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육

오랜만에 학계 사람들을 만났다. 다섯 명 모두 대학에서 교수를 하거나 연구소에 근무하는 사람들이었다. 반주를 곁들인 저녁식사를 하면서 서로의 근황에 대한 안부가 오고 간 뒤 얘기는 자연스럽게 사회 이슈로 넘어갔다. 그때부터 식사자리는 정부를 규탄하는 성토대회장으로 돌변했다. 모두들 투사라도 된 듯한 목소리로 현 정부 정책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부동산 문제부터 남북한 정책까지, 최저임금 문제부터 예멘 난민 문제까지 주제는 다양했고 분석은 예리했다.      한번 달아오른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지금 상황은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더 심각한데 정부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내가 뽑은 대통령이 이럴 줄 몰랐다” “어떻게 노무현 정부 때 실패했던 정책을 똑같이 되풀이하느냐” “상위 1%의 부자를 잡기 위해 나머지 99%의 국민을 볼모로 잡고 있다” 등의 격앙된 목소리가 식사시간 내내 이어졌다. 하나의 이슈가 거론될 때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우리가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같은 지식인들이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란 결론에 도달했고 내일이라도 당장 행동에 옮기자는 얘기까지 나왔다. 시국선언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다음 날이었다. 아침이 되자마자 나는 어제 가장 목소리를 높였던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잘 들어갔느냐는 인사와 함께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까를 물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말이 그렇다’는 얘기지 우리가 당장 무엇을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대답이었다. 시국선언은 못 하더라도 글이라도 써서 정부가 국민들의 뜻을 알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더니 더 참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글을 써 봤자 받아줄 매체도 없고, 정부가 귀를 닫고 있는데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했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전화를 걸어봤지만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서 학교 재단이나 연구소 소장 눈 밖에 나면 좋을 게 없다는 뜻이었다. 누군가는 ‘찍히면’ 학술연구재단의 지원금을 받을 수 없다고 했고, 누군가는 외부 용역이 끊길 것을 걱정했다. 그들 모두 전날 밤의 얘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결국 그날의 비분강개함은 허약한 지식인들이 사회에 대한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데 그쳤고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날의 모임이 계기가 되어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식인의 정의, 지식인의 역할, 지식인의 책무 등등 지식인에 대한 논쟁은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 그만큼 한 사회를 지탱하는 데 지식인의 존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그런 논쟁을 정리하기보다는 역사 속에서 서로 다르게 살아간 세 사람의 예를 통해 지식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채용신, ‘황현상(像)’, 비단에 색, 95×66㎝, 구례 매천사    나라가 망하자 자결한 황현(黃玹)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하나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나는 위로 황천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한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이 유서(遺書)는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 1910년 경술국치에 맞서 자결로 생을 마감하기 전에 남긴 글이다. 그는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지는 않았다. 과거제도의 부패상을 목격하고 출세를 포기한 후 고향인 전남 구례로 낙향하여 제자들을 길렀다.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가 없다’는 얘기는 그가 나라의 녹봉을 받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 그가 망국의 날을 맞아 한·일 강제병합 체결 16일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선비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선비 된 자의 의무를 그런 식으로 실천했다. 그는 자결하기에 앞서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겼는데 그중 세 번째 시에는 나라 잃은 지식인의 고뇌가 절절하게 담겨 있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1848 ~1941)이 그린 ‘황현상(黃玹像)’에는 우국지사의 꼿꼿함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조선시대 마지막 초상화가인 채용신은 인물을 잘 그려 고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해 ‘최익현상(崔益鉉像)’ ‘전우상(田愚像)’ ‘운낭자상(雲娘子像)’ 등 수많은 초상화를 남겼다. ‘황현상’은 채용신이 전신(傳神)의 천재라는 명성에 걸맞게 얼굴의 피부결을 극세필로 그린 육리문(肉理文)이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다. 터럭 하나까지도 틀리게 않게 그리는 핍진(逼眞)함이 탁월한 수작이다. 초상화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대변한다. 40대 이후의 얼굴에 대해서는 본인 스스로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도 그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황현상’과 마주하는 순간 그의 강렬한 눈빛을 받아내기가 힘들 만큼 움찔하게 되는 것은, 입을 꼭 다문 채 말 없는 말로 우리에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가’라고.      절명시는 대체로 암울한 시대에 쓰였다. 성삼문(成三問·1418~1456)과 이개(李塏·1417~1456)도 세조의 단종 폐위에 항거해 절명시를 썼고, 개혁을 추구하다 38세에 사약을 받은 조광조(趙光祖·1482~1519)도 절명시를 남겼다. 이들이 모두 왕의 뜻에 반해 의로움을 실천하다 강제로 죽임을 당해야 했다면 황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이 차이점이라 하겠다. 항거의 형태가 꼭 자결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황현이 무장투쟁을 할 수 있는 무인(武人)이 아니라 평범한 지식인이자 선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절명이야말로 최고의 결단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나라의 녹을 먹고서도 모자라 자진해서 나라를 팔아먹겠다고 설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던 시대였다.      지금은 황현의 시대처럼 나라를 잃은 식민지 상태가 아니다. 그때만큼 절박한 상황은 아니라 해도 여전히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예를 들면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 난민 문제가 불거졌을 때, 지식인들은 난민 수용을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서로 피켓 들고 시위하는 모습을 방관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그 사건을 계기로 해서 난민 연구자들은 역사적으로 난민이 발생한 원인과 세계의 난민 현황을 다룬 글을 정리해서 발표해야 하고, 다른 나라의 난민 대체 사례 등을 첨가하여 우리는 어떤 식으로 난민대책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어야 한다.       연구자들과 지식인들이 나 몰라라 하고 입을 닫으니 황색언론과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사람들은 판단능력이 흐려져 포퓰리즘에 휩쓸리게 된다. 지식인들이 여전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을 하기 위해서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스티브 풀러는 ‘지식인: 현대사회에서 지식인으로 살아남기’에서 “무슨 생각이든, 어떤 매체를 통해서든 기꺼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려고 노력하라”고 조언한다. 꼭 유명한 매체가 아니라도, 또한 정부에서 귀를 닫고 있어 말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다는 회의가 들어도 지식인은 자신의 소신을 발표할 의무가 있다. 이것이 우리 시대에 지식인이 목숨을 바쳐야 할 시대적 소명의식이고 의무감이다. 황현이 쓴 유서와 절명시도 유명한 매체가 아니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는가.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단순히 술자리의 안주로 젓가락질만 하다 끝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공(功)을 이루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    ▲ 김홍도, ‘동강조어’ 고사인물도 8폭, 종이에 연한 색, 111.9×52.6㎝, 간송미술관 엄광(嚴光·기원전 37년~서기 41년)은 후한(後漢) 때의 인물이다. 그는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기원전 6년~서기 57년)와 동문수학한 친구였는데 유수가 황제로 즉위하자 이름을 바꾸고 은거(隱居)해버렸다. 광무제가 엄광을 찾아내어 조정으로 불렀으나 오지 않다가 삼고초려 끝에 겨우 나왔다. 광무제는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 회포를 나누다 함께 잠을 자게 되었는데 잠결에 엄광이 광무제의 배에 다리를 올려놓고 잤다. 다음 날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객성이 어좌(御座)를 범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광무제가 웃으면서 “짐이 엄광과 더불어 잤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였다. 광무제는 엄광이 조정에 머물러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엄광은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부춘산(富春山)으로 들어가 농사짓고 낚시질하며 숨어 살았다. 사람들은 엄광이 낚시질한 곳을 ‘엄릉여울(嚴陵瀨)’이라고 불렀다. ‘후한서(後漢書)’ 권83 ‘일민열전(逸民列傳) 엄광조’에 나오는 내용이다.      후대의 시인과 화가들은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의연하게 살다간 엄광의 삶을 ‘동강수조(桐江垂釣)’ ‘동강조어(桐江釣魚)’ ‘엄릉거조(嚴陵去釣)’ 등의 제목으로 작품화했다. 작품 제목에 ‘동강(桐江)’이 들어간 이유는, 엄광이 낚시질하던 엄릉여울이 절강성 동려현(桐廬縣)에 있었기 때문이다. 후한의 황보밀(皇甫謐·215~282), 남송(南宋)의 대복고(戴復古·1167~?) 등을 비롯한 여러 시인들이 엄광을 찬탄하는 시를 남겼다. 조선의 김홍도(金弘道·1745~1806)는 엄광이 낚시하는 장면을 소재로 ‘동강조어(東江釣魚)’라는 그림을 그렸다. ‘동강(桐江)’을 동음(同音)인 ‘동강(東江)’으로 표기한 것이 흥미롭다. ‘동강조어’는 그림 중간을 가위질하여 둘로 나눠도 될 만큼 화면의 중심에 넓은 공간을 배치했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춰지기를 원했던 엄광의 심정을 대변하고자 했을까.      엄광처럼 은거하는 사람을 ‘은자(隱者)’라고 한다. 은자는 ‘은사(隱士)’ 또는 ‘유인(幽人)’ ‘일민(逸民)’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이름을 감추고 숨어 사는 사람을 뜻한다. 이들은 죄를 지었거나 능력이 없어서 숨어 사는 것이 아니라 어지러운 속세(塵世)를 피하기 위해 깊숙한 곳으로 숨는다. 은자는 흔히 옛 그림에서 어부(漁夫)나 초부(樵夫) 등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물고기와 낚싯대를 든 어부와 허리춤에 도끼를 찬 나무꾼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그린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가 바로 은자들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어부와 초부는 생계를 위해 물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은자가 어부와 초부라는 신분으로 위장한 ‘가어옹(假漁翁)’이고 ‘가초옹(假樵翁)’이다. 무술영화에서 무공이 뛰어난 고단자들이 거지 행색을 하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콘셉트이다.      어부라고 해서 물론 전부 은자는 아니다. 어부 중에는 강태공(姜太公)도 있다.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을 알아봐줄 귀인을 기다리며 위수(渭水)에서 낚시질하다 나이 70에 문왕(文王)을 도와 주(周)나라를 세우는 ‘브레인’ 역할을 했다. 같은 그림이라도 함부로 예단하지 말고 맥락을 잘 살펴봐야 한다. 엄광과 강태공 모두 어부는 어부로되 그들이 지향하는 세계는 정반대였다. 강태공이 현세적이었다면 엄광은 도가적(道家的)이었다. 노자(老子)가 “공(功)을 이루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라고 얘기했듯 도가는 은자의 삶을 지향한다. 고시(古詩)에 ‘맑은 물에 귀 씻어 인간사 아니 듣고, 푸른 소나무 벗 삼고 사슴과 한 무리’라고 한 것처럼 은자의 최상의 즐거움은 유유자적함이다. 유유자적함은 티끌 세상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청복(淸福)인 까닭에 속세를 등져도 일말의 미련도 갖지 않는다. 은자가 강호자연에서 사는 모습은 ‘뻐꾸기 은사’와는 전혀 다르다.      뻐꾸기 은사는 강호에 숨어 산다면서 말로만 은둔할 뿐 속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이비’를 지칭한다. 그들의 목적은 은둔이 아니라 숨어 사는 고고한 선비라는 ‘청명(淸名)’을 얻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대로 소문이 잘 나지 않자 스스로 소문을 내게 된다. 이것은 꼬마들이 술래잡기를 할 때 술래가 숨은 아이를 오랫동안 찾지 못하면 숨은 아이가 ‘뻐꾹’ 소리를 낸 것을 비유한 말이다. 즉 내가 지금 여기 숨어 있으니 술래는 빨리 내가 숨어 있는 곳으로 오라는 소리다. 그와 같이 뻐꾸기 은사는 말로는 은둔한다고 하면서 행여 세상이 자신을 몰라줄까봐 안달이 난 모습이 마치 스스로 ‘뻐꾹’ 하고 외치는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허명(虛名)에 집착한 자들을 질타한 신랄한 풍자다.      엄광과 같은 ‘강호은둔학파’에 속한 사람 중 가장 큰 형님뻘에 속한 사람으로 허유(許由)와 소부(巢父)를 들 수 있다.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요(堯) 임금 시절의 얘기다. 허유는 요(堯) 임금이 천하를 자신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자 기산(箕山)에 숨어버렸다. 다시 요 임금이 구주(九州)라도 맡아달라고 하자 이번에는 영수(潁水)에 가서 더러워진 귀를 씻었다. 마침 소부가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려 영수에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귀를 씻는 이유를 물었다. 허유의 사연을 들은 소부는 갑자기 송아지를 이끌고 강물을 거슬러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 허유에게 소부가 한마디 했다. “그대가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내 어찌 송아지에게 먹일 수 있겠소.” 은자입네 하면서 소문을 퍼트린 허유의 속마음을 그대로 꿰뚫어본 말이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강호 은둔자의 절대고수라고 할 수 있다.      엄광이 물러나겠다고 하니 억지로 붙잡지 않고 보내준 광무제도 대단한 사람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광무제 같은 사람도 찾기 힘들다. 허명에 사로잡혀 뻐꾸기 소리를 내는 가짜 은자들도 문제지만, 누군가 이름이 조금 알려졌다 하면 공부를 할 수 있게 가만 내버려두지를 않는 사회 분위기도 문제다. 공부할 사람은 공부할 수 있게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 ‘나도 이렇게 유명한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깍두기로 끼워넣으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은자를 은자로 살아가게 놓아두어야 광무제가 될 수 있다. 지식인이 글을 쓰고 강의하는 것은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지 유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학교수는 수업시간 외에는 판판이 놀아도 되는 ‘놀고 먹는’ 직업이 아니다. 놀고 먹는 직업으로 대학교수를 하는 사람은 이미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다. 유명인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모임에 안 나온다고 비난하는 대신 논문과 책이 안 나올 때 욕을 해야 한다. 그래야 학자나 교수들이 직무유기하는 대신 자신이 하는 일에 책임감을 느낀다.      은자는 출사(出仕)하지 않고 강호에 틀어박혀 몸을 맑게 한다. 시쳇말로 더러운 물에 발을 담그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은자와 뜻을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은자의 대척점에 공자(孔子·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가 있다. 기원전 491년이었다.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섭(葉) 지역을 지나 채(蔡)나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공자가 고국인 노(魯)나라를 떠나 주유열국(周遊列國)을 시작한 지 6년째 되는 해였다. 황하(黃河)를 건널 수 있는 나루터를 찾다 밭을 갈고 있는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을 만났다. 공자는 제자 자로(子路)를 시켜 그들에게 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게 하였다. 그러자 장저와 걸익은 자로에게 나루터를 알려주는 대신 엉뚱한 말을 했다. “도도한 흙탕물이 바로 천하의 형국인데, 누구와 더불어 개혁할 수 있겠는가. 그대도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지 말고, 세상을 피한 선비를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렇게 말하고는 나루터를 알려주지는 않고 계속해서 밭을 갈았다.      이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자로문진(子路問津)’이다. ‘자로문진’은 ‘자로가 나루터를 묻다’란 뜻으로 조선 후기에 활동한 평양 출신 화가 김진여(金振汝)가 그린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1700)에 들어 있다. ‘공자성적도’는 공자의 생애를 여러 장의 그림으로 그린 화전(畵傳)으로 중국·한국·일본에서 지속적으로 그려졌다. ‘자로문진’은 ‘논어(論語)’ 미자(微子) 편에 나오는 내용인데 ‘공자성적도’의 한 장면으로 그려진 것은 물론 독립적인 주제로 그려질 만큼 인기 있는 소재였다.          도가 없으니까 은둔할 수 없다는 공자      표면적으로 보면 지나가던 사람이 나루터를 묻는 그림이지만 깊이 들어가보면 그 의미가 사뭇 깊다. 장저와 걸익으로 대표되는 도가(道家)와, 공자와 제자들로 상징되는 유가(儒家)가 맞부딪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장저와 걸익은 은자다. 그들은 ‘도도한 흙탕물이 천하의 형국’이라서 그런 세상을 피해 이름을 숨기며 농사를 짓고 살았다. 농부는 어부와 초부에 이어 세 번째 유형의 은자다. 여기서 ‘사람을 피한 선비’는 공자를, ‘세상을 피한 선비’는 걸익 자신을 지칭한다. 그들의 눈에 공자는 벼슬하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가 나루터를 가르쳐주지 않은 것은 ‘난세에 은거하지 않고 도를 행하겠다고 천하를 주유하는 공자’가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논어’와 ‘사기세가(史記世家)’를 보면 장저와 걸익뿐 아니라 여러 명의 은자들이 공자를 비난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공자는 무엇 때문에 유랑생활을 계속했을까. 나루터를 가르쳐주는 대신 동문서답을 한 은자에게 공자가 한숨 쉬며 대답한 말에 그 해답이 들어 있다. “새나 짐승과 더불어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사람 무리와 어울리지 않으면, 누구와 어울리랴. 세상에 도가 서 있다면, 내가 굳이 바꾸려 하겠는가.” 아무리 세상이 혼탁해도 결코 세상을 피해 몸을 숨기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주희(朱熹·1130~1200)는 ‘논어집주(論語集注)’에서 ‘천하가 이미 태평성세라면 굳이 개혁할 필요도 없는데, 천하에 도가 없기 때문에 도로써 개혁하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호(程顥·1032~1085)는 ‘성인은 감히 천하를 망각하는 마음을 지닐 수 없는지라, 그 말씀이 이와 같다’고 했고, 장재(張載·1020~1077)는 ‘성인은 어질어 천하를 무도하다고 단정하고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즉 은자는 천하에 도가 없으니까 은둔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공자는 도가 없으므로 은둔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공자는 제자 자공(子貢)이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궤에 넣어 보관해두시겠습니까? 좋은 상인을 찾아 파시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좋은 상인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공자는 천하에 도모하지 못할 시절이란 없다고 생각했다. 공자는 벼슬하기를 바라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임관(任官)에 의한 부귀는 공자의 목적이 아니었다. 공자의 목적은 오직 ‘제인(濟人)’, 난세에 태어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벼슬을 해도 되면 하고, 도에 의거하지 않을 경우에는 즉시 그만두었다. 55세에 길을 나선 공자는 도를 행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주유열국을 계속했고, 14년 후 68세가 되어서야 노나라에 귀국했다. 공자의 뒤를 이은 맹자(孟子·기원전 372년경~기원전 289년경)도 ‘현실정치에 참여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듯 유가(儒家)들은 모두 출사(出仕)에 적극적이었다.      누구는 은자로 살아 존경을 받았고 누군가는 은자로 살아 손가락질을 받았다. 유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은자냐 유가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 김진여, ‘자로문진’ 공자성적도, 1700년, 비단에 색, 32×57㎝, 전주박물관    지식인은 비판정신과 책임감을 지닌 자      몇 해 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란 책이 출판되었다. 뒤이어 종편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 방송되었다. ‘지대넓얕’과 ‘알쓸신잡’ 모두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지대넓얕’의 서론에 보면 ‘교양과 인문학으로서의 넓고 얕은 지식이 우리를 심오한 어른들의 대화 놀이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고 되어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교양과 인문학에 대해 목말라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문제는 우리 시대의 지식인들조차 교양과 인문학 차원의 지식 수준에 멈추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나가고 미래를 준비해야 할 지식인들이 자신의 전문지식을 사회에 환원시키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도 모자랄 판에 ‘지대넓얕’을 아는 것에 만족한다는 사실은 매우 슬픈 현실이다. 노암 촘스키는 ‘지식인의 책무’에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적합한 대중에게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진실을 찾아내 알리는 것이 지식인에게 주어진 도덕적 과제’라고 정의하면서 대중에게 진실을 알리는 이유는 교화의 목적도 있지만 ‘인간적 의미를 갖는 행동을 촉구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지식인이 ‘전문지식을 보유하고 담론에 참여하며 담론을 형성하고 주도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준비하고 숙성시켜야 하겠는가.      상황이 이러할진대 ‘지대넓얕’을 비싼 가격에 팔아보겠다고 선거 때마다 선거운동 캠프로 달려가 줄을 서는 지식인들이 수백 명씩 되는 상황은 더더욱 슬픈 현실이다. 자신의 학문세계가 얄팍하니 행여 정치판이라도 기웃거려 ‘아웃사이더’의 열등감을 만회해보겠다는 심산이 아닐까. 예전에 어느 모임에서 내가 허유와 소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어떤 교수가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소부가 송아지를 끌고 가버린 이유가 혹시, 요 임금이 자기는 ‘콜’하지 않고 허유만 캐스팅하려고 하니까 부아가 치밀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지식인들은 이제 더 이상 ‘지대넓얕’으로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행위를 그만두어야 한다. 그 대신 부당한 현실에 침묵하는 대신 자신의 전문지식을 살려 비판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여림심연(如臨深淵)’하며 ‘여리박빙(如履薄氷)’해야 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나오는 말인데 ‘심연에 임하여 살얼음을 밟는 것처럼 전전긍긍하라’는 뜻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안다고 해서, 가방끈이 조금 더 길다고 해서 우쭐대거나 거드름 피우는 대신 자신의 이론이 맞는지, 오류는 없는지, 끊임없이 묻고 검증하고 확인해야 한다. 그것이 지식인의 본분이고 지식인이 있어야 할 환지본처(還至本處)다.      세계 역사를 살펴볼 때 히틀러나 스탈린을 비롯한 모든 독재자들 곁에는 그들의 이론을 뒷받침해준 어용지식인들이 있었다. 지식인이 환지본처를 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결과다. 물론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지식인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술자리에서만 목소리를 높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유행가 가사의 주인공처럼 사는 ‘뻐꾸기 지식인’ 대신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자신의 삶으로 녹여내기 위해 실천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그나마 우리 사회가 삐꺼덕거리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다.      나 또한 지식인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느냐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조선 중기의 문신 간이(簡易) 최립(崔岦·1539~1612)은 ‘김수재가 화답한 시에 회답하다(回金秀才和章)’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다 함께 목욕하며 발가벗었다 욕을 하고/ 바보에게 꿈 이야기 해준 것도 진실로 믿는 세상/ 작은 재주에 천착하며 자랑하지 않으면/ 필시 조장하는 송나라 사람들뿐인데/ 나 역시 잘하는 게 무엇이 있으리요/ 단지 그들과 같은 것이 부끄러울 뿐이로세’.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나부터 반성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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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열

법률을 공부하면서 필자가 제일 먼저 당황스럽게 느낀 이야기가 “법은 상식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일반인들 역시 당황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그렇지만 다시 “법이 상식은 아니지만 적어도 상식에 기초하여야 한다”로 바꾸면 이제 누구나 공감하는 진리가 된다. 민법 제1조는 ‘민사에 관하여 법률의 규정이 없으면 관습법에 의하고 관습법이 없으면 조리에 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조리(條理) ’를 법률사전에서 찾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승인하는 공동생활의 원리인 도리(道理)이며 사회통념,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 신의성실의 원칙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상식을 의미한다.   최근 “법은 상식이 아니다”를 넘어 “법은 상식에 기초하여야 한다”라는 문구에도 맞지 않는 듯한 사건들이 법조계 주변에서 일어났다. 사회가 일원화 되었던 과거와 달리 다원화, 다극화된 현대사회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현상일지 모른다. 법은 ‘구체적 타당성’과 ‘거래의 안전 내지 법적 안정성’이라는 상반된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기에 상식과 구별될 수 있다. 그러나 법이 상식과 너무 괴리되면 “법의 존재이유가 무엇인가”하는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비근한 예로 회색이 진실인 경우 법은 그 자체 제약성 때문에 회색과는 동 떨어진 흰색과 검은색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도록 강요받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민사사건은 승 또는 패, 형사사건에서는 유죄 혹은 무죄라는 양자택일의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를 보완하기 위해 ‘과실비율’ 또는 ‘양형’이라는 조정변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구조적으로 적정하게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유무죄가 애매하고 경미한 사건에서 이런 현상이 자주 목격된다. 특히 과거의 형법 조문이 현재의 행위를 생각하지 못한 경우를 가정할 수 있다. 조속한 입법적인 업데이트가 필요한데 이를 방치하거나 게을리하면 법과 상식의 괴리현상이 심각하게 발생한다.   과거 법조문이 예상하지 못한 행위와 관련한 사건을 배당받은 재판부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재판을 거부할 수 없다. 이 사건에 해당되는 적정한 법조문이 없어 무죄 판결을 내린다고 생각해 보라. 사회적인 비난에 재판부가 직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조문 중 관련성이 있는 항목이나 판례를 다소 무리하게 확대 적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형사법에서 이 같은 접근이, 만에 하나 이루어진다면, 심각한 위험성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적용 조문이 없어 입법기관인 국회에 공을 돌리거나 무죄 등을 선고할 경우 사회적 비난여론이 들끓을 것이다. 어떻게든 민심을 반영해 기소된 사건을 관련 조문에 따라 판결하기를 바랄지 모른다.   “유전무죄” 나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   이 경우 진실, 즉 ‘회색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배제될 경우를 가정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억울한 나머지 재판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형사법의 기본원칙인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입증여부”에 대하여도 무시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오로지 흰색이냐 검정색이냐를 판단하는데 집중하기에 그 다음 단계인 ‘입증정도’에 대한 판단은 후순위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고차원적인 이런 생각(입증정도)은 유무죄를 판단하는 2차원적인 생각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필자의 개인적인 이론적인 가설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실제 형사사건에서 그 입증의 정도 부분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주장은, 일부 형사 변호사에게 틀에 박힌, 교과서 문구 같은 취급을 당하고, 이를 주장하는 변호사는 ‘초짜’라는 비아냥을 당하기 십상이다. 쉽게 말해 기소된 사건에서 피고인이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무죄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물론 이는 형사법원칙에 반한다. 기본 원칙은 검사가 공소사실을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입증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과서적인 주장만으로는 무죄를 얻기 어렵고 또한 더 문제는 이의 결과가 좋지 못하게 되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다는 비난에 직면해 ‘괘씸죄’의 위험성에 노출하게 된다. 이 같은 현실은 피고인 입장에서는 안타까움을 넘어 고통스럽지만 당사자 외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무심하게 넘어갈 뿐이다.   물론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입증”에 대해 극렬하게 주장하면 세간의 관심을 끌 수도 있다. 더욱이 유명하거나 유능한 변호사가 강력하게 주장하면 더욱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런 연유로 ‘유전무죄’ 나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온다. 신약성경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어느 눈 먼 소경이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있는 힘껏 “내 눈을 뜨게 해달라”고 외쳤다. 주위 사람들이 시끄럽게 소리치지 말라고 야단을 하였으나 계속 소리쳤다. 마침내 지나가던 예수가 그를 발견하고서 “네 신앙이 너의 눈을 뜨게 하였다”며 치유한 대목이 생각난다. 소경이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면 예수는 소경를 그냥 지나쳤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소경은 평생 눈 먼 채로 비참하게 살았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재판부가 일단 유무죄 판단을 내리면 그간 유무죄의 판단과정에서 고려했던 사항들은 더 이상 고려하지 않고 폐기해 버린다. 그 다음 단계인 양형기준에 적시된 요소만을 추출해 찾아내고 적용 판단한 뒤 거의 기계적으로 양형을 적용한다. 이런 과정에서 내린 판결은 사안에 따라 상식과 너무나 괴리된 듯한 느낌을 갖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민사보다도 형사 사건에서 이 같은 현상 즉 상식과 너무 괴리된 판결이 양산되는 부분이 있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원인을 제대로 살펴보아야 한다. 법정 형의 적정성, 입법적인 업데이트 필요, 특정 법조문의 무리한 확대해석, 기본 법원칙의 충실정도, 재판에 대한 적정한 통제제도의 완비여부, 재판소원의 필요여부, 사법절차적 기본권의 충실정도 등등 손봐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일반생활의 가치 기준은 다소 난해한 “법”보다 “상식”   이제 이 같은 왜곡현상을 계속 방치하거나 어찌할 수 없다고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본다. 전통적인 법원 판결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대체적인 분쟁해결 절차가 도입되고 나아가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온라인 분쟁해결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글로벌 디지털 시대는 역설적으로 국민이 국가를 선택하는 시대다. 국가는 하나의 사회 인프라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 제공자의 입장에서 좀 더 시각을 넓힐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국가기관 역시 과거의 관존민비가 아니라, 공공서비스 제공자로서의 역할과 서비스 품질을 제고할 때가 왔다. 법의 영역에서도 이제는 과거 귀족들만이 영위하는 독점적인 영역이 아니라 사법소비자의 수요에 부응하는, 상식에 부합하는 사법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한다. 물론 그에 따른 의무와 책임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소시민이 가지는 일반생활의 가치 기준은 다소 난해한 ‘법’보다 ‘상식’이다. 모든 법의 해석 및 집행 역시 적어도 상식에 기초하여야 소시민은 소속감과 평온함을 느낄 것이다. 법과 상식의 괴리정도가 너무 심각할 정도라면 공공서비스 제공자는 이에 대한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하여야 한다.

엄상익

나는 이따금씩 바둑을 두는 사람이 복기를 하듯 재판이 끝난 후 수사기록이나 증언을 다시 생각해 본다. 특히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사건은 시대의 격류를 타고 금세 머나먼 바다로 휩쓸려가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진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고손실죄도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퇴색되어 가고 있다. 나는 소수의 법조인들만 가지고 있는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을 다시 들추어 본다.   그 기록들은 몇 년이 지나면 영원히 폐기될 기록이다. 관련자를 감옥에 넣고 징역형을 확정하면 더 이상 필요 없다. 남이 보면 껄끄러운 요소가 남아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추수가 끝난 논에서 남은 벼이삭을 줍듯 기록들을 다시 보고 나름대로 글로 남겨두곤 했다. 법대교수들은 대법원판결이 나면 그걸 보고 자신의 의견을 글로 발표하기도 한다. 그게 판례평석이다.   변호사의 이런 글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정원돈을 끌어들여 남용했다는 것이 죄의 본질이다. 그걸 준 국정원장들은 공범이다. 그렇게 돈을 바치고 국정원장이라는 자리를 유지했으니까 뇌물이라고 검찰은 주장했다. 돈 관리의 핵심에 있던 사람 중의 하나가 속칭 문고리 3인방 중의 하나였던 이재만 비서관이다. 그의 검찰에서의 진술은 대충 이랬다.   2013년 4월경 어느 날 사무실에 앉아 있던 청와대의 총무비서관 이재만은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국정원에서 봉투를 가지고 올 테니 받아요”   이재만 비서관은 그게 돈이라고 직감했다. 그 얼마 후 국정원장 비서실장이 그를 찾아와 커다란 봉투를 건네주었다. 봉투 안에는 작은 박스가 있었고 그 안에 오만원권으로 된 현찰뭉치가 들어있었다. 그 후 액수가 늘어나면서 돈이 든 지퍼가 달린 가방이 왔다. 그때는 안봉근 비서관이 국정원으로부터 돈을 받아서 건네주었다. 안봉근이 가방을 건네주면 이재만은 가방을 열어서 금액을 확인한 후 그 돈을 책상서랍에 넣고 가방은 안봉근 비서관에게 돌려주었다. 이재만 비서관은 다음날 박근혜 대통령에게 돈 받은 사실을 보고했다.   “돈을 청와대 특수 활동비처럼 잘 관리 하세요”   대통령의 지시였다. 그는 대통령에게 직접 배정되는 청와대의 특수활동비도 관리하면서 매달 일정액을 대통령에게 가져다주었다. 대통령은 돈을 쓸 일이 많았다. 군부대 방문등 행사에 참석하면 몇 천만 원씩 격려금을 주어야 했다.   이재만은 국정원에서 온 돈을 총무비서관실에 있는 금고에 넣어 보관했다. 국정원의 자금을 받는 것은 대통령과 문고리 삼인방이라고 불리는 비서관들만 알고 있었다. 문고리 삼인방과 박근혜 대통령의 인연은 1988년경부터였다. 당시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이었던 김석원 의원이 국회의원직을 사직하면서 보궐선거가 치러졌다. 쌍용그룹 회장이었던 김석원은 IMF를 겪으면서 쌍용그룹이 어려워지자 경영에 전념하기 위해 국회의원직을 사임했다.   그의 보좌관이었던 안봉근은 정치에 입문하는 박근혜 후보의 캠프로 들어가 수행과 지역관리 일을 맡았다. 고려대 노어노문학과를 나와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하던 정호성은 교수들의 추천으로 1988년 4월경부터 박근혜 후보의 보좌관이 됐다. 그는 연설문작성과 정책분야담당이었다. 1999년 경영학 박사 출신인 이재만이 보좌관으로 합류해 그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될 때까지 약 17년 간 함께 근무하게 된다. 야당의원시절부터 박근혜 의원과 보좌관들은 차명폰을 사용했다. 보안을 위해서였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차명폰의 사용은 계속 됐다. 차명폰은 문고리3인방과 최순실등이 통화할 때 사용했고 외부 사람들과 연락할 때는 업무폰을 사용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필요할 때면 이재만 비서관에게 전화를 해서 국정원에서 온 돈을 일정금액씩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럴 때면 이재만 비서관은 쇼핑백에 돈을 담아 대통령관저로 갔다. 관저입구의 경호실을 지나 통로를 따라가면 휘트니스가 나오고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서재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대통령이 있을 때는 직접 전달하고 없을 때면 서재 문 뒤쪽에 쇼핑백을 조용히 놓고 나왔다. 한 달에 한번 이상 대통령에게 돈을 가져다주었다. 이재만 비서관은 보관하고 있는 잔액을 에이포 용지에 써서 가지고 있다가 대통령이 물을 때면 보고했다. 더러 대통령이 전화를 해서 “얼마가 있어요?”라고 확인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재만 비서관이 보관하고 있는 국정원에서 보낸 돈을 명절이나 휴가 때 비서실장, 경호실장, 안보실장에게는 이천만원씩 지급하고 경비와 요리사 등 직원에게 격려금으로 지급하게 했다. 대통령의 해외순방이 끝나고 돌아오면 수석비서관들에게 국정원에서 온 돈으로 격려금을 지급하고 청와대 내부인사 자녀들의 결혼, 수술 등의 경우에도 그 돈이 사용됐다. 요리사의 전별금도 그 돈에서 나갔다. 문고리 3인방도 국정원돈에서 매달 천만원씩을 받았다. 대충의 상황이었다.  2017년 10월 31일 서울중앙지검 622호 검사실에서 이재만 비서관이 심층 조사를 받고 있었다.   “문고리 3인방이라는 얘기를 들어봤죠?”   검사가 물었다.   “그건 저희 비서관 세 사람의 업무가 대통령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많고 보고서를 정리해서 대통령에게 드리기 때문입니다. 세 명이 대통령과 특별한 관계라기보다는 업무가 대통령과 가깝기 때문입니다. 역대 어떤 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세 명에 대해 문고리 3인방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역대 다른 대통령들에 비해 직접 대면보고를 받지 않고 거의 서면보고를 받았다고 하는데 맞나요?”   “그런 평가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피의자는 국정원으로부터 받은 돈 봉투를 어떻게 했나요?”   “대통령에게 올렸더니 다시 봉투째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봉투를 따로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한 두 번 봉투를 받아 올렸더니 같은 방법으로 다시 내려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이후에는 별도로 대통령께 올려드리지는 않고 제가 관리를 했습니다.”   “대통령이 받은 금액 전부를 내려주던가요?”   “제 기억에 국정원에서 보낸 봉투 그대로 내려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피의자가 관리를 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요?”   “대통령님께서 지시가 있을 때 제가 청와대의 특수활동비에 준해서 관리를 했다는 뜻입니다.”   “그 돈은 어떤 용도로 사용됐나요?”   “국정최고 책임자의 통일, 외교, 국방, 안보 등 기밀을 요하는 국정수행활동과정에서 집행되는 비용이어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청와대도 국가정보원과 같이 국가기밀이나 안보에 관한 기밀한 사업내용들이 많습니다. 국정원 돈을 쓰는 것은 역대 관행이 그랬기 때문에 그렇게 처리를 한 것입니다.”  2018년 6월 5일 이재만은 법정에 증인으로 나왔다. 검사가 그에게 물었다.   “증인은 국정원 자금을 어떻게 대통령에게 올렸나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죠.”   “대통령이 매월 한 두 번씩 돈을 요청했고 한번 올려드리는 돈이 평균 2천만 원이고 많게는1억 2천만 원이었습니다. 3천만 원, 5천만 원, 6천만 원을 쇼핑백에 담아 올렸습니다. 국정원에서 온 띠지가 그대로 묶인 상태였습니다.”   “국정원에서 온 자금을 대통령이 쓴 부분과 증인이 금고에 보관하면서 격려금 등으로 사용한 비율은 어떻게 되나요?”   “대통령에게 올려드리는 국정원자금은 60-65%정도고 제가 사무실금고에 보관하는 것은 35-40%정도였습니다. 제가 평소에 계산해 보곤 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제출한 진술서를 보면 이 국정원자금이 어떻게 쓰였는지 전혀 보고받은 바가 없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제가 보고 드렸고 잔액을 적은 문건도 드렸습니다. 그 집행내역을 아는 사람은 저와 박근혜 대통령 두 사람뿐입니다.”   “문고리 3인방의 다른 사람인 정호성 비서관은 증인에게서 매월 천만원을 받아서 그 돈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삼성동 사저 관리비용, 기치료, 운동치료, 대포폰 요금에 사용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돈을 주기만 했지 어떻게 쓰는지는 몰랐습니다. 이번 수사과정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국정원에서 온 돈 중 대통령이 관리하는 60%는 어디에 사용됐나요?”   “제가 여쭈어 본 적도 없고 관여한 적도 없지만 대통령이 격려할 곳이 엄청 많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격려금으로 쓰지 않았을까 합니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사태가 벌어졌을 때 국정원의 청와대 자금지원이 중단됐죠? 왜 그랬습니까?”   “어느 날 오후에 안봉근 비서관이 제 사무실로 와서 ‘이거 계속해도 되나’라고 혼잣말같이 얘기한 적이 있구요. 그래서 제가 ‘그러면 말씀드려 보든지’하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증인은 검찰조사과정에서 최순실이 작성한 메모를 본 적이 있지요? 그 메모를 보면 국정원의 자금내역이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는데 최순실이 어떻게 그 내역을 알고 있나요?”   “저는 모릅니다.”   “증인이 국정원 자금을 쇼핑백에 담아 대통령관저의 서재로 갈 때 최순실과 마주친 적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다음은 변호인이 물었다.   “증인이 처음 국회의원 박근혜의 보좌관으로 채용될 때 정윤회와 최순실 부부가 면접을 진행했죠?”   “정윤회 비서실장이 면접을 보았습니다.”   “증인을 포함한 속칭 문고리3인방은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기소된 상태죠?”   “공동정범으로 기소됐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성향 상 국정원 돈에 대해서는 비서관인 증인에게 일임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 사용대상, 격려금지급대상과 그 금액 이런 부분에 대해서 대통령의 말씀에 따라서 지출하는 것이지 제가 그런 부분을 결정하거나 그런 적이 없습니다.”   “증인은 2014년 6월 25일경 아파트 구입경위에 대해 추궁 받으신 사실이 있지요? 일년 만에 아파트 대출금을 전액 상환했던데 검찰에서는 그 돈에 국정원의 돈이 들어간 것으로 의심하는데 어떤가요?”   “다 문제없는 것으로 소명되었습니다.”   “최순실은 2015년 말 독일로 가기 전에 증인을 만나 ‘그동안 수고 했는데 퇴직금도 제대로 주지 못해 어떡하느냐’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만난 적 없습니다.”   “최순실이 출국할 무렵 통화를 한 적은 있나요?”   “출국하던 날 통화를 했습니다.”   “어떤 얘기를 나누었나요?”   “당시 언론에 나오는 국정농단등의 내용에 관해서 이야기 했던 것 같습니다.”   “격려비등을 지급할 때 그 금액은 어떻게 정했나요?”   “박근혜 대통령이 구체적인 액수까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검찰은 그 돈이 뇌물이라고 했다. 변호인의 입장으로는 뇌물을 그런 식으로 받고 그렇게 관리할까 하는 의문이었다.   국고 손실죄가 되려면 그 돈들이 어떻게 사용됐는지 정확하게 조사되어야 했다. 그런 것도 없었다. 핵심이 되는 박근혜 대통령의 증언도 없다. 최순실이 왜 국정원돈에 대해 메모까지 가지면서 대통령비서관의 퇴직금까지 걱정해 주었을까 비서관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할까? 의문들은 재판이 끝난 지금까지 현재진행형이다.

엄상익

황혼이 질 무렵이면 대법원과 검찰청 앞을 산책을 하곤 한다. 그 앞에서 여러 해 일인시위를 하다가 망부석 같이 된 사람을 봤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검찰청의 철문 앞 인도에 서있었다. 그의 옆에는 햇빛에 누렇게 바랜 호소문이 바닥에 깔려있다. 어떤 검사에 대한 분노와 한이 가득 차 있는 글이다. 그는 점점 풍화되어 망가져 갔다. 생생하던 얼굴이 윤기 없는 메마른 시커먼 피부에 눈이 움푹 들어간 얼굴이 되었다. 바짝마른 몸은 뼈만 남았다. 수많은 사람과 차량들이 드나들지만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차라리 길 잃은 고양이나 개였으면 한번쯤은 돌아다보았을지도 모른다.   한번은 그에게 다가가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나를 외면한 채 무심히 하늘만 쳐다보았다. 더 이상 메아리 없는 누구와의 대화도 필요치 않다는 저항의 태도였다. 이미 그는 이 사회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누런 눈동자 속에는 살기조차 감도는 느낌이었다. 그의 가득 차 있는 화약에 어느 순간 불꽃이 닿으면 엄청난 폭발이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밤 공원을 산책하고 돌아오다가 대법원 정문 앞을 지날 때였다. 한 남자가 어둠 속에 우뚝 서 있는 텅 빈 대법원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역시 폭발 직전의 폭탄 같았다. 법원과 검찰청 정문 근처에는 그런 사람들이 바위구멍 사이사이에 꽂아놓은 다이너마이트 같이 서 있다. 그들에게 검찰과 법원은 악마집단인 것 같다.   한 맺힌 민원인의 집요한 추적을 받는 대법관 친구가 있었다. 그는 항상 두려워하고 주위를 경계했다. 퇴근할 때 아파트 앞에 도착한 후 차에서 내려 쏜살 같이 집으로 달려간다고 했다. 예전의 어떤 판사같이 석궁을 맞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주머니 안에 항상 짧은 몽둥이를 휴대하고 다닌다고 했다. 내 목숨을 내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다고 했다. 가족의 안전까지 걱정하던 대법관인 그 친구의 얼굴에는 이미 대법관으로서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포용력은 보이지 않았다. 켜켜이 쌓인 상대방에 대한 격앙된 감정만 남아 있었다.   2018년 11월 27일 오전 9시 10분경 대법원 정문 앞을 통과하던 김명수 대법원장이 일인시위를 하던 남자가 던진 화염병 세례를 받았다. 대법원장이 탄 관용차에 불이 붙었고 화염병을 던진 남자의 몸에도 불이 붙었다. 74세의 평범한 노인이었던 그는 대법원에서 심리 불속행으로 패소가 확정된 데 대한 원한으로 그렇게 했다고 전한다. 그 노인은 왜 하나의 폭탄이 되어 자폭을 했을까.   앞으로 아침에 출근하는 판사에게 흉기를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지도 모른다. 판사들은 왜 그러는지 원인을 잘 모를 것이다. 민원인 편에서 변호사 생활을 삼십년 이상 해 오면서 나는 이면의 원인을 약간은 봤다. 고통이나 슬픔의 체험이 별로 없는 흰 손이 쓴 판결문은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판사들은 외국어를 쓰는 다른 나라 사람이다. 마네킹 같이 법대위에 앉아서 판결문만으로 의사를 표시한다고 한다. 변호사들은 난해한 판결문을 해석해 주는 것으로 먹고 살기도 한다. 그중 가장 어려운 것은 대법원의 심리불속행의 문장이다. 기록을 읽어보니까 이유 없더라는 짧은 문장으로 재판 자체를 거부한다. 그 문장을 해석해 줄 사람은 없다. 몇날 며칠을 상고이유서를 준비한 변호사들까지도 종주먹질을 하면서 분노한다. 사법에서는 모든 제도가 법관들 편이다. 행정청의 진정은 아무렇게나 써도 공무원들이 알아서 조사하고 친절한 답을 해 준다. 돈도 들지 않는다. 법원에 호소하려면 보통사람은 쓸 수 없는 까다로운 형식을 요구한다. 변호사에게 돈을 주고 써야 한다. 접수시키는 데도 돈을 받는다. 돈을 받아야 함부로 법원에 소송을 걸지 못한다는 취지다. 지면 큰 금액의 돈을 내야 한다.   사법부가 행정부와 달리 그렇게 구름위에 있을 이유를 국민들은 모른다. 모든 게 판사 마음이다. 진실도 판사가 아니라고 하면 아니다. 진실이 뭉개진 돈 없는 국민이 마지막으로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테러는 더 나올 수도 있다. 사법부는 자기 시각이 아니라 국민의 눈으로 판사의 모습을 다시 봐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엄상익

육십년대 말 우이동의 한 허름한 집에 일곱 명의 소년이 모여 있었다. 한 남자한테 노래를 배우려고 모인 소년들이었다. 그 중 눈이 크고 해말싹 하게 생긴 아이가 그 옆의 서너살 많아 보이는 소년에게   “형, 학교에서 공부 못하지?” “응, 나는 성적이 나빠. 그리고 공부하기도 싫어.”   잠시 후 나이가 어린 소년이 다시 물었다.   “형네 집 되게 가난하지?”“맞어, 우리 집 아주 가난해. 나는 아버지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자랐어. 6.25때 아버지가 총 맞아 죽었어.”   “우리 집도 아주 가난해, 형. 우리 아버지는 국악인이야”   두 소년은 그 집에서 열심히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연습했다. 나이어린 소년이 어느 날 친해진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 우리가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지만 노래로는 한번 세상을 막 흔들어 놓자.”“그러자”   두 소년은 눈빛을 마주쳤다. 몇 년 후 거리의 전파사 스피커 마다 남자듀엣 오니언스의 ‘편지’란 노래가 흘러나오고 가수 김정호의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의 ‘하얀 나비’가 허공에 너울을 일으키며 울려 퍼지고 있었다. 두 소년은 가수가 되어 국민들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일으키고 있었다. 늦은 밤 잠 이 안 올 때 본 TV다큐멘터리 프로에서 가수인 임창제 씨가 하는 얘기였다. 1973년 대학입학 무렵이었다. 편지란 노래가 마음에 촉촉하게 물기를 고이게 했다. 통기타를 들도 청바지에 체크무늬셔츠를 입은 젊은 가수는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 속에서도 영원히 청년으로 머물러 있을 것 같았다. 눈덮인 얼어붙은 남한강가의 한적한 집 방을 빌려 혼자 고시공부를 하던 무렵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수 김정호의 ‘하얀 나비’의 멜로디는 방안의 메마른 공기를 독특한 쓸쓸한 빛으로 채색하곤 했다.   한내지 슬픔의 결이 묻은 가수의 음성이 그대로 파동이 되어 나의 영혼을 흔들었다. 영원한 젊음일 것 같은 편지의 가수는 텔레비전화면 속에서 어느새 칠십 노인이 되었다. 어깨가 쳐지고 화면에 비친 걸음걸이에 힘이 없어 보였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나보고 노래로 세상을 한번 흔들어보자고 했던 김정호가 기타를 그렇게 좋아했어요. 한번은 새로 기타를 구했다고 하면서 어떻게 좋아하는지 몰라요. 그리고는 일주일 만에 죽었어요. 서른 세 살이던가? 폐결핵이면서도 목숨을 걸고 끝까지 노래를 불렀어요.”   그는 지금도 너무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한다. 노인이 된 지금도 불러주는 무대에 달려가는 모습이었다.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끝까지 정진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풋풋해 지는 것 같다. 흔들려도 마지막까지 걸어가는 거다.   비슷한 나이의 그를 보면서 상대적으로 나는 어떻게 살았나를 반성해 본다. 초등학교시절부터 우리들은 경주마같이 인생트랙의 출발선을 박차고 뛰기 시작 했었다. 공부에 일등을 해야 판검사나 의사도 되고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목표를 설정 받았다. 한눈을 팔지 못하도록 눈가리개를 하고 앞만 보고 뛰어야 했다. 나의 경우는 열심히 뛰던 어느 순간 나의 모습이 보였다. 능력이 없었다. 집념도 없었다. 최고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미 출발부터 정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내면의 어떤 존재가 경주트랙을 벗어나 초원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그 존재는 내게 이렇게 가르쳤다. 삶은 심오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많은 가치와 의미가 눈에 띄지 않는 초라한 곳에서 꽃을 피울 수도 있다고. 소년과 청년 시절을 함께했던 친구들이 이제는 모두 경주를 마치고 돌아와 허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주연역할을 맡은 친구들도 많았다. 박수갈채를 받기도 하고 인기와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인생무대의 공연이 끝나고 객석의 불이 켜졌다. 요즈음은 인생무대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되돌아보게 된다. 주연급을 하지 못하고 조역이나 단역이었더라도 최선을 다할 건데 하는 후회가 앞선다. 공부를 못하고 가난했더라도 ‘하얀 나비’와 ‘편지’로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흔든 그들이 가장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은열

“넌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제일 솔직해.”언젠가 한 선배가 말했다(그것도 여러 번). 처음엔 그런가 했고 거푸 들었을 땐 칭찬인가 싶었다. ‘가식적이란 말보단 훨씬 듣기 좋네!’ 은근히 우쭐해 했던 것도 같다.포커페이스가 되지 못해 슬픈 짐승한참 후에 알았지만 제대로 헛다리였다. ‘감정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날 절반은 놀리려, 절반은 걱정하며 내린 평가였으니까. 굳이 구분하자면 칭찬보다 지적에 가깝달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내 얼굴은 포커페이스이길 극렬히 거부했다.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만큼 예외 없이 티가 났다.학창 시절까진 그럭저럭 괜찮았다.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건 회사에 들어오면서였다. 조직의 일원이 된 후 만난 사람 중 내 ‘솔직한’ 감정을 날것 그대로, 그것도 훅 들어오는 표정에서 읽어내는 일을 달가워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혹자는 신기해했고 혹자는 당혹스러워했다. 좀 친해지고 나선 (‘솔직함’의 당의정을 입혀 우회적 충고를 건넸던 선배처럼) 조심스레 우려를 표했다. “그렇게 읽히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 판판이 네 손해야.” 대놓고 꾸짖는 이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 몇몇은 내 ‘리트머스 표정’에서 “당신이 끔찍해요!”란 속마음을 읽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날 떠나갔다.그런 반응을 접하는 내 심정은 다소 양가적이었다. 일면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론 괜히 부루퉁해지곤 했다. ‘그게 진심인 걸, 뭐. 어쩌라고!’ 꽤 고집스러웠던 소신을 바꾸게 된 계기는, 이번에도 역시 논어였다(논어에서 얻은 회사 생활의 첫 번째 깨달음은 이전 글 ‘스페셜리스트와 제너럴리스트 사이’에서 고백한 적이 있으니 참조하시길).문질빈빈의 핵심은 ‘형식’의 재발견논어 ‘옹야(雍也)’ 편에 ‘문질빈빈 연후군자(文質彬彬 然後君子)’란 표현이 나온다. 군자의 자질에 관한 공자의 생각이 집약된 이 것으로 ‘문(文)’은 ‘형식’을, ‘질(質)’은 ‘내용’을 각각 대표한다. 그 뜻을 넣어 해석하면 ‘꾸밈과 바탕이 조화를 이뤄야 비로소 군자라 할 수 있다’ 정도가 되려나. 하지만 이런 식의 풀이는 너무 뻔해 딱 ‘공자 말씀’ 같다. 아무런 울림이 없다.그런데 이 말을 하나씩 뜯어 다시 들여다보면 새로운 단면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형식과 내용의 경중을 논할 때 은연중 후자를 더 중시한다. 더 나아가 본질이 진짜라면 겉으로 보이는 모양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의 생각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들었던 논어 수업에 따르면 문질빈빈의 하이라이트는 ‘형식도 내용만큼이나 중요하다’에 있다. 제아무리 오랜 연인 사이라 해도 사랑하는 마음(質)은 굳이 말(文)로 해야 전해지고, 진심(質)이 어떻든 공적 자리에서 타인을 마주할 땐 낯빛(文)을 가지런히 하는 게 사회생활의 도리란 얘기다.부정적 의미로만 통용돼온 사자성어 ‘교언영색(巧言令色)’ 역시 같은 맥락에서 재정의될 필요가 있다는 게 그날 강의의 핵심이었다. 남 듣기 좋게 말하고(巧言) 얼굴을 아름답게 꾸미는(令色) 데에만 정신이 팔려선 곤란하겠지만, 문질빈빈의 참뜻에 비춰볼 때 그런 노력 역시 엄연히 절반(文)을 차지하는 만큼 덮어놓고 폄하하는 건 옳지 않단 얘기였다.깨달은 바가 컸다. 그날 이후 누굴 보든 늘 생글거리던 후배, 도통 속을 알 수 없어 답답했던 선배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도리 없이 나도 ‘궤도 수정’에 들어갔다. 수십 년간 방치해뒀던 표정 관리에 본격적으로 나서보기로 한 것이다. 요즘은 주름 잡히는 미간이 느껴질 때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이마를 편다. 출근 전 화장대 거울을 보며 입꼬리도 한 번씩 올려본다. 도무지 표정 관리가 안 될 것 같은 사람과는 대면(對面) 횟수를 최소화하기로 했다. 단,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뿜어져 나올 레이저를 의뭉스레 숨길 수 있을 때까지만.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옛말 틀린 것 하나 없다, 노력하면 안 될 게 없을지니!). 그런데 며칠 전, 내 ‘솔 메이트’를 자처하는 한 선배가 조용히 다가오더니 귀엣말을 했다. “있지, 내가 요 며칠 두 사람한테서 자기에 대해 똑같은 얘길 연속으로 들었거든. ‘○○씨는 사석에선 한없이 친근하게 굴다가 다음 날 사무실에서 마주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무뚝뚝해지더라.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으이구, 표정 관리 좀 해.”하긴, 문질빈빈이 그리 쉽게 되는 거였으면 세상 사람 전부 벌써 군자 됐지. 나도 아직 멀었다. 글쓴이 은열은 신문사에서 일하다 뜻한 바 있어 기업으로 이직했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게 글쓰기인 데다 오랜 데스크 생활까지 거쳐 남의 글 들여다보고 고치는 데 이골이 났다. 어쩌면 이 땅 어딘가에 존재할, ‘논스톱 20년 차 직장인’의 내공이 궁금할 이름 모를 후배들에게 손톱만 한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다시 글 쓸 용기를 냈다.

엄상익

법원을 다녀와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는데 아내가 쓸쓸한 표정이 되어 내게 말했다.   “길을 묻는 사람이 있어서 옆에서 설명을 해 줬는데 그 젊은 사람의 얼굴에서 묘하게 무시하는 게 느껴졌어. 이제 좋은 일도 한발 물러서야 할 때가 된 거 같아.” 젊은 시절 만나는 사람마다 아내에게 활짝 미소를 짓고 도울려고 했다. 세월이 가고 이제 아내는 윤기 없는 백발에 고왔던 피부도 탄력을 잃고 늘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아침에 법원에 갔다가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 나이를 먹으니까 이제는 모두가 싫어하는 것 같더라구”   오전에 법원에 갔었다. 법원직원의 표정에서 마치 파충류라도 보는 듯한 거부감을 보았다. 늙음이란 그런 것이다. 젊은 시절 우리들도 그랬다. 얼굴에 잔뜩 검버섯이 끼고 손등이 거북이 등껍질 같은 노인들을 보면 추한 느낌이 들곤 했다. 영원할 줄 알았던 젊음이 어느 순간 소리도 없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나와 아내가 그런 늙은이가 되어 버렸다.   “이제부터 어둠이 물들기 시작하는 이 황혼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사실상 용도가 끝난 그릇같이 찬장 귀퉁이에서 빈 공간만 차지하고 있어야 할까?”   내가 혼잣말 같이 내뱉었다. 인생을 그릇에 비유하니까 40년 저쪽의 눈덮힌 전방의 광막한 들판에서 순찰을 돌고 있던 장교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고시에 실패하고 직업장교로 입대했다. 속칭 돈이나 빽이 없어 최전방에 배치됐다. 그런 시절이었다.   밤새 순찰을 마치고 막사로 돌아왔다. 새벽여명과 함께 허무가 밀물같이 가슴으로 스며들어왔다. 그때 부하인 하사관이 교회에서 보낸 전도용 성경을 책상위에 놓고 갔다. 얇은 성경의 종이로 담배를 말아 피면 좋다고 했다. 호기심에 우연히 한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여러 종류의 그릇이 등장하는 비유가 있었다. 귀하게 쓰이는 도기도 있고 막 쓰는 질그릇도 있었다. 큰 그릇도 있고 간장종지 같은 작은 그릇도 있었다.   자기가 어떤 그릇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조물주인 도공의 마음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니 어떤 그릇으로 세상에 나왔는지 탓하지 말고 그냥 자기 역할에 충실하면서 살라는 것이었다. 그걸 보면서 내 자신은 투박한 뚝배기신세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싸구려 선술집 선반에 있다가 배고픈 사람의 허기를 채워주는 국밥그릇 역할에나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후 힘겹게 변호사자격증을 취득해 뒷골목에 개인법률사무소를 차리고 30여년 시간의 강을 흘러왔다. 최선을 다하면 뚝배기는 벗어나 소품인 놋그릇정도는 될 수 있겠지 하고 살아왔다. 그러다 어느새 끝이 보이는 세월이 왔다. 앞에 앉아 있던 아내가 뜬금없이 한마디 내뱉었다.   “아니야, 깨진 그릇이나 쓰지 않는 그릇보다는 요강이라도 되는 게 나을 것 같아.”   “뭐 이제 오줌이나 받는 요강이 되라고?”   “그래, 그게 뭐 어때서? 그래도 쓰임을 받으면 좋은 거잖아?”   백발인 아내가 오늘은 내게 요강이 되라고 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나의 영혼에 강한 울림을 줬다. 깨진 그릇 같은 궁색한 늙은이 보다는 그래도 역할을 맡은 요강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위치를 파악하고 얼른 낮아지는 것도 삶의 지혜가 아닐까.

엄상익

전국의 감옥으로 간단한 글을 보냈다. 책을 그 도서관에 선물로 보낼 테니까 받아주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변호사로 평생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돈으로 밥을 먹고 아이들을 키웠다. 생업을 마감할 무렵인 지금 얼마라도 신세를 갚고 싶었다. 책을 선물로 보내기로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감옥 안에서도 저마다 시각이 달랐다. 어떤 사람은 하늘의 별을 보고 또 어떤 사람은 바닥에 괴어있는 웅덩이의 진 흙탕물을 봤다. 영혼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정신적 양식이 더 좋을 것 같았다.   몇 달 전이었다. 나이 칠십의 잘 아는 노인이 감옥체험을 했다면서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는 서민아파트의 구석방에서 나 홀로 잡지를 하는 괴짜였다. 수사기관에서 외면하는 아파트의 비리들을 글로 써서 집집마다 찾아가 우편함에 넣었다. 그에게 명예훼손죄로 벌금 30만원이 선고됐다. 그는 돈 대신 몸으로 때우기로 했다. 그가 내게 한 감옥여행의 내용은 이랬다. “토요일 오후에 구치소 담 안으로 들어가 신체검사를 하고 수의와 신발을 받아 감방에 들어갔어요. 죄수 몇 사람이 있더라구요. 그중 한 사람이 내게 바둑을 둘 줄 아느냐고 하면서 종이로 만든 바둑판을 펼치더라구요. 계속 바둑을 뒀죠. 끼니때가 되면 음식이 나오는데 닭고기도 나오고 돼지고기 반찬도 나왔어요. 밥을 먹고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한 후 빈 시간에는 책을 읽었죠. 거기 있는 책들을 보니까 무협지 같은 게 많고 좋은 책들은 별로 없더라구요. 그렇게 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 새벽 네 시 쯤 됐는데 교도관이 나보고 나가라고 하더라구요. 아침이나 먹고 나가자고 했더니 안 된대요. 빨리 가래요. 그래서 나왔어요. 책을 읽는 정적인 성격의 사람들은 들어가도 별로 힘들지 않겠더라구요. 그리고 하루 일당 십만원으로 쳐주는 데 그게 어딥니까?” 그의 말을 들으면서 감옥이야 말로 독서당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핸드폰이나 인터넷을 못하니까 진지한 독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기도하고 불교에서는 선정에 들지만 유교에서는 책을 읽는 게 수도의 방법이다. 변호사생활을 30년이 넘게 하면서 듣고 본 체험들을 직접 써서 책으로 만든 것들이 있었다. 출판사에서 그걸 사서 보내면 어떨까 생각했다. 출판사도 좋고 그들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굳이 그렇게 돈을 쓰려고 마음먹은 동기가 있었다. 이혼소송을 맡긴 여인이 있었다. 어느 시점부터 그녀는 자신의 변호사인 내가 소송상대방인 남편에게 돈을 먹고 자기를 불리하게 한다고 의심했다.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편집증을 가진 그녀의 뇌리에 내 말은 들어가지 않았다. 워낙 확신을 가지고 집요하게 덤벼드니까 법관들도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은 언제 증오의 화살이 자기들에게 날아올지도 모른다고 염려하는 것 같기도 했다. 법관들은 내게 책임을 지우는 어정쩡한 판결을 내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판결 선고를 앞두고 나는 악한 그녀에게 돈을 빼앗기느니 하나님께 돈을 바치겠다고 기도했다. 그 돈만큼 책을 감옥에 보내기로 마음먹은 배경이었다. 그러나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교도소 담당자들의 연락을 받은 사무실의 여직원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변호사님 교도소에서 어떤 책을 몇 권을 보낼지 써서 신청을 하라고 하네요. 그러면 자기네가 받을지 안 받을지 심사를 하겠다고 하네요.”   선의가 저울대에 올려지는 느낌이었다. 여직원이 말을 계속했다. “또 어떤 교도소는 변호사님이 직접 만든 책을 넣으면 자기광고가 될 수도 있으니까 받기가 곤란하다고 하네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의 생업을 그만두는 마당에 내가 무슨 광고가 필요한 것일까. 속으로 픽 웃었다. 여직원이 덧붙였다. “서울 근교의 구치소는 마음만 받겠다고 말하면서 거절했어요. 그리고 보니까 지방에 외떨어진 교도소 한두 군데만 감사하게 받겠다고 하고 나머지는 모두 거절하는 것 같아요.”어느새 따뜻해지려고 했던 내 마음은 찬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이 서늘해졌다. 순수한 성의도 그들의 검열을 받아야 하는 것 같았다. 차고 넘치는 세상인가? 어쩌다 선한 마음이 들어도 실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김주덕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이 있다. 매우 중요한 법이다. 점포를 빌려서 장사를 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기 때문이다.   사실 호프집을 하든, 카페를 하든, 대형 식당을 하든 자기 건물에 자기 가게를 가지고 하는 사람은 거의없다. 때문에 대부분 세를 얻어 인테리어를 하고 장사를 한다.   때로는 권리금도 준다. 직원을 고용해서 폼나게 오픈은 하지만 대부분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고생만 죽도록 하고 손을 든다.   잘 버텨야 1년 내지 3년 이다. 손해 보고 가게문을 닫게 되면 신용불량자가 되거나, 월세방으로 옮겨야 한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① 세상이 생각 보다 무섭다는 것! ②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③ 건물주는 역시 갑이고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는 것, ④ 부동산 중개인은 남의 일이기 때문에 무조건 장사 잘 된다고 부추겨 중개비만 받는다는 것, ⑤ 장사도 되지 않는 장소에서 맨날 인테리어업자만 수지 많는다는 것, ⑥ 종업원은 주인이 망해도 다소 불편해할 뿐 같은 심정으로 속상해하지 않는다는 것, ⑦ 장사하다 망하면 사회에서는 돈벌려고 욕심부리다 망한 것으로만 생각하고 동정하지 않는다는 것, ⑧ TV에서 장사해서 부자됐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대부분 허풍이라는 것, ⑨ 장사란 열심히 한다고 해서만 되지 않는 이상한 것이라는 것, ⑩ 망하면 가족관계도 이상해지고 가정은 해체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남의 건물을 세얻어 장사하는 사람들이 곧 깨닫게 되는 법칙이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장사를 함부로 하지 마라! 하게 되면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을 100번 이상 읽어라. 중요한 법조문에 밑줄을 그어라

은열

“저기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유니폼 차림의 여직원이 턱을 까딱하더니 물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턱이 가리키는 방향에 놓인, 낡고 딱딱한 나무 의자엔 나 같은 ‘수금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서넛 앉아 있었다. 엉덩이를 반쯤 걸친 채 어색하게 두리번거리길 30분여. 마침내 봉투 하나를 받아 들었다. 그 안엔 3개월 후 지급 조건의 100만 원권 어음증서 한 장이 담겨 있었다. 괜히 코끝이 시큰거렸다. ‘해냈어!’‘10년 후 할 일’ 누구도 안 바꿔준다신문사에서 처음 배치된 부서는 문화사업을 기획, 운영하는 곳이었다. 당시 우리 부서 주최 행사에선 거의 예외 없이 참가자 배부용 팸플릿을 제작했다. 그리고 거기엔 광고 페이지가 몇 장씩 포함됐다. 당연히 유료였고 그걸 수주하는 건 부서원의 몫이었다. 신문에 종종 광고를 싣는, 알 만한 업체 담당은 일찌감치 선배들에게 돌아갔다. ‘신입 면제 특권’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나 같은 새내기가 시도할 방법은 ‘맨땅에 헤딩하기’가 전부였다.소규모 음악회를 앞두고 또다시 ‘광고 수주전(戰)’이 시작됐다. 사무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사람 키만 한 백지 한 장이 붙었고 전 부서원의 이름이 차례로 적혔다. 수주 실적 ‘성적표’였다. 잘나가는 선배들이 ‘바를 정(正)’ 자를 그리며 수금 예정액을 높여갈 때 내 이름 옆만 내내 공백이었다. 한동안 부러 한 시간쯤 일찍 출근, 단골 도넛 가게에서 탕약 같은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신세를 한탄했다. ‘이러려고 취직했나….’그날도 예의 그 도넛 가게에서 신문을 뒤적이다 한 광고 앞에 시선이 멈췄다. 고가의 수입 피아노를 판매하는 악기 도매 업체의 흑백 광고였다. ‘비싼 악기를 파는 곳이니 클래식 음악회 관객에게 광고하고 싶지 않을까…?’ 대표 전화번호를 옮겨 적고도 한참을 망설였다. 네댓 번의 통화 대기를 거쳐 겨우 광고 담당자와 연결됐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겨운 ‘100만 원짜리 어음 수주’ 사연이다.그 후로도 내 ‘이러려고…’ 타령은 꽤 오래 이어졌다. 매일 아침 그날 신문을 선배들 책상에 올려놓고 커피 메이커를 청소하면서, 오후 두 시쯤 우편실로 달려가 선배들에게 배달된 등기우편 꾸러미를 받아오면서, 많게는 수천만 원에 이르는 행사 지출 내용을 맞추느라 산처럼 쌓인 영수증 더미와 씨름하며 시시때때로 겁이 났다. ‘10년, 20년 후에도 이런 일만 주어지면 어쩌지?’​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이후 난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비상’을 여러 번 경험했다. 팸플릿에 들어갈 임원 인사말을 쓰고 사내 신문 리포터로 활동하며 글쓰기 능력을 인정받았고, 교육 기사를 열심히 쓰다 때마침 교육사업을 준비 중이던 사내 기획단(TF)에 합류해 새로운 업무도 익혔다. 오래 알고 지내던 취재원에게서 확보한 제보 덕에 난생처음 특종상도 받았다. 30대 초반에 수십 년 전통의 매체 운영 책임자 자리에 앉았으며, 무대 공포증을 이겨가며 치러낸 강의 경험을 눈여겨봐준 몇몇 지인 덕에 매해 끊이지 않고 특강 의뢰를 받을 정도의 평판도 얻었다.물론 ‘거저’는 아니었다. 석 장짜리 단신 기사 하나 송고하면서도 수십 차례 퇴고가 예사였고, 교육 전문 기자가 돼 보겠다며 ‘핫(hot)’하다는 사교육 전문가와 욕하는 초등생, 아이비리그행 티켓을 거머쥔 토종 여고생 사이를 누볐다. 준비 없이 리더가 됐다는 자괴감에 머리를 쥐어뜯다 거금 50만 원을 들여 6개월 과정의 모 대학 리더십 아카데미에 등록했으며, 어렵게 확보한 영상 강의 촬영 기회를 망치기 싫어 주말마다 카페에 죽치고 앉아 스크립트를 쓰고 고치길 반복했다.​만사형통 주문 ‘난 주머니 속 송곳이다!’사자성어 ‘낭중지추(囊中之錐)’를 좋아한다. 주머니(囊) 속에 숨겨놔도 언젠가 뚫고 반드시 비어져 나오는 송곳(錐)처럼 유능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각을 드러낸다는 뜻이 퍽 맘에 들었다. 돌이켜보면 난 병아리 회사원 시절부터 줄곧 마음속에 낭중지추 네 글자를 고이 품고 살았다. ‘비록 지금은 주머니 속에 감춰진 신세지만 언젠가 이 갑갑한 공간을 뚫고 나가 내 존재를 만방에 떨쳐야지!’ 이를 악물었다. 한편으론 ‘주머니 뚫는 힘’을 기르려 백방으로 노력했다. 자신을 송곳이라 칭하면서도 내심 ‘남이 볼 땐 그저 뭉툭한 막대기면 어쩌지?’ 전전긍긍했다. 그 간극을 어떻게든 좁혀보려 갖은 수를 썼다.​‘쳇, 겨우 그 정도면서 송곳은 무슨!’ 주변에서 수군거릴 수 있다. 그래도 회사 생활을 시작할 때 스스로를 낭중지추로 명명하는 건 실(失)보다 득(得)이 크다. 일단 지금 당장 당신이 처리해야 할 일이 형편없이 한심하더라도 스스로를 진정시킬 수 있다. 당신은 아직 제대로 된 바깥세상을 구경조차 못 한 거니까. 그저 어둑한 주머니 속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니까. 지난한 회사 생활을 이겨낼 ‘전투의식’ 함양에도 유용하다. 주머니를 뚫고 바깥 구경을 하려면 결코 ‘멍 때려선’ 안 되기 때문이다. 끝이 무뎌지지 않도록, 녹이 슬어 돌파력을 잃지 않도록 한시도 쉬지 않고 자신을 벼려야 하기 때문이다.​그렇게 20년쯤 애쓰다 보면 어느 틈엔가 정말 ‘날 선 송곳’이 된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돈이니 명예니 하는 건 자석에 달라붙는 쇳가루처럼 저절로 따라온다. 그러니 직장 초년생이라면 속는 셈 치고 낭중지추를 마음에 새기자. 혹 ‘약발’이 받는다 싶거든 꼭 《톱클래스》 편집부로 연락 주길.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온, 멋진 송곳의 탄생을 기꺼이 축하할 용의가 있으니! 글쓴이 은열은 신문사에서 일하다 뜻한 바 있어 기업으로 이직했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게 글쓰기인 데다 오랜 데스크 생활까지 거쳐 남의 글 들여다보고 고치는 데 이골이 났다. 어쩌면 이 땅 어딘가에 존재할, ‘논스톱 20년 차 직장인’의 내공이 궁금할 이름 모를 후배들에게 손톱만 한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다시 글 쓸 용기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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