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헌

▲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진경산수의 창시자, 겸재 정선   겸재가 이룩한 예술 세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진경산수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또 그것을 완성한 것이다. 진경산수란 중국풍의 그림을 답습하던 종래 화가들의 관념 산수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산수화를 말한다.(창비, 67)   이것은 현행 교과서인 『고등학교 국어Ⅱ』에 실린 글이다. 이 글대로라면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은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장르를 창시하고, 개척하고, 완성한 인물이다. 실로 위인전(偉人傳)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정선이 창시한 진경산수는 종래의 관념 산수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천을 있는 그대로 그린 산수화를 말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를 정선이 창시했으니 정선 이전에는 진경산수가 없어야 하고, 정선이 완성했으니 정선 이후에도 진경산수는 없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화가의 진경산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다른 화가의 진경산수가 있다면 그것은 정선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진경산수는 정선이 창시하고 개척하고 완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글은 실상 겸재 정선의 그림을 ‘진경산수화’로 자리매김한 최완수 실장(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의 주장을 따른 것이다. 아래는 최완수 실장의 글이다.   겸재 정선은 우리나라 회화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대화가로 화성의 칭호를 올려야 마땅한 인물이다. 겸재는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사생하는 데 가장 알맞은 우리 고유 화법을 창안해내어 우리 산천을 소재로 그 회화미를 발현해내는 데 성공한 진경산수화의 대성자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우리 고유 산수화 양식인 진경산수화풍의 시조인 것이다.(『진경시대2』 51, 돌베개)   겸재는 조선중화사상이 팽배하던 시기에 태어나서 조선 고유사상인 조선성리학을 전공한 사대부이자 그 조선성리학을 사상적 바탕으로 하여 조선 고유색을 현양하는 진경문화를 주도해 간 장본인으로서 우리 산수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해내기 위해 그에 알맞은 우리 고유의 화법인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해내어 우리 산수를 우리 고유의 회화미로 표현해내는 데 성공한 진경산수화풍의 창시자이자 대성자였다.(최완수 실장 외, 『진경시대2』 107, 돌베개)   학술 용어는 개념이 분명해야 한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글을 보면 진경산수의 개념이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유홍준 교수는 정선이 진경산수(진경산수화와 동일-필자 주)라는 장르를 창시하고 개척하고 완성했다고 한 반면, 최완수 실장은 정선을 두고 ‘진경산수화의 대성자’, ‘진경산수화풍의 창시자’, ‘진경산수화법의 창안자’, ‘진경산수화풍의 대성자’, ‘진경산수화풍의 시조’라고 했다.   여기에 더하여, 간송미술관의 연구원인 탁현규는 ‘겸재가 진경산수를 창안, 발전, 절정, 추상화까지 이루었기 때문에 후대 화가들이 겸재를 넘어서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네이버 미술캐스트, 진경산수 비교 감상하기)라고 했다. 사용된 단어를 보면 창시, 창안, 개척, 발전, 완성, 대성, 시조 등 참으로 화려하다. 한 사람의 예술 세계를 규정하기 위해 세상의 좋은 말은 다 동원한 것 같다. 예술 분야에 이처럼 전지전능하신 분이 또 있을까? 그러니 화성(畵聖:그림의 聖人)’이라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최완수 실장의 진경시대(眞景時代)에 관한 글을 읽다 보면 수시로 만나는 것이 ‘고유(固有)’라는 단어다. 최완수 실장은 겸재를 두고 ‘조선 고유사상인 조선성리학을 전공한 사대부’라고 규정했다. 고려 말 남송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성리학이 도입된 이래 조선조가 이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채택하고, 기라성 같은 수많은 학자들이 나타나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에 대한 각자의 주장을 밝히고 이를 글로 남겼다. 조선 초에는 정도전과 권근이 있었고,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이 발단이 되어 7년간 논쟁으로 이어진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 있었고,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이기론(理氣論) 대화가 있었고, 송시열(宋時烈)의 재제자(再弟子)인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 있었다. 이 외에도 성리학에 대한 학설을 남긴 학자는 부지기수(不知其數)다.   그렇다면, ‘조선 성리학’은 이들 모두의 성리학을 이르는 것일까? 아니면 특정인의 성리학을 이르는 것일까? 학자마다 주장이 다른 성리학을 두고 하나로 아울러 조선 성리학이라 일컫는 것도 부당하지만, 특정인의 성리학을 두고 조선 성리학이란 이름으로 대표성을 부여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또, 어느 쪽이든 그 성리학이 조선 고유의 사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옳지 않다. 주지하듯이 성리학은 송(宋)으로부터 도입된 것으로 우리나라에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처럼 조선 성리학의 성격조차 불분명하게 제시한 최완수 실장은 정선에 대해 ‘조선의 고유사상인 조선 성리학을 전공한 사대부’라고 규정지었다. 성리학과 같은 고도의 사상 체계는 해당 학자가 남겨놓은 글을 통해서만이 파악할 수 있다. 정선이 성리학을 전공한 사대부라면 그의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글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정선은 문집은커녕 그 흔한 시 한 수조차 찾기 어렵다. 그런데 어떻게 ‘조선 성리학을 전공한 사대부’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최완수 실장은 정선의 그림을 두고 ‘조선 고유색’, ‘우리 고유의 화법’, ‘우리 고유의 회화미’라고 하였다. ‘고유(固有)’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특유한 것’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과거부터 있어왔다는 뜻이다. 화법이나 회화미와 같은 요소가 만약 고유의 것이라면 이는 ‘계승(繼承)‧발전(發展)’시킬 수 있을지언정 새롭게 창안하거나 창시할 사안이 아니다. 만에 하나, 최완수 실장의 주장대로 정선이 창안한 화법이나 회화미를 두고 여기에 ‘고유(固有)’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라면 더더욱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특정인이 창안한 것을 두고 후대에 와서 ‘고유’라고 일컬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위 글만 보면 정선과 진경산수화는 엄청난 화가이고 대단한 그림이다. 그렇다면 정선이 창안한 ‘진경산수(眞景山水)’는 과연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유홍준 교수는 앞의 글에서 ‘진경산수란 중국풍의 그림을 답습하던 종래 화가들의 관념 산수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산수화를 말한다.’고 하였다. 또, 최완수 실장 실장은 ‘진(眞)짜 있는 경치(景致)를 사생해낸 그림이라는 의미도 되고, 실제 있는 경치를 그 정신까지 묘사해내는 사진 기법 즉 초상기법으로 사생해낸 그림이라는 의미도 된다.’고 하였다.   사진기법과 초상기법을 동원하여 산수화의 정신까지 어떻게 묘사해내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쪽이든 ‘우리나라에 실재(實在)하는 풍경(風景)을 그린 그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는 산수화의 소재(素材)를 상상 속의 풍경이 아닌 ‘실재하는 풍경’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재하는 풍경을 그린 산수화’는 당연히 ‘실경산수(實景山水)’다. 그런데, 왜 진(眞)자를 써서 진경산수라고 하였을까? 아래 글은 탁현규가 쓴 실경산수와 진경산수의 차이점에 대한 설명이다.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원이 쓴 글이니 최완수 실장의 생각도 이와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Q. 그럼 실경(實景)산수와 진경산수는 다른 그림인가요?   옛날 사람들이 쓴 책을 보면, 진경이란 말보다 실경이란 말이 더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진경이란 말이 더 뒤에 나옵니다. 실경에는 산수뿐만 아니라 지도와 같은 지형도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우리 산천을 산수화로 그리면서 ‘실(實)’보다 의미가 강한 ‘진(眞)’이란 글자를 써서 이상 경치가 아닌 진짜 경치로 불러 준 것입니다. 실경과 진경은 비슷한 의미지만 산수화를 이야기할 때는 진경산수화라고 부르는 게 올바릅니다.(진경산수화 감상법 - 네이버 미술캐스트)   집필자는 분명 실경산수와 진경산수가 다른 그림이라는 주장을 한 것 같은데, 솔직히 이 글을 몇 번이나 읽고도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우선, 집필자는 지도와 같은 지형도를 포함한 그림을 실경산수라 한 것으로 보이나 이는 잘못이다. 실경산수에는 지도와 같은 지형도가 포함된 실용적 그림도 있으나 완상(玩賞)을 위한 산수화나 기록을 위한 산수화 등 그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또, 집필자가 ‘실(實)’보다 의미가 강한 ‘진(眞)’이란 글자를 써서 불러 준 것이라 한 것을 보면 이는 제목의 의미를 좀 더 강조하기 위해 붙인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실경산수와 진경산수의 차이는 의미의 강약에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진경산수는 정선의 그림이 여타의 그림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진(眞)이란 글자로 바꾸어 정한 것임이 분명하다.   사실, 정선의 진경산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유홍준 교수와 최완수 실장의 글에 모두 드러나 있다.   겸재의 진경산수를 논함에서 중요한 것은 18세기 전반기 숙종‧영조 연간에 이처럼 민족적이고 감동적인 우리의 산천 그림을 훌륭히 예술적으로 그렸다는 사실이다. 겸재의 작가의식이 여기에 있는 한 그가 진경산수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황공망을 이용하든 를 원용하든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독창성이란 남이 하지 않은 그 무엇을 혼자 제시했다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이룩하지 못한 또는 생각하지 못한 예술 세계를 창출했다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기법적으로 여러 선례를 원용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대가에게나 있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겸재의 진경산수는 겸재 이전 시대에도 있었던 사경산수(寫景山水)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중국 남종화(南宗畵)의 예술적 성과를 받아들임으로써 한 차원 높은 민족적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기왕에 이동주, 최순우, 안휘준 등이 해석했던 주장은 그대로 유효한 것이다.(유홍준 교수, 『화인열전1』, 역사비평사)   유홍준 교수가 쓴 이 글을 요약하면, 겸재 정선은 우리나라의 산천을 그리면서 남들이 이룩하지 못한 예술 세계를 창출했는데, 이는 겸재 이전 시대에도 있었던 사경산수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남종화 기법을 수용하여 한 차원 높은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즉, 정선이 창안한 산수화는 그림의 소재를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풍경’에서 다른 것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전통적 기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법을 구사한 그림이라는 것이다. 즉, 소재의 변화가 아닌 기법(技法)의 변화를 말한다. 변한 것은 기법인데 정작 소재로 인해 주어진 명칭인 실경산수(實景山水)가 진경산수(眞景山水)로 바뀌어버렸다.   최완수 실장의 주장은 더욱 분명하다.   겸재는, 스승 삼연과 집우 사천이 진경시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거침없이 사생해내고 있었으므로 이를 그림으로 바꿔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데, 이는 창강 조속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아직 이루어내지 못한 조선성리학파들의 숙제이기도 하였다. 마침내 겸재는 그 숙제를 풀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 산천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새로운 그림기법을 창안한 것이다. 이는 중국 북방화법의 특징적 선묘(線描)와 남방화법의 특징적 기법인 묵법(墨法)을 이상적으로 조화시키는 방법이었다. -중략- 이는 중국 회화사에서 항상 시도하면서도 이루어내지 못하였던 남북방화법의 이상적 조화의 성공이기도 하였으며 조선에만 있는 조선 고유화법의 창안이기도 하였다. 이런 화법은 겸재가 벌써 36세에 금강산을 그려내면서 시도하기 시작하여 60세 이후에 완성해 낸 독자기법이었던 것이다.(최완수 실장 외, 『진경시대1』, 27~28)   최완수 실장은 정선이 남종화와 북종화를 수용한 새로운 그림기법을 창안하고 이를 36세에 금강산을 그리면서 작품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여 60세 이후에 독자적 기법으로 완성했다고 하였다. 정선이 완성한 그 독자적 기법이 바로 진경산수화이고, 진경산수화법이고 진경산수화풍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최완수 실장의 글에서는 화(畵)와 화법(畵法)과 화풍(畵風)을 번갈아 쓰고 있다. 혼란스럽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진경산수화에 대해 ‘조선 후기(1700∼1850년)를 통하여 유행한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로 정의하고, ‘화풍은 종래의 실경 산수화 전통에 18세기에 이르러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남종화법(南宗畫法)을 가미하여 형성되었다.’고 하였다. 또,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제공한 「테마로 보는 미술」에서는 ‘진경이란 용어 자체가 남종화의 개념이듯이 정선의 진경산수화도 남종화풍을 근간으로 삼았다.’고 하여 진경을 남종화와 동일시하였다. 이렇듯 정선이 창안한 진경산수라는 것은 실상 ‘중국의 남종화법을 토대로 새로운 기법을 구사하여 그린 산수화’를 이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사 교과서에는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교학사 18세기 이후에는 진경산수화가 등장하였고, 풍속화가 유행하였다. 진경산수화를 통해 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이룬 화가는 정선이었다. 그는 우리의 자연을 직접 보고 사실적으로 그림으로써 회화의 토착화를 이룩하였다.(153) 금성출판사 조선 후기 그림에서 나타난 새 경향은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유행이다. 정선은 진경산수화를 통해 우리나라의 자연을 그려내는 데 알맞은 구도와 화법을 창안해 냈다. (204) 동아출판 조선 후기에는 우리의 자연을 사실적으로 그린 진경산수화가 유행하였다.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화가는 18세기에 활약한 정선이었다. 그는 중국의 화법을 모범으로 하여 이상향을 그리는 관념적인 산수화 대신 자신의 눈으로 직접 관찰한 조선의 자연을 그렸다. 그 과정에서 독자적인 구도와 화법을 창안하였다.(142) 리베르스쿨 조선 후기에는 우리의 자연과 인물을 소재로 한 진경산수화가 발달하였고, 생활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풍속화가 유행하였다.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겸재 정선은 한성 근교와 강원도의 명승지들을 직접 돌아보고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를 사실적으로 그렸다.(188) 미래엔 후기에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지고 현실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그림과 글씨에서도 한국적 고유색을 표현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림에서는 정선이 진경산수화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하여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165) 비상교육 그림에서는 우리나라의 산천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진경산수화와 백성의 생활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풍속화가 등장하였다. 특히 정선은 중국의 것을 모방하던 기존의 산수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법을 활용하여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 등의 진경산수화를 그렸다.(184) 지학사 18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진경산수화는 우리 고유의 자연과 풍속을 대상으로 하면서 중국 남종과 북종 화법을 고르게 수용하여 창안된 새로운 화법이다.(190) 천재교육 그런데 18세기에 들어와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한 산수화가 등장하였는데, 이를 진경산수화라고 한다. 진경산수화의 대표적인 인물인 정선은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 등을 통해 사실 그대로의 조선의 자연을 독특한 필체로 담아내었다.(159)   위와 같이 한국사 교과서에는 진경산수화에 대해 ‘등장’, ‘유행’, ‘시작’, ‘발달’ 등 실로 다채롭게 쓰고 있다. 이 네 단어는 같은 뜻일까, 아니면 다른 뜻일까? 또, 정선의 업적에 대해 ‘산수화의 새로운 경지 이룩’, ‘회화의 토착화 이룩’, ‘독자적 구도와 새로운 화법 창안’, ‘진경산수화의 개척’, ‘독자적 화풍의 개척’, ‘새로운 기법 활용’ 등 참으로 풍성하다. 한 가지 사안을 두고 이렇게 다양한 서술이 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역사 해석의 다양성인가?   그런가 하면, 정선의 그림을 두고 ‘사실적 그림’ 또는, ‘사실적 표현’이라 하기도 하였다. 이는 교과서뿐만 아니라 여타의 학술서나 대중 역사물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최완수 실장이 진경산수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진 기법 즉 초상기법으로 사생해낸 그림’이라 한 것을 보면 현대미술의 사실주의 표현 기법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정선의 그림은 전혀 사실적으로 표현한 그림이 아니다. 만약, 정선의 그림을 두고 말한 ‘사실적 표현’이라는 서술이 현대미술의 사실주의 표현과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학술 용어의 자의적 사용이라 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을 정리하면 ‘진경산수(眞景山水)’는 ‘조선 후기에 겸재 정선이 창안하고 완성한 산수화’로 정의된다. 그런데,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이렇게 정의할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여러 혼선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가장 먼저 ‘진(眞)’이라는 글자로 인한 혼선이다. 진(眞)은 기본적으로 ‘가치 평가’를 위한 글자이기 때문에 비평자의 관점에 따라 ‘진(眞)’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자연을 담은 실경산수를 그려왔고 지금도 그리고 있다. 그 그림 중에 남종화 기법이 있으면 진경산수이고 없으면 진경산수가 아니라는 것인가? 정선을 포함하여 우리의 산천을 그린 수많은 화가들 중에 누구의 그림은 진경산수이고 누구의 그림은 진경산수가 아니라는 것인가? 한 사람의 작품 중에도 시기에 따라 작품에 따라 우열이 있는데, 작품성이 뛰어난 그림은 진경산수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진경산수가 아니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진경산수가 아닌 산수화는 위경산수(僞景山水)라 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실경산수(實景山水)라 해야 하는가?   또, 정선 이전에 진경산수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정선이 진경산수의 창안자이고 창시자이고 시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완수 실장 스스로도 정선 이전 인물인 조속(趙涑)에 대해 ‘인조반정 성공 후에는 일체 벼슬길에서 물러나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시화로 이를 사생(寫生)해내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니 이때 사생해낸 시를 진경시(眞景詩), 그림을 진경산수화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진경산수의 창시자는 정선이 아닌 창강 조속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한국사』에도 ‘명산탐승 중에 절경을 보면 문득 말에서 내려앉아 “率意畵出眼前光景(솔의화출안전광경)” 즉 “눈앞의 광경을 뜻(창생적 흥취)에 따라 그려내고” 천기론(天機論)에 입각한 자득적 창작으로 평가받은 조속(1595∼1668)과 금강산 만이천봉을 최고의 전신법(傳神法)으로 묘사한 김명국(1600년경∼1662년 이후)이 진경산수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서술하였다. 정선 이전에도 이미 진경산수 작가가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진경산수는 곧 정선의 그림이라는 인식이 각인됨으로 인해 미술사에서 남종화 기법과 관련 없는 여타 작가들이나 작품이 매몰되는 왜곡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또, 정선의 화법 또는 남종화법을 구사한 작가나 그림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정선의 아류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정선이 진경산수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아래의 그림이다.   ▲ 강세황의 영통골입구 그림 이 그림에 대해 교학사 교과서에는 정선의 진경산수화,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 등을 소개하고 난 다음 ‘이 밖에도 산수화에 서양 화풍을 접목한 18세기의 강세황과 다양한 소재를 힘차고 능숙한 필법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한 19세기의 장승업도 주목할 만하다.’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영통골 입구의 풍경을 그린 실경산수임에도 서양화 기법을 적용한 그림이라는 이유로 정선의 진경산수와 별도로 취급되는 것이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나 강세황의 ‘영통골입구도’나 우리의 산천을 그린 실경산수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차이가 있다면 정선의 그림은 중국의 남종화기법을, 강세황의 그림은 서양화기법을 적용한 점이다.   교과서는 전문가가 아닌 어린 학생들이 보고 공부하는 책이다. 당연히 개념이 분명하고 설명이 일목요연해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연구자들조차 실상에 맞지 않은 용어를 제시하고 제대로 된 개념조차 정립하지 못하니 8종 교과서의 서술이 중구난방(衆口難防)이다. 이러한 여건에서 일선 교사들은 과연 진경산수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또, 실경산수와 진경산수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이를 학생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이는 불가능하다. ‘진경산수’라는 용어 자체가 잘못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사 교과서에 제시된 작가와 작품을 토대로 아래와 같이 조선후기 산수화에 대한 서술을 재정리해본다.   산수화는 상상속의 풍경을 그린 관념산수(觀念山水)와 실재하는 풍경을 그린 실경산수(實景山水)로 나눌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풍경을 그린 실경산수가 유행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작가로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표함 강세황 등이 있다. 겸재 정선은 중국의 남종화법을 토대로 독창적 기법을 구사하여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와 같은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단원 김홍도는 도화서 화원 출신으로 산수화, 풍속화, 기록화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특히 연풍 현감에서 해임된 50세 이후로는 우리나라의 산천을 소재로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의 실경산수를 많이 남겼다. 표암 강세황은 원근법과 음영법 등 서양화 기법을 구사하여 영통골입구도와 같은 독창적인 실경산수를 남겼다.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풍경을 그린 실경산수에는 대부분 화제(畵題)에 지역이나 명승지(名勝地)의 이름이 들어 있어 어느 곳을 그렸는지 쉽게 알 수 있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진경산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답은 ‘버려야 한다.’이다. 지금까지 18세기에 유행한 산수화로 소개된 진경산수는 실상 소재(素材)와 기법(技法)을 혼돈하여 잘못 만들어진 용어다. 이는 반드시 ‘실경산수’로 바로잡아야 한다.▩

이동윤

대학입학 수능시험이 다가오면서 피로감을 호소하며 진료를 받으러 오는 수험생들이 많아지고 있다. 운동을 하라고 하면 짜증나는 얼굴로 잠잘 시간도 없는데 운동을 어떻게 하느냐고 항의성 불평을 하기도 한다.  그럼 과연 운동은 신체를 피로하게 하여 수험생에게 해로울까?  "전혀 그렇지 않다"가 답이다. 운동은 신체활동 부족으로 허약해진 수험생들의 신체건강을 유지시켜줄 뿐만 아니라  뇌의 기능을 활성화하여 기억력 증진에도 효과적이다. 다리 근육에서 만들어진 신체적 자극이 감각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되는 것이 뇌가 감지하는 감각자극 가운데서 가장 크고, 이 감각자극이 뇌 신경세포들을 가장 많이 각성시킬 수 있다.  뇌는 1.3kg에 불과하지만 우리 몸이 하루에 소비하는 전체 산소소모량의 20%를 차지할 만큼 대사기능이 왕성하다. 뇌조직에 산소 공급이 더 많아질수록 뇌세포의 기능도 좋아지고, 운동을 통한 건강한 심폐기능만이 적시에 절절한 산소를 공급할 수 있다.  또 뇌는 오직 포도당만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므로 뇌를 주로 사용하는 수험생에게 당질의 충분한 섭취는 필요하다. 그렇지만 피곤하다거나 시장기를 느낀다고 과일, 포도 주스, 토마토 주스, 요구르트 같은 간식을 너무 자주 섭취하다 보면 고혈당을 일으키고 혈액순환을 악화시킬 수 있다.  탄수화물의 과다 섭취로 인한 이런 고혈당 상태가 오래 자주 지속되면 그 자체가 비만과 졸음을 유발할 수 있다. 걷기나 달리기 같은 적절한 신체활동으로 혈당의 수준을 낮춰줌으로써 고혈당으로 인한 부작용도 해소하여 맑은 정신으로 학습에 열중할 수 있게 된다.  또 '4당5락' 이라고 "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며 억지로 수면시간을 줄이는 수면박탈 현상이 학습능력 저하나 두통, 그리고 집중력 저하로 학습효율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잠을 잘 자야 오늘 해놓은 중요한 공부들이 뇌안에 정리되고 기억되며 또한 뇌는 내일을 위해 필요한 준비를 하게 된다.  운동을 한다고 해서 운동장을 걷거나 달리라는 말이 아니다. 휴식시간에 앉아서 신문이나 TV, 또는 잡지를 보는 대신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며 먼 곳을 바라보며 맨손체조를 하거나 밖으로 나가 2~3분이라도 산책 또는 가벼운 달리기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귀찮고 실내에서 하고 싶다면 간단히 몸통과 다리, 어깨, 목 등 근육을 스트레칭한다. 그런 의미에서 차를 타고 등교하는 것은 최소한의 운동 기회조차를 뺏는 병주고 약주는 격이다. 잠을 잘자고 최선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사람이 승리한다.  낮에 20분에서 30분 정도만 적절히 운동을 해도 생활리듬이 회복되어 고혈당을 예방하고 숙면을 취하게 하여 공부 능력을 높여준다. 그냥 자주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걷기만 해도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며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있어 바라는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마라톤 선수가 경기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수험생에게도 건강관리와 컨디션 유지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원하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공부에 최선을 다하되 최소한의 건강관리도 변하지 않는 중요한 수능전략이다. 

김수인

기온이 적당히 내려가 산으로 들로 놀러다니기 딱 좋은 행락의 계절이다. 10월 초는 사상 가장 긴 열흘간의 연휴가 이어져 직장인들은 한껏 설렘 속에 9월을 보낸다. 연휴가 끝나면 설악산을 시작으로 단풍이 절정으로 치달아 등산객들은 신이 난다. 사람들이 9~10월엔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보내다 보니 한의원은 환자 숫자가 크게 줄어든다고 한다.      9~10월은 골퍼들 세상이다. 선선하고 상쾌한 날씨에 잔디 컨디션까지 좋으니 핸디캡을 낮출 절호의 기회다. 하지만 등산과 골프를 둘 다 즐기려는 이들에겐 유의사항이 있다. 일정을 조절해 ‘土산日골’을 삼가고 ‘土골日산’ 원칙을 지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말에 등산과 골프를 병행하게 된다면 ‘토요일은 골프, 일요일엔 등산’을 해야 한다.      등산은 보통 네 시간을 오르막 내리막으로 걷게 된다. 매주 산을 타는 사람도 네 시간 산행을 하면 일시적으로 종아리에 알이 배게 된다. 알이 배지 않아도 근육 피로는 하루 만에 풀리지 않는다. 따라서 토요일 등산을 하고 일요일 골프를 치게 되면 하체 고정이 안 돼 미스 샷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등산 말고도 라운드 하루 전에 조심해야 할 사항을 살펴보자.      지나친 음주, 장시간 화투나 카드놀이는 스코어를 잡아먹는 귀신이다. 무거운 화분을 들거나 집안일을 하느라 고개를 숙이고 대못을 박는 일도 금물. 순간적으로 근육이 뒤틀려 하루 만에 풀리지 않는 탓이다. 자전거나 오토바이 타기도 삼가야 한다. 사고 위험이 크고 근육이 일시적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세 시간 이상의 야간운전도 다음날 샷에 악영향을 준다.      수년 전 필자의 친구가 경남 거제의 모 기업 임원으로 근무할 때 일이다. 그는 금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손수 운전으로 경기 분당의 집으로 와 토요일과 일요일 골프를 즐긴다. 필자와는 주로 토요일에 함께 라운드를 했는데, 핸디캡이 12 정도 되지만 늘 90타를 훌쩍 넘기는 게 아닌가.      이유는 장거리 야간운전이었다. 금요일 퇴근 후 오후 6시쯤 거제를 출발하면 집까지 4~5시간을 운전하게 된다. 밤늦게 귀가해 바로 취침한다 하더라도 운전으로 인한 허리, 어깨 피로가 몇 시간 만에 풀리지 않아 미스샷을 자주 저지르게 된다. 하지만 일요일엔 대부분 80대 초·중반의 좋은 스코어를 기록한다 하니 ‘土산日골’만큼이나 라운드 전날 장시간 야간운전이 해로웠다.      하루 전의 지나친 연습도 철저히 기피해야 한다. 골프를 잘 치는 편인 어떤 동반자가 초반부터 샷이 엉망이길래 이유를 물어봤더니 “어제 저녁 연습장에서 드라이버샷만 100개 이상 날렸다”고 했다. 바쁜 업무 탓에 연습을 못해 라운드 하루 전에 연습장에서 몰아치기를 했는데, 이게 보약이 아닌 독약이 됐다. 장시간 운전 피로와 마찬가지로 하루 만에 근육이 정상을 되찾지 못하니 샷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하루 전 연습은 안 하느니 보다 못 하다. 불안해서 꼭 연습장을 찾는다면, 큰 인내심을 갖고 30분을 넘기지 말자. 드라이버샷 20~30개에 아이언샷과 어프로치 리듬만 익히는 걸로 만족해야 한다. 그야말로 과욕은 금물이다.

김승열

런던 일기(12) 독일 뮌헨의 막스프랑크 연구소의 객원연구원으로 초빙받다   독일 뮌헨의 막스프랑크 연구소는 지식재산법 분야에서 가장 유명하다. 현재 세계 각국의 지식재산권법에 대한 자료와 정보를 정리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 연구소가 매력적인 장소였다. 필자가 독일 방문시 막스프랑크 연구소에 이런 의사를 표명하니 Josef Drexl이사(뮌헨대학의 교수)가 초청을 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잠시 독일을 방문하고 런던에 되돌아오기로 하였다.   유럽이 그리 넓지 않다는 생각에 당일 코스로 잡았다. 오전에 가서 교수와 이야기를 하고 오후에 오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각국에서 출입국 절차가 있는 등 국내 여행이 아니라 해외여행이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가 세운 일정은 9시에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에서 독일항공을 타고 11시 45분에 도착을 하여 기차를 타고 연구소를 방문하여 간단하게 교수와 면담을 한 후 다시 바로 뮌헨공항으로 와서 4시5분의 런던행 비행기를 타는 것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국제항공편은 2시간 전에 공항에 도달하여야 하는데 이점을 간과하였다. 따라서 처음부터 무리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필자가 예약한 비행기는 탑승 전 쉬소나 변경이 안 되는 비행기였고, 그 이후의 비행기는 탑승자체를 허용해 줄지가 다소 불확실했다. 공교롭게도 그 다음비행기는 만석이라는 이야기를 해당 여행사를 통해 듣게 되니 마음이 더욱더 조급해졌다.   먼저 히드로 공항까지 가는 것도 문제였다. New Malden에서는 Waterloo까지는 기차로 그리고 Pedddington은 런던시내 지하철을 이용하고 그곳에서 히도로 국제공항으로 가는 급행기차를 타야하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가는 기차도 없고 하여 고민이 되었는데 지인이 도와주어 다행히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제는 공항자체가 엄청나게 크고 터미널이 5개나 있는데 각자가 독립적인 공항처럼 크고 넓어서 터미널간의 상호 이동에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아침 일찍이었는데 교통량이 너무 많아서 놀라웠다. 알고보니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는 올때나 갈 때 중 한번은 런던을 거칠 정도록 항공교통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 시간 내에 도착하여 기계를 통하여 보딩패스를 발급받았다.   그런데 가야하는 해당 게이트가 8시30분이 되어야 해당게이트를 스크린에 표시한다는 안내말이 기재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아니하였다. 기차의 프랫폼과 마찬가지로 탑승수속이 이루어지는 시점에 알려주다니. 우리나라에서 이런일이 일어나면 탑기사감일텐데.....예측 가능성과 시민의 편의성 부분에서는 우리가 훨씬 앞서가고 있다는 점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느 누가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이는 소시민 문화가 만들어 낸 부정적인 면이기도 하고 또한 한편으로는 사회시스템에 대한 순종적이고 협조적이며 타인의 업무에 대한 존중으로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필자도 한국 사람인지라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국민성이 좀 더 경쟁력이 있다는 느낌도 가졌다.   우여곡절 끝에 뮌헨공항에 도착하니 다소 푸근한 생각이 들었다. 거의 12시가 되어 시간이 빠듯하였는데도 다소 여유를 부리는 바람에 시간에 쫒기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공항에서 연구소까지 56분 정도소요되지만 기차에 시간 간격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역까지 가는 시간 그리고 역에서 연구소까지 가는 시간을 등을 합하여 약속시간이 오후 1시 30분은 무리였다.   이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부분은 기차의 간격이었다. 거의 15분이상이 소요되어 당초 약속시간에 도착은 무리가 있어서 연락을 하고자 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메일을 보내려고 하니 와이파이가 잘 안되어 계속 끊어지는 바람에 더욱더 초조하게 되었다.   여러 차레의 시도 끝에 겨우 간단하게 늦는다는 취지의 이메일을 보냈다. 역에 내려서는 거의 달려서 거우 1시 50분에 DREXL 교수님의 연구소를 가게 되었다. 비록 늦었음에도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고 이사 신분이어서 그런지 비서도 있었다. 반갑고 인사를 하면서 늦어서 죄송하다고 하자, 기차 때문에 자신도 그런 경험을 한적이 있다고 하면서 오히려 위로를 해주었다.   초청문제 등으로 런던에서 방문한 정성에 대하여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직접 행정책임자를 소개하면서 초청장 등을 준비토록 부탁을 하였다. 필자가 저작권법과 온라인상의 지식재산관려법에 대하여 연구를 하고자 한다고 하자, 유럽 저작권부분의 권위자인 Silke Lewinsky교수를 필자의 Tutor로 지정하면서 직접 해당연구실에 같이 가서 소개를 시켜 주었다.   Lewinsky교수는 유럽저작권법에 대한 전문가로서 WIPO회의 등에서 독일을 대표하는 등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무실 공간과 일종의 Guest House에 대하여도 신경을 써주셨다. 사무실 공간은 확보를 하였고 다만 Guest House부분은 해당 직원분이 휴가중이어서 이에 대한 조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염려하지 말라는 취지로 알려주었다.   돌아오는 항공편의 출발 시간이 4시5분인데 벌써 시간이 2시 40분을 넘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우버택시를 호출하였더니 픽업장소를 특정하는 데 불편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5분정도 되어 이를 취소하고 역으로 달려갔다. 아무리 빨리가도 3시30~40분전에 도착은 불가능해 보였다.   탑승시간이 3시 40분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다만 뮌헨공항에 도착하고 나서 시간상 여유가 없을 것을 예상하고 기계를 통하여 탑승권은 미리 발급받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비행기를 놓치는 상황이 발생되더라도 게이트에서 놓쳐야 다음 비행기편을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여 공항에 가기로 하였다.   그렇지 아니하면 단순한 No-Show로서 다음 비행기 마련 자체도 불확실하기 때문이었다. 역까지 뛰었고, 다행이 기차도 5분만에 와서 뮌헨공항역에 도착하여 다시 열심히 뛰었더니 다행스럽게 출국수속을 하는 사람이 그리 붐비지는 아니하였다.   출국심사 후에 바로 게이트로 가니 바로 탑승시간이 3시 40분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서 가볍게 화이트와인을 마시면서 제대로 비행기를 타는 급박한 상황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자축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저녁 약속 시간이 7시인데 런던히드로 공항에 도착하니 5시 10분 정도이었다. 먼저 히드로 공항에서 Peddington까지 급행으로 가야하는데 비용도 만만찮고 시간도 예측이 어려웠다. 이어 Peddington역에서 Waterloo까지 지하철을 타야하는 데 일부구간이 폐쇄되는 등 복잡하였다.   이런 와중에 3일 간 유효한 Oyster카드를 구매하니 가격도 아주 저렴하였다. 이를 이용하여 waterloo에 와서 New Malden까지 가는 기차안내 전광탄을 보니 6시41분이었다. 기차로 가는 시간만도 대략 28분 정도 걸리니 7시까지 약속장소에 가는 것이 어려워 카톡으로 양해를 구하고 기타를 타고 내려서는 또한 뛰었다. 다행스럽게 7시20분 정도에 도착하여 다행이었다.   이 와중에 이메일을 보니 독일에서 공식 초청장을 보내주고 원본은 우편을 발송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향후 뮌헨과 런던을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의 연구활동 내지 법대교수나 변호사 등과의 교류 등의 거점을 확보하였다는 측면에서 즐거운 소식이었다.   그러나 각론에 들어가서는 국내업무의 스카트 워크시스템의 확보 그리고 유럽전역의 로펌이나 대학 등과의 연계 활동 등 부분이 너무나 광범위하여 어떻게 이에 대한 효율적인 계획과 일정을 만들어 갈수 있을 지가 상당히 도전적인 일로서 다가왔다.    그러나 일단은 첫 걸음을 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두기로 하였다. 오늘 하루 새벽부터 밤까지 뛰면서 굉장히 타이트한 스케줄을 소화하였지만 향후 유럽일정에서 중요하고 의미있는 하루었다.   그리고 연구소에 나를 기꺼이 초청하신 교수님께도 감사하고 아침 일찍 복잡한 공항까지 라이더를 친히 해주신 지인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다. 향후 필자의 유럽 일정을 좀 더 의미있게 진행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분들의 배려에 감사하는 길이라고 스스로 다시 한번 다짐을 해본다.         런던 일기(13)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 전문가들과 대화를 나누다   영국 문화와 국제시장에서 차지하고 있는 런던의 현황과 향후의 전망 등에 대하여 궁금하여 국제 외교무대와 국제통상 등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과 면담을 가졌다. 바쁜 와중에 소중한 시간을 내주어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표한다.   다만 실명을 거론하는 것을 완곡하게 거절하여 만난 여러분의 의견을 종합하여 나름대로 파악한 영국 특히 런던의 국제금융, 법률 등 시장에서의 현황 및 문화와 BREXIT에 즈음한 향후의 전망 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영국문화 자체가 상당히 도전적이고 나아가 국제적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기질과 특성에 기초하여 대영제국을 이루게 된 기초 토양이 이와 같은 도전적이고 국제적인 성향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대외적으로 떠벌이지 아니하고 조용하게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영국문화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부분은 상당히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다.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도 런던이 역동적인 측면이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해외진출적인 성향도 충분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영국인이 상당히 호전적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결투문화를 보면 충분히 짐작이 간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호전성과 도전성을 엄격한 법제도로 규제하지 아니하면 상당히 혼란스러울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분도 있었다. 그리고 겉으로는 강당히 예의를 갖추고 결코 그 속을 잘 드러내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이는 보기에 따라서는 부정적으로 볼수도 있고 또한 장점이라고도 보여진다. 전세계를 호령하면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접하면서 각자의 개성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는 사정하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지배자로서의 일종의 전략적인 측면도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사실은 런던이 진실로 국제적인 도시라는 점이다. 실제로 독일의 도시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다이나믹하고 비즈니스 친화적인 분위기는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에 대한 부작용이라면  엄청나게 비싼 물가이다.   어쨌든 런던에는 수많은 인종과 기업들이 꾸준하게 유입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어구사능력도 천차만별이어서 계급사회인 영국내에서 어느 정도의 계급(?)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영어발음이 아니라 영어표현에서 상당히 노력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비록 겉으로 내색을 하지는 아니하지만 일정한 단계의 영어구사 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상류사회에서는 진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보이지 아니하는 장벽을 상당히 실감하고 있어서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한다고 고백하는 분이 적지 아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세계적인 도시로서 매력적인 도시라는 점에서는 모두 공감을 하는 분위기였다.   무엇보다도 대영제국으로서 전세계를 지배하면서 여러인종과 문화를 조화롭게 더불어 살아가면서 상생을 하는 그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략적인 노하우는 우리나라가 좀 더 적극적으로 배울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필자 역시 그간 EU의 여러 나라를 겪으면서 런던이 왜 물가가 가장 비싼 이유를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국제도시로서 여러 여건을 갖추고 있고 또한 실제적으로 너무 매력적인 면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적인 측면도 크고, 해외의 금융기관 등을 유입하는 비규제친화적인 여러 문화와 환경도 무시하기 어렵다.   물가가 비싼 반면에 그만큼 먹거리도 많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장에서 국제금융 등에서 괄목할 만한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모습역시 예사롭지 아니하였다. 이들 실물 경제를 지원하는 성격을 가지는 법률분야도 이제 런던 등 국제법률시장에 적극적인 진출이 불가피하고 나아가 시대적인 과제라고도 느껴졌다.   그렇다면 런던법률 시장이야말로 가장 경쟁이 치열하면서 또한 가장 매력적이고 그 노하우를 습득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는 어떤 느낌이 들었다. 비록 너무 복잡하고 경쟁이 치열하고 그런만큼 여러 어려움이 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가장 경쟁적인 도시중의 하나로서 자신을 한번 테스트 한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도전해볼 만한 법률시장의 본모습으로 느껴졌다.   국제금융도 이제 현지화를 통하여 국제경쟁력 있게 나아간다면 국제법률 시장에서 우리나라의 변호사 역시 해외에 진출하여 그 우수성을 충분하게 보여주고 나아가 가시적인 성과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필자의 경우에 다소 나이가 있기는 하지만 젊은이 못지 않은 도전정신과 패기가 있으므로 필자 자신스스로가 한번 도전하면서 그 과정하나하나를 즐기고 있다는 강한 충동을 받았다.   영국이 금융, 중재 등에 있어서는 강하지만, 최근의 BREXIT에 즈음하여 독자적으로 Anti-dumping 등 통상 구제, 그리고 정부기관의 Reform등에 있어서는 좀 더 전문가의 수요가 증가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그간 EU에서 경제규모가  가장 큰 도시중의 하나였다는 점이다. 물론 BREXIT이후에는 상당한 타격을 받겠지만, 이와 같이 경제규모가 큰 이유와 그 배경에 대하여는 충분하게 배울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국제금융기관을 끌어들일수 있었던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그런 노하우를 제대로 습득할 필요가 있다. 그런 차원에서 필자 역시 런던법률시장에 한번 도전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물론 시간이 걸리고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여지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깊은 신념으로 나아가고 싶다.     런던 일기(14) 런던 소재의 국제로펌을 방문하다     한국계 사무변호사의 소개로 런던소재하는 유수의 로펌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유수의 로펌들은 소위 말하는 city of London에 소재하고 있었다. 즉 금융시장거리로 불리우는 영란은행을 지점으로 다같이 모여 있었다. 해당 로펌은 상대적으로 외곽으로 보이는 곳에 있었으나, 전세계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고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 로펌이었다.   약속시간에 방문을 하여 일층 아니 ground층에서 방문층을 받아서 해당 층에 올라가니 리셉션공간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물론 뉴욕처럼 엄청나게 넓은 리셉션공간을 조성하여 상당히 위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지는 아니하였고 단지 깔금하고 실용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오히려 친근감이 드는 분위기의 사무실이었다. 비록 전세계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지만 런던에서는 두 개의 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필자의 경우 미국로펌에 다닐 때에는 이정도 크기의 빌딩에서 거의 10개 층을 사용하는 뉴욕로펌으로서 뉴욕사무실 자체에 변호사가 거의 1,000명전후였기 때문에 오히려 아담하게 느껴졌다.   이어서 한국인 어쇼변호사가 회사법의 헤드격인 변호사와 같이 와서 반갑게 인사를하였다. 당초에는 단지 파트너인 한국변호사를 만나기로 하였기 때문에 다소 당황스러운 면도 있었지만 오리려 고마웠다. 이어서 회의실에서 차를 한잔 하면서 같이 담소를 하는 도중에 원래 만나기로 한 한국인 파트너 변호사가 들어왔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나서 나의 방문 목적을 설명하였다. 즉 나는 현재 한국로펌에 있는 senior partner이지만 영국로펌에서 로펌의 운영전반을 한번 경험하고 싶다, 그간 한국내에서 금융, IP 그리고 ADR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EU에 진출한 한국기업 등에 대한 자문시에 나름대로 도움과 지원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추후 국내에 진출계획 시에 필자와의 교류를 통하여 상호협업을 도모하고 싶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얼마정도 머무르기를 원하는지를 물어보기에 가능한 장기적으로 근무하고 싶다고 하면서 그간의 나의 경력 등에 대하여 나름대로 설명을 하였다.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영국로펌의 경우는 좀 더 비즈니스친화적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지난 독일로펌에서 느껴지는 다소 커뮤니티 친화적인 성격의 분위기와는 달랐다.    독일로펌도 변호사가 130여 명 되어서 독일 내에서는 20위 안에 들어가는 상당히 유슈의 로펌이었는데도 이곳 런던로펌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질문도 당장의 비즈니스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질문을 하고 나아가 이에 초점을 두고 대화하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물론 이러한 접근이 효율적인 측면이 많은 것은 분명하지만, 좀 더 장기적인 차원의 시각을 가지기에는 다소 여유로움이 미흡하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어쨌든 1시간 30분 정도의 미팅이었지만 영국계 로펌의 좀더 비즈니스 집중적인 특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아주 소중한 자리였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디지털과 국제화시대에서 국제적인 네트워크가 중요한 사정하에서 내가 독일, 영국을 비롯하여 전세계의 로펌을 경험하는 것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에 상당한 기여를 할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아니한다.   물론 여러 로펌에서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도전할 필요성과 강한 충동을 받게 되었다. 다만 국제로펌으로서 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기를 소망한다.   맥도날드가 탄생하게 된 것은 맥도날드 오너가 52세 되는 시점에 맥도널드 체인점이 비로소 처음으로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면, 어쩌면 필자가 영국런던 소재 국제로펌에서의 경험을 향후 엄청난 파급효를 일으킬 수 있다는 긍정적인 미래전망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런던로펌으로의 발걸음을 내딛기로 하고 이제 그 걸음마를 시작한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이제 목표가 생겼으니 이를 이루는 것은 나의 몫이기도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만 아니한다면 이의 성취여부는 단지 시간싸움일 따름일 것이다. 필자가 글로벌시대에 온라인로펌을 만들기 위하여 좀 더 노력하면서 현지 로펌의 오너, 파트너 그리고 전문가로 자림매기를 시작하는 어쇼변호사 등과의 다양하고 의미있는 많은 만남을 기대해 본다.

류근일

모내기 후에 쉬고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 조선DB 박정희 전 대통령 출생 100주년을 기해 명지대학에서 학술포럼이 있었다. 이 자리(에 가지는 않았다)에서 이영훈 서울대 명예교수가 발표한 논문 “박정희 모델의 의의와 재평가”가 눈에 띈다. 논문의 핵심인즉, 박정희 모델 성공의 비결은 정부-기업-근로자들의 자발적 유인(誘引)을 이끌어낸 점이라 했다.   흔히 ‘박정희 방식’에 대해선 강제력의 측면만 강조했지, 자발적 협력의 측면은 도외시해 왔다. 강제력의 측면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이영훈 교수는 “그것뿐이었을까?”라는 이의를 제기한 셈이다. 이 영훈 교수에 의하면 1960년대에 시작된 대외 지향적-수출주도형 산업화, 그리고 1970년대 후반에 시작된 중화학공업이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데는 단순한 강제력만이 아닌, 근대화를 향한 국가-기업-현장 근무자들 3자의 합심(合心)이 있었다고 한다.  필자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박정희 정치경제학’에 비판적이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과 세상은 이런 비판적-비관적 견해와는 다르게 돌아가는, 그 어떤 열기(熱氣) 같은 걸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5, 16 이전의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무(無)변화에 식상해 있던 때와는 달리, 무언가 전례 없이 역동적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눈코 뜰 사이 없이 학교 나와 취직하고, 출근하고, 일에 미치고, 바쁘고, 회사 이야기에 여념이 없고, 해외 마인드를 갖게 되고, 신용장(L/C)이 어떻고 어떻다 하고, 중동엘 나가고, 서울근교가 개발돼 내 집을 마련하고, 냉장고를 사들이고, 텔레비전을 사고, 보너스라는 걸 타보고,.. 하며, 마치 서부(西部) 개척이라도 하듯 매일 매일을 열성적으로 끌어안으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강단(講壇) 지식인 다수는 시종 ‘박정희 정치경제학’에 비판적이었고 비관적이었다. 박정희대외지향성은 종속화의 길, 외채망국의 길, 부익부-빈익빈의 길이라 했고, 박정희 정치는 배제(exclusion) 일변도의 정치라고 했다. 그러나 근대화 관료, 전문가(expertise), 기능인, 기업인, 경영인, 직장-시장-산업현장-무역현장-작업장 종사자들은 2교대 3교대로 팽팽 돌아가는 일과를 밟느라 ‘바쁘다 바뻐“ 하며 "죽으려 해도 죽을 시간이 없다"는 식이었다.  강단 지식인들은 자유시장주의, 대기업 주도, 차관(借款)경제의 비(非)민족주의적이고 ‘매판적’인 성격을 질타했지만, 근대화 작업 현장에서는 역사상 처음 접해보는 지구경제권(圈)의 광활한 지평 앞에서 왕성한 '자본주의적' 성취욕을 폭발시키고 충족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영훈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 고도성장의 성공은 비판적 지식인들의 비관적 관찰과는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정부-기업-산업현장 종사자들의 열심, 헌신, 부지런함, 의지, 보람, 도전, 할 수 있다(can do) 정신의 합작(合作) 덕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비판적 지식인들에겐 실망스러운 것일 수 있다.  언젠가 김문수 전 경기도 지사가 한 말에 폭소를 터뜨린 적이 있다. “아 글쎄 대학엘 들어가 보니 교수들마다 하는 소리가 고속도로도 안 된다, 자동차 산업도 안 된다, 포항제철도 안 된다, 하며 말짱 안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말만 믿고 열심히 데모만 했지요...” 하지만 나중에 보니까 그런 게 다 되었더라는 것이다.  얼마 전 1970년대에 신문사에 함께 근무하던 동료 5~6인의 월례 오찬 모임에서 한 동료가 이렇게 말했다. 그 동료는 필자의 대학 같은 과(科) 동문이고, 그 신문사 정치부장, 편집국장, 주필을 역임하고 은퇴한, 아주 균형 잡힌 시각의 온건한 신사다. 그 동료의 말은 그래서 불편부당(不偏不黨)-객관성-정확성에 많이 근접해 있다고 필자는 늘 생각해 오던 터였다. 그의 말은 이랬다. “박정희 근대화 성공했지. 한데 유신은 잘못했어... 유신을 해서 중화학공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있지만...이란 표현은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란 뜻일 게다.      유신말기 필자의 상황은 어려웠다. 주말에 집에 있을 때는 관할 정보과 형사가 찾아오고, 대문 밖에 나서면 기관원이 차를 가지고 지키고 있다가 신문사에 실어다 놓은 때도 있었다. 혹시 다른 데로 가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던 어는 날 새벽, 잠에서 깨자마자 늘 하던 대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켰다. “박정희 대통령 유고로 최규하 국문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엉???  10. 26 사태를 계기로 필자는 ‘박정희 시대’를 조기에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해방되고 싶어서였다. 결론은, 역사는 한 줄기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빛도 있고 그림자도 있다. ‘박정희 시대’도 그렇게 보기로 했다. '박정희 근대화'는 성공 스토리였다. 빛이었다. 그건 종속의 길이 아니라 종속 탈피의 길이었다. 정치리더-기업리더-현장 근무자들의 합심(이걸 이영훈 교수는 한국적 전통이라고 했다)의 성과였다. 이걸 죽어도 인정하지 않겠다며 ‘식민지 종속국’이니 ‘사대매국’이니 하는 매도는 그만 했으면 한다.  ‘박정희 시대’의 그림자도 있다. 정보정치의 과잉탄압으로 국가가 분열되었다. 그 분열은 지금 더 크게, 더 깊이 벌어졌다. 남미 군사정권들에 비하면 '박정희 시대‘ 탄압은 별것 아니었다 할지 모른다. 그러나 고통은 주관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 시대(플러스 신군부 시대)의 그림자로 인해 좀처럼 아물지 않을 상처를 입었다고 아파하는 영혼들이 있는 한, 우리 현대사는 그 뒷자락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필자는 단독 강화(講和)를 한 셈이다. 10. 26 당시 어머니, 어린 아들, 나 셋이서 아무도 모르게 박 대통령 분향소를 잠깐 찾았다. “박정희 대통령, 귀(貴) 영가에 대한 미움에서 오늘부로 벗어나려 합니다. ‘박정희 근대화’는 적중(的中)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 세상에서라도 이 시대 정치적 수난자들의 마음을 헤아리셔야 합니다.” 그의 영혼이 헤아렸기를 소망한다.     지난 현대사에서 자성(自省) 해야 할 바가 있다면?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너무 일국(一國)주의에 갇혀있다는 점이다. 세상은 넓고 한국이 세상의 기준이 아니다. 넓은 안목을 가지고 이 좁은 우물 속에서 제살 깎아먹는 소모전 좀 덜했으면 한다. ‘폐쇄적 민족주의’는 북쪽 김가네나 하라 하고, 우린 보수를 하든 진보를 하든 글로벌하게 살아보자는 것이다. ‘박정희 100년’에 부치는 한 귀퉁이 소감이다.

류근일

문재인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 총회 회의장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뉴시스 “트럼프는 분명 정치인이 아니라 불장난을 즐기는 불망나니, 깡패임이 틀림없다... 미국의 늙다리 미치광이를 반드시, 반드시 불로 다스릴 것” 이 말은 김정은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한 성명의 한 부분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이 도발하면 “완전히 부숴버리겠다”고 한 것에 대한 멍군인 셈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완전히 부숴버리겠다”고 하고 아베 일본 총리가 미국입장에 전폭 동조하겠다고 하고 김정은이 “불로 다스리겠다”고 하는 판에 문재인 대통령의 ‘대화’가 설 자리가 과연 있을까? 남들이 아무리 격렬한 분노를 토로해도 나만은 고고한 가치와 이상을 견지하겠다는 건 물론 나쁜 건 아니다. 그러나 가치는 있어도 현실성이 없다면 그것 또한 문제다. 국제정치는 ‘레알 폴리티크’ 즉 현실주의적 접근으로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대북정책은 북한이 어떤 존재냐 하는 정확한 인식에 기초해야 헛물을 켜지 않을 수 있다. 현재의 김정은 북한은 분명 남북대화를 우선순위 상 아주 낮게 치고 있다. 수소폭탄-대륙간탄도탄을 보유한 김정은은 남한을 1대1의 대화 상대방으로 치지 않고 제압의 대상으로 치고 있다. 김정일과 김양건 대남담당 비서 때만 해도 북한은 남한을 위장평화공세의 대상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북한은 남한을 그 안의 ‘진보’ 정권까지를 포함해 자기들보다 저 하위(下位)에 있는, 그리고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백수로 치고 자기들은 미국과만 상대하겠다고 하고 있다. 자기들은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을 때릴 수 있는 핵보유국이란 뜻이다. 이 판에 문재인 대통령이 “평창 올림픽에 와 달라‘ ’800만 달러 주겠다” ‘대화하자“고 한들, 그게 김정은 귓가엔들 들릴까? ”아 남조선이 말랑말랑하게 나오는데“ 하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그럴수록 저들은 ”그럼 좀 더 높게 대접해 주지“하기 보다는, 더 기고만장해지고 우쭐해질 수도 있다.   미국-일본은 지금 최고도의 강력한 대북 봉쇄작전에 임하려 하고 있다. 세컨더리 보이콧도 곧 발동될 기세다. 북한의 돈줄을 한껏 죄서 김정은의 내탕금을 텅텅 빌 때까지 몰고 갈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김정은을 간부들로부터도 고립시켜 마침내는 레짐 체인지로까지 가겠다는 것이다. 북한의 정권교체, 붕괴를 바라지 않는다던 미국의 약속은 더 이상 있지 않다. 이젠 김정은에 대한 끝장 제재로 접어든 형국이다. 그런데 이 판에 한국만 ‘대화’?  대북 대화는 청(請)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북한에 대해선 오직 월등한 힘만이 통한다. 대화의 정신과 취지는 좋다. 그러나 세상에는 되는 일이 있고, 되지 않는 일이 있다. 문 대통령의 대북 대화제의가 되는 일인지 되지 않는 일('코리아 패싱')인지, 조만간 분명하게 가려질 것이다.

조갑제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 연설은 사실, 헌법, 상식에 반하는 점이 너무 많다.   1. 헌법을 준수해야 할 대통령이 자신의 정부를 촛불혁명이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헌법위반의 소지가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쿠데타이든 혁명이든 선거 이외의 방식에 의한 정권 교체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혁명은 초헌법적 발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촛불혁명이 아닌 대통령 선거로 탄생하였다.        거리를 가득 메운 수십만, 수백만의 불빛들, 노래와 춤과 그림이 어우러진 거리 곳곳에서 저마다 자유롭게 발언하고 평등하게 토론하는 사람들, 아이들과 손잡고 집회장을 찾는 부모들의 환한 표정, 집회가 끝난 거리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청년들에게서 느껴지는 긍지, 그 모든 장면들이 바로 민주주의였고, 또 평화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촛불혁명은 민주주의와 헌법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시민들의 집단지성으로 이어진 광장이었습니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나 자신도 오직 시민의 한 사람으로 그 광장에 참여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성취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실체인 국민주권의 힘을 증명했고, 폭력보다 평화의 힘이 세상을 더 크게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새 정부는 촛불혁명이 만든 정부입니다. 민주적인 선거라는 의미를 뛰어넘어, 국민들의 주인의식, 참여와 열망이 출범시킨 정부라는 뜻입니다. 나는 지금 그 정부를 대표해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시작은 늦었지만 세계 민주주의에 새로운 희망을 보여줬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2. 그의 6·25 남침 전쟁에 대한 언급은 사실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좌파적이다. 그는 북한정권을 침략자로 규정, 유엔군을 보내 한국을 살려주었던 그 유엔에서 한 번도 한국전쟁이 김일성의 남침에 의하여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한국전을 내전으로 인식하는 것은 한완상 류의 좌파적 인사의 왜곡이다. 6·25 남침 전쟁은 내전이 확대된 것이 아니라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을 업고 일으킨 침략전쟁이란 사실이 세계적으로 확정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브루스 커밍스 류의 反역사적, 反국가적, 反사실적 전쟁관을 갖고 있다는 게 놀랍다. ‘세계적 냉전 구조의 산물이었던 그 전쟁’이라는 말은 김일성의 전쟁범죄 책임을 덮기 위하여 냉전 구조에 책임을 轉嫁한 용서할 수 없는 억지이다.        그 전쟁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세계적 냉전 구조의 산물이었던 그 전쟁은 냉전이 해체된 이후에도,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64년이 지난 지금에도, 불안정한 정전체제와 동북아의 마지막 냉전 질서로 남아 있습니다.>      3.   이는 헌법위반이다. 헌법 제4조는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인위적 자유통일을 명령한 것이다.      4.   유엔이 촛불 되면 어떻게 되나? 불타 없어지란 뜻인가? 비유도 분위기를 봐서 해야 할 것 아닌가? 9·11 테러로 폭파된 세계무역회관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유엔건물이다.

유슬기

240번 버스가 건대입구에 정차할 당시 CCTV_ytn 캡처   라쇼몽(羅生門)은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1950년에 만든 영화다. 같은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증언이 엇갈린다. 1인칭으로 서술된 사건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이를 두고 사회학에서는 ‘인간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라쇼몽 효과’라는 말을 만들었다. 지난 11일부터 현재까지 240번 버스는 ‘라쇼몽’의 다른 이름이었다. 목격자의 기억과 당사자의 증언이 어긋났다. 여론은 급발진을 하듯 방향을 바꿨다. SNS를 타고 있던 이들은 다같이 앞으로 쏠렸다가 또 다같이 뒤로 쏠렸다. 멀미가 나는 이런 상황에 늦게나마 안전바가 되어준 것은 ‘Fact’였다.   240번 버스는 중랑차고지에서 출발해 건대역과 신사역을 지나는 버스다. 퇴근 인파가 붐비는 9월 11일 오후 6시 30분경 한 포털의 카페에 240번 버스 기사를 비난하는 글이 올라왔다. 비난의 내용은, 한 정류장에서 아이가 엄마 없이 내렸고, 이를 확인한 엄마가 세워달라고 소리쳤으나 기사가 이를 무시하고 지나쳤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만 내리고 미처 하차하지 못한 엄마를 태운 채 그대로 출발했다’는 글은 처음에는 안타까움을 나중에는 분노를 낳았다.   목격자의 기억 vs 당사자의 증언    이글이 커뮤니티 사이트, 카페 등에 퍼지면서 읽는 이들의 공분을 샀다. 여론이 확산되자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고 서울시는 이 사건에 대해 진상조사를 시작했다. 이튿날 오후 2시, 240번 버스기사의 딸이라고 밝힌 이가 해명글을 올렸다. 당시 정황에 대해서 처음 알려진 것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라쇼몽처럼 같은 사건에 두 가지 증언이 나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당시 상황을 담은 CCTV가 있었다. ‘다섯 살도 되어 보이지 않는’ 아이는 사실 일곱 살이었고, 등 떠밀려 내리는 대신 자기 발로 유유히 하차 계단을 밟았다. 아이가 내린 뒤 문이 닫히고, 240번 버스는 정류장을 떠났다. 건대입구역 정류장은 교통이 혼잡하다. 오토바이 충돌 사고도 빈번히 발생한다.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버스의 경우 정류장을 떠난 뒤에는 문을 열지 않도록 되어 있다. 운전 기사의 온정의 문제가 아니라 규정의 문제다.   과장된 선의, 상황의 급선회   그럼에도 이번 상황은 특수하다. 아이는 내리고, 엄마는 내리지 못했다. 지난 5월 인천 무인 지하철에서 유모차는 탑승하고 보호자가 타지 못하는 아찔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 경우는 기사가 운전하는 버스였기에, 특수한 상황에 대한 ‘융통성’이 논란의 화두가 됐다. 이렇게 아이를 잃어버렸을 경우,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시작은 ‘보호자의 부주의’였다고 해도, 함께 버스에 탑승한 이들은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선의가 발동하게 된다.   문제는 이 선의에 분노가 보태져 상황을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장된 선의’는 피해자의 부주의를 축소하고, 상황의 불가피성을 불합리성으로 탈바꿈한다. 아이 엄마가 울부짖었다는 표현이나, 기사가 욕을 했다는 정황은 사실과 달랐을 뿐더러 상황을 다른 방향으로 호도하는 신호가 됐다. 여론의 쏠림은,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분노’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기사 퇴출 운동’이나 ‘사과요구’ 등은 그 결과다.   버스 기사의 심경 인터뷰_채널A 캡처   해당 버스의 기사는 며칠 사이 지옥으로 향하는 급행버스를 탔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면 이승이 바로 지옥’이라는 참담함을 경험했다. 쏟아지는 비난에 식음을 전폐하고 일을 그만 둘 생각을 했다고 한다. 진상이 알려지면서 비난은 멈췄지만, 다시 버스를 운행하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해 휴직을 신청했다. 사과를 요구하던 첫 목격자와 아이의 보호자는 사과를 남긴 뒤 커뮤니티 공간에서 사라졌다. 라쇼몽에 등장한 승려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처럼 무서운 얘기는 처음이오. 이 일로 인해 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었소. 그건 도적 떼들보다도, 전염병보다도, 기근과 불보다도 더 나쁜 일이오”   기사를 폭행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기사들을 위한 유리벽이 설치됐다. 이는 혼잡한 차내에서 승객이 외치는 소리를 듣기 어려운 방음벽이 되기도 했다. 이번 사건은 어떤 벽으로도 보호해 줄 수 없는 화살이었다. 기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벽은 더 두꺼워질 것이고, 비슷한 사건이 났을 때 기민하게 대처하기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온정이 사라진 곳에 규정이 생긴다. 분노로 바뀐 선의는, 무관심보다 더 한 재앙을 낳기도 한다. 다시 라쇼몽, 재구성된 기억은 팩트체크가 필요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기억일 때는 더욱 그렇다.

오봉학

서늘한 바람이 불고 하늘이 맑아 창밖 풍경이 잘 보이는 완연한 가을아침이다. 모처럼 창밖으로 북악산을 보며 철민(가명)이와의 일을 회상하는 여유를 가져본다.      철민이는 일명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대학병원을 다니며 심리치료를 받고, 지금도 약을 복용하고 있다. 철민이가 1학년 때 참가한 가을 사생대회 및 백일장에서의 일화는 유명하다. 철민이는 이날 그림을 그리거나 글은 전혀 쓰지 않고 물에 뛰어들어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을 끼얹고 물총에 물을 담아 학생들에게 쏘고, 심지어 유치원 아이들의 뒤를 따라가며 큰소리로 “오리 꽥꽥” 하고 외쳤다. 철민이는 행사장에서 방송으로까지 주의를 받았다. 덕분에 다음해부터는 백일장 장소를 바꾸었다.      철민이가 3학년 때 우리 반에 배정되었다. 학급에서의 철민이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과제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제대로 끝마치지도 못하였다. 함께하는 조별 작업을 특히 어려워했다. 감정 표현을 적절히 못 하고 종종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선생님이나 급우들에게 내뱉었다. 갑자기 교실을 벗어나거나 이유 없이 다른 학생의 일을 방해하고 식당에서도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끼어들어 종종 다툼이 일어났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수업시간에는 의자에 앉아 있기를 힘들어했고 엎드려서 잠을 자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철민이는 장점도 많이 있었다. 감정 살린 노래를 잘 부르고 목소리가 크고 우렁찼다. 얼굴과 몸짓으로 감정 표현을 잘하였다. 심부름을 시키면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듯 쉬지 않고 뛰어다녔다. 질문이 많았다. 식물에 관심이 많았고 식물이 자라면서 보이는 작은 변화를 잘 알아차렸다. 다른 학생들의 감정 변화도 잘 읽는 것 같았다. 나는 교사와 학생들과의 협조를 통해 적극적으로 철민이를 도와주기로 했다. 철민이 스스로도 노력하기로 약속했다.      철민이의 장점은 잘 살리고 단점이 되는 행동은 줄여나가기로 했다. 자리부터 배려해 뒷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로 앉혔다. 충동을 이기지 못해 밖으로 뛰쳐나갈 때 다른 친구들에게 방해가 적고 철민이에게도 편리했다. 잘못된 행동을 한 후에는 반드시 사과하기로 하고, 학생들은 철민이의 과도한 반응에 침착하게 대해주기로 했다. 반 체육대회의 응원단장은 에너지가 많은 철민이 몫이었다. 철민이는 모두가 놀랄 만큼 훌륭하게 응원단을 구성하고 이끌었다. 특색 있는 분장과 복장으로 와서 과장되고 큰 몸짓 큰 목소리로 응원하니 효과 만점이었다. 독창의 기회를 자주 갖도록 음악 선생님이 도와주시고, 방과 후에도 성악반에 들어가 노래를 배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철민이의 노력만큼 행동이 점점 좋아졌다. 학생들과의 어울림도 자연스러워졌다. 결국 노래 재능을 잘 살려 예술 계통의 특성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진학 후 철민이는 뮤지컬을 하고 싶다며 새벽에 일어나 학원에서 영어를 배우고 학교에 등교했다. 밤 12시까지 공부와 노래, 춤 연습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와 고등학교 선생님들의 칭찬도 많이 듣게 됐고 약도 끊게 되었다. 이제 철민이는 원하는 대학교에 진학해 뮤지컬 배우의 꿈을 키우며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

김형국

이건 국토발전의 오랜 세계적 법칙이다. 한반도도 마찬가지로 선진국에서 흘러 들어온 신문물은 수도 서울에서 먼저 자리 잡았고 그다음 지방으로 퍼져 나갔다. 신식 문물 등의 혁신(革新)은 생성시킬 앞선 창의적 두뇌가 있어야 하고 그걸 수용해 줄 인구가 많아야 한다. 이 점에서 단연 서울이 압도적이다. 까닭에 이 나라의 혁신 문물은 거의 절대적으로 서울발이거나 서울 경유였다.      지방도시 시발의 시민강좌  〈도판 2〉 노산 이은상 시비, 마산역 광장 입구가곡 ‘가고파’의 가사가 새겨졌다. 시비가 2013년 2월 6일에 제막되고 그다음 날, 이승만 독재 등에 부역했다고 비판하는 조직이 돌비에다 페인트 훼손을 저질렀다. 사람에 대한 평가를 공과로 교량(較量)하기보다 일도양단하려는 한국적 정서 탓인지 “치앗삐라”를 연발하는 지방적 정서 탓인지 마산 상징의 명시(名詩)도 시련을 받고 있다.  법칙엔 예외가 있다. 우리나라 도시들 가운데 최초로 남해안 마산에서 거도적(擧都的) 인문학 강좌가 40년 전인 1977년에 생겨났던 것도 그 하나다. 이래로 줄곧 지속되어 온, 전문적으로 말해 기관형성(機關形成)이 되었으니 서울 등의 대도시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경우로 바로 마산의 합포문화동인회가 펼쳐 온 ‘지역과 세상을 밝힌다’는 인문강좌가 올봄 마흔 돌을 맞았다.     합포는 개항도시로 출발한 마산의 옛 이름이다. 이곳 지방 유지들이 시민의식을 심화시키려고 결집했던 시의(時宜)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때 1970년대 중반은 ‘하면 된다’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현대 한국의 경제성장이 한창 탄력을 받았을 때로 절대가난을 뛰어넘는 성장이면 만사형통이라고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때 세상 추이에 대해 촉각을 세우려고 1968년에 발족한 한국미래학회가 발전이 초래할 갈등에 대해 앞서 염려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우연의 일치로 무언가 서울보다 한발 늦다고 생각해 온 지방에서 외형적 성장이 초래할 사회계층 간 갈등 등의 사회비용을 놓고 자의식 강한 그곳 마산 시민들이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도판 1 참조)    새로운 일에는 역시 사람이 있는 법이다. 혁신은 먼저 새롭게 생각하는 아이디어맨인 원(原)착상자가, 그리고 착상자의 뜻을 받들어 이를 펼쳐 나가려는 창도자(唱導者)가 있기 마련이다.    합포문화동인회의 원착상자는 마산 태생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1903~1982) 시조시인이었다. 물론 동향 문인에 전국적 사랑의 인물도 있다. 애국가보다 더 많이 불린다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의 ‘고향의 봄’ 동요를 열네 살 때 지었다는 이원수(李元壽·1911~1981) 아동문학가나,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귀천’을 노래했던 순진무구의 극치 천상병(千祥炳·1930~1993) 시인이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마산을 문향(文鄕)으로 소문나게 만든 주역은 연조로 봐서도 국민애창가곡 ‘가고파’ 작사자 노산일 것이다.(도판 2 참조)    1976년 말 고향을 찾았던 노산이 재향(在鄕) 청년들에게 지방문화 창달의 방편으로 인문강좌를 제안했다. 원로다운 제안이었다. 그해는 칠십대 중반 노산에게 무척 득의의 시간이었다. 서울에서 그의 문학 일대를 기리는 노산문학상이 제정되었고, 이 연장으로 ‘민족문화강좌’를 해마다 6회씩 대학을 순회하며 개최한다는 계획도 세웠다.(《경향신문》, 1976.4.5) 고향을 위해서도 사회의식을 자극할 장치를 찾고 있었다.      아이디어에는 튼실한 실행가가    마산의 뜻있는 청장년 여럿이 한국 문화계의 원로 노산을 적극, 그리고 즉시 호응했다. 이듬해 1월, 민족문화협회의 마산지부를 결성하고 지부장 선임과 함께 곧이어 3월에 ‘마산 태생’ 제1회 민족문화강좌를 열었다. 그 시절은 문화행사용 도시 인프라가 다방이 고작이었다. 전국적 문화인사 노산의 ‘충무공의 구국정신’ 특강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산에 전해진 참신한 아이디어의 착상과 실행에 앞장선 창도자들 가운데는 지성(至誠)의 리더도 있어야 했다. 그 노릇을 감당한 이가 그때 여당 사무국 마산지부 간부 조민규(趙敏奎·1936~)였다. 시민의식 고취형 인문강좌 아이디어가 특히 그에게 솔깃했음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때 몸담고 있던 정당 사무국 요원들은 공익(公益) 실현에 앞장서야 하는 직분도,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기 일쑤인 그 판에서, 자칫 빈말에 그치기 쉬웠고 그만큼 손에 잡히는 구체적 실행의 보람을 느끼기 어려웠던 점이 스스로 실망스러웠고 한편으로 노산의 제안이 가슴에 와 닿았음은 마산 창신학교의 선후배 사이라는 진한 유대감도 작용했다.    고등학교로 구실하고 있는 창신학교가 어제오늘 전국적으로 알 만한 존재가 더 이상 아닐지라도 아는 사람은 알듯이, 1906년 설립의 오랜 역사에다 무엇보다 일제 때 민족의식 고취에 매진했던 자랑스런 역사의 학교였다. 그때 저명 국학자들이 교편을 잡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를테면 일제에 대한 저항의 몸짓으로 《성웅 이순신》을 펴냈던 이윤재(李允宰·1888~1943)도 그 한 분이었다. 나중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잡혀 옥사한 그가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쳤을 것인가는 능히 짐작되고도 남았다.    창신학교는 그때 그곳 기독교 수용에도 앞장섰던 마산 개화의 주역 이승규(李承奎·1860~1922)가 세운 학교였다. 바로 노산의 아버지였다. 노산 또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함흥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기소유예로 겨우 풀려났다.       민족문화강좌의 진행  〈도판 3〉 김훈 작가 특강이순신의 행적을 알리려고 애썼던 노산에 이어 더욱 폭넓게 감동으로 ‘민족의 태양’을 만나게 해준 《칼의 노래》의 동인문학상 작가가 장군의 승첩에 합포해전(1592년 5월 7일)도 들어 있음을 일깨우고 있음인가.  그렇게 시작한 민족문화강좌는 사회 각계의 일선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론형 식자들과 실무형 리더들을 초청해서 그들의 소견, 식견을 육성으로 경청하는 방식이었다. 세상 일이 하나도 쉬운 것이 없다는 게 상투어인데, 문화강좌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유명한 강사 섭외가 어려웠다. 요로를 통하긴 해도 그 섭외는 항상 아쉬운 부탁일 수밖에 없었다. 어렵사리 확보한 강사를 마산까지 모셔오는 일도 언제나 조마조마했다. 서울과 마산을 오가는 KTX 운행이 시작된 2010년 말 이전만 해도 서울 출발 강사들은 대개 비행기를 이용했는데 그때마다 김해비행장 출영도 지부장 조민규의 몫이었다. 이런 부담성 과업에 대처하자면 일자리가 아예 공동체 봉사형이어야 좋겠다고 생각할 무렵 마침 대한적십자사가 경남지사를 출범한다기에 거기 사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합포문화강좌는 마흔 돌 기념식이 열렸던 2017년 3월 17일 현재로 470회를 기록했다. 그 사이 이어진 강사진은 한마디로 이 나라의 명사 족보와 다름이 없었으니 이 강좌를 즐겨 온 마산 시민의 자부심도 ‘좀 넘치게’ 도저(到底)했다. “합포문화강좌에 서지 못한 이는 아직 한국 명사 반열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라고.    기실, 자부심도 가질 만했다. 서울 쪽에서 보면 한미하다 할 천리 밖 도시인데도 청중의 열의에 감복한 나머지, 일단 다녀간 연사들은 장차의 또래 연사를 즐겨 추천해 주었다. 초치된 연사들 가운데 누구라 하면 알 만한 전국적 인사는 문단 쪽이기 쉬운데 그 사이 다녀간 이로 모윤숙, 정비석, 김동리, 구상, 이병주, 황금찬, 이문열, 김훈을 우선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가까이 2016년 말에는 백 세를 바라보는 높은 나이에 《백년을 살아보니》(2016)를 펴내 시중의 화제를 모았던 철학자 김형석(金亨錫·1920~)도 다녀갔다. 그의 특강에 회원들의 호응이 컸다.(도판 3 참조)     기함(旗艦) 행사인 합포문화강좌를 주축으로 1976년부터 개최해 온 ‘노산가곡의 밤’은 35회, 젊은 주역을 상대로 2007년부터 시작한 ‘영리더스강좌’는 38회, 1999년부터 시작한 ‘여성강좌’는 66회, 1988년부터 시작한 ‘인간생명의 존엄성에 관한 세미나’는 15회를 기록했음이 대표적 방계 활동이었다.    동인회의 대표적 강좌가 계속되고 거기에 좀 전문적인 강좌들로 가지를 칠 수 있었던 성공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마흔 돌 기념의 제470회 강좌는 바로 동인회의 대표 얼굴이던 조민규의 그간 내력에 대한 성찰로 갈음했다. 무엇보다 동인회의 활동비용을 정부나 기업 등 외부에 일절 기대지 않고 개인 회원들이 취지에 적극 찬동해서 물심양면으로 직접 참여해 왔던 덕분이었다. 이를 더욱 제도로 굳히기 위해 출범 20년이던 1996년에 사단법인을 결성했다.     마흔 돌 기념행사에서 동인회는 조민규의 공덕을 두 가지 방식으로 기렸다. 하나는 옛 선비들의 아취(雅趣)에 따라 마산의 옛 이름을 따서 ‘합포’라는 아호를 봉증했고, 또 하나는 자칫 빠질 수 있는 반목과 질시의 나쁜 버릇을 경계하면서 남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돕는 지방 분위기 창출을 기대하려고 ‘합포조민규봉사상’을 제정했다.(도판 4 참조)      시민강좌가 기대하는 바는?    마흔 돌을 맞아 장차의 사십 년을 기대해 봄은 생명력 있는 조직체의 당연 관심사다. 일단 그간의 관성(慣性)으로 잘되리라는 기대는 금물이라는 게 동인회 안팎의 공통 인식이었다. 향토사랑은 무엇보다 영토성(領土性)이 그 기반인데, 동인회의 기반이던 마산의 지명(地名)이 명사로는 사라지고 ‘마산 합포구’와 ‘마산 회원구’라는 식의 관형사로 겨우 남았기 때문이다. 행정 경계가 경제생활 경계와 차질이 있다며 2010년 이웃 행정구역끼리 통합할 때 마산·창원·진해 인근 세 시가 창원시로 통합된 결과였다.     마산이라 하면 구마산·신마산·북마산을 지칭하던 세 쪽 마산이, 얼마 뒤에 동마산·서마산이 보태진 다섯 쪽 마산이 그 지리적 구성인 줄 알았던 토박이들이 그만 난감한 상황을 만나고 말았다. 시내외를 오가는 도중에 만나는 도로표지판 행선지에 ‘마산’이 나와야 할 자리에 계속 ‘창원’이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창원에 경남도청이 옮겨오긴 해도 개화기 이후 생겨난 이 나라 도시 체계에서 마산의 위상은 인접 도시가 비할 바 아니었다. 19세기 말 개항에다 일제 때는 그 식민 모국과 가까운 근접(近接) 지정학으로 성장세를 얻었고 광복 조국이 동족상잔의 시련에 들었을 때 대한민국을 지켜낸 것이 낙동강 최후 방어선이었는데 그 일각인 ‘마산-진동전투’의 승리가 패망 직전의 대한민국을 구출한 보루였다.    전쟁이 끝난 뒤 전후 복구기에 일본 밀수의 거점이라며 ‘우마야마갱(馬山縣)’이란 오명을 잠시 피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국의 자생적 근대화의 기폭제가 되었던 정치혁명이 저 유명한 3·15의거가 일어났던 곳이 바로 마산 아니던가. 이를 계기로 마산은 일거에 이 나라 민주화의 성지(聖地)로 우뚝 솟았고 그 기백이 부마사태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 마산 시민들의 자부심이었다.      마산정신은 어디로  〈도판 1〉 마산수출자유지역수출자유지역은 한국 산업화 과정에서 외국인의 투자촉진·고용증대·기술향상을 목적으로 수출자유지역설치법(1970)에 따라 경남 마산과 전북 익산 2곳에 지정·개발되었다. 구로공단에서 보았던 산업화의 명암은 마산수출자유지역도 마찬가지였음을 시인(서효인, 《여수》, 문지사, 2017)이 〈마산〉이란 서사시로 성찰하고 있다. ‘자유무역단지에서 빠져나오는 이들은 여공이었다. 밤이면 학교에 갔지만 엎드려 있었다. 토요일이면 졸업처럼 시내에 나갔고, 시내에 붙은 바다에 떠밀려갔다.…’  현대 한국 민주화의 선봉이었다는 자부심이야말로, 비록 마산 땅이란 영토성은 희미해졌지만, 기질로 살아 있는 마산정신이라 할 것이다. 통영 쪽 예술정신은 임란이 끝난 뒤 그곳에 자리 잡았던 수병들이 배운 게 바다뿐인 지경에서 체질화된 강한 생활력과 함께 바다의 낭만에서 유래했다는 그곳 출신 박경리 소설가의 소론이 설득력이 있다면 충무공이 승첩을 거두었던 해역이던 마산 또한 그런 환경에서 마산정신이 생겨났을 것이다. 서양사에서 혁명성은 항상 낭만성을 동반한다 했다. 어렵사리 말할 게 아니라 이 점은 흘러간 옛 우리 유행가가 단도직입으로 쉽게 말해준다. ‘마도로스 순정’의 한 구절이 바로 그것. “바다에는 강하여도 사랑에는 약한 게 마도로스다!”    합포문화동인회는 바로 혁명과 낭만의 양 날개를 품고 있는 인문성을 지키고 키워나가려는 몸짓이다. 동인회 말고, 땅 근거를 잃었지만, 마산정신을 이으려는 재향 및 출향 인사의 노력도 현재 진행형이다. 마산을 근거로 살았던 명인들과 그 행적을 적은 책(남재우·김영철, 《그곳에 마산이 있었다》, 글을읽다, 2016)도 나왔다.    한편, 현지 당국도 창원을 광역시로 키우려고 백방으로 노력 중이다. 그게 성공하면 광역시 안에서 마산시는 이름으로 옛 자리를 찾을 수 있으리란 일말의 기대도 거기에 끼어들었다.⊙
10개더보기

TODAY`S 칼럼

TODAY`S FUN

TODAY`S 뉴스&이슈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