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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공항 신설 놓고 10년째 공방

앞쪽에 송전탑이 있는 길게 가로지르는 섬이 흑산도공항이 들어서 부지다. 섬을 가로로 절단 내서 1,200m의 활주로를 만든다는 계획이다.흑산도공항이 갑자기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전 환경부 장관이 흑산도공항에 반대하면서 경질됐다는 보도도 잇따른다. 경질하기 위해 청와대 감찰까지 있었다는 주장이다. 흑산도공항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흑산도공항의 핵심 쟁점은 ‘주민편의성과 관광활성화’ 대 ‘환경훼손’이다. 흑산도공항은 2009년 국토부가 검토하면서 시작됐다. 당초 계획은 국비 1,833억 원을 들여 정원 50석 안팎의 항공기가 이착륙 할 수 있는 1,160m 길이의 활주로와 여객터미널 등을 건설할 예정이었다. 국책사업으로 용역을 마치면서 2013년 예비타당성 조사까지 통과했다. 2016년 완공해서 2017년 운영에 들어갈 목표까지 세웠다. 하지만 2016년 10월 국립공원위 첫 심의에서 조건부 보류되면서 지연되기에 이르렀다. 2018년 7월 20일 두 번째 심의에 이어 11월 19일 세 번째 심의까지 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 와중에 국토부 서울지방항공청이 2016년 10월 공원위에 사업계획을 제출했으나, 공원위는 11월에 보완요구를, 2017년 7월에는 재보완 요구를 했다. 이에 서울지방항공청은 2018년 2월 재보완 서류를 제출했고, 공원위는 7월부터 경제성·환경성·안전성 등 쟁점사항에 대한 전문가 검토와 종합토론회 등을 진행했다. 특히 11월 19일 제124차 공원위에서는 위원들이 진행한 전문가 검토와 토론회 등의 결과를 보고 받고 최종 승인여부를 결정하기로 했으나 국토부 등의 반대로 결론을 내지 못하고 회의가 중단되는 등 파행을 거듭했다. 공원위는 주로 민간위원들로 구성돼 사업반대 가능성이 높자 환경부가 나서 심의를 중단시켰다는 후문이다. 당시 김은경 장관도 반대입장을 명확히 밝혀 경질됐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환경단체와 반대론자들은 건설대상지가 국립공원인데다 철새도래지이고, 경제성도 낮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문재인 후보의 대선공약이자 이낙연 총리가 전남지사로 있을 때 적극 추진했던 사업이라 현 정권 차원에서 밀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이낙연 총리는 전남지사 취임 후 “흑산공항이 2020년 완공되면 흑산도와 서울, 중국 간 접근성이 1시간 거리로 개선되는 세기적 변화로 흑산도가 천지개벽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한다. 환경부 장관은 반대입장이라 당연히 정권에 부담이 됐을 수 있어 경질됐다는 것이다. 반면 주민들 포함 사업추진론자들의 찬성론은 매우 거세다. 목포항에서 흑산도까지 쾌속선으로 2시간가량 걸리는데다 파도가 높아서 선박 결항이 잦아 주민들의 불편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또한 한 해 관광객만 20여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년 한국의 가고 싶은 섬에 꼽힐 정도로 풍광도 매우 뛰어나다. 접근성만 좋으면 관광객은 폭발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지난 12월 흑산도 신안 이종주 군의원은 “환경단체들이 왔을 때 환경문제만 말하면 되지, 왜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경제성과 안전성이 없다는 말을 하느냐. 철새도래지는 주변 섬에 충분한 대체지가 있으며, 경제성과 안전성은 국가가 공인하는 기관에 의뢰해서 완전 검증받을 자신이 있다”고 강조했다. 흑산도 주민들이 지난 11월 19일 국립공원위에서 흑산도공항 건설을 반대하고 사업을 무산시킬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집단 상경해서 회의를 저지하는 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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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근

■ 케 브랑리 박물관의 ‘십이류면류관’   2018년 10월 25일, 문화유산회복재단 조사단은 스포츠 토토의 후원을 받아 프랑스 국립박물관인 케 브랑리박물관을 방문하였다. 박물관은 2006년에 개관한 곳으로 건물 외관부터 특이하였다. 박물관은 에펠탑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은 주로 인류 초기의 문명 유물 30만여 점을 전시하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조사단은 이곳에 19~20세기 수집한 한국 유물이 소장되어 있어, 어렵게 열람 허락을 얻어 방문하였다. 한국 유물 중에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십이류면류관’이었다. 조사단을 맞이한 박물관 측은 특별 열람실에 ‘십이류면류관’을 전시하고 관련 자료를 검색할 수 있게 컴퓨터도 연결하였다.   십이류면류관은 ‘황제’만이 착용할 수 권위의 상징이다. 중국이나 일본은 황제국을 자칭하면서 자신만의 열두 줄 구슬이 달린 면류관을 사용하였지만 조선은 아홉 줄이 달린 구류면류관을 착용하였다. 그러나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조선은 황제국이 되었고 십이류면류관을 사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순종황제가 십이류면류관을 쓴 사진은 있으나, 고종황제의 십이류면류관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고 사진조차 없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었다. ■ 1898년 스테낙께르가 수집했다 조사단으로 참여한 김나래 박사는 수집 경위와 관련하여 “면류관의 경우 다른 한국 수집품과 함께 처음에는 1898년에 기메박물관으로 스테낙께르에 의해 기증되었다. 이후 1981년 트로카데로에 있는 인류 박물관(Musée des hommes)으로 다른 아시아 유물들과 함께 옮겨진 후, 다시 2006년에 께 브랑리 인류사 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1904년에 발간된 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기증자 명단에 요코하마의 프랑스 영사였던 스테낙께르가 있으며, ‘돌조각상 하나와 한국의 머리장식 및 모자 컬렉션을 기증했다(Steenackers-Consul de France à Yokohama. Une statue pierre. Une collection de coiffures coréennes)’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여기에서의 하나의 컬렉션이라는 표현이 모호하여 구체적으로 그 수량과 형태를 이 글만으로는 자세히 추정하기는 어렵다.    현재 께 브랑리 박물관의 십이류면류관 유물 카달로그에는 기증자에 대한 정보와 함께 아래와 같은 옛 한국 모자의 형태, 왕실용 모자제작 등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다. ≪Série de chapeaux coréens envoyés au Musée Guimet en 1898 par M. Steenackers le donateur.Les chapeaux doivent se placer sur le sommet de la tête, ils ne sont pas faits pour être enfoncés, ce qui explique la petitesse du tour de tête, il en est de même pour la plupart des bonnets, sauf ceux en crin tressé et ceux formant capuchon, destinés à protéger du froid. Ces derniers se portent toujours sous le chapeau. Dans les couvre-chefs coréens présentant une partie plus haute que l’autre, la plus élevée est destinée à couvrir la tête, cette disposition a pour but de loger le topnot, touffe épaisse de cheveux relevée en forme de chignon, que les hommes portent au sinciput. Les chapeaux et bonnets royaux ne peuvent être confectionnés que par certaines personnes possédant ce droit héréditairement, nul autre ouvrier, sous peine de mort, n’a le droit de fabriquer les coiffures royales. Il est interdit à ceux qui sont autorisés à fabriquer les chapeaux du roi, de vendre ces objets, sous les peines les plus sévères. Les coiffures royales hors d’usage ou ne plaisant plus au souverain, sont détruites au Palais.기증자 스테낙께르에 의해 1898년 기메 박물관에 보내진 한국 모자들모자들은 눌러쓰는 것이 아닌 머리 위에 놓는 스타일로 머리 둘레가 작은 편인데, 말총으로 짜여진 것(탕건)이나 두건형태의 것을 제외한 추위를 막기 위한 대부분의 헝겊 모자들도 이와 같다. 이것들(탕건이나 두건들)은 항상 모자 아래에 쓰여진다. 한국의 두건식 모자들은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더 높은데 가장 높은 부분은 머리를 덮는 곳이며, 이러한 형태는 남자들이 전두부에 머리를 틀어올린 상투끝을 놓기 위한 것이다. 왕실의 모자들은 대를 이은 특별한 장인들만 제작할 수 있으며, 다른 장인들은 왕실 머리장식이나 모자들을 만들 수 없으며 이를 어길 시 사형을 당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왕의 모자를 만들거나 심지어 파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일반적인 경우) 사용할 수 없거나 왕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왕실 모자들은 궁에서 파기된다.≫설명대로 왕실에서 사용된 물품들은 궁에서 파기되기 때문에 어떤 경로로 궁 밖으로 유출되었는지, 어디에서 스테낙께르가 구입해서 1898년에 프랑스에 기증하게 되었는지 의구심이 생긴다. 참고로 이 면류관 외에도 께 브랑리 박물관에는 한국 왕실 의례 때 쓰였던 금관(목록번호 71.1981.93.18 D) 등 관모(官帽)를 소장하고 있는데 역시 같은 내용이 설명되어 있다.십이류면류관은 박물관의 홈페이지(collections.quaibranly.fr)에는 머리쓰개(coiffe)류로 분류되어 있으며, 목록번호(71.1981.93.21 D), 면류관이라는 한국식 발음 명칭, 인류 박물관에서 이전된 유물, 19세기 후반, 재질(종이, 천, 밀랍), 크기와 무게(20x25x20cm, 177g) 등의 기본 정보가 소개되어 있다. 오렌지색, 빨간색, 녹색의 12줄 구술 끈과 붉은 술이 특별한데 홈페이지의 첫 줄에 ‘공식의례를 위한 황제의 머리장식’이라고 소개되어 있으며, 이후의 설명은 위의 카달로그 내용과 동일하다.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가 구류 면류관과 구장 면복을 입은데 반해, 황제는 십이류 면류관과 십이 장복을 입었음을 고려할 때 이 면류관이 대한제국 선포 이후 1897년경 제작된 고종황제의 면류관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께 브랑리로 이전된 이후 먼지가 제거되고 떨어진 술과 면판의 박락된 모서리부분을 붙여놓았으며, 전체적으로 유물의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대한제국의 ‘십이류면류관'이 아니다조사단이 촬영한 면류관의 사진을 본 궁중복식전문가들은 ‘우리 것이 아니다’라는 입장이다.우선 구술 줄이 앞면에만 있고, 구슬의 배열과 면판도 오동나무면판이 아닌 종이에 천을 배접한 점 등 대한황실의 제작기법, 형태, 재질 등에 있어 상이함으로 유사품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참고로 대한제국의 십이류면류관에 대한 기록은 에 있다. 대한예전은 대한제국이 창건됨으로 새롭게 제정한 예전으로 ”시일야방석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이 각고의 노력 끝에 편찬하였다.     ■ 프랑시스 프레데릭 스테낙께르 Francis-Frédéric Steenackers (1858-1917)김나래 박사의 조사에 의하면 프랑시스 스테낙께르는 유명한 행정가이자 조각가, 역사가, 문학가였던 프랑소와 프레데릭 스테낙께르(François-Frédéric Steenackers, 1830-1911)의 아들로 30살 무렵부터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88년 스위스의 프랑스 부영사를 역임했으며, 같은 해 기사훈장을 받았다. 이후 프랑스로 돌아왔으나 1891년부터 일본의 프랑스 공사관에서 부영사로 일했다. 이 시기 스테낙께르는 일본 미술품 애호가였던 정치가 조르쥬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1841-1929)의 ‘눈’이자 자문 역할으로 그의 많은 일본 미술작품과 민속품 수집을 돕게 된다. 이 시기의 외교관들이 과학조사(mission scientifique)를 목적으로 현지의 민속학 자료 및 유물들을 수집해 프랑스로 보내는 일을 수행했다. 아시아 예술품에 해박했던 스테낙께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일본과 한국의 민속품 등을 수집해 프랑스로 보냈으며, 1898년에는 기메 박물관에 십이류면류관을 비롯한 한국 민속유물들을 기증했다. 께 브랑리 박물관 카달로그에는 모자(삿갓, 면류관, 사령모자 등)류, 머리장식품, 부채류들의 기증자로 기록되어 있다.1900년부터 1906년까지는 나가사키 및 요코하마 프랑스 영사로 일했으며, 폴 포탕의 군사자문이자 일본 전문가로 유명해졌다. 1908년에 프랑스 공사관이 일본에서 문을 닫게 되며, 스케낙께르는 프랑스로 돌아와 58세의 나이로 파시(Passy)에서 사망한다.저서로는 우에다 토쿠노스께(Uéda Tokunosuké)와 함께 프랑스어로 편찬한 이 있다. 1885년에 파리에서 출간된 이 책은 각 페이지마다 소소한 일본인들의 일상을 그린 삽화들과 수묵화들이 포함되었으며, 각 격언마다 스테낙께르가 상세한 해석과 설명을 한 점이 인상적이다. ■ 대한제국 선포의 역사적 의미와 면류관의 ‘진실’    문화유산회복재단은 박물관에서 기록한 수집시기와 수집가에 대한 내용과 궁중복식연구가들의감정결과에 따라 케 브랑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국 유물의 출처조사가 필요하다고 결론내렸다. 십이류면류관이 유사품이라면 이를 박물관에 알리고 바로 잡아야 하고 국내 연구자들의 기술적 범위에서의 감정이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면 이에 대한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하였다.   자주독립국가의 상징인 ‘십이류면류관’은 ‘만세’운동의 상징성과 함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귀중한 단서가 될 것이다.

박동운

바른사회시민회의·대한민국수호비상국민회의·선진통일건국연합 등 보수 진영 11개 시민단체가 공동 주최로 1월 2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자유진영 시국 대토론회’를 갖고 ‘보수 통합’ 기치를 내세웠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이날 토론회에서 “반(反)대한민국 세력에 의해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보수 우파 자유 진영은 통합과 단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자유한국당 김영우 의원은 “보수 원탁회의를 만들어 보수 대통합을 시도해야 한다”고 했고, 김종석 의원은 “한국당이 플랫폼 정당이 돼서 이념과 가치에 뜻을 같이하는 모든 정치 세력을 단결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 토론회에서 등장한 ‘보수 원탁회의(圓卓會議, Conservative Round Table Conference)’를 이야기한다. 원탁회의는 회의 참가자들의 서열에 집착하지 않고 대등한 관계에서 자유롭게 발언 할 수 있는 회의로, ‘둥근 테이블’을 이용한다. 원탁회의 아이디어는 아서 왕 전설에서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을 위한 탁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원탁회의가 위력을 발휘한 사례는 뉴질랜드 노동시장 개혁에서 찾을 수 있다. 데이비드 롱이 총리는 1984년에 정권을 잡자마자 영국의 마가렛 대처처럼 구조개혁을 추진했다. 구조개혁은 순조롭게 추진되었으나 노동시장 개혁은 막강한 노조 파워에 막혀 한 치도 나아가지 못했다. 1984년 이후 10여 년 동안 정권이 세 차례나 바뀌었을 정도로 노조 파워는 막강했다. 뉴질랜드는 두 차례나 노동시장 개혁에 실패한 후 1990년 10월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이 무렵, 1986년에 자유주의 경제학으로 무장한 일단의 영향력 있는 기업 인사들이 조직한 ‘뉴질랜드 기업가 원탁회의(New Zealand Business Roundtable)’가 급진적인 노동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들은 100여 년 동안 유지되어 온 ‘중앙집권적 노사관계법’ 개정과 ‘특별법’이 적용되어 온 노동도 일반 상품과 마찬가지로 ‘보통법’이 적용되어야 하는 자유계약의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노동개혁을 선거의 핵심 이슈로 내건 국민당이 1990년 10월 선거에서 재집권한 후 1991년 5월 15일에 ‘고용계약법(Employment Contract Act of 1991)’을 도입함으로써 뉴질랜드 노동시장 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기업가 원탁회의’가 한 몫을 했다.‘원탁회의’는 한국에서도 빛을 발했다.  2011년 7월에 출범한 소위 ‘희망 2013·승리 2012 원탁회의’가 그것이다. 이 내용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에 잘 나타나 있다. ‘2013년체제 만들기’는 백낙청 중심의 좌파들이 당시 이명박 정부가 끝나면 우파를 무너뜨리고 좌파 정부를 세우자는 정치 계획이었다. 이들은 2011년 11월 26일에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좌장으로 이해찬 전 총리, 함세웅 신부,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김상근 목사, 이창복 민주통합시민행동대표, 문성근 국민의 명령 대표, 이학영 진보통합시민회의 상임대표 등 20∼30여 명의 좌파 원로들과 시민정치조직 핵심 관계자들이 참여하여 첫 원탁회의를 가졌다. 이들의 계획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문재인 대선 후보가 이끈 ‘촛불시위’가 박근혜 정부를 조기 퇴진시키고 문재인 정부를 들어서게 하는 데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원탁회의’는 위력을 발휘했다.    최근에 들어와 한국 정계에서도 ‘진보 대 보수’ 논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되어 이 기회에 나는 20개 항목에 걸쳐 ‘진보와 보수의 성격’을 비교한다. 내용 자체가 어렵지 않은 데다 지면의 한정 때문에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한다. ‘진보=좌파’와 ‘보수=우파’는 프랑스혁명(1789∼1794) 때 등장한 말이다. 왕정체제를 무너뜨려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려 한 공화파가 ‘진보’, 왕정체제를 고수하여 기존체제를 유지하려 한 왕당파가 ‘보수’로 불렸다. 일반적으로 진보는 미래와 기존체제 내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고자 변화를 추구하고, 보수는 기존체제 내에서 전통적 가치를 찾아내 이를 옹호하고 유지하려는 정치 이념이다. 따라서 진보정당은 반시장·친규제·복지·평등·큰정부 등을, 보수정당은 친시장·친기업·반규제·경쟁·작은정부 등을 지향한다. 현재 한국의 정치풍토에서 ‘진보=좌파’는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 ‘보수=우파’는 자유한국당이 대변한다. 그 외의 야당은 좌파, 반보수 등으로 분류되는 것 같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바른사회시민회의 등 보수 진영 11개 시민단체가 ‘보수 통합’ 기치를 내세웠는데, 그렇다면 ‘보수 원탁회의’도 좌파의 ‘희망 2013·승리 2012 원탁회의’처럼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보수 원탁회의’가 위력을 발휘하려면 ‘출발’에 그치지 말고 면밀하게 스케줄을 세워 2020년 국회의원 선거와 2022년 대통령 선거를 향해 쉬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능력 있는 보수 인사들이 수없이 많다. 11개 시민단체들은 더 많은 보수 단체들을 통합하여 보수 원로들을 원탁회의로 불러내, 문재인 좌파 정부에서 총체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대한민국을 살릴 수 있는 고견(高見)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간의 건실한 이념 논쟁은 대한민국 발전에도 밑거름이 될 것이다.

김승열

디지털 시대에는 고정비용이 많이 드는 오프라인 사무실이 필요없다. 컴퓨터가 바로 온라인 사무실이 된다. 사무실의 위치, 크기와 화려한 외관 등이 회사의 권위와 신뢰의 상징이 되어 왔다. 지금도 여전히 사무실의 외형은 회사 신뢰성의 척도다. 그러나 문제는 번지르르한 외형에 따른 고비용이 모두가 소비자들에게 돌아간다는 사실. 정보가 공개·공유되기 어려운 시대에는 어쩌면 불가피한 면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디지털 시대다. 거의 모든 정보가 공개·공유되는 블록체인(Blockchain) 시대다. 주된 업무와 서비스가 온라인으로 처리되어 오프라인 상의 사무실 공간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도심 번화가에 사무실을 열고 값비싼 기자재를 들여놓아 회사 방문객이나 소비자의 눈을 현혹시킬 필요가 없게 되었고 고정비용 역시 크게 줄이게 되었다.   이른바 온라인 혁명은 직원들의 출퇴근에도 영향을 미친다. 각자의 업무는 컴퓨터만 있으면 되니 컴퓨터가 있는 곳이 바로 사무실이다. 노트북과 핸드폰 그리고 약간의 협업을 위한 컴퓨터 소프트웨어만 있으면 충분하다. 회의는 온라인상으로 진행되니 별도의 회의실이 불필요하다. 실제 일부 스타트업 회사는 오프라인 사무실이 없고 모든 업무를 온라인으로 처리한다. 다만 정기적으로 국내 또는 해외에서 워크숍을 하면서 상호 의사소통의 원활성과 효율성을 도모한다.   물론 현재는 온라인 업무와 오프라인 업무가 상호 공존하면서 상호 보완하는 상태에서 비즈니스 활동이 이루어지는 과도기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OSO(Online to Offline·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 서비스는 비즈니스에서 사무실의 개념 역시 변화시키고 있다. 예를 들면 기존의 사무실이 아니라 어느 정도 조용하고 쾌적한 공간이 있고 이 공간에서 운동 및 음악 등을 즐기면서 필요하면 회의도 하는 그런 공간이면 최상일 것이다. 물론 물품을 저장할 공간은 필요하겠지만 이 역시 창고의 공유화 등을 통하여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해외 출장을 가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호텔의 비즈니스센터는 의외로 이런 면에서 좋은 공간이 된다. 컴퓨터 시설 등이 제공되며 기타 비서적인 기능도 지원받을 수 있다. 연계된 호텔 내 헬스클럽 역시 운동도 즐기지만 사무실 기능으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클라이언트와의 회의 등의 경우 비즈니스센터 내에 있는 회의실은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고 그 호텔의 브랜드만큼의 품격 등을 활용할 수 있다. 물론 이들 시설은 공유 시설이기에 한계성은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비용 대비 가성비는 엄청나게 높아 충분한 경쟁력이 있다.   실제로 호텔 헬스클럽에서 핸드폰과 노트북을 가지고 운동을 하면서 고객들과 연락도 하고 필요하면 비즈니스센터에서 사무실, 컴퓨터 및 비서 등의 지원을 받아 회의 등이 가능하다. 물론 비즈니스의 성격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고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을 것이나 적절하게 오프라인 공간과 조화를 이룬다면 최상의 가성비를 가진 사무공간으로 변신할 수 있다.   이런 개념을 좀 더 확대해 복합리조트 시설에서 적절한 비서 기능 등의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환상적인 사무실 공간이 될 것이다. 집, 사무실, 여가, 사교활동 등 모든 것이 한 공간에서 쾌적하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래의 유망산업 중의 하나가 바로 리조트산업일 것이다. 일본의 아베 수상은 리조트 산업의 육성을 미래산업의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이제는 사무실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창조적이고 쾌적하며 멋진 온라인 공간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변혁해야 할 시기라고 본다.

이동윤

달리면서 즐기는 풍경은 단순히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 이전에 어떤 정서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대부분이다. 어떤 장소가 자아내는 각각의 느낌들은 주자가 세상을 접촉하는 기분과 심리에 따라 다르며, 물과 숲, 공기와 땅, 그리고 그들을 구성하는 원소들의 세계와 관련이 있다.  달리기는 땅과 공기와 물과 숲 등 원초적이고 원소적인 세상과의 만남의 수단이다. 달리기는 사회적인 공간을 세상에 종속시킴으로써 우리 내면에 성서러운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달리면서 만나는 사람이나 장소와의 인연을 통해 자신의 근원에 변화를 가져오는 존재감을 느낀다.도시 자연 속에 묻혀 오랫동안 평범한 사물들을 까마득히 잊고 심드렁하게 지내온 도시 사람들에게 이런 메아리 같은 내밀한 울림은 기적마냥 놀라운 감격적 사건이다. 그런 만큼 달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우습게 보일 뿐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한 겨울에 차가운 냉기 속을 숲속이나 들판을 달리면 그때의 기억은 마음속에 남아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찬 바람이나 눈속에 서면 우리는 무한하고 진동하는 어떤 우주 속에 던져진 피조물로 되돌아간 자신의 존재를 느낀다.낮과 밤, 더위와 추위, 비와 눈 같은 자연 현상들은 경이로움과 두려움이라는 두 가지 얼굴을 대면시킨다. 그에 따른 괴로움과 즐거움, 그리고 아쉬움, 또 오늘이나 내일 다시 그런 순간을 되풀이하여 맛보고 싶은 향수에 젖게 된다. 그런 경험은 일상의 지각에서 시작하지만, 자아를 초월하는 피안의 세계와 접하는 방식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겨울은 더할 수 없는 낭만과 감동의 세계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수한 생명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가늠할 수 없는 섬뜩한 두려움이 되살아나는 시간이다.마음의 준비나 의복 등 보온 대책이 부실한 상태에서 출발하면 처음 얼마 동안의 즐거움이 몸이 서서히 부자연스럽게 굳어지는 고통과 불안이 공포로 변하면서 오던 길로 되돌아가고 싶어진다. 주위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고요한 겨울 냉기에 기가 꺽여 가던 길을 되돌아온다.달리기는 희열을 향한 자기 개방이다. 주변 환경과 몸으로 직접 만나는 일이므로 여러 장소의 감각적 조건에 끊임없이, 거리낌없이 자신을 맡기게 된다. 냉기는 달리기에 소금과도 같은 것이다. 추위가 규칙적 질서를 뒤흔들어 놓기는 하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보증한다.길은 살아 있다. 우리가 달리는 길은 언제나 여유를 가지고 우리를 어디론가로 데려간다. 길이 제 갈 길이나 제 목표를 모르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길을 밟는 발의 관능적인 쾌감은 어떤 길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심지어 미끄러운 길까지도 재미있어한다.달리기는 전신의 감각을 열어놓고 몸을 맡긴 채 더듬어가는 길을 벗삼아 살아있는 관계를 맺는 가운데, 매순간 발밑에 밟히는 땅을 느끼고 배우게 만든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이 거쳐가는 길 위의 숱한 사건들을 골고루 기억하고 즐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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