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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윤

운동 강도가 증가하면 우리 몸은 더 많은 혈액을 근육으로 보내 증가된 에너지 요구량을 유지할 것인지 또는 피부로 가는 혈액량을 증가시켜 열 제거를 촉진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이런 상반된 요구에 직면하면 우리 몸은 항상 근육으로 가는 혈액량을 우선적으로 늘리게 된다. 그러면 열 생산은 증가되는 반면에, 운동으로 더 많이 발생하는 열을 제거하는 능력은 감소되기 마련이다. 세계적인 선수들은 최소한 15km까지는 피부로 가는 혈액 공급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열 상실 능력이 제한되면서 열 균형의 유지 능력이 환경 상태에 완전히 좌우되는 상황에서 달린다.이런 상황이 운동 중 체열 제거에 불리하다면, 선수들은 자신들의 체온이 일사병이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해서 열을 축적하게 된다. 인체내 체온감지기로부터 체온이 약섭씨 41도를 초과하기 전에 통상적으로 운동을 종료시켜 일사병 발병 위험을 예방한다.체열 상승 속도에 반응하는 이런 체온 조절 방법이 뇌의 중추 통제기로 하여금 근육 동원을 감소시키도록 만들어 뇌가 허용하는 운동 강도를 결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주자의 의지에 의해 무시될 때 일사병이 발생하게 된다. 빨리 달리는 속도는 일사병의 가장 심각한 위험 요인이다. 이와 반대로 느린 달리기 속도는 환경적 상태에 상관없이 일사병을 통상적으로 예방한다. 그러므로 더위로 인한 부상은 거의 최대의 노력으로 15~60분을 달리는 짧은 대회에서 선수들에게 중요한 위험이 되고 있다.트윈시티 마라톤의 12년 연구(1982~1994)에서 8만 1277명의 참가자 중에서 겨우 17명(0.02%)만이 섭씨 40도가 넘는 직장 온도 때문에 의사의 치료가 필요했다. 거의 3배나 되는 주자들(46명 또는 전체 참가자의 0.06%)에게는 저체온에 대한 치료가 필요했다.최근 마라톤 대회 참가자들이 예전에 비해 많이 늘었는데, 이런 상황은 시속 10km 미만의 속도로 달리는 주자들에게는 특히 추운 날 진행되는 대회에서 추위가 더위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더운 기후에서 운동할 때의 위험이 많이 강조되고 있지만, 습고가 아닌 대기 온도에 관심의 초점이 맞춰져 온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바람의 속도가 느리고 주자가 시속 20km 달릴 때 대류에 의한 열손실이 감소하므로 땀이 운동 동안의 열 손실에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땀의 분비를 통한 열 손실은 공기의 습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습도가 더위에서 운동하는 동안 주자들이 자신들의 신체를 식히는 데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경우는 특히 덩치가 크고 체중이 무거운 주자들과 관련이 많다.위험한 열사병을 피하려면 직사광선에서 오래 활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직사광선이 없더라도 덥고 습한 곳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면 땀의 기화에 의한 체열 소실이 되지 않아 열사병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노인들은 체온 조절 능력이 젊은 사람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박현도

  “국민은 정권 전복을 원한다(앗샤으브 유리두 이스까딴 니담).”    2011년 1월 튀니지 벤 알리의 24년 독재정권이 민주화 시위로 무너지면서 시작된 이른바 ‘아랍의 봄’ 때 독재정(獨裁政)이 만연한 중동(中東) 지역 국민들이 애호하던 구호다. “개도 국경을 넘어야 짖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국민 감시가 철저한 시리아에서도 3월 6일 남부 도시 다라에서 청소년들이 이 말을 담장에 썼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아이들이 붙잡혀 고문을 당하자 부모들이 거리로 나섰다. 같은 달 15일에는 수도 다마스쿠스와 시리아 최대 도시 알레포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현(現)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의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가 197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이듬해 대통령을 갈아치우고 스스로 대권(大權)을 거머쥔 이래 무려 41년간 부자(父子)세습 독재에 지친 시리아 국민들이 ‘아랍의 봄’에 힘입어 거리로 나선 것이다.    시리아의 반(反)정부시위는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바샤르 알아사드는 국민들을 말로 어르고 달래거나 총칼로 협박하며 자리를 굳건히 지키려 했다. 반정부 시위대 또한 강대강(强對强)으로 맞섰다. 그 결과는 모두가 다 알다시피 지난 7년간 시리아를 휩쓸고 있는 내전(內戰)이다.      시리아, 제3차 대전의 震源 되나?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 가족. 뒤편 왼쪽에서 두 번째가 현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  단순하게 보면 시리아 내전은 민주적인 정치개혁 없이 정권을 유지하려는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과 이에 반대하는 반정부 세력의 다툼이다. 한 꺼풀 더 벗겨 들어가 보면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유지해서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시아초승달(Shia Crescent)’ 지대를 수호하려는 이란과 이를 막으려는 반이란 국가의 대립이 자리 잡고 있다. 이란은 억압자에 반대한다는 이슬람혁명정신을 내세워 팔레스타인 선주민(先住民)을 내쫓고 국가를 세운 이스라엘의 시온주의 타파를 국시(國是)로 삼고 있다.    이란은 시리아를 확보해야만 반이스라엘 무력(武力) 투쟁 선봉에 선 레바논의 헤즈볼라 지원이 가능하기 때문에 친(親)이란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 수호에 전력(全力)을 기울이고 있다. 반면 아라비아반도에서 이란의 영향력을 제거하고자 애쓰는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란과 시리아의 관계를 파탄 내고자 반군(反軍)을 지원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반군에게 무기와 자금을 제공했다. 이스라엘은 내전이 시작된 이래 약 100여 차례에 걸쳐 조용히 시리아 공습을 감행했다.    시리아 내전은 국내적으로 보면 정부군과 반정부군의 다툼, 지역적으로 보면 친이란과 반이란의 대립이다. 더 나아가 시리아 내 지중해 연안 항구도시 타르투스(Tartus)에 건설한 해군기지를 수호하고 중동 내 영향력 확대를 꿈꾸는 러시아와 이를 막으려는 미국의 대립이기도 하다. 형세가 마치 1차 세계대전 직전의 발칸 반도와 같아서 시리아 내전이 자칫 잘못하면 3차 세계대전을 촉발할 수 있다는 우려스러운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의 기반은 전 국민의 약 11%에 달하는 200여만 명의 알라위(Alawi)파 사람들이다. 아버지 하페즈부터 아들 바샤르까지 알아사드 부자 정권이 1971년 이래 무려 47년 동안 존속되고 있는 것은 이들 알라위파의 단결에 힘입은 바 크다. 시리아가 독립하기 이전까지 이단(異端) 종파로 낙인찍혀 박해와 멸시를 받았던 알라위파 사람들이 시리아 정권을 유지해 왔다는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힘은 군권(軍權) 장악에서 나온다. 북한이 그러하듯 말이다. 이들이 시리아 정부군의 65%를 차지하고 고위 요직을 꿰차고 있기 때문에 장기 독재체제가 가능했다. 이들은 도대체 누구이기에 소수(少數)이면서도 알아사드 부자 정권을 어언 반세기 동안이나 지탱해 올 수 있었던 건가?      알라위 혹은 누사이리    알라위는 시아(Shia)파다. ‘시아’는 아랍어로 ‘파(派)’나 ‘당(黨)’을 뜻한다. 시아는 원어로는 시아트 알리(Shiat Ali)라고 하고 이를 줄여 시아라고 하는데, 알리파, 알리당, 즉 알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알라위’라는 말은 아랍어는 알리(Ali)라는 이름의 형용사 형태로 ‘알리의’라는 뜻을 지니고, 형용명사로 알리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알라위나 시아나 사실상 같은 말이다.    알리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가리킨다. 시아파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기 전 632년 마지막 메카 순례를 마친 후 가디르 쿰에서 일행과 헤어지기 전에 사람들에게 “나를 지도자로 여기는 이들이여, 보라, 여기 알리가 너희의 지도자다”라고 하면서 알리를 무슬림 공동체의 지도자로 임명했다고 믿는다. 시아들의 믿음과 달리 그는 무함마드 사후(死後) 24년이 지난 65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4번째 칼리파, 즉 예언자의 대리자가 됐고, 661년 정적(政敵)의 칼에 암살당한 비운의 지도자다.    알리는 예언자의 딸 파티마와 결혼, 하산과 후세인 두 아들을 두었다. 오늘날 시아파 다수를 차지하는 12이맘 시아파는 알리를 첫 번째 이맘, 하산을 두 번째 이맘, 후세인을 세 번째 이맘으로, 후세인의 직계 후손을 네 번째부터 열두 번째 이맘으로 여긴다.    이 글에서 지칭하는 알라위는 원래 역사적으로 보면 알라위라는 말보다는 ‘누사이리(Nusayri)’로 불렸다. ‘누사이리’는 ‘누사이르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누사이르는 무함마드 이븐 누사이르 알나미리를 가리킨다. 그는 9세기 바그다드에서 시아파 열번 째와 열한 번째 이맘 추종자였다고 한다. 시리아가 프랑스보호령이던 시대인 1924년에 당시 여러 지역 경찰 업무를 맡고 있던 경찰총수가 아랍어로 《알라위의 역사》라는 제목의 책을 쓰면서 처음으로 알라위라는 말을 사용한 이래 누사이리가 알라위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시아와 알라위  1938년 안티오크. 알라위 남성.  시아파는 형성 과정에서 주요 인물, 특히 알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정통파와 과장(誇張)파로 나뉜다. 정통파와 달리 과장파는 알리의 신성(神性)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아랍어로 굴라트(Gulat)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과장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누사이리’, 즉 ‘알라위’는 알리를 신으로 숭앙하기 때문에 과장론자들로 불렸다. 엄밀히 따지면 알리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아니다. 알라위는 대단히 영적(靈的)이고 비의적인 해석을 채용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러한 해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들을 ‘인간 알리를 신으로 과장하여 섬기는 자’들로 간주하여 이단시했다.    알라위는 신론(神論)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소 독특하다. 그리스 철학자 플로티노스(204/5~270)의 유출론(流出論)의 영향을 받았다. 유일신에서 나온 다양한 자연세계를 가장 잘 설명해 주기에 유출론은 유일신론자들이 크게 환영했다. 태양에서 여러 갈래의 햇빛이 나오지만 해와 햇빛이 동일하지 않듯, 유일신에서 세상이 유출되지만 세상이 신이 아니기에 이슬람과 같이 유일신론을 견지하는 종교를 설명하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사상도 없을 것이다.    알라위는 창조주 유일신이 본질(마으나 ma‘na), 이름(이슴 ism), 문(門・바브 bab)이라는 세 가지 양식을 취한다고 본다. 이 셋을 신성의 세 형태라고 부를 수 있다. 이와 같은 신성의 세 가지 표현양식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과 유사하다. 그래서 학자들은 알라위가 십자군 시대에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본다.    본질은 뜻, 의미라고도 하는데 창조되지 않고 영원하다. 유출의 근원이다. 이름은 본질/뜻, 의미에서 처음으로 유출되는 것으로 신성한 빛에서 유출된다. 문은 본질/뜻, 의미에서 두 번째로 유출된다. 이름은 신성을 숨긴다. 문은 신성으로 이르는 길이지만 신성 그 자체는 아니다. 알라위는 문을 통해 신성에 관한 지식을 얻는다.    태초에 알라위의 영혼은 신을 둘러싸고 찬양하는 빛이었으나 신에 불복하여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던져져 물질적 육체를 지니고 윤회(輪回)에 휩싸이게 됐다. 죄인의 영혼이 들어간 동물은 섭취가 금지되고, 죄의 결과로 창조된 동물은 먹을 수 있다. 신의 본질을 믿으면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 별이 되어 다시 천상의 궁극자를 향하는 여정에 오를 수 있다. 여성은 사탄이 지은 죄악의 결과물인바, 천상여행을 할 수 없을뿐더러 종교의례 참여도 불가능하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지극히 남성 중심의 신앙이다. 여성을 배제하고 남성만이 참가하는 알라위 종교의례는 일정한 연령에 이른 자들만이 내부적으로만 은밀하게 행하기 때문에 외부인이 알 방법이 없다. 종교사상도 의례도 밀의적 요소가 강하다. 종교지도자나 학자들이 신앙해석을 제공하지 않기에 연구자들은 지금도 기존에 발표된 문서에만 의존할 뿐이다.    외부인들은 그리스도교에서 신이 예수로 육화(肉化)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알라위가 신이 알리로 육화됐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알라위가 이슬람 내에서 이단으로 갖은 박해와 공격을 받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시아와 알라위의 화해  2차 세계대전 당시 시리아 알라위 매사냥꾼.  알리 이후 2번째 이맘부터 11번째 이맘은 각기 자신의 가르침을 전해줄 문을 지니고 있었다. 알라위의 창시자인 누사이르는 11번째 이맘의 문이다. 이란과 이라크에서 다수를 이루는 12이맘 시아파와 달리 알라위는 12번째 이맘의 대리자를 따로 인정하지 않고, 누사이르가 문으로 계속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이 점이 무엇보다도 12이맘파와 알라위를 갈라놓은 지점이다. 오늘날에는 양측이 서로를 인정하고 있다. 하페즈 알아사드 집권 당시인 1973년에 알라위 지도자들은 알라위가 12이맘파와 같은 믿음을 공유한다고 선언했다. 12이맘파 법학자 무사 알사드르는 알라위를 12이맘파로 인정하는 법해석을 내렸다.    현대 12이맘파가 알라위를 포용한 것과는 달리 무슬림 사회는 일반적으로 알라위를 배척했다. 아무리 영적이고 비의적인 해석이라고 하더라도 그 뜻을 깊게 새길 수 없는 대다수 사람에게 알라위의 종교사상은 오해받기 딱 좋았다. 한발리 법학자 이븐 타이미야(1263~1328)는 “알라위를 유대인, 그리스도교인보다 더 이단”이라고 하면서 이들이 무슬림 사회에 끼친 해악이 몽골군과 십자군보다 더 큰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그들은 배우지 못한 무슬림 앞에서는 자신들이 시아파요, 예언자 집안사람들에게 충직한 척하지만, 사실 그들은 신과 예언자, 성스러운 경전, 의무나 금지사항, 보상과 징벌, 천국과 지옥, 또는 무함마드 이전에 오신 사도들이나 이슬람 이전의 종교 중 하나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무슬림들에게 알려진 신과 신의 사도들의 말씀을 자신들이 고안한 우의적인 방식으로 해석하여 비의학(秘義學)이라고 부른다.”    말리키 법학자 이븐 바투타(1304~ 1369)는 알라위가 사는 지역을 지나면서 이들이 알리를 신으로 믿고, 예배도 세정례도 단식도 하지 않으며, 맘룩 술탄의 명령으로 지은 모스크를 동물 축사로 쓴다고 기록했다. 한때 술탄이 이들을 모두 죽여 버리려고 했다가 농사에 필요하다는 재상의 건의에 따라 제거 계획을 포기했다고도 한다.      프랑스의 분할통치  현재 알라위 분포도.  알라위는 오늘날 알라위산(山)을 중심으로 주변으로 퍼져 살았다. 시리아 지도에서 서쪽 지중해 연안이 이들의 집중 거주지다.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산악거주민으로 천대받던 알라위의 삶에 볕이 든 때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다.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를 두려워하던 프랑스는 소수(少數) 종파를 보호하면서 ‘나누어 다스려라’는 고전적 통치법을 활용했다. 1920년 알라위 자치 지역은 몇 차례 변화를 겪은 후 1937년 새로운 국가 시리아의 영토로 편입됐다. 알라위 국가로 독립하지 못하고 시리아의 일부가 된 것이다. 오늘날 알라위는 시리아 서북부와 레바논 북부(약 20만명), 터키 남서부(약 150만명)에 걸쳐 살고 있다.    편견 때문에 무슬림 사회에서 정상적인 출세가 불가능했던 알라위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군인으로 활약했다. 하페즈 알아사드 시대부터 알라위파가 군부를 기반으로 지금까지 시리아를 장악하게 된 것도 이러한 전통 덕분이다. 박해받던 이들이 새로운 기회의 창이 열리자 적극적으로 편승하여 운명을 개척한 것이다.    시리아 내전 종결을 둘러싸고 국제사회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오늘날 알라위가 또 어떻게 자신의 앞날을 개척할까? 하나 확실한 것은 이슬람을 정치와 사회적 삶의 원리로 삼는 무슬림형제단에게 조금이라도 시리아를 양보한다면 알라위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프랑스 식민지 보호령 이전 전통 무슬림 사회에서 알라위의 삶은 비참했으니까 말이다. 바샤르 알아사드를 지탱하는 힘은 바로 소수자로서 겪어야 했던 참혹한 과거의 기억이다.⊙

김주덕

간통죄가 없어졌기 때문에 남녀간의 사랑에 제3자가 불법적으로 침범하는 경우는 더 많아졌다. 종전에는 간통죄라는 무기가 있었다. 애정관계에 제3자가 침입하는 경우 간통죄로 감방에 보낼 수단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간통죄가 없어졌다.   남녀가 만나는 기회도 예전과는 다른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많은 경우 인터넷으로 짝을 찾는다. 결혼의 경우에는 직업적인 결혼정보회사를 이용하기도 한다. 옛날처럼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여자를 뒤따라 가서 구애를 했다가는 성추행범으로 신고될 위험성이 높다.   정상적인 사랑을 하기 어려운 일부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상당수는 정신적 질환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 길에서 자위행위를 하다가 체포되는 남자도 있고, 갑자기 여자를 보고 바바리코트를 벗어제끼고 남성의 알몸을 보여주고 도망가는 바바리맨도 있다.   혼잡한 지하철에서 여자의 신체에 밀착하여 성적 쾌감을 느끼는 지저분한 사람도 있다. 애인과 성관계 동영상을 촬영했다가 애인이 변심하면 인터넷에 올려 매장시키는 악질도 있다. 길을 가는 여자의 다리만 몰래 찍은 남자는 법원에서 카메라이용촬영죄로 기소되었다가 무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다리만 찍은 경우에는 성적 수치심이 느껴지는 신체의 부위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인데, 그 판결은 너무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   만일 그 판결이 대법원에서도 확정되면 정부에서는 빨리 경범죄처벌법에라도 처벌조항을 넣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길에서 다른 여자들의 다리를 몰래 매일 찍고 다니는 남자를 처벌하지 못하는 것은 법의 잘못된 공백이 아닐까 싶다.

엄상익

 30년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법원을 속이는 지능범들을 많이 봤다. 치밀한 논리로 만든 허위를 가짜 증인들의 입술을 통해 법정에서 전개했다. 그런 교활성을 꿰뚫어 보는 판사는 별로 없었다. 대법원은 더 잘 속았다. 서류만 보는데다가 형식논리에 더 치중하기 때문이었다. 자만하는 대법관일수록 진실에 눈이 더 어두웠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동화 속의 소년처럼 허위를 진실로 착각한 대법원 판결을 지적하는 글을 썼다. 속칭 ‘꾼’에게 대법원이 속은 경우였다. ‘꾼’들 쪽에서 바로 나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나를 파멸시키겠다고 협박하면서 거액을 청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꾼’의 겉모습은 그럴듯한 돈 많은 회사의 사장이었다. 하급법원의 판사는 내 말에 수긍했다. 진실이 따로 있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그가 고민하다가 이렇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대법원 판결이 그렇게 확정했는데 하급심 판사인 내가 어떻게 그걸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여기는 관료주의가 더합니다.”     법전(法典) 속의 판사는 독립해서 소신에 따라 진실을 밝히는 존재였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치받기가 두려운 것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조사단의 결과가 나왔다. 상고법원의 설치를 둘러싸고 정치적 거래를 했다는 것이다. 진행중인 사건을 거래에 이용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상고법원을 만들려고 했을까. 상고사건이 많아 죽을 지경이라고 하면서도 대법관들은 그 숫자를 늘리는 것은 반대해 왔다.     왜 그럴까. 사법 관료체제의 피라미드 정점에 있는 대법관의 가치가 줄어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권위는 유지하고 일은 상고법원을 만들어 아래 법관에게 떠맡기려는 발상은 아닌지 의문이다. 법이 바로 서려면 법관들의 출세 지향적 탐욕과 관료주의가 없어져야 한다. 그런 것들이 사법부 오염의 원인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재판 때다. 권력의 뜻에 영합한 대법관들은 자리를 유지하고 사법부의 수장(守長)까지 된 사람이 있다. 반대 의견을 낸 대법관들은 예외없이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런 구조에서 하급법원도 오염됐었다. 정보기관에서 고문으로 자백을 받고 사실을 조작해도 법관들이 외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필자는 젊은 시절 잠시 대통령 직속 기구에 소속된 적이 있었다. 대법원장이 될 두 후보를 놓고 평가하는 옐로 카드가 작성되는 과정을 어깨 너머로 봤다. 공정하고 청렴한 분이 대법원장이 되지 못하고 정치성이 강한 인물이 선택됐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너 같으면 말 안 듣는 놈을 대법원장 시키겠냐?”라는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법부를 권력의 시녀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 시절 대법관 후보 두 사람의 모습도 본 적이 있다. 한 분은 지금 같은 독재 구조에서는 대법관직을 맡지 못하겠다고 자리를 사양했다. 존경할 만한 용감한 법관이었다. 다른 사람은 영부인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대법관이 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결국 그런 삼류가 대법관이 되는 걸 봤다. 민주화가 되도 자기 사람만 심으려는 폐해는 여전한 것 같았다.     2년 전 대법관 추천회의에 갔다 오던 대한변협 회장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형식만 회의지 대법관 추천도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더라면서 분노했다. 억울한 눈물을 흘리는 국민이 마지막으로 기대는 곳이 법원이다. 덮기만 한다고 신뢰가 유지되는 건 아니다. 깨끗한 사법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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