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세훈

서울대병원에서 ‘3시간 대기, 3분 진료’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국립 서울대병원부터 일인 진료시간을 15분으로 늘려서 실시한다고 한다. 국민들 입장에는 너무너무 국민을 사랑하는 제도개선으로 볼 수 있다. 3시간 기다려서 겨우 3분 진료하던 아쉬움과 불만을 15분이라는 긴 시간동안 진료를 꼼꼼히 봐 주도록 정권이 나서서 제도화해준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서울대병원이야 국립이니 적자가 나더라도 국민세금으로 메워 줄 것이고, 진료하는 의사는 진료환자 숫자에 상관없이 월급이 나오니 3분 간격으로 환자에게 시달리던 것을 15분 간격으로 시달림이 줄어들었으니 환자나 의사나 병원이나 모두가 ‘윈윈정책’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3시간 대기, 3분 진료의 본질적 원인을 모르고 이런 정책을 자랑스럽게 실시하면 정말 아마추어 정권이 되고, 과거 3분 진료로 불만을 가진 분이 15분 동안의 긴 시간 진료를 받고 행복해 하는 모습만으로 판단하면 광우병 연출에 가까운 고의적 현실 왜곡이 된다.   이유는 이렇다. 서울대병원에 진료 받고자 하는 숫자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므로 당장 대기시간이 단순계산으로도 평균 5배 늘어날 것이다. 3분 진료가 15분 진료가 되었으니 환자가 더 몰릴지도 모른다. 또 대기시간이 늘어나서 결국 진료를 못 본 환자들이 당장 3분 진료라도 받게 해달라고 집단 항의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건 수학이 아니라 산수만 공부한 사람이라도 당연히 예측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지적하면, 그렇기 때문에 중증환자가 아니면 서울대병원에 가지 않아야 한다고 정책담당자들은 이야기 한다. 대학병원으로 몰리는 현상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방법으로 해결 될 것이면 이미 대학병원에 몰리는 환자문제가 벌써 해결 되었어야 한다. 더욱이 대학병원으로 몰리는 현상을 지금보다 대기 시간을 5배 늘려서 대학병원에서 기다리다 지쳐서 안 오도록 하는 것이 이 제도의 목적이라면 솔직히 목적을 알려야 한다. 진짜 목적은 숨긴 채 국민을 위해서 3분 진료를 15분 진료로 제도화 한다는 측면만 알리면 그것은 대국민 사기다. 따라서 이런 대답은 삶이 피곤하면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는 사이비 종교집단과 같은 수준의 말이다.   사람을 죽여서 현행범으로 붙잡힌 살인자도 체포와 수사와 처벌에 인권이 있다. 이것은 여론조사로도 바뀔 수 없는, 민주 비민주의 현재의 가치를 뛰어 넘는 인권에 관한 정부의 민주 문명사회의 상징적 규범이다. 살인자라 하더라도 살인을 저지른 범죄행위를 처벌하는 법에 정한 제재를 제외하고는 살인자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어떤 부자유나 어떤 제재도 있을 수 없다.   봉건제도 하의 대감 집에서 부리는 종에게도 어떤 일을 시키면서 일의 목적을 설명하고 성실히 일을 수행할 것을 명령하지, 일 하나 하나를 몇 분에 혹은 몇 시간 간격을 처리하라고 지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예라 하더라도 일을 맡은 주체가 기계가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에 맡은 사람이 목적에 맞게 효율적으로 처리해나가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의사는 비싼 등록금에 6년 대학공부하고 노예보다 못한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4~5년 거쳤을 뿐 아니라 그것도 자격을 검증하기 위해 국가고시를 쳐서 실력이 확인된 전문가이다. 입으로만 대중에게 어필해서 인기투표 하듯이 수시로 떨어졌다 붙었다 하는 선출직 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이런 지상 최고의 가치인 국민건강을 지키는 전문직의 진료행위를 하는 의사를 감옥에 잡아 놓은 살인범죄자 만큼도 배려하지 않고 의사를 봉건시대 노예만큼의 대접도 하지 않는, 전기 스위치만 올리면 부서질 때 까지 돌아가야 하는 대량생산 기계 부속품으로 여기는 무식하고 뻔뻔한 마음이 아니면 이런 일을 구상할 수도, 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의사도 15분 진료를 당연히 하고 싶다. 국민은 대기시간을 최대한 줄이길 원한다. 그 해결책이 고작 서울대병원의 3시간 대기, 15분 진료정책 뿐인가. 이는 한 마디로 의료정책 담당자의 눈 감고 아웅 하는, 국민과 의사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정책이다.   의사도 국민이다. 의사를 최소한 배려하는 것도 자랑스러운 정부의 책임이다.

홍익희

오늘은 저와 함께 유대인의 경전, 탈무드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유대교의 경전은 모두 몇 개일까요? 유대인의 경전은 2개입니다. 하나는 ‘토라’이고 또 다른 하나가 ‘탈무드’입니다.    여러분 토라는 읽어보셨죠? 안 읽어보셨다구요? 여러분은 토라를 조금이라도 읽어보셨을 겁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구약성경의 도입부 첫 다섯 권. 곧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가 썼다고 하여 이를 모세오경이라 부릅니다. 바로 이 모세오경이 토라입니다.    구약(舊約)의 약(約)은 ‘계약’을 뜻하는데, 히브리어로는 혈약(血約)을 의미합니다. ‘피로 약속한 영원불변의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구약을 경전으로 삼고 있는 종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경을 ‘구약’이라 부르는 걸 싫어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성경을 ‘타나크’(TANAKH)라 부릅니다. Torah(율법서), Neviim(예언서), Ketubim(성문서)의 첫 문자를 떼어 만든 이름으로 총 24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유대교는 히브리 원문이 남아 있지 않으면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기독교의 구약성경 보다 권수가 적습니다.    그럼 타나크는 토라 곧 율법서 말고도 19권이 더 있는데 나머지는 뭐냐구요? 유대인들은 나머지 부분은 토라를 보조하거나 해설하는 보조경전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토라만을 양피지에 손으로 필사하여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어 이를 갖고 예배를 봅니다.   토라에는 창조 이야기를 시작으로 출애굽과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의 유대인 역사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을 비롯해 유대민족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율법이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 토라에 실린 율법의 수는 613개입니다.    이 가운데 “하지 마라”가 365개로 일 년의 날 수와 같고, “하라”가 248개로 이는 인간의 뼈와 모든 장기의 수와 같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 우리가 일 년 내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의 지체를 가지고 열심히 해야 할 것들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 합니다.    토라는 특별하게 규제하는 것이 없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이런 저런 일은 하라’고 적혀 있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이런 저런 일은 하지 마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규제를 최소화하는 이른바 ‘네가티브 시스템’입니다.    토라는 ‘가르침’이란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이렇듯 토라는 유대민족이 어떻게 태동하여 왔는지를 알려주는 역사서이자 유대 민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율법서입니다.   그럼 탈무드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그의 백성들이 앞으로 지킬 십계명과 율법을 내려주며 삶의 작은 부분까지 아주 자세히 알려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이 초막절 절기 때에 모세에게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라는 '율법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뒤 하느님은 초막을 짓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서 율법의 말씀은 글로 쓴 토라에 기록되어 있고 초막 짓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장로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하나는 글로 쓰여 ‘토라’로 남겨졌고 또 다른 방대한 내용은 미처 글로 쓰이지 못하고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율법은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글로 쓰여 진 ‘성문율법’이요 또 다른 하나는 말로 전해져 내려온 ‘구전율법’입니다.    구전율법은 오랜 시간이 지나자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선대의 설명을 그대로 후대에 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기원전 6세기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왔을 때, 선지자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더 늦기 전에 구전율법들을 모아 책으로 편찬하기로 했습니다. 에스라는 유대인의 종교생활과 일상생활을 규율하는 구전율법을 모아, 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글로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작업은 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져 방대한 저작을 낳게 됩니다.   서기 210년경 랍비 ‘유다 하 나지’는 사람들을 모아 그간 선배 랍비들이 모아 오던 구전율법의 본격적인 편찬에 착수해 6부(농업, 종교절기, 결혼, 민법과 형법, 제물, 제식) 63편 520장으로 완성했습니다. 이로써 탄생한 것이 탈무드의 전신 ‘미쉬나’입니다.   가운데 부분이 미쉬나, 그 주변이 미쉬나를 해석한 게마라 그런데 미쉬나는 원론적 내용만 담고 있어,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미쉬나를 바탕으로 오랜 기간 토론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 뒤 300여 년 동안 많은 랍비들은 미쉬나에 대한 보충설명과 해석을 더 했습니다. 이 해석들을 모은 것이 ‘게마라’입니다.    이렇게 미쉬나와 그 주해 게마라를 한데 모은 것이 ‘탈무드’입니다. 사회의 모든 사상에 대해 구전으로 전해지던 율법을 모아, 해설을 덧붙여 집대성한 책입니다. 이렇게 탈무드는 원로 랍비들이 후손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 기원전 500년부터 약 1천 년 동안 현인들의 말과 글을 모아놓은 지혜서의 일종으로 유대 교육의 중심서입니다.    ‘탈무드’는 히브리어로 ‘위대한 배움’이라는 의미입니다. 탈무드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종교적 지침과 민족적 동질성을 지켜주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탈무드는 원래 이방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책이었습니다. 시중의 탈무드 책은 유대인의 삶과 생각을 규율하는 율법 자체가 나와 있지 않으며, 그저 유명한 랍비 이야기나 흔히 알려진 일화나 우화 같은 것들로 채워져 있는 일종의 우화집입니다. 이는 실제 탈무드의 양을 생각할 때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탈무드는 한 권의 책이 아니라 63권의 방대한 책입니다. 그 무게가 75 kg이나 나가는 엄청난 분량입니다. 참고로 미국에서 탈무드는 히브리어-영어 대역판 72권으로 나와 있는데 이게 300페이지 책 140권 분량입니다. 탈무드는 책이라기보다는 ‘학문’입니다. 그것도 ‘위대한’ 학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탈무드는 한 가지 정답만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읽는 이의 시각과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후 탈무드 교육을 통한 질문과 토론문화 곧 하브루타가 유대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교육방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질문과 토론문화를 통해 유대인들의 다양한 사고와 창의성이 발현되어 자기 분야에서 우뚝 솟는 업적을 남기는 유대인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탈무드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김병헌

최근 조선일보를 비롯한 주요 일간지에는 6월 27일 열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분과 회의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과 4.19혁명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 신청 대상에 선정됐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기사 중에는 위 문건을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기록물로 언급하며 아래와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사발을 엎어 그린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의 명단을 빙 둘러 적은 사발통문(沙鉢通文)과 농민군 해산을 권고하는 흥선대원군 효유문(興宣大院君 曉諭文) 등이 대표적이다. 동학자료들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이 추구한 평등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조선일보, 2017. 6. 28)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에 말한 사발통문은 사발통문이기 전에 통문조차 될 수 없는 잡기로 분류해야 할 문건이다. 사발통문은 통문 중에서도 주모자를 숨기기 위해 참여자의 명단을 사발처럼 둥근 원을 따라가며 서명한 것을 이른다. 사발통문 이전에 통문이라는 자격부터 갖추어야 하기에 거기에는 일정한 서식이 있다. 개인 간에 오가는 편지에서도 서식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통문의 서식은 서두에 通文이라고 제호처럼 쓰고, 줄을 바꾸어 右文爲通諭事段……(우문위통유사단……)이라는 문구로 시작하여 본론을 말한 다음, 모일 장소나 일시를 쓰고 ……千萬幸甚(……천만행심)이라는 글귀로 끝을 맺으며, 수신처·발신연월일·발신처 및 발신자 명단을 차례로 열기(列記)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를 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대체적인 서식은 이와 같으나 ‘通文’이라는 제목을 주로 쓰는 가운데, 檄文(격문)이나 敬通(경통) 등 다른 제목을 쓴 경우도 있다. 마지막의 발신 일자, 참여자 명단, 수신처 등은 순서가 바뀌기도 한다. 그렇다면 상기 문건이 왜 통문이 될 수 없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이 문건은 대략 내용에 따라 네 단락으로 구분된다. 이를 분석하면 아래와 같다.   제1단락은 1893년 11월, 20명의 동지가 서명하고 각 리의 이집강(里執綱)에게 통고한 문서로 여겨지나 ①제목과 ②본문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이 ③발신 연월일 이하만 있다. 편지를 예로 든다면 마지막의 발신 날짜와 발신자만 있고 앞의 편지 내용이 없는 것과 같다. 둥글게 돌아가며 쓴 이름 안에는 직경 5cm의 원이 있고 그 원을 따라 쓴 20명의 이름 중에는 크기가 약간 큰 전봉준의 이름도 보인다. 제목과 본문을 갖추고 있었다면 여기까지를 통문이라 할 수 있다.   제2단락은 ‘오른쪽과 같이 격문을 사방에 날려 보내니’라는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격문, 즉 앞의 통문을 배포한 다음 일어난 민심의 동향을 적고 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虐政)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어찌할 도리 없이 속만 부글부글 끓이면서 난리라도 터져 나라가 망해야만 한다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던 차에, 동학교도들이 통문을 돌리고 봉기(蜂起)할 것이라는 소식이 돌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호응하는 장면이다. 이 글에는 난리가 나서 나라가 망하든지 말든지 해야지 그렇지 않고 그냥 이대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백성들의 원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제3단락은 통문을 돌리고 난 다음 동요하는 민심 사이에서 동학교도로 이루어진 도인들이 송두호의 집에 모여 차후 진행해야 할 대책, 즉 선후책(善後策)을 논의하는 과정과 그 논의에서 결정된 4개 조항을 적고 있다. 그런데, 정읍시에서는 고부면 고부주산길 4(구 송두호의 집, 신중리 562-1)를 ‘사발통문을 작성한 집’이라 하여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이 문건을 통해 당시 통문이 배포되었다는 점과 통문 배포 후 송두호의 집에 모여 선후책을 논의했다는 점 외에 통문이 누구의 집에서 작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송두호의 집은 선후책을 논의한 곳이지 통문을 작성한 곳이 아니다.     제4단락은 선후책 4개 조항을 결정한 후 이를 실행할 지도부를 구성하는 과정을 적은 것으로 판단되나 나머지 부분이 잘려나가 더 이상의 내용 파악은 불가하다.   이 문건은 통문 배포와 이후 송두호 집에 모여 4개 조항의 선후책을 의결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집행부를 구성하는 등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기록한 잡기다. 이 문건의 작성자는 아마도 이러한 과정에 직접 참여하거나 자세히 알고 있던 사람일 것으로 짐작된다. 만약, 발송 연월일 앞에 통문이라는 제목과 본문이 있었더라면 당시 배포된 진본은 아닐지라도 그것만 따로 떼어내 사발통문이라 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발신 날짜, 발신자, 수신자만 남아 있는데다가 나머지 통문을 배포한 후 벌어진 상황이 같은 면에 기록되어 있어 통문이라 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이 문건은 2015년 12월, 전라북도에서 ‘사발통문은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역사자료로, 1893년 11월, 전봉준을 비롯한 20명이 거사 계획을 세우고 그 내용을 사방에 알리기 위해 작성한 문서’라는 사유를 들어 문화재(전북도 고시 제2015-337호)로 지정하였다.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 필자는 상기 분석 자료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으로 보내 통문이 될 수 없다는 취지로 이의를 제기한 바가 있다. 하지만 필자의 이의 제기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로 지정된 후에는 기념재단을 직접 방문하여 전북도청과 기념재단 관계자를 만나 사발통문은커녕 통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피력하였다. 이에 두 관계자는 필자의 주장에 동의하고 추후 문화재 심의위원과 논의하여 그 결과를 알려주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이후 연락은 없었으며 지난달 세계기록유산 후보에 선정되었다는 사실을 보도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이없는 일이다.   잡기에 지나지 않는 문건을 사발통문으로 둔갑시킨 황당한 일은 교과서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현행 교과서 중 교학사와 금성출판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교과서는 해당 문건 사진과 함께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 사발통문으로 소개하고 있다.   ▲ 천재교육 한국사 교과서 197쪽   이에 대해 필자는 이 문건을 사발통문으로 소개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필자의 지적에 대한 출판사의 답변과 처리 결과는 아래 표와 같다.   교학사 수록하지 않음 금성출판 수록하지 않음 동아출판 학계의 일반적인 논의에 따른 것임 리베르 집필자의 답변 거부 미래엔 필자의 주장이 타당하고 보임 - 미수정 비상교육 검토 약속 - 미수정 지학사 집필자의 답변 거부 천재교육 사발통문 → 사발통문 필사본으로 수정  비슷한 질의에 대해 가장 황당한 답변을 한 곳은 국사편찬위원회다. 답변 중 일부를 소개한다.   ‘조선시대 생산된 통문에 일정한 양식이 있다는 것을 본인은 들어본 바 없다. 또한 통문에 일률적으로 右文爲通諭事라고 언급되었다는 것도 금시초문일 따름이다.’   ‘질의자는 통문이라면 전봉준의 글씨를 크게 쓰지 않았다고 단정하시고 있으나 그 근거는 매우 박약하다. 전봉준의 글씨가 크게 쓰여 졌다고 하나 그것은 상당히 주관적 판단에 불과한 것이며 글씨의 크고 작음은 붓글씨를 쓸 때 각자의 버릇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집강(執綱) 좌하(座下) 이하의 문구는 난리를 일으키게 된 배경과 불특정 다수가 이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 그리고 어떻게 난리를 진행시킬 것인가가 기재되어 있는 셈이다. 대개 연구자들은 이 점에 주목하였기 때문에 당연하게 이 문건을 고부 농민봉기를 촉발시킨 통문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국편의 답변을 보노라면 답변자는 이 문건을 읽어보지 않았거나 읽었더라도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답변자는 고문서에 대한 신중한 접근 자세가 느껴지지 않는다. 고문서는 글씨의 크기뿐만 아니라 점 하나까지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하여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서술조차 확인하지 않고 ‘금시초문’이라는 말을 쉽게 쓰고 있다. 국편 질의 때마다 느끼는 실망감을 또 한 번 경험하였다.     이 외에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사발통문이라는 항목에서 ‘그 대표적인 예로 동학군의 통문 제1호라고 할 수 있는 사발통문을 들 수 있다.’고 하여 근거도 없이 통문 제1ㅌ호라 하는가 하면, ‘그 내용은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동학 간부 20여명이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宋斗浩)의 집에 모여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이하 악리(惡吏)들을 제거하며, 이어 전주감영을 함락시키고 서울[京師]로 직향(直向)할 것을 결의한 것이다.’라고 하여 사실 관계와 전혀 맞지 않은 서술을 하였다. 그런가 하면 통문이나 언론 등의 항목에서는 이 문건 사진을 사발통문이란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모두 수정해야할 부분이다.   필자의 주장은 위 문건이 본래의 사발통문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사발통문이기 전에 통문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모두들 사발통문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백과사전에 싣고, 교과서에 실어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문화재로 등록하는가 하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기념관 관련자, 심의위원, 교과서 집필자, 백과사전 집필자는 모두 해당 분야 전공자일 것이다. 전공자라면 위 문건을 한 번만 읽어봐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읽고도 판단이 안 된다면 전공자라 할 수 없다.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류근일

보수진영이 철저히 망하자 이제는 보수 가치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고, 자유한국당도 혁신위원회라는 걸 만들어 새로운 보수정당으로 거듭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보수란 어떤 것인가? 사람마다 대답이 다를 것이다. 일부는 보수가 보수를 벗어나 중도 쪽으로 좌(左)클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만들고 발전시킨 세력은 사실은 처음부터 보수인 적이 없었다. 늘 진보적이고 변혁적이었다. 공산주의-좌파 민족주의와 대립하다 보니 우파로 자리매김 당했고, 그렇게 되다보니 보수라고 불리게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한국 자유-민주-공화 세력으로선 보수라고 낙인찍히는 게 억울할 수도 있다.    한국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원류(源流)를 조선왕조 말기의 문명개화 운동에 둘 경우 그 선각자들에겐 당시의 조선왕조 또는 조선사회는 변혁의 대상, 개혁의 대상이지 온존(溫存) 시켜야 할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의 근대의식은 물론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예컨대 이승만 박사는 조선왕조의 정치 사형수였다. 김구 선생도 동학군 즉 혁명가였다. 그들은 시체 말로 하면 당시의 변혁운동권 즉 진보였던 셈이다. 일제 치하에서도 그들은 반일(反日) 혁명가 즉 진보 인물들이었지, 보수 인사가 아니었다.  1948년의 대한민국도 우리 역사상 최초의 자유-민주-인권-공화-개인-개방-시장 원리에 기초한 근대적 국민국가의 본격 탄생이었다. 이건 보수가 아니라 진보다. 왕조국가-봉건사회-유교 원리주의-중화주의-쇄국주의-사농공상(士農工商)-신분제-양반지주 지배를 타파하고 서양이 선도한 근대국민국로 나아갔다는 것은 ‘진보적’을 넘어 엄청난 혁명적 사태였다. 게다가 그 직후엔 이승만 대통령의 성공적인 농지개혁이 있었다. 이것도 대단한 사회혁명이었다.  1960년대~1980년대의 산업화는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와 천지개벽 같은 변혁이었다. 이처럼 대한민국 자유-민주-공화 세력은 시종 모더니티(modernity, 근대성) 혁명의 길을 따라 끊임없이 ‘진보’를 이룩해 온 비(非)보수 혁신세력이었다.  이에 비한다면 대한민국적 근대화를 서구에 종속되는 '식민지 근대화'라고 배척한 좌파 민족주의자들과 주체사상 파는 겉으로는 ‘진보’를 자처하면서도 콘텐츠에 있어서는 근대화-산업화-개방-자유시장에 반대한 수구꼴통이었다. 현대판 척사위정(斥邪衛正) 파였던 셈이다. 이들은 1980년대 후반엔 한국의 ‘식민지 반봉건사회’가 망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막상 망가진 건 북한 ‘주체’ 체제였고, 대한민국은 선진국 문턱까지 도달했다.  근대화라고 해서 물론 다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인간 소외(疏外), 양극화, 환경파괴, 대량살상무기, 타락한 이성의 산물인 좌-우 극단의 전체주의 같은 비극이 파생되었다. 이래서 오늘날엔 이런 부작용을 치유하기 위한 성찰적 철학, 사회과학, 정책학들이 대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정적인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선각자들은 북한 김씨 일족의 천황제 파시즘에 비해 월등히 우수한 변혁노선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맞다. 그들이 걸은 길은 수구나 보수라기보다는 변혁적이고 진보적이고 혁신적이며 끊임없는 변신의 길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 자유-민주-공화 진영은 자부심을 가지고 천명해야한다. 우리는 참 진보세력이라고.    오늘의 한국 자유민주 진영의 재기 노력은 바로 이런 진보적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재발견과 긍지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대한민국 자유-민주-공화 세력은 밀리고 쫓기고 몰리고 추궁당할 과거의 세력이 아니다. 그들은 박차고, 구(舊)를 깨고, 혁신하고, 변동하고, 창출하고, 성취한 미래의 선취(先取)자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자임해야 한다.  그럼에도 오늘의 국면에서 한국 자유-민주-공화 진영은 왜 이렇게 참담한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는가? 지도층이 공부를 하지 않았고, 나태했고, 이상과 기상(氣像)을 잃었고, 후대를 양상-교육하지 않았으며, 문약(文弱)에 빠졌고, 위기의식이 없었고, 주적(主敵)을 망각했고, 그에 대한 투철한 투쟁의식을 상실했고, 시류(時流)에 영합하고 비겁했으며,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도층의 타락과 더불어 대중사회(mass society)도 함께 타락해 갔다.    따라서 대한민국 자유-민주-공화 진영 재활의 길은 선배 세대가 대한민국 네이션 빌딩 과정에서 보인 탁월한 방향선택과 변혁적-진취적 발상 자체는 계승하면서 그것을 오늘의 시대적 요구에 맞게 좌파보다 앞서(그러나 좌파보다 현명하게) 재조정하는 작업과 함께, 우리가 그 동안 방기했던 시퍼런 윤리적-정신적-미학적 기상과 서슬을 갖추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결론은 자명하다. 한반도의 싸움은 정태(靜態)적이고 전(前)근대적이고 수구적인 전통사회를 마치 ‘민족적’인 양 설정하는 쇄국적 반(反)근대문명 세력에 대한, 대한민국적 근대문명 세력의 투쟁이다. 이 투쟁이 오늘의 담당세대가 잘못한 탓으로 궤도에서 탈선했다. 정신을 가다듬어 과오를 반성하고 다시 본 궤도에 올라타야 한다. 그리하여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의 문명개화를 향한 100년래의 변혁투쟁을 다시 이어가야 한다. 이런 화두만 서면 그 다음부터는 실마리가 하나하나 풀릴지 않을까?

엄상익

변호사가 사무실에서 무릎을 꿇린 채 쌓인 책더미 위에 고개를 묻고 죽어 있었다. 팬티 차림에 양팔은 뒤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그런데 그의 배 쪽의 살이 일부 잘려나간 처참한 죽음이었다. 변호사를 살해한 범인은 피로 벽에다가 ‘탐욕’이라고 써 놓고 유유히 사라졌다. 돈독이 올라 강간범을 무죄로 조작한 변호사에 대한 응징이었다. 비오는 토요일 오후 방에서 혼자 본 명화 ‘세븐’의 한 장면이 내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서른세 살부터 예순다섯 살이 된 지금까지 변호사 생활을 해 왔다. 전문 직업인으로서 자신의 직업을 보는 시각이 많이 변해왔다는 걸 느꼈다. 가난한 변호사로 혼자 막 개업을 했을 때는 찬바람 부는 어두운 광야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벌어서 가족이 먹고 살아야 했다. 돈만 준다면 뭘 못하겠어? 악마의 그런 속삭임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돈 몇 푼을 받고 살인사건도 맡았고 또 조직폭력배들의 변호도 맡았다. 그들 중에는 이미 영혼이 빠져버린 좀비같이 변질된 자들이 많았다. 본능만 남아 다른 이의 피를 빨고 살을 뜯어먹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전염되어 가는 것 같았다.     살인범을 변호하는 한 법정에서였다. 방청석 뒤에 앉았던 죽은 여인의 아버지가 갑자기 일어나 법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그가 피가 다 빠진 듯한 하얗고 무서운 표정으로 내게 손가락을 쳐들면서 소리쳤다.    “당신 그렇게 살인범을 두둔하는 거 아니야. 재판장님 내 딸을 죽인 저 놈도 사형에 처해 주세요.”     법정 앞에서 죽은 아버지와 동료들이 나를 둘러쌌다. 곧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올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였다. 나는 억울했다. 법은 살인범이라도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변호사라는 내 길을 간다고 생각했다. 그날 잠이 오지 않았다. 한밤중에 일어나 곰곰 생각했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 것인지. 그 살인범을 왜 변호했는지 내면의 나에게 솔직히 물어봤다.     그랬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변호를 했다. 돈이란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돈만 일단 받으면 죄가 잘 보이지 않았다. 정의에 둔감해지고 승부욕에만 집착했다. 의뢰인의 이익을 위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고용된 양심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악마의 낚시미끼를 탐내다가 아가미가 꿰어져 꼼짝달싹 못하는 신세 같았다.     어느 날 민사법정에서 상대편 변호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로펌에서 나온 세 명의 변호사가 나와 싸우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모두 화려한 경력을 가진 허여멀건 미남들이었다. 검은 법복을 입고 법대 위의 붉은 의자에 앉았을 때는 전능해 보이던 사람이다. 재판이 시작됐다. 그들의 입에서 녹음이 된 듯 화려한 수사의 변론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보기에 그들이 받들어 모시는 분은 정말 나쁜 놈이었다. 몇 년을 뼈가 빠지게 혹사당하고도 임금을 한 푼 주지 않은 악덕 기업주였다.     하나님은 일꾼의 품삯을 넉넉히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 주라고 했다. 그들이 변호하는 기업주는 대형로펌에 큰돈은 줘도 노동을 한 사람의 품값은 주지 않았다. 상대편 세 사람의 변호사를 보는 순간 착시현상이 왔다. 사람이 아니라 잘 생긴 마네킹들이 와서 입을 벙긋벙긋 하면서 속에 있는 녹음된 소리들을 흘려보내는 것 같았다. 내남없이 변호사들이 영혼을 되찾으면 조금은 좋은 세상을 만들 텐데.

문갑식

  국정농단의 장본인인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7월 12일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재판에 출석해 어머니 최순실과 이 부회장에게 불리한 증언을 쏟아 냈다. 불출석 사유서까지 내 재판에 안 나올 것으로 보였던 정유라가 작심한 듯 재판 당일 특검(特檢)이 제공한 차를 타고 증언대에 선 것이다.    정유라가 이 부회장 재판에서 한 증언의 요지는 두 가지다. ▲명마(名馬) ‘살시도’의 이름을 바꾼 것은 “삼성에서 지원한 것이 드러나면 안 된다”고 엄마가 지시했기 때문이며 ▲어머니 최순실이 박상진 삼성전자 전 사장 등과 만나 자신이 타던 말을 다른 말과 바꾸는 문제도 얘기했다는 말을 승마코치로부터 전해들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정유라의 증언은 말 이름을 바꿨다거나 정유라가 타던 말을 다른 말로 교환하는 ‘말 세탁’이 없었다는 삼성 주장과 배치되는 것이다. 딸로부터 ‘배신’당한 최순실은 조카 장시호로부터 배신당한 데 이어 연타(連打)를 맞게 됐다. 정유라가 ‘살모사(殺母蛇)’ 같다는 말도 나왔다.    딸에게 뒤통수를 강타당한 최순실은 자신의 변호사들에게 딸의 전날 법정 증언에 대해 묻는 등 관심을 보였으며 “딸에게 연락해서 정말 (나에게 불리한 증언을 계속 하려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 의중(意中)을 물어봐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최순실은 “변호인들이 그 아이의 변호를 그만둔다면 딸이 국선변호사를 써서라도 알아서 자기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변호인들에게 말했다고도 한다.    사서삼경의 하나인 《대학(大學)》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나온다. 유교에서 강조하는 올바른 선비의 길(道)을 이르는 것인데 ‘수신제가’의 반대말이 궁금해 논어등반학교 이한우 교장에게 물어보니 ‘패가망신(敗家亡身)’ 아니겠느냐는 답이 왔다. 그래서 다시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반대말은 ‘망신패가멸국혼천하(亡身敗家滅國混天下)’ 쯤 되지 않느냐고 묻자 ‘정확히 그대로’라는 답이 온 것이다.    작년 10월부터 《월간조선》은 최태민·최순실·정유라와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한 여러 문헌과 검찰 및 특검 신문조서, 공판기록 등을 꾸준히 보도해 왔다. 그런 자료들을 바탕으로 한 ‘국정농단 사건’의 골격은 이런 것이다.    최순실은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인성(人性)도 그다지 바르지 못한 자기 딸 정유라를 어떻게든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 승마를 시켰고 온갖 ‘백’을 동원해 정유라를 국가대표로 만들어 아시안게임에 출전시켜 메달을 획득했다. 그 과정에서 정유라보다 실력이 낫거나 딸의 ‘신분 세탁’에 문제가 되는 인물은 온갖 갑질을 해서 생매장시켰다.    이렇게 해서 획득한 메달을 들고 이화여대에 체육특기생으로 입학시켰으며 그 과정에서도 대학 관계자들에게 특혜와 압력을 동시에 구사했다. 최순실은 딸을 일단 명문여대에 입학시킨 뒤 딸이 평생 먹고살 수 있도록 스포츠기획사를 차려주려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고등학교 3학년생이던 정유라가 덜컥 임신을 한 것이다. 최순실은 이제 급해졌다.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딸’이었기에 제주도로 사람을 딸려보내 아이를 낳게 하고 독일로 보내 다시 승마를 시키려 한 것이다. 물론 정유라는 승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최순실은 거의 단말마(斷末魔)처럼 ‘최후의 한탕’을 노렸다. 여러 재벌기업으로부터 강취한 돈으로 K스포츠재단을 설립했고 자기 딸에게는 스포츠매니지먼트 회사 비슷한 것을 차려주려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든든한 ‘백’을 믿고 한 것이다. 하지만 ‘갑질의 대명사’ 최순실은 그런 거친 행동을 하면서 고영태·노승일 등 수족(手足)들이 흑심(黑心) 혹은 배신(背信)을 기획하고 있는 걸 몰랐다.    반면 삼성그룹의 경영진은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말(言)이라면 꼼짝 못하는 것을 알고 최순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최순실이 홀딱 넘어갈 만한 최대 약점인 말(馬)로 접근했다. 이런 사실을 이재용 부회장에게 미리 보고했다는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승마계에 유명한 격언이 있다. ‘말(馬)이 있는 곳에 말(言)이 많다’는 것인데 작년부터 국민들은 그 격언의 실증을 목도하고 있다. 한 욕심 많고 인성 나쁜 중년 여인과 그 못된 딸의 패가(敗家)가 결국 자유경제체제의 세 축을 뒤흔들고 있다. 보수당의 위기와 대표적인 기업에 망신 주기, 그리고 보수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있으니 이 어찌 ‘망신패가멸국혼천하(亡身敗家滅國混天下)’가 아니겠는가.⊙

오봉학

노고단 산장의 아침은 일찍부터 분주하다.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지리산 10경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노고단 운해는 장관으로 꼽힌다. 이를 보려는 기대감으로 산행을 서두른다.      학생들도 긴장하고 있었는지 깨우지 않았는데도 모두 일찍 일어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안 되도록 서로 조심하면서 부산하게 준비하는 모습이 기특하다. 식사 준비부터 설거지에 주변 청소까지 미리 나눈 각자의 역할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인다. 요즘 청소년들이 어른 말을 잘 안 듣고 스스로 할 줄 모른다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자신이 해야 한다고 느끼는 일은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한다.      지리산 종주는 노고단을 오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늘의 목적지인 벽소령 산장은 학생들 걸음으로 11시간에서 12시간 정도 걸린다. 노고단을 오르는 길은 처음부터 매우 가파르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출발했지만 역시나 만만치 않다. 배낭의 무게도 무겁게 느껴지고, 길을 올려다보면 마치 땅이 하늘로 훅 들어올려진 것 같아 아찔하다. 학생들은 아무리 주의를 줘도 연신 물을 들이켜며 제자리에서 도무지 발을 떼려 하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속았다” “왜 왔지?” 하는 후회의 말들을 내뱉는다.      모두 숨을 몰아쉬며 힘들어하고 있을 때, 준범이가 보란 듯이 혼자 가볍게 치고 올라간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평소 체력이 약하고 체육시간에 운동능력이 떨어져 힘들어했던 준범이다. 산행이 결정됐을 때 준범이와 부모님에게는 특별 부탁까지 했었다. 그런 준범이가 당당하게 앞서서 올라가고 있지 않은가! 이를 본 다른 학생들은 경쟁하듯 손으로 배낭의 밑을 받쳐 올리며 힘을 내서 올라갔다. 드디어 노고단에 도착했다. 발밑으로 넓게 펼쳐진 노고단 구름바다는 학생들을 시인으로 만든다.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멋진 감탄사들을 연신 쏟아내고 있다. 소중한 땀방울로 얻어낸 훌륭한 경치를 즐기는 귀한 시간이다. 학생들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장면을 몸에 담고 있다. 이 길에 오기까지 준범이의 역할이 컸다.      준범이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준범아, 너는 체력이 약하니 특별히 더 잘 준비해야 한다. 꼭 함께 종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나의 말에 준범이는 저녁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아버지와 함께 동네 낙산 성곽 길을 걸었고, 집에서도 배낭을 메고 러닝머신 위를 걸었다고 한다. 힘든 과정을 묵묵히 이겨낸 데에는 아버지의 응원이 있었다. 준범이 아버지는 힘든 훈련을 함께하면서 “너는 해낼 수 있다”는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으셨다고 한다.      이후 준범이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학교 생활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반 학생들도 준범이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체력이 좋은 학생으로 통해 체육시간에도 활동적이 되었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자신 있게 도전하는 학생이 되었다. 성적도 올랐다.      부모의 역할 중 하나는 아이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다가 실패해도 위축되지 않고 또다시 도전할 수 있는 환경과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조급함’은 버리고 ‘느긋함’을 갖는 거다. 학생 스스로 도전하고 이루어내는 과정을 지켜보고 기다려주는 인내가 필요하다.    오봉학      서울 동성중학교 상담교사

김태산

북한정권의 마지막 보루인 평양은 1996년 2월부터 식량 배급이 완전히 끊겼다.사람들이 무리로 죽어나가고 가정들은 파산나고 군인들도 무리로 쓰러졌다.고난의 행군 전 기간에 최고 사령관 김정일은 어디에 숨었는지 코빼기도 안 보였다.   그런데 수백만이 굶어죽기를 2년째 되던 1998년에 들어서면서 남포항에 쌀 실은 남조선 배들이 들이 닥친다. 인민군 차량들은 번호판을 감추고 쌀을 실어 나른다.솔직히 남조선 군대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던 북한사람들은 실망 100%였다.   이때를 노리던 노동당 선전 선동부가 떨쳐나서서 불어댄다.“미제 침략자들과 남조선 괴뢰도당들이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께 드디여 무릎을 꿇고 경제 봉쇄를 풀고 지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직 위대한 장군님만을 따라 나아 갈 때에 우리민족의 미래는 휘황찬란할 것입니다, 위대한 김정일 장군 만세!”   군인들과 당일꾼들 보위, 안전, 검찰 일꾼들에게는 식량공급이 재개되고 그들은 김정일의 지시를 따라서 국가의 질서안정과 국민단속에 돌입하였다.그러나 국민들에게는 여전히 한 알의 식량도 공급이 되지 않았다.   국민들은 다시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끌려 다니며 위대성 강연을 들어야 했다.   생활 총화도 다시 시작되고 산비탈 뙤기 밭은 회수 당했다.   시장마당은 철폐되었다. 극심한 기아와 죽음의 뒤를 이어 국민들에게 찾아들던 “자유”는 무참히도 저지당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은 남한사람들을 미워한다.하늘이 우리에게 비싼 댓가를 치루고 주었던 “자유”를 빼앗아가게 만든 사람들이 남조선 사람들이라고....   그런데 남한에 오니까 자기들이 쌀을 주어서 햇볓 10년간 북한 국민들을 살렸다고 자랑스럽게 떠드는 무식한 인간들이 적지 않더라.   그래서 간단한 자료를 공개한다.  -북한군 120만 명에 군관 가족들 까지 하여 1년에 식량을 40만톤 소비한다.  -노동당 유급일꾼, 공산대학을 비롯한 정치대학 학생들, 그 가족들 도합 28만 여명에게 년간에 6만톤 이상의 식량을 공급한다.  - 국가안전 보위부와 국가보안부성원들과 정치대학 학생들 그 산하기관 성원들과 그 가족들 까지 하여 도합 25만 명에게 년간 식량을 5만톤 이상 공급한다.  - 기타 검찰기관과 재판 기관은 빼고도 년간 최소한 50만톤의 식량이 노동당과 독재기관들과 군대에 공급이 된다.   결론은 남한이 준 쌀은 군대와 노동당 간부들, 독재의 하수인들만 살찌웠을 뿐이며 그로 인하여 국민들은 자유를 빼앗기고 또다시 노예의 운명을 강요당해야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면 북한에서 자체로 생산하여 군대와 당일꾼들에게 주려던 쌀이 남아서 국민들에게로 돌아가지 않았겠는가?” 라고 억지를 부려본다.   천만에! 북한정부는 그 쌀을 전쟁예비물자로 모두 2호 창고에 쓸어 넣고 국민들 속에서 “우리는 노동당이 아니라 남조선 때문에 살아났다.”는 감사한 감정이 조금도 생기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참고로 장마당에 나돈 남한의 쌀은 군인들과 도둑들이 몰래 빼돌린 쌀과 쌀자루가 조금 나돌았을 뿐이다.   지난 9년간 북한 국민들에게 차려졌던 “자유”를 새 정부가 다시 빼앗는 행위를 하지말기를 진심으로 바랄뿐이다.

배철현

▲ 베히스툰 비문세계 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왕은 누구인가? 우리는 흔히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고대 페르시아제국의 다리우스 대왕(기원전 550~486년)이 인류 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왕이다. 그는 기원전 550년경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파르티아 통치자 히스타스페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세 번째 왕으로, 기원전 522년부터 기원전 486년까지 36년간 통치하였다. 그는 서쪽에서 새롭게 등장한 아테네와 기원전 490년 마라톤전쟁을 치렀던 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다리우스 대왕은 제국에 필요한 경제구조, 도로망, 통화 등을 정비하여 인류 최초의 제국을 만들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다리우스에 관한 자료를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저작 ‘역사’에 의존해왔다. 페르시아에 관한 사료를,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그리스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해온 셈이다. 헤로도토스의 해석이 객관적 사실을 표방하고 있지만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시작된 ‘오리엔트 르네상스’로 페르시아 쐐기문자가 판독되기 시작했다. 쐐기문자는 19세기 초 판독될 때까지 1500년 이상 사람들에게 장식으로만 여겨져왔다.      1618년 피구에로아가 고대 페르시아 다리우스 대왕과 그의 후손들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에서 수많은 유적지의 흔적을 보았다. 그리스, 로마의 저자들이 자신들의 작품에서 숱하게 언급했던 바로 그 왕이었다. 그는 이 유적지에서 새로 발견한 알 수 없는 문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문자들은 아람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혹은 아랍어도 아니다. 이들은 삼각형으로 피라미드나 오벨리스크 모양과 거의 유사하다.”      1657년, 필사한 쐐기문자가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당초 쐐기문자는 이집트의 성각문자와는 달리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1700년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히브리어와 아랍어 교수였던 하이드는 이 문자들이 쐐기처럼 생겼다 하여 설형문자(楔形文字·cuneiform)라 불렀다. 영어의 cuneiform은 cuneus(쐐기)+forma(모양)의 합성어다. 1712년 네덜란드의 의사이며 고전학자인 캠퍼가 1686년 유적지를 방문해서 그린 쐐기문자 문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1770년대까지 쐐기문자 판독에는 진전이 없었다. 그러다가 덴마크의 여행가였던 니부르가 페르세폴리스에 써 있는 문자는 모두 세 종류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 세 종류의 문자는 후에 인도-유럽어인 고대 페르시아어, 고립어인 엘람어, 그리고 셈어인 아카디아어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니부르의 작업은 18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쐐기문자 판독의 기초를 놓은 셈이다.      쐐기문자 판독에 첫 진전을 본 사람은 독일 괴팅겐의 고등학교 라틴어 교사였던 그로테펜트였다. 그는 중기 이란어와 산스크리트어, 그리고 고전문헌 등에서 반복되는 관용어구를 대입시켜 1802년 고대 페르시아어를 거의 판독하게 된다. 그가 만든 음절표에 실수가 있었고 그가 대학교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그가 쐐기문자 판독의 선구자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베히스툰 비문의 발견      쐐기문자 판독이 진행되면서 단문보다는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장문의 쐐기문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란의 자그로스산맥의 서쪽 베히스툰산에는 한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영국의 장교이자 외교관인 로린슨(1810~1895)은 1826~1833년까지 인도에 장교로 머물면서 힌디어, 아랍어, 현대 이란어를 배웠다. 그 후 이란 국왕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해 베히스툰산이 속해 있는 케르만자 지방의 책임자로 부임했다. 그는 탁월한 체력과 동네 양치기 소년의 도움으로 1100행 이상이 되는 베히스툰 비문을 모두 베끼는 데 성공하여 판독하였다. 이 베히스툰 비문에 바로 다리우스 대왕의 족적이 남겨져 있었다.       기원전 522년 페르시아 전체는 정치적 혼란기였다. 키루스 대왕의 아들 캄비세스 왕이 이집트 정벌에 나서자 페르시아는 내분에 휩싸였다. 캄비세스의 동생이라고 자칭한 가우마타는 스스로를 왕이라 칭했다. 이 소식을 들고 페르시아로 돌아오는 도중 캄비세스가 시리아 부근에서 죽는다. 베히스툰 비문에 의하면 캄비세스가 말을 타다 칼집이 실수로 벗겨지면서 칼에 허벅지가 찔려 그 상처로 죽었다고 기록한다.      캄비세스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페르시아제국의 10개 속국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이 정치적 혼란기에 페르시아제국 전체의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이가 바로 다리우스다. 그는 페르시아제국의 속국이었던 파르티아 태수의 아들이었으며 캄비세스 왕과 함께 이집트 원정을 갔던 페르시아의 일만용사 중 한 명이었다. 다리우스는 고대 이란인들이 오래전부터 ‘거룩한 산’이라고 불리는 베히스툰산에 자기의 등극 과정을 자세히 새기기로 결심한다. 그는 고대 이란의 아후라마즈다 신에게 비문을 헌사하여 신으로부터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성산에 비문을 새긴 이유      다리우스 대왕은 인류 최초로 제국을 건설하였다. 좌우로는 터키에서 인도, 상하로는 박트리아에서 이집트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박트리아는 힌두쿠시산맥과 아무다리아강 사이에 고대 그리스인이 세운 나라다. 그는 자신의 공적을 이란 중부 베히스툰산 절벽에 새겨놓았다. 베히스툰산은 이란 케르만자로부터 30㎞ 동쪽에 위치한 산이다. 베히스툰산은 독립적인 산이 아니라 케르만자 지역을 감싸며 북쪽으로 계속되는 산맥 중의 일부이다. 하마단 쪽에서 보면 베히스툰산은 평원에 갑자기 생겨난 500m 정도의 산이다. 다리우스가 이곳에 베히스툰 비문을 남긴 이유는 뭘까.      다리우스 왕이 이곳을 고른 이유는 우연이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실제적인 것이었다. 비문과 부조석상을 새기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평평한 바위가 필요했다. 왕의 대로(大路)를 따라 있는 여느 자그로스산맥의 산들과는 달리 베히스툰산은 메데 왕국의 목초지를 포함한 매우 평평한 절벽을 지닌 산으로 쐐기문자를 정으로 새기기가 용이했다. 둘째, 베히스툰산 아래에 메소포타미아나 이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몇 개의 샘터들이 있었다. 왕의 대로를 지나간 수많은 행상들과 병사들이 지친 몸을 달래던 쉼터였다. 이곳을 지나는 모든 군인이나 대상들이 다리우스 부조물과 비문들을 보았을 것이다. 셋째,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러스에 의하면 베히스툰산은 ‘바가스타나’로 불렸다. 바가스타나를 직역하면 ‘신들의 장소’다. 즉 이곳은 오래전부터 성스러운 곳으로 이 근처에서 가로 10m, 세로 10m의 제단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다리우스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신들에게 제사드릴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네 번째, 다리우스 대제가 등극하면서 최고의 정적인 가우마타를 잡아 처형한 곳이 바로 베히스툰산 근처이다. 다리우스에게 페르시아제국의 왕권을 가져다준 결정적 사건인 가우마타 처단을 기념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베히스툰 비문 안에는 그 처단 장소를 ‘메데 지방, 나사야 지방의 시카유바티’라고 말하는데, 그곳이 바로 베히스툰산 뒤로 10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이런 이유들로 베히스툰산은 다리우스 왕이 자신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한 최적지였다.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된 비문    ▲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다리우스 대왕 부조. 베히스툰 비문은 엘람어, 아카드어, 그리고 고대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삼중 쐐기문자 문헌이다. 이 비문은 고대 페르시아제국 왕들이 남긴 비문들 중 가장 길며 역사학적·문헌학적으로 가장 중요하다. 베히스툰 비문은 서양인들이 쐐기문자를 판독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학자들은 이 비문을 ‘고대 비문의 여왕’이라고 부른다. 베히스툰 비문은 바빌론, 수사, 그리고 엑바타나(현재의 하마단)를 잇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연결되는 고대의 중요한 무역로에 위치해 있었다. 이 길을 따라가는 대상무역상들은 지상으로부터 60m 높이의 절벽 위에 새겨진 다리우스의 부조물과 비문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베히스툰산에 다리우스는 자기가 왕으로 등극한 과정을 쐐기문자로 상세히 기록했다. 베히스툰산의 중턱에 비문과 부조물이 있는데 지상으로부터 69m 위의 경사면에 가로 18m, 세로 7m의 크기로 새겨져 있다. 워낙 험한 곳이라 사람이 이를 보려면 지상으로부터 고작 40m 위까지밖에 접근하지 못한다. 1839년 영국 학자 헨리 로린슨은 베히스툰산 정상에서 자일을 타고 내려와 공중에 매달린 채 쐐기문자를 일일이 베꼈다고 한다. 이 비문과 부조물이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이와 같이 난공불락의 지점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베히스툰 비문의 상단 중심에 부조물이 있는데, 실물 크기(173㎝)인 다리우스 대왕과 두 신하인 인타파르나스와 고르바야스, 그리고 다리우스가 정복하여 처단한 10명의 왕들이 새겨져 있다. 이 부조물 위에는 조로아스터교 최고의 신인 아후라마즈다가 강복하고 있다. 이 부조물들의 위아래로는 반란군들의 이름과 행적을 적은 설명문이 세 가지 쐐기문자로 새겨져 있다. 이 부조물의 오른편으로는 다리우스 왕의 등극 과정을 새긴 엘람어 비문이 손상된 채 있고, 왼편으로는 같은 내용이 아카드어로 적혀 있다. 밑은 고대 페르시아어로 적혀 있다. 당초 다리우스 왕도 ‘왕위 찬탈자’에 불과했지만 현란한 업적으로 결국 키루스가 창건한 페르시아제국을 완성하는 왕이 되었다.      베히스툰 비문에서 다리우스 대왕은 캄비세스를 둘러싼 정치적 혼란기를 설명하고 있다. 다리우스 대왕에 따르면, 캄비세스가 그의 친동생 바르디야를 살해했지만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그때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인 가우마타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한다. 즉 자신이 바르디야라고 속이고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받기에 이르렀다.      그때 이집트를 정벌 중이던 캄비세스는 가우마타가 반란을 일으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페르시아로 돌아오다가 자기가 찬 칼에 찔려 실수로 죽게 된다. 이 모든 사건을 감지했던 다리우스는, 자기가 페르시아제국의 패권을 잡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6명의 경호대원과 함께 신속히 가우마타와 그의 군대에 대한 정벌에 나선다. 그는 곧 가우마타를 죽이고 6명의 경호대원의 추대로 페르시아의 왕으로 등극한다.      이러한 기록은 베히스툰 비문 이외의 사료에서는 증명될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캄비세스가 죽은 후 반란이 일어나 페르시아가 혼란에 빠졌고, 다리우스는 그것을 이용하여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페르시아에서의 반란은 도화선처럼 번져 페르시아제국의 모든 나라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다리우스 대왕은 즉위 후 1년간 이런 반란들을 진압하는 데 전력투구하였다.      다리우스는 베히스툰 비문과 부조상의 구성을 고대 근동의 아주 오래된 예술사적 전통에 따라 재현하였다. 그의 부조상과 구성, 그리고 비문들은 이라크와 이란의 국경 지역인 ‘사리-폴리-주합’에서 발견되는 룰루비의 왕 아누바니니의 부조물과 아키드 왕족의 나람신 왕의 비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다리우스 왕은 파르티아의 왕 히스타스페스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이러스나 캄비세스처럼 아케미니드 왕조의 정통성이 결여돼 있었다. 그런 다리우스가 성산 베히스툰에 조로아스터교의 가장 위대한 신 아후라마즈다에게 인정받아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면서 자기의 정통성을 천명하게 될 때, 당시 고대 근동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사적 자료를 이용한 것은 당연하다. 특히 아누바니니 비문은 아누바니니 왕이 새벽별의 여신 이난나로부터 왕권을 상징한 원형을 받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 부조에서 이난나는 2명의 발가벗은 포로를 포승줄로 묶고 있다. 아누바니니 왕은 헬멧을 쓰고 왼손에는 활과 화살을,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이 비문의 배열은 베히스툰 비문의 배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이 없다.         고대 페르시아어를 창제한 다리우스      베히스툰 비문에서 다리우스 왕은 두 명의 신하들과 서 있다. 왼쪽의 신하는 고르바야스로서 페르시아 창을 들고 서 있고, 오른쪽 신하는 인타파르나스로 활을 들고 있다. 아누바니니처럼 다리우스 왕은 왼발로 그의 정적 가우마타를 밟고 있고, 그 뒤로 8명의 포로를 포승줄로 목을 감은 채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다리우스 왕은 스키타이 정벌에서 ‘스쿤카라는 고깔모자를 쓴 반란군’을 잡은 후에는 본래 새겼던 글씨 부분을 삭제하고 스쿤카의 부조상을 첨가했다. 이 모든 일이 아후라마즈다의 허락으로 이루어짐을 강조하기 위해 날개 달린 아후라마즈다가 손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원형을 달고 다리우스 왕을 축복하고 있다. 이처럼 다리우스 왕은 왕권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베히스툰 비문이 계속하여 뭔가를 새겼고, 같은 내용이 당시에 국제 공용어인 아람어로 쓰여져 23개의 페르시아제국의 속국에 보내지게 되었다.      다리우스 왕은 왕으로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문자를 창제한다. 조선의 세종대왕과 더불어 문자를 창제했다고 확실하게 기록을 남긴 유일한 왕이다. 그는 당시 학자들을 동원하여 쐐기문자로 고대 페르시아어를 창제한다. 하지만 다리우스 왕은 페르시아제국의 공식문서에는 당시 고대 근동에서 널리 쓰이던 전통적인 문자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제국의 속국들 간의 원활한 통신을 위해서 이란어가 아닌 셈어인 아람어를 국제공용어로 사용한 것이다. 아람어는 이미 레반트, 이집트, 동부 이란 지역에 통용되고 있었다. 아람어 알파벳은 엘람어나 아카드어의 쐐기문자보다 배우기가 쉬웠다. 베히스툰 비문에 쓰인 또 다른 언어인 엘람어는 페르시아제국의 행정수도 수사를 중심으로 모든 행정·경제 문서에 사용되었고, 아카드어는 지난 1000년 이상 고대 오리엔트의 외교문자로 쓰였다.      페르시아제국은 처음부터 다문화주의와 다언어주의를 표방하였다. 고대 근동의 긴 역사 가운데 처음으로 다언어 비문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페르시아제국의 원동력은 페르시아제국을 창건한 키루스의 다종교주의와 다문화주의, 그리고 다리우스가 표방한 다언어주의에 있었다.

이상흔

경북 안동과 예천 경계지역에 들어선 경북도청 신청사. 크기나 규모가 경복궁이 명함을 내밀기 부끄러울 정도다. / 경북도청농촌 인구는 30년 전에 비해 반토막이 났다. 그런데도 농어촌 지역 공무원들 숫자는 점점 불어나고 있다. 반면 행정업무는 최첨단화되었다. 과거 100명이 해도 모자랄 서류작성과 분류, 증명서 발급 작업을 컴퓨터 한 대가 다 처리할 수 있다.   도청, 군청, 면사무소, 동사무소마다 상위 기관에 있는 부서가 거의 다 조직돼 있다. SNS 홍보, 유투브 TV 제작, 소식지 제작 같은 대민지원에서 별로 시급하지 않은 행정 업무도 늘어나고 있다.    농촌에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이듬해 봄까지 공무원들이 마이크가 달린 차를 몰고 시골 구석구석을 누비며 산불을 감시하러 다닌다. 주말도 휴일도 없다. 전국적으로 치면 얼마나 많은 인원이 산불조심 예방활동에 투입되고 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앞으로는 여름에 “물조심하라”며 순찰을 다니는 공무원이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다.   취재차 전국을 다녀보면 지방에서 가장 번쩍번쩍한 건물은 죄다 관공서라고 보면 틀림없다. 지금도 수많은 지역에서 경쟁적으로 군청, 도청 건물이 올라가고 있다. 필자의 고향이 있는 경북의 도청사는 거의 아방궁 수준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경치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관공서 연수시설이 들어차 있다.   지방 유지들 감투 놀이터로 전락한 지자체   명색이 30년이 다 돼가는 지방자치제의 실상은 어떠한가? 국회의원들의 갑질 무대와 지방 유지들 감투 놀이터가 된 것 외에 남은 것이 무엇인가? 이런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수천억원의 세금을 써가며 선거를 하고, 연봉 수천만원에 상전 노릇하는 지방 의원들을 뽑아야 한다는 것인가?    도대체 지자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주민들이 스스로 무보수 대표를 뽑아 자기들 지역의 술집 숫자를 정하고, 유해업소를 감시하고, 금연 구역을 지정하는 등의 실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된 일을 주민들이 직접 결정하고 합의된 의견을 따르는 것이 진짜 풀뿌리 민주주의 아닌가? 이런 일을 하는데 그렇게 많은 유급 선출직 공무원이 필요하단 말인가? 우선 광역 지자체는 남겨두고 전부 새로 손을 볼 때가 됐다고 본다.   그리고, 현재의 시군구동(市郡區洞)으로 이루어진 행정구역 대부분은 교통과 통신이 불편했던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가 등장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5000년도 더 되었을 것이다.   서초구와 강남구나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기에 별도의 행정조직을 두고 그 많은 공무원이 동원되어 사무를 봐야 하는가? 21세기 최첨단 시대에 언제까지 이런 신라시대의 행정 구역과 조선시대의 관료 만능주의 시스템으로 나라가 굴러가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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