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덕

간통죄가 없어졌기 때문에 남녀간의 사랑에 제3자가 불법적으로 침범하는 경우는 더 많아졌다. 종전에는 간통죄라는 무기가 있었다. 애정관계에 제3자가 침입하는 경우 간통죄로 감방에 보낼 수단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간통죄가 없어졌다.   남녀가 만나는 기회도 예전과는 다른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많은 경우 인터넷으로 짝을 찾는다. 결혼의 경우에는 직업적인 결혼정보회사를 이용하기도 한다. 옛날처럼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여자를 뒤따라 가서 구애를 했다가는 성추행범으로 신고될 위험성이 높다.   정상적인 사랑을 하기 어려운 일부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상당수는 정신적 질환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 길에서 자위행위를 하다가 체포되는 남자도 있고, 갑자기 여자를 보고 바바리코트를 벗어제끼고 남성의 알몸을 보여주고 도망가는 바바리맨도 있다.   혼잡한 지하철에서 여자의 신체에 밀착하여 성적 쾌감을 느끼는 지저분한 사람도 있다. 애인과 성관계 동영상을 촬영했다가 애인이 변심하면 인터넷에 올려 매장시키는 악질도 있다. 길을 가는 여자의 다리만 몰래 찍은 남자는 법원에서 카메라이용촬영죄로 기소되었다가 무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다리만 찍은 경우에는 성적 수치심이 느껴지는 신체의 부위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인데, 그 판결은 너무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   만일 그 판결이 대법원에서도 확정되면 정부에서는 빨리 경범죄처벌법에라도 처벌조항을 넣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길에서 다른 여자들의 다리를 몰래 매일 찍고 다니는 남자를 처벌하지 못하는 것은 법의 잘못된 공백이 아닐까 싶다.

엄상익

 30년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법원을 속이는 지능범들을 많이 봤다. 치밀한 논리로 만든 허위를 가짜 증인들의 입술을 통해 법정에서 전개했다. 그런 교활성을 꿰뚫어 보는 판사는 별로 없었다. 대법원은 더 잘 속았다. 서류만 보는데다가 형식논리에 더 치중하기 때문이었다. 자만하는 대법관일수록 진실에 눈이 더 어두웠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동화 속의 소년처럼 허위를 진실로 착각한 대법원 판결을 지적하는 글을 썼다. 속칭 ‘꾼’에게 대법원이 속은 경우였다. ‘꾼’들 쪽에서 바로 나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나를 파멸시키겠다고 협박하면서 거액을 청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꾼’의 겉모습은 그럴듯한 돈 많은 회사의 사장이었다. 하급법원의 판사는 내 말에 수긍했다. 진실이 따로 있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그가 고민하다가 이렇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대법원 판결이 그렇게 확정했는데 하급심 판사인 내가 어떻게 그걸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여기는 관료주의가 더합니다.”     법전(法典) 속의 판사는 독립해서 소신에 따라 진실을 밝히는 존재였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치받기가 두려운 것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조사단의 결과가 나왔다. 상고법원의 설치를 둘러싸고 정치적 거래를 했다는 것이다. 진행중인 사건을 거래에 이용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상고법원을 만들려고 했을까. 상고사건이 많아 죽을 지경이라고 하면서도 대법관들은 그 숫자를 늘리는 것은 반대해 왔다.     왜 그럴까. 사법 관료체제의 피라미드 정점에 있는 대법관의 가치가 줄어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권위는 유지하고 일은 상고법원을 만들어 아래 법관에게 떠맡기려는 발상은 아닌지 의문이다. 법이 바로 서려면 법관들의 출세 지향적 탐욕과 관료주의가 없어져야 한다. 그런 것들이 사법부 오염의 원인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재판 때다. 권력의 뜻에 영합한 대법관들은 자리를 유지하고 사법부의 수장(守長)까지 된 사람이 있다. 반대 의견을 낸 대법관들은 예외없이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런 구조에서 하급법원도 오염됐었다. 정보기관에서 고문으로 자백을 받고 사실을 조작해도 법관들이 외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필자는 젊은 시절 잠시 대통령 직속 기구에 소속된 적이 있었다. 대법원장이 될 두 후보를 놓고 평가하는 옐로 카드가 작성되는 과정을 어깨 너머로 봤다. 공정하고 청렴한 분이 대법원장이 되지 못하고 정치성이 강한 인물이 선택됐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너 같으면 말 안 듣는 놈을 대법원장 시키겠냐?”라는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법부를 권력의 시녀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 시절 대법관 후보 두 사람의 모습도 본 적이 있다. 한 분은 지금 같은 독재 구조에서는 대법관직을 맡지 못하겠다고 자리를 사양했다. 존경할 만한 용감한 법관이었다. 다른 사람은 영부인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대법관이 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결국 그런 삼류가 대법관이 되는 걸 봤다. 민주화가 되도 자기 사람만 심으려는 폐해는 여전한 것 같았다.     2년 전 대법관 추천회의에 갔다 오던 대한변협 회장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형식만 회의지 대법관 추천도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더라면서 분노했다. 억울한 눈물을 흘리는 국민이 마지막으로 기대는 곳이 법원이다. 덮기만 한다고 신뢰가 유지되는 건 아니다. 깨끗한 사법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김주덕

예전과 달리 현대사회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최대한 보장되고 있다. 혼인빙자간음죄나 간통죄는 이제 구시대의 유물로 사라져버렸다.   성개방의 물결 속에서 혼전 순결의 개념은 애당초 논의의 대상도 되지 못한다. 문제는 결혼제도에 있어 법과 현실의 커다란 괴리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결혼하기 전에 다른 이성과 동거하거나 임신과 낙태를 경험하고 결혼한 다음, 일부일처제의 엄격한 법적 테두리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쉽게 일탈을 시도한다.   법은 아직도 결혼한 남자와 여자에 대해 아주 엄격한 법적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정조의무와 순결의무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배우자 있는 사람은 배우자 이외의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육체적인 성관계는 없어도, 정신적으로 서로 좋아하고 연애를 하는 것도 금지된다. 매일 서로 전화를 하고 자주 만나고, 연애를 하는 것이 밝혀지면, 그러한 행위는 배우자에 대한 불법행위가 된다.   간통죄라는 범죄행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족법상 배우자에 대한 부정행위헤 해당되어 불법행위자가 된다. 그 때문에 배우자에 대해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배상, 이른바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생긴다. 뿐만 아니라 배우자가 원하면 그러한 부정행위는 이혼을 당한 유책사유에 해당한다.   사랑이 없는 섹스도 금지된다. 이른바 성매매가 여기에 해당한다. 돈을 주고 사랑은 사고 팔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섹스를 돈과 연결시키면 그것은 곧 바로 범죄행위가 된다.

김주덕

사랑을 제대로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대개가 서툰 사랑, 비합리적인 사랑을 한다. 때로는 서로 맞지 않는 사랑이 무작정 시작되기도 한다.   그것은 사랑의 본질 자체가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성보다는 감성이 작용하는 영역이다.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비합리적이며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판단이 더 우선한다.   그래서 사랑에는 그 어떤 일보다도 시행착오가 많고 오판이 많다. 사랑에서 얻는 행복보다는 불행과 고통이 더 크다.   부부가 좋아서 결혼해서 살다가 헤어지는 이혼과정을 보면 사랑이 얼마나 허망하고 공허한지 알 수 있다. 자녀가 없는 경우의 이혼은 더욱 그렇다.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불륜의 경우는 더 하다. 결혼하고 이혼하면 그래도 공부상에도 남고 자녀도 남는다. 불륜은 좋았다가 싫어지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사랑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그리고 왜 그때 그렇게 동물적인 욕망의 노예가 되었던 것인지, 자신의 이성이 얼마나 마비상태에 있었던 것인지 하는 회한만 남는다.   불륜이 아닌 싱글들의 연애도 마찬가지다. 사랑에서 어차피 불변성, 영속성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라면, 사랑은 언젠가 수명을 다하고 끝이 난다. 끝날 때 서로 좋게 끝나기란 ‘낙타가 바늘 구명을 통과하는 것’처럼 거의 불가능하다.   서로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고, 상대방을 비하시키며, 서로가 만들었던 사랑의 탑을 깨뭉겨버린다. 그것은 그 다음의 사랑에 도움이 되는 추억이 아니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독극물이 된다.   그러므로 사랑의 본질을 알고, 사랑을 할 때 신중하라. 사랑을 선택할 때 자기 수준에 맞추어 보고, 상대방의 성격을 잘 살펴라. 상대방이 사랑에 대해 어떤 인식과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따져보라. 그렇지 않으면 짧은 인생에서 사랑을 하지도 못하고, 사랑의 가치를 폄하시키게 된다.

은열

근로자의 날이었던 지난 5월 1일 저녁, 동네 극장에서 영화 〈원더스트럭〉을 봤다. ‘참, 나 노동자였지!’ 새삼 깨닫게 해준 모처럼의 휴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상상에 잠시 행복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예매 결제 버튼을 클릭했다. 오후 8시, 탄산수 한 병 사 들고 습관처럼 고르는 모퉁이 좌석으로 향했다. 몇 개의 예고편이 상영되더니 이윽고 암전! (이후 스크린이 다시 밝아지는 몇 초간은 내가 극장 나들이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캐롤〉을 연출했던 토드 헤인즈 감독의 신작이란 점에서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영화는 예상대로 좋았다. 1977년과 1927년. 반세기를 뛰어넘어 뉴욕 곳곳을 누비며 호흡하는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는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큼의 스펙터클은 없었지만 충분히 신비로웠다. 나도 모르게 자꾸 다음 장면이 기다려질 정도로.쳇바퀴 도는 다람쥐, 더는 싫어!한동안 발길이 뜸했던 극장과 다시 친해진 건 4년 전쯤이다. 야근과 휴일 근무가 일상다반사였던 옛 회사에 과감히 사직서를 던지고 새 직장으로 출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 당시 나는 ‘되도록 빨리 여기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갓 이직한 경력사원 특유의 조바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직장 일이 어디 그런가. 출퇴근 시간은 비교적 일정했지만 ‘어제 같은 오늘과 오늘 같은 내일’이 무한 반복되는 일상에 갇혀 금세 초심을 잃고 매너리즘에 빠졌다. ‘쳇바퀴 도는 다람쥐’란 말의 어감이 절절하게 와 닿았다.‘더는 안 되겠어!’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매일 회사와 집을 무력하게 오가는 내 모습이 한심해 보였다. 그날 이후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우선 평소 친분이 있던 후배가 꾸리던 독서 모임에 가입했다. 각자 읽고 싶은 책을 돌아가며 추천해 매달 한 권씩 읽고 토론하는 자리였다. 공연 캘린더를 흘깃거리며 그리 비싸지 않은 클래식 음악회 티켓을 구매하는 습관도 생겼다. 클래식 음악에 딱히 조예가 있는 건 아니지만 아주 난해한 음악(가)이 등장하지 않고 일정이 허락한다면 망설임 없이 지갑을 열었다.그리고 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단,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비교적 시간 여유가 있는 주말 (중에서도 덜 붐비는) 조조 시간을 택한다, 되도록 평단의 반응이 괜찮은 작품을 고른다, 보려고 마음먹은 영화 관련 리뷰는 미리 읽지 않는다, 영화를 본 후엔 반드시 잘 쓰인 리뷰 중심으로 꼼꼼히 챙겨 읽은 후 내 감상과 비교하고 메모한다….몇 시간의 일탈과 맞바꾼 ‘생각’자, 이쯤 되면 슬슬 궁금해질 거다. “그래서, 그렇게 했더니 달라지는 게 있던가?” 대답은 일단 “절반은 아니요”다. 책을 읽고 클래식 공연을 찾아다니며 좋은 영화를 관람하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갑갑함이 말끔히 해소된다면 얼마나 신날까. 하지만 현실은 현실. 제아무리 무릎 치게 만드는 문장과 맞닥뜨려도, 귀 호강하는 선율과 조우해도,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까지 그저 먹먹한 명장면을 만나도 그때뿐이다. 여전히 일은 하품 나게 재미없고, 금토일은 월화수목보다 턱없이 짧으며, 가출한 후배의 싹수는 돌아올 줄 몰랐다.그런데 참 희한했다. 책으로, 음악으로, 영화로 떠나는 불과 몇 시간의 일탈은 때로 꽤 많은 걸 선사한다. 적어도 그 시간만은 지긋지긋한 일상의 쳇바퀴에서 잠시 내려와 쉴 수 있다. 일종의 ‘거리 두기’를 통해 무탈한 자신의 삶에 새삼 안도하게 되는 효과라고나 할까? ‘나’란 인간의 편협한 사고와 경험을 확장하는 데도 적잖이 도움이 됐다. 회사와 집만 오가는 생활에선 죽었다 깨어나도 건져 올리기 힘든 통찰을 얻을 수 있다.제일 좋은 건 ‘생각’이란 걸 하게 된다는 사실. 생각이야 만날 하는 것 아니냐고? 글쎄, 여러분의 일상을 가만히 복기해보시라. ‘10년 후, 30년 후의 난 뭘 하며 살고 있을까?’ ‘내 인생은 내가 원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을까?’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 알기나 할까?’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생각(다운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여러분도 나도 대개는 이런 질문과 마주하는 일이 어쩐지 귀찮고 껄끄러우며 두렵다. 게다가 ‘사색의 최대 적(敵)’인 그놈의 스마트폰! 앞선 질문에 대한 나의 두 번째 대답은 그래서 “절반은 예”다.‘지금, 여기’만 아니면 좋겠다고요?지금 하는 일을 은퇴할 때까지 하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설사 일 자체가 너무 좋아 죽도록 하고 싶다 해도 그 속에서의 역할은 조금씩 발전하길 바랄 거다. 인간은, 크든 작든 변화를 추구하는 동물이니까.그런데 그 변화란 누군가 선심 쓰듯 툭, 던져주는 게 아니다. 바로 거기서 우리의 비극이 시작된다.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으면서 “지금, 여기가 아닌 뭔가”를 갈구하는 이에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얄궂게도 그 변화는, 앞서 말한 ‘생각’에서 잉태된다. 자신과 타인, 그리고 사회에 대해 뭐라도 고민해본 사람만이 변화의 구체적인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하루하루 매출을 신경 쓰는 자영업자, 뛰는 만큼 정직하게 연봉이 결정되는 전문직 종사자의 입지는 그래도 좀 낫다. 결국 최악의 케이스에 당첨되는 건 샐러리맨이다.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에 취해 변화나 생각 따위, 잠시 잊고 살아도 되(는 것처럼 보이)기에.흔히 문화생활은 여유 있는 사람에게나 허락되는 것, 할 일 다 하고도 시간이 남으면 그제야 즐기는 것 정도로 여겨진다. 하지만 내 생각은 정반대다. 문화생활이야말로 여유가 없을수록 기를 쓰고 찾아야 하는 것, 없는 시간도 쪼개가며 누려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단골 영화관 앱을 만지작거린다. ‘이번 주말엔 신박한 영화 한 편 개봉 안 하나?’ 글쓴이 은열은 신문사에서 일하다 뜻한 바 있어 기업으로 이직했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게 글쓰기인 데다 오랜 데스크 생활까지 거쳐 남의 글 들여다보고 고치는 데 이골이 났다. 어쩌면 이 땅 어딘가에 존재할, ‘논스톱 20년 차 직장인’의 내공이 궁금할 이름 모를 후배들에게 손톱만 한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다시 글 쓸 용기를 냈다.

이슬기

실험을 시작한 지 1329일째, 창밖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이불 속이 다른 날보다 더 포근하다. 나무늘보처럼 한참을 꼼지락거리다가 일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즈음 몸을 일으켰다. 늘 가는 카페에 들러 우유거품이 가득한 라테를 주문했다. 나는 그것을 차분하게 입으로 가져가며, 비가 공중제비를 돌다 바닥에 부딪쳐 흩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무엇을 해볼까?글이 쓰고 싶어졌다. 마침 ‘슬기로운 퇴사생활’을 주제로 한 칼럼의 마감일도 다가온다. 세상에, 내가 칼럼을 쓰게 되다니. 꿈에는 심장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원하는 것이 진해지면, 그것을 바라는 심장 소리도 커진다. 북처럼 울리는 그 소리를 듣고, 길을 잃은 행운이 찾아온다. 지금 내게 칼럼니스트 자리가 찾아온 것처럼. 4년 전 가을, 나는 퇴사를 했다. 그것도 남들이 선망해 마지않는 삼성이라는 대기업을. 무서운 선택이었다. 지금까지 걸었던 길과 전혀 다른 길을 가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거나 전문직 자격증을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은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마음이 이야기하는 대로 살아보는 것, 그것이 내가 퇴사를 선택한 이유였다. 헤맬 것이 분명했고 성공 확률은 매우 낮아 보였다. 게다가 주변에서 들리는 소문들, ‘바깥은 전쟁터다. 배가 덜 고파서 그렇다. 결국 후회하게 될 것이다’ 식의 이야기는 단전에서부터 겨우 끌어모은 용기를 짓밟기도 했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모른 채 살다가 인생이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은, 시도한 무언가에 실패해서 후회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아주 단순했다. 오늘을 살아 있는 것처럼 사는 것, 그것조차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거라면, 인생의 모든 시간 중 최소 1할은 나답게 살아본 기억을 가지고 세상을 떠나는 것, 그것뿐이었다. 카르페 디엠. 오늘을 살아라명언에 밑줄을 그으며 부러워하는 삶에서 벗어나, 마음이 이야기하는 대로 살아보는 실험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미션은 시작부터 난항을 겪었다. 지난 30년간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본 적도, 마음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찰싹 붙어 도무지 떠날 생각을 않는 소심함까지 가세해 나를 괴롭혔다. 첫 실험 기간으로 정한 3년 중 6개월은 불안함을 가득 안은 채 지나 보냈다. 이럴 줄 알고, 5년이나 퇴사를 준비하며 36개의 프로젝트와 12개의 직업을 가져봤건만, 바보 같은 성격 때문에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무서워하며 많이 울기도 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두려움에서 도망치지 않고 마음대로 살아봐’ 티켓이 허용한 3년이라는 시간을 모두 사용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는 점이다. 조급함을 누르고, 원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 기다린 덕분에 오늘도 출근 없는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마음의 소리가 이끄는 삶이 주는 선물은 굉장했다. 두려움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자유와 여유가 찾아왔다. 가장 고무적인 일은 첫 실험 기간에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은 덕분에 마음 가는 대로 살 수 있는 기간이 무한 연장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많은 일을 하는 대신, 꼭 필요한 것만 하고 나서 기다리는 습관을 가지게 되면서 애를 쓰는 일도 줄었다. 신기하게도 몸에 힘을 빼면 뺄수록,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졌고 인생의 통제력도 커졌다. 하지만 ‘슬기로운 퇴사생활’에는 이런 결과론적인 이야기보다, 삽질 가득했던 성장 과정을 가감 없이 담고 싶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누군가에게, ‘이 정도는 나도 해볼 수 있겠는걸’ 하고 용기를 줄 수 있는 솔직한 이야기 말이다. 고개를 들어 책상 앞 창가에 빼곡히 붙은 포스트잇을 바라보았다. 나로 사는 연습을 시작한 후, 부닥쳤던 문제들과 해결을 위한 질문과 대답이 햇살에 반짝였다. 글쓴이 이슬기는 한때 회사원이었다.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아보겠다고 다짐한 이후, 숱한 실험을 통해 평생하고 싶은 것 두 가지를 찾았다. 하나는 글쓰기, 또 하나는 누군가의 새로운 시작을 돕는 일이다. 내일이 궁금한 삶을 살며, 실행력 연구소 '액션 랩'을 운영 중이다. 《좋아하는 일 하면서 돈 걱정 없이》, 《댄싱 위드 파파》를 썼다.

김주덕

실존의 고독과 사랑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고독하기 때문에 사랑에 이끌린다. 하지만 사랑이 고독을 완전하게 물리쳐주지는 못한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고독은 또 다시 기회를 틈타서 존재의 한 가운데로 파고든다.   뜨거웠던 사랑이 식으면 고독은 다시 고개를 쳐든다. 사랑과 고독은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반비례하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이란 참 묘하다. 우선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오직 가슴 속에서만 머물다가 사라진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지만, 그 사랑의 강도는 언제나 동일하지 않다. 한 사람은 사랑을 주고, 한 사람은 사랑을 받는 경우도 있다.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주는 사랑은 진한 감정을 자신의 가슴 속에 쌓아놓는다. 사랑을 상대에게 많이 주고, 자신에게서 많은 에너지가 분출되어 상대에게 전달되었음에도 사랑의 결정체는 자신의 내부에 저장하게 된다.   받는 사랑은 상대로부터 많은 에너지가 들어왔고, 사랑의 감정이 전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자신의 가슴 속에 남는 것은 별로 없다.   때문에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진하다. 더 아프고 고통스럽다. 그에 비해 받는 사랑은 새털처럼 가볍고 언제 변할지 모른다.   사랑을 주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이 무척 고독하다는 사실을 내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받는 사람은 사랑 때문에 고독을 느끼지는 않는다.

김정연

갈수기의 안동댐./ 뉴시스얼마 전 모 매체에서 ‘축구장 222 배만한 크기의 안동댐 오염’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안동댐의 저수율이 40%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노려 수자원 공사가 경작 허가를 내 줬고, 그 결과 농약, 퇴비 등이 하천에 스며들면서 오염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게다가 안동댐의 불법 경작지가 48만 평에 이른다는 통계 결과도 나왔다. 수자원 공사는 지금까지 하천이 썩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업인들을 단속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안동댐 농업오염을 방조한 수자원공사가 ‘낙동강 사람들’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단체는 2018년까지 핵심 사업 방향을 집중 토의한 후 2019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할 거라고 한다. 지역 관계자에 따르면 ‘낙동강 사람들’은 앞으로 환경부나 수자원공사의 주요 공론화 사업들을 도맡아 할 것이라고 한다. 낙동강 사람들의 멤버 구성은 더 기가 막히다. 4대강 녹조에 대한 책임이 완연한 수자원공사가, 4대강 반대론자들을 골라 내부화한 꼴이다. 과연 이들이 전문가인지 운동가인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대구지방환경청에 따르면 잇따르고 있는 물고기 폐사의 원인은 과도한 유기오염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안동댐은 중금속보다도 퇴비, 농약, 화학비료로 인한 강물 오염이 더 극심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안동댐 내 경작자들 중에는 외제 바이크를 가져 와 경주를 벌이는 사람들까지 있다고 한다. 과연 이 상황을 방치하고 있는 수자원공사는 어느 나라 기관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잘못을 가리기 위해 시민운동가들을 내부화하는 모습은 ‘수(水) 자원공사’가 아니라 ‘정치 자원 공사’라고 비판할 만 하다.   지금 수자원 공사는 영남인 1300만을 대상으로 석고대죄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책임 없는 자원관리를 해온 그들이 당당하게 ‘물 관리 일원화’와 ‘낙동강 보존’을 논할 자격이 없다. 2009년 환경과학원이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경상북도 내 홍수조절용지 경작 면적은 2886만 제곱미터에 이른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치다. 경작지 비료요구량도 토지피복도 기준으로 641톤이나 된다. 경상북도민들은 안동댐에서 내려오는 ‘돼지 똥물, 소 똥물’을 걸러서 먹고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모 언론의 취재에 수자원공사가 뒤늦게 내놓은 변명이 “친환경 비료를 보급하겠다”는 실효성 없는 주장이다.   이것이야말로 공공의 부패가 아니고 무엇인가. 정부기관의 무능은 곧 부패다. ‘낙동강 사람들’에 속한 환경운동가들은 헛다리 짚을 게 아니라 당신들을 위원으로 위촉한 수자원공사를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고발해야 한다. 바로 그들이 낙동강 오염의 주범이다.

김형자

▲ 바닷물에 분해되는 종이 생수병. photo Youtube ▲ 바닷물에 분해되는 종이 생수병을 개발한 영국의 사회적 사업가. 제임스 롱크로프트. photo Youtube   지난 5월 1일(현지시각),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메일은 사회적 기업가 제임스 롱크로프트(James Longcroft·27)가 개발한 일회용 종이병(Paper Bottle) 소식을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더 나은 지구를 위한 생수병(Boxed water is better for earth)’이라는 이름의 이 종이병은 식물 추출물과 종이를 합성해 만든 것으로, 바다에 던져 넣으면 불과 3주 만에 분해가 된다.      이 생수병을 만든 롱크로프트는 영국 더럼(Durham)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한 재원. 그는 대학 졸업 후인 2016년 비영리 생수 회사를 만들었다. 회사를 세운 목적은 단 하나. 생수 회사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금을 ‘아프리카 물 부족 국가에 식수를 제공하는 자선단체’에 기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선행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 하나 있었다. 아프리카에 제공할 생수가 담기는 페트병이 환경오염의 주범이라는 사실이었다. 플라스틱은 현대 화학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지만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자연분해되는 데는 최소 20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이 걸린다. 특히 생수병은 전 세계 바다에 버려지는 대표적인 플라스틱 폐기물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플라스틱을 대체할 생수병을 개발하기로 했다. 그의 목표는 간단했다. 바다나 토양을 더럽히지 않으면서도 생수만큼은 신선하게 유지될 수 있는 그릇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병의 외부는 재활용할 수 있도록 종이로 만들고, 물이 새지 않게 내부는 방수처리를 하기로 했다. 또 병의 형태를 지탱할 만큼 단단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했다.      롱크로프트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수개월간 실험을 반복했지만 실험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모든 재료를 나무와 식물 등에서 추출한 후 몇 가지 성분을 섞어 나갔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다. 물이 새기도 하고 병이 힘 없이 주저앉기도 했다. 그렇게 거듭되는 실패 끝에 어느 날 원하던 종이병이 완성되었다.      실험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종이병을 바다에 던져 넣거나 땅에 매립하여 분해되는 과정을 살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몇 시간 지나 분해가 시작됐고 바닷물에서는 3주 만에 완전히 녹았다. 더구나 이 종이 생수병은 90% 이상 재활용이 가능했다. 재활용 비율이 약 14%인 페트병하고는 비교가 안 됐다.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은 친환경적 종이병이라서 바다 생물이 먹게 되더라도 안전하고 땅에 버려지거나 매립될 경우 종이가 산성 상태의 토양을 중화시키는 이점도 있었다.          대량생산 위해 크라우드펀딩      롱크로프트는 친환경적 종이병이 생수병 업계에 혁신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종이병의 생산비용은 페트병보다 5%가량 높지만 “플라스틱 물병만이라도 쓰지 않고 줄인다면 자연환경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한다. 그는 친환경적 일회용 종이병을 상업적 규모로 생산하기 위해 ‘크라우드펀딩’을 진행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2만5000파운드(약 3700만원)를 모았다.      사실 하루에도 수십t씩 쏟아져 나오는 일회용 페트병은 지구가 고통받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원유로 만든 플라스틱은 첨가하는 재료나 방법에 따라 100여종류로 나뉜다.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플라스틱은 폴리에틸렌(PE), 폴리프로필렌(PP), 폴리염화비닐(PVC), 폴리스티렌(PS), 페트(PET), 에이비에스(ABS) 등이다. 모두 가열하면 녹는 열가소성 플라스틱들이다.      플라스틱은 수많은 분자들을 인공적으로 결합시켜 만든 고분자 화합물이다. 탄소 원자의 긴 배열에 약간의 다른 원자들이 붙어 있다. 이 탄소 배열은 자연계에는 없다. 이는 플라스틱이 자연적으로 ‘생체 분해’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스틱은 녹여서 재사용할 수 있지만 여러 종류의 플라스틱을 함께 녹여 사용할 수 없다는 난점이 있다. 이를테면 플라스틱으로 만든 페트병, 포장지, 기계부품 등을 함께 섞어 녹일 경우 다시 페트병, 포장지, 기계부품 등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각각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종류대로 플라스틱을 분류해서 재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재활용쓰레기를 비롯해 환경 관련 이슈가 많은 요즘, 우리나라 환경부도 플라스틱 배출량을 줄이고 재활용 비율을 높이기 위한 정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음료업체 19곳과 업무 협약을 체결해 제조·생산 단계에서부터 재활용이 어려운 유색 페트병을 재활용이 쉬운 무색으로 전환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통해 2030년까지 재활용률을 70%까지 높이기로 했다. 재활용이 어려운 제품은 단계적으로 퇴출하고 플라스틱 폐기물은 절반으로 줄여나간다는 방침이다.

박상융

경찰 재직 시 특별단속, 기획수사를 많이 해보았다. 단속기간도 100일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한달인 경우도 많다. 수사에서 송치까지 평균 한달 이상이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인데도 말이다. 대통령과 총리, 장관, 청장의 특별지시에 따라 부랴부랴 실시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실적을 평가한다. 실적에 따라 검거 유공자는 특진도 하고 수사포상비도 받게 된다. 지휘자도 덩달아 지휘, 관리 유공으로 승진과 성과평가에 도움을 받게 된다. 구속 건수가 많고 검거 인원이 많아야 점수가 높다. 심지어 언론 보도평가점수도 있어 당사자가 혐의를 다투는데도 불구하고 보도자료를 통해 언론에 대대적인 보도를 했다. 나중에 무죄, 무혐의로 결론이 다르게 나와도 사과도 자성도 없었다. 단속기간 중 입건과 구속을 해야 실적 점수에 포함되니 수사를 보류했다가 단속기간에 맞춰 영장 청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특별단속과 기획수사 테마는 전국적으로 획일적이다. 지정시행하다보니 실적을 올리기 위해 무리한 수사와 단속이 뒤따르게 된다. 굳이 형사입건할 필요도 없거나 구속영장을 청구할 필요도 없는 사건도 무리하게 입건하거나, 영장을 청구하는 것이다. 조직폭력배 단속의 경우 때로는 일부러 조직범죄로 만들기 위해 억지로 짜 맞추기식으로 특진기준의 명수조직으로 만드는 사례도 있었다.   풍속업소 단속과 관련하여 시각장애인들의 마사지 업소 단속과 유혹에 의해 어쩌다 한번 유사 성행위를 한 군인과 외국인 노동자들, 직장인들, 대학생들이 입건, 처벌을 받게 되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생계에 떠밀려 나온 불쌍한 노래방도우미와 티켓다방 여종업원들까지 단속입건하였다. 청소년 유해업소 단속과 관련하여 청소년인 줄 모르고 술과 담배를 판 구멍가게 주인과 아르바이트생까지도 단속되어 벌금과 행정처분을 받게 된다.  노래방 업자들은 간혹 손님이 술을 밀반입하여 마시다가 경찰에 신고 단속되거나, 손님의 유혹에 의해 도우미를 불러주었다가 단속, 처벌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렵게 대출을 받아 음식점을 차렸는데 청소년에게 술을 팔았다고 단속당하고 영업정지 처분을 받으면 업자는 빚더미에 몰려 거리에 나앉게 된다.   예컨대 주폭(주취자폭력) 관련 특별단속을 하게 되면 실수로 술에 취해 택시비를 못 내거나, 바가지 식대를 씌운 억울한 사람까지 주폭 사범으로 몰리게 되고, 교통사망사고 줄이기 관련하여 교통법규 단속을 실시하면 교통 표지판을 잘못 본 사람까지 법규 위반 처벌로  몰려 범칙금과 함께 면허정지 처분까지 당하게 되는 것이다.   상부에서는 실적이 없다며 “먹고 노느냐”고 질책을 하면 일선에서는 어쩔 수 없이 실적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라도 무리한 단속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다보니 지역실정상 도저히 단속테마와 관련이 없는 중소도시 경찰서, 지구대, 파출소의 경우 실적을 위해 굳이 입건할 필요도 없는 사건까지 무리하게 입건하고 나아가 영장까지 청구하게 되는 것이다.   일선에서는 변호사들이 경찰에서 특별단속과 기획수사를 자주 해야 변호사들이 먹고 살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돈다. 이러한 무리한 단속과 수사는 검찰의 인력 증원과 더불어 검찰 수사지휘의 합리성을 가져다준다.   수사와 단속은 권한이고 칼이다. 칼을 잘못 휘두르면 선량한 여러 사람이 다친다. 칼날과 칼등을 써야 할 때를 구분하면서 생각하면서 써야 한다. 내가 칼을 가졌다고 나 혼자만의 무소불위의 권한이라고 생각하고 자의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수사기관은 자의적인 수사권 행사를 막기 위한 자체 내부통제가 필요하고, 그 내부통제는 수사경험과 지식을 갖춘 사람들에 의해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수사를 하다 보면 수사의 핵심을 찾지 못하고 일을 벌이기만 하는 수사관을 보게 된다. 여기저기 압수수색만 할 뿐 증거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결론도 못 내리고 수사 결론을 미루기만 하는 수사관도 있었다.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수사를 당하는 사람의 심정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과 소신만 믿고 밀어붙이기식으로 무리한 수사를 하는 경우도 보게 된다.   과연 경찰, 검찰 자체 내에 이러한 무리한 수사에 대한 통제와 절차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을까하는 생각을 늘 갖게 된다. 법과 규정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법과 규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수사관의 심성과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수사를 지휘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로스쿨과 경찰, 검찰교육기관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고 관심이 없는 삶과 인간에 대한 철학과 따뜻한 심성과 배려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 수사관을 선발하여야 하지 않을까? 수사는 권한이 아니라 책임이다. 잘못 칼을 사용하여 무고한 사람이 다치면 그에 따른 응분의 책임을 지는 모습도 필요하다.
10개더보기

TODAY`S 칼럼

TODAY`S FUN

TODAY`S 뉴스&이슈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