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헌

▲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진경산수의 창시자, 겸재 정선   겸재가 이룩한 예술 세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진경산수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또 그것을 완성한 것이다. 진경산수란 중국풍의 그림을 답습하던 종래 화가들의 관념 산수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산수화를 말한다.(창비, 67)   이것은 현행 교과서인 『고등학교 국어Ⅱ』에 실린 글이다. 이 글대로라면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은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장르를 창시하고, 개척하고, 완성한 인물이다. 실로 위인전(偉人傳)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정선이 창시한 진경산수는 종래의 관념 산수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천을 있는 그대로 그린 산수화를 말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를 정선이 창시했으니 정선 이전에는 진경산수가 없어야 하고, 정선이 완성했으니 정선 이후에도 진경산수는 없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화가의 진경산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다른 화가의 진경산수가 있다면 그것은 정선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진경산수는 정선이 창시하고 개척하고 완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글은 실상 겸재 정선의 그림을 ‘진경산수화’로 자리매김한 최완수 실장(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의 주장을 따른 것이다. 아래는 최완수 실장의 글이다.   겸재 정선은 우리나라 회화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대화가로 화성의 칭호를 올려야 마땅한 인물이다. 겸재는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사생하는 데 가장 알맞은 우리 고유 화법을 창안해내어 우리 산천을 소재로 그 회화미를 발현해내는 데 성공한 진경산수화의 대성자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우리 고유 산수화 양식인 진경산수화풍의 시조인 것이다.(『진경시대2』 51, 돌베개)   겸재는 조선중화사상이 팽배하던 시기에 태어나서 조선 고유사상인 조선성리학을 전공한 사대부이자 그 조선성리학을 사상적 바탕으로 하여 조선 고유색을 현양하는 진경문화를 주도해 간 장본인으로서 우리 산수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해내기 위해 그에 알맞은 우리 고유의 화법인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해내어 우리 산수를 우리 고유의 회화미로 표현해내는 데 성공한 진경산수화풍의 창시자이자 대성자였다.(최완수 실장 외, 『진경시대2』 107, 돌베개)   학술 용어는 개념이 분명해야 한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글을 보면 진경산수의 개념이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유홍준 교수는 정선이 진경산수(진경산수화와 동일-필자 주)라는 장르를 창시하고 개척하고 완성했다고 한 반면, 최완수 실장은 정선을 두고 ‘진경산수화의 대성자’, ‘진경산수화풍의 창시자’, ‘진경산수화법의 창안자’, ‘진경산수화풍의 대성자’, ‘진경산수화풍의 시조’라고 했다.   여기에 더하여, 간송미술관의 연구원인 탁현규는 ‘겸재가 진경산수를 창안, 발전, 절정, 추상화까지 이루었기 때문에 후대 화가들이 겸재를 넘어서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네이버 미술캐스트, 진경산수 비교 감상하기)라고 했다. 사용된 단어를 보면 창시, 창안, 개척, 발전, 완성, 대성, 시조 등 참으로 화려하다. 한 사람의 예술 세계를 규정하기 위해 세상의 좋은 말은 다 동원한 것 같다. 예술 분야에 이처럼 전지전능하신 분이 또 있을까? 그러니 화성(畵聖:그림의 聖人)’이라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최완수 실장의 진경시대(眞景時代)에 관한 글을 읽다 보면 수시로 만나는 것이 ‘고유(固有)’라는 단어다. 최완수 실장은 겸재를 두고 ‘조선 고유사상인 조선성리학을 전공한 사대부’라고 규정했다. 고려 말 남송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성리학이 도입된 이래 조선조가 이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채택하고, 기라성 같은 수많은 학자들이 나타나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에 대한 각자의 주장을 밝히고 이를 글로 남겼다. 조선 초에는 정도전과 권근이 있었고,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이 발단이 되어 7년간 논쟁으로 이어진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 있었고,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이기론(理氣論) 대화가 있었고, 송시열(宋時烈)의 재제자(再弟子)인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 있었다. 이 외에도 성리학에 대한 학설을 남긴 학자는 부지기수(不知其數)다.   그렇다면, ‘조선 성리학’은 이들 모두의 성리학을 이르는 것일까? 아니면 특정인의 성리학을 이르는 것일까? 학자마다 주장이 다른 성리학을 두고 하나로 아울러 조선 성리학이라 일컫는 것도 부당하지만, 특정인의 성리학을 두고 조선 성리학이란 이름으로 대표성을 부여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또, 어느 쪽이든 그 성리학이 조선 고유의 사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옳지 않다. 주지하듯이 성리학은 송(宋)으로부터 도입된 것으로 우리나라에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처럼 조선 성리학의 성격조차 불분명하게 제시한 최완수 실장은 정선에 대해 ‘조선의 고유사상인 조선 성리학을 전공한 사대부’라고 규정지었다. 성리학과 같은 고도의 사상 체계는 해당 학자가 남겨놓은 글을 통해서만이 파악할 수 있다. 정선이 성리학을 전공한 사대부라면 그의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글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정선은 문집은커녕 그 흔한 시 한 수조차 찾기 어렵다. 그런데 어떻게 ‘조선 성리학을 전공한 사대부’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최완수 실장은 정선의 그림을 두고 ‘조선 고유색’, ‘우리 고유의 화법’, ‘우리 고유의 회화미’라고 하였다. ‘고유(固有)’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특유한 것’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과거부터 있어왔다는 뜻이다. 화법이나 회화미와 같은 요소가 만약 고유의 것이라면 이는 ‘계승(繼承)‧발전(發展)’시킬 수 있을지언정 새롭게 창안하거나 창시할 사안이 아니다. 만에 하나, 최완수 실장의 주장대로 정선이 창안한 화법이나 회화미를 두고 여기에 ‘고유(固有)’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라면 더더욱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특정인이 창안한 것을 두고 후대에 와서 ‘고유’라고 일컬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위 글만 보면 정선과 진경산수화는 엄청난 화가이고 대단한 그림이다. 그렇다면 정선이 창안한 ‘진경산수(眞景山水)’는 과연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유홍준 교수는 앞의 글에서 ‘진경산수란 중국풍의 그림을 답습하던 종래 화가들의 관념 산수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산수화를 말한다.’고 하였다. 또, 최완수 실장 실장은 ‘진(眞)짜 있는 경치(景致)를 사생해낸 그림이라는 의미도 되고, 실제 있는 경치를 그 정신까지 묘사해내는 사진 기법 즉 초상기법으로 사생해낸 그림이라는 의미도 된다.’고 하였다.   사진기법과 초상기법을 동원하여 산수화의 정신까지 어떻게 묘사해내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쪽이든 ‘우리나라에 실재(實在)하는 풍경(風景)을 그린 그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는 산수화의 소재(素材)를 상상 속의 풍경이 아닌 ‘실재하는 풍경’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재하는 풍경을 그린 산수화’는 당연히 ‘실경산수(實景山水)’다. 그런데, 왜 진(眞)자를 써서 진경산수라고 하였을까? 아래 글은 탁현규가 쓴 실경산수와 진경산수의 차이점에 대한 설명이다.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원이 쓴 글이니 최완수 실장의 생각도 이와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Q. 그럼 실경(實景)산수와 진경산수는 다른 그림인가요?   옛날 사람들이 쓴 책을 보면, 진경이란 말보다 실경이란 말이 더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진경이란 말이 더 뒤에 나옵니다. 실경에는 산수뿐만 아니라 지도와 같은 지형도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우리 산천을 산수화로 그리면서 ‘실(實)’보다 의미가 강한 ‘진(眞)’이란 글자를 써서 이상 경치가 아닌 진짜 경치로 불러 준 것입니다. 실경과 진경은 비슷한 의미지만 산수화를 이야기할 때는 진경산수화라고 부르는 게 올바릅니다.(진경산수화 감상법 - 네이버 미술캐스트)   집필자는 분명 실경산수와 진경산수가 다른 그림이라는 주장을 한 것 같은데, 솔직히 이 글을 몇 번이나 읽고도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우선, 집필자는 지도와 같은 지형도를 포함한 그림을 실경산수라 한 것으로 보이나 이는 잘못이다. 실경산수에는 지도와 같은 지형도가 포함된 실용적 그림도 있으나 완상(玩賞)을 위한 산수화나 기록을 위한 산수화 등 그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또, 집필자가 ‘실(實)’보다 의미가 강한 ‘진(眞)’이란 글자를 써서 불러 준 것이라 한 것을 보면 이는 제목의 의미를 좀 더 강조하기 위해 붙인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실경산수와 진경산수의 차이는 의미의 강약에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진경산수는 정선의 그림이 여타의 그림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진(眞)이란 글자로 바꾸어 정한 것임이 분명하다.   사실, 정선의 진경산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유홍준 교수와 최완수 실장의 글에 모두 드러나 있다.   겸재의 진경산수를 논함에서 중요한 것은 18세기 전반기 숙종‧영조 연간에 이처럼 민족적이고 감동적인 우리의 산천 그림을 훌륭히 예술적으로 그렸다는 사실이다. 겸재의 작가의식이 여기에 있는 한 그가 진경산수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황공망을 이용하든 를 원용하든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독창성이란 남이 하지 않은 그 무엇을 혼자 제시했다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이룩하지 못한 또는 생각하지 못한 예술 세계를 창출했다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기법적으로 여러 선례를 원용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대가에게나 있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겸재의 진경산수는 겸재 이전 시대에도 있었던 사경산수(寫景山水)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중국 남종화(南宗畵)의 예술적 성과를 받아들임으로써 한 차원 높은 민족적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기왕에 이동주, 최순우, 안휘준 등이 해석했던 주장은 그대로 유효한 것이다.(유홍준 교수, 『화인열전1』, 역사비평사)   유홍준 교수가 쓴 이 글을 요약하면, 겸재 정선은 우리나라의 산천을 그리면서 남들이 이룩하지 못한 예술 세계를 창출했는데, 이는 겸재 이전 시대에도 있었던 사경산수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남종화 기법을 수용하여 한 차원 높은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즉, 정선이 창안한 산수화는 그림의 소재를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풍경’에서 다른 것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전통적 기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법을 구사한 그림이라는 것이다. 즉, 소재의 변화가 아닌 기법(技法)의 변화를 말한다. 변한 것은 기법인데 정작 소재로 인해 주어진 명칭인 실경산수(實景山水)가 진경산수(眞景山水)로 바뀌어버렸다.   최완수 실장의 주장은 더욱 분명하다.   겸재는, 스승 삼연과 집우 사천이 진경시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거침없이 사생해내고 있었으므로 이를 그림으로 바꿔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데, 이는 창강 조속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아직 이루어내지 못한 조선성리학파들의 숙제이기도 하였다. 마침내 겸재는 그 숙제를 풀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 산천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새로운 그림기법을 창안한 것이다. 이는 중국 북방화법의 특징적 선묘(線描)와 남방화법의 특징적 기법인 묵법(墨法)을 이상적으로 조화시키는 방법이었다. -중략- 이는 중국 회화사에서 항상 시도하면서도 이루어내지 못하였던 남북방화법의 이상적 조화의 성공이기도 하였으며 조선에만 있는 조선 고유화법의 창안이기도 하였다. 이런 화법은 겸재가 벌써 36세에 금강산을 그려내면서 시도하기 시작하여 60세 이후에 완성해 낸 독자기법이었던 것이다.(최완수 실장 외, 『진경시대1』, 27~28)   최완수 실장은 정선이 남종화와 북종화를 수용한 새로운 그림기법을 창안하고 이를 36세에 금강산을 그리면서 작품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여 60세 이후에 독자적 기법으로 완성했다고 하였다. 정선이 완성한 그 독자적 기법이 바로 진경산수화이고, 진경산수화법이고 진경산수화풍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최완수 실장의 글에서는 화(畵)와 화법(畵法)과 화풍(畵風)을 번갈아 쓰고 있다. 혼란스럽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진경산수화에 대해 ‘조선 후기(1700∼1850년)를 통하여 유행한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로 정의하고, ‘화풍은 종래의 실경 산수화 전통에 18세기에 이르러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남종화법(南宗畫法)을 가미하여 형성되었다.’고 하였다. 또,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제공한 「테마로 보는 미술」에서는 ‘진경이란 용어 자체가 남종화의 개념이듯이 정선의 진경산수화도 남종화풍을 근간으로 삼았다.’고 하여 진경을 남종화와 동일시하였다. 이렇듯 정선이 창안한 진경산수라는 것은 실상 ‘중국의 남종화법을 토대로 새로운 기법을 구사하여 그린 산수화’를 이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사 교과서에는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교학사 18세기 이후에는 진경산수화가 등장하였고, 풍속화가 유행하였다. 진경산수화를 통해 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이룬 화가는 정선이었다. 그는 우리의 자연을 직접 보고 사실적으로 그림으로써 회화의 토착화를 이룩하였다.(153) 금성출판사 조선 후기 그림에서 나타난 새 경향은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유행이다. 정선은 진경산수화를 통해 우리나라의 자연을 그려내는 데 알맞은 구도와 화법을 창안해 냈다. (204) 동아출판 조선 후기에는 우리의 자연을 사실적으로 그린 진경산수화가 유행하였다.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화가는 18세기에 활약한 정선이었다. 그는 중국의 화법을 모범으로 하여 이상향을 그리는 관념적인 산수화 대신 자신의 눈으로 직접 관찰한 조선의 자연을 그렸다. 그 과정에서 독자적인 구도와 화법을 창안하였다.(142) 리베르스쿨 조선 후기에는 우리의 자연과 인물을 소재로 한 진경산수화가 발달하였고, 생활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풍속화가 유행하였다.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겸재 정선은 한성 근교와 강원도의 명승지들을 직접 돌아보고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를 사실적으로 그렸다.(188) 미래엔 후기에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지고 현실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그림과 글씨에서도 한국적 고유색을 표현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림에서는 정선이 진경산수화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하여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165) 비상교육 그림에서는 우리나라의 산천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진경산수화와 백성의 생활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풍속화가 등장하였다. 특히 정선은 중국의 것을 모방하던 기존의 산수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법을 활용하여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 등의 진경산수화를 그렸다.(184) 지학사 18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진경산수화는 우리 고유의 자연과 풍속을 대상으로 하면서 중국 남종과 북종 화법을 고르게 수용하여 창안된 새로운 화법이다.(190) 천재교육 그런데 18세기에 들어와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한 산수화가 등장하였는데, 이를 진경산수화라고 한다. 진경산수화의 대표적인 인물인 정선은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 등을 통해 사실 그대로의 조선의 자연을 독특한 필체로 담아내었다.(159)   위와 같이 한국사 교과서에는 진경산수화에 대해 ‘등장’, ‘유행’, ‘시작’, ‘발달’ 등 실로 다채롭게 쓰고 있다. 이 네 단어는 같은 뜻일까, 아니면 다른 뜻일까? 또, 정선의 업적에 대해 ‘산수화의 새로운 경지 이룩’, ‘회화의 토착화 이룩’, ‘독자적 구도와 새로운 화법 창안’, ‘진경산수화의 개척’, ‘독자적 화풍의 개척’, ‘새로운 기법 활용’ 등 참으로 풍성하다. 한 가지 사안을 두고 이렇게 다양한 서술이 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역사 해석의 다양성인가?   그런가 하면, 정선의 그림을 두고 ‘사실적 그림’ 또는, ‘사실적 표현’이라 하기도 하였다. 이는 교과서뿐만 아니라 여타의 학술서나 대중 역사물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최완수 실장이 진경산수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진 기법 즉 초상기법으로 사생해낸 그림’이라 한 것을 보면 현대미술의 사실주의 표현 기법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정선의 그림은 전혀 사실적으로 표현한 그림이 아니다. 만약, 정선의 그림을 두고 말한 ‘사실적 표현’이라는 서술이 현대미술의 사실주의 표현과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학술 용어의 자의적 사용이라 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을 정리하면 ‘진경산수(眞景山水)’는 ‘조선 후기에 겸재 정선이 창안하고 완성한 산수화’로 정의된다. 그런데,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이렇게 정의할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여러 혼선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가장 먼저 ‘진(眞)’이라는 글자로 인한 혼선이다. 진(眞)은 기본적으로 ‘가치 평가’를 위한 글자이기 때문에 비평자의 관점에 따라 ‘진(眞)’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자연을 담은 실경산수를 그려왔고 지금도 그리고 있다. 그 그림 중에 남종화 기법이 있으면 진경산수이고 없으면 진경산수가 아니라는 것인가? 정선을 포함하여 우리의 산천을 그린 수많은 화가들 중에 누구의 그림은 진경산수이고 누구의 그림은 진경산수가 아니라는 것인가? 한 사람의 작품 중에도 시기에 따라 작품에 따라 우열이 있는데, 작품성이 뛰어난 그림은 진경산수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진경산수가 아니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진경산수가 아닌 산수화는 위경산수(僞景山水)라 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실경산수(實景山水)라 해야 하는가?   또, 정선 이전에 진경산수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정선이 진경산수의 창안자이고 창시자이고 시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완수 실장 스스로도 정선 이전 인물인 조속(趙涑)에 대해 ‘인조반정 성공 후에는 일체 벼슬길에서 물러나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시화로 이를 사생(寫生)해내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니 이때 사생해낸 시를 진경시(眞景詩), 그림을 진경산수화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진경산수의 창시자는 정선이 아닌 창강 조속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한국사』에도 ‘명산탐승 중에 절경을 보면 문득 말에서 내려앉아 “率意畵出眼前光景(솔의화출안전광경)” 즉 “눈앞의 광경을 뜻(창생적 흥취)에 따라 그려내고” 천기론(天機論)에 입각한 자득적 창작으로 평가받은 조속(1595∼1668)과 금강산 만이천봉을 최고의 전신법(傳神法)으로 묘사한 김명국(1600년경∼1662년 이후)이 진경산수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서술하였다. 정선 이전에도 이미 진경산수 작가가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진경산수는 곧 정선의 그림이라는 인식이 각인됨으로 인해 미술사에서 남종화 기법과 관련 없는 여타 작가들이나 작품이 매몰되는 왜곡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또, 정선의 화법 또는 남종화법을 구사한 작가나 그림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정선의 아류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정선이 진경산수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아래의 그림이다.   ▲ 강세황의 영통골입구 그림 이 그림에 대해 교학사 교과서에는 정선의 진경산수화,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 등을 소개하고 난 다음 ‘이 밖에도 산수화에 서양 화풍을 접목한 18세기의 강세황과 다양한 소재를 힘차고 능숙한 필법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한 19세기의 장승업도 주목할 만하다.’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영통골 입구의 풍경을 그린 실경산수임에도 서양화 기법을 적용한 그림이라는 이유로 정선의 진경산수와 별도로 취급되는 것이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나 강세황의 ‘영통골입구도’나 우리의 산천을 그린 실경산수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차이가 있다면 정선의 그림은 중국의 남종화기법을, 강세황의 그림은 서양화기법을 적용한 점이다.   교과서는 전문가가 아닌 어린 학생들이 보고 공부하는 책이다. 당연히 개념이 분명하고 설명이 일목요연해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연구자들조차 실상에 맞지 않은 용어를 제시하고 제대로 된 개념조차 정립하지 못하니 8종 교과서의 서술이 중구난방(衆口難防)이다. 이러한 여건에서 일선 교사들은 과연 진경산수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또, 실경산수와 진경산수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이를 학생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이는 불가능하다. ‘진경산수’라는 용어 자체가 잘못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사 교과서에 제시된 작가와 작품을 토대로 아래와 같이 조선후기 산수화에 대한 서술을 재정리해본다.   산수화는 상상속의 풍경을 그린 관념산수(觀念山水)와 실재하는 풍경을 그린 실경산수(實景山水)로 나눌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풍경을 그린 실경산수가 유행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작가로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표함 강세황 등이 있다. 겸재 정선은 중국의 남종화법을 토대로 독창적 기법을 구사하여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와 같은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단원 김홍도는 도화서 화원 출신으로 산수화, 풍속화, 기록화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특히 연풍 현감에서 해임된 50세 이후로는 우리나라의 산천을 소재로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의 실경산수를 많이 남겼다. 표암 강세황은 원근법과 음영법 등 서양화 기법을 구사하여 영통골입구도와 같은 독창적인 실경산수를 남겼다.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풍경을 그린 실경산수에는 대부분 화제(畵題)에 지역이나 명승지(名勝地)의 이름이 들어 있어 어느 곳을 그렸는지 쉽게 알 수 있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진경산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답은 ‘버려야 한다.’이다. 지금까지 18세기에 유행한 산수화로 소개된 진경산수는 실상 소재(素材)와 기법(技法)을 혼돈하여 잘못 만들어진 용어다. 이는 반드시 ‘실경산수’로 바로잡아야 한다.▩

김수인

기온이 적당히 내려가 산으로 들로 놀러다니기 딱 좋은 행락의 계절이다. 10월 초는 사상 가장 긴 열흘간의 연휴가 이어져 직장인들은 한껏 설렘 속에 9월을 보낸다. 연휴가 끝나면 설악산을 시작으로 단풍이 절정으로 치달아 등산객들은 신이 난다. 사람들이 9~10월엔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보내다 보니 한의원은 환자 숫자가 크게 줄어든다고 한다.      9~10월은 골퍼들 세상이다. 선선하고 상쾌한 날씨에 잔디 컨디션까지 좋으니 핸디캡을 낮출 절호의 기회다. 하지만 등산과 골프를 둘 다 즐기려는 이들에겐 유의사항이 있다. 일정을 조절해 ‘土산日골’을 삼가고 ‘土골日산’ 원칙을 지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말에 등산과 골프를 병행하게 된다면 ‘토요일은 골프, 일요일엔 등산’을 해야 한다.      등산은 보통 네 시간을 오르막 내리막으로 걷게 된다. 매주 산을 타는 사람도 네 시간 산행을 하면 일시적으로 종아리에 알이 배게 된다. 알이 배지 않아도 근육 피로는 하루 만에 풀리지 않는다. 따라서 토요일 등산을 하고 일요일 골프를 치게 되면 하체 고정이 안 돼 미스 샷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등산 말고도 라운드 하루 전에 조심해야 할 사항을 살펴보자.      지나친 음주, 장시간 화투나 카드놀이는 스코어를 잡아먹는 귀신이다. 무거운 화분을 들거나 집안일을 하느라 고개를 숙이고 대못을 박는 일도 금물. 순간적으로 근육이 뒤틀려 하루 만에 풀리지 않는 탓이다. 자전거나 오토바이 타기도 삼가야 한다. 사고 위험이 크고 근육이 일시적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세 시간 이상의 야간운전도 다음날 샷에 악영향을 준다.      수년 전 필자의 친구가 경남 거제의 모 기업 임원으로 근무할 때 일이다. 그는 금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손수 운전으로 경기 분당의 집으로 와 토요일과 일요일 골프를 즐긴다. 필자와는 주로 토요일에 함께 라운드를 했는데, 핸디캡이 12 정도 되지만 늘 90타를 훌쩍 넘기는 게 아닌가.      이유는 장거리 야간운전이었다. 금요일 퇴근 후 오후 6시쯤 거제를 출발하면 집까지 4~5시간을 운전하게 된다. 밤늦게 귀가해 바로 취침한다 하더라도 운전으로 인한 허리, 어깨 피로가 몇 시간 만에 풀리지 않아 미스샷을 자주 저지르게 된다. 하지만 일요일엔 대부분 80대 초·중반의 좋은 스코어를 기록한다 하니 ‘土산日골’만큼이나 라운드 전날 장시간 야간운전이 해로웠다.      하루 전의 지나친 연습도 철저히 기피해야 한다. 골프를 잘 치는 편인 어떤 동반자가 초반부터 샷이 엉망이길래 이유를 물어봤더니 “어제 저녁 연습장에서 드라이버샷만 100개 이상 날렸다”고 했다. 바쁜 업무 탓에 연습을 못해 라운드 하루 전에 연습장에서 몰아치기를 했는데, 이게 보약이 아닌 독약이 됐다. 장시간 운전 피로와 마찬가지로 하루 만에 근육이 정상을 되찾지 못하니 샷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하루 전 연습은 안 하느니 보다 못 하다. 불안해서 꼭 연습장을 찾는다면, 큰 인내심을 갖고 30분을 넘기지 말자. 드라이버샷 20~30개에 아이언샷과 어프로치 리듬만 익히는 걸로 만족해야 한다. 그야말로 과욕은 금물이다.

김승열

런던 일기(12) 독일 뮌헨의 막스프랑크 연구소의 객원연구원으로 초빙받다   독일 뮌헨의 막스프랑크 연구소는 지식재산법 분야에서 가장 유명하다. 현재 세계 각국의 지식재산권법에 대한 자료와 정보를 정리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 연구소가 매력적인 장소였다. 필자가 독일 방문시 막스프랑크 연구소에 이런 의사를 표명하니 Josef Drexl이사(뮌헨대학의 교수)가 초청을 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잠시 독일을 방문하고 런던에 되돌아오기로 하였다.   유럽이 그리 넓지 않다는 생각에 당일 코스로 잡았다. 오전에 가서 교수와 이야기를 하고 오후에 오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각국에서 출입국 절차가 있는 등 국내 여행이 아니라 해외여행이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가 세운 일정은 9시에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에서 독일항공을 타고 11시 45분에 도착을 하여 기차를 타고 연구소를 방문하여 간단하게 교수와 면담을 한 후 다시 바로 뮌헨공항으로 와서 4시5분의 런던행 비행기를 타는 것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국제항공편은 2시간 전에 공항에 도달하여야 하는데 이점을 간과하였다. 따라서 처음부터 무리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필자가 예약한 비행기는 탑승 전 쉬소나 변경이 안 되는 비행기였고, 그 이후의 비행기는 탑승자체를 허용해 줄지가 다소 불확실했다. 공교롭게도 그 다음비행기는 만석이라는 이야기를 해당 여행사를 통해 듣게 되니 마음이 더욱더 조급해졌다.   먼저 히드로 공항까지 가는 것도 문제였다. New Malden에서는 Waterloo까지는 기차로 그리고 Pedddington은 런던시내 지하철을 이용하고 그곳에서 히도로 국제공항으로 가는 급행기차를 타야하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가는 기차도 없고 하여 고민이 되었는데 지인이 도와주어 다행히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제는 공항자체가 엄청나게 크고 터미널이 5개나 있는데 각자가 독립적인 공항처럼 크고 넓어서 터미널간의 상호 이동에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아침 일찍이었는데 교통량이 너무 많아서 놀라웠다. 알고보니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는 올때나 갈 때 중 한번은 런던을 거칠 정도록 항공교통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 시간 내에 도착하여 기계를 통하여 보딩패스를 발급받았다.   그런데 가야하는 해당 게이트가 8시30분이 되어야 해당게이트를 스크린에 표시한다는 안내말이 기재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아니하였다. 기차의 프랫폼과 마찬가지로 탑승수속이 이루어지는 시점에 알려주다니. 우리나라에서 이런일이 일어나면 탑기사감일텐데.....예측 가능성과 시민의 편의성 부분에서는 우리가 훨씬 앞서가고 있다는 점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느 누가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이는 소시민 문화가 만들어 낸 부정적인 면이기도 하고 또한 한편으로는 사회시스템에 대한 순종적이고 협조적이며 타인의 업무에 대한 존중으로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필자도 한국 사람인지라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국민성이 좀 더 경쟁력이 있다는 느낌도 가졌다.   우여곡절 끝에 뮌헨공항에 도착하니 다소 푸근한 생각이 들었다. 거의 12시가 되어 시간이 빠듯하였는데도 다소 여유를 부리는 바람에 시간에 쫒기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공항에서 연구소까지 56분 정도소요되지만 기차에 시간 간격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역까지 가는 시간 그리고 역에서 연구소까지 가는 시간을 등을 합하여 약속시간이 오후 1시 30분은 무리였다.   이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부분은 기차의 간격이었다. 거의 15분이상이 소요되어 당초 약속시간에 도착은 무리가 있어서 연락을 하고자 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메일을 보내려고 하니 와이파이가 잘 안되어 계속 끊어지는 바람에 더욱더 초조하게 되었다.   여러 차레의 시도 끝에 겨우 간단하게 늦는다는 취지의 이메일을 보냈다. 역에 내려서는 거의 달려서 거우 1시 50분에 DREXL 교수님의 연구소를 가게 되었다. 비록 늦었음에도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고 이사 신분이어서 그런지 비서도 있었다. 반갑고 인사를 하면서 늦어서 죄송하다고 하자, 기차 때문에 자신도 그런 경험을 한적이 있다고 하면서 오히려 위로를 해주었다.   초청문제 등으로 런던에서 방문한 정성에 대하여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직접 행정책임자를 소개하면서 초청장 등을 준비토록 부탁을 하였다. 필자가 저작권법과 온라인상의 지식재산관려법에 대하여 연구를 하고자 한다고 하자, 유럽 저작권부분의 권위자인 Silke Lewinsky교수를 필자의 Tutor로 지정하면서 직접 해당연구실에 같이 가서 소개를 시켜 주었다.   Lewinsky교수는 유럽저작권법에 대한 전문가로서 WIPO회의 등에서 독일을 대표하는 등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무실 공간과 일종의 Guest House에 대하여도 신경을 써주셨다. 사무실 공간은 확보를 하였고 다만 Guest House부분은 해당 직원분이 휴가중이어서 이에 대한 조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염려하지 말라는 취지로 알려주었다.   돌아오는 항공편의 출발 시간이 4시5분인데 벌써 시간이 2시 40분을 넘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우버택시를 호출하였더니 픽업장소를 특정하는 데 불편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5분정도 되어 이를 취소하고 역으로 달려갔다. 아무리 빨리가도 3시30~40분전에 도착은 불가능해 보였다.   탑승시간이 3시 40분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다만 뮌헨공항에 도착하고 나서 시간상 여유가 없을 것을 예상하고 기계를 통하여 탑승권은 미리 발급받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비행기를 놓치는 상황이 발생되더라도 게이트에서 놓쳐야 다음 비행기편을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여 공항에 가기로 하였다.   그렇지 아니하면 단순한 No-Show로서 다음 비행기 마련 자체도 불확실하기 때문이었다. 역까지 뛰었고, 다행이 기차도 5분만에 와서 뮌헨공항역에 도착하여 다시 열심히 뛰었더니 다행스럽게 출국수속을 하는 사람이 그리 붐비지는 아니하였다.   출국심사 후에 바로 게이트로 가니 바로 탑승시간이 3시 40분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서 가볍게 화이트와인을 마시면서 제대로 비행기를 타는 급박한 상황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자축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저녁 약속 시간이 7시인데 런던히드로 공항에 도착하니 5시 10분 정도이었다. 먼저 히드로 공항에서 Peddington까지 급행으로 가야하는데 비용도 만만찮고 시간도 예측이 어려웠다. 이어 Peddington역에서 Waterloo까지 지하철을 타야하는 데 일부구간이 폐쇄되는 등 복잡하였다.   이런 와중에 3일 간 유효한 Oyster카드를 구매하니 가격도 아주 저렴하였다. 이를 이용하여 waterloo에 와서 New Malden까지 가는 기차안내 전광탄을 보니 6시41분이었다. 기차로 가는 시간만도 대략 28분 정도 걸리니 7시까지 약속장소에 가는 것이 어려워 카톡으로 양해를 구하고 기타를 타고 내려서는 또한 뛰었다. 다행스럽게 7시20분 정도에 도착하여 다행이었다.   이 와중에 이메일을 보니 독일에서 공식 초청장을 보내주고 원본은 우편을 발송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향후 뮌헨과 런던을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의 연구활동 내지 법대교수나 변호사 등과의 교류 등의 거점을 확보하였다는 측면에서 즐거운 소식이었다.   그러나 각론에 들어가서는 국내업무의 스카트 워크시스템의 확보 그리고 유럽전역의 로펌이나 대학 등과의 연계 활동 등 부분이 너무나 광범위하여 어떻게 이에 대한 효율적인 계획과 일정을 만들어 갈수 있을 지가 상당히 도전적인 일로서 다가왔다.    그러나 일단은 첫 걸음을 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두기로 하였다. 오늘 하루 새벽부터 밤까지 뛰면서 굉장히 타이트한 스케줄을 소화하였지만 향후 유럽일정에서 중요하고 의미있는 하루었다.   그리고 연구소에 나를 기꺼이 초청하신 교수님께도 감사하고 아침 일찍 복잡한 공항까지 라이더를 친히 해주신 지인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다. 향후 필자의 유럽 일정을 좀 더 의미있게 진행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분들의 배려에 감사하는 길이라고 스스로 다시 한번 다짐을 해본다.         런던 일기(13)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 전문가들과 대화를 나누다   영국 문화와 국제시장에서 차지하고 있는 런던의 현황과 향후의 전망 등에 대하여 궁금하여 국제 외교무대와 국제통상 등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과 면담을 가졌다. 바쁜 와중에 소중한 시간을 내주어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표한다.   다만 실명을 거론하는 것을 완곡하게 거절하여 만난 여러분의 의견을 종합하여 나름대로 파악한 영국 특히 런던의 국제금융, 법률 등 시장에서의 현황 및 문화와 BREXIT에 즈음한 향후의 전망 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영국문화 자체가 상당히 도전적이고 나아가 국제적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기질과 특성에 기초하여 대영제국을 이루게 된 기초 토양이 이와 같은 도전적이고 국제적인 성향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대외적으로 떠벌이지 아니하고 조용하게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영국문화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부분은 상당히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다.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도 런던이 역동적인 측면이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해외진출적인 성향도 충분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영국인이 상당히 호전적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결투문화를 보면 충분히 짐작이 간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호전성과 도전성을 엄격한 법제도로 규제하지 아니하면 상당히 혼란스러울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분도 있었다. 그리고 겉으로는 강당히 예의를 갖추고 결코 그 속을 잘 드러내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이는 보기에 따라서는 부정적으로 볼수도 있고 또한 장점이라고도 보여진다. 전세계를 호령하면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접하면서 각자의 개성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는 사정하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지배자로서의 일종의 전략적인 측면도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사실은 런던이 진실로 국제적인 도시라는 점이다. 실제로 독일의 도시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다이나믹하고 비즈니스 친화적인 분위기는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에 대한 부작용이라면  엄청나게 비싼 물가이다.   어쨌든 런던에는 수많은 인종과 기업들이 꾸준하게 유입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어구사능력도 천차만별이어서 계급사회인 영국내에서 어느 정도의 계급(?)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영어발음이 아니라 영어표현에서 상당히 노력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비록 겉으로 내색을 하지는 아니하지만 일정한 단계의 영어구사 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상류사회에서는 진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보이지 아니하는 장벽을 상당히 실감하고 있어서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한다고 고백하는 분이 적지 아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세계적인 도시로서 매력적인 도시라는 점에서는 모두 공감을 하는 분위기였다.   무엇보다도 대영제국으로서 전세계를 지배하면서 여러인종과 문화를 조화롭게 더불어 살아가면서 상생을 하는 그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략적인 노하우는 우리나라가 좀 더 적극적으로 배울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필자 역시 그간 EU의 여러 나라를 겪으면서 런던이 왜 물가가 가장 비싼 이유를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국제도시로서 여러 여건을 갖추고 있고 또한 실제적으로 너무 매력적인 면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적인 측면도 크고, 해외의 금융기관 등을 유입하는 비규제친화적인 여러 문화와 환경도 무시하기 어렵다.   물가가 비싼 반면에 그만큼 먹거리도 많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장에서 국제금융 등에서 괄목할 만한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모습역시 예사롭지 아니하였다. 이들 실물 경제를 지원하는 성격을 가지는 법률분야도 이제 런던 등 국제법률시장에 적극적인 진출이 불가피하고 나아가 시대적인 과제라고도 느껴졌다.   그렇다면 런던법률 시장이야말로 가장 경쟁이 치열하면서 또한 가장 매력적이고 그 노하우를 습득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는 어떤 느낌이 들었다. 비록 너무 복잡하고 경쟁이 치열하고 그런만큼 여러 어려움이 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가장 경쟁적인 도시중의 하나로서 자신을 한번 테스트 한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도전해볼 만한 법률시장의 본모습으로 느껴졌다.   국제금융도 이제 현지화를 통하여 국제경쟁력 있게 나아간다면 국제법률 시장에서 우리나라의 변호사 역시 해외에 진출하여 그 우수성을 충분하게 보여주고 나아가 가시적인 성과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필자의 경우에 다소 나이가 있기는 하지만 젊은이 못지 않은 도전정신과 패기가 있으므로 필자 자신스스로가 한번 도전하면서 그 과정하나하나를 즐기고 있다는 강한 충동을 받았다.   영국이 금융, 중재 등에 있어서는 강하지만, 최근의 BREXIT에 즈음하여 독자적으로 Anti-dumping 등 통상 구제, 그리고 정부기관의 Reform등에 있어서는 좀 더 전문가의 수요가 증가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그간 EU에서 경제규모가  가장 큰 도시중의 하나였다는 점이다. 물론 BREXIT이후에는 상당한 타격을 받겠지만, 이와 같이 경제규모가 큰 이유와 그 배경에 대하여는 충분하게 배울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국제금융기관을 끌어들일수 있었던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그런 노하우를 제대로 습득할 필요가 있다. 그런 차원에서 필자 역시 런던법률시장에 한번 도전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물론 시간이 걸리고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여지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깊은 신념으로 나아가고 싶다.     런던 일기(14) 런던 소재의 국제로펌을 방문하다     한국계 사무변호사의 소개로 런던소재하는 유수의 로펌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유수의 로펌들은 소위 말하는 city of London에 소재하고 있었다. 즉 금융시장거리로 불리우는 영란은행을 지점으로 다같이 모여 있었다. 해당 로펌은 상대적으로 외곽으로 보이는 곳에 있었으나, 전세계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고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 로펌이었다.   약속시간에 방문을 하여 일층 아니 ground층에서 방문층을 받아서 해당 층에 올라가니 리셉션공간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물론 뉴욕처럼 엄청나게 넓은 리셉션공간을 조성하여 상당히 위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지는 아니하였고 단지 깔금하고 실용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오히려 친근감이 드는 분위기의 사무실이었다. 비록 전세계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지만 런던에서는 두 개의 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필자의 경우 미국로펌에 다닐 때에는 이정도 크기의 빌딩에서 거의 10개 층을 사용하는 뉴욕로펌으로서 뉴욕사무실 자체에 변호사가 거의 1,000명전후였기 때문에 오히려 아담하게 느껴졌다.   이어서 한국인 어쇼변호사가 회사법의 헤드격인 변호사와 같이 와서 반갑게 인사를하였다. 당초에는 단지 파트너인 한국변호사를 만나기로 하였기 때문에 다소 당황스러운 면도 있었지만 오리려 고마웠다. 이어서 회의실에서 차를 한잔 하면서 같이 담소를 하는 도중에 원래 만나기로 한 한국인 파트너 변호사가 들어왔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나서 나의 방문 목적을 설명하였다. 즉 나는 현재 한국로펌에 있는 senior partner이지만 영국로펌에서 로펌의 운영전반을 한번 경험하고 싶다, 그간 한국내에서 금융, IP 그리고 ADR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EU에 진출한 한국기업 등에 대한 자문시에 나름대로 도움과 지원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추후 국내에 진출계획 시에 필자와의 교류를 통하여 상호협업을 도모하고 싶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얼마정도 머무르기를 원하는지를 물어보기에 가능한 장기적으로 근무하고 싶다고 하면서 그간의 나의 경력 등에 대하여 나름대로 설명을 하였다.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영국로펌의 경우는 좀 더 비즈니스친화적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지난 독일로펌에서 느껴지는 다소 커뮤니티 친화적인 성격의 분위기와는 달랐다.    독일로펌도 변호사가 130여 명 되어서 독일 내에서는 20위 안에 들어가는 상당히 유슈의 로펌이었는데도 이곳 런던로펌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질문도 당장의 비즈니스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질문을 하고 나아가 이에 초점을 두고 대화하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물론 이러한 접근이 효율적인 측면이 많은 것은 분명하지만, 좀 더 장기적인 차원의 시각을 가지기에는 다소 여유로움이 미흡하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어쨌든 1시간 30분 정도의 미팅이었지만 영국계 로펌의 좀더 비즈니스 집중적인 특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아주 소중한 자리였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디지털과 국제화시대에서 국제적인 네트워크가 중요한 사정하에서 내가 독일, 영국을 비롯하여 전세계의 로펌을 경험하는 것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에 상당한 기여를 할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아니한다.   물론 여러 로펌에서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도전할 필요성과 강한 충동을 받게 되었다. 다만 국제로펌으로서 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기를 소망한다.   맥도날드가 탄생하게 된 것은 맥도날드 오너가 52세 되는 시점에 맥도널드 체인점이 비로소 처음으로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면, 어쩌면 필자가 영국런던 소재 국제로펌에서의 경험을 향후 엄청난 파급효를 일으킬 수 있다는 긍정적인 미래전망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런던로펌으로의 발걸음을 내딛기로 하고 이제 그 걸음마를 시작한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이제 목표가 생겼으니 이를 이루는 것은 나의 몫이기도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만 아니한다면 이의 성취여부는 단지 시간싸움일 따름일 것이다. 필자가 글로벌시대에 온라인로펌을 만들기 위하여 좀 더 노력하면서 현지 로펌의 오너, 파트너 그리고 전문가로 자림매기를 시작하는 어쇼변호사 등과의 다양하고 의미있는 많은 만남을 기대해 본다.

김형국

이건 국토발전의 오랜 세계적 법칙이다. 한반도도 마찬가지로 선진국에서 흘러 들어온 신문물은 수도 서울에서 먼저 자리 잡았고 그다음 지방으로 퍼져 나갔다. 신식 문물 등의 혁신(革新)은 생성시킬 앞선 창의적 두뇌가 있어야 하고 그걸 수용해 줄 인구가 많아야 한다. 이 점에서 단연 서울이 압도적이다. 까닭에 이 나라의 혁신 문물은 거의 절대적으로 서울발이거나 서울 경유였다.      지방도시 시발의 시민강좌  〈도판 2〉 노산 이은상 시비, 마산역 광장 입구가곡 ‘가고파’의 가사가 새겨졌다. 시비가 2013년 2월 6일에 제막되고 그다음 날, 이승만 독재 등에 부역했다고 비판하는 조직이 돌비에다 페인트 훼손을 저질렀다. 사람에 대한 평가를 공과로 교량(較量)하기보다 일도양단하려는 한국적 정서 탓인지 “치앗삐라”를 연발하는 지방적 정서 탓인지 마산 상징의 명시(名詩)도 시련을 받고 있다.  법칙엔 예외가 있다. 우리나라 도시들 가운데 최초로 남해안 마산에서 거도적(擧都的) 인문학 강좌가 40년 전인 1977년에 생겨났던 것도 그 하나다. 이래로 줄곧 지속되어 온, 전문적으로 말해 기관형성(機關形成)이 되었으니 서울 등의 대도시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경우로 바로 마산의 합포문화동인회가 펼쳐 온 ‘지역과 세상을 밝힌다’는 인문강좌가 올봄 마흔 돌을 맞았다.     합포는 개항도시로 출발한 마산의 옛 이름이다. 이곳 지방 유지들이 시민의식을 심화시키려고 결집했던 시의(時宜)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때 1970년대 중반은 ‘하면 된다’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현대 한국의 경제성장이 한창 탄력을 받았을 때로 절대가난을 뛰어넘는 성장이면 만사형통이라고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때 세상 추이에 대해 촉각을 세우려고 1968년에 발족한 한국미래학회가 발전이 초래할 갈등에 대해 앞서 염려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우연의 일치로 무언가 서울보다 한발 늦다고 생각해 온 지방에서 외형적 성장이 초래할 사회계층 간 갈등 등의 사회비용을 놓고 자의식 강한 그곳 마산 시민들이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도판 1 참조)    새로운 일에는 역시 사람이 있는 법이다. 혁신은 먼저 새롭게 생각하는 아이디어맨인 원(原)착상자가, 그리고 착상자의 뜻을 받들어 이를 펼쳐 나가려는 창도자(唱導者)가 있기 마련이다.    합포문화동인회의 원착상자는 마산 태생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1903~1982) 시조시인이었다. 물론 동향 문인에 전국적 사랑의 인물도 있다. 애국가보다 더 많이 불린다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의 ‘고향의 봄’ 동요를 열네 살 때 지었다는 이원수(李元壽·1911~1981) 아동문학가나,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귀천’을 노래했던 순진무구의 극치 천상병(千祥炳·1930~1993) 시인이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마산을 문향(文鄕)으로 소문나게 만든 주역은 연조로 봐서도 국민애창가곡 ‘가고파’ 작사자 노산일 것이다.(도판 2 참조)    1976년 말 고향을 찾았던 노산이 재향(在鄕) 청년들에게 지방문화 창달의 방편으로 인문강좌를 제안했다. 원로다운 제안이었다. 그해는 칠십대 중반 노산에게 무척 득의의 시간이었다. 서울에서 그의 문학 일대를 기리는 노산문학상이 제정되었고, 이 연장으로 ‘민족문화강좌’를 해마다 6회씩 대학을 순회하며 개최한다는 계획도 세웠다.(《경향신문》, 1976.4.5) 고향을 위해서도 사회의식을 자극할 장치를 찾고 있었다.      아이디어에는 튼실한 실행가가    마산의 뜻있는 청장년 여럿이 한국 문화계의 원로 노산을 적극, 그리고 즉시 호응했다. 이듬해 1월, 민족문화협회의 마산지부를 결성하고 지부장 선임과 함께 곧이어 3월에 ‘마산 태생’ 제1회 민족문화강좌를 열었다. 그 시절은 문화행사용 도시 인프라가 다방이 고작이었다. 전국적 문화인사 노산의 ‘충무공의 구국정신’ 특강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산에 전해진 참신한 아이디어의 착상과 실행에 앞장선 창도자들 가운데는 지성(至誠)의 리더도 있어야 했다. 그 노릇을 감당한 이가 그때 여당 사무국 마산지부 간부 조민규(趙敏奎·1936~)였다. 시민의식 고취형 인문강좌 아이디어가 특히 그에게 솔깃했음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때 몸담고 있던 정당 사무국 요원들은 공익(公益) 실현에 앞장서야 하는 직분도,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기 일쑤인 그 판에서, 자칫 빈말에 그치기 쉬웠고 그만큼 손에 잡히는 구체적 실행의 보람을 느끼기 어려웠던 점이 스스로 실망스러웠고 한편으로 노산의 제안이 가슴에 와 닿았음은 마산 창신학교의 선후배 사이라는 진한 유대감도 작용했다.    고등학교로 구실하고 있는 창신학교가 어제오늘 전국적으로 알 만한 존재가 더 이상 아닐지라도 아는 사람은 알듯이, 1906년 설립의 오랜 역사에다 무엇보다 일제 때 민족의식 고취에 매진했던 자랑스런 역사의 학교였다. 그때 저명 국학자들이 교편을 잡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를테면 일제에 대한 저항의 몸짓으로 《성웅 이순신》을 펴냈던 이윤재(李允宰·1888~1943)도 그 한 분이었다. 나중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잡혀 옥사한 그가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쳤을 것인가는 능히 짐작되고도 남았다.    창신학교는 그때 그곳 기독교 수용에도 앞장섰던 마산 개화의 주역 이승규(李承奎·1860~1922)가 세운 학교였다. 바로 노산의 아버지였다. 노산 또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함흥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기소유예로 겨우 풀려났다.       민족문화강좌의 진행  〈도판 3〉 김훈 작가 특강이순신의 행적을 알리려고 애썼던 노산에 이어 더욱 폭넓게 감동으로 ‘민족의 태양’을 만나게 해준 《칼의 노래》의 동인문학상 작가가 장군의 승첩에 합포해전(1592년 5월 7일)도 들어 있음을 일깨우고 있음인가.  그렇게 시작한 민족문화강좌는 사회 각계의 일선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론형 식자들과 실무형 리더들을 초청해서 그들의 소견, 식견을 육성으로 경청하는 방식이었다. 세상 일이 하나도 쉬운 것이 없다는 게 상투어인데, 문화강좌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유명한 강사 섭외가 어려웠다. 요로를 통하긴 해도 그 섭외는 항상 아쉬운 부탁일 수밖에 없었다. 어렵사리 확보한 강사를 마산까지 모셔오는 일도 언제나 조마조마했다. 서울과 마산을 오가는 KTX 운행이 시작된 2010년 말 이전만 해도 서울 출발 강사들은 대개 비행기를 이용했는데 그때마다 김해비행장 출영도 지부장 조민규의 몫이었다. 이런 부담성 과업에 대처하자면 일자리가 아예 공동체 봉사형이어야 좋겠다고 생각할 무렵 마침 대한적십자사가 경남지사를 출범한다기에 거기 사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합포문화강좌는 마흔 돌 기념식이 열렸던 2017년 3월 17일 현재로 470회를 기록했다. 그 사이 이어진 강사진은 한마디로 이 나라의 명사 족보와 다름이 없었으니 이 강좌를 즐겨 온 마산 시민의 자부심도 ‘좀 넘치게’ 도저(到底)했다. “합포문화강좌에 서지 못한 이는 아직 한국 명사 반열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라고.    기실, 자부심도 가질 만했다. 서울 쪽에서 보면 한미하다 할 천리 밖 도시인데도 청중의 열의에 감복한 나머지, 일단 다녀간 연사들은 장차의 또래 연사를 즐겨 추천해 주었다. 초치된 연사들 가운데 누구라 하면 알 만한 전국적 인사는 문단 쪽이기 쉬운데 그 사이 다녀간 이로 모윤숙, 정비석, 김동리, 구상, 이병주, 황금찬, 이문열, 김훈을 우선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가까이 2016년 말에는 백 세를 바라보는 높은 나이에 《백년을 살아보니》(2016)를 펴내 시중의 화제를 모았던 철학자 김형석(金亨錫·1920~)도 다녀갔다. 그의 특강에 회원들의 호응이 컸다.(도판 3 참조)     기함(旗艦) 행사인 합포문화강좌를 주축으로 1976년부터 개최해 온 ‘노산가곡의 밤’은 35회, 젊은 주역을 상대로 2007년부터 시작한 ‘영리더스강좌’는 38회, 1999년부터 시작한 ‘여성강좌’는 66회, 1988년부터 시작한 ‘인간생명의 존엄성에 관한 세미나’는 15회를 기록했음이 대표적 방계 활동이었다.    동인회의 대표적 강좌가 계속되고 거기에 좀 전문적인 강좌들로 가지를 칠 수 있었던 성공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마흔 돌 기념의 제470회 강좌는 바로 동인회의 대표 얼굴이던 조민규의 그간 내력에 대한 성찰로 갈음했다. 무엇보다 동인회의 활동비용을 정부나 기업 등 외부에 일절 기대지 않고 개인 회원들이 취지에 적극 찬동해서 물심양면으로 직접 참여해 왔던 덕분이었다. 이를 더욱 제도로 굳히기 위해 출범 20년이던 1996년에 사단법인을 결성했다.     마흔 돌 기념행사에서 동인회는 조민규의 공덕을 두 가지 방식으로 기렸다. 하나는 옛 선비들의 아취(雅趣)에 따라 마산의 옛 이름을 따서 ‘합포’라는 아호를 봉증했고, 또 하나는 자칫 빠질 수 있는 반목과 질시의 나쁜 버릇을 경계하면서 남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돕는 지방 분위기 창출을 기대하려고 ‘합포조민규봉사상’을 제정했다.(도판 4 참조)      시민강좌가 기대하는 바는?    마흔 돌을 맞아 장차의 사십 년을 기대해 봄은 생명력 있는 조직체의 당연 관심사다. 일단 그간의 관성(慣性)으로 잘되리라는 기대는 금물이라는 게 동인회 안팎의 공통 인식이었다. 향토사랑은 무엇보다 영토성(領土性)이 그 기반인데, 동인회의 기반이던 마산의 지명(地名)이 명사로는 사라지고 ‘마산 합포구’와 ‘마산 회원구’라는 식의 관형사로 겨우 남았기 때문이다. 행정 경계가 경제생활 경계와 차질이 있다며 2010년 이웃 행정구역끼리 통합할 때 마산·창원·진해 인근 세 시가 창원시로 통합된 결과였다.     마산이라 하면 구마산·신마산·북마산을 지칭하던 세 쪽 마산이, 얼마 뒤에 동마산·서마산이 보태진 다섯 쪽 마산이 그 지리적 구성인 줄 알았던 토박이들이 그만 난감한 상황을 만나고 말았다. 시내외를 오가는 도중에 만나는 도로표지판 행선지에 ‘마산’이 나와야 할 자리에 계속 ‘창원’이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창원에 경남도청이 옮겨오긴 해도 개화기 이후 생겨난 이 나라 도시 체계에서 마산의 위상은 인접 도시가 비할 바 아니었다. 19세기 말 개항에다 일제 때는 그 식민 모국과 가까운 근접(近接) 지정학으로 성장세를 얻었고 광복 조국이 동족상잔의 시련에 들었을 때 대한민국을 지켜낸 것이 낙동강 최후 방어선이었는데 그 일각인 ‘마산-진동전투’의 승리가 패망 직전의 대한민국을 구출한 보루였다.    전쟁이 끝난 뒤 전후 복구기에 일본 밀수의 거점이라며 ‘우마야마갱(馬山縣)’이란 오명을 잠시 피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국의 자생적 근대화의 기폭제가 되었던 정치혁명이 저 유명한 3·15의거가 일어났던 곳이 바로 마산 아니던가. 이를 계기로 마산은 일거에 이 나라 민주화의 성지(聖地)로 우뚝 솟았고 그 기백이 부마사태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 마산 시민들의 자부심이었다.      마산정신은 어디로  〈도판 1〉 마산수출자유지역수출자유지역은 한국 산업화 과정에서 외국인의 투자촉진·고용증대·기술향상을 목적으로 수출자유지역설치법(1970)에 따라 경남 마산과 전북 익산 2곳에 지정·개발되었다. 구로공단에서 보았던 산업화의 명암은 마산수출자유지역도 마찬가지였음을 시인(서효인, 《여수》, 문지사, 2017)이 〈마산〉이란 서사시로 성찰하고 있다. ‘자유무역단지에서 빠져나오는 이들은 여공이었다. 밤이면 학교에 갔지만 엎드려 있었다. 토요일이면 졸업처럼 시내에 나갔고, 시내에 붙은 바다에 떠밀려갔다.…’  현대 한국 민주화의 선봉이었다는 자부심이야말로, 비록 마산 땅이란 영토성은 희미해졌지만, 기질로 살아 있는 마산정신이라 할 것이다. 통영 쪽 예술정신은 임란이 끝난 뒤 그곳에 자리 잡았던 수병들이 배운 게 바다뿐인 지경에서 체질화된 강한 생활력과 함께 바다의 낭만에서 유래했다는 그곳 출신 박경리 소설가의 소론이 설득력이 있다면 충무공이 승첩을 거두었던 해역이던 마산 또한 그런 환경에서 마산정신이 생겨났을 것이다. 서양사에서 혁명성은 항상 낭만성을 동반한다 했다. 어렵사리 말할 게 아니라 이 점은 흘러간 옛 우리 유행가가 단도직입으로 쉽게 말해준다. ‘마도로스 순정’의 한 구절이 바로 그것. “바다에는 강하여도 사랑에는 약한 게 마도로스다!”    합포문화동인회는 바로 혁명과 낭만의 양 날개를 품고 있는 인문성을 지키고 키워나가려는 몸짓이다. 동인회 말고, 땅 근거를 잃었지만, 마산정신을 이으려는 재향 및 출향 인사의 노력도 현재 진행형이다. 마산을 근거로 살았던 명인들과 그 행적을 적은 책(남재우·김영철, 《그곳에 마산이 있었다》, 글을읽다, 2016)도 나왔다.    한편, 현지 당국도 창원을 광역시로 키우려고 백방으로 노력 중이다. 그게 성공하면 광역시 안에서 마산시는 이름으로 옛 자리를 찾을 수 있으리란 일말의 기대도 거기에 끼어들었다.⊙

신상목

 유럽 근대화를 촉발한 종교 개혁의 본질은 지식 혁명이다. 마르틴 루터의 성경 번역은 교회의 지식 독점을 해체하고 지식을 민중에게 돌리려 한 시도였다. 유럽의 근대화 과정은 교회의 지식 독점이 해체되면서 민중이 종교적 권위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 정치와 경제가 세속화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유럽과 같은 드라마틱한 종교 개혁이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교 개혁의 본질에 해당하는 과정이 근세기에 존재하였다. 형태만 다를 뿐 원리는 유사한 근대화의 궤적이다.    일본이 국가 체계를 갖춘 이래 지식을 독점한 것은 승려들이었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학문의 속성을 갖고 있다. 중국에 유학을 갔다온 승려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권위를 얻었다. 유학(儒學)도 승려들이 경전을 반입하여 해석하고 전파하였다. 승려들은 세속 세력에 대한 지적 우위를 바탕으로 국사(國師), 즉 나라의 스승으로 모셔졌다. 승려들은 오랫동안 지식의 정점이었고, 교육의 중심이었다.    승려의 지식 독점은 비슷한 시기 고려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은 해체 과정이다. 조선에서는 사대부가 등장하여 불교의 지식 독점을 해체했다. 일본에서는 무사들이 해체의 주역이 되었다. 오직 실력만이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하극상(下剋上)의 시대였던 전국(戰國)시대를 맞아 기존의 권위는 의심되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 지식과 정보가 중시되었다.    가장 먼저 천하통일에 근접하였던 오다 노부나가는 뜻을 거스르는 불교 집단은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척결하였다.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불교세력의 무장을 해제하고 거주지를 제한하며 통제를 강화하였다. 억불 정책은 에도 막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승려들의 지적 권위는 무너졌고 정치는 종교에서 벗어나 세속화하였다.    이 지점에서 일본과 조선의 지식 생태계가 분기(分岐)한다. 조선의 사대부는 본질적으로 지식인 집단으로, 불교의 지식 독점을 해체한 이후 스스로 지식을 독점하였다. 반면 일본의 무가는 스스로 지식을 독점할 입장에 있지 않았다. 집권과 통치에 도움이 된다면 다양한 소스(source)의 지식을 취사선택하는 실용적·실리적 접근을 취하였다.       일본 주자학의 토대 닦은 하야시 라잔  일본 주자학의 토대를 닦은 하야시 라잔.  에도 막부가 집권 후 정권 차원에서 통치철학으로 채택한 것은 유학, 그중에서도 주자학이다. 그 토대를 닦은 것이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이다. 1583년 교토에서 낭인(浪人·주군이 없는 무사)의 아들로 태어난 하야시는 유소년 시절 교토의 건인사(建仁寺)에 위탁되어 불교를 공부한다.    사원이 소장한 방대한 서적을 탐닉하던 하야시는 불경보다 유학의 경전에 흥미를 느끼고 주자학 공부에 천착한다. 당대 유학의 권위자이자 스승이었던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천거로 이에야스의 상담역이 된 그는 2대 도쿠가와 히데타다, 3대 이에미츠에 걸쳐 쇼군의 스승으로서 막부가 주자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    공고한 신분제, 예(禮)에 바탕한 사회 질서, 충과 효의 강조 등 막부에 시급하였던 통치 안정화의 이론적, 사상적 토대를 하야시가 완성해 주었다. 막부의 하야시 등용으로 주자학은 막부의 관학(官學)이 되었고 주자학은 무가(武家)의 필수 지식이 되었다.    주자학이 관학이 되기는 하였지만 무(無)비판의 대상은 아니었다. 하야시의 주자학은 조선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기론(理氣論)을 신봉하였고 주자학 이외의 학문을 배척하였다. 전술(前述)한 대로 일본의 무가적 전통은 지식의 교조화(敎條化)보다 실용적·실리적 융통성을 선호한다. 하야시의 도덕론, 관념론에 치우친 주자학 절대화 학풍은 곧 비판에 직면한다.      오규 소라이의 주자학 비판  오규 소라이를 중용했던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  그 선봉에 선 것은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였다. 오규는 1666년 에도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좌천으로 모친의 고향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독학으로 불교, 유학의 경전과 고전을 탐독하면서 지식의 기반을 쌓는다.    부친의 복권(復權)으로 에도에 복귀하였을 즈음에 극심한 생활고로 저잣거리의 인정과 비정(非情)을 두루 경험한 그는 학문은 민중의 삶에 기여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오규는 후에 학식을 인정받아 관직에 오르고 8대 쇼군 요시무네에게 정치적 자문을 하면서 이러한 신념을 정치에 투영하려 하였다.    오규가 에도 지식사(知識史)에서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정치적 실적보다는 그의 개혁적 사상에 있다. 당시 일본은 막부 창업 이래 10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내부적 모순과 갈등이 노정되고 있었다. 직전 20년간 아라이 시라이시(新井白石)가 주자학에 기초하여 주도한 정덕의 치(正德の治) 개혁이 제대로 효과를 내지 못하고 도시와 농촌 모두 불만과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쇼군 요시무네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취임과 동시에 사회 분위기 일신과 제도 개혁을 모색한다. 에도시대 3대 개혁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향보의 개혁(享保の改革)’이다. 오규는 이러한 시대상 속에서 개혁 정책에 자신의 뜻을 반영코자 하였던 것이다.    오규는 당시 주류 사상이었던 주자학을 강하게 비판하고, 인정(人情)에 이끌리지 않는 규율과 질서의 확립을 강조하는 정치 철학을 설파하였다. 어찌 보면 유가보다는 법가에 가까운 법치 중시의 사상이었다. 오규는 주자학이 “억측에 근거한 허망한 요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기론(理氣論)이라는 틀에 세상을 끼워 맞추려는 본말전도(本末顚倒)의 모순을 안고 있는 주자학으로는 세상을 개혁할 수 없으며 보다 현실적인 세계관으로 기성관념을 혁파하여 ‘안천하(安天下)’를 추구하는 것이 정치의 정도(正道)라고 강조하였다.      일본의 마키아벨리    그는 주자학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행동에 나선다. 중국어, 특히 고어(古語)를 집중적으로 연마하여 유학의 경전을 주자의 해석이 아닌 원전을 통해 직접 해석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중용(中庸)》을 받아들임에 있어 주자의 《중용장구(中庸章句)》에 의존하지 않고 체계적인 방법론을 통해 원전을 분석한 《중용해(中庸解)》를 집필하여 주자의 해석이 오류와 독선으로 점철되었음을 입증한 것이다.    다른 관료나 학자들이 주자학을 바탕으로 유교적 도의(道義)를 논하면 오규는 원전을 근거로 선현(先賢)의 뜻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추궁하였다. 주자의 해석에 의존한 사람들이 원전에 근거한 그의 논박 이상의 지적 권위를 제시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마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원전으로 읽은 사람과 다이제스트 번역본으로 읽은 사람 간에 논쟁이 붙었을 때 지적 권위의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규의 이러한 고전 중시 해석론은 ‘고문사(古文辭)학파’ 또는 그의 호를 따서 ‘겐엔(蘐園)학파’를 이루었다. “주자학 등 후세의 해석에 좌우되지 말 것. 직접 중국 고전으로 돌아가 배울 것”을 강조한 오규의 사상은 후대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실증적 연구와 고증을 중시하는 일본 유학계 학풍의 초석이 되었다.    오규의 학문적 성과는 후에 조선 실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정약용은 《논어고금주》에서 오규의 《논어징(論語徵)》을 대거 인용하면서 “이제 그들(일본 유학자들)의 글과 학문이 우리나라를 훨씬 초월했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라고 토로했다고 한다.    일본 정치사상계의 대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政男)는 오규를 “근대성의 사상적 개척자이자 정치의 발견자”라고 평한다. 유럽의 지식사에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통해 도덕과 정치를 분리한 것이 근대 정치의 토대를 닦았듯이 오규가 통치 철학으로서의 유학이 교조적 관념론, 도덕론에 치우치지 않고 실증과 실용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한 것은 근대 정치의 발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메이지유신의 기틀    유학을 현실에 밀착시키려 한 오규의 사상은 중농주의적 유교관에서 탈피하여 경세제민(經世濟民),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용적 경제관을 바탕으로 위정자의 덕(德)을 도덕적 통치를 넘어 국가 경영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에도 후기 경세가들의 사상으로 이어졌다.    막부 관료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주자학이 주류로 남아 있었지만, 시대 변화에 민감한 번에서는 주자학에 얽매이지 않고 유능한 경세가들의 의견을 경청하였다. 막부 말기 내부의 모순과 외부의 압력으로 막부체제가 흔들릴 때 사쓰마, 조슈, 도사, 사가 등 서남지역의 번(藩)들은 유능한 경세가들을 전국에서 초빙하여 신지식으로 무장한 인재를 육성하는 한편, 자체적인 부국강병, 식산흥업의 정책을 통해 국력을 배양하여 막부 타도 및 메이지유신, 근대국가 수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같은 유학이라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세상을 망칠 수도 흥하게 할 수도 있다. 에도시대의 유학은 독점되지 않았고 종교화하지 않았으며, 서로 다른 해석은 배척이 아니라 공존·경쟁의 길로 걸었다. 조선의 유교와 일본의 유학은 같은 뿌리에서 자랐지만 다른 열매를 맺었다.⊙

김승열

런던 일기(9)  영국 공인중재인협회(CIArb.)를 방문하여 현황 등에 대하여 논의 하다   역사가 오래되고 전세계에 136개 사무실을 가진 영국공인 중재인협회(Charted Institute of Arbitrators)를 방문하여 실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마케팅팀장(Nikki Nilar)과 분쟁담당팀장(Keisha Williams) 등 3명과 면담한 후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영국에서 일찍부터 중재가 발달하게 된 배경은?   "영국법이 해상, 보험, 금융 등 분야에서 발달하고 이에 따른 법률의 발전에 힘입어 영국의 분쟁해결 절차가 신뢰를 받게 되고, 법원 중재에 대하여 호의적으로 진행되어 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들 분야에서 영국법이 준거법으로 지정되어 자연스럽게 중재 등이 발전된 것이다."    -귀 협회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 무엇인가?   "역사가 가장 오래되고 전세계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다. 전세계에 138개 사무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일부 직원의 경우는 급여를 받는 직원이고 나머지는 자발적 무보수로 참여하는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중재인에 대하여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귀협회와 법원의 상호관계는 어떠한가?   "법원과 협회 상호관계는 서로 긴밀하게 협조적이고, 특히 법원에서 협회에 대하여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실제로 판사들이 퇴직 후에 협회의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등 상당히 긴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법원의 업무량이 많은데 이를 도와주는 중재에 대하여 법원에서 상당히 우호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   -중재인의 직무윤리위반에 대하여 어떠한 규정이 있으며 실제로 이에 따른 징계절차 등이 마련되어있나?   "중재인의 직무윤리부분은 상당히 중요하고  상호이해관계 충돌부분은 상당히 예민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이다. 이를 위하여 내부적으로 중재인의 윤리장전이 있다. 그리고 이를 위반하여 문제가 제기되면 사무국에서는 이를 심사하는 전문위원회에 보고하고 해당위원회에서 이를 조사하여 이에 따른 징계등의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귀협회에서는 인턴제도 등의 제도가 마련되어 있는가?   "공식적인 인턴제도가 마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나 중재제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에 대하여 사안별로 검토하여 인턴을 뽑고는 있는데 현재는 인턴이 1명이 있다."   -아시아중재시장 등에 대하여 어떠한 샐각을 가지고 있는가?   "상당히 매력적이고 주목을 하고 있는 시장이다. 다만 이들 지역에 관하여는 싱가포르에 지역본부가 있어서 이들 지역본부에서 담당을 하고 있다."   -온라인 분쟁해결절차 즉 ODR에 대하여는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현재 ODR시스템을 도입하고 있지는 아니하나, 주의깊게 관찰하고 이의 도입여부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 다만 현재 협회에서는 소비분쟁에 관하여는 이를 담당하지 아니하고 있어서 현재 다루고 있는 분쟁의 성격상 ODR이 적정한지에 대하여 검토를 하는 데에 시간이 소요되고 있다. 물론 향후에는 ODR이 일반화될 것이고 추세인점에 대하여는 아무런 이의가 없지만 이의 도입에 대하여는 좀더 신중한 접근을 하고 있다."   -현재 매년 중재건수는 대략 얼마나 되는가?   "소비자분쟁 성격의 중재는 CEDR에 넘겨서 그 선수가 적어져서 한때 일년에 50건에 불과한 시기도 있었으나, 현재에는 대략 매년 100-150건 정도가 된다."   -대학과의 중재관련 협업 등은 어떠한가?   "과거에는 대학과 MOU 등을 맺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공식적인 절차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는 아니하고, 다만 중재에 관심이 있는 대학생들에게 많은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나아가 대학교수가 중재에 대한 강의 등을 협회의 교육프로그램에서 운영하는 등 상호 긴밀한 업무관계를 유지하고는 있다."   -귀중한 시간을 내어 주어 감사하다. 귀협회와 대한중재인협회가 좀더 상호 긴밀한 교류활동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협회를 방문하여 주어 감사하다."     런던 일기(10)  영국 런던중재법원(LCIA)를 방문하여 현황 등에 대하여 논의 하다   중재를 담당하고 있는 기관으로서 역사가 오래되고 세계적으로 명망이 있는 영국 런던중재법원(LCIA)를 방문하여 사무총장인 Jacomijn Hof와 법무실장인 Wing Shek를 만나서 간단히 면담을 하였다.   사무실은 런던정경대학으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었고, 해당 건물을 영국 런던중재법원에서 소유하고 있는데 해당 건물안에서 각종 중재전문기관이 입주해 있었다. 미국의 영리중재기관인 JAMS도 입주하고 있어 상당히 놀라웠다.   먼저 LCIA의 경우는 아시아 시장에 대하여도 많은 관심을 표명하면서 방문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들은 대한중재인협회에 대하여는 잘 모른다고 하였지만, 협회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영국 런던중재법원에서는 별도로 중재인 후보자풀을 운영하고 있지는 아니하지만 좀 더 많은 한국 중재인의 참여를 바란다고 하였다. 실제 중재인으로 지명되는 것과 관련하여 달리 학위 등 특별한 자격요건을 정하고 있지는 아니하고 있으나, 주로 추천 등을 통하여 해당 중재후보자의 자격조건을 검증하고 있다고 하였다.   한국에서 중재인으로 지명되는 것에 관심이 있는 법률 실무가들이 자신들의 홈페이지 등에 이력서를 등재하여 중재커뮤니티에 자신을 소개하고, 여러 활동에도 참여함으로써 먼저 중재당사자들로부터 대리인으로서 지명받아 중재절차에 참여하고, 향후에 중재인으로 참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한국인 중재인의 경우에 준거법이 한국법이면 더 많은 중재인 지명이 가능하겠으나, 현재로서는 주로 준거법이 영국법이어서 다소 제한적인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준거법이 영국법이라고 하더라도 분쟁당사자가 한국기업 등인 경우에는 당연히 한국중재인 후보자가 그 중 1인으로서 참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영국중재협회에 많이 노출하고 참여한 중재후보자가 중재인으로 지명될 가능성이 높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중재인들의 영국 런던중재법원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들은 대한중재인협회의 중재인이 얼마인지 물어보았다. 필자가 대략 2,000명정도가 되고 나아가 대한중재인협회는 영국의 경우에 공인중재인협회에 해당되는 조직이라고 하니 이해를 쉽게 하였다.   그동안 대한중재인협회 차원에서 다른 중재인협회와의 교류가 없었으나, 이제 중재산업시기에 즈음하여 좀더 국제적인 교류활동을 활성화하고자 하는 희망을 피력하였다. 그들은 필자의 말에 공감을 하면서 상호 교류를 좀더 활성화하는 방안을 같이 연구해보기로 하였다.   이들은 상호 교류행사 등을 통한 국제적인 공조와 협업체계의 구축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과 의사를 표명하여 상당히 긍정적인 방문이었다고 자평을 해본다. 향후 상호 교류활동을 정례화하거나 좀더 발전적으로 활성화하는 방안마련이 필요할 것으로 보여진다.    런던 일기(11) 영국 KOTRA를 방문하고 BREXIT 영향 등에 대하여 논의를 하다   BREXIT와 관련한 영국 진출 국내기업 등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KOTRA 영국무역관의 김운태 관장을 만나보았다. 런던무역관은 대영박물관의 아래쪽인, 워터루 전철역 근처에 있어서 위치가 좋아보였다.   김운태 관장은 먼저 한-EU간 FTA가 체결된 이후에 무역량이 급격하게 증가하여 적어도 한국과 EU 모두 상호 상생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평가하였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경우에는 우리나라와 달리 FTA가 체결되지 아니하여 적어도 관세 상당부분 정도는 유리한 고지에 있었던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최근에 일본의 경우에는 FTA가 발효되는 시점에 있기는 하다.   BREXIT와 관련하여서 그는 영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경우 제조보다는 단지 판매시설 등에 치중되어 있어서 이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다만 발전시설에서 보일러 부분으로 유명한 영국 기업을 인수한 두산중공업 정도가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영국과의 교역량 측면에서는 영국이 EU 중에서 가장 그 비중이 높아 연간 80억불 정도에 이른다고 하니, BREXIT의 영향력에 대하여 이를 간과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김 관장은 투자은행 등의 분석에 따르면, BREXIT가 되더라도 영국같이 인프라고 잘 구축된 나라가 없으므로 그 영향이 미미할 것이라는 주장도 많이 있지만 지금은 부정적인 영향을 우려하는 전망이 증가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다.   이에따라 영국에 진출한 국내기업의 경우에도 수익 악화가 우려된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삼성의 경우는 유럽지역 본부를 여전히 영국에 두고 있으나, LG의 경우는 독일의 뒤셀도르프로 이전을 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는 영국에서 아일랜드로 이전을 하고 있으며, HSBC는 파리로 그리고 나머지 국가나 기업이 경우에는 암스테르담으로도 많이 이전을 하고 있다고 김 관장은 전했다.   다만 자동차 제조시설의 경우에 우리나라는 체코나 슬로바키아에 자동차 제조시설이 있고,  삼성과 LG의 경우는 폴란드에 제조시설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일본의 경우에는 자동차 주요3사가 모두 영국에 있어 대비가 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점 때문에 BREXIT 이후에 그 영향이 일본에게 상대적으로 더 크게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되고 있다.   김 관장은 기본적으로는 EU지역에서 영국 특히 런던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서 BREXIT 이후의 영향력에 대하여 예의주시하지 아니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여진다는 조심스러운 전망을 내놓았다. 특히 영국의 경우는 서비스산업에서 연간 800억불 정도의 무역흑자를 기록해왔으나, 막상 BREXIT가 되면 이에 대한 타격이 없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로서는 영국과의 FTA를 조속하게 체결하는 것도 다른 나라에 비하여 상대적인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이 될 수는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번 방문을 통하여 알게 된 것인데, 소위 말하는 KORCHAM의 사무국 기능을 KOTRA가 담당을 하고 있어서 영국진출 국내기업뿐만아니라 현지의 관련기업 들에게 중요한 네트워크의 장을 제공하는 주요 기능을 담당하고 았었다. 특히 최근까지 M&A 데스크를 운영하여 기업 인수합병 관련 거래의 주된 소스를 제공하는 등 국내기업의 현지화 등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실제로 이런 역할은 국내의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대기업에 까지 큰 도움이 될 수 밖에 없다. 특정기업이 감당하기에는 많은 비용과 그간의 노하우가 집적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공기업인 KTORA가 현지 영업사정 등에 대한 충분한 정보와 자료를 신뢰성있게 제공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현지법인이나 비즈니스와의 상호 교류와 정보교환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할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랑크 푸르트와 마찬가지로 KTORA는 중소기업에 대해 EU 현지의 연락사무소의 역할과 기능을 제공하고 있었다. 현재 런던무역관에는 국내 파견직원이 5인이고 현지직원이 2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다만 KOTRA가 담당하는 주요 기능에 비추어 인력보강이 필요하거나 좀 더 많은 전문인력 및 관련 서비스를 제공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차제에 더 많은 인력과 재정지원이 이루어져서 개별기업으로서는 담당하기 어려운 업무를 일종의 아웃소싱의 개념으로 실효성있게 활성화하기를 기대해보고자 한다. 글로벌화되어 가고 있지만 현지비즈니스에 대하여는 익숙하지 아니한 국내 중소기업을 위하여서는 KOTRA의 이런 기능이 좀 더 업그레이드 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한우

  ‘더덕’ 정승을 꺾은 ‘김치’ 판서의 힘    한 시대의 정승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살피는 것은 동시에 그 당시 국왕의 지인지감(知人之鑑)의 수준과 안목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실패한 임금 광해군 11년(1619년) 3월 5일 《광해군 일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가사 하나가 실려 있다.    사삼각로권초중(沙參閣老權初重)  잡채상서세막당(雜菜尙書勢莫當)    우선 뜻을 풀어보면 ‘사삼 각로의 권력이 처음에는 무겁더니 / 잡채 판서의 세력을 당해낼 수가 없구나’라는 뜻이다. 각로는 정승, 상서는 판서다. 사삼 각로란 사삼(沙蔘-더덕)으로 밀병을 잘 만들어 임금에게 바쳤던 정승 한효순(韓孝純·1543~1621년)을 말하고 잡채 상서란 잡채(雜菜-혹은 김치)를 잘 만들어 광해군의 입맛을 사로잡은 호조판서 이충(李沖·1568~1619년)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더덕 정승과 김치 판서의 권력투쟁에서 김치 판서가 이겼다는 뜻이다.    먼저 한효순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함께 수군 강화에 많은 기여를 했고 선조 때 이조판서에 올랐다. 당색은 그리 강하지 않아 광해군 때에도 이조판서를 거쳐 광해군 8년(1616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이듬해인 광해군 9년 북인의 실력자 이이첨(李爾瞻·1560~1623년)이 주도한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소극적으로 관망하며 사직을 청했고 강경 폐모론자들은 이를 문제 삼아 처벌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효순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폐모론에 가담한 자로 분류돼 관직이 추탈됐고 조선이 망하기 직전인 1908년에야 겨우 신원됐다. 아마도 이런 엉거주춤한 입장으로 인해 실록에서 비판적으로 묘사됐는지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더덕’ 정승은 참으로 그에게는 모욕적이라 여겨진다. 당쟁 격화 시대를 살아야 했던 온건 합리적 성품의 관리라면 흔히 당할 수밖에 없는 시대의 단면이기도 하다.    이충은 효령대군의 후손이자 이량(李梁)의 손자로 광해군 8년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에 올랐는데 그가 죽었을 때 《광해군 일기》는 지극히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량의 손자로 사론(士論)에 버림받은 자인데 외척과 혼인을 맺어 궁궐과 결탁했으며 흉악한 무리에게 붙어서 현직에 통망(通望)되어 높은 품계로 뛰어올랐다. 위인이 흉험하고 탐욕스러운 데다 포학하여 사람의 목숨을 한 포기 풀이나 다름없이 여겼는데 일찍이 배에서 갓난아기가 우는 소리를 듣고는 그 아기를 강에다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는 진기한 음식을 만들어 사사로이 궁중에다 바치곤 했는데 왕은 식사 때마다 반드시 이충의 집에서 만들어 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곤 했다.”    실은 아무리 음식을 맛있게 해도 판서의 권세가 정승의 권력을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조선은 중기 이후부터 당쟁이 자리 잡으며 당파의 실력자가 조정의 품계를 뛰어넘어 권력을 행사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만큼 비정상적인 때였다고 할 것이다.      정승감은 칭찬, 판서감은 은근한 욕    정승은 한 글자로 상(相)이다. 정승을 승상(丞相)이라고도 했고 상국(相國)이라고도 했고 재상(宰相)이라고도 했다. 따라서 상을 빼고서는 정승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다.    상은 일차적으로 돕는다는 뜻이다. 글자 자체가 장님에게 눈의 역할을 대신하는 지팡이를 나타낸다. 임금의 도와 길을 열어가는 것이 상, 즉 정승이다. 더불어 상은 살펴본다는 뜻이 있다. 사람을 보는 것을 상인(相人), 땅을 살피는 것을 상지(相地), 말을 알아보는 것을 상마(相馬)라고 한다. 정승은 임금을 도와 인재를 가려서 적재적소에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예부터 사람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사람은 정승이 될 수 없었다. 물론 이는 정승을 고르는 임금이 정상적이고 뛰어날 때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왕조 시대에는 “저 사람은 정승감”이라고 하는 것은 최고의 지도자감이라고 하는 극찬에 가까웠다. 그릇이 커서 남을 품을 줄 알고 한쪽으로 편벽돼 있지 않으며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는 열린 귀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에 “저 사람은 판서감”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정승감이 안 된다는 욕에 가까운 말이다. 즉 강직하되 융통성이 없고 머리는 뛰어나고 학식은 많은데 겸손하지 못해 자기주장만 강한 사람들에게 하던 말이다. 우리 역사 속의 조광조나 이이는 아무리 보아도 정승감보다는 판서감에 가깝다. 판서감이 정승이 됐을 경우에는 아무래도 제명에 살기 어려운데 김종서가 어쩌면 여기에 해당하는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도 임금의 지인지감은 어떤 정승을 고르느냐에서 가장 잘 발휘된다고 할 수 있다. 실은 그때 임금의 고민이 가장 깊은 순간이기도 하다.    한나라 경제(景帝)는 문제(文帝)의 아들로 흔히 한나라의 문경치세(文景治世)를 이룩한 뛰어난 임금이다. 그만큼 인물을 잘 볼 줄 알았던 황제라 할 수 있다. 조정에 승상 자리가 비게 되자 어머니인 두(竇)태후는 여러 차례에 걸쳐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을 천거했다. 자신의 사촌오빠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그런 친척관계 때문은 아니었다. 《한서(漢書)》 두영전(竇嬰傳)이 전하는 그의 모습의 일부다.      한 경제와 두영  사람을 잘 보았던 한(漢)나라 경제.  장면 1. 효경(孝景-경제)이 즉위하자 (두영은) 첨사(詹事)가 됐다. 제(帝-경제)의 동생 양나라 효왕(孝王)은 어머니 두태후(竇太后)에게 사랑을 받았다. 효왕이 조회하니 그 기회에 형제의 만남을 축하하는 주연이 베풀어졌다. 이때 상은 아직 태자를 세우지 않았기에 술자리가 무르익자 상은 조용히 효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추(千秋) 만세(萬歲) 후에 (제위(帝位)를) 왕(王)에게 주겠노라.”    태후는 매우 기뻐했다. 이때 영(嬰)이 일어나 술잔을 들어 상에게 올리며 말했다.    “천하란 고조(高祖)의 천하로 부자간에 서로 전하는 것이 한(漢)나라의 약속인데 상께서는 무슨 근거로 양왕에게 전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까?”    태후는 이 때문에 영을 미워했다.    장면 2. 효경(孝景) 3년에 오(吳)와 초(楚)가 반란을 일으키자 상은 종실(宗室)과 여러 두씨(竇氏)들을 살펴보니 영만큼 뛰어난 사람이 없어 그를 불러 만나보았으나 굳게 사양하면서 병으로 인해 임무를 맡기에 부족하다고 했다. 태후도 역시 부끄러워했다. 이에 상이 말했다.    “천하가 바야흐로 위급한데 왕손(王孫)이 어찌 겸양만 부리는가?”    마침내 영을 제배해 대장군(大將軍)으로 삼고 황금 1천 근을 내려주었다. 영은 원앙(袁盎), 난포(欒布) 등 여러 명장과 뛰어난 이들 중에서 집에 머물고 있는 자들을 천거해 벼슬에 나아오게 했다. 하사받은 금은 모두 행랑에 진열해 두고 군리(軍吏)들이 지나갈 때마다 각자가 알아서 가져다 쓰게 했고 자기 집에는 조금도 가져가지 않았다.    영은 형양(滎陽)을 지키며 제(齊)와 조(趙) 지역의 군사들을 감독했다. 7국의 군대가 이미 격파되자 영을 봉해 위기후(魏其侯)로 삼았다.    장면 3. (효경) 4년에 율(栗)태자를 세우고 영을 부(傅)로 삼았다. 율태자가 폐위될 때 영은 간쟁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남전(藍田)의 남산(南山) 기슭에서 몇 달간 숨어 지냈다. 여러 두씨와 빈객과 변사(辯士)들이 찾아가 설득했으나 그를 돌아오게 할 수 없었다. 양(梁)나라 사람 고수(高遂)가 이에 영을 찾아 말했다.    “능히 장군을 부귀하게 할 수 있는 분은 황제이고, 능히 장군을 친하게 할 수 있는 분은 태후이십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태자의 스승으로 태자가 폐위될 때 제대로 쟁론을 벌이지 못했고 (쟁론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또 죽지도 못했습니다. 그러고서 스스로 병을 핑계로 조나라 미인을 옆에 끼고 한가로운 곳으로 물러 나와 조회에도 참가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원망과 분노를 더해가며 온 천하에 나타내고 있으니 이는 임금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일 양궁(兩宮-황제와 태후-)께서 장군에게 화가 나시게 되면 (장군의) 처자식 중에 살아남을 자는 없게 될 것입니다.”    영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마침내 몸을 일으켜 예전처럼 조회에 참석했다.    이 정도면 누가 보아도 반듯하다. 그런데 태후의 요청에 엄정한 성품의 경제는 이렇게 말했다.    “태후께서는 어찌 신(臣)이 위기(魏其)를 승상에 쓰는 것을 아까워서 그런다고 여기십니까? 위기는 경박하고 자만하여 쉽게 자기 마음대로 이랬다저랬다 하기 때문에 승상으로서 막중한 위엄을 지키기에 어렵습니다.”    경박, 자만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은 판서감은 될지언정 정승감은 아니었던 것이다.      8년간 병조판서 지낸 조말생  세종.  조말생(趙末生·1370~1447년)은 태종 초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태종과 세종 시대를 살았던 최고의 엘리트 관료다. 이미 태종 때 비서실장 격인 지신사(知申事)를 지냈고 세종이 즉위할 때 형조 및 병조판서를 지냈다. 따라서 세종의 재위기간 중에 잠시라도 3정승 중에 가장 낮은 우의정이라도 지냈어야 하는데 그의 이력에 정승은 없다. 대신 일종의 상원 격인 중추원의 동지사, 지사, 판사, 영사만 지냈다. 한마디로 실권이 없는 한직이다. 조말생은 세종 8년에 뇌물죄에 걸려 좌천된 적이 있다. 흥미롭게도 《세종실록》 조말생 졸기(卒記)는 그가 정승에 오르지 못한 까닭을 뇌물죄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말생(末生)은 기개와 풍도가 넓고 컸으며[氣度恢洪] 일을 처리함에 너그럽고 두터워[處事寬厚] 태종이 소중한 그릇으로 여겼으나, 옥에 티-뇌물죄-가 신상에 오점(汚點)이 되어 끝끝내 국무대신이 되지 못했다.”    국무대신, 즉 정승이 되지 못한 점이 조말생에게 천추의 한이 됨을 졸기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됨에 있어 “넓고[恢] 크며[洪=弘] 일 처리가 너그럽고[寬] 두터웠다[厚]”면 그것이야말로 타고난 정승감이다.    사실 이 질문, 즉 “왜 세종은 조말생을 정승으로 삼지 않았을까?”는 “왜 태조는 정도전을 정승으로 삼지 않았을까?”만큼이나 흥미로운 문제 제기다. 게다가 태종에서 세종으로 권력 이양기에 줄곧 병조판서를 맡아 병권을 쥐었던 인물이 바로 조말생이다. 사실 조말생은 아버지의 신하였다. 그럼에도 세종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다음 두 구절을 명심했기에 8년 내내 조말생을 병조판서에 그대로 두었다.    첫째는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경우에는 3년이 지나도록 아버지의 뜻을 조금도 잊지 않고 따른다면 그것은 효라고 이를 만하다.”    세종은 태종이 세상을 떠나고 4년이 지나도록 아버지의 뜻을 따랐던 것이다.    둘째는 미자(微子)편에 나오는 말로 주공(周公)이 아들 노공(魯公)에게 유언을 한 것인데 특히 세종이 깊이 마음에 새겼던 내용이다.    “참된 군주는 그 친척을 버리지 않으며, 대신으로 하여금 써주지 않는 것을 원망하지 않게 하며, 선대왕의 옛 신하들이 큰 문제가 없는 한 버리지 않으며, 아랫사람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세종이 조말생을 정승으로 삼지 않은 이유    그런데 왜 세종은 결국 조말생을 정승의 자리에 올리지 않았던 것일까? 그 해답은 세종 8년 3월 7일 자에 담겨 있다.    “옛날에 오랫동안 정권을 잡고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제 생각하니 이해가 간다. 대체로 모든 관원을 임명함에 있어서, 임금이 그 사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무를 맡은 대신에게 이를 맡기는 것이요, 대신이 사람을 쓰는 것은 반드시 과거부터 알던 사람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무를 오래 잡으면 아무리 마음을 정직하게 가지는 사람일지라도, 남들이 반드시 그가 사사로운 정실을 행사한다고 의심할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지신사로부터 병조판서까지 10여 년간이나 오랫동안 정무를 잡은 사람으로는 조말생처럼 오래된 사람이 없더니 과연 오늘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단순 뇌물죄로 본 것이 아니라 사사로이 자기 권력을 행사했다고 본 것이다. 정승은 임금을 돕는 자일 뿐 임금을 대신할 수 없다. 최고 통치권자의 역린(逆鱗)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조말생은 적중하는 데는[中] 성공했으나 오래 유지하는 데는[庸] 실패한 것이다.⊙

김승열

런던 일기(7)   대영박물관과 한국계 자산운용회사를 방문하다   필자가 영국을 방문하게 된 것은 중재산업이 발전하고 전세계의 중심지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배경과 현황에 대한 생생한 모습을 접하고 싶어서였다. 아시다시피 런던에는 가장 오래된 런던 중재법원(London Court of International Arbitration)이 있고, 중재인들의 모임인 동인중재인협회가 유명하다.   중재법원(ICIA)은 런던대학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단독건물을 소유하고 있었다. 아담한 건물이지만 그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좀 더 가면 정원과 같은 공원이 있고, 대영제국의 박물관이 있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건물에 공인중재인협회(CIArb.)가 있었다. 두 군데 다 조용한 위치에 있어서 중재라는 업무성격에도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런던 정경대학과 퀸메리 런던대학의 법과대학에서도 그리 멀지 않았다.    약속 시간과 여유가 있어서 주변에 있는 대영제국박물관에 들어가 보았다. 박물관의 규모가 웅대함에 먼저 놀랐다. 더 놀라운 것은 입장료가 없다는 점이었다. 옥스퍼드나 캠브리지대학에서 아름다운 단과대학에 들어갈 때도 입장료를 받는 나라에서 엄청나게 웅대한 대영박물관에서 입장료가 없다는 것이 신기하였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전세계에 박물관법이 있어서 약탈한 소장품이 일정한 비율을 차지하면 입장료를 받을 수 없다는 규정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분야의 전문가는 대영박물관  소장품들이 약탈품인지 여부에 대하여 다툼과 논란이 있다고 하면서 무료입장은 대영제국의 박물관 설립목적에 따른 조치라는 설명을 하였다.   일반 공중에 대한 계몽차원에서 이 박물관을 짓고, 개방하는 것이어서 달리 입장료를 받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다만 곳곳에 기증코너가 있어서 아예 입장료에 상당하는 금액(5파운드)을 특정해 실제로 사실상 입장료를 내도록 유도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식민지 국가에서 적법 또는 다소 무리하게 취득한 소장품에 대하여 자신만의 논리와 명분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도 없지는 아니한 것으로 보였다.   박물관 안에 들어서니 일단 그 규모가 지금까지 가 본 박물관과는 차이를 느끼게 하였다. 곳곳에 있는 소장품들은 너무나도 귀중해 보여서 마치 세계 각국의 식민지 국가에서 강제적으로 가져왔겠구나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리고 각 전시실의 각 소장품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그 가치가 높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이들 소장품 하나하나를 제대로 보기 위하해서는적어도 일주일은 걸릴 것같아 엄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정말아자 전세계의 문화의 아름다운 장점만을 보여주는 듯한 소장품들만이 모여있는 소중한 장소라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번 방문에는 시간이 부족하여 일단 전체적으로 개괄하는 수준으로 만족하여야 하였다.   어쨌거나 대영박물관은 박물관의 모델을 보여주는 것 같아 더욱 충격적이었고, 과거 대영제국의 화려한 영광이 그대로 묻어 나와있는 것 같아 갑자기 역사 공부를 하고 싶다는 충동마져 느끼게 하였다. 그 만큼 소장품이 아름답고 해당 문화를  품격있게 보여주고 있어 정신이 어질해질 정도였기 때문이다. 세상은 너무 넓고 배우고 탐구할 것이 너무 많아 보였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현지 관계자분들과 즐거운 담소를 하면서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에는 한국 관련 투자회사, 즉 자산운용사를 방문하였다. 투자회사의 특성상 투자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여 인터뷰 대신에 간단히 현황을 물어 보고 그 느낌을 전해듣는 수준으로 만족해야 했다.    영란은행의 주변의 건물을 구입하여 이를 리노베이션하여 투자이익을 높이고  나아가 그간 투자를 성공적으로 하여 자신감이 넘치는 분위기를 사무실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투자처로서 영국의 미래에 대하여는 BREXIT에도 불구하고 상당힌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좀 더 많은 재원이 주어지면 더 적극적인 국제금융업무에 전념하여 한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기도 하였다.   한국의 국제금융의 현황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보는 모습에서 강한 자부심을 느끼게 만들어 주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런던 일기(8)  런던에 진출한 금융전문가와를 만나 새로운 시장의 잠재성을 절감하다   제일 왼쪽부틔 시계방향으로 수출입은행의 김호준 법인장, KDB의 황길석 지점장, 필자,  이태준 기업은행 지점장.런던에서의 우리나라의 국제금융의 현황을 접하고자 국내 금융기관에 근무하는 책임자분들과 어려운 자리를 마련하였다. 모두 바쁜 와중에 소중한 시간을 내주어서 너무 감사하였다. 전부 국책은행에 근무하시고 있었다.    KDB의 황길석 지점장님, 수출입은행의 김호준 현지법인장님, 기업은행의 이태준 지점장님이었다. 이태준 지점장은 파견온지 2년, 황길석 지점장은 1년6월, 김호준 법인장은 7월이 경과하여 어느 정도 현지사정 등에 대하여 밝았다.   이들은 런던이 매력적인 국제금융의 중심지이고 대영제국이라는 칭호에 어울리게 산업과 문화가 광범위하게 발달하였다는 데에 모두 공감을 표시하였다. 특히 산업혁명이 이곳에서 시작되었고, 잔디와 관련한 모든 스포츠의 발상지가 바로 영국이라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보니 골프, 테니스, 럭비, 크로겟 등등의 모국이 영국이었다.   그리고 박물관이 정말 많다고 이야기 했다. 예를들어 대영박물관의 경우 이를 관람하고 나면 '대영박물관'이라는 칭호를 자연스럽게 사용할 만큼 그 위용에 압도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융의 중심지로서 배울 점이 너무나도 많다고 하였다.    논란이 되고 있는 BREXIT의 영향에 대해서는 현재 BREXIT 때문에 이로 인하여 다소 어수선한 것은 사실이지만, 수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금융 분야의 중심지로서의 위상과 역할은 그리 쉽게 허물어지지는 아니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하였다.   특히 보험과 같은 분야는 BREXIT에 상관없이 여전히 런던으로 많은 기업들이 유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집적효과에 의하여 이들 분야는 여전히 전망이 그리 어두워보이지는 아니하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리스크 관리는 당연하다는 의견도 개진하였다.   BREXIT의 현실화에 관하여서도 비록 영국이 한번 결정한 사항은 쉽게 바꾸지는 아니하지만, 국익과 직결되고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정책변경을 과감하게 진행한 사례 등에 비추어 볼 때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또한 BREXIT가 실제로 확정되어도 영국의 미래는 그리 어둡지만은 아니할 것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였다.    우리나라 금융기관의 런던 국제금융 시장에서의 현황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최근에 들어와서 일부 국내금융 기관의 경우는 가시적인 성과이루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국내금융 기관의 국제경쟁력에 대한 강한 자신감도 동시에 보여주었다.   런던일기(7)편에 소개된 대영박물관의 내부 전시물 모습. KDB의 경우는 작년에 13개 해외점포에서 드디어 1억불의 순이익을 달성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런던지점의 경우에도 거의 200억불 정도의 단기 순이익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간 우리나라의 국제금융의 낙후성을 비판해왔고, 국제금융 전반에 대하여 항상 부정적인 이야기만 접한 필자로서는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반문을 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낙후된 것만으로 여겨져  온 국제금융 부분에서 실로 놀랍고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성과를 이룩한 것이어서 상당히 고무적인 현상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간 외환위기 등을 겪으면서 고통을 통하여 많은 학습효과가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도 금융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 같아 보였다. 다만 그간 아픈 상처 때문에 아직도 보수적이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왔지만, 무력감을 이제 극복할 시기가 도래한 것으로 보인다.   현지 금융인들도 우리나라가 외환위기 등을 겪으면서 리스크 관리 부분에서 괄목할 만한 노하우를 습득하였고, 나아가 국제금융의 영업형태에서도 현지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이에 대한 관리를 제대로 하는 등 금융영업 및 관리기법이 이제 상당히 선진화되어 이제는 우리나라 금융기관도 상다한 국제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러한 국제금융에서의 국제경쟁력의 확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극적인 태도와 자세는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느껴졌다.   런던일기(7)편에 소개된 대영박물관의 내부 전시물 모습. 기업은행의 경우 작년에 거의 200억불 수준의 경이적인 세전 단기영업이익을 거두었다고 한다. 현지기업에 대하여 다양한 리스크 관리기법을 동원하여 제대로 리스크관리를 하면서 현지영업의 새로운 모델을 맏들었다는 점에서 모두가 주목을 하고 있다고 한다. 시중은행에서도 이를 참조하여 국제금융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태준 지점장은 국내의 금융여건이 포화상태이므로 이제는 눈을 해외로 돌리고 특히 유럽시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언급하였다. 그는 금융기관에 호의적인 비규제상황이 국내금융기관의 금융영업과 리스크관리 측면에서는 우호적인 측면이 있으므로 좀더 적극적인 국제금융 업무를 활성화시킬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제 동남아뿐 아니라, EU 등에 대한 국제금융 시장 시각을 좀 더 긍정적으로 전환할 시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한국계의 다른 자산운용사에도 동일한 의견을 이야기 한 적이 있어 수긍이 가는 부분이 적지 아니하였다. 어쩌면 이제 국제금융이 우리나라의 미래 먹거리 중의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쳐주는 중요한 시간이고 유익한 토의의 장이었다.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국제금융의 주역으로서 가시적인 성과를 이룬 이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필자 역시 국제금융에서의 일대 코페르니쿠스적인 혁신의 기초 토양를 발견한 것 같아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런던일기(7)편에 소개된 대영박물관의 내부 전시물 모습. 우리나라도 이제 세계 10대 경제강국으로서 국제금융을 마냥 터부시하는 것을 지양할 시점인 것만은 분명하였다. 그런 점에서는 법률분야도 마찬가지로 이제는 해외에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범정부차원의 지원을 통해 진취적인 자세로 국제금융을 선도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그간 낙후된 국제금융분야에서 부정적인 시각에서 좀 더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접근을 기대해 본다.    필자는 금융인은 아니지만, 이번 런던 방문에서 어려운 여건하에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나가고, 현지에서 당당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일하는 국제금융인들을 만나보니  필자도 국제법률 전문가로서의 자리매김을 해야겠다는 자극을 받았다. 스스로에게 이를 위한 노력을 다시한 번 다짐해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런던일기(7)편에 소개된 대영박물관의 내부 전시물 모습.

정정수

  근래 건축물에 석재를 많이 이용하면서 유럽의 중심지에서나 볼 수 있는 묵직한 건축 양식을 닮은 건물군(群)을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1970~1980년대만 해도 건물의 외형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건물을 짓는 일에만 급급했었으나 지금은 건물의 가치를 높이려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특히 2000년대 초부터는 아파트 단지를 시작으로 단지의 인지도와 가치를 높이기 위해 수공간(水空間)을 조성하는 일에 노력해 왔다. 그러나 아파트가 서양 건축의 구조적 형식을 따르다 보니 수공간의 대부분이 정형화·규격화됐다. 특별한 조경철학 없이 크고 작은 분수만을 천편일률적으로 시공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이런 분수가 있는 수공간은 여름에 시원한 맛을 주기는 한다. 그러나 한겨울에는 쓸모없이 방치되어 애물단지로 전락한다는 단점이 있다.      분수와 폭포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 새벽을 여는 조경인들의 모습에서 경건함이 보인다. 이들은 호수에 물을 채우기 전에 호수 안의 작은 섬을 정리하고 있다. (천수마을 2015)  한국의 아파트에는 어떤 수공간이 어울릴까? 분수와 폭포가 서로 상반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양정신이 추구하는 폭포는 중력을 거스르지 않고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니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형태다. 서양의 분수는 중력을 거스르며 자연의 순리에 역행하는 것이어서 동양인은 물론, 특히 우리나라의 정서와 환경에는 맞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분수는 수직적 형태를 갖는다. 이 수직적 형태가 수평적 형태와 함께 배치될 때 비로소 조화를 이룬다. 이는 미술적 안목(아름다운 조화)이 있어야만 찾아낼 수 있다. 조경을 미술이 주도하고 시작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미술이 가미되어 수평과 수직의 조화를 만들어 낸 조경의 예로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들 수 있다.  물이 채워진 호수는 하늘의 모습까지 담아 낸다. (천수마을 2016)  동서를 막론하고 절대권력자가 기거하는 궁전의 정원에는 어린아이보다도 작은 높이의 나무들이 다듬어져 있다. 큰키나무가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적이 침투를 시도할 경우 큰키나무가 적을 가려내는 데 방해가 되거나 은신의 장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궁전은 삼엄한 경호가 필요하기에 정원에 큰키나무를 조성하지 않고 낮은 크기로 조경을 한 것이다.    베르사유 궁전의 경우에는 키작은나무가 만들어 내는 수평적 평면 위에 수직으로 높이 올라가는 분수가 평면의 밋밋함을 없애 주고 조화로움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아파트라는 건축물은 이미 수십 층 높이의 수직의 집합체로 형성되어 있다. 이렇게 수직이 연속된 주변에 또 수직적 형태인 분수가 덧붙여지는 것은 공감을 이끌어 내기 어려운 디자인이다.      폭포가 있는 아파트  생태공원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는 초심원은 입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이 됐으며, 인근 주민들은 물론이고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자연스레 찾아와 산책하는 공간이 됐다. 한여름에 아이들이 계류에 발 담그고 뛰어다니며 물놀이를 즐기는 모습은 조경공간을 넘어 사람과 자연이 함께 어울리는 공간이 만들어졌음을 증명하고 있다. (래미안 금광 아파트 초심원 2007년)  이 같은 문제점은 어떻게 해결하는 게 좋을까? 수직적인 고층 아파트에는 폭포를 조성하고 거기서 떨어지는 물이 계류로 구불구불 낮게 흐르다가 연못으로 모이는 수평적 수공간을 조성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필자는 2007년 ‘래미안 금광’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현장 소장과 의견을 모아 위의 방법을 적용해 보았다. 그렇게 특화조경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 자연생태공원으로 불리는 래미안 금광 ‘초심원(初心園)’이다.    래미안 금광아파트에는 높고 가파른 법면(法面・경사면)이 있다. ‘초심원’에는 이 지형적 특성에 약간의 평지를 빌려 방지(方池)를 만들고 ‘ㄱ’ 자 정자를 세워서 주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했다. 절벽 주변의 안전을 위해 설치된 가담 밑으로 흐르는 물은 두 개 층으로 나누어진 폭포로 조성했다. 이렇게 떨어진 물은 연못에 고였다가 어린이 물놀이터로 사용되고 계류를 150m 거리까지 흘러가서 조그만 연못에 머물렀다가 다시 방지로 올려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초심원’은 폭포를 중심으로 계곡을 따라 물이 순환하는 구조의 자연을 닮았다. 많은 조경인들이 이곳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2008년 IFLA(세계조경가대회·인도 개최) 최우수상을 시작으로 국내의 디자인상을 여러 개 수상했다.      한길 물속도 알아보자  완성된 연못을 보여주면 “여기 이 연못은 원래 있었던 연못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최고의 찬사로 받아들이고 싶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물을 채우기 전에 각종 기능에 적합한 시설을 만든 후 물을 채우고 수변식물과 수생식물들로 주변을 정리한다. 그런 다음 물고기도 넣어 준다. 만남이라는 아름다운 관계를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만든다면 조화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탄생한 수공간이다. (천수마을 2016년)  자연은 인간의 상처 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눈에 보이는 상처보다는 보이지 않는 상처가 더 심각한 법이다. 예를 들어 종합병원에서 만나는 환자들 중에서 정형외과 환자들은 보조기구에 의존해서 움직이거나, 붕대를 감고 있어서 보기에는 고통이 크게 느껴진다. 하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 원래 상태로 회복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에 비해 내과 병동의 환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고통이 덜 느껴지지만 이들의 병은 오랫동안 지속된 잘못된 습관이나 환경에서 기인했기에 대부분 회복이 쉽지 않다.    자연은 이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심각성까지도 상당 부분 치유하는 기능이 있다. 현대인의 삶에 자연을 닮은 조경공간을 제공하는 것은 삶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상처를 보듬어 주는 장소를 갖는다는 의미다. 자연을 닮은 조경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술성과 기능을 겸비한 조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연으로부터 얻은 미술적 표현인 직선과 곡선, 수평과 수직으로 이루어지는 변화와 통일의 문제들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  물속의 관계를 읽는 눈을 갖는다는 것은 시각적 감각에 논리적 사고를 얹어 줄 수 있으므로 폭넓은 시야를 갖게 한다. 좀 더 나은 감각의 완성을 위해 물속 관계를 관찰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벽초지 2003)  ‘열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의 한길 마음속은 모른다’고 했다. 연못 속 1m 깊이도 눈에 보이지 않을 테니 그 속을 아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도 자연 상태의 연못은 자연스럽게 물이 정화되면서 그곳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공 연못은 인위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것이 인위적이되 작위적이지 않은, 그래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추구하는 조경이 할 일이다.    즉 연못이 위치하는 지역과 기능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식생(植生)의 조절을 위한 물속 기능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를 들어 연못에 연(蓮)을 식재해 놓고 그냥 놔두면 수년 만에 연이 연못을 점령해 버린다. 다른 수생식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통 수생식물을 화분에 심어서 물속에 가라앉히는 방법을 선택한다. 이것은 부자연스럽고 소극적인 방법일 뿐 아니라, 관리하는 시간과 공을 더 많이 필요로 한다.    필자는 연을 심는 곳에 원하는 크기만큼의 면적을 계획해서 물밑 흙 속에 연뿌리가 넘지 못할 만큼의 담장을 설치한다. 화분 대신 연못 바닥에 담을 만드는 것이다. 연못의 규모가 조금 크다면 물속 흙 높이를 조절하여 다양한 식생이 서식하는 구조를 만들 수도 있다. 수심 2m가 넘는 곳부터 50cm 전후 깊이까지 흙 높이를 조절하면 한 종(種)의 일방적 잠식 없이 다양한 종이 어우러지는 자연스러운 생태연못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김병헌

  오른쪽 문제는 최근 치러진 제36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 문제 중의 하나다.   ‘이 사당은 위정척사 운동을 주도한 [ (가) ]의 위패를 모신 충청남도 청양의 모덕사입니다. 흥선 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던 그는 왜양일체론을 내세워 강화도 조약 체결을 반대하였습니다.’   (가)에 해당하는 인물은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으로 그는 상소(上疏)에서 흥선 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을 요구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두 가지 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첫째, 흥선 대원군은 공식적 통치 기구가 아니기 때문에 ‘하야(下野)’라는 용어는 부합하지 않는다. 그냥 ‘영향력 상실’ 정도가 적당한 표현이다.   둘째, 위에서 말한 소(疏)는 최익현이 1873년에 올린 것으로 여기에는 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을 요구한 내용이 없다. 고종의 친정은 1866년 2월 13일 대왕대비가 철렴(撤簾:수렴청정을 거둬들임)과 함께 전권 위임을 선포함으로써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또다시 친정을 요구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이 지문은 완전히 엉터리다. ‘하야(下野)’와 ‘친정(親政)’의 의미를 알고, 해당 상소를 한 번이라도 읽어봤더라면 이런 지문을 쓸 수 없다.   이와 같이 우리 역사는 1863년부터 1873년까지 흥선 대원군이 마치 최고의 권좌에 앉아서 모든 국정을 통할(統轄)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경복궁 건립도 그 중의 하나다.   흥선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그러나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이란 기부금을 강제로 거두었다. 당백전이라는 고액 화폐도 발행했는데, 이로 인해 물가가 폭등하였다. 또 백성을 강제로 동원했고, 도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징수했으며, 양반들의 묘지림까지 베어냈다.   대원군이 집권 후 심혈을 기울인 다른 한 가지 사업은 임진왜란 당시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왕실의 존엄을 과시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중략- 흥선 대원군은 고종 2년(1865) 4월에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하였으며, 스스로 진두에서 사업을 지휘하였다.   윗글은 미래엔 한국사 교과서와 『신편한국사』의 서술이지만 나머지 교과서도 대동소이하다. 이를 요약하면, 흥선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한 목적에서 경복궁을 중건하였으며, 이를 위해 1865년 영건도감을 설치하고 스스로 진두에서 사업을 지휘했다는 것으로 경복궁 중건의 주체가 흥선 대원군이라는 논지다. 과연 그럴까?   아래는 이와 관련한 『승정원일기』의 기록이다.   대왕대비전이 전교하기를, “경복궁(景福宮)은 바로 우리 왕조가 설 때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정궁(正宮)이다. 규모의 정대함이나 위치의 정제함에서 성인(聖人)의 심법(心法)을 우러러볼 수 있고, 정령의 시행이 하나도 정도(正道)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어 팔도의 백성들이 모두 복을 입은 것이 이 궁궐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병란으로 불타 버린 뒤 미처 중건하지 못하여 뜻 있는 이들이 탄식해 온 지 오래되었다. 지금 정부의 중수를 인하여 국가가 융성할 때 민물(民物)이 번창하고 훌륭한 이들이 등용된 것을 매양 생각하면 대체로 공경히 되뇌이며 추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중략- 이 궁궐을 중건하여 중흥의 대업을 이루려면 여러 대신들과 일을 계획하지 않을 수 없으니, 시원임 대신은 내일 음식을 내린 뒤에 남아서 기다리라.” 하였다.   경복궁은 조선왕조 건국 직후인 1394년 12월부터 이듬해 9월에 걸쳐 정도전의 지휘 아래 건립된 조선의 정궁(正宮)이었으나 임진왜란 때에 소실(燒失)되었다. 그 후 순조와 헌종 때에 중건을 시도한 바가 있으나 재정이 여의치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고종 즉위와 함께 대왕대비의 전교(傳敎)로부터 시작되었다. 전교가 있은 다음날인 4월 3일에는 2품 이상의 대신들이 논의를 하여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같은 날 동녕위(東寧尉) 김현근을 비롯하여 80여명이 넘는 2품 이상의 대신들이 개진(開陳)한 의견을 모아 보고하였는데 하나같이 적극 찬성이었다. 이에 고종은 “여러 재상들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의정부로 하여금 좋은 쪽으로 품의한 뒤 조처하도록 하라.”고 전교(傳敎)함으로써 경복궁 중건은 결정되었다.   이어 같은 날 오후에는 대왕대비가 시임(時任)과 원임(原任) 대신을 소견(召見)한 자리에서 "어제 경복궁의 중건 문제를 명령한 바가 있는데 경들은 들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경복궁 중건에 관한 논의는 이어졌다. 이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이, “지금 받은 명령은 대소 신민들이 항상 바라던 것입니다. 그런데 궁전을 짓자면 먼저 규모도 정하고 준비도 있어야만 공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대왕대비는 "나라에서 공사를 하려고 드는 이상 안 될 리가 있겠는가? 옛날 그 대궐을 사용할 때에는 백성들이 번성하고 물산이 풍부하였으므로 태평 시대라고 칭송하였다. 그 때문에 주상이 백성을 위하여 이 공사를 한번 해보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라 하며 중건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경복궁을 중건하여 사용하면 백성들이 늘어나고 물산이 풍부해질 것이라는 희망이 배어있는 말이다.   이렇게 시작된 오후 소견에서는 경복궁 중건에 대한 핵심적인 두 가지 사안이 거론되었다. 하나는 영의정 조두순이 건의하고 대왕대비가 윤허함으로써 별 논란 없이 결정된 영건도감(營建都監)의 책임 관리 차출이었다. 영건도감 설치에 따라 임명된 책임 관리로는 도제조(都提調)에 영의정 조두순과 좌의정 김병학이, 제조(提調)에는 흥인군 이최응, 좌찬성 김병기, 판중추부사 김병국, 겸호조판서 이돈영, 대호군(大護軍) 박규수, 종정경 이재원 등이었다. 국가적인 대역사(大役事)인만큼 영의정에게 공사의 모든 책임을 맡긴 것이다.   다른 하나는 경복궁 중건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민력(民力)의 동원과 재원 마련의 문제였다. 영의정 조두순이 “경복궁 중건에 민력(民力)을 동원할지의 여부는 온 조정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기를 기다린 다음에 아뢰겠다.” 하였고,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경재는 “실로 재물을 마련하자면 백성에게서 받아내는 길밖에 없어 결국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여야 할 형편인데 절약하는 방도는 유사(有司)들이 어떻게 조처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여 민력 동원의 불가피성을 아뢰는가 하면, 좌의정 김병학은 "대체로 나라에 큰 공사가 있으면 으레 백성의 힘을 빌리는데 이것은 어버이의 일을 도우려고 아들들이 달려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라고 하여 민력 동원이 관례임을 강조하였다.   경복궁 중건이라는 대역사에 백성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는 대신들의 의견에 대왕대비는 “이번의 중건 공사는 순전히 백성들을 위하여 하는 일인데 어떻게 맨 먼저 백성들의 힘을 소비할 수 있겠는가?”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자 정원용은 "옛 제도에도 한 해에 백성들의 품을 3일간 썼습니다. 이런 나라의 공사에 백성들이 품을 들이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라고 하여 백성 동원의 불가피성을 재차 강조하였다. 이어 대왕대비가 백성들의 힘만 빌릴 것인지에 대해 묻자 조두순은 서민(庶民)뿐 아니라 위로 경재(卿宰)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힘을 내어 돕게 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위로 경재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온 국민이 동원되는 국가사업을 구중궁궐에 있는 한 여인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왕대비는 흥선 대원군의 조력(助力)을 얻고자 하여 영의정 조두순에게 아래와 같은 명을 내린다.   이처럼 더없이 중대한 일은 나의 정력(精力)으로는 미칠 수가 없기 때문에 모두 대원군(大院君)에게 맡길 것이니, 매사를 반드시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如此重大之事, 以予精力, 有所不逮, 故都委於大院君矣, 每事必講定爲之也.)   대왕대비의 명을 받은 조두순은 ‘하교(下敎)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답함으로써 모든 것이 정리 됐다. 대왕대비의 명에 따라 중건의 책임자인 도제조 조두순은 중요한 문제를 흥선 대원군과 협의를 거쳐 결정해야만 했다. 흥선 대원군에게는 일종의 자문 역할이 부여된 셈이다. 이는 서원을 정리할 때 전국의 1인(人) 1원(院)에 한해 존속시키고 나머지 모든 서원을 철폐할 때 그 대상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의 실질적 문제는 흥선 대원군에게 품정(稟定)해서 실행하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흥선 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서울 종로) - 동아출판 155쪽자문 역할이 부여되긴 했지만 중건의 최고 책임자인 영의정이 반드시 그와 상의해서 결정하도록 했으니 실로 막강한 권한이 아닐 수 없다.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 건립의 총감독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고 하더라도 흥선 대원군은 국가 정책을 결정하고 시행하는 국왕이 아니다. 서원 철폐 때도 그랬고 경복궁 중건 때도 그랬듯이 흥선 대원군은 권력을 가지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국왕의 조력자(助力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역사 서술은 합법적 최고 통치 기구인 대왕대비나 국왕을 배제하고 흥선 대원군이 마치 국왕의 지위에서 국정을 총괄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 한국사 교과서에서 1863년부터 1873년까지의 역사 서술에는 고종은 없고 오로지 흥선 대원군만이 있다. 이는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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