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헌

최근 조선일보를 비롯한 주요 일간지에는 6월 27일 열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분과 회의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과 4.19혁명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 신청 대상에 선정됐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기사 중에는 위 문건을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기록물로 언급하며 아래와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사발을 엎어 그린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의 명단을 빙 둘러 적은 사발통문(沙鉢通文)과 농민군 해산을 권고하는 흥선대원군 효유문(興宣大院君 曉諭文) 등이 대표적이다. 동학자료들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이 추구한 평등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조선일보, 2017. 6. 28)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에 말한 사발통문은 사발통문이기 전에 통문조차 될 수 없는 잡기로 분류해야 할 문건이다. 사발통문은 통문 중에서도 주모자를 숨기기 위해 참여자의 명단을 사발처럼 둥근 원을 따라가며 서명한 것을 이른다. 사발통문 이전에 통문이라는 자격부터 갖추어야 하기에 거기에는 일정한 서식이 있다. 개인 간에 오가는 편지에서도 서식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통문의 서식은 서두에 通文이라고 제호처럼 쓰고, 줄을 바꾸어 右文爲通諭事段……(우문위통유사단……)이라는 문구로 시작하여 본론을 말한 다음, 모일 장소나 일시를 쓰고 ……千萬幸甚(……천만행심)이라는 글귀로 끝을 맺으며, 수신처·발신연월일·발신처 및 발신자 명단을 차례로 열기(列記)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를 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대체적인 서식은 이와 같으나 ‘通文’이라는 제목을 주로 쓰는 가운데, 檄文(격문)이나 敬通(경통) 등 다른 제목을 쓴 경우도 있다. 마지막의 발신 일자, 참여자 명단, 수신처 등은 순서가 바뀌기도 한다. 그렇다면 상기 문건이 왜 통문이 될 수 없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이 문건은 대략 내용에 따라 네 단락으로 구분된다. 이를 분석하면 아래와 같다.   제1단락은 1893년 11월, 20명의 동지가 서명하고 각 리의 이집강(里執綱)에게 통고한 문서로 여겨지나 ①제목과 ②본문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이 ③발신 연월일 이하만 있다. 편지를 예로 든다면 마지막의 발신 날짜와 발신자만 있고 앞의 편지 내용이 없는 것과 같다. 둥글게 돌아가며 쓴 이름 안에는 직경 5cm의 원이 있고 그 원을 따라 쓴 20명의 이름 중에는 크기가 약간 큰 전봉준의 이름도 보인다. 제목과 본문을 갖추고 있었다면 여기까지를 통문이라 할 수 있다.   제2단락은 ‘오른쪽과 같이 격문을 사방에 날려 보내니’라는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격문, 즉 앞의 통문을 배포한 다음 일어난 민심의 동향을 적고 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虐政)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어찌할 도리 없이 속만 부글부글 끓이면서 난리라도 터져 나라가 망해야만 한다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던 차에, 동학교도들이 통문을 돌리고 봉기(蜂起)할 것이라는 소식이 돌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호응하는 장면이다. 이 글에는 난리가 나서 나라가 망하든지 말든지 해야지 그렇지 않고 그냥 이대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백성들의 원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제3단락은 통문을 돌리고 난 다음 동요하는 민심 사이에서 동학교도로 이루어진 도인들이 송두호의 집에 모여 차후 진행해야 할 대책, 즉 선후책(善後策)을 논의하는 과정과 그 논의에서 결정된 4개 조항을 적고 있다. 그런데, 정읍시에서는 고부면 고부주산길 4(구 송두호의 집, 신중리 562-1)를 ‘사발통문을 작성한 집’이라 하여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이 문건을 통해 당시 통문이 배포되었다는 점과 통문 배포 후 송두호의 집에 모여 선후책을 논의했다는 점 외에 통문이 누구의 집에서 작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송두호의 집은 선후책을 논의한 곳이지 통문을 작성한 곳이 아니다.     제4단락은 선후책 4개 조항을 결정한 후 이를 실행할 지도부를 구성하는 과정을 적은 것으로 판단되나 나머지 부분이 잘려나가 더 이상의 내용 파악은 불가하다.   이 문건은 통문 배포와 이후 송두호 집에 모여 4개 조항의 선후책을 의결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집행부를 구성하는 등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기록한 잡기다. 이 문건의 작성자는 아마도 이러한 과정에 직접 참여하거나 자세히 알고 있던 사람일 것으로 짐작된다. 만약, 발송 연월일 앞에 통문이라는 제목과 본문이 있었더라면 당시 배포된 진본은 아닐지라도 그것만 따로 떼어내 사발통문이라 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발신 날짜, 발신자, 수신자만 남아 있는데다가 나머지 통문을 배포한 후 벌어진 상황이 같은 면에 기록되어 있어 통문이라 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이 문건은 2015년 12월, 전라북도에서 ‘사발통문은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역사자료로, 1893년 11월, 전봉준을 비롯한 20명이 거사 계획을 세우고 그 내용을 사방에 알리기 위해 작성한 문서’라는 사유를 들어 문화재(전북도 고시 제2015-337호)로 지정하였다.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 필자는 상기 분석 자료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으로 보내 통문이 될 수 없다는 취지로 이의를 제기한 바가 있다. 하지만 필자의 이의 제기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로 지정된 후에는 기념재단을 직접 방문하여 전북도청과 기념재단 관계자를 만나 사발통문은커녕 통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피력하였다. 이에 두 관계자는 필자의 주장에 동의하고 추후 문화재 심의위원과 논의하여 그 결과를 알려주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이후 연락은 없었으며 지난달 세계기록유산 후보에 선정되었다는 사실을 보도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이없는 일이다.   잡기에 지나지 않는 문건을 사발통문으로 둔갑시킨 황당한 일은 교과서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현행 교과서 중 교학사와 금성출판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교과서는 해당 문건 사진과 함께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 사발통문으로 소개하고 있다.   ▲ 천재교육 한국사 교과서 197쪽   이에 대해 필자는 이 문건을 사발통문으로 소개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필자의 지적에 대한 출판사의 답변과 처리 결과는 아래 표와 같다.   교학사 수록하지 않음 금성출판 수록하지 않음 동아출판 학계의 일반적인 논의에 따른 것임 리베르 집필자의 답변 거부 미래엔 필자의 주장이 타당하고 보임 - 미수정 비상교육 검토 약속 - 미수정 지학사 집필자의 답변 거부 천재교육 사발통문 → 사발통문 필사본으로 수정  비슷한 질의에 대해 가장 황당한 답변을 한 곳은 국사편찬위원회다. 답변 중 일부를 소개한다.   ‘조선시대 생산된 통문에 일정한 양식이 있다는 것을 본인은 들어본 바 없다. 또한 통문에 일률적으로 右文爲通諭事라고 언급되었다는 것도 금시초문일 따름이다.’   ‘질의자는 통문이라면 전봉준의 글씨를 크게 쓰지 않았다고 단정하시고 있으나 그 근거는 매우 박약하다. 전봉준의 글씨가 크게 쓰여 졌다고 하나 그것은 상당히 주관적 판단에 불과한 것이며 글씨의 크고 작음은 붓글씨를 쓸 때 각자의 버릇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집강(執綱) 좌하(座下) 이하의 문구는 난리를 일으키게 된 배경과 불특정 다수가 이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 그리고 어떻게 난리를 진행시킬 것인가가 기재되어 있는 셈이다. 대개 연구자들은 이 점에 주목하였기 때문에 당연하게 이 문건을 고부 농민봉기를 촉발시킨 통문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국편의 답변을 보노라면 답변자는 이 문건을 읽어보지 않았거나 읽었더라도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답변자는 고문서에 대한 신중한 접근 자세가 느껴지지 않는다. 고문서는 글씨의 크기뿐만 아니라 점 하나까지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하여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서술조차 확인하지 않고 ‘금시초문’이라는 말을 쉽게 쓰고 있다. 국편 질의 때마다 느끼는 실망감을 또 한 번 경험하였다.     이 외에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사발통문이라는 항목에서 ‘그 대표적인 예로 동학군의 통문 제1호라고 할 수 있는 사발통문을 들 수 있다.’고 하여 근거도 없이 통문 제1ㅌ호라 하는가 하면, ‘그 내용은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동학 간부 20여명이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宋斗浩)의 집에 모여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이하 악리(惡吏)들을 제거하며, 이어 전주감영을 함락시키고 서울[京師]로 직향(直向)할 것을 결의한 것이다.’라고 하여 사실 관계와 전혀 맞지 않은 서술을 하였다. 그런가 하면 통문이나 언론 등의 항목에서는 이 문건 사진을 사발통문이란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모두 수정해야할 부분이다.   필자의 주장은 위 문건이 본래의 사발통문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사발통문이기 전에 통문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모두들 사발통문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백과사전에 싣고, 교과서에 실어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문화재로 등록하는가 하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기념관 관련자, 심의위원, 교과서 집필자, 백과사전 집필자는 모두 해당 분야 전공자일 것이다. 전공자라면 위 문건을 한 번만 읽어봐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읽고도 판단이 안 된다면 전공자라 할 수 없다.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엄상익

 서초동에 산 지도 이십 년이 다가온다. 냉랭한 도시 생활 속에서 그런대로 가까운 이웃도 생겼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십 분쯤 걸어가면 칠십대 중반의 언론인 출신의 대학선배가 살고 있다. 그와 서울고등학교 운동장을 같이 걷던가 아니면 방배동쪽 프랑스 사람들이 많이 사는 근처의 몽마르트 공원을 산책하기도 한다. 한번은 해가 질 무렵 어스름해지는 공원을 걸으면서 그가 이런 얘기를 해 주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문예반을 했는데 두 살 아래의 후배가 있었어. 그 누나는 연극인이고 장관도 지내고 글도 쓰고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유명인사지. 아버지가 돌보지 않는 바람에 남매가 고생을 하고 자랐어. 그 후배가 문학적 재주가 있어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방생’이라는 이름으로 일찍 당선이 됐어. 그런데 작가가 되지 않고 건설회사에 취직해서 회사원이 된 거야. 그리고는 소식이 끊겼었지.”    하나님한테 재능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싹이 트는 것 같다. 소설가 황석영 씨의 자전(自傳)을 읽으면 십대 말에 북한산 자락의 바위 아래 동굴에 들어가 참선을 하면서 단편소설 ‘입석부근’을 써서 사상계잡지 공모에서 입선을 했다. 소설가 최인호 씨도 고교시절 신춘문예에 당선이 됐다. 산책을 같이 하는 선배가 말을 계속했다.    “얼마 전 수십 년 만에 그 후배 소식을 들었는데 말이야, 그 후배가 미국에 이민을 갔는데 나이가 들어 뇌경색이 와서 심각하게 반신마비가 온 거야. 나름대로 재활하려고 이를 악물었대. 중풍이 오니까 자신의 존재 의미가 뭔가 따져보게 되고 다시 글을 쓰게 됐다고 하더라구.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 꺾었던 펜을 들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대. 그렇게 쓴 소설로 미국 현지의 이민자들한테 주는 문학상도 받았고 내게 책을 보냈더라구. 그 후배는 이제 치매 증상까지 온다고 하더라구. 그런 상황에서도 하루하루 글을 쓰는 것 같아.”    선배가 전하는 말에는 가슴 뭉클한 메시지가 있었다. 사람마다 자기의 존재 자체인 그 무엇이 있었다. 늙고 병이 들어 글을 쓴 그 사람은 건설회사의 회사원이 아니라 작가였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생명과 몸 속의 에너지를 짜내어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내가 임종을 옆에 지켜본 강태기 시인도 그랬다. 십대 시절 공장 직공으로 있으면서 두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신춘문예에 모두 당선이 됐다. 그는 글을 쓸 계획을 착실히 세웠다. 젊은 시절 인도 등을 방랑하면서 내공을 보다 확실히 한 뒤에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글을 쓰려고 시도하려는 나이가 됐을 때 갑자기 암이란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그의 병실을 찾아간 내게 죽음을 앞둔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嚴兄(엄형), 글은 말이죠. 나중에 쓴다고 하지 말고 그때그때 바로 쓰세요.”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삶은 물거품 같이 스러지는 허무한 것이라고 하지만 예술가들은 자신의 영혼을 글로 그림으로 또는 소리로 바꾸어 영원히 존재하고 싶은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그 쪽이 한 줄의 관직명이나 화려한 묘지나 비석으로 가지고 가지 못한 재물을 자랑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김승열

바이마르 도시 전경.   가볍게 화이트와인을 먹고 멋진 침대에서 들어서 인지 모처럼 숙면을 한 느낌이다. 볼수록 숙소가 마음에 든다. 호스트가 바이마르대학 응용미술학도여서 그런지 실내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근처 마트에 가서 과일, 방, 치즈 등을 사서 아침에도 가볍게 화이트와인을 먹었는데 그런대로 맛이 괜찮았다.   나오기 싫은 숙소를 뒤로 한 채 실러하우스로 향하였다. 베토벤은 실러를 가장 존경하고 흠모했다.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 9번 ‘합창’은 실러의 시 환희에 붙임>에 곡을 붙인 것으로 유명하다.   실러의 위대한 문학과 베토벤의 음악적 영감이 합쳐져 최고의 역작으로 탄생한 것이다.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달리 표시가 없어 찾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잘 보존된 실러의 생가는 시인답게 아름다운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다.   문학이라는 예술의 통하여 유토피아를 꿈꾸어 왔음을 짐작하게 하였다. 실러와 베토벤은 각자 46세와 56세라는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만큼 예술에 대한 격정과 집중이 크게 느껴졌다.   실러(왼쪽)와 베토벤 동상. 그런데 천재 괴테는 좀 달랐다. 소설을 쓰고 극장 대표도 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출하고 출연하기도 했으며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에 식상하자 자연과학에 빠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훌쩍 이탈리아로 자유여행도 떠나는 등 자유로운 영혼으로 인생을 즐기면서 살았다. 그래서인지 괴테는 실러와 베토벤보다 장수하며 80여세까지 살았다. 실러 생가에 걸린 그의 자화상. 필자는 괴테의 삶이 궁금하여 생가가 있는 프랑크푸르트를 찾았고, 그가 말년을 보낸 바이마르에 왔는데, 괴테가 왜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감했는지를 생각해 보니 바이마르라는 도시가 새롭게 느껴졌다. 이 도시에 대한 궁금증이 밀려왔다.   어떻게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이곳에 정착하고 삶을 마감하게 됐을까. 도대체 어떠한 매력이 있기 때문일까. 사실 바이마르는 인구 10만 명도 안 되는 작은 도시다. 호수라는 의미의 ‘마르’와 합성어인 바이마르는 ‘신비한 호수’라는 뜻이 내포돼 있다. 헤어초크 독일대통령은 “독일의 문화는 바이마르가 없다면 생각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법학도에게 바이마르는 ‘바이마르 헌법’을 연상하지만 심오한 독일문화의 심장부다.   혹자는 ‘독일의 아테네’라고 부른다. 작은 도시 곳곳에 예술작품이 가득 차 있다. 그냥 사진 셔터를 누루는데 정신이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 의미를 느낄수록 더 예사롭지가 않다. 어쨌든 변호사로서 법과대학을 한번 찾아보려고 바이미르대학에 가서 물어보니 이곳은 법과대학이 없단다. ‘바우하우스 운동(건축예술 분야의 실험적 모던운동)’의 산실인 바우하우스 바이마르 대학이 있고, 시내 중심가에 음악대학만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의 기마상. 너무 무식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시내 곳곳을 돌아보니 유명한 국립극장 앞에 괴테와 실러가 함께 서 있는 동상이 있다. 조금 걸으니 바우하우스 미술관이 보이고, 좀 지나서 카를 아우구스츠 대공의 기마상이 보인다. 기마상 뒤의 건물이 바로 리스트 음악대학이라고 한다. 마침 배가 고파 시장이 들어선 광장에서, 빵 안에 소시지를 넣은 독일의 대표적인 음식을 주문했다. 2.50 유로에 푸짐한 성찬을 하게 될 줄이야….   어느 정도 요기는 채웠으니 이제 괴테의 ‘정원하우스’를 찾아가보기로 하였다. 한참을 걸었는데 어느 건물이 눈에 띄어 들어가니 온통 꽃들이 자연스런 상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괴테의 취향을 느낄 수 있었다. 화려하기보다 단순하고 자연스러웠으며 아름다웠다.   푸짐한 소시지 빵. 이 집은 아우구스트 대공이 젊은 괴테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원하우스를 어느 정도 이용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상반된 주장이 존재한다. 그러나 롯데(로테)에게 하루에도 여러 편의 편지를 이곳에서 써서 주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괴테가 바이마르에 오래 머물게 된 것도 정원하우스가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된다. 괴테의 정원하우스. 누구라도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괴테의 삶을 벤치마킹해야겠다는 생각을 불현듯 하게 되었다. 상황은 다르지만 필자 역시 1~2년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 방문변호사 내지 방문학자로 특강도 하고 현지 학자들과 토론을 겸한 담소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바이하우스 운동의 산실 바이마르 대학. 그리고 며칠 전 갑자기 사망한 필자의 벗이 떠올라 인생의 허망함이 밀려왔다. 그래서인지 더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충동을 느끼게 된다. 여생을 이방인으로 유럽 각국을 떠돌며 ‘나만의’ 게스트 하우스를 거점으로, 한국 업무는 ‘스마트워크’(일종의 모바일 오피스)로 보고 시간이 되는 대로 유럽 문화를 만끽하는 도전!!! 생각만 해도 설랜다. 어쨌든 바이마르는 필자로 하여금 유럽문화의 기행을 자극하는 멋진 만남으로 기억될 것 같다.

김승열

바이마르의 괴테하우스. 초상화 아래 그가 쓰던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두 번째 주말을 앞둔 금요일. 청명한 날씨, 기온은 20도가 안될 정도로 쌀쌀하다. 반팔에 느껴지는 바람의 촉감이 그리 나쁘지 않다. 외투 입은 사람도 더러 보인다. 이곳 로펌의 4개 본점과 지점 사무실(프랑크푸르트, 뮌헨, 베를린, 드레스덴) 사무실에서 한국 법 관한 세미나 주제발표를 해야 해서 발표 초안에 대한 정리를 마치고 관련 코멘트를 블라우 박사 등 몇 분의 변호사에게 요청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남아 괴테의 뒤(?)를 추적하기로 했다.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괴테는 인류역사상 최고의 천재다. 시인이자 극작가, 정치가, 과학자, 문학가, 자연연구가, 그리고 화가였다. 괴테가 태어나서 20대 중반을 보낸 프랑크푸르트보다 말년의 40여년을 보낸 바이마르가 궁금했다. 그는 왜 바이마르를 택했을까? 그리고 왜 그렇게 많은 시인과 음악가들이 바이마르에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필자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카를 마르크스가 태어난 에르푸르트 역 인근의 모습이다. 시인 실러와 괴테의 친분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래서 오늘 오후 그간 그리던 바이마르 행(行) 기차표를 예매하였다. 도이치반에서 일등석을 50% 할인해 주는 카드를 사서 가는 첫 여행지다. 직행은 없고 카를 막스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한 에르푸르트(ERFURT)를 거쳐 간다. 일등석 기차는 나름 여유가 있어 편안했다. 그리고 에르푸르트역에 도착하니 20분정도 시간이 남아 잠시 주변을 둘러보려는데 약간은 사회주의적 도시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후 바이마르 역에 도착했는데 마치 군사(軍事)도시의 역사 같은 착각이 들었다. 중앙역에서 천천히 내려가니 독일의 전형적인 건물과 풍성한 수풀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아름답다는 생각만 들었다.   바이마르 중앙역 부근. 일부는 다소 투박한 맛도 들었지만 곳곳에 즐비한 동상과 조각물 같은 건물 등등 여기가 왜 독일고전주의 중심지였는지를 짐작케 해주는 것 같았다. 먼저 숙소에 짐을 내려놓으려고 구글맵을 통해 에어비앤비(AIRBNB)를 찾아가 초인종을 눌렸으나 응답이 없다. 때마침 와이파이도 안 터져 에어비엔비 메시지를 실행시킬 수 없어 당황스러웠다. 얼마 전 본에서 겪은 경험을 살려 근처 맥주집에 가서 와이파이 비번을 물어 겨우 작동을 하니 한참 있다가 “곧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기다리는 동안 생맥주를 시켜놓고 괴테하우스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니 여기서 100m 정도란다. 숙소의 호스트가 방을 안내하는데 한층 전체를 쓰는 그야말로 멋진 집이었다. 창문과 아름다운 침대, 테이블의 양초 등 모든 것이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하루 숙식비가 비싼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가족용 내지 단체용 숙소였던 것이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아름다운 공간이 방랑객인 필자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호스트는 의외로 젊은 남자 대학생이었다. 바이마르대학에 다니면서 작년부터 호스트 역할을 하고 있는데 재미있다고 하였다. 유쾌한 친구여서 즐거운 마음으로 키를 받아 가볍게 사워를 하고 괴테하우스를 갔다. 생각보다 입장료가 비쌌지만 규모가 프랑크푸르트의 생가보다는 더 크게 느껴졌다.   괴테가 쓰던 탁자와 소파 안에는 멋진 조각, 책, 해부 대상물, 그림, 아름다운 장신구 등등이 즐비하였다. 소장품들이 훨씬 많아보였고 집도 좀 더 크게 느껴졌다. 본인의 초상도 곳곳에 걸려 있었다.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고 해부, 자연과학도 즐겼던 그야말로 자유롭고 멋진 인생이었다.   근처 광장의 즐비한 야외식당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맥주와 와인을 여유롭게 즐기면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평온해 보였다. 잘 정돈되고 깔끔하고 아름다운 고도시라는 느낌이 그대로 와 닿았다. 헤르만 헤세가 격찬한 바와 같이 괴테의 “단순하고 소박한 표현으로 삶의 본질을 전달”하는 것처럼 도시 전체가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괴테가 재상을 하다가 이탈리아로 장기여행을 떠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짜여있고 아름다우나 아무래도 답답함을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바이마르는 단순함을 통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도시다.   바이마르 도시 전경 괴테의 삶을 살펴보면서 중요한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즉 괴테가 인류역사상 최고 천재가 된 이유는 어머니의 책 읽어주는 방법에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괴테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이야기 결말 부분은 읽어 주지 않고 괴테가 상상토록 해서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무한한 창조성을 키웠다고 한다.   이와 유사하게 《실락원》의 밀턴 역시 천재가 된 이유는 아버지와 산책을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일반적으로 어머니와의 대화는 예견할 수 있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대화가 많다. 그러나 아버지는 좀 다르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아이들에게 신선하고 색다른 충격과 자극이 될 수 있으리라. 뜬금없지만 천재도 그냥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의 엄청난 영향 하에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필자의 아이들에게 아버지 역할을 충실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문득 괴테의 말이 떠오른다!   "세상을 아름답게 살고 싶다면 지나간 일에 구애말라. 그리고  쉽게 화를 내지 말 것! 언제나 지금을 즐길 것이며 남을 미워하지 말고 앞날은 하느님께 의탁하라!"   때마침 교회의 종소리가 경건하게 울렸다. 그런데 몇 번 안 치고 그친다. 고인이 일찍 세상을 떠난 이인가 보다. 최근 부고(訃告) 소식을 전해들은 필자의 대학동기 얼굴이 떠오른다. 학창시절 그는 멋지고 잘 생긴 친구였다. 괴테의 말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은 ‘그저 지금 이 자리에서 현재에 충실하라는’ 마음 뿐이다. 이 현재를 즐기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성경에 어느 노부부가 모처럼 풍년을 맞이하여 풍성한 수확을 기뻐하며 “앞으로 2~3년은 양식걱정을 할 필요가 없겠다”고 하면서 모처럼 행복한 마음으로 잤더니 그날 밤 하느님께서 하늘나라로 데려갔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그래! 고민이 있고 삶이 힘들게 느낄 때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고민이 없다는 것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지금에 충실하고 실타래 같은 고민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느끼고자 스스로에게 다짐해본다.

김승열

베르너 블라우 변호사   독일 로펌 아네케 시베트의 베르너 블라우(Werner Blau) 변호사는 1952생으로 변호사 경력이 35년이다.   기업인수 합병, 공정거래법, 지식재산 관련법, 중재법 등의 대가로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러나 로펌 내에서 상당히 중요한 파트너 변호사로 손꼽힌다. 그의 아내가 한국인 권정희 씨. 그런 인연으로 한국인의 독일정착과 한국문화 소개, 한독 법률인 교류 등에 남다른 애정을 쏟아왔다. 독일 소재 한국학교 설립에도 앞장섰다고 한다.   지난 7월 13일 인터뷰를 가졌다. 블라우 박사와의 인터뷰는 향후 유튜브, 네이버tv 등에 등재할 예정이다.   ―‘독일한국인변호사모임’의 회장으로 재직하신지가 오래된 것으로 안다. 모임 전반에 대해 설명해 달라. “이 변호사 모임은 한국계거나 아니면 가족 친지 중 한국인 등이 있는 경우와 같이 한국과 관련이 있는 변호사들의 모임이다. 내가 회장이 된지는 6년 정도 됐다. 한국과 독일 상호 문화의 이해와 한국인의 독일 정착 등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다.”   ―독일문화와 한국문화와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는가? “과거 독일은 좀 더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지녔고, 한국은 좀 더 가족중심적인 성향을 띠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다. 오히려 한국이 더 핵가족화 되어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졌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이젠 양국의 차이가 거의 없거나 해소됐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통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독일의 경우 통일비용이 많이 발생했으나 긍정적인 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통일한국도 긍정적인 의미가 클 것이다. 물론 통일이 되면 통일비용이 상당할 것이지만 여러 긍정적인 측면을 고려하면 통일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남북 분단의 경우 전쟁의 위험이 있으나 통일이 되면 통일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한국인의 생존과 연결된 전쟁의 공포와 위험은 해소되리라. 통일한국이 갖는 시너지는 대단할 것이고 남북한 상호 상생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높일 것이다. 현재 비정상적인 김정은 정권이 언제 몰락을 할지는 모르지만 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 등을 유지하고 이를 위한 노력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유럽통합과 BREXIT 이후의 독일과 프랑크푸르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유럽통합 이후 독일의 역할은 커질 것이고 나아가 BREXIT 이후 프랑크푸르트는 많은 발전이 예상된다. 특히 프랑크푸르트는 유럽의 관문으로 그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도 커질 것이다.” 블라우 변호사와 인터뷰 중인 필자 ―독일 중견로펌인 아네커 시베트와 블라우 박사 본인을 소개하자면. “아네커 시베트는 독일의 중견 로펌으로서 상당히 국제화된 국제로펌이다. 고객 50% 이상이 독일 이외의 외국계 회사이고, 특히 미국계 회사를 중심으로 아시아에서 온 기업을 대리해 많은 국제법률 분쟁을 다루고 있다. 유럽진출 해외기업의 지역본부가 거의 프랑크푸르트에 소재하고 있다. 반면 제조시설은 임금이 상대적으로 값 싼 동유럽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연유로 유럽지역 대리점 업무 등과 관련한 공정거래법 등이 상당히 중요해졌다. 나 자신도 대리점 업무와 관련한 공정거래법 업무, 나아가 지식재산법 관련 업무와 중재 등에 관여하고 있다.   ―한국 법률시장이 개방을 하였고 유럽에 한국기업들이 많이 진출하고 있는데 귀 법인에서 한국 비즈니스를 개발할 의사는 없는 것인가? “한국과의 비즈니스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실제로 많은 네트워크를 통하여 한국변호사들과 업무제휴도 하고 있다. 아네커 시베트는 국내 지점을 두고 있으며 해외와는 인터로우(Inter-law) 등 해외제휴 네트워크를 이용해 업무협조를 통하여 공동으로 비즈니스를 개발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유럽진출을 앞둔 한국기업이나 한국변호사 들에게 해 줄 이야기가 있다면. “이제는 한국기업뿐만이 아니라 젊은 한국변호사도 영어에 능통하고 많이 국제화됐다고 느낀다. 유럽의 관문인 프랑크푸르트에 많은 국내외 기업들의 유럽지역 총판매본부가 소재하고 있다. 대리점 관련 법규와 공정거래법이 실제로 많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 법역(法域)에서 독일만의 다소 독특한 법제도가 많아 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중재 등 ADR 분야에서도 상당한 전문성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ADR 등의 미래에 대해 어떤 생각이신지. “어떤 분쟁이나 갈등을 법원이 법원에서 하게 되면 국제거래 관련 서류를 모두 다시 독일어로 번역을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국제거래는 거의 영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재를 하게 되면 그런 불편함이 상당히 줄어든다. 왜냐면 중재절차는 일반적으로 영어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송 등을 통한 분쟁해결 절차는 시간, 비용 등에서 너무 많이 발생해 기업들이 너무 싫어한다. 반면 중재는 비용도 적게 들고 단심제다. 나름 강력한 경쟁력이 있어 좀 더 활성화될 것으로 보여 진다.”   ―오늘 바쁘신 와중에 소중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린다.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기념 촬영을 한 블라우 박사와 필자. 블라우 박사는 “오는 10월경 서울을 방문할 예정”이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한국기업이나 한국의 젊은 변호사들의 유럽진출에 많은 도움을 주고 싶고 양국 법률가들이 상생하는 발전적 모습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병헌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개국기년’을 검색하면 위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개국기년은 1894년 갑오경장 때 채택된 연호(年號)이며, 건양(建陽) 연호를 사용한 1896년 1월 1일을 기하여 폐지되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모두 사실과 다르다.   ‘개국기년’은 연호가 아닐 뿐만 아니라 ‘개국’도 연호가 아니다. 고종 때 사용한 연호는 건양(建陽:1896~1897)과 광무(光武:1897~1907) 둘 뿐이다. 개국기년은 조선이 개국한 1392년을 기원(紀元)으로 삼아 연도를 표시한 것으로 서기(西紀), 불기(佛紀), 단기(檀紀)로 연도를 적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전에는 시행 시기를 1894년이라고 하였으나, 그보다 훨씬 앞선 1876년 「조일 수호 조규」를 체결할 무렵에 이미 사용하기 시작했다. 기록상으로는 수호 조규 협상이 한창 진행되던 강화도에서 일본국 대표 구로다 키요타카에게 보낸 「서술책자(敍述冊子)」에 처음 등장한다. 이어 며칠 후 체결된 「조일 수호 조규」의 마지막 서명란에는 ‘大朝鮮國開國四百八十五年 丙子二月初二日(1876. 2. 2.)’로 명시하여 조선이 근대적 조약의 당사국으로서 주권 국가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이후 1892년까지 체결된 스무 건이 넘는 외국과의 조약에는 모두 개국기년을 사용하였다. 이런 조약 중에는 1882년 「조미조약」의 ‘大朝鮮國開國491年 卽中國光緖八年 4月 6日’과 같이 개국기년 다음에 중국의 광서(光緖) 연호가 삽입된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청이 조약을 주선한 경우에 해당된다.   ▲ 헐버트 특사 임명장(1906)사전에는 1896년 1월 1일부로 개국연호가 폐지되었다고 하였으나, 건양과 광무 연호를 사용할 때에도 개국기년은 계속 사용되었다. 심지어 1905년 을사조약 직후 미국에 특사로 파견된 헐버트의 임명장에는 ‘大朝鮮國開國’이 아니라 ‘大韓開國 515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건양이나 광무 기간에 사용된 개국기년의 용례는 적지 않다.   그런데,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는 ‘지금부터 국내외 공사 문서에는 개국기년을 쓸 것(從今以後, 國內外公私文牒, 書開國紀年事)’이라는 의안(議案)을 발표한다. 이는 종전까지 외교 문서에서만 사용하던 개국기년을 국내외 모든 공사(公私) 문서에 확대 적용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1895년 3월 10일 내무아문(內務衙門) 훈시 제86조에서는 ‘이미 개국기년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더 이상 청의 연호를 사용하지 말 것’이라는 지시를 하달한다. 이때에 와서 청의 연호를 공식적으로 폐지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하면 서두에서 언급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서술은 사실 관계가 전혀 맞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개국기년 사용과 청의 연호 폐지완 관련된 사안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1876년 대일본 외교 문서에 처음으로 청의 연호 대신 개국기년을 사용했으며, 이후 외교 문서에는 개국기년이 계속 사용되었다. 2.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는 그동안 외교 문서에만 사용하던 개국기년을 국내외 모든 공사 문서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3. 1895년 3월 10일, 청의 연호 사용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였다.   이와 관련한 교과서의 서술을 살펴보면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과 별 차이가 없다. 아래는 2014년 판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이다.   교학사 중국 연호는 폐지하고 개국기년을 사용하였으며(189) 금성출판사 중국 연호 사용을 폐지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242) 리베르스쿨 먼저 외교적 측면에서는 청의 종주권을 거부하는 의미로 조선이 개국한 1392년을 기준으로 삼는 개국을 새로운 연호로 채택하였다.(223) 미래엔 정치면에서는 먼저 중국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 연호를 사용하였다.(198) 비상교육 정치면에서는 중국 연호를 폐지하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217) 지학사 청의 연호를 쓰지 않고 개국기년을 사용하였다.(229) 천재교육 청의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 기원을 사용하여 청과의 사대 관계를 끊었다.(201) 동아출판 서술 없음  이는 군국기무처가 주도한 1차 갑오개혁 때의 개혁 내용에 포함된 것으로 ‘독자적 연호’, ‘개국 연호’, ‘새로운 연호’ 등의 서술은 모두 잘못이다. 또 개국기년은 1876년에 이미 사용되었으므로 갑오개혁 때 처음으로 사용한 것처럼 서술한 것도 잘못이다. 그리고 청의 연호를 공식적으로 폐지한 것은 2차 갑오개혁 때인 1895년 3월의 일이므로 이때 ‘청의 연호를 폐지했다’고 서술한 것도 옳지 않다. 이러한 사항에 대해 필자는 각 출판사마다 수차례에 걸쳐 문제 제기를 한 결과 2016년 판에는 아래와 같이 서술이 바뀌었다.   교학사 중국 연호는 폐지하고 개국기년을 사용하였으며(변화 없음) 금성출판사 중국 연호를 사용하던 관행을 버리고 개국기년을 사용하였다. 리베르스쿨 먼저 외교적 측면에서는 청의 종주권을 거부하는 의미로 조선이 개국한 1392년을 기준으로 삼는 개국을 기년으로 채택하였다. 미래엔 정치면에서는 먼저 중국 연호를 사용하던 관행을 버리고 개국 연호를 사용하였다. 비상교육 정치면에서는 중국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을 사용하였다. 지학사 청의 연호를 쓰지 않고 개국기년을 사용하였다.(변화 없음) 천재교육 모든 문서에 개국 기원을 사용하게 하여 청의 연호 사용을 중지하였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부분 교과서의 서술이 바뀌기는 했으나 청의 연호 폐지와 관련해서는 별로 변한 것이 없다. 또, 이미 사용되어 오던 개국기년을 이 때 처음 사용한 것처럼 그대로 둔 것도 옳지 않다. 다만, 개국 연호를 개국기년으로 표시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유일하게 개국 연호를 끝까지 유지한 미래엔 집필자는 여전히 개국 연호가 옳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필자는 2014년 『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검정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에 대한 국사편찬위원회의 입장을 듣고자 위의 내용을 정리하여 질의한 바가 있다. 아래는 필자의 질의에 대한 국편의 답변이다.   ‘갑오개혁 시기 개국기년은 연호와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한국사 교과서의 개국기년 관련 서술은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   몇 차례 오간 질의와 답변에서 국편 답변자는 개국 연호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고수했다. 그리고 최종 결론에서는 개국기년은 연호와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모호한 답변으로 얼버무렸다. 국편의 답변은 대체로 이와 같이 우기거나 두루뭉수리다.▩

김승열

본 시내 풍경 숙소가 아름다워서 일어나기가 싫었지만 일어나 샤워로 기분을 전환한 후에 호스트에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고 본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도시 전체가 그냥 아름다움이고 예술이었다. 필자의 주장에 반론도 있겠지만 워낙 덧없이 걷고 목가적인 풍광과 숲이 너무 아름다워 감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시내를 몇 번이나 돌아보았는데 너무 인상적이었다. 그렇다고 꼭집어 말할 만큼의 인상적 장면은 없었지만 그냥 산책하고 좋은 공기를 느끼면 마음을 정리하기에는 너무나도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실망을 안긴 베토벤 하우스. 그러나 베토벤 역사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어 감사했다. 하지만 시내복판에 있는 베토벤 생가는 크게 감동적이지 않았다. 사진도 못 찍게 하는 등 다소 권위적인 직원모습에 반감마저 느꼈다. 괴테하우스에서는 모든 직원이 친절했는데…. 이곳에서 베토벤에 대한 인상마저 흐려지는 것 같았다. 지나치게 상업화된 것 같다고 할까. 어쨌든 베토벤을 경외하는 일반인이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아쉬움이 간절했다. 다만 베토벤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이 순간에 감사하고 싶었다.  본대학 모습 본대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글맵에 의존하여 갔더니 법과대학은 본중앙역에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닌가. 기차 시간이 빠듯해 뛰어서 갔더니 원걸 아는 이가 없었다. 그나마 길 가던 본대학 학생의 도움으로 간신히 대학 도서관 앞 건물이 법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운타운에 있어 다소 도회적인 분위기가 생소하게 느껴졌으나 토요일임에도 마치 평일처럼 많은 학생들이 오가고 있어 놀라웠다!   본대학 법과대학 건물. 물어물어 힘들게 찾아갔다. 법과대학 건물사진을 찍고 부랴부랴 역에 왔더니 연착이란다. 연결 편으로 공항에 가야해서 계속 기차표를 바꾸었는데 계속 연착이 이어져서 거의 패닉 수준이 되었다. 다만 다행스럽게 현지 독일인이 친절하게 프랑크푸르트공항 시간에 맞춰 가도록 안내해 주었다. 아니 독일과 같은 선진국에서 연착이 이렇게 빈번하게 발생할 줄이야…. 독일인들은 연착을 의식해 항상 30분 정도 여유를 가지고 움직이거나 예약한다고 한다. 이야기하기가 좀 복잡하지만 계속된 연착으로 어찌할 수 없이 쾰른중앙역에 갈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바로 쾰른중앙역에 소재한 쾰른대성당을 보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독일의 랜드마크라고 불리는 퀼른대성당  

김병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보빙사’를 검색하면 위와 같이 최초로 미국에 파견된 사절단이며 구성원은 전권 대신 민영익과 부대신 홍영식을 포함한 11명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보빙사(報聘使)라는 용어는 사절단의 호칭이 아닐 뿐만 아니라 민영익(閔泳翊) 개인에게 부여한 호칭도 아니기에 이는 명백히 잘못된 서술이다.   전근대에 사(使)를 붙인 사신이 여럿 있으나 고종 시대의 사신으로는 「조일 수호 조규」 체결 이후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修信使) 김기수(金綺秀)가 익숙하다. 이에 대한 실록의 기록에는 전사(專使:특사)라는 임무와 함께 호칭을 수신사(修信使)로 한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수신사는 김기수 개인에게 부여한 직책이며, 그 외 김기수를 따라간 관리는 수대원(隨帶員) 즉 수행원이다. 2차(1880) 수신사는 김홍집(金弘集), 3차(1882) 수신사는 박영효(朴泳孝)이다.   또 다른 사신으로 1881년 청나라에 파견된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이 있다. 김윤식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견학하기 위한 학도(學徒) 20명과 공장(工匠) 18명 외 수종(隨從)들을 포함하여 모두 69명을 인솔해 간 사신이다. ‘선발된[選] 인원을 인솔[領]하는 사신’이란 의미의 영선사는 김윤식 개인에게 부여한 직책이다. 수신사나 영선사와 마찬가지로 보빙사는 개인에게 부여되는 직책으로 사절단과 같은 단체의 호칭으로는 사용할 수 없다.   현행 교과서의 보빙사와 관련된 서술은 아래와 같다.   교학사 보빙사, 1883년 미국에 최초로 파견된 사절단이다.(178) 금성출판사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은 보빙사로 미국에 다녀왔으며(231) 동아출판 미국에 파견된 사절로 민씨 정권의 핵심인 민영익, 홍영식과 서광범이 동행했다.(163) 비상교육 한편, 정부는 미국과 수교한 이후 미국의 공사 파견에 대한 답례로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하였다. 보빙사 일행은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각종 근대 시설을 시찰하였다.(207) 지학사 1883년 미국으로 파견된 보빙사는 24세의 민영익을 단장으로 하여 모두 11명으로 구성되었다.(218) 천재교육 보빙사 일행(사진), 미국이 공사를 파견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1883년 민영익을 대표로 하여 미국에 파견한 사절단이다.   위와 같이 ‘사절단’, ‘보빙사 일행’이라 한 서술에서 알 수 있듯이 단체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수신사와 영선사의 예에서 보듯이 사호(使號)는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사절단을 보빙사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동아출판의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이 동행했다.’는 서술은 민영익이 대표임을 감안한다면 앞뒤가 안 맞는 문장이다.   ▲ 미래엔 교과서 180   뉴욕 헤럴드지에 보도된 고종 신임장 미래엔 교과서에는 ‘보빙사 일행’이라는 제목 아래 ‘그래서 수교를 맺은 후 8명의 젊은이들을 미국에 파견하였다. 그들이 바로 1883년 미국에 첫발을 내디딘 보빙사였다.’라 하여 8명 모두를 보빙사로 서술하였다.   또, 이어지는 문장에서 ‘그들은 미국 대통령을 만나 고종의 신임장을 전달하였다. 이 신임장이 뉴욕 헤럴드 신문에 한글로 번역되어 게재됨으로써, 조선이 고유 문자를 가진 문화국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고 하였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고종이 보낸 신임장은 한글로 되어 있을 터이니 ‘한글로 번역되어’는 ‘영어로 번역되어’로 해야 맞다. 오른쪽 신임장 이미지에도 한글 아래에 ‘translation of the above’라고 되어 있다.   1883년 미국에 파견된 사절단에 관하여 『고종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미국 공사(公使)가 국서를 가져와 우호 관계가 돈독해졌으니 마땅히 보빙(報聘:답방)이 있어야 할 것이다. 협판교섭통상사무 민영익은 전권 대신(全權大臣)으로, 협판교섭통상사무 홍영식은 부대신(副大臣)으로 임명하여 떠나게 하라.(美國公使䝴來國書. 隣好旣敦, 宜有報聘. 協辦交涉通商事務閔泳翊爲全權大臣, 協辦交涉通商事務洪英植爲副大臣, 使之前往.)’   이 기록에서 고종은 미국 공사의 부임에 대한 답방으로 민영익을 전권 대신으로, 홍영식을 부대신으로 임명하였을 뿐 민영익에게 별도의 보빙사라는 직함을 부여하지 않았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보빙사(報聘使)로 부르는 것은 잘못이며, 나아가 일행 모두를 보빙사라 하는 것은 더더욱 잘못이다.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잘못 써온 보빙사는 ‘미국 방문 사절단’ 또는 ‘방미 사절단’이라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필자는 논란이 많았던 국정 한국사 교과서 검토본에 대한 이의 제기 과정에서 ‘보빙사’라는 명칭이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가 있다. 이에 최종본 국정 교과서에서는 이를 모두 아래와 같이 ‘미국 방문 사절단’으로 수정하였다.   ▲ 국정 교과서 방미 사절단 서술 수정 전(좌)와 수정 후(우) 그런데 리베르스쿨 교과서는 ‘조선은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이후 미국 공사의 파견에 대한 답례로 1883년에 전권 대사 민영익 등을 보빙사로 미국에 파견하였다.(리베르스쿨 210)’고 하여 민영익을 ‘전권 대신’이 아닌 ‘전권 대사’로 소개하였다. 대신(大臣)과 대사(大使)는 엄연히 다름에도 이를 구분하지 못한 것은 실수를 넘어서 교과서 집필자의 자격이 의심스러워진다.   이와 동일한 오류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도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제한 시험에서 이런 오류가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 한국사능력검정시험(고급) 27회 30번 그런가 하면, 대한민국 정부 대표 블로그에는 ‘보빙사(報聘使)를 아십니까?’라는 카드뉴스를 실었는데, 여기서도 보빙사에 대한 설명은 교과서와 차이가 없다. 이 블로그에는 보빙사 용어의 오용 외에 더 황당한 사진 설명이 있다.   ▲ 대한민국 정부 대표 블로그 수록 자료(출처:http://blog.naver.com/hellopolicy/220509745145) 조선의 대표와 부대표를 모두 전권대사로 쓰고 슈펠트는 전권공사라고 하였다. 모두 잘못이다. 「조미조약」 마지막에는 ‘전권 대관(全權大官) 신헌(申櫶), 전권 부관(全權副官) 김홍집(金弘集), 전권 대신(全權大臣) 수사 총병(水師總兵) 슈펠트〔薛裴爾:Shufeldt, R.W.〕’라고 되어 있다. 전권 대사라고 한 것도 모자라 정(正)과 부(副)의 구분도 하지 않고 모두 전권 대사라고 하였으니 실수라 하기에는 지나치다.   우리 역사 용어는 거의 모두가 한자어다. 한자어를 교과서에 쓰면서 한자는 버리고 한글로만 적으니 개념이 불분명하고 위와 같은 오용(誤用) 사례가 자꾸 발생하게 된다. 한자・한문을 모르고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영어를 모르고 미국사를 연구하는 것과 같다. 한자・한문을 외면하면 할수록 우리 역사는 점점 흐릿해질 수밖에 없다. 한자・한문을 제대로 모르고 중국과의 역사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지금부터라도 초・중・고에서는 최소한의 한자를 가르쳐 전문 연구를 위한 기초를 갖추도록 해야 한다.▩  

김승열

오늘은 주말을 앞둔 즐거운 금요일이다. 독일 로펌의 동료 변호사의 가벼운 옷차림에서 주말 분위기가 풍겼다. 그러고 보니, 날씨도 쾌 더운 편이다.   오늘 생일을 맞이한 파트너 변호사가 자축하기 위해 아이스크림을 구내 간이식당에 가져다놓고 공지했다. 삼삼오오 오가며 즐겁게 아이스크림을 간식으로 즐겼다. 비교적 가족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일전에 만났던 금감원 프랑크푸르트 연락사무소 강한구 소장을 다시 만났다. 뜻밖에도 이태리 식당에서 점심을 사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로펌까지 나를 찾아와 20여분 거리의 식당으로 향했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메뉴판을 보면서 우리나라 식으로 보면 소위 ‘런치 스페셜’을 추천하여 샐러드 대신 당근수프와 생선요리를 주문했다. 독일에서는 물을 별도로 주문해야 해서 필자는 탄산가스 없는 물과 화이트와인을 주문했다. 강 소장은 탄산가스가 있는 물을 주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도 이곳에 와서 처음엔 탄산가스 없는 물을 주문했어요. 독일생활이 익숙해지자 민민한 물보다는 소화에도 도움이 되는 탄산가스 물을 주문하게 되더군요. 이곳 독일인들도 주로 탄산가스가 있는 물을 마셔요. 그러나 초행의 관광객은 탄산가스 없는 물을 주문해요. 그게 현지인과 관광객의 차이라면 차이일까요?”   이어서 나온 화이트와인, 당근수프, 생선, 그리고 디저트 케익크가 나왔다. 케이크가 꽤 크고 맛도 좋았다. 커피를 주문하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선택이 달랐다. 필자는 아메리카노를, 강 소장은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필자가 “에스프레소는 너무 쓰지 않냐”고 물었더니 강 소장은 “디저트까지 다 먹고 나서는 양이 적은 에스프레소가 좋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다. “저도 한국에서는 식후 아메리카노를 마셨는데 이탈리아 여행과정에서 한 식당에서 만난 할머니 종업원이 ‘왜 에스프레소에 물 탄 아메리카노를 마시냐. 커피 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에스프레소를 마셔라’고 해 그때부터 에스프레소를 마시게 됐어요.”   강 소장의 권유로 에스프레소를 마셔보니 양도 적당하고 향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마치 필자가 현지인이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랄까, 생활양식이 서구화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쨌든 새로운 경험 속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본으로 가는 길. 강 소장은 필자에게 독일보다 프랑스 남부를 경험해 볼 것을 권했다. 독일인은 외부인에게 그렇게 친숙하지 않다고 한다. 반면 스페인 사람은 처음 만난 누구라도 평생친구처럼 대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스페인에서 평생친구처럼 다정하게 얘기하는 이에게 몇 년 지기(知己)냐고 물어보면 초면이라 답하는 이가 많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단다. 강 소장에 따르면, 자연경관은 독일도 좋지만 건물들은 실용적이고 투박하다. 옷차림도 독일은 지극히 평범하다. 하지만 프랑스는 건물이나 조그마한 장식에서도 미적 감각을 내세운다. 그래도 필자가 “하이델베르그에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느꼈다”고 하자 “남부 프랑스에 가면 더 새로운 정취를 맛볼 것”이라고 귀띔했다. 속으로 다음엔 남부 프랑스의 로펌이나 법과대학을 방문해 보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필자가 “프랑스인은 독일인과 달리 영어를 거의 못한다”고 하자 “인터내셔널 로펌이나 대학교수들은 영어를 잘할 것이니 무엇이 걱정이냐”고 했다. 본으로 가는 길에 만난 거리와 사람들 강 소장과 헤어진 후 베토벤 생가가 있는 본으로의 여행을 시작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본은 마인츠 등을 거쳐 가게 되는데 주변의 풍광이 예술적이었다. 언덕 사이로 고색창연한 고성들을 볼 수 있었고 강변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중세로 돌아간 듯, 시간여행에서 잠깐 머무르듯 오묘하고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본중앙역에 도착해 베토벤 생가를 찾아갔다. 구글맵에 의지하며 도보로 걷다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걸려서 내일 다시 방문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조그마한 문제가 발생했다. 예약한 에어비앤비(AIRBNB) 숙소 근처에 도착은 했지만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아 호스트와 연락할 수 없었다. 초행길에 당황했는데 근처 헤어살롱의 남자 헤어 디자이너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너무나 친절하게 와이파이 접속을 도와주고 직접 탄 커피도 권했다. 낯선 곳에서 만난 뜻밖의 친절에 큰 감동을 받았다. 에어비엔비 숙소 내부 모습 예약한 숙소(3층 방)에 가니 창밖으로 이국적 풍광이 쏟아지고 있었다. 멋진 화분과 거울, 양초로 즐비한 방이었다. 순간 그동안의 여독을 다 잊을 만큼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날 밤, 근처 슈퍼에서 마실 것을 사서 모처럼 사치스러운 망중한을 보냈다.

김태완

현대미술은 당대 현실을 드러내는 현상이자 얼굴이다. 세상에 대한 답이 없는 질문을 화폭에 담는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전시된 사진작가 오석근의 〈교과서(철수와 영희)〉(2006~2008)는 1970~80년대 도심의 한적한 변두리 담벼락 아래에 앉아 있는 철수와 영희의 모습을 담고 있다.    당시 인기 어린이 프로그램이었던 ‘모여라 꿈동산’의 등장인물처럼 커다란 머리통을 뒤집어쓴 두 녀석이 삽화처럼 앉아 있다. 〈교과서〉는 왠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철수 머리 위의 기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 불안하다. 놀 만한 아무런 도구도 기구도 없이 우두커니 앉은 모습은 무료해 보인다.    그 시절, 〈교과서〉에 등장하는 변두리 골목에는 늙어 쭈글쭈글해진 할머니 한 분이 살고 있지 않을까.    농촌의 몰락으로 이주한 빈농의 후예일지 모른다. 담벼락에 역한 오줌 지린내가 나고 아이들이 골목에다 똥을 싸 놓으면 당장 어디선가 달려와 순식간에 먹어치우던 똥개들(안정효의 장편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쓰러져 가는 천막교회와 구멍가게가 골목 한쪽에 마주보고 있을 것이다.    그 시각, “차렷” 소리와 함께 국기 하강식이 있고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를 악을 쓰며 외치는 악동들이 있을지 모른다. 악동 노트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지 않았을까.    ‘Boys, be ambitious(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시절, 골목길에 우두커니 앉은 철수와 영희는 전자오락도 스마트폰도 변변한 책도 없던 시절의 민낯이었다. 커서 무엇이 될까? 다들 가난했지만 돈 벌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다. 군인이, 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말이지 구체적인 직업을 꿈꾸진 못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아이들이 한 반에 절반은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도호의 〈Who Am We?〉. 사진=Kisu Park, Seoul Nils Clauss, Seoul.  2년 전 《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2015, 메디치)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에는, 거창고 교장이던 전영창 선생이 학교 강당 액자에 써 놓았다는 ‘직업선택의 십계’가 소개돼 있다.    … 직업 선택의 십계    하나,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둘,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셋, 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넷,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다섯,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여섯,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일곱,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여덟,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아홉,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이 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열,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p.18)    굉장히 은유적인 10가지 계명을 만든 이유에 대해 전영창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공부 열심히 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자꾸만 더 가지려 하고 더 밟고 올라서려 하지 말고, 좁은 길로 가 섬김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라고 가르쳐야 한다.”    거창고를 거쳐 간 수많은 졸업생들, 우리들의 철수와 영희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직업선택의 십계’가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몹시 궁금하다.    서도호의 〈Who Am We?〉(2000)는 한국의 전형적인 교육 시스템 속에서 드러나는 익명의 개인과 집단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과천 현대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졸업 앨범 속 수많은 얼굴들을 벽지 형태로 제작했다. 관객들은 벽지 앞에 다가가 얼굴들을 바라본다. 누굴 찾는 양 종횡으로 익명의 얼굴을 ‘탐닉’한다. 〈Who Am We?〉라는 제목은 틀린 문장이다. 작가는 의도적 문장 오류를 통해 ‘인간과 전체의 관계에 대한 질문과 함께 하나의 거대한 집단을 이루고 있는 감춰진 존재들의 개별성’을 드러내려 한다.      지난 5월 ‘크리스 노먼’ 공연장 찾은 철수와 영희들  한국 투어 기념으로 발매된 《크리스 노먼 더 히츠(Chris Norman The Hits)》.  1970년대 후반 국내 팝송 마니아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인기 밴드는 스모키(Smokie)였다. 〈Living Next Door to Alice〉 〈If You Think You Know How to Love Me〉 〈Lay Back in the Arms of Someone〉 〈Don’t Play Your Rock ’n’ Roll to Me〉, 수지 콰트로와 함께 부른 〈Stumblin in〉은 자주 라디오 전파를 타며 당시 비틀스나 비지스 못지않게 인기를 누렸다.    이들 노래의 충성도가 비틀스에 버금갔던 이유는 알지 못한다.(비틀스 팬들이 야유를 보낼지 모르겠다. 감히 비틀스와 비교하다니. … 70년대 후반은 이미 비틀스의 거대한 성채가 점점 바래 가던 시절이었다.) 스모키 멤버에 대한 호기심은 별로 없었다. 기타 비트가 특별할 것도 없었고 드럼도 요란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그저 소프트 록 내지 컨트리 록에 가까운 사운드가 가장 큰 미덕(?)이었다.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흥겨우니까. 어쩌면 1970년대 통기타 문화에 영향 받은 듯하다.  스모키의 전성기 시절 모습.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크리스 노먼이다.  스모키는 1974년 첫 앨범을 낸 이래 여러 멤버가 거쳐 갔으나 지금도 건재하다. 구글에 검색해 보니 2010년 신보 〈Take a Minute〉을 발매했는데 덴마크 차트에서 최고 3위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그해 10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독일에서 싱글 〈Sally’s Song (The Legacy Goes On)〉이 출시됐다. 이 곡은 스모키의 대표작 〈Living Next Door to Alice〉의 후속 편이다.    원래 이 노래(〈Living Next …〉)의 오리지널 곡은 호주 출신 트리오 ‘뉴 월드(New World)’가 1972년 처음 불렀다. 호주 차트에서 35위에 올랐었다. 스모키가 다시 불러 1976~77년 호주와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독일, 아일랜드, 노르웨이, 스위스에서 1위를 차지했다. 영국 싱글 차트에선 5위, 미국 ‘빌보드 핫 100’에선 25위까지 올랐다.    〈Living Next…〉가 소꿉친구 앨리스에게 24년을 기다리며 속앓이만 하다 떠나보낸 이야기라면, 〈Sally’s Song〉엔 그녀가 쓴 ‘미안하다’는 메모가 발견되면서 복잡한 심사가 전개된다. 잠깐 가사를 살펴보면 이렇다.    샐리가 떠났어. 난 아직도 아침에 날 떠난 이유를 몰라. 심지어 작별인사도 없이. 날 떠난 이유를 알 수 없어.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도 몰라. 그녀는 말 대신 미안하다는 쪽지를 남겼어.  (Sally’s gone. And I still don’t know why she left me in the morning. Didn’t even say goodbye. I don’t know why she left me. Don’t know where she is: She didn’t say, she just left a note. That said “I’m sorry”)  지난 5월 20일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스모키의 전 리드보컬 크리스 노먼의 내한 공연이 있었다. 국내 팝팬의 사랑을 받던 스모키의 히트곡들을 불러 40~50대 중년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다.  지난 5월 20일 스모키의 ‘리즈 시절’ 보컬이었던 크리스 노먼(Chris Norman)의 라이브 공연이 서울에서 있었다. 지금은 솔로로 활동 중이지만 그는 무려 22년간을 스모키의 보컬로 군림했다. 스모키의 히트곡들은 모두 그의 음성으로 모조리 채워져 있다. 어쩌면 스모키의 전성기 시절과 크리스의 불꽃 같았던 20~30대가 정확히 일치할지 모른다. 공연장인 여의도 KBS홀은 중년 남녀로 가득했다. 그 시절의 철수와 영희로 돌아가려는 듯 기꺼이 크리스 노먼에 열광했다. 몸을 흔들고 떼창을 부르며 무대 앞으로 다가섰다.    크리스 노먼은 올해로 68세. 노장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건장했고 허스키 보이스는 매력적으로 들렸다. 그가 스모키를 떠난 뒤에도 정규, 베스트, 라이브 앨범 등 지금까지 29장의 솔로 앨범을 내놓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국에서만 잊혔을 뿐인 것이다.    한국 투어 기념 앨범인 〈크리스 노먼 더 히츠(Chris Norman The Hits)〉를 샀다. CD1에는 스모키 시절 히트곡이 담겨 있었고 CD2에는 90년대 이후 발표됐던 15곡의 솔로곡이 채워져 있었다. 트렌디한 스타일의 록 넘버 〈Waiting〉, 컨트리와 포크 록이 절묘하게 합쳐진 〈Hard to Find〉와 〈Cat’s Eyes〉, 과거 스모키 사운드가 연상되는 〈Blue Rain〉 등이 귀를 흥겹게 자극했다. 역시 구관이 명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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