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규

비–김태희, 송중기–송혜교. 결혼 당시 화제를 모았던 대표적인 연하남–연상녀 스타 커플이다. 2016년 65세 기준 한국 남자의 기대수명은 83.4세, 여자 87.6세로 여자가 약 4.2년 더 산다. 남성이 여성보다 수명이 짧은 것은 인간사회와 동물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이렇게 볼 때 연하남–연상녀는 생물학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커플인 셈이다. 남자들의 수명이 더 짧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남자가 흡연이나 음주 등 건강에 안 좋은 행동을 더 많이 하기 때문이라는 주장부터 사냥 등의 힘든 육체노동으로 에너지를 더 많이 소비하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그 밖에 여성 세포의 강인함 등 다양한 가설이 있다.그중에서 가장 유력한 가설은 바로 남성의 바람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바람 잘 피우는 남성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깊은 저음의 목소리를 내며 턱수염이 많아 면도 자국이 유난히 푸르스름하다. 또한 유난히 성욕이 높아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은 것은 물론이고 게다가 어깨나 팔 등의 근육이 발달한 대신 체지방이 적어 나이가 좀 있어도 몸매는 날씬한 편이다.그들의 이 같은 매력적인 특징을 조절하는 것은 바로 테스토스테론이란 남성호르몬이다. 그런데 바람기 많은 남성에게 테스토스테론은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테스토스테론이 많이 분비될수록 수명이 더 짧아지기 때문이다.가장 좋은 예가 호주에 서식하는 ‘북부쿠올’이라는 주머니고양잇과의 유대류다. 이 동물의 암컷은 수명이 3년이지만 수컷은 고작해야 1년이다. 수컷이 빨리 죽는 이유는 일생 단 한 번 겪는 짝짓기 시기에 암컷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수컷끼리의 싸움과 테스토스테론의 급격한 증가로 인한 지방 부족 현상으로 생존 확률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한 생태학자는 북부쿠올 수컷들의 짝짓기 행태를 ‘마치 죽음과 섹스를 하는 것 같다’고 비유할 정도다.환관들의 평균수명은? 여러 동물실험 결과에서도 테스토스테론이 수명을 단축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조류학자들이 수컷 새에게 테스토스테론 보충제를 꾸준히 섭취하게 한 결과, 예상대로 보충제를 먹지 않은 개체에 비해 둥지를 더 많이 만들고 경쟁자를 쫓아내는 전투능력이 향상됐다. 그런데 지방 비율이 낮아지는 현상 등으로 인해 그들의 생존력은 더 떨어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동물실험 결과만으로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다. 또한 인간을 대상으로 테스토스테론을 변화시키는 비윤리적인 실험을 감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테스토스테론을 분비할 수 없는 매우 특별한 남성 집단이 있다. 왕을 모신 환관이나 17~18세기 유럽의 소년 합창단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단지 성기만이 아니라 음경과 음낭을 포함한 남성 생식기 전체를 거세당했다. 이들이 일반 남성들과 가장 다른 점은 테스토스테론의 유무이니, 평균수명을 비교하면 테스토스테론이 얼마나 남성 수명에 악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변성기를 거치지 않도록 일찍 거세해 소프라노 소리를 내는 카스트라토 가수들은 거세하지 않은 다른 가수들과 수명 차이가 없었던 것. 하지만 몇 년 전에 결정적인 자료가 한국에서 나왔다. 16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 사이에 살았던 조선 환관 385명의 기록이 담긴 ‘양세계보’라는 내시 가문 족보를 조사한 연구결과가 바로 그것이다.조선시대 임금을 비롯해 왕족 남성들의 평균수명은 45~47세다. 또한 당시 궁궐 출입이 잦았던 관직을 많이 배출하는 등 생활환경 면에서 궁궐에서 일한 환관과 비슷했던 3개 가문 남성들의 평균수명을 조사한 결과 51~55세로 나타났다. 그에 비해 양세계보에 기록된 환관 중에서 다른 역사기록에서도 확인된 환관 81명의 평균수명은 70세였던 것. 사대부 남성보다는 15~19년, 임금과 왕족 남성보다는 무려 23~25년을 더 오래 살았다.더욱 놀라운 것은 100세 이상 산 환관이 3명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81명 중 3명이니 100세인의 확률이 27명 중 1명꼴이었던 셈이다. 이는 현대의 일본인(3500명 중 1명)과 미국인(4400명 중 1명)과 비교해도 놀라운 수치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길 수밖에 없다. 거세당한 환관 가문에 어떻게 족보가 있나 하는 점이 바로 그것. 족보란 자손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의 왕들은 중국 등의 다른 문화권과는 달리 환관들에게도 결혼할 권리와 함께 다른 집안의 거세된 소년을 양자로 들여 대를 이을 수 있게 했다. 환관들은 양자 역시 고자에 한해 입양해야 했으므로 같은 성을 찾기가 쉽지 않아 양자들에게 생가에서 쓰던 성과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게 했다. 이처럼 여러 집안의 남자들이 혼합된 족보이기에 ‘양세계보’의 통계는 더욱 신뢰 있는 연구 결과로 전 세계의 연구자들에게 인용되고 있다.만약 테스토스테론이 원인이라면 남성들은 좀 억울할 수 있다.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은 면역기능 강화 및 세포 손상을 방지하는 효과까지 있는데, 남자들만 번식을 위해 수명 단축이라는 위험을 감내해야 하니 말이다. 그 이유는 번식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근원적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바람기 많은 남성의 경우 1년에 100명의 각기 다른 여성과 섹스를 해 100명 이상의 자손을 남길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 아무리 많은 남성과 섹스를 해도 1년에 낳을 수 있는 자식은 한두 명으로 한정된다. 다시 말해 여성에 비해 남성의 잠재적 번식 이득이 훨씬 큰 셈이다. 따라서 남성을 비롯한 포유류 수컷들은 테스토스테론을 근육처럼 유지하기 힘든 신체기관에 투자하거나 위험한 행동에 사용하기도 한다. 암컷보다 잠재적 번식 이득에 대한 대가가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성들이 마냥 어리석진 않다. 테스토스테론의 분비를 적게 할 수 있는 다양한 장치를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가 바로 그것이다. 평생 함께할 짝이 있어 자손을 번식시킬 안정된 환경이 마련된다면 남성은 굳이 다른 여성을 유혹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이처럼 안정된 환경의 남성들은 테스토스테론의 수치가 더 낮으며, 결혼한 남성의 심혈관계 질환 위험 및 치사율이 더 낮은 것으로 밝혀졌다.또 다른 장치 하나는 부성애다. 자식을 돌보기 위해서는 건강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 남성들은 근육과 위험한 행동을 포기해야 한다. 실제로 자식의 양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남성은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낮아지고 체중이 늘어난다. 혹시 오늘도 힘든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갈까 다른 데(?)로 샐까 망설이는 남성 가장이 있다면 정확히 알려주고 싶다. 집에서 기다리는 마누라와 자식들이 바로 당신의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생명의 은인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유광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마셨다는, 정확히 말하자면 유학준비생 원효가 마시고 대사로 거듭났다는, 해골 물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만히 있다가 돌 맞은 것처럼 억울한 사람이 생각난다.    배움에 목말랐던 신라 승려 원효와 의상이 선진불교를 배우기 위해 당(唐)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가던 길에 날이 저물었다. 비바람을 피할 곳을 찾아 무너진 동굴에 들어가 노숙을 했다. 한밤중에 목이 말랐는데 주변을 더듬어 보니 물이 있어 마셨다. 그야말로 감로수(甘露水)처럼 달콤했다.    날이 밝아서 보니 자신들이 잔 곳은 동굴이 아니라 무너진 무덤 속 썩어 문드러진 시체 옆이었으며 감로수는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 충격과 놀람, 역겨움에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에 한참 토악질을 하던 원효가 번개처럼 깨달았다.    ‘해골에 담긴 물은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데, 어찌 어제는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하게 마셨고 오늘은 구토를 한단 말인가? 달라진 것은 해골 물이 아니라 내 마음일 뿐이니, 모든 것이 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술수로구나[一切唯心造].’    깨우친 원효는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와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널리 알렸고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 같은 불후의 저작을 집필했다.    전해지는 승전(僧傳)에 따라, 해골 물이 아니라 시체 썩은 물이었다고도 하고, 무덤인 것을 확인하고 나자 다음날 귀신이 출몰했다고도 하는 등, 조금씩 내용이 다르지만 물을 마시고 원효가 깨달았고 유학 대신 돌아와 포교에 힘쓴 고승(高僧)이 되었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이야기의 불편함은 원효의 깨달음이 마뜩잖아서도 아니고, 이야기에 조작의 냄새가 농후하다는 것도 아니며, 해골 물을 마시고 감염되지 않은 것이 도무지 현대의학적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는 어깃장 같은 것도 아니다. 같이 유학 가던 젊은 승려의 처지가 딱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같이 해골 물을 마셔놓고 한 명은 깨달음을 얻었는데 한 명은 아무것도 몰랐단 말처럼 들린다. 한 명은 진각(眞覺)을 이뤄 유학이니 당나라니 하는 것의 부질없음을 깨달았는데 다른 한 명은 미련하게 당나라로 가서 공부를 계속했다. 명민하고 활달한 원효와 대조적으로 갑갑하고 답답해 보이는 의상(義湘)의 처지가 무척이나 졸렬해 보인다.    의상도 대단한 고승이다. 어마어마한 업적을 남겼고 한국 불교에 끼친 영향은 원효보다 심대하다면 더 심대했지 절대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말을 아무리 늘어놔 봐야 구질구질한 변명이나 어설픈 하소연으로 들린다. 해골 물 이야기의 강력한 이미지로 인해, 의상은 이미 쫀쫀한 인간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한마디 입도 뻥끗 못하고 어처구니없이 억울하게 된 의상을 위해 어느 정도의 변명이 필요한 듯하다.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제대로 보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의상과 원효 이야기를 살펴봐야 하는데, 일단은 조금 돌아서 〈광덕·엄장〉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섹스리스 광덕과 인간적인 엄장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은 친구였다. 둘이 각각 도(道)를 닦았는데 먼저 득도(得道)하면 서로 알려주기로 약속했다. 어느 날 저녁 하늘에서 엄장에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먼저 서방정토로 가네. 자네도 서둘러 오게.”    약속대로 친구 광덕이 득도하여 서방으로 가면서 알려준 것이다. 이에 엄장이 광덕의 집으로 가보니 정말 광덕이 죽어 있었다. 혼자 살던 엄장과 달리 광덕은 처가 있었는데, 엄장은 광덕의 처와 함께 시신을 거둬 무덤을 만들어 주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같이 지내는 것이 어떻소?”    광덕의 처가 좋다며 그러자고 했다.    엄장이 밤이 되자 자연스럽게 광덕의 처를 가까이하려 했다. 그러자 광덕의 처가 벌떡 일어나 꾸짖었다.    “당신은 절대로 득도하지 못하겠군요.”    그러고는 정말이지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남편은 저와 십여 년을 함께 살았지만 단 한 번도 같은 침상에 눕지 않았고 몸을 더럽히지도 않았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단정하고 바르게 앉아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미타불을 불렀습니다. 정성이 이랬으니 어떻게 득도하지 않겠습니까?”    광덕 처의 말인즉, 광덕이 10년 넘게 같이 살면서 동침은커녕 밤마다 염불을 외며 도를 닦았다는 거였다. 그러려면 뭐 하러 혼인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이 말을 들은 엄장은 부끄러워 그 길로 그곳을 나와 원효를 찾아갔다. 원효에게서 깨끗하게 바라보는 법[淨觀法]을 배웠고 결국은 득도를 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광덕·엄장〉 조에 있는 이 이야기는 읽을 때마다 광덕 때문에 갑갑하다. 대체 이 작자는 왜 결혼해서 부인과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냥 밥해 주고 빨래해 주는 식모를 구하지 말이다.    아무튼 〈광덕·엄장〉의 핵심은 고고하게 정진한 광덕이 먼저 득도했고 속되고 인간적인, 어쩌면 광덕의 처를 탐내 넉살 좋게 같이 살자고 집적댄 엄장의 득도가 요원했다는 거다. 물론 엄장은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원효를 찾아가 깨우침을 얻어 성불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러니 우리가 도를 닦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광덕처럼 살아야 할까, 엄장처럼 살아야 할까. 묻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답은 명확하다. 광덕처럼 되어야 한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 대체 무슨 소리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일단 다음 이야기까지 들어보시라. 그리고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라.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삼국유사》에는 〈광덕·엄장〉과 꼭 닮은 이야기이지만 정확하게 반대의 이야기가 있다. 바로 〈남백월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 조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이야기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역시 친구였다. 역시 득도하려고 각자 암자를 짓고 도를 닦았다. 어느 날 달달박박이 지내는 암자에 스무 살가량의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온몸에 난초와 사향 향기를 풍기면서 그의 암자에서 하룻밤 자고 가겠다고 간청했다. 달달박박은 이대로라면 큰일 나겠다 싶어, “절은 정결한 곳이니 썩 떠나시오”라며 그녀를 내쫓았다.    여인이 이번엔 노힐부득의 암자로 가서 같은 말을 했다. 그런데 노힐부득은 달달박박과 달랐다. 깊은 산골인 데다 날도 저문 것을 보자 그녀를 받아들여 자고 가게 했다. 노힐부득은 밤새도록 염불을 했다. 그렇게 밤을 보내려 하자 여인이 그에게 말했다.    “제가 마침 해산할 기미가 있어요. 부탁이니 해산할 자리를 만들어 주세요.”    여인은 집요했다. 그가 넘어오지 않자 갖은 수선을 피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노힐부득은 그녀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그녀의 해산을 도왔다. 그러자 이번엔 여인이 목욕을 시켜달라지 않는가. 그는 부끄러움과 난감함, 이러다가 파계(破戒)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까지 교차했다. 어쩔 수 없이 목욕통을 준비해서 그녀를 통 안에 앉히고는 물을 데워 그녀의 몸을 닦아 주었다. 그러자 여인이 한술 더 떴다.    “스님도 같이 목욕하시지요.”  결국 그는 그녀의 말대로 한 목욕통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말았다.    아무튼 이러저러해서 아침이 되었다.    여인을 쫓아냈던 달달박박이 노힐부득의 암자를 찾아왔다. 자신에게 쫓겨난 여자에게 친구 노힐부득이 파계를 했을 것 같아서였다. 실컷 비웃어주려고 노힐부득의 암자 문을 여는 순간 깜짝 놀랄 일을 목격했다.    노힐부득이 미륵부처가 되어 연화대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노힐부득이 사정을 설명해 주자 달달박박이 크게 탄식했다.    “내가 장애가 많아 부처님을 만나고도 도리어 만나지 못한 셈이 되었구나.”    그러고는 자신을 좀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그러자 노힐부득이 말했다.    “통 속에 남은 물이 조금 있으니 그걸로 목욕을 하시오.”    그렇게 남은 물로 목욕하자 노힐부득도 결국 득도한 아미타불이 되었다. 이런 소문을 들은 산 아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우러러보며 감탄했다. 두 부처는 그들에게 불법의 요체를 가르치고는 구름을 타고 서방정토로 떠났다.    〈광덕·엄장〉 이야기와 구조는 꼭 같지만 거꾸로 뒤집혀 있는 인화지와 같은 느낌이다. 여기선 그렇게 엄정한 달달박박이 오히려 나중이 되고, 반대로 엄장처럼 조금 느슨하고 헐렁한 노힐부득이 먼저 득도해서 부처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쯤 되면 아리송해진다. 누가 더 나은지, 누가 더 훌륭한지를 따지기가 난감해진다.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 스님은 왜 이렇게 거꾸로 뒤집혀 상충하는 이야기를 써놓으셨는지 알 수가 없다. 대체 어떤 삶이, 어떻게 사는 것이 옳단 말인가?      의상과 낙산사  관세음보살을 만난 후 낙산사를 일으켰다는 의상 대사.   이제 당나라에 유학 갔던 의상과 그동안 신라에서 포교를 벌여 명성을 쌓은 원효가 어떻게 엇갈리는지를 살펴보자. 그들의 이야기가 《삼국유사》 〈낙산이대성 관음・정취, 조신(洛山二大聖 觀音・正趣, 調信)〉 조에 전한다.    의상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보니,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이 동해 해변의 동굴에 사신다지 않는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당나라 전역을 다니며 만나 뵈려 했는데, 얼마나 고생고생 불법을 닦았는데 이런…, 그 먼 곳이 아니라 우리나라 고국 동해안에 계시다니…. 의상의 막막하고 허탈한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안 될 정도다. 하지만 역시 의상이었다. 다시 용기를 내서, 관음보살이 산다는 서역 보타낙가산(寶陁洛伽山)의 이름을 따서 낙산(洛山)이라 이름 붙인, 그곳의 그 동굴을 찾아갔다.    그리고 성심을 다해 관음보살을 뵙기 위해 정성껏 7일 동안 재계(齋戒)를 한다.    마지막 날 새벽 일찍 의상은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물 위로 던졌다. 그랬더니 그 자리가 물 위에 둥둥 떴다. 의상의 신통력이 대단한 건지 아니면 보살께서 허락하신 것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거다. 그러더니만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천룡팔부(天龍八部)가 나타나서 굴속으로 들어가라고 안내했다.    굴로 들어간 의상이 또다시 예를 정성껏 올렸다. 그러자 허공에서 수정염주(水晶念珠) 한 꾸러미가 나타났다. 그가 공손히 염주를 받고 물러나자, 이번엔 동해 용이 나타나 여의주 한 알을 그에게 바쳤다. 그것까지 같이 받아서는 굴 밖으로 나왔다.    의상은 지겹지도 않은지 또다시 재계를 올렸고, 그런 지 7일 만에 굴로 다시 들어가 드디어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났다. 관음이 말했다.    “앉은 자리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절을 짓는 것이 좋겠다.”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났고, 그래서 절을 짓고 관음상까지 만들어 봉안했다. 그러자 그 대나무가 사라졌다. 의상은 그제야 관음의 진신이 이곳에 머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절을 낙산사(洛山寺)라고 하고, 받은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그곳에 모셔두고 떠났다.    거의 암호처럼 알아듣기 힘든 기이한 상황이 이어진다. 의상의 신통력이 앉은 자리를 물에 띄우질 않나 염주와 여의주를 받질 않나,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다. 신적 존재만 해도 천룡팔부를 만나고 동해 용왕도 만난다. 그리고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관음보살도 만나 그가 하라는 대로 절을 짓기까지 한다. 짧은 글이기에 시간이 순식간에 흐른 듯하지만, 절을 짓는 것이 며칠 만에 끝날 일이 아니란 것을 감안하면, 의상의 행동과 생각이 정말 벽창호처럼 갑갑하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아니 그토록 열심히 재계를 올리고 갖은 정성을 다한 후에 관음보살을 만나고도 그때는 깨닫지 못하고, 나타났던 대나무가 사라지자 ‘비로소 관음보살이 이곳에 계신 것을 알았다’니 대체 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보통 사람 같으면 신기한 징조 중 하나만 체험해도 대번에 “아이고 보살님, 감사합니다!” 하고 깨달을 텐데, 이 의상은 마지막에 대나무가 사라진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믿다니 말이다. 좋게 말해 진지한 구도자의 모습이지만 막말로 하면 정말 대책 없는 갑갑함의 지존이라 하겠다.      관음보살을 몰라본 원효  의상대사가 세운 낙산사의 의상대. 사진=문화재청   어떻든 의상이 깨달았다니 다행이다. 그러나 그가 대체 뭘 깨달았는지는 요령부득이다. 역시 의상의 이야기는 어렵다. 곧바로 이어지는 원효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무척이나 쉽다. 헐렁헐렁한 것이 정말 원효답다. 그를 민중불교의 창시자로 지목하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의상이 낙산에서 관음을 만나고 낙산사를 창건한 후 시간이 꽤 지났다. 원효가 그런 소리를 듣고 그도 예를 올리려고 했다. 해골 물에서는 앞섰던 원효가 이번엔 한걸음 늦은 셈이다.    아무튼 그가 낙산 남쪽 부근에 이르렀을 때였다. 논에서 흰옷 입은 여자가 벼를 베고 있었다. 장난꾸러기답게 원효가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 벼 좀 주지 그래.”    단순한 말일 수도 있지만, 원효의 전력이 있기에 문맥상 무슨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다. 여자를 꾀는 희롱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아직 벼가 영글지 않아 드릴 수 없네요.”    헛물을 켠 원효가 또 시적시적 낙산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다리 밑에서 어떤 여자가 서답을 빨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서답은 생리대인데, 1회용이 없던 옛날에는 모두 다 천으로 만들어서 썼다.    옛날 여인네들은 빨래를 꼭 냇가에 가서 했고, 아무리 지독한 시어머니라도 빨래터에 가는 며느리를 못 가게 드잡이질하지는 않았던 거다. 바구니 위로 가득 쌓인 빨랫감 밑에 서답을 숨겨서 가져가는 것이 여자들만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여인네들의 빨래터는 금남(禁男) 구역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더펄거리는 원효가 그 빨래터를 지나시는 거였다. 모른 척하고 그냥 가야 하는데 어디 천하의 원효가 그럴 수 있나, 그가 대뜸 여인을 희롱했다.    “여보시오, 거 물 좀 한 잔 주시오.”    벼 베던 여인처럼 이 여인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말없이 냇물을 떠서 바치는데, 서답을 빨던 불그스름한 더러운 물을 떠서 주는 것이 아닌가. 원효는 받은 물을 엎질러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그 순간이었다. 근처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靑鳥] 한 마리가 소리쳤다.    “그만! 이런 땡중을 보게나.[休醍醐和尙]”    놀라 돌아보니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소나무 아래에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어떻든 맥 빠진 원효는 어찌어찌해서 낙산사에 도착했고 의상이 조성해 놓은 관음상 앞에 가서 예를 올렸다. 그런데 그 관음상 앞에 조금 전 본 신발 한 짝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신발 한 짝’의 존재 증명    ‘신발 한 짝’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데 모두 다 자신의 존재 증명과 관련 있다. 그리스 신화의 테세우스(Theseus)가 아버지의 신발 한 짝을 들고 찾아가서 만나는 것도 그렇고, 영웅 이아손(Iason)이 헤라 여신을 업고 강물을 건너다가 신발을, 그것도 꼭 한 짝만, 잃어버려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소문에 부합하게 되는 것도 그렇다.    달마대사가 죽어 묻었는데 먼 나라에서 달마가 여전히 살아서 신발 한 짝만 들고 다닌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의 관을 열어보니 신발 한 짝만 덩그러니 남아 있더라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지금 원효가 본 관음상 앞에 놓인 신발 한 짝은 결국 조금 전 소나무 밑에 있던 신발 한 짝과 합해져야 온전한 켤레가 되는 것으로, 관음이 곧 소나무라는 존재 증명의 증표인 것이다.    그렇게 신발 한 짝을 보고서야, 비로소 원효는 자신이 희롱하고 수작했던 여인들과 소나무가 관음의 진신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자신이 외치는 민중불교의 정수, 매일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곧 부처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모든 것을 깨달았지만, 역시 원효는 원효다웠다. 그냥 돌아가지 않고 다시 그 신성한 굴로 들어가 관음을 보려 한다. 하지만 풍랑이 거세게 일어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미 봐 놓고, 만나 놓고, 대체 뭘 더? 군더더기야, 군더더기.’    이런 의미를 알아들은 원효는 훌훌 털어 버리고 떠났다.      누가 옳은가?    원효의 행동과 깨달음은 우리 같은 범인(凡人)도 얼핏 이해가 쉽다. 의상은 도통 뭔 소린지 모르지만 말이다. 이제 묻자. 원효가 훌륭한가, 의상이 훌륭한가? 섹스리스 광덕처럼 살아야 하는가, 욕망덩어리 엄장처럼 살아야 하는가? 여인을 목욕시켜 준 노힐부득이 옳은가, 물리쳐 버린 달달박박이 옳은가?    답을 아시겠는가? 사실 질문이 애초부터 잘못되었다. 구분하고 따지고 서열을 세우려는 짓거리 자체가 애초부터 글러먹은 거였다. 모든 것이 옳고 모든 것이 진리였다.    우리가 ‘원효의 해골 물’을 그리도 좋아했던 것은 우리 시각에 쉽게 포착되고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입맛에 짝짝 달라붙기에 원효가 ‘더 나아 보이고’ 그래서 ‘더 옳아 보였던’ 거였다. 자신의 아집(我執) 속에서 판단해 놓고 남들에게 동의해 달라고 멋대로 우기고 강요했던 거다.     고지식한 의상도 탐욕덩어리 광덕도 교활한 달달박박도 모두 다 옳았지만,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폄훼했던 것이다.    해골 물을 마시고 돌아온 원효도 깨달았지만 그걸 마시고 당나라로 갔던 의상도 역시 깨달았던 것이다. 단지 원효의 길과 의상의 길이 달랐을 뿐이었다. 그걸 두고 아둔한 우리가 왈가불가했던 거다. 미련하게도… 말이다.⊙

이한우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서 언언(言偃)이라는 사람이 공자(孔子)에게 “예(禮)가 이토록 시급한 것입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한다.    “대개 예라는 것은 선왕(先王)이 하늘의 도리를 이어받아 그것으로써 사람의 정(情)을 다스린 것이다. 그러므로 예를 잃은 자는 죽고 예를 얻은 자는 살아간다.”    사람의 정[人情]을 다스리는 것이 예라면 다스리지 못한 것이 비례(非禮), 무례(無禮)가 된다. 그리고 《예기》에서는 흥미롭게도 사람의 정을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심내는 것 7가지, 즉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이라고 말한다. 이는 따로 배우지 않고서도 발산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마땅함[義]으로 다스려야 한다. 《예기》에서는 사람의 정을 다스리는 마땅함으로 부모의 자애로움[慈=子], 자식의 효도[孝], 형의 사랑[良], 아우의 공순[弟=悌], 지아비의 의로움[義], 지어미의 순종[聽=從], 어른의 베풂[惠]과 아이의 따름[順], 임금의 어짊[仁]과 신하의 충성스러움[忠] 10가지를 제시한다. 몇몇을 제외한다면 현대사회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결국 마땅함으로 사람의 정을 다스리는 것이 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곧바로 그동안 우리가 관심을 가졌던 지인(知人)의 문제로 연결된다.    “사람은 마음을 숨기고 있어 그 속을 헤아릴[測度] 길이 없으며 사람의 좋고 나쁜 점[美惡]은 모두 그 마음 안에 있어 그 얼굴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단 한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알아내고자 한다면 예가 아니고서 무엇으로 할 수 있으랴!”      “곧되 예가 없으면 강퍅해진다”    따라서 먼저 예를 배워서 알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비례, 무례, 결례(缺禮), 실례(失禮) 등을 알아차릴 수 없다는 말이다. 이 같은 《예기》의 도움을 받게 되면 우리는 《논어(論語)》 태백(泰伯)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단순히 예를 갖추라는 도덕 명령이 아니라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는 비결임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공자는 말했다.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恭而無禮] 몸만 힘들고[勞] 조심하되 예가 없으면[愼而無禮] 두렵고[葸=恐] 용맹하되 예가 없으면[勇而無禮] 위아래 없이 문란해질 수 있고[亂] 곧되 예가 없으면[直而無禮] 강퍅해진다[絞].”    날 때부터 공이례(恭而禮), 신이례(愼而禮), 용이례(勇而禮), 직이례(直而禮)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생이지지(生而知之)한 사람이다. 그다음은 그것을 배워서라도 알아야[學而知之] 한다. 여기서 무례(無禮)란 예를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바로 이 예의 자리에 다시 사리분별 혹은 현실감을 집어넣어 다시 해석해 보면 그 뜻은 훨씬 명확하게 드러난다. 때와 장소를 제대로 가려가며 공손하고 조심하고 용맹하고 곧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그 사람의 공손, 조심, 용맹, 곧음만 보지 말고 그 사람이 상황에 맞게 행동을 하는지[隨時處變]를 보고서 판단할 때 사이비(似而非)가 아닌, 진짜 그 사람의 진면목을 꿰뚫게 되는 것이다.      정장(亭長)에서 승상에 오른 주박  공자의 제자 자로.  《한서(漢書)》 주박전(朱博傳)에 따르면 주박(朱博)은 두릉(杜陵) 사람으로 집안이 가난해 젊은 시절 현(縣)의 급사(給事)로 정장(亭長)이 됐다. 우리 식으로 보면 동장 정도 되는 말직이다. 도적을 잡는 일이 있을 때는 과감하게 나서 피하지를 않았다. 점차 승진해 (현의) 공조(功曹)가 됐고 협객들과 사귀기를 좋아했다. 이때 전장군 소망지(蕭望之)의 아들 소육(蕭育)과 어사대부 진만년(陳萬年)의 아들 진함(陳咸)도 재주가 뛰어나 이름이 있었는데 박(博)은 이 두 사람 모두와 우정을 나눴다.    그런데 진함이 어사중승으로 있으면서 궐내[省中=禁中]의 일을 누설한 일에 연루돼 수감에 처해졌다. 주박은 관리를 그만두고 몰래 정위(廷尉)의 관아에 들어가 함의 일을 훔쳐보았다. 진함이 고문을 당하며 아주 고생을 하자 주박은 의원(醫員)인 것처럼 꾸며 옥 안에 들어가 진함을 만났고 죄에 걸려든 정황을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 주박은 감옥 밖으로 나와 다시 성과 이름을 바꾸고서 진함이 수백 대나 맞는 등의 고초를 겪고서 어쩔 수 없이 털어놓은 것임을 입증하여 감형될 수 있게 해준다. 진함은 정식 논죄를 받아 감옥에서 나왔다. 덕분에 주박은 이름이 났으며 군의 공조가 됐다.    드디어 지방의 행정을 맡아 태수로 나갔다. 성실하고 진취적이었기에 가는 곳마다 잘 다스린다는 좋은 평가를 얻었다. 다만 배움이 짧은 데다가 나아가 유학을 싫어했다. 유리(儒吏)들은 수시로 옛 기록을 운운하며 글을 올렸으나 주박은 그들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태수란 한나라 관리이며 3척(짜리 죽간에 실린) 율령이면 얼마든지 일을 할 수 있는데 무슨 유생들이 함부로 성인(聖人)의 도리 운운하는가? 정 그런 도리를 따르고 싶거든 훗날 요순(堯舜) 같은 임금이 나타났을 때 그 사람에게 가서 진설(陳說)하라.”    여기서 우리는 《논어》 선진(先進)편에 나오는 자로(子路)를 떠올리게 된다. 한번은 자로가 계씨(季氏)의 가신이 되어 공자의 또 다른 제자인 자고(子羔)를 비읍(費邑)의 책임자로 삼자 공자는 탄식했다.    “남의 자식을 해치는구나!”    이에 자로가 맞섰다.    “백성과 사람이 있고 사직(社稷)이 있으니 어찌 반드시 책을 읽은 뒤에야 학문을 하겠습니까?”    공자는 말했다.    “바로 이런 너 때문에 나는 말 잘하는 사람[佞者]을 미워하는 것이다.”    자로는 전형적으로 용이무례(勇而無禮)한 자다. 주박의 말은 자로의 말 그대로다. 영자(佞者)에 대한 공자의 부정적인 인식은 이 구절만 봐서는 명확히 알기 어렵다. 《논어》 위령공(衛靈公)편에서 수제자인 안연(顔淵)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방책에 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라의 책력을 시행하고 은나라의 수레를 타고 주나라의 면류관을 써야 한다. (그런 연후에) 음악은 순임금의 음악인 소무로 하고 정나라의 음악을 추방하며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나라 음악은 음탕하고 말 잘하는 사람은 위태롭기 때문이다.”    자기는 물론이고 나라를 망칠 사람이 바로 영자인 것이다.      실무 능력이 뛰어났던 주박    한나라 애제.그러나 주박은 이재(吏才), 즉 관리로서 다스리는 재주가 뛰어났다.    “박은 군을 다스리면서 늘 속현(屬縣)들에 명해 각각 자기 현의 호걸들을 써서 대리(大吏-고위관리)로 쓰도록 하고 문재(文才)와 무재(武才)를 감안해 적재적소에 배치토록 했다. 현에 큰 도적이나 그 밖의 다른 비상사태가 있으면 즉각 문서를 보내 엄하게 책망했다. 이에 그들이 온 힘을 다해 효과가 있으면 반드시 큰 상을 주었고 간교함을 품고서 임무를 소홀히 할 경우에는 즉각 주벌을 시행했다. 이 때문에 호강(豪强)한 자들은 두려워하여 복종했다.”    치적이 뛰어나 도성에 들어가 임시 좌풍익(서울시장)이 됐고 임기를 다 채우자 정식 좌풍익이 됐다. 그가 좌풍익을 할 때 법리와 총명(聰明)은 설선(薛宣)에 미치지 못했지만 무략과 계책이 많았고 비밀 연락망을 잘 조직했으며 이익을 별로 탐하지 않았고 과감하게 주살(誅殺)을 시행했다. 그러나 또한 큰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에 아래 관리들은 이로 인해 온 힘을 다했다. 이에 그는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탄탄대로 승진의 길을 걸었고 마침내 애제(哀帝) 때 신하로서는 최고의 자리인 승상(丞相)의 자리에 오른다.    그런데 그에 앞서 애제의 할머니 정도(定陶)태후가 존호를 원했을 때 태후의 사촌동생 고무후(高武侯) 부희는 대사마(大司馬)로 있으면서 승상 공광(孔光), 대사공(大司空) 사단(師丹)과 함께 공동으로 바른 의견을 고수했다. 반면에 공향후(孔鄕侯) 부안(傅晏) 또한 태후의 사촌동생이었는데 아첨을 하면서 태후의 뜻을 따르고자 하여 마침 주박이 새롭게 지방에서 불려와 경조윤이 되자 함께 교결을 맺고서 존호를 받게 하려는 계책을 만들어 (애제가) 효도를 넓히게 하려 했다. 이로 말미암아 사단이 먼저 면직됐고 주박이 그를 대신해서 대사공이 되자 여러 차례 애제가 한가한 틈을 타서 봉사를 올려 말했다.    “승상 광의 뜻은 자기 한 몸이나 지키는 데 있어 나라를 제대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대사마 희는 지존(至尊)의 지친(至親)이면서 대신에게 아부하여 당파를 이뤘으니 정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애제는 드디어 부희를 파직시켜 내보내 봉국으로 나아가게 했고 공광을 면직시켜 서인으로 삼고서 주박을 광을 대신해 승상으로 삼고서 양향후(陽鄕侯)에 봉하고 식읍은 2000호로 했다. 이에 주박은 글을 올려 사양하며 말했다.    “고사에 따르면 승상을 봉할 때 1000호를 넘지 않았는데 신 홀로 제도를 뛰어넘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1000호를 반납하고자 합니다.”      태후에게 영합하다가 탄핵당해  주박을 탄핵한 좌장군 팽선.  애제는 허락했다. 부(傅)태후는 부희에 대한 원망이 그치지를 않아 공향후 안으로 하여금 은근히 승상에게 눈치를 주어 부희의 후(侯) 작위를 박탈하도록 아뢰게 했다. 주박은 조(詔)를 받고서 어사대부 조현(趙鉉)과 토의를 하니 조현이 말했다.    “그 일은 이미 전에 결정되었는데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박이 말했다.    “이미 공향후가 가져온 (태후의) 뜻에 따르기로 했소. 필부와의 약속이라도 죽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하물며 지존이겠습니까? 박은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오.”    현은 즉시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다.    박은 오직 희만을 배척하는 글을 아뢸 수가 없어 예전에 대사공이었던 범향후(氾鄕侯) 하무(何武)도 전에 역시 죄에 연루되어 봉국으로 돌아간 적이 있어 일이 부희와 유사하다고 여겨 곧장 함께 아뢰어 말했다.    “희와 무는 예전에 자리에 있으면서 모두 정치에서는 무익했는데 비록 이미 물러나서 면직됐지만 작위와 봉토는 그대로 봉받고 있으니 마땅한 바가 아닙니다. 청컨대 모두 벗겨서 서인으로 삼아야 합니다.”    상(황제)은 부태후가 평소에 일찍이 희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박과 현이 태후의 뜻을 이어받은 것으로 의심하고 곧바로 현을 불러 상서로 오게 하여 상황을 물어보니 현이 두려워하여 실상을 자백하자 조서를 내려 좌장군 팽선(彭宣)과 중조(中朝)에 있는 신하들이 함께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선(宣) 등이 주박을 탄핵하여 아뢰었다.      자살로 마감한 주박    “박은 재상이고 현은 상경(上卿)이며 안은 외척으로 그 지위가 특진(特進)이니 모두 팔다리와 같은 대신으로 상의 신임을 받고 있는데도 온 정성을 다해 공을 받들고 은혜와 교화를 넓히는 일에 힘써 백료들을 앞서 이끌 생각은 하지 않고서 모두 아는 바와 같이 희와 무의 일은 이미 성은에 따라 결정된 일이며 3번이나 고쳐서 사면되었는데도 박은 그릇된 도리를 고집하며 폐하의 성은을 훼손하고 외척과 신의를 지킨다며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저버리고 정치를 어지럽게 하면서 간사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 아랫사람에게 붙어 위를 기망하려 하였으니 신하 된 자로서 불충이자 부도입니다. 현은 박이 말한 것이 법에 어긋나는 것임을 알면서도 대의를 굽혀 아첨하고 따라 큰 불경을 저질렀습니다. 안과 박이 희를 면직시키자고 토의한 것은 예를 잃은 것이며 불경입니다.    신은 청컨대 알자에게 조서를 내리시어 박, 현, 안을 불러 정위에 이르러 조옥(詔獄)에 가둬야 할 것입니다.”    제(制)하여 말했다.    “장군, 중(中) 2000석, 2000석, 제(諸)대부, 박사, 의랑을 함께 토의하라.”    우장군 교망(蟜望) 등 44인은 “선(宣) 등이 말한 대로 허락하셔야 합니다”라고 했고 간대부 공승(龔勝) 등 14명은 “《춘추(春秋)》의 대의에도 간사하게 임금을 섬길 경우에는 일반 형벌을 그만두지 않습니다. 노(魯)나라 대부 숙손교여(叔孫僑如)는 노나라 공실을 제 마음대로 하려고 그 족형인 계손행보(季孫行父)를 진(晉)나라에 참소했고 진나라에서는 행보를 잡아가두어 노나라를 혼란에 빠트렸는데 《춘추》는 이 일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기록한 것입니다. 지금 부안은 폐하의 명을 따르지 않아 일족을 패망으로 이끌고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게 만들었으며 대신을 협박해 상을 기망하려 했으며 본래부터 계책을 주도하여 혼란을 빚어냈으니 박, 현과 같은 죄이며 모두 부도(不道)에 해당합니다”라고 말했다.    상은 현의 죽을 죄를 3등급 감형했고 안의 식읍 4분의 1을 삭감했으며 알자에게 지절을 주어 승상을 불러 정위의 조옥에 보내게 했다. 주박은 자살했다.      자로를 닮은 주박    딱히 악행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속된 말로 새로운 줄에 서보려다가 명분에 밀린 경우다. 자로도 위(衛)나라의 권력투쟁에 휘말려 제 수명을 다하지 못했다. 묘하게도 반고(班固) 또한 다른 맥락에서이긴 하지만 주박의 삶을 한 줄로 압축하면서 자로를 끌어들인다.    “박(博)은 열심히 내달려 진취(進取)한 바가 컸으나 도리와 다움[道德]을 생각지 않았으니 이미 뭐라 칭송할 만한 말이 없고, 또 효성(孝成·성제)의 세상을 보았고 대신으로 위임을 받아 이름을 빌려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했다. 세상의 주인[世主]이 이미 바뀌었다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예전과 달리하면서 다시 정씨(丁氏)와 부씨(傅氏)에게 붙어 공향후(孔鄕侯)의 뜻에 맞춰 순종했다. 일이 발각돼 힐책을 당했고 드디어 꾐에 빠졌으니 말은 궁하고 사실은 명확해 짐독(鴆毒)을 마셨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오래되었구나! 유(由)의 거짓을 행함이여!’라고 했으니 박 또한 그러했도다.”    반고가 여기서 인용한 것은 《논어》 자한(子罕)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의 일부다. 공자가 병이 더 심해지자 자로는 또 다른 제자를 스승의 가신으로 삼았다. 병에 차도가 있자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오래되었구나! 유의 거짓을 행함이여! 가신이 없는데 가신을 두었으니. 내가 누구를 속였는가? 내가 하늘을 속였구나!”    공자는 임금이 아니기 때문에 신하를 둘 수 없었다. 그런데도 자로가 하늘을 속이고서 스승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공자에게 가신을 둔 것에 대한 공자의 탄식이다. 세상의 이치, 즉 예를 몰랐던 자로나 주박은 공자의 말대로 제 수명을 다하지 못했다.⊙

박종선

▲ (좌) 호메로스. (우) ‘오디세이아’ 표지.시중에는 ‘아빠의 무관심’이 자식을 잘 키우는 비결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아빠는 잠자코 돈이나 잘 벌어오고 엄마가 좋은 사교육을 수소문하여 자식을 일류대학에 보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요즘 아버지들은 자녀교육에 관해 대부분 부재(不在) 상태이다.      이러한 부재는 자식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아버지가 집을 떠나 부재한 상태에서 자식이 스스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고색창연한 고전이 있다. 바로 호메로스(Homeros)의 ‘오디세이아(Odysseia)’이다. 이 시가(詩歌)는 수백 년 동안 구전(口傳)되다가 기원전 8세기 무렵 비로소 문자로 정착되었다.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의 노래’라는 뜻이다. 당연히 주인공은 이타케의 왕인 오디세우스이다. 그는 막 태어난 아들을 두고 그리스 연합군의 일원으로 트로이전쟁(기원전 12세기)에 참전한다. 그는 전쟁 중에 출중한 지모(智謀)를 발휘한다. 저 유명한 트로이목마도 그의 아이디어다. 그는 직접 목마 안에 숨어 트로이 성 안으로 들어가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드디어 10년간의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자 연합군의 왕들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각자 귀향길에 오른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순조롭게 귀향하지 못한다. 그는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에게 미움을 받아 무려 10년 동안이나 바다 위를 떠돌게 된다. 이를 둘러싼 파란만장한 모험담이 ‘오디세이아’인 것이다.      그러나 ‘오디세이아’를 펼치면 정작 오디세우스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첫머리(1~4권)는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차지하고 있다. 그는 집을 떠나 1년간 여행을 하고 돌아온다. 이어서 중간 부분(5~12권)은 오디세우스가 10년 동안 바다를 떠도는 이야기이고, 후반부(13~24권)는 부자(父子)가 협력하여 가정을 회복하는 이야기이다.      트로이전쟁이 끝나고 9년이 지나도 오디세우스는 여전히 행방이 묘연하다. 그의 생존에 의구심이 들자 이미 3~4년 전부터 많은 사내들이 그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구혼을 하러 몰려든다. 그들은 주인 없는 집의 가축을 잡아먹으며 무례한 행동을 일삼는다. 텔레마코스는 10대 중후반부터 이런 난장판을 바라보며 전전긍긍한다.      이때 제우스를 비롯한 신들은 포세이돈이 멀리 간 사이에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돕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아테네 여신이 나그네로 변신하여 텔레마코스 앞에 나타난다. 여신은 바다 건너 필로스의 네스트로와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를 찾아가 아버지의 행방을 알아보라고 권한다. 또한 “그대는 더 이상 어린애 같은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되오”라고 격려한다.      이를 통해 텔레마코스는 커다란 용기를 얻는다. 그는 가인(歌人)의 애절한 노래를 제지하려고 밖으로 나온 페넬로페에게 쏘아붙인다.      “어머니께서는 집안으로 드시고…. (이런 일은) 제 소관이에요. 이 집에서는 제가 주인이니까요.”      페넬로페는 깜짝 놀라며 아들의 의젓함에 감동한다. 이튿날 텔레마코스는 오디세우스가 떠난 이래 처음으로 주민총회를 소집한다.      그는 구혼자들이 더 이상 자기 집에 대해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 요구한다. 아울러 아버지 소식을 알아보려고 하니 배와 선원을 준비해 달라고 요청한다. 회중은 그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이때 아테네 여신이 오디세우스의 충직한 부하인 ‘멘토르’의 모습으로 나타나 항해를 주선하고 동행한다. 이 ‘멘토르’가 오늘날 멘토(mentor)의 어원이 된 것이다.      배는 새벽 무렵 필로스에 닿는다. 마침 거기서는 성대한 제사의식이 열리고 있다. 오랫동안 오디세우스가 부재한 이타케에서는 보지 못하던 성대한 광경이다. 멘토르는 “이제는 자신을 갖도록 하시오. 지금은 결코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오”라고 격려한다. 네스트로에게 안내된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의 행방을 묻는다.      네스트로는 오디세우스를 회상하며 텔레마코스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오디세우스의 행방은 모르니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에게 가보라고 권고한다. 그러자 멘토르, 즉 여신은 네스토로에게 텔레마코스를 부탁하고 떠나간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멘토는 적당한 시점에 물러나야 하나 보다. 네스트로는 텔레마코스의 스파르타행을 주선한다.      텔레마코스는 스파르타에 도착하여 메넬라오스를 만난다. 그가 바로 문제의 여인 헬레네의 남편이다. 그녀는 한때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사랑에 빠져 달아났다. 메넬라오스가 그의 형인 미케네의 아가멤논에게 이 일을 호소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는 트로이에서 헬레네를 되찾지만 그의 귀향길은 순탄치 않았다. 최근에야 9년 만에 가까스로 귀향한 것이다.      메넬라오스 부부도 텔레마코스가 오디세우스를 닮았다고 놀란다. 메넬라오스는 귀향 도중에 오디세우스가 요정 칼립소에게 붙잡혀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낙담한 텔레마코스 앞에 아테네 여신이 나타나 귀향을 재촉한다. 텔레마코스가 서둘러 작별인사를 하자 헬레네는 “오디세우스가 벌써 돌아와 있을지도 모른다”고 덕담을 건넨다.      마침 그때 오디세우스는 오랜 방랑을 끝내고 무려 20년 만에 고향땅을 밟는다. 두 부자는 서로 알아보지도 못하는 모습으로 조우한다. 그러나 곧 부자임을 확인하고 뜨겁게 포옹한다. 부자는 집으로 돌아가 밖으로 통하는 문을 걸어잠근 다음 난폭한 구혼자 무리들을 도륙 낸다.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도 재회의 기쁨을 만끽한다.      텔레마코스는 스무 살이 되도록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자란다. 10대 중후반부터는 난폭한 구혼자 무리로부터 시달리다 19세부터 1년 동안 여행을 하고 돌아온다. 그의 1년은 아버지의 20년 축소판이다. 어느새 늠름한 용사로 성장한 아들은 아버지와 손잡고 집안을 회복한다. 이처럼 ‘오디세이아’는 아버지의 귀향기이자 동시에 아들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 아이들도 아버지의 부재 속에 자란다. 그러나 텔레마코스의 경우와는 다르다. 그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생생한 현실이다. 그는 스스로 역경을 헤치며 성장한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강요된 허구이다. 그들은 입시교육의 포로가 되어 진정한 성장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하고 만다.      그로 말미암아 성장론은 사라지고 수저론만 난무한다. 흙수저, 금수저도 모자라 핵수저까지 등장한다. 김정은까지 수저론에 힘을 보태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러나 세태가 어떻든 간에 ‘오디세이아’는 변함없이 고전적인 성장론을 역설하고 있다. 텔레마코스는 아마 강인한 후계자가 되어 이타케를 훌륭하게 다스렸을 것이다.

이충국

 온 국민을 축구에 열광하게 했던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의 대한민국 4강 신화 기적 이후 16년이 지나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이 4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놀라운 기적이 펼쳐지고 있던 2002년 6월의 순간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표-1〉은 당시 우리가 속했던 D조 2차전까지의 결과이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폴란드에 2대0으로 승리하고 미국과 1대1로 무승부를 기록하며 1승 1무라는 준수한 성적으로 조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음 라운드 진출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함은 명백했지만, 공교롭게도 3차전의 결과로 진출과 탈락이 정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경기 결과에 따라 대한민국 대표팀이 어떤 순위를 차지할지를 생각해 보는 것, 이것이 리그전이라는 방식이 갖고 있는 흥미로운 부분이다. 우리 대표팀이 탈락하는 경우의 수만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ⅰ)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패배 & 미국이 폴란드에 이기거나 비길 경우 = 탈락    ⅱ)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2점 차 이상 패배 & 미국이 폴란드에 1점 차 이내 패배 = 탈락    D조 조별리그 3차전의 결과는 대한민국이 포르투갈에 1대0으로 승리하면서, 미국과 폴란드의 경기 결과와 관계없이 조1위 진출하여 사상 최초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이후 우리나라 대표팀은 G조 2위였던 이탈리아, B조 1위였던 스페인, E조 1위였던 독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C조 2위였던 터키까지 만나며 4위로 월드컵을 마무리하게 된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 본다. ‘대진운(對陣運)’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당시 많은 사람은 거듭된 축구 강호들을 연거푸 맞닥뜨리는 대표팀에 대진운이 나쁘다고 평했다. 일정 부분 수긍은 할 수 있지만, 이는 가능한 최상의 공정함을 기하는 시스템 속에서 비롯된 결과다. 프로스포츠에서의 대진표는 합리적이고 수학적인 사고(思考)에서 비롯된다. 이에 대해 설명을 하기에 앞서, 월드컵과 그 진행방식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우선 하고자 한다.      월드컵 : 어떻게 진행되는가?    FIFA(Fede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에서 주관하는 세계축구선수권 대회인 월드컵은 본대회에 앞서 각 대륙의 예선을 통해 본선 진출국 32개국을 확정짓는다. 그 후 32개 진출국의 순위를 고려하여 8개 조에 4개국을 각각 배정하고 풀리그 방식으로 각 조의 상위 2개국을 선출하게 된다. 16개국이 남은 시점부터 대회는 녹아웃 토너먼트 방식으로 변경, 진행하여 준준결승, 준결승, 그리고 결승을 거치며 우승국을 가리게 된다. 1930년 제1회 월드컵 이래 본선 진출국의 수에서만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 조별 풀리그 →토너먼트 방식은 꾸준히 이어진 전통이다. 흥미로운 점은 기타 스포츠 종목, 대표적으로 미국의 4대 프로스포츠로 일컬어지는 풋볼, 야구, 농구, 하키 역시 위와 같은 풀리그→토너먼트의 흐름으로 진행된다. 어째서 위의 방식이 대중적으로 자리 잡았는가? 리그와 토너먼트를 먼저 알아보자.       라운드 로빈 방식 (Round robin)    앞서 언급했듯이, 대부분의 프로스포츠에서 널리 이용되며 우리에게는 리그전으로 잘 알려져 있는 방식이다. 좁게는 각 조, 넓게는 전체 참가팀 간의 공평한 경기 횟수를 거친 후 순위를 매기는 방식으로 라운드 로빈이라 일컫는다. 모든 팀과 경기를 진행하므로 객관적 전력을 평가하기에 적합하다.    풀리그전의 결과는 주로 도표 방식과 그래프 방식으로 표기할 수 있다.    〈표-2〉는 행의 팀이 열의 팀을 이겼을 경우를 표현한 방식이다. [승리 시 O 패배 시 X]    위 〈표-3〉은 각 팀을 꼭짓점과 중심에 놓고 승리한 팀을 향해 화살표를 그려 표기하는 방식이다.      풀리그전의 경기 수    위의 표에서 보듯이 4명의 선수 혹은 팀(이하 4개의 팀으로 서술)이 참가하여 풀리그 방식으로 경기를 진행하게 될 시, 전체 경기 수는 4×3/2=6이 된다. 4개의 팀은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3팀과 경기를 진행하므로 4×3이지만, 중복되는 경기, 일례로 A팀과 B팀, B팀과 A팀의 경기는 제외해야 하므로 2로 나누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즉, n개의 팀이 풀리그를 진행할 때, 필요한 경기의 수는 nC2=n(n-1)/2로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토너먼트 방식    토너먼트는 경기를 진행할 시, 승자는 다음 라운드로 진출, 패자는 탈락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현대 대부분의 프로스포츠에서는 라운드 로빈 방식으로 일정 순위를 선정하고 그 후에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데 토너먼트 방식을 사용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월드컵 역시 16강부터는 승자→진출, 패자→탈락이라는 단판 녹아웃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한다. 리그전에 비해 경기의 수가 적기에 단시간에 순위 결정이 가능하고 선수들과 관중들 역시 소수의 경기에 집중할 수 있다.      토너먼트의 경기 수    토너먼트의 경기 수 역시 리그전과 마찬가지로 일반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유의할 점은, 참가하는 팀의 수를 n이라 할 때, n = 2a인 경우와 n ≠ 2a일 때,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ⅰ) n = 2a    토너먼트의 경기 수는 (n-1) 번으로 일반화된다. 이때 참가팀의 수가 2의 거듭제곱인 경우 모든 팀이 공평하게 동일한 경기수를 진행하게 되어 부전승(不戰勝)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등비수열을 사용하여 이를 확인해 보자. 예를 들어, 월드컵 16강 토너먼트와 같은 〈표-4〉에서 16강 통과를 위해 16개의 팀은 8경기를 치러야 한다. 계속해서 다음 라운드 진출을 위해 4경기, 2경기, 마지막으로 결승에서 1경기를 치러야 우승을 가릴 수 있게 된다. 즉 23+22+21+20=15, 16-1을 확인할 수 있다. 즉, n = 2a의 경우 2∝-1+2∝-2+…+20=2∝-1 이라는 등비수열의 합의 공식으로 확인할 수 있다.    ⅱ) n ≠ 2a  참가국의 수가 2의 거듭제곱이 아닐 경우, 토너먼트의 경기 수는 (n-1)로 위와 동일하지만, 부전승의 경우가 발생하여 공평성의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아래의 그림과 같이 5개 팀이 토너먼트 경기에 출전할 시, 경기 수는 4경기로 고정되지만 조합상의 변동이 발생한다.    어떤 대진이 가장 공평하고 혹은 그렇지 않은가? 전자의 답은 한눈에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후자의 답으로는 대부분 〈표-7〉을 선택할 것이다. 좀 더 일반화시켜 이 문제에 접근해 보자. 토너먼트 방식에서 다음 라운드로 진출할 때, 팀은 자연스레 한 단계를 거치게 된다. 그 단계의 최댓값을 l이라 표기하고, 참가하는 팀의 수를 n이라 했을 때, 토너먼트 방식은 n≦2l을 따르게 된다. 토너먼트의 총 경기 수는 (n-1) 이기에, 5개의 팀인 경우 5≦23 혹은 5≦24의 값이 나온다. 위 표에서 〈표-5〉와 〈표-6〉은 3단계를 거치는데 비해, 〈표-7〉은 E팀이 가장 마지막 4단계에서 1경기만을 치르기 때문에 불공평하다. 즉, n≦2l의 l값이 최소일수록 공정한 대진표를 위한 필요조건이 마련된다. 유의해야 할 점은, 위의 식으로는 상이한 단계를 거치는 대진표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지만, 동일한 단계를 거치는 〈표-5〉와 〈표-6〉 중 더 공평한 대진을 찾기에는 불충분하다. 〈표-6〉이 가장 공정한 대진표인 이유는 〈표-5〉 역시 E팀은 한 경기만으로 우승자가 될 수 있는 대진이기 때문이다.      토너먼트의 대진표    이쯤에서, 당신이 다가올 월드컵의 대진표를 작성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는 가정을 해 보자. 작성하기에 앞서, 이 대회의 중요도를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월드컵은 하나의 큰 산업이다. 일례로 2002년 한일월드컵을 성사시킨 대한민국의 한 달여간의 대회 기간 수입은 4700억원, 순이익으로 약 1650억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또한 월드컵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시청하는 문화행사이다. FIFA에서는 2014 브라질 월드컵을 시청한 인구가 32억명에 달한다고 발표하였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 대회에서 브라질,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초반에 격돌시킬 수 있겠는가? 상당수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순위에 산정해 공정한 대진표 작성법을 알아보자.    ⅰ) 참가팀의 수가 2의 거듭제곱인 경우 (n = 2a)    참가팀의 수가 2의 거듭제곱인 경우는 부전승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팀이 동일한 경기수를 진행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16개의 팀이 참가한다는 가정하에 미리 산정한 순위에 기반을 두어 {1,2,3,4,5,6,7,8}, {9,10,11,12,13,14,15,16} 두 집합으로 나누고, 같은 집합에 속한 팀들은 서로 경기를 펼치지 않도록 한다. 다음 라운드인 8강에서는 {1,2,3,4}, {5,6,7,8}, {9,10,11,12}, {13,14,15,16}의 집합으로, 4강전에서는 {1,2}, {3,4}, {5,6}, {7,8}, {9,10}, {11,12}, {13,14}, {15,16}의 세분화 작업을 통해 동일 집합 내 경기를 편성하지 않게 한다. 이를 도식화할 시 〈표-8〉과 같은 대진표가 완성된다.    ⅱ) 참가팀의 수가 2의 거듭제곱이 아닌 경우 (n≠2a)    토너먼트에 출전한 팀의 수가 2의 거듭제곱이 아닌 경우는 위의 방식을 응용하여 부전승을 만들고 팀을 제거하여 대진표를 완성한다. 예를 들어 한국 프로 농구 KBL(Korean Basketball League)은 정규 풀리그 시즌을 보낸 후 6팀으로 토너먼트를 진행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6보다 크고 6에 가장 가까운 2의 거듭제곱인 23=8이다. 위 〈표-9〉는 8명이 참가했을 때의 대진표를 작성한 후 7, 8위를 제거하여 완성한 것이다. 위의 방식을 일반화하면 n개의 팀이 출전할 때, 2∝-1‹ n ‹2∝가 도출된다. 즉, 2∝팀으로 가정하여 대진표를 작성한 후, (n+1)부터 2∝까지 (2∝-n)개의 팀을 제거한다. 수 (2∝-n)는 또한 부전승의 횟수와도 같다.      가장 치열했던 월드컵 조별예선    역사상 가장 흥미로웠던 월드컵 조별예선을 꼽자면 1994년 미국 월드컵 E조를 들 수 있다. 먼저 조별 풀리그는 토너먼트와 달리 녹아웃 제도가 아니기에 승리, 무승부, 패배가 기록되는데, 각각 승점 3점, 1점, 0점이 주어진다. 팀당 3경기를 치른 후 승점에서 가장 앞선 두 팀이 상위 라운드로 진출하되, 승점이 같을 시 득실차→다득점→승자승 →동전 던지기 순으로 순위를 가린다.    ※ 득실차 : 조별리그 3경기의 득점수 -실점수가 높은 순  ※ 다득점 : 조별리그 3경기에서 넣은 득점수의 총합이 높은 순  ※ 승자승 : 위 두 가지 항목이 동일할 시, 팀의 상대 전적을 비교하여 승리한 팀이 더 높은 순    다음 〈표-10〉은 당시 E조에 속해 있던 4개국의 조별리그 결과이다.    멕시코는 이탈리아와 최종전 경기에 1대1로 무승부를 기록하였고, 아일랜드와 노르웨이 역시 최종전에 0대0 무승부를 기록했다. 당시 1, 2위로 상위 라운드 진출을 확정지은 팀은 멕시코와 아일랜드이다. 그렇다면 멕시코와 노르웨이의 E조 최종 승점과 득실차는 어떻게 될까?    흔히들 스포츠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칭한다. 예측, 예상하지 않은 순간에 기적 같은 반전을 만들어 내어 관객들에게 짜릿함을 선사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반전은 반전 그 자체의 카타르시스를 감소시킨다. 예상할 수 없는 순간을 자아내기 위해 가능한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을 자아내려는 것. 스포츠경기와 그 운영방식은 역설적이기에 그만큼 흥미롭다.    만약 1994 미국 월드컵에서 이탈리아가 순조롭게 승승장구하며 결승전에 진출했다면 지금까지 회자되는 순간으로 많은 축구팬들에게 기억됐을까? 그들은 조별리그 3위를 기록, 와일드카드에서도 마지노선인 4위로 가까스로 본선 진출 후, 16강과 8강, 4강 경기들 모두 힘겹게 2대1로 승리하며 극적으로 결승에 진출하여 브라질과의 접전 끝에 마지막 끝내기 승부차기에서 패배했기에 아름다운 패자로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이다. 이것이 스포츠가 가지는 매력이다.     다가올 2018 러시아 월드컵을 기다리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현 전력은 강팀으로 분류하기 힘들다. 더욱이 어려운 조편성을 받은 부분 역시 객관적인 데이터인 FIFA 랭킹을 기준으로 공정한 대진표 시스템에서 비롯된 결과다.     하지만 이렇게 누구나 예측하기 쉬운 조건 속에서 그 조건들을 뒤엎을 때 사람들은 열광하지 않는가. 다시금 스포츠의 매력에 매료되길 강력히 희망한다.⊙

김승열

막스 프랑크 일기(41)   일본 미야자키에서의 또 다른 일상   일본 미야자키 공항.여러 가지 복잡하고 다소 어려운 과정에서 어수선한 마음을 달래보고자 모처럼 가족들 간의 소중한 시간을 가지기 위하여 가까운 일본에 잠시 다녀오기로 하였다. 비교적 날씨가 따뜻한 일본 남부지방을 찾아가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골프장이나 기타 리조트로 유명한 미야자키에 가기로 하고, 비용절감을 위하여 이스타항공을 타기로 하였다. 저가항공이어서 안전도 등에 대하여 다소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유럽 등에서도 많은 저가 항공이 성행하고 있고 이를 직접 타본 경험 등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거부감이 없이 이스타항공을 선택했다.   비행기에 오르니 의외로 깨끗하여 기분이 좋았다. 인천공항에서 미야자키까지는 대략 1시간 35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않기 때문에 크게 피곤할 것 같지 않아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실제로 비행기를 타고 잠시 눈을 붙이니 착륙준비를 한다는 안내방송이 내리는 것이 아닌가.   미야자키 공항. 사실 비행시간 동안 기내서비스는 거의 없고 단지 물만 컵에 넣어 제공될 뿐이었다. 저가 항공사이니 이처럼 다소 불필요하고 비용이 드는 서비스는 과감하게 없애고 절감하려는 비용절감 노력이 충분히 이해되기도 하였다.   미야자키 공항에서 입국 절차 과정은 마치 몇 개의 의자를 놓은 치과병원처럼 보였다. 사진을 찍고, 손가락의 지문을 찍는 과정을 출입국직원들이 마치 병원에서 환자를 도와주는 의료보조원처럼 아주 편안하고 자유로운 모습이어서 관광지 특유의 입국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관광도시여서 관광객의 유치차원에서 이런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신경을 쓴 것으로 보였다. 공항도 조그마한 것이 다소 귀엽기까지 하였다. 전체적으로 색감도 밝아 보여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자동차 렌털사무실. 간결한 입국절차를 마치고 바로 옆에 있는 자동차 렌털사무실을 방문하여 차를 대여하였다. 아쉽게도 렌털사무소 직원들이 거의 영어를 하지 못하여 의사소통에 다소 어려움이 있었으나, 안내 자료에는 한국어도 된 자료가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그만큼 한국관광객이 많아서인 것으로 보였다. 이 부분이 다소 신기하기도 하였지만, 실제 차를 빌리는 과정에서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때마침 사용한 구글 번역기의 정확성은 상당히 놀라울 정도였다. 조만간 통역이 거의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만 아직도 음성인식 부분은 미흡하여 휴대전화기에 아주 가까이 대고 크게 이야기하여야만 이를 인식할 수 있어서 다소 불편하고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상당히 유용한 프로그램으로 다가왔다.    필자 일행이 먹은 우동.문제는 일본의 경우는 차가 우측통행이 아니라 좌측통행이어서 차 운전에 어려움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특히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고 차도가 우측통행이 아니고 좌측통행이어서 이에 익숙하지 아니한 사람으로서는 차를 운전하는 일이 보통이 아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운전조작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을 들고 운전대를 잡고 진행하려고 하니 약간 두려움이 느껴졌다. 다행스럽게 일행 중의 한 분이 자신이 직접 운전을 하겠다고 하여 부담을 덜게 되었다. 그나마 차에 장착된 내비게이션이 한국어로 듣고 볼 수 있게 세팅이 되어 있어 다행스러울 따름이었다.   좌측통행에 익숙하지 아니하여 처음 출발부터 좀 헤매었지만, 인생에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특별한 경험이라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마저 들었다. 기본적으로는 차의 코너회전 시에는 도로의 코너를 왼쪽으로 끼고 돌아가는 것이 일종의 팁이었다.   그러나 실제 운행에서 특히 교차로 등에서 차를 운전하는 과정에서 다소 혼선이 일어났으나 전체 차량을 따라 진행하다가 보니 크게 무리가 없이 진행되어 다행스러웠다.   먼저 주위에 유명한 온천지역을 갈까 생각하였으나, 점심때가 상당히 지나서 일단 적당한 곳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근처의 쇼핑몰에 들어가 보니, 스시와 우동을 파는 두 개의 식당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스시보다는 우동이 서민적이고 더 맛이 좋을 것 같아서 일행은 우동집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주문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좀 당황스러웠다. 다행스럽게 음식 사진이 전시되어 있어서 선택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겨우 주문 음식을 선정하였는데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 식당에서는 카드는 받지 아니하고 현금만 받는다는 것이다. 다행스럽게 일부 환전한 금액이 남아 있어서 이를 사용하여 주문하였다. 음식은 아주 맛이 있었다. 특히 일본의 물가가 높음에도 이 식당의 경우에 우동값이 310엔 정도밖에 되지 아니하여 요즘말로 ‘가성비’가 아주 좋았다.   우동집의 내력을 적어놓은 안내판.카페테리아처럼 자율적인 시스템으로 운용하여서 직원들의 인건비를 과감하게 줄인 가게였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이 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식탁정리도 손님이 알아서 정리정돈하는 것이 원칙으로 보였다. 이런 모습이 전통적인 식당에서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손님들이 자신이 먹은 테이블을 나름대로 정리하는 모습이 상당히 이국적이고 인상적이었다.   모처럼 행복한 점심을 즐겨서 감사할 뿐이었다. 알고 보니 우동집의 역사가 80년 이상이 된 프랜차이즈 식당이었다.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가게 이름으로 만들었는데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많은 소비자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나름 철학을 가진 가게로 느껴졌다.    이후 운전을 하는 과정에서 익숙하지 아니하여 신호를 놓쳐 차가 차도 가운데에 어설프게 엉거주춤하게 서 있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너무나도 당황이 되는 순간이었다. 다른 차량에 심각한 운행 방해가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주위의 빗발치는 비난과 경적 등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어 불편하고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누구도 경적을 울리거나 큰소리로 고함을 외치지 아니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라웠다. 이 순간 비록 인정하기는 쉽지 아니하지만, 일본이 역시 우리보다는 문화적으로도 앞선 선진국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비록 한국과는 다소 미묘한 관계에 있지만 일본에서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더 놀라운 점은 식당 등 대중이 많은 장소에 어느 곳에서나 큰소리로 외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공공의 장소에서 모두 조근조근 하게 조용히 이야기하고 사람을 보게 되면 고개 숙여 친절하게 인사하는 모습이 새삼 놀랍고 한편으로는 마음을 복잡하게 할 뿐이었다. 그런 모습들이 너무 부럽기까지 하고 한편으로는 우리도 이를 본받아야 할 부분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드디어 가고시마로 가는 고속도로에 몸을 실었다. 주변의 광경은 아열대 지방으로서 해변이 보이면서도 또한 동시에 산의 경치가 어울려지는 조용한 섬지역 해변을 연상시켜 주었다. 마치 제주도와 하와이의 중간 정도의 지역으로 느껴졌다. 유럽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지면서도 필자에게는 다소 친숙한 전경으로 다가와서 마음 한구석에 다소 푸근함과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이런 평온함은 가고시마에 거의 도착하여 톨게이트에 도착하기까지 지속되었다. 이곳에서 또 다른 놀라움에 충격을 받게 되기 전까지는….   2시간 정도의 거리였는데 통행료가 3,730엔, 원화로는 거의 4만원 상당의 돈을 내야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일본의 높은 물가를 실감하였다. 가성비 높은 식당 등에서 잠시 일본의 높은 물가를 망각하였다가 이제 실감을 하게 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한국이 갑자기 그리워지게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조성관

1976년 어느 날이었다. 대한전선 도시바 흑백TV로 가요프로그램을 보는데 처음 보는 남자 가수가 나왔다. 훤칠하지도 세련되지도 잘생기지도 않은 외모의 가수가 나와 처음 들어보는 제목의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인데도 귀에 낯설지가 않았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른 조용필(1950~) 이야기다. 어찌된 일인지, 나는 신인가수 조용필과 첫 대면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알려진 대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부산에서 유행하기 시작해 경부선 열차를 타고 서울로 상경했다. 대중문화의 대부분이 중심부 서울에서 먼저 유행한 뒤 동심원처럼 주변부로 전파되어 가는 경향이 있는 것과 정반대였다.      조용필을 세상에 확실하게 각인시킨 것은 ‘촛불’과 ‘창밖의 여자’다. ‘촛불’은 1980년대 초반 정윤희 주연의 드라마 ‘축복’의 주제가로 쓰이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대는 왜 촛불을 키셨나요/ 연약한 이 여인을 누구에게 말할까요/ 사랑의 촛불이여 여인의 눈물이여’. 드라마가 끝나갈 때 “그대는 왜~” 하고 조용필이 외치면 TV 앞의 여인들 가슴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창밖의 여자’에서 그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를 외치자 군웅할거하던 남자 가수들이 초토화되었다.      사람이 가진 것 중 가장 잘 변하지 않는 게 목소리다. 그래서 목소리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은 얼굴로 먹고사는 사람보다 수명이 길다. 흔히 이미자와 김지미를 비교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가만있어도 목소리는 유지될까. 전성기 때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가수활동을 중단한 사람들이 국내외에 꽤 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탁성(濁聲)이 생기지만 조용필의 목소리는 여전히 젊다. 얼마나 정성껏 관리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용필은 언제나 혁신의 최전선에 섰다. ‘단발머리’를 예로 들어보자. 이 노래가 나왔을 때 대중은 기겁했다. 세상에 이런 노래도 있을 수 있구나. 뉴웨이브를 가미했기 때문이었다. 2013년에 발표한 ‘헬로’와 ‘바운스’는 또 어떤가. 누가 예순셋 가수가 불렀다고 생각이나 할까. 조용필은 이렇게 스스로를 끊임없이 혁신해나갔다. 록으로 출발해 트로트의 대륙에서 이름을 얻었지만 그는 정주하지 않고 뉴웨이브·팝발라드·포크의 바다를 항해했다. 가왕(歌王)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오래전 조용필을 심층인터뷰한 기사에서 읽은 대목이 잊히지 않는다. “왜 재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냐?”는 질문에 조용필은 이런 취지의 답변을 했다.       “나는 결혼생활에 맞지 않는 사람이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음악 생각밖에 없다. 나는 한번 음악 작업을 시작하면 완벽을 추구해 누구에게도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 이런 나를 누가 이해할 수 있겠나?”      조용필의 노래는 전 세대, 모든 계층을 아우른다. ‘여행을 떠나요’를 보자. “배낭을 메고~”를 부르는 순간 우리는 모두 시원한 계곡에 가 있다. 거나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에서 ‘허공’을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래방에서 ‘그 겨울의 찻집’만 찾아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뤄지지 않는 사랑에 괴로워해 본 모든 사람은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에 격하게 공감한다.       20대는 조용필을 ‘바운스’로 기억한다. 이렇듯 20대부터 모든 한국인은 조용필의 노래를 가슴에 품고 저마다의 인생 고비고비를 넘어왔다. 조용필은 1968년 밴드 ‘애트킨즈’로 데뷔했다. 그러니 올해가 50년이다. 그런 조용필이 여전히 무대에 선다는 것은 한국인의 축복이다.

김병헌

교육부에서는 최근 2020학년도부터 사용할 국사 교과서 편찬을 위한 교육과정과 집필기준 시안을 마련하여 세 차례의 공청회를 마쳤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전근대사와 근현대사 비율을 종전의 약 5:5에서 2.5:7.5로 조정하고 집필 기준을 대폭 완화하여 3분의 1 수준으로 축소하였다. 아마도 집필자의 자율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처로 보여 진다. 그러나 과거 교학사 교과서 파동 때나 국정교과서 파동 때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교과서 수요자인 학생의 입장을 고려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교과서의 주인은 학생이며 학생들의 입장을 도외시한 교과서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교과서 집필에는 집필 기준이 있어 반드시 이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이 집필 기준이 양면성을 띠고 있다. 기준이 지나치게 세세하고 구체적이면 교과서별 차별이 없어져 굳이 여러 종으로 발행할 이유가 사라진다. 반면 집필 기준을 대폭 완화하여 집필자의 자율성을 보장하면 교과서마다의 차별성이 확연하여 역사 인식의 다양성을 실현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이는 교과서가 다르다는 것이지 역사 인식의 다양성을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교과서별 차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문제는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비교적 구체적이고 세세한 집필 기준에 의해 발행된 현행 7종 교과서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빈약한 집필진 - 부실 교과서는 필연   2015년 국정 국사 교과서 문제가 불거졌을 때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에 “민간이 발행하는 검인정교과서들은 모두 집필진 전원은 물론, 내용을 검토하는 연구위원과 검증위원들의 명단까지 공개한다. 그런데도 정부가 국정교과서 집필진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것은 공개에 자신이 없고 당당하지 못하다는 고백이다. 정부가 집필진의 명단을 숨긴다면 우리는 집필진이 부실하거나 편향됐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당시 교육부에서는 집필진의 숫자뿐만 아니라 대부분 역사 전문가가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누차 강조하였음에도 각계의 반발과 공세는 누그러들지 않고 계속 되었다.   그렇다면 국정교과서 집필진에 대해 비난을 퍼부은 측에서는 검정 교과서 집필진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언급했어야 공평하다. 하지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그 누구도 검정 교과서 집필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꺼낸 바가 없다. 검정 교과서 집필진이 훨씬 많은 전문가가 참여하였거나 전문성이 뛰어났다면 할 말이 없겠으나 그렇지가 않다. 아래가 현행 7종 검정 교과서의 집필진이다.   출판사 교수‧연구원 교사 기타 전체 대표집필자 전근대 근현대 금성출판사 2 2 4   8 근현대 동아출판 1 1 5   7 근현대 리베르스쿨 0 0 4 1(영어) 5 교사 미래엔 0 2 6   8 근현대 비상교육 1 1 6 8 근현대 지학사 2 2 4 8 근현대 천재교육 2 2 5 9 근현대 국정(2015) 11 10 6 27     이를 보면 모든 검정 교과서의 필진 중에는 비전문가인 교사가 교수보다 훨씬 많다. 더구나 7종 교과서의 모든 교수 수를 합해도 국정교과서 교수 수에 미치지 못한다. 특히 검정 7종은 고대와 고려, 그리고 조선을 아우르는 긴 역사를 다루는 부분에 많아야 두 명의 전문가가 전부다. 리베르스쿨의 경우 교사 1명이 고대와 중세(고려)를 집필하는가 하면 국권상실기를 다룬 5단원은 영어과 출신 회사 대표가 전담하였다. 7종 교과서 전반에 걸쳐 오역(誤譯)과 오류(誤謬), 그리고 왜곡(歪曲) 서술이 만연(蔓延)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양성 - 중구난방(衆口難防)의 다른 표현   검정 교과서 발행은 기본적으로 ‘다름’을 전제로 하고 있다. 다르지 않다면 굳이 여러 종의 교과서를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검정 제도를 주장하는 측의 논리대로라면 이 ‘다름’은 곧 ‘역사 인식의 다양성’이라는 뜻이다. 명분이야 그럴 듯하지만 교육 수요자인 학생 입장에서는 차별 교육이고 공정하지 못한 교육일 뿐이다.   옹관묘(甕棺墓) 서술을 보더라도 옹관(甕棺) 사진을 실어놓고 버젓이 ‘독무덤’이라 하는가 하면, 어떤 교과서는 신석기 시대, 어떤 교과서는 철기시대의 무덤 양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한국사 능력검정시험에서는 신석기시대 무덤 양식으로 알고 답을 쓰면 오답이라는 국편의 답변을 받은 바도 있다. 암각화(巖刻畵)에 대해 두 면을 할애하여 자세하게 설명한 교과서가 있는가 하면 일부 교과서에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또, 어떤 교과서에는 암각화라 하고 어떤 교과서에는 바위그림이라 했다. 학생들마다 서로 다르게 배우는 것이다.   1882년 조미 조약의 관세에 대해 비교적 높은 관세율을 적용했다는 교과서가 있는가 하면 낮은 비율의 관세를 부과했다는 교과서도 있다. 또, 관세를 부과한 사실만 서술한 교과서가 있는가 하면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은 교과서도 있다. 1894년 갑오개혁 때의 개국기년(開國紀年) 사용에 대해서도 다양한 서술은 이어진다. 처음으로 개국(開國)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한 교과서가 있는가 하면, 개국기년을 사용했다는 교과서, 개국기원을 사용했다는 교과서, 아예 서술이 없는 교과서도 있다. 이 경우는 아예 서술이 없는 경우가 차라리 낫다. 개국(開國)은 연호가 아닐 뿐만 아니라 개국기년은 1894년이 아닌 1876년부터 이미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교과서마다 다른 서술에다 엉터리라는 오명까지 덮어썼다.   출판사 단원 제목 - 1945년 무렵 금성출판사 신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과 국제 사회의 움직임 동아출판 한국의 독립을 준비하다. 지학사 광복을 준비하는 움직임 리베르스쿨 국내외의 건국 노력과 국제 사회의 움직임 비상교육 건국 노력과 국제 사회의 움직임 미래엔 무장 독립 전쟁의 전개와 건국 준비 활동 천재교육 민족 운동 세력의 결집과 건국 준비   건국(建國) 논란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단원 제목만 보더라도 건국 준비, 건국 노력, 독립 준비, 광복 준비 등 비슷한 듯 다른 용어를 쓰고 있다. 더구나 금성출판사는 건국이란 말이 거슬렸는지 ‘신국가 건설’이라는 이해 불가의 용어를 썼다. 신(新)이라는 글자가 ‘신세계’, ‘신세대’, ‘신여성’과 같이 추상적으로 사용되는 글자인데다 건설은 또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이렇듯 다양성은 곧 중구난방(衆口難防)과 동의어다.  역사 왜곡 - 채택율에 숨겨진 비밀   출판사 면수(부록제외) 채택률(2014) 미래엔 364 33.2% 비상교육 404 29.4% 천재교육 363 16.0% 금성출판사 431 7.5% 지학사 407 6.1% 리베르스쿨 385 4.1% 동아출판 330 3.6%   교과서의 분량과 채택율도 문제다. 분량의 경우 가장 많은 금성출판사 교과서와 가장 적은 동아출판사 교과서와의 차이는 무려 100쪽이나 된다. 학생 입장에서 학습 부담 면에서는 동아출판 교과서가 유리할 수 있으나, 그만큼 배우는 내용이 적다는 점에서는 불리하다. 학생 입장에서는 공평하지 않다는 뜻이다.   문제는 채택율이다. 채택율이 높은 교과서는 내용이 충실하고 오류가 적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채택율의 차이에는 더 큰 역사 왜곡이 도사리고 있다. 가령 1948년 건국이 다수설이고 1919년 건국이 소수설이라 하더라도 채택률이 낮은 교과서에 다수설이 실리고 채택율이 높은 상위 3개 교과서에 소수설이 실릴 경우 소수설은 그 순간 다수설로 둔갑한다. 같은 또래 중 80%에 가까운 학생들이 상위 3개 출판사의 교과서로 공부하기 때문이다.   조일수호조규 무역규칙의 항세(港稅)에 관한 서술은 또 다른 왜곡을 보여준다. 채택률 하위 교과서에는 항세 부분이 아예 서술되지 않은 교과서가 있는가 하면 상위 3개 교과서에는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고 서술되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무역규칙에서 무항세 허용으로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무역규칙 7칙에는 상선(商船)에 대해서는 배의 크기에 따라 항세를 차등 부과하였으며, 일본 정부 소속 선박 즉 관선(官船)에 대해서는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는 예외조항을 두었다. 당연히 서술하지 않은 교과서가 차라리 올바른 교과서이지만 80%에 가까운 학생들이 상위 3개 교과서로 공부하니 오류도 역사적 사실로 둔갑하게 된다.   오류 수정 - 애초에 불가능   검정 교과서의 오류가 제기될 때마다 나오는 이야기는 오류가 있는 교과서는 검정 과정에서 거르면 되고, 나중에 문제가 있으면 그때마다 수정하면 된다고들 한다. 말은 쉽지만 현실은 그렇진 않다. 한때 교육부에서 오류 수정을 권고했을 때 집필자들은 ‘검정제도의 취지를 훼손하고, 역사교육을 정권의 입맛에 맞게 길들이는 시도”라며 수정 권고를 거부한 적이 있다. 그 성명 발표를 보는 순간 ’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집필한 교과서조차 제대로 안 읽는 모양이다.’고 혼자 중얼거린 적이 있다. 솔직히 현행 검정 교과서는 오류가 곳곳에 널려 있다. 그런데도 집필자들이 수정 권고를 거부한 것을 보면서 과연 학자적 양심이나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든다.   필자는 2014년부터 지금까지 교과서 출판사와 국사편찬위원회에 교과서 오류에 대해 수없이 많은 민원을 제기하였으며 상당 부분 수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문제 제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교과서마다 오류가 예상 외로 많은데다가 혼자 8종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개별 교과서의 단순 오류는 그나마 쉽게 수정하지만, 모든 교과서에 있는 학설 오류는 받아들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 경우 출판사는 국편에 책임을 미루고, 국편은 개별 출판사에 대해 관여할 입장이 아니라고 또 미룬다.   신라의 국사(國史)와 백서의 서기(書記)는 역사서가 아닌데도 역사서로 가르치고 있다. 진경산수(眞景山水)는 존재할 수도 없는 용어임에도 실경산수(實景山水) 다음에 등장한 산수화로 가르치고 있다. 동국진체는 최초의 학설 제기자가 초보적인 한문을 오역하면서 제시한 황당한 용어임에도 교과서에 실어 가르치고 있다. 1894년 고부민란 때 전봉준이 집강(執綱)에게 돌렸다는 사발통문(沙鉢通文)은 통문도 아닌 잡기(雜記)라는 지적에도 여전히 교과서에 실려 있다.   모든 교과서에 1873년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고 고종이 친정(親政) 시작을 선포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승정원일기나 고종실록 등 정사(正史)에는 1866년 2월 13일 조대비가 철렴(撤簾)하고 고종의 친정을 선포했음이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국편에서는 1873년 흥선대원군 하야와 친정 선포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라는 필자에 요구에 최익현의 상소 중 ‘종친의 반열에 속하는 사람들은 단지 지위를 높이고 녹봉을 후하게 주어 그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함께 하도록 하고 나라의 정사에는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부분을 근거라고 제시하였다.   평가 문제 - 다양성 강화는 평가 불가의 길   집필자의 자율성이 보장될수록 교과서별 서술의 출입(出入)은 점점 더 심해진다. 서술의 출입이란 어떤 책에는 있고 어떤 책에는 없는 것을 이른다. 교과서만 충실히 공부해도 어떤 시험에서도 문제가 없으려면 모든 교과서에 공통으로 서술된 내용을 출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불이익을 당한 학생의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8학년도 수능 한국사 15번 지문에는 현행 7종 중 3개 교과서에만 수록된 ‘수탈’이라는 단어와 어느 교과서에도 없는 ‘수탈 정책’이 출제되었다. 이에 대해 수차례의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그때마다 ‘현행 교과서와 학계의 통성을 근거로 출제했다.’는 답변만 계속 하고 있다. 현행 7종 교과서는 시험 출제자에게는 지뢰밭이나 다름없다. 곳곳에 오류와 서술 출입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행 검정 국사 교과서는 다방면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전문성이 떨어지는 몇 안 되는 집필진으로 인한 오역과 오류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으며, 다양성을 빙자한 역사 왜곡과 중구난방식 서술은 눈과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서로 다른 학설을 서로 다른 교과서에 실어놓고 다양성이라 강변(强辯)하고 있는 것이다. 검정제로 발행되는 여타 과목에서 서로 다른 학설을 서로 다른 학생에게 가르치는 경우는 없다. 국어 과목에서 학생들마다 다른 문법을 가르친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 국사 학계에서는 이러한 것이 마치 당연한 듯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 역사는 하나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과서도 하나다. 다양한 역사 인식을 추구하려면 하나의 교과서에 담아서 가르쳐야 한다. 서로 다른 교과서에 서로 다른 사실이나 대립된 학설을 실어 가르치는 것은 국론 분열과 갈등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친한 친구끼리도 학교가 다르면 서로 다른 교과서로 서로 다는 내용을 배우는 현실은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 그런 이유에서 현행 검정 7종 교과서는 폐기만이 답이다.▩

우태영

최근 넷플릭스(Netflix)를 통해 드라마 ‘더 폴(The Fall)’을 보았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제작사가 합작한 이 시리즈물은 영국의 여성 수사관 스텔라가 벨파스트에 파견돼 연쇄살인범을 체포하는 추리물이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모두 3부작으로 방영된 이 드라마의 1,2부는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영상물 평론 사이트인 ‘로튼토마토 닷컴(www.rottentomatoes.com)’에서 100%라는 완벽한 평점을 얻은 수작이다.   드라마 주인공인 스텔라는 뛰어난 능력으로 남성수사관들을 지휘하며, 연쇄살인범을 추적한다. 젊고 잘 생긴 남성 수사관들을 보면 거리낌없이 자신의 침실로 불러들이기도 한다. 시리즈 두 번째에는 친밀하게 지내던 경찰 상관이 그녀를 침실로 찾아가 어떻게 한번 해볼려고 마구 들이대는 장면이 있다. 완강하게 거부하던 스텔라는 한 주먹으로 남성의 얼굴을 가격하여 피투성이를 만든다. 그리고 나서 정신차린 남성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주며 다시 범인과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이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나서 며칠 후 마침 최영미 시인이 문단에서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단초가 된 최영미 시인의 괴물을 읽으며 문득 드라마 '더 폴'에서 집적거리는 상관의 쌍코피를 터뜨린 스텔라 수사관을 떠올렸다.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의 전반부는 다음과 같다.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Me too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여기서 En은 한 시대를 풍미한 시인 고은 이라는 것은 이제는 세상이 다 안다. 유승민 의원은 8일 “최영미 시인이 고은 시인의 문학계 성추행을 고발했다. 매우 추악하고 충격적”이라고 언급했다. 또 “고발 내용을 보면 매우 추악하고 충격적으로 정말 추하게 늙었다”면서 “고은 시인의 시를 국정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최영미 시인이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지도록 성추행을 당했을 때 즉석에서, 드라마 ‘더 폴’의 주인공인 스텔라 수사관처럼 En의 면상을 주먹으로 내리쳐서 쌍코피를 쏟게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최 시인은 En이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것을 보고도 “이 교활한 늙은이야!”하고 소리치고 도망쳤다. 만약에 최 시인이 즉석에서 En의 얼굴을 내리쳐서 입술이라도 터지게 만들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En의 ‘호위무사’들에 의해 현장에서 즉각 무력으로 제압당하고 보복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노 대가의 유머를 받아주지 못하는 속좁은 인물로 치부되고, 까칠한 성격, 긴 가방끈 등도 도마위에 올랐을 것이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인 시인에게 감히 상처를 입힌 무엄한 인물로 두고두고 비난을 받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En선생의 성희롱 사건은 한 시대를 풍미한 늙은 시인의 기행 정도로 문단의 이면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 것이다.   명백한 잘못조차도 만담이나 전설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En의 힘, 영향력...그것이 바로 En이 누리고 보유한 권력이 아니었을까?  En의 권력은 한국 지식 사회나 문단을 좌파가 장악한 이래 매우 공고해 보였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En의 권위는 불가침적인 절대적인 것 같았다. 최영미 시인도 올해 1월30일 다음과 같이 페이스북에 올렸다.   “서지현 검사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뉴스 보며 착잡한 심경.  문단에서도 성추행 성희롱 문화가 만연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지금 할 수 없다. 이미 나는 문단의 왕따인데, 내가 그 사건들을 터뜨리면 완전히 매장당할 것이기 때문에? 아니, 이미 거의 죽은 목숨인데 매장 당하는 게 두렵지는 않다. 다만 귀찮다. 저들과 싸우는 게. 힘없는 시인인 내가 진실을 말해도 사람들이 믿을까? 확신이 서지 않아서다. 내 뒤에 아무런 조직도 지원군도 없는데 어떻게? 쓸데없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더 무시무시한 조직이 문단.”   그런데 최영미 시인이 jtbc에 출연해서 En의 성희롱문제가 공론화되면서, En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En의 호위무사인듯한 사람들이 En을 비호하는 글들이 온라인에 나타났다. 저명한 문학평론가이자 대학교수인 K가 2월7일 En을 쉴드치는 글을 포스팅하였다. 그는 불과 며칠 전에 서지현 검사를 응원한다는 포스팅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의 포스팅의 주요 부분은  다음과 같다.    “- 얼마 전 서지현 검사가 그랬듯 이른바 ‘산전수전 다 겪었을’ 그녀도 ‘상급 권력자’에게 당한 성적 모욕을 돌이키는 일은 그만큼 힘겨웠던 게 분명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서 검사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울음을 참고 있는 느낌이었고, 최시인은 격앙과 분노를 짓누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 하지만 적지 않은 ‘문단 사람들’이 지청구를 대듯, 그녀의 인터뷰 내용은 여러 형태의 성폭력을 적당히 감내하지 못하고 저항한 여성문인들은 주요 문학지면을 얻지 못하고 중요 문학출판사에서 작품집 한 권 내지 못하다가 문단에서 잊혀져가게 되는 것이 예외 없는 현상인 것처럼 비쳐지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조금 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그런 식의 성마른 일반화를 강변하지 않고도 자기 본의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라는 반론을 승인한다고 해서 문제의 심각성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최 시인 자신의 경험 여부를 떠나서 그런 사례가 다만 몇 건이라도 실재해 왔다면 그것만으로도 문단이라는 곳의 불건강성은 ‘일반적으로’ 추론되기에 충분하며, ‘여성문인’들이 문학을 업으로 하여 먹고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인가를 환기하기에 충분하다. 베스트셀러 작가로 나름 한 시대를 풍미한 명망가인 최영미가 저러할 진대 나머지 수많은 작고 기댈 곳 없는 영혼들의 운명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나 같은 ‘꽃길만 걸어온’ 언필칭 엘리뜨 남성 문인은 죽어도 알기 어려운 경지임에 틀림없다.  - 모든 권력구조는 원래 하부구성원들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에 의해서만 지속가능한 것인즉, 확실히 이젠 변화가 오기는 올 모양이다. - 진심으로 말하건대 나는 여전히 그 En선생을 좋아하고 따르는 쪽에 속해 있는 사람이다. 비록 노벨상을 향한 오랜 갈구가 이젠 좀 근천스러워 보이고, 엄청난 다작이면서도 한국문학사를 너끈히 관통할만한 단 한 편의 절창을 가지지 못한 것이 아쉽긴 해도, 에서 을 거쳐 에 이르는 그의 시적 여정 한 땀 한 땀을 늘 아끼고 좋아해 왔으며, 무엇보다 70~80년대의 헌신적 투쟁 과정 속에서 만난 그라는 존재의 소중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 그가 젊고 예쁜 여성들을 좋아하고 술자리에서 그들에게 이쁘다느니 어떻다느니 희롱하고 또 이리 와봐라 저리 가봐라 하면서 손을 잡고 더듬고 하는 일은 나처럼 이런저런 행사에 잘 끼지 않는 사람도 직접 본 적이 있을 정도로 흔한 일이다. 아마 본인은 다 기억도 못할 것이다. 그것은 전설이기도 하고 현실이기도 할 정도로 오랜 시간 파다한 문단의 일상 같은 일이었다. 산에 가면 나무가 있고, 강에 가면 물이 있듯 자연스러운 일이라고나 할까? 근래에는 나로서는 접할 기회가 없어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20년 전까지는 그런 세상이었다. 문단이건 다른 문화예술판이건 젠더감수성, 일상적 인권감수성은 거의 제로라서 어딜 가든 크고 작은 En선생들이 그야말로 즐비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를 둘러싼 전설이 그처럼 파다했다는 것,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사실에서 의외로 그를 옹호해 줄만한 작은 언턱거리가 찾아질 수도 있겠다. 그의 인생을 내가 어떻게 다 알겠는가마는 내 기억에 그에 관한 소문은 늘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裏)에 모두에게 공개된 술자리가 진원지였다. - 당사자에게는 그런 자리에서 공개리에 희롱을 당하고 추행을 당하는 것이 정말로 고통스럽고 끔찍한 경험이었겠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만큼 지속적일 수는 없다는 뜻도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음습한 곳에서 일어나는 추악한 성범죄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과 대비해 본다면 그의 ‘파다한 행각’은 상대적으로 매우 양명(?)한 것이고 일회적인 것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 말하는 김에 또 하나,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그가 무슨 주요 문학잡지의 편집위원 같은 것을 지속적으로 맡은 적이 없다. 그의 문단 내외의 젊은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이 기본적으로 강약이 부동한 상황에서 발생하므로 원천적으로 권력관계의 소산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가 이를테면 등단이라거나 발표지면 등을 미끼로 여성들을 괴롭혔다는 소문은 들은 바가 없다. 그런 점에서 최영미시인의 인터뷰가 마치 그 En선생이 권력관계를 이용하여 여성문인들의 문단활동을 좌우한 것처럼 비쳐진 것은 조금 유감스럽다. 적어도 내가 아는 그는 그런 뒤끝을 가진 사람은 아닐 것이다. - 이렇게 쓰면 누군가는 나에게 자기 주례선생님을 능멸하는 패륜아라고 할지도 모르고, 반대로 오랫동안 문단출입을 안 하더니 눈과 귀가 어두워 순진한 소리만 늘어놓는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로서는 최선을 다 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변명 같지 않은 변명, 이유 같지 않은 이유는 열거할수록 사실 기름불에 물 끼얹는 격이 될 것이다. 이런 구구한 말 몇 백 마디를 늘어놓는다 해도 최영미시인 한 사람이 겪은 모멸감의 무게 단 일 그램과도 맞설 수는 없는 게 분명하다.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제 판이 바뀌는 중이다. 이제는 누구도 함부로 다른 존재를 사물화하거나 타자화할 수 없는 세상이 오고 있다. 기존의 질서가 안온하고, 그대로 지속되었으면 하는 자들만이 기존 질서 속에서 언어도 장소도 갖지 못한 채 떠돌고 있는 존재들이 계속 침묵하기를, 견디기를, 이대로 배부른 노예처럼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 어쩌면 En선생은 이 일로 ‘명예’에 흠집을 입고, 그렇지 않아도 미적거리기만 하는 노벨상 위원회에 상을 안 줘도 되는 좋은 구실을 주게 될지도 모른다. 주제넘고 남의 인생을 두고 할 말은 아닌 줄 알지만, 어차피 제국과 그 주변에서 돌아가며 타 먹는 노벨상 따위 못 받으면 어떤가.  - 당사자는 좀 억울하고, 이른바 ‘죄질’도 진짜 어둠 속 독버섯 같은 악질들에 비해서는 범속한 수준일 수도 있지만, 차제에 인생 후반에 맞는 또 한 번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스스로 꿈에라도 악행이라 생각해본 적 없었다 할지라도 그 일로 인해 평생을 치욕감으로 살아가야 하는 피해자들의 고통을 치열하게 깨닫는 것으로부터 다시 만년의 문학을 시작할 수 있다면 그도 큰 다행 아닐까. 처음부터 아무 것 없이 탁발로 표표하게 시작한 삶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문단의 명망가인 K 교수의 글에 달린 댓글 120여개의 대부분은 K교수의 글을 비난하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En을 비호하는 K교수를 ‘공동정범’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 사진출처=jtbc 뉴스룸 캡쳐본  En을 옹호하여 화제가 된 도 하나의 글은 시인 L씨. 그도 7일 페이스북에 최 시인을 비난하는 글을 포스팅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JTBC 손석희ㅡ최영미 인터뷰를 보면서 내내 심기가 불편했다. 문단에 만연한 성추행이라니, 최영미는 참으로 도발적인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잣대로 마치 성처녀처럼 쏟아냈고, 천하의 손석희는 한국문단이 "아 이럴수가 있나" 하며, 통탄하고 있었다. 메이저 출판사와 무소불위의 평론가들의 묵계를 강조하면서 그녀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남발했다. - 최영미의 그런 발언에 대해 절실성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왠지 내가 그녀의 가해자가 된듯 나도 모르게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최영미 인터뷰는 한국문단이 마치 성추행집단으로 인식되도록 발언했기에 난 까무라치듯 불편했다. 왜 그녀가 이 시점에서 자기 체험을 일반화해서 문단 전체에 만연한 이야기로 침소봉대해 쏟아내는지 조금 의아했다. - 지난번 호텔 집필실 사건이 터졌을 때 썩 달갑지 않았지만 그래도 난 그녀를 옹호했었다. 시인도 인간이기에 욕망에 자유로울 수 없지 않은가. 하긴 그녀는 손석희와 인터뷰 때 추악한 문단을 떠난지 오래였다고 했다. 허나 그 오랜 기억이 문단의 현재적 풍토인양 뉴스화됐다. - 최영미 시인, 그녀는 선병질적으로 튀는 성격이었다. 매우 완강한 자존의 소유자였고, 어찌 보면 유아독존적 처신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시에 대해 추호의 비판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건 어찌보면 창비와 언론이 만들어낸 이 불러온 결과였기에 그녀의 무례함에 대해 누구도 대놓고 반박하지는 못했다. - 그즈음 이 땅의 민족문학은 사실상 최영미 현상으로 인하여 절단나고 있었다. 그녀의 시 구절 ㅡ "컴퓨터와 씹하고 싶다"는 말만이 오랫동안 술좌석에 회자되었을 뿐, 그때 우리는 그녀가 야기한 환멸의 미학에 얼마나 통탄스러워했던가. - 1994년 어느날이었을 것이다. 서울 마포 아현동 작가회의 사무실에서 가 열렸다. 그날 창비에서 출간된 그녀의 첫시집 ("잔치는 끝났다"는 표현은 서정주 시의 표절이었다)에 대해 수십명의 시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토론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저자인 그녀는 물론 민영 시인 등 원로 문인들도 자리를 함께 했는데, 몇몇 시인들이 그녀 시에 대해 사소한 비판을 했는데, 그때 그녀는 좌중이 놀랄 정도로 난리 부르스를 쳤다. 숫제 안하무인이었다고 할까. 그 싸가지없던 악다구니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합평회란 시의 문제점에 대해 이런저런 비판이 오가는 게 상례건만 합리적 대화가 불가능한 정도로 그녀는 피해의식으로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 십여년 전인가? 그녀는 실천문학사에서 란 시집을 펴낸 적이 있었다. 그 시집을 보면 시적 소재로 등장한 수많은 문화계, 문학계 인사들이 나온다. 시의 요점은 모두들 그녀에게 했다는 성적 추행의 이력이다. 어찌보면 지독한 남성혐오에 가까운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왜 그녀는 그 시집에 등장한 수많은 유명인사들과 일부러 만나 그런 사건을 만들어야 했는가. 어찌보면 난 그게 의문스러웠다.그 시집을 읽고 이걸 팩트로 믿어야 하나, 물론 시적 장치이지만, 여러 의구심이 들었다. - 최영미 발언이 용기 있다고 한다. 어허 그렇다면 한국문학의 상징, 우리 En시인은 어찌할꼬나. 물론 En 시인의 기행에 대해서 숱한 얘기를 들은적 있지만 먼먼 소싯적 얘기를 현재 진행형하여 매도하는 건 조금 납득할 수 없다. - 남자의 성적 욕망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가.그리고 그 욕망의 피해자가 받는 고통은 또 얼마나 지속적이고 치유 불가능한가.그걸 최영미 발언을 통해서 확인해본다. - 난 미투가 두렵진 않다. 나도 한때는 여자사람을 좋아했는데 누가 나를 이십년, 삽십년 전 일로 미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잠시 옛날을 되돌아 본다. 타인의 불행이 더이상 나의 행복은 아니다.허나 미투 투사들에 의해 다수의 선량한 문인들이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매도되는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시인 L의 글에는 무려 580여개의 댓글이 붙었다. 대부분 L시인을 맹렬히 비난하는 내용들이다.  평론가 K는 En의 ‘명예’에 흠집이 날까, 노벨상을 못받을까 걱정한다. L 시인도 “한국문학의 상징, 우리 En시인은 어찌할꼬나”하고 통탄하고 있다. 하지만 온라인의 일부 반응을 살펴보면 그는 이미 바닷 속 깊이 침몰한 난파선 신세나 다름없는 것 같다. 정치인들이 그와 함께 사진을 찍으려 들 것 같지 않다. 아무리 좌파 언론이라 하더라도 En에게 다시는 새해맞이 기념시를 부탁하거나, 앞날을 묻는 인터뷰를 기획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저항시인이 젊은 대중의 분노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이처럼 속절없이, 이처럼 빠른 속도로 세상에서 멀어져 가기도 쉽지 않을 듯 하다.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의 후반부에서 대중들에 대해 걱정한다.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불쌍한 대중들.>   하지만 최 시인의 이러한 걱정은 기우(杞憂), 즉 앞일에 대한 쓸데 없는 걱정이라 생각해도 좋을 듯하다.      관련기사 : 최영미 시인, '그'의 성희롱 비난..."평창 올림픽 일로 묻혀 버릴까 걱정" 댓글도 등장

엄상익

2018년 1월29일 나는 비행기와 배를 타고 남아메리카 대륙을 돌고 있었다. 작은 항구도시마다 배가 도착하면 소박한 도시의 골목길들을 걸어다니며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봤다. 푼타아레나스, 우수아이아, 스탠리, 푸에르토마르딘 등 모두가 평생 처음 보는 먼 나라의 낯선 도시들이다.     십여 년 전 암으로 저 세상으로 간 소설가 정을병 씨와 한동안 가깝게 지낸 적이 있었다. 그는 죽음을 선고받은 후 남미에 있는 이스터섬을 가보고 싶어했다. 인간의 영혼이 지구별에 소풍을 와서 마지막으로 들르고 싶은 곳이 남미대륙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몬테비데오로 가는 배 안에서 몇몇 한국인 부부와 만났다. 거의 다 인생무대의 막이 내리고 텅빈 객석 앞에서 어쩔 줄 몰라 떠나온 사람들 같았다. 퇴직을 한 고교 선생님 부부도 있고 정년을 맞이한 의대 교수도 있었다. 정신없이 사업을 하다가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으로 불쑥 태평양을 건너 남미대륙으로 왔다는 부부도 있었다. 백발의 아픈 아내와 함께 온 육십대 중반의 남자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조금 시간을 앞당겨 명예퇴직을 했습니다. 아내와 저는 인생의 버킷 리스트를 작성했어요. 배들이 오가는 부산 바닷가에 살다보니까 먼 바다를 오가는 배들을 보곤 했어요. 그 배들이 닿는 끝에 우리도 가고 싶은 꿈을 꾸었었죠. 점점 먹어가는 나이에서 그래도 지금이 가장 젊은 때 아니겠어요? 그래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남미대륙을 선택한 거죠. 여기부터 시작해서 세계 일주를 하기로 작정한 겁니다. 이 다음은 일본 배를 타고 세계를 돌 겁니다. 저희는 이제야 자유인이 됐어요.”    나는 공고(工高)에서 전기를 가르쳤다는 선생님 출신의 그가 과연 그런 노후의 경제력이 있을까 의문이었다. 나는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자식들에게 대학까지 교육비는 대 주겠지만 그 이후는 너희들이 스스로 살아가라고 일찍부터 말했습니다. 여유가 있어서 이렇게 여행하는 건 아닙니다. 집을 담보로 한 역(逆)모기지로 여비를 만들어 이렇게 세상을 떠도는 거예요. 이렇게 살다가 그래도 남는 돈이 있으면 자식들이 가지는 거고 없으면 못 가지는 거죠.”    그의 말이 내 속으로 들어와 마음에 물결치는 것 같았다. 같이 여행을 하는 칠십대 부부는 배에서 나가 버스를 타고 푸에르토 마드린 뒤쪽의 초원으로 갔다고 했다. 작가 생텍쥐베리가 보아 뱀을 연상했다는 호수를 보고 왔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은 그는 다시 문학청년이 된 것 같았다. 의사 출신인 다른 부부의 인생고백도 들었다. 초등학교 선생님 출신이라는 부인이 여행길에 오른 과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저는 강원도 정선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했어요. 그러다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됐죠. 남편은 강원도 원주에서 30년 동안 의대 교수를 하다가 이제 정년퇴직을 하게 됐어요. 언제 세월이 지나갔는지 모르겠어요. 퇴직을 하고 우리 부부는 제주도로 갈 예정이예요. 거기서 남은 세월을 바닷가 의사로 보낼 예정입니다.”    아름다운 소설의 한 장면 같은 평탄하고 행복한 부부 같았다. 내가 그 남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평생 의사로서의 삶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지난 40년 동안 그저 수술실에서만 살았어요. 레지던트 때 방광쪽의 암을 제거하는 수술에 들어가면 열한 시간 동안 화장실도 못가고 앉아보지도 못하고 수술을 했어요. 집도하는 교수님은 더러 나가서 소변도 보고 잠시 쉬기도 하는데 저는 그렇게 하지 못했죠. 지독한 고통이었어요. 그러다 교수가 됐는데 평생 방광에 있는 암을 제거하는 수술을 해 왔죠. 요도를 통해 복강경을 집어넣어 주먹덩어리만하게 부풀어 오른 전립선을 깎는 데는 최고의 프로라고 생각해요. 신경을 잘못 건드리면 하반신이 마비가 되기도 하고 성(性)기능이 없어지기도 하죠. 그 분야에서 최고의 기술을 가지게 된 게 나의 인생이었습니다. 죽음 저편으로 가는 분들을 구했다는 게 제 인생의 보람이라면 보람입니다.”    여러 종류의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듣는 것도 여행의 묘미였다. 얼굴에 온통 수염이 덥수룩한 육십대 초반의 부부가 있었다. 서울에서 여러 개의 회사를 운영한다고 했다. 물질적으로는 꽤 성공한 사람 같았다.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나이 오십까지는 정말 나라는 게 없었습니다. 일 년에 하루도 쉬지 않고 사업에만 매달렸습니다. 휴일도 없고 가족도 돌보지 않았죠. 그저 일에만 미쳐서 하루하루 살아갔습니다. 사업에도 성공하고 재산도 남부럽지 않게 들어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문득 내가 왜 이렇게 돈에, 사업에 노예같이 매어서 사나 하는 회의가 드는 거예요. 어떻게 사는 게 바로 사는 것인지 모르고 이 나이까지 그저 달리기만 하는 나 자신이 한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장실에서 뛰쳐나와 한 달 간의 남미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밤 나는 배의 선실에서 한밤중에 깨어났다. 밤하늘에는 맑고 투명한 별들이 가득히 떠 있었다. 수평선 위로 밝은 달이 떠서 바다 위를 비추고 있었다. 검게 번들거리는 바다위에 달빛이 긴 띠를 만들고 있었다. 그 달을 보면서 나는 기도했다.    ‘이제는 내면의 깊은 곳에 계시는 그 분에게 모든 걸 맡깁니다. 가라는 곳으로 가고 하라는 일만 합니다. 쉬라고 하시면 침묵하고 쉬겠습니다.’    내면에 있는 본질적인 존재는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그분께 맡기라고 한다. 그게 영원과 자유를 얻는 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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