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일

모내기 후에 쉬고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 조선DB 박정희 전 대통령 출생 100주년을 기해 명지대학에서 학술포럼이 있었다. 이 자리(에 가지는 않았다)에서 이영훈 서울대 명예교수가 발표한 논문 “박정희 모델의 의의와 재평가”가 눈에 띈다. 논문의 핵심인즉, 박정희 모델 성공의 비결은 정부-기업-근로자들의 자발적 유인(誘引)을 이끌어낸 점이라 했다.   흔히 ‘박정희 방식’에 대해선 강제력의 측면만 강조했지, 자발적 협력의 측면은 도외시해 왔다. 강제력의 측면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이영훈 교수는 “그것뿐이었을까?”라는 이의를 제기한 셈이다. 이 영훈 교수에 의하면 1960년대에 시작된 대외 지향적-수출주도형 산업화, 그리고 1970년대 후반에 시작된 중화학공업이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데는 단순한 강제력만이 아닌, 근대화를 향한 국가-기업-현장 근무자들 3자의 합심(合心)이 있었다고 한다.  필자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박정희 정치경제학’에 비판적이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과 세상은 이런 비판적-비관적 견해와는 다르게 돌아가는, 그 어떤 열기(熱氣) 같은 걸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5, 16 이전의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무(無)변화에 식상해 있던 때와는 달리, 무언가 전례 없이 역동적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눈코 뜰 사이 없이 학교 나와 취직하고, 출근하고, 일에 미치고, 바쁘고, 회사 이야기에 여념이 없고, 해외 마인드를 갖게 되고, 신용장(L/C)이 어떻고 어떻다 하고, 중동엘 나가고, 서울근교가 개발돼 내 집을 마련하고, 냉장고를 사들이고, 텔레비전을 사고, 보너스라는 걸 타보고,.. 하며, 마치 서부(西部) 개척이라도 하듯 매일 매일을 열성적으로 끌어안으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강단(講壇) 지식인 다수는 시종 ‘박정희 정치경제학’에 비판적이었고 비관적이었다. 박정희대외지향성은 종속화의 길, 외채망국의 길, 부익부-빈익빈의 길이라 했고, 박정희 정치는 배제(exclusion) 일변도의 정치라고 했다. 그러나 근대화 관료, 전문가(expertise), 기능인, 기업인, 경영인, 직장-시장-산업현장-무역현장-작업장 종사자들은 2교대 3교대로 팽팽 돌아가는 일과를 밟느라 ‘바쁘다 바뻐“ 하며 "죽으려 해도 죽을 시간이 없다"는 식이었다.  강단 지식인들은 자유시장주의, 대기업 주도, 차관(借款)경제의 비(非)민족주의적이고 ‘매판적’인 성격을 질타했지만, 근대화 작업 현장에서는 역사상 처음 접해보는 지구경제권(圈)의 광활한 지평 앞에서 왕성한 '자본주의적' 성취욕을 폭발시키고 충족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영훈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 고도성장의 성공은 비판적 지식인들의 비관적 관찰과는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정부-기업-산업현장 종사자들의 열심, 헌신, 부지런함, 의지, 보람, 도전, 할 수 있다(can do) 정신의 합작(合作) 덕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비판적 지식인들에겐 실망스러운 것일 수 있다.  언젠가 김문수 전 경기도 지사가 한 말에 폭소를 터뜨린 적이 있다. “아 글쎄 대학엘 들어가 보니 교수들마다 하는 소리가 고속도로도 안 된다, 자동차 산업도 안 된다, 포항제철도 안 된다, 하며 말짱 안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말만 믿고 열심히 데모만 했지요...” 하지만 나중에 보니까 그런 게 다 되었더라는 것이다.  얼마 전 1970년대에 신문사에 함께 근무하던 동료 5~6인의 월례 오찬 모임에서 한 동료가 이렇게 말했다. 그 동료는 필자의 대학 같은 과(科) 동문이고, 그 신문사 정치부장, 편집국장, 주필을 역임하고 은퇴한, 아주 균형 잡힌 시각의 온건한 신사다. 그 동료의 말은 그래서 불편부당(不偏不黨)-객관성-정확성에 많이 근접해 있다고 필자는 늘 생각해 오던 터였다. 그의 말은 이랬다. “박정희 근대화 성공했지. 한데 유신은 잘못했어... 유신을 해서 중화학공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있지만...이란 표현은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란 뜻일 게다.      유신말기 필자의 상황은 어려웠다. 주말에 집에 있을 때는 관할 정보과 형사가 찾아오고, 대문 밖에 나서면 기관원이 차를 가지고 지키고 있다가 신문사에 실어다 놓은 때도 있었다. 혹시 다른 데로 가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던 어는 날 새벽, 잠에서 깨자마자 늘 하던 대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켰다. “박정희 대통령 유고로 최규하 국문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엉???  10. 26 사태를 계기로 필자는 ‘박정희 시대’를 조기에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해방되고 싶어서였다. 결론은, 역사는 한 줄기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빛도 있고 그림자도 있다. ‘박정희 시대’도 그렇게 보기로 했다. '박정희 근대화'는 성공 스토리였다. 빛이었다. 그건 종속의 길이 아니라 종속 탈피의 길이었다. 정치리더-기업리더-현장 근무자들의 합심(이걸 이영훈 교수는 한국적 전통이라고 했다)의 성과였다. 이걸 죽어도 인정하지 않겠다며 ‘식민지 종속국’이니 ‘사대매국’이니 하는 매도는 그만 했으면 한다.  ‘박정희 시대’의 그림자도 있다. 정보정치의 과잉탄압으로 국가가 분열되었다. 그 분열은 지금 더 크게, 더 깊이 벌어졌다. 남미 군사정권들에 비하면 '박정희 시대‘ 탄압은 별것 아니었다 할지 모른다. 그러나 고통은 주관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 시대(플러스 신군부 시대)의 그림자로 인해 좀처럼 아물지 않을 상처를 입었다고 아파하는 영혼들이 있는 한, 우리 현대사는 그 뒷자락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필자는 단독 강화(講和)를 한 셈이다. 10. 26 당시 어머니, 어린 아들, 나 셋이서 아무도 모르게 박 대통령 분향소를 잠깐 찾았다. “박정희 대통령, 귀(貴) 영가에 대한 미움에서 오늘부로 벗어나려 합니다. ‘박정희 근대화’는 적중(的中)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 세상에서라도 이 시대 정치적 수난자들의 마음을 헤아리셔야 합니다.” 그의 영혼이 헤아렸기를 소망한다.     지난 현대사에서 자성(自省) 해야 할 바가 있다면?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너무 일국(一國)주의에 갇혀있다는 점이다. 세상은 넓고 한국이 세상의 기준이 아니다. 넓은 안목을 가지고 이 좁은 우물 속에서 제살 깎아먹는 소모전 좀 덜했으면 한다. ‘폐쇄적 민족주의’는 북쪽 김가네나 하라 하고, 우린 보수를 하든 진보를 하든 글로벌하게 살아보자는 것이다. ‘박정희 100년’에 부치는 한 귀퉁이 소감이다.

유슬기

240번 버스가 건대입구에 정차할 당시 CCTV_ytn 캡처   라쇼몽(羅生門)은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1950년에 만든 영화다. 같은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증언이 엇갈린다. 1인칭으로 서술된 사건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이를 두고 사회학에서는 ‘인간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라쇼몽 효과’라는 말을 만들었다. 지난 11일부터 현재까지 240번 버스는 ‘라쇼몽’의 다른 이름이었다. 목격자의 기억과 당사자의 증언이 어긋났다. 여론은 급발진을 하듯 방향을 바꿨다. SNS를 타고 있던 이들은 다같이 앞으로 쏠렸다가 또 다같이 뒤로 쏠렸다. 멀미가 나는 이런 상황에 늦게나마 안전바가 되어준 것은 ‘Fact’였다.   240번 버스는 중랑차고지에서 출발해 건대역과 신사역을 지나는 버스다. 퇴근 인파가 붐비는 9월 11일 오후 6시 30분경 한 포털의 카페에 240번 버스 기사를 비난하는 글이 올라왔다. 비난의 내용은, 한 정류장에서 아이가 엄마 없이 내렸고, 이를 확인한 엄마가 세워달라고 소리쳤으나 기사가 이를 무시하고 지나쳤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만 내리고 미처 하차하지 못한 엄마를 태운 채 그대로 출발했다’는 글은 처음에는 안타까움을 나중에는 분노를 낳았다.   목격자의 기억 vs 당사자의 증언    이글이 커뮤니티 사이트, 카페 등에 퍼지면서 읽는 이들의 공분을 샀다. 여론이 확산되자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고 서울시는 이 사건에 대해 진상조사를 시작했다. 이튿날 오후 2시, 240번 버스기사의 딸이라고 밝힌 이가 해명글을 올렸다. 당시 정황에 대해서 처음 알려진 것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라쇼몽처럼 같은 사건에 두 가지 증언이 나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당시 상황을 담은 CCTV가 있었다. ‘다섯 살도 되어 보이지 않는’ 아이는 사실 일곱 살이었고, 등 떠밀려 내리는 대신 자기 발로 유유히 하차 계단을 밟았다. 아이가 내린 뒤 문이 닫히고, 240번 버스는 정류장을 떠났다. 건대입구역 정류장은 교통이 혼잡하다. 오토바이 충돌 사고도 빈번히 발생한다.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버스의 경우 정류장을 떠난 뒤에는 문을 열지 않도록 되어 있다. 운전 기사의 온정의 문제가 아니라 규정의 문제다.   과장된 선의, 상황의 급선회   그럼에도 이번 상황은 특수하다. 아이는 내리고, 엄마는 내리지 못했다. 지난 5월 인천 무인 지하철에서 유모차는 탑승하고 보호자가 타지 못하는 아찔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 경우는 기사가 운전하는 버스였기에, 특수한 상황에 대한 ‘융통성’이 논란의 화두가 됐다. 이렇게 아이를 잃어버렸을 경우,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시작은 ‘보호자의 부주의’였다고 해도, 함께 버스에 탑승한 이들은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선의가 발동하게 된다.   문제는 이 선의에 분노가 보태져 상황을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장된 선의’는 피해자의 부주의를 축소하고, 상황의 불가피성을 불합리성으로 탈바꿈한다. 아이 엄마가 울부짖었다는 표현이나, 기사가 욕을 했다는 정황은 사실과 달랐을 뿐더러 상황을 다른 방향으로 호도하는 신호가 됐다. 여론의 쏠림은,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분노’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기사 퇴출 운동’이나 ‘사과요구’ 등은 그 결과다.   버스 기사의 심경 인터뷰_채널A 캡처   해당 버스의 기사는 며칠 사이 지옥으로 향하는 급행버스를 탔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면 이승이 바로 지옥’이라는 참담함을 경험했다. 쏟아지는 비난에 식음을 전폐하고 일을 그만 둘 생각을 했다고 한다. 진상이 알려지면서 비난은 멈췄지만, 다시 버스를 운행하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해 휴직을 신청했다. 사과를 요구하던 첫 목격자와 아이의 보호자는 사과를 남긴 뒤 커뮤니티 공간에서 사라졌다. 라쇼몽에 등장한 승려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처럼 무서운 얘기는 처음이오. 이 일로 인해 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었소. 그건 도적 떼들보다도, 전염병보다도, 기근과 불보다도 더 나쁜 일이오”   기사를 폭행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기사들을 위한 유리벽이 설치됐다. 이는 혼잡한 차내에서 승객이 외치는 소리를 듣기 어려운 방음벽이 되기도 했다. 이번 사건은 어떤 벽으로도 보호해 줄 수 없는 화살이었다. 기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벽은 더 두꺼워질 것이고, 비슷한 사건이 났을 때 기민하게 대처하기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온정이 사라진 곳에 규정이 생긴다. 분노로 바뀐 선의는, 무관심보다 더 한 재앙을 낳기도 한다. 다시 라쇼몽, 재구성된 기억은 팩트체크가 필요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기억일 때는 더욱 그렇다.

조갑제(趙甲濟)

6ㆍ25 전쟁이 계속되던 1952년 7월 3일 제주도 제1훈련소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이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뒷줄 오른쪽), 훈련소장인 장도영 준장(왼쪽 두번째) 등과 함께 지프를 타고 시찰하고 있다. /정부기록보존소. 조선DB *이승만(李承晩)의 72시간: 사흘간 잠을 자지 않고 전쟁 지도를 한 75세의 초인(超人)     수년 전 화제가 된 이라는 논문의 著者(저자) 남정옥 박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는 기습 받은 李 대통령의 긴급 대응을 이렇게 극찬하였다.       기습 받은 나라의 지휘부는 보통 공황상태에 빠지는데(스탈린은 독일군의 기습을 받은 후 며칠 간 출근을 하지 않고 지휘도 포기하였다), 李 대통령은 즉각적으로 반응하였다(북침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이것도 트집을 잡아 한국이 전쟁을 준비하였다고 우길 것이다.)     南 박사가 재구성한 李 대통령의 일정은 이렇다.       전쟁 다음날인 6월26일에는 새벽부터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03:00), 무초 대사에게 전화(04:30), 치안국 방문(아침), 대통령 지시로 군사경력자 회의 개최(10:00), 국회 본회의 참석(1100-13:00),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 방문(14:00), 서울 시경국장 피란 건의 접수(21:00), 주미 대사관에 전화(27일, 01:00 이후), 맥아더에게 전화, 신성모와 조병옥 등 피란 건의 접수(02:00), 청량리에 敵의 戰車(전차)가 진입하였다는 경찰의 보고에 따라 경무대 출발(03:00), 서울역 출발(04:00) 등이다.>    李 대통령은 사흘 간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南 박사는 면서 그럼에도 고 했다.       남정옥 박사는 '전쟁중에 이승만은 자신이 꼭 해야 할 일과 절대로 하지 않아야 할 일을 구분하였다'고 했다. 李 박사가 절대로 허용하지 않아야 할 일이라고 다짐한 것은 한국 정부의 해외(제주도 포함) 이전(또는 망명)과 일본군의 참전이었다는 것이다. 南 박사는 KBS의 '6월27일 일본 망명 타진' 보도에 대하여 '이승만의 머리 속에는 일본 망명이란 말조차 들어갈 틈이 없었다'고 했다.    李 대통령은 남침 보고를 받은 지 두 시간도 안 되어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駐韓 미국대사 무초를 불러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남정옥 박사는, 이 자리에서 李 대통령이 한 말은 한국의 대응 방향에 대한 지침이 되었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이승만은 이어서 그동안 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배경이 됐던 제2의 사라예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 왔다고 말하면서, 이 위기를 이용,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승만은 지금의 위기가 한반도 문제를 항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best opportunity)'가 될 것으로 여겼다. 전쟁이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벌써 한반도의 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승만이 전쟁을 가볍게 본 것이 아니라 이미 김일성이가 38선을 먼저 파기했으니 이 참에 통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그 출발점이 바로 전쟁 당일이었다.>     '남녀와 어린이끼지 막대기와 돌을 가지고라도 나와서 싸우라'라고 호소하는 지도자가 일본 망명을 요청하였다는 글을, 3류 공상소설이 아니라 '단독 보도'로 내어보낸 것이 역사를 모르는 KBS였다.

이상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9일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동영상 갭쳐.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UN총회에서 한 연설을 보면서, 필자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김정은의 핵 인질로 전락한 시점에서 우리나라 대통령이 세계를 향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해야 할 말들이 미국 대통령의 입을 통해 나왔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설에서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불량체제로 구성된 작은 집단’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우리 헌법이 북한 지도부를 불법 반역집단으로 규정한 것과 정확하게 궤를 같이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한 김정은을 ‘로켓맨’이라고 불렀는데, 지상 최악의 독재자이자 민족반역자에게 ‘국방위원장’이라고 꼬박꼬박 존칭을 붙이는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들과 언론과 사뭇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정권을 악으로 규정하며, 이 사악한 정권으로부터 해방해야 할 북한 주민들을 정확하게 구분해서 이야기했다. 그는 “만약 올바른 다수가 사악한 소수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악이 승리하고, 올바른 사람들과 국가가 역사의 구경꾼에 안주한다면 파괴의 세력은 권력과 힘을 쥐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악한 북한 정권에 희생된 사람들과 타락한 정권의 사례를 하나씩 열거했다.   반면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그동안 해온 광복절 경축사나 국경일 연설은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김대중 정부 이후 우리 대통령들의 연설에는 선악의 개념도 없고, 피아의 구별도 모호했다. 연설문은 그저 ‘평화’, ‘번영’, ‘화해’ ‘협력’, ‘민족공영’ 같은 추상적이면서 공허한 말 잔치로 채워졌다.   우리는 우리 대통령의 입을 통해 북한 정권이 저질러온 수많은 악행을 상기시켜 독재자의 등에 식은땀이 나게 하거나, 북한 주민들을 기필코 독재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노예상태에서 신음하는 그들의 처지를 진심으로 동정하는 말이 나온 경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가 이 민족사의 운명을 건 역사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을 보여주거나, 자유민주 체제로 반드시 통일을 이루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지도자도 없었다.   관광을 간 자국민이 총을 맞아 죽어도, 자국민이 납치를 당해도, 핵실험을 해도, 미사일을 날려도, 영해를 지키던 군함이 어뢰에 폭침을 당해도, 연평도에 포탄이 쏟아져도 우리 국민들은 지도자가 분루(憤淚)를 삼키는 모습을 본 적이 없고, 결의를 다지는 피 끓는 호소를 하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는 사이 안보의식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수준이 되었고, 독재자의 민족적 양심이나 선의(善意)에 기대어 평화를 애걸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2007 남북정상회담차 방북중인 노무현 대통령이 만수대 의사당을 찾아 방명록에 남긴글. / 청와대 사진기자단   노무현 남포 서해갑문 방명록, "인민은 위대하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온 가장 큰 원인은 우리나라의 대통령 스스로 대통령직이 어떤 자리이며, 어떤 역사적 사명과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본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7년 10월2일 평양의 만수대의사당을 찾아가 방명록에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이라는 글을 남겼다. 남포 서해갑문을 방문한 자리에서는 ‘인민은 위대하다’라는 글을 남겼다.    우리는 남과 북이 이념을 놓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인 나라다. 이념 때문에 피를 나눈 부모·형제가 서로 죽고 죽인 전쟁을 벌인 것이다. 북한은 국호에 ‘인민’이란 단어를 집어넣었고, 김일성은 바로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후 김일성-김정일 부자(父子)가 북한을 세계에 유례가 없는 악랄한 독재국가로 만들고, 주민을 노예상태로 만들면서 갖다 붙인 구실도 바로 ‘인민을 위한다’는 한 가지 명분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남한에서는 ‘인민’이란 단어 사용에 대해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분단상황에서 ‘인민’이란 단어는 이 말이 본래 가진 국어적 의미를 넘어서 이념을 내포한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은 방북 당시 개인 신분이 아니라, 국민을 대표하고, 대한민국의 헌법과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해야 할 대통령의 신분이었다. 이런 대한민국 대통령이 북한의 독재자 앞에서 ‘인민의 행복’ 운운하는 글을 방명록에 남긴 것은 개인의 이념과 신념의 문제 차원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대통령으로서 지위에 대한 자각이 없었고, 역사적 사명감과 인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노 전 대통령이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환영 나온 북한 주민들의 얼굴에서 “제발 우리를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처절한 절규를 읽으며 입술을 깨물고 다짐했어야 했다. 그가 평소 자신의 막중한 지위와 연계해서 독재에 신음하는 북한 주민의 고통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다면 만수대 의사당에서 ‘인민 행복이 나오는 전당’이라는 양심에 반하는 거짓말은 절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김정일의 노예나 다름없는 북한 주민들에게 주권이 있는 듯이 이야기 했으니, 동포들의 가슴에 잔인한 대못질을 한 것이며, 북한 주민의 처지를 알고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독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양심과 진실을 속인 결과가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안보적 위기에 처했지만, 뒤집어 보면 핵 문제를 해결하고 민족사의 비극을 끝낼 기회를 맞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5000년 역사에서 이만큼 영광스러운 위치에 서 있었던 지도자는 많지 않다. 그가 민족사의 영광스러운 주인공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오직 하나, 김정은을 악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렸다.

신상목

미국 공군이 오는 2020년 실전배치를 계획하고 있는 현대식 중력투하형 핵폭탄 'B61-12'./위키피디아미국도 전술핵 재배치에 대한 논의 동향이 바뀌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보도, 지적이 있다. 한국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하등 미국의 입장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이 덧붙여진다.   상대방의 메시지를 읽을 때에는 아래와 같은 독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첫째, 관련 보도를 보면, 미국내 전술핵 재배치 용인을 언급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중국에 대한 압박”을 언급한다. 이에 반해 한국내에서는 “한국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결의의 표현” 차원에서 재배치를 언급한다. 전술핵 재배치라는 동일한 사안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의도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둘째, 미국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국방 책임자들이 아니다. 트럼프의 좌충우돌 트위팅을 제외하면 국방 관계자들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반대로 전술핵 재배치는 “북핵으로 인한 미국 안보 위협 경감에 무용”하다고 명언한다. 북핵에 대한 억지로서의 핵전력은 확장 억지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전술핵을 재배치한다는 것은 전술핵을 억지력의 기초로 삼아 북한의 핵을 “못쓰게” 하는 것이 포인트이다. 그러나, 이를 주장하게 되면 이미 논리적으로 북한의 핵을 “인정”하는 전제 위에 서게 된다. 북핵을 인정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수순을 지금 밟는 것이 맞는가?   북핵에 대한 기본입장은 어디까지나 북핵을 “없애는” 것에 맞춰줘야 한다. 미국은 그에 대해 기본 입장을 바꾼 적이 없다. 북핵을 없애는 것이 아직 완전히 불가능하지도, 물건너 간 얘기도 아닌데, 왜 한국에서 “없애는” 방안보다 “못쓰게”하는 방안에 우선적 초점을 맞추자고 미국에 주장하여야 하는가. 미국의 국방 담당자들은 이에 대해 “못쓰게” 하는 목적이라면 전술핵 재배치는 아무런 현실적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고 확언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북핵을 없앨 방법이 무엇이 있는가? 역시 강한 제재와 압박이다. 세상에 외부와 완전히 고립되어 존속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그 존속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존재의 협조를 얻어 효과적인 제재와 압박을 하고, 그를 통해 사안의 전개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기본 해법은 미국 내에서 아직 유효하다. 미국 내에서 흘러나오는 전술핵 재배치 논의 동향도 초점은 그에 맞춰져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발상은 양날의 칼이다. 중국의 협조를 얻어내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지장이 될 수도 있다. 아직 수읽기가 끝나지 않은 셈법이다. 전술핵이 남한에 들어오는 순간, 중국으로서는 한반도의 비핵화는 깨진 것이고, 북핵을 일방적으로 탓하거나 국제여론이나 한미일의 압력에 굴복할 이유가 흐려진다. 미국으로서도 관변에서 흘리며 떠볼지언정 이를 중국과의 협상 테이블에 직접 놓고 얘기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명분도 없고 이익도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셈법이 확실히 서서 전술핵을 들여오자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정말로 하고 싶은 얘기는 전술핵 재배치 여부는 군사적 판단 사항이라는 것이다. 사드도 주한미군의 군사적 필요에 의해서 배치가 요청되었고, 그렇기에 미국이 어떠한 반발이나 어려움이 있어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관철시킨 것이다. 전술핵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주한미군이 그 재배치를 통해 억지력의 증대가 기대된다고 판단하면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요청할 것이고, 미국은 그를 어떠한 반대나 난관이 있어도 관철시킬 것이다. 해외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그것은 예외를 둘 수 없는 철칙이다. 그러한 순수 군사적 판단 사항에 자꾸 “우리의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식의 비군사적, 정치적 고려를 집어넣어 미국을 설득하거나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과 동맹 전략을 튜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튜닝의 핵심에 있는 것은 “북한의 행동에 가장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국가의 협조를 확보하여 강력한 제재와 압박으로 북한의 핵프로그램을 좌절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영식

잠수함이 부두에 정박한 사진을 보면 잠수함 마스트에 빗자루가 내걸려 있는 것이 가끔 보인다. ‘물속에서 나온 잠수함이 왜 빗자루를 달고 다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잠수함 근무 장교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 빗자루는 ‘바다에서 적(수상함)들을 쓸어 버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한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세계 어느 나라 해군이든 잠수함에 근무하는 장교는 남다른 문화와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 우리 해군의 잠수함 장교도 긍지가 대단하다. 군대에서 체육대회는 유사 전쟁 수준이다. 1995년 진해 해군 작전사령부 가을 체육대회에서 30년간의 신화가 깨졌다.    줄다리기 종목은 세계 해군 공통의 주 종목이다. 배를 부두에 계류하기 위해 홋줄을 연결하고 계류색을 부두에 연결하면, 그때부터 함정의 승조원들은 줄을 당겨야 한다. 때문에 모든 배의 승조원은 줄다리기를 밥 먹듯이 해야 한다. 그래서 줄다리기는 어느 나라에서든 해군 체육경기의 필수 종목이다.  ‘수상함을 쓸어버리겠다’는 의지를 담아 마스트에 빗자루를 내거는 것은 잠수함대의 오랜 전통이다.사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해군 잠수함 와후(SS-238)호의 모습.  1995년까지 줄다리기는 정비창 군무원팀이 30년 전승(全勝)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생생한 젊은 병사로 구성해서 붙어도 노련한 정비창 군무원단을 이기는 현역팀은 없었다. 그런데 잠수함 전대(戰隊)가 이 기록을 깼다. 잠수함 부대의 응집력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대한민국 잠수함 부대원이 신화를 이루어 가겠다는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이후 잠수함 부대는 전대, 전단(戰團)을 거쳐 214급 잠수함이 건조, 운영되기 시작하자 사령부로 승격했다. 잠수함사령부는 대한민국을 지키는 침묵의 부대이다.       음식물 쓰레기를 식재료와 함께 보관  배식을 하는 잠수함 승조원들. 잠수함에서는 음식재료와 음식물쓰레기를 함께 보관한다.  항구를 떠나는 배의 승조원은 누구나 단절감을 느낀다. 그중에서도 잠수함 부대원들의 단절감은 대단하다. 출동 시기가 가까워 오면 부인들은 남편들의 눈치를 많이 본다. 신경을 거슬리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남편 또한 말수가 줄어든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가족들하고 시간을 보내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가족에 대한 걱정과 외부와의 단절이라는 점이 1회성이 아니고 반복 또 반복된다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라고 잠수함 근무자들은 토로한다.    최근 출동 중에 아이를 출산한 김 모 대위는 “출산과 산후(産後)에 도움을 주지 못해서 바가지 긁힌다는 선배들의 이야기가 내 일이 됐다”면서 “둘째는 생각을 해 보고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수상함의 공간도 넉넉하지는 않지만 잠수함은 그보다 훨씬 더 협소하다. 때문에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가피한 일들이 많다.    모든 음식물 쓰레기는 먹어야 할 음식 재료와 함께 냉동실에 보관한다. 이때 제일 신경 써야 하는 일은 쓰레기나 식재료가 터지지 않게 잘 감싸는 것이다.     잠수함에서 세탁은 할 수 없다. 소음 발생 원인을 없애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세탁물은 최대한으로 부피를 줄여서 보관했다가 집으로 가져간다. 출동 후 가져온 세탁물에 모두 놀라워한다.    햇빛이 없는 잠수함에서는 비타민 D가 생성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무기력한 상태에 이르기 쉽다. 잠항(潛航) 시에는 공기 순환이 제한되는 상태에서 이산화탄소(CO₂) 농도가 일반 대기보다 10~20배가량 늘어난다. 이로 인해 졸림, 두통 등의 증세가 발생하고 시간이 많이 지나면 치통이 동반되기도 한다. 운동 부족 등으로 변비가 발생하고 방귀를 뀌는 경우가 많아진다. 잠수함 장교들은 방귀에 대하여 매우 너그럽다. “서로 방귀 튼 관계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잠수함 부대는 흡연율이 낮다. 잠수함 장교였던 정우성 예비역 준장은 잠수함 부대원들이 “이번 출동에 담배 피우지 못할 바에야 이참에 끊는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래도 부상(浮上)하는 시간이 다가오면 함교 탑 밑에 줄을 선다. 참으로 묘하다. 수십 일 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고 생각도 없다가 잠수함 부상 시기가 다가오면 담배 생각이 갑자기 몰려오고 담배를 피울 수 있게 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게 된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 정 준장은 잠수함 함장이나 전대장 시절에는 피우던 담배를 해군본부 근무 시절 끊었다. 책임감으로부터의 해방이 담배를 끊은 이유가 됐나 보다.      우군 잠수함끼리 충돌은 불가능  적함에 발견되지 않기 위해 잠수함 함내에서는 최대한 정숙을 유지해야 한다.  자신이 사는 집이 쪼그라들어서 수축하는 소리를 들으면 어떨까? 잠수함 승조원들은 깊은 바닷속으로 심도(深度)를 변경할 때에 선체 압력으로 외부 선체가 찌그러지는 소리를 듣는다. 잠수함의 활동 심도가 깊어지면 외부 수압이 높아져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잠수함의 외부 쇳덩이가 압력에 의해 “끼기기긱--” 하는 소리를 낸다.    잠항심도가 깊어질 때는 모든 승조원이 긴장감을 가지고 자신이 체크해야 할 안전 사안을 빠짐없이 확인한다. 매번 들리는 소리이지만 이 소리는 마치 바다의 신(神)이 신음하는 소리로 들린다. 매우 불편하고 기분 나쁜 소리라고 한다. 그래서인가? 잠수함 승조원들은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 잠수함”이라고 말한다.    잠수함은 항해에 나서기 전에 계획된 경로를 정하고 그 경로상에 해저 지형, 지물 등 모든 항해상 안전 사항을 파악하고 출항한다. 그리고 그 바닷속 경로를 따라서만 이동한다. 만약에 잠항 항해 중에 물체와 접촉하면, 적으로 구분하고 작전대응에 들어간다. 그 잠항구역에 우리 잠수함은 없기 때문이다.    잠수함은 수중관리 구역, 상호간섭 방지, 수중교통 안전규칙 등 안전항해에 대한 규정에 따라 수중항해 계획을 수립하고 그대로 행동한다. 또한 우리 잠수함의 안전과 이동은 보장하고 적 잠수함에 대한 탐지공격 작전을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 ▲탐지된 잠수함을 공격할 수 있는 대잠전(對潛戰) 구역 ▲잠수함 공격 금지구역 ▲우리 잠수함 안전 이동로 등의 개념에 따라 수중구역 관리규칙을 작전용도에 따라 구분하여 사용한다. 이 때문에 우군 잠수함끼리의 충돌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부상 항해와 입항의 설렘  마스트에서 바다를 살펴보는 잠수함 승조원들.  임무지역을 벗어나 모항(母港)으로 일정 구역까지 오면 복귀 중 잠수함은 부상한다. 종종 어민으로부터 잠수함을 보았다는 신고가 해경(海警)이나 해군에 접수된다. 대체로 잠수함 식별절차를 진행하고 확인해 보면 우군 잠수함이다.    이런 제보를 받고 언론이 확인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해군은 우군 잠수함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면서 꼭 한 가지를 당부한다.    “신고된 잠수함 부상 항해의 위치는 보도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해군은 모든 미(未)식별 잠수함 신고에 대하여 각종 채널을 통해 확인한다. 목격된 시간과 해역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우군 잠수함인지 미식별 잠수함인지 꼭 확인한다. 우리 군 잠수함의 이동, 동맹국이나 주변국 잠수함 동향 등을 확인한다. 만약 영해 내에서 잠수함이 보인 이후 잠항했다면 그 순간부터 대잠식별 작전이 펼쳐진다.    잠수함은 작전을 종료하고 복귀하는 과정에 정해진 일시와 해역에 도달하면, 부상항해를 한다. 잠수함의 부상은 다시금 외부세계와의 연결, 만남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부상시간이 몇시 몇분인가? 최대 관심사가 된다.    부상을 하고 항해 당직장교가 함교탑 상부 해치를 열고 올라가면서 “상황 끝. 수상항해 상태 유지”를 외치는 순간이면, 이미 잠수함 승조원의 마음은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달려간다. 함교 탑 해치가 열리는 순간부터 1시간가량 함교 탑은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룬다. 햇빛을 보려고, 밤이면 별빛을 보려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고 …. 파도소리와 멀리 보이는 섬,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기쁨이다. 출동임무를 마치고 안전하게 돌아간다는 확신이 서는 순간이기에 더욱 그렇다.    바다는 또 다른 인생의 배움터이고, 삶의 터전이다. 그래서 꼭 지켜야 한다.⊙

엄상익

모처럼 약속된 일정이 없는 날이다. 오늘은 어떤 일을 할까 하다가 구치소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삼십대에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냈다. 겁이 났던 그는 필리핀으로 도주했다. 그러다 근 삼십 년 만에 잡혀와 감옥으로 들어갔다. 도망을 한 괘씸죄가 적용되어 그는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노년의 그의 삶은 찬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이었다. 가족은 외국에 있었다. 면회 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감옥에 있는 그를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것 같았다.     문정역에서 내려 장방형의 웅장한 건물들이 들어차 있는 사이의 길을 이십 분쯤 걸어 구치소에 도착했다. 초가을의 햇볕이 따가왔다. 구치소 입구에서 신분증과 출입 전자텍을 교환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교도관들이 없어지고 이제는 무인 시스템이다. 철창마다 옆에 감지장치가 붙어있다. 목에 건 전자텍을 거기에 대면 철창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구치소 깊숙이 있는 접견실에서 친구를 만났다. 인간은 자기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보면 위로가 된다. 입시에서 낙방했을 때 가장 위로가 되는 건 같이 떨어진 친구다.     “어떻게 지내냐?”  내가 물었다.    “잘 지내.”  그가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박근혜 대통령도 감옥에 계시는데 나쯤이야 뭐’ 하던 친구였다.    그래도 그의 미소의 뒤편에는 엷은 적막함이 담겨 있었다.  “요즈음은 대통령 말고 위로받는 죄인은 옆에 안 계시냐?”  내가 장난기를 섞어 물었다.    “옆방에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가 들어와 계셔. 왜 들어와 있는지 주위 사람들한테 말하지 않는대. 같은 방에 있는 사람들이 불편해 해. 다른 사람들이 모두 깊이 잠들어 있는 새벽 네 시면 일어나서 공부한다면서 부시럭대서 옆 사람들이 싫어하더라구. 자기는 집행유예로 곧 나갈 거라고 한대.”    “부장검사 출신이 왜 들어왔어?”  “돈을 많이 먹었나 봐. 왜 그런 변호사들 많잖아? 얼마 전에도 판사에게 로비해서 보석으로 풀어준다고 하고 오십억 원인가 받은 판사 출신 여성 변호사도 있잖아?”    “대통령도 뇌물죄로 들어가고 부장검사도 들어가고 그랬는데 너는 돈 먹은 게 아니고 사업하다 네 돈 다 털렸는데 억울하지 않냐?”  “그게 내 팔잔데 어떻게 하겠어? 인간이 어떻게 운명을 이겨? 운명이 인간을 휘감아 버리는 거지.”    “오늘 아침에 감옥 독방에 있던 박노해 시인의 시를 읽었는데 감옥에서 벽에 뚫린 식구(食口)통으로 식은 저녁밥을 받고 혼자 밥을 먹을 때가 가장 쓸쓸하다고 하던데?”  가족과 따뜻한 저녁밥을 함께 먹는 건 행복이었다.     “그건 맞아. 여기 구치소를 보면 독방에서 혼자 밥먹는 사람들이 많아. 나는 그래도 네 명이 있는 방에서 그 사람들하고 같이 밥을 먹어. 다행이지”    “영치금은 있냐?”  아무도 그에게 돈을 줄 사람이 없었다.     “돈 필요 없어. 내가 당(糖)이 있어서 밥도 조금만 먹으면 돼. 영치금으로 반찬을 사서 보탤 필요가 없어. 나라에서 주는 반찬만 먹어도 충분해. 뭐 짜장밥도 주는데 뭘.”     “변호사인 내가 경험하면 감옥 안에서도 부익부 빈익빈이 있던데 말이야. 범털은 모포나 속옷도 새 거 입고 개털은 범털이 버린 걸 주워 입고 말이야.”     “내가 입고 있는 옷하고 옆방 사람이 입은 옷하고 비교해 봐라.”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접견을 하고 있는 옆의 죄수가 보였다. 얇아 보이는 청색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그걸 같이 보면서 친구가 말했다.    “나는 법무부에서 주는 누런 죄수복을 입고 저 사람은 자기가 사서 입은 거지. 요즈음은 그게 감옥 안의 빈부 차이라고 할 수 있지. 운동할 때 신는 운동화도 고급을 신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어. 그리고 영치금으로 먹을 걸 사서 감방 안에서 혼자 먹는 경우도 있고 말이야. 그게 감옥 안 부자들의 모습이지.”    “빈 시간은 뭐를 하고 지내니?”  “그 시간이면 성경 한 번이라도 더 읽으려고 노력해. 간디나 그 제자들도 감옥이 수도하기 가장 좋은 장소라고 했잖아?”    철저히 외로운 그는 고독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돈이 없어도 세상에서 격리되어 있어도 바위처럼 묵묵히 앉아서 비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신경줄을 끊어버리신 것 같았다. 그는 어떤 다른 세계에 대한 눈이 열린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열악한 노동현장에서나 감옥에서나 마디가 굵은 손을 성경책 위에 얹음은 인간의 가장 숭고한 자세가 아닐까.

김승열

런던 일기(5)   영국 최고 명문대학 중의 하나인 캠브리지 대학과 대학도시에 가다   영국 전통명문 중의 하나인 캠브리지대학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서 캠브리지대학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아침에 조금 늦게 일어나서 약간 여유를 부리니 벌써 10가 다 지났다. 부랴부랴 짐을 싸서 대중교통을 타려고 하니 영국의 지하철과 국철시스템에 익숙하지 아니하여  헤매다가 다짜고짜 New Malden역에 가서 표를 사고 물어보았다.   몇 차례 기차와 지하철 그리고 다시 기차를 타는 코스였다. 시간상으로는 대략 2시간 30분 정도가 걸리는 거리였다. 그리고 기차값도 28파운드에 달하였다. 조금 부담스러운 거리이고 비용도 드는 것 같았으나, 명문대학의 풍광과 그 분위기를 접한다는 생각에 즐거운 마음으로 기차를 탔다.   간단히 그 루트를 이야기하면 Nwe Malden에서 Wateroo까지는 기차를, 그리고 Wateroo에서 Kings Cross까지는 지하철 구간이어서 Oxford Cross를 기점으로 두 개의 노선을 거쳐 다시 Kings Cross에서 Cambridge 기차역까지는 기차를 타는 다소 복잡한 과정이 걸렸다.   지하철과 기차는 모두 깔끔하여서 이용하는 데에 불편함이 없었고, 또한 지하철 구간은 다소 복잡하였으나, 잘 연결이 되어 있었고 안내 표지판도 비교적 잘정리가 되어 있어서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안내 서비스는 우리나라가 최상이라면, 그 다음이 런던 그리고 독일 정도라고 개인적으로 느낌이 들었다.   어쨰든 Cambridge 기차역에서 내리니 대학도시여서 그런지 아주 깔끔하고 상당히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필자 스스로 자격지심에서 느끼는 반응일수도 있으나, 그만큼 깔끔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 역시 젊음과 활기가 있어 보였다. 사실은 학생보다는 관광객이 더 많았을 텐데, 편견이 작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걸어서 대학 본부까지는 26분 정도가 걸리는 것으로 구글맵에서 안내가 되었다. 대학에 점차 가까이 갈수록 풍광은 멋진 고성과 같은 건물, 박물관, 잘꾸며진 정원 등 분위기가 너무나 고전적이면서도 아름답고 멋지게 펼쳐졌다.   도심은 아주 깔끔하고 가게 역시 고풍스럽고 아담하면서도 멋있게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길 옆에는 수많은 작은 대학들의 출입구가 있었고 밖에서 보기에도 과거의 멋진 고성과도 같은 건물이 즐비하여 너무 고색창연하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 안으로 들어가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정원과 수풀, 그리고 잔디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어 그저 감탄만을 할 뿐이다. 대학도시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일깨워주는 그런 풍경이었다. 미국에서 본 대학의 개념과 너무나 차이가 있고, 독일에서 본 대학도시의 분위기와도 다른 새로운 세계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건물들과 모든 것들이 너무 아름답다가 보니까 학생과 교수보다는 오히려 관광객이 득세하는 모습이라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곳곳에 있는  안내판에서는 여기는 대학이고 공부하는 곳이니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요한다는 문구가 자주 보였기 때문이다.   수학자의 다리라고 하는 곳을 지나니 작은 강이 있어서 배를 타고 즐기는 사람들도 있고, 대학이라기 보다는 관광지라는 착각이 들정도였다. King's Colleg같은 곳은 대학건물이 하나의 큰 성과도 같아서 이곳이 고성인지 대학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 안쪽에는 잔디, 정원그리고 멋진 수풀들이 조화를 이루어서 고전문학과 고전음악이 흐르는 고색창연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이런 곳에서 수풀 사이의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는 사람은 얼마나 축복을 받은 사람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도 이런 곳에서 한번 공부를 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받지 아니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이곳에 Visiting Scholar로 방문할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을 해보았다.   법대 건물은 중심에서 벗어나 다소 외진 곳에 있어서 외히려 조용한 학문이 가능할 것으로 보여졌다. 경제학부 등과 함께 법대도서관이 위치한 곳은 좀 더 실용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 옆에 아시아학 학부와 형사법연구센터와도 인접하여 있었다.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아니하여 안에 들어갈수가 없어서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학구적인 분위기에 위치한 법대건물과 법대도서관 등을 바라보면서 여러생각이 교체하였다. 우리나라도 대학생들이 좀 더 학구적인 분위기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단지 건물만 많이 짓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건물을 보존하여 좀 더 역사의 흐름속에서 학문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고 고전적인 분위기의 대학도시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떄문이다.   너무 현대적이고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과 문화를 생각하면서 산책과 명상도 하고 또한 끝없는 토론을 하면서 역사와 전통이 어울어진 그런 고전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우리나라만의 개성이 있는 대학도시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 환경과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진정한 의미의 미학과 철학이 나오고, 나아가 실용학문의 기초를 다질수 있는 그런 하드웨어적인 요소도 소프트웨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주었다.   우리나라도 영국의 Cambridge 대학도시와 같은 역사적이고 고전적인 대학도시를 계승해 나갈 수는 없을 것인가? 안동의 여러 서원 등을 좀 더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현하여 이를 좀더 멋진 대학도시(?)로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을 까하는 다소 뜬금없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부러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캠브리지대학 도시를 바라보면서 그간 피상적으로만 느낀 대학도시의 개념이 새롭게 재정립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맛보는 느낌이었다. 대영제국이라는 영광이 그냥 온 것은 아니고 또한 그러한 대영제국의 영화로운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대학도시 역시 지금까지도 그 멋진 자태와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숙연해 지기도 하였다.   역시 역사를 제대로 배우는 것인 중요하다는 생각과 이번 독일과 영국의 방문은 서양문화와 대학 그리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역할과 기능 등등 제반 문제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가져다 주어 큰 문화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를 어떤 형태든 재정리하여 좀 더 발전적인 계기를 만들고자 스스로에게 다짐을 해본다.    런던 일기(6)   영국 최고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옥스퍼드대학에 가다   이번에는 영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최고의 명문대학인 옥스퍼드 대학에 가보기로 하였다. 안타깝게도 하기 방학기간이어서 접촉한 교수분들께서 휴가 중이어서 다음 방문기회때 만나기로 하고 이번에는 그냥 학교만 방문하기로 하였다.   캠브리지대학과 마찬가지로, 런던 시내인 Waterloo까지는 기차로 그리고 런던 시내에서는 지하철을 타고 Paddington역으로 그리고 다시 옥스퍼드 기차역까지는 기차를 타야했다. 조금 불편하기는 하였으나, 가벼운 마음으로 New Malden기차역을 향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횡단보도에 줄무늬 막대와 두 개의 전등이 있는 곳은 어떠한 경우에도 보행자 우선이어서 여기에서 사고가 나면 운전자의 과실여부를 불문하고 운전자가 책임을 지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한다. 통과하는데는 다소 불편하였지만 모른 척하고 차도 보지도 않고 지나가니 모든 차가 정지하였다.   혹자는 이 횡단보도의 통과하는 태도를 보고 영국 현지인인지 아니면 외국인인지를 구분한다고 하였다. 나도 이제 현지인이 다되었구나 하는 자부심(?)가지고 새로운 대학 분위기를 맛보는 장도를 시작하였다.   옥스퍼드 기차역에 도착하니 깔끔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역 앞에 지도가 옥스퍼드대학에 대하여 자세하게 안내를 하고 있어서 여기가 대학도시라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역 앞에 있는 호텔은 너무 오래되어서 인지 좀 낡아 보여서 주변건물과 균형이 맞지 않아 보였다. 호텔의 창가에 Korean Food라는 글씨가 보여 반갑기도 하고 한국 유학생들이 그만큼 많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캠브리지의 경우에는 상당히 걸어가야 대학으로 접근을 하는 데에 반하여 옥스퍼드는 이어서 대학의 건물이 보였다. 다만 강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좀 더 규모가 크게 보이고 대학들이 밀집되어 있지 아니하고 곳곳에 대학도시 시민들의 생활공간이 상당히 퍼져있어서 조금은 타이트한, 대학 도시라기보다는 대학이 곳곳에 있는 시골의 도시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의 처음으로 맞닿은 곳에 대학이 있었으나 일반인은 출입금지라고 되어 있어서 주변에서 사진을 찍었더니 관리인이 혼자왔느냐고 하면서 그러면 교회와 건물주변과 이어 있는 호수를 보도록 허락하여 교회와 멋진 대학전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단과대학이 법대로서 유명하였고, 바로 입구에 있는 건물이 법과대학 도서관이고 그 옆의 건물이 법대 교수실이라고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그리고 옥스퍼드에서는 수업이 여러 명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1대1로 하는 수업이라고 하였다. 또한 옥스퍼드 대학 내의 다른 단과대학의 학생들이 여기 법대 수업을 듣기 위하여 자유롭게 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건물 뒤편에 있는 잔디와 나무 그리고 호수의 모습은 거의 절경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색과 명상을 저절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고전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즉 건물입구에 많은 관광객이 드나드는 전경과는 달리 조용하고 차분하고 목가적이고 전원적이며 고전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캠브리지에서 느꼈던 분위기보다 더 고전적이며 역사와 전통과 강한 자부심을 한몸에 느낄 수 있는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으면 그냥 고전음악, 미술, 철학이 그냥 흘러 넘칠 것 같은 너무나도 낭만적이고 전원적이며 학구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서 신기로울 정도였다. 대학 주변으로는 강이 흐르고 있어서 보트를 조용히 즐기는 사람도 있었고 또한 강가 주변에 수풀이 우거진 산책길도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이를 지나 조금 더 가니 이제는 일반 도시에서 볼수 있는 가게와 식당이 보였다. 많은 관광객이 보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곳이 대학 도시라기 보다는 마치 관광도시처럼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도로변에 접한 건물 안은 일반 관광객들에게는 개방이 되지 아니하고 넓은 야드로 구성되어 있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학문을 탐구할 수 있도록 낭만적이고 학구적인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는 것이 신기로울 뿐이었다.   마침 점심 시간이 되어 주변의 삭당을 찾아보니, itsu라는 스시집인데 아주 깔끔하게 보여서 들어가서 스시를 먹어보니 맛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옥스퍼드에 있는 가게나 식당의 특징은 아주 깔끔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기부누이 덩달아 좋았다.   외곽지역을 가보니 여기에는 강이 흐르고 있어서 일반인들도 보트를 타면서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들이 주변의 수풀과 함께 어율어져 멋진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건초더미를 쌓아둔 모습이 잔디와 고색창연한 고성과 같은 건물과 함꼐 멋진 전경을 보여주었다.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도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위대한 철학자와 문학자 그리고 과학자가 나오게 된 토양을 먀련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리고 그들만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우리도 이제 경제대국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기 위하여 대학문화도 새롭게 정비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연히 현대식 건물을 많이 짓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곳을 복원하고, 나아가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여러 가지 활동과 대학이 가지는 독특한 우리 나름대로의 문화와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볼 때가 된 것으로 느껴졌다.   캠브리지와 옥스퍼드를 보면서 이제 우리나라의 대학도 좀 더 우리 나름의 색깔과 분위기를 연출하는 작업을 시도할 필요가 있고, 나아가 모든 학생들이 자신의 대학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하드웨어와 소프트 웨어의 조성 등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고 이를 전세계에서도 귀감이 될 수 있는 모델로 창조, 발전시켜나가려는 노력을 감히 기대해 본다.  

엄상익

변호사인 나는 폭력조직의 보스 몇 명으로부터 초대받아 강남의 고급 일식집에 간 적이 있었다. 처음 보는 그들의 태도는 오만방자했다. 권력자였다면 영화장면 속의 건달처럼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그들은 식사도 나오기 전에 양주를 큰 컵에 가득 채워 돌렸다. 여종업원에게 “너”라고 하면서 말도 함부로 했다. 대신 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내 주면서 여종업원의 분기(憤氣)를 죽였다. 방 밖에는 건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의 원색적인 근육의 힘 안에서 나는 무시당한 느낌이었다. 그들에게 변호사란 돈을 던져주면 허겁지겁 받는 그런 존재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과연 어떤 것이 그들을 보스로 만들었는지 나는 순간 호기심이 일었다. 그들이 특별히 덩치가 크거나 격투기 선수처럼 싸움기술이 있는 아닌 것 같았다.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내가 끼어들어 그중 좌장격인 남자에게 물었다.    “뭡니까?”  그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여기 계시는 분들 전국적인 조직의 보스인 걸 지금 말 중에 자랑하시잖아요? 저는 여러분이 먹물이라고 부르는 문약(文弱)한 변호사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하나님한테 ‘같이 죽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고 한판 붙으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그런 경우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 말에 저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을 보면서 진짜 궁금했다. 그들도 나이 먹은 나약한 한 인간으로 보였다. 허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표정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 중 한 명이 갑자기 자세를 바로 하면서 말했다.     “잘못했습니다. 형님.”  갑자기 호칭이 바뀌었다. 그 말을 들으니까 불안해졌다.    어떤 조폭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건달들이 형님이라고 부르니까 좋아서 진짜 우쭐하다가 나중에 구덩이에 묻혀 혼쭐이 나는 그런 모습이었다.    “형님이라고 부르시면 제가 상당히 겁이 납니다. 형님 형님하고 부르다가 때리면 저는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저희가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아까 물으셨는데 각오하시고 맞짱을 뜨면 어떠냐고 하셨는데 그런 각오라면 저희가 집니다.”    그중 좌장격인 남자가 정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갑자기 다들 양같이 온순해진 얼굴이었다. 내가 덧붙였다.     “저는 저녁식사에 초청받아 왔습니다. 아까부터 술들만 드시는데 그건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제가 먼저 가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밥을 안 먹었습니다. 제 밥만 먼저 시켜주세요. 저녁식사에 초청받았으면 밥은 먹고 가야 할 거 아닙니까?”    그중 한 명이 여종업원에서 다급하게 초밥을 내오라고 주문했다. 잠시 후 나온 초밥을 먹었다. 그중 좌장격인 남자를 다시 보니 초등학교 시절 알던 친구와 인상이 비슷한 게 원인모를 친근감이 들었다. 그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말했다.    “대충 나이도 비슷한데 앞으로 친하게 지냅시다. 어때요?”  “예 알겠습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의 행동이 건달사회에서 흔히 보는 독기 품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기싸움이 아니었다. 하늘에 대고 마음속으로 남과 싸우기보다 상황이 어쩔 수 없다면 맞아죽을 각오를 주세요 하고 기도했다. 사실은 장교 시절 철책선에서 순찰을 돌면서 유사시 포로가 되면 그 자리에서 차고 있는 권총으로 죽음을 선택해야 하지 않나 하고 마음을 먹었었다.     핵을 개발한 북한의 김정은이 이미 세계의 깡패가 되어있다. 강력한 원색적인 폭력을 가지면 개인이나 국가가 마찬가지인가 보다. 중동에서 위축되어 있던 이스라엘은 핵을 개발하자 깡패가 됐다.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세 나라를 단번에 점령했다. 덩치 큰 아랍권도 핵이 무서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핵전쟁을 우려한 미국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도왔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었던 한 선교사한테 직접 들었다. 이스라엘의 헬기가 그들의 대상목표인 팔레스타인 지도자가 있는 빌딩을 보고 공중에서 미사일을 쏘니까 건물 전체가 그 자리에서 먼지투성이 콘크리트더미가 되는 걸 목격했다는 것이다. 아랍권도 세계도 아무도 그런 인권유린을 도와주지 않더라고 했다.     북한이 세계적인 깡패국가가 됐다. 우리도 각오를 해야 하지 않을까. 김정은은 빌게이츠보다 더 부자다. 햇볕정책으로 남쪽에서 받은 거액의 돈에 몇천만 북한 동포를 노예같이 부리고 있는 왕(王)이다. 세계에서 그런 부자가 있을까. 가진 게 있는 독재자는 약하다. 살라고 핵을 개발했지 망하려고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핵 한 방 날리고 죽을 짓은 바보가 아니면 하지 않는다. 문제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우리의 각오가 아닐까. 죽는다는 각오가 있으면 사람은 산다.

김수인

기업의 임원으로 재직할 때 있었던 이야기다. 금요일 오후 사장에게서 호출이 왔다. “내일 별일 없으면 같이 운동하러 가자고.”      골프 부킹과 멤버 구성은 거의 한 달 전에 끝나므로 하루 전에 제의를 한다는 것은 멤버 중 한 명이 갑작스러운 사정이 생겨 펑크가 났기 때문이다. 다음날 친구들과 라운드가 예정돼 있었으나 내 입에서는 “아, 별일 없습니다. 같이 가시죠”라고 자연스러운 대답이 나왔다.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빠질 수 있었으나 그러면 사장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어 거짓말을 한 것이다. 만약 내가 불참했다면 3명이 느슨한 플레이를 하며 매우 아쉬워했을 건 뻔한 일이다. 사장은 나를 원망했을 테고.      이번엔 나의 고교 동창 경우다. 토요일 아침 지인들과의 라운드를 위해 집을 나서려는데, 회사의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말에 집에서 뭐 해? 같이 운동이나 하자고.” 이렇게 해서 동창의 지인들은 애꿎게 세 사람이 골프를 쳤다. 조직사회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인사권을 쥔 사장과 회장이 부르면 만사를 제치고 합류해야 한다.      이것뿐만 아니다. 라운드 전후에도 상사(사장)를 잘 모셔야 한다. 골프장 도착해서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식당으로 달려가 메뉴가 어떤 게 있는지 살펴보고 식당 매니저에게 가장 잘하는 음식을 추천받아 놔야 한다. 비서에게 사장이 뭘 좋아하는지를 미리 체크해 놓으면 금상첨화. 식사 후엔 골프숍에 들러 모든 골퍼들이 선호하는 A사 제품의 공을 구입해 골프백에 비치한다.      라운드 시작 전에는 캐디에게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저분(사장)에게만 상세히 코스와 그린 컨디션을 잘 설명해주면 돼”라며 슬쩍 팁을 찔러준다. 내기는 사장의 핸디캡에 맞춰, 가능한 사장이 유리한 방법을 택한다. 사장이 룰에 까다로운지, 후한 편인지도 재빨리 간파해야 한다. 룰에 까다로울 경우 디보트에서 구제 없이 그대로 치거나, 워터해저드에 빠졌을 때는 1벌타로 (드라이버) 2클럽 이내 공을 드롭하는 등 규칙을 웬만큼 준수해야 한다.      반대로 느슨한 편이라면 OB 났을 때 수시로 멀리건을 주고, 카트 도로에 공이 떨어졌을 경우 페어웨이로 던져 주는 등 최대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안 그러면 “이 친구, 일은 않고 쓸데없이 룰 공부만 했구먼”이라는 핀잔을 듣게 된다. 사장의 공이 깊은 러프에 빠졌을 때는 잽싸게 낙하 지점으로 가 폭발물을 찾아내듯이 뒤져 반드시 공을 찾아내야 한다.      그린에 올라가서는 “남에게는 관대하게, 자신에게는 엄격하게”라는 골프 격언을 100% 실천해 퍼트 OK(기브)를 넉넉히 줘야 한다. 만약 내기에서 본의 아니게 따고 있다면 16번 홀쯤에서 방향을 살짝 틀어 OB를 내 사장을 흐뭇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골프 끝나고서 바쁜 건 마찬가지. 빨리 샤워를 마치고 클럽하우스로 뛰어가 미리 알아둔 사장의 선호 메뉴를 주문해놓아야 한다. 사장이 오자마자 기다리지 않고 맛있게 들 수 있도록 하는 게 상사 접대의 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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