미는 것이라고.   ▼ 잠복(潛伏) 크리스천들에게 소중했던 것은 후자였다. 대대로 내려온 성화(聖絵), 성상(聖像) 중에서 성모의 그림 ‘마리아 관음(観音)’이 많아서다. ‘어머니의 종교’를 더욱 필요로 했던 것이다.   ▼ 순교자 같은 용기를 가질 수 없는 비애(悲哀)가 있다. 빚(負)이나 열등감도 있다. 후미에(踏み絵)를 강요당하는 괴로움과 그 다리의 통증, 고통의 여러 가지를 성모 마리아는 이해하고 용서해 준다. ‘그들은 그렇게 바랐다’고 작가 엔도(遠藤) 씨는 해석을 덧붙였다.   ▼ 나가사키(長崎)와 구마모토(熊本)의 잠복 크리스천 관련 유산이 유네스코(UNESCO)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됐다. 성직자 부재의 금교(禁教) 시대- 발각되면 엄벌에 처해지는 상황에서 200년 이상 비밀리에 이어간 신앙의 릴레이는 기적이었다.   ▼ 이 역사에 ‘영웅’은 없다. 주인공은 농·어업에  종사하는 서민들이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불교를 가장하면서도 성모에게 구원을 청하기도 했다. 슬프고 나약한 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관철하는 힘이 하나의 마음으로 뭉쳐졌다. 이러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공감과 놀라움을 배가(倍加) 시킨다.   ▼ 다른 한편으로 결정 후 후예(後裔)들에 의해서 엄숙한 종교 행위를 ‘관광’ ‘지역 진흥’과 세트로 거론되는 것에 대해 당황의 목소리도 새어나온다. 흥행이 아닌 내면의 마음을 어떻게 보여줄까. 세계유산등록과 동시에 안아야 할 어려움이다. 짧은 글이었으나 시사(示唆)하는 바가 컸다. 특히, “역사의 주인공은 농어업에 종사하는 서민들이었다”는 것과 “엄숙한 종교 행위를 ‘관광’ ‘지역 진흥’과 세트로 거론되는 것에 대해 걱정한다”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다. 이는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세계문화유산을 상업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잠복(潛伏) 크리스천의 의미   일본의 기독교 역사는 15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란시스코 하비에르(1506-1552)에 의해서 크리스천(가톨릭)이 많아졌으나, 19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의 금교령에 의해서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설상가상(雪上加霜). 1637년에 야기된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島原・天草の乱)’으로 막부(幕府)의 강력한 제재에 의해 일본의 기독교가 뿌리째 뽑히고 말았다.   밀랍인형으로 재현된 잠복 크리스천(아마쿠사) 1644년 이후 일본에는 가톨릭 사제가 한 사람도 존재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신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심지어 불교 신자로 위장하는 편법을 쓰기도 했다. 이들을  ‘잠복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잠복 크리스천은 지극히 소단위의 집단으로 비밀리에 기도문을 만들어서 암송했다. 이 기도문을 ‘오라쇼(라틴어 Oratio)’라고 했다. ‘기도’의 의미란다. ‘오라쇼’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으로, ‘뜻을 이해하는 것보다 함께 외우는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쩌면, 그들만의 행동통일 강령이었던 듯싶다.   마리아 관음상 후미에(아마쿠사) 아무튼, 잠복 크리스천들은 메달이나 로사리오, 성상·성화, 십자가 등을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자체적으로 세례를 주면서 자신들의 종교를 지켰다. 막부(幕府)시대가 종말을 고(告)하고 메이지(明治) 시대에 종교의 자유가 시행된 데도, 그들은 크리스천으로 복귀하지 않고 토속적 신앙의 형태로 전승하기도 했다. 나가사키(長崎)와 구마모토의 아마쿠사(天草) 지역의 사람들이다. 일본에서는 금교 시대의 신자들을 ‘잠복 크리스천’이라고 하고, 메이지 이후 토속화된 신자들을 ‘숨은(隱れ) 크리스천’으로 구별하고 있다.   이러한 신자들의 역사와 믿음에 대한 가치가, 6월 30일 중동의 바레인에서 열린 제42회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 의해서 정식으로 등재된 것이다.       후미에(踏み絵)란 무엇인가.   후미에(踏み絵)는 에도(江戶) 막부가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밟게 하여 신자를 색출하는 방법이었다. 잠복 크리스천으로 의심되는 사람 중 성화를 밟은 사람은 배교(背敎)를 인정받아 살아나고, 주춤거리거나 밟지 못하는 사람은 죽음을 맞았다. 후미에는 크리스천을 색출하는 잔인한 도구였다. 엔도 슈사쿠(遠藤周作)는 나가사키에서 이와 같은 후미에를 본 후 소설 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소설 의 마지막 부분으로 들어가 본다.   “신부님! 기치지로입니다.”   “이제는 신부가 아니다. 빨리 돌아가는 게 좋다. 들키면 귀찮아진다.”   “저는 신부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성화 판에도 발을 올려놓았습니다.”   “그 성화 판에 나도 발을 얹었다. 그때 이 다리는 그분의 얼굴 위에 있었다. 내가 수백 번도 더 머리에 떠올린 얼굴 위에, 인간 중에 가장 착하고 아름다운 그 얼굴 위에...그 얼굴은 지금 성화 판에서 마멸되고, 움푹 파여, 슬픈 눈으로 이쪽을 보고 계신다.”   성화를 밟는 신부 로드리고(영화 '사일런스'에서) “이 세상에는 약자가 있습니다. 강자는 그 어떤 고통에도 굽히지 않고 천당에 갈 수 있겠지만, 저 같은 약자는 성화 판을 밟으라고 관리들이 고문하면...”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다. ‘강한 자보다 약한 자가 괴로워하지 않았다’고 그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주인공 기치지로와 결국은 배교할 수밖에 없었고, ‘오카다 산에몬’이라는 일본 이름까지 하사받은 ‘로드리고’ 신부와의 대화 내용이다.   정답은 없다. 중요한 것은 약한 자들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는 강자들의 배려일 것이다. 필자가 얼마 전 나가사키의 소토메(外海)에 있는 엔도 슈사쿠의 문학관을 다녀온 후 다뤄본 테마(Thema)이다.   등장인물과 나(작가)와의 관계는? 소토메 문학관에 게시된 영화 '사일런스' 포스터   작가 엔도 슈사쿠가 ‘침묵의 소리(김승철 譯)’에서 밝힌 소설 속 주인공들에 대한 설명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내재된 갈등(葛藤)일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설혹 나를 배신했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당신이 옛날 믿고 있던 그 신앙은 자신감이나 재판하는 강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버림받은 자의 슬픔을 위해서 존재했었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가 1968년에 발표(新潮 1월호)한 단편 소설 에 묘사된 ‘버림받은 자의 슬픔’도 강자가 아닌 약자이기 때문에 겪어만 하는 비애(悲哀)일  것이다.   ‘왜? 약(弱)한 우리가 고통스러울까?’

김동연

매티스 국방장관과 아베총리. 사진=위키미디어   싱가포르 회담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은 북한에게 유리하게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북한의 입장에서 가장 큰 수확은 아무래도 한미연합훈련 중단이다. 북한은 그동안 한미연합훈련에 대해 거칠게 항의해왔다. 조선중앙방송을 통해서도 한미연합훈련을 적대행위 혹은 전쟁연습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해왔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하겠다고 하자, 북한은 이를 반기는듯하다. 국내에서는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두고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보수진영에서는 한미연합훈련 중단은 섣부른 조치라며 미국에게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진보진영은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환영하며, 한국의 독자적 훈련까지 중단을 요구, 이미 일부는 국방부를 통해 중단을 추진중이다. 이대로라면 더 이상 한미의 모든 군사훈련은 중단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즉 훈련을 하지 않는 군인만 한국에 남게 되는 것이다. 훈련을 하지 않는 군인이 유사시 쓸모가 있을까. 미국의 한미연합훈련 결정의 배경은 무엇일까.   워싱턴의 분위기를 종합하면 세가지로 관측된다. 1. 한미연합훈련중단은 미국의 리트머스 시험지였나?    첫째, 한미연합훈련은 중단은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한반도의 정국을 미국이 테스트 해보기 위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한미연합훈련 중단이라는 카드를 던졌을 때 남한의 분위기가 어떻게 될지를 보려고 한 것이다. 한미연합훈련 중단에 대해 한국의 여론이 반길 것인가? 아니면 우려할 것인가?   미국내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의 보수진영이 추진한 태극기 집회와 진보진영이 추진한 촛불 집회를 지켜봐왔다. 특히 매티스 국방장관의 방한때 대규모로 등장한 태극기 집회 세력을 보고 워싱턴도 놀랐다. 당시 매티스 장관은 태극기 집회 인파에 다가가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여론의 분위기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한반도의 여론을 훈련중단을 통해 지켜볼 심산이었다. 보수 진영이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계기로 심각성을 깨닫고 미국과의 협조를 강화하자는 바람이 국내 여론에서 불 것인지 보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반응이 나온다면, 미국의 입장은 한국의 여론 등을 빌미로 훈련 중단에서 훈련 축소 등으로 방향을 돌릴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정작 국내 여론은 미국의 예상과 다르게 흐르고 있다. 한미연합훈련 중단에 반기를 든 보수진영의 목소리는 묻히고 있다. 극히 일부의 매체에서만 우려하는 목소리만 나올뿐이다. 주요 언론과 여론은 한미훈련중단에 무관심하거나 반기는듯 보인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정국을 최종적으로 가늠하는 잣대로서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던졌다고 볼 수 있다.   2. 반드시 재도발할 북한을 간파한 미국의 대북압박 카드    둘째, 훈련 중단은 북한의 꼼수를 간파한 미국의 묘수다. 워싱턴내에서 볼턴 국가안보보좌관 등은 이미 북한의 행동패턴을 파악하고 있다. 북한은 항상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항상 다른 태도를 보이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미북간 대화를 통해 평화무드를 꽃피우다가도 돌연 북한은 미국의 뒤통수를 치는 도발을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도발 시점이 언제인지를 모를뿐 이러한 북한의 추가 도발은 예견된 일이다. 결과적으로 북한이 언젠가는 다시 도발할 것을 알고 있는 미국이 한미연합훈련 중단이라는 카드를 뽑았지만, 이 카드의 실효성은 북한에게 달린 것이다. 북한이 재도발을 하게 되면, 다시 훈련은 재개될 수 밖에 없다. 북한이 도발하면 미국의 입장에서 북한이 다시 도발을 했기 때문에 미국은 다시 훈련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정당한 명분이 생긴다. 따라서 이 훈련 중단이라는 카드는 사실 북한에게 득이 되는 카드가 아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북한에게 CVID 이행에 대한 부담을 떠안기게 된 카드다. 북한도 스스로 재도발하면, 미국이 언제든지 한미연합훈련 재개를 해도 할말이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 따라서 사실 이 훈련 중단의 책임은 북한이 쥐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미국의 입장에서 연합훈련 중단은 북한을 배로 압박하는 묘수인 것인다.     미국, 일본, 인도, 호주, 싱가포르 해군이 지난 2015년 모여서 해상 훈련을 했다. 사진=위키미디어 3. 한반도에 대한 워싱턴의 지정학적 재구성     셋째, 훈련중단은 한반도를 포함한 지정학적 재구성의 의미가 있다. 한반도는 과거 한국전부터 지정학적(geopolitically) 요충지다. 일례로 에치슨 라인(Acheson Line)을 들 수 있다. 한반도는 공산권 확장을 막아내는 최후의 보루다. 이 때문에 한반도의 군사적 중요성은 워싱턴 내에서도 익히 알고 있다. 특히 중국의 경제적, 군사적 급성장을 견제하기 위해서 한국의 역할은 몇번을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한반도의 중요성을 바라보는 워싱턴의 시각이 일부분 바뀌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으나, 현재 한국정부의 모호한 외교적 스탠스를 들 수 있다. 친중, 친러 형태의 외교적 움직임을 보여주는 문재인 정부를 워싱턴에서도 재평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정부는 최근 중국과 러시아를 자주 방문하는 등 여러가지 사업 등을 구상중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한국을 대신하여 일본의 역할이 확대 및 강화되는 양상이다.   이를 대변하는 한가지는 주한 미국대사로 선택된 해리스 제독을 들 수 있다. 해리스는 일본통으로 일본 수뇌부를 비롯한 군부와 밀접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내 구성된 미군기지의 역할과 방향을 파악 및 통제하고 있다. 최근 연이은 미일 정상회담도 이러한 일본중심적 한반도 작전 개편의 일부분을 뒷받침한다.   아베와 트럼프가 연거푸 만나는 동안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지 않았고, 한미일 3국 정상간 비공개 대화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현재 한반도는 불과 5년전 한반도의 구성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훈련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한미간 전시에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유사시 손발이 맞지 않는 한미 장병을 대신하려면 분명 미일연합훈련이 이런 공백을 메워야만 한다. 아직 대외적으로는 미일연합훈련이 과거와 동일한 규모라고 하지만, 이면을 보면 한미연합훈련 중단으로 늘어난 부담을 메우려는 미일의 노력이 감지된다. 이것은 최근 일본과 미국의 군사소식통과 언론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요미우리 신문은 6월말 사설을 통해 미일 동맹 강화가 새롭게 변한 한반도 국면에 필연적이라는 식의 주장을 폈다. 미일의 국방 수장인 매티스와 오노데라간 오고 간 대화에서도 양국은 북한의 비핵화와 모든 종류의 탄도미사일을 완전히 폐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런 가운데 한국의 송영무 국방장관은 한미연합훈련 중단은 물론 한국의 독자적 훈련(해병대 훈련 등)마저도 중단을 내세우고 있어 미일간 국방적 조치와 한미간 국방조치가 완전히 다른 기로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미일 국방 수장간 대화 직후 매티스가 언론에서 밝힌 발언에서도 미일의 중요성 강화를 확인 할 수 있다. 매티스는 “우리(미일)의 동맹은 여전히 철갑을 두른듯 확고하다. (Our commitment to this alliance remains ironclad with a long-term ally).” 매티스가 Ironclad라는 단어까지 사용한 부분을 주목할만하다. 매티스 국방과 아베 총리가 만나고 난 직후 아베의 군사적 중요성을 담은듯한 발언도 주목할만하다. 그는 “미일동맹은 일본의 평화와 안보뿐만 아니라 지역적 번영을 위한 초석이다”라고 말했다. 군사적 자위권을 보유한 일본이 더 이상 자국의 안보뿐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지역에서의 역할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반면, 방일에 앞서 방한했던 매티스 국방장관은 문재인 대통령의 몸살로 면담조차 성사되지 못했다.   외교적 스킨십 외에도 미일의 군사적 스킨십도 강화되는 추세다. 가장 대표적인 훈련은 6월 8일부터 16일까지 성사된 미일인(美日印)해상 훈련이다. 3국이 모여서 대북 및 대중도발의 억제력 제공 훈련을 처음으로 진행한 것이다. 이번 훈련은 괌을 기점으로 진행된 것으로 미국의 태평양함대의 인도-태평양 작전지역 확장 및 남중국해에서 지속되는 중국의 도발, 그리고 북한의 도발까지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이 훈련에는 미 7함대 소속의 레이건 핵추진 항공모함과 오하이호급 핵추진 잠수함까지 동원된 대규모 훈련으로 알려졌다. 주목할 점은 이 훈련에 포함된 대잠 대응 훈련이다. 적의 잠수함을 적발하는 즉시 요격하는 훈련내용이 포함되었다. 이것은 유사시 북한의 잠수함 전개도 제거하는 능력을 강화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대잠훈련을 통해 3국이 해당 지역에 대한 수중 작전까지도 숙달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훈련에서 대북억제력 확보차원에서 포함되어야 할 한국 해군은 빠져 있다. 이미 문재인 정부는 출범이후 북한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며 미국의 오하이호급 핵추진 잠수함의 부산 입항을 거부한 전례가 있다. 이 군사적 훈련을 보면 워싱턴의 동북아 구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추진중인 대북 대화 무드가 언제까지 유지될 것인가. 이 대화의 실효성이 바닥을 드러나는 순간,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향후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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