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일

 “냉전과 반공주의를 떠나 평화와 함께하는 안보정당, 일자리와 성장에 집중하는 경제적 실용주의 정당, 서민과 함께하는 사회개혁 정당으로서 정책혁신을 추진해 가겠다" ”시대정신에 맞게 수구 냉전 반공주의에 매몰된 낡은 주장을 스스로 혁파해 정로운 보수의 새 트렌드를 만들어나갈 것“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김성태가 전날에 이어 오늘(6/18) 또 한 말이다. 여기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그가 수구, 냉전, 반공주의를 자기 식으로 매도한 대목이다. 1. '수구' 운운에 대해서  수구? 지금 누가 수구를 한다고 그러는가? 수구란 앙샹 레짐(구체제)을 그대로 놓아두자고 하는 정파인데, 김성태가 말하는 구체제는 무엇이고, 누가 그것을 옹호한다는 것인가?  우리 역사상에는 이승만 정부, 장면 정부, 박정희의 3공, 유신정부, 신군부, 5공. 6공, 문민정부,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가 있었다. 김성태는 이 중 어느 것을 구체제라고 보는가? 그러나 그 중 어는 것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잔재가 남아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설령 남아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힘 있는 권력으로서가 아니라 이미 다 죽은 것들이거나, 죽어가고 있거나, 있더라도 비실비실 하는 그룹에 불과하다.  이승만은 동상 하나 제대로 세워줄 수 없을 만큼 철저히 짓밟히고 있다.  박정희 역시, 기념사업회 외엔 그의 추종세력이랄 게 없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꽤 있다. 산업화를 성공시켰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박정희 집단’이랄 건 없다. 상당수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박정희 향수는 일종의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기에 어쩔 수가 없다.  전두환? 그는 이미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를 따르는 구세력이 있다고? 없다.    김영삼 계열도 이제는 세력화 돼있지 않다. 다만 김대중을 계승하는 세력은 아직도 큰 덩치로 건재하고 있다. 노무현 추종자들도 엄연한 세력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명박 박근혜? 이 두 사람도 이젠 완전 죽은 몸이다. 박근혜는 30년 징역을 살아야 할 판이다.   이명박의 경우는 박근혜 정도의 지지자들조차 없다.  사정이 이런데 김성태는 지금 누구더러 “야, 이 수구세력아, 물러가!”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인가? 이번에 자유한국당 후보들을 찍어준 33%를 향해? 그렇다면 김성태는 왜 그들을 향해 표를 달라고 선거기간 그토록 난리 부르스를 췄나?  설마 1948년의 대한민국 수립을 낡은 구체제라고 불인정하는 건 아니겠지? 한반도의 낡은 구체제는 평양의 사교(邪敎) 신정(神政) 체제다. 혹시 자유시장 경제를 일종의 사회민주주의 체제로 바꾸자는 것은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려면 왜 애당초 좌파정당으로 가지 한나라당, 새누리당에 가 공천 달라 했나?  2. 냉전 운운에 대해서  냉전이란 무엇인가? 전체주의 소련의 세계혁명과 이를 막으려 한 미국 등 서방 자유주의 진영의 이념대결, 군비경쟁, 첩보전, 심리전, 선전전의 시대를 말한다. 트루먼, 아이젠하워, 레이건, 처칠, 대처 같은 지도자들은 소련 전체주의의 냉전에 대해 자유주의 나름의 대응적 냉전을 했다. 이 대응이 뭐가 잘못됐단 말인가? 그럼 그러지 말고 소련이 마냥 자유세계 안으로 기어들어오게 놓아뒀어야 했다는 것인가? 서방 지도자들의 치열한 대응적 냉전 덕택에 고르바초프가 두 손 번쩍 들어 철의 장막이 무너졌다. 베를린 장벽도 무너졌다. 이게 잘못 됐다는 것인가? 레이건이 냉전을 잘해 소련 전체주의 체제가 무너져 내린 게 나빴다는 것인가?  그런데 유독 한반도 북쪽에서만은 공산 전체주의가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 이래 우리 역대 정부는 그것을 그대로 두고서도 어떻게 해서든 한반도에서도 냉전체제를 평화공존-교류-협력 체제로 바꿔볼 수 없을까 해서 남북대화라는 걸 추구해 왔다. 항상 우리가 먼저 남북 대화를 하자고 졸라댔다. 때로는 김정일에게 막대한 비자금 뇌물까지 줘가면서(이건 촛불혁명 정신에 안 걸리나?) 대화를 ‘애걸복걸' 하다시피 했다. 결과는 어땠나? 북한은 우리가 준 돈을 핵무기 만드는 데 다 써버리고 천안함을 폭침하고 연평도를 포격하고 서울 불바다를 호언했다.  이 자명한 역사를 돌아보면서도 김성태는 마치 냉전적 적대행위의 원흉이 우리라는 듯, ‘수구 냉전적’ 어쩌고 하며 책임소재를 전도(顚倒)시키며 턱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 그는 지난 수십 년의 한반도 현대사를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몰라서 하는 건가?  3. 반공주의 운운에 대해서 반공주의에 매몰됐다고? 반공은 지금 다 죽었다. 지난 시절 ‘막걸리 반공법’이란 말이 있었다. 공산당 아닌 사람이 술 먹고 “김일성이 내 형이다” 운운 하다가 반공법으로 곤욕을 치렀다는 우스개가 말해주듯, 한 때 자유당 시절의 정치깡패들이 ‘반공청년단’이란 걸 만들어 3. 15 부정선거에 저항하는 고려대학 학생들을 습격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다 옛날 고릿적 이야기다.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오히려 대학가에 주체사상사파라는 그룹이 생겨 학생운동을 ‘천하통일’ 한 사례도 있다.  그 이래 민주화가 되면서부터 국가보안법은 갈수록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지금은 친북 활동을 한 주범이 받은 형량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받은 형량이 3배 쯤 더 많다. 판사들은 국보법 피고인들을 “그 정도로는 큰 위험이 되지 않는다”며 무죄, 집행유예, 단기형을 선고한다. 일심회 간첩단 사건은 수사하다가 중단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있다. 김성태가 답했으면 한다. 김정은은 수 십 개의 수용소를 운영하고 있다. 수많은 정치범들이 하찮은 이유로 구금되고 고문당하고 처형당하고 있다. 수용소에 들어온 임신부는 강제낙태를 당한다. 탈북자들이 잡히면 온갖 방법의 고문을 당하고 죽기도 한다. 북한 전체가 빅 브라더(big brother)의 24시간 감시를 받는 오웰리안 사회(Orwellian society,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병영체제)가 다름 아닌 북한의 사교(邪敎)체제다. 이런 사회의 그런 짓거리를 김성태 당신은 찬성 하는가 반대하는가? 틀림없이 반대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김성태의 입장을 반공주의에 매몰된 ’나쁜 것‘이라고 몰아갈 수 있는가? 없다.  김성태는 그래서 ‘반공주의’라는 말 한 마디로 행여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체제의 반(反)인륜적-반(反)인권적 체제를 비판하는 것까지 무차별적으로 수구-냉전-반공타령으로 낙인 할 우려가 있는 표현일랑 최대한 자제해주었으면 한다.  자유한국당은 결국 뿔뿔이 해산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수구-냉전-반공에 관해 김성태처럼 생각하는 부류와, 그와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부류가 한 정당에 당원 동지랍시고 함께 동거한다는 건 웃기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은 차라리 해산하라!

류근일

경북을 제외하고는 5060까지 더불어 민주당을 찍었다. 보수 정계 폭망의 원인은 결국 민심이 변해서 일어난 것이다. 민심은 왜 변했는가? 자유 한국당, 바른 미래당 등 보수정당들이 잘못해서 그렇게 됐다는 게 천편일률적인 진단들이다. 그야 그렇지. 그렇게 말한다 해도 아니라고 반박하긴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면 보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흔히 나오는 말은 “보수가 혁신해야 한다” “새 이념, 새 정책, 새 인물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이야 좋다. 그러나 새 이념이란 대체 뭔가? 혁신? 무얼 어떻게 하는 게 혁신인가? 새 인물이라지만 그런 게 어디 준비돼 있나?  새 이념, 새 정책이란 것을 ‘중도우파-중도-중도좌파’ 쯤으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고(思考)가 있다. 그렇다면 유승민, 안철수는 왜 더 망했나? 정치-안보는 우파, 분배-노동-복지-여성은 ‘진보적’으로 가겠다는 게 바른 미래당 아니었나? 그런데 유권자들은 그들을 무시하고 아예 더불어 민주당으로 넘어가 버렸다. 그들의 길은 대안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사회풍조가 온통 좌(左)로 가는 것 같은 현실은 조직 전문가-선동 전문가들이 만들어내는 군중 소용돌이 정치 때문인 측면이 다분히 있다. 그러나 세태가 그렇다고 해서 자유-우파 리더임을 자임하는 사람들까지도 덩달아 좌파 닮아가기, 좌파 복사해서 붙이기, 강남좌파 하기, 투항주의, 청산주의, 해체주의로 가는 건 속류 기회주의적 처신이다.  보수 정계 폭망의 원인은 그래서 안보에서든 경제에서든 자유주의-보수주의 노선 자체에 있었다기보다는, 지난 보수 정계 8년 시대와 그 인맥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이 너무 컸기 때문이라는 게 보다 리얼할 것이다.    실망의 원인으로는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전(前) 정권들에 우호적이거나 덜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실수는 있었지만 대단한 건 아니었는데 그걸 죄파와 언론이 한껏 부풀려서 선동해 댄 탓에 국민이 휩쓸려갔다”고 말할 것이다.      반면에 전 정권들에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지난 보수 시대가 보수 발전의 기회를 선용(善用)하기는 고사하고 안일, 태만, 무능, 전투력 결핍으로 낭비한 탓”이라고 말할 것이다.  비판적이다 못해 보수정파에 대해 완전히 적(敵)의 입장에 선 사람들의 의견은 여기서 굳이 드려다 볼 필요가 없다. 그들은 보수가 잘한다 해도 나쁘다고 할 터이니까.  이상의 두 관점 중 어느 것을 취하느냐는 각자의 자유다. 아니면 두 입장을 적당히 반죽한 관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해 이렇게 답할 수 없을까? 1. 자유주의-보수주의 철학 자체를 그 어떤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보수가 아예 죽어버리자는 것이니 대책이 아니다. 2. ‘1948년의 대한민국’과 6. 25 남침 격퇴, 산업화-근대화 성공에 대한 긍지는 살려야 한다. 자유 시장경제, 기업 활동의 활성화를 통한 복지확대, 원전(原電) 정책, 대의제 민주주의, 법에 의한 지배, 공공질서와 사회기강 확립, 한-미 동맹도 살려야 한다. 3.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세습-사교(邪敎)-신정(神政) 체제의 폭압에 대해서도 투철한 저항으로 임해야 한다.   4. 대한민국 내부의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변혁론’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5. 새로운 한반도 평화 체제와 동북아 협력 체제를 위해 적극적인 열린 자세로 임하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력한 억지력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남한체제의 변혁은 주장하면서도 북한의 반(反)인륜적-반(反)인권적 체제의 변혁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자세는 배척돼야 한다. 북한의 주민 생활 향상을 위해서는 북한의 개혁-개방이 전제돼야 한다. 6.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저버리는 보수 수혜자들이 있다면 이는 단호히 척결해야 한다. 각종 부정부패, 인사비리, 권력형 부조리, 각종 갑(甲)질 행태, 대기업의 있을 수 있는 위법-불법과 기업문화의 전근대적-봉건적 유풍(遺風)에 대해선 합리적 개혁-개선이 있어야 한다. 7. 귀족노조에 대해서도 노(no)라고 말해야 한다. 노조는 체제타파 운동보다 권익향상에 전념해야 한다. ‘진보정치’는 정당-사회단체 활동으로 하면 된다. 8. 여성, 취약계층, 청년실업에 대해서는 각별한 대책이 필요하다. 좌파보다 더 효율적이고 실속 있는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좌파의 ‘베네주엘라-그리스의 길’이 얼마나 취약계층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해야 한다.   9. 문화계, 교육계의 반(反)대한민국적 이념편향에 대해서는 블랙리스트가 아닌 정당한 문화전쟁, 사상투쟁, 이론투쟁, 정책-제도 개혁으로 임한다. 10. 이런 모든 혁신을 위해 보수정당의 전투적 재편을 단행한다. 차기 국회에 30~40~50 대 투사-전사들을 진출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물갈이와 세대교체를 추진한다. 70세 이상은 무대에 서거나 지휘부에 서거나 대형(隊形) 앞줄에 서지 말고 초야에서, 뒷전에서, 개인자격으로 응원하고 충언하는 정도로 하는 게 바람직하다. 결론 : 결국 자유-보수-우파 혁신이란 도덕성 강화, 전투력-투쟁력 강화, 투철한 대힌민국 긍지사관(矜持史觀) 견지, 세대교체, 리더십 교체, 보수정치인의 교양수준 향상, 문화주의적 접근, 선전-홍보 기능 강화, 자체 교육기능 강화, 시민운동과의 병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 과연 이런 과제들을 리드할 것인가? 할 일은 태산인데 일꾼은 없구나. 蛇足: 혹시....이건 어디까지나 사견이다. 자유한국당의 현지도부는 총사퇴하고 비대위 체제로 가되, 심재철, 김문수, 김진태, 전희경(더하기 그들과 비슷한 원외인사)으로  비대위를 만들면 안 되나? 필자는 잘 모른다. 질문으로 던질 뿐이다. '아니면 말고'다.

류근일

예상하던 대로 이번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이 참패했다. 바른 미래당도 참패했다. 자유-우파-보수-(자칭)중도의 참패였다. 홍준표, 유승민, 안철수의 참패였다. 안철수는 김문수보다 더 참패했다. 이재명이 당선됐고 김경수도 이 시각 현재 역전세다. 부산 겅남이 더 이상 우파지대가 아니게 되었고, 충청권이 언제나 그렇듯 대세에 가담했다. 경기도는 아에 여당 싹슬이였다.   이번 선거는 따라서 전체주의적 획일화로 가는 군중정치가 더욱 강력한 괴력을 발휘한 선거였다. 이에 힘입어 운동권 여당은 체제변혁 조치들을 더욱 으악스럽게 강제하려 들 것이다.       원인? 많은 평론가들이 TV에 나와 이런 저런 교과서적인 분석들을 내놓았다. 맞기야 하지만, 너무 천편일률적이고 성현(聖賢) 같은 말씀들이라 들으나 마나다. 그래서 그런 분석들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필자 개인만의 ‘하나의 시각’을 말해보면 이렇다. 아직은 오늘의 대중민주주의의 향방을 좌우하는 대중(mass)의 관성(慣性)이 보수 야당에 유리한 쪽으로 흐르게 돼 있지 않다고.    오늘의 민주주의는 소수 엘리트층이 좌우하는 게 아니라, 선정적인 미디어 정치의 영향을 받는 다수 대중의 정서적 감흥이 좌우한다. 구체적으로는 어느 쪽이 그 대중정서를 조작(操作, manipulate)하는 기술에서 더 월등한가에 따라 선거정치의 승패가 갈린다.    한국 현실에서는 자칭 ‘진보’-타칭 좌파가 그 기술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우리사회의 지배적인 정치-문화 담론은 모두 자칭 ‘진보’-타칭 좌파가 생산-유통-재생산하고 있다. 그들은 유력한 전달매체도 장악하고 있다. 공-사(公-私) 교육현장, 문화계, 뉴스제작 현장, 선전선동, 유언비어 유포, 영상제작, 스토리 텔링에서 모두 자칭 ‘진보’-타칭 좌파 아니면 강남좌파-‘위선적’ 리버럴들이 주역이다.  같은 이야기라도 어 다르고 아 다르다. 같은 촛불 사태라도 누가 보도하고 해설하고 논평하고 분석하느냐에 따라 파급효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래서 자칭 ‘진보’-타칭 좌파-강남좌파-‘위선적’ 리버럴들은 탄핵정국 이후의 정세를 자기들의 취향과 의도에 맞춰 편집, 제작, 스핀(spin, 뒤틀기), 전달, 선전, 세뇌, 확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성공한 작품이 다름 아닌 ‘촛불혁명’이라는 이름의 ‘영구혁명(permanent revolution)’ 분위기다.  이 '영구혁명' 분위기는 성난 대중, 군중, 아스팔트 부족으로 하여금 일거에 제도를 초월한 막강무비의 힘으로 만들었다. 이들을 이길 힘은 우리 사회에 없다. 이 힘은 법도 공권력도 의회도 사법부도 어쩌지 못한 채 그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이 힘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작동한다. 아니, 잘 보면 ‘보이는 손’이다. 그 손은 잘 숙련된 직업적 조직자(organizer), 그리고 선동선전(agitation & propaganda)가들의 손이다.  오늘의 대중은 이들이 만들어내는 ‘정치적-도덕적 올바름(correctness)’에 관한 대본(臺本)과 연출의 추동(推動)을 받아 자신들의 분노와 화염과 적개심과 원한을 어느 특정한 타깃을 향해 폭발시킨다. 혁명이다. 오늘 이 시국의 타깃은 ‘적폐세력’이다. 야당을 그 적폐의 대변자로 낙인찍는 데 그들 연출자들은 성공했다. 야당은 그래서 패했다.    그래서 많은 평론가들이 야당과 보수와 우파가 반성을 안 하고 개혁을 안 하고 혁신을 안 해서 망했다고들 떠드는데, 대중이 이런 방향으로 세팅 돼 있는 한, 그리고 그 세팅의 한계가 아직 오지 않은 한, 야당과 보수와 우파가 아무리 반성하고 개혁하고 혁신한다고 말하고 별에 별짓을 다해도 상당기간은 더 대중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쩌랴. 추락할 땐 추락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뭐가 있나? 대중의 의식에 그런 칩(chip)이 심어져 있는 데야 뭘 어쩌겠는가? 추락의 본인 책임은 물론 당사자가 져야 한다. 본인들 업보의 부분이 없다는 건 물론 아니다. 그러나 야당, 모든 악조건 하에서 수고들 했다. 특히 자유-중도-보수 쪽 교육감 후보들 수고 많았다. 서울에서 보수 교육감 후보 단일화가 성사된 건 무엇보다도 값진 기록이었다.    이렇게 계속 추락하다 보면 어느 날엔가는 반드시 바닥에 닿을 것이다. 이게 ‘혁명의 피로’라는 것이다. ‘혁명의 피로’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황폐해져 나락에 떨어지는 시점이다. 이 시각에 이르면 역사의 향방은 달라진다. 새로운 시대로 유턴 하는 것이다.  한국 자유-보수-우파의 경우도 공짜는 없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어둠이 깔려야만 나래를 편다. 조바심 내지 말고 이 추락의 마디마디를 천착하고 곱씹으며, 죽어서 떨어져 썩어서 다음 번 유턴의 밑거름이 되겠다는 마음가짐을 다짐할 수밖에 없다.  너무 현실을 초월한 사변적 ‘노가리’였나? 그렇다고 “망해봐야 한다”고 말하는 건 결코 아니다. 입 달렸다고, 펜대 잡았다고 남의 말 함부로 왜곡하지 말라. 그저 비(非)정치적 성찰(省察)일 뿐이다.

류근일

사진출처=조선DB 과거 이 후보와의 관계에 대한 입장을 두 차례 번복한 이유도 (김부선 씨는) 밝혔다. 그는 “무수히 많은 항의를 나름대로 페이스북에 ‘가짜 총각’이라든가 했지만 그럴 때마다 지인들도, 같은 진보를 지지하는 그런 분들이 ‘그래도, 아무리 나빠도 김부선씨가 좀 참아라. 박근혜, 이명박을 물리칠 사람은 이재명밖에 더 있느냐’라고 해서 저를 이렇게 좌절시키고 주저앉혔다”라고 말했다.  조선일보에 실린 배우 김부선 씨의 발언 한 대목이다.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관련된 이야기다. 자기들이 선(善)이라고 생각하는 쪽 사람을 두둔하기 위해선 그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더러 “입 다물라”라고 해도 괜찮다는 사고방식. 무서운 노릇이다. 자기들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쪽 사람이 같은 일로 논란이 되고 있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재명 김부선 논란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쓸데없는 것 갖고 말이 많은데 도지사는 일하는 능력을 보면 된다” 이재명 후보가 아닌 야당 후보였더라도 추미애 대표는 똑같은 논평을 했을까? 그리고 ‘일하는 능력을 보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과연 적절한지? 조금은 다른 사례라지만 '미 투’에 걸려 기소당한 어떤 인사도 일만은 썩 잘했는데... 그리고, 김부선 씨는 그러면 지금 '쓸데없는 것' 하고 다니는 건가? 김부선 씨 그래요?    정치가 무엇이고 선거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분노 조절능력 아닌 윤리 조절 능력 장애라고 말하겠어용~~ 야, 선거 매년 한 번 하면 좋겠다. 1년에 한 번 씩은 저런 희한한 표현 들으며 쓴웃음이라도 지을 수 있을 터이니... 자, 선거법 고칩시다아아아~.

류근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금 금년 11월의 미국 중간선거에서 어떻게 이길 것인가, 그러기 위해 싱가포르의 트럼프-김정은 회담을 어떻게 100% 자신에게 이롭게 우려먹을 것인가에만 집착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그러자면 이번엔 일단 원칙적인 합의, 포괄적인 합의, 미사여구(美辭麗句)로 포장된 합의만 할지 모른다. 디테일은 뒤로 미루는 방식이다.  김정은은 “완전한 비핵화는 한반도 비핵화이고, 이는 선대의 유훈(遺訓)”이라고 말하고 “핵군축을 위해 앞으로 양측이 협상을 해나가자“고 할 것이다. 특히 ”미국에 도달할 대륙간탄도탄부터 우선 폐기 하겠다“고 할지 모른다. 트럼프에게는 미국만 안전하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완전한 비핵화를 하겠다는 뜻으로 알아듣겠다“고 말하고 ”나의 협상 노력은 성공했다“고 선언할 것이다. 서로 적당히 맞춰주는 수법이다.  이렇게 되면 트럼프 대통령은 국내정치적 호재를 얻고, 김정은은 숙원인 미-북 수교와 제재 해제를 얻을 것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과다. 결국 한국의 친(親)대한민국 진영만 소외될 판이다. 아니, 망할 판이라고 하면 과언일가? 그 다음 날 6월 13일에 있을 지방선거 결과는 보나마나다.     한국 자유우파 진영은 그래서 비장한 결의를 해야 할 때다. 문자 그대로 무너졌음을 알아야 한다. 며칠 전 어떤 인시와 대화를 했다. 그 인사도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100% 망하고 제로 베이스에 서야 합니다. 망해 쌌다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습니다. 이걸 인정해야 합니다”  한 번 망했다가 영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느냔 걱정도 물론 할 만하지만, 그렇다고 죽은 시신을 붙잡고 늘어질 수도 없다. 차라리 완전한 백지 상태에서 새로운 우파의 아담 이브가 등장하길 바라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도 결론은 아니다. 결론은 대중이 자신들이 지금 어디를 향해 의지적으로 질주하거나, 자기도 모르게 떠밀려가거나, 무엇에 혹하고 취해서 휩쓸려가거나 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게 될 때까진 백약이 무효라는 사실이다.  한 시대가 무너지고 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 잘 쌓아올렸던 괜찮은 것들마저 함께 무너져내려 그 다음에 올 시다가 전체주의 군중정치의 공포가 황행하는 시대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시대가 오더라도 그게 일시적인 것이 될지 영속적인 것이 될지는 전적으로 오늘의 주연(主演) 세대가 선택할 문제다. 필자 같은 왕년의 세대는 쉬 가면 그뿐이다. 자신들이 만드는 시대를 잘들 즐기기 바란다.

류근일

 요즘 사법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운동적 문화의 사법부 판(版)이라고 필자는 본다. 필자의 이런 시각도 ‘적폐’라고 하겠지만, 이 운동을 벌이고 있는 일부 판사들과 바깥 세력의 부추김은 딱히 범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닌 것을 기어이 범죄로 포장해 보려는 ‘정치 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법부 차원에서도 법보다 정치가 더 상위에 있다는 식이다.  양승태 전 대법관 시절의 법원행정처의 행위는 권한을 다소 남용했다는 정도의 비판은 들을 순 있어도, 그것을 범법행위로 보는 건 무리라는 게 대체적인 평판이다. 그럼에도 일부 성향 판사들과 김명수 대법원장의 사법권력은 지금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수사하라고 ‘투쟁’을 벌이고 있다. 아니, 어떻게 사법부마저 운동적 사고와 운동적 방식에 휩쓸리게 되었는가? 이게 선진 법치국가의 사법부에서 있을 법한 일인가?  사상에 따라서는 법이나 사법행위도 정치행위라고 볼지는 모른다. 법과 사법행위는 지배세력의 정치적 도구이기에, 진보정권 하에서는 그 도구를 보수시절 사법부를 몰아세우고 밀쳐내고 처벌하는 데 써먹을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사법적 방법이나 사법적 절차에 의해서가 아니라 운동적-대중투쟁적 방법과 절차에 따라 써먹을 수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은 자유일지 모르나, 그런 시각과 행동은 사법부인들 스스로 자체의 권위와 국민적 신뢰를 추락시키는 자해 행위가 될 것이다.  사법부 구성원들이 특정한 세계관, 역사관, 사회과학, 그리고 특정한 정파, 세력, 경향의 한 하위체계로 편입될 경우 그것은 이미 사법부의 독립성, 객관성, 정치적 초월성을 스스로 내동댕이친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이미 도구화된 사법운동가(activist)들일 뿐이다.  이에 대해 “그럼 너희 보수 사법부는 보수정파의 도구 아니고 무엇이었느냐?”고 반론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은 ’더러운 적폐'의 도구가 아니라 ’거룩한 노선'의 도구라는 점에서 도덕적 우위와 정당성을 갖는다고 강변할지 모른다. 필자도 물론, 예컨대 권위주의 당시의 도구화 된 사법부 행태를 미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른바 ’진보‘ 시대에 들어와서도 사법부가 똑같은 정치적 도구화의 길을 걷는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사법부에서마저 ‘운동적’ 방식이 범람한다면 그거야말로 자유민주 법치국가 대한민국은 무너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 판사들과 김명수 대법원장은 특정한 정치의식에 앞서 법의식에 투철하기 바란다. 그 어떤 이상한 민주주의의 법의식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법의식 말이다. 하기야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떼어버린 민주주의로 가자는 판에, 그 풍조가 사법부라 해서 예외란 보장이 있을까 싶진 않지만 말이다.  한심한 세태다. 언제 판사들이 이렇게 전혀 다른 종류의 판사들이 되었나? 교사들이 달라져서 그렇게 됐나? 386 또는 586이 70대까지 해먹는다고 칠 때 앞으로도 20년은 그들의 세상이니 그 동안 ‘1948년에 세운 대한민국’이 어다 남아나겠나? 하기야 그건 필자 세대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그러니 하고 싶은 대로들 해보셔, 그 끝에 뭐가 있는지 봐야지...아무렴.

강인선

한국이 역동적이라고 해서 ‘다이내믹(dynamic) 코리아’라고 한다. 그에 비하면 밋밋하게 돌아가는 미국은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트럼프 시대의 미국은 예전의 미국이 아니라 ‘드라마틱(dramatic) 미국’이다.      트럼프 대통령을 생각하면 두 개의 단어가 떠오른다. ‘반전’과 ‘반격’이다. 보통 사람들이 예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과감하게 방향을 틀고, 자신이 비난이나 공격을 당하면 더 세게 받아친다. 그는 그렇게 성공해왔고 살아남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요즘 말로 ‘멘탈 갑’이다. 과감한 결정을 할 때나 그것을 번복할 때나 너무 당당하다. ‘지도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든지, ‘국민 여론을 의식해 조심한다’든지 하는 상식적인 대통령학은 트럼프에게 통하지 않는다.      트럼프 취임 후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미국의 시스템이 그를 좀 더 전통적이고 대통령다운 모습으로 서서히 변화시켜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강력하고 안정적이라는 미국의 시스템도 트럼프를 길들이지는 못하고 있다. 오히려 미국의 시스템에 익숙한 전통적 엘리트들이 트럼프 스타일에 적응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새벽부터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트위터로 날리는 트럼프는 어떤 의미에서 극도로 투명한 대통령이다. 마음속의 생각을 그때그때 내보여준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예측불허이다. 덕분에 5월은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정신없이 흘러갔다. 지난 3월 초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을 전격 수락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더니, 두 달 반 후엔 전격 취소한다고 해 세상을 뒤집어놓았다. 그러더니 하루도 못 가서 다시 할 수도 있다고 해서 또 한 번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6월 12일 미·북 정상회담이 기정사실화됐지만 워싱턴 기자들은 ‘잠정적으로’ 그렇다고 받아들인다. ‘혹시 모른다’라는 마음의 보험을 들어두는 것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싱가포르에서 마주 앉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 안전하다. 그의 책 ‘거래의 기술’은 협상가 트럼프의 면면을 짐작게 해주는 자료이다. 트럼프는 이 책에서 자신이 “아주 느슨하게 사업을 하는 편”이라고 했다. “일일이 스케줄을 잡아두려고 애쓰는 편도 아니다”라고 한다. 실제로 그래 보인다.      트럼프는 무엇보다 ‘현재’를 중시한다. 과거로부터 배우려고 노력은 하지만 “현재에 모든 초점을 맞춤으로써 미래를 계획한다”는 것이다. 미·북 협상 역시 참모들이 최대한 준비하되 협상장에 들어가서는 대통령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재량을 한껏 안고 들어갈 것이다. 그 순간의 판단에 충실한 게 트럼프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일을 할 때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일은 “거칠게 나갈 필요가 있을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요하면 협박도 하고 과감하게 밀어붙인다. 취임 후 지금까지 북한 정책은 물론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이런 식으로 해왔다.      일찍이 사업에 눈뜬 트럼프는 이렇게 쓴다. “난 좀 여유 있게 산다고 해서 만족하지는 않았다. 뭔가 기념비적인 건물, 큰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는 건물을 짓고 싶었다.” 트럼프가 미·북 정상회담이란 승부수를 던지기까지는 아마 이런 마음의 행로도 거쳤을 것이다. 단순한 성공이 아니라, 역사적 성공을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두 주 안에 또는 그 후에 또 다른 반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트럼프니까.

류근일

 “문재인 정부는 남북의 서로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북한 붕괴-흡수통일-인위적 통일을 추구하지 않겠다” 송영무 국방장관이 한 말이다. 그러나 천하대세가 송영무란 공인 또는 자연인 한 사람의 말과 뜻대로 되는 것인가? 그는 너무 큰 이야기를 너무 쉽게 했다.  어는 날 갑자기(?) 동독이 붕괴하고 독일이 통일될지 누가 알았나? 고르바초프가 손을 떼고 동독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자 흡수통일은 벼락 치듯 왔다. 한반도에서도 중국이 북한에서 손 떼고 북한주민들이 떼 지어 탈북하거나 봉기를 하면 흡수통일은 하지 않으려 해도 온다.  문제는 중국이 고르바초프의 소련이 아니고 김정은 폭정의 장악력은 워낙 잔인무도한 데다, 북한주민들의 저항역량이 아직은 ‘필요-충분’ 하지가 않다는 것뿐이다.  한반도는 미-북 회담을 고비로 엄청난 변혁기로 들어갈 판이다. 그 변혁은 대한민국 진영에 썩 이로운 변혁이 아닐 수 있다. 김정은 체제는 고스란히 있는 채 대한민국 안보장치만 거두어지는 꼴이 되면 특히 더.    김정은은 ‘현재 핵’과 ‘미래 핵’은 포기할지 모른다. 그러나 ‘과거 핵’은 상당수를 얼마든지 감출 수 있다. 미국이 그걸 얼마나 사찰하고 뒤지려 할지 글쎄다. 그러면 북한은 사실상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는 결과가 된다.  반면에 우리는 미군 철수 또는 감축, 미-북 평화협정 체결, 한-미 군사훈련 중단, 미국 핵우산 철거, 연방제 같은 일련의 과정을 밟아가며 ‘낙동강 오리알’처럼 될 위험성이 있다. 이럴 경우는 ‘1948년에 세운 한민국의’의 쇠망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대한민국을 ‘헬 조선’이라고 부르는 젊은이들, 포시러운 보수로 살면서도 “나도 실은 진보적”이라고 자기소개 해온 강남좌파들, 중도라고 자칭하면서도 우파만 비난하고 좌파엔 입 다무는 기회주의적 지식인과 정치인들, 보수의 잇속은 저희들이 다 챙기고 보수의 흠결도 저희들이 다 만들었으면서도 막상 보수가 망하게 됐을 때는 깨갱 깽 꼬랑지나 사타구니에 처박고 허겁지겁 대는 정상(頂上) 층 큰손들-이들이 과연 앞으로 닥칠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변혁 와중에 어떤 신세와 운명이 될지 자못 흥미롭다.    “그럼 네놈 신세와 운명은?” 하고 물을 것이다. 걱정 말라. 이 나이면 반동으로 찍혀 비명횡사를 당한데도 아까울 게 없다. 네놈들 걱정이나 해라. 공산당은 네놈들 같은 부류는 실컷 우려먹고 빨아먹다가 나중엔 다 수용소에 보내거나 죽였어.  한반도 싸움 끝판엔 사이공 최후의 날 같은 게 오거나 주석궁 최후의 날이 오거나 둘 중 하나인데, 요즘 돌아가는 꼴은 이쪽이 훨씬 더 불안-불안 해보인다. 과민(過敏)일까? 서로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고 흡수통일을 안 해? 돼가는 꼴에 따라선 단계적 흡수통일이 거꾸로 올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김우택

70년 동안에 대한민국을 현재와 같은 자랑스러운 번영의 나라로 이끌어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고사 위기에 처해 있다. 위기를 헤쳐 나갈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왜 이런 상황까지 왔는가?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와 시장경제라는 경제 질서는 자유라는 가치를 중심에 둔 자유주의라는 이념의 진화과정에서 숙성된 정치 ․ 경제 질서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승전국 미국의 도움과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탁월한 식견 덕분에 쉽게 얻은 이들 대한민국의 기초의 중요성을 대부분의 국민들은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무릇 진화라는 것이 자연선택 과정에서 적자만이 생존하는 냉혹한 경쟁이기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질서도 세월이 흐르면서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피 흘려 쟁취하고 땀 흘려 노력하면서 가꾸어 얻은 결실인데 우리는 거저 얻었기에 그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리 귀한 것도 그 가치를 모르면 쉽게 버릴 수 있다.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혁명, 프랑스혁명이라는 세계 정치사의 뚜렷한 이정표들이 오늘의 자유민주주의가 있기까지의 험난했던 과정을 상기시켜 주지만, 상업혁명, 산업혁명,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지식 정보혁명으로 인류를 기아해서 해방시켜주었고 오늘의 번영을 가능케 한 자유시장경제의 기초가 되는 법, 관행, 조직 등의 제도 인프라가 누구에 의해 언제 어디서 얼마나 힘들게 만들어졌는지를 콕 찍어 보여주는 경제사의 이정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것이 얼마나 어렵게 만들어졌고 지켜졌는지, 또 지금 잘 살게 된 거가 그 덕인지를 알지 못하니 귀한 거라 생각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바깥세상의 상황을 보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자유주의의 위기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대공황 이래 최악이라는 2007-8년의 경제위기가 발생하면서 자유시장의 자기조정 기능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미국에서 트럼프의 등장과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 유럽 대륙 각국에서의 극우세력 약진 등으로 자유주의 위기론이 고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의 중심인 미국에서 지난 1년 동안 출판되어 주목받는 자유주의 혹은 민주주의 관련 책들의 제목들이 이들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나 Why Liberalism Failed』,『서구 자유주의의 후퇴 The Retreat of Western Liberalism』, 『한 때 그리고 미래의 자유주의자 The Once and Future Liberals』, 『민주주의는 어떻게 죽나 How Democracies Die』, 『민주주의는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을 수 있나 Can Democracy Survive Global Capitalism』, 『인민 대 민주주의, 왜 우리의 자유는 위험에 처해 있으며 어떻게 구할 것인가 The People vs Democracy: Why Our Freedom is in Danger and How to Save It』등등. 만일 자유주의의 위기가 한국만이 직면한 한국특유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 원인의 진단과 대응도 자유주의 자체와 인간의 본성에서 찾는 보편적 접근이어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는 그 이념이 기초로 삼는 정전(canon)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용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그 의미도 다양하기에 정의하기도 어렵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치된 의견이지만,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이 동의하는 자유주의의 특징들을 열거하는 것으로 자유주의가 무엇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 중심에는 어떤 권위(교회나 국가)로부터도 독립된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있으며,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 관용, 법치, 개방성, 진보, 정교분리 등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역사적 고찰도 도움이 된다. 근대적 원조 자유주의로 인정되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에 그 뿌리가 있고 아담스미스(Adam Smith)로 대표되는 ‘고전적 자유주의 classical liberalism'의 중심 원리는 공(公, public)과 사(私, private)의 구분에 있다. 타인에게 위해가 되지 않는 한, 개인의 행동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밀(J. S. Mill)이 제시한 기준이 이 구분에서 나오며, 종교 사상 언론의 자유의 기초이다. 또 생산, 교환과 같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활동도 거래 당사자들만의 사적 영역이기에 타인의 필수적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한, 사적 자치가 보장되어야 하는 자유경쟁시장의 기초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는 다른 색깔의 자유주의가 모습을 드러냈다. 프랑스혁명의 초기 결실인 1793년 헌법 제2조는 정부가 보장하는 기본권으로 평등, 자유, 안전, 그리고 재산권을 꼽아 평등 지향성을 분명히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노동권과 필요한 사람에게 생존의 수단을 제공할 사회의 의무도 명시했다. 1793년 헌법은 1795년 헌법으로 대체되었지만, 그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혁명가 페인(Thomas Paine)은 권리로서의 기본소득 논리에 근거한 제도를 제안했고, 그 후 유토피안 사회주의자 푸리에(Charles Fourier)와 샤를리에(Joseph Charlier)도 ‘토지배당’이라는 이름의 기본소득을 주장했다. 고전적 자유주의와 대비되는 평등 지향적 좌파 자유주의라는 흐름도 생겨난 것이다. 20세기 미국의 정치지형에서, 공화당 보수 자유주의와 루스벨트(F. D. Roosevelt)이후의 민주당 좌파 자유주의의 이념적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두 흐름이다.   두 유형의 자유주의를 구분하는 이유는 자유주의가 실패에 이르게 하는 원인 제공방식과 경로가 다르기 때문이다. 평등이 자유에 우선하는 좌파 자유주의는 그 정도가 심해지면 보다 더 평등해지기 위해 자유를 희생하는 우를 범해 민주주의의 실패로 독재정권이 탄생하면서 자유주의가 종말을 맞게 된다. 이 경로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른 칼럼을 참조하기 바란다.   칼럼:"평등이 자유에 우선할 때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폭정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 우파 자유주의는 어떻게 실패에 이르는가? 민주국가의 ‘고전적 자유주의’이념의 정권이라면, 큰 틀의 경제정책기조는 작은 정부, 자유경쟁시장 질서유지(경제규제의 최소화), 자유무역의 세 가지이어야 한다. 하지만 정작 우파 자유주의 정권 하에서도 작은 정부와 시장 경쟁질서가 회복되는 것을 보기는 쉽지 않다. 재정학에는 19세기 독일 경제학자의 이름이 붙은 바그너 법칙(Wagner's Law)이라는 가설이 있다. GDP대비 정부지출 비중은 추세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 법칙은 사회주의 실험 중에 지속 불가능한 수준까지 정부지출이 늘어났던 몇몇 국가들의 경우가 아니고는 지금도 유효하다. 또 노동시장의 진입장벽 수준을 보여주는 자격증이 필요한 직업의 비중도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지금 미국 IT대기업들의 시장지배력은 19세기 말 반독점법이 만들어지던 때보다 더 우려스러운 수준에 이르렀다.   이념정당이 선거공약으로 내건 슬로건의 실천력이 추세의 힘을 이기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슬로건에는 진심이 담겨있지 않지만, 추세는 인간이 본성에 따라 행동한 결과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즉, 정치인과 관료를 포함한 기업, 직능단체 등 이익집단들이 자기이익을 추구하며 행한 행위들이 의지가 담기지 않은 정책 슬로건보다는 더 많은 것을 이루어 낸 것이다. 인간의 합리성 가정 하에 독립된 개인의 자기결정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그래서 자기이익 추구가 정당화 되는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모형은 현실의 불확실성과 불완전한 합리성 하에서 그 설명력이 의심되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모형이 시장의 공정한 경쟁 질서를 보장하는 바람직한 제도로 평가되던 능력주의(Meritocracy)와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가 아이비리그(Ivy league)나 옥스브리지(Oxbridge)에서 교육받고 전문직이나 학자로서 사회적으로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높은 연봉을 누리는 엘리트들이 그들의 특권을 세습하는 ‘세습 능력주의 hereditary meritocracy' Edward Luce, The Retreat of Western Liberalism. 혹은 ’자유주의자지배 liberalocracy' Patrick Deneen, Why Liberalism Failed.로 불리는, 전근대 귀족계급을 자유주의 엘리트 계급이 대체한 사회로 바뀐 것 뿐 이라는 비판과 함께 정치 신인 트럼프의 미국 공화당 장악이나 영국의 EU탈퇴 결정과 같은 현상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모형은 민주주의 선거시장에서 또 의회라는 판에서 로비를 매개로 벌어지는 이권시장에서 어떻게 바람직스럽지 못한 결과들이 만들어지는지를 설명해 준다는 사실이다. 왜 선거에서 투표율이 낮은지를 기대효용으로, 유권자들은 정당의 정책이나 후보자들 검증노력을 하지 않는지를 유권자들의 ‘합리적 무지’로 설명한다. 또 생산자 로비가 소비자 로비를 이기는 현상을 올슨(Mancur Olson)의 ‘집단행동의 논리’로 설명한다.  소비자와 같이 광범위한 대집단의 구성원인 개인이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에 나서서 사적으로 얻을 이익은 크지 않다. 따라서 합리적 개인은 남들이 나서기를 바라며, 자신은 무임승차하려 한다. 반면 생산자 단체와 같이 소수로 구성된 이익집단에서는, 집단행동으로 공동의 목표를 달성했을 때 개인에게 돌아갈 이익이 크기 때문에 각 구성원들은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다. 안재욱 외, 『새 경제학 원론』, 301-2쪽. 실패의 원인을 알면, 해결책이 보인다. 해결책은 간단한 것일 수도 혹은 실행불가능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합리성 가정이 문제가 되는 많은 경우가 사람들이 이익을 장기적 고려가 아니라 단기적 계산만 하기 때문인데, 이는 장기의 불확실성이나 상호작용의 복잡성에 따른 계산의 어려움을 피하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제 빅 데이터의 사용으로 정보비용이 낮아지면, 이 문제도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발상의 전환이다. ‘자유’를 자기이익추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근시안적 이익추구가 복잡한 사회적 상호작용을 거쳐 야기할 정치적 파장까지 고려하게 되어 비용-편익의 계산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제 자유주의자들과 자유주의의 혜택을 누리는 모든 사람들은 ‘자유’의 가치를 자신들의 의사결정에 반영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배용진

문재인 정부는 ‘일자리 정부’를 자처해왔습니다. 취임 초 문 대통령이 가장 먼저 팔을 걷어붙인 것이 고용 창출입니다. 재정 수단을 통해 상대적으로 쉽게 만들 수 있는 공공 분야 81만개 일자리를 우선의 목표로 내세웠습니다.      출범 1년을 맞은 지금, 일자리위원회가 제 역할을 못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4월까지의 통계를 보면 공공부문 일자리는 늘었지만 그 밖의 분야에서 취업자 수는 예년에 비해 3분의 1 수준을 밑돌고 있습니다. 10%를 넘나드는 청년실업률은 더 큰 문제입니다.      오는 6월 미·북 정상회담이 끝나고 민생 문제가 부각되면 일자리 문제는 첫손에 꼽힐 만한 과제입니다. 결국 ‘문제는 경제’라는 말이 나올 것입니다. 각종 규제로 목을 죄고 투자를 위축시키면 이윤 극대화가 목표인 기업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합니다.      취재를 위해 접촉한 일자리위원회의 위원들은 “결국 일자리는 민간에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노사가 실업 문제를 공동의 해결 과제로 인식하고 합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명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사의 갈등을 중재하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나아가는 중재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덮어놓고 고용만 창출하라고 윽박질러서는 문제 해결이 요원합니다.      이목희 신임 부위원장은 일자리위원회 일부 위원들에게 ‘이단아’로 불릴 만큼 파격적 행보로 주목받아 왔습니다. 기재부 출신 관료로 재정 수단에 의존해온 전임 부위원장과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습니다. 노동운동가로 잔뼈가 굵은 그가 정치력과 협상력을 얼마나 발휘할 수 있을지 주목받고 있습니다.
10개더보기

TODAY`S 칼럼

TODAY`S FUN

TODAY`S 뉴스&이슈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