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흔

지난 11월 19일 K-pop 그룹으로는 처음으로 방탄소년단이 ‘2017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American Music Awards) 무대에 초청받아 공연을 펼쳤다. / 유투브 관련 영상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귀순하다 북한군의 집중 사격으로 사경을 헤매던 북한군 병사가 의식을 회복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많은 이들은 이 무명 북한 병사가 단 며칠이라도 의식을 회복하여 자신이 그토록 그렸을 자유의 땅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기를 바라며, 그의 소생을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사실상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던 사람이 의식을 회복했다니 이런 것을 두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는 것일까?   어쨌거나 이 북한 병사가 의식을 회복한 후 “남한 노래가 듣고 싶다”며 노래를 틀어달라고 요청했다고 알려졌다. 그가 의식을 회복한 후 들었을 첫 남한 노래가 무엇인지 무척 궁금해지지만, 신세대 장병이니만큼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K-pop 일 것이다. 아마 지금 북한에서는 이 병사처럼 수많은 군인, 청소년, 젊은이들이 K-pop과 한국 드라마에 빠져서 자유세계를 동경하고 있을 것이다.   도대체 K-pop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사경을 헤매다 살아난 북한 병사의 첫 소망이 될 정도가 되었을까? K-pop은 우리나라 대중가요를 기존의 미국 pop과 구별하기 위해 외국의 K-pop 애호가들이 붙인 이름이다.   10여 년 전 아시아 일부 국가에 머물던 K-pop은 2007년 걸그룹 ‘소녀시대’ 데뷔를 기점으로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2009~2010년은 그야말로 K-pop의 부흥기였다. 포미닛, 브라운아이드걸스, 카라, 샤이니, 2PM, 티아라 등 쟁쟁한 그룹이 이 당시 등장했다. 이 무렵 K-pop은 드라마와 영화에 이은 제2차 한류 붐을 주도하며,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뻗어가기 시작했다.   당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유튜브(You tube)라는 세계 최대 동영상 사이트도 K-pop을 세계로 퍼뜨리는 견인차 구실을 했다. 당시 유튜브는 2012년 K-pop의 인기와 영향력을 반영해 자신들의 음악 채널에 K-pop이라는 별도의 카테고리를 개설하기도 했다. 한 나라의 음악이 이처럼 별도의 장르로 대접받은 경우는 없었다.    K-pop은 40대 중후반인 필자의 삶도 많이 바꾸어놓았다. 필자는 1990년 중반부터 2008년 소녀시대라는 걸그룹을 알기 전 10여년 동안 대중음악과 완벽하게 차단된 채 지내왔다. 2008년 무렵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한 기회에 소녀시대라는 그룹을 알게 되면서, 그들의 가창력과 춤실력에 반하게 되었고, 점점 다른 아이돌 그룹에게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소녀시대, 2ne1, 빅뱅 같은 그룹은 생활의 큰 활력소가 되어 주었다. K-pop은 우리 대중 가요사에서 거의 처음으로 부모세대(주로 1970년대 생)와 자녀세대가 세대를 초월해 같은 노래를 듣고 즐기게 만들었다.    갓 등장한 새내기 아이돌 그룹이 국내 무대를 넘어 세계무대에 진출하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면서 뿌듯함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세계적 히트를 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에 앞서 5~6년간 한류 아이돌 스타들이 세계적으로 폭넓은 K-pop 팬층을 다져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빅뱅과 소녀시대가 데뷔한 지도 어느덧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남녀를 통틀어 이토록 장수하는 아이돌 그룹이 나온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빅뱅과 소녀시대는 어쨌거나 그 일을 해냈고, 대중 가요사에 큰 별로 남을 것이다. 얼마 전 필자는 미국에서 뮤지컬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KPOP(케이팝)’이라는 제목의 뮤지컬을 무대에 올린 헬렌 박을 인터뷰 하면서 그에게 “2012년을 정점으로 K팝 열풍이 한풀 꺾인 것이 아니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렇지 않아요. 미국에서 방탄소년단(BTS)이 K-pop 가수로는 처음으로 빌보드 10위 안에 들었잖아요. K-pop은 미국 팝에 비해 하모니가 복잡하고, 멜로디가 중독성이 있으며, 멋진 안무와 어울려 전 세계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충분히 세계적인 경쟁력이 있는 우리 문화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국에는 한류와 K-pop이 덜 알려져 있는데, 이번 우리 작품을 통해 K-pop의 매력과 장르의 다양성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미국인들이 K-pop을 알고 나면 금방 빠져들 것이라고 생각해요.”   헬렌 박이 언급했던 방탄소년단은 지난 11월 19일 우리나라 K-pop 그룹으로는 최초로 ‘2017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American Music Awards)를 통해 미국 TV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 기업 중에 K-pop과 아이돌 그룹에 신세를 지지 않은 업체가 과연 있을까? 대한민국의 위상을 K-pop 그룹 만큼 전 세계에 떨친 이들이 있을까?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다고 한들 일본의 대형 콘서트장에 수만 명의 아주머니 부대를 동원할 수 있을까? 동남아에서, 남미에서, 유럽에서 이처럼 많은 한국 팬들을 만들 수 있을까?   심정이라면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기업의 대외 이미지 개선에 기여한 공로로 K-pop 그룹을 대표하여 빅뱅과 소녀시대에게 훈장이라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아울러 탈북 병사가 깨어나면 그가 가슴에만 품어왔던 아이돌 그룹과 만남이 이루어지길 바라본다.

김병헌

▲ 부여의 건국과 발전, 천재교육 한국사 교과서 정확한 사료 번역은 올바른 역사 서술의 기본(2) - 부여(夫餘)   현행 고등학교 검정 한국사 교과서에 소개된 초기 국가와 관련한 서술은 모두 중국 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토대로 서술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번역 자료를 사료(史料)로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들 인용 사료(史料)의 번역이 잘못되거나 미흡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초기국가 서술과 관련하여 사료 제시나 이를 바탕으로 한 서술에서 어떠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부여의 엄격한 형벌에 관한 원전 사료와 교과서 서술이다.   형벌을 가함이 엄격하여 살인자는 죽이고 가족은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물건을 훔치면 열 두 배로 갚게 한다. 남녀가 간음(姦淫)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이는데, 투기를 더욱 증오하여 죽인 시체는 나라의 남쪽 산 위에 두었다가 썩어 문드러질 때가 되어 여자 집에서 가져가고자 할 경우 우마(牛馬)를 바쳐야 준다.(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 竊盜一責十二. 男女淫, 婦人妬, 皆殺之, 尤憎妬, 已殺尸之國南山上, 至腐爛,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 -『삼국지』 위서 동이전, 이하 같음 )  교학사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또한,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물건 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하고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한다는 항목이 전해지고 있다.(22) 금성출판사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도둑질한 자는 12배로 배상하게 하였으며, 간음한 자와 투기한 부인은 사형에 처하였다.(33) 리베르스쿨 부여에는 1책 12법이라는 엄격한 법이 있어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는 훔친 것의 12배를 갚게 하였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였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심지어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까지도 사형에 처하였다.(26) 비상교육 살인한 사람을 사형에 처하고, 남의 물건을 훔치면 12배를 배상하게 하였으며,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을 사형에 처하는 엄격한 법이 있었다.(24) 미래엔 형벌은 엄하고 각박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집안사람은 노비로 삼는다. 도둑질을 하면 물건의 12배를 변상하게 하였다.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모두 죽였다. 투기는 더욱 증오해서 죽인 후 시체를 나라의 남산 위에 버려서 썩게 한다. 친정집에서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나 말을 바쳐야 한다.(18, 사료) 원전(原典)의 ‘남녀가 간음(姦淫)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인다.’는 부분을 교과서에서는 대부분 ‘간음한 자와 투기한 부인’이라 하여 병렬로 서술하였다. 남녀 간의 간음 행위와 여자의 투기를 모두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원전과는 달리 교과서는 ‘간음한 자와 투기한 부인’이라 하여 마치 남자는 간음 행위, 여자는 투기 행위를 할 경우 처벌하는 것처럼 오해를 살 수 있도록 하였다.   더구나, 금성출판사를 제외한 나머지 4개 교과서는 ‘투기가 심한 부인’이라 하여 투기의 경중에 따라 처벌을 달리 하는 것으로 서술하였다. 투기가 심하지 않은 경우 처벌하지 않는다는 해석도 가능하기 때문에 원전의 의미를 왜곡한 것이다. 이는 원전에 없는 자의적 번역으로 대부분 원전을 확인하지 않고 옮겼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출전까지 밝힌 미래엔 교과서의 경우 ‘집안사람’이라 한 번역은 원전의 ‘其家人’에 맞게 ‘그 집 사람’이라 해야 살인자의 가족임이 분명해진다. 또, ‘투기는 더욱 증오해서’는 ‘투기를 더욱 증오해서’로, ‘친정집’은 원전의 ‘女家’를 그대로 옮겨 ‘여자의 집’이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특히, ‘남녀가 간음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이는데, 투기를 더욱 증오하여 죽인 시체는 나라의 남쪽 산 위에 두었다가 썩어 문드러질 때가 되어 여자 집에서 가져가고자 할 경우 소나 말을 바쳐야 준다.’고 하여 하나의 문장으로 옮겨야 의미가 분명해진다.   이어서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는 혼인 풍습에 관한 내용이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데 흉노와 같은 풍속이다.(兄死妻嫂, 與匈奴同俗.) 금성출판사 혼인 풍습으로 죽은 형의 부인을 아내로 맞는 형사취수혼이 행해지기도 하였다.(33) 리베르스쿨 형사취수제는 형이 죽으면 아우가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제도로 남자 집안의 재산이 여자 쪽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으려는 방편이었다.(26, 고구려의 풍습으로 소개) 지학사 부여에는 취수혼, 고구려에서는 서옥제, 옥저에서는 민며느리제, 동예에서는 족외혼 등이 시행되었다.(27) 부여에서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이 풍속은 흉노와 같다.(27, 사료) 천재교육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풍습도 있었다.(19, 형사취수제)  부여의 혼인 풍습을 거론할 때 으레 ‘형사취수혼’, ‘취수혼’, ‘형사취수제’ 등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형사취수’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어 있다. 하지만, 원전에 분명히 ‘형사처수(兄死妻嫂)’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여타 자료에서 ‘형사취수’의 용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는 잘못이다. 형사처수에서 ‘처(妻)’는 ‘아내로 삼다[爲之妻]’라는 의미로 자주 쓰이는 글자다. 교과서대로 ‘취수’라고 했을 경우 ‘형수를 취하다’라는 뜻이 되는 취수(取嫂)와 ‘형수에게 장가들다’는 뜻이 되는 취수(娶嫂)로 생각해볼 수 있겠으나 어느 쪽도 ‘처로 삼다.’, ‘아내로 삼다’라는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서술된 용어나 글자는 편찬 당시 춘추필법(春秋筆法)에 따라 한 글자 한 글자 엄선하여 집필하였기 때문에 합당한 이유나 근거 없이 함부로 변경해서는 안 된다. 본래의 의미를 정확하게 담아내지 못하거나 심지어 왜곡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형사취수’는 본래의 뜻을 훼손한 자의적 변경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형사취수제’라 하여 마치 일반화된 제도인 것처럼 쓰는 것도 문제다. 부여의 민간에서 나타나는 풍습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제도로 정착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형이 죽을 경우 형수를 아내로 삼는 ‘형사처수’의 풍습이 있었다.”는 정도로 서술하면 된다.   다음은 부여의 왕권과 관련된 사료다.   옛 부여 풍속에 홍수나 가뭄이 고르지 못하여 오곡이 익지 않으면 바로 왕에게 허물을 돌려 혹은 ‘바꿔야 한다.’, 혹은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舊夫餘俗, 水旱不調, 五穀不熟, 輒歸咎於王, 或言當易, 或言當殺.) 교학사 옛 부여 풍속에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바꾸어야 한다.’고 하거나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22, 사료) 동아출판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라고 하거나 ‘죽여야 한다.’라고 하였다.(23, 사료) 천재교육 옛 부여의 풍속에 장마와 가뭄이 연이어 오곡이 익지 않을 때, 그때마다 왕에게 허물을 돌려서 ‘왕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라거나 혹은 ‘왕은 마땅히 죽여야 한다.’라고 하였다.(19, 사료) 이와 관련한 교과서 본문 서술에는 대부분 문제가 없으나 사료 인용에서 번역이 잘못 되었다.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에 해당하는 원문은 ‘水旱不調(수한부조)’로 수(水)는 ‘비’를, 한(旱)은 ‘가뭄’을 나타낸다. 따라서, ‘水旱不調’는 ‘비와 가뭄이 고르지 못함’이란 뜻으로 폭우나 장마 또는 가뭄 등으로 날씨가 고르지 못하여 흉년이 드는 경우를 상정한 것이다. ‘부조(不調)’는 ‘고르지 못하다’는 뜻이지 ‘계속’이나 ‘연이어’의 뜻이 아니다. 이 부분의 번역은 국편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잘못된 번역 자료를 그대로 갖다 쓴 데서 온 오류다. 국편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탑재된 ‘중국정사조선전’에는 오역이 적지 않아 이용에 주의를 요한다.   이번에는 제천(祭天) 행사인 영고(迎鼓)에 관한 서술이다. 은(殷) 정월[12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온 국민이 모여 연일 마시고 먹으며 춤을 추니 영고(迎鼓)라 한다. 이때 형옥을 중단하고 죄수들을 풀어준다.(以殷正月祭天, 國中大㑹, 連日飲食歌舞, 名曰迎鼓. 於是時, 斷刑獄, 解囚徒.)   리베르스쿨 부여는 해마다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치렀다. 영고는 ‘둥둥둥 북을 울리면서 신을 맞이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추수를 마친 12월에 온 나라 백성이 동네마다 한 곳에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며칠 동안 계속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놀았으며, 죄가 가벼운 죄수는 풀어주었다.’라는 기록이 있다.(26) 지학사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의 5월제‧10월제 같이 목축 및 농경과 관련하여 하늘에 제사 지내는 행사가 있었다. 이때에는 죄수를 풀어 주고 모든 사람이 잘 차려입고 나와 밤낮으로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며 놀았다.(28) 천재교육 정월에 지내는 제천 행사는 국중 대회로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은 영고라 한다.(23, 사료) 금성출판사 은력 정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나라 사람들이 도성에 크게 모여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니, 이름 하여 영고라 한다. 이때에는 형옥을 판결하고 죄수들을 풀어 준다.(36, 사료) 리베르스쿨 교과서에는 “영고는 ‘둥둥둥 북을 울리면서 신을 맞이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여 영고의 의미를 특정하였으나 이는 집필자의 자의적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영고(迎鼓)가 부여의 고유어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다 위와 같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온 나라 백성이 동네마다 한 곳에 모여'라는 서술에서도 ‘동네마다 한 곳에 모여’는 원전에 없는 내용이다. 마찬가지로, ‘죄가 가벼운 죄수는 풀어주었다.’라는 부분도 그냥 죄수를 풀어준다고 하였을 뿐 죄의 경중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서술이다. 지학사 교과서의 ‘모든 사람이 잘 차려입고’라는 서술도 원전에 없는 내용이다.   천재교육의 인용사료는 완전히 잘못된 번역이다. ‘정월에 지내는 제천 행사는 국중 대회로’라는 문장은 다른 달에도 제천 행사가 있는데 특별히 정월에 지내는 제천 행사는 ‘국중 대회’라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도 국편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잘못된 번역을 그대로 옮겨온 경우다. ‘정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온 국민이 모여 연일 마시고 먹으며 춤을 추니 영고라 한다.’고 해야 자연스럽다.   금성출판사의 ‘형옥을 판단하고’는 ‘형옥을 중단하고’의 오역이다. 형옥(刑獄)은 ‘형벌(刑罰)과 옥사(獄事)’를 일컫는 말이니 죄인에게 형벌을 내려 옥에 가두는 일이다. 따라서, 죄의 판단이 이미 끝나고 감옥에 가두어 처벌을 실행하는 것이다. 판단의 단계는 이미 지났다는 뜻이다.   이와 동일한 오역이 국편에서 주관한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도 출제된 바 있다. 2017년 1월에 실시된 34회 고급 3번 지문에서는 ‘은력(殷曆)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국중대회(國中大會)에서 연일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니, 이를 영고(迎鼓)라고 한다. 이때 형옥(刑獄)을 판단하여 죄수를 풀어주었다.’고 한 지문 중에서 ‘형옥(刑獄)을 판단하여 죄수를 풀어주었다.’고 한 부분이다. 이는 ‘형옥을 중단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로 하는 것이 올바른 번역이다. 앞부분의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국중대회(國中大會)에서’라는 번역도 어색한 문장으로 ‘하늘에 제사 지내고 도성 안 사람들이 크게 모여서’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때 ‘國’은 ‘왕성의 안[王城之內]’ 즉 ‘도성(都城)’이란 뜻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전번역원, 규장각, 장서각 등에는 한문으로 된 원전 자료를 번역하여 제공하고 있다. 연구자의 입장에서 정확하고 꼭 필요한 자료를 찾는데 투자해야 할 많은 시간과 노력을 덜어주니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원전 자료가 경사자집(經史子集)에 걸쳐 워낙 다양한 데다 그 분량 또한 엄청나기에 간혹 오역이나 미흡한 부분이 눈에 띄기도 한다. 현재 널리 사용되지 않은 문자와 문체로 기록된 한문 원전 자료를 제한된 인력과 제한된 시간으로 오류 하나 없이 완벽하게 번역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독자의 오류 제보로 더욱 완성도 높은 번역문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문제는, 오역이나 미흡한 번역 자료를 연구 논문이나 교과서 집필에 이용하는 연구자가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데 있다. 교과서에 인용된 사료가 그리 많지 않은데도 오역이나 의미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대부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교과서 집필자는 사료 인용에 앞서 원문과 대조하여 오역이나 미진한 부분은 반드시 바로잡아 본래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 전문가가 이해할 수 없는 번역이라면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다. 현행 검정 한국사 교과서에 인용된 번역 사료에는 그런 오역과 왜곡이 적지 않다.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김승열

제네바 일기(23): 후기1   부가가치 산업에 집중한 스위스 모델과 EU 내에서 유연성을 장점으로 부각시킨 벨기에   이번 제네바일기는 WIPO가 있는 제네바를 중심으로 스위스 내의 취리히 등 일부지역, 독일 프랑크 푸르트와 뮌헨, 영국 런던, 벨기에 브뤼셀, ICC가 있는 프랑스 파리 및 프랑스 일부 지역을 차로 여행하여 실제 현장의 모습을 확인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각 나라마다의 특성과 나름대로의 경쟁력 등을 접하면서 시각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이 든다.   먼저 스위스는 제조업이 발전한 독일과 금융이 발전한 영국의 장점을 모두 취합하면서 부가가치의 극대화를 도모하는 산업으로 방향성을 가져가고 있었다. 이는 국토가 작고, 천연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이를 벤치마킹할 만한 의미있는 모델로 다가왔다. 그리고 영세중립국을 선언하면서 다양한 국제기구 등을 성공적으로 유치하여 국가의 이미지 제고 및 청정하고 살기좋은 긍정정인 나라라는 이미지 제고에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최근에 금융에서의 비밀주의를 포기하게 됨에 따라 금융산업이 활기를 잃고 나름대로의 미래 대안에 주력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다행스럽게 가상화폐나 핀테크 등으로 기본 방향을 제대로 잡고 디지털시대의 국제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발빠른 행보를 보이는 것 같아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졌다. 따라서 우리나라와의 관계에서는 초 부가가치산업에서의 R&D공유 내지 상호협업 모색 등을 통하여 시너지 효과가 발생할 가능성을 였볼 수 있었다.    스위스의 법률시장 부분에서는 국제기구를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모니터링을 비롯한 점진적인 참여와 현지 국제기구 등에서의 일자리 모색 등의 다양한 접근을 할 필요성이 높아 보였다.   벨기에 역시 상당히 주목할 국가로 보여졌다. 상대적으로 소국이면서도 EU 본부를 유치하여 명실상부한 EU 행정수도로서 그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의 강대국이나 외국 문화 등에 대하여 상당히 긍정적이고 유연한 태도를 취하여 EU내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율할 수 있는 구심점으로서의 역할과 활동에 주력하면서 비즈니스 창출을 도모하는 등 나름대로의 경쟁력 확보에 상당한 진전이 있어 보였다.   법률시장 측면에서도 EU 내에서의 경쟁법 제도 및 그 집행 등에 있어서 잠재적인 시장이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EU의 행정수도로서 향후 법률수요는 상당할 것으로 보여졌다.   다만 스위스와 벨기에 두 나라 모두 우리에게는 언어적인 장벽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미국 시스템보다는 좀 더 유연성이 떨어지고 우리나라의 시스템과도 생소한 면이 적지 않아 보였다. 그렇지만 EU 자체의 잠재 시장성이 높고 EU문화 자체의 장점도 있어서 EU문화 및 EU에서의 생활 등에 대하여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젊은 청년과 스타트 업 기업의 경우 언어장벽 같은 진입장벽을 잘 극복하고 EU와의 네크워크작업을 통하여 시장개척과 국제경쟁력 제고의 시너지효과를 적극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법률시장에서 있어서도 비용절감을 위하여 대형로펌이 아니라 중소형 로펌의 경우에도 이들 국가와 제휴 등 협력 관계를 강화하고 필요하면 현지법인의 섭립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EU에서의 전통적인 강국인 독일, 영국 및 프랑스 세 나라의 경우는 나름대로 장점이 크게 와닿았다.   영국의 경우 최근에 BREXIT 이후로 다소 불확실성이 증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EU 내에서 영어문화권으로서의 장점을 가지고 있고, 제4차 산업혁명에서 AI, 핀테크 등으로 선점을 도모하고 발빠르게 치고 나아가는 모습에서 가장 배울 점이 많은 국가로 느껴졌다. 정책의 유연성 및 비즈니스 오리엔트 된 사회기반 구조 등이 나름대로의 국가경쟁력을 지원하는 큰 원동력으로 와 닿았다.    따라서 우리나라 젊은 청년들은 제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이하여 가장 중요한 맥을 잡아 제대로 나아가는 영국의 전방위적인 산업변화 과정에서 새로운 시각을 접하고, 다양한 시도를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영국으로의 적극적인 진출과 참여가 절실하게 보였다.   독일의 경우에는 제조업의 디지털화를 도모하여 나름대로의 확고한 시장을 선점하고 또한 경쟁력을 충분하하게 확보하고 있는 안정적이면서도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EU의 핵심중심국가로서의 그 잠재력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착하여 살기에도 안정적으로 보여 우리 기업의 경우 장기적으로 현지화를 도모하는 장기계획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는 국가로 느껴졌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생각보다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고 나아가 한국인의 진출과 현지 취업 등에서 상당히 잠재력이 있는 시장으로 보였다. EU진출의 도모하는 청년으로서는 프랑스가 가지는 장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필자가 돌아본 이들 EU 국가 나름대로 장점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번 방문 등을 통하여 우리나라 역시 이에 못지 않은 장점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 이는 이번 여행의 또 다른 큰 성과었다고 본다. 변화와 혁신의 아이콘인 대한민국의 경쟁력 있는 부분을 전세계에 알리고 또한 이를 현지 실정에 맞게 현지화시켜 그 시장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여졌기 떼문이다.   물론 시간이 소요되고 어려움도 있겠지만, 이제는 글로벌시장을 타겟으로 하는 사업전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므로 영미권과는 또 다른 EU시장에서의 틈새 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할 중요한 시기이고, 우리나라도 충분한 잠재력과 경쟁력을 가졌음을 이번 여행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경쟁력이 높아졌다는 점을 실감하게 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의 경험이었지만 어려운 시장으로만 느껴저 온 EU에서 새로운 미래 시장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어 개인적으로는 의미가 있는 시간들이었다. 디지털시대에는 글로벌시장이 자연스럽게 일반화된 목표 시장으로 와닿았고, 오프라인 상으로도 자주 접하였기에 이번 경험을 통해 좀 더 자극을 받았고 나아가 이들 시장과의 친화성을 도모하여야 겠다는 생각을 가져보게 되었다.   나름대로 매력적인 EU시장의 잠재력 등을 확인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하고, 우리 기업과 청년들이 좀 더 많은 직간접 혹은 오프라인과 온라인 상의 접촉을 통하여 틈새 시장의 공략을 도모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제네바일기(24): 후기2   스위스와 프랑스의 교통시스템 등에 대하여 살펴보다   제네바를 거점으로 스위스 지역과 프랑스 지역을 차로 다녀보면서 교통시스템과 관련하여 느낀 부분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먼저 스위스의 경우는 몇일에 걸쳐 제네바부터 취리히까지 운전을 하면서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 모든 시스템이 너무나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 통행료는 1년에 40유로 상당의 스티커만 부착하면 1년 동안 전국의 고속도로 전역을 자유로이 운행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고속도로 통행과 관련하여서는 큰 부담이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교통법규 위반에 대한 범칙금은 엄격하고 누진제도를 적용하고 있었다. 스위스에 파견 나온 한국 상사 직원들이 귀국할 때 지불한 교통 벌칙금액이 수백만원을 넘는다는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교통법규는 상당이 잘 지키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거의 5,000km 이상을 차로 운행한 경험이 있어서 느낀 바가 적지 아니하다. 먼저 고속도로에서의 통행료 납부가 너무 부담스럽게 와 닿았다. 통행료는 거의 무인시스템으로 되어 있는데 납부 방법이 동전, 지폐 및 신용카드로 되어 있으며, 일부는 전자시스템으로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관광객이 많아서 인지 전자시스템을 이용하는 차량은 극히 일부분이고 개별적으로 신용카드, 동전 및 지폐로 납부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각 통행구간마다 시스템이 조금씩 달라서 이를 납부하는 데에 사람들이 상당히 어려움을 겼는 것을 보았고, 이로 인한 시간적인 손실이 많아 보였다. 특히 이 시스템에 익숙하지 아니한 외국인에게는 상당히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상황이 되기도 하였다.   다만 프랑스 교통시스템의 장점은 교통의 흐름을 가급적 막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사거리 등에서 우리나라와 같은 교통신호등에 의한 통제를 하지 아니하고, 원형 로타리 시스템에 의하여 상호 우선 순위에 따라 전체 교통 흐름을 크게 중단하지 아니하면서 진행시키는 효율적인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다. 프랑스보다도 차량의 통행량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도 잘 진행될 지에 대하여는 다소 불확실성이 있지만 프랑스의 원형 로타리 교통시스템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교통법규에 따른 철저한 우선순위 준수, 자기 차선의 준수 등으로 인하여 법규를 지키는데 대한 상호 신뢰문화가 정착되어 있어 보였다. 이때문인지 왕복1차선이나 편도1차선과 같이 다소 좁고 열악한 도로 사정하에서도 각자 상당한 속력을 내어서 효율적인 운행이 가능한 교통문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교통량이 적은 곳은 대체로 자율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일부 지역은 교통시스템에 의하여 우선 순위가 배정되어 전반적으로 상당히 효율적인 교통 운행을 도모하는 점이 인상깊었다.   그리고 진행차선과 추월차선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었고, 추월후에는 다시 진행차선으로 원위치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도로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도로가 그리 넓지 아니한 상태에서도 상당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운전자들의 운전 솜씨가 상당하다고 느껴졌다. 경사가 심한 산속의 위험한 도로와 편도 일차선의 좁은 도로에서도 거의 시속 70~90km 이상의 속도를 내면서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차선에 충실하게 운행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나이가 든 할머니가 상당한 속도로 가파르고 꼬불꼬불한 좁은 산속의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은 상당이 인상적이었다. 이때문인지 도로사정이 열악한 산 중턱이나 정상에도 많은 집들이 있었고, 거주하는 이들이 생활에 크게 불편함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고속도로의 경우에는 통상적으로는 최고속도가 110km이고, 도로사정이 좋은 곳은 최고 130km의 운행이 가능하였다. 대부분 차량이 이 속도보다도 더 빨리 운행하는 모습에 조금은 놀랐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부분은 우선 순위가 높은 도로를 운행을 하는 운전자는 곁가지 도로에서의 차량이 갑자기 등장하는 것을 신경쓰지 아니하는 분위기이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각자가 교통법규를 엄정하게 준수하고 있다는 철저한 신뢰 문화가 형성이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신뢰가 있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운전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고, 교차로에서도 자신의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자동차 연비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느껴졌다. 실제 운전을 해보니, 운행시의 피로감도 상대적으로 훨씬 적었다. 하루에 600km 이상의 거리를 운전하여도 크게 피로감이 쌓이지 않았다.   주차문화 역시 생소하였다. 차량의 주차가 가능한 지역에 자리가 나는 대로 주차를 하고 근처에 있는 주차스티커 발급 무인기에 가서 동전이나 신용카드 등을 통하여 주차증을 발급받아, 운전석 앞에 올려 두면 되었다. 스티커에는 언제까지 주차가 가능하다는 시간이 기재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상당히 불편하였으나 그 나름대로의 장점도 있어 보였다. 성숙한 시민문화에 따라 자율적으로 주차하도록 하는 시스템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별도의 사람과의 접촉이 없이 무인 시스템에 따라 자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작동되고 있었다.    정리하면 각자가 교통법규를 철저하게 준수하고 나아가 자신의 차선을 지키면서 우선순위에 따른 운행이 확립되어 비록 열악한 도로 사정 하에서도 엄청난 속도로의 각자의 운행이 보장된다는 점에서 성숙되고 신뢰가 정착된 선진 교통문화라고 느껴졌다. 또한 원형 로타리 시스템을 잘 활용하여 교차로 등에서도 전체 교통 흐름의 중단이 거의 없는 상태로 도로를 운영한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우리나라의 교통시스템도 장점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교차로에서 운행의 흐름이 너무 자주 중단된다는 점에서는 정비의 필요성이 보인다. 프랑스식의 원형 로타리 운행시스템에 대하여도 깊이 있게 검토하여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의 도입 여부 등을 진지하게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배진영

10월 초 화창한 가을날 찾아간 서울 천연동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정은 한가했다. 추석이라고 해도 달리 갈 곳이 없을 것 같은 외국인 학생들만 간간이 눈에 보였다. 게시판에는 이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대자보들이 붙어 있었다. 추석 연휴의 초입에 이곳을 찾아간 것은 이곳이 바로 ‘대한민국 국군의 산실(産室)’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1945년 12월 5일부터 이듬해 2월 27일까지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가 있었다. 군사영어학교는 초창기 대한민국 국군, 더 나아가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정계·관계의 요인들을 수없이 배출해 냈다.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가 6000달러를 들여 5000평의 부지와 한옥 몇 채를 구입, 수리하고 협성신학교를 세운 것이 1911년 9월의 일이었다. 1931년에는 협성여자신학교를 합병, 감리교신학교가 됐다. 감리교신학교는 1940년 10월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됐다가 1946년 1월 다시 문을 열었다. 군사영어학교는 감리교신학교가 문을 열기 전 짧은 기간 동안 이 대학 건물을 빌려 쓴 셈이다.      이응준    미군정(美軍政)은 1945년 11월 13일 군정법령 28호로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다음 날 쉬크 준장을 부장으로 임명했다. 당초 미 군정청은 1946년까지 4만5000명 규모의 육군과 공군, 5000명 규모의 해군 및 해양경비대로 구성되는 ‘국방군’을 창설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점령지 문제를 관할하고 있던 국무부·육군부·해군부 조정위원회(SWNCC・The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는 이 계획을 보류시켰다. 그러자 미 군정청은 ‘대나무(Bammboo)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2만5000명 규모의 경찰예비대(Constabulary)를 창설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경찰예비대는 ‘경찰 지원 및 국가비상시 국토방위’를 수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국방군’이건, 경찰예비대건 군사조직을 만들려면 장교가 필요했다. 장교를 키우려면 사관학교부터 만들어야 했다. ‘대나무계획’의 책임자이던 리머 아고 대령은 이를 위해 일본군 대좌(대령) 출신인 이응준(李應俊)을 영입했다. 이응준은 대한제국 시절 육군무관학교 출신이다. 1909년 무관학교가 문을 닫자 당시 무관학교 재학생들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됐다. 이들이 일본 육사에 진학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대한제국이 망했다. 망국의 사관생도들은 일본 군적(軍籍)에 편입됐고, 1914년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응준의 동기생으로는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 일본 육군 중장까지 올라간 홍사익 장군, 신태영 전 국방부 장관 등이 있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항만 수송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이응준은 해방 직후 소련군의 체포를 피해 남한으로 내려왔다.      영어 잘해 출세한 원용덕  군사영어학교 생도들을 선발했던 이응준(육군참모총장 역임)과 원용덕(헌병총사령관 역임).  태평양전쟁 이전인 1930년대부터 미국은 일본의 적성국(敵性國)이었다. 일본 육사는 물론이고 일본 대학에서도 영어는 환영받지 못하는 언어였다. 당연히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장교 경험자가 많지 않았다. 영어를 할 줄 알면 금방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원용덕(元容德)이었다. 그는 군의관으로 만주군 중좌(중령)까지 올라갔던 인물이었다. 그는 일본군·만주군에 소속되어 있던 한 무리의 청년들을 이끌고 월남(越南)했다. 38선을 경비하고 있던 미군 병사는 원용덕 일행을 저지한 후 자기 상관과 통화하게 했다. 원용덕은 유창한 영어로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했다. 그와 통화를 한 미군 대위는 다음 날 원용덕을 찾아왔다. 그는 “고급 장교 출신으로 당신처럼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은 처음 본다”면서 “지금 군정청에서는 당신과 같은 사람을 찾고 있으니 서울에 가는 대로 군정청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원용덕을 만난 아고 대령은 “당신과 같은 영어 실력자와 건군 작업을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원용덕은 이응준과 함께 건군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원용덕이 1950년대에 군부의 실력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신임도 신임이지만, 이처럼 창군 요원들의 선발에 참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초 미군은 군사영어학교 정원을 60명으로 정하고, 광복군·일본군·만주군 출신자를 각각 20명씩 선발하려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광복군이 국군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던 데다가 미 군정청의 통치권을 부인하고 있던 참이었다. 임시정부 측에서는 광복군 출신을 추천하기를 거부했다. 소수의 중국군 출신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군사영어학교에 들어왔다.    당시 국내에는 출신별로 갖가지 사설 군사단체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미 군정청은 이들 단체에 장교 및 준사관(準士官) 출신자들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이응준·원용덕이 입회한 가운데 아고 대령이 이들을 심사했다. 시험은 간단했다. 응시자들이 작성한 영문·한문 이력서를 바탕으로 경력을 살펴본 후, 간단한 영어 회화 테스트를 했다.    학생들은 입학 전 나이, 경력, 계급이 각양각색이었다. 50대의 이응준처럼 일본군 대좌까지 올랐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21살의 장창국(張昌國·합참의장 역임)처럼 일본 육사 생도 출신도 있었다. 20대 초의 하사관·학병 출신들도 있었다.    이들이 입교한 학교가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였다.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군사언어학교’였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곧 ‘영어’였기에 군사영어학교로 번역됐다. 이 학교의 공식적인 목표는 이름 그대로 ‘기초적인 군사영어를 해독하는, 미군 지휘관의 통역관’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 군정청이 단순히 통역장교를 길러내려 이 학교를 연 것은 아니었다. 이 학교에 입교하는 생도들도 마찬가지였다. 군사영어학교는 사실상의 육군사관학교였다. 교장은 미군 리스 소령, 부교장은 원용덕이 맡았다.    선발된 학생들은 군정청 회의실에서 사흘 동안 예비교육을 받았다. 감리교신학교가 수리 중이었기 때문이다. 군사영어학교 개교식은 1945년 12월 5일 열렸다. 주한미군사령관 존 하지 중장과 조병옥(趙炳玉) 경무부장 등이 축사를 했다.      군사영어학교에도 번진 좌우갈등    영어 실력에 따라 학생들은 A·B· C·D반으로 나뉘어 교육을 받았다. 매일 시험을 보아 성적에 따라 반을 바꾸었다. 한국사·참모학·소총분해·자동차 운전 등도 가르쳤다.    이들이 교육을 받고 있을 때, 모스크바 3상 회의 소식이 전해졌다. 신탁통치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국민들은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져 갈등을 빚었다. 그 여파는 군사영어학교로도 밀려왔다. 좌익 학생들은 ‘반탁(反託)은 반역’이라는 표어를 학교 곳곳에 붙여 놓았다. 좌익 학생들은 교문 앞에 자기 편 사람들을 배치해 반탁파(反託派) 학생들의 등교를 가로막았다. 당시 학생들은 집에서 등·하교를 하고 있었다.    김종오(金鍾五, 육군참모총장·합참의장 역임), 민기식(閔幾植, 육군참모총장 역임) 등 반탁파 학생들은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권용준 교수가 강의 중 “지금 우리는 좌우 사상의 혼란기에 있다. 자칫하면 공산주의에 당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가 좌익 학생들의 집단항의를 받은 적도 있다. 학교 당국은 권 교수를 해임하려 했지만, 원용덕이 “교수에게도 ‘사상의 자유’는 허용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무마했다.    군사영어학교 내에서 좌익세력이 발호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미 군정이 ‘사상의 자유’와 ‘불편부당(不偏不黨)’을 천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으로 냉전(冷戰)이 시작되기 전이라 미 군정, 아니 미국 자체가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때문에 군사영어학교는 물론 초기 육군사관학교에는 좌익세력이 자유롭게 침투할 수 있었다. 일본 육사 출신 김종석·조병건·오일균, 만주군 출신 최남근·이병주·이상진, 학병 출신 하재팔·최상빈 등이 군사영어학교 내 좌익세력의 핵심이었다. 이들은 후일 여순반란사건 이후 숙군(肅軍) 때 처형되었다.      입학식은 있었지만 졸업식은 없어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는 1946년 1월 14일 창설됐다.  군사영어학교는 입학식은 있었지만 졸업식이 없었다. 성적에 따라 A반부터 10차례에 걸쳐 차례로 졸업을 시켰기 때문이다. 1946년 1월 16일 장창국·민기식·박병권(국방부장관 역임) 등이 처음으로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임관했다.    같은 날 일본군 소좌 출신인 채병덕(蔡秉德), 대위 출신인 이형근(李亨根, 육군참모총장·연합참모본부 총장 역임)은 대위로 임관했다. 이형근은 ‘군번 1번’으로 유명하다. 그가 ‘군번 1번’이 된 것은 서류 접수순으로 군번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 육사 선배인 채병덕은 불만스러워했고, 두 사람 사이가 불편해졌다고 한다.    정일권(丁一權, 육군참모총장 역임), 유재흥(劉載興, 1군사령관·국방부장관 역임), 최경록(崔慶祿, 육군참모총장·연합참모본부 총장 역임) 등도 같은 날 참위(소위)로 특별임관했다. 그 밖에 창군 작업에 참여했던 이응준과 원용덕도 나중에 군사영어학교 출신들과 함께 임관했다. 이응준은 대령, 원용덕은 소령 계급장을 달았다. 이들은 실제로 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군사영어학교 출신으로 분류된다. 이들이 임관하기 이틀 전인 1946년 1월 14일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됐다.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2월 27일 태릉에 있던 제1연대의 서쪽 병사(兵舍)로 옮아갔다. 일제말에는 지원병 훈련소가 있던 곳이다. 이후 수많은 육군 장교들을 배출한 육군사관학교의 태릉시대는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4월 30일 문을 닫았다. 같은 날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Korea Constabulary Training Camp)가 문을 열었다. 직역하면 ‘조선경비대훈련소’쯤 되겠지만, 교장 이형근 소령 등은 이 학교를 육군사관학교라고 불렀다. 경비사관학교 1기가 곧 육군사관학교 1기다. 정식으로 육군사관학교가 된 것은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9월 5일 국군이 창설되면서부터였다. 육사 7기생들은 미 군정하에서 경비사관학교 생도로 입교했다가 건국 후인 1948년 11월 11일 대한민국의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한국을 움직인 군사영어학교 출신자들  1953년 10월 5군단 청설식에 참석한 야전군단장들. 왼쪽부터 이형근 1군단장, 정일권 2군단장, 강문봉 3군단장, 최영희 5군단장. 모두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이다.  군사영어학교 출신 임관자는 110명이었다. 일본 육사 출신이 12명, 학병 출신이 72명, 지원병 출신이 6명, 만주군 출신이 18명, 중국군 출신이 2명이었다.    교육기간은 짧았지만, 이들은 이후 국군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들 가운데 선두 주자들은 대령~소장으로 6·25를 맞았다. 채병덕은 육군 소장으로 육군참모총장이었고, 장창국(대령)은 육군본부 작전국장, 장도영(대령)은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다. 백선엽·이형근·김종오 등은 대령으로 사단장이었다. 이들은 개전 초기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지만, 결국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면서도 대한민국을 지켜 냈다. 백선엽은 다부동전투에서, 김종오는 백마고지전투에서, 장도영과 송요찬은 용문산전투에서 용명(勇名)을 떨쳤다. 김백일(金白一)은 1군단장으로 38선을 돌파했고, 아몬드 장군에게 호소해 흥남철수작전을 성사시켰다.    고생한 만큼 이들은 보상을 받았다. 임관자 가운데 절반이 넘는 68명이 별을 달았다. 대장까지 올라간 사람은 모두 8명이다. 정일권·백선엽(白善燁, 육군참모총장·연합참모본부 총장 역임) ·이형근·장창국·민기식·김종오·김계원(金桂元)·김용배(金容培, 육군참모총장 역임) 등이 그들이다. 이 중 백선엽·정일권·이형근은 ‘3대장’이라고 불리면서 1950년대 중·후반 육군을 주름잡았다.    육군참모총장이 13명(이응준·채병덕·정일권·백선엽·이형근·송요찬·최영희·최경록·장도영·김종오·민기식·김용배·김계원), 합참의장(연합참모본부 총장)이 7명(이형근·정일권·유재흥·백선엽·최영희·김종오·장창국)이나 나왔다. 육군 중장은 20명이 나왔다. 1960년대 후반까지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이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직을 독식하다시피 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자들은 정계·관계에서도 큰 활약을 했다. 정일권은 예편 후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5·16 당시 육사 교장으로 혁명에 반대해 육군 중장으로 옷을 벗은 강영훈(姜英勳)은 노태우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냈다. 4·19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송요찬(宋堯讚)은 5·16군사정부에서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내각수반을 지냈다.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정래혁(丁來赫)은 박정희 정권 시절 상공부·국방부 장관을 거쳐 전두환 정권 때 국회의장을 지냈다.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김계원은 중앙정보부장을 거쳐 10·26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대통령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으로 이름을 떨친 이후락(李厚洛), 2군 사령관 재직 시 김창룡 암살을 조종했던 강문봉(姜文奉), 5·16 당시 1군 사령관이었던 이한림(李翰林), 이승만 정권 시절 상공부 장관으로 업적을 남긴 김일환(金一煥) 등도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다.      강영훈과 이형근의 고민    미 군정하에서 ‘국방군’도 아니고 ‘경찰예비대’로 출발한 국군의 시작은 초라했다. 초기에는 경찰모(鏡察帽)의 귀단추를 계급장으로 달아 경찰보다도 그 존재가 미미했다.    일본군·만주군 출신들이 건군의 주역이 되면서 두고두고 정통성 시비도 일었다. 하지만 일본군·만주군 출신들이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일본군에 가고 국군에 몸담은 것은 아니었다. 노태우 정권 시절 국무총리를 지낸 강영훈은 만주 건국대 재학 중 학병으로 끌려갔다. 그들에게 최남선은 이렇게 말했다.    “민족의 실력배양 중 가장 중요한 군사기술을 습득하고 무력을 기를 수 있는 이 기회를 우리는 잘 활용해야 한다. 출전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희생된 전우의 몫까지 우리 민족을 위해 일해 주리라 믿는다.”     일본 육사(56기) 출신인 이형근 전 육군참모총장은 포병 중대장으로 중국전선에서 싸웠다. 해방 후 귀국한 그는 근신(勤愼)하는 마음으로 대전고등학교 교사로 있었다. 1946년 1월 미 군정에서 그를 호출했다. 참페니 대령과 아고 대령은 그에게 창군 작업에 참여해 달라고 청했다. 이형근은 “일본군 장교를 지낸 몸으로 근신도 하고, 부모님을 모시면서 그동안 못다 한 효도도 좀 해야겠다”면서 사양했다. 하지만 참페니 대령과 아고 대령은 “일본군으로 복무했으면서 자기 나라 군대를 사양하느냐”면서 이형근을 설득했다. 이응준의 보좌관이 된 그는 이응준의 집에서 숙식을 하다가 결국 이응준의 사위가 됐다.    강영훈이나 이형근의 고민은 군사영어학교 출신 대부분의 고민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젊어서 한때 일본군이나 만주군에 몸담는 바람에 이름에 흠을 남겼다. 그들이 태어났을 때 이미 그들이 기꺼이 ‘조국’이라고 부를 나라는 없었다는 사실은 흔히 망각된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이 나라를 지켜냈고, 군복을 벗은 후에는 개발연대(開發年代)를 이끌었다. 미우나 고우나 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젊은 그들의 고민과 혼란, 망국민의 설움을 겪어 보지 못한 후인(後人)들이 ‘나중 태어난 자의 행운’을 만끽하면서 오늘의 잣대로 그들을 단죄(斷罪)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일까?      일본공사관이 있던 동명여중  감리교신학대학 앞에 있는 동명여자중학교. 1880~1882년 주한일본공사관이 있던 곳이다.  감리교신학대학 앞에는 동명여자중학교가 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이 개설한 첫 번째 주한일본공사관이 있던 곳이다. 판리공사(辦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는 1880년 4월 이곳에 일본공사관을 마련했다. 이곳은 원래 조선 영조 때부터 경기중군영(中軍營)이 있던 곳이다. 경기중군영 내에는 천연정(天然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천연동이라는 동명(洞名)이 여기서 나왔다. 천연정은 서지(西池·지금의 금화초등학교 자리)라는 연못을 끼고 있었다. 주한일본공사관은 흔히 청수관(淸水館)이라고 불렸다.     정식으로 공사관을 개설하기 전부터 강화도조약 후 서울에 들어오는 일본 사신들은 이곳에 묵었다. 이곳에 있던 일본공사관은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난민(亂民)들의 방화로 소실됐다.⊙

문성근

▲ 영화 ‘최종병기 활’에 등장하는 만주족(여진족)의 한 장면. /조선DB  1583년 1월, 여진족인 니탕개는 경원과 종성 일대의 번호(조선에 귀화한 여진족)들을 규합하고, 1만이 넘는 여진 기병을 이끌고 조선의 국경을 넘나들며, 근 6개월 동안 함경도 지방을 휘젓고 다니면서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이 난은 우을지라는 번호가 부패한 함경도 관리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아산보의 관아를 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후 조선의 조정에서 이 사건을 반란으로 규정하여 토벌하려고 들자 겁을 먹은 번호들이 국경너머 동족에게 군사를 요청하면서 폭동이 전쟁으로 번지고 말았다.   이때의 국제정세를 보면, 조선은 신분제의 병폐로 경제가 파탄되고 국고가 텅비었지만, 계급적 특권을 고집하는 양반들이 당파를 형성하여 변법(變法)을 거부하느라 당파싸움만 일삼는 바람에 온 나라가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명은 밖으로 북로남왜의 외침에 시달리고, 안으로 조정의 무능과 부패로 외국에서 온 사절단의 안위조차 지키기 힘들었지만 황제는 황음에 빠져 채찍으로 환관이나 궁녀를 때려죽이는 놀이를 그치지 않았으니 나라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조선 및 명과 국경을 맞댄 여진족이 발호하여 하루가 다르게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관리들은 국제정세에 무지한데다 이기적 특권유지에만 신경을 쓰느라 북방 이민족의 준동을 보고받고도 나몰라라 했다. 이 때문에 니탕개의 난 때 경원과 종성 일대의 관아는 무방비로 공격을 당해 창고의 무기나 곡식은 물론 붓이나 벼루까지 깡그리 약탈을 당했으며, 가족이나 가축을 지키려다 미처 피하지 못한 백성들은 무참하게 살육을 당해 백성들의 피가 내를 이룰 정도였다.   이런 참극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변화를 꾀하기 보다는 오히려 신분제도의 강화를 위해 옥비의 후손들을 주된 대상으로 하는 대대적 노비쇄환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 노비쇄환령의 연유를 이해하려면 150년 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50년 전 세종조 때 조정은 북방의 여진족을 아우르고, 국경지역에 사군육진(四郡六鎭)이라는 10개의 교역 겸 군사도시를 건설했다. 그런데 그 때 사군육진을 건설한 힘은 군사력이 아니라 백성들의 자유를 향한 염원과 땀이었다. 당시 조정은 사군육진의 인구확충을 위해 남도의 백성들을 북방의 국경도시로 이주시켰는데, 이 때 이주한 사람들은 국가의 강제가 아니라 모두 자발적으로 지원한 백성들이었다.   북방의 국경도시로 이주할 경우 노비의 신분에서 해방시켜주겠다는 조정의 약속을 믿고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난 것이다. 그들은 국경지대의 둔전병이 되어 평시에는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다가 외적이 침입하면 주저없이 농기구 대신 창검을 손에 쥐었다. 겉으로 보기에 고달픈 삶이었지만 노비신분을 벗고 자유를 가졌다는 해방감만으로도 그들은 행복했다. 딴 곳에 팔려갈 걱정없이 가족과 함께 살 수 있기에 이민족의 침입쯤은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30년도 지나지 않아 갑자기 국가정책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선왕(예종)이 재위 10개월 만에 석연찮은 죽음을 맞은 바로 그날 대비(정희왕후)와 권신들의 추대로 왕위계승권이 한참 뒤처지는 12세의 어린 왕자(자을산군)가 왕(성종)으로 등극했다. 그렇게 되자 권력은 대비(정희왕후 윤씨)의 수렴청정을 통해 저절로 한명회, 신숙주 등의 조정권신의 손에 들어갔다.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권신들은 가산을 늘리기 위해 노비수를 대폭 늘리고 싶었다. 그래서 선대 왕의 유지나 업적마저 부정하고, ‘전조의 폐단을 바로 잡는다’는 명목으로 과거 자유를 찾아 북방으로 이주했던 백성들의 자유와 권리를 몽땅 소급해서 박탈하고, 다시 노비로 돌려버렸다.   이렇게 되자 하루아침에 토지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떨어진 백성의 수가 10만이 넘었고, 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이런 와중에 옥비의 부모는 딸자식만큼은 노비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평생 모은 재물(어차피 노비가 되면 한 푼의 재산도 소유할 수 없게 된다)과 딸을 국경지역에 파견 나온 한 군관에게 넘겨주고, 척박한 땅을 벗어나게 했다. 이런 부모의 헌신 때문인지 옥비는 양민의 아내로서 평생을 살면서 열이 넘는 자식을 두었다. 후손들도 번창하여 옥비의 사후 80여 동안 500명이 넘는 후손을 두었는데, 그 중에는 고관대작이나 왕가의 인척도 있었다.   ▲ 명나라 때 여진 무사도 [출처=위키피디아]그런데 니탕개의 난이 발생한지 두세 달 후 옥비의 도주사건이 우연히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자 조정대신들은 ‘건장한 노비를 면천하여 군사로 등용하자’는 병조판서 이율곡의 주장을 물 먹이고, 이민족의 침입으로 어수선한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전국의 관아에 대대적인 노비쇄환령을 내렸다. 그리고 사헌부와 한성부, 포도청은 물론 전국 8도의 지방관아에 실적경쟁을 시켰다. 그 결과 수천에 이르는 양민이 영문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노비로 떨어져 전 재산을 몰수당한 채 북방의 국경지대로 끌려갔다.   결과도 그렇지만 노비쇄환을 위한 재판과정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웠다. 불문곡직 관아에 끌려가 잔혹한 고문과 함께 죽은 조상이 노비였다는 사실을 자복하라는 추궁을 받다보니 일단 맞아 죽지 않으려면 허위로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들은 대부분 선량하고 힘없는 백성들이었지만, 권력싸움에서 패배하거나 권력자에게 찍힌 양반이나 왕족도 적지 않았다.   이로 인해 민심은 얼어붙고, 나라는 더 기울었다. 양반들도 이런 사정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사건의 초기에는 벼슬아치들이 사건을 처결할 경차관의 임무를 맡지 않으려고 서로 피했다. 처음 경차관을 맡은 자는 양심에 찔려 처결을 미룬 채 시간을 끌며 행여나 어명이 바뀌기를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자 집안의 상을 핑계로 사직해 버렸다. 그 후 등을 떠밀리다시피 경차관을 맡은 자는 부임행차를 앞두고 갑자기 중병에 걸렸다며 자리에 누워 버렸다.   이렇게 되자 조정에서는 심사숙고 끝에 사명감이 넘치고 유능한 인물을 다시 경차관으로 임명했다. 과연 이 인물은 조정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가차 없는 고문으로 쉽사리 죄인들의 자백을 받아내고, 속전속결로 처결을 내렸다. 그렇지만 이렇게 북방의 국경지대로 끌려간 사람들이 과연 국방의 강화에 도움이 되기나 했을까?   이 사건으로 가장 큰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은 이는 당시 병조판서였던 율곡 선생이었다. 그는 이 사건이 있기 10년 전부터 ‘건장한 노비의 면천과 군사등용을 통한 군사력을 증강’을 목청이 터지도록 주창했지만 자신의 뜻과는 정반대로 계급사회의 동요를 우려한 양반들의 극심한 반발을 초래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옥사로 희생되는 참극을 목격하고,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노비쇄환이 마무리될 무렵 모든 벼슬에서 물러났고, 그로부터 석 달 후 49세의 나이에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과거나 지금이나 왜 우리는 1583년에 연속하여 일어난 엄청난 국가적 재난을 역사에 묻어둔 채 교훈을 얻지 않는가? 역사를 독점하면서 과오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권력의 편협함 때문인가?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수천의 백성이 외적의 손에 죽거나 다치고, 수천의 양민이 하루아침에 노비가 되어 북방 국경지대로 끌려가는 사건이 어떻게 역사 속에 묻힐 수 있단 말인가? 그 때 조선의 양반들에게 백성을 귀히 여기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그때의 국난으로 교훈을 얻었다면, 불과 수년 후 토요토미 히데요시같은 과대망상병자 따위가 감히 조선을 침공하는 사건도 역사의 기록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한우

《논어(論語)》 책을 열고서 학이시습(學而時習) 불역열호(不亦說乎)를 어렵사리 넘으면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불역낙호(不亦樂乎)’를 만나게 된다. 강의를 하면서 이게 무슨 말이냐고 하면 대부분 익히 알고 있다는 듯이 큰 소리로 대답한다.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과연 그럴까? 공자(孔子)가 과연 그런 뜻으로 한 말일까? 그런 정도의 말인데 《논어》라는 책의 서두에서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그럴 경우 다시 물어본다.    “그러면 가까이에서 늘 만나는 벗이 오면 기뻐하지 말라는 뜻인가요?”    “가까이에 있는 벗과 멀리서 찾아온 벗을 차별해서 대우하라는 말일까요?”    그때야 상황을 눈치챈 청중은 웅성웅성한다.    먼저 우(友)가 아니라 붕(朋)이다. 붕은 벗 중에서도 뜻을 같이하는 벗[同志之友]을 말한다. 그 뜻은 열렬하게 애씀[文]을 배워 그것을 틈날 때마다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 뜻을 함께하는 벗이 바로 붕이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에 적용해서 말하면 임금으로부터 충분한 신뢰를 받는 사람이 바로 붕이다.    그런 붕이 원(遠)에서 온다? 이건 또 무슨 뜻일까? 임금은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측근, 근신(近臣), 후궁 그리고 친족들에게 둘러싸이기 마련이다. 일반 백성들의 공적인 의견이나 비판적인 견해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다. 바로 이럴 때 그냥 그런 신하[具臣]가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붕신(朋臣)이 있어 그가 그런 쓴소리, 비판, 공적인 의견을 듣고 와서 가감 없이 전할 때 성내지 않고 오히려 평소 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해주고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표정을 지을 때라야 맘껏 신하들은 그 쉽게 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임금에게 전달할 수 있다. 임금이 조금이라도 즐거워하지 않는 표정을 지으면 제아무리 신뢰를 받는 신하라도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를 감히 하기 쉽지 않다.    정리하자면 학이시습 불역열호는 임금에게 스승 같은 신하[師臣]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고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는 임금에게 뜻을 같이하는 벗과 같은 신하[朋臣]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둘은 모두 임금의 겸손한 마음[謙]을 요구하고 있다.      임금에게 벗은 가능한가?  겸재 정선이 그린 함흥본궁. 이성계의 잠저(潛邸)였고, 함흥차사 전설의 무대이다.  세조 4년 9월 16일(1458년) 의정부에서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를 처벌할 것을 아뢰었다. 이유는 전날 술자리에서 임금인 세조에게 “너[爾]”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미 그전에도 과감한 직간(直諫)으로 문제가 된 바 있었기 때문에 임금을 향해 “너”라고 한 것은 아무리 만취 상태였다 해도 죄를 벗기가 어려웠다. 불경(不敬)은 물론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무군(無君)의 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승까지 지낸 훈구(勳舊)공신 정인지를 처벌하기는 힘들었다. 1년 넘게 정인지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가 올라왔지만 결국 이 건은 직첩(職牒)을 회수했다가 다시 돌려주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참고로 나이는 정인지가 1396년, 세조가 1417년생이니 정인지가 21세나 많았다. 나이로만 보면 정인지는 세조에게는 벗 같은 신하가 아니라 스승 같은 신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세종 말년에 함께 각종 도서 편찬 작업을 하면서 벗과 같은 뜻을 나눈 바 있었기에 우정의 의미 또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인지는 그런 마음을 버리지 못해 여러 차례 목이 날아갈 뻔했다.    태조 이성계에게는 성석린(成石璘)이라는 벗과 같은 신하가 있었다. 실록은 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로부터 석린을 가장 중히 여기더니, 왕위에 올라서는 대우함이 더욱 높아서 비록 임금의 마음에 기쁘지 않은 일이 있더라도 석린을 보면 마음이 풀리어 노여움을 그치고 말하면 반드시 들어주었다.〉    “말하면 반드시 들어주었다.” 이런 신하가 바로 전형적인 붕신(朋臣)이다. 실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야사집 《대동기문(大東奇聞)》에는 함흥차사(咸興差使)를 최종적으로 해결한 주인공이 성석린이라고 나온다. 1차 왕자의 난 이후에 태조 이성계는 그 일에 분노하여 고향인 함흥 옛집에 거처하고 있었다. 이방원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냈으나 아버지를 모셔오지 못했다.    이에 성석린이 오랜 벗이기도 하여 스스로 갈 것을 청해 함흥으로 갔다. 석린은 과객 차림을 하고서 그 인근을 지나는 척했다. 태조가 이를 멀리서 알아보고서는 환관을 보내 그를 불러오게 했다. 태조와 마주한 석린은 한참 동안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가만히 본론을 끄집어냈다. 그것도 직접 말할 수는 없어 인륜(人倫)의 도리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것이 바로 태조의 입장에서 보자면 말 그대로 유붕자원방래다. 그러나 그는 결코 불역낙호할 수 없었다. 오히려 석린의 방문 의도를 알아차린 그는 낯빛이 변하며 말했다.    “네가 네 임금을 위해 비유를 끌어들여 나를 속이려 드는 것이냐?”    이에 석린은 자신의 순수성을 믿어달라며 이렇게 말했다.    “신이 만일 과연 그런 의도라면 신의 자손 중에 반드시 눈이 먼 소경이 나올 것입니다.”    이 말에 태조는 화를 가라앉히고 마침내 도성으로 돌아와 부자 화해를 했다. 그런데 《대동기문》은 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석린의 큰아들 지도(至道)는 소경이 됐고 둘째 아들 발도(發道)는 아들이 없었으며 지도의 아들 창산군(昌山君) 구수(龜壽) 및 그 아들은 모두 배 속에서 소경이 됐다.”    결국 아무리 오랜 벗이었다고 해도 한 사람은 임금이 되고 한 사람은 신하가 될 경우 계속 벗과 같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는 오히려 언관(言官) 혹은 간관(諫官)의 역할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급암과 무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한나라 무제(武帝) 때 급암(汲黯)이 주작도위(主爵都尉・왕실에서 순임금의 제사를 주관하고 그 후손들에게 작위를 내리는 일을 맡았던 고위직)가 되어 구경(九卿)의 반열에 올랐다. 그의 간언은 황제의 안색을 범할 만큼 직간이었는데 한번은 황상이 글을 하는 유학자들을 초빙하려 하면서 말했다.    “나는 이러이러하고자 한다(이 말은 ‘어짊과 의리[仁義]의 정치를 행하고 싶다’는 뜻).”    이에 급암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속으로는 욕심이 많으시면서 겉으로는 어짊과 의리를 베푸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야 어찌 요임금과 순임금의 다스림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황제는 화가 나서 낯빛까지 바뀌더니 서둘러 조회를 끝내버렸다. 공경(公卿)들은 모두 급암을 걱정했다. 황상은 조정을 나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무도 심하구나. 급암의 꽉 막힌 우매함[戇]이여!”    여러 신하가 급암을 책하자[數=責] 급암이 말했다.    “천자께서는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을 두어 보필하는 신하로 삼으셨는데 어찌 아첨하여 천자의 뜻만 따라 하면서 폐하를 옳지 못한 곳에 빠지게 하겠소? 또 그런 지위에 있는 이상 자기 몸을 희생시키더라도 조정을 욕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급암이 병에 걸리자 엄조(嚴助)가 급암에게 휴가를 내려줄 것을 황상에게 청했다. 이에 황상이 말했다.    “급암은 어떤 사람인가?”    “급암에게 어떤 책임이나 자리를 맡기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을 것은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이 어린 군주를 보필할 경우 수성(守成)해 낼 것이며 옛날의 맹분(孟賁)이나 하육(夏育)(둘 다 옛날의 힘센 자였다) 같은 자라도 그의 마음을 빼앗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상이 말했다.    “그렇다. 옛날에 사직을 지켜내는 신하[社稷之臣]들이 있었는데 급암이 바로 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결국 무제는 급암을 들여 쓰지 못했다. 진덕수(眞德秀)는 《대학연의(大學衍義)》에서 이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급암의 곧음[直]을 무제는 사직을 지켜내는 신하에 가깝다고 보았으면서도 결국은 제대로 쓰지 못한 반면 공손홍(公孫弘)의 무리는 끝까지 총애하며 일을 맡겼습니다. 대체로 무제의 마음은 아첨하고 간사한 자[佞邪]를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여겼을 뿐 그들이 결국은 황제의 병을 더 심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반대로) 충성스럽고 곧은 자[忠直]를 자신을 배척한다고 여겼을 뿐 그들이 결국은 황제의 황제다움[德]을 이루어준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곧게 말하는 것[直言]은 진실로 간관의 직무”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가 묻힌 헌릉.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흥미롭게도 무제, 급암의 경우와 유사한 사례가 우리 역사에도 등장한다. 태종 4년 5월 3일이다.    사간원에서 다시 노이(盧異)를 탄핵하니 명하여 전리(田里-고향)로 내쫓았다. (사간원에서) 이(異)에게 상(上)을 향해 공손치 못한 말을 하고 그것을 바깥사람들에게 떠들어 말한 까닭을 물으니 이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말한 것이 불손한 것이 아니라 곧게 말하는 것[直言]은 진실로 간관의 직무다. 또 밖에 떠들어 말한 것이 아니라 다만 동료들과 그것을 말한 것뿐이다.”    휴(休-조휴) 등이 소를 올려 말했다.    “좌정언 노이가 지존을 향해 함부로 고분고분하지 못한 말을 지어내었고 밖에다 대고 사람들에게 떠들었으니 청컨대 직첩을 거두고 저 해외(海外・먼 바닷가)로 물리쳐야 합니다. 우정언 신효도 이를 거들어 말하였으니 마땅히 함께 죄를 주어야 합니다.”    상이 이를 듣고서 이를 불러 물어보니 이가 이렇게 대답했다.    “옛날 소신(小臣)이 사관일 때 해주(海州)에 어가를 따라가서 어리석은 속마음[衷]을 우러러 올렸더니 곧 아름답게 여기고 받아들여 주심을 입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감격하여 항상 남몰래 생각하기를 만일 언관이 되어 말해야 할 것이 있으면 앞뒤를 돌아보지 않고 남김없이 다 말해야겠다고 여겼습니다. 지난번에 말하고자 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상께서 실질적인 다움(을 닦는 것)에는 힘쓰지 않으시고 겉으로만 어짊과 의로움[仁義]을 다 갖춘 양 꾸미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신(李伸), 김보해(金寶海) 등이 여색(女色)을 바쳐 전하를 속였는데도 일찍이 죄를 받지 않아 죄를 청하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썩은 참외의 비유와 남의 처첩을 빼앗았다는 말은 신이 한 발언이 아닙니다. 효(曉)의 경우에는 이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들은 자가 잘못 들은 것일 뿐입니다.”      “너는 분명 백이·숙제와 같은 뜻”    그러고는 드디어 (이번 일의) 본말(本末)을 끝까지 다 말하니 상이 말했다.    “네가 이와 같이 할 말이 있었으면 어찌하여 날 찾아와 전달하지 않고 사사로운 자리에서 말했느냐?”    이가 대답했다.    “신은 사사로운 자리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단지 동료들과 더불어 원의(圓議・대간(臺諫)이 비밀리에 풍헌(風憲)에 관계되는 일이나 탄핵에 관계되는 일 또는 배직(拜職)한 사람의 서경(署景)을 의논하는 것. 완의(完議)라고도 한다)에서 말했을 뿐입니다.”    상이 말했다.    “옛날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주(周)나라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다. 너는 분명 백이・숙제와 같은 뜻을 갖고 있어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지금 마땅히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해주겠다(태종의 말은 노이가 처음부터 자신의 즉위 과정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가 말했다.    “신의 죄는 주살에 해당되건만 전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시니 은택이 지극히 두텁습니다. 그러나 신이 백이・숙제와 같은 마음이 있었다면 마땅히 일찍이 물러났지 어찌 오늘에 이르렀겠습니까? 간관이 되어서 한 번도 미미한 충성[微忠]이나마 바치지 못하고 갑자기 전리로 돌아가게 되니 이것이 한스럽습니다.”    상이 말했다.    “너의 이런 말을 들으니 나 또한 슬프구나. 눈앞에서 오랫동안 일을 맡겼던 사람을 하루에 내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효는 집에 머물러 있으라고 명하고 그 소(疏)는 (궁중에) 머물러 두고 (해당 부서에) 내려보내지 않았다. 좌헌납 박초(朴礎)가 대궐에 나아와 말씀을 올렸다.    “노이는 죄가 무거운데 벌이 가볍고 효는 이와 죄가 같은데 벌이 다릅니다.”      태종, “급암과 같은 신하가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    상이 말했다.    “이가 말한 바는 근거 없는 일이 아닌데 어떻게 죄를 주겠는가? 다만 이가 사관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까이에서 나를 모신 지가 이미 오래인데 나에 대해 평하기를 ‘겉으로는 옳은 척하고 속은 그르다[外是而內非]’고 했으니 내가 이를 가려보려고 했지만 그러나 내가 (실제로) 다움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일 뿐이다. 급암이 한무제(漢武帝)에게 ‘안으로는 욕심이 많으면서 겉으로는 어짊과 의로움을 베푸는 척한다’고 했는데 무제의 웅대한 재주[雄才]와 큰 계략[大略]은 내가 미칠 바는 못 되나 그렇지만 진정 급암과 같은 신하가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노이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더 이상의 처벌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급암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벼슬살이를 하지도 못했다. 벗과 같은 신하[朋臣]는 그만큼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김병헌

  정확한 사료 번역은 올바른 역사 서술의 기본이다(1)- 고조선 편   현행 고등학교 검정 한국사 교과서에는 고조선과 관련하여 『삼국유사』의 「고조선」 조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의 8조법이 사료로 소개되어 있다. 물론 원문이 아닌 번역문이다. 그런데, 인용된 사료의 번역이 부정확하거나 오역이 적지 않다. 먼저 리베르스쿨 교과서에 ‘환웅의 신시 건설’이라는 제목 아래 소개된 『삼국유사』의 단군신화 부분이다.   하늘의 제왕인 환인에게는 환웅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환웅은 천하에 뜻을 품고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였다. 이에 환인은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 세 개를 주고 뜻을 펴기에 적당한 삼위태백에 내려가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불렀다. 그때부터 환웅 천왕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 360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며 인간 세상을 교화하였다. -삼국유사-   이 사료는 『삼국유사』라는 출전을 명기한 이상 원전에 충실한 번역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교과서에 수록된 번역은 대부분 의미 전달에 치중한 나머지 지나친 의역이나 원전과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 『삼국유사』 해당 부분의 번역문과 비교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옛날에 환인(桓因:어떤 본에는 桓國으로 되어 있음)의 서자인 환웅이 있었는데, 자주 하늘 아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탐냈다. 아버지가 자식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였다.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며 가서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하니, 이를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한다.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목숨, 질병, 형벌, 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인도하였다.(昔有桓因庻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徃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 神壇樹下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 雨師, 雲師, 而主糓, 主命, 主病, 主刑, 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하늘의 제왕인 환인에게는 환웅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환웅은 천하에 뜻을 품고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였다.’에서 ‘하늘의 제왕’은 원문에 없는 글이며, ‘천하에 뜻을 품고’에서는 ‘자주[數]’라는 중요한 부분이 빠졌다.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였다.’는 번역에 해당하는 ‘貪求(탐구)’는 ‘탐내어 구하다’라는 뜻으로 ‘다스리고자 하였다.’는 번역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에 환인은’이라는 문장은 원문대로 ‘아버지는’으로 하는 것이 부드러우며, 이어지는 문장인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 세 개를 주고 뜻을 펴기에 적당한 삼위태백에 내려가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는 문장에서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 빠졌을 뿐만 아니라 문장 전체가 오역이다. ‘아버지가 자식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였다.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며 가서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로 분명하게 나누어 옮겨야 정확한 의미가 전달된다. 또, ‘그때부터 환웅천왕은’이라는 부분은 앞의 문장과 연결하여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하니, 이를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하였다.’고 단락을 마무리하여야 한다. 원문에는 ‘그때부터’에 해당하는 글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을 교화하였다.’는 부분은 ‘다스려 인도하였다.’고 번역하여 ‘다스리다’는 뜻에 해당하는 ‘이(理)’의 의미를 살려야 한다.     이어서 ‘환웅 부족과 곰 숭배 부족의 통합’이라는 제목의 인용 사료와 해당 부분의 『삼국유사』 번역을 함께 살펴보도록 한다.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환웅에게 사람이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은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였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곰과 호랑이는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 먹으며 지냈다. 금기를 지키기 시작한 지 삼칠일(21일) 만에 곰은 여자가 되었지만,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혼인할 상대가 없어 늘 신단수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축원하였다. 이에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사랑을 나누었고, 웅녀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가 단군왕검이다. 단군왕검은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이때에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神) 환웅(雄)에게 기도하되 화(化)하여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이에 신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百日)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이 될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그것을 받아서 먹어, 기(忌)한지 삼칠일(三七日)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호랑이은 금기하지 못해서 사람의 몸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양 단수(壇樹)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혼인하였다. [웅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 하였다. 당(唐)의 고(高)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庚寅)으로,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처음으로 조선이라 하였다.(時有一熊一虎同穴而居, 常祈于神雄願化爲人. 時神遺靈艾一炷蒜二十枚曰, 爾軰食之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故每於壇樹下呪願有孕. 雄乃假化而㛰之. 孕生子號曰壇君王倹. 以唐髙即位五十年庚寅, 都平壤城 始稱朝鮮.) ‘곰과 호랑이는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 먹으며 지냈다. 금기를 지키기 시작한 지 삼칠일(21일) 만에 곰은 여자가 되었지만,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라고 한 문장은 ‘곰과 호랑이가 그것을 받아서 먹었다. 삼칠일을 금기(禁忌)한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금기하지 못하여 사람의 몸이 되지 못하였다.’로 번역하여야 한다. ‘쑥과 마늘만 먹으며 지냈다’고 한 번역은 원전과 다른 번역이다. ‘이에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사랑을 나누었고’는 ‘환웅은 이에 잠시 변하여 혼인하니 잉태하였고’로 번역해야 한다.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다’고 한 부분에서 원문에는 ‘국호’라는 단어가 없다. ‘처음으로 조선이라 하였다’고 번역해야 한다.   옛날에 환인과 그의 아들 환웅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가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하므로(홍익인간, 弘益人間)…… 환웅은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령스러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형벌 등 인간에게 필요한 360여 가지를 주관하며 사람들을 다스렸다. 그때 곰과 호랑이가 환웅신에게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 …… 그 중에서 곰은 삼칠일 동안 금기를 지켜 여자의 몸을 얻었다. …… 이에 환웅이 웅녀와 혼인하여 아이를 낳았으니 이를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삼국유사-     이 교과서의 인용 사료는 사료를 충실하게 번역하여 소개하기보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를 토대로 축약하여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중간 중간 중요한 내용들을 생략함으로써 본래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면이 있다. ‘환인과 그의 아들 환웅이 있었는데’는 ‘환인의 서자 환웅이 있었는데’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신령스러운 박달나무’는 풀이할 것이 아니라 ‘神壇樹(신단수)’라고 그대로 써야 한다. 삼국유사에는 ‘단(檀:박달나무)’이 아닌 ‘단(壇:제터)’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몸을 얻었다’에 해당하는 원문은 ‘得女身(득여신)’으로 이 때의 ‘得’은 ‘能(능, 가능)’의 뜻이기 때문에 ‘여자의 몸이 될 수 있었다’로 해석해야 자연스럽다. ‘이에 환웅이 웅녀와 혼인하여’는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라는 내용이 들어가야 본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 아래에 자주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였다.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니 널리 이롭게 할 만하였다. …… 환웅은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신성한 나무) 아래에 내려왔다. 환웅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였다. 이 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았는데, 늘 사람이 되기를 환웅에게 빌었다. 곰은 삼칠일(21일) 동안 몸을 삼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그렇지 못하여 사람의 몸을 얻지 못하였다. 환웅이 임시로 변하여 웅녀와 결혼하였다. 그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단군은 요임금(중국 신화에 나오는 전설적인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 째가 되는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삼국유사-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였다’는 ‘인간 세상을 탐냈다’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니 널리 이롭게 할 만하였다’는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였다’로 번역해야 한다. ‘신성한 나무’는 원문에 ‘神壇樹(신단수)’로 되어 있어 잘못된 번역이며, ‘사람의 몸을 얻지 못하였다.’는 ‘사람의 몸이 되지 못하였다.’로 번역하여야 한다. ‘檀君王儉’은 『삼국유사』에 있는 대로 ‘壇君王儉’으로 써야 하며,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는 ‘처음으로 조선이라 하였다’로 옮겨야 한다. 원문에 ‘나라 이름’에 해당하는 글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은 8조 법에 대한 사료 인용이다. 먼저 『한서』 「지리지」의 번역문을 살펴보고 각 교과서를 확인하기로 한다.   조선 백성의 범금 8조는, 살인하면 바로 살인으로 갚는다. 상처를 입히면 곡식으로 갚는다. 도둑질 한 자는 남자는 몰수하여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데, 배상을 하고자 하는 자는 일인당 50만을 내야한다. 비록 죄를 면하고 백성이 되더라도 풍속[민간]에서 수치로 여겨 혼인하려 해도 짝을 구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그 나라 백성은 마침내 도둑질 하지 않아 문을 닫는 일이 없었으며, 부인들은 정신(貞信)하고 음벽하지 않았다.(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是以其民終不相盜 , 無門戸之閉. 婦人貞信不淫辟.) -한서 지리지- 금성출판사의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재산을 몰수하고 그 집의 노비로 삼으며(31)’라고 한 문장은 ‘남자는 몰수하여 그 집의 노(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다.’로 번역해야 한다. 몰수에 해당하는 ‘몰입(沒入)’이라는 글이 ‘남(男)’자의 뒤에 있기 때문이다. 리베르스쿨의 ‘당시 풍속에 따라 부끄러움을 씻지 못하여(23)’는 ‘풍속[민간]에서는 여전히 부끄럽게 여겨’로 풀이하여야 하며, 교학사의 ‘이러해서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아 대문을 닫고 사는 일이 없었다(21)’는 번역문은 바로 앞 문장의 중복이다.   위 내용에는 없으나 천재교육의 ‘군을 설치하고 초기에는 관리를 요동에서 뽑아 왔는데, 이 관리가 백성이 문단속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장사하러 온 자들이 밤에 도둑질하니 풍속이 점차 야박해졌다. 지금은 금지하는 법이 많아져 60여 조목이나 된다.(17)’고 한 인용 사료에서, ‘군을 설치하고 초기에는’이라 한 문장에 해당하는 원문에는 ‘설치’를 뜻하는 단어가 없으므로 ‘군(郡)에서 처음에는’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또, ‘장사하러 온 자들이’는 ‘장사하러 간 자들이[賈人往者]’라고 번역하는 것이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중국 입장에서 기록한 조선(朝鮮)에 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사료로 출제된 지문이 잘못 번역되어 국사편찬위원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민원 담당 연구원과 전화로 대화한 적이 있다. 필자의 지적에 연구원은 정답에 영향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비록 정답에 영향이 없더라도 국편에서 주관하는 시험에서 지문으로 제시된 사료의 번역은 정확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돌아온 답변이 가관이다. ‘우리 역사는 사료의 정확한 번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해석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소한 번역의 오류는 문제 될 것이 없다.’라는 것이다. 국편 연구원의 답변이라 하기에는 믿기지 않아 내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우리 역사는 현대사를 제외한 나머지는 90% 이상이 한문 원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료에 나타난 한문을 한 글자라도 놓치거나 두루뭉수리로 해석하는 순간 우리 역사 서술은 엉뚱한 길로 빠져든다. 그것이 바로 서술 오류가 되고 역사 왜곡이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김승열

제네바 일기(21)   파리, 제네바를 거쳐 독일 뮌헨으로 돌아오다    파리 근교에 숙박을 하기로 하였는데 조금 늦게 도착하니 리셉션 지역에 사람이 전혀 없었다. 놀라서 알아보니 해당 호텔은 늦은 시간에는 무인으로 체크인을 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늦은 시간에는 전화로 체크인을 하고 해당 방의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사전에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서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주위가 녹음으로 가득찬 비교적 조용하고 목가적인 지역이어서 그나마 기분을 달랠 수 있었다. 프랑스는 중저가 호텔의 경우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무인체크인이 일반화되어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방문객은 상당히 당황스러워질 수 있으니 이 지역을 여행할 때는 이점을 미리 챙겨야 할 것이다.   아침에 파리 근교에서 프랑스 국왕과 귀족들의 사냥터로 널리 알려진 퐁텐블로 지역을 가보기로 하였다. 산적한 시골길을 지나니 아담하면서 아름다운 성이 눈에 띄였다. 파리 근교는 의외로 평탄한 지역이 많고, 전체적으로 조용하면서 목가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퐁테블로 지역에 있는 멋지고 조용한 성같은 건물에서 사냥을 즐긴 이후에 다함께 쉬기도 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어서 베르사유궁전을 잠시 들러 보았다. 22년 전에 OECD에 한국 대표로 출장을 왔다가 시간이 나서 전철을 타고 와서 그 아름다움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당시 다음 방문 기회에는 차를 몰고 와서 파리 근교를 한번 다녀 보고싶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다. 그동안 사는 게 바빠 차일피일하다가 지금에 와서 차를 몰고 이곳을 다시 방문하게 되니 상당히 감회가 새로웠다.   다시 와보니 이번에는 과거에 느꼈던 큰 감흥까지는 일어나지 않았고, 단지 반가운 모습으로만 와닿았다. 어쨌든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베르사유궁정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고 서로 이를 본받아 많은 궁전을 만들어 온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베르사유 궁전이 그만큼 아름다운 궁전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만 그간 세월이 많이 흘러 필자로서는 젊었을 때와 같은 깊은 감흥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움이라고나 할까... 그 만큼 감수성이 무디어 진 것인지 아니면 그간 많은 곳을 보아 견문이 넓어져서 더 이상 큰 감흥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인지...   이어 파리의 드골 공항에 들어서니 다른 나라의 공항보다는 좀 더 아름답고 공간 사용 등에 있어서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직원들도 좀 더 여유가 있고 상당히 친절했다. 의자나 배치된 가구 등도 다른 공항보다 더 세련되어 보였다. 아무래도 문화와 예술을 즐기는 나라의 특성상 공항도 아무래도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욕구가 많이 표출된 것으로 보였다. 이에 반하여 스위스의 제네바 공항은 실용적이면서 깔끔한 인상이다. 뮌헨 공항은 좀 더 실용적인 측면이 강조된 것 같아 서로 비교를 해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독일 뮌헨에 도착하였다. 비교적 알려진 렌탈 회사에 차를 예약하였는데 차고에 들어온 차가 없다는 이유로 "계약을 취소하거나 아니면 버스를 운전하라"는 어처구니 없는 응대를 받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상황에서 너무나도 당당한 해당 직원의 태도였다. 마치 차가 없는 데 어쩌라는 말이냐는 식의 너무나 몰상식한 태도를 보였다.   그동안 독일에 대하여 가졌던 좋은 인상 자체를 전부 갈아치울 정도로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일부 직원이 문제일지는 모르나, 국제 공항에서 그것도 상당히 알려진 자동차 렌탈 회사에서 이런 식으로 손님을 응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곳이 독일이 맞는지 나의 눈과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이런 일이 만약 한국에서 일어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직원의 태도와 고객의 태도 모두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고객이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놀랍기도 하였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를 성숙한 시민의식이라고 해야 하나? 꼭 그것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물론 소리를 지르며 소동을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지 모르나 이와 같이 몰상식한 직원들을 제대로 응징할 수 있는 개인의 의식과 나아가 사회시스템은 필요할 것으로 보여졌다.    렌탈 회사 직원의 태도는 유럽이 우리와 비교하여 선진국이 아닌 면도 있구나하는 사실을 제대로 실감하게 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제네바에서 뮌헨으로 가는 비행기가 연착하여 체크인이 10-15분 정도 지체가 되었는데도 비행기를 타기 전 게이트에서 항공사 직원 어느 누구하나 이 부분에 대하여 미리 알리고 이해와 양해를 구하는 방송을 하지 아니한 것이 새삼 떠올랐다. 단지 전광판에 10분 지체된 체크인이 예상된다는 표지만 있었을 뿐이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작은 사건 하나를 너무 침소봉대하는 것일까? 아니면 과거에는 선진국이었으나 이제 점차 경쟁력을 잃어가는 EU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까? 예약에 따른 차가 회사 사정으로 준비가 안 되었으면 이에 대하여 제대로 대책을 세워주는 조치를 취하기는 커녕, 어느 직원하나 진정으로 미안해 하는 모습조차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물론 이 사건 하나를 가지고 독일 혹은 EU를 너무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다만 이런 현상을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또한 해석하여야 할 것인가가 굉장히 궁금해졌다. 앞으로 필자는 독일에서 방문 연구원 생활을 통하여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자동차 렌탈 회사 직원의 태도는 독일 사회가 어떤 형태로든지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만은 분명한듯하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회사 직원들의 손님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히 경쟁력이 있고, 또 명실상부한 선진국의 대열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는 면이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번 일은 비록 개인적으로는 황당한 경험이었지만, 나름대로 의미있는 사건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네바 일기(22)   독일 산학협동의 요체인 막스 프랑크 연구소의 시스템 등을 접하다   전날 자동차 렌탈 회사와의 해프닝으로 예상지 않게 공항에 위치한 힐튼 호텔에서 하루밤을 보내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비록 속은 쓰렸지만 테레사 수녀님의 가르침대로 "역경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또 하나를 깨우쳐 주시는 것"이라고 믿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졌다.   그동안 중저가 호텔을 다니느라 힘들었는데 역시 세계적인 호텔의 경우는 방부터 달랐다. 값이 비싸 부담은 되었지만 어찌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사워를 하고 모처럼 좋은 호텔에서 단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거의 8시였다. 전날 밤에 지식재산권 분야에서 성공한 변호사가 갑자기 담낭암으로 별세하였다는 국내 신문 기사를 보고 충격에 빠졌다. 아주 성공적인 삶을 살아 온 나와 학번이 같은 변호사였는데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웠다. 법무법인을 제대로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다. 삼가 명복을 빌면서 인생의 무상함과 유한함을 실감하였다. 지금이라도 나는 좀 더 삶을 즐기면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오늘은 시간을 내어 막스 프랑크 연구소의 사택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막스 프랑크 연구소는 저녁에 도서관을 닫지만, 막스 프랑크 소사이터라는 사무실은 일년 내내 24시간 열고 있었다. 이는 전 세계에서 오는 학자들의 편의를 위함으로 보였다.   원래는 어제 저녁에 방문하기로 했지만, 차 렌탈에 문제가 생겨 아침에 들렀더니 친절하게 나에게 전달하여야 할 물품을 주었다. 시스템적으로 잘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연구소 내에 나에게 배정된 사무실 공간을 둘러보았더니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일을 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안내 편지에 따라 배정된 아파트를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전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야 해서 다소 번거로웠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아주 근사한 아파트였다. 그리고 바로 옆에 호수같은 곳이 있어서 산책하기에 너무 좋았다. 주변도 상당히 조용하고 사색하거나 책을 읽기에 알맞아 보였다. 호수 주변을 산책하여 보니 의외로 조용하고 주위 경관도 좋아서 더 한 층 기분이 업되었다.   막스 프랑크 연구소는 독일의 산학연구의 중심 연구소이다. 독일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학자나 전문가를 초빙하여 필요한 경우에 장학금을 주고 공동연구를 수행하는 기관이다. 그리고 독일 내의 거의 모든 대학은 대학별로 하나의 막스 프랑크 연구소가 있어서 해당 대학과 산학합동연구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번에 와서 보니 제대로 연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여 전세계의 학자와 함께 협업과 상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시스템을 잘 갖추고 있었다. 실로 대단한 프로젝트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차원에서 막스 프랑크 연구소의 사택 역시 비교적 신경을 써서 나름대로 잘 꾸며져 있어 보였다.   전날의 렌트카 사건으로 다소 실망한 느낌이 이번 막스 프랑크의 시스템과 사택을 접하게 되면서 다시 반전되었다. 역시 독일은 개인의 미래를 위한 투자에서 대단하다는 것을 실로 절감하게 되었다. 다시 독일에 대하여 호의와 좋은 감정이 새롭게 들었다. 내 마음이 너무 변덕이 심한 것인가?   우리나라도 막스 프랑크 연구소의 모델을 벤치마킹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세계적인 학자들을 모여들게 하여 이를 통한 학문적인 업적을 쌓고 종국에는 한국산업발전의 모태가 되도록 하는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독일의 막스 프랑크 연구소와 같은 산학협동의 구심점을 좀 더 진지하게 추구하고 이를 모색하여야 할 중요한 시점으로 느껴졌다.  

이상근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모습. 사진 출처 네이버 문화재청이 23곳 중앙행정기관 평가에서 4년 연속 최하위 평가를 받았다.(노컷 뉴스 10,16. 문화재청 ‘헬조선급’ 조직문화…청렴 실종·여성 찬밥) 기사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6년까지 국민권익위 청렴도 조사결과, 문화재청의 내부 첨렴도는 5등급인 6.48점으로 최하위이고 종합 청렴도 면에서도 5등급으로 꼴찌를 차지했다"고 보도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보면 "문화유산의 보존과 가치창출로 민족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설립목적으로 문화유산의 창조적 계승· 발전으로 세계일류 문화국가 실현"을 하고자 되어 있다. 역할로는 "문화재 지정 및 등록, 현상변경·발굴 등 허가, 문화재 보존과 재정지원, 조선 궁·능 및 중요 유적지 관리, 우리 문화재 세계화 및 남북 문화재 교류, 문화재 조사·연구 및 전문 인력양성 등 통해 국민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하는 것을 기본 임무로 한다"고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지정된 문화재가 국보 318건, 보물 1,942건, 사적지 등을 관장하고 전국의 40여 국립박물관도 문화재청의 몫이고 지방정부의 신청이 줄을 잇고 있는 세계문화유산의 선정과 등재 신청도 일이다.   이처럼 문화재청의 역할과 책임은 막중하다. 반면에 지나 온 과정을 살펴보면 중앙행정기관의 외청으로 변방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해방 후 이왕직을 인수하여 구황실 사무청으로 출발하여 55년 구황실재산사무총국으로 개편된다. 즉 이때까지는 일제가 관리하던 이왕직(李王職)으로 업무를 인수한 기관에 불과했다. 이왕은 조선 왕실의 성씨인 전주 이씨를 뜻하며 이왕직은 일본 왕실인 궁내성에 소속된 기구이다. 따라서 출발부터 정통성과는 거리가 있다.   1961년, 구황실재산관리사무총국과 문교부의 문화보존과를 통폐합하여 문교부의 외국(外局)인 문화재관리국(文化財管理局)이 설치함으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1999년 문화재청으로 별원하고, 2004년에는 차관청으로 승격하였다. 2011년 프랑스 외규장각의궤, 일본 궁내청 조선왕조도서 등이 반환되던 시기에 국외문화재팀을 신설하는 등 한 박자 늦은 대응으로 문화유산 보전과 회복에 대한 국민적 요구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평가이다.   21세기, 문화혁명시기를 선도하는 법과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백범 김구 선생의 소망대로 ‘문화강국론’이 실현되었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문화유산을 향유하고 가치가 보전되는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기실, 해방이후 우리의 문화재정책은 역사적 배경과 조건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였다. 앞서 설펴본 바와 같이 해방이후 조선왕실의 유산관리에만 초점을 맞추어 출발, 일제강점기에 불법 반출, 부당징발, 은닉, 훼손 등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조선총독부가 남긴 적산(敵産)을 물려받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있는 지광국사탑 등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징발당한 석조물들이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석조물공원에서 산성비에 찌들어 가는 최고의 석탑과 이름도 없이 방치되어 있는 석불이 그러하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전국의 국립박물관, 학교 운동장, 도로가 등에 산재하여 있다. 해방 70년이 지났음에도 일제가 행한 불법적이고 부당한 행위의 잔재들은 도처에 있는 셈이다.   적산으로 물려받아 제대로 조사연구가 없다보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문화재조차 목록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지광국사탑에 있던 돌사자가 박물관 수장고에 버젓이 있음에도 지난 수십 년 동안 도난당했다는 보고했으니 관리행정이 어느 수준인지 알 수 있다.   최근 일제강점기에 부당 반출당한 청와대 석불의 제자리 이전을 두고, 그동안 중앙정부에 의해 부당하게 문화유산을 징발당한 지역민들의 문화유산 회복요구가 높아가고 있다. 때를 맞추어 국립중앙박물관이 약 4만 4000여 점의 유물을 2018년까지 지방 국립박물관으로 이전할 것이라 발표하였다. 환영할 일이다.   2018년 개헌의 핵심 화두가 ‘지방분권’이라면 이 보다 더 큰 사고와 정책의 전환이 필요하다. 일단 ‘중앙(中央)’박물관이라는 이름의 개선부터 그동안 독점적, 배타적으로 누렸던 그들만의 특권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문화유산은 지역민의 품으로’라는 모토아래 독일과 같이 철저히 분권화가 이뤄져야한다. 또한 국립, 공립, 사립박물관의 가치 공유와 역할 조정을 현재와 같은 유물소장에 있어 양극화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석조공원에 이름없이 입는 석불들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문화유산에 대한 국민들의 향유권 보장이다. 현재와 같이 특정인에 의해 다수의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는 경우, 정보공개와 전시, 학술연구 등의 기회 제공을 의무화 할 수 없다. 따라서 문화유산에 대한 공적 개념의 도입으로 공개, 전시, 학술연구에 촉진을 의무화하고 이에 대한 평가시스템을 도입하여 공공성을 확립해야 한다.   현재의 문화재보호법은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조선총독부가 남긴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대체하기 위해 일본의 「문화재보호법」을 근간으로 삼고 있음은 제정 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962년 1월 10일자로 공포된 「문화재보호법」의 제정은 열흘만 늦었더라도 구 법령인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은 특별조치법에 의하여 자동 폐지될 상황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문화재보호법’의 제정은 그만큼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러한 급박한 사정 때문에 법 제정이 졸속으로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1950년 일본에서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유사점을 두고 있다.   대표적인 내용으로 제1조 목적과 제2조 정의이다.   제1조 목적   본 법은 문화재를 보존하여 이를 활용함으로써 국민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하는 동시에 인류문화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 법률은 문화재를 보호하고 또한 그 활용을 도모함으로써 국민의 문화적 향상에 이바지함과 동시에 세계문화에 공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문화재의 정의   본 법에서 문화재라 함은 다음에 게기(揭記)하는 것을 말한다. 1. 건조물, 전적, 고문서, 회화, 조각, 공예품 기타의 유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우리나라의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큰 것과 이에 준하는 고고자료(이하 “유형문화재”라 한다) 2. 연극, 음악, 무용, 공예기술 기타의 무형의 문화재 소산으로서 우리나라의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큰 것(이하 “무형문화재”라 한다) 3. 패총, 고분, 성지, 궁지, 요지, 유물 포함층 기타 사적지와 경승지, 동물, 식물, 광물로서 우리나라의 역사상, 예술상, 학술상 또는 관상상 가치가 큰 것(이하 “기념물”이라 한다) 4. 의식주, 생업, 신앙, 연중행사들에 관한 풍속습관과 이에 사용되는 의복, 기구(器具), 가옥 기타의 물건으로서 국민생활의 추이(推移)를 이해하는데 불가결한 것(이하 “민속자료”라 한다)   이 법률에서 「문화재」라 함은 다음에 게기(揭記)하는 것을 말한다. 1. 건조물, 회화, 조각, 공예품, 서적, 전적, 고문서 기타의 유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우리나라에 있어서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높은 것 및 고고자료 (이하 「유형문화재」라 한다). 2. 연극, 음악, 공예기술 기타의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우리나라에 있어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높은 것(이하 「무형문화재」 라 한다). 3. 의식주, 생업, 신앙, 연중행사 등에 관한 풍속관습 및 이에 사용되는 의복, 기구, 가옥 기타의 물건으로서 우리 국민생활의 추이를 이해함에 불가결한 것(이하 「민속자료」라 한다) 4. 패총, 고분, 도성적(都城跡), 성적(城跡), 구택(舊宅) 기타의 유적으로써 우리나라에 있어 역사상 또는 학술상 가치가 높은 것, 정원, 교량, 협곡, 해빈(海浜), 산악, 기타의 명승지로서 우리나라에 있어 예술상 또는 관상(觀賞)상 가치가 높은 것 그리고 동물(생식지, 번식지, 및 도래지를 포함한다), 식물(자생지를 포함한다), 지질광물(특이한 자연의 현상이 생겨난 토지를 포함한다)로서 우리나라에 있어서 학술상 가치가 높은 것(이하 「기념물」이라 한다.   이상과 같이 법률 제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목적과 정의 규정이 유사하다는 점은 각국에 처한 역사적 배경과 환경, 철학과 정책 등이 제대로 반영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문화재보호법은 그 후 48회 개정되었고, 관련법안과 시행령은 다음과 같다.    - 다 음-   1. 법 령 - 문화재보호법(1962년 제정) - 고도보존에 관한 특별법(2004년 제정) -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자산에 관한 국민신탁법(2006년 제정) - 문화재보호기금법(2009년 제정) - 매장문화재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2010년 제정) - 문화재 수리 등에 관한 법률(2010년 제정)   2. 대통령령 - 문화재 보호법 시행령 - 고도보존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 -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자산에 관한 국민신탁법 시행령 - 문화재보호기금법 시행령 - 문화재위원회 규정 - 한국전통문화학교 설치 령 - 문화재청과 그 소속기관의 직제 - 매장문화재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시행령 - 매장문화재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시행령   관련 법안을 보면 문화재보호법으로 담기 못한 요구를 수렴하기 위해 2000년대 이후 5개의 관련 법령과 9개의 시행령을 제정하였다. 이는 다시 말해 문화유산에 대한 변화요구를 수렴하기 위한 과정이자 역으로 모법인 문화재보호법의 태생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와 지방분권시대에 부응하기 위해 문화재보호법의 폐지와 관련 법률의 통할에 기초한 새로운 법률의 제정이 필요하다.     참고로 주요국가의 문화재관련법과 행정기구를 소개한다.   국가 주요 법령 행정 기구 한국 「문화재보호법」, 「문화재보호기금법」,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자산에 관한 국민신탁법」 문화재청 일본 「문화재보호법」, 「독립행정법인 국립문화재기구법」 문화청, 국립박물관 북한 「민족유산보호법」 민족유산보호지도국 중국 「문물보호법」 국가문물국. 지방정부 미국 「고대유물법」, 「유적지법」, 「전미역사보존법」, 「역사보존을 위한 국가신탁법」 내무부, 미국립공원청 주 역사보존청 독일 「연방문화재보호법」, 「문화재반환법」 문화 및 미디어 정책 담당 부처(BKM). 주정부 프랑스 「문화유산법」 문화통신부, 지방문화국 영국 「국가유산법」, 「개발계획법」 「역사적 건물 및 고대 기념물에 관한 법」 국무장관, 지역부장관 문화유산부     ▲ 군산 발산리 오층석탑, 일제강점기 농장주 시마타니 야소야가 이전하여 현재 발산초등학교 뒷뜰에 있다.

김수인

신문을 읽을 땐 누구나 기사·기고문·칼럼의 제목을 보고 읽을지 말지를 결정한다. 조선일보의 명사 에세이 ‘일사일언(一事一言)’처럼 10자 이내의 한 줄 제목이 달리는 경우는 더욱 더 제목이 중요하다.      얼마 전 조선일보를 읽는데 일사일언의 제목 ‘일파만파’라는 게 눈에 띄었다. 일파만파라면 골프장에서 흔히 쓰는 용어이니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내용은 미국에서 골프를 배운 가수 최백호씨가 한·미 간의 골프 문화를 비교하며, 첫홀에서 잘 치든 못 치든 4명 모두 스코어를 ‘파(Par)’로 기입하는 걸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룰과 매너를 잘 지키는 미국식 사고방식으로는 기기묘묘한 발상이라고 비꼬았다. 골프 스코어는 고칠 수도 없고, 고쳐서도 안 되는 그날 자신의 ‘역사’라는 따끔한 말을 곁들이면서. ‘일파만파’라는 사자성어는 골프 접대에서 나왔겠지만, 어느 누구도 민망하고 부끄러운 행위에 대해 이의를 달거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게 문제다. “골프 스코어 하나 가지고 뭘 그리 예민한 반응을 보이냐”고 반문할 수 있으나 적당주의의 산물인 일파만파는 사회의 도덕성을 흐리게 할 수도 있다.      최백호씨의 지적대로 일파만파에 대한 방관이 우리 사회를 좀먹고 부패의 구덩이로 이끄는 ‘첫 파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을 망가뜨리는 요인 중 하나가 분식회계인데, 일파만파가 바로 골프장의 분식회계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일파만파의 그릇된 풍조를 깨뜨리는 데 나름 노력을 해왔다. 접대골프이거나 아주 연로하신 분들을 모실 때는 어쩔 수 없이 일파만파에 순응한다. 하지만 친구나 동료, 후배들과의 라운드 때는 캐디에게 당부를 해 절대로 일파만파를 기입하지 못하게 한다. 물론 혼자 까탈스럽게 굴 수 없어 더블보기 이상 저지른 이들에게는 첫홀에 한해서 ‘보기’를 허용한다. 일파만파는 스포츠의 정신인 정정당당함을 크게 훼손하므로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일파만파의 잘못된 습관을 깨뜨리는 데 앞장섰으면 한다.      일파만파 다음으로 골프장에서 없어져야 할 적폐가 마구잡이로 연습 스윙하는 것. 특히 티잉 그라운드에서 동반자가 샷을 하려는데 이에 아랑곳없이 연습 스윙을 계속하는 건 매너에도 위배되지만 동반자의 미스샷을 유발하므로 절대 삼가야 한다. ‘매너 꽝’은 그린 주변에서 더 자주 일어난다. 초보 때부터 어설프게 습관이 든 탓이지만, 어프로치를 잘못했다고 공을 주머니에서 꺼내 한 번 더 테스트하는 것, 퍼팅 미스했다고 다시 치는 행위는 반드시 없어져야 할 그릇된 행위다. 연습은 연습장에서 이뤄져야 한다. 한번 실패한 것은 잘 기억해서 다음 홀이나 추후의 라운드에서 만회하면 된다.      이런 황당한 경우를 당했을 때, 정색을 하면 의가 상하므로 정중하게 지적을 해 되풀이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좋다. 어린애들과 마찬가지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 아무도 지적을 하지 않으면 구력 20년이 넘도록 나쁜 습관이 이어진다. 중국 송나라의 정치인 ‘포청천’이 되어서는 인심을 잃기 마련이지만 적폐 청산으로 ‘밝고 명랑한 골프 문화’ 조성에 모두 힘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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