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열

톈진에서 필자와 함께 라운딩을 한 패널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다. 오늘은 본격적인 경기가 시작된 첫날. 오전 6시에 아침을 부랴부랴 먹고 ‘27클럽’으로 향했다. 선수들은 오전과 오후에 각 포볼과 포섬으로 36홀 라운딩을 하게 되어 있었다. 필자는 패널로서 우리 선수들을 격려하려고 첫 번 째 홀로 향했다. 선수들의 비장한 각오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중국선수단은 젊어 보이는데다 몸매도 호리호리하여 예사롭지 않았다. 반면 우리 선수들은 50대 후반이나 60대의 중장년층이었다. 신구 세대 간 대결이라 불러야 할까. 아니나 다를까 드라이버 거리부터 차이가 있었다. 어쨌든 선전을 기원하며 응원전을 펼쳤다.   중국 시골 골프장의 추억을 만들어준 톈진 포춘 레이크 골프 클럽장 입구 모습이다. 한편, 필자와 패널들은 톈진의 다른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경험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전해들은 말로는 중국의 10대 골프장의 하나라고 해 기대감을 부풀게 했다. 그런데 도착한 골프장의 입구가 실망스러웠다. 골프하우스도 동네 골프장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골프 코스만은 다를 것이라고 기대감을 버리지 않았다. 락커룸에 갔더니 시골 목욕탕 같은 분위기였다. 또다시 놀라웠으나 그래도 낙관적은 믿음을 놓지 않았다.   캐디의 모습이 장관이었다. 소위 말하는 몸빼바지를 입고 있었고 그마져도 통일된 복장이 아니라 제멋대로였다. 더 놀라운 점은 공사장에서 볼 수 있는 안전모를 착용하고 있는 점. 또 캐디언니들은 거의 다 중장년층의 아주머니나 할머니로 보였다. 젊은 여성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버린 것일까.   한 가지 더. 4인의 캐디 중 1인은 젊은 남자였다. 이 친구가 팀장이고 4인의 캐디단 전체를 이끈다. 그렇다고 남자 캐디가 낯선 존재는 아니다. 최근 남자 캐디가 국내 골프장에서도 느는 추세이긴 하다. 놀라움의 정점은 주중 라운딩 비용이 800위엔 즉 거의 15만원 수준이라는 사실이었다.   골프 코스 역시 실망스러웠다. 도대체 이곳이 어떻게 중국 10대 골프코스가 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로비에 걸린 사진에는 2010년 무렵 중국 10대 골프장으로 선정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폐쇄된 신코스는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구글 검색을 통해 확인한 천진 포춘 레이크 골프 클럽(Tianjin Fortune Lake Golf Club). 이 골프장은 18 & 36 개의 홀이 있으며 길이는 7,237 야드, 파 72, 3,500mn의 면적을 가지고 있다. 또 폭이 넓고 페어웨이와 모래 구덩이가 있으며 물이 막혀 있고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어쨌든 뜨거운 날씨에 열심히 라운딩을 마치고 사워를 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엔 현지인 팀이 카드놀이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영어를 하는 직원이 전혀 없어 구글번역기를 이용해 맥주를 시키고 국산 라면을 주문, 맛있게 먹고 골프라운딩의 추억을 되새겼다. 숙소로 돌아와서 보니 ‘27클럽’의 품격이 새삼 높게 와 닿았다. 이를 느끼게 하려고 시골 골프장 라운딩을 준비한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어쨌든 색다르고 의미 있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조화유

자동차로 본 우리 가족 이민사   1973년 7월29일은 필자가 미국 유학을 위해 혼자 대한항공 여객기를 타고 하와이를 거쳐 미국 본토에 도착한 날이다. 아내와 두 아이(아들과 딸)은 6개월 후 뒤따라왔다.   미국에서는 자동차가 신발이다. 더구나 대중교통수단이 없는 중소 도시에서는 자가용 차가 없으면 꼼짝을 할수 없는게 미국이다. 나는 유학생이어서 학교 캠퍼스 안에 있는 학생용 아파트에 들어가 살았기 때문에 처음 6개월은 그럭저럭 차 없이 견뎠으나 가족이 온 뒤에는 차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1974년 여름 첫 차를 샀다.   60불 주고 산 고물차 바로 위 사진이 그 차다. 1965년에 나온 Mercury Monterey란 큰 차인데 미시간 주의 디트로이트 근처에서 샀다. 어느 주유소 백인 주인의 부인이 타던 차라는데, 이미 8만 마일(약 13만km) 가까이 뛴 고물차였으므로 단돈 60불을 주고 샀다. 이 차가 새 차였다면 당시 4000불 정도는 줘야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부품 몇개 갈고, 중고 타이어 하나 사 끼우고, 엔진 오일 가는 것 등에 약 90여불이 더 들어가 결국 첫 차 마련에 150여불을 쓴 셈이 되었다. 당시 다섯 살, 세 살이던 우리 아들과 딸은 한국서는 꿈도 꾸지 못할 자가용 생겼다고 무척이나 좋아했다.   첫 차를 산지 1년만에 우리는 L.A.로 이사를 가게 되어 이 차를 팔았다. 한국인 미국 대학 교수가 부인이 샤핑하러 갈때만 쓸거라며 80불에 샀다. 60불에 사서 80불에 팔았으니 20불 남은 장사였다고 해야 하나?   L.A.에 가서는 다른 고물차를 300불 주고 샀다, 1965년형 Oldsmobile Cutlass라는 뚜껑을 열 수 있는(convertible) 중형차였다, 이 차는 한국인 자동차 정비 기술자가 타다가 팔려고 내놓은 것인데, 시운전을 하던 중 뒤따라오던 차에 추돌을 당해 뒷 밤퍼가 좀 쭈구려졌다. 상대방 운전자는 미국 흑인 여자였는데, 그녀가 가입한 보험사 직원이 나와 보더니 나에게 수리비 368불을 계산해 주었다. 그래서 차값 300불을 제하고도 68불이 더 생긴 셈이 되었다. 내 차를 뒤에서 박은 그 여자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텔 비용을 아끼려고 공용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네 식구기 차안에서 잠을 잤다. 1974년형 Impala 뒷 창문 아래서 자고 있는 네살난 딸.L.A,에서 마땅한 직장을 찾지 못한 나는 1975년 봄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미시간으로 되돌아갔다. 거기서 1974년형 Chevy Impala 대형차를 4000불에 월부로 샀다.(위 사진) 그러나 미시간에서도 일자리가 마땅치 않아 다시 L.A.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미시간 주에서 워싱턴 D.C.로 가서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남서쪽으로 고속도로를 따라 내려갔다. 테너시주에서 친구 집에 들려 하룻밤 신세를 지고, 그 다음 부터는 계속 밤에는 샤핑센터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네 식구가 잤다. 주머니엔 단돈 300여불 밖에 없었으므로 숙박비를 아끼려고 그랬다. 마침 여름이고 또 차가 커서 차 안에서 네 식구가 잘 수 있었다. 몸이 가냘픈 딸 아이는 뒷 유리창 밑에 들어가 잤다. 가난해서 자동차로 거의 1주일 동안 대륙횡단을 한 덕분에 Grand Canyon, Las Vegas 등에 들려 관광은 많이 했다. L.A.에 되돌아와 Impala를 3년 동안 56,000 마일 달리고, 1978년 9월에 네번째 차 1978년형 Ford Thunderbird를 7500불 주고 샀다. 타던 차 Impala를 1200불로 쳐서 trade in하고 (헌 차를 새차 값의 일부로 쳐주는 것) 나머지 6,300불은 월부로 갚았다. 캐딜랙 다섯번 째 차는 1981년형 Cadillac Fleetwood 하늘색 대형차를 23,000불에 월부로 섰다. 캐릴랙이 비싸긴 하지만 아내와 세 아이(미국에서 막내 아들 출생)를 태우고 다닐 차였으므로 나는 좀 무리를 해도 크고 든든한 차를 샀다. 이 캐딜랙은 5년쯤 탔는데 한번은 집사람이 몰고 가다 L.A. downtown freeway에서 트럭과 옆을 살짝 부딛치는 접촉사고를 당해 팔아버리고 같은 싸이즈의 1986년형 Cadillac Brougham을 에 샀다. 이번엔 검은색 차인데 먼저 캐딜랙보다 조금 더 고급형이었다. 우리의 여섯번째 차다.   그 다음 일곱번째 차가 이번에 팔려간 그 차다. 1995년에 4만9천불 주고 샀는데 가끔 oil change만 해주고 무려 22년을 탔다. 나의 자동차에 대한 상식은 거의 zero 상태라 엔진 오일만 갈아주면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 정비 스케쥴에 따라 부품도 갈아주지 않고 무식하게 휘발유만 넣고 계속 몰고 다닌 탓에 주행거리 15만 마일이 넘어서자 여기 저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두 달 전 부터는 발동이 잘 걸리지 않았다. 처음엔 배터리 문제인가 해서 새것으로 갈았으나 며칠 가다 또 시동이 잘 걸리지 않았다. 몇 번을 crank up해야 겨우 사동이 걸리더니 마침내 시동이 아주 걸리지 않았다. odometer(오다미터/주행거리판)에 155,576마일(약25만 킬로)이 나타난 작년 7월 8일이었다.   탱크 같이 든든하던 그 차가 우리 식구에겐 정말 고마운 차였다. L.A.에서 4년, 워싱턴에서 18년, 도합 22년을 탄 차, 사고라곤 1999년 워싱턴에서 소형차와 옆을 약간 스친 것 뿐이었다. 그 때 소형차는 많이 찌그러졌으나 우리 차는 멀쩡했다. 그만큼 강한 철판으로 만들어진 차체였다. 그래서 한번도 body shop에 갈 필요가 없었다. 이 차 안에만 들어가 앉으면 안정감이 들고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모든 움직이는 것에는 수명이 있는 법, 그렇게 든든하던 그 차도 22년만에 우리 곁을 떠났다. 단돈 1500불에 그 차를 인수한 새 주인이 잘 정비만 하면 몇 년은 더 인간에게 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잘 가거라, 정든 차야! 그 차를 떠나보내는 날 내 눈엔 정말 눈물이 고였다. 우리집 앞에 세워둔 차 2대. 검은차가 최근 판 것이고 은색차가 현재 타고 다니는 차다.위 사진은 22년 동안 탄 헌 차와 이번에 새로 산 차를 우리집 앞에 나란히 세우고 찍은 것인데 검은색 차가 팔려간 헌 차이고 은빛 차가 새로 산 차다. 같은 자동차 회사가 만든 이 두 차의 이름을 독자 여러분들이 한번 맞춰보시기를... 2018년 7월 워싱턴에서 조화유

이경희

당신의 화양연화는 언제였나요? 가끔 좋아하는 사람들과 눈이 아찔하도록 아름다운 풍광을 만나거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 때, 문득 숨을 멈추고 다시 돌아본다. 지금 이 시간이 내 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인가, 이게 화양연화인가, 하고. 어린 청춘 시절엔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고, 내가 바라기만 하면 행복은 내 곁에 머물 것이라고. 그 멍청한 생각이 얼마나 웃긴 것인지 깨닫는데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그것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처절한 삶의 논리 같은 것이었다. 행복이란 건 나의 바람과 무관하게 세상을 굴러다니고 있으며, 그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취하거나 나를 버리고 달아나는 존재라는 것을. 바람난 연인처럼 붙잡을 수도 없고, 붙잡아서도 안 되는 손에 쥔 바람 같은 것이란 것을. 2000년대 초반,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생소한 제목에 마음이 팔려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다. 물론 주인공 양조위 때문이었다. 당시 내 눈엔 그의 어떤 모습도 다 좋았지만, 이 영화 스틸컷엔 전에 보이지 않던 색다른 모습이 많아 더욱 가슴이 설렜다.   영화의 장르는 분명 멜로임에도, 영화관에 걸린 사진에선 남녀 주인공의 웃음이나 행복한 표정이 전혀 없었다. 음울하고 심오했다. 그래서 더 호기심이 일었다. 거기에 단정하게 블랙 수트를 차려입고 담배를 피우는 양조위의 눈빛은, 나 같은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을 어두운 관람석으로 밀어넣기에 충분했다. 그의 눈빛에 끌려들어 가 처음 알게 되었다. 인생의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절을 ‘화양연화’라 일컫는다는 것을.  영화 속에서도 제목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음악 신청을 받는 라디오 DJ가 엽서를 읽어주는 부분이다.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는 메이 양과 친구와의 우정을 기린다는 장 부인, 그리고 사업 때문에 일본에 있는 첸 선생도 이 노래를 청했군요, 아내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인생의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절을 뜻하는 ‘화양연화’입니다” 영화는 제목부터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행복한 시절을 말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출발은 외로운 한 남자와 외로운 한 여자의 일상으로부터 시작한다. 1960년대 초반, 홍콩의 어느 아파트에 두 가구가 동시에 이사를 온다.  지역 매일신문 데스크인 차우(양조위)와 그의 부인, 그리고 무역 회사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리첸(장만옥)과 그녀의 남편. 차우의 아내는 호텔에서 일하느라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다. 리첸의 남편 또한 일본에 사업체를 두고 있어 출장으로 늘 집을 비우며 사는 사람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차우와 리첸은 아파트 좁은 복도에서 자주 마주치게 된다. 차우와 리첸은 주변의 이웃과 어울려 가끔 마작을 하거나, 가십거리로 소소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런 일상이 반복되면서 점차 절친한 친구가 되어가는 두 사람. 차우는 우연히 리첸과 아내가 똑같은 핸드백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리첸이 가진 그 핸드백은, 그녀의 남편이 해외에서 사온 것이라, 쉽게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차우는 아내에 대한 믿음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리첸 역시 남편이 해외에서 사온 넥타이와 똑같은 걸 차우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남편과 차우의 아내와의 관계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차우와 리첸, 두 사람은 자신의 배우자들이 서로 외도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 짐작하게 된다. 둘은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로부터 외면당한 아픔 때문에 괴로워하는데...    남편의 불륜을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일상을 이어가고 있는 리첸, 아내의 외도를 짐작하면서 애써 모른 척 가정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차우. 갑이 아니라 ‘을’의 입장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출장 간 남편과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기다리며 쓸쓸하고 외로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영화의 제목은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을 의미하고 있지만, 차우와 리첸에겐 ‘가장 힘들고 불행한 시절’이 될 수도 있는 역설적인 상황으로 영화는 전개된다. 고통을 제공하는 자는 차우의 아내와 리첸의 남편이지만, 그들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영화의 모든 시선은  배우자의 외도로 쓸쓸하게 남겨진 두 사람만을 조명한다. 외로움으로 불륜에 이르게 되는 이야기가 영화의 주 내용이지만 차우와 리첸, 두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데 매우 인색하기만 하다. “우린 그들과는 다르니까요.” 리첸의 말은,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다가설 수 없는 마음의 공간을 부여한다. 좁은 아파트 복도와 가파르고 비좁은 골목 계단을 오가면서도 두 사람은 늘 사이에 공간을 두고 스칠 듯 말 듯 비껴간다. 함께 택시를 탈 때나, 거리를 걸을 때도 그 공간은 여전하다. 그 공간을 채우는 건 영화 속 아름다운 영상이다. 영화는 말이 없다. 대사가 없는건 아니다.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이 없다. 눈빛으로, 표정으로, 행동으로, 시선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뿐이다. 말 없는 말로 연결되는 드문드문 비어있는 그 공간을 채워주는 건 역시 아름다운 영상과 영혼을 울리는 절절한 음악이다.   눈과 귀가 영화에 흡입되면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마치 그 순간을 자신의 화양연화로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당신은 스스로에게 질문할 것이다. 나에게 화양연화는 언제였을까? 이미 가버린 것일까 아니면 언젠가 선물처럼 다가올 것인가. 어쩌면 아직 지나치지 않았다고 안도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겐 기억 속에 그 시절이 묻혔을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겐 아직 아름다운 행복의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을테니까.  화양연화,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에게 외면당하게 되면서 하필, 생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을 맞게 된 두 주인공에게, 그 시절은 결국 어떤 기억으로 남게되었을까? 잊을 수 없는 을의 기록일까, 아니면 을을 뛰쳐나온 갑의 기록일까. 영화의 결말은 당신이 직접 확인하리라 생각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어쩌면 당신도, 앙코르와트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러 뛰어나갈 지 모르겠다. 그때, 내가 그리했던 것 처럼.

김승열

한중 10대 골프장 경기대회에 참석한 필자. 아침에 눈을 떠니 오전 5시 30분이었다. 룸메이트가 깰까 봐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하였다. 호텔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가니 정면에 경기장 같은 곳이 눈에 띄었다. 가볍게 걸어보니 소위 폴로라는 경기장이 보였다. 곳곳에 말들의 숙소나 비품 내지 시설물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마천루 빌딩 높이가 장난이 아니었다. 톈진은 중국에서도 네 번째 가는 큰 도시였다.   럭셔리한 호텔 수영장. 입구는 좁았으나 시설은 훌륭했다. 산책을 마치고 호텔 안 헬스클럽에 가니 아직 문이 닫혀 있었다. 필자는 수영을 좋아하는데 안내원 말이 “수영장은 오전 7시에 개장한다”고 했다.그러나 7시에 내려가도 문은 닫혀 있었다. 30분 뒤 다시 찾은 수영장 문 입구는 매우 좁아 보였다. 내심 수영장 규모가 머릿속에 그려졌는데 예상은 깨졌다. 장관이었다. 천장에서 햇빛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너무나 반가워 수영장에 들어가 물속을 걸어 다녔다. 호사가 따로 없었다. 아침식사 시간을 훌쩍 지날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할까. 수영장에 인접한 탈의실과 목욕탕도 규모가 클 뿐만이 아니라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다. 아침 식사는 뷔페식이었는데 한국 라면이 너무 반가웠다. 산책과 수영까지 해서인지 아침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골프 클럽에 10대 메이저 챔피언 27인의 우드를 전시하고 있다. 이어 버스에 올라 ‘27골프클럽’으로 향했다. 골프장 입구가 큰 대문으로 되어 있어 수위가 수동으로 열어주어야 했다. 주변에 골프텔과 같은 아름다운 건물 그리고 아름다운 클럽하우스가 인상적이었다. 깔끔하고 멋스러움이 느껴졌다. 한중 10대 골프장 경기대회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개막식을 거행하고 모두가 선전을 다짐했다. 드론을 이용한 사진 촬영이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우리 조는 10대 골프장 선정위원회의 김 위원장, 파인리즈 골프장의 김 대표, 골프장 코스관리업체의 민 사장 그리고 필자가 한 팀을 이뤘다. 골프장은 아주 깔끔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27개 홀로 이루어져서 각 홀 별로 메이저 챔피언의 의도를 받들어 설계를 한 골프장이었다. 나아가 각 홀에 메이저 챔피언의 이름을 새겨서 이를 기념하는 형식으로 각 홀이 구성되어 있었다. PGA 챔피언십 우승, PGA투어 혼다클래식 우승, 볼보차이나오픈 우승, 아시아유럽 골프대항전 로열트로피 우승 등이 빛나는 양용은 골퍼를 기념하는 ‘양용은 홀’이 있었는데 너무 아름다워 자랑스러웠다. '27클럽'에서 골프를 치는 필자. 우리 팀이 우승을 해서 기쁨이 두 배였다. 다만 잔디 등의 상태가 좋지 않아 27홀 중 18홀만 운영한다고 하여 아쉬움은 있었지만 각 홀이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파4의 경우 430~440야드가 될 정도로 그 길이가 꽤 길었으나 매력적이었고 페어웨이나 잔디가 잘 관리되어 있어 인상적이었다. 다만 2인이 한 팀을 이뤄 서로 가볍게 캐디피 내기를 하는 바람에 게임에 집중하느라 골프장 코스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우리 팀이 승리하게 되어 기뻤다. 라운딩을 마치고 목욕탕에 가니 우리나라처럼 커다른 냉온탕은 없고 개인 샤워부스만 있어 당혹스러웠지만 시설은 상당히 고급스레 꾸며져 있었다.   이어 개막 만찬이 열렸다. 만찬주는 ‘사득’이라는 술이었는데 마오타이와 함께 고급 술이라고 했다. 마셔보니 향이 예사롭지 않았다. 평소 와인을 즐기는 편이었는데 이 날은 중국술을 많이 마셨다. 물론 와인도 제공됐는데 만찬 음식과 조화를 이뤘다. 이국에서 모처럼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중국의 멋진 술까지 마시는 풍성한 한여름 저녁이었다.   폴로 경기를 하고 있는 조각상이 호텔 로비에 설치되어 있어 인상적이었다.

김승열

필자가 머무른 중국 톈진의 한 호텔 입구 모습이다. 한국과 중국의 10대 골프장 챔피언들이 모여 골프대회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흔쾌히 참여했다. 필자는 한국 10대 골프장 선정위원이기도 하다.중국의 10대 골프장은 어디며 회원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올해는 중국 톈진에서 개최가 되는데 그곳에 ‘27클럽’이라고 해서 메이저챔피언 27인 별로 각 홀을 디자인해 유명해진 골프장이 있어 한층 호기심이 갔다.   에어 차이나가 생각보다 깔끔했다. 평소 해외출장은 혼자 다녔지만 이번에는 여러 패널과 함께 가기로 해 편안하고 여유있는 일정이 될 것 같았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에 하늘은 더없이 화창하고 간혹 시원한 바람마저 불었다. 더없이 밝은 햇살이 우울한 느낌을 가시게 했다. 내년이면 필자 나이 예순이다. 아니 이럴 수가! 대학을 졸업한 지가 3~4년도 안 되는 것 같은데 거울 속 모습은 영락없는 노인이다. 옛날 같으면 손자 볼 나이이다. 그런데 여전히 산적한 문제도 많고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더 없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공항에 도착하니 일행이 먼저 와 체크인을 서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탑승권을 발급받아 게이트 방향으로 나가니 시간이 거의 한 시간 이상이 남았다. 라운지 사정도 여의치 않아 공항 간이서점에 들렀다.캐리어에 걸터앉아 책을 읽는 즐거움이 스스로 대견하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꽤 재미있는 책이 많았다. 최근 베스트셀러로 부상한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가 눈에 띄었다. 또 소박한 삶에 대한 에세이를 읽으니 공감되는 부분도 있고 새롭게 와 닿는 부분도 있었다. 탑승시간이 되어 비행기에 올랐다. ‘에어 차이나’가 생각보다도 깔끔하고 친절해 기분이 상쾌해졌다.   톈진 공항 모습이다. 톈진까지는 1시간 45분 정도 걸렸다. 그리 긴 시간이 아니어서 또 다른 일상 탈출이라는 자그마한 기대감으로 부풀게 해주었다. 공항 서점에서 읽은 한 구절이 떠올랐다. ‘매사에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라!’ 평범한 진리에 감사하는 오후였다. 드디어 톈진에 도착! 그러나 공항 밖을 나서니 더운 기운이 확 밀려와 숨이 다 막혔다. 섭씨 35도는 족히 넘어 보였다.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버스 창밖의 광경은 1960~70년대의 한국의 모습으로 느껴졌다. 40여분을 가니 숙소인 톈진 골딘 메트로폴리탄 호텔이 보였다. 호텔 앞에  승마, 아니 폴로를 즐기는 사람들과 말들을 조각한 조형물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알고 보니 이 곳은 폴로경기를 하는 회원들만을 위한 일종의 클럽하우스 였다. 유럽의 영향을 받아서 인지 폴로라는 고급 취미활동을 즐기는 하나의 고급 커뮤니티인 셈이었다. 여장을 푼 뒤 선수와 패널을 포함한 임원을 소개하고 나아가 각자 인사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두들 한국을 대표해 최선을 다하자는 각오를 느낄 수 있었다. 이어서 간단한 뷔페로 식사를 했는데 특이한 점은 커피는 뷔페에 포함이 안 돼 별도 주문을 해야 했다. 그나마 뷔페음식에 중국 향신료를 많이 쓰지는 않아 다행스러웠다.   호텔 앞에  폴로를 즐기는 사람들과 말들을 조각한 조형물이 눈에 확 들어왔다   때마침 필자의 룸메이트가 된 이 박사와 인사를 나눴다. 그는 대학에서 조경학을 전공하고 쌍용양회에서 용평의 3개 골프장의 실무책임자로 일했다. 이 박사는 용평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회사의 지원 하에 뉴질랜드에서 1년간 공부하고 미국의 페이블비치 골프장에서도 연수를 한 경험이 있었다.   골딘 메트로폴리탄 호텔 로비 모습이다. 이후 LG그룹으로 이직, 곤지암골프장을 처음부터 설계하고 시공해 완성시켰다. 이를 위해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이 박사에게 일본 50개 이상의 현에 있는 골프장과 리조트를 견학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일본어에 능통하고 일본의 골프장 문화에 조예가 깊어졌다. 그리고 신라골프장의 사장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국내 유명골프장의 설계 시공 등의 자문 내지 감리업무를 도맡았다. 이 박사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는데 사적인 이야기여서 소개할 수 없어 아쉽다. 전두환 전 대통령 사택의 정원 자문과 관련한 일화가 기억에 남는다. 어쨌든 출장 첫 날, 다소 바쁘고도 여러 가지로 사건이 많은 비교적 알찬 하루였다. 

문성근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원하든 말든 항상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부대끼고 살다보면 서로 어울려 협력할 때도 있지만, 부딪히고 싸울 때도 많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숱한 갈등과 대립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지 못하면 평화로운 삶이 어렵다.   그러면 그 갈등과 대립은 어떻게 해소될까? 주변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대립과 갈등은 당사자 간 대화를 통하여 조용히 해결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는 상식과 도덕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상식과 도덕에 따라 당사자 사이에서 해결되지 못할 때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부득이 제3자의 손에 의해 법으로 해결된다.   그런데 상식과 도덕에 따른 갈등과 대립의 해소는 당사자 사이에서 평화롭게 이루어지지만, 제3자의 손을 빌어 법으로 해결되는 일은 수사나 재판이라는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수사나 재판은 사건의 과정을 잘 아는 당사자가 아무 것도 모르는 심판자를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과정이라 자기편이 없거나 조리 있는 설명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그런데다 시간과 비용과 많이 들어 배(소송의 목적)보다 배꼽(소송비용)이 더 클 때도 많아 없는 사람에겐 그야말로 그림의 떡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하물며 삶의 어려움이라고는 도통 모르는 책상물림에게 심판이 맡겨진다면, 과연 당사자들이 그 심판에 쉽사리 승복할까?   그래서 그런가? 우리나라에는 억울하다는 사람이 감옥에 가득하고, 법적정원을 초과한 과밀수용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는 지경이다. 국가기관으로서 공정한 법집행을 책임 진 법무부부터 위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무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돌이켜보건대,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는다. 살다보면 누구나, 무심코 꺼낸 뒷담화, 공연한 의심이나 미움, 짓궂은 장난이나 농담, 어설픈 자기과시, 섣부른 애정표현, 순간적 분노나 짜증을 범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뜻하든 않든 다른 사람에게 상처나 고통을 준다. 어쩔 땐 잘난 척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의 원한과 질시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이 사는 곳에는 항상 갈등이나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 세상의 수많은 갈등과 다툼은 다행스럽게도 99% 이상 당사자 간 상식과 도덕에 따라 자연스레 해소되고, 나머지 1% 미만이 법에 따라 다른 사람의 손으로 해소된다. 그렇다면 상식과 도덕이야말로 인간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지키는 근본규범이며, 법이란 상식과 도덕의 빈틈을 채우는 보충적 수단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사회는 도덕과 상식을 무시하고, 무작정 법부터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오죽하면 ‘법대로 하자’는 말이 ‘너랑 상대 안 해’, ‘누가 센지 함 붙어보자’는 말로 들릴 지경일까? 이런 식이면, 법은 갈등을 해소하는 수단이 아니라 갈등을 유발하는 도구로 전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렇게 된 데는 법률가를 비롯한 권력의 잘못이 크다. 우리나라의 권력이 지금껏 수사나 재판에서 절차적(증거적),부분적 진실을 과장하여 실체적, 전체적 진실추구이라고 큰소리치고, ‘정의의 파수꾼’을 뛰어넘어 주제넘게도 ‘정의의 건설자’를 자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툭하면 ‘철저한 수사를 통한 악의 발본색원(拔本塞源; 폐단의 근본원인을 뿌리 채 없애버림)’을 외치며, 이를 위해서라면 피의자나 피고인의 변명이나 인권 쯤은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시킨다’는 구실로 짓밟아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범죄를 낳는 사회적 폐단은 본래 수사나 재판만으로는 근본적인 제거가 불가능하다. 정치의 부패, 사회도덕의 붕괴, 상식이 불통인 사회에서 아무리 철저한 수사와 재판이 이루어진들 윗물이 혼탁한데 어떻게 아랫물이 맑기를 기대한단 말인가? 따라서 ‘철저한 수사를 통한 악의 발본색원’이라는 말은 사회악의 원인을 개인에게 모두 전가시킴으로써 정치의 무능과 부패를 숨기는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안다면, 우리는 지금이라도 법의 모순과 한계를 인식하고, 법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환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상식과 도덕의 가치와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법의 제정과 운용을, 백성들과 멀리 있는 소수의 책상물림에게 맡겨둔 채 방관할 것이 아니라 법이 상식과 도덕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항상 감시의 눈을 번득여야 한다. 가끔은 ‘법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2,000년 전 로마법의 격언을 되새기면서…

엄광용

  고구려의 연나부(椽那部) 조의 명림답부(明臨答夫)는 폭군으로 알려진 제7대 차대왕(次大王)을 시해하고 신대왕(新大王)을 세워 쿠데타에 성공한 인물이다. 그는 고구려 최초로 국상(國相)의 자리에 올라 정권을 휘둘렀다. 그는 꼭두각시인 신대왕이 죽고 아들 백고(伯固)가 왕위에 오르자 연나부 출신 우소(于素)의 딸을 왕후로 삼게 했다.     우씨녀를 왕후로 맞은 백고가 바로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故國川王)이다. 명림답부 이래로 연나부 세력은 권력의 중심을 차지하여 왕은 신하들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 중외대부(中畏大夫) 패자 어비류(於畀留)와 평자 좌가려(左可慮)가 모두 우씨 왕후의 친척인 연나부 세력이었다. 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고, 자제들 역시 남의 여자를 빼앗고 전택을 몰수하는 행태를 일삼았다. 이때 고국천왕은 죄로써 그들을 주벌하려고 하자 좌가려가 반란을 일으켜 왕도를 쳤다.    고국천왕은 재위 13년에 좌가려의 반란을 토벌하였고, 이로써 우씨의 친정 세력인 연나부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우씨 또한 남편인 고국천왕 앞에 낯을 들 입장이 못 되었다. 이때 고국천왕은 연나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과감하게 서압록곡에 은거하고 있던 유리왕조(琉璃王朝)의 대신 을소(乙素)의 손자 을파소(乙巴素)를 재상으로 삼았다. 을파소는 연나부 세력을 견제하고 흉년이 들었을 때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는 등 나라 정치를 바로잡는 데 힘썼다.    그러나 고국천왕이 재위 19년 5월에 병고로 죽으면서 다시 연나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 중심에 바로 우씨 왕후가 있었다.    당시 고국천왕과 우씨 왕후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다. 따라서 다음 왕위를 이어받을 사람은 왕의 형제들이었다. 4형제 중에서 고국천왕이 첫째였고, 그 다음 둘째가 발기(勃岐), 셋째가 연우(延優), 그리고 넷째가 계수(罽須)였다. 그러므로 다음 왕위는 둘째인 발기가 이어받아야 할 차례였다.    우씨 왕후는 고국천왕이 세상을 떠난 데 대한 슬픔보다 어떻게 하면 약화된 연나부 권력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지에만 마음이 급했다. 자신이 왕후 자리를 계속 이어가고, 친정인 연나부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왕위에 오를 둘째 왕제 발기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우씨 왕후는 고국천왕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발상(發喪)을 하지 않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당시 고구려에는 취수혼(娶嫂婚) 제도가 있었다. 즉 형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풍습이었다. 역사학자 노태돈은 《고구려사 연구》에서 취수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취수혼에서 망형(亡兄)의 처를 취하는 차례는 형제의 연령순이다. 단 미혼의 동생이 있을 경우 일반민에게 있어서는, 귀족은 구애되지 않지만, 그가 우선적일 수 있다. 이는 혼납금(婚納金)을 마련하기 어려운 데 따른 관행으로 여겨진다.〉    이때 ‘혼납금’은 결혼할 때 신랑이 신부 집에 보내는 돈으로, 일종의 ‘신부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왕실의 경우 혼납금이 아까워 장가를 들지 못할 처지는 아니다. 다만 가난한 일반인들 사이에서 혼납금을 마련할 수 없어 결혼을 못한 동생이 죽은 형의 아내, 즉 형수를 취하여 결혼을 하는 사례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우씨 왕후의 생각은 달랐다. 왕실이라고 ‘취수혼’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억지로 일반인들의 풍습에 따른다고 하면, 우씨 왕후는 결혼한 발기가 아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셋째 왕제 연우와 결혼을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발기가 왕위에 오르고, 그의 처는 왕후가 된다. 한때 우씨 왕후의 아래동서였던 발기의 처가 왕후가 된다는 사실도 가슴 아픈 일인 데다, 연우와 결혼하면 완전히 자신의 처지가 위에서 아래로 바뀌고 마는 것이다.    우씨 왕후는 발기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계속 자신이 왕후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을 거라고 계산한 것이다.      왕위가 형에서 동생으로 뒤바뀌다    한밤중에 우씨 왕후는 남편 고국천왕의 시신을 궁궐 깊은 곳에 숨겨둔 채 둘째 왕제 발기의 집으로 찾아갔다.    “나에겐 후사가 없으니 그대가 왕위를 계승하시오.”    우씨 왕후는 고국천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도 꺼내지 않고 먼저 그렇게만 말했다.    잠을 자다 나온 발기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왕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발기는 아직 왕이 죽은 줄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다음 왕위를 논하는 것도 해괴한 일일 뿐더러, 한밤중에 왕후인 형수가 헐레벌떡 달려온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늘의 운행이 따로 돌아가고 있으니, 가벼이 의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왕후께서 이 밤중에 홀로 나와 다니니, 이는 예의에 어긋난 일이라 생각됩니다.”    발기는 형수인 우씨 왕후를 점잖게 훈계하여 돌려보냈다.    우씨 왕후는 발기에게 우스운 꼴만 당하자 도무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다시 셋째 왕제인 연우의 집을 찾아갔다.    연우는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의복을 갖추고 나와 우씨 왕후를 맞았고, 집안으로 안내하여 주연을 베풀었다. 한창 주연이 무르익을 무렵, 우씨 왕후는 연우에게 누가 들을까 무서워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늘 밤 대왕이 세상을 떠나셨소. 그대도 알다시피 우리에겐 후사가 없습니다. 당연히 다음 왕위는 둘째 발기에게 돌아가게 되는데, 그는 나에게 딴마음이 있다고 폭언하면서 오만무례한 행동을 하였소. 그래서 지금 이렇게 그대를 보러 온 것이오.”    연우는 우씨 왕후의 말을 듣고, 곧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지금 형수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형 발기 대신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우씨 왕후를 더욱 극진히 대접했다.    이때 연우는 예의를 다하여 우씨 왕후를 대접하려고 직접 칼을 잡고 고기를 썰다가 그만 실수로 손가락을 베었다. 이것을 본 우씨 왕후가 얼른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 시동생의 상처가 난 손가락을 싸매 주었다. 그것으로 곧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로 통했다.    궁궐로 돌아가려고 할 때, 우씨 왕후는 연우에게 넌지시 말했다.    “밤이 깊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그대가 나를 궁궐까지 바래다 주시오.”    연우가 흔쾌히 승낙하자, 우씨 왕후는 곧 그와 함께 궁궐로 향했다.    이튿날 아침, 우씨 왕후는 고국천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신하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대왕의 유언이라며, 발기가 아닌 연우를 왕으로 삼았다. 하룻밤 사이에 왕위가 형에서 아우로 뒤바뀐 것이었다.    발기는 고국천왕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왕이 죽으면 당연히 둘째인 자신이 왕위를 계승하리라 믿었다. 그런데 동생 연우가 우씨 왕후와 결탁하여 고구려 제10대 왕위에 오르자 그는 크게 노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형이 죽으면 그 다음 아우에게 왕위가 돌아가는 것이 예인데 너는 그 순차를 뛰어넘어 왕위를 찬탈했다. 너의 죄가 크니 어서 나와 이 형의 칼을 받아라.”    발기가 자기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궁궐의 성문 앞에 나타나 이렇게 외쳤으나, 동생 연우는 3일 동안 성문을 걸어 잠근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이미 연우는 왕위에 올랐으며, 우씨 왕후와 결혼한 사이였다. 즉, 고구려 왕후 중에서 우씨 왕후는 고국천왕에 이어 산상왕(연우)까지 두 왕을 남편으로 둔 유일한 여인이었다.     고국천왕이 죽었을 때 “우씨 왕후는 연우에게 왕위를 계승케 하라”고 유언했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그녀를 둘러싼 연나부 세력의 음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국천왕이 죽었을 때 우씨 왕후가 상사(喪事)도 알리기 전에 밤길을 이용해 급히 발기를 찾아간 것은 이미 연나부 세력과의 음모에 의한 수순 밟기에 다름 아니었다. 그 음모의 단서가 바로 《삼국사기》 기록에 나타나 있다.    〈처음 고국천왕이 돌아갔을 때 왕후 우씨는 (喪事를) 비밀에 부쳐 발상(發喪)치 않고 밤에 왕제(王弟) 발기(發岐)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왕이 후사(後嗣)가 없으니 그대가 계승하라”고 하였다.〉    이 기사 속에 우씨 왕후와 연나부 세력의 음모가 숨어 있는 것이다. 우씨 왕후는 발기에게 고국천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다만 왕위를 계승하라고 말했을 뿐이다. 만약 그 죽음을 알렸다면 발기는 당장 궁궐로 달려가 왕위를 계승하고, 고구려 제10대 왕의 자격으로 고국천왕의 장례를 모셨을 것이다.    그런데 우씨 왕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발기에게 질책만 듣고 그의 집에서 나온 후 미리 연나부 세력과 짜 놓은 계획에 따라 그날 밤 아주 바쁘게 움직였다. 곧바로 셋째 연우의 집을 찾아간 우씨 왕후의 행동 속에 또 음모의 씨앗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기록을 다시 인용해 본다.    〈후(后)가 말하기를 “대왕이 돌아가시고 아들이 없으니 발기가 장(長·어른)이 되어 의당 뒤를 이어야 할 터인데 도리어 (나더러) 이심(異心)이 있다 하고 포만무례(暴慢無禮)하므로 (지금) 숙(叔·아제)을 보러 온 것이오” 하였다.〉    이 대목을 보면 아주 노골적으로 고국천왕의 죽음을 알리고 발기 대신 연우에게 왕위에 오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유혹’이다. 연우는 그 유혹을 금세 알아차리고 우씨 왕후의 청을 받아들여 고구려 제10대 산상왕이 된 것이다.      발기의 반란  개마총 고구려 벽화에 그려진 전투장면. 무사와 말 모두 갑주를 입고 있다.  산상왕이 된 연우는 형 발기가 군사를 몰고 궁궐 앞에 나타나자 3일 동안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반란을 평정할 대책을 논의했다. 이때 물론 우씨 왕후와 연나부 세력이 권력 전면에 재등장하여, 음모의 다음 수순으로 발기를 제거할 계책을 세웠을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발기는 자신의 군사가 적은 데다 궁궐 안에서 동조하는 세력이 없자 식구들을 데리고 요동으로 달아났다. 그는 요동 태수 공손도(公孫度)를 찾아가 말했다.    “나는 고구려왕 남무(男武)의 동모제(同母弟)인데, 남무가 죽고 아들이 없으니 아우 연우가 형수 우씨와 공모하고 즉위하여 천륜(天倫)의 의(義)를 저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분하여 상국(上國)에 와 의탁하는 것이니 원컨대 나에게 군사 3만을 주면 아우 연우의 군사들을 평정코자 합니다.”    발기가 말하는 ‘남무’는 고국천왕의 이름이고, ‘동모제’란 같은 어머니의 핏줄을 타고난 동생을 뜻한다.    요동태수 공손도는 발기의 말을 듣고 깊이 생각해 보았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손쉽게 고구려를 후한(後漢)의 속국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공손도는 선뜻 발기에게 군사 3만을 내주었다. 발기는 후한의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고구려의 국내성으로 쳐들어갔다. 그 소식을 들은 산상왕 연우는 아우 계수를 시켜 발기의 군사와 맞서 싸우게 했다.    이때 계수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명을 어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해서 그 명을 받아 형 발기와 맞서 싸우기도 곤란했다. 일단 그는 지엄한 왕명을 어길 수 없어 군사를 이끌고 나가 발기가 지휘하는 후한의 3만 군사와 결전을 벌였다.    계수가 선봉장이 되어 이끈 고구려 군사들은 날래고 용맹하여 후한의 군사들이 당하지 못했다. 더구나 후한의 군사들은 고구려의 발기가 대장군이라는데 불만이 많은 데다, 왜 그를 위해 피를 흘려야 하느냐는 분위기가 팽배하여 도무지 싸울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고구려 군사가 공격해 오면 후한의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에 바빴다.     후퇴를 거듭하면서 발기는 아우 계수를 보고 외쳤다.    “네가 지금 이 형을 죽이려 하느냐?”    “연우 형님이 왕위를 형님에게 사양치 않는 것은 의로운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발기 형님께서 그 분을 참지 못해 다른 나라 군사를 이끌고 와서 우리나라를 멸하려 들다니, 대체 이 무슨 해괴한 짓입니까?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선왕(先王)들을 뵈올 작정이십니까?”    발기는 동생의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배천(裴川)으로 달아났다. 계수는 형이 달아나도록 내버려두었다. 발기는 후한의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끝내 자신의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죽었다.    형 발기의 주검을 본 계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 시체를 거두어 초장(草葬)을 지냈다. 나중에 다시 왕명을 받아 정식으로 장례를 치러 주기로 하고 풀로 시체를 덮어 임시로 무덤을 만들어 둔 것이다.  고구려 벽화 무용총의 접객도. 주인과 손님의 모습을 크게, 하인의 모습을 작게 그려 놓았다.  고구려 군사를 이끌고 국내성으로 돌아온 계수는 산상왕에게 보고하고 울면서 말했다.    “결국 발기 형님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겨 자결하였습니다. 형제끼리 의를 저버려 이런 슬픈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산상왕은 따로 술상을 마련하고 왕과 신하의 관계가 아닌 형제의 정을 다지는 자리에서 계수에게 이렇게 질책했다.    “발기가 다른 나라에 청병(請兵)하여 우리나라를 침범한 것은 대단히 큰 죄다. 이제 네가 그의 군사를 쳐 크게 이겼으나 도망가는 것을 죽이지 않고 놓아 주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살을 한 것인데, 너는 왜 슬피 울며 나에게만 잘못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냐?”    계수는 다시 눈물을 머금고 대답했다.    “신(臣)은 지금 한마디 말씀을 아뢰고 죽기를 청합니다.”    산상왕이 물었다.    “그 청이 무엇이냐?”    “왕후(우씨)가 비록 선왕의 유명(遺命)을 가지고 대왕을 세웠다 하나, 대왕이 예로써 사양치 않은 것은 일찍이 형제로서의 의리가 없던 까닭입니다. 신은 대왕의 덕을 널리 알리려고 발기 형님의 시체를 거두어 초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신은 지금 대왕께서 진노하시는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왕이 만일 인자한 성품으로 모든 것을 잊고 형의 예로써 장사를 지내 주신다면 누가 대왕을 의리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이미 말씀을 사뢰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청컨대 신하들에게 명하여 신을 죽여 주십시오.”    산상왕은 이 말을 듣고 앞으로 다가앉으며 계수에게 자정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불초하여 너를 질책하였구나. 지금 네 말을 들으니 진실로 나의 허물이 무엇인지 알겠노라. 너의 충정과 형제애를 알았으니 너무 자책하지 말거라.”    이에 계수는 벌떡 일어나 산상왕에게 절을 한 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술을 마시며 형제애를 돈독히 했다.    곧 산상왕은 신하들을 시켜 발기의 시신을 모셔다 왕의 예로 장례를 치러 주었다.      주통촌 여자의 몸에서 왕자를 얻은 산상왕  삼실총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여인. 평민으로 보인다. 주통촌 여인은 아마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산상왕은 7년이 지나도록 우씨 왕후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어 걱정이었다. 전 남편인 고국천왕과의 사이에서도 자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아이를 잉태하지 못하는 결함은 우씨 왕후에게 있었던 모양이다. 석녀(石女)였을 가능성이 크다.    재위 7년 3월에 산상왕이 산천에 기도를 하였더니 15일 밤 꿈에 천신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너의 소후(小后)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할 터이니 근심하지 말라.”    산상왕은 꿈에서 깨어나 여러 신하가 있는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꿈에 천신이 나타나 나에게 말하기를 소후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정작 나에게는 소후가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이때 재상 을파소가 대답했다.    “천명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대왕께서는 그저 기다리고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해 8월에 을파소는 죽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어 고우루(高優婁)가 재상이 되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재위 12년 11월의 일이었다. 산상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고 할 때 제상에 올릴 교시(郊豕·돼지)가 달아났다. 그 돼지를 잡으려고 담당 관리가 쫓아가다 보니 주통촌(酒桶村)이란 마을에 이르렀다. 아무리 쫓아가도 관리는 달아나는 돼지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그 마을에 사는 20세쯤 된 아름다운 여인이 앞질러 가서 돼지를 잡아 주었다.    이렇게 겨우 돼지를 잡아 가지고 돌아온 관리가 산상왕에게 주통촌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대왕은 이상히 여겨 밤에 몰래 그 여자의 집으로 찾아갔다. 같이 간 신하를 시켜 그 여자와 하룻밤 정을 나누고 싶다고 전했다. 그 여자의 집에서는 대왕이 온 것을 알고 감히 그 청을 거역하지 못했다.    여자의 부모가 허락하자, 산상왕은 곧 방에 들어가 그녀와 마주보고 앉으며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라.”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대왕의 명을 감히 어길 수는 없습니다만, 만일 아이가 생기면 부디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산상왕은 그 여자에게 약속을 지키겠다고 맹세하고, 하룻밤의 정을 나눈 뒤 환궁했다.    산상왕 재위 13년 3월에 우씨 왕후가 주통촌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투기(妬忌)를 하여, 몰래 군사를 보내 죽이려고 했다. 그 여자가 먼저 그 소식을 듣고 남자 복장을 하고 달아났으나, 곧 붙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때 주통촌 여자는 왕후가 보낸 군사에게 말했다.    “너희가 지금 와서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은 대왕의 명령이냐, 아니면 왕후의 명령이냐? 지금 나의 뱃속에는 아이가 들어 있다. 만약 나를 해치게 되면 왕자를 죽이게 되는 것이니 그리 알라!”    그러자 군사는 감히 여자를 해치지 못하고 돌아가 왕후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보고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왕후는 어떡하든 그 여자를 죽이려고 패악을 떨었으나 끝내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 이야기가 산상왕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이때 대왕은 그 여자의 집으로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지금 아이를 배었다 하니, 그것이 누구의 아이냐?”    “신첩이 평생 형제와도 동석치 않거늘 하물며 다른 남자를 가까이하겠나이까? 지금 복중에 있는 아이는 대왕의 핏줄이 틀림없사옵니다.”    산상왕은 그 여자에게 위로금을 전달하고 돌아와, 우씨 왕후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알렸다. 마침내 왕후도 어쩌지 못하고 그 여자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그해 9월에 주통촌의 여자가 아들을 낳자, 산상왕은 크게 기뻐하여 말했다.    “오, 하늘이 나에게 귀한 아들을 주셨구나.”    산상왕은 처음 ‘교시(郊豕)’가 달아나 여자를 얻은 것이므로, 아들의 이름을 ‘교체(郊)’라고 지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 주통촌 여인을 ‘소후(小后)’로 삼았다. 처음 소후를 낳을 때 그 어머니는 해산하기 전에 무당으로부터 “왕비를 낳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그 이름을 ‘후녀(后女)’라고 지었는데, 정말 나중에 그 이름대로 되었다고 한다.      둘째 남편 산상왕과의 합장을 원한 우씨 왕후    오래도록 바라던 왕자를 얻은 산상왕은 그해 10월에 도읍을 국내성에서 환도성으로 옮겼다. 재위 2년부터 성을 쌓기 시작하여 13년에 완성을 본 것이니, 축성기간만 11년이 걸린 셈이다.    산상왕은 재위 13년에 주통촌의 여인에게서 아들 ‘교체’를 얻었고, 재위 17년에 그 아들을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태자 교체는 15세의 나이에 아들 연불(然弗)을 얻었다.    이때 왕손(王孫)을 얻은 산상왕은 크게 기뻐하였을 것이다. 왕위를 물려받을 혈통이 없어 형제끼리 싸움이 일어나는 변란을 겪은 그로서는 왕손을 얻게 되자, 비로소 ‘형제상속’이 아닌 ‘부자(父子)상속’으로 왕위를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년 후인 재위 31년 5월에 산상왕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우씨 황후는 살아 있었다.    산상왕의 뒤를 이어 태자 교체가 고구려 제11대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동천왕(東川王)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심성이 매우 착하여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 소후뿐만 아니라 부왕의 정실인 왕후 우씨에게도 깍듯한 예의를 갖추었다.    우씨 왕후는 산상왕이 죽고 나서 동천왕이 왕위를 이어받자, 은근히 그의 심성을 떠보고 싶었다. 왕으로서 자격을 갖추었는지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씨 황후는 동천왕의 측근에서 보위하는 신하를 한 명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몰래 대왕이 타는 애마의 말갈기를 잘라 보시오.”    그때까지도 우씨 왕후는 새로 즉위한 동천왕보다 실제적으로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말을 들은 신하는 명령대로 감히 대왕이 타는 애마의 말갈기를 잘랐다.    “말이 갈기가 없으니 가련하도다.”    동천왕은 애마의 말갈기를 자른 신하를 찾아내 벌줄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의 가련한 모습만 안타까워했다.    우씨 왕후는 그래도 동천왕의 성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가식적으로 온화한 성격인 척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시험을 해 보기로 하고, 대왕의 수라상을 담당하는 시녀를 불러 말했다.    “수라상을 들여갈 때 일부러 대왕의 옷에 국을 엎지르도록 하여라.”    수라상을 담당하는 시녀는 곧 우씨 왕후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동천왕은 그때도 화를 내지 않았다.    동천왕이 왕위에 오른 후, 우씨 왕후가 걱정한 것은 자신의 처지였다. 동천왕은 소후의 아들이므로 비록 산상왕 정실인 우씨 왕후였지만 자신이 왕태후(王太后)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장받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씨 왕후는 두 번에 걸쳐 동천왕을 시험해 보고 나서 적이 안심이 되었다. 과연 재위 2년 2월에 동천왕은 졸본의 시조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죄수들을 대사면했으며, 그해 3월에는 우씨 왕후를 ‘왕태후’로 삼았다.    우씨는 동천왕 8년 9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왕태후’로서 대왕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그리고 임종을 맞았을 때 그녀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일찍이 행실이 바르지 못하여 많은 과오를 범하였으니, 어찌 국양(고국천왕)을 지하에서 뵐 수 있으리오. 그러하니 만일 내가 죽거든 산상왕릉 곁에 묻어 주시오.”    《삼국사기》에는 왕태후 우씨가 유언대로 산상왕 곁에 묻혔을 때의 기록 끝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무자(巫者·무당)가 말하기를, “국양왕(고국천왕)이 나에게 강림하여 말하기를, ‘어제 우씨가 천상에 온 것을 보고 (내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드디어 그와 싸움을 하였다. 그런 연후 물러나와 생각하니 안후(顔厚·낯이 뻔뻔함)하여 차마 나라 사람을 볼 수 없으니, 너는 조정에 고하여 (무슨) 물건으로 나를 가려 주게 하라’ 하였습니다” 하므로 능(고국천왕릉)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    지하에 묻힌 혼령까지 이처럼 진노를 했다면, 당시 고구려 왕실은 물론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왕태후 우씨의 ‘취수혼’ 풍습에 대한 금기 깨기가 얼마나 큰 문제였는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고구려는 우씨 왕후의 ‘취수혼 사건’ 이후 왕계(王系)의 변화가 있었다. 즉 형제상속 제도가 거의 사라지고 장자(長子)상속으로 이어져 왕위계승으로 인한 왕족 간의 불협화음을 막았던 것이다. 이러한 왕계의 변화가 없었다면, 고구려는 왕이 죽을 때마다 삼촌과 조카 간의 왕위 다툼으로 인해 정국(政局)이 시끄러워졌을지도 모른다.⊙

문성근

사람들은 수사와 재판이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절차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그렇지만 현실의 수사와 재판에서 과연 진실이 규명되고 정의가 실현되고 있을까? 이에 관해 20여년 전 한 선배로부터 “수사나 재판에서 진실이 규명될 가능성은 동전던지기의 확률보다 더 나을 게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는 그 말에 별로 공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참 세월이 흐른 요즈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수사와 재판에는 원초적 모순과 한계가 있다. 우선 재판은 사건의 진상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사건의 진상을 훤하게 아는 사람을 심판한다는 구조적 모순을 갖는다. 그런데다 사건이 많아 한 사건에 매달릴 수 없는 사람이 한 사건에 오롯이 인생을 건 사람을 심판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그렇다고 수사나 재판에서 추구하는 진실과 정의의 개념은 과연 명확한가? 절대 그렇지 않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현인과 철학자들이 진실과 정의를 규명하려고 수천년간 평생을 노력했지만, 뚜렷한 개념정의에 실패했다. 그러다보니 진실과 정의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하는 개념이 되었고, 힘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이용될 때도 많았다.   그런데다 인간의 의식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인간은 사물의 일부를 볼 수밖에 없기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원하는 것만 잘 기억하는 인지편향적 본성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한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증인들의 증언이 대개는 서로 다르다. 이를 보면, 수사나 재판이란 어렵고 복잡하며, 소모적인 절차이다(이를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잘된 수사나 재판이라 하더라도 이를 통해 밝혀지는 것은 증거와 절차라는 좁은 문틈으로 엿보이는 진실의 쪼가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늘 정의의 문제와 부닥친다. 때문에 ‘미적거리는 앞차에 클랙슨을 누를까? 말까?’, ‘괜히 신경을 거스르는 녀석에게 화를 낼까?, 말까?’, ‘주인에게 종업원의 불친절을 따질까? 말까?’, ‘예쁜 아이를 한 번 쓰다듬어 줄까? 말까?’, ‘그 녀(이)에게 과감히 대쉬를 해볼까? 말까?’ 따위의 고민이 항상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모든 일상의 고민거리는 상대에 따라 오해나 싸움으로 번질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수사나 재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지만 수사나 재판은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시비를 일일이 가릴 수 없다. 어느 사회든 사람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나 충돌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수사나 재판보다는 도덕과 상식에 따라 대부분 평화롭게 해결된다. 따라서 도덕과 상식의 사회적 가치는 수사나 재판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크고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도덕과 상식의 가치를 너무 모른다. 그런 나머지 함부로 법을 앞세워 엄벌주의에 빠질 때가 많다. 그렇지만 역사는, 엄벌주의란 범죄예방효과는 별로 없으면서 범죄예비군을 키울 뿐 아니라 시대와 백성의 여망에 따른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권력의 도구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권력에 대드는 자에게 삼대(三代)를 몰살하는 혹독한 처벌을 일삼은 권력자치고 정치적 안정을 이룬 예가 없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양심과 도덕 및 상식이 제자리를 지키려면, 법이 설치고 날뛰어서는 안 된다. 법이 설쳐대면 수사와 재판이 난무하고, 그렇게 되면 진실과 정의가 오히려 흐려져 억울한 사람이 늘 수밖에 없다. 수사나 재판이 수많은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정의를 실현하기에는 처음부터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이 설치지 않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백성들이 법에 과도한 기대나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 법이 과도한 기대나 부담을 받을 때, 수사나 재판은 범인을 ‘색출’하는 게 아니라 ‘창출’하는 제도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수사나 재판이 일반백성의 건전한 상식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지 않도록 단단히 고삐를 죌 책무가 있다. 왜냐하면, 이 나라의 주인은 다름 아닌 우리(백성)들이니까!

신승민

  “김두한과 효도르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가끔 남자들은 치기 어린 생각을 한다. 주먹세계의 강자와 전문 무도인(武道人)들의 가상대결을 떠올리며 친구들끼리 편을 갈라 입씨름한다. 조건은 맨손싸움이다. “김두한은 실전에 강해서 30초면 끝난다” “날쌘 괴력의 소유자 효도르가 뒤집는다” 등 필살기를 예상해 승패를 가정한다. 1대1로 속칭 ‘맞짱’을 붙었을 때, 누가 먼저 주먹을 내지르고 돌려차기를 할지 상상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남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세계 최강의 파이터들은 어떻게 상대를 제압했을까? 번개같은 발차기로 17대1의 대결에서 승리했을까? 회칼과 쇠파이프를 든 잔인한 폭력배들을 회심의 ‘박치기’로 때려눕혔을까? 아니, 이글거리는 눈빛만으로 적들을 물러가게 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이름마저 전설로 불리는 다섯 격투가들의 일생을 추적해 봤다. 정열과 낭만, 기행(奇行)을 벗 삼아 야인(野人)처럼 살았던 ‘싸움의 전설’들을 만나 본다.      이소룡  뒷골목 대장, 영웅이 되다  왕년의 이소룡. 그의 깡마른 체격은 밀도 높은 근육으로 다부졌고, 체지방이 거의 없어서 극단적으로 탄탄한 몸을 유지했다. 사진=조선DB  중국계 미국인 무도인이자 영화배우인 이소룡(李小龍, 1940~1973)은 어려서부터 싸움을 좋아했다고 한다. 왜소한 체격과 병약한 체질을 극복하기 위해 중학생 때부터 길거리 싸움에 몰두, 퇴학과 전학을 반복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패싸움을 즐기는 타고난 골목대장에다 춤까지 잘 춰 각종 댄스 경연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당시 여자친구와 댄스장에서 춤을 추던 중 시비를 거는 미군병사들을 때려눕히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이소룡의 고강한 무술 실력은 중국 전통무예인 ‘쿵푸’에 뿌리를 뒀다. 7살 때부터 태극권을 익혔고, 청년기에는 당대의 고수 엽문과 그의 제자들에게 유명 권법인 영춘권(詠春拳)과 채리불권(蔡李佛拳)을 배웠다. 여기에 권투·펜싱·태권도까지 연마했다. 이렇게 익힌 무술로 1959년 한 격투기 대회에 출전, 1·2라운드에서 장사(壯士)들을 상대로 5분 만에 KO승을 거둬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이소룡은 중국 대륙의 주먹계를 석권한 뒤부터 전통 쿵푸의 단점을 간파하기 시작했다. 형식에 과도하게 얽매여 있다는 점이었다. 그에게는 좀 더 실용적인 무술이 필요했다. 이소룡은 세계 각국의 무술들을 종합·연마한 뒤 장점만을 골라 새 무공(武功)을 창조해 냈다. 자신이 오래 익힌 쿵푸를 바탕으로 권투·펜싱·태권도에 유도·레슬링·가라테·무에타이 등 다양한 무술들의 가장 강력한 기술들만 조합했다. 그를 홍콩영화와 할리우드를 주름잡는 유명 액션배우로 거듭나게 만든 ‘절권도’(截拳道)가 바로 그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에 핀 꽃’이라고 불리는 절권도는 상대의 공격을 간단한 동작으로 미리 차단시킨다는 뜻의 무술이다. 다시 말해 적의 빈틈을 노려 급소만 정확히 가격하는 등, 불필요한 몸동작을 절약해 기력을 낭비하지 않는 무술이다. 이소룡은 사후(死後) 출간된 책 《절권도》에서 본인 무술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절권도는 그저 최소한의 움직임과 에너지를 이용해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쿵푸의 진정한 길에 더 가까이 갈수록, 표현의 낭비는 더 줄어든다.”      老莊철학과 실전무술의 정수 ‘절권도’    이소룡은 홍콩에서 5년 동안 영춘권을 연마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12년 동안 절권도를 창시·수련했다. 그는 1964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롱비치에서 열린 국제 가라테 선수권 대회에서 절권도의 기본 공격기가 되는 ‘1인치 펀치’를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3년 뒤에는 LA에 도장을 열어 당대 할리우드의 극작가·영화배우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며 친분을 쌓았다.    절권도의 철학은 노장사상(老莊思想)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전 형식이나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 찌르는 이소룡의 무술은 단순하고 자연스런 공격을 강조한다. 그는 생전 ‘물이 돼라’ ‘물처럼 싸우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이는 도가(道家)에서의 화육(化育)과 부쟁(不爭)을 뜻하는 ‘상선약수’(上善若水) 사상과 유사하다. 그래서 그의 절권도는 현란하고 수세적인 방어보다, 간단하고 적극적인 가격으로 싸움의 우선권을 장악한다. 그는 주먹이나 발차기를 내지를 때도 힘과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곡선보다 직선을, 복잡한 초식보다 재빠른 기술들을 선호했다.    이소룡은 자신의 몸을 항상 최적의 상태로 만드는 것을 중요시했다. 난삽한 기교보다는 기본적인 체력단련과 정신수련에 집중했다. 그는 실제 시비가 붙어 싸울 때나 정식 대련이 있을 때면, 영화에서처럼 특유의 괴성을 내지르며 화려하게 싸우지 않았다고 한다. 최대한 신속하고 간결하게 대결을 마무리짓는다고 한다.    일례로 영화 《용쟁호투》 촬영 때 엑스트라 배우 몇 명이 와서 이소룡에게 ‘싸워 보자’며 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당시 엑스트라들은 실제 지하조직에 몸담고 있던 ‘진짜 깡패’들이었다. 이소룡은 이를 귀찮아하면서도 단 몇분 만에 소리 없이 대결을 끝냈다고 한다. 학창 시절처럼 이전투구를 벌인 게 아니라, 속도전으로 일격을 가해 승부를 가린 것이었다.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엑스트라들은 영화 촬영이 끝날 때까지 이소룡에게 존경을 표했다고 전해진다.      “한계는 없다, 꼭대기만 있을 뿐”    이소룡의 전기(傳記)를 쓴 브루스 토마스는 그가 영화배우이기 전에 진지한 무도인이었다고 증언한다. 그만큼 이소룡은 승부에 대한 열정이 강한 인물이었다. 토마스는 이소룡이 한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세상에 한계라는 것은 없다. 꼭대기만 있을 뿐이다. 꼭대기에 머물라는 말은 아니다. 그것을 분명히 넘어서서 (앞으로) 나가야 한다.”    세계적 무술가이자 20세기 문화의 상징이었던 이소룡. 그의 생전 체격은 키 173cm, 몸무게 62kg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깡마른 체격은 밀도 높은 근육으로 다부졌고, 체지방이 거의 없어서 극단적으로 탄탄한 몸을 유지했다. 실제 그의 서재에 꽂힌 2500여 권의 책 중 대다수는 스포츠 생리학에 관한 책들이었다고 한다. 체구가 작은 동양인이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싸울 수 있을지, 이소룡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했던 것이다.    그는 생전에 여러 명언을 남겼는데 현재까지 회자되는 세 문장이 눈에 띈다. “훌륭한 무술가는 긴장하지 않는다. 단지 준비할 뿐이다.” “한계 따윈 없다. 정체기가 있을 뿐이다.” “나는 만 가지의 발차기를 연습한 사람보다, 발차기 하나를 만 번 연습한 사람이 두렵다.”      최배달  泰山의 괴력, 항우의 現身  황소를 길들이는 왕년의 최배달. 그는 1950년 11월 일본 다테산(館山)에서 맨손으로 수십 마리의 소와 결투를 벌여 총 47마리를 무찌르고 4마리를 즉사시켰다. 사진=조선DB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난 최배달(崔倍達, 본명 최영의, 1923~1994)은 9살 때부터 택견·씨름 등 전통무술을 익혔다. 16살이 되던 해 도일(渡日), 군관학교에서 가라테를 배우고 10여 년 뒤 일본 가라테 선수권대회에서 최종 우승해 이름을 알렸다. ‘최배달’이라는 명칭은 당시 그의 일본식 이름인 ‘대산배달(大山倍達)’에서 유래했다. 자신의 뿌리가 한국임을 잊지 않기 위해 ‘배달’이라는 별칭을 고집했다고 한다.    그는 무술 고수로서 일본 전역을 제패했으나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수십 개월 입산수도를 통해 가공할 만한 가라테 실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최배달은 1950년 11월 일본 다테산(館山)에서 맨손으로 수십 마리의 소와 결투를 벌인다. 총 47마리를 무찌르고 그중 4마리를 즉사시켰다. 그의 나이 불과 스물일곱 살이었다.    최배달은 23세 때 일본 에도시대 전설의 검객인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五輪書)》를 읽고 전율을 느끼게 된다. 그는 ‘무예 단련의 끝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수련을 반복해 비로소 자신만의 무도를 창시하게 된다. 바로 극진가라테(極眞空手)다. 실전 무술을 중시한 무사시의 뜻을 이어 기존의 가라테를 공격형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손에 의한 얼굴 가격을 제외하고 모든 공격을 시도할 수 있도록 한 극진가라테는 최배달이 업그레이드시킨 당대 제일의 무술이었다.    최배달은 1952년 3월 일본대표 신분으로 11개월 동안 미국 전역 32곳에서 무술 지도를 했다. 최배달은 1년 뒤 미국 시카고에서 다시 소와 격투를 벌인다. 당시 수도(手刀, 손날)를 연마한 그는 달려드는 소를 쓰러뜨리는 것은 물론, 억센 뿔까지 잘라내는 진기(珍技)를 선보인다.      《五輪書》를 읽고 소의 뿔을 절단 내다    그는 1951년 3월 일본에서 검도·유도의 강자들과 결전을 치른 뒤부터 세계를 순회하며 최강의 파이터들과 겨뤘다. 쿵푸·복싱·레슬링에 프랑스 무술 ‘사바트’, 브라질 무술 ‘카포에이라’까지 그의 손끝에 무너진 세계의 무술은 다양했다. 이때 최배달은 미국 대표 레슬러 톰 라이스, 태국 무에타이 챔피언 블랙 코프라 등을 꺾으며 무림고수(武林高手)로서의 입지를 다진다.    심지어 1954년 한 도장에서 유도 실력자 100명과 겨룬 적도 있다. 당시 1대100의 대결은 사생결단의 격투나 다름없는 실전이었다고 한다. 이때도 그는 너끈히 100명의 고수들을 상대하며 단 한 번도 패하지 않는 괴력을 보였다. 1958년 미국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연방수사국(FBI)과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에서 무술을 지도하기도 했다. 이처럼 명성과 맹위(猛威)를 떨친 최배달의 수도는 훗날 ‘신의 손’이라는 영광스런 칭호까지 받게 된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아들들에게 ‘황소까지 때려잡는’ 극진가라테의 비법을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동전을 쉽게 구부릴 정도의 악력, 새끼손가락 하나로 턱걸이 15개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손가락 힘, 100m를 11초 만에 주파(走破)하는 달리기, 벤치프레스 106~150kg을 너끈히 들어올리는 완력(腕力), 단청을 손가락 세 개로 잡아끌어서 배에 붙일 수 있을 정도의 괴력.’ 이상 다섯 가지가 가능할 정도로 인간의 주먹이 단련된다면, 포악한 황소까지도 죽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아들 최광범씨는 훗날 부친을 이렇게 기억했다. “아버지는 산 같은 분이었다. 곁에 있어도 존재의 크기를 느끼기 어려울 정도였다.”    최배달은 극진가라테의 명성이 널리 퍼지자 세계 곳곳에 도장(道場)과 대회를 열고 제자들을 양성했다. 그의 도장은 고수들을 배출하는 산실이 됐다. 1975년 11월 열린 제1회 극진가라테 국제대회에는 36개국 120명의 선수가 나섰다. 그 뒤 관중과 참가자는 꾸준히 증가했다. 지부(支部)도 늘었다. 1960년대 말부터 북미·남미·중동·유럽·동남아시아 등에 지부를 설립하고 4년 뒤에는 일본 도쿄에 극진회관 총본부를 차렸다. 이때 그는 ‘국제가라테연맹’을 발족해 총재로 취임했다. 지금도 세계 각국의 지부와 도장은 최배달의 극진가라테를 배우기 위해 찾아드는 입문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한다. 그는 생전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요르단 왕실 훈장(1979), 브라질 정부 문화 공로상(1984)을 받기도 했다.      “무술의 완성은 곧 인격의 완성”    그는 생전 “무술의 완성은 곧 인격의 완성”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무도인은 무예단련 못지않게 정신수련과 인격도야도 중요하다는 점을 말했던 것일 테다. 그의 일대기는 한국의 대표 만화가 고우영의 〈대야망〉, 방학기의 〈바람의 파이터〉로 극화(劇化)돼 우리나라에 알려졌다. 특히 당시 《스포츠서울》(1989~1993)에 연재된 만화 〈바람의 파이터〉는 1일 신문 판매고를 100만부까지 올려놓는 인기작이었다. 이후 다섯 권의 단행본 만화책으로 출간(1994~1995)됐으며, 2004년 동명(同名)의 영화가 스크린을 장식하기도 했다.    일본 유도의 전설 기무라 마사히코는 “최배달 앞에 최배달 없고, 최배달 뒤에 최배달 없다”고 그를 평가했다. 최배달의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싸움 실력을 상찬한 말이다. 그럼에도 최배달은 생전 “모든 무도는 공존하면서 발전하는 것이지 적대관계의 무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겸손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시라소니  절대고독의 ‘인간 미사일’  왕년의 시라소니. 그는 3m 공중까지 뛰어올랐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박치기’부터 상대의 이마를 작살내는 무릎치기까지 공격 기술이 다양했다. 사진=페이스북 페이지 ‘시라소니 이성순’ 게시물 캡처  일제 치하 평북 신의주에서 태어난 시라소니(본명 이성순, 1916~1983)는 SBS 드라마 〈야인시대〉로 유명한 ‘장군의 아들’ 김두한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서 최고의 주먹으로 통하는 인물이다. 각종 소설·영화·드라마에서 협객(俠客)으로 극화될 만큼 한국 건달 역사의 상징적 존재가 됐다.    훗날 개신교에 귀의하는 시라소니는 사실 전주 이씨 가문 목사의 아들 출신이다. 괴력의 소유자답게 아버지인 이기정 목사 역시 15살에 활을 당겨 쏠 정도로 대단한 완력을 지녔다고 한다. 당시 전통 활은 성인 남자도 오랜 연습을 거쳐야 겨우 당길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드는 무기였다.    시라소니는 집안 생계가 어려워지자 17세 때부터 만주와 신의주를 오가는 기차에서 비단 밀무역으로 살림을 꾸렸다. 그는 일본 단속원들의 감시를 피해 기차와 기차 사이를 재빠르게 뛰어넘어 가면서 살벌한 생존의 법칙을 익혔다. 시라소니 특유의 노련한 판단력과 행동력은 소싯적부터 길러진 본능이었다. 이후 그는 고양잇과 동물인 ‘스라소니’의 민첩성과 용맹함을 본인과 동일시해 자신의 별칭을 ‘시라소니’로 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1934년 중국으로 건너간 시라소니는 백두산 수련 후 상하이·청두·톈진 등지를 유랑하며 ‘주먹 강자’로 이름을 날렸다. 중국인 출신 폭력배들은 물론 당시 중국에 주둔하던 일본 헌병들과도 맞서 싸웠다. 그는 3년 뒤 상하이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던 중, 일본인의 아편을 태워 버린 일로 잔인무도한 중국인 청부 폭력배들과 싸우기도 한다. 시비를 걸던 미국·러시아 등 여러 서양 출신 폭력배들도 제압한다. 그는 또 한때 중국 샨하이관을 지나 베이징으로 가던 중 공문서 위조 혐의로 체포돼 8개월 징역에 처해졌는데, 거기서도 건장한 일본인 죄수들과 싸워 이겼다고 한다. 그 넓은 대륙에서도 시라소니의 맞수는 없었던 것이다.      ‘종로통’ 김두한을 아우로 삼다    당시 시라소니의 명성은 중국을 넘어 일제가 강점한 한반도에도 퍼지고 있었다. 그는 ‘하라다’ 신의주 경찰서장의 복심(腹心)들을 척결하면서 당대의 일본에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시라소니의 ‘주먹 신화’는 중국 전역은 물론 조선팔도에도 널리 알려졌다. 반쯤 졸린 눈을 하면서도 어디선가 시비가 붙으면 안광(眼光)이 형형했다. 그는 일반적인 주먹다짐보다도 상황에 맞춰 급소를 노리는 임기응변이 강했다. 3m 공중까지 뛰어올랐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박치기’부터 상대의 이마를 작살내는 무릎치기까지 공격 기술이 다양했다. 일순 비룡(飛龍)처럼 날아올라 피스톤 펀치를 날리거나, 돌개바람보다 매서운 발차기를 가하는 등 화려한 무예로 ‘조선 제일의 주먹’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심지어는 당대의 맞수 종로통 김두한(1918~1972)까지 그 절륜한 실력에 감복해 시라소니를 ‘형님’으로 모실 정도였다.    해방 후 시라소니가 한반도로 돌아올 때, 경성(京城)의 주먹들은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고 있었다. 우미관을 중심으로 한 김두한, 명동 신사 이화룡, 동대문 ‘알카포네’ 이정재가 세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시라소니는 이화룡이 감찰부장을 맡고 있는 ‘서북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는 조선반도에 명성이 자자한 ‘인간 미사일’이었다. 시라소니의 타고난 위력의 박치기를 당해 낸 인사가 없었다. 항간에는 시라소니의 ‘박치기’가 5m 이상의 거리를 마치 용수철처럼 튀어나간다고 해서 ‘권총의 탄환(彈丸)보다 빨랐다’는 소문도 나돌 정도였다. 이에 호승심을 부린 일제 잔병(殘兵)들이 나름의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지만, 시라소니만의 예리한 ‘칼 던지기’ 솜씨에 일본군 무리가 와해됐다고 전해진다.    당대의 시라소니는 해방 정국에서 서북청년단 감찰부장은 물론, 독립운동가 해공 신익희의 경호실장을 맡을 정도로 무력이 대단했다. 그는 이미 1945년 본인의 친구를 박살낸 한국계 일본 깡패 가네미야(金宮) 일당 40여 명과 단신(單身)으로 대적해 끝장을 본 위인이었다. ‘낭만주먹’의 마지막 전설인 ‘인간미사일’ 시라소니의 명성이 세상을 뒤덮는 건 시간 문제였다.      정치깡패 이정재와의 갈등    시라소니가 아무리 당대 1인자 주먹이었다 할지라도 세월에 장사 없고 조직에 못 버티는 게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당시 남한의 조직폭력배 두목들은 더할 나위 없이 큰 조직을 거느린 경우 직속 휘하에 1만명 이상의 무리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 반면 시라소니는 혈혈단신 단기필마(單騎匹馬)로 조폭 세계에 입문하였으니 여러모로 장애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바야흐로 그때 동대문 거두(巨頭) 이정재와의 갈등이 빚어지게 된 것이다.    씨름꾼 출신인 이정재는 당시 전국대회에서 황소 10마리를 부상으로 거둘 만큼 천하제일의 장사였다고 한다. 그 같은 괴력을 지닌 이정재도 6·25 동란 당시 피란지였던 부산에서 지역깡패 ‘용가리’ 소속 10명의 불량배에게 린치를 당하고 있었다. 그 길을 우연히 지나가던 시라소니가 깡패들을 제압해 이정재를 살려줬던 것이다. 그때부터 이정재는 시라소니를 ‘형님’으로 깍듯이 모셨다.    그렇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던 이정재도 당시 혼란한 시대상황을 틈타 나름 본인의 조직을 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시라소니와의 갈등이 시작됐다. 동대문의 ‘알카포네’로 불렸던 이정재에게는 이북 출신 명동파의 시라소니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결국 제일의 주먹 강자인 시라소니도 1953년 이정재 일당에게 가혹한 린치를 당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이정재의 복심(腹心) 이석재에게 한 번 더 무자비한 폭행을 당한 뒤에는 모두가 시라소니의 재기(再起)는 불가능하다고 점칠 정도였다.    그때 시라소니는 동향(同鄕)인 이북 상인들의 민원을 청탁하기 위해 이정재에게 갔으나, 그의 부하들은 이미 갈퀴·도끼·절굿공이로 무장한 상태였다. 혼자였던 시라소니는 보스 이정재에게 점포 양도를 요구하다 그 일파에게 모진 집단구타를 당해 중상해를 입는다. 이석재의 추가 린치에도 겨우 명줄을 잡고 있던 시라소니는 복수를 위해 2년 동안 권총을 품고 다녔다.    하지만 이정재는 박정희 혁명정부가 집권한 이후 형장의 이슬로 돌아갔다. 그 일파도 자유당 독재정권의 주구(走狗) 노릇을 했다 하여 불명예의 정치깡패로 종식됐다. 시라소니로서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소리 없이 죽어 버린 셈이었다. 그는 이후 서북청년단 소속의 옛 부하들을 교화(敎化)시키는 기독교인이 됐다. ‘시라소니’ 이성순의 아들인 이의현 목사는 과거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부친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지는 싸움에 이기고도 그 지역을 접수하지 않았어요. 오직 일제에 대항하여 주먹을 휘두르셨으며 광복 후에는 독립운동가였던 신익희 선생의 경호실장을 역임하고 6·25 때에는 국군으로 참전하는 등 나라를 사랑하신 분이셨습니다.”    물론 최종 평가는 독자들의 몫이다. 그러나 시라소니는 풍운의 시절 속에서 치부(致富)보다는 ‘낭만주먹’을 택했다. 그것이 비록 무지막지한 주먹세계의 소설이었다 할지라도, ‘고독한 사냥꾼’으로서 살아온 이성순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마이크 타이슨  괴짜 핵주먹, 끈기의 鐵拳  타이슨의 과거 경기 장면들. 타이슨은 데뷔 1년 만에 19경기 연속 ‘KO승’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운다. 사진=영화 스틸컷 캡처  미국 출신 권투선수 마이크 타이슨(1966~)은 약관의 나이에 세계 복싱 대회에서 헤비급 챔피언에 오른 전설의 주먹이다. ‘핵주먹’ ‘핵이빨’이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막강한 완력을 가지고 있다. 20대 초반에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3개의 복싱단체 타이틀을 거머쥘 만큼 복싱계의 실력자다.    타이슨은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바깥으로 나돈 타이슨은 소싯적 ‘소매치기 천재’로 범죄도시에서 이름을 날렸다. 파란만장한 소년원 수감을 마치고 1985년 프로복싱 선수로 데뷔했다. 그의 나이 불과 18살 때였다. 타이슨은 데뷔 1년 만에 19경기 연속 ‘KO승’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운다. 그는 헤비급 타이틀전에서 당대 챔피언 ‘트레비 버벅’을 한 방에 제압해 역대 최연소(20살) 헤비급 세계 챔피언으로 등극한다.    당시 타이슨은 공식 체급에 비해 몸집이 작았다. 그러나 그는 살과 근육으로 육중한 최강의 경쟁자들을 단박에 때려눕히고선 이렇게 말했다. “덩치가 크면 쓰러질 때의 소리만 더 클 뿐이다.”    이리하여 순식간에 세계 최강 복서가 된 타이슨은 서서히 오만으로 보이는 난폭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990년 2월 11일, 일본 도쿄 통합 타이틀전에서 당시로서는 무명선수였던 제임스 더글러스에게 참패한 이후부터였다. 더구나 그때는 1년 전 이혼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시기였다. 혼돈에 빠진 타이슨의 사생활은 문란했다. 1991년 흑인 소녀를 강간해 구속된 사건은 그의 복싱선수 경력에 큰 오점을 남겼다. 타이슨은 3년 동안 복역한 뒤 1995년 3월 25일 가석방됐다. 1년 뒤 WBC(세계복싱평의회) 왕좌를 되찾은 그는 6년 만에 다시 복싱 최강자의 자리에 올랐다.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다    타이슨은 1997년 일생일대의 흥행(?)이자 흠결이 되는 사건을 벌인다. 그해 6월 28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MGM 호텔에서 열린 ‘에반더 홀리필드’와의 헤비급 타이틀 리턴 매치에서 상대의 귀를 사정없이 물어뜯어 버린 것이다. 타이슨은 앞서 1996년 11월 홀리필드에게 ‘KO패당한’ 불명예를 안고 있었다. 당시 복수심에 불탄 그는 민첩한 홀리필드의 몸놀림에 이미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타이슨 특유의 강력한 핵주먹도 바람처럼 빠른 홀리필드의 회피 기술에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분개한 타이슨은 사리분별조차 못하고 3라운드 2분20초경 악물고 있던 마우스피스를 뱉어 버리고 억센 이빨로 홀리필드의 오른쪽 귀 윗부분을 물어뜯었다.    삽시간에 낭자한 선혈(鮮血)이 링 위에 뿌려졌다. 타이슨은 입술을 우물거리다 홀리필드의 한쪽 귀 살점을 뱉어냈다. 홀리필드는 극심한 고통에 절규했다. 주심은 흥분한 타이슨에게 “한 번만 더 귀를 물게 되면 실격패를 선언하겠다”고 경고했지만 소용없었다. 타이슨은 3라운드에도 홀리필드의 왼쪽 귀를 물어뜯었던 것이다. 타이슨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세에 몰린 홀리필드를 막무가내로 공격했다. 양측 관계자와 경찰들이 몰려와 간신히 싸움을 말렸지만 비극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타이슨은 이른바 ‘핵이빨’이라는 오명을 자초한 당시 사건 발발로 유력 스폰서와의 계약이 끊어졌다. 스포츠계의 ‘비(非)매너남’으로 찍혀 세간의 지탄까지 받았다.    이후 ‘선수자격 정지’를 당한 그는 5년 동안 자숙한 뒤 재기를 모색했다. 2002년 다시 링 위에 올라섰지만 당시 챔피언이었던 영국 선수 ‘레녹스 루이스’에게 8회 KO패로 패전했다. 2004~2005년 연속으로 챔피언 자리를 노렸지만 끝내 복싱의 왕좌를 수복하지 못했다.    분방한 여성편력과 갖은 기행으로 강력한 주먹보다 특이한 성격이 더 유명했던 타이슨. 그러나 그의 위력적인 펀치만큼 담대했던 배포는 아직까지도 전 세계 복싱 팬들을 놀라게 한다. 과거 한 영국 매체 보도에 따르면 타이슨은 한때 뉴욕 갱단의 살해 목표였다. 2000년경 당시 타이슨은 본인의 보디가드가 갱단에게 살해되자 이를 보복하도록 수하들에게 특별지시를 내렸고, 이에 맞서 갱단도 타이슨 살해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이와 관련, 타이슨은 당시 한 미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난 이미 최악의 상황을 예견했다”고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괴팍한 성격만큼 특유의 배포도 그의 독특한 정체성을 만들어 준 요소인 듯하다.      연예계까지 넘나들던 奇人    현역 시절 50승 6패의 기록, 그중 44전에서 KO승을 거둔 타이슨의 전설은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초라해진다. 이혼·범죄·마약·알코올중독에 파산신청까지, 최연소 복싱 챔피언의 말로는 처량했다. 그러나 타이슨은 여타의 ‘인생 패배자’와 달랐다. 그는 늙어서까지 끊임없이 도전했다. 일면 웃음거리가 될지라도 본인의 의사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도전의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스스로 과거를 반성하는 자서전을 펴내고, 배역의 비중과 관계없이 영화·드라마·원맨쇼·애니메이션에 거침없이 출연했다. 다소 뻔뻔하게까지 느껴지는 그의 자신감은 어떻게 보면 핵주먹보다도 더 무서운, 끈질긴 매력일지도 모른다.    그의 오래된 어느 팬은 ‘선수 타이슨’ ‘인간 타이슨’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다른 선수에게서 느낄 수 없는 무엇인가가 느껴지는 선수였다. 타이슨에게 잔인한 동물 같은 페르소나가 있었던 것도, 여자문제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게 그런 페르소나는 링에 오르기 위해, 세상과 맞서기 위해 필요했던 것 같다.” 물론 그의 어지러운 사생활을 주먹 실력으로만 포장하는 것은 지나친 미화일지 모르겠다.      힉슨 그레이시  파워 老益壯, 무패의 신화  왕년의 힉슨 그레이시. 그는 현역 체급이 키 178㎝, 몸무게 87㎏에 불과했지만, 본인보다 30~40㎏ 체중이 더 나가는 헤비급 선수들을 거뜬히 제압했다. 사진=조선DB  힉슨 그레이시(1958~)는 브라질 유술(柔術)의 창시자 엘리우 그레이시의 셋째 아들이다. 여기서 유술이란 병기(兵器)를 쓰지 않고 맨손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무술로, 치고·차고·꺾고·던지고·조이고·찌르는 등의 기술을 발휘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도가 대표적이다. 그레이시 가문은 이 유술을 바탕으로 한 ‘주짓수’라는 격투기성 무술을 파생·발전시켰다. 주짓수는 유술 본래의 무예보다 실전 기술의 성격이 더 강하다.    힉슨은 아버지의 무공을 이어받은 여러 형제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한때 세계 종합격투기 대회인 UFC에서 이름을 날리던 동생 호이스 그레이시가 “나의 형 힉슨은 나보다 100배는 강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실제 힉슨은 6살 때부터 주짓수 훈련을 받았다. 중학생 나이인 15세 때 당시 입문한 수련생들을 지도했다. 18살이 되던 해에는 주짓수 외에 유도·레슬링 등 무술 전반에 걸쳐 남다른 실력을 보였다. 모국(母國)인 브라질 레슬링 대회에서 2회 우승을 거머쥐었고 삼보(러시아 격투기)로는 금메달까지 땄다. 그렇게 국제 주짓수 선수권 대회에서 20년 동안 미들급·헤비급·무제한급에서 최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2000년 일본 선수 후나키 마사카쓰에게 승전한 이후 현역에서 은퇴해 지금까지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힉슨이 본국에서만 주짓수 신화를 세운 것은 아니다. 그는 일본 원정까지 떠나며 당대의 최강 격투가들을 꺾었다. 1997년 다카다 노부히코를 1라운드 만에 처리하고 1년 뒤 열린 대회에서 또 다시 승전해 국제적 명성을 쌓았다. 힉슨은 당시 5만명의 관중이 모여든 도쿄돔에서 경기 시작 4분 만에 다카다의 팔을 비틀어 암바를 시전해 보기 좋게 승리했다.    그는 현역 체급이 키 178cm, 몸무게 87kg에 불과했지만, 본인보다 30~40kg 체중이 더 나가는 헤비급 선수들을 거뜬히 제압했다. 유도의 고장 일본 무대에서만 대전료가 무려 2억 엔에 달할 정도였다. 거구의 관절을 꺾고 급소를 조르는 신기(神技)는 오직 힉슨만 가능했던 비술(術)이었다. 여타의 주짓수 선수들과 같아 보이는 자세라도, 신체의 어느 곳에 무게를 더 싣느냐에 따라서 상대방의 약점을 급습하고 장악할 수 있었다. 과거 국내의 한 격투 경기 해설위원은 힉슨에 대해 “수많은 싸움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정타를 허용한 적이 없는 선수”이자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유리한 포지션을 만들 능력을 갖춘 선수”라고 극찬했다.      “효도르·크로캅과 싸워도 이긴다”    주짓수를 세계 최강 무술로 올려놓았던 힉슨은 2000년대 초반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고 난 뒤부터 끝내 무대에 나서지 않았다. 450전(戰)450승(勝), 무패의 신화를 달성하던 전설의 파이터도 부모로서의 죄책감과 상실감은 끝내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일까.    그즈음 세계는 물론 국내에서도 이종격투기 대회 K-1에 대한 인기가 열풍이었다. 당연히 브라질 유술의 고수 힉슨이 언급됐다. 당시 힉슨은 지금도 최강 격투가라 불리는 “효도르나 크로캅과 싸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차마 링 위에 직접 나서지는 못했지만, 그만한 자신감을 갖고 싸울 만한 기력이 남아 있다는 점을 내세운 말이었을 것이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그의 나이 이미 50에 가까웠지만, 노익장을 과시하며 자신의 명성을 지키려 했다는 점은 파이터로서의 ‘불굴의 자존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진정 그의 호언은 그저 철 지난 노익장에 불과했을까. 힉슨의 K-1 복귀설이 퍼질 당시 우리나라 격투기 해설위원들은 다음과 같이 기대를 걸었다. “힉슨은 진정한 무도인이다. 일상생활 자체가 주짓수 단련이다.” “(평소)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경기가 잡히면 한 달 전부터 부인과 성관계도 하지 않는다.” “힉슨의 그라운드 능력은 레벨이 다르다. (그가) 40여 년간 익혀 온 브라질의 주짓수는 철저히 실전형 무술로 덩치의 크고 작음이 문제될 수 없다.”    실제 당시 힉슨은 비록 나이는 들었어도 본인 도장에서 꾸준한 무예단련과 복식호흡, 요가체조 등으로 전성기의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한때 자신이 치른 경기 횟수에 대해 “비공식 대회까지 합하면 1000전이 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따라서 힉슨의 호기는 단순한 으름장의 수준을 넘어, 실전에서도 맞붙을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갖추고 외친 자신감의 발로였던 것이다.      “몸집 불리기보다 궁극의 기술에 도달해야”    힉슨은 무술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던 위인이다. 그에게 있어 무술이란 비루한 이전투구(泥田鬪狗), 길거리에서의 주먹다짐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덩치를 키우거나 강한 타격만 중시하는 파이터들의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했다. 힉슨에게 무술이란 고도의 기술 연마, 궁극의 기술 시전이었다.    “현재 격투기 선수들의 기술은 뒤떨어져 있다. 몸집을 불리고 타격과 그라운드의 균형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술의 궁극에 도달해야 하는 파이터의 숙명으로 볼 때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힉슨의 주짓수에서 강도 높은 타격과 균형 잡힌 체력은 기본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약점을 가릴 만큼 맷집도 있어야 하고, 완벽한 기술 발휘를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련해야 한다.    어느덧 전설의 고수가 된 힉슨이 새기고 익힌 명언은, 우리들에게 무술의 진면목이 곧 인생의 바른길과 일맥상통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해 준다.    “‘만약 네가 좋은 스승이 되려면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을 보여줘라. 만약 네가 위대한 스승이 되고 싶다면 학생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쳐라.’ 이 말씀은 내가 가르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전에는 학생들을 내가 가르치고 싶은 것에 맞추었거든요. 내 아버지가 말씀해 주신 방법은 매우 심오한 방법이고 스승과 제자 모두를 성장시킬 것입니다.”    힉슨이 근래 한 주짓수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가르침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이어받았고, 다시 제자들에게 본인이 배운 모든 것을 전수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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