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인

-일본의 광촉매공업회 ‘후지이 다카하루’ 부회장으로부터 듣다   미세먼지가 대한민국 전역을 지배하던 지난 7일 서울시청 9층의 카페 ‘하늘공원’에서 후지이 다카하루(藤井隆治·62)씨를 만났다. 서울시가 주최한 ‘대기질 개선을 위한 광촉매기술 국제포럼’을 마친 직후다. 그는 이날의 포럼에서 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후지이(藤井)씨는 호텔에 체크인도 못했는지 캐리어 가방을 끌고 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는 선채로 필자에게 두 개의 명함을 건넸다. 하나는 일본의 광촉매공업회 부회장의 직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식회사 곤(鯤)코퍼레이션의 대표이사였다. 두 개의 명함 공히 ‘깨끗한 일본’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일본을 아름답게 하는 것을 광촉매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서 광촉매에 대해서 설명했다.   후지이 다카하루 부회장 “광촉매는 태양이나 조명 등의 빛을 받아서 그 표면이 강력한 분해력과 친수작용(親水作用)으로 생겨나는 특성이 있습니다...광촉매에는 세 개의 효과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즉, 환경정화·미관유지·청결한 공간입니다.”   그러면서 후지이(藤井)씨는 일본의 경우는 광촉매 제품에 대한 규격화가 엄격하게 시행되고 있는데 비해 한국은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시장에는 좋은 제품도 있으나 나쁜 것도 있습니다. 나쁜 것들이 시장에 유통되면 좋은 제품들도 덩달아 신용이 떨어지지요. 이러한 잘못된 제품을 걸러내는 수단이 바로 엄격한 표준화입니다. 일본은 ISO(국제표준화기구)의 기준에 의해 광촉매제품의 표준화가 엄중하게 시행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환경에 대한 의식이나 제품의 표준화가 다소 느슨한 것 같습니다.”   현재 광촉매의 세계표준규격인 ISO는 일본표준규격인 JIS를 기준으로 정해져있다. ISO 기준에 따른 광촉매제의 공기정화 시험규격(시험시료규격)에 따르면 시험 대상의 규격이 5㎝ x 10㎝이다. 하지만, 한국은 그 두 배 이상인 10㎝ x 10㎝로 광촉매제를 2배 이상 뿌려야 비슷한 효능이 나타나게 돼있다. 후지이(藤井)씨는 “세계적으로 지정된 ISO 규격을 엄격히 적용하고 규제하면서 관리해야 부작용이 없고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광촉매공업협회는 어떤 일을 할까?   일본의 광촉매공업협회가 추구하고 있는 기본 모토(motto)는 ‘광촉매와 삶의 관계를 지구환경을 위해 고심하고 있습니다’이다. 그만큼 지구환경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후지이(藤井) 부회장의 말이다.   일본 광촉매협회의 역할에 대해서 설명하는 후지이 부회장 “광촉매는 방오(防汚), 방담(防曇), 항균, 항(抗)곰팡이, 항(抗)바이러스, 공기정화, 물(水)정화 등 환경 분야의 폭넓은 응용이 가능하고, ‘지구환경의 개선’과 ‘생활환경의 향상’ ‘에너지문제 해결’ 등 인류사회의 가(加)일층 지속적 발전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각 분야에서 기대를 모으는 산화티타늄 광촉매의 용도확대를 위해서 광촉매재료 및 그것을 응용한 제품에 대해 품질·성능 향상을 위한 표준화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일반 소비자가 제품을 정확하게 선택하도록 하는 환경정비가 필요합니다.”   광촉매제의 기본적 내용을 설명한 후지이(藤井) 부회장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협회의 역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협회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협회는 광촉매제품의 표시등록제와 인증제도를 실시하고, 기본적인 표시 가이드라인을 알기 쉽게 제시해서 소비자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광촉매공업협회는 소비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광촉매제품의 표시등록제도를 다음과 같이 5개 항목의 규정으로 시행하고 있다.   첫째, 광촉매 제품의 품질과 안정성에 관한 규정둘째, 광촉매제품 인증규정셋째, 표시·용어 등에 관한 규정넷째, 마크관리운용 규정다섯째, 광촉매 제품 품질인증검사 규정이다.   일본은 이처럼 엄격한 규정에 의거해서 광촉매 제품의 규격화와 표준화를 도모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0여 년 전에 새집징후군 대책으로 광촉매제를 사용한 바 있었으나, 오히려 유해물질이 발생하는 관계로 한국광촉매협회가 해체되고 말았다. 제품에 대한 엄격한 검증과 효과 측정을 하지 못해서 소비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한 것이다. 광촉매제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지금도 광촉매에 대한 표준화가 되어있지 못해 자칫 과거 실패사례를 답습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코팅(Coating)기술의 원천은 도자기   후지이 다카하루(藤井隆治)씨가 지금 수행하고 있는 광촉매관련 업무는 운명적인 측면이 있다. 그가 도자기 마을인 규슈(九州) 사가현(佐賀縣)의 아리타(有田)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도공 이삼평(李參平)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임진왜란을 일명 ‘도자기 전쟁’으로도 부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도자기에 흠뻑 빠졌던 도자기 광(狂)이어서다. 히데요시(秀吉)는 조선의 ‘도자기를 빼앗아 가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해서 도공(陶工)들을 붙잡아 갔다. 히데요시가 조선침략 전쟁에는 실패했지만, 조선의 도공을 수 만 명이나 일본에 납치해 ‘세계적인 일본의 요업(窯業)’이라는 도자기 산업을 도입하고 맥키(Coating) 기술을 부흥시켰다.   사가현 아리타에 있는 이삼평의 비(碑)이삼평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걸쳐 두 번이나 조선에 출정했던 사가(佐賀)의 영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6-1618)’에 의해 일본에 끌려갔다. 이삼평은 나베시마(鍋島)의 명을 받아 이즈야마(泉山)에서 자기의 원료인 백자석을 발견했고, 시라카와(白川)의 덴구다니(天狗谷)에서 자기소성에 성공했다. 그 후 이삼평은 이곳에서 영주의 반열에 올라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도자기 마을 아리타에 있는 ‘도조(陶祖) 이삼평의 비(碑)’에 새겨진 글이다. 이삼평이 420여 년이 지난 오늘날도 일본인들로부터 이렇게 존경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고집스러운 장인정신으로 일본 최초로 자기(磁器)를 생산한 원조이기 때문이다. 한 도공의 기술이 발전을 거듭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운명처럼.   ‘사강 코트(Sagan Coat)’의 환경개선 대책은 무엇인가.   후지이 곤코퍼레이션 대표“2001년 도자기 고장 사가현(佐賀縣)에 주식회사 곤(鯤)코퍼레이션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회사의 광촉매기술이 ‘사강 코트(Sagan Coat)’입니다. 어느 덧 20여년의 세월이 흘렀군요.”   필자는 ‘곤(鯤)’이라는 회사의 이름에서 국제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北冥(북명)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은 곤(鯤)이다.” (북쪽 끝 캄캄한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은 곤(鯤)이다. 곤(鯤)의 크기로 말하면 그것이 몇 천리에 이르는지 알 수 없다.)   장자(莊子)의 어록과 후지이(藤井) 대표의 포부대로 곤(鯤)코퍼레이션은 한국을 비롯해서 미국, 중국, 프랑스 등 10개국에 진출해 있다.   후지이(藤井) 대표는 사가현 요업기술센터에서 개발된 과산화 티타늄계 코팅제(Coating劑)를 사업화에 성공했다. 사가현이 보유한 특허를 활용한 것이다. 그는 제품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말했다.   “오늘 국제 포럼에서도 발표한 것입니다. 저희 회사의 사업내용은 광촉매 컨디션제의 제조판매, 건축 기획설계 시공, 도자기 제조 판매 등입니다. 제품의 특징을 든다면 코팅제에 포함된 산화티타늄입니다. 이는 창모양의 액체입니다. 유기용제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산화티타늄과 물로 구성된 수분산액이지요.”   곤(鯤)코퍼레이션이 개발한 ‘사강코트 20’은 비오염코팅제 페록시티탄으로, 빛을 받으면 바로 반응이 일어나는 광촉매제이다. 즉, 빛을 받으면 유기물을 분해돼 유해물질을 제거하는 것이다.   “유사 제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길게는 2년, 심지어 6개월에도 효력이 없어지는 제품들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사강코트 20’은 20년 이상 효력이 유지되는 세계 유일의 제품입니다. 바탕 재질(모제) 훼손 없이 효과를 유지하는 것이지요. 이번 국제포럼에 제가 연사로 초청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곤코퍼레이션이 광촉재제로 시공한 후쿠오카 돔 ‘사강코트 20’은 일반건물이나 아파트의 내외벽 및 유리창 외부, 공항청사·지하철 역사·병원·학교· 유치원 등 공공 위생이 필요한 건물 내부, 태양광발전소 패널 표면, 도로 방음벽의 유리 내외부, 건물 환기구 및  진공청소기 필터·정수기와 가습기의 필터 등 적용범위가 아주 넓다.   특히, 이 제품은 창문 외벽에 있는 오염원을 분해시켰다가 비가 올 경우 오물(汚物)이 깨끗하게 씻겨 내려감으로써 투명한 상태를 유지시켜 준다.   이 회사의 제품은 우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미세먼지 대책과 탈원전·탈석탄화력발전소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보였다. 공기 중은 물론 실내의 유해 성분을 제거해 쾌적한 환경과 건강한 생활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물질을 25㎡에 적용할 경우 15년생 은행나무 1그루의 공기정화효과를 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실외보다도 학교, 병원을 포함한 공공시설 등의 실내에 적용하는 사례가 많다.   한국의 환경 정책, 전반적으로 기준을 강화해야   곤코리아가 광촉매제로 시공한 한국정보통신빌딩 “한국의 경우 각 가정의 남방시스템에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일본의 경우 방(room)만 난방시스템을 합니다만, 한국은 집안 전체를 하지 않습니까? 물론, 일본보다 더 춥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요. 이러한 전체적인 난방시스템을 위한 보일러 가동으로 인해 대기 오염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동차의 배기(排氣) 기준도 일본에 비해 ‘다소 여유롭다’습니다. 자연친화적인 에너지 환경정화 기술이 범용화 되도록 하는 규정을 강화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후지이 대표는 PM2.5의 미세먼지는 어린아이들에게 치명적이라면서, 기준강화와 대책 마련에 부심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경우 미세먼지에 의한 어린이 사망자가 많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성인보다 호흡이 빠르기 때문에 프탈레이트, 비스페놀-A와 같은 환경 유해물질에 의한 피해가 치명적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다음세대를 이어갈 주인공들입니다. 그들을 잘 보호하는 것은 우리 성인들의 책임이지요.”   후지이 대표는 ‘환경정화는 주먹구구식 정책이 아니라 매뉴얼 화를 통해서 제도적으로 안전장치를 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서울시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광촉매제품도 개선이 필요할 듯싶다. 이 제품은 이산화티타늄으로 효과를 보기에는 무척 까다롭기 때문이다. 이 제품은 또한 자체 바인더가 없어서 원재료 위에 별도의 바인더를 뿌려야 하는 등 2중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면 바인더에 뿌려진 광촉매 부분은 빛을 받지 못해서 유해물질 분해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서울시가 적용한 광촉매 아스팔트 도로도 문제가 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있다. 도로의 아스팔트가 열에 녹을 경우 광촉매제가 녹은 아스팔트에 묻혀서 빛을 발하지 못하게 돼 기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또한 ‘1톤 이상의 자동차가 지나가면 광촉매제가 유실된다’는 지적과 함께 ‘아파트의 경우도 광촉매제를 도료(塗料)에 혼합할 경우 도료에 함몰돼 본래의 효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를 든다면 유기물로 된 기본자재(모재)인 벽지나 유기물페인트 위에 광촉매차단제를 사용하지 않은 관계로 광촉매제가 오히려 원 자재를 분해함으로써 유해물질 방출을 부추기는 것이다.   미세먼지 대책은 단순한 지식이나 유사 제품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미세먼지의 실질적인 대책 수립을 위해서는 정부·지자체·협회·기업 등 모든 관계자들의 중지(衆智)를 집결시킴은 물론 해외에서 채택되고 있는 기술과 제품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를 교훈삼아 더 이상 그런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으려면, 현재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광촉매제 도입 초기부터 정확한 표준을 정해 철저히 관리하고 결과를 감시하는 시스템이 절실히 필요하다.

장상인

-커피의 메카로 우뚝서다   커피는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니다. 커피콩(豆) 한 알 한 알에는 가난한 원주민들의 삶과 고뇌와 전통과 문화가 눈물처럼 배어 있다. 그리고, 배에 실려 지구촌 곳곳으로 팔려가는 커피콩의 여정도 난마(亂麻)처럼 얽혀있다.   필자는 2011년 식인종의 나라로 소문난 파푸아뉴기니의 커피 농장 취재를 계기로 ‘커피가 단순히 즐겨 마시는 음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커피 콩을 따는 파푸아뉴기인들의 모습더불어 프랑스 백작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의 말처럼 커피의 유혹에 빠져들었다.   “커피의 본능은 유혹. 진한 향기는 와인보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은 키스보다 황홀하다. 좋은 커피란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겁고, 천사처럼 순수하고, 그리고 사랑처럼 달콤하다.”   UCC본사와 커피 박물관내친김에 일본의 고베(神戶)에 있는 ‘UCC 커피 박물관’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이 박물관은 ‘UCC’ 커피회사가 1987년에 설립한 곳으로 기업 소유시설이다. 박물관장의 인사말을 다시금 옮겨본다.     필자는 ‘자연의 풍부한 은혜와 커피(나무)를 키우는 사람들의 훌륭한 지혜와 창조력을 느끼라’는 말에 특히 공감이 갔다.   바다와 함께하는 커피 거리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강릉 커피거리삼일절 연휴를 맞아 강릉의 커피거리를 찾았다. 안목 항(港) 근처에 다다르자 서울의 러시아워보다 차량들이 많았다. 주차 공간을 확보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가까스로 커피숍 뒤편에 숨어있는 주차공간에 차를 대는 행운을 얻었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 쪽은 일층, 이층, 삼층 모두 선점돼 있었다.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비즈니스 석(?) 정도에 자리를 잡았다. 이 또한 행운이었다.   “독도는 우리 땅!”   삼일절 100주년을 맞아서인지 안목 항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오가는 여객선의 옆구리에 붙어 있는 슬로건이 더욱 진하게 다가왔다.   드넓은 백사장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젊은 청춘 남녀들은 모래밭에 털썩 주저앉았으며, 어린아이들과 강아지들은 아예 뒹굴었다. 바다 저 멀리에 하얀 돛을 단 요트들은 유유자적 흐름을 이어갔으나, 물살을 가르며 곡예하는 제트보트들은 인정사정없이 갈매기들을 허공으로 내몰았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모든 것이 신선하고 감동적이었다. 진한 커피 향처럼.   산골짜기의 커피 박물관으로 달려   카페라테(Cafe Latte) 한잔을 길게 마시고서 승용차로 8분 거리의 ‘커피커퍼 뮤지엄’을 뒤로하고 강릉시 왕산면(王山面)에 있는 ‘커피 박물관’으로 달렸다. 친절한 내비게이션은 ‘33분 걸린다’고 안내했다. 강릉사람들이 알고 있는 왕산은 외진 산골이다. 하지만, 이곳은 고려 32대 우왕(禑王, 1365-1389)이 유배됐던 관계로 ‘제왕산(帝王山)’으로 불렸다. 후일 ‘왕산(王山)’이 된 것이다.   왕산으로 가는 길은 좁았으나 길목마다 매화가 반겼고, 목련들은 꽃망울을 터트리기 위한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다. 계곡을 흐르는 물줄기들도 봄이 왔음을 알리는 듯 ‘콸콸’ 활기가 넘쳤다. 자연을 즐기며 달린 관계로 지루함 없이 커피 박물관에 도착했다. 박물관은 산 속 깊은 곳에 다소곳히 자리하고 있었다.   커피커퍼 커피박물관(왕산점)‘대한민국은 커피 공화국이다?’   필자는 자연이 아름다운 것에 놀랐고, 산 속의 커피 박물관에 관람객들이 많음에 한 번 더 놀랐다.   2000년에 설립된 박물관의 공식 명칭은 ‘커피커퍼 커피박물관(Coffee Cupper Coffee Museum)’- 2011년 문화관광부에 등록되기도 했다.   1900년대 미국에서 사용된 커피머신‘커피커퍼(Coffee Cupper)’는 커피감별사의 의미와 ‘커피커핑(Coffee Cupping)’ 전문가를 지칭하기도 한다.   커피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 1관은 가화(Gahwah)·카화(Qahwah)·카베(Kahve)·카페(Cafe)· 아라비아 와인 등 커피의 어원에서부터 커피의 역사가 자세하게 전시돼 있었다.   커피 로스터 & 그라인더를 소개한 2관은 초기의 로스터기를 시작으로 180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사용됐던 커피 로스터 등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커피 추출관인 3관은 우수한 성능과 다양한 기능을 가진 커피 추출도구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놨다. 세계 각국의 커피 추출도구들이 각기 다른 모양새를 선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커피나무가 자라고 있는 4관-관광객들이 커피 묘목을 살펴보고 있다  커피나무 재배관인 4관은 1만여 그루의 커피나무들이 키 재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기후 상, 커피나무가 자라기 어렵다. 하지만, 요즈음은 ‘관계자들의 지혜와 창조력과 열정’으로 커피나무가 재배되고 있다. 과거와 달리 국산 커피콩의 생산량도 제법 많다. 커피 시음과 뮤지엄샵으로 구성된 5관에는 커피와 관련한 각종 용품들이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연간 4-5만여 명이 찾는 관광명소   이 박물관은 연간 10만 여명이 다녀갔으나, 요즈음은 4-5만 여명이 찾는단다. 유사한 시설들이 여기저기 생겨난 이유이기도 하다. ‘커피커퍼 뮤지엄 경포 본점’도 같은 맥락일 수 있다. 교통이 편리하고 건물이 스마트하기 때문이다.   Coffee Cupper  Museum엑스프레소(Expresso) 한잔을 마신 필자는 다시 차를 돌려서 ‘커피커퍼 뮤지엄(경포 본점)’으로 향했다. 강릉 시내는 여전히 차량들이 많았다. 해안 쪽으로 다가가자 소나무 숲 앞길에 멋진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경포 본점은 영어로 ‘Coffee Cupper Museum’이라고 쓰여 있었다. 뮤지엄 안으로 들어갔다.   1층은 로스터리 카페, 2층은 아트 갤러리, 3층은 커피의 기원과 커피 로스터 & 그라인더관, 5층은 커피메이커스 관(館)으로 구성돼 있었다. 왕산점보다 더 많은 커피도구들이 세련미를 과시하고 있었다. 핸드드립, 초콜릿 만들기, 나만의 컵 만들기 등 체험관도 인기 만점이었다.   ‘이토록 많은 커피 관련 도구들을 어떻게 모을 수 있었을까?’   커피앤틱 수집가인 김준영 씨의 열정에 의해서다. 그는 강릉 커피 박물관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그가 이러한 도구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의 저자 이태리의 ‘엔리코 말토니(Enrico Maltoni)’와의 운명적인 만남도 큰 힘이 됐다. ‘엔리코 말토니’는 세계 곳곳에 산재한 에스프레소 머신을 한자리에 결집시킨 수집가로 유명하다. 그와의 인연으로 김준영 씨는 2014년 의  번역서도 출간했다. 이 책에는 2,700개의 커피메이커의 이미지와 2,080개의 기술묘사, 커피 메이커에 대한 역사가 세세하게 담겨있다.   커피 내리는 박물관장...먼 길 손님에게 맛있는 커피 제공한다   최금정 대표필자가 종업원에게 ‘최 대표가 근무하는 사무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아뿔싸! 최 대표는 1층 로스터리 카페에서 직접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박물관 대표가 커피를 직접 내린다?’ 이유는 간단했다.   “서울에서 오시는 손님들의 경우 5-6시간 차를 타시고서 먼 길을 오시지 않습니까? 그분들에게 맛있는 커피를 제공해 드리기 위해서 시간이 허락하는 한 직접 커피를 내립니다.”   대답이 커피처럼 따뜻했다. 최금정 대표가 안목 항에서 커피숍 1호점을 낸 이유도 심플했다.   “바다가 아름답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면서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장소-  ‘그곳이 바로 여기다’라고 생각하고 커피숍을 차렸습니다.”   그렇다. 한 여인의 소박한 생각이 밀알이 되어 오늘날 ‘강릉 커피거리’라는 관광명소로 우뚝 선 것이다.   “커피 맛이 너무 황홀해서 마치 컵 안에서 신의 얼굴을 본 것 같았다”는 마이클 와이즈먼의 저서 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Coffee Cupper Museum’을 나왔다. 경포 해변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했다.

장상인

-짧은 생(生)에 512편의 시(詩)를 남겨   일본 내해의 관문인 시모노세키(下關)의 간몬대교(關門大橋) 상공을 하얀 구름들이 무리지어 어디론가 몰려갔다.     구름들의 흐름을 보면서 ‘겨울이 달아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던 필자는 ‘가메야마하치만구(亀山八幡宮)’ 앞길을 걸었다. 바람은 거셌으나 바다는 잔잔했고, 하늘도 맑았다.   길을 가던 중 우연히, 가네코 미스즈(金子みすゞ)의 시비(詩碑)와 눈이 마주쳤다. 발걸음을 멈추고서 시(詩)를 읽었다. 제목은 였다.     두루미야.     네가 보면  세계의 모든 것은  무엇이든, 그물코가 쳐져 있겠지     저렇게 맑은 하늘에도  자그마한 나의 얼굴에도     신사 연못의    두루미가   그물 속에서 조용히   깃을 칠 때에     산 너머 저 쪽을   기차가 갔다.>     가네코 미스즈와 시모노세키는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가네코 미스즈’는 1903년 4월 11일 태어나서 1930년  3월 10일 사망한 일본의 동요 시인이다. 그녀는 26세라는 젊은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512편의 시를 썼다. 1923년 9월 ‘동화’ ‘여성 클럽’ ‘부인 화보’ ‘돈의 별’ 등 네 개의 잡지에 시를 게재해 이름을 날렸다.   ‘미스즈’의 시비가 ‘가메야마하치만구’ 앞에 세워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망 전날인 3월 9일 ‘가메야마하치만구’ 옆에 있던 미요시(三好)사진관에서 마지막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란다.   시비 옆에는 또 다른 시 가 있었다.       가네코 미스즈(사진: JULA 출판사/도쿄)   풍선,  가스 등불 비치네.     그림자 등롱(燈籠)속  사람처럼,  얼음장수 목소리가 사무치도다.     희읍스름  은하수,  여름나기 축제의 밤이 깊도다.     네거리를 돌아서면  풍선,  별밤에 어두워 지누나.>   가네코는 야마쿠치현(山口県) 나가토시(長門市)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녀가 3살 때 청나라에서 불의의 죽음을 맞았다. 청나라 국영 서점(上山文英堂) 시모노세키 지점장 시절이었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인해 시모노세키에 이주해서 살았다.   1926년 삼촌이 경영하는 서점의 점장 격인 남자와 결혼하고서 딸 하나를 낳았다. 그러나, 남편은 삼촌과의 불화로 서점에서 해고됐다. 자포자기(自暴自棄)한 남편의 방탕한 생활을 참다못해 1930년 2월 이혼했다. 딸의 양육문제로 이혼한 남편과 다투다가 반항하는 의미에서 음독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했다. “어머니! 아이를 부탁합니다.”는 유서를 남기고서.   마음이 따뜻한 시인으로 사후(死後)에 더 유명해   대표작으로는 와 등이 있다. 그녀의 고향은 예로부터 어부의 마을이었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누구에게나 상냥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동요를 쓰기 시작한 것은 20살 때부터였다. 그리고, 오랜 세월 묻혀 있던 가네코의 작품은 아동 문학가 야자키 세쓰오(矢崎節夫·72)씨에 의해서 알려졌다. 그는 나가토시에 있는 ‘가네코 미스즈 기념관’의 관장 직을 맡고 있다. 그의 열정에 의해 ‘미스즈’의 시(詩)가 세상 밖으로 나왔고,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게 됐던 것이다.   “미스즈는 천재 동요 시인입니다. 자연의 풍경을 부드럽게 응시하는 그녀의 작품들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교 1학년 시절  미스즈의라는 시에 강렬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야자키 세쓰오 씨의 말이다. 그가 매료됐다는 시 를 소개한다.     풍어다.  참정어리  풍어다.     항구는 축제로  들떠 있지만  바다 속에서는   몇 만 마리  정어리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겠지.>   야자키(矢崎) 관장은 2월을 맞아 기념관의 홈페이지에 라는 ‘미스즈’의 시와 함께 다음과 같은 칼럼을 썼다.   야자키 세쓰오 관장(사진: JULA 출판사/도쿄)   쌀은 사람이 만들어 주지  소는 목장에서 길러주지  잉어도 연못에서 길러주지  잉어도 연못에서 밀기울을 받아먹는다.     그렇지만 바다의 물고기는  아무한테도 신세지지 않고  심술 한 번 부리지 않는데  이렇게 나에게 먹힌다.  정말로 물고기는 가엾다.>   “가네코 미즈즈의 ‘물고기’를 읽으면 같은 야마구치 출신인 마도 미치오(본명, 石田 道雄1909-2014)씨의 이 기억납니다...미스즈 씨는 ‘사람이 싫어하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라고 여자 동창생들이 말했다고 합니다. 마도 씨도 언제나 상대를 염려하는 말을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무심코 ‘건강했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마도 씨는 ‘변함이 없네?’라고 말합니다. ‘건강’과 ‘변함없는’의 말은 같은 듯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변함없는’이 훨씬 폭이 넓고 기쁜 마음이 될 것입니다. 추운 2월입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변함없이’ 보내시기 바랍니다.”   누구의 신세도 지지 않고, 심술 한 번 부리지 않았는데 잡아먹히는 물고기 같은 억울한 사람들이 우리의 주변에도 많다. 억울한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말 한마디라도.

장상인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어   우리나라는 지금 성추행, 성폭행 등의 문제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그토록 잘난 사람들이 이토록 추락할 수가 있을까? 누구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로 비춰지고 있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작금의 상황을 보면서 420여 년 전 일본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다시금 들여다 본다(필자 칼럼 2018. 3. 27자 참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맞선 조선 여인   슨푸성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상 “이럴 수가 있을까?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얼굴을 똑바로 들고서 대답하다니...놀라운 일이로다.”   슨푸성(駿府城)의 문무백관을 비롯해서 궁녀들까지 혀를 내둘렀다. ‘오타 줄리아’가 나르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일본 최고 권력자와 맞대응을 하고 있어 서다. 이에야스(家康)가 목청을 높였다.   “저 아이를 멀리 바다 한 가운데의 섬으로 보내버려라.”   이에야스(德川家康)가 화를 낸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측실이 되라’는 것과 ‘종교(기독교)를 버리라’는 두 가지 제안을 ‘줄리아’가 한 마디로 거절했기 때문이다.   오시마로 유배 길을 떠나다   오타 줄리아의 초상화 결국 ‘오타 줄리아’는 이에야스(家康)의 명(命)에 의해 슨푸성(駿府城)을 떠나 이즈(伊豆)제도의 섬 오시마(大島)에 유배를 가게 됐다. 1612년 3월 20일의 일이다.   그녀는 임진왜란 때 평양성 근처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포로로 일본에 끌려가서 그의 양녀로 자랐다. 6-7세 때 모레홍 신부에 의해 ‘줄리아’라는 세례명이 붙여졌다. 또 하나의 우연한 일이 있다.   네가 없는 오오 세상 속은 아침 해 조차 떠오르지 않아   (...)   불타라 여름의 십자가 남쪽하늘 높이밤의 어둠을 비추는 별자리는 눈물의 상들리에마치 무지개처럼 꿈으로 사라진 줄리아.   (...)   사랑의 끝을 알리듯이 찢겨진 나의 로자리오>   일본의 유명 밴드 ‘서던 올 스타스(Southern All Stars)’가 예로부터 내려온 전설을 토대로 작사·작곡한 노래 ‘꿈으로 사라진 줄리아’이다. 무심코 노래를 하던 그들도 아연실색(啞然失色)했다. 전설이 아닌 실제로 존재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 석등과 만나다   필자는 ‘줄리아가 슨푸성(駿府城) 한 구석에 있는 석등에 남몰래 기도하면서 살았다’는 기록을 접하던 중, 일본 여행 중에 시즈오카(靜岡)의 호다이인(寶台院)이라는 절(寺)을 찾았다. 한적한 경내에서 할머니 한 사람이 석등에 물을 뿌리면서 청소하고 있었다. 필자는 청소하는 할머니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할머니! 이 석등이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나요?”“글쎄요.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그래요?”   오타 줄리아가 실제로 기도했던 크리스천 석등이때 호다이인(寶台院)의 주지스님이 필자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오타 줄리아에 대해서 잘 아시나요?”“네. 10년 전부터 연구하고 있습니다.”“그런데...어디서 오셨나요?‘“한국의 서울에서 왔습니다.”“서울에서요?”“네. 그렇습니다.”   필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놀라던 주지 스님은 ‘오타 줄리아’가 기도했던 석등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를 보세요.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아무도 모르게 사각형 돌(石)에 약간의 돌출을 했습니다. 그 아래 ‘성모 마리아 상(像)’이 새겨져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 상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땅속에 묻었던 것입니다.”  “그렇군요. 놀라운 일이군요. 그런데, 이 석등을 누가 만들었나요?” “안내문에 쓰여 있는 바와 같이 전국시대의 무장이자 다인(茶人)인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 1544-1615)’ 선생이 만들었습니다.”   줄리아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 시간을 이용해서 성경책을 읽고, 또 기도했다. 그런 가운데 줄리아는 천주교와 적대적인 도쿠가와(德川)나 이교도들의 눈을 피해야 할 기도단(외형은 봉양탑)이 필요했다. 그녀는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 씨에게 기도단 제작을 부탁했던 것이다.  줄리아의 마지막 삶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가 처형을 당한 후 슨푸성에서 기거하게 된 ‘줄리아’는 외부의 신부들과 자주 접촉하지 못해서 석등에 기도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그리고서 유배지(神津島)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오랜 세월 보내다가 하늘나라로 갔다. ‘줄리아’가 눈을 감은 날 어디선가 천사들의 노래가 들려왔을 듯싶다.   줄리아의 마지막 유배지 고즈시마저 동편하늘 환히 밝아오고, 새들은 깨어 노래 부른다. 저 풀잎에 찬이슬. 고요한 아침 다함께 모여 경배 드린다.   어두운 밤 지나 찬란한 이 아침.나 삶의 그늘 벗어나리라.저 하늘 드맑고 참 아름다워,잠깨면 기뻐 주와 만나리.   시달린 이 몸 고달파서 쉴 때나 눈을 감고 주를 뵙는다. 저 땅위의 참 기쁨 새롭게 솟아,나 주와 함께 길이 살리라.                                                                 * 

장상인

-시모노세키(下關)에서 만난 ‘다카스기 신사쿠’     시모노세키(下關)의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야마구치의 관광가이드 팸플릿’에 들어 있는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1839-1867)에 대한 안내의 글이다.   히요리야마(日和山) 공원의 동상   다카스기 신사쿠는 혁명가, 풍운아, 폭주남(暴走男) 등 여러 개의 별명이 붙은 젊은 청년이었다. 그만큼 카리스마가 넘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시간 절약을 위해 택시를 이용해서 그의 동상이 있는 히요리야마(日和山) 공원으로 달렸다.   다카스기 신사쿠의 동상벚꽃의 명소로 알려진 히요리야마 공원은 멀리 ‘간몬해협’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공원의 중앙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높이 4.2m로 키가 컸다. ‘1936년 그의 70주기를 기념해서 세웠으나, 1956년 90주기에 도자기 동상을 새로이 건립했다’고 쓰여 있었다. ‘도자기 동상은 오카야마 비젠요(備前焼)에서 약 반년에 걸쳐 제작된 것’이라는 안내문도 있었다.   허리에 칼을 차고 왼 손에  칼을 들고 있는 전설적인 다카스기 신사쿠-동상에서도 젊은 혈기가 느껴졌다.   거센 바람 때문에 길게 머물지 못하고 기다리던 택시를 타고서 그가 기병대(奇兵隊, 기이한 군대라는 뜻)를 조직했던 시라이시 쇼이치로(白石正一郞, 1812-1880) 유적지로 갔다. 유적지는 큰 길 옆 코너에 있었다.   기병대를 창설한 역사의 현장   시라이시 쇼이치로 저택이 있었던 곳시라이시 쇼이치로는 자영업으로 부를 축적한 호상이었다. 시라이시(白石)는 신사쿠(晉作)를 비롯한 유신의 지사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기병대는 1863년 6월 8일 그의 저택에서 결성됐다.     역사 전문가 성희엽(55) 박사의 저서 에 들어 있는 기병대에 관한 내용이다. 성 박사는 “기병대는 신분제를 벗어나 구성된 최초의 군대 조직으로 제대(諸隊)라고 불렀다”면서 “제대는 사무라이(侍)만으로 편성되는 봉건 군대와 달리 사무라이와 평민이 동참한 혼성부대였다”고 했다.   막부의 조슈(長州) 정벌이 시작되자 번(藩)은 좌우로 갈라졌다. 그래서 다카스기 신사쿠는 1864년 12월에 거병했다. 여러 기병대들의 호응을 얻은 신사쿠는 시모노세키 점령에 성공했다.   다카스기 신사쿠는 야마구치의 하기(萩)에서 태어났다. 열혈 팬도 많고 전설적인 에피소드도 많다. 하지만 생은 짧았다.   다카스기 신사쿠의 마지막 흔적   다카스기가 요양하던 곳다카스기 신사쿠는 고쿠라(小倉)전쟁에서 조슈군을 지휘하고 막부군과 싸우다가 지병인 결핵이 악화됐다. 사쿠라야마(桜山) 신사 근처에 작은 집을 짓고 요양생활을 했다. 舊요양지는 작은 골목길 비탈길에 있었다. 비(碑)에는 칠언절구의 한시(漢詩)가 새겨져 있었다.   흩어져가는 꽃도 가라앉는 석양도 원한은 끝이 없구나.병으로 쇠약해지는 몸에 한탄하고 있는 것이 부끄럽도다.사쿠라야마에 이주한 것을 의심하지 않기 바란다.아침저녁 사당(廟) 앞의 낙엽을 쓸고 싶어라.   신사쿠가 병마에 시달리면서 요양을 하던 곳에서 한시를 풀어본 필자는, 그가 생을 마감한 흔적을 찾기 위해서 다시 택시를 탔다. 하지만, 택시 운전사도 쉽게 찾지 못했다. 차를 세우고서 지나가던 사람을 붙들고 물었으나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하던 운전사가 시모노세키 시청 관광과 직원과 통화하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한적한 골목길로 안내했다.   다카스기 신사쿠 종언(終焉)의 지(地)-   그곳 역시 찾는 사람은 없었으나 다녀간 흔적은 엿보였다. 안내문을 통해 그의 생애를 정리해 봤다.   신사쿠가 생을 마감한 곳(1)   신사쿠가 생을 마감한 곳(2)다카스기 신사쿠는 ‘재미없는 세상을 재미있게’라는 말을 남기고 메이지 유신(1868) 일년 전 하늘나라로 훌쩍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메이지 유신은 경제적·사회적·문화적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침략의 씨앗이 발아(發芽)되기도 했다.   ‘지금의 일본은 재미없는 세상일까? 재미있는 세상일까?’   필자는 ‘다카스기 신사쿠’가 생을 마감했던 장소에서 답을 얻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비록 일본인이지만 ‘재미없는 세상을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서 과감하게 막부와 맞선 젊은 혈기가  남달랐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필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장상인

-단노우라(壇ノ浦) 전투에서 패한 헤이케(平家)이야기   야마구치(山口)의 시모노세키(下關)에 아카마(赤間) 신궁이 있다. 이 신궁은 여덟 살 나이로 생을 마감한 안토쿠(安德王: 재위 1180-1185)왕의 위패가 있다. 그는 헤이안(平安, 794-1185)시대의 무장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의 외손자로, 무사집단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가 최후의 전투를 벌인 ‘단노우라(壇ノ浦)’에서 가문이 패하자 가족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다. ‘단노우라’가 바로 시모노세키의 간몬해협(關門海峽)에 있다.   아카마 신궁의 전경 아카마 신궁 앞 해안에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녹슨 닻(碇)이 하나 있다.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가 싸운 ‘겐페이(源平)전투’ 800년을 기념해서 시모노세키(下關)해양소년단이 세운 것이다. 안내문을 들여다봤다.   시모노세키 해양단이 세운 닻(碇)   닻의 유래를 쓴 안내문   이 전투는 일본 역사에서 한 획을 그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겐지(源氏) 가문의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 1147-1199)가 1192년 가마쿠라(鎌倉)에 바쿠후(幕府)를 설치해서 무인 정치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로써 바쿠후는 에도(江戶)시대까지 약 700년 간 지속됐다.   노가쿠(能樂) 이카리카즈키(碇潜)와 단노우라(壇の浦)   ‘닻(碇)’의 옆에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노가쿠(能樂)보존위원회의 ‘헤이케이야기(平家物語)’에 대한 안내문이 있다.   헤이케 이야기의 안내문   고기잡이 노인은 다이라노 도모모리(平知盛)의 유령이 노도노카미노리쓰네(能登守教経)의 분전과 장렬한 최후를 자세히 이야기하며 위로한다.   ‘객승’의 불공에 의해 유도되는 것처럼 용장 도모모리(知盛)의 모습이 나타나 안토쿠(安徳)천황을 비롯해서 일가족 모두가 물에 빠질 때까지의 경과와 자신의 치열한 전투 장면이나 닻을 메고 바다에 뛰어든 도모모리의 환영(幻影)을 객승이 본 것이었다. ‘헤이케이야기’는 이렇게 구성된 후나벤케이(舟弁慶: 만담의 일종)류의 곡이다. 단노우라는 급류로 알려진 간몬해협 하야토모(早鞆)의 세토에 접한 일대이면서도, 헤이케 멸망의 비애와 그 마지막을 아름답게 묘사한 총사(総帥)의 면모와 정취가 연상되게 하는 해안이다.>   기원정사(祈園精舍)의 종소리, 제행무상(諸行無常)울림 있어   조선통신사 상륙 기념비가 있는 공원 입구 필자가 조선통신사 기념비로 가던 공원의 입구에 할머니인지 어머니인지 알 수 없는 여인이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조각품이 있었다. 조각품 앞에서 어린 두 딸과 함께 사진을 찍던 젊은 여인이 목례를 해서 말을 건넸다.   다이라노 도키코와 안토쿠왕의 입수상(入水像) “이 근처에 사십니까?”“아닙니다. 시모노세키 도심에 살고 있습니다.”“조선통신사 기념비에는 무슨 이유로 오셨나요?”“아닙니다. 저는 아이들과 함께 오랜 역사의 현장 ‘단노우라’를 보기 위해서 왔습니다.”   일본 여인과 필자의 생각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 필자가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동상은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가 최후의 전투를 벌인 ‘단노우라(檀ノ浦)’에서 패해 안토쿠(安徳)왕의 할머니인 다이라노 도키코(平 時子, 1126-1185)가 손자를 안고 바다에 몸을 던진 것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동상의 받침대에는 헤이케이야기(平家物語) 제1구(句) 기원정사(祇園精舎)가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헤이케이야기 제1구 기온정사 작자미상의 (오찬욱 譯) 1권 기원정사에는 다음과 같이 자세히 풀이돼 있다. 평이(平易)하면서도 삶의 이치가 담겨있는 문장이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시사(示唆)하는 바가 컸다. ‘성한자도 쇠(衰)하고, 교만한 자도 오래가지 못하며, 강한자도 멸망하니, 오로지 바람 앞의 티끌과 같도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토록 욕심을 부리는 것일까? 순간 간몬해협으로부터 불어 닥친 겨울 바람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거셌다. 필자는 몸을 웅크리면서 풀어헤쳤던 목도리를 칭칭 감고서 가라토(唐戶)시장 건물 내부를 향해서 줄달음쳤다. ‘필자 역시 바람 앞의 티끌이로다.’

장상인

-영원한 '아시아 선교의 아버지'   시모노세키(下關)의 가라토(唐戶) 정류장에서 내리면 붉은 벽돌의 서양식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1906년에 지어진 舊영국 영사관 건물이다.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옛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거기에서 육교를 건너면 가라토 시장으로 이어지는 해변이 나온다. 아침 이른 시각인데도 국적불문, 가라토 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필자는 그들과 섞이어 시장으로 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아니? 여기에 하비에르의 기념비가?’   하비에르 상륙 비(碑)필자가 평소 관심이 많았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1506-1552)의 기념비가 있어서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했다.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1550년 가을 시모노세키(下關)에 이방인(異邦人)이 상륙했다. 그의 이름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좌측 기념비의 글   짧은 글속에 그의 업적과 신앙심 그리고, 인간미가 녹아 있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49년 8월 15일 일본의 가고시마(鹿児島)에 첫발을 내딛었다. 동행자는 코스메 드 토레스(Cosme de Torres)신부와 후안 페르난데스(Juan Fernandez)수사 등이었다. 9월 29일 사쓰마(薩摩)의 다이묘(大名)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 1514-1571)를 알현했으나 포교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듣지 못했다. 2개월 정도 머물다가 나가사키(長崎)의 히라도(平戸)에 갔고, 거기에서 육로로 규슈의 부젠(豊前)으로 갔다. 그리고, 간몬해협을 거쳐서 시모노세키에 상륙했다. 1551년 4월 말 야마구치(山口)의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大內義隆, 1507-1551)를 만나서 선교 허가를 받는데 성공했다.   야마구치에서 500여 명 세례 해   역사학자 고노이 다카시(五野井隆史·78) 박사는 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 책은 ‘하비에르가 2개월여 만에 야마구치에서 500여 명에게 세례를 주는 커다란 성과를 도출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 당시의 상황에서 보면 놀라운 성과였다. 특히, 하비에르는 ‘설교보다는 성덕과 모범을 보이며 선교에 힘썼다’고 한다. 시모노세키 상륙 450주년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에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위대한 정신과 행동력에 의해서 덕(德)을 봤던 것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고노이(五野) 박사의 저서에는 1552년 1월 29일자 유럽의 동료에게 보낸 하비에르의 편지가 소개돼 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의 생에 있어서 이만한 정도의 기쁨과 영적인 만족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하비에르 성(城)의 돌   하비에르 성의 돌기념비의 오른쪽에 작은 돌 하나가 받침대 위에 놓여있었다. 타이틀은 ‘하비에르성(城)의 돌.’ 돌 하단에는 마태(마태오)복음 16장 26절이 새겨져 있었다.   “만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하비에르 성의 돌은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왔을까?’   하비에르는 1506년  나바라(지금의 스페인)왕국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돌은 그가 태어난 스페인의 하비에르 성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는 파리대학교와 성 바르브학교(1530년 입학) 학생시절 예수회 창립 7인 멤버가 됐다.  성직자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게 된 하비에르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1542년 5월 6일 인도의 고아(Gôa)에 가서 가톨릭 교리 해설서와 성가를 현지말로 번역하는 등 활발한 선교활동을 했으며,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고아(Gôa)대학교를 설립했다.   1550년 시모노세키에 상륙해서 야마구치에서 5개월간 선교 활동을 하던 하비에르는 중국인들의 전도를 위해 1551년 뱃길에 올랐다. 1552년 11월 21일 중국에서 장례 미사 집전 후 열병으로 쓰러져 그해 12월 3일 세상을 떠났다.   필자는 ‘만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의 성경 구절이 기념비에 새겨진 이유에 대해서 고개가 끄덕여 졌다.    그는 세상을 떠난 70년 후인 1622년 3월 성인으로 시성됐다. 야마구치를 비롯헤서 가고시마, 나가사키, 오이타 등 일본의 곳곳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도자키(堂崎)의 나루터 흔적   나루터의 흔적을 알리는 비(碑)   여기는 일본 최초로 그리스도교와 서양문화를 전한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나가사키에서 순교한 26성인, 막부(幕府)의 사상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과 지사(志士)  다카스기 신사쿠(高彬晉作, 1839-1867) 등 많은 유명무명(有名無名)의 사람들이 이 나루터의 돌계단을 밟으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것이다.>   유명무명의 사람들 중에는 강제적으로 이 나루터의 돌계단을 밟아야 했던 억울한 조선의 무명인(無名人)들도 많았을 것이다.   *참고문헌:  

장상인

-복어의 본고장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윙윙)울리는 스크루(screw)-간몬해협(關門海峽)/ 나의 배(腹)에 두른 빛바랜 천이 젖는구나/ 나와 네가 히레자케(鰭酒)를 마시도다/ 간장에 얼어붙었는가, 진눈개비 눈(雪)인가/ 아-아-아- 바라보는 남자끼리 눈(目)이 젖도다.”   시모노세키(下關) 출신 가수 야마모토 죠지(山本讓二·68)의 노래 을 흥얼거리며 가라토(唐戸)에 갔다. 10년 만의 발걸음이다. 노래에서 나오는 히레자케(鰭酒)는 복어의 마른 지느러미를 태워서 넣는 따끈한 사케(酒)를 일컫는다.   해협에 접해 있는 가라토 지역은 예로부터 교통의 중심지였고, 메이지(明治, 1868-1912)시대에는 해외 무역의 거점이었다. 그 시절 각국의 영사관과 외국 무역 기관·은행들이 속속 들어섰다.   1909년 가라토의 길거리에서 야채·과일 등 식료품을 판매하기 시작했고, 1924년 어시장(魚市場)이 생겨났다. 1933년 지금의 가라토 시장의 기반인 어류와 야채시장이 개장했다. 1976년 식료품 유통 센터가 문을 열었고, 1979년 현지 생산자를 중심으로 하는 아침(새벽) 시장이 열렸다.   가라토 시장의 외관2009년 개장 100주년을 맞아 수족관·해향관(海響館)·가몬와후(Kamonwafu)와 함께 시모노세키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발돋움했다. 100여 개의 가게가 들어서 있는 가라토 시장(市場)은 시모노세키 시(市)가 건물 등 시설물을 직접 관리하고 있다.   복어는 생선의 왕자로 최고의 맛   복어의 독과 맛에 대한 안내문“독소(毒素)를 밝혀내는 지식과 기술의 향상에 의해 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담백한 맛은 생선 중의 왕자로 일컬어지는 최고입니다. ‘복어(河豚)를 드시지 않는 사람과는 통하지 않습니다.’ 복어의 시모노세키(下關).”   ‘복어의 독(毒)에 대해 불안해하지 말고 마음껏 먹으라는 것’과 ‘시모노세키에서 복어를 먹지 않는 사람과는 통하지 않는다’는 진지하면서도 익살스러운 협동조합의 안내문이다.   “복어는 먹고 싶으나 목숨이 아깝구나.”   복어에 대한 일본의 속담이다. 일본에서도 복어를 잘못 먹고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복어의 내장과 혈액 등에 함유된 테트로도톡신(tetrodotoxin)때문이다. 테트로도톡신(화학식: C11H17N3O8)은 신경에 작용하는 독의 일종이다. 테트로도톡신이라는 이름은 독성 물질을 지니고 있는 복어류의 학명에서 따왔다.   복어의 독은 ‘복어 자신이 독을 생성한다’는 설(説)이 우세하다. 하지만, 먹이 등 외부에서 받아 들여 지는 것으로 보는 외인설(外因説)도 만만치 않다. ‘바다의 세균에 의해 만들어지고, 먹이 사슬을 통해 복어의 체내에 축적된다’는 것이다. 독성이 있는 조류 등 유독 플랑크톤이나 슈도모나스(pseudomonas)의 일부 세균, 먹이가 되는 조개와 불가사리 등이 농축돼 체내에 축적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아무튼, 복어의 체내에 들어있는 독을 제거하는 전문 기술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렇게 독이 제거된 복어는 시장에서 얇고 예쁘게 포장돼서 판매되고 있다. 가격은 다양하다. 2인분이 13,000엔(한화 13만원), 3인분이 20,000엔(20만원), 5인분이 26,000엔(26만원)이다. 복어를 사는 것보다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복어의 익살스러운 캐릭터 인기 만점   인간복어의 캐릭터가 걸려있는 어시장 내부가라토 어시장에는 곳곳에 복어의 캐릭터가 걸려 있다. 하나같이 귀엽다. 그 중에서 ‘복어 인간’ 캐릭터가 시선을 끈다.   ‘그는 누구일까.’   주인공은 아역배우 스즈키 후쿠(鈴木福·14)군이다. 2006년 NHK 예능으로 데뷔해서, 2010년 동(同) 방송의 TV소설에 이어 영화에도 출연한 인기 아역 배우가 됐다.   “후쿠입니다.”   가라토 해변에 있는 '후쿠'의 캐릭터 시모노세키의 ‘후쿠(복어)’와 그의 이름이 ‘후쿠(福)’인 점이 맞아 떨어진 듯싶다. 그의 얼굴과 복어의 몸통인 캐릭터는 해변은 물론 복어를 파는 가게의 입구에도 어김없이 붙어 있다. 그는 언제부터 복어의 모델이 됐을까.   음식점 입구의 문에 붙어 있는 '후쿠'의 캐릭터“유명 아역배우인 후쿠(福)군은 2018년 9월부터 복어 캐릭터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기 때문에 시모노세키의 복어가 더욱 유명해지고 있습니다.”   시모노세키 시청 직원 이노우에 야쓰히로(井上康博) 씨의 말이다.   최근에 제작된 파격적인 동영상과 후쿠(福) 군이 직접 부른 노래도 인기 만점이다. 제목은 .   “복어 복어 뻐끔뻐끔 천국의 맛 복어 복어 뻐끔뻐끔 행복의 맛 맛이 있으나 있거든요. 복어에는 독이 그래도 역시나 먹고 싶어요.(생략)”   복어 식해금(食解禁) 130년을 알리는 포스터이 노래에는 맛뿐이 아니라 복어에 대한 역사와 문화까지 담고 있다.     실제로 시모노세키의 곳곳에 ‘복어 식용 해금 130년’이라는 안내문이 걸려 있다. 백화점과 기차역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매달려 있는 캐릭터들도 바람 따라 흔들리며 사람들을 반긴다.   거짓말은 복어의 독(毒)과 같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등 많은 작품을 남긴 메이지(明治) 시대의 유명 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가 한 말이다. 단순히 복어의 독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 생(生)의 철학이 담겨 있다. 작가 ‘아지마 유키히코(失島裕紀彦·62)’는 이를 정치인에 비유해서 의미 있게 풀이했다.   “거짓말은 복어의 독(毒)과 같은 것이라고 소세키(漱石)가 말했습니다. 거짓말이 때로는 괴로운 피를 토하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뱉은 거짓말을 덮으려고 하면할수록 구멍이 생기고 파탄(破綻)으로 이어집니다. 돌이킬 수 없는 추태도 노출하게 됩니다.”   아지마(失島) 씨는 일본에서 벌어진 일부 정치인들의 정무 활동비 비리(非理)를 예(例)로 들었다.   ‘허위와 속임수로 공금에서 경비의 지급을 받으면서 뻔한 괴로운 변명을 한다.’ ‘숨기고 있던 작은 불씨가 뜻밖의 장소에서 피어오른다.’ ‘변명과 거짓말을 거듭하다보면 마침내 자리에서 물러나고 만다.’   어찌 일본만의 일인가. 복어의 독과 같은 거짓말이 우리의 주변에서도 번번이 일어나고 있다.   2019년 새 해는 ‘거짓말이라는 독(毒)’에 중독되지 않는 투명한 한 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장상인

지난 주말, 영하의 날씨를 뒤로하고 시모노세키(下關)에 갔다. 인구 26만 명 정도의 소도시이다. 역(驛)에 내리자마자 복어(河豚)들이 날라 다녔다. 하나같이 귀여웠다. 실물이 아니라 캐릭터 내지는 인형들이었다.   시모노세키역연말연시(年末年始)인지라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많았고, 시장에도 설 준비를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양력과 음력의 차이일 뿐 모습들은 설을 맞아 고향을 찾아가는 인파들이었다. 시모노세키는 예로부터 서부 일본의 육해교통의 십자로 였다. 그런 연유로 교통·상업 중심지로 번창했다. 1905년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 항로가 개설돼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대륙침략의 문호이기도 했다.   간몬항 간몬항(關門港)은 기타큐슈(北九州)의 모지항(門司港)과 시모노세키(下關)를 나란히 하고 있는 건너편 항구다. 아무튼,시모노세키는  일본 제1위의 어획량을 자랑하는 곳이다. 수산가공·냉동·통조림·어망·선구·조선 및 화학·금속·목재 공업이 왕성했다.   1894년 4월 청·일전쟁의 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이 슌판로(春帆樓)에서 체결됐다. 1864년에는 시코쿠 함대가 미국 선(船)을 공격했다가 시모노세키 포대가 한 때 미군에 점령되는 사건도 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   복어는 약 120종의 물고기다. 그중에서 식용으로는 참복 등이 유명하다. 식용 가능한 부위는 복어의 종류와 어획 장소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아마추어 요리사에 의한 복어 취급이 금지돼있다. 실제로 일본의 식중독의 원인의 대부분이 버섯과 복어이다.   이러한 복어를 식용으로 금지한 사람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6-1598)였고, ‘먹어도 좋다’고 한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였다. 두 사람 모두 조선을 침략한 사람이다. ‘참으로 이상한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가라토 시장은 점입가경. 복어가족 인형들이 있었고, 시장 안에는 거대한 복어 인형이 있었다. 건너편 언덕의 신사(神社)에는 세계 최대의 복어 인형이 있었다.   복어인형 가족   시장안의 거대한 복어 형상 세계 최대의 복어동상일본인들이 일컫는 복어는 ‘후구(ふぐ)’이다. 하지만, 시모노세키사람들은 ‘후쿠(ふく)’라고 한다. 이유인즉 ‘후구’는 ‘불우(不遇)’와 발음이 같고, ‘후쿠’는 ‘복(福)’을 가져다주는 물고기라서 이렇게 부르고 있을 뿐, 특별한 의미는 없다.   2019년 우리에게 복(福)을 가져다 줄 생선이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호텔로 돌아갔다. 기온은 영상이었으나, 바닷바람이 거셌다. 불현듯 주강현(朱剛玄) 선생의 저서 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바닷가 변방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것 역시 ‘생각의 반란’이 필요한 일이다. 섬을 거느린 바다는 대개 변방이다. 그런데, 종종 그 변방들이 중심을 들이치고 새로운 중심으로 전환됨을 자주 본다."   이렇게 우리네 인생 지난 한 해를 과거로 흘러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향해서 달리고 있는 듯싶다.

장상인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일본인 이야기   “조선일보 근처로 장소만 알려주시면 어디라도 좋습니다.”“네. 코리아나 호텔 로비 5시 어떨까요?”“좋습니다.”   한국을 찾은 일본인 기무라 히데토(木村英人·73) 씨와 문자메시지로 주고받은 대화 내용이다. 필자는 시간에 맞춰서 약속 장소로 갔다. 지난여름 나가사키(長崎)에서 만난 이후 반년만인 지난 22일의 일이다. 그는 ‘나가사키 평화의 집’에서 봉사자로 일하고 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면서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이 부러워   광화문 네거리에서의 기무라 씨광화문은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시민단체들이 무리지어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북과 꽹과리를 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단체도 있었다.   “일본에서 볼 수 없는 살아 있는 모습입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면서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일본을 보세요. 아베 신조(安倍晉三) 수상이 아무리 잘못해도 일본인들은 입을 꽉 다물고 있지 않습니까?”   기무라(木村) 씨는 필자가 우려하는 것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민단체나 노동조합 구성원들이 길을 메우고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 거리로 뛰쳐나오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다’는 것이다.   시민단체들의 성난(?) 목소리들을 뒤로하고 광화문교보문고로 갔다. 거기에도 사람들이 북적됐다. 기무라 씨는 서점에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놀랐다. 인터넷이 발달한 한국은 ‘책을 사는 사람들이 소수일 것’으로 생각했단다.   “놀랍습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저도 독서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만, 서점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을 줄 몰랐습니다.”   서점 일본소설 코너에서의 기무라씨기무라 씨가 서점에 간 이유가 있었다. 의사이면서 유명작가인 ‘하하키기 호세이(帚木蓬生)’ 씨의 의 번역본(해협)을 사기 위해서였다. 그가 일본 책 번역본을 사는 것은 소설이 한국어 선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되고 없었다.   기무라 씨는 일본 소설 코너에 일본 작가들의 책이 즐비하고, 일본 소설을 사는 젊은이들이 많은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일본에는 한국 소설을 일본어로  번역한 책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일본소설만 별도로 진열한 코너가 있군요.”   그는 교보문고에서 임진왜란과 관련한 책을 한 권 사고서 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이미 어둠이 깔리고 있었고,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각종 네온들이 낮과 밤의 경계선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기무라 씨가 ‘한국에 자주 오는 관계로 매운 음식도 좋아한다’고 해서 광화문에 있는 평범한 식당으로 갔다. 메뉴는 낙지볶음.   “보통 맛으로 해 주세요.” “네. 중간(매운)맛으로 준비하겠습니다.”   필자가 주문한 낙지볶음에 대해 기무라 씨와 식당 종업원이 우리말로 주고받은 대화다. 그가 한국의 문화와 언어에 친숙해져 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남북사진전 참가를 위해 한국에 오다   남북사진전에 참가한 기무라(좌) 씨와 이재갑(우) 작가기무라 씨가 이번에 한국에 온 것은 남북사진전 ‘통일의 꽃이 피었습니다’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22일은 이시우 작가가 ‘금강산 통일 미학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강연이 있었다. 그는 필자도 알지 못하는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 한국을 찾은 것이다.   “대단하십니다. 저도 모르는 행사에 참가하셨군요.”“아닙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서입니다.”   기무라 씨가 내민 자료를 보자 사단법인 통일의 길과 한반도 경제문화포럼에서 주최한 행사였다. 그는 “남한과 북한 작가의 사진 30점이 전시되어 있었다”면서 “사진예술을 통해서 한민족의 동질성을 찾으려는 의지가 엿보였다”고 말했다.   기무라 씨는 한국 소설을 좋아한다. 조정래 선생의 장편소설 을 읽고서 지리산을 찾기도 했다. 그는 한국 드라마도 무척 좋아한다. 오래전에 방영된 ‘과 이 특히 인상 깊었다’고 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날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기무라 씨는 ‘형제의 강 드라마에서 어린 배우들이 밀양아리랑을 부르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강제노동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일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 중공업의 손해배상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 이후 한일 관계가 급격하게 냉각됐다. 이 판결 이후 양국 정부 간 국장급회의 가 열린다는 보도만 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보인다. 필자는 기무라 씨의 생각이 궁금해서 그 부분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한다’고 했다.   미쓰비시의 강제노동에 대해서 말하다가 잠시 침침묵하는 기무라 씨“제가 법률전문가도, 정치인도 아닌 평범한 시민에 불과하기 때문에 뭐라고 평가하지 않겠습니다...그러나,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합니다.”   이어서 기무라 씨는 필자가 가지고 간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펴낸 (박수경·전은옥 옮김)의 183쪽을 펼치면서 말했다. “여기 있군요. ‘일본 패전 당시 징용공을 포함해 약36만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거대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이 나가사키와 그 주변의 산하 및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시켰던 조선인의 수가 13,156명이 넘는다’고 쓰여 있지 않습니까? 강제노동은 사실입니다.”   이 책에는 강제노동자에 대한 숫자를 구체적으로 나열돼 있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본다.     필자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과거사 문제를 취재하는 자리가 아니라,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과의 개인적인 만남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필자와 기무라 씨는 “양국의 관계가 과거사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미래를 향한 발전적인 일에 협력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를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서울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효창동에 있는 복지재단의 숙소로 돌아간다’고 했다. 마치 자기 집을 찾아가는 사람처럼.   필자도 지하철을 탔다. 집에 도착하자 둥근달이 중천에 떠있었다. 40년이라는 긴 세월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퇴임하고서도, 쉬지 않고 평화를 위해 헌신(獻身)하고 있는 기무라 씨의 얼굴이 둥근달 속에 들어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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