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연

귀순병 당시 상황 재현 그래픽. 사진=TV조선 영상 캡처 판문점 JSA(공동경비구역)을 통해 북측에 있던 경계병이 남측으로 탈북했다. 이 과정에서 북측이 남을 향해 달아나는 군인에게 총질을 했다. 여러 보도를 통해 북측은 약 40여발을 발사했고, 이 중 약 4~5발 가량이 탈북 군인의 몸에 맞은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북한 귀순병사는 국내에서 치료 중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설명하는 국방부와 언론의 내용을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여럿 나온다. 이번 사건은 1976년 도끼만행사건 이후 공동경비구역에서 벌어진 사상 초유의 무력도발사건이자 총기가 사용된 최초의 사건이다. 특히 남북한 모두 비무장 상태로 있어야 하는 공동구역 내에서 북한이 무려 40여발의 총질을 한 것이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권총뿐 아니라, AK-47과 같은 돌격소총까지도 북한은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즉 이것은 북한측의 단순 무장을 넘어선 중무장을 의미한다. 앞서 언급한 도끼만행사건도 그 사건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북한측이 미군(UN)과 작업에 참여한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총기가 없는 비무장상태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미군에게 위협을 가했다. 미군이 가지치기를 지속하자 북한측은 현장에서 가지치기에 사용하던 도끼로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했다. 살인에 사용된 무기가 도끼인 점은 총기가 허용되지 않는 공동경비구역의 상황을 대변해준다. 도끼만행 사건 직후 해당 내용을 전달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한 말, “미친 개(북한)는 몽둥이가 약이다. 내 철모와 군화를 가져오라”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당시 북한의 행위에 대해 미군과 우리군은 즉각 데프콘 3를 발동하고 북한의 행동을 규탄했다. 이후 한국과 미군은 폴 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에 돌입, 미국 전략무기인 F-111과 F-4 전폭기, B-52폭격기가 한반도로 전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미군의 작전을 도와 우리 공군의 F-5와 F-4를 출격시켜 미군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를 엄호해줬다. 이후 북한측은 사건의 심각성을 깨닫고, 김일성이 직접 도끼만행사건에 대한 유감 성명을 발표한 것으로 폴 버니언 작전은 일단락됐다.   이번 사건이 북한 병사가 귀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앞선 도끼만행사건처럼 직접적인 위해가 없다는 점을 두고 여론의 해석이 분분하다. 일반 여론에서 나오는 주장을 종합하면 크게 5가지다. 1. 북한측이 발사한 총알은 남측 경계선을 넘어왔나. 2. 북한측이 남북한 경계선을 넘었나. 3. 북한측이 직접 우리측을 공격할 의도가 있었나. 4. 우리측은 귀순병의 탈출과정을 파악하고 있었나. 5. 정부의 대응 방안   첫째, 북한측의 총알이 남측 경계선을 넘어왔나? 북한은 무조건 남측향해서도 발포하라는 지침 있어 귀순병사는 탈출과정에서 지프차량을 타고 남측경계선 지역으로 달려왔다. 달려오다가 경계선을 불과 10미터 남짓 남겨두고 차량의 바퀴가 배수로에 빠졌다. 즉 차량으로 탈출하려다가 마지막에 차량이 더 이상 달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에 귀순병은 차에서 내려 남측을 향해 달렸고, 총을 맞고 경계선을 지나 남측내 50미터 지점에서 쓰려졌다. 남측 방향으로 달린 병사의 후미에서 총을 발사했기 때문에 총알의 방향도 귀순병과 같은 남쪽이다. 정황상 총알이 남측으로, 또 남측으로 넘어왔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또한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이 한 종편방송에서 귀순병 관련 내용을 설명하는 중 “북한측 경계병들에게는 남쪽을 향해 도망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해당 사람이 남측을 넘어가더라도 반드시 사살하라”는 지침이 하달되어 있다고 했다. 안 소장은 과거 남북이 대치하는 휴전선에서 근무하다 탈북한 인물이다. 즉 이 말은 북한이 남측을 향해 총을 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뿐만 아니라, 이 귀순병사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우리측 군인 2명정도가 낮은 포복으로 접근하여, 귀순병을 구출했다고 했다. 포복으로 다가갔다는 사실 자체가 남측 진영에 대한 사격이 있었음을 드러내는 방증이다. 북한이 남측을 향해 총질을 해댄 것은 북한의 여러 과거 도발과 마찬가지로 남측 영토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자 도발이다. 특히 유엔사 관할지역에서 남측을 향한 총질은 한국은 물론 미국을 포함한 유엔의 국제사회에 대한 도발이기도 하다.   둘째, 북한군이 남측 경계선을 넘었나? 영상 확인한 군 내부자의 증언 귀순병 사건이 있은 직후 국방부는 관련 CCTV 영상과 TOD 열감지장비로 촬영한 영상 등을 곧장 공개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영상공개를 연기하겠다고 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영상에서 북한군이 우리 경계선을 넘지 않았다면 굳이 국방부가 유엔사를 설득하면서까지 영상을 연기할 이유가 없다”며 공개연기 결정에 대해 국방부를 질타했다. 귀순병 영상을 두고 KBS가 해당 영상을 직접 확인했다는 군 내부자를 통해 영상안의 내용을 말하기도 했다.   해당 군 내부자에 따르면, “북한 경계병이 귀순병을 따라오면서 사격을 하는데 집중을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명이 추격에 몰두한 나머지 우리측 경계선을 넘어까지 따라 들어왔고, 이후 자신이 경계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고는 놀라서 다시 돌아갔다”고 증언했다. 군 내부자의 말대로라면, 영상 안에서 북한군이 우리측 진영으로 넘어왔다는 것이다. 이 부분 때문에 국방부가 영상 공개를 미룬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종합하면 북측이 발포한 총알뿐 아니라 북한군이 물리적으로 우리측 진영을 넘어오기까지 했기때문에 북한의 행동은 분명 정전협정 위반이며, 한국에 대한 직접적인 도발로 간주된다.    귀순병 상황 그래픽. 사진=채널A 영상 캡처 셋째, 북한이 우리군을 공격할 의도가 있었나? 구출(救出)과 포복의 의미도 모르는 국방부   언론에서 이 부분을 언급하면서, 북한이 남측으로 총질을 했어도 우리군을 조준할 의도는 없었다며 북을 두둔하고 있다. 이 질문은 질문부터가 그 의미가 잘못됐다. 남측을 넘어 총알을 발사한 마당에 북한이 우리군을 공격할 의도를 따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만약 이 논리대로라면, 연평도 포격도발을 한 북한이 포를 연평도를 향해 쏘았어도, 우리군을 공격할 의도는 없었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도 성립되기때문이다.   이는 마치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대를 향해 당신이 내 목숨을 위협해도 당신 마음은 안 그렇지 않냐고 묻는 것과 다름없다. 또한 북한이 쏜 수십발의 총알이 날아오는 동안 총을 발포한 북한군을 일일이 찾아가 “지금 누구한테 쏘는 거냐? 설마 지금 우리군을 보고 쏘는 것은 아니지?”라고 묻는 꼴이다. 빗발치는 총알의 발사 방향과 발사한 사람의 마음을 읽고 대응하는 군은 전세계 어디에도 없다.   휴전상태에서는 실수로 발포한 총성 한발에도 즉각 공격태세에 돌입하는 것이 군이다. 본능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군이다. 그런데 지금 북한의 심정과 의도를 묻는 태도는 안일한 우리 군의 대비태세를 대변해 준다. 그리고 이미 우리측 진영으로 넘어온 귀순병을 포복으로 다가가서 구출했다는 상황 자체에서부터 우리 군은 앞선 40여발의 총알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한 총알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포복으로 다가간 것 자체가 군으로서 부끄러운 것이다. 우리 진영에 대한 확고한 대비태세와 완벽한 임전무퇴(臨戰無退) 정신을 새기고 있는 군의 태도가 아니다. 우리 땅에서 우리 땅의 안보를 최전방에서 지키는 우리 군이 귀순병을 포복으로 구출한 것은 여론의 질타를 받을 일이다. 이 말은 곧 귀순병이 굳이 목숨을 걸고 경계선을 넘을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해당 귀순병이 북측 땅에 있을때와 남측 땅에 있을때와 다른 것이 없기때문이다. 적진에 쓰러진 우리 군을 구하러 갈 때 사용하는 것이 포복이다. 그런데 현재 언론에서는 오히려 우리군이 잘 구조했다는 칭찬을 하고 있으며, 누가 먼저 구출했냐에만 왈가왈부하고 있다. “구출”이라는 표현조차 부끄럽다. 제대로 된 조치였다면, 우리군도 총기로 무장하고 일부에서는 혹시모를 추가교전에 대비해 경계엄호를 하고, 걸어가서 우리 진영에 쓰러진 귀순병을 부축해서 데려왔어야 한다.   구출(救出)이란 위험에 빠진 자를 위험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구출이란 표현을 함으로써 우리 군은 우리 진영에 대한 위험요소부터 제거하지 못했음을 입증한 셈이다. 우리 군 스스로도 우리군 진영에 대한 위험을 제거하지 못했고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군 스스로도 민망한 포복과 구출이 동원한 것이다. 이 말대로라면, 지금도 판문점에서 근무하는 우리 군인들은 언제든 날아올지 모를 북한군의 총알이 두려워 항시 포복으로 이동해야 한다. 이는 우리집 안방에서조차 강도의 침입이 두려워 두리번 거리는 꼴이다. 이번 상황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목격한 북한군 앞에 우리군은 고개를 들 수 없는 상태다.   넷째, 북한 귀순병의 탈출과정 알고 있었나? 관측 장애물 필히 제거한 군의 전통 이 부분에 대해 국방부가 발표한 내용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CCTV 영상과 관련하여 잘 관측되지 않는 지역이 있다는 말을 했다. 또 TOD 열영상장비를 통해서 보고서야 귀순병이 쓰러져 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판문점은 수풀이 우거진 곳이 아니며, 그 규모가 여의도만큼 큰 규모도 아니다. 그런데 이 지역을 관할하는 우리 군이 굳이 TOD 열영상장비까지 동원하고서야 귀순병이 쓰러져 있음을 확인했다고 했다. 지프차가 우리쪽을 향해 돌진하다 배수로에 빠지는 과정만 보더라도 과연 이것이 대수롭지 않게 여길만한 사건일까. 이 과정이 조용하게 벌어졌을까? 또 40여발의 총소리가 울려퍼지는 동안 우리군은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는 말인가? CCTV로 보이지 않는 지역이 있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차폐지역이 있다면 애당초 제거를 했어야 한다. 이미 도끼만행사건과 같은 일을 겪은 마당에 보이지 않는 지역을 방치했다는 말과 같다. 당시 도끼만행 사건도 우리군의 초소에서 북측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관측을 가로막는 미루나무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그만큼 우리군이 관측에 애를 쓰는 지역이 공동경비구역이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차폐지역을 방치했다면 이 역시 군의 안일한 대비태세를 대변하는 것에 불과하다. 과거부터 이 지역에서 관측 방해물은 심각한 장애요인으로 판단하여 필히 제거하고 조치를 취하는 곳이다. 그런데 차폐지역이 있다는 말은 국방부의 영상공개 연기 등을 두고 미심쩍은 의심만을 증폭시킬뿐이다.   다섯째, 정부의 대응 방안 이번 사건은 엄중히 다뤄져야 할 사안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남측을 향한 총질, 경계선을 넘어 남측으로 들어온 북한군 등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과거 도끼만행사건처럼 북한으로부터 유감표명 및 재발방지 등을 요구해야 한다. 북한이 이런 요구에 응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당연한 우리측의 권리이자, 이번 북한의 행동은 국제사회에 대한 위협이다. 특히 2018 평창동계올림픽 및 패럴림픽을 앞둔 마당에 이런 부분이 남북간에 흐지부지 종결되어 버리면, 오히려 국제사회는 불안요소가 남아 있다는 이유로 방한을 꺼릴 이유가 커 보인다.   앞서 프랑스 대표단 등은 평창 대회 참여를 심사숙고한다는 발언을 한 바 있다. 따라서 한국의 안보가 확실히 보장된다는 점을 이번 귀순병 사건을 계기로 제대로 집고 넘어가야 한다. 현재 우리 근해에는 미국의 항공모함이 3대나 들어온 마당이기 때문에 과거 도끼만행 사건때보다도 더 신속한 유사 폴 버니언 작전도 수행이 가능한 상태다. 귀순병 사건은 유엔사 관할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분명 한미동맹에 대한 도발의 대가를 확고히 알려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상흔

지난 11월 19일 K-pop 그룹으로는 처음으로 방탄소년단이 ‘2017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American Music Awards) 무대에 초청받아 공연을 펼쳤다. / 유투브 관련 영상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귀순하다 북한군의 집중 사격으로 사경을 헤매던 북한군 병사가 의식을 회복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많은 이들은 이 무명 북한 병사가 단 며칠이라도 의식을 회복하여 자신이 그토록 그렸을 자유의 땅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기를 바라며, 그의 소생을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사실상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던 사람이 의식을 회복했다니 이런 것을 두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는 것일까?   어쨌거나 이 북한 병사가 의식을 회복한 후 “남한 노래가 듣고 싶다”며 노래를 틀어달라고 요청했다고 알려졌다. 그가 의식을 회복한 후 들었을 첫 남한 노래가 무엇인지 무척 궁금해지지만, 신세대 장병이니만큼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K-pop 일 것이다. 아마 지금 북한에서는 이 병사처럼 수많은 군인, 청소년, 젊은이들이 K-pop과 한국 드라마에 빠져서 자유세계를 동경하고 있을 것이다.   도대체 K-pop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사경을 헤매다 살아난 북한 병사의 첫 소망이 될 정도가 되었을까? K-pop은 우리나라 대중가요를 기존의 미국 pop과 구별하기 위해 외국의 K-pop 애호가들이 붙인 이름이다.   10여 년 전 아시아 일부 국가에 머물던 K-pop은 2007년 걸그룹 ‘소녀시대’ 데뷔를 기점으로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2009~2010년은 그야말로 K-pop의 부흥기였다. 포미닛, 브라운아이드걸스, 카라, 샤이니, 2PM, 티아라 등 쟁쟁한 그룹이 이 당시 등장했다. 이 무렵 K-pop은 드라마와 영화에 이은 제2차 한류 붐을 주도하며,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뻗어가기 시작했다.   당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유튜브(You tube)라는 세계 최대 동영상 사이트도 K-pop을 세계로 퍼뜨리는 견인차 구실을 했다. 당시 유튜브는 2012년 K-pop의 인기와 영향력을 반영해 자신들의 음악 채널에 K-pop이라는 별도의 카테고리를 개설하기도 했다. 한 나라의 음악이 이처럼 별도의 장르로 대접받은 경우는 없었다.    K-pop은 40대 중후반인 필자의 삶도 많이 바꾸어놓았다. 필자는 1990년 중반부터 2008년 소녀시대라는 걸그룹을 알기 전 10여년 동안 대중음악과 완벽하게 차단된 채 지내왔다. 2008년 무렵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한 기회에 소녀시대라는 그룹을 알게 되면서, 그들의 가창력과 춤실력에 반하게 되었고, 점점 다른 아이돌 그룹에게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소녀시대, 2ne1, 빅뱅 같은 그룹은 생활의 큰 활력소가 되어 주었다. K-pop은 우리 대중 가요사에서 거의 처음으로 부모세대(주로 1970년대 생)와 자녀세대가 세대를 초월해 같은 노래를 듣고 즐기게 만들었다.    갓 등장한 새내기 아이돌 그룹이 국내 무대를 넘어 세계무대에 진출하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면서 뿌듯함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세계적 히트를 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에 앞서 5~6년간 한류 아이돌 스타들이 세계적으로 폭넓은 K-pop 팬층을 다져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빅뱅과 소녀시대가 데뷔한 지도 어느덧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남녀를 통틀어 이토록 장수하는 아이돌 그룹이 나온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빅뱅과 소녀시대는 어쨌거나 그 일을 해냈고, 대중 가요사에 큰 별로 남을 것이다. 얼마 전 필자는 미국에서 뮤지컬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KPOP(케이팝)’이라는 제목의 뮤지컬을 무대에 올린 헬렌 박을 인터뷰 하면서 그에게 “2012년을 정점으로 K팝 열풍이 한풀 꺾인 것이 아니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렇지 않아요. 미국에서 방탄소년단(BTS)이 K-pop 가수로는 처음으로 빌보드 10위 안에 들었잖아요. K-pop은 미국 팝에 비해 하모니가 복잡하고, 멜로디가 중독성이 있으며, 멋진 안무와 어울려 전 세계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충분히 세계적인 경쟁력이 있는 우리 문화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국에는 한류와 K-pop이 덜 알려져 있는데, 이번 우리 작품을 통해 K-pop의 매력과 장르의 다양성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미국인들이 K-pop을 알고 나면 금방 빠져들 것이라고 생각해요.”   헬렌 박이 언급했던 방탄소년단은 지난 11월 19일 우리나라 K-pop 그룹으로는 최초로 ‘2017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American Music Awards)를 통해 미국 TV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 기업 중에 K-pop과 아이돌 그룹에 신세를 지지 않은 업체가 과연 있을까? 대한민국의 위상을 K-pop 그룹 만큼 전 세계에 떨친 이들이 있을까?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다고 한들 일본의 대형 콘서트장에 수만 명의 아주머니 부대를 동원할 수 있을까? 동남아에서, 남미에서, 유럽에서 이처럼 많은 한국 팬들을 만들 수 있을까?   심정이라면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기업의 대외 이미지 개선에 기여한 공로로 K-pop 그룹을 대표하여 빅뱅과 소녀시대에게 훈장이라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아울러 탈북 병사가 깨어나면 그가 가슴에만 품어왔던 아이돌 그룹과 만남이 이루어지길 바라본다.

김병헌

▲ 부여의 건국과 발전, 천재교육 한국사 교과서 정확한 사료 번역은 올바른 역사 서술의 기본(2) - 부여(夫餘)   현행 고등학교 검정 한국사 교과서에 소개된 초기 국가와 관련한 서술은 모두 중국 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토대로 서술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번역 자료를 사료(史料)로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들 인용 사료(史料)의 번역이 잘못되거나 미흡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초기국가 서술과 관련하여 사료 제시나 이를 바탕으로 한 서술에서 어떠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부여의 엄격한 형벌에 관한 원전 사료와 교과서 서술이다.   형벌을 가함이 엄격하여 살인자는 죽이고 가족은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물건을 훔치면 열 두 배로 갚게 한다. 남녀가 간음(姦淫)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이는데, 투기를 더욱 증오하여 죽인 시체는 나라의 남쪽 산 위에 두었다가 썩어 문드러질 때가 되어 여자 집에서 가져가고자 할 경우 우마(牛馬)를 바쳐야 준다.(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 竊盜一責十二. 男女淫, 婦人妬, 皆殺之, 尤憎妬, 已殺尸之國南山上, 至腐爛,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 -『삼국지』 위서 동이전, 이하 같음 )  교학사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또한,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물건 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하고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한다는 항목이 전해지고 있다.(22) 금성출판사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도둑질한 자는 12배로 배상하게 하였으며, 간음한 자와 투기한 부인은 사형에 처하였다.(33) 리베르스쿨 부여에는 1책 12법이라는 엄격한 법이 있어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는 훔친 것의 12배를 갚게 하였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였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심지어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까지도 사형에 처하였다.(26) 비상교육 살인한 사람을 사형에 처하고, 남의 물건을 훔치면 12배를 배상하게 하였으며,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을 사형에 처하는 엄격한 법이 있었다.(24) 미래엔 형벌은 엄하고 각박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집안사람은 노비로 삼는다. 도둑질을 하면 물건의 12배를 변상하게 하였다.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모두 죽였다. 투기는 더욱 증오해서 죽인 후 시체를 나라의 남산 위에 버려서 썩게 한다. 친정집에서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나 말을 바쳐야 한다.(18, 사료) 원전(原典)의 ‘남녀가 간음(姦淫)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인다.’는 부분을 교과서에서는 대부분 ‘간음한 자와 투기한 부인’이라 하여 병렬로 서술하였다. 남녀 간의 간음 행위와 여자의 투기를 모두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원전과는 달리 교과서는 ‘간음한 자와 투기한 부인’이라 하여 마치 남자는 간음 행위, 여자는 투기 행위를 할 경우 처벌하는 것처럼 오해를 살 수 있도록 하였다.   더구나, 금성출판사를 제외한 나머지 4개 교과서는 ‘투기가 심한 부인’이라 하여 투기의 경중에 따라 처벌을 달리 하는 것으로 서술하였다. 투기가 심하지 않은 경우 처벌하지 않는다는 해석도 가능하기 때문에 원전의 의미를 왜곡한 것이다. 이는 원전에 없는 자의적 번역으로 대부분 원전을 확인하지 않고 옮겼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출전까지 밝힌 미래엔 교과서의 경우 ‘집안사람’이라 한 번역은 원전의 ‘其家人’에 맞게 ‘그 집 사람’이라 해야 살인자의 가족임이 분명해진다. 또, ‘투기는 더욱 증오해서’는 ‘투기를 더욱 증오해서’로, ‘친정집’은 원전의 ‘女家’를 그대로 옮겨 ‘여자의 집’이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특히, ‘남녀가 간음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이는데, 투기를 더욱 증오하여 죽인 시체는 나라의 남쪽 산 위에 두었다가 썩어 문드러질 때가 되어 여자 집에서 가져가고자 할 경우 소나 말을 바쳐야 준다.’고 하여 하나의 문장으로 옮겨야 의미가 분명해진다.   이어서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는 혼인 풍습에 관한 내용이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데 흉노와 같은 풍속이다.(兄死妻嫂, 與匈奴同俗.) 금성출판사 혼인 풍습으로 죽은 형의 부인을 아내로 맞는 형사취수혼이 행해지기도 하였다.(33) 리베르스쿨 형사취수제는 형이 죽으면 아우가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제도로 남자 집안의 재산이 여자 쪽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으려는 방편이었다.(26, 고구려의 풍습으로 소개) 지학사 부여에는 취수혼, 고구려에서는 서옥제, 옥저에서는 민며느리제, 동예에서는 족외혼 등이 시행되었다.(27) 부여에서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이 풍속은 흉노와 같다.(27, 사료) 천재교육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풍습도 있었다.(19, 형사취수제)  부여의 혼인 풍습을 거론할 때 으레 ‘형사취수혼’, ‘취수혼’, ‘형사취수제’ 등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형사취수’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어 있다. 하지만, 원전에 분명히 ‘형사처수(兄死妻嫂)’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여타 자료에서 ‘형사취수’의 용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는 잘못이다. 형사처수에서 ‘처(妻)’는 ‘아내로 삼다[爲之妻]’라는 의미로 자주 쓰이는 글자다. 교과서대로 ‘취수’라고 했을 경우 ‘형수를 취하다’라는 뜻이 되는 취수(取嫂)와 ‘형수에게 장가들다’는 뜻이 되는 취수(娶嫂)로 생각해볼 수 있겠으나 어느 쪽도 ‘처로 삼다.’, ‘아내로 삼다’라는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서술된 용어나 글자는 편찬 당시 춘추필법(春秋筆法)에 따라 한 글자 한 글자 엄선하여 집필하였기 때문에 합당한 이유나 근거 없이 함부로 변경해서는 안 된다. 본래의 의미를 정확하게 담아내지 못하거나 심지어 왜곡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형사취수’는 본래의 뜻을 훼손한 자의적 변경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형사취수제’라 하여 마치 일반화된 제도인 것처럼 쓰는 것도 문제다. 부여의 민간에서 나타나는 풍습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제도로 정착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형이 죽을 경우 형수를 아내로 삼는 ‘형사처수’의 풍습이 있었다.”는 정도로 서술하면 된다.   다음은 부여의 왕권과 관련된 사료다.   옛 부여 풍속에 홍수나 가뭄이 고르지 못하여 오곡이 익지 않으면 바로 왕에게 허물을 돌려 혹은 ‘바꿔야 한다.’, 혹은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舊夫餘俗, 水旱不調, 五穀不熟, 輒歸咎於王, 或言當易, 或言當殺.) 교학사 옛 부여 풍속에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바꾸어야 한다.’고 하거나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22, 사료) 동아출판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라고 하거나 ‘죽여야 한다.’라고 하였다.(23, 사료) 천재교육 옛 부여의 풍속에 장마와 가뭄이 연이어 오곡이 익지 않을 때, 그때마다 왕에게 허물을 돌려서 ‘왕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라거나 혹은 ‘왕은 마땅히 죽여야 한다.’라고 하였다.(19, 사료) 이와 관련한 교과서 본문 서술에는 대부분 문제가 없으나 사료 인용에서 번역이 잘못 되었다.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에 해당하는 원문은 ‘水旱不調(수한부조)’로 수(水)는 ‘비’를, 한(旱)은 ‘가뭄’을 나타낸다. 따라서, ‘水旱不調’는 ‘비와 가뭄이 고르지 못함’이란 뜻으로 폭우나 장마 또는 가뭄 등으로 날씨가 고르지 못하여 흉년이 드는 경우를 상정한 것이다. ‘부조(不調)’는 ‘고르지 못하다’는 뜻이지 ‘계속’이나 ‘연이어’의 뜻이 아니다. 이 부분의 번역은 국편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잘못된 번역 자료를 그대로 갖다 쓴 데서 온 오류다. 국편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탑재된 ‘중국정사조선전’에는 오역이 적지 않아 이용에 주의를 요한다.   이번에는 제천(祭天) 행사인 영고(迎鼓)에 관한 서술이다. 은(殷) 정월[12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온 국민이 모여 연일 마시고 먹으며 춤을 추니 영고(迎鼓)라 한다. 이때 형옥을 중단하고 죄수들을 풀어준다.(以殷正月祭天, 國中大㑹, 連日飲食歌舞, 名曰迎鼓. 於是時, 斷刑獄, 解囚徒.)   리베르스쿨 부여는 해마다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치렀다. 영고는 ‘둥둥둥 북을 울리면서 신을 맞이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추수를 마친 12월에 온 나라 백성이 동네마다 한 곳에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며칠 동안 계속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놀았으며, 죄가 가벼운 죄수는 풀어주었다.’라는 기록이 있다.(26) 지학사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의 5월제‧10월제 같이 목축 및 농경과 관련하여 하늘에 제사 지내는 행사가 있었다. 이때에는 죄수를 풀어 주고 모든 사람이 잘 차려입고 나와 밤낮으로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며 놀았다.(28) 천재교육 정월에 지내는 제천 행사는 국중 대회로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은 영고라 한다.(23, 사료) 금성출판사 은력 정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나라 사람들이 도성에 크게 모여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니, 이름 하여 영고라 한다. 이때에는 형옥을 판결하고 죄수들을 풀어 준다.(36, 사료) 리베르스쿨 교과서에는 “영고는 ‘둥둥둥 북을 울리면서 신을 맞이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여 영고의 의미를 특정하였으나 이는 집필자의 자의적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영고(迎鼓)가 부여의 고유어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다 위와 같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온 나라 백성이 동네마다 한 곳에 모여'라는 서술에서도 ‘동네마다 한 곳에 모여’는 원전에 없는 내용이다. 마찬가지로, ‘죄가 가벼운 죄수는 풀어주었다.’라는 부분도 그냥 죄수를 풀어준다고 하였을 뿐 죄의 경중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서술이다. 지학사 교과서의 ‘모든 사람이 잘 차려입고’라는 서술도 원전에 없는 내용이다.   천재교육의 인용사료는 완전히 잘못된 번역이다. ‘정월에 지내는 제천 행사는 국중 대회로’라는 문장은 다른 달에도 제천 행사가 있는데 특별히 정월에 지내는 제천 행사는 ‘국중 대회’라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도 국편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잘못된 번역을 그대로 옮겨온 경우다. ‘정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온 국민이 모여 연일 마시고 먹으며 춤을 추니 영고라 한다.’고 해야 자연스럽다.   금성출판사의 ‘형옥을 판단하고’는 ‘형옥을 중단하고’의 오역이다. 형옥(刑獄)은 ‘형벌(刑罰)과 옥사(獄事)’를 일컫는 말이니 죄인에게 형벌을 내려 옥에 가두는 일이다. 따라서, 죄의 판단이 이미 끝나고 감옥에 가두어 처벌을 실행하는 것이다. 판단의 단계는 이미 지났다는 뜻이다.   이와 동일한 오역이 국편에서 주관한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도 출제된 바 있다. 2017년 1월에 실시된 34회 고급 3번 지문에서는 ‘은력(殷曆)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국중대회(國中大會)에서 연일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니, 이를 영고(迎鼓)라고 한다. 이때 형옥(刑獄)을 판단하여 죄수를 풀어주었다.’고 한 지문 중에서 ‘형옥(刑獄)을 판단하여 죄수를 풀어주었다.’고 한 부분이다. 이는 ‘형옥을 중단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로 하는 것이 올바른 번역이다. 앞부분의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국중대회(國中大會)에서’라는 번역도 어색한 문장으로 ‘하늘에 제사 지내고 도성 안 사람들이 크게 모여서’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때 ‘國’은 ‘왕성의 안[王城之內]’ 즉 ‘도성(都城)’이란 뜻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전번역원, 규장각, 장서각 등에는 한문으로 된 원전 자료를 번역하여 제공하고 있다. 연구자의 입장에서 정확하고 꼭 필요한 자료를 찾는데 투자해야 할 많은 시간과 노력을 덜어주니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원전 자료가 경사자집(經史子集)에 걸쳐 워낙 다양한 데다 그 분량 또한 엄청나기에 간혹 오역이나 미흡한 부분이 눈에 띄기도 한다. 현재 널리 사용되지 않은 문자와 문체로 기록된 한문 원전 자료를 제한된 인력과 제한된 시간으로 오류 하나 없이 완벽하게 번역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독자의 오류 제보로 더욱 완성도 높은 번역문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문제는, 오역이나 미흡한 번역 자료를 연구 논문이나 교과서 집필에 이용하는 연구자가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데 있다. 교과서에 인용된 사료가 그리 많지 않은데도 오역이나 의미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대부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교과서 집필자는 사료 인용에 앞서 원문과 대조하여 오역이나 미진한 부분은 반드시 바로잡아 본래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 전문가가 이해할 수 없는 번역이라면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다. 현행 검정 한국사 교과서에 인용된 번역 사료에는 그런 오역과 왜곡이 적지 않다.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주동식

2000년 6월 13일 6월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을 김정일이 맞이하고 있다. /조선DB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햇볕정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호남 출신들이 많은 편이다.   김대중의 정치적 자산은 소중하다. 반발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나는 적어도 현재의 대한민국은 박정희와 김대중 두 사람의 흔적이 가장 강하게 남아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런 김대중의 정치적 자산을 살린다는 선의라고는 해도 햇볕정책에 집착하는 것은 위험하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을 위해서도, 호남을 위해서도 최악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내가 팃포탯 전략이라는 개념을 들어 설명했지만, 김대중 집권 당시로서는 햇볕정책은 시도해볼만한 노선이었다고 본다. 강경 대치 일변도로 나아갔던 보수정권들이 대북 정책에서 그다지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접근은 시도할 수 있었다.   IMF 외환위기라는 상황에서 대북 정책으로 새로운 정치 경제적 활로를 모색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북핵이 드러나지도 않았던 시점이기 때문에 그런 대북정책이 갖는 위험성도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김대중 본인이 자신의 햇볕정책에 대해 '강력한 안보를 전제로 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보수 성향 사람들은 김대중이 서해교전 당시에도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월드컵 결승전에 갔다며 마치 안보를 등한시한 것처럼 비난하곤 하지만 그건 초점을 잘못 잡은 얘기이다. 만일 그때 김대중이 월드컵 결승전에 가지 않았다면 한국은 서해교전으로 인한 피해보다 훨씬 더 큰 국제적 이미지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거야말로 서해에서 도발한 북한의 의도에 가장 부합하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상황이 달라졌다. 북핵과 미사일이 이미 한반도와 일본은 물론 조만간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중국을 등에 업고 노골적으로 핵 위협을 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과 중국에 대해서 유화적이고 온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가? 지금 상황에서 평화적 방식으로만 북핵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양쪽이 주먹에 돌을 쥐고 있다가, 한쪽이 갑자기 총을 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 총에 실탄을 장전해 위협한다. 이때 평화적인 방법으로만 해결하자는 얘기는 무릎꿇고 항복하자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북한과 중국은 정상적인 협상 상대가 아니다. 해방 이후 70년 넘게 쌓아온 경험이 그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최소한의 신뢰도 갖기 어렵다. 북한과 중국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합리적인 불신과 의심을 갖고 대하는 것이 정상적인 대응이다.   지금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내세우며 북한과 중국에 대해서 타협 일변도의 정책으로 나아가는 것은 실은 김대중과 그를 지지한 호남 정치의 상징자산을 결정적 치명적으로 훼손하는 행위이다. 지금 이대로 가면 김대중과 호남 정치는 정말 북한에 나라 팔아먹은, 반란세력의 누명을 벗기 어려워진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한반도가 북한 체제로 통일된다면 김대중의 햇볕정책도 영광스러워지는 것 아니냐고 여기는 정신병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영광이 아니다. 치욕이자 역사적으로 영원히 똥물을 뒤집어쓰는 결과가 된다.   북한 체제가 어떤 명분과 합리성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보는가? 그 체제가 영속할 수 있다고 보는가? 만일 북한 체제에 한국이 흡수되는 비극이 발생한다면 그 정치적 책임은 김대중과 호남에게 귀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문재인 정권은 정치적으로 폼나는 위치에 호남 출신들을 대거 기용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실권을 쥔, 예산과 인사권을 쥔 자리는 PK 친노 등이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문재인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이 발생하면 호남 출신들 나아가 호남 전체가 그걸 뒤집어쓰게 된다. 정치적인 자리와 명분이란 게 원래 그런 역할을 한다.   사실상 햇볕정책도 마찬가지 운명이다. 문재인과 친노들은 철저하게 김대중과 호남의 정치적 상징자산을 공짜로 써먹고 있다. 실권도 없는 고위직 몇 자리 안겨주고 5.18 빅쑈 립써비스로 기분 맞춰주면서 등골을 빼먹는 전략이다.   내가 자주 사용한 비유지만 집문서 땅문서 선산 문서까지 빼돌리면서 짜장면 몇 그릇 사주고 생색을 낸다. 짜장면 몇 그릇 얻어쳐먹은 친구들은 "역시 우리 문재인"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게 찬양질하기 바쁘고.   정말 김대중과 호남 정치를 생각한다면 지금 상황에서 문재인의 햇볕정책과 김대중의 그것은 분명하게 다르다고 선을 그어야 한다. 김대중이라면 지금 문재인의 대북정책과 중국 정책을 철저하게 비판했을 것이라고 얘기해야 한다.   돌아가신 양반은 말이 없다. 결국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는 남은 자들, 그의 정치적 유산이 대한민국에 활용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몫이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김대중은 대한민국을 만든 두 기둥의 하나이자 위대한 정치인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나라 팔아먹은 역적이라는 누명을 쓰게 될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상황이 김대중과 햇볕정책의 마지막 탈출구이다. 만일 대한민국의 운명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귀결된다면 그때 가서는 무슨 명분으로도 변명이 불가능하다. 백약이 무효이다. 제발 깊이 깊이 생각하자.

엄상익

  20년 가까이 끈질기게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 한 여인의 이혼소송을 맡았었다. 미모에 일류대를 나온 그녀는 부잣집에 시집을 가면서 야망이 컸던 것 같았다. 그녀는 남편 명의로 등기해 둔 빌딩과 부동산들을 자기의 것으로 간주했다. 시부모의 재산을 빼돌려 따로 미국에 저택을 사기도 했다.     그녀의 욕심을 눈치 챈 시부모는 철저한 방어태세로 들어갔다. 그녀는 변호사인 나를 찾아와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재산을 빼앗아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큰 댓가를 약속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허황된 그녀의 탐욕을 나는 도와주기 싫었다. 사건을 그만두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녀의 증오의 대상이 됐다. 그녀의 적인 남편 측으로부터 돈을 받고 내가 소송에서 자신에게 불리하게 했다는 망상을 가지고 내게 소송을 걸었다. 그녀는 자기를 불쌍한 여자로 위장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모두가 그녀를 믿었다. 워낙 확신을 가지고 주위에 말하니까 사람들은 다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나를 고소하면서 괴롭혔다. 담당 형사가 증오가 전염된 눈빛으로 나를 쏘아 보았다. 검사가 경멸의 눈으로 나를 보면서 모욕했다. 법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정을 하던 대법관 출신 위원은 “법리 설명이든지 뭐든지 하여튼 잘못했으니까 그렇겠지”라면서 나를 힐난했다. 심지어 내가 선임한 변호사까지도 나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그 어디에도 내 편은 없었다. 선입견을 가진 판사들의 오만이라는 둑을 나는 넘어설 수가 없었다. 나는 소송에서 패소하고 그녀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선고받았다.     전문가인 의사들도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환자 측이 집요하게 덤빌 때 법원은 의사가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서 의사 쪽으로 책임을 돌린다. 의사들이 의학교과서를 통째로 들이대고 설명했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법원이 그렇다면 그렇게 알라는 것이 현실의 힘의 논리였다. 진실이 중요하지 않았다.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불교경전을 보면 부처님도 여자를 겁탈했다는 모함을 받았다. 부처님은 항변을 하지 않고 침묵했다. 예수님도 조직적인 음모와 선동 속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을 당했다. 그런 고난을 경험하면서 나는 남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도 인간이 가져야 할 귀중한 능력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가슴이 아플 때 절실했던 것은 공감해 주는 사람이었다. 긴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당신 그런 사람이 아닌 걸 안다’라는 한 마디만 해 준다면 빙산같이 얼어붙었던 마음이 단숨에 녹아버릴 것 같았다. 변호사 생활에 대한 뼈저린 깊은 반성을 했다. 곤경에 빠진 사람의 아픔에 진정 공감을 한 적이 있었던가? 절망하는 이웃의 모습을 보면서 눈이 촉촉해진 게 언제였었나? 마음에 시퍼런 멍이 든 사람 앞에서 공허한 관념만 늘어놓지는 않았는지 의문이었다. 상대방에 대한 공감이 없이 변호를 한다는 건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일 뿐이다. 공감은 고통을 대신 다 짊어지라는 얘기가 아니다. 마음을 열고 서로 흐르라는 것이다. 고통을 당해 보니까 남의 아픔에 공감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동윤

많은 사람들이 운동이 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규칙적으로 운동을 실천하기는 어려워한다. 지속적으로 신체활동을 하지 않으면 암에 걸릴 확률이 아주 높아지거나 운동이 식욕을 억제시켜 체중을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은 과학적 연구로 밝혀졌다.  미국 로스웰파크 암연구소에서는 신장암 환자 160명, 방광암 환자 208명, 건강한 사람 766명을 대상으로 개인적인 신체활동 수준을 근거로 운동을 하지 않고 앉아서만 생활하는 습관이 암 발병과 연관있는지 조사했다.  그 결과, 평생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에서는 신장암 발병률이 77%, 방광암 발병률이 73% 높았다. 이런 효과는 체중과는 상관이 없어서 정상 체중이더라도 신체 활동을 전혀 하지 않으면 비만과 무관하게 암 발병 확률이 증가했다.  또 다른 연구에서도 운동을 꾸준히 하면 거의 모든 암의 발생 위험을 7% 정도 낮출 수 있고, 유방암10%를 비롯해 대장암16%, 폐암26%, 골수성 백혈병21%, 골수종17%, 식도암42%, 간암27%, 신장암23%, 위암22%, 자궁내막암21%, 방광암13%, 두경부암15% 등의 암 발생 위험이 크게 감소한다고 밝혀졌다.  암을 예방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운동이다. 달리기 등의 고강도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것만으로도 식도암, 유방암, 대장암, 폐암 위험이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적당한 강도의 운동은 속보, 테니스 등이며 고강도 운동은 달리기, 수영 등이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거나 바쁘다는 핑계로 운동과 거리가 먼 생활 습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동기를 부여하기에 충분하다. 즉 암을 줄이기 위해서 꼭 마라톤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저 점심시간에 산책을 하거나 물건을 사러 걸어서 갔다 오는 등 생활 속에서 건강하고 활동적인 운동 습관을 유지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매주 150분 동안 적당한 운동을 하거나 75분 동안 고강도 운동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동이 암과 관련된 호르몬 수치를 낮추고 인슐린이나 인슐린 같은 인자들의 수치를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어다. 또 운동 근육은 포도당을 이용해 에너지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산소가 필요하다.  이 때 산소 공급이 충분하지 않으면 신체는 부산물로서 젖산을 생산하여 운동 후 근육을 뻣뻣하게 만든다. 따라서 꾸준한 운동을 통해 산소 공급 능력이 향상되면 젖산을 뇌나 근육, 기관에 주요 연료로 전환시켜 유용하게 사용하는 소비 능력을 높이는 재순환 체계를 갖게 된다.  이런 재순환 체계가 고장 나면 암세포를 유발할 수 있는데, 운동선수들의 신체는 젖산을 유용한 연료로 전환시키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런 고장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운동이 부족하면 암과 당뇨를 포함한 여러 질병에 걸리기 쉽다. 흡연ㆍ비만ㆍ당뇨보다 더욱 건강에 위험한 것이 바로 운동 부족이다. 혈압이나 1분당 숨쉬는 횟수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조성관

▲ 왼쪽부터 존 F 케네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 사진출처=위키미디어,뉴시스 “…이 세상에는 자유세계와 공산세계 간의 가장 큰 이슈가 무엇인지 정말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모르는 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베를린에 한번 와보라고 합시다. 세상에는 공산주의가 미래의 흐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도 베를린에 와보라고 합시다. 유럽이나 다른 곳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손잡고 일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도 베를린으로 데려옵시다. 공산주의는 나쁜 제도지만 경제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라고 말하는 이들도 일부 있는 모양인데, 그들도 베를린에 한번 와보라고 합시다. 자유란 어려운 것이고 민주주의는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높은 담을 쌓아 사람들을 가두고, 그들이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적은 없습니다.… 서베를린은 18년 동안이나 포위되어 있었으면서도 여전히 활력과 힘, 희망과 결의를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구상 어느 곳에도 이런 도시는 없습니다. 베를린장벽은 공산체제의 실패를 가장 생생하고 명백하게 세계 앞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것이, 누가 어디서 한 연설인지를. 1963년 6월 26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서(西)베를린 시청 발코니에서 한 연설이다. “Ich bin ein Berliner(나는 베를린 시민이다)”로 널리 알려진 베를린 연설! 지난 10월 독일 베를린을 여행하면서 일부러 이곳을 찾아갔다. 당시 서베를린 시청은 미국 지역인 쇠네베르크구에 있었다. 현재 이곳은 쇠네베르크 구청사 건물로 쓰인다. 20세기 역사는 케네디 대통령이 서베를린 시청 발코니에서 예언한 대로 전개되었다. 베를린 시당국은 이 역사적인 장소를 여러 형태로 기억하고 있었다. 먼저 구청사 앞 광장을 ‘존 F 케네디 광장’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발코니와 연결된 방을 ‘존 F 케네디 방’으로 이름지었다. 방안에는 6월 26일 그날을 상기시키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그날의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국회 연설의 반향(反響)이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왜 그런가. 연설이 명문(名文)이기 때문이다. 번역된 연설문을 읽어도 명문의 맛을 느낄 수 있지만 한영(韓英) 대역(對譯)으로 읽으면 명문의 묘미가 배가된다. 희뿌옇던 머릿속이 말갛게 개이는 듯한 느낌이랄까. 두통이 날 때마다 진림(陳琳)의 글을 읽으면 머리가 맑아졌다는 조조(曹操)가 된 기분이다.      그렇다면 트럼프의 연설은 왜 명문인가. 엄정한 사실에 기반해 깊이 생각한 것을 알기 쉽게 썼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연설문은 어려운 단어가 거의 없다. 고등학교 2학년생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레토릭도 별로 없다. 그런데 힘이 느껴지고 울림이 있다. 왜 그런가. 연설문에 진실을 담았기 때문이다. 거짓이 아닌 진실을 평이한 언어로 간결하게 표현했기에 읽을수록 빨려든다.      트럼프의 연설문과 대비되는 것이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이다. 현충일 추념사, 광복절 경축사, 유엔 연설문 3개를 되새겨 보자. 현충일 추념사에서 6·25전쟁을 일으킨 북한은 일절 언급되지 않았다. 광복절 경축사는 또 어떤가. 세계가 인정하는 대한민국의 성공사(史)는 무참히 편집됐다. 유엔 연설에서 문 대통령은 자신이 ‘피란민’임을 강조했지만 정작 무엇으로부터의 피란인지를 빼먹었다.       케네디의 베를린 연설이 지금 읽어도 가슴이 뛰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웅변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국회 연설은 역사를 바꾼 명연설로 기록될 것이다. 진실을 외면한 연설문은 결코 감동을 줄 수 없다.

박광작

▲ 루이제 린저(1911~2002) photo www.Welt.de소설 ‘생의 한가운데’로 널리 알려진 독일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1911~2002). 1980년대 루이제 린저는 우리나라에서 최고 인기의 외국 여류작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이름을 네이버 검색창에 입력하면 이런 설명이 나온다.      ‘전후 독일의 가장 뛰어난 산문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대학 졸업 후 1935년부터 교사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39년 학교로부터 나치스에 가입하라는 독촉을 받게 되자 직장을 떠났다.… 1944년 남편이 러시아전선에서 전사했으며, 자신은 히틀러 정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작품의 출판금지를 당하고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이어 반나치스 활동으로 투옥되었으며 1944년 10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전으로 1945년 석방되었다.’      박광작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지난 10월 말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것이 루이제 린저의 정체다’를 4회 연속 게재해 지식인 사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2011년 무리요가 쓴 전기 ‘루이제 린저: 모순의 삶’이 출간되었을 때 ‘루이제 린저는 나치주의자였다’는 독일 통신기사를 받아 일부 신문에서 단신으로 보도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위의 네이버 인물 검색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루이제 린저에 대한 기술은 1980년대와 똑같다. 전혀 수정된 바가 없다. 박 교수가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이유다. 박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0년대 후반에 독일 유학을 했다. 베를린자유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귀국해 성균관대 경제학과에서 학생을 가르쳐왔다. 오랜 기간 한독(韓獨)포럼의 한국 측 간사를 역임한 독일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박 교수는 무리요가 쓴 전기 ‘루이제 린저: 모순의 삶’의 주요 부분을 요약하고, 린저의 ‘북한여행기’를 참고해 주간조선에 기고문을 보내왔다.          “품위 있게 보이는 나이 든 한 여인이 오버바이에른 지방 마을 ‘베소브룬(Wessobrunn)’의 공원묘지에 묻혀 있는 아들 묘 앞에 서 있었다. 이 여인 곁에는 젊은 남자 한 명도 동행해 있었다. 이 젊은 남자는 갑자기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속에서 무언가 치솟아 참을 수 없이 터져나오는 이 여인의 신음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이 여인은 혼란스러운 말들을 중얼거리며 죽은 아들에게 용서를 빌고 있었다. 상당한 시간이 흘러간 후 그녀는 평생 마음속 깊이 숨겨 놓았던 사연을 이야기했다. 그녀의 둘째 아들은 혼외자로 출생했다. 이 아들은 어릴 때 자기를 고아원에 맡겼던 그의 엄마에 의해 버림받았다는 절망 속에서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들에게 출생의 비밀을 말하는 데 냉담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아들의 묘지에서 비탄과 회한에 빠져 있었던 여인은 바로 독일 좌파 소설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였다. 그녀의 둘째 아들 ‘슈테판 린저’(Stephan Rinser·예술감독으로 활동하다 1994년 사망)와 어머니 루이제 린저는 평생 갈등관계 속에 살았다.”         1935년 히틀러 찬양시 발표      1990년대 말 루이제 린저와 오랜 교우관계를 가졌던 철학자이며 수도회 신부 호세 산체스 데 무리요(Jos Snchez de Murillo) 교수는 루이제 린저와 함께 그녀의 둘째 아들 묘소를 방문한 후 위의 글을 남겼다. 무리요 신부는 린저 탄생 100년을 맞았던 2011년 린저의 일생을 밝혀주는 ‘루이제 린저: 모순의 삶(Luise Rinser: Ein Leben in Widerspruchen)’을 출판했다. 처음 루이제 린저의 전기를 쓰기 시작할 때 무리요 신부는 그녀를 신화적인 독일의 ‘잔 다르크’로 그리고자 기획했다. 그러나 자료를 연구해 가면서 ‘아! 이게 아니구나!’라고 탄식했다. 그녀가 자신에 대해 한 이야기가 모두 거짓이란 사실이 밝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입증된 사실에 입각한 ‘린저’의 전기를 출판했다.      이 전기는 루이제 린저의 첫째 아들 크리스토프 린저(Christoph Rinser)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나올 수 있었다. 크리스토프도 어머니의 감춰진 ‘과거’를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루이제 린저는 아들에게까지 거짓말을 해왔기 때문에 아들도 어머니의 감춰진 진실을 알고 싶어 했다. 원래 이 루이제 린저 전기 발간은 그녀의 출생 100주년에 그녀를 기념비적 정의의 여신으로 만들어주는 팡파르로 의도되었으나, 이와 반대로 그녀의 모든 거짓말과 미화된 삶의 허구성을 밝혀줌으로써 그녀는 거짓말쟁이로 추락하고 말았다.      1933년 히틀러의 나치가 집권한 후 루이제 린저는 여러 번 히틀러 찬양 글을 발표했다. 그중 1935년 초 잡지 ‘아궁이 불(Herdfeuer)’에 발표한 6연(聯)의 시 ‘젊은 세대(Junge Generation)’ 중 마지막 연만 봐도 나치 찬양은 분명하다. 1~5연도 역시 구구절절 히틀러 독일을 위한 찬양문이다.      “…우리는 죽음으로 충성을 다해 몸을 바치는 성스러운 이 땅의 감시자/ 위대한 지도자(히틀러)의 비밀을 지키는 파견인들/ 우리들 이마에 불꽃을 일으키는 그의 신호와 함께/ 우리 젊은 독일인들!/ 우리는 감시한다. 우리는 승리 아니면 죽음을 택할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충성스럽기 때문이다.”      루이제 린저는 자신이 쓴 히틀러 찬양 시가 알려졌을 때, 자기가 쓴 시가 아니라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나중에 루이제 린저가 그 시를 썼다는 것이 밝혀지자 그녀는 공동으로 작성한 시라고 말을 바꾸었다. 나중에는 다시 말을 바꾸면서, 자신이 그 시를 썼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히틀러에 대한 풍자시’라고 변명했다. 루이제 린저는 히틀러가 집권했던 1933년 교사 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그녀가 봉직했던 학교의 교장은 유대인이었다. 그녀는 그 교장을 나치에 밀고하여 그녀 자신의 출세에 이용했다. 그녀는 나치 여성동맹(NS-Frauenbund)과 나치 교원동맹에도 가입했다. 무리요 교수는 루이제 린저가 보통의 나치 추종자들을 넘어서는 나치에 ‘꽉 엮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루이제 린저는 젊은 나치 기간요원으로 나치와 함께 성장하며 출세했던 것이다.      유대인 교장을 고발한 지 1년 만에 그녀는 나치 청년여성 조직인 ‘독일소녀동맹(Nazi-Organization·Bund Deutscher Mädchen)’의 한 교육소 책임자가 되었다. 젊은 나이에 이미 나치의 주요 인물로 출세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후 악명 높은 나치 선전상 괴벨스의 영화부서인 UFA가 제작하는 선전영화의 대본작가로 활약하면서 6000라이히마르크의 보수를 받고는 ‘베를린 영화작가’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옥중기’ 등은 모두 자신을 미화하기 위한 거짓 이야기이며, 린저의 뇌 속에서 창조된 허구의 ‘소설’이었다. 그녀의 자서전 ‘늑대를 껴안다’(Den Wolf umarmen, 1981)도 사실에 입각한 기술이 아니고 전설 만들기였다. 나치 시절 그녀가 출판금지 조치를 당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나치 패망 후 그는 히틀러에 저항해 목숨을 걸었던 저항 문학가로 행세하며, 독일의 ‘잔 다르크’가 되길 원했으나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인 소설가 클라우스 헤르만(Klaus Herrmann)이 남긴 유품(베를린 국립도서관 소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고가 남아 있다.       ▲ 조선화보사가 일본어로 펴낸 ‘빛나는 생애’ 379쪽에 나오는 사진. 김일성(왼쪽)이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를 만나는 모습.    反파시스트 저항작가로 미화      린저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헤르만은 나치를 추종하는 그녀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주기 위해 당시의 정세를 설명하는 가운데 히틀러를 지원하는 대기업가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지원 정치자금의 규모 등을 말해주었다. 린저는 2년 후 친구에게 이 말을 다시 전해주었고 그 친구의 남편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린저를 나치 게슈타포에 고발했다. 린저는 조사를 받기 위해 미결수 구치소에 구금되었다. 이 고발 사건으로 그녀가 국방력 와해 공작(Wehrkraftzersetzung) 혐의로 1944년 10월에서 12월 성탄절 전까지 구속 조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루이제 린저는 친구에게 “전쟁은 곧 끝날 것이며, 러시아 병정들도 그렇게 사악하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 러시아 병정들과 적당히 지내는 것도 괜찮다”는 내용의 말을 했다고 고발되었으나 나치 소추 당국은 루이제 린저의 변명을 듣고 황당한 밀고 내용이라 판단했다. 그녀는 미결수 구치소 당국으로부터 휴가를 받고 출옥한 후 더 이상 구속되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로 드러났다. 그녀는 ‘옥중기’와 자서전 ‘늑대를 껴안다’에서 1944년 10월 국가반역죄(Hochverrat)로 구속된 후 악명 높은 나치 민족재판소의 프라이슬러(Freisler) 소장에 의해 증거를 근거로 사형에 선고될 처지에 놓였었다고 주장했다. “모두 석방되길 기다렸다. 저녁 늦게 변호사가 찾아왔고 나를 불러냈다. 나는 그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허사였다. 변호사는 ‘(석방) 청원이 거부되었어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감방에서 성탄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변호사를 선임한 적도 없고 구치소에서 성탄절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국가반역죄로 ‘기소’되기는커녕 재판도 받지 않았다. 악명 높은 나치 프라이슬러는 이미 사망하고 당시에 이 세상에 없었다. 어떻게 국가반역죄로 재판받았다고 주장하는 그녀가 구치소 당국으로부터 휴가를 받아 1944년 12월 21일 석방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데도 궁색했다. 그러나 그녀는 1945년 4월 석방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자신을 반(反)파시스트 여성 저항문인으로 미화하였다. 히틀러 나치에 협력했다가 전쟁에서 살아남은 모든 독일 사람들은 새로운 서독 민주주의를 재건하는 가운데 여성들 중에서 반나치 깃발의 명예를 지킨 ‘잔 다르크’가 나타나주길 갈망하는 분위기가 지배했던 시절이었다. 이때 루이제 린저는 바로 ‘생의 한가운데’라는 작품을 발표해 자신이 반나치 저항작가이며 사형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양심이라고 미화하기 시작하면서 첫 거짓의 단추를 채웠던 것이다.      1945년 패전과 함께 나치 선전 활동을 했던 그녀는 가톨릭교회에 똬리를 틀었다. 가톨릭 교인으로 신심이 깊어 나치에 협력하지 않았던 아데나워가 경제 기적과 새로운 서독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어가던 시대였다. 그녀는 가톨릭 좌파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는 순진한 평화주의자들도 있었고, 교회에서는 과거를 따진다거나 신상조사도 하지 않는다. 루이제 린저는 기자 자격으로 로마에서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취재하여 이에 관한 기사도 썼다. 변신에 능한 그녀는 가톨릭교회 조직 안에 머물면서도 열정적인 가톨릭 비판가란 명성을 얻었다. 1968년 반권위주의 좌파 학생운동이 서독으로 번져나갔다. 극좌 테러단체인 적군파(赤軍派)가 대량소비사회를 극단적 폭력 혁명으로 극복하겠다는 이유로 프랑크푸르트 상업지구의 한 백화점에 방화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주범인 안드레아스 바아더(Andreas Baader)와 구드룬 에슬린(Gudrun Esslin)이 체포돼 슈투트가르트의 슈탐하임 교도소에 갇혔다. 이 사건은 루이제 린저가 돌출행동으로 자기 마케팅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녀는 이 극좌 테러범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는 공개편지를 발표해 서독 사회를 놀라게 했다. 그 후 수감돼 있던 두 방화범은 다른 테러범들과 함께 형무소에서 밀반입했던 권총으로 자살하여 서독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다.       ▲ 호세 무리요의 전기 ‘루이제 린저: 모순의 삶’ 표지.    히틀러에 이어 김일성 찬가      극좌 테러리스트를 옹호하는 ‘양심적 지식인’ 이미지를 남긴 후 루이제 린저는 1972년 서독 하원 총선에서는 갑자기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를 지지하는 문화예술인으로 변신했다. 정치적 ‘정조’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변하지 않는 일관성이 있다면, 그것은 깊은 무의식의 심연에 자리 잡고 있는 강력한 독재자에 대한 ‘정신적 위탁과 열광’이었다. 그런 점에서 히틀러는 루이제 린저의 종교이며 우상이었다. 그러한 ‘히틀러’가 사라진 후 방황하던 그녀가 새로운 대상으로 찾아낸 인물이 북한의 김일성과 이란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였다. 그녀는 현대 개발국가의 면모를 찾아가던 이란을 신정(神政)국가로 바꾸며 피 맛을 즐겼던 호메이니를 열렬히 숭배·찬양했다. 그녀는 호메이니를 가리켜 “제3세계 국가들의 빛나는 전범(典範)”이라고 했다.      독일의 저명 작가들 중 북한의 김일성을 몇 번이나 친견하며 국빈(國賓) 대우를 받았던 작가는 루이제 린저뿐이다. 독일은 친북(親北)작가가 나올 수 있는 토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윤이상은 절친(切親) 관계에 있었다. 윤이상의 음악은 별건으로 하고, 종북·친북이란 공통분모가 있는데 왜 그렇지 않았겠는가. 같은 국빈 격으로 김일성의 환대를 받은 윤이상과 얼마나 친했던가는 그녀가 편찬한 책 ‘상처받은 용, 윤이상(Der verwundene Drache, Isang Yun)’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에서도 독문학자 전혜린이 번역한 ‘생의 한가운데’가 1960년대에 출판되었고, 1980년대 386세대 중심으로 루이제 린저의 책은 널리 알려져 있다. 좌파 운동권 인사들은 북한을 영국 작가 제임스 힐턴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히말라야의 이상향 샹그릴라와 같다고 믿었는데, 여기에 루이제 린저의 역할이 컸다.      루이제 린저는 1980년부터 10차례나 북한의 초대를 받았다. 그녀는 ‘북한 기행문’(1981)에서 북한 김씨 절대왕조를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위대한 지도자’ ‘범죄 자체가 없고 가난이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에는 형무소가 없다’ ‘교화소는 쇠창살이 없고, 교육생들은 언제든 자기가 원하는 시점에 교화소에서 출소할 수 있다’ 등 완전한 ‘김일성 용비어천가’를 썼다. 1986년 평양 방문 때에는 김일성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북한에는 교회의 탑이 없고 교회 종소리가 없어서 좀 섭섭했다는 말을 남겼다. 행간(行間)을 읽으면, 그녀가 믿는다고 말했던 가톨릭교회와 종교는 말살되었다는 말이 되겠다.      루이제 린저가 ‘김일성 왕국’을 찬양한 기록 중에는 황당한 부분이 많다. “일본인 호텔 투숙객이 방문에 문을 잠글 수 없다고 불평하자 북한 호텔 지배인이 ‘공화국에 대한 모욕’이라고 하면서 북조선은 전국적으로 자물쇠도 열쇠도 필요 없는 나라라고 했다.” “도둑도 없고 강간도 없다.” “약품도 (필요) 없다. 조선 의학은 예방으로 해결하므로 페니실린 등 항생제도 (필요) 없다.”      “감기도 결핵도 좋은 영양과 예비검진 덕택에 전멸했다(ausgerottet). 암도 조기 발견되어 없다.” “신체 장애아에 대해 묻자 북한 의사는 놀란 표정을 짓고서 쳐다보며 ‘세상에 어디 그런 것이 있는가’라고 답했다.” “나(루이제 린저)는 한 명의 장애인, 불구자( Krüppel)도 보지 못했다.” ‘루이제 린저’가 방문했던 평양 등에서 장애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가 김일성과 찍은 다정한 모습의 사진은 북한의 지상낙원 이미지와 정통성을 세계에 선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루이제 린저가 인간신(人間神)이 지배하는 북한에 체재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문화계의 여신으로 대접을 받았다. 그녀를 그렇게 인정해주는 나라는 북한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김일성 왕국에 최대의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과 린저의 ‘오고 가는’ 상호주의적 교환이었다.      루이제 린저의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영향력에 반비례하여 그녀에 대한 문단의 평가는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독일의 ‘문학 교황’으로 칭해지는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Marcel Reich-Ranicki)는 “루이제 린저의 문학성은 평가할 가치가 없으며, 그녀의 작품은 대중영합적인 저속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큰 영향이 있는 대표적 주간지 ‘슈피겔’은 그녀의 작품이 “나이브하고 재능도 없으며 어쩐지 쓴웃음을 자아내는 것(naiv, untalentiert und ein wenig lächerlichl)”이라고 평했다.

박상융

서울구치소 정문./ 조선DB변호사로서 서울구치소를 방문해 수감된 사람들과 접견을 할 기회가 많다. 입구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석방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플래카드가 수없이 걸려 있고,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대와 시국 사범으로 수감된 수감자들의 처우개선과 인권을 요구하는 시위도 많은 편이다. 구치소를 담당하는 의왕경찰서는 24시간 경찰버스를 대기하면서 별도의 경비를 하고 있다. 서울구치소에는 살인, 절도, 강도, 사기범뿐 아니라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전직 국정원장, 안봉근 등 박근혜 정부의 속칭 ‘문고리 3인방’, 김관진 전 국방부장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처럼 정·재계를 주름잡았던 사람들도 다수 수용돼 있다.   변호사들은 별도의 접견실에서 수감자들과 편안하게 시간의 구애 없이 교도소 업무시간 중에는 접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 가족이나 친구, 지인 같은 면회객들은 아무리 먼 곳에서도 왔다고 해도 단 10분 내외의 면회 시간밖에 주지 않는다. 면회 시간도 하루 단 한 번에 불과하고, 손도 잡아보지 못한 채 마이크를 통해 안부만 전달할 뿐이다.   그나마 토요일을 제외하고는 공휴일과 야간에는 면회가 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검사가 가족면회금지(제한) 조치를 해놓아서, 가족들이 면회를 왔다가 이유도 모른 채 그냥 돌아가는 일도 있다. 평일에는 생계 때문에 면회가 어려운 사람은 일요일 외에는 시간이 없는데 일요일 가족 면회가 안 되고, 평일에도 일과 시간 이후에 도착하면 면회가 안 된다. 가족면회 횟수도 하루 한 번밖에 안 되는 규정을 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심지어 가족 등 지인과 면회 시 면회 내용이 기록되고 기록된 내용이 나중에 검찰에 보고되기도 한다고 하여 제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도 못 한다고 한다. 어찌 보면 변호사와 접견보다는 가족과의 충분한 면회 시간의 보장이 필요한데도 실상은 정반대이다. 변호사들도 업무시간 외인 야간과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에는 접견이 허락되지 않는다.    변호사 자격으로 수감자들을 접견하면서 많은 하소연을 들었다. 어떤 수감자들은 변호사보다 법률에도 능통하고 심지어 판사·검사의 스타일도 잘 파악하고 있다. 수감자들은 “어떤 판사는 강성이라 그 재판부에 배당받으면 항소가 기각되거나 심지어 검사 구형보다 더 무거운 형을 선고한다”고 말하곤 한다.     형을 낮춰 받기 위해 장기기증 서약도 하고(수감자들 간에는 장기기증 서약서를 제출하면 판사가 형을 깎아준다고 알고 있다), 거의 매일 재판부에 탄원서도 작성, 제출하는 이들도 보았다. 또한 어떤 변호사에게 사건을 맡기면 그 변호사가 판사·검사와 친해 형을 적게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하며, 법률 지식과 법조계 사정에 훤한 수감자들은 구치소 내에서 속칭 사건소개 알선브로커 역할을 하기도 한다.   수감된 방도 독방부터 4인실, 5인실, 7인실 등 다양하다. 고위직 공무원과 관리들은 다른 수감자들과 어울리기를 꺼려 독방수감을 선호한다고 한다. 하지만 입감할 때는 독방에 수감되길 원하다가 나중에는 우울증에 빠져 스스로 독방 수감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독방의 경우 누워 있기도 비좁은데, 책상을 놓고 사건 기록을 제대로 검토하기 어렵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운동도 하루 30분밖에 허용되지 않아 운동할 때 못 만났던 사람끼리 만나 잠시 안부를 묻곤 한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 비록 같은 시설에 수감되어 있지만 구치소 내에서 다른 이들이 보지는 못한다고 한다.    일단 구치소에 수감되면 수감자끼리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형사소송절차, 형선고결과예측, 검사와 판사 성향에 대해 거의 박사 수준이 된다. 수감자끼리 나누는 화제는 대부분 어떻게 하면 형량을 적게 받을 수 있는지와 무죄 또는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심지어 같이 수감된 사람 중 변호사와 검사, 판사 출신이나 유사 사건의 수사와 재판을 받아본 수감자들이 있으면 수사와 재판에서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도움(자문)도 받는다고 한다.     수감자는 변호사보다 의견서, 증인신문조서, 변론 요지서를 더 잘 작성하는 경우도 있다. 어찌 보면 구치소는 로스쿨의 형법·형사소송법을 가르치는 저명한 교수보다 실무적으로 많은 내용을 알고 토론도 하는 학습장이라고 할 수 있다.     재력이 많거나 권력을 가졌던 명사들은 날마다 온종일 변호사들이 교대로 접견하여 수감방보다는 접견실에서 변호사와 생활하는 시간이 많을 때도 있다. 이에 비해 돈이 없거나 권력이 없는 일반 속칭 ‘잡범’들은 변호사 접견은커녕 가족이나 지인 면회조차 오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재력가나 권력자와 같이 수감되어 그들에게 잘 보이는 행동을 함으로써 사식제공 등 혜택을 받으려는 사람들도 있고, 구치소 내에서도 유전(권)호강, 무전(권)빈곤도 있다고 투덜대기도 한다. 요즘은 독방이 꽉 차서 독방 수감대상자가 다인실로 밀려, 좁은 방에 속칭 ‘칼잠’을 자기도 한다. 무죄, 집행유예, 보석을 받아 석방될 줄 알았는데 석방되지 않아 실망하여 좌절하는 사람도 있다. 이럴 경우 수감자 대부분은 자신을 수감시킨 검사와 판사가 사건의 실체를 제대로 모르고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필자도 많은 수감자로부터 “요즘에는 몸을 때리는 고문이 아니라, 마음을 때리는 말에 의한 강압이나 회유 식의 추궁에 의하여 수사관들이 원하는 내용으로 조서를 작성하고, 그러한 조서를 판사에게 제출하니 판사는 선입견과 편견에 의해 유죄의 심증을 가지고 재판을 하게 되고, 무죄나 억울함을 밝히기가 정말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것을 듣곤 한다.   일부 수감자들은 밤샘 장시간 조사에 지치고, 그 과정에서 인격적인 모멸감을 느끼는 추궁에 시달려 자괴감과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러한 내용을 변호사에게 이야기해보았자 조사과정에서 느낀 심적인 고통은 조서에 기재하지 않으니 답답하다는 이야기를 한 수감자도 있었다.   실례로 중국에서 마약을 운반한 혐의로 구속된 어느 시골 부녀자는 “자신은 그것이 마약인 줄 모르고 단지 보석운반 심부름만 해주면 심부름값을 주겠다는 꼬임에 속아 운반한 죄밖에 없는데 마치 자신이 마약인 줄 알면서 운반한 것처럼 뒤집어 씌워 7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정말 한스럽다”며 자신을 수사한 검찰 수사관과 기소한 검사, 중형을 선고한 판사를 원망하였다.    몸과 마음이 아파도 구치소에는 분야별 당직 전문의사도 부족한 실정이다. 구치소 수감 후 형이 확정되면 교도소로 이감하는데 어느 교도소로 보내질지에 대한 걱정도 많다. 가족 면회가 잘되고, 시설이 좋은 교도소로 이감되어 수용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이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 줄 사람이나 창구를 모르니 답답해한다. 간혹 종교 시설에서 위문을 오기도 하는데 그것이 큰 위안이 된다고 한다. 운동이 그나마 유일한 낙인데 운동시간도 부족하고 공간도 협소하다. 책 반입도 서신전달도 오래 걸리고 절차도 복잡하다.     구치소에서 수감자를 관리하는 교도관의 얼굴을 보면 지친 모습이 역력하다. 여자 수감자들의 변호인 접견실은 남자 수감자들보다 더 협소하다. 사람이 많을 때는 접견실이 아닌 의자에서 접견하기도 한다. 인터넷 화상 면회와 접견이 있다고는 하지만 절차도 까다롭고 화상 면회 시설을 갖춘 가까운 구치소에 가서 미리 예약을 하여야 한다. 왜 미국 등 선진국의 구치소처럼 구치소 안에서 가족과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도록 못 하는 것일까?   검찰의 급작스런 구속영장 청구와 구속 후 연이은 조사에 일부 수감자들은 변호사로부터 충분한 조력도 받지 못한 채 재판에 임하게 된다. 헌법, 형사소송법에서 배웠던 평등의 원칙, 무죄추정과 불구속수사원칙, 충분한 방어권보장을 위한 형사소송절차상의 당사자(검사와 피고인과 변호인)주의, 무기대등의 원칙은 구치소에서 볼 때는 딴 세상의 원칙이다.   구치소에 수감자들이 넘쳐나고 억울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이 땅의 경찰, 검사, 법관들이 반드시 한 번쯤 보아야 한다. 휴가 때 골프를 치고, 외유를 하기보다 자신들이 수사하고 단죄를 했던 구치소, 교도소를 찾아가서 수감자들의 목소리를 한번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경찰, 검사, 법관도 자신들도 잘못하면 단죄받을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미래의 법조인을 꿈꾸는 로스쿨 학생들도 한 번쯤 구치소 시설을 방문하여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 위원들 나아가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도 구치소를 방문하여 억울한 사람들은 없는지, 법집행은 제대로 되고 있는지에 대해 수감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경청할 필요가 있다.

김문수

  청와대 비서관의 주류가 주사파 운동권 출신으로 채워졌습니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63명 비서관 중 22명이 운동권 출신입니다.     임종석 비서실장과 일하는 비서관급 이상 30명 가운데서 17명(57%)이 운동권 출신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첫째, 김일성주의자로서 반미친북 사상을 가지고 활동하다, 감옥까지 살고 나와서도 여전히 반미친북 활동을 계속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임종석은 김일성주의자로 3년 6개월간 감옥생활까지 했습니다. 감옥생활을 한 이후에도 김일성주의를 공식적으로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임종석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국회의원을 하면서도, 반미친북활동에 주력했습니다.    임종석 국회의원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발의하고, 미국 의회가 북한인권법 제정을 하는데 반대 공한을 보내고, 김대중 정부의 대북비밀송금에 대한 특검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북한 핵실험의 원인이 미국의 대북금융제재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임종석 국회의원은 2005년부터는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이사장으로서 KBS, MBC, SBS로부터 북한영상 사용료를 22억 5천만 원을 받아 북한에 7억 9천만 원을 송금하였고, 14억 6천만 원은 법원에 공탁되어 송금 대기중입니다.    둘째, 사람의 사상은 바뀌기 아주 힘듭니다. 담배 끊기보다 더 힘듭니다. 고문을 당하고, 감옥을 다녀오고, 생활이 어려워도 사상을 바꾸지 않고 반미친북활동을 계속합니다. 연옥의 고통을 거쳐서도 잘 바뀌지 않는 것이 사상입니다.    셋째, 이들이 주체사상을 배운 것은 전대협이나 한총련 등 대학생 조직이나 비밀지하조직을 통해서, 단파 라디오로 북한의 대남혁명방송을 들으며 조직적 사상학습을 통해 불법적으로 배웠습니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건국과 헌법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파괴하는 불법사상이기 때문에 감옥에 다녀 왔습니다.    넷째, 이들은 혁명적 열정과 의리가 강하기 때문에 두 명만 모여도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청와대에 22명이나 들어가 있으니, 엄청난 일입니다.    다섯째, 이들은 사상통일이 되어 있고, 과거 운동권 경험을 함께 했기 때문에, 청와대 내에서 서로 긴밀하게 협력할 뿐만 아니라, 바깥의 정당이나 시민단체와도 동지적 협력을 합니다. 대학 운동권 혁명동지들이 법조계, 언론계, 학계, 공무원, 민노총, 전교조, 문화예술계, 영화계, 종교계, 경제계, 농민운동, 환경운동, 생협운동, 지역운동으로 민들레 꽃씨처럼 사방으로 흩날려서, 뿌리 박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번 동지는 영원한 동지입니다.” 그리고 “혁명은 영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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