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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탁랜드 강원랜드에선 17년간 무슨 일이?

▲ 카지노에서 애용되는 게임 중 하나인 룰렛. photo PXHERE강원랜드 채용비리 의혹이 10월 12일 실시되는 국정감사에서 주요 쟁점으로 다뤄질 전망이다. 의혹의 핵심에는 지역구가 강원도인 자유한국당 권성동·염동열 의원 등이 있다. 이들은 지난 9월 25일 참여연대 등 친정부 성향 시민단체로부터 직권남용 및 업무방해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된 상태다. 자신의 인턴비서가 합격하도록 강원랜드에 채용 청탁을 하고, 지인들의 채용 청탁도 넣었다는 게 주된 고발 사유다.      여야의 치열한 공방이 예상되는 가운데 더불어민주당은 검찰 수사까지 촉구하고 나섰다.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는 “공공기관 채용비리를 이번 국정감사에서 발본색원하겠다”고 전의를 다졌고, 박범계 민주당 의원도 “채용비리에 관해 전방위적으로 성역 없는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당은 국정감사 종합상황실을 발족시키면서 그 산하에 강원랜드를 비롯한 공기업 채용비리를 점검할 전담팀도 꾸렸다.      자유한국당은 ‘국회의원 고유의 직무’란 취지로 반박하고 있다. 홍준표 대표는 지난 9월 20일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지역) 주민들이 자녀 취업시켜 달라고 국회의원에게 부탁하고 그걸 받아주는 건 국회의원의 직무다. 취업시켜주면서 돈을 받으면 나쁜 행동이지만 자기 지역 민원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개장 초부터 끊임없는 채용 비리      2000년 개장한 국내 최초의 내국인 카지노인 강원랜드는 개장 초부터 최근까지 각종 비리로 잡음이 끊이지 않아왔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강원랜드 비리는 야당이 여당을 공격하는 단골 소재였다. 지난 17년간 어떤 공방이 벌어졌는지부터 살펴보자.      2002년 10월 4일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국정감사 회의록에는 정진석 당시 한나라당 의원과 김광식 강원랜드 사장 간의 문답이 실려 있다. 정진석 의원은 “여당 중진의원의 동서가 판촉부장을 맡고 있고 카지노 영업실장의 동생이 2명이나 근무하고 있고 이윤복 서울사무소 소장 이 사람은 이희호 여사의 동생인 이상호씨의 사위죠”라며 김광식 사장에게 물었다. 김 사장이 “예, 맞습니다”라고 답하자 정 의원은 “안동선 의원 사위, 최규선이라고 대통령 아들들하고 교제를 맺었던 그 양반의 처남 전부 이런 식이에요. 천용택 의원 동서 이러니 누가 투명하다고 하겠어요”라고 되묻는다. 김 사장은 “조직을 확대하면서 경력자들을 뽑다 보니까 그렇습니다”라며 사실상 시인한다.      이희호 여사는 모두가 아는 대로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이다. 안동선 의원은 김대중 정부 당시 국회의원과 여당 최고위원을 지냈고, 천용택 의원은 국방부 장관과 국정원장을 역임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보좌역 출신인 최규선씨는 2002년 김 전 대통령의 3남 홍걸씨(현 더불어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와 함께 기업체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던 인물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낙하산 인사’ 논란이 일었다. 2003년 10월 7일 국회 산업자원위원회 국정감사 회의록(부록)에 의하면, 안영근 무소속 의원은 “현재 강원랜드의 2급 이상 직원 중에 정부부처, 공기업 등 정부기관 출신이 많다”며 “1급 26명 중 13명, 2급 92명 중 20명이 정부기관 출신”이라고 지적했다. 안 의원은 “최근 (강원랜드) 신임 건설본부장으로 정당인이 임명되었다”고도 했다. 국회 회의록 확인 결과, 당시 건설본부장은 여당인 새천년민주당 지방자치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이모씨로 확인되었다. 인사 운용에도 허점이 있었다. 2005년 11월 17일 배성기 산자부 정책홍보관리실장은 강원랜드 감사 결과를 국회 산업자원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보고했다. 배성기 실장은 “(강원랜드) 카지노본부장의 친인척 채용과 징계처분으로 자격이 미달된 직원을 임원으로 승진시켰다는 것은 사실로 확인하였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허위경력자 미확인 채용 △무보직 관리직급 과다 운용 등이 감사에서 적발되었다.      2005년 말 소위 ‘법조 브로커 비리’가 정치권을 강타했을 때에도 강원랜드는 구설의 중심이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윤상림(당시 53세)씨는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수십억원을 돈세탁한 뒤 이를 정계와 군, 검찰에 뿌렸다는 의혹을 받았다. 2005년 11월 29일자 조선일보 보도를 요약하면, 2004년경 윤상림씨는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딜러에게 욕설을 해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 한다. 윤씨는 전병헌 열린우리당 의원(현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전화해 ‘블랙리스트에서 해제해 달라’고 부탁했고, 전 의원은 보좌관을 통해 (윤씨를) 블랙리스트에서 해제해줄 것을 강원랜드에 요구했다는 게 보도의 요지다. 당시 전 의원은 “(윤씨가) 출입금지된 사유가 무엇인지 (보좌관을 통해) 강원랜드에 물어봤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윤씨와 금전 거래가 있던 정황도 포착됐다. 전병헌 의원이 검찰 서면진술에서 윤씨에게 공사비조로 5000만원을 줬다고 밝힌 것이다. 2006년 초 검찰은 ‘대가성 있는 돈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취지로 전병헌 의원을 ‘불입건’ 처리했다.      이명박 정부 때에도 비리는 이어졌다. 2009년 강원랜드 직원 24명이 입사지원서와 경력기술서를 위·변조해 허위 경력으로 호봉을 높게 부여받았다가 징계를 받은 적이 있었다. 2010년엔 한 카지노 딜러가 100만원권 고객 수표 101장을 빼돌린 사실이 적발되었고, 2011년엔 소위 ‘함바(건설현장 식당) 비리’에 최영 강원랜드 사장이 연루돼 구속된 적도 있다.          폐광지역개발 특별법 논란      강원랜드는 공기업이자 준정부기관이다. 현재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한국광해관리공단(석탄산업합리화사업단의 후신)과 강원도가 설립한 강원도개발공사, 폐광 지역 4개 시·군(정선, 태백, 영월, 삼척) 등 공공 부문이 강원랜드 지분 51%를 소유하고 있다. 한 채용 사이트에 따르면, 올해 정규직 평균 연봉은 최고 7000만원에 달했다. 안정적인 공기업에 높은 급여까지 보장되니 강원랜드가 외부 청탁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이와 관련 강원랜드 사정에 밝은 A씨는 “강원랜드 설립 취지가 폐광 지역 경기 활성화이기 때문에 (다른 공기업과 달리) 지역과의 밀착 강도가 세다”며 “지역 유지나 고위 인사들이 채용 청탁을 하는 경우가 있긴 있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A씨는 그러나 “대주주는 이사회에서 자기 지분만큼 의결권을 행사할 뿐, 법적으로는 인사에 관여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1995년 폐광 지역의 경기 활성화와 주민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 ‘폐광지역개발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의 13조2항에는 “시행자 및 진흥지구에 입주하는 기업은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이주자·지역주민 또는 탄광 근로자를 우선적으로 고용하여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강원랜드도 이 조항에 의거해 채용을 하고 있다. 이 규정이 제대로 준수되고 있는지 A씨에게 물어보았다.      A씨는 “법조인들 사이에서 (특별법 13조2항을) 선언적인 규정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고 말했다. 선언적인 규정이라 강제성·구속력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그에 따른 처벌 규정도 모호하다는 것이다. 채용 규정에 관한 핵심 법률 조항의 강제성이 약하다 보니, 폐광 지역 출신 채용보다는 외부 인사들의 청탁이 빈번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채용 잡음이 계속되자 강원랜드는 현 함승희 사장 체제에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A씨에 따르면, 현재 강원랜드는 신입사원 채용 시 타 지역 50%, 폐광 지역 50% 비율로 뽑는 일종의 ‘쿼터제’를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치르는 시험은 동일하지만 타 지역 출신은 타 지역끼리 경쟁하고, 폐광 지역 출신은 폐광 지역끼리 경쟁하도록 해 공정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2014년 11월, 검사 출신의 함승희 전 의원과 MBC 정치부장을 지낸 김경중 SPC그룹 부회장이 각각 사장과 부사장에 선임된 후 이뤄졌다. 김경중 부사장은 주간조선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사원채용, 구매, 투자에 있어 전사적인 심의과정을 거치게 해 투명성을 높였다. 과거 비리 관련자들을 검찰에 고발하는 조치도 취했고, 지역의 무리한 요구에 의해 이뤄진 ‘낭비적 투자’도 합리적으로 변경·처리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강원랜드는 2016년 2월 국민권익위원회가 발표한 ‘2015년도 부패방지 시책평가’에서 ‘우수’ 등급에 해당하는 2등급 판정을 받았다. 2년 연속 최하위 5등급의 멍에를 벗은 것이다. 김 부사장은 “지난 3년간 새로 발생한 비리는 없었던 것 같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채용비리는 모두 (함승희-김경중 체제 발족) 이전에 발생한 일임을 헤아려 달라”고 당부했다.      강원랜드를 관리감독하는 산업통상자원부의 이상준 석탄산업과장에게 강원랜드 채용비리의 근본 대책을 물었다. 이상준 과장은 “기획재정부 등 관련 부처와 협의 중인 상태라 구체적인 대책을 말하기는 곤란하다”며 말을 아꼈다. 이상준 과장은 “(강원랜드의 근본 문제가)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더 많은 개선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논란의 중심에 선 권성동·염동열 의원 측의 입장도 들어보았다. 권성동 의원실 관계자는 ‘인턴비서 채용을 위해 강원랜드에 청탁했다’는 보도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인턴비서는 자발적으로 채용에 응시했다”며 “그 과정에서 뒤를 봐준 사실이 없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강원랜드가 인턴비서의 평판 조회를 할 때 (권 의원 측에서) 잘 이야기해줬을 수는 있다. 그걸 가지고 채용 청탁이라고 하는 건 무리”라고 말했다. 염동열 의원 측은 “강원랜드 관련해선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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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흔

결혼식 전날 예비 신랑신부와 친구들(들러리)이 실제 결혼식이 열리는 곳에 모여 예행연습을 하고 있다.  결혼식 전날 열린 ‘예행연습’ 미국에 있는 조카딸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추석 연휴 동안 미국에 다녀왔다. 필자의 누나는 1980년대 중반 미국인과 결혼해 현재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시에 살고 있다. 딸과 아들을 연년생으로 두었는데, 그 가운데 맏이인 딸이 지난 10월 1일 결혼하였다. 미국의 결혼식 장면은 TV나 영화 등으로 간간이 보아왔지만, 결혼식을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우리의 결혼식 문화도 대부분이 서양식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실제 미국의 결혼식을 보니 우리와는 상당한 차이가 느껴졌다.   부케 대신 자동차 키를 들고 행진연습을 하며 웃고 있는 예비 신혼부부(신부 에이미와 신랑 앤드류). 우선 우리의 결혼과 가장 다르게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결혼식 예행연습(리허설: rehearsal)을 한다는 것이었다. 리허설은 결혼식 하루 전날인 토요일 오후 2시에 실제 결혼식 예정 장소에서 진행됐다. 하객만 없는 상태에서 신랑과 신부, 들러리, 신랑·신부 부모님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갑작스런 기온 하락으로 날씨가 제법 쌀쌀했지만, 신랑·신부의 친구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이날 하루를 친구를 위해서 헌신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신랑의 들러리는 그룸스맨(Groomsmen), 신부의 들러리는 브라이드메이드(Bridesmaids)라고 하는데, 실제 결혼식이 열리는 날까지 치면 이들은 이틀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친구의 결혼식에 투자하는 셈이다.   결혼식 예행연습을 마친 신랑신부 친구들과 가족들이 인근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다. 이것을 '리허설 디너'라고 한다. 신세대 목사가 기도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2시간 정도 이어진 리허설에서는 결혼식 순서와 동선(動線)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리허설을 마친 일행들은 부근의 식당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리허설에 참석한 들러리들의 식사 대접을 ‘리허설 디너’라고 하며, 대게 신랑 측 어머니가 이날의 밥값을 부담하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결혼식은 10월 1일 일요일 오후 4시에 열렸다. 신부인 조카딸은 결혼 전날을 브라이드메이드들과 호텔에서 보낸 후 아침 7시 반에 어머니(필자의 누나)에게 전화해서 호텔로 오라고 했다. 어머니도 같이 화장을 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조카딸은 밤새 친구들과 호텔방에서 노느라 한숨도 못 잤다고 하소연했다. 화장은 메이크업 전문가가 직접 호텔을 방문해 진행한다. 신부뿐 아니라, 들러리, 신부 부모가 모두 화장을 마치면 드레스를 갈아입고 결혼식장으로 이동한다.   본격적인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 예비 신랑·신부와 들러리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신부와 들러리들의 기념촬영. 신랑 측 들러리들은 신랑과 같은 색의 양복을 맞춰 입고, 신부 들러리 경우 신부가 입는 흰색을 제외한 색으로 드레스를 맞춰 입는다. 옷값은 들러리로 뽑힌 이들이 이를 영광으로 생각하고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기꺼이 옷값(약 500달러)을 부담한다고 한다. 신랑과 신부의 가장 친한 친구 한명씩을 대표 들러리로 세우는데 이를 ‘베스트맨’(Best man)과 ‘메이드 오브 아너’(Maid of Honor)라고 부른다. 이들은 신랑 신부를 도와 결혼식 과정의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신랑·신부가 식장으로 출발하면 일거수일투족을 도와주며, 결혼 반지를 건네는 등 결혼식 내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본격적인 식이 열리기 전에 이루어지는 기념촬영   결혼식장은 시내 외곽 허허벌판에 있었다. 결혼식장은 콜럼버스시 북동쪽 외곽의 ‘허허벌판’에 있었다. 결혼을 포함 각종 모임을 개최하기 위해 지어진 시설로, 메인 홀과 식사, 기타 각종 이벤트를 진행할 수 있는 공간 등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진입로는 비포장에 먼지가 심하게 일어 결혼식 당일에는 물을 뿌려 놓았다.   필자는 누나는 “이 결혼 전문 시설을 빌리는 데 음식과 술값을 제외하고 순수 시설 대여료만 7200달러가 소요되었다”며 “그나마 일요일에 빌리는 것이 좀 더 싸고, 토요일의 경우는 9500달러 이상”이라고 말했다. 예식장과 드레스, 술과 음식, 케이크, 꽃값  등을 포함해 조카딸의 결혼식에는 총 3만 달러 정도 소요되었다고 한다. 결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미국인들은 교회나 가정집 마당(뜰)에서 피크닉 식의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선호한다. 시에서 운영하는 좀 더 값이 저렴한 시설이 있기는 하지만, 예약이 1년 전부터 꽉 차서 순서를 잡기가 어렵다고 했다. 필자의 누나의 경우 결혼식을 남편 집 뜰에서 올렸는데, 햇볕을 가릴 대형 텐트를 빌리는 데 든 돈을 제외하면 예식장 비용은 따로 들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 미리 도착한 하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간단한 음료를 마시면서 식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결혼식장에 30분 전에 도착하니 이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손님들은 서로 인사를 하거나, 삼삼오오 모여 포도주나 맥주, 쿠키, 과일 등을 먹고 마시면서 담소를 즐겼다. 미국 결혼식의 특징은 결혼식에 오는 손님들이 모두 신랑 신부의 친한 친구들로 초청을 받아 온다는 것. 신랑·신부 부모들이 자신의 지인들을 초청할 때는 미리 자녀와 사전에 상의한 후, 평소 자녀와 친분이 있는 사람 위주로 초청한다고 한다.   메인 홀에 마련된 임시 바. 바텐더가 손님들에게 음료와 주류 서빙을 하고 있다.     임시로 마련된 바에서 음료를 주문하는 하객들.   결혼 전 1시간 가까운 기념촬영이 이어지는 동안 대기하고 있는 하객들이 음료와 주류, 쿠키 등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미국 결혼식에서도 역시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는 철학이 통하는 사진 찍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본격적인 식이 진행되기 전 신랑 신부와 들러리들이 거의 1시간 가까이 별도의 시간을 할애해 미리 기념 촬영을 한다는 것이었다. 기념 촬영이 이어지는 동안 하객들은 와인이나, 맥주, 쿠키, 케이크 등의 간단한 음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며 식이 진행되기를 기다렸다. 촬영이 진행된 메인 홀에는 간이 바와 뷔페식 음식 코너가 마련돼 있었고, 바텐더가 하객들이 원하는 주류나 음료를 건네주었다. 예식장에서도 바텐더에게 팁을 주는 손님이 많았다.   4시가 되면서 본격적인 예식이 시작되었다. 들러리들이 입장 한 후 신부가 가장 나중에 입장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부조금 문화   오후 4시가 되자 본격적인 결혼식이 시작됐다. 하객들은 야외 잔디밭에 마련된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신랑·신부의 입장을 기다렸다. 먼저 신랑·신부의 가족이 입장했고, 이어서 남녀 들러리들이 짝을 지어 입장하면서 식이 시작됐다. 식은 신랑의 친구인 목사의 주례로 진행됐다. 주례사를 마친 후에 반지 교환과 결혼선서를 하고, 부부가 된 신랑·신부가 하객들 사이를 행진하는 것으로 예식의 주요행사가 끝이 났다.   결혼식 이모저모. 마지막으로 신랑 신부가 퇴장하면서 주요 행사는 끝나고, 저녁 식사 후 피로연이 이어진다.이후에는 우리나라처럼 사진촬영이 이어졌다. 주례를 선 목사와 들러리들이 신랑·신부와 가장먼저 사진을 찍고, 양가 가족은 가장 마지막이었다. 결혼식에서 전문 사진사를 고용할 경우 평균 3000~3500달러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결혼식 축의금(부조)는 예전에는 선물을 많이 했지만, 요즘에는 현금을 선호하는 추세라고 한다. 예식장 메인홀에는 선물을 놓는 테이블이 따로 마련돼 있었고, 가운데 유리 항아리에는 편지와 함께 돈이 든 봉투가 가득했다. 조카딸은 이 부조금을 결혼식 2주 뒤에 있을 신혼여행 비용으로 충당할 예정이라고 했다. 신혼여행지는 미국 서부 그랜드캐년으로 정했다고 한다.   결혼식장 메인홀 한켠에 마련된 결혼식 선물. 필요한 물건은 이미 한달 반 전에 친구들이 선물을 하기 때문에 실제 결혼식장에는 선물이 많지 않다. 식장에서는 주로 현금 부조를 많이 했다. 친구들의 경우 결혼식 부조금 금액은 50~100달러가 일반적이라고 하며, 선물은 신랑·신부가 필요한 물건을 미리 친구들에게 알려준다고 한다. 결혼식이 열리기 한달 반 전쯤 ‘브라이덜 샤워’(Bridal Shower)라고 해서 신부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행사(파티)를 여는 경우가 많은데, 이 파티 초청장에 물건의 목록과 이 물건을 구입할 가게(마트)의 인터넷 사이트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선물의 중복을 피할 수 있다고 한다.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금액이 큰 선물의 경우 여러 명이 합쳐서 살 수도 있다.   예식의 마지막 행사로 가족 촬영이 이어지는 사이 일반 하객들이 피로연 자리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손님들은 자신의 이름이 든 작고 귀여운 꽃병을 들고와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 안내를 담당하는 친구(usher)가 따로 있다. 이날 조카딸 결혼식에는 약 160명의 하객이 참석했다.   피로연 파티가 진행되는 동안 들러리들이 입장하고 있다. 저마다 장난기 가득한 춤동작을 선보이며 입장했다. 결혼식 후 피로연 저녁 식사 모습.   음식은 메인홀에 마련되어 있고, 이곳에서 먹을 만큼 덜어와 피로연 자리에 앉아서 먹는다.   피로연 테이블에 앉기 위해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작은 꽃병을 고르는 하객의 모습. 어느덧 저녁 6시가 되어 어둑어둑 해가 기울기 시작했고, 하객들은 뷔페식으로 된 음식을 가져와 자리를 잡았다. 손님들이 음식을 먹는 사이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남녀 들러리들이 짝을 맞추어 입장했다. 이때 들러리들은 저마다 장난기 가득한 춤을 추면서 등장해 웃음을 선사했다.   피로연 자리에서는 친구들의 축하와 신혼 부부가 서로에 대한 맹세를 다짐하는 편지낭독이 이어졌다. 피로연 메인 테이블 가운데에는 이날의 주인공인 신혼 부부가 앉고, 그 양쪽으로 신랑·신부 들러리들이 나누어 앉았다. 메인 테이블 앞쪽에는 들러리 대표 가족들이 자리를 잡았고, 양가 가족들은 하객들 테이블 중 맨 앞 자리에 위치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들러리 대표인 ‘베스트맨’과 ‘메이드 오브 아너’가 각각 신랑 신부에게 바치는 편지를 읽었다. 감동과 웃음, 눈물이 섞인 편지 낭독에 이어 신랑·신부가 각자의 배필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며  가족에 대한 감사와 서로에 대한 사랑을 맹세했다.   밤 11시까지 이어진 흥겨운 노래와 춤   저녁 식사 후 신혼 부부의 춤을 시작으로 저녁 파티가 이어진다. 저녁을 겸한 편지 낭독 행사가 끝나자 하객들이 피로연 뒤편에 마련된 뜰로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미 날은 어두워졌지만, 결혼식은 오히려 이때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DJ의 안내에 따라 신랑과 신부가 춤을 추는 것으로 본격적인 피로연 파티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신부는 자기 가족인 어머니, 아버지, 남동생과 춤을 추었고, 그 밖에 특별한 사람들과 춤을 추었다. 파티는 점점 흥을 더해가면서 부부나 연인들끼리 춤을 추었다. 춤을 추는 동안 DJ는 “결혼 1년차 이하는 빠져달라” “결혼 5년차 이하는 빠져달라”고 하자 결국 맨 마지막에 가장 결혼 생활을 오래한 커플이 남아서 춤을 추었다.   DJ는 결혼식 파티 분위기를 흥겹게 이끈다. 결혼식 DJ의 진행 능력에 따라 결혼식 분위기가 확 달라지기 때문에 실력 있는 DJ를 잘 섭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결혼식 DJ의 경우 500달러 정도의 비용이 들어간다고 한다. 조카딸의 결혼식 피로연을 맡은 DJ는 능수능란하게 분위기를 이끌었다.   DJ가 트는 음악에 따라 하객들은 디스코를 추기도 하고, 블루스를 추기도 하며, 단체로 동작을 맞추어 춤을 추기도 했다. 남녀노소가 어울려 춤을 추고, 심지어 주례를 본 목사님까지 흥겹게 노는 모습이 필자의 눈에 상당히 신기하게 보였지만, 바쁜 사람들이 이렇게 온 종일 신혼부부를 축하는 모습을 보니 잊어버렸던 우리네의 옛날 잔칫집 풍경이 떠올랐다. 미국의 결혼식에서 우리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흥겨운 잔치의 한 단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피로연 파티 이모저모. 피포연 파티 이모저모. 밤 11시까지 이어진 파티. 신혼 부부의 앞날을 축복하기 위해 하루를 기꺼이 투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객들의 흥이 함참 오르자, 신부의 부케 던지기 행사가 진행됐다. 조카딸은 부케를 던질 듯 말 듯하더니, 잡자기 자기 남동생의 여자 친구에게 달려가 부케를 안겼다. 그러자 동생은 그 자리에서 여자 친구의 손에 약혼반지를 끼워주며 청혼을 했다. 여자 친구는 수많은 하객의 박수 속에서 환호와 눈물을 흘리며 청혼을 받아들였고, 둘은 분위기 있는 음악에 맞춰 한참 동안 춤을 추었다. 피로연 파티는 11시가 되어서 끝이 났다.     결혼식 다음날, 조카딸은 부모님께 감사의 편지를 전달했다. 가꺼이서 본 미국의 결혼식 모습은 이색적이면서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조갑제

*아래 글은 내가 작년 12월7일에 쓴 기사이다. 여기서 지적된 오보를 동아일보는 지금도 고치지 않아 구글 검색을 하면 오보가 그대로 뜬다. 검색자들은 속아 넘어가게 된다. 언론은 오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보임이 판명되면 고쳐야 한다. 오보임에도 고치지 않는다면 그때부터는 언론이 아니라 선동기관이고 범죄행위를 구성한다.     동아일보의 횡설수설 난 오늘 제목은 이다. 정성희 논설위원이 썼다.  정 위원은 면서 고 단정하였다.   차은택 씨는 고 하더니 고 못을 박았다. 처녀 대통령이 외간 남자를 심야에 청와대로 불러 수상한 만남을 가진 것처럼 쓴 것이다. 정 위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차 씨가 거짓말을 했다고 추궁한다.    는데 이는 는 것이다.   동아닷컴에 실린 이 글 바로 밑에 댓글이 달렸다.       17일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이런 문답이 있었다.   박범계 의원 : 본인 최초 인터뷰에 의하면 청와대에 일주일에 두세 번, 늦은 시간에 들어갔다 온 적 있다고 한다.차은택 : 절대 아니다.박 : 그런 인터뷰 한 적 없나.차 : 안 했다 박 : 청와대에 밤에 출입한 적은?차 : 절대 없다.    자, 이제 공은 동아일보로 넘어갔다. 동아는 차은택 씨가 밤에 청와대로 들어가 박 대통령을 만났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차은택 씨가 거짓말 하였다는 증거도 있어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빨리 칼럼의 전문(全文)을 취소하고 독자와 차은택 씨에게 사과해야 할 것이다.   오늘 청문회에 의하여 그동안의 언론 보도 상당수가 허위, 왜곡, 과장으로 드러났다. 언론탄핵운동이 일어날 것 같다. 

허정환

“선생님! 제가 3학년이 되면 선생님께서 우리 동생을 좀 봐줘야 할지도 몰라요. 몸이 조금 아픈데, 선생님이시라면 우리 동생 환희를 잘 봐 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작년 이맘때, 2학년 운희가 나를 찾아와서 한 말이다. 늘 밝고 긍정적인 성격에다 운동도 잘해 남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던 운희의 말에 적잖이 놀랐다. 지난 1월엔 운희 어머님이 따로 뵙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이렇게 해서 장애전담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는 운희 동생 환희를 만나게 됐다. 자폐가 있는 환희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부모님은 환희를 특수학교에 보내기로 마음먹었지만, 운희의 제안으로 일반 초등학교 입학을 검토하게 됐다. 운희는 “우리 반 우석이는 환희보다 더 동생 같아요”라고 말했다. 운희 어머니는 운희가 환희와 같은 학교에 다니면 장애 동생 때문에 놀림을 받거나 상처를 입지 않을까 걱정했다.      장애아동은 신체적·인지적으로 비장애 아동에 비해 더 세심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장애아동을 둔 가족은 모두 장애아동의 영향을 받게 되고, 장애아동 중심으로 가정의 패턴이 이루어진다. 부모는 장애아동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장애아동에게 거의 모든 관심을 쏟기 때문에 비장애 형제, 자매를 돌보기 힘든 상황이 된다. 비장애 형제자매가 겪는 정신적 충격이나 고통이 상당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들까지 헤아리지 못한다.      장애 형제가 있는 비장애 아동들은 자기비하와 분노, 부모의 보상심리에 대한 부담감, 사회생활의 위축과 갈등 등을 겪는다. 장애인의 형제는 부모의 관심이나 여가, 보호, 지도 등의 여러 측면에서 자신의 요구를 충족받지 못하고 부모의 차별대우에 소외감, 외로움, 상실감을 느낀다.      둘째, 장애 형제 보호에 대한 책임감으로 역할 갈등이 심각하고 분노를 느끼며 친구관계에서도 어려움을 느낀다.      셋째, 비장애 형제들은 자신의 가치를 낮추고, 초라하게 생각한다. 자신도 장애를 지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거나 장애를 지니게 될 것으로 염려한다. 이로 인해 자아존중감이 낮고 사회에 적응하는 데에도 곤란을 겪는다.      비장애 자녀에게도 세심한 배려와 지도가 필요하다. 이때 주의할 점이 있다. 절대 장애 형제에 대한 부담감을 주면 안 된다. 물론 형답게 양보와 배려를 권하는 정도의 인성교육을 할 순 있지만 장애 형제를 가족의 책임감으로 느끼기보다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 배려의 마음 정도만 가지면 된다.      환희가 일반 학교에 입학하고 9월이 되었다. 온순하고 차분하고 신나는 동요를 잘 흥얼거리는 귀여운 모습 때문에 환희는 반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다. 운희 또한 환희와 마주치면 “내 동생”이라며 안아주거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애정을 표현하곤 한다.      어쩌면 장애인을 지원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부부와 형제, 즉 가족을 지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장애 형제자매의 건강한 삶을 지원하는 것은 결국 장애인 당사자를 지원하는 것이고 가족 모두를 지원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이한우

 나라가 망하는 이유나 원인은 수없이 많다. 외우(外憂)와 내환(內患)으로 나뉘는데 외부의 위협이 있어도 내부가 단결돼 있으면 나라가 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사례는 제외해야 할 것이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실은 내환, 그중에서도 내분(內紛)이 결정적이다. 조선이 일본에 전쟁 한 번 못해보고 망한 것은 그래서 더 치욕스럽다.    내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다양한 진단이 있겠지만 결국은 리더십 붕괴 혹은 무능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한때 제국을 건설할 만큼 뛰어난 역량을 보였던 제왕이 자기 당대나 바로 다음 대에서 나라를 망하게 한 요인을 추적함으로써 그 그림자를 살펴보자.      양(梁) 나라를 일으킨 무제(武帝)    중국 역사에서 후한(後漢)이 멸망한 다음 해부터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기까지 서기 221년부터 589년까지를 위진 남북조(魏晉 南北朝) 시대라고 한다. 그중에서 남조는 송(宋)·제(齊·남제)·양(梁)·진(陳) 네 나라를 함께 부르는 말이다. 그중 세 번째인 양나라가 오늘의 주인공 무제(武帝)가 세운 나라다. 이름은 소연(蕭衍·464~549년)이다.    그는 제나라에서 벼슬하여 옹주자사(雍州刺史)가 돼 양양(襄陽)을 지켰다. 제나라 말인 영원(永元) 2년(500년) 황실이 어지러워지자 군사를 일으켜 도읍인 건강(建康·南京)을 함락시킨 뒤 정권을 장악하면서 양왕(梁王)에 봉해졌다. 이어 502년 제나라 화제(和帝)를 폐위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양(梁)이라 했다. 그때 그의 나이 38세였으니 말 그대로 영웅(英雄)이었다.    즉위 초 그의 모습에 대해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이렇게 전한다.    〈상(上)은 몸소 빨래한 옷을 입었고 항상 먹는 음식은 오직 채소로만 만들었다. 지방 고위 관리들을 고를 때마다 힘써 청렴하고 공정한 사람을 뽑았으며 모두 앞에 불러서 접견하고 정치의 도리를 가지고 권고했다.〉    그는 유술(儒術·유학)을 국학(國學)으로 재건했고 지방에서 효도와 청렴으로 이름난 인재들을 올려 썼다. 《주역강소(周易講疏)》 《중용강소(中庸講疏)》 《예기대의(禮記大義)》 《효경강소(孝經講疏)》 《효경의소(孝經義疏)》 《공자정언(孔子正言)》 등 유학의 경전에 대한 그의 주석은 전문가 수준에 이르렀다. 문학에 뛰어났으며 음률(音律)도 잘 알아 스스로 작곡을 했으며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무(文武)를 갖춘 준걸이었다.      불교에 빠져든 황제    재위 30년을 바라볼 무렵부터 무제는 불교에 흠뻑 젖어 들었다. 그는 중대통(中大通) 원년(529년) 9월 본인이 세운 동태사(同泰寺)에 행차하여 승려와 비구니, 그리고 일반 남녀신도 등이 아무 차별 없이 참여하는 법회인 사부무차대회(四部無遮大會)를 열었다. 황제는 어복(御服)을 벗고 법의(法衣)를 입었으며 마음을 깨끗이 하고 번뇌와 사욕을 버렸다. 여러 신하도 많은 돈을 내고서 삼보(三寶-불보·법보·승보)에 기도하고 황제보살을 받들어 속죄하였다. 승려들은 잠자코 허락하였다. 이후 황제는 환궁했다.    문제는 그것이 지나친 데 있었다. 사마광은 이렇게 말한다.    〈상은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자애로우며 공손하고 검소했으며 학문을 널리 익혔고 글을 잘 지었으며 정사를 보는 데도 부지런하여 겨울에도 새벽 3~4시면 일어나 정사를 보면서 추위를 무릅쓰며 붓을 잡아 피부가 얼어서 터졌다.    (그러나) 당시 왕후(王侯)와 그 자제들은 대부분 교만하고 음란했으며 불법(不法)을 일삼았다. 황상은 연로하여 국정에 싫증을 내고 있었다. 또 오로지 불법(佛法)의 계율에만 정성을 쏟아 매번 무거운 죄를 판결할 때마다 하루종일 즐거워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반역을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었는데도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용서해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왕후들은 더욱 횡포를 부려 어떤 때는 대낮에 도시의 길거리에서 사람을 죽이는가 하면 어떤 때는 한밤중에 공공연하게 약탈을 했다. 또 죄를 짓고 도망친 사람이 왕후들의 집에 숨으면 유사(有司-해당관청)가 감히 집을 뒤져 체포할 수 없었다. 상은 이런 폐단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애로움에 깊이 빠져 금지시킬 수가 없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전형이다.    〈중대동(中大同) 원년(546년) 3월 경술일에 상(이때 나이 83세였다)이 동태사에 행차했다가 사성(寺省·절에 마련한 천자용 임시숙소)에 머물면서 《삼혜경(三慧經)》을 친히 강론했다. 여름 4월 병술일에 강론을 해산했는데 이날밤 동태사의 부도(浮屠)에 화재가 나자 상은 말했다.    “이는 마귀의 짓이다. 마땅히 크게 법사(法事-절의 신축)를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곧장 조서(詔書)를 내려 말했다.    “도가 높으면 마귀가 성하고 선(善)을 행하면 장애가 생기니 마땅히 힘을 다하여 더욱 토목사업을 일으켜 지난날보다 두 배로 늘리도록 하라!”〉    이리하여 12층짜리 부도를 짓기 시작했고 거의 완성되려는 시점에 후경(侯景)의 난(~548년)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단됐다. 이듬해 무제는 후경에 의해 유폐됐다가 굶어 죽었다. 이후 간문제(簡文帝)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2년 후인 551년에 후경에 의해 살해됐고 양나라는 이로써 사실상 멸망했다.    《논어(論語)》 선진(先進)편에서 제자인 자로(子路)가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는가?”    삶의 정점에 오른 황제가 죽음만을 걱정한 결과는 곧 제국의 초단명(超短命)이었다.      진시황의 불로장생(不老長生) 꿈이 부른 비극  진시황. 천하통일 후 교만해지면서 망국의 길을 열었다.  기원전 221년 중국 천하를 통일한 진(秦)나라 왕 영정(嬴政)은 자신의 다움[德]은 삼황(三皇-복희·신농·황제)을 겸했고 공로[功]는 오제(五帝-소호·전욱·고신·요임금·우임금)를 능가한다고 여겨 스스로를 황제(皇帝)라고 칭했다. 스스로를 짐(朕)이라고 부른 것도 영정이 처음이다.    그의 교만함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시호법을 없앴다. 그는 이렇게 명했다.    “죽고 나서 행적을 가지고 시호를 정한다면 이는 아들이 아버지를 논하는 것이며 신하가 임금을 논하는 것이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짐은 시(始)황제이고 후대에는 수를 계산해 2세, 3세 하여 만세에 이르도록 무궁하게 전할 것이다.”    진나라의 멸망 원인을 과도한 법치주의나 엄격한 군현제(郡縣制)에서 찾는다. 그것은 본질적 진단이라 하기 어렵다. 위대한 성공이 부른 이 교만함이야말로 진나라의 폭망을 설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무궁함에 대한 그의 집착은 자신의 불로장생(不老長生) 기획으로 나타난다. 그가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한 지 2년 만인 기원전 219년(시황제 28년)에 그는 동쪽의 제(齊)와 연(燕)을 순행하다가 신선과 불사약(不死藥)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 공자의 말대로 불혹(不惑)해야 할 나이였는데 혹(惑)하고 만 것이다.    여기서 공자가 말한 혹 혹은 불혹의 의미를 알고서 이야기를 진행하자. 《논어》 안연(顔淵)편에서 제자 자장(子張)이 혹이 무슨 뜻인지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자기가 사랑한다고 해서 (이미) 죽은 것도 살기를 바라고 자기가 미워한다고 해서 (버젓이) 살아 있는 것도 죽기를 바라는 것이 혹이다.”    이 말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사람의 소관이지만 죽고 사는 것은 사람의 소관이 아닌데 그 경계를 헷갈리는 것이 혹이라는 뜻이다. 앞서 공자가 자로에게 했던 말과 그대로 통한다. 인간사(人間事)는 인간사의 범위를 넘어서서 해결을 시도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논어》의 여러 곳에서 공자는 “지자(知者)는 불혹한다”고 말한다. 이때 지자는 그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보다는 사람을 볼 줄 아는 사람 혹은 인간사의 사리(事理)를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결국 40세에 불혹이라고 했으니 사람을 볼 줄 알고 사리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매한 자가 불혹할 수도 있으나 권력에 도취되면 아무리 뛰어난 자도 교만으로 인해 불혹하기 마련이다.      인사 그르쳐 망국을 부르다    다시 진시황의 이야기다. 당시 승상(丞相·재상)은 이사(李斯)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사는 승상으로서 진시황의 혹에 대해 간언했어야 했다. 시황제 35년(기원전 212년) 이사는 유학을 금지할 것을 청했다. 소위 분서갱유(焚書坑儒)다. 그리고 같은 해 진시황은 아방궁과 자신의 능인 여산(驪山)을 짓게 했다. 이때는 스스로를 짐이라고 부르지 않고 신선을 뜻하는 진인(眞人)으로 불렀다. 그리고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여 버렸다.    기록을 유심히 보면 그의 장자 영부소(嬴扶蘇)만이 직간(直諫)을 했다.    “유생들은 모두 공자의 말씀을 외우고 본받는데 지금 상께서는 무거운 법률로 이들을 묶어 버리시니 신은 천하가 불안할까 걱정입니다.”    진인은 화를 내며 부소를 북쪽으로 쫓아 흉노 정벌을 위해 나가 있던 몽염(蒙恬)의 군대를 감독하라고 했다.    시황제 37년(기원전 210년) 천하를 순행하며 산동 지방을 돌아보던 시황제는 병이 났다. 그해 가을 하북성 사구평대란 곳에서 시황제는 눈을 감았다. 그가 혹하여 어두운 정사를 펼친 지 10년이었다. 대가는 컸다. 시황제는 조고(趙高)라는 환관에게 영부소에게 내리는 유서를 전했다.    아마도 지난 10년간 바른 정사를 펼쳤다면 조고는 엉뚱한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정에 바른 신하들이 있는 한 그 같은 꾀를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황제와 조정 신하들 사이를 오가며 바른 신하들이 대부분 제거되고 주변에는 굽은 신하들만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조고는 잘 알고 있었다. 조고는 진시황의 또 다른 아들 영호해(嬴胡亥)를 설득했다. 시황제가 영부소를 죽이고 영호해를 후사로 삼으라고 명한 것으로 거짓말을 한 것이다.    관건은 이사였다. 이사에게 이 계획을 전하자 이사는 처음에는 반대했다.    “어찌 나라를 망칠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자 조고는 이사가 라이벌로 여기고 있던 몽염의 존재를 언급하며 자극했다. 이사는 이를 묵인하기로 했다. 이로써 모든 일은 결정됐다. 결국 영부소, 몽염, 이사 등은 죽고 호해와 조고의 세상이 됐다. 기원전 206년 호해와 조고도 모두 죽고 진나라는 망했다. 이건 누가 봐도 시황제가 망하게 만든 것이다. 인사(人事)를 그르친 결과다.      구렁텅이에서 겨우 빠져나온 한(漢) 무제(武帝)  한무제. 실정이 많았지만 말년에 뉘우쳤다.  한나라 무제는 중국 역사에서 공과(功過) 논란이 있는 제왕이다. 사방으로 영토를 넓힌 면에서는 시황제를 능가한다. 예악을 정비해 국내 정치의 제도적 안정을 가져온 사람도 무제다. 그의 업적은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런 그도 말년에 성공에 도취돼 문성장군(文成將軍)이나 난대(欒大)니 하는 방사(方士)를 통해 신선의 술법에 빠져들었다. 무제 원정(元鼎) 4년(기원전 113년)에 제나라 사람인 공손경(公孫卿)이 전설 속의 인물 황제(黃帝)가 마지막에 죽지 않고 용을 타고서 후궁 70여 명을 거느리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하자 이렇게 말한다.    “아! 정말로 황제와 같이 될 수만 있다면 나는 처자를 버리기를 헌신짝 벗듯이 할 것이다.”    그는 신하들의 간계에 넘어가 태자를 죽이는 일까지 저질렀다. 어떤 면에서는 진시황을 능가하는 암군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정화(征和) 3년(기원전 90년) 전천추(田千秋)라는 사람이 글을 올려 태자의 무고함을 호소하자 무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이어 전천추는 방사들의 허망함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지적했다. 이에 무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에 어리석고 미혹되어 방사들에게 속아 넘어갔다. 천하에 어찌 신선이 있겠는가? 밥 덜 먹고 약을 먹으면 질병은 줄일 수 있다.”    그 후에 후사(後嗣)에 대해서도 미리 대비를 갖춘 다음 후원(後元) 2년(기원전 87년) 세상을 떠났다. 말년의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에 한나라는 폭망을 면하고 소제(昭帝)를 거쳐 선제(宣帝) 때 다시 한 번 중흥의 시대를 맞이했다. 무제에 대한 사마광의 사평(史評)으로 결론을 대신한다.    〈무제는 끝까지 사치하고 큰 욕심을 갖고서 번거로운 형벌을 사용했으며 세금을 무겁게 거두어 안으로는 궁실을 사치스럽게 꾸몄고 밖으로는 사방의 오랑캐들에게 일을 벌였으며 신선의 괴이함을 믿고 현혹되어 순행하는 데 절도가 없었고 백성들로 하여금 피폐하게 하여 도적이 되게 했으니 이는 진시황과 다를 바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는 이로써 망했는데 한나라는 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무제는 먼저 돌아가신 황제의 도리를 존중했고 스스로 지켜야 할 도리를 알았으며 충직한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고 뛰어난 사람을 좋아했으며 게으르지 않았고 상벌이 엄정했으며 만년에는 허물을 고치고 후사를 돌아보아 부탁하는 적당한 사람을 얻었으니 이것이 그가 망한 진나라와 같은 허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끝내 망한 진나라와 같은 재앙을 면할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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