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열

시안은 잠재력이 풍부한 도시이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져 독특한 시안 만의 색채를 띈다. 이번 시안 방문은 중국시장 및 문화의 잠재력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간 중국에 대해 필자가 가졌던 편견도 상당 부분 해소되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 공산주의 2대 강대국 중 하나인 중국은 구소련과 많은 면에서 비교가 된다. 냉전시대에 세계 2대 강국이었던 구소련은 자본주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국가가 해체되는 진통을 겪었고 지금은 여러 개 국가로 나누어져 과거의 영광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이에 반하여 중국은 일찍이 등소평의 ‘실용 자본주의’ 노선에 힘입어 현재 G2로서 그 위상을 높이고 있다. 이는 지도자의 미래를 보는 눈과 이에 따른 추진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의 특징인 중앙집권적인 지배구조가 오히려 효율성 면에서는 배가(倍加)되어 빠른 시일 내에 현대화 및 국가재건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의 독재 권력이 밀어붙인 국가경제 개발정책이 경제발전의 효율적인 원동력이 된 것과 비슷하다.   중국 시안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도시다. 시안의 성곽에서 바라본 도심의 모습이다. 그런 면에서 현재의 중국사회와 문화를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디지털화는 상당 수준에 이르렀다. 무엇보다도 구매 등에 있어서 바코드를 이용한 결제시스템은 가히 혁명적이다. 거의 모든 가게에서 바코드를 통한 결제시스템이 일반화되고 있었다. 여전히 신용카드 결제시스템에 의존하는 우리나라와 비교해 좀 더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해외기업의 인수합병을 통한 브랜드 제고 및 해외시장 개척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컴퓨터, 자동차에서부터 시작해 지금은 거의 모든 산업에서 해외기업의 인수합병에 나서고 있다. 그 결과, 품질과 브랜드 면에서 중국 이미지가 바뀌고 있고 해외시장 개척과 마케팅 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고 있다. 법률서비스를 개선한 사법 시스템도 놀랄만하다. 먼저 지식재산권 침해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중국은 특허법원을 설립했다. 최근에는 온라인 법정까지 개설해 법률서비스의 디지털화에 앞장서고 있다. 그리고 공증제도 등 사회전반의 신뢰성 제고를 위한 사회기반 시스템 구축에 집중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 정부의 실크로드 재건사업이 심상찮다. 과거 유럽과의 교역무대가 된 실크로드를 새롭게 재건하여 유럽시장과 중국시장의 접근성을 개선,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하는 야심찬 글로벌 프로젝트다. “Belt and Road Initiative"라는 기치 하에 실크로드 전역을 중국의 주도하에 재개발하겠다는 의도는 관련 지역을 모두 중국의 영향권 하에 두고 나아가 유럽시장을 장악하여 미국주도의 세계시장에서 중국의 지위를 업그레이드 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글로벌 시대에 맞는 글로벌 프로젝트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역동적인 중국에 대해 우리는 오히려 모르는 점이 너무 많다. 역사적으로 문화 등이 친숙하기는 하나 중국의 전문가가 의외로 부족하게 느껴진다. 중국이라는 시장이 워낙 크다 보니 각 지역별로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 시장과 문화에 대한 분석 등이 미흡하다.   시안은 진시황제의 병마용이 있는 고대 도시다. 이곳에서 중국의 실크로드 재건 작업이 일어나고 있다. 어차피 중국시장, 실크로드와 연결되는 유럽시장은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시장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실크로드 재개발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하고 한 걸음 나아가 중국과 한국을 연결하는 벨트를 구축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번 시안의 방문을 통하여 중국내륙 특히 실크로드의 출발점인 중국 내륙 지방도시의 무한한 잠재력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되었다. 시안의 경우 베이징이나 상하이보다 더 깔끔하고 잘 정돈되어 있어서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보았다. 시안 곳곳에서 실크로드가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는 느낌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이제라도 중국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중국의 현재와 미래를 다시 공부를 하여야 할 것 같았다.

김승열

시안국제공항으로 가는 길에서. 어느 때보다 행복했던 시간여행이었다. 시안에서 살고 싶었다. 진시황 병마용과 시안성 동문을 종일 돌아다니다가 숙소로 돌아오니 온몸이 노근해졌다. 그렇지만 실물로 진시황의 병마용을 보니 과거로 시간여행을 온듯 흥미로웠다. 그 시대 왕후장상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고된 삶을 살았을지 가히 짐작이 갔다. 황제가 자신의 사후세계를 위해 도제로 빚은 동상을 저렇게 많이 만들고 온갖 정성을 다했으니 국민들의 피와 땀은 오죽했겠는가.   시안의 야경을 배경으로 호텔 근처 맥주광장에서 국제공증인협회 세미나에 참석했던 일행들과 맥주잔을 기울였다. 필자는 국제공증인협회 세미나에 동행한 일행과 호텔 근처 맥주광장에서 간단한 저녁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강이 보이고 산이 있으며 시원한 바람마저 부는 이곳에서 여유로움을 느끼니 3000년 전 시대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시안이 가져다 준 감동은 의외로 깊었다. 단순히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곳이고 진나라, 당나라 수도였기에 화려했던 문물이 흥미를 더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필자에게 시안은 사람이 살기에 딱 좋은 도시로 각인되었다. 교통체증을 제외한다면 과거와 현재, 클래식함과 모던함, 오래된 성(城)과 숲 그리고 마천루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당 현종과 양귀비가 향유했던 삶을 역사 현장에서 확인하고 머릿속에서 그려본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그리고 인구가 900만 명이나 되지만 도시 전체가 바쁘게 흘러간다기보다 이상할 정도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중국의 다른 도시도 여행했지만 시안에서 느끼는 여유는 남다르다고 해야 할까.   김승열 변호사모처럼 잠을 푹 자고 일어나니 어제 마신 맥주 때문에 다소 피곤하게 느껴졌으나 기분만은 홀가분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채비를 하였다. 호텔에서 공항으로 가는 무료셔틀이 없어서 택시를 불렀다.   잠시 후 나타난 택시… 그런데 의외로 택시가 조그마하면서도 밝은 분위기를 주어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택시 안도 깨끗했고 기사의 표정도 밝았다. 시내를 주행하는데 아주 부드럽게 운행을 하여 그간 중국의 택시 운전사에 대한 편견을 없애주는 계기가 될 정도였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시내는 조용하고 모든 것이 포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베이징 등에서는 택시기사가 큰소리로 욕을 하고 경적을 마무 누르거나 운전을 하면서 멋대로 담배를 피워 경악스러웠던 기억이,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난다. 지나가는 화물트럭을 보니 쌓아올린 화물이 넘어지지 않게 잘 포장된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지나가는 다른 트럭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던해지고 미래지향적으로 성장하는 중국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짐을 가득 실은 화물트럭. 포장을 잘 해서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경찰이 차량의 운행을 중단시키고 있었다. 필자가 “무슨 사고가 났느냐”고 물었더니 기사는 웃으면서 “당(黨) 간부가 지나가서 통행을 일시 통제하는 데 10분 이내로 마칠 것”이라고 했다. 이 택시기사의 대화는 구글 번역기를 통해 중국어와 한국어로 나누었다. 신기술의 체험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VIP를 위한 차량 통제와 이에 따른 정체는 불가피하나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지 않을까.   공항으로 가는 길이 갑자기 막혀 구글 통역기를 통해 운전기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신기술의 체험이었다.  시안국제공항에 도착,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항 역시 아담하지만 잘 정비되어 있었고 비교적 조용하고 쾌적하였다. 전자장비가 없어 손으로 철저하게 검색하는 안전요원의 성실한 근무태도 역시 인상적이었다. 전체적으로 시안의 중국인 표정이 어둡지 않아 중국의 발전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물론 크게 환히 웃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모습을 하거나 인상을 쓰고 얼굴 찌푸리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 만큼 시안에서의 삶에 만족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안국제공항 내부 모습. 중국내륙 안쪽에서 3000년의 역사와 그 문물을 잘 보존하면서 현대와도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멋진 역사 도시에서의 시간이 자못 자랑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문화와 역사의 도시인 시안의 묘한 매력은 당분간 필자의 기억 속에서 아주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김병헌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에서 시행하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은 일정 급수 이상 합격자에 한해 국가공무원, 외교관후보자, 교원임용 선발시험의 응시자격을 부여하는 등의 특전이 주어지는 중요한 시험이다. 그런데 이처럼 비중 높은 시험에서 역사적 사실과 명백하게 배치되는 출제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 2017년 8월에 시행한 고급 36회 32번은 최익현의 활동을 묻는 문항으로 ‘흥선 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親政)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던 그는 왜양일체론을 내세워 강화도 조약 체결에 반대하였습니다.’라는 지문을 제시하고 다섯 개의 답 중 하나를 고르도록 하였다. 여기서 ‘그’는 물론 최익현이며 해당 상소는 승정원일기와 고종실록 1873년 11월 3일자 기록에 있다.   지문대로라면 최익현의 상소에는 흥선 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최익현의 상소에는 그런 내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있을 수도 없다. “그는 이렇게 권력을 잡아갔지만 그에게는 국정에 관여할 공식적인 권한은 없었다. 그는 국왕의 생부라고 하는 특수한 관계를 바탕으로 비공식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였다.”는 국편의 ‘한국사 연대기’ 이하응 조에서 알 수 있듯이 흥선 대원군은 하야할 공식적 지위에 있지 않았으며, 고종은 1866년 2월 13일에 이미 친정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문항에 대해 필자는 지난해부터 수차례에 걸쳐 출제 오류임을 주장하였으나 국편은 명확한 근거 제시도 없이 오류를 인정하지 않다가 마침내 중복 질문이라는 이유로 종결 처리해 버렸다. 더 이상의 문제제기를 할 수 없도록 차단한 것이다. 그렇다고 역사 사실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오류가 정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국편은 지금이라도 출제 오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솔직한 자세가 필요하다. 역사 서술은 정직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병헌(동국대 사학과 박사 수료)

정규홍

조선총독부박물관 ‘기부취조표’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는 1906년에 한국복심원 차관으로 한국에 건너와 판사로 활동하다가, 후에 총독부 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1918년까지 판사로 활동하면서 한국 고미술품을 많이 수집하였다.   아사미 수집품으로는 『대정원년 약보고』에, 1911년 촬영했다는 「조선고적사진목록」도판 25-29로 게재된 것도 있다. 1916년에는 도기, 와전 등 수십 점을 총독부박물관에 기부하기도 했다. 그의 수집은 일찍부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식견이 높아 수준이 높고 폭이 넓었다. 1918년 9월에 사료조사 차 한국에 잠시 건너온 도쿄대학 하기노(萩野) 박사와 함께 동행 했던 다나카(田中)박사의 복명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특히 한국서적을 많이 수집하였는데, 자기의 문고 1084부 5771책을 미쓰이문고(三井文庫)로 넘겼다. 아사미가 편찬한 『조선수집 도서목록』(1916년)의 내용에는 당본목록 2700책, 조선본 추가목록 293책, 금석비판류 200종 합계 3193책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종전 후 미국으로 팔려가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의 ‘아사미문고’가 되었다. ‘아사이문고’에 대해 일부 국내에 소개된 것도 있지만, 1918년에 다나카(田中)박사가 목격한 목록에 들어있는 조선의 묵탁법첩류(墨拓法帖類) 등의 조사가 아쉽다.    『每日申報』 1918년 3월 7일자 기사 淺見倫太郞, 「고려자기에 관한 고려인의 기록」, 『매일신보』 1914년 10월 28일자  

김승열

거대한 진시황의 군대다. 진시황이 죽은 뒤 그의 사후세계를 따라갈 수많은 병사와 말 도제들이다. 진시황은 죽음 이후를 매우 두려워한 것은 아닐까. 오늘은 그 유명한 진시황 병마용(兵馬俑)으로 가기로 했다. 병마용이란, 중국 시안의 진시황 무덤에 있는 약 1만 구의 도제(陶製) 병마(兵馬)를 지칭한다. 병마용은 보(步, 보병) · 노(弩, 방아쇠를 사용하는 활) · 차(車, 전차) · 기(騎, 기병) 4종의 등신대(等身大, 사람 크기와 같은 크기)다.   필자가 머무르고 있는 호텔에서 한 시간 거리였다. 처음 발견한 농부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40년 전인데 그 농부는 병마용을 발견한 공적으로 그 박물관 공무원으로 채용되어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게 됐단다. 박물관에서 진시황 병마용 책을 사는 사람에게 농부 자신의 사인을 제공하는 것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가보니 그 농부가 있었다. 나이가 70세 전후라고 하니 30세 전후에 발견한 모양이었다. 놀랍게도 농부의 표정이 아주 밝고 즐거워 보였다.   갑옷 대신 평상복으로 갈아 입은 이(귀족일까?)가 화려한 네 마리의 말을 몰고 있는 형상이다.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진시황 병마용은 원래 황제가 죽으면 측근의 병사를 순장하여 같이 묻으려 했는데 너무 잔인하다고 하여 동상을 만들어 대체하기로 한 것이라고 한다. 일부지역은 아직도 발굴 중인 것으로 보였다. 다만 진시황의 묘는 그곳에서 떨어져 있는 곳으로 추측되나 아직 묘를 못 찾았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의 묘가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려 비밀에 붙인 것으로 보여 진다.   병마용 사령부 모습이다. 네 마리의 말이 무언가를 끌려하고 그 주위에 병사들이 서 있다. 손 동작으로 보아 창을 들고 서 있는 듯하다.  병마용 동상 등을 가까이에서 막상 보니 사진에서 본 것과 큰 차이는 없었다. 크기는 하였으나 위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최초 발굴 당시엔 다양하고 화려한 색깔이었으나 발굴 후 공기 등이 유입되어 산화되어 지금은 색이 바래 흑백으로 밖에 볼 수 없다고 한다. 어쨌든 3000여년 전의 진시황 시대 문화를 추측할 수 있어서 놀라웠다. 안타깝게도 진시황 사후 진나라는 15년 만에 멸망한 것을 보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뿐이다.인생 자체가 불확실하고 허망한 것임을 황제라도 달리 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자신의 왕조가 영원할 것으로 믿고 있었을 진시황이, 죽어 하늘에서 진나라가 폐망한 것을 목도했을 때 얼마나 허망했을까?   병마용갱에 있는 도용들은 각각의 도용마다 표정과 동작과 의상이 모두 달랐다고 한다. 심지어 채색까지 되어 있었는데 발굴 과정에서 외부 공기와 접촉하는 순간 채색이 다 날아가 버렸다. 점심을 먹고 시안의 성곽으로 향하였다. 비교적 성곽이 잘 보존돼 있었는데, 이 성곽이 당나라 때 건축된 것이 아니라 명나라 때 건축된 것이라고 하여 다시 한 번 놀랐다. 여러 성문 중 동문에 해당되는 곳으로 가니 성문과 성이 너무 멋지고 나아가 그 보존상태가 신기할 정도로 좋았다. 시안 시내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현대식 건물과 성곽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성문과 성이 너무 멋지고 현대식 건물과 성곽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규모도 상당히 커서 지금 현대의 대포로 쏴도 성곽이 쉽게 허물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게 보였다. 특히 성 밖 물로 된 해저드(해자)와 성 사이에 약간의 간격을 두어서 해자를 넘어 온 적군을 화살로 저격할 수 있게끔 잘 설계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곽 너비가 20~30m 이상이어서 군인들이 순찰하고 장비를 준비하는 데 편리하고 효율적이게 설계되어 있었다. 왠지 시안이 너무 멋진 역사이자 문화 도시이고, 가능하면 한번 살아 보고 싶은 아름다운 이국도시로 와 닿았다. 잠시 조용히 산책을 즐기다보니 3000여 년 전의 삶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친근하면서도 무한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시안 성문을 통해 버스가 이동해 놀라움을 주었다. 남은 자투리 시간에 자유시장을 잠시 들렀다. 대다수의 상품이 가짜라는 말에 좀 안타깝고 아쉬웠다. 그렇지만 이런 시장 역시 시안의 한 요소라는 생각에 가이드와 같이 시장을 한번 걸어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막상 시장에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도 지저분하고 정돈이 안 돼 실망스러웠다. 특히 곳곳에 쓰레기통이 널려 있었다. 조만간 정비되어 좀 더 매력적인 시장으로 다가올 날을 기대해 보고 싶었다.  

김주덕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서는 봄부터 소쩍새는 피를 토하도록 울어야 한다.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피와 눈물, 세월을 필요로 한다.   사랑의 탑을 쌓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랑을 어루만져서 깨지지 않도록 정성을 들여 높은 탑을 세우는 것은 상상만 해도 힘이 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사랑은 오직 두 사람만의 의지와 노력으로 쌓아야 하는 것이니까 더욱 힘이 든다.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두 사람이, 그것도 오직 같은 두 사람만이 똑 같은 강도로 해야 사랑은 이루어진다.   하지만 사랑은 아프다. 언제나 내면에 아픔을 품고 있다. 그래야 사랑이다. 아프지 않고 쉽게 얻어지는 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단순한 유희에 불과하며 육체적 정신적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 아픈 이유는 정말 자신에게 맞는 짝을 찾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애써서 찾고, 상대의 마음을 자신의 가슴속에 품기 위해서 잉태와 해산의 고통을 겪는 것이다.   ‘세상이 내게 미쳤다 말해도/ 멈출 수가 없네요 난 안돼요/ 사랑이 내게 거두라 말해도/ 그댈 단념할 수 없어요/ 사는 동안 처음이었죠/ 마지막이겠죠’(민경훈, 아프니까 사랑이죠, 가사 중에서)   그러나 그토록 애써 쌓은 탑이 무너지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와르르 하는 소리 한번으로 끝이 난다. 그것이 무너짐의 법칙이다. 모든 존재는 무너질 때 소리를 낸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나라가 망하는 것도, 재벌기업이 부도나는 것도, 공직자가 뇌물로 끝장이 나는 것도 한 순간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몇십년 살던 부부도 도장 한번 찍으면 이혼이다. 남이 된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최영미, 선운사에서, 시의 일부 발췌 부분)

이상근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에서 나왔다. 1314년(고려 충숙왕 1)에 정한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백두대간의 줄기인 속리산이 북으로 솟아있고, 남에는 낙동강 줄기가 휘돌고 있다. 산과 물, 들이 고루 펼쳐지니 자연, 인심이 넉넉하다. 옛 선인들은 넉넉한 상주에도 근심이 있었다.    근심의 첫째는 지네 때문이다.   상주여자고등학교 서쪽에는 율수(栗藪)라는 제방이 있다. 이곳에 조공재(趙公堤)라는 비명(碑銘)이 있는데 내용인 즉, 선인들은 노음산에서 시작하여 북천에 이르는 형상이 지네를 닮아 이를 오공입지형(蜈蚣立地形)이라 하였다. 지네 때문에 소년의 죽음이 많다고 여긴 선인들은 액을 막기 위해 지네가 싫어하는 밤나무를 심었다. 1873년(고종 10년)에 세워진 조공제 비문에 따르면, 1871년 상주목사로 부임한 조병로(趙秉老)는 밤나무 숲에 둑을 다시 쌓고 마을 이름을 율수리 또는 밤숲개로 하였다하니 풍수설의 절실함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근심은 배 모양 형세이다.   상주 시내 한복판에 옛 동방사의 터가 있다. 대부분 산 속에 절을 짓는데 특별하게도 고을의 한 가운데 절을 지었다. 그 이유를 설명한 기록이 고려 우왕 때 자초스님이 창건한 동해사(東海寺)기록에 있다. 1881년 제작된 에 “상주 들녘이 떠다니는 배의 형국과 같아, 배를 묶어 두기 위해 병성천과 북천의 사이에 가짜 산(假山)을 만들어 동방사를 세웠다.”라고 한다. 상주 시내의 지형은 북동쪽에서 흐른 물과 남동쪽으로 흐르는 물이 복룡동에서 합수하여 병성천으로 이어지고, 그 가운데 충적평야가 자리하고 있는 형세이니 선인들은 동방사로 하여금 상주를 지키게 한 것이다.     비보사상은 신라 도선국사가 주창하여 고려에 와서 크게 전파되었다. 비보사찰인 동방사는 신라 때 창건하여 융성하였으니 그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다. 상주문화 제22호에는 “고려의 문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상주 기행시가 있다. 1232년 8월 상주 동방사에서 묵으면서 박군문우와 최수재가 술을 준비해 찾아왔기에 한 수를 구점(口占)하였다”는 것이다.     동방사의 기억들    신라 말 창건하여 융성하였던 동방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복원의 기회를 놓쳐 옛터는 농토가 되었다. 하지만 기억의 흔적들은 곳곳에 있다. 복룡동 207-2번지에 있는 당간지주는 천년의 시간을 말해준다.     왕산공원을 지키는 석불은 동방사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동글한 얼굴, 내려 뜬 눈과 묵직한 콧방울, 도톰한 입술은 마치 만화 속의 캐릭터 닮았다.   동방사 복원에 힘쓰는 동조스님(상락사 주지)은 "비로자나불의 모습은 당시 민초들의 간절한 염원을 간직하고 있어요. 동방사가 비보사찰로 물의 피해를 막기 위해 창건, 석불을 조성했다는 것은 떠내려가지 말고 영원히 자리를 지켜달라는 마음이죠."   허나 지금은 자리를 떠나 왕산공원 가장 높은 곳에서 상주를 바라보고 있다.     동방사터에서 농사하는 이는 "지금도 기와조각, 그릇 조각이 나온다" 하니 한번도 안했다는 발굴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 상주문화 제22호에는 당간지주가 있는 주변의 농지에서 '조선시대 자기, 와편과 함께 신라시대 단선문, 고려시대 어골문 와편이 채집되는 것으로 보아, 신라말이나 고려초기 사원이 위치하였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라 설명이다.     파리까지 간 철불관음상    천수천안, 그야말로 천개의 손과 눈이다. 만 세상을 살펴보고 구원하겠다는 소원이 담겨있다. 국내 몇 곳에 있으나, 동방사 관음보살처럼 오래되고 훌륭할 수 있을까. 몇 차례 아시아유물을 모아 놓은 기메박물관을 탐방한 적이 있다. 한국관 전시실 복판에서 서양인의 눈요기로 충분히 시선을 끌만한 자태이다.   1882년 조선 기행에 나선 샤를 바라가 수집하여 기메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바라는 조선여행이 인상적이었는지 이라는 책을 썼다. 조선기행에서 샤를 바라는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출발, 일본과 중국을 거쳐 인천에 도착, 한양을 경유하여 문경새재를 넘어 낙동강변을 따라 대구, 부산에 이르기까지 기행하였다한다. 당시 상주는 규모가 큰 고을로 이방인은 상주에 들러 천수천안관음상을 수집한 것으로 추측된다.    천개의 눈과 손, 관음보살이 동방사 출토품이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불행하게도 동방사사적기나 향토사 등에 관련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샤를 바라가 남긴 기록에 의해 확인될 뿐이다. 그는 신기하게 생긴 불상을 보며 동방사의 옛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이야기의 동방사를 기억하기 위해 이라고 기록을 남겼을 것이라 추정된다.     상주 지킴이, 동방사   이를 복원하고 흩어진 성보를 봉안하는 일은 상주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고, 이야기를 완성하는 일이다. "누가 이 일을 할 것인가?" 산소 벌초 객들이 몰려있는 도로에서 내내 드는 생각이다. 동방사 복원에 힘쓰는 동조스님(상락사 주지)과 김종하 상주법우회 고문  

김승열

아시아 6개국이 참여한 공증인협회 국제 세미나 모습이다. 각국을 대표하는 공증인들의 발표와 열정은 뜨거웠다 오늘은 국제 공증인 세미나가 빡빡한 일정으로 진행됐다.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 20분까지 약간의 휴식시간을 제외하고는 일사천리였다. 중국 측의 환영사는 중국 법무부 차관과 시안의 시장 격인 인사가 했는데, 다소 권위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동시통역이 이뤄져 다행이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중국이 의외로 공증제도에 국가적 관심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이 G2로 부상하고는 있으나 사회전반에 아직 후진성을 면치 못하여 국제적으로 그 신뢰성을 회복하는 데에 공증제도가 기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2005년 무렵 공증인법이 도입돼 공증인 수가 1만3000명에 불과하지만 그 사회적 역할이 상당하게 보였다.   반면 중국에서 활동 중인 변호사는 30만 명 정도여서 공증인이 변호사보다 상대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높아 보였다.(물론 필자의 생각이다.) 가장 수입이 많은 공증인이 연 100만 위안 정도를 번다면, 변호사는 3000만~4000만 위안 정도여서 차이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변호사의 경우 업무강도가 세다. 그래서 업무강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인 공증인을 선호하기도 하여 공증인이 나름 인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나라의 사법시험과 같은 시험에 합격하면 자신의 선택에 따라 변호사가 될 수 있고 아니면 공증인이 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변호사를 선호하나 여성의 경우 수입은 낮지만 상대적으로 업무강도가 낮은 공증인을 선호한다고 한다.   국제공증인협회의 회장이 스페인인이어서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본격적인 세미나 세션으로 진행됐다. 세미나는 일본, 인도네시아, 중국, 한국, 몽고, 그리고 베트남의 순으로 각국의 공증제도를 소개했는데 독일과 프랑스의 공증인도 손님으로 참석, 자국의 제도를 설명했다. 최근의 정보통신 등 신기술로 업그레이드된 전자 공증제에 대한 논의가 주된 관심사였다.   일본의 공증인은 판사나 검사 중 30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이만이 대략 59세 정도에 공증인으로 지원을 한다. 60세에 공직에서 퇴직을 하고 바로 공증인으로 임명돼 70세까지 공증인을 하는 게 전통적인 제도로 정착됐다. 따라서 판사나 검사 중에서 30년의 경력이 없는 사람은 공증인이 될 수 없다고 하니 놀랍게 느껴졌다. 일본의 공증인 수는 현재 500명 정도. 이중에서 여자 공증인은 5명밖에 안 된다고 했다. 이번 행사에 여성 공증인이 한 분이 참석했는데 검사로 30년간 재직하고 공증인이 됐다. 전관예우의 폐해를 방지하는 등 공증인 임명제가 나름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는 법학 석사를 마치고 일정한 시험과 인턴 과정을 거쳐 공증인으로 활동할 수 있다. 의외로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단다. 이번에 발표를 한 여성 공증인은 영어구사력이 아주 뛰어나 놀라웠다. 인도네시아가 국제경쟁력 제고와 글로벌 시장에 깊은 관심이 있어 보였다. 중국의 경우는 사법 시험의 합격자 중에서 25세 이상이고, 공증인 직업을 선택해 공증인 사무실에서 인턴을 거쳐 공증인이 된다. 변호사와 겸업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몽고의 경우는 흥미로웠다. 이번 국제 행사에 참여한 모든 공증인이 여성이었다. 이유를 물으니 “몽고에는 300명 정도의 공증인이 있는데 여성 공증인이 절대적으로 많다”는 것이었다. 다만 이번 행사에 남성 공증인 한 분이 참석키로 했지만 부득이 사정상 못 왔다고 했다. 변호사는 5000명 정도다. 베트남의 경우는 다소 특이하였다. 법학사 자격을 갖추고 공증인 사무실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5년간의 수습 공증인 과정을 거쳐야 공증인이 될 수 있다. 현재 베트남에서는 2000명 정도의 공증인이 있다. 조만간 그 수가 8000명으로 확대될 예정이라고 한다. 베트남의 역동성이 그대로 느껴졌다. 아직 정식 회원국은 아니지만 업저버 자격으로 참석한 캄보디아의 경우 변호사가 2000명 정도 되는데 공증인은 겨우 61명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발전 잠재력이 많은 캄보디아의 활기찬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 자못 기대가 됐다.   한국의 전자공증제도에 대해 발표하고 있는 필자. 필자는 한국의 전자공증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2010년에 전자공증이 도입돼 전자적으로 공증접수가 가능했지만 의뢰인은 직접 공증사무실에 출석해야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런데 지난 6월부터 화상 공증제가 도입돼 공증사무실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 아직 도입 초기지만 시장반응이 나쁘지 않아 미래가 밝다. 이번에 발표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화상공증을 하는 국가는 거의 없어 보였다. 이에 의기양양해져서 “과거 실크로드의 출발지인 시안에서 디지털 시대를 맞아 공증의 새로운 세계를 여는 전자 화상 공증제도를 발표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참석한 아시아 공증인들이 한국을 부러워하는 듯 느껴졌다. 디지털 시대를 앞서가고 있는 한국의 발전상을 자신있게 소개를 하니 필자 개인적으로도 깊은 영광이고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유럽 선진국의 공증인 제도도 흥미롭게 들을 수 있었다. 독일의 경우 전자공증의 도입에 좀 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전자 공증제도의 신뢰성에 의심의 눈초리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필자가 “지금은 온라인 세상이 더 현실처럼 가깝게 와 닿는 시대다. 새로운 전자 공증시대에 진입한 것이 무엇보다 의미가 새롭다. 조만간 화상 공증제도의 업그레이드한 소식을 전하고 싶다”고 말하자 격려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제 한국은 디지털 시대를 맞아 국제행사에서도 다른 나라를 선도하는 지위에 있다는 자부심을 느꼈다. 중국이라는 다소 권위적인 국가에서의 행사답게 생각보다 세미나 진행이 딱딱하게 보였으나 각국을 대표하는 공증인들의 발표와 열정은 뜨거웠다. 생각보다 타이트하고 열정적인 세미나 일정을 마치고 나니 온 몸이 거의 탈진한 상태였다.   시안의 전통예술 공연은 놀랍도록 화려했다. 마치 당나라 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듯 느껴졌다. 세미나를 마치고 중국 공증인협회에 준비한 시안의 전통식 저녁을 먹기 위해 버스에 오르니 목적지까지 1시간 가까이  걸렸다. 시안의 퇴근시간대 교통혼잡이 생각보다 심각할 정도였다. 당나라 때 수도의 위상에 어울리게 상당히 큰 도시라는 것을 교통체증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느꼈다고 할까. 도시 인구도 900만 명 정도여서 놀라웠고 도심 건물 역시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당나라 시대의 화려하고 현란한 궁중 문화를 그대로 재연하는 듯 아름다운 춤과 음악이 필자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시안의 전통음식은 의외로 입맛에 맞아 필자의 원기를 북돋워주었다. 또 중국 전통 비파소리를 들으며 식사를 하니 이국땅의 정취가 새롭게 느껴졌다. 이어 자리를 옮겨 당나라 시대의 전통 춤과 음악으로 구성된 공연을 보여준다고 해 무대로 향했다. 공연은 상상이상이었다. 당나라 시대의 화려하고 현란한 궁중 문화를 그대로 재연하는 듯 아름다운 춤과 음악이 필자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진시황 때부터 당나라 현종 때에 이르는 화려한 문화가 고스란히 필자의 가슴에 와 닿았다. 중국문화의 화려함이 이 정도였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중국문화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느끼게 해 준 무대였다. 마치 당나라 시대로 시간여행을 다녀온 느낌이었다. 다시 한 번 소중한 시간여행을 하게 해 준 중국 공증인협회 관계자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

엄광용

온달(溫達)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本紀)에는 보이지 않고 열전(列傳) 제5권에 나온다. 김부식(金富軾)이 온달을 본기가 아닌 열전에서 다룬 것은, 이야기 자체가 설화적으로 처리되어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역사에서 제외시킨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25대 평원왕 때 장군인 온달은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이라는 설화로 유명하다.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평원왕(平原王)을 ‘평강왕(平岡王)’으로 쓰고 있어 그 딸을 ‘평강공주’라고 불렀다.    《삼국사기》 열전 5권 온달편에 나오는 평강공주 이야기의 대략은 이러하다.      평강과 온달    평강공주가 어렸던 시절, 대왕은 울기를 잘하는 딸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 사대부의 아내가 될 수는 없겠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    그러나 공주의 나이 이팔(二八), 즉 16세가 되었을 때 왕은 상부(上部·東部) 고씨(高氏)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했다. 그러자 공주가 말했다.    “폐하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된다 하셨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저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려 하십니까? 필부(匹夫)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거늘 하물며 지존께서 그러하시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왕자(王者)는 희롱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 폐하의 명은 잘못된 것이오니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나이다.”    이에 평강왕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네가 나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정말 내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함께 있을 수 있으랴? 이제부터 너는 갈 데로 가는 것이 좋겠다.”    평강왕은 공주를 궁궐에서 내쫓았다.     이때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뚝에 차고 궁궐을 나와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온달의 집을 찾아갔다. 온달의 집에는 눈이 먼 그의 노모가 있었는데, 공주는 가까이 가서 절을 하고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노모가 대답했다.    “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추하여 귀인(貴人)이 가까이할 인물이 못 되오. 지금 그대의 몸에서는 그윽한 향기가 나고,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풀솜 같은즉, 천하의 귀인임에 틀림이 없소.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찾아온 거요?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산에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 오래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공주는 그 집에서 나와 산 밑에 가서 온달을 기다렸다.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 공주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그러자 온달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는 어린 여자가 행동할 바가 아니다. 반드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이다. 내 곁으로 가까이 오지 말라.”    온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가 버렸다.    공주는 온달의 집 사립문 아래서 하룻밤을 지새우고, 이튿날 다시 모자에게 자신이 찾아오게 된 사연을 간곡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온달은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때 온달의 어머니가 말했다.    “내 자식은 지극히 추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의 거처할 곳이 못 되오.”    공주가 그 말을 듣고 대답했다.    “옛사람의 말에, 한 말 곡식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음만 같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한 후에라야 함께 지낼 수 있겠습니까?”    공주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공주와 온달은 결혼했다. 그리고 공주는 자신이 궁궐에서 가져온 금팔찌를 팔아 밭을 사고 주택과 노비와 우마와 기물 등을 사서 온달과 함께 살았다.      ‘얼굴이 파리하다’    이것은 궁궐에서 나온 평강공주가 온달과 결혼하기까지의 이야기다.    당시 평강공주는 궁궐에서 추방당한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스스로 걸어 나온 것이다. 평강왕이 공주와 결혼시키려고 한 상부의 고씨는 당시 고구려의 최고 관료 집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공주가 왕의 명을 어기고 온달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하자 왕은 화가 나서 호통을 쳤던 것이다.    이때 이미 공주는 온달을 흠모하고 있었으며, 중매혼이 아닌 자유혼을 원한 개방적인 여성이었다. 아버지 평강왕의 호통에도 굴하지 않고, 공주는 자신이 평소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사람을 찾아가서 당당하게 사랑을 고백하고 온달의 아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 온달편에서는 공주가 평강왕의 말을 듣지 않아 궁궐에서 쫓겨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설화는 평강왕과 공주의 갈등을 감추기 위해 똑똑한 온달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했다.    《삼국사기》 열전 기록은 이야기 초입 부분에서 온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온달은 얼굴이 파리(龍鐘)하여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쾌활했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떨어진 옷과 해어진 신으로 시정간(市井間)에 왕래하니, 그때 사람들이 지목하기를 바보 온달이라 하였다.〉    이 기록으로만 볼 때 온달은 바보다. 그러나 《삼국사기》 열전 기록 어디를 봐도 온달의 행동에서 바보 같은 구석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의 행동이나 언행을 볼 때 보통 사람 이상으로 너무 똑똑하여 의문이 갈 정도다. 얼굴이 파리하여 우습게 생기고, 집이 가난하여 밥을 빌어다 먹었다는 것은 외형이나 행동에 대한 묘사이지 ‘바보’라서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더구나 마음씨가 착하고 어머니를 봉양했다는 것은 ‘효자’의 행동이지 바보가 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다.    과연 평강공주가 사랑한 온달은 바보였을까. 《삼국사기》 열전 기록에 보면 온달의 용모에 대해 ‘얼굴이 파리(龍鐘)하여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쾌활했다’고 나온다. 한자로 ‘용종(龍鐘)’의 의미는 ‘늙고 병든 모양’을 뜻한다. 얼굴이 하얗고 주름이 많은 병자를 ‘파리하다’고 표현하는데, 한창 젊은 사람이 그런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 이는 온달이 당시 고구려 사람의 모습과 다르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고대 역사 기록에 나온 온씨(溫氏)는 온달이 처음이다. 그 이후 고구려 보장왕 때의 장수 온사문(溫沙門), 신라 진덕여왕 때 김춘추가 당나라 사신으로 갔다 귀국할 때 종사관이었던 온군해(溫君解)란 인물이 역사 기록에 보인다. 온군해는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만난 서역의 소그드인으로 종사관이 되었다. 신라로 입국할 때 해상에서 고구려군의 추격을 받게 되자, 온군해는 김춘추의 옷으로 갈아입고 적을 따돌리다가 끝내 붙잡혀 죽은 충신이었다.      ‘온달’은 소그드에서 온 귀화인?  원성왕릉으로 알려진 경주 괘릉의 무인상. 눈이 깊고 코가 우뚝한 소그드인의 모습이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온씨는 소그드인일 가능성이 크다. 소그드인 중에는 당나라 현종 때 난을 일으킨 안녹산(安祿山)의 조상인 안씨(安氏), 소그드 왕족 출신인 온씨(溫氏)가 대표적인 성씨다. 당시 소그드인들이 살던 곳은 지금의 사마르칸트다.    바로 고구려의 평강공주가 사랑한 온달은 사마르칸트에서 온 소그드인일 가능성이 크다. 소그드인은 심목고비형(深目高鼻形), 즉 눈이 깊고 코가 우뚝한 전형적인 서양인 모습이다. 고구려 각저총(角塚)의 벽화에는 바로 심목고비형 소그드인과 고구려인의 씨름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실크로드 전문학자이자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인 정수일은 경주 괘릉(掛陵·원성왕릉으로 추정)의 무인석상(武人石像)이나 처용(處容)의 탈 등 심목고비형 인물들의 형상을 소그드인의 전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 평강왕 때의 온달은 소그드에서 온 귀화인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고구려 시대에는 외형이 다르다는 것만 보고도 토착인들의 배타적인 성향이 강해 천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온달은 귀화인이라 말조차 더듬거리니 주위에서 ‘바보’ 소리를 듣기에 딱 알맞았던 것이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매년 3월 3일 산에 가서 사냥대회를 열고, 그날 잡은 산돼지·사슴 등으로 하늘과 산천신(山川神)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날은 왕까지 친히 사냥에 나섰으며, 여러 신하들과 5부의 병사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그리고 5부의 수장들은 권력을 가진 귀족들이다.     《삼국사기》 열전 기록에는 온달도 그 사냥대회에 참여했다고 나온다. 이 기록으로 볼 때 어쩌면 온달은 5부 소속의 병사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이 사냥대회에서 말을 잘 타고 사냥감을 많이 포획하여 누구보다 눈에 띄었다. 사냥대회가 끝나고 나서 ‘왕이 친히 불러 이름을 물어보고 놀라며 또 이상히 여겼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때 분명 평강공주도 왕 옆에 있었다면, 그 용맹스런 모습의 온달을 보고 첫눈에 반했을 것이다.    신화 해석은 앞뒤를 잘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힘 있는 인물의 입장을 생각하다 보니 사실이 왜곡되어 서술되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앞뒤가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열전 기록에서는 평강공주가 궁궐에서 나와 온달과 살면서, 금팔찌를 팔아 말을 사 오게 했다고 한다. 그때 공주는 온달에게 시장 사람이 파는 말을 사지 말고 꼭 국마(國馬)를 고르되 병들고 파리해서 내다파는 것을 사 오라고 일렀다. 그리고 공주는 이 말을 잘 길러 살을 찌우고 건강하게 키운 후 온달에게 주었다. 온달은 그 말을 타고 나가 사냥대회에서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先後를 바꾸어 보면…    여기서 잠시 이야기의 앞뒤를 바꾸어 보면, 온달이 사냥대회에 나가기 전까지 평강공주는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온달은 5부 소속의 하찮은 병사였는데, 남달리 무술이 뛰어나 장군들보다 더 많은 사냥감을 포획하여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때 평강공주가 왕 곁에서 지켜보고 온달을 은근히 사모하기 시작했다. 사냥대회에서 대왕은 온달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고 했는데, 아마도 그의 심목고비형 얼굴과 어눌한 말투를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때부터 대왕은 온달을 ‘바보’로 인식하고 딸이 울 때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놀려댔을 것이다.     그리고 딸이 컸을 때 평강왕은 공주를 상부(上部)의 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 상부는 5부의 하나로, 고씨는 당시 세도가 있는 고관의 자제였을 것이다. 고구려의 왕들이 건국 초기부터 5부 출신의 왕후를 택하였던 것은 왕권과 신권이 결탁한 정략결혼이었다. 이처럼 왕실 결혼은 대부분 정략결혼이어서, 공주의 배우자 역시 세도 있는 고관의 자제들 가운데서 택할 수밖에 없었다. 왕권이 약할 때는 권력을 쥔 고관들의 압력에 못 이겨 억지로 그의 자제와 공주를 결혼시킬 때도 있었다. 왕의 사위에게는 부마도위(駙馬都尉)의 벼슬이 내려지므로 그만큼 그 집안의 권위가 올라가는 일이다.    아무튼 평강왕이 공주를 상부의 고씨에게 시집보내려고 한 것도 그러한 맥락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공주가 반대를 하고 나서며 당당하게도 자신은 온달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이다. 진노한 평강왕은 공주를 궁궐에서 내쫓았고, 그 길로 그녀는 자신이 평소 남달리 흠모하던 온달을 찾아가 사랑을 고백하고 같이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신화에서는 ‘온달’을 바보로 만들었을까? 그것은 왕실의 자존심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공주가 평민과 결혼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평강공주는 그녀 스스로 평민 남편인 ‘온달’을 택했다. 어쩌면 평강왕이 공주를 궁궐에서 쫓아낸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궁궐을 나와 ‘사랑하는 남자’ 온달을 찾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공주가 궁궐에서 도망쳐 평민과 결혼했다 하더라도, 당시 평강왕으로서는 딸을 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을 키워 장군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로 둔갑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반드시 온달이 ‘바보’여야만 평강공주의 지혜로운 선택이 돋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고구려 왕실의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死生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돌아갑시다”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 온달이 산성을 쌓고 신라군과 싸운 곳이라고 전해진다. 사진=조선일보DB  무술에 뛰어났던 온달이지만, 평강공주와 결혼하고도 그는 한동안 대왕의 사위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신분이 미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보내 고구려 변방인 요동을 쳤다. 이때 평강왕(평원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원정을 나가 배산(拜山) 앞 들판에서 적군을 맞아 싸웠는데, 온달이 선봉장으로 출전했다.    평강왕이 온달을 선봉장으로 내보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온달의 무술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안 대왕은 남들도 다 알아줄 정도로 큰 공을 세워 떳떳하게 사위로 인정해 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요컨대 다른 고위 관료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때 온달은 선봉장으로 나가 적군 수십 명을 눈 깜짝할 사이에 베어 넘겼으며, 그 기세를 타고 그가 거느린 고구려 선봉 부대가 적의 예봉을 꺾어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완전히 적군을 무찌르고 나서 공을 논할 때, 장수들이 모두 온달을 극찬해 마지않았다. 이때 평강왕은 기쁜 나머지 온달을 불러 장수들 앞에 세우고 말하였다.    “이 사람이 나의 사위다!”    이것은 평강왕이 온달을 사위로 받아들이는 공식 선언이었다.    이때 평강왕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위 온달에게 작위를 주어 대형(大兄)으로 삼았다. ‘대형’은 5품쯤 되는 벼슬로, 온달은 이때부터 대왕의 총애를 받았다.    평강왕이 죽고 양강왕(陽岡王)이 즉위하였다. 《삼국사기》 열전편에는 ‘양강왕’이라고 나오는데, 평강왕이 곧 ‘평원왕’이므로, 양강왕은 평원왕의 아들 영양왕(陽王)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구려 제26대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원통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리석은 신을 불초하다 여기지 마시고, 만약 군사를 주시면 한번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영양왕은 이를 허락하고 온달에게 군사를 주었다. 온달은 군사를 정비해 신라를 치러 갈 때 다시 대왕에게 말했다.    “계립현(谿立峴)과 죽령(竹嶺) 서쪽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신은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온달이 말한 계립현은 조령(鳥嶺), 즉 지금의 ‘새재’를 이르는 말이다. 이때 온달은 단양 인근에 산성을 쌓아 신라군과 대적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양의 ‘온달산성’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비장한 각오를 하고 출정한 온달은 신라 군사들과 아단성(阿旦城)에서 맞서 싸우다 적의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아단성’은 지금의 아차산성을 이르는 말이다. 이설이 많지만, 아단성에서 전사했다면 계립현에서 신라군에게 밀려 후퇴를 하던 중 지금의 아차산성에서 전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삼국사기》는 다시 신화를 하나 만들어 냈다. 온달이 죽어 장사를 지내려고 하는데 관이 움직이지를 않자, 평강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사생(死生)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갑시다.”    그러자 온달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이 땅에서 떨어져 운구하여 마침내 장사를 치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온달은 ‘바보’가 아닌 불세출의 ‘명장’    한데 일제 강점기에 한학자 김종한(金宗漢)이 저술한 한문 역사서 《조선사략(朝鮮史略)》에 보면 평강공주가 남편 온달의 관을 붙들고 울다 기절했는데,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죽어 온달의 묘 옆에 장사 지냈다고 나온다. 《삼국사기》에 비하면 저술 연대가 너무 후대(後代)여서 신빙성이 덜하긴 하지만, 그래서일까 더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다만 평강공주가 온달과 같이 죽었다는 대목은 극적 효과를 노리기 위해 지어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튼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이야기는 신화로 남아 있다. 그러나 엄연히 온달은 현존했던 인물이고, 고구려의 훌륭한 장수였다. 신화적인 요소만 제거하고 나면 곧바로 역사로 편입시킬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따라서 온달을 역사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신화로 만들 때 그에게 붙여준 ‘바보’라는 오명을 벗겨 주어야 마땅하다.⊙

김승열

중국 시안의 야경. 필자가 올해 대한공증인협회의 이사 겸 국제위원회의 부위원장직을 맡게 돼 지난 9월초 중국 시안(西安)을 다녀왔다. 아시아 6개국이 참여하는 공증인제도 세미나가 시안에서 열렸는데 세미나 발표를 권유받아 고민하던 중 새로운 도전의 하나로 즐거운 마음으로 참가를 결심했다.   필자에게 주어진 역할은 ‘디지털 등 신기술에 따른 전자공증’에 대한 소개 및 ‘공증인의 역할 증대’에 관한 주제 발표였다. 무엇보다도 과거 실크 로드의 출발지였던 시안이라는 도시가 주는 신선함에 이끌려 시안 방문도 할 겸 그리고 다소 등한시한 동남아시아 국가의 법률전문가 그룹과의 만남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시안국제공항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증인은 법무법인 중에서 인가를 받아서 활동을 하다가 최근에는 임명 공증인제도가 생겨 변호사 중에서 공증업무 만을 전담하는 사람으로 대체되고 있다. 즉, 변호사 업무와 공증인 업무의 겸업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정착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자공증제도가 2010년에 도입되어 전자문서형태로 공증의뢰가 가능하다. 다만 공증을 위해선 의뢰인이 공증사무실에 직접 방문을 해야한다. 그런데 지난 6월부터 화상 공증제도를 도입했다. 의뢰인이 공증사무실에 직접 방문하지 않더라도 화상회의만으로 의뢰인의 신분을 확인해 공증이 가능하도록 법 개정이 이뤄진 것이다. 의외로 시장반응이 나쁘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다. 놀라운 점은 화상 공증제도가 거의 세계최초라는 점이다. 이는 법률서비스의 디지털화라는 측면에서 역사적인 쾌거가 아닐까. 국제적인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안으로 가는 국적기를 타기 위하여 이른 아침부터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였다. 날씨는 어느덧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었다. 제2국제청사는 신청사답게 넓고 포근함과 상당한 여유를 제공해 주었다. 시안까지 대략 3시간 15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역사 도시로의 여정이 필자를 더없이 들뜨고 설레게 만들었다.   시안은 아시다시피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여 건국한 진나라의 수도이고 과거 나라시대의 도읍지여서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큰 도시다. 지금 중국에서는 “Belt and Road Initiative”라는 기치 아래 정부주도로 과거 실크로드의 재건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 재건의 한 축으로 시안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또한 역사적으로는 진시황의 병마용이 발견되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아직도 진시황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아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었다. 시안은 무엇보다도 과거 당나라 시대에 도읍지다. 그 왕성하고 화려한 도시 분위기가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기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묘한 매력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당나라 시대 현종의 애첩으로 그 아름다운 미모로 유명한 양귀비가 목욕을 즐겼다는 계곡 등도 있다고 한다.   곧이어 시안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비교적 잘 꾸며지고 나름 잘 정돈되어 있었다. 필자가 묵을 호텔은 차로 5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일행과 택시를 타고 가기로 하였는데 공식 택시(파란 택시)가 아니어서 다소 걱정이 되어 택시로 가는 도중에 구글 맵으로 제대로 호텔로 향하고 있는지 체크할 수 있어 안심이 되었다. 들은 바로는 비공식 택시를 탔다가 봉변을 당했다는 소문이 있어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두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호텔에 도착하니 5성급 호텔에 어울리게 규모가 크고 아주 멋진 호텔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규모에 압도당하였다.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종업원의 서비스 등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는 다소 아쉬움이 있었다. 무엇보다 영어구사력이 기대에 못 미쳤다.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가니 규모가 크고 잘 꾸며져 있어 그동안의 긴장감과 여독을 충분히 가라앉혀주는 것 같았다. 시간이 조금 남아 수영장에 가보니 지하 1층에 있었다. 가볍게 물위에서 거닐다가 만찬장소로 향하였다.   필자와 자리를 같이한 중국 공증인협회의 한 인사. 중국 공증인협회는 각 국가별로 전담 통역요원을 배치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깊은 배려에 일단 깊은 감사함을 표시하고 전체 만찬을 하였는데 필자 옆에는 상하이에서 공증인을 하는 중국 공증인과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그는 15년간 변호사를 하다가 공증인으로 변신, 나름대로 만족해하고 있었다. 전문적인 업무를 마치면 자신만의 여가, 예컨대 마라톤과 등산, 산책 등을 즐기며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만찬의 음식은 5성급호텔의 음식이어서 고급스러웠지만 중국특유의 향이 있는 전통음식도 있어 충분히 즐기는 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놀라운 점은 서빙하는 호텔직원이 상당히 많았으나 체계적인 서빙이 이뤄지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직원들의 경우 영어를 못하는 직원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열심히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려는 태도가 그대로 행동에 담겨 약간은 놀랍게 느껴졌다.   중국에서 공증인은 공무원은 아니지만 공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직업이어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중국 공증인이 풍기는 분위기는 공무원에 준하는 엄중함이 느껴졌다. 만찬을 마치고 필자 일행은 주변을 한번 산책해보고자 하였다. 호텔 주변에 강이 있어서 야경이 멋지게 다가왔다. 강 주변에 달리 각종 음식점 등이 없어서 깨끗하게 보여 좋았으나 아쉽게도 강 주변에 모노레일 등이 깔려 있어서 강가의 멋진 풍광을 반감시키는 부분이 조금 아쉬웠다.   시안의 야경 모습이다. 시안의 야경은 상당히 화려하고 멋지고 조용하면서도 아름다움 그 자체로 다가왔다. 조금 더 걸어가니 시안의 야경을 즐길 수 있는 야외식당 등이 있었으나 아쉽게도 시간이 밤 9시가 넘어 문을 닫고 있었다. 우리나라였으면 야경을 즐기면서 술도 한잔하기에 딱 좋은 시간인데 아쉬웠다. 어쨌든 필자에게 느껴지는 시안의 야경은 상당히 화려하고 멋지고 조용하면서도 아름다움 그 자체로 다가왔다. 현대의 타이트하고 긴장된 모습의 전경이 아니라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이국적인 도시 같았다. 호텔로 돌아와 일행 모두가 가볍게 맥주를 한잔하면서 중국 시안에서의 첫날밤을 마무리했다. 묘한 매력의 역사도시 시안에서 과거의 문화와 그 시대의 사람들의 숨결마저 느껴지는 것 같아 또다른 추억여행의 시작에 알 수 없는 기대와 설렘으로 내일을 기약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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