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동식

2000년 6월 13일 6월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을 김정일이 맞이하고 있다. /조선DB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햇볕정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호남 출신들이 많은 편이다.   김대중의 정치적 자산은 소중하다. 반발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나는 적어도 현재의 대한민국은 박정희와 김대중 두 사람의 흔적이 가장 강하게 남아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런 김대중의 정치적 자산을 살린다는 선의라고는 해도 햇볕정책에 집착하는 것은 위험하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을 위해서도, 호남을 위해서도 최악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내가 팃포탯 전략이라는 개념을 들어 설명했지만, 김대중 집권 당시로서는 햇볕정책은 시도해볼만한 노선이었다고 본다. 강경 대치 일변도로 나아갔던 보수정권들이 대북 정책에서 그다지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접근은 시도할 수 있었다.   IMF 외환위기라는 상황에서 대북 정책으로 새로운 정치 경제적 활로를 모색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북핵이 드러나지도 않았던 시점이기 때문에 그런 대북정책이 갖는 위험성도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김대중 본인이 자신의 햇볕정책에 대해 '강력한 안보를 전제로 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보수 성향 사람들은 김대중이 서해교전 당시에도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월드컵 결승전에 갔다며 마치 안보를 등한시한 것처럼 비난하곤 하지만 그건 초점을 잘못 잡은 얘기이다. 만일 그때 김대중이 월드컵 결승전에 가지 않았다면 한국은 서해교전으로 인한 피해보다 훨씬 더 큰 국제적 이미지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거야말로 서해에서 도발한 북한의 의도에 가장 부합하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상황이 달라졌다. 북핵과 미사일이 이미 한반도와 일본은 물론 조만간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중국을 등에 업고 노골적으로 핵 위협을 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과 중국에 대해서 유화적이고 온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가? 지금 상황에서 평화적 방식으로만 북핵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양쪽이 주먹에 돌을 쥐고 있다가, 한쪽이 갑자기 총을 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 총에 실탄을 장전해 위협한다. 이때 평화적인 방법으로만 해결하자는 얘기는 무릎꿇고 항복하자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북한과 중국은 정상적인 협상 상대가 아니다. 해방 이후 70년 넘게 쌓아온 경험이 그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최소한의 신뢰도 갖기 어렵다. 북한과 중국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합리적인 불신과 의심을 갖고 대하는 것이 정상적인 대응이다.   지금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내세우며 북한과 중국에 대해서 타협 일변도의 정책으로 나아가는 것은 실은 김대중과 그를 지지한 호남 정치의 상징자산을 결정적 치명적으로 훼손하는 행위이다. 지금 이대로 가면 김대중과 호남 정치는 정말 북한에 나라 팔아먹은, 반란세력의 누명을 벗기 어려워진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한반도가 북한 체제로 통일된다면 김대중의 햇볕정책도 영광스러워지는 것 아니냐고 여기는 정신병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영광이 아니다. 치욕이자 역사적으로 영원히 똥물을 뒤집어쓰는 결과가 된다.   북한 체제가 어떤 명분과 합리성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보는가? 그 체제가 영속할 수 있다고 보는가? 만일 북한 체제에 한국이 흡수되는 비극이 발생한다면 그 정치적 책임은 김대중과 호남에게 귀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문재인 정권은 정치적으로 폼나는 위치에 호남 출신들을 대거 기용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실권을 쥔, 예산과 인사권을 쥔 자리는 PK 친노 등이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문재인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이 발생하면 호남 출신들 나아가 호남 전체가 그걸 뒤집어쓰게 된다. 정치적인 자리와 명분이란 게 원래 그런 역할을 한다.   사실상 햇볕정책도 마찬가지 운명이다. 문재인과 친노들은 철저하게 김대중과 호남의 정치적 상징자산을 공짜로 써먹고 있다. 실권도 없는 고위직 몇 자리 안겨주고 5.18 빅쑈 립써비스로 기분 맞춰주면서 등골을 빼먹는 전략이다.   내가 자주 사용한 비유지만 집문서 땅문서 선산 문서까지 빼돌리면서 짜장면 몇 그릇 사주고 생색을 낸다. 짜장면 몇 그릇 얻어쳐먹은 친구들은 "역시 우리 문재인"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게 찬양질하기 바쁘고.   정말 김대중과 호남 정치를 생각한다면 지금 상황에서 문재인의 햇볕정책과 김대중의 그것은 분명하게 다르다고 선을 그어야 한다. 김대중이라면 지금 문재인의 대북정책과 중국 정책을 철저하게 비판했을 것이라고 얘기해야 한다.   돌아가신 양반은 말이 없다. 결국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는 남은 자들, 그의 정치적 유산이 대한민국에 활용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몫이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김대중은 대한민국을 만든 두 기둥의 하나이자 위대한 정치인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나라 팔아먹은 역적이라는 누명을 쓰게 될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상황이 김대중과 햇볕정책의 마지막 탈출구이다. 만일 대한민국의 운명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귀결된다면 그때 가서는 무슨 명분으로도 변명이 불가능하다. 백약이 무효이다. 제발 깊이 깊이 생각하자.

조성관

▲ 왼쪽부터 존 F 케네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 사진출처=위키미디어,뉴시스 “…이 세상에는 자유세계와 공산세계 간의 가장 큰 이슈가 무엇인지 정말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모르는 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베를린에 한번 와보라고 합시다. 세상에는 공산주의가 미래의 흐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도 베를린에 와보라고 합시다. 유럽이나 다른 곳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손잡고 일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도 베를린으로 데려옵시다. 공산주의는 나쁜 제도지만 경제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라고 말하는 이들도 일부 있는 모양인데, 그들도 베를린에 한번 와보라고 합시다. 자유란 어려운 것이고 민주주의는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높은 담을 쌓아 사람들을 가두고, 그들이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적은 없습니다.… 서베를린은 18년 동안이나 포위되어 있었으면서도 여전히 활력과 힘, 희망과 결의를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구상 어느 곳에도 이런 도시는 없습니다. 베를린장벽은 공산체제의 실패를 가장 생생하고 명백하게 세계 앞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것이, 누가 어디서 한 연설인지를. 1963년 6월 26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서(西)베를린 시청 발코니에서 한 연설이다. “Ich bin ein Berliner(나는 베를린 시민이다)”로 널리 알려진 베를린 연설! 지난 10월 독일 베를린을 여행하면서 일부러 이곳을 찾아갔다. 당시 서베를린 시청은 미국 지역인 쇠네베르크구에 있었다. 현재 이곳은 쇠네베르크 구청사 건물로 쓰인다. 20세기 역사는 케네디 대통령이 서베를린 시청 발코니에서 예언한 대로 전개되었다. 베를린 시당국은 이 역사적인 장소를 여러 형태로 기억하고 있었다. 먼저 구청사 앞 광장을 ‘존 F 케네디 광장’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발코니와 연결된 방을 ‘존 F 케네디 방’으로 이름지었다. 방안에는 6월 26일 그날을 상기시키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그날의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국회 연설의 반향(反響)이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왜 그런가. 연설이 명문(名文)이기 때문이다. 번역된 연설문을 읽어도 명문의 맛을 느낄 수 있지만 한영(韓英) 대역(對譯)으로 읽으면 명문의 묘미가 배가된다. 희뿌옇던 머릿속이 말갛게 개이는 듯한 느낌이랄까. 두통이 날 때마다 진림(陳琳)의 글을 읽으면 머리가 맑아졌다는 조조(曹操)가 된 기분이다.      그렇다면 트럼프의 연설은 왜 명문인가. 엄정한 사실에 기반해 깊이 생각한 것을 알기 쉽게 썼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연설문은 어려운 단어가 거의 없다. 고등학교 2학년생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레토릭도 별로 없다. 그런데 힘이 느껴지고 울림이 있다. 왜 그런가. 연설문에 진실을 담았기 때문이다. 거짓이 아닌 진실을 평이한 언어로 간결하게 표현했기에 읽을수록 빨려든다.      트럼프의 연설문과 대비되는 것이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이다. 현충일 추념사, 광복절 경축사, 유엔 연설문 3개를 되새겨 보자. 현충일 추념사에서 6·25전쟁을 일으킨 북한은 일절 언급되지 않았다. 광복절 경축사는 또 어떤가. 세계가 인정하는 대한민국의 성공사(史)는 무참히 편집됐다. 유엔 연설에서 문 대통령은 자신이 ‘피란민’임을 강조했지만 정작 무엇으로부터의 피란인지를 빼먹었다.       케네디의 베를린 연설이 지금 읽어도 가슴이 뛰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웅변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국회 연설은 역사를 바꾼 명연설로 기록될 것이다. 진실을 외면한 연설문은 결코 감동을 줄 수 없다.

박광작

▲ 루이제 린저(1911~2002) photo www.Welt.de소설 ‘생의 한가운데’로 널리 알려진 독일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1911~2002). 1980년대 루이제 린저는 우리나라에서 최고 인기의 외국 여류작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이름을 네이버 검색창에 입력하면 이런 설명이 나온다.      ‘전후 독일의 가장 뛰어난 산문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대학 졸업 후 1935년부터 교사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39년 학교로부터 나치스에 가입하라는 독촉을 받게 되자 직장을 떠났다.… 1944년 남편이 러시아전선에서 전사했으며, 자신은 히틀러 정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작품의 출판금지를 당하고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이어 반나치스 활동으로 투옥되었으며 1944년 10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전으로 1945년 석방되었다.’      박광작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지난 10월 말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것이 루이제 린저의 정체다’를 4회 연속 게재해 지식인 사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2011년 무리요가 쓴 전기 ‘루이제 린저: 모순의 삶’이 출간되었을 때 ‘루이제 린저는 나치주의자였다’는 독일 통신기사를 받아 일부 신문에서 단신으로 보도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위의 네이버 인물 검색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루이제 린저에 대한 기술은 1980년대와 똑같다. 전혀 수정된 바가 없다. 박 교수가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이유다. 박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0년대 후반에 독일 유학을 했다. 베를린자유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귀국해 성균관대 경제학과에서 학생을 가르쳐왔다. 오랜 기간 한독(韓獨)포럼의 한국 측 간사를 역임한 독일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박 교수는 무리요가 쓴 전기 ‘루이제 린저: 모순의 삶’의 주요 부분을 요약하고, 린저의 ‘북한여행기’를 참고해 주간조선에 기고문을 보내왔다.          “품위 있게 보이는 나이 든 한 여인이 오버바이에른 지방 마을 ‘베소브룬(Wessobrunn)’의 공원묘지에 묻혀 있는 아들 묘 앞에 서 있었다. 이 여인 곁에는 젊은 남자 한 명도 동행해 있었다. 이 젊은 남자는 갑자기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속에서 무언가 치솟아 참을 수 없이 터져나오는 이 여인의 신음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이 여인은 혼란스러운 말들을 중얼거리며 죽은 아들에게 용서를 빌고 있었다. 상당한 시간이 흘러간 후 그녀는 평생 마음속 깊이 숨겨 놓았던 사연을 이야기했다. 그녀의 둘째 아들은 혼외자로 출생했다. 이 아들은 어릴 때 자기를 고아원에 맡겼던 그의 엄마에 의해 버림받았다는 절망 속에서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들에게 출생의 비밀을 말하는 데 냉담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아들의 묘지에서 비탄과 회한에 빠져 있었던 여인은 바로 독일 좌파 소설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였다. 그녀의 둘째 아들 ‘슈테판 린저’(Stephan Rinser·예술감독으로 활동하다 1994년 사망)와 어머니 루이제 린저는 평생 갈등관계 속에 살았다.”         1935년 히틀러 찬양시 발표      1990년대 말 루이제 린저와 오랜 교우관계를 가졌던 철학자이며 수도회 신부 호세 산체스 데 무리요(Jos Snchez de Murillo) 교수는 루이제 린저와 함께 그녀의 둘째 아들 묘소를 방문한 후 위의 글을 남겼다. 무리요 신부는 린저 탄생 100년을 맞았던 2011년 린저의 일생을 밝혀주는 ‘루이제 린저: 모순의 삶(Luise Rinser: Ein Leben in Widerspruchen)’을 출판했다. 처음 루이제 린저의 전기를 쓰기 시작할 때 무리요 신부는 그녀를 신화적인 독일의 ‘잔 다르크’로 그리고자 기획했다. 그러나 자료를 연구해 가면서 ‘아! 이게 아니구나!’라고 탄식했다. 그녀가 자신에 대해 한 이야기가 모두 거짓이란 사실이 밝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입증된 사실에 입각한 ‘린저’의 전기를 출판했다.      이 전기는 루이제 린저의 첫째 아들 크리스토프 린저(Christoph Rinser)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나올 수 있었다. 크리스토프도 어머니의 감춰진 ‘과거’를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루이제 린저는 아들에게까지 거짓말을 해왔기 때문에 아들도 어머니의 감춰진 진실을 알고 싶어 했다. 원래 이 루이제 린저 전기 발간은 그녀의 출생 100주년에 그녀를 기념비적 정의의 여신으로 만들어주는 팡파르로 의도되었으나, 이와 반대로 그녀의 모든 거짓말과 미화된 삶의 허구성을 밝혀줌으로써 그녀는 거짓말쟁이로 추락하고 말았다.      1933년 히틀러의 나치가 집권한 후 루이제 린저는 여러 번 히틀러 찬양 글을 발표했다. 그중 1935년 초 잡지 ‘아궁이 불(Herdfeuer)’에 발표한 6연(聯)의 시 ‘젊은 세대(Junge Generation)’ 중 마지막 연만 봐도 나치 찬양은 분명하다. 1~5연도 역시 구구절절 히틀러 독일을 위한 찬양문이다.      “…우리는 죽음으로 충성을 다해 몸을 바치는 성스러운 이 땅의 감시자/ 위대한 지도자(히틀러)의 비밀을 지키는 파견인들/ 우리들 이마에 불꽃을 일으키는 그의 신호와 함께/ 우리 젊은 독일인들!/ 우리는 감시한다. 우리는 승리 아니면 죽음을 택할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충성스럽기 때문이다.”      루이제 린저는 자신이 쓴 히틀러 찬양 시가 알려졌을 때, 자기가 쓴 시가 아니라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나중에 루이제 린저가 그 시를 썼다는 것이 밝혀지자 그녀는 공동으로 작성한 시라고 말을 바꾸었다. 나중에는 다시 말을 바꾸면서, 자신이 그 시를 썼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히틀러에 대한 풍자시’라고 변명했다. 루이제 린저는 히틀러가 집권했던 1933년 교사 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그녀가 봉직했던 학교의 교장은 유대인이었다. 그녀는 그 교장을 나치에 밀고하여 그녀 자신의 출세에 이용했다. 그녀는 나치 여성동맹(NS-Frauenbund)과 나치 교원동맹에도 가입했다. 무리요 교수는 루이제 린저가 보통의 나치 추종자들을 넘어서는 나치에 ‘꽉 엮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루이제 린저는 젊은 나치 기간요원으로 나치와 함께 성장하며 출세했던 것이다.      유대인 교장을 고발한 지 1년 만에 그녀는 나치 청년여성 조직인 ‘독일소녀동맹(Nazi-Organization·Bund Deutscher Mädchen)’의 한 교육소 책임자가 되었다. 젊은 나이에 이미 나치의 주요 인물로 출세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후 악명 높은 나치 선전상 괴벨스의 영화부서인 UFA가 제작하는 선전영화의 대본작가로 활약하면서 6000라이히마르크의 보수를 받고는 ‘베를린 영화작가’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옥중기’ 등은 모두 자신을 미화하기 위한 거짓 이야기이며, 린저의 뇌 속에서 창조된 허구의 ‘소설’이었다. 그녀의 자서전 ‘늑대를 껴안다’(Den Wolf umarmen, 1981)도 사실에 입각한 기술이 아니고 전설 만들기였다. 나치 시절 그녀가 출판금지 조치를 당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나치 패망 후 그는 히틀러에 저항해 목숨을 걸었던 저항 문학가로 행세하며, 독일의 ‘잔 다르크’가 되길 원했으나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인 소설가 클라우스 헤르만(Klaus Herrmann)이 남긴 유품(베를린 국립도서관 소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고가 남아 있다.       ▲ 조선화보사가 일본어로 펴낸 ‘빛나는 생애’ 379쪽에 나오는 사진. 김일성(왼쪽)이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를 만나는 모습.    反파시스트 저항작가로 미화      린저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헤르만은 나치를 추종하는 그녀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주기 위해 당시의 정세를 설명하는 가운데 히틀러를 지원하는 대기업가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지원 정치자금의 규모 등을 말해주었다. 린저는 2년 후 친구에게 이 말을 다시 전해주었고 그 친구의 남편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린저를 나치 게슈타포에 고발했다. 린저는 조사를 받기 위해 미결수 구치소에 구금되었다. 이 고발 사건으로 그녀가 국방력 와해 공작(Wehrkraftzersetzung) 혐의로 1944년 10월에서 12월 성탄절 전까지 구속 조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루이제 린저는 친구에게 “전쟁은 곧 끝날 것이며, 러시아 병정들도 그렇게 사악하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 러시아 병정들과 적당히 지내는 것도 괜찮다”는 내용의 말을 했다고 고발되었으나 나치 소추 당국은 루이제 린저의 변명을 듣고 황당한 밀고 내용이라 판단했다. 그녀는 미결수 구치소 당국으로부터 휴가를 받고 출옥한 후 더 이상 구속되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로 드러났다. 그녀는 ‘옥중기’와 자서전 ‘늑대를 껴안다’에서 1944년 10월 국가반역죄(Hochverrat)로 구속된 후 악명 높은 나치 민족재판소의 프라이슬러(Freisler) 소장에 의해 증거를 근거로 사형에 선고될 처지에 놓였었다고 주장했다. “모두 석방되길 기다렸다. 저녁 늦게 변호사가 찾아왔고 나를 불러냈다. 나는 그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허사였다. 변호사는 ‘(석방) 청원이 거부되었어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감방에서 성탄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변호사를 선임한 적도 없고 구치소에서 성탄절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국가반역죄로 ‘기소’되기는커녕 재판도 받지 않았다. 악명 높은 나치 프라이슬러는 이미 사망하고 당시에 이 세상에 없었다. 어떻게 국가반역죄로 재판받았다고 주장하는 그녀가 구치소 당국으로부터 휴가를 받아 1944년 12월 21일 석방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데도 궁색했다. 그러나 그녀는 1945년 4월 석방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자신을 반(反)파시스트 여성 저항문인으로 미화하였다. 히틀러 나치에 협력했다가 전쟁에서 살아남은 모든 독일 사람들은 새로운 서독 민주주의를 재건하는 가운데 여성들 중에서 반나치 깃발의 명예를 지킨 ‘잔 다르크’가 나타나주길 갈망하는 분위기가 지배했던 시절이었다. 이때 루이제 린저는 바로 ‘생의 한가운데’라는 작품을 발표해 자신이 반나치 저항작가이며 사형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양심이라고 미화하기 시작하면서 첫 거짓의 단추를 채웠던 것이다.      1945년 패전과 함께 나치 선전 활동을 했던 그녀는 가톨릭교회에 똬리를 틀었다. 가톨릭 교인으로 신심이 깊어 나치에 협력하지 않았던 아데나워가 경제 기적과 새로운 서독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어가던 시대였다. 그녀는 가톨릭 좌파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는 순진한 평화주의자들도 있었고, 교회에서는 과거를 따진다거나 신상조사도 하지 않는다. 루이제 린저는 기자 자격으로 로마에서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취재하여 이에 관한 기사도 썼다. 변신에 능한 그녀는 가톨릭교회 조직 안에 머물면서도 열정적인 가톨릭 비판가란 명성을 얻었다. 1968년 반권위주의 좌파 학생운동이 서독으로 번져나갔다. 극좌 테러단체인 적군파(赤軍派)가 대량소비사회를 극단적 폭력 혁명으로 극복하겠다는 이유로 프랑크푸르트 상업지구의 한 백화점에 방화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주범인 안드레아스 바아더(Andreas Baader)와 구드룬 에슬린(Gudrun Esslin)이 체포돼 슈투트가르트의 슈탐하임 교도소에 갇혔다. 이 사건은 루이제 린저가 돌출행동으로 자기 마케팅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녀는 이 극좌 테러범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는 공개편지를 발표해 서독 사회를 놀라게 했다. 그 후 수감돼 있던 두 방화범은 다른 테러범들과 함께 형무소에서 밀반입했던 권총으로 자살하여 서독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다.       ▲ 호세 무리요의 전기 ‘루이제 린저: 모순의 삶’ 표지.    히틀러에 이어 김일성 찬가      극좌 테러리스트를 옹호하는 ‘양심적 지식인’ 이미지를 남긴 후 루이제 린저는 1972년 서독 하원 총선에서는 갑자기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를 지지하는 문화예술인으로 변신했다. 정치적 ‘정조’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변하지 않는 일관성이 있다면, 그것은 깊은 무의식의 심연에 자리 잡고 있는 강력한 독재자에 대한 ‘정신적 위탁과 열광’이었다. 그런 점에서 히틀러는 루이제 린저의 종교이며 우상이었다. 그러한 ‘히틀러’가 사라진 후 방황하던 그녀가 새로운 대상으로 찾아낸 인물이 북한의 김일성과 이란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였다. 그녀는 현대 개발국가의 면모를 찾아가던 이란을 신정(神政)국가로 바꾸며 피 맛을 즐겼던 호메이니를 열렬히 숭배·찬양했다. 그녀는 호메이니를 가리켜 “제3세계 국가들의 빛나는 전범(典範)”이라고 했다.      독일의 저명 작가들 중 북한의 김일성을 몇 번이나 친견하며 국빈(國賓) 대우를 받았던 작가는 루이제 린저뿐이다. 독일은 친북(親北)작가가 나올 수 있는 토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윤이상은 절친(切親) 관계에 있었다. 윤이상의 음악은 별건으로 하고, 종북·친북이란 공통분모가 있는데 왜 그렇지 않았겠는가. 같은 국빈 격으로 김일성의 환대를 받은 윤이상과 얼마나 친했던가는 그녀가 편찬한 책 ‘상처받은 용, 윤이상(Der verwundene Drache, Isang Yun)’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에서도 독문학자 전혜린이 번역한 ‘생의 한가운데’가 1960년대에 출판되었고, 1980년대 386세대 중심으로 루이제 린저의 책은 널리 알려져 있다. 좌파 운동권 인사들은 북한을 영국 작가 제임스 힐턴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히말라야의 이상향 샹그릴라와 같다고 믿었는데, 여기에 루이제 린저의 역할이 컸다.      루이제 린저는 1980년부터 10차례나 북한의 초대를 받았다. 그녀는 ‘북한 기행문’(1981)에서 북한 김씨 절대왕조를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위대한 지도자’ ‘범죄 자체가 없고 가난이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에는 형무소가 없다’ ‘교화소는 쇠창살이 없고, 교육생들은 언제든 자기가 원하는 시점에 교화소에서 출소할 수 있다’ 등 완전한 ‘김일성 용비어천가’를 썼다. 1986년 평양 방문 때에는 김일성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북한에는 교회의 탑이 없고 교회 종소리가 없어서 좀 섭섭했다는 말을 남겼다. 행간(行間)을 읽으면, 그녀가 믿는다고 말했던 가톨릭교회와 종교는 말살되었다는 말이 되겠다.      루이제 린저가 ‘김일성 왕국’을 찬양한 기록 중에는 황당한 부분이 많다. “일본인 호텔 투숙객이 방문에 문을 잠글 수 없다고 불평하자 북한 호텔 지배인이 ‘공화국에 대한 모욕’이라고 하면서 북조선은 전국적으로 자물쇠도 열쇠도 필요 없는 나라라고 했다.” “도둑도 없고 강간도 없다.” “약품도 (필요) 없다. 조선 의학은 예방으로 해결하므로 페니실린 등 항생제도 (필요) 없다.”      “감기도 결핵도 좋은 영양과 예비검진 덕택에 전멸했다(ausgerottet). 암도 조기 발견되어 없다.” “신체 장애아에 대해 묻자 북한 의사는 놀란 표정을 짓고서 쳐다보며 ‘세상에 어디 그런 것이 있는가’라고 답했다.” “나(루이제 린저)는 한 명의 장애인, 불구자( Krüppel)도 보지 못했다.” ‘루이제 린저’가 방문했던 평양 등에서 장애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가 김일성과 찍은 다정한 모습의 사진은 북한의 지상낙원 이미지와 정통성을 세계에 선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루이제 린저가 인간신(人間神)이 지배하는 북한에 체재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문화계의 여신으로 대접을 받았다. 그녀를 그렇게 인정해주는 나라는 북한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김일성 왕국에 최대의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과 린저의 ‘오고 가는’ 상호주의적 교환이었다.      루이제 린저의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영향력에 반비례하여 그녀에 대한 문단의 평가는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독일의 ‘문학 교황’으로 칭해지는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Marcel Reich-Ranicki)는 “루이제 린저의 문학성은 평가할 가치가 없으며, 그녀의 작품은 대중영합적인 저속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큰 영향이 있는 대표적 주간지 ‘슈피겔’은 그녀의 작품이 “나이브하고 재능도 없으며 어쩐지 쓴웃음을 자아내는 것(naiv, untalentiert und ein wenig lächerlichl)”이라고 평했다.

김문수

  청와대 비서관의 주류가 주사파 운동권 출신으로 채워졌습니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63명 비서관 중 22명이 운동권 출신입니다.     임종석 비서실장과 일하는 비서관급 이상 30명 가운데서 17명(57%)이 운동권 출신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첫째, 김일성주의자로서 반미친북 사상을 가지고 활동하다, 감옥까지 살고 나와서도 여전히 반미친북 활동을 계속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임종석은 김일성주의자로 3년 6개월간 감옥생활까지 했습니다. 감옥생활을 한 이후에도 김일성주의를 공식적으로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임종석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국회의원을 하면서도, 반미친북활동에 주력했습니다.    임종석 국회의원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발의하고, 미국 의회가 북한인권법 제정을 하는데 반대 공한을 보내고, 김대중 정부의 대북비밀송금에 대한 특검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북한 핵실험의 원인이 미국의 대북금융제재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임종석 국회의원은 2005년부터는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이사장으로서 KBS, MBC, SBS로부터 북한영상 사용료를 22억 5천만 원을 받아 북한에 7억 9천만 원을 송금하였고, 14억 6천만 원은 법원에 공탁되어 송금 대기중입니다.    둘째, 사람의 사상은 바뀌기 아주 힘듭니다. 담배 끊기보다 더 힘듭니다. 고문을 당하고, 감옥을 다녀오고, 생활이 어려워도 사상을 바꾸지 않고 반미친북활동을 계속합니다. 연옥의 고통을 거쳐서도 잘 바뀌지 않는 것이 사상입니다.    셋째, 이들이 주체사상을 배운 것은 전대협이나 한총련 등 대학생 조직이나 비밀지하조직을 통해서, 단파 라디오로 북한의 대남혁명방송을 들으며 조직적 사상학습을 통해 불법적으로 배웠습니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건국과 헌법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파괴하는 불법사상이기 때문에 감옥에 다녀 왔습니다.    넷째, 이들은 혁명적 열정과 의리가 강하기 때문에 두 명만 모여도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청와대에 22명이나 들어가 있으니, 엄청난 일입니다.    다섯째, 이들은 사상통일이 되어 있고, 과거 운동권 경험을 함께 했기 때문에, 청와대 내에서 서로 긴밀하게 협력할 뿐만 아니라, 바깥의 정당이나 시민단체와도 동지적 협력을 합니다. 대학 운동권 혁명동지들이 법조계, 언론계, 학계, 공무원, 민노총, 전교조, 문화예술계, 영화계, 종교계, 경제계, 농민운동, 환경운동, 생협운동, 지역운동으로 민들레 꽃씨처럼 사방으로 흩날려서, 뿌리 박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번 동지는 영원한 동지입니다.” 그리고 “혁명은 영원합니다.”

엄상익

 고시를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 들어갔을 때였다. 검사장 출신 교수가 강당에서 연수생을 앞에서 이렇게 자기 자랑을 했다.     “내가 쓴 기소장 하나로 한 그룹이 넘어갔어요.”    그의 얼굴에는 누구든지 자기가 노리면 감옥에 잡아 쳐 넣을 수 있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연수생들이 그 힘에 감탄을 했다. 판사들은 자신들의 도장 하나에 사람들이 구속이 되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다는데 은근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당시 판사출신 연수원장은 자신의 결정으로 김영삼 대표의 당권이 정지되게 한 사람이었다. 판검사가 되는 것은 그 힘을 아니 완장으로 표현되는 원색적인 권력을 가지고 싶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법대에 들어가 십년 동안 읽고 또 읽은 헌법과 법률 속의 판검사의 위치는 전혀 달랐다. 인권옹호 기관으로 또 헌법상 기본권의 최후의 보루로 국민들이 억울하게 인신구속이 되지 않게 하는 천사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그게 법의 정신이라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구속되어 여섯 달을 넘겼다. 법원은 재판을 더 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수사기록에 나와 있는 여러 혐의사실 중에서 하나를 명분삼아 새로운 구속영장을 만들었다. 앞으로 여섯 달 동안 더 구속시킬 수 있다. 그때도 아직 끝내기에 충분하지 않으면 수사기록 중에서 혐의 하나를 더 골라 또 구속영장을 만들면 또 여섯 달 구속하고 그렇게 한없이 구속시킬 수 있는 것일까? 40년 법의 밥을 먹고 그중 30년을 변호사를 해 오면서 그런 특이한 경우를 처음 본 것 같다. 구속사건의 경우 어떤 어려운 사건이라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재판은 여섯 달 만에 끝이 났다. 법에 그렇게 하라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몇십 년 전부터 권력의 핵심인물이나 대통령이 법정에 서면 담당 법관들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흔들리는 걸 목격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죽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였다.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에 의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가 체포되고 군부 내부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시민의 저항에 불이 붙어 타오르고 있었다. 김재규는 자신의 행동이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한 거사임을 법정에서 주장하고 그 말이 설득력을 가지고 퍼지고 있을 때였다. 구명운동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수도군단의 법무장교였던 나는 어느 날 육군본부 군사법원에 갔다가 법정 앞에서 그곳에서 몇 십 년 근무해온 고참 준위와 마주쳤었다. 법무병과의 원로로 우리 같은 초급장교들한테 잘 대해주던 형님 같은 존재였다. 그가 나를 보더니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내뱉었다.    “이게 재판인 거야 개판인 거야? 법정 뒤에 모니터가 연결된 방에서 권력을 가진 놈이 지시를 쪽지에 적으면 나는 그걸 법정에 전달하는 심부름을 하고 있어. 법정 위에 군판사로 앉은 저 놈은 장군이 될 욕심에 시키는 대로 다 하는 꼭두각시야. 한심한 놈이지. 여기 분위기가 그래.”    김재규의 운명은 이미 모든 게 예약이 된 것 같았다. 그 무렵 학생소요가 격화되고 있었다. 시위군중의 힘이 경찰력이라는 둑을 넘어서고 있었다. 시국의 역류에 당황한 신군부의 핵심참모들은 김재규에 대한 재판을 빨리 끝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졸속재판으로 사형이 선고되고 사건은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신군부의 핵심이 담당 대법관을 찾아갔다. 그는 재판을 빨리 확정지어주면 그 공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김재규에 대한 사형이 확정됐다. 나보다 한 기(期) 위의 법무장교가 김재규의 사형집행을 지휘했다. 그는 김재규의 마지막 모습을 사석에서 후배장교인 우리들에게 이렇게 전했다.    “마지막에 손에 염주를 들고 있는데 사시나무같이 손을 벌벌 떨고 있더라구. 이미 죽기 전에 혼이 빠져 있었어.”    그 후 전두환 정권이 서고 대법원에서 김재규에 대해 내란목적은 아니라고 반대의견을 냈던 다섯 명의 대법관은 모두 쫓겨났다. 반대로 협조했던 대법관은 사법부의 최고 수장이 됐다. 이 얘기는 후일 내가 담당 변호사가 되어 전두환의 심복핵심인 인물로부터 직접 들었던 내용이다.     인간의 운명은 돌고 도는 것 같다. 그 후 어느 날 신문에서 사법부의 수장으로 성공한 그 분이 한강다리에서 떨어져 자살을 했다는 기사를 봤다. 언론은 자살의 동기를 우울증으로 추정했다. 군사법원에서 꼭두각시를 했던 심판관들도 그 끝이 반드시 좋지만은 않은 걸 목격했다. 장군들이 되고 국회의원 공천을 받고 승승장구해도 결국은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걸 봤기 때문이다. 모든 건 인과응보의 법칙이 적용되나 보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자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사형에 처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법적인 근거가 약하다는 의견들이 있었다. 김영삼 정권은 법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고 해서 특별법들을 만들었다. 그곳에 진정한 법치주의가 있는지 의문이었다. 하루에 여덟 시간씩 매주 재판을 하는 강행군이었다. 사형선고가 예정되어 있다는 소리가 들리고 김영삼 대통령의 무서운 성격상 죽일 것이라는 말도 돌았다. 전두환 측은 죽을까봐 떨고 있다는 얘기도 들렸다.     나는 하루 여덟 시간씩 강행군 하는 그 재판을 서른 번 동안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방청석 앞에서 다 봤다. 재판인지 죽은 권력에 대한 정치보복인지 서민인 나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권력의 핵심에서 담당 재판장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믿을 만한 분의 얘기였다.     법대 위에 올려진 정치를 보는 재판장의 내면에는 무엇이 또아리를 틀고 있을까 궁금했다. 헌법과 법률 그리고 양심일까. 아니면 오물 같은 다른 요소가 섞이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됐다. 권력의 요구에 따르면 그 댓가는 달콤할지도 모른다. 전두환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담당법관은 그 후 법관으로서 최고 명예로운 지위까지 올라갔다.     대통령들의 운명이 기구한 대한민국이었다. 법정에 서기 싫은 개결한 성격의 노무현 대통령은 이른 새벽 바위산에서 뛰어 내려 죽음을 택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감옥에서 정치재판을 거부하고 있다. 더 이상 법관이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고 있지 않다고 본 것이다. 변호사들도 일제히 재판을 거부했다. 국민들이 사법부를 주시하고 있다.     법관들이 시대의 광풍에 풀처럼 휘어지지 말고 거목처럼 우뚝 서서 맞서야 할 시점이다. 나는 직접 현장에서 당사자로 있으면서 목격했다. 미국산 쇠고기만 먹으면 광우병이 걸린다는 선전선동을 그리고 영국 도축장의 광경을 미국의 것으로 속인 자들의 행위를 담당법관은 허위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나는 껍질이 덮인 그의 눈을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보아도 보지 못했다.     친일반민족행위를 처벌하자는 광풍이 불 때 시류에 영합하는 판사들이 순간의 고민조차 없이 위원회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도 많이 봤다. 들어도 듣지 못하는 존재들이었다. 시대의 광풍이나 정치권력 앞에서 그들은 시대의 닻이 되지 못하고 돛이 되어 버렸다. 이제 그 돛들은 접고 닻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주동식

2017년 11월 15일 오전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조선DB국민의당이 현재 처해있는 혼란은 결국 당 정체성의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   창당 당시부터 사실 이 문제는 잠복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안철수로 대표되는 정치적 가치와 호남 국회의원들로 대표되는 정치적 가치의 갈등이 통일점을 찾지 못하고 진통을 겪는 것이다.   하지만 당이란 것은 정체성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고 원내 제3당이자 교섭단체 구성 요건을 훌쩍 넘긴 정당이 정체성이 없을 수는 없다. 다만 구성원들이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국민의당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게 헷갈린다면 간단히 말해서 이 정당을 존립하게 만들어준 정치적 계기나 이벤트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면 된다.   두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지난해 4월 13일 치러진 20대 총선이다. 그 선거를 통해서 국민의당은 호남 의석을 휩쓸고 나아가 전국적으로 고른 득표를 얻었다. 정당 득표율 2위라는, 신생정당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성적표였다.   그렇다면 국민의당의 정체성은 지난해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표를 던져준 그 요구에 근거해야 한다. 그 요구는 무엇인가?   제3세력이라고 말해도 좋고, 다당제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형식이지, 실제 내용이 아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말해야 한다.   그것은 야권을 장악하고 있는 친노좌파 세력에 대한 거부를 핵심으로, 새누리당으로 대표되는 보수우파 정권에 대한 불만을 부차적인 요소로 하는 정치적 요구였다. 단적으로 호남의 득표가 국민의당의 출발점이라는 사실만 봐도 이 점은 분명해진다.   이 지점에서 국민의당 호남 국회의원들의 혼란이 시작된다. 무작정 호남 유권자의 표심만 내세울뿐, '어떤' 호남 민심인지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한다. 또 하나, 이들의 주장은 20대 총선 이전의 호남 즉, 친노좌파 vs 중도우파로 분열되기 이전 단일한 정체성의 호남만을 계속 얘기하고 있다.   20대 총선 이전까지 호남의 표심은 어떻게든 단일대오(?)를 유지했다. 군부독재와 영남패권에 대한 저항의 필요성에서 기인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야당과 친노좌파에 불만이 있어도 참아야 했다. 우선 거대 새누리당과 영남패권을 견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노좌파의 무지와 무능력, 부도덕, 호남에 대한 패악질은 호남의 분열을 부추겼다. 호남이 친노좌파와 더 이상 같이 갈 수 없다고 결단한 것이다. 그 결단의 결과가 바로 20대 총선이요, 국민의당의 출발이다.   국민의당의 존립 기반은 호남이다. 하지만 그냥 호남이 아니라, 억지로 보기 싫어도 친노에게 표를 주었던 호남이 아니라 이제 친노에 대해서 'No'라고 선언한 호남이다. 호남이 분열 아니 분화를 시작한 것이다.   확실한 과학적 사실이 있다. 모든 발전은 분화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태아 세포를 보면 된다. 일단 시작한 세포 분열은 급속도로 진행된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메커니즘은 없다. 그냥 그 세포를 죽여버리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호남의 정치적 선택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호남의 정치적 선택이 무효화되고 뒤로 되돌려질 경우 그것은 호남 정치 자체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국민의당이 해야 하는 일은 명백하다. 정치적 분열을 시작한 호남에서, 둘로 갈린 호남에서 누구의 편을 들 것인지 분명히 선택하는 것이다. 과거의 관성에 따라 친노좌파의 손을 들어준 그 호남 유권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정치를 할 것인가, 아니면 거대 더민당에 갖고 있는 지분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신생 벤처나 마찬가지인 국민의당에 투자한, 새로운 호남 유권자의 선택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호남에서도 패배한 지난 대선의 결과는 국민의당이 자신들 앞에 놓인 그 정치적 과제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실천하지도 못하고 방기한 결과이다. 1년 이상의 천금 같은 시간을 그냥 속수무책 수수방관 허송세월한 것이다.   지난해 총선에서 호남의 선택은 상당히 뚜렷하게 갈라진 유권자 집단의 편향성을 보여준다. 즉, 더민당 친노좌파를 선택한 호남 유권자들은 주로 청년학생, 교수 등 지식인, 시민사회 단체, 언론 등 이른바 오피니언 리더 중심이었다. 반면 국민의당을 지지한 유권자들은 자영업자나 평범한 직장인 그리고 김대중과 함께 투쟁한 경험을 갖고 있는 민주화 세대였다고 본다. 칼로 자르듯 단순화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다.   그렇다면 총선에서 일시적으로 국민의당이 승리했다 해도 특별한 정치적 조직화와 선전선동, 이념투쟁이 없을 경우 호남 민심이 다시 친노좌파로 선회할 가능성이 높았다. 오피니언 리더란 말 그대로 여론을 주도할 능력을 가진 집단이기 때문이다.   특히 호남 유권자들은 정치적 경험과 훈련이 뛰어난 그룹이다. 그런 호남 유권자들을 상대로 특별한 이념, 사상적 접근 없이 설득하기는 어렵다.   국민의당은 지금이라도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호남에 뿌리를 두되, 명백하게 친노좌파를 거부한 그 유권자들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그 유권자들 다 돌아섰다고? 웃기지 마라. 국민의당과 안철수가 그렇게 삽질을 했어도 지난 대선에서 30%를 준 것이 호남이다. 최근의 안철수 지지도 역시 호남이 가장 높았다.   과학적 진실은 표면적 현상으로 덮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한번 시작된 분화는 결코 되돌릴 수 없다. 유기체도 그렇고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의 호남 유권자들을 의식하면서 낡은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국민의당 호남 정치인들은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안철수 측 역시 이런 당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 없이 높은 자리에 앉아 시간과 기회를 낭비하는 어리석은 행태를 벗어나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엄상익

▲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14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아세안 정상회담을 마친 뒤 기자들에게 순방 소감을 말하고 있다. / 뉴시스  몇 년 전 평택 항에서 아라비아반도로 가는 LNG선을 얻어 타고 바다로 나간 적이 있다. 선장은 배 한 척이 한 도시의 한 달분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고 했다. 아파트에 불과 물을 공급하고 공장을 돌리고 도로의 차를 움직이는 에너지는 모두 바닷길을 통해 오는 것이다.     동중국해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였다. 레이더에는 하얀 점들이 비늘같이 박혀 있었다. 고기를 잡으러 바다를 뒤덮은 중국 어선들이었다. 20만 톤의 가스운반선은 항로를 막고 있는 중국의 배들과 충돌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바닷길도 체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폭이 좁은 말래카 해협을 지날 때 선장과 선원들이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여기를 지날 때 가장 공포를 느낍니다. 섬들에 틀어박혀 있던 해적들이 나타나니까요. 어선같이 고기를 잡는 체 하며 저희 배에 접근해서 쇠사다리를 걸치고 갑자기 배로 침입하는 거예요. 몇 명의 선원들은 속수무책이죠. 총과 칼을 든 해적놈들한테 몽땅 털리는 겁니다. 해적들이 별놈이 다 있어요. 제대군인인지 몰라도 중국의 인민군복을 입은 놈들도 많아요. 선실을 뒤지면서 심지어 포르노가 들어있는 노트북까지 뺏어가지고 간다니까요. 해적 하면 소말리야 해적만 생각하는데 더 더러운 건 남중국해의 중국놈 해적입니다. 인도양을 건너 소말리아 앞바다 사우디까지 우리의 에너지 루트를 지켜주는 나라는 없어요. 항상 떨면서 다니는 게 우리 선원들입니다.”    해적들이 배를 나포하거나 선원을 인질로 데려갔을 때 그걸 구출하기 위해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달러를 내놓아야 하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그 일을 전담하는 영국의 보험회사가 상품을 만들어 재미를 보고 있다. 공해상에서 가스나 석유운반선은 덩치만 컸지 의외로 허술했다. 강도로부터 지켜주는 경찰이 없는 외딴 집이라고 할까.     중국이 남중국해에 군함을 보내 영향력을 높이면서 주변 국가들과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의 군함이 그곳의 에너지 루트를 차단하면 한국의 에너지선은 바로 동맥경화증에 걸릴 것이다. 중국이 남중국해의 에너지 루트에 영향력을 행사할 경우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댓가는 해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엄청 클지도 모른다. 그건 국가의 운명과도 관련된 것이다. 이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미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으로 가는 에너지루트를 차단했다. 그게 일본이 미국에 덤비게 된 원인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한 나라에 있어 에너지와 식량은 목숨이다. 예를 들어 동해안에 북한의 핵잠수함이 한 척이라도 버티고 있으면 곡물수송선이 들어오지 못할 수 있다. 바로 혼란이 온다. 다행히 미국이 남중국해에 함대를 파견해 석유루트를 보호해 왔다.     어제 조갑제TV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공동성명에 담긴 양국의 남중국해에서의 국제법을 준수하겠다는 취지의 내용해석을 들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미동맹을 이용해 한국의 에너지 루트의 안전을 약속받은 의미라고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큰 선물을 받은 것 같다. 역대 대통령과는 반대로 여기저기서 구설수에 오르고 천대만 받는 트럼프를 존중해 주고 잘 대접해 보냈는지 궁금하다. 일본의 아베는 벙커에서 발라당 나가자빠지는 망신을 당하면서도 정신없이 따라갔는데 말이다. 남들은 웃을지 모르지만 일본을 위해 모든 걸 내던지는 그의 헌신적인 모습으로도 내게는 보인다.

조갑제(趙甲濟)

▲ (좌) 짐바브웨를 38년째 통치하고 있는 로버트 무가베(93) 짐바브웨 대통령. (우)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사진출처=뉴시스] 2011년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은 반(反)정부 시위대에 포위된 리비아의 카다피를 지원하기 위해 제5여단 출신들을 용병(傭兵)으로 보냈다.       복무 중이거나 은퇴한 수백 명의 짐바브웨 군인들과 소수의 공군 조종사들은 전세기로 수도 하라레에서 리비아로 수송되어 트리폴리에서 활동중이던 코트디부아르, 차드, 모리타니아 출신의 아프리카 용병들과 합류(合流)했다.      1980년대 북한군으로부터 훈련을 받았던 제5여단은 짐바브웨 반군(反軍)을 진압하면서‘마타벨레랜드 대학살’사건을 일으켜 2만 명을 학살하였다.       무가베는 1980년대 초 김일성을 만나고 와선 숭배자가 되었고 김일성의 숫법을 자신의 철권(鐵拳)통치에 도입하였다. 차우세스쿠, 무바라크, 카다피도 김일성을 만난 뒤 사람이 달라졌다는 평을 듣는다. 독재자들은 자신보다 더 독재적인 자(者)를 만나면 그를 부러워하고 닮으려 한다. 히틀러는 스탈린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민주적 지도자는 독재자를 만나면 경멸감과 분노를 갖게 되지만 非민주적 지도자는 독재자 앞에서 작아진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김정일 앞에서 비굴하게 행동한 경우이다. 이는, 두 사람이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자였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무가베와 차우세스쿠는 김일성과(科)에 속하는 독재자들이었다. 그 무가베가 군사 쿠데타로 가택 연금 되었다고 한다. 최근 해임된 부통령이 지휘하였다는 이야기도 떠돈다. 1980년 김일성을 만나고 온 무가베는 사람이 달라졌다. 김일성 전집을 부하들에게 읽게 하고, 자신의 생일을 김일성 생일처럼 국경일로 만들었다. 큰 동상을 세우고, 반대자를 숙청, 고문, 세놰하는 것도 김일성 식으로 했다. 무가베는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북한군의 지원을 받았다. 북한군 약3500명이 짐바브웨에 기지를 두고, 앙골라, 모잠빅, 이디오피아의 독재정권을 지원하였다.      무가베는 김일성이 죽었을 때는 추도 위원회를 만들었다. 매년 김일성 추모 모임을 가진다. 2013년 무가베는 김정은에게 핵무기 제조에 쓰일 수도 있는 우라늄 옐로 케이크를 팔기도 하였다.     시리아의 아사드도 김일성을 만나고 온 뒤 전국에 석상을 건립하도록 하였다. 무가베, 아사드, 차우셰스쿠는 악령 김일성에게 영혼을 빼앗긴 독재자이다. 그리하여 나라를 망치고, 국민들을 고생시켰다. 한국에도 김일성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사람이 달라져 인생을 망친 이들이 있다.      아프리카에서 북한과 가장 친한 독재자 한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은 김정은의 손가락 하나를 자른 셈이다. 무가베는 김정일과 김정은의 독재 기간을 합친 것보다 더 긴 37년을 통치하였다. 그런 그가 간단하게 무너지는 것을 본 북한 지배층의 계산이 복잡해질 것이다.

김대현

“며칠 전 출장 준비로 바쁜 와중에 감사부서에서 연락이 왔다. 주민등록초본과 5년간 거주지 증명서 같은 서류를 제출하라는 내용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까 공공기관 채용비리 전수조사 차원이라고 했다. 모든 직원들을 상대로 ‘혹시나 있을지 모를’ 비리를 찾겠다고 이렇게 기관 전체를 들었다 놨다 해서야 되겠습니까.”      11월 초 공공기관에 종사하는 고위급 인사는 정부의 채용비리 전수조사에 대해 이런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직원들이 윗선에서 내려온 전수조사 준비에 연연하는 걸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정권이 바뀌면 한바탕 소동이 빚어지는 일이 반복되곤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 5년간 전체 공공기관에서 실시한 직원채용 과정을 모두 점검하겠다고 했다. 대상기관은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330개 공공기관과 지방 공기업 그리고 1089개 공직 유관단체를 포함한다. 이를 위해 공공기관 종사자는 관련 서류를 제출해야 하고 조사단의 기관 방문에 앞서 준비작업도 해야 한다.      이에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월 23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공공기관 채용비리는 우리 사회의 만연한 반칙과 특권의 상징으로 보인다. 전체 공공기관을 전수조사해서라도 채용비리의 진상을 철저하게 규명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공공기관의 직원채용 문제가 주목받게 된 것은 최근 불거진 강원랜드 채용 비리 사건 때문이다. 강원랜드는 2012~2013년에 총 518명의 교육생을 채용했는데 이 가운데 95%에 해당하는 493명이 정치인과 유력인사의 부정청탁으로 입사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줬다. 감사원이 검찰에 수사의뢰한 금감원 채용비리 사건도 결국 최흥식 금감원장의 공식사과까지 이어지며 파장을 낳았다.      정부는 채용비리를 찾아내기 위해 각 부처 또는 국무총리실 홈페이지를 통해 비위 제보를 받고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공공기관 문제점을 내부 고발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준 셈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현 정부가 채용비리를 명분으로 공공기관 물갈이에 나선 게 아니냐는 시각이 대두됐다. 익명의 공공기관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채용비리를 조사한답시고 제보와 투서를 받는다는데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다. 이런 방식은 직원들을 서로 이간질시키기 때문에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 이 조사를 통해 보수성향이 강하거나 지난 정부에서 잘나갔던 인사들을 걸러내려는 게 아닌가 의심된다.” 공공기관 가운데 현 정부 들어 입김이 강해진 고용노동부 산하기관과 다른 부처 공공기관은 이번 전수조사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고용부가 아닌 부처의 공공기관에서는 “정권 바뀌고 나서 숨 쉬는 것도 조심스럽다”고 하소연한다.      공공기관은 사실 연중 감사에 노출되어 있다. 내부 감사와 감사원 감사, 국회 국정감사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임직원의 경우 청와대와 국무총리실 그리고 사정기관의 상시 감찰 대상이다. 이처럼 겹겹이 둘러싸인 공공기관의 감시 시스템을 제쳐두고 다시 전수조사라는 ‘전시성’ 수단을 꺼내든 정부의 목적에 의구심이 제기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보수진영 일각에서는 문 대통령이 채용비리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배경 중 하나로 지난 대선 기간 불거진 아들 문준용씨의 고용정보원 취업특혜 의혹을 손꼽기도 한다. 문 대통령이 아들 관련 사안 때문에 채용비리 문제에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게 아니냐는 시각이다. 고용정보원은 고용노동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준용씨의 특혜취업 의혹 고소·고발 사건은 검찰에서 조사가 진행 중에 있다. 고용노동부 장관을 지낸 한 인사는 “디자인을 전공한 유력인사의 자제가 어느 날 고용정보원이라는 낯선 기관에 원서를 내고 채용된다는 건 (내가 보기에) 일상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조성관

1980년대 초반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대체로 전두환 정권에 깊은 반감이 있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간접적으로 경험했고 친구들이 강제징집당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전두환 정권에 적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리영희의 책과 대자보의 영향으로 ‘매판자본’ 운운하며 한국의 미래를 어둡게 전망했다. 사회에 진출한 이들이 넥타이 차림으로 거리로 뛰쳐나가 스크럼을 짠 게 1987년 6월항쟁이었다. 이른바 386세대다. 나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사회에 나와서도 나는 한동안 민주화 진영에 심정적 지지를 보냈다. 산업화 세력을 대표하는 박정희를 새롭게 볼 안목과 식견이 없었던 탓이다. 무엇보다 국가발전 단계에서 산업화가 갖는 엄중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 현대사를 보는 안목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이룬 계기는 1994년의 캐나다 연수였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연수특파원 자격으로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자유롭게 어울렸다. 캐나다는 인종의 모자이크로 불린다. 그중 토론토는 150개 인종이 모여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살아간다. 일본·중국·대만·독일 출신 등을 제외하고 기억나는 대로 언급하면 이렇다. 베트남, 필리핀, 스리랑카, 펀자브, 이란, 아프가니스탄(이상 아시아), 베냉, 나이지리아(이상 아프리카), 브라질, 가이아나, 자메이카(이상 남미), 터키, 그리스, 아일랜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이상 유럽).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외국에서 보는 한국과, 한국에서 보는 한국의 간극이 크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조국이 가난하고 정치가 불안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한국을 부러워했다. 그들은 한국이 88서울올림픽을 개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이들을 통해 우리가 겪은 전란·혁명·쿠데타·독재가 결코 한국만 겪어온 것이 아닌, 후진국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에 눈을 떴다. 2차대전 후 독립한 국가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과정을 밟아가고 있었다. 문제는 1990년대 들어서도 이들 국가들은 여전히 그 악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은? 1961년 1인당 GNP 82달러이던 세계 최빈국이 박정희 시대 18년을 거치면서 전혀 다른 국가로 태어났다.      한동안 언론에서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을 등가(等價)로 놓고 평가하곤 했다. 나도 이에 동의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생각에 변화가 일어났다. 경제적 토대 위에서만 민주정치도 문화예술도 꽃을 피운다는 이치를 터득했다. 먹고살기 급급하면 정치도, 복지도, 인권도, 예술도 다 허망한 이야기다. 1960년대 아시아의 부국이었던 필리핀과 미얀마를 보라. 역시 1960년대 강대국이었던 아르헨티나는 지금 어떤가.      대학 대신 사회에 나가 현실과 부닥친 사람들은 일찍부터 박정희를 평가했다. 또 대기업에 들어가 세계를 상대로 장사를 한 사람들은 더 일찍 박정희를 달리 봤다. 좋은 대학을 다녔다는, 책 좀 읽었다는, 소위 먹물들이 박정희 평가에 가장 인색했다. 유신 시절인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지만 그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다. 당시 야당 인사들 중에 중화학공업이 왜 중요한지를 알았던 사람은 몇이나 될까.      박정희와 이병철과 정주영이 동시대에 살았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축복이다. 마오쩌둥이 극좌사회주의운동인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대륙을 혼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을 때 박정희는 정주영·이병철과 손을 잡고 경제개발계획을 하나씩 실천해나갔다.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커버스토리로 올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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