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근

■ 케 브랑리 박물관의 ‘십이류면류관’   2018년 10월 25일, 문화유산회복재단 조사단은 스포츠 토토의 후원을 받아 프랑스 국립박물관인 케 브랑리박물관을 방문하였다. 박물관은 2006년에 개관한 곳으로 건물 외관부터 특이하였다. 박물관은 에펠탑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은 주로 인류 초기의 문명 유물 30만여 점을 전시하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조사단은 이곳에 19~20세기 수집한 한국 유물이 소장되어 있어, 어렵게 열람 허락을 얻어 방문하였다. 한국 유물 중에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십이류면류관’이었다. 조사단을 맞이한 박물관 측은 특별 열람실에 ‘십이류면류관’을 전시하고 관련 자료를 검색할 수 있게 컴퓨터도 연결하였다.   십이류면류관은 ‘황제’만이 착용할 수 권위의 상징이다. 중국이나 일본은 황제국을 자칭하면서 자신만의 열두 줄 구슬이 달린 면류관을 사용하였지만 조선은 아홉 줄이 달린 구류면류관을 착용하였다. 그러나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조선은 황제국이 되었고 십이류면류관을 사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순종황제가 십이류면류관을 쓴 사진은 있으나, 고종황제의 십이류면류관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고 사진조차 없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었다. ■ 1898년 스테낙께르가 수집했다 조사단으로 참여한 김나래 박사는 수집 경위와 관련하여 “면류관의 경우 다른 한국 수집품과 함께 처음에는 1898년에 기메박물관으로 스테낙께르에 의해 기증되었다. 이후 1981년 트로카데로에 있는 인류 박물관(Musée des hommes)으로 다른 아시아 유물들과 함께 옮겨진 후, 다시 2006년에 께 브랑리 인류사 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1904년에 발간된 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기증자 명단에 요코하마의 프랑스 영사였던 스테낙께르가 있으며, ‘돌조각상 하나와 한국의 머리장식 및 모자 컬렉션을 기증했다(Steenackers-Consul de France à Yokohama. Une statue pierre. Une collection de coiffures coréennes)’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여기에서의 하나의 컬렉션이라는 표현이 모호하여 구체적으로 그 수량과 형태를 이 글만으로는 자세히 추정하기는 어렵다.    현재 께 브랑리 박물관의 십이류면류관 유물 카달로그에는 기증자에 대한 정보와 함께 아래와 같은 옛 한국 모자의 형태, 왕실용 모자제작 등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다. ≪Série de chapeaux coréens envoyés au Musée Guimet en 1898 par M. Steenackers le donateur.Les chapeaux doivent se placer sur le sommet de la tête, ils ne sont pas faits pour être enfoncés, ce qui explique la petitesse du tour de tête, il en est de même pour la plupart des bonnets, sauf ceux en crin tressé et ceux formant capuchon, destinés à protéger du froid. Ces derniers se portent toujours sous le chapeau. Dans les couvre-chefs coréens présentant une partie plus haute que l’autre, la plus élevée est destinée à couvrir la tête, cette disposition a pour but de loger le topnot, touffe épaisse de cheveux relevée en forme de chignon, que les hommes portent au sinciput. Les chapeaux et bonnets royaux ne peuvent être confectionnés que par certaines personnes possédant ce droit héréditairement, nul autre ouvrier, sous peine de mort, n’a le droit de fabriquer les coiffures royales. Il est interdit à ceux qui sont autorisés à fabriquer les chapeaux du roi, de vendre ces objets, sous les peines les plus sévères. Les coiffures royales hors d’usage ou ne plaisant plus au souverain, sont détruites au Palais.기증자 스테낙께르에 의해 1898년 기메 박물관에 보내진 한국 모자들모자들은 눌러쓰는 것이 아닌 머리 위에 놓는 스타일로 머리 둘레가 작은 편인데, 말총으로 짜여진 것(탕건)이나 두건형태의 것을 제외한 추위를 막기 위한 대부분의 헝겊 모자들도 이와 같다. 이것들(탕건이나 두건들)은 항상 모자 아래에 쓰여진다. 한국의 두건식 모자들은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더 높은데 가장 높은 부분은 머리를 덮는 곳이며, 이러한 형태는 남자들이 전두부에 머리를 틀어올린 상투끝을 놓기 위한 것이다. 왕실의 모자들은 대를 이은 특별한 장인들만 제작할 수 있으며, 다른 장인들은 왕실 머리장식이나 모자들을 만들 수 없으며 이를 어길 시 사형을 당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왕의 모자를 만들거나 심지어 파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일반적인 경우) 사용할 수 없거나 왕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왕실 모자들은 궁에서 파기된다.≫설명대로 왕실에서 사용된 물품들은 궁에서 파기되기 때문에 어떤 경로로 궁 밖으로 유출되었는지, 어디에서 스테낙께르가 구입해서 1898년에 프랑스에 기증하게 되었는지 의구심이 생긴다. 참고로 이 면류관 외에도 께 브랑리 박물관에는 한국 왕실 의례 때 쓰였던 금관(목록번호 71.1981.93.18 D) 등 관모(官帽)를 소장하고 있는데 역시 같은 내용이 설명되어 있다.십이류면류관은 박물관의 홈페이지(collections.quaibranly.fr)에는 머리쓰개(coiffe)류로 분류되어 있으며, 목록번호(71.1981.93.21 D), 면류관이라는 한국식 발음 명칭, 인류 박물관에서 이전된 유물, 19세기 후반, 재질(종이, 천, 밀랍), 크기와 무게(20x25x20cm, 177g) 등의 기본 정보가 소개되어 있다. 오렌지색, 빨간색, 녹색의 12줄 구술 끈과 붉은 술이 특별한데 홈페이지의 첫 줄에 ‘공식의례를 위한 황제의 머리장식’이라고 소개되어 있으며, 이후의 설명은 위의 카달로그 내용과 동일하다.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가 구류 면류관과 구장 면복을 입은데 반해, 황제는 십이류 면류관과 십이 장복을 입었음을 고려할 때 이 면류관이 대한제국 선포 이후 1897년경 제작된 고종황제의 면류관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께 브랑리로 이전된 이후 먼지가 제거되고 떨어진 술과 면판의 박락된 모서리부분을 붙여놓았으며, 전체적으로 유물의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대한제국의 ‘십이류면류관'이 아니다조사단이 촬영한 면류관의 사진을 본 궁중복식전문가들은 ‘우리 것이 아니다’라는 입장이다.우선 구술 줄이 앞면에만 있고, 구슬의 배열과 면판도 오동나무면판이 아닌 종이에 천을 배접한 점 등 대한황실의 제작기법, 형태, 재질 등에 있어 상이함으로 유사품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참고로 대한제국의 십이류면류관에 대한 기록은 에 있다. 대한예전은 대한제국이 창건됨으로 새롭게 제정한 예전으로 ”시일야방석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이 각고의 노력 끝에 편찬하였다.     ■ 프랑시스 프레데릭 스테낙께르 Francis-Frédéric Steenackers (1858-1917)김나래 박사의 조사에 의하면 프랑시스 스테낙께르는 유명한 행정가이자 조각가, 역사가, 문학가였던 프랑소와 프레데릭 스테낙께르(François-Frédéric Steenackers, 1830-1911)의 아들로 30살 무렵부터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88년 스위스의 프랑스 부영사를 역임했으며, 같은 해 기사훈장을 받았다. 이후 프랑스로 돌아왔으나 1891년부터 일본의 프랑스 공사관에서 부영사로 일했다. 이 시기 스테낙께르는 일본 미술품 애호가였던 정치가 조르쥬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1841-1929)의 ‘눈’이자 자문 역할으로 그의 많은 일본 미술작품과 민속품 수집을 돕게 된다. 이 시기의 외교관들이 과학조사(mission scientifique)를 목적으로 현지의 민속학 자료 및 유물들을 수집해 프랑스로 보내는 일을 수행했다. 아시아 예술품에 해박했던 스테낙께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일본과 한국의 민속품 등을 수집해 프랑스로 보냈으며, 1898년에는 기메 박물관에 십이류면류관을 비롯한 한국 민속유물들을 기증했다. 께 브랑리 박물관 카달로그에는 모자(삿갓, 면류관, 사령모자 등)류, 머리장식품, 부채류들의 기증자로 기록되어 있다.1900년부터 1906년까지는 나가사키 및 요코하마 프랑스 영사로 일했으며, 폴 포탕의 군사자문이자 일본 전문가로 유명해졌다. 1908년에 프랑스 공사관이 일본에서 문을 닫게 되며, 스케낙께르는 프랑스로 돌아와 58세의 나이로 파시(Passy)에서 사망한다.저서로는 우에다 토쿠노스께(Uéda Tokunosuké)와 함께 프랑스어로 편찬한 이 있다. 1885년에 파리에서 출간된 이 책은 각 페이지마다 소소한 일본인들의 일상을 그린 삽화들과 수묵화들이 포함되었으며, 각 격언마다 스테낙께르가 상세한 해석과 설명을 한 점이 인상적이다. ■ 대한제국 선포의 역사적 의미와 면류관의 ‘진실’    문화유산회복재단은 박물관에서 기록한 수집시기와 수집가에 대한 내용과 궁중복식연구가들의감정결과에 따라 케 브랑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국 유물의 출처조사가 필요하다고 결론내렸다. 십이류면류관이 유사품이라면 이를 박물관에 알리고 바로 잡아야 하고 국내 연구자들의 기술적 범위에서의 감정이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면 이에 대한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하였다.   자주독립국가의 상징인 ‘십이류면류관’은 ‘만세’운동의 상징성과 함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귀중한 단서가 될 것이다.

김승열

디지털 시대에는 고정비용이 많이 드는 오프라인 사무실이 필요없다. 컴퓨터가 바로 온라인 사무실이 된다. 사무실의 위치, 크기와 화려한 외관 등이 회사의 권위와 신뢰의 상징이 되어 왔다. 지금도 여전히 사무실의 외형은 회사 신뢰성의 척도다. 그러나 문제는 번지르르한 외형에 따른 고비용이 모두가 소비자들에게 돌아간다는 사실. 정보가 공개·공유되기 어려운 시대에는 어쩌면 불가피한 면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디지털 시대다. 거의 모든 정보가 공개·공유되는 블록체인(Blockchain) 시대다. 주된 업무와 서비스가 온라인으로 처리되어 오프라인 상의 사무실 공간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도심 번화가에 사무실을 열고 값비싼 기자재를 들여놓아 회사 방문객이나 소비자의 눈을 현혹시킬 필요가 없게 되었고 고정비용 역시 크게 줄이게 되었다.   이른바 온라인 혁명은 직원들의 출퇴근에도 영향을 미친다. 각자의 업무는 컴퓨터만 있으면 되니 컴퓨터가 있는 곳이 바로 사무실이다. 노트북과 핸드폰 그리고 약간의 협업을 위한 컴퓨터 소프트웨어만 있으면 충분하다. 회의는 온라인상으로 진행되니 별도의 회의실이 불필요하다. 실제 일부 스타트업 회사는 오프라인 사무실이 없고 모든 업무를 온라인으로 처리한다. 다만 정기적으로 국내 또는 해외에서 워크숍을 하면서 상호 의사소통의 원활성과 효율성을 도모한다.   물론 현재는 온라인 업무와 오프라인 업무가 상호 공존하면서 상호 보완하는 상태에서 비즈니스 활동이 이루어지는 과도기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OSO(Online to Offline·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 서비스는 비즈니스에서 사무실의 개념 역시 변화시키고 있다. 예를 들면 기존의 사무실이 아니라 어느 정도 조용하고 쾌적한 공간이 있고 이 공간에서 운동 및 음악 등을 즐기면서 필요하면 회의도 하는 그런 공간이면 최상일 것이다. 물론 물품을 저장할 공간은 필요하겠지만 이 역시 창고의 공유화 등을 통하여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해외 출장을 가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호텔의 비즈니스센터는 의외로 이런 면에서 좋은 공간이 된다. 컴퓨터 시설 등이 제공되며 기타 비서적인 기능도 지원받을 수 있다. 연계된 호텔 내 헬스클럽 역시 운동도 즐기지만 사무실 기능으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클라이언트와의 회의 등의 경우 비즈니스센터 내에 있는 회의실은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고 그 호텔의 브랜드만큼의 품격 등을 활용할 수 있다. 물론 이들 시설은 공유 시설이기에 한계성은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비용 대비 가성비는 엄청나게 높아 충분한 경쟁력이 있다.   실제로 호텔 헬스클럽에서 핸드폰과 노트북을 가지고 운동을 하면서 고객들과 연락도 하고 필요하면 비즈니스센터에서 사무실, 컴퓨터 및 비서 등의 지원을 받아 회의 등이 가능하다. 물론 비즈니스의 성격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고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을 것이나 적절하게 오프라인 공간과 조화를 이룬다면 최상의 가성비를 가진 사무공간으로 변신할 수 있다.   이런 개념을 좀 더 확대해 복합리조트 시설에서 적절한 비서 기능 등의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환상적인 사무실 공간이 될 것이다. 집, 사무실, 여가, 사교활동 등 모든 것이 한 공간에서 쾌적하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래의 유망산업 중의 하나가 바로 리조트산업일 것이다. 일본의 아베 수상은 리조트 산업의 육성을 미래산업의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이제는 사무실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창조적이고 쾌적하며 멋진 온라인 공간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변혁해야 할 시기라고 본다.

김승열

독일 바이마르의 도시 전경 몇 해 전 필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소재 독일 로펌에서 방문 변호사로 지내며 인류의 천재인 괴테의 삶을 더듬을 수 있었다. 필자가 찾은 괴테하우스(프랑크푸르트 소재)는4층 정도의, 비교적 아담한 건물이었다. 처음엔 괴테가 태어나 젊은 시절을 보낸 곳이어서 한번 쯤 방문해 볼만한 곳이라는 정도의 감흥만 있었다. 그러던 중 괴테가 말년을 보낸 바이마르에도 괴테의 가든하우스가 있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도대체 인류가 낳은 최고의 천재는 왜 바이마르에서 장년과 노년을 보냈는지가 궁금하였다. 바로 일정을 잡아 바이마르로 향했다. 알다시피 독일은 기차 교통수단이 잘 발달한데다 중앙기차역으로부터 1시간 반경 내에 모든 시설과 주택이 위치해 있다. 가든하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이마르의 괴테 가든하우스 바이마르에 있는 괴테의 가든하우스는 프랑크푸르트보다 조금 화려할지 모르지만 전체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변에 심은 꽃들 역시 수수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는 괴테의 수수한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었다고 할까. 괴테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상(宰相)으로 초대 받아 말년을 보낸 곳도 이곳이었다. 말년의 애인에게 열렬한 연애편지를 쓰기도 했다. 필자는 가든하우스에서 괴테의 행복한 노년을 떠올려 보았다. 이곳이야 말로 괴테의 무한한 호기심을 자극한 곳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자극과 도전의식은 괴테로 하여금 추호의 주저함이 없이 과감하게 하고 싶은 일을 감행하는 성취동기를 부여했으리라.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명상을 통해 자신의 삶을 경건한 마음으로 재조명하면서 좀 더 도전적이고 배우는 삶으로 승화시키려 애썼을 것이다. 괴테는 일찍이 청년시절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평생 1,000점 이상의 스케치를 남기기도 했다. 재상으로 공적인 성취감을 맛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탈리아로 여행길에 올라 2~3년을 보냈으며 국립극장 단장이자 연출자로서도 활동하고 나아가 배우로 출연한 적도 있다. 의학공부도 즐겨 당시 의학계가 찾지 못한 뇌의 한 부분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필자에게 괴테는 단순히 천재가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주위의 시선이나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았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깊이 와 닿았다. 그런 과감한 결단과 도전의식이 그의 천재성을 더 빛나게 해주었다. 괴테는 필자에게는 결코 따라가기 어려운 존재지만 마음으로는 필자의 영원한 롤 모델(?)로 남아있다. 괴테의 삶을 흉내 내 먼저 필자만의 가든하우스를 만들고자 마음먹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2019년이 그 실천의 원년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필자의 형편에 맞고 글로벌 시대이자 디지털 시대에 맞는 필자만의 소박하고 현실적인 가든하우스를 꿈꾸어야 할 것이다. 희망컨대 언젠가 필자만의 가든하우스를 소개하고 이에 따른 칭찬과 동시에 혹한 비난에도 그저 감사하며 웃을 수 있는 그 날을 상상해 보면 저절로 미소가 감돈다.

김승열

지난해 중국 샤먼(厦門)에서 열린 중국과 EU 간 지적 재산 보호 컨퍼런스 모습이다. 중국의 지식재산권법 분야에서 새로운 변화의 모습이 느껴진다. 최근 베이징의 지식재산권 법원은 국내 ’미르의 전설‘ 게임업체인 위메이드엔터테인먼트가 중국의 웹게임 '전기패업' 개발사인 37게임즈를 상대로 낸 저작권 침해에 따른 서비스 금지 소송에서 저작권 침해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간 지식재산권 보호와 관련, 중국 법원이 가지는 불확실성 내지 불투명성 탓에 우려가 컸으나 이제 중국 법원의 태도가 종전과 많이 변화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 예로 중국이 지식재산권 전문법원을 설립하고 나아가 기존 특허법을 개정하려 한다.   뒤집어 생각하면 중국의 특허권 출원 건수가 세계에서 거의 제일 많을 정도로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다. 명실상부한 지식재산 권리의 최대 수출국가다. 자국의 지식재산권 보호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이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미국과의 무역 분쟁에서 중요 이슈 중의 하나가 지식재산권 보호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중국은 1984년에 제정한 특허법에 대하여 4번째 개정법안을 상정하였다. 개정안에는 손해배상의 산정이 어려운 특허침해의 경우, 법정 손해금의 범위를 현저하게 증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종전 1만~100만 위안 정도에서 10만~500만 위안으로 대폭 증액한 것이다.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종전의 법정 손해금은 특허 침해자가 매출이나 이익 관련 자료를 폐기하거나 법원에 제출하지 않아 특허권 침해로 인한 실손해 배상금액을 제대로 산정할 수 없어 금액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 개정안을 통한 법정 손해금 인상은 물론, 실효성 여부에 관한 부분은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일단은 긍정적으로 보여진다. 무엇보다 중국 자체가 이제는 지식재산 권리의 수출국가로 거듭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보여진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온라인사업자에 대한 배상 책임의 부과이다. 즉 플랫폼 사업자가 자신의 플랫폼에 각종 지식재산권을 침해하는 작품이 있을 경우 이를 삭제하거나 봉쇄하여 보이지 않도록 조치할 의무를 부여하고 이를 위반하면 법적 책임을 부과하도록 했다. 그러나 중국 특허법 개정안에는 필터링 업로드 조항(위법한 저작물 여부를 확인하고 이를 자신의 플랫폼에 업로드 하도록 한 조항) 중 특허권 침해 여부에만 한정하고 있어 실효성에 다소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유럽의 저작권법 지침이 많은 논란을 낳고 있지만, 중국의 특허법 개정안은 큰 논란을 낳지 않고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이 개정안이 단지 특허법에만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특허법이 아닌 저작권법 개정이었다면 EU저작권법 지침과 마찬가지로 파장은 가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물론 중국의 저작권법도 조만간 이번 특허법 개정과 같은 맥락으로 개정을 추진하면 그 파장은 생각보다 더 심각할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중국에서의 지식재산권 보호가 중요한 현안이 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중국 정부와 중국 지식재산권 전문법원이 보여주는 태도는 아무래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다만 좀 더 중국 지식재산권법에 대한 연구와 자료 축척을 통하여 국내 기업이 중국에서 제대로 된 지식재산권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대비할 필요가 있다. 한중 자유무역조항에는 이러한 분쟁을 감독하도록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대응책이 있는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차제에 범국가 차원에서 대중국 지식재산권보호 시스템 구축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김승열

일러스트=조선일보DB 인생은 B와 D사이의 C라는 말이 실감난다. 즉 Birth(탄생)와 Death(죽음) 사이의 Choice(선택)를 뜻한다. 선택이라는 결정은 하루에도 수십 아니 수백 또는 수천 번의 상황으로 다가온다. 물론 어떤 결정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정도로 중요한 것인지는 결정하는 사람도 아니,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리고 보면 필자 역시 인생에서 수많은 결정의 순간이 있었고 작지만 의미 있는 순간이 있었다.   먼저 고교에서의 계열 선택이 떠오른다. 문과냐 이과냐는 무척이나 고민스런 문제였다. 글을 읽는 독자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필자의 경우 황당한 동기에서 결정했다. 중학교까지 전교 1등을 했던 필자는 고교에 진학해 선의의 경쟁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친구가 문과를 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과로 정했다. 사실 필자의 장래 희망은 의사였다. 그러나 그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가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남지만 그때의 결정이 우연이라기보다 계시, 운명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두 번째는 대학의 선택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욕심일지 모르지만 가능하면 최고의 학과에 진학하고 싶었다. 그런데 확신이 없었다. 안전한 학과에 진학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재수를 각오하고 법대에다 원서를 냈다. 과감하게 지원하였고 운 좋게 합격했다. 지금도 가끔 지적받는, 이유 없는 자신감의 기초가 되는 행운까지 맛보게 되었다. 스스로의 용기에 대한 과분한 보답 같기도 하다.   미국유학 시절의 일이다. 기왕의 유학길이니 미국문화를 제대로 알고 싶었다. 룸메이트도 미국인으로 정하고 싶었다. 그렇게 만난 이가 공교롭게도 미국인 여대생이었다. 그 학생은 필자의 이야기를 듣고 학교까지 자신의 차로 등하교시켜 주겠다고 친절한 제안까지 했다. 어쩌면 너무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미국의 룸메이트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 친구가 여자 룸메이트와 생활을 우려하며 “한국에서 이상한 소문이 날수도 있다”는 등 부정적으로 말해 영 신경이 쓰였다. 할 수 없이 포기하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혼자 아파트에서 지내는 것이 아니라 미국 학생들과 같이 룸메이트를 했다면 좀 더 미국문화에 친숙했을지 모르겠다.   미국 뉴욕의 로펌에서 변호사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뉴욕사무실 뿐만 아니라 워싱턴DC 사무실로 옮겨 좀 더 일해도 좋다는 승인을 로펌 경영진으로부터 마침내 받아냈다. 필자가 재직하던 로펌은 컬럼비아 법대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로펌 중 하나였고 톱10 로펌 중의 하나였다. 또 주미 한국대사관의 자문변호사 사무실로 지정되어 국내 및 국제적으로 여러 가지 유익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가족이었다. 향수병에 걸린 아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종용했다. 당시 신혼초인 데다가 아내 태도가 워낙 강경했다. 필자로선 새로운 기회의 상실뿐만이 아니라 워싱턴DC 사무실로 이전을 도와준 분들까지 난처하게 만드는 등 설상가상의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아내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서초동에서 법인을 운영하던 필자는 비교적 운영이 잘되기는 했으나 ‘규모의 경제’에 대한 욕심이 났다. 주위의 조언도 마찬가지였다. 강북의 법률사무소와 합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사무실을 합친 이후 문제가 생겼다. 주로 혼자서 업무 결정을 하던 필자에게 다소 이질적인 다른 법률사무소의 환경 내지 문화가 아주 숨이 막힐 정도로 힘들게 느껴졌다. 나아가 필자의 의욕을 완전히 떨어드릴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각하였다. 그간 지시만 했지, 수평적논의에 익숙지 않았던 필자에게는 그냥 이상한 사람이고 아웃사이더로 비쳐졌다. 그래서 결별하고자 마음을 먹었는데 문제는 필자가 진행하여 온 핵심 업무가 결별시 새로운 인가가 불가능하도록 갑자기 법 규정이 개정되었다. 그 업무를 중단하게 되면 필자 사무실로서는 기본적인 운영조차 어려울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치니 포기할 수도, 추진할 수도 없이 그냥 엉거주춤하게 시간만 낭비하게 되었다. 외도라고 할까, 본연의 변호사 업무보다 자연스럽게 다른 관련 업무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최고경영자 과정, 외국 학위과정, 서울법대 박사과정, 칼럼쓰기, 방송출연, 강연, 그리고 변협과 대한특허변호사 활동 등등으로 대외활동을 활발히 했다. 나름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얻고 잃은 것을 따지면 궁극적으로는 거의 제로인 셈이었다. 그때 유․불리를 떠나 과감하게 새로 시작하였으면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당시에 과감하게 결단을 하였다면 필자의 로펌을 좀 더 알차게 키우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역시 또 다른 결정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고집대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당당하게 대응해, 만약 성공을 하게 되면 큰 결과물이 나오겠지만 실패하면 필자가 감당할 불이익이 너무 크다. 주위에서는 너무 고집을 피우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당당하게 정면 대응하는 짜릿함에 마음과 몸을 던지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에 따른 엄청난 불이익을 생각하면 고집 피울 것이 아니라 그저 적당히 타협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무엇이 옳은 선택일까. 무식한 용기와 절제된 균형감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어떻게 동시에 잡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어느 곳에다 방점을 둘까. 결과는 그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어차피 운칠복삼(운이 70% 복이 30%)일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문제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난다. 지금까지 나름 잠정 결론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하고 후회하는 것이 나중에 덜 후회하는 길”이라는 가르침만이 귓가에 울릴 뿐이다.

김승열

와인과 치즈 (이미지_픽사베이)한국의 저작권법에 의하면 저작물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이라고 한다. 그 예로 음악, 미술, 영상 그리고 컴퓨터 프로그램 등을 들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어느 정도 독창적인 창작물로 음식의 맛이나 향기 등이 저작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 답은 “예”와 “아니오”다. 적어도 EU법원에서 향기는 저작물로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음식맛은 저작물이 아닌 하나의 아이디어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표현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논리는 어디에 근거하고 있을까?   2006년에 화장품회사 랑콤은 케카파(Kecafa)를 상대로 이 회사가 자신의 트레조르(Tresor) 향수를 모방하였다는 이유로 저작권 침해소송을 제기했다. 쟁점은 향기를 객관적으로 묘사할 수 있느냐 였다. 랑콤은 “향기가 지각능력으로 인지될 수 있고, 어느 정도의 독창성이 있으며, 저작권자의 특징 등이 개입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향기는 장미 등 여러 요소를 결합하여 장기간의 노력을 투입한 결정체”라고도 했다. 네덜란드 대법원은 랑콤의 주장을 받아들여 향기의 저작물성을 인정했다.   반면 EU 법원은 음식맛에 대해선 다른 결론을 내렸다. 네덜란드의 한 크림치즈 생산업체가 경쟁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자사 주력품의 맛을 베꼈다는 것이 이유였다.  EU의 최종 사법기관인 유럽사법재판소는 고심 끝에 ‘음식맛은 너무 주관적이어서 객관적으로 정의를 내릴 수 없기에 저작권법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음식맛을 법적으로 보호하기 위해선 좀 더 명확하고 객관적인 맛의 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맛은 음식을 맛보는 사람, 연령과 음식에 대한 선호, 환경 그리고 음식을 먹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향기와 비교하여 볼 때 논란의 소지는 있어 보인다. 향기 역시 주관적인 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다만, 향수는 일찍이 산업화의 과정을 거쳐서 어느 정도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자료가 있어 저작권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음식맛은 아직 독자적인 산업화의 과정, 특히 체계적인 맛에 관한 과학적 연구자료가 다소 미흡하다고 볼 수 있다. 향후 음식맛에 대한 과학적 분석자료 등이 보강된다면 저작물의 보호대상이 될 여지는 충분하다. 음식 역시 상당기간 투자와 노력을 투입하여 이루어진 하나의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맛과 향기는 사법제도에서 중요한 주장과 입증 책임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법이 상식에 기초한다면 법이 추구하는 정의의 관념에서 보면 상당기간 투자와 노력의 결과물인 맛과 향기도 보호받아야 마땅하다.

김승열

이미지_픽사베이세기의 천재 괴테는 ‘색채는 빛의 고통’이라고 표현했다. 아름다운 색채는 온갖 역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잉태된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겉보기에 아름다운 모습도 그 이면에 엄청난 고통을 품고 있고, 그 외부의 아름다움은 그 고통을 나름대로 승화시킨 결과물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인생의 여정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다. 어떤 어려움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정돈된 일상을 완전히 부셔버린 채 절망의 나락으로 내몬다. 최근 암으로 필자의 친구와 후배가 세상을 떠났다. 남겨진 그들의 가족이 겪었을 아픔은 상상하기 어렵다. 필자 생각에 그들은 누구보다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온 누군가의 착한 이웃이었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잘나가고 즐거운 시기에 뜬금없이 불현 듯 불행이 찾아오는 모양이다.갑작스런 죽음이 가져다주는 고통과 불행은 합리적으로 예견할 수 없는, 그냥 인생의 자연스럽고 통상적인 현상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종착역은 죽음이고 그 죽음이 당장에 오지 않더라도 각종 고통이나 불행은 어디서나 도처에 깔려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숨 한번 내쉬는 것조차 두렵고 발걸음 하나 내딛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그래서 인생은 비극이라는 말이 나온 것일까. 저절로 철학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 열심히 살지 말자’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현실에 아등바등 하지 말고 결과보다 과정에 충실하며 오늘, 지금을 즐기라는 말로 들린다. 그렇지만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치열한 경쟁과 서로를 비교하는 것이 일상화된 한국의 지독한 현실에서 나 혼자 뒤쳐져 유유자적하게 산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그러다 가끔 큰 시련을 겪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출세와 욕망이라는 큰 욕심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그 고통 속에서 큰 선물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종교인은 필자에게 “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큰 시련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될 것 같기도 하다. 일상의 작은 일에 만족하고 작은 기쁨에 만족하는 것이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긍정적으로 신께 모든 것을 의탁하면 어떤가. 쉽지 않겠지만 그런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시련은 조만간 큰 깨달음과 축복으로 변환되지 않을까. 그 시련을 극복했는지, 사후 무엇이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말이다. 심지어 질병과 뜻하지 않은 사고 등으로 별안간 인생의 종말이 닥치더라도 남아있는 그 짧은 시간이 소중하고 감사할 것 같다. 인생 2막에 즈음해 이제 2019년은 필자에게 무엇보다도 마음을 잘 다스리는 한해가 되길 소망한다. 인생의 어떠한 역경도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여기리라 다짐해 본다.

김주덕

세상 일은 언제나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허황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혼자만 열심히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중 10%는 언제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 10% 안에 들어가면 만족해야 한다.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어진 여건과 환경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보라. 개인의 건강관리도 철저하게 하고, 가정도 잘 지키고, 직장생활도 열심히 한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혼자만 머리 좋고, 똑똑하고, 인물 좋고, 열심히 산다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한심하다.   인생은 큰 방향이 있고, 중간 중간에 크고 작은 굴곡이 있다. 그리고 매일 매일 작은 파도가 밀려온다. 그것을 잘 헤쳐나가야 한다. 아무 파도도 없는 곳은 작은 연못이나, 작은 개천에 불과하다. 그곳에서는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없다. 상어를 잡기 위해서는 넓은 바다, 파도가 무섭게 치는 바다의 가운데로 들어가야 한다.   너무 자신의 역량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결과에 실망하고, 말도 되지 않는 허황된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 현실을 직시하라. 현실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눈높이를 낮추라.   인생에 늘 행복만 있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다. 인생은 기본적으로 생로병사의 고통을 수반하면서 삶의 본능 때문에 누구나 살아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아무리 잘 나가도 때로 꺾이기도 한다. 나이 들면 자연히 시들해진다. 화무십일홍이다. 권세는 10년 못 가고, 부자도 3대를 못 간다.   현실에 만족하라. 그리고 노력하라. 기죽지 마라.

이한우

  성군(聖君)은 아니어도 명군(明君) 혹은 영군(英君)으로 불리기에 손색없는 한 무제(漢 武帝)도 나이가 많아 병이 들자 판단력이 흐려졌다. 그것이 빌미가 돼 일어난 비극적 사건을 흔히 중국사에서는 ‘무고(巫蠱)의 화(禍)’라 부른다. 무고란 무축(巫祝)의 주법(呪法)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 화의 희생자가 다름 아닌 다음 황위를 이을 태자였기에 이 사건은 두고두고 조명을 받았다.    기원전 92년 병으로 눕게 된 말년의 무제는 당시 강충(江充)이라는 인물을 절대 신임하고 있었다. 유가(儒家)의 덕치(德治)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엄격한 법 집행을 강조했던 무제는 강충의 고지식할 정도로 엄격한 일처리를 좋아했던 것이다. 그런데 태자 유거(劉據)는 강충과 사이가 틀어져 있었다. 예전에 강충이 황제의 명을 직접 받드는 직지사자(直指使者)였을 때 태자의 집안 수레가 황제만이 다니는 치도(馳道) 위를 올라간 적이 있었다. 태자가 없었던 일로 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강충은 들어주지 않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오히려 무제는 강충을 곧은 자[直]라고 여겼다.    강충은 무제가 병석에 눕자 걱정에 휩싸였다. 무제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태자에게 주살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무고(巫蠱)의 일이 일어나자 강충은 이를 이용해 간사한 짓을 벌이기로 결심한다. 사전에 준비를 해 둔 함정에 태자를 빠트리려고 한 것이다.      태자의 亂   이때 강충은 무고의 일을 재판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이미 무제의 뜻을 알아차리고서 궁중에 무고의 기운이 있다고 건의한 다음에 궁궐에 들어가 어좌가 있는 곳을 무너트려 땅을 팠다. 무제는 안도후(按道侯) 한열(韓說), 어사 장당(章贛), 황문(黃門·환관) 소문(蘇文) 등으로 하여금 강충을 돕게 했다. 강충은 드디어 태자궁에 이르러 고(蠱)를 파내어 오동나무로 만든 인형을 찾아냈다. 이때 무제는 병에 걸려 감천궁(甘泉宮)으로 더위를 피해 가 있었기 때문에 황후와 태자만이 경사(京師·수도)에 있었다. 태자가 소부(少傅) 석덕(石德)을 부르니 석덕은 사부로서 함께 주살(誅殺)될 것을 두려워해 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 승상 부자와 두 공주 그리고 위씨(衛氏)가 모두 이 사건에 연루됐는데 지금 무당과 사자(使者)가 땅을 파 증거물까지 얻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는 무고를 갖다 둔 간사스러운 짓이 혹시 실제로 있었는지를 모르겠지만 스스로 밝힐 방법이 없으니 부절(符節)을 칭탁해 강충 등을 체포해 옥에 가두고서 그의 간사함을 끝까지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태자는 위급한 상황이라 석덕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정화(征和) 2년(기원전 91년) 7월 임오일(壬午日)에 마침내 (태자는) 빈객으로 하여금 사자인 척하고 가서 강충 등을 잡아들였다. 안도후 한열 등은 사자에게 속임수가 있다고 의심해 기꺼이 조서를 받으려 하지 않자 빈객은 한열을 쳐 죽였다. 어사 장당은 부상을 입고 겨우 탈출해 직접 감천궁으로 달려갔다. 태자는 사인(舍人) 무차(無且)를 시켜 미앙궁 궁전의 장추문(長秋門)으로 들어가게 해 장어(長御·여자 시위대장) 의화(倚華)를 통해 황후에게 전말을 갖추어 고백하게 하고 황실의 마구간에 있는 수레를 내어 활 쏘는 병사들을 싣고 가서 무기고의 병기를 꺼내고 장락궁(長樂宮)의 위졸들을 출동시켰으며 백관들로 하여금 강충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하게 했다. 그리고 강충의 목을 벴다.    여기에 태자의 잘못도 있었다. 먼저 아버지 무제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했다. 그런데 황후에게만 통고하고 일을 일으킨 것은 분명 무제의 의심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한편 강충을 따랐던 무리들은 감천궁으로 달려가 “태자가 난(亂)을 일으켰다”고 보고했다.      父子相爭    무제는 조카이기도 한 승상(丞相) 유굴리(劉屈氂)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보고하도록 했다. 그런데 유굴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에 무제는 크게 화가 나서 이렇게 전했다.    “승상에게는 주공(周公)의 풍모가 없도다. 주공은 관채(管蔡)를 토벌하지 않았던가!”    관채란 관숙과 채숙으로 주나라 주공과는 형제인데 주공이 보필하던 조카 성왕(成王)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 형제임에도 토벌을 한 일이 있다. 사실상 태자를 토벌하라는 명이었다. 이에 유굴리는 군대를 출동시켰다. 부자 간의 일전(一戰)이 벌어진 것이다. 닷새의 혈전 끝에 수만 명이 사망했다. 태자의 군대가 패하자 태자는 달아났다.    그에 앞서 장안에서 태자의 반란이 막 전해졌을 때 무제는 크게 화가 났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은 두려워만 할 뿐 어떤 계책을 내야 할지 몰랐다. 이 때 (상당군) 호관현(壺關縣)의 삼로(三老·교육 담당관) 무(茂)라는 사람이 글을 올려 말했다.    “옛날에 순(舜)임금은 효심이 지극했는데도 (아버지인) 고수(瞽叟)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또 (은나라 고종의 아들인) 효기(孝己)는 (계모에게) 비방과 모략을 당했고 백기(伯寄)도 (계모에게) 추방을 당했으니 골육을 함께한 지친이면서도 아버지와 자식이 서로 의심한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비방[毁]이 오래 쌓이면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자식은 결코 불효를 하지 않는데도 아버지는 그것을 미처 다 살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서둘러 태자를 용서해 줄 것을 청했다. 《한서(漢書)》는 “천자는 느끼고 깨닫는 바가 있었다”라고 적고 있지만, 적극적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실상의 진압을 명한 것이다.    난이 실패로 돌아가자 태자는 도망쳐 동쪽으로 호현(湖縣)에 이르러 그곳의 천구리(泉鳩里)에 숨었다. 주인집은 가난해서 늘 짚신을 만들어 팔아 태자의 먹을거리를 댔다. 태자와 옛날부터 알던 사람이 호현에 있었다. 태자는 그가 부유해 넉넉하다는 말을 듣고서 사람을 시켜 그를 부르려다가 발각됐다. 관리들이 태자를 둘러싸 잡으려 하자 태자는 더 이상 벗어날 곳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헤아리고서 곧바로 방에 들어가 문틀에서 자살했다. 무제는 태자를 잃었다. 강충의 말을 믿은 결과는 너무도 처참했다.      뒤늦은 후회    1년이 지난 정화3년(기원전 90년) 9월 경 무고의 사건이 대부분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무제는 태자가 두려워서 그랬던 것이지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는데 당시 한고조 유방의 사당을 관리하던 고침랑(高寢郞) 거천추〔車千秋·원래 그의 이름은 전천추(田千秋)인데 그의 나이가 많아 천자는 그가 작은 수레를 타고 대궐에 들어올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거(車)를 붙여 거천추 혹은 차천추라고 하는 것이다〕가 다시 태자의 원통함에 대해 말했다. 무제는 드디어 거천추를 발탁해 승상으로 삼고 강충의 집안은 족멸시켰으며 태자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었음을 가련하게 여겨 마침내 사자궁(思子宮)을 짓고 호현(湖縣)에 귀래망사지대(歸來望思之臺·이는 ‘태자의 혼령이라도 돌아오기를 바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 사건은 흔히 우리나라 역사에서 사도세자의 일과 비교된다)를 세우니 천하 사람들이 이를 듣고서 다 슬퍼했다.    여기서 《논어(論語)》 옹야(雍也)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재아(宰我)가 물었다. “어진 사람은 비록 (누가) 사람이 함정에 빠져 있다고 와서 말해 주더라도 따라 들어가야겠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어찌 그렇게 하겠는가? 군자를 (함정까지) 가게 할 수는 있으나 빠지게 할 수는 없으며 속일[欺] 수는 있으나 옭아넣을[罔] 수는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그 뛰어난 무제도 강충의 말에 속았을 뿐만 아니라 옭아매였다고 할 수 있다. “태자가 두려워서 그랬던 것이지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태자가 죽고 나서야 깨달은 무제는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는 사리에 밝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강충의 이간질    사실 강충의 부자 이간질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한서(漢書)》 ‘강충전(江充傳)’에는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짤막하게 실려 있다.    〈강충(江充)은 자(字)가 차천(次)으로 조(趙)나라 한단(邯鄲) 사람이다. 충(充)의 본래 이름은 제(齊)였는데 북과 비파를 잘 연주하고 가무에 능한 여동생이 있어 조(趙)나라 태자 단(丹)에게 시집을 갔다. 제(齊)는 경숙왕(敬肅王)에게 총애를 얻어 상객(上客)이 됐다.    얼마 후에 태자는 제(강충)가 자신의 은밀한 사생활을 왕에게 아뢰었다고 의심해 제와 틈이 생겨 관리를 보내 제를 쫓아가 체포하려 했는데 (이미 달아나) 붙잡지를 못하자 그의 아버지와 형을 감옥에 넣고 조사해 모두 기시(棄市)했다. 제는 드디어 종적을 감추고 도망쳐 서쪽으로 함곡관에 들어가 이름을 충(充)이라고 고쳤다. 대궐에 나아가 태자 단(丹)이 자신의 친여동생 및 왕의 후궁과 간통하고 군국(郡國)의 간활한 토호들과 교통하며 백성들을 겁주면서 온갖 못된 짓을 하고 있는데도 관리들이 제대로 통제를 못하고 있다고 고했다. 글이 올라가자 천자(무제·武帝)는 화가 나서 사자를 보내 군(郡)에 조서를 내려 관리와 병사들을 발동해 조나라 왕궁을 포위하게 하고 태자 단을 붙잡아 위군(魏郡)의 조옥(詔獄)에 옮겨서 집어넣고 정위(廷尉)와 함께 다스리도록 하니 법적으로는 사형에 해당됐다.〉    무제는 이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오히려 강충의 이 같은 굽은 마음씨[枉]를 오히려 곧다[直]고 보아 절대 신임을 보였던 것이다.      목인해의 음모    1차 선위(禪位)파동이 있는 다음해인 1408년(태종8년)이 끝나가던 12월 5일 밤 태종은 조준(趙浚)의 아들이자 자신의 둘째 사위인 조대림(趙大臨)을 반역 혐의로 순금사(巡禁司)에 가두도록 명했다. 이때 조대림의 나이 21살이었다. 얼마 후 밝혀지지만 그가 순금사에 갇히게 된 것은 목인해(睦仁海)의 모함 때문이었다.    목인해는 김해 관노(官奴) 출신으로 애꾸눈에 활을 잘 쏘았고 원래는 태종의 처남 이제(李濟)의 가신이었다가 이제가 1차 왕자의 난 때 죽자 정안공(태종 이방원)의 사람이 돼 호군(護軍·장군)에 올랐다.    그의 부인은 조대림 집의 종이었다. 그래서 목인해는 늘 조대림의 집을 드나들었고 조대림도 목인해를 가족처럼 대해 주었다. 그런데 목인해는 ‘대림이 나이가 어리고 어리석으니 모함하면 부귀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고 생각해 나름의 시나리오를 꾸민다.    목인해는 자신이 부마(駙馬)로서 군권(軍權)을 갖고 있던 이제의 휘하에 있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뜻밖의 변이 일어나면 다른 사람들은 문제가 없지만 공은 군사에 익숙하지 못하니 미리 대처하는 방법을 익혀 둬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목인해는 “설사 변을 일으키는 자가 있더라도 내가 힘을 다해 공(公)을 돕겠소”라고 다짐했다.    다른 한편으로 목인해는 은밀하게 이숙번을 찾아가 “평양군(平壤君·조대림이 아버지 조준의 작호를 1406년 이어받았다)이 두 마음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공(公)과 권규(권근의 아들이자 태종의 셋째 사위), 마천목을 죽이고 역모를 꾀하려고 하오”라며 거짓 밀고를 했다.      태종, “내 이미 알고 있었다”    이숙번은 즉각 태종에게 아뢰었고 태종은 직접 목인해를 불러 믿을 수 없다며 “대림이 나이 어린데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느냐? 만일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주모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목인해는 이 말을 듣고는 즉각 조대림에게 달려가서 “곧 무장한 군사 수십 명이 경복궁 북쪽 으슥한 곳에 모여 공을 해하려고 하니, 공은 마땅히 거느리고 있는 병마로 이를 잡으소서”라며 덫을 놓았다. 병사를 몰고 경복궁쪽으로 간다는 것은 곧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쿠데타이기 때문이다.    조대림은 처음에는 이숙번과 이야기해야겠다, 태종에게 알려야겠다고 하자 목인해는 상황이 급하니 먼저 군사를 출동시키고 나서 알려도 늦지 않다고 유인했다. 조대림도 이를 옳다고 여겨 우선 목인해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태종은 조대림에게 사람을 보내 소격전(昭格殿)에서 제사를 지내라고 명했다. 그런데 조대림은 자신이 범염(犯染·초상집에 갔다옴)을 했기에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그 바람에 태종도 조대림을 의심하게 된다.    목인해의 구상은 의외로 치밀했다. 목인해는 조대림의 집에 와서 “위아래 친분이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이에 조대림은 “조용밖에 없다”고 말했다. 조용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덕망이 있는 학자였다.    조대림이 조용을 불러 침실에서 은밀하게 자기가 아는 전후사정을 이야기했다. 조용은 당장 “주상께 아뢰었소?”라고 물었다. 조대림이 “아직 아뢰지 못하였소”라고 답하자 조용은 얼굴빛이 변하며 “신하가 되어서 이런 말을 들으면, 곧 주상께 달려가 고하는 것이 직분인데, 하물며 부마는 더 말할 게 뭐가 있겠소?”라며 야단치듯 말하고 자신이 직접 고하겠다고 대궐을 향해 나섰다. 이에 당황한 목인해는 조용을 길에서 잡아 억류한 다음 이숙번에게 달려갔다.    “조용이 지금 평양군의 집에 있습니다. 이 사람이 모주(謀主)입니다. 평양군이 만일 거사하면, 내가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를 것이니, 만약 대인의 군사와 만나거든, 군사를 경계하여 나를 알게 하소서. 그러면 내가 칼을 뽑아 평양군을 베겠습니다.”    그런데 이 틈에 조용이 탈출에 성공해 태종에게 진상을 낱낱이 보고했다. 태종은 조용의 말을 듣자 “내 이미 알고 있었다”고 답한다. 이제 남은 것은 목인해를 잡아들이는 일이었다.      황희의 사람 보는 눈    한편 전후 사정을 모르는 조대림은 해가 저물자 대궐로 태종을 찾아뵈었다.    “듣자오니 경복궁 북쪽에 도적이 있다 하니, 신이 이를 잡고자 합니다. 원하옵건대, 신에게 마병(馬兵)을 주소서.”    “네가 어떻게 잡겠느냐?”    “신이 능히 잡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서 태종은 속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는지 모른다. 그러고는 모른 척하고서 좋다고 말한다. 조대림은 그래서 당직을 서고 있던 총제(總制) 연사종(延嗣宗)에게 병사를 빌려달라고 하니 미리 태종의 밀지(密旨)를 받았던 연사종은 23명을 내주었다.    한편 태종은 이숙번에게는 “조대림이 만약 군사를 발하면 향하는 곳이 있을 것이니, 경의 집에서 조천화(照天火·일종의 조명탄)를 터뜨려라. 내가 나발을 불어서 응하겠다”고 일러두었다. 그러면서도 지신사(知申事·후일의 도승지) 황희(黃喜)에게는 시치미를 뚝 떼고서 “들으니 평양군이 모반하고자 한다니, 궐내를 요란하고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에 황희가 주동자가 누구냐고 묻자 태종은 “조용이다”고 답했다. 그러자 황희는 “조용은 사람됨이 아비와 임금을 죽이는 일은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며 의아해했다. 황희의 이 말은 《논어(論語)》 ‘선진(先進)편’에 나오는 말로 크게 뛰어나지는 않아도 기본적인 도리는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어둠이 깔리고 목인해는 조대림을 재촉했다. 조대림은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르면서 “도적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목인해는 남산의 마천목 총제 집 옆에 있다고 답했다. 조대림이 남산을 향해 집을 막 나서는 순간 이숙번이 조천화를 쏘았고 태종은 궐내에서 직접 나발을 불었다. 궐에서 나발소리가 난다는 것은 뭔가 변고가 생겼다는 신호였다. 조대림은 “군사들에게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었고 군사들은 하나같이 “나발 소리를 들으면 궐문에 모이는 것이 군령(軍令)입니다”고 대답했다. 이에 맞서 목인해는 “곧장 남산으로 가야 한다”고 우겼다.      태종의 조대림 살리기    만일 여기서 조대림이 목인해의 말을 따랐다면 죽은 목숨이었다. 그러나 조대림은 대궐을 향했다. 목인해는 당황했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자신이 먼저 대궐로 들어가 “평양군이 갑옷을 입고 군사를 발하여 대궐로 향하였다”고 소리쳤다. 이에 태종은 총제 권희달을 시켜 조대림을 체포케 하여 순금사에 가둔 것이다.    태종은 찬성사 윤저, 대사헌 맹사성, 형조참의 김자지, 좌사간 유백순, 승전색 박영문, 동순금사 겸판사 이직 등에게 명하여, 대림이 군사를 발한 까닭과 주모자를 국문(鞠問)토록 하였다. 세 번이나 물어도 말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실제로 조대림으로서는 할 말도 없었다. 오히려 조대림은 자신을 문초하던 부사직 최규를 통해 목인해와 대질케 해 달라고 태종에게 간청을 했다. 이에 대해 태종은 이렇게 지시한다.    “조정승(조준)은 개국원훈이므로, 내가 그 아비를 중하게 여겨 그 아들을 부마로 삼은 것이다. 어찌 일찍이 매 한 대 맞고 자랐겠느냐? 대림이 만일 꾀한 바가 있다면, 비록 형벌을 가하지 않더라도 그 사실을 고하지 않겠느냐? 만일 고하지 않거든, 억지로 형벌하여 공초(供招)를 받는 것이 어찌 마음에 쾌하겠느냐? 목인해와 적당히 대질하여 묻고, 곤장을 가할 것은 없다. 그러나 잠시 형장(刑杖)을 가하여 반드시 그 사실을 토로하게 하라.”    적당한 시늉만 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태종은 최규가 오해하기 좋을 만한 이야기를 조대림에게 전하라고 시켰다.    “네가 이미 내게 불효하였으니, 내가 어찌 너를 아끼겠느냐? 네가 비록 죽더라도 명예는 나쁘지 않게 하여야 하겠으니, 주모자를 스스로 밝히라.”    최규로서는 조대림이 정말로 역모를 꾀했다고 생각했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조대림을 조사하던 문사관(問事官)은 장(杖) 64대나 때렸다. 그런데도 조대림은 결백을 주장했다. 반면 지신사 황희를 직접 보내 목인해를 심문한 결과 장 10여 대를 맞고서 자신이 조대림을 모함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때서야 조대림은 “어제 나발을 분 것은 나를 살리기 위함이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태종의 회고    조대림과 조용은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파란의 시작이었다. 태종은 중국의 고사까지 인용하며 자신의 사위가 무참한 지경으로 곤장을 맞는데도 전후사정을 제대로 알아보려 한 신하들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에 분격했다. 이 일로 대사헌 맹사성은 거의 죽음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가 이숙번 등의 구명으로 겨우 살아났다.    태종 11년 11월 22일 태종은 편전에서 신하들과 정사를 이야기하던 중에 3년 전의 그 사건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평양군 조대림을 하옥(下獄)했을 때에 순금사에서 조대림은 굳게 추문(推問)하고 목인해는 가볍게 핵실(覈實·일의 진상을 조사함)한다는 것을 듣고 내 마음이 아프고 상해 한(漢)나라 병길(丙吉)이 옥(獄)의 원통한 것을 잘 살핀 말을 생각하고 순금사가 반드시 틀린 것이리라 여겨, 내관(內官) 박유(朴輶)를 보내 감문(監問·죄인을 심문할 때 임금이 따로 사람을 보내어 문초하던 일)하게 했는데 박유도 역시 대림을 장차 중형(重刑)에 처하려고 했다. 내가 박유를 꾸짖기를 ‘감문하는 때에 밝지 못한 것이 이와 같으니 너와 같은 자는 비록 열 사람이 죽어도 가하다’라고 하고 마침내 박유를 가두고 다시 지신사 황희를 보내 감문해 그 사실을 알아내 목인해가 주형(誅刑)을 당했다. 만일 조대림이 (사위가) 아니었다면 반드시 죄를 잘못 당했을 것이다. 내가 이 일을 겪고 나서 더욱 더 옥송(獄訟)을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일은 곧 조대림에게는 불행이었으나 실로 뒷사람들에게는 다행한 일이다.”      사리를 잘 알아내는 법    태종이 이처럼 한 번은 속았으나[欺] 두 번은 옭아매이지[罔] 않았기에 사위 조대림은 태자 유거와 달리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런 것을 귀 밝고 눈 밝다[聰明]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사리분별 능력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논어》 ‘위정(爲政)편’에서 똘똘한 제자 자장(子張)이 출세하는 법을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그것은 출세하는 법이자 사리를 잘 알아내는[知禮] 방법이기도 하다.    “많이 듣고서(듣되) 의심나는 것은 제쳐놓고[多聞闕疑] 그 나머지 것[其餘]들에 대해서만 신중하게 이야기한다면 허물이 적을 것이요, 많이 보고서 위태로운 것은 제쳐놓고[多見闕殆]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행한다면 후회가 적을 것이니, 말에 허물이 적으며 행실에 후회할 일이 적으면 벼슬 자리는 절로 따라오게 될 것이다.”⊙

김태완

  4인조 영국밴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그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역대 음악영화 흥행기록을 갈아치웠다. 누적 관객 수 713만8188명(12월 12일 현재). 외화 〈레미제라블〉 〈맘마미아〉의 기억을 밀어내 버렸다.    10월 31일 첫 개봉해 상승곡선이 지칠 줄 모른다. 2D버전, 스크린X, 싱어롱 버전(떼창 관람) 등으로 영화를 2~3차례 봤다는 이가 즐비하다. 이런 흥행은 퀸 본거지인 영국을 위협할 기세다. 흘러간 옛 노래였던 퀸 음악도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그것도 한국에서 빚어지는 것일까. 언제부터 한국인이 록음악을 즐긴 것일까. 기자는 음악 전문가들에게 기(奇)현상을 묻기 앞서 ‘자기 고백’부터 하리라 마음먹었다.    분지(盆地)의 도시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며 늘 생각했다. 삶 속에 검은색 공과 흰색 공이 섞여 있다고, 여러 진실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고 생각했다. 공부든 뭐든 결국엔 따라잡히거나 병들게 될지 모른다고 불안해했다. 등하교 쳇바퀴를 돌리며 하루라도 음악을 듣지 않으면 불안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그즈음, ‘마이 마이(my my)’라는 포터블 카세트라디오가 등장했을 때 얼마나 열광했던지….    매일 아침 비소(팝송)를 조금 먹으면 저녁까지 버틸 수 있었고, 저녁에 돌아와 다시 조금 먹으면 자정까지 버틸 수 있었다. 미량의 비소는 중독을 피할 수 있었지만 학교 성적은 간혹, 때때로, 급기야 곤두박질쳤다.   나이 들어 생각하니, 만약 그때 비소 먹는 일을 멈췄다면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전혀 후회는 없다. 그때 먹은 비소의 시린 감수성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을 테니까.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것이 인생이니까. 신(神)은 공평하시니….    일요일이면 대구 푸른다리(신천철교) 근처 노상에서 팔았던 LP 백판을 사기 위해 서성였다. 주머니가 텅텅 비어 ‘눈 호강’만 했다. 실은 집에 전축이 없었다. 그때 샀던, 나중 친구에게 넘긴 ‘더밴드(The Band)’의 두 장짜리 앨범이 기억에 남는다. 앨범 타이틀은 기억 속에 없다.    팝송 전문잡지인 《월간팝송》을 읽었고, 일본 음악잡지를 구하기 위해 대구역과 남문시장 주변 헌책방을 돌던 기억도 새롭다. 일본 잡지의 종이 질은 《월간팝송》과 달리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월간팝송》 종이는 과장해서 말해 마분지였다.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택해 일본어는 전혀 몰랐다. 팝스타의 사진을 본다는 것에 기꺼이 환호했다.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 갖게 된 손바닥만 한 방 벽에 온통 팝스타의 사진을 붙였던 기억도 난다. 그때 교대생이던 큰누나가 내 방에 들어와 지었던,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도 생각난다. 온통 뒤죽박죽 엉망이던 학창시절이었다.      처음 산 앨범 〈The Works〉… 퀸에 빠져들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포스터. 관객수 700만명을 돌파, 역대 음악영화 흥행기록을 경신했다.  당시 여러 팝스타를 좋아했지만 특히 좋아하던 가수는 퀸이었다. 그때 ‘퀸 앓이’가 사춘기의 첫 진통이었다. 비틀스,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블랙 사바스 같은 밴드를 좋아했지만 퀸에 미치지 못했다. 오직 퀸이었다. 친구들에게 퀸을 얘기한 적이 있었지만, 친구들은 마이클잭슨이나 마돈나에 더 흥분했다. 대부분 팝송에 별 관심이 없었다.    처음 산 퀸 앨범은 1984년에 발매된 〈더 웍스(The Works)〉였다. 이 앨범 수록곡들이 다 좋았다. ‘라디오 가가(Radio Ga Ga)’ ‘아이 원트 투 브레이크 프리(I Want To Break Free)’ ‘잇츠 어 하드 라이프(It’s A Hard Life)’ ‘맨 온 더 플로어(Man On The Prowl)’ 등을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들었다.    이 중 딱 한 곡만 고르라면 아마도 ‘잇츠 어 하드 라이프’리라. 프레디 머큐리의 가슴 저미는 발라드였다. 그 무렵, 대구MBC 라디오에 엽서를 보냈다. 신청곡은 ‘맨 온 더 플로어’를 적었다. ‘잇츠 어 하드 라이프’를 적지 않았다. 왜냐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선 안 되니까.    ‘잇츠 어…’에 나오는 강렬한 서두의 가사는 루제로 레온카발로의 유명한 오페라 ‘팔리아치(Pagliacci)’의 아리아 ‘의상을 입어라’에 나오는 ‘웃어라 광대여. 비록 그대의 가슴이 찢어질지라도’에 기반한 것이었다. 프레디 머큐리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는 ‘웃어라 광대여’를 재연하는 것 같았다.    앨범 〈더 웍스〉 이후 퀸 앨범을 차례로 들었다. 국내 발매 라이선스 앨범엔 ‘보헤미안 랩소디’가 없었다. 금지곡이었다. 동네 레코드 가게에서 카세트테이프에 담아 처음 들었다. 첫 느낌은 ‘이게 뭐지?’였다. 가사 중 ‘스카라무쉬, 스카라무쉬, 윌 유 두 더 판단고? 선더볼트 앤 라이팅 베리 베리 프라이팅 미. 갈릴레오 갈릴레오, 갈릴레오 피가로, 매그니피코-오-오-오’(Scaramouche, Scaramouche, will you do the Fandango? Thunderbolt and lightning, Very very frightening me. (Galileo) Galileo. (Galileo) Galileo. Galileo Figaro Magnifico-o-o-o)라고 외치는 코러스에 놀랐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이 노랫말이 이렇게 해석되고 있음을 알고 또다시 놀랐다.    ‘겁쟁이, 겁쟁이, 넌 판당고 춤이나 출 거니? 천둥 치고 번갯불이, 너무너무 날 두렵게 하는데. (신이시여) 신이시여, (신이시여) 신이시여, 신이시여 당신의 권능으로 날 구하소서.’    퀸의 수많은 곡 중에 가장 좋아하는 곡은 프레디 머큐리가 아닌,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가 불렀던 ‘’39’이었다. 이 노래는 그들의 4번째 앨범 〈한밤의 오페라(A Night At The Opera)〉에 실렸다. 퀸 팬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브라이언 메이는 런던 임페리얼 칼리지에서 천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뮤지션이 되지 않았다면 미국 나사(NASA)에서 근무하고 있지 않았을까. ‘’39’은 우주여행에 대한 노래다. 가사를 거칠게 번역하면 이렇다.    ‘○○39년, 그 무렵 우주 비행사들이 조직되었죠. 땅이 메말라 가던 어느 날, 우주선은 푸르고 맑은 아침을 향해 항해를 시작했어요.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밤이 낮을 따라 떠났어요. 오랜 외로운 시간 동안 은하수를 건너 돌아보지 않고, 겁내지 않고, 슬퍼하지 않았죠.    수백광년 떨어져 있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제가 당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모래 속에 당신의 편지를 묻었죠. 당신의 손을 잡기 위해, 우리의 손주들이 알았던 그 땅으로, ○○39년째 되는 날 하늘에서 돌아왔어요.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지구는 이미 늙고 잿빛으로 변했고 날 반겨주는 건 늙은 손녀뿐.’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오랜 우주여행을 마치고 지구로 돌아와 보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나오는 ‘시간 팽창’처럼 오랜 세월이 흘러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 죽어 있더라는 슬픈 내용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1914년 소설 《더 리버(The River)》에 기초한 가사로 알려졌다.    그렇게 ‘’39’을 들으며 사춘기 ‘퀸 앓이’를 했다. 《월간팝송》 과월호를 통해 퀸의 두 멤버(존 디콘, 로저 테일러)가 한국을 찾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과월호를 구해 읽었지만 무슨 내용이 담겼는지 기억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30년 이상 시간이 흘렀으니까.      존과 로저의 來韓을 전한 《월간팝송》 1984년 5월호  1984년 3월 30일 내한한 퀸의 존 디콘과 로저 테일러가 음악잡지 《월간팝송》을 읽고 있다. 이 사진은 《월간팝송》 1984년 5월호에 실렸다.  문득 퀸 멤버의 내한 소식을 전한 《월간팝송》 1984년 5월호가 궁금했다. 도서관에서 누렇게 변색된 옛 잡지를 빌렸다. 그리고 두 눈으로 확인했다. 사춘기 시절로 돌아가는 듯했다. 기사 앞부분만 인용해 본다.    〈… 현대 브리티시 록 전통을 잇는 정상의 록그룹 퀸의 멤버인 로저 테일러와 존 디콘의 방한소식이 확정된 것은 그들이 김포공항에 도착하기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나마 약 20여 차례의 텔렉스가 오가면서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를 포함한 방한 일정이 잡힌 직후 ‘100분 쇼’를 생방송하기로 했던 KBS 측이 돌연 녹화로 방침을 변경, 행여나 이들이 방한을 취소하지 않을까 하고 관계자들을 조바심 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3월) 30일 밤 9시25분 록의 여왕 퀸의 두 멤버는 예정대로 김포공항에 안착했다.    본지(《월간팝송》) 기자 일행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어떻게 알았는지 도착 시간과 비행기편까지 정확히 알아낸 국내 팬들(대부분이 여고생들이었다)이 이미 외국인 전용 출구에 몰려와 있었는데 퀸 멤버들이 입국 수속을 하느라 10시경까지 나타나지 않자 발을 구르며 초조해하던 그들은 본지 취재팀을 보고 환성을 지르는 바람에 우리 일행은 공항에서 본의 아니게 뜨거운 눈길을 받기도 했다.  DJ 김광한의 생전 모습. 팝 음악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한 광고에 출연한 김광한의 모습이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로저와 존이 모습을 드러내자 공항 출구는 그들에게 꽃다발과 선물을 주고 사인을 받으려는 팬들이 달려들어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는 듯싶었다. “땡큐”를 연발하며 출구를 빠져나온 그들은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 두 대에 경호원과 함께 분승,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숙소인 신라호텔을 향해 출발한 차내에서 한국에 온 기분이 어떠냐는 기자의 첫 질문에 “Very Fine!”이라고 찬탄하는 로저는 생각대로 매우 세련된 용모에 사춘기의 소녀라면 가슴이 탁 막힐 정도의 멋진 모습이었고 검은 안경을 쓰고 창밖의 서울 거리를 살펴보는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호기심 어린 표정이었다.…〉(p54~55, 《월간팝송》, 1984년 5월호)    내한 당시 퀸의 로저와 존은 KBS 라디오 프로인 〈김광한의 팝스다이얼〉과 KBS TV 〈100분쇼〉에 출연했다. 〈100분쇼〉에는 김광한도 초대됐다. 당시 인터뷰 내용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전설적인 DJ 김광한은 2015년 7월 9일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부인 최경순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씨는 김광한과 찍은 퀸 멤버 사진을 보내주었다. “남편이 〈100분쇼〉에서 존과 로저 두 사람을 만났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이다.    “당시 남편이 아주 고가(高價)의 장비였던 레이저 디스크를 일본에서 사왔었어요. 그땐 뮤직 비디오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그걸 가지고 전국을 돌며 청취자들을 만나곤 했어요. 레이저 디스크에 담긴 영상을 틀어주면 팝 팬들의 반응이 아주 뜨거웠어요. 남편이 구입한 레이저 디스크 중에 퀸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돼요.    남편은 퀸 앨범을 거의 다 갖고 있었어요. 저도 퀸 음악을 좋아하는데 한 곡만 꼽으라면… 글쎄… 다 명곡인 것 같아요. 아직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못 봤어요. 빨리 봐야 하는데….”      퀸 노래 ‘Radio Ga Ga’를 라디오 프로그램 타이틀로!    DJ 김광한의 후배인 DJ 겸 PD인 경인방송의 박현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매일 정오부터 오후 2시까지 〈박현준의 라디오 가가〉(90.7MHz)라는 팝송 전문 프로그램을 직접 진행하고 있다. ‘라디오 가가’는 바로 퀸의 히트곡이다. 퀸 노래를 프로그램 타이틀로 정한 것이다.    ― 그러고 보니 프로그램 타이틀이 퀸 노래네요.    “그러니 퀸을 안 좋아할 수가 없어요. 퀸으로 인해 제 인생이 바뀌었다고 할까요? 2006년 4월 프로그램을 개편할 때 〈라디오 가가〉라는 이름으로 바꾼 뒤 지금까지 13년째 같은 이름을 쓰고 있으니까요.”    ― ‘라디오 가가’를 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프로그램 개편을 앞두고 이름(타이틀)을 고민하고 있었죠. 아이디어를 짜내어 (방송)국장님께 보고했으나 번번이 고개를 저으셨어요. 어느 날 퀸의 ‘라디오 가가’를 틀었더니 국장님께서 ‘그걸로 가자’고 하셨어요. 그러니 제가 퀸 음악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죠.”    ― 요즘 퀸이 한국에서 뜨거운 이유가 뭘까요.    “본질적으로 퀸 음악에 대한 매력 때문이 아닐까요? 1971년 데뷔 이래 시대변화에 따라 퀸은 변신했고 때로 시대변화에 앞섰어요.”    ― 고 김광한 선생님은 퀸을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퀸 음악에는 라디오 세대의 추억이 담겨 있지만 퀸은 영상 세대와 친숙해요. 한국의 비디오자키(VJ) 1호가 김광한입니다. 전국을 돌며 뮤직비디오를 많이 틀었는데 아하, 듀란듀란, 컬처클럽과 함께 퀸도 열심히 소개하셨어요. 영상음악의 한 축으로 퀸을 소개하는 데 일조한 이가 선생이 아닐까요?    사실 퀸은 당시 국내에서는 부담스러운 존재이기도 했어요. 동성애 코드가 있었고 문화적으로 한국인에게 조금은 이질적이었죠. 퀸의 ‘아이 원트 투 브레이크 프리(I Want To Break Free)’의 여장(女裝) 뮤직비디오처럼 경망스럽다고 할까요? 그러나 〈팝스다이얼〉 같은 라디오 프로에서 퀸 발라드인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Love Of My Life)’를 열심히 틀었어요. 이 곡은 국내에서 유독 인기가 많았습니다. 4050세대들에게 ‘퀸 앓이’를 안긴 노래죠.”      퀸 신드롬의 진짜 이유는…    록밴드 H2O의 보컬 김준원씨도 퀸 광팬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전해왔다.    “저는 항상 노래의 힘이 뮤지션보다 거대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뮤지션이 사라진 후에도 좋은 곡들은 오래오래 살아남기도 하죠. 6여분짜리 ‘보헤미안 랩소디’ 역시 그런 곡이죠.    이 곡엔 서정적 발라드, 헤비한 록 리듬, 클래식한 오페라, 멋진 코러스… 굳이 록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좋아할 수 있는 매우 유니크한 노래입니다. 그 노래를 과감하게 만든 도전정신, 타협 없는 반항의식… 이런 바탕이 프레디 머큐리의 전성기 시절을 경험하지 못했던 젊은 세대까지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요소들이죠.”    ― 왜 2030세대들이 1970~80년대 밴드인 퀸에 열광할까요.    “1970~80년대 당시 슈퍼 밴드들은 지금의 밴드들과는 뭔가 달랐습니다. 말하자면 레드 제플린, 롤링스톤스, 퀸 같은 밴드는 지금의 브릿팝(영국 팝) 밴드인 콜드플레이와는 달랐다는 거죠. 이들은 음반판매, 공연흥행 모두 톱이었습니다. 음반을 발표할 때마다 톱10곡이 한두 곡씩 나오는, 그야말로 팝 음악의 전성기를 구가했죠. 당시를 모르는 2030세대들은 퀸의 여러 음악이 신선하게 느껴질 겁니다. 요즘 열광하는 뮤지션들과는 다른….”    대중음악평론가 고종석씨는 4050세대들이 좋아했던 퀸의 전성기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전성기는 1980년대 전반에 걸쳐 형성되었습니다. 당시 국내 대중음악의 취향은 가요 못잖게 팝 음악, 특히 장르적으로 록에 열광하고 있었어요.    또 신중현을 먼저 알고 레드 제플린에 빠져들기보다, 에릭 클랩튼이나 제프 벡의 음악을 듣다가 국내 음악으로 접어드는 경향이 강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퀸 음악은 대중가요보다 팝 음악을 먼저 접하고자 했던 이들에게 등용문과 같았죠. 그리고 그 선택은 시대와 관계없이 여전히 이루어져 왔고 그 흐름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와 함께 배가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 영화가 히트한 후 영화음악이 사랑받았던 사례가 있었나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상영과 함께 요즘 어딜 가도 퀸 노래가 들립니다. 그 모습은 1997년 가을에 개봉된 영화 〈접속〉과 흡사해요. 영화 주제곡인 사라 본의 〈어 러브 콘체르토(A Lover’s Concerto)〉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죠. 비슷한 계절에 개봉된 〈보헤미안 랩소디〉 역시 영화가 히트하면서 2018년 대한민국의 겨울을 뜨겁게 채우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어떤 신드롬보다 무서운 기세로 영화와 음악시장을 잠식하고 있어요.”    ― 왜 한국인이 이렇게까지 퀸 영화와 음악에 열광할까요.    “대통령과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10월 이후 상당히 떨어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촛불혁명에 앞장섰던 2030세대들은 이 정부에 대한 기대가 컸다고 봐요. 그러나 체감 현실이 과거와 달라지지 않자 현실을 타파하고, 폭발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커졌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던 중 고루하다 여기던 윗세대들의 소셜미디어(SNS) 곳곳에 등장한 퀸과 프레디 머큐리에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2030과 4050이 한자리에 모여 관람하는 사례가 많아졌고, 주체하지 못할 감동까지 받게 됩니다. 마치 1969년 8월 미국 뉴욕 우드스톡(Woodstock)에서 개최된 히피족들의 페스티벌인 ‘우드스톡 콘서트’에 열광했던 4050세대의 기억처럼, 디지털화되고 개인화된 현실 속에서 또 다른 분출구를 찾고자 고민하던 2030의 내재된 바람과 결합됐다고 생각해요.    ‘음악산업은 불경기에 더 성장한다’는 법칙을 증명하고 있다고 할까요?”      “한국인은 브릿팝의 우울한 정서를 좋아해”  《월간팝송》 1984년 5월호에 실린 존 디콘과 로저 테일러의 인터뷰 모습이다.  경기도 분당에서 LP바인 ‘뮤직박스’를 운영하고 있는 DJ 조중석씨는 지금도 DJ박스에 앉아 손님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신청곡도 틀어주고 있다.    “젊은 세대들이 퀸에 열광하는 심리는 경기가 안 좋을 때 복고문화가 살아난다는 통설과 일치하는 측면이 있어요.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대박 났던 사례 역시 우리 경제가 어려울 때였거든요. 요즘 청년실업난이잖아요. 성 소수자, 차별받는 이민자의 상징인 프레디 머큐리가 음악으로 시련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고 한마디로 ‘뿅’ 간 것이죠.”    ― 한국인이 퀸 음악을 좋아하는 기질적인 측면이 있을까요.    “가게 손님들의 신청곡을 보면 미국팝보다 브릿팝이 훨씬 많아요. 브릿팝에는, 영국의 궂은 날씨처럼 레인코트를 준비해야 할 것 같은, 조금은 칙칙하고 특유의 우울한 정서가 배어 있는데 그런 측면이 미국 팝과 다른 면이죠. 한국인 정서가 아무래도 브릿팝과 어울리는 것 아닐까요.”    ― K-POP 같은 국내 대중음악에 대한 반성적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IMF 이후 공중파들이 밴드를 출연시키지 않았어요. 출연료가 비싸기 때문이죠. 대신 데모 테이프를 틀면 되는 보이그룹이나 걸그룹을 선호했어요. 비주얼 음악에 관심이 쏠리면서 밴드들이 설 자리를 잃었죠. 〈보헤미안 랩소디〉 이후 그런 밴드에 대한 그리움이 다시 싹텄다고 보입니다. 요즘 직장인 밴드가 다시 결성되고, 악기 판매도 다시 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요.”    이번에는 정통 록음악 매거진 《파라노이드》의 송명하 편집장에게 물어보았다. 송 편집장은 1990년대 음악잡지인 《핫뮤직》에서 수석기자를 지냈다. 《핫뮤직》은 창간호(1990년 11월호)에 레드 제플린의 보컬 로버트 플랜트를 표지모델로 내세워 화제가 됐었다.    “사실 퀸의 코어(핵심) 팬이라면 영화 서사적인 면에 실망한 측면도 있어요. 하지만 스토리 전개보다 음악에 집중할 수 있게 영화가 만들어졌거든요. 그것은 퀸 음악이 지닌 매력 때문이죠. 한 번 들으면 이내 수긍할 수밖에 없는 멜로디라고 할까. 또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광고음악으로 퀸 노래를 자주 접했던 측면도 있어요.”    ― 왜 유독 한국에서 퀸 신드롬 현상이 나타날까요.    “프레디 머큐리의 죽음(1991년 11월 24일)은 분명 충격이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엔 매스컴들이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어요. 사인(死因)이 에이즈와 관련됐다는 점, 전성기에 비해 퀸의 인기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봐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영화는 프레디 사후 우리가 놓쳤던, 혹은 놓치려고 했던 이야기들을 터놓고 보여주고 있잖아요. 또 영어권 국가와 달리 한국인은 1970~80년대부터 퀸 노래를 좋아하긴 했지만 가사에는 비중을 두지 않았어요. 그런데 영화 자막을 통해 노랫말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일 것입니다.    왜냐면 1980년대 중반까지 퀸을 좋아했던 이들은 ‘금지곡’의 멍에 때문에 불법 복제음반(백판)의 조악한 음질로 음악을 접해야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영화관의 풍성한 사운드에다 금기시됐던 노랫말까지 당당하게 듣고 확인할 수 있게 됐잖아요. 과거 향수를 떠올리며 2번, 3번 계속해서 영화를 보는 이유는 그런 보상심리 같은 것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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