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이슈 더보기

반도체 제국을 만든 3代의 결단

▲ 경기도 평택 고덕산업단지 내 289만㎡ 부지에 자리 잡은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단지. 건물 높이가 25층 아파트와 비슷한 80m에 달한다. 단일 생산라인으로 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라인이다. photo 삼성전자‘한민족 세계 제패, 월드베스트 정신으로 해냈습니다.’      1994년 8월 삼성은 256메가 D램 개발 성공 소식을 전했다. 세계 최초였다. 신문 전면광고에는 구한말 태극기를 넣었다. 김광호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은 “적어도 D램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선, 한·일 관계가 평등했던 구한말 이전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발표장의 기자들은 박수를 쳤다.         삼성전자, 반도체 세계 1위      지난 7월 7일 삼성전자는 짤막한 보도자료를 냈다.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 매출 60조원, 영업이익 14조원의 실적을 거뒀다. 전기 대비 매출은 18.69%, 영업이익은 41.41% 증가했고 전년 동기 대비는 매출 17.79%, 영업이익은 71.99% 증가했다.’      숫자만 보면 무슨 얘기인가 싶다. 의미는 단순하다. 올해 2분기, 삼성전자가 반도체 세계 1위 기업으로 올라섰다는 얘기다. 1993년 이후 단 한 해도 반도체 세계 1위를 놓치지 않았던 인텔사를 제쳤다. 꼭 23년 전 광고까지 내걸며 염원한 ‘세계 제패’를 올해 비로소 이룩한 셈이다. 태극기가 아니라 UN기라도 내걸 수 있는 상황임에도 축배는 없었다. 최대한 조용히 낭보를 발표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다섯 달 넘게 구속 수감 중이다.      기업 광고에 구한말 태극기가 등장한 배경에는 삼성의 반도체 창업 초기 에피소드가 깔려 있다. 시간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경기도 부천에서 ‘한국반도체’라는 회사가 탄생했다. 미국 모토로라의 반도체연구소 출신인 재미공학자 강기동 박사와 사업가 이상규 캠코 회장이 함께 세웠다. 창업 비용은 100만달러. 국내 최초의 전공정 반도체 회사였다. 12월 6일 당시 동양방송 이사였던 이건희 회장은 한국반도체 지분의 절반을 사들인다. 기업 차원의 투자가 아니었다. 이건희 회장이 사재를 들였다. 당시만 해도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사업에 확신이 없었다. 1978년 남은 지분마저 삼성에 넘어가며 한국반도체는 삼성반도체로 재탄생했다. 회사 운영은 쉽지 않았다. 트랜지스터 정도를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자체 설계기술이 없었던 탓이다. “삼성반도체로 발령 나면 퇴직하겠다.” 삼성전자 직원들 사이에서 돌던 말이다.      1980년 1월, 삼성반도체는 삼성전자에 흡수됐다. 그해 이병철 회장은 친분이 있던 일본 NEC의 고바야시 고지 회장에게 부탁을 했다. “삼성반도체를 둘러보고 문제점을 지적해달라.” 당시 NEC는 도시바, 히타치와 함께 반도체업계 세계 최정상의 길로 향하고 있었다. 일본이 오일쇼크에도 거뜬히 버틴 데는 바로 이들 반도체 기업 덕이 컸다. NEC의 직원들이 한국에 왔다. 삼성반도체의 가능성을 예감한 탓일까. 이들이 부천 공장을 둘러보고 돌아간 후, NEC는 자문과 협력을 일절 거절했다. 이병철 회장의 비서팀장을 지낸 정준명씨가 언론에 털어놓은 말이다.      “삼성은 당시 NEC·산요와 손을 잡고 TV를 생산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NEC는 반도체 기술을 주지 않았다. 이병철 회장이 NEC 회장을 찾아가면 만나주지 않거나 다른 얘기만 했다. 같이 골프를 칠 때도 반도체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선대 회장과 이건희 회장은 ‘기술 자립’을 결심했다.       ▲ 1983년 삼성이 개발에 성공한 64K D램. 지난 2013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이병철 회장의 도쿄선언      1982년 4월, 이병철 회장은 미국으로 향했다. 보스턴대학에서 명예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서였다. 이건희 부회장도 함께였다. 학위 수여식이 끝나고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등 곳곳의 반도체 공장을 둘러봤다. “(우리가) 늦었다.” IBM, GE, HP의 반도체 생산라인을 둘러보며 이병철 회장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이병철 회장에게 처음으로 반도체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하고, 그 중요성을 설파한 이가 바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미국 유학생이던 20대 손 회장의 ‘천재성’을 알아본 이 회장은 사위인 정재은 현 신세계 명예회장에게 특명을 내렸단다. “손군이 삼성에 어떤 도움이 될지 살펴봐라.” 삼성의 손정의 영입은 현실화되진 않았다.      1983년 2월 8일, 마침내 삼성이 선전포고를 했다.      “고부가가치 반도체를 자체 생산하겠다.”      이병철 회장의 ‘도쿄선언’이었다. 반도체 전쟁의 막이 올랐다. 1차 목표는 64K D램이었다. D램(Dynamic random-access memory)은 휘발성 메모리 반도체의 한 종류다.      반도체는 크게 둘로 나뉜다. 인간의 ‘기억’ 기능을 대신해주는 메모리 반도체와 ‘연산’을 대신해주는 비메모리 반도체다. 비메모리 반도체의 거개는 시스템 반도체다. 메모리 반도체는 다시 램(Random Access Memory·RAM), 롬(Read Only Memory·ROM), 플래시 메모리(Flash Memory)로 나뉜다. 램은 정보를 기록했다 지울 수 있는 휘발성 메모리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필수적으로 장착된다. 롬은 한 번 기록한 후엔 읽기만 가능한 비휘발성 메모리다. 흔히 ‘CD롬’이라 부르는 저장수단이 그 예다. 플래시 메모리는 램과 롬의 중간 형태다. 전원이 꺼져도 정보가 남아 있다. 스마트폰, 디지털 카메라 등에 쓰인다.      64K D램은 손톱 크기의 칩에 약 8000자 분량의 정보를 담을 수 있는 메모리다. “마치 자전거를 만드는 철공소에서 초음속 항공기를 만들라는 주문과 같을 정도였다. 그 누구도 삼성이 64K D램을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믿지 않았다.”      64K D램 개발팀원의 회상이다. 삼성전자 40년사에 실려 있다. 당시 선두업체들은 64K를 넘어, 다음 단계인 256K D램 개발을 거의 마친 상태였다. 일본·미국의 기업과 삼성의 기술 격차는 약 10년. 삼성엔 시간이 없었다. 기존 챔피언들이 4K, 16K, 32K 순으로 순서를 밟아 기술을 발전시킨 과정을 그대로 따라할 순 없었다. 마이크론과 설계기술 이전 계약을 맺었다. 6명의 연구원을 미국 현지로 보냈다. 이 중엔 이윤우 현 삼성전자 부회장도 있었다. 이들은 산업스파이 취급을 받으면서도 극적으로 반도체 설계도를 입수했다. 문제는 그 후였다.      반도체 공정은 상당히 까다롭다. 반도체 하면 하얀 방진복을 입고서 원판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근로자의 모습을 흔히 떠올린다. 이 실리콘 원판이 웨이퍼(wafer)다. 반도체의 재료다. 웨이퍼는 본래 2겹으로 된 얇은 비스킷을 말한다. 흔히 ‘웨하스’라 부르는 과자명은 웨이퍼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거다. 문제는 웨이퍼로 완제품을 만드는 공정이 300단계도 넘는다는 사실이다. 설계도 설계지만 이 공정 과정을 어떻게 효율화하느냐에 사업의 성패가 좌우된다. 작게는 장비 배치, 크게는 공정 순서, 사용 약품 등 공정과정에 기업의 노하우가 담겨 있다. ‘레시피’라 부른다. 반도체 공장의 출입 통제가 엄격한 것도 그 때문이다. 업계 ‘선수’라면 작업장을 훑어보는 것만으로 상당한 노하우를 챙겨나갈 수 있다.      6개월 만에 삼성은 64K D램 개발에 성공한다. 기술 격차는 단숨에 2~3년으로 줄었다. 곧바로 흑자로 연결되진 않았다. 첫 흑자를 내기까지 5년이 걸렸다. 그나마 소요시간이 단축되어 그 정도였다. 경기도 기흥 공장을 지을 때다. “6개월 안에 완성하라.” 이병철 회장의 지시였다. 영하 15도의 추위 속에서 환히 불을 켜고 24시간 공사를 했다. 동원된 연인원 26만명. 보통 18개월 이상 걸리는 공사였다. 꼭 6개월 만인 1984년 3월 말 완공했다. 장비를 들여오는 것도 문제였다. 공장까지 길이 제대로 닦여 있지 않았다. 작업자들은 거액의 반도체 포토 장비를 운송하지 못할까 발만 굴렀다. 포토 장비는 진동에 민감하다. 잘못하면 옮기다 망가질 수 있다. 왕도는 없었다. 삼성은 4㎞ 도로를 반나절 만에 포장했다.       ▲ 1987년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3라인 기공식에 참석한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 회장(맨 오른쪽)과 이건희 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이병철 회장이 생전에 참석한 마지막 공식행사다. photo 삼성전자   세 번의 위기를 세 번의 기회로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대표적인 장치 산업이다. 지금 당장 적자라도 반드시 투자를 계속해야만 미래에 흑자를 낼 수 있는 구조다. 라인 하나를 짓는 데 최소 10조원이 든다. 지난 7월 4일 낸드 플래시를 첫 출하한 삼성전자 평택 1라인의 경우 15조6000억원이 들어갔다.      반도체 신화에 ‘오너’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보는 게 이 때문이다. 전문경영인이 조 단위의 투자를 선제적으로 결정하기는 쉽지 않다. 반도체사업부는 ‘돈먹는 하마’였다. 1986년까지 누적적자 2000억원. 1986년 삼성그룹 전체의 이익은 1200억원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적자 보전을 위해 통신에 붙였다가 전자에 붙였다가 하면서도 반도체 부문을 필사적으로 유지했다. 삼성전자 출신의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반도체 기술인들에게 이병철 회장은 ‘신’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사장을 지낸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진대제 전 장관에게 삼성반도체 역사의 결정적 장면을 꼽아달라고 했다. 그는 세 가지 장면을 들었다. 역시 첫 장면은 ‘도쿄선언’이다.      “삼성은 기로에 서 있었다. 메모리 반도체인가, 비메모리 반도체인가. 메모리라면 D램으로 갈 건가, S램으로 갈 건가. 이병철 회장은 D램을 택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절체절명 선택의 순간은 그 후에도 다가왔다. 4M D램을 개발할 때의 일이다. 메모리 용량이 늘어나면서 정보 저장공간인 셀(cell)을 늘리기 위해 두 가지 방식이 개발됐다. 스택(stack)과 트렌치(trench)였다. 스택은 아파트처럼 복층으로 셀을 쌓는 방식이고, 트렌치는 지하로 파내려가는 방식이다. 갈림길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면 손해는 걷잡을 수 없다. IBM, 도시바와 같은 기존 업체들은 이미 트렌치 방식을 선택한 상황이었다. 연구진에서는 스택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워낙 엄청난 선택이라 누구도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이때 이건희 회장이 ‘스택으로 간다’고 결정을 내렸다. 두 번째의 결정적 순간이다. 후에 이 회장 자신도 이렇게 술회했다. “내 자신도 스택 방식이 맞을 것이라는 감은 있었지만, 100% 확신은 못 한 상태였다. 운이 좋았다.”(1999년 서울대 강연) 실제 도시바와 NEC는 트렌치 방식에서 뒤늦게 스택으로 선회하느라 업계 1위 자리를 놓쳤다.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 자체에 관심이 많았다. 진대제 전 장관의 말이다.      “반도체면 반도체, 벽지면 벽지, 관심 항목이 생기면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분이다. 일본의 전문가를 만나 묻는 식이었다. 16M D램을 개발할 때 일이다. 8인치 웨이퍼 투자를 둘러싸고 삼성 내부에서 고민이 시작됐다. 잘못 선택하면 한순간에 망할 수 있다. 1조원이 날아간다. 실무진들이 이건희 회장 앞에서 토론을 했다. 토론을 본 이 회장이 최종 선택을 내렸다.”      진대제 전 장관은 세 번째 순간으로 1990년 7월 어느 날을 꼽았다.      “전 세계 기업 중 가장 먼저 16M D램 완제품을 선보였다. 일본 회사들보다 서너 달 빨랐다. 일본의 기술을 따라잡은 순간이었다.”      이후부터는 삼성의 시대였다. 64M D램 세계 최초 개발(1992), D램 시장 세계 1위(1992), 세계 메모리 반도체 1위(1993), 1G D램 세계 최초 개발(1996), 낸드 플래시 메모리 세계 1위(2002), 세계 최초 30나노 64G 플래시 개발(2007), 기록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올해 1분기 기준 삼성전자의 D램 시장점유율은 44.8%다. 전 세계인들이 올해 구입한 컴퓨터, 스마트폰의 절반 이상에 삼성 반도체가 쓰인 셈이다.      오너체제만이 할 수 있는 선제적 투자가 반도체 신화의 주춧돌이었다면, 대들보는 ‘기술력’이었다. 연구실과 생산 현장을 가리지 않고 기술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그 예가 ‘수요공정회의’다. 이윤우 부회장이 기흥연구소에 있던 시절 만든 정례 회의다. 이건희 회장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삼성에는 천재급 인재는 없어도 준천재급 인재는 세 명 있다.”      세 사람이 바로 이윤우 부회장, 진대제 전 장관, 황창규 사장이다. 박재근 교수의 설명이다.      “연구소에서 제품을 개발하면, 공장에서 생산했다. 문제는 연구소에서 하던 공정을 공장에서 안 썼다. 연구소의 레시피가 공장에는 공유가 안 됐다는 얘기다. 매주 수요일 연구 인력과 공장 인력이 모였다. 아예 제품이 개발될 때부터 제조부문도 함께 진행 상황을 공유하라는 의미였다. 결론이 날 때까지 끝장 토론을 했다. 진대제·황창규·권오현 등의 기술 전문가들이 모두 수요공정회의를 거쳤다. 이런 식으로 수율을 빨리 올릴 수 있었다.”      수율은 생산물 중 양품(良品)의 비율을 뜻한다. 불량률의 반대다. 수율을 높이는 만큼 생산원가가 낮아진다.      수요공정회의는 이후 삼성그룹 전체로 퍼졌다. 진 전 장관은 “공유와 토론이라는 고급 기업문화가 그룹으로 퍼졌다. 우리도 세계 1등이 될 수 있다는 반도체사업부의 자신감도 함께 그룹 전체로 번졌다.”      반도체산업에서 어찌 보면 기술 개발보다 중요한 게 ‘대량생산 체제’ 확립이다. 이런 식이다. 새로운 기술에 먼저 투자해 개발한 다음, 상용품을 가장 먼저 내놓는다. 많은 양을 비싸게 팔아치워 투자비용을 재빨리 회수한다. 후발주자가 생산체제를 확립할 즈음엔 가격을 확 낮춘다. 선발주자가 가격을 낮추지 않아도, 시장에 전체 공급량이 늘어나기 때문에 가격이 자동으로 내려간다. 조금만 대량생산에 늦어도 손해를 볼 수 있다. 이게 바로 반도체 사이클이다. 예전엔 보통 4년 주기로 반복됐다.       ▲ 2010년 5월 17일 이건희 회장(왼쪽에서 두 번째), 이재용 부회장(왼쪽 네 번째)이 삼성나노시티 화성캠퍼스에서 열린 기공식에 참석했다. photo 삼성전자   인재 유출을 막아라      1980~1990년대는 반도체 업계의 춘추전국시대였다. 이후 몇 차례의 반도체 사이클과 전략적 실수를 거치며 기존의 강자들은 모두 탈락했다. 지금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는 4개의 기업만이 남아 있다. 삼성,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도시바다. 이병철 회장의 요청을 거절했던 NEC의 D램 사업은 그 후신인 엘피다가 2012년 법정관리를 받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선발주자로 자리매김하며 삼성은 여러 이점도 함께 누렸다. 세계 어느 기업보다 신규 설비를 먼저 구매하기 때문에 오히려 비용을 아낄 수 있었다. 기계업계에서는 최초 구매자에게는 설비를 싸게 공급해주는 관례가 있다. 장비업체도 현장 테스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장비 사용 노하우를 초창기에 쌓고, 장비업체는 장비를 개선할 수 있다.      2000년대 스마트폰 시대가 본격화되며 반도체 수요는 급팽창했다. 시장에 4개의 기업만 있으니, 공급이 갑자기 늘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수퍼사이클’의 시대가 시작됐다. 반도체 장기 호황시대다.      삼성반도체 앞에는 장밋빛 미래만 있을까. 일단 단기적으로는 장밋빛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위험 요소들이 있다는 게 중론이다. 가장 큰 위협은 중국이다. 중국은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고, 전 국가적으로 반도체 전쟁에 나섰다. 2015년 6월 중국 정부는 반도체 국산화에 10년간 1조위안(약 161조50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투자 수단으로 ‘중국 국가 시스템반도체 산업육성기금’을 활용한다. 일명 ‘빅펀드’로 불린다. 중국 재정부와 국영 기업이 출자했다.       ▲ 1994년 8월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 256메가 D램 개발 성공을 전하며 일간지에 낸 광고.    월드베스트 시대의 과제      중국 반도체 업계는 기술을 얻어내기 위해 몸이 달아있다. 기술이전을 받기 위해 협력을 제안(삼성전자·SK하이닉스)했다가 거절당한 후엔 아예 기존의 반도체 기업을 사들이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지난해 5월엔 중국 기업이 독일 반도체장비 업체 아익스트론을 6억7000만달러(약 7490억원)에 인수하려 했다. 독일과 미국 정부가 브레이크를 걸어 인수는 무산됐다. 이런 식으로 몇 차례 인수가 저지되자, 이제는 핵심 인재를 영입하는 작전을 쓴다. 한국의 인력을 빼내간다는 의심을 받았지만 진짜 문제는 ‘대만 기술인력’이라고 박재근 교수는 말했다.      “대만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하던 인력이 거의 조직 그대로 중국으로 넘어갔다. 대만 마이크론 얘기다. 기술인력 60여명이 한 번에 허페이 창신으로 옮겼다. 마이크론에서 제소한다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중국의 굴기도 굴기지만 만약 이런 일들이 계속돼 마이크론이 망하면 더 큰 문제다. 시장엔 사실상 삼성전자, SK하이닉스만 남게 된다. 중국은 우리 반도체 기업의 가장 큰 시장이다. 독과점으로 걸고 넘어질 게 명백하다.”       중국의 부상 외에도 한국 반도체 업계 자체의 문제도 있다. 바로 인력 부족이다. 해마다 배출되는 반도체 전공 석·박사급 인력은 300여명이다. 반도체 인력 수요를 따라가기엔 어림도 없다고 교수들은 지적했다. 기업들은 내년 입사 인력까지 선점하려 각 대학 반도체학과를 두드린다. 인력이 부족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학생들의 진학 기피다. 반도체의 기술 수준, 특히 한국 기업의 기술 수준은 매우 높기 때문에 학부 졸업장만으로는 부족하다. 석·박사를 졸업해야 실력 발휘가 가능하다. 긴 수학 기간에 학생과 학부모들이 진학을 부담스러워한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정부의 지원 부족이다. 지난해 정부 예산 중 반도체 부문 R&D 신규 예산은 0원이었다. 기존에 진행되던 사업이 끝나면 연속 사업을 새로 진행하지 않았으니 실질적으로는 마이너스 예산이었던 셈이다. R&D 예산이 줄어드니 학계 연구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지난 정부는 ‘돈을 많이 버는 대기업이 알아서 R&D를 해야 할 것’이라는 방침이었다. 시장 상황에 무지한 탓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에 치중해 있다. 전 세계 차원에서 보면 메모리 반도체는 전체 반도체 시장의 30%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시스템 반도체다. 시스템 반도체는 앞으로 폭발적 성장이 확정되어 있다. 사물인터넷, 자율주행차 등 4차 산업혁명의 모든 것이 시스템 반도체와 연관되어 있다.       이병철부터 이재용까지 3대 기업인이 40년간 이룩한 ‘반도체 월드베스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기라성 같던 반도체 챔피언들도 몇 번의 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신흥국 한국에 1등 자리를 뺏겼다. 월드베스트 시대를 어떻게 연장해 나갈지, 그 어느 때보다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인기기사

칼럼 더보기

진세훈

서울대병원에서 ‘3시간 대기, 3분 진료’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국립 서울대병원부터 일인 진료시간을 15분으로 늘려서 실시한다고 한다. 국민들 입장에는 너무너무 국민을 사랑하는 제도개선으로 볼 수 있다. 3시간 기다려서 겨우 3분 진료하던 아쉬움과 불만을 15분이라는 긴 시간동안 진료를 꼼꼼히 봐 주도록 정권이 나서서 제도화해준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서울대병원이야 국립이니 적자가 나더라도 국민세금으로 메워 줄 것이고, 진료하는 의사는 진료환자 숫자에 상관없이 월급이 나오니 3분 간격으로 환자에게 시달리던 것을 15분 간격으로 시달림이 줄어들었으니 환자나 의사나 병원이나 모두가 ‘윈윈정책’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3시간 대기, 3분 진료의 본질적 원인을 모르고 이런 정책을 자랑스럽게 실시하면 정말 아마추어 정권이 되고, 과거 3분 진료로 불만을 가진 분이 15분 동안의 긴 시간 진료를 받고 행복해 하는 모습만으로 판단하면 광우병 연출에 가까운 고의적 현실 왜곡이 된다.   이유는 이렇다. 서울대병원에 진료 받고자 하는 숫자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므로 당장 대기시간이 단순계산으로도 평균 5배 늘어날 것이다. 3분 진료가 15분 진료가 되었으니 환자가 더 몰릴지도 모른다. 또 대기시간이 늘어나서 결국 진료를 못 본 환자들이 당장 3분 진료라도 받게 해달라고 집단 항의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건 수학이 아니라 산수만 공부한 사람이라도 당연히 예측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지적하면, 그렇기 때문에 중증환자가 아니면 서울대병원에 가지 않아야 한다고 정책담당자들은 이야기 한다. 대학병원으로 몰리는 현상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방법으로 해결 될 것이면 이미 대학병원에 몰리는 환자문제가 벌써 해결 되었어야 한다. 더욱이 대학병원으로 몰리는 현상을 지금보다 대기 시간을 5배 늘려서 대학병원에서 기다리다 지쳐서 안 오도록 하는 것이 이 제도의 목적이라면 솔직히 목적을 알려야 한다. 진짜 목적은 숨긴 채 국민을 위해서 3분 진료를 15분 진료로 제도화 한다는 측면만 알리면 그것은 대국민 사기다. 따라서 이런 대답은 삶이 피곤하면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는 사이비 종교집단과 같은 수준의 말이다.   사람을 죽여서 현행범으로 붙잡힌 살인자도 체포와 수사와 처벌에 인권이 있다. 이것은 여론조사로도 바뀔 수 없는, 민주 비민주의 현재의 가치를 뛰어 넘는 인권에 관한 정부의 민주 문명사회의 상징적 규범이다. 살인자라 하더라도 살인을 저지른 범죄행위를 처벌하는 법에 정한 제재를 제외하고는 살인자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어떤 부자유나 어떤 제재도 있을 수 없다.   봉건제도 하의 대감 집에서 부리는 종에게도 어떤 일을 시키면서 일의 목적을 설명하고 성실히 일을 수행할 것을 명령하지, 일 하나 하나를 몇 분에 혹은 몇 시간 간격을 처리하라고 지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예라 하더라도 일을 맡은 주체가 기계가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에 맡은 사람이 목적에 맞게 효율적으로 처리해나가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의사는 비싼 등록금에 6년 대학공부하고 노예보다 못한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4~5년 거쳤을 뿐 아니라 그것도 자격을 검증하기 위해 국가고시를 쳐서 실력이 확인된 전문가이다. 입으로만 대중에게 어필해서 인기투표 하듯이 수시로 떨어졌다 붙었다 하는 선출직 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이런 지상 최고의 가치인 국민건강을 지키는 전문직의 진료행위를 하는 의사를 감옥에 잡아 놓은 살인범죄자 만큼도 배려하지 않고 의사를 봉건시대 노예만큼의 대접도 하지 않는, 전기 스위치만 올리면 부서질 때 까지 돌아가야 하는 대량생산 기계 부속품으로 여기는 무식하고 뻔뻔한 마음이 아니면 이런 일을 구상할 수도, 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의사도 15분 진료를 당연히 하고 싶다. 국민은 대기시간을 최대한 줄이길 원한다. 그 해결책이 고작 서울대병원의 3시간 대기, 15분 진료정책 뿐인가. 이는 한 마디로 의료정책 담당자의 눈 감고 아웅 하는, 국민과 의사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정책이다.   의사도 국민이다. 의사를 최소한 배려하는 것도 자랑스러운 정부의 책임이다.

홍익희

오늘은 저와 함께 유대인의 경전, 탈무드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유대교의 경전은 모두 몇 개일까요? 유대인의 경전은 2개입니다. 하나는 ‘토라’이고 또 다른 하나가 ‘탈무드’입니다.    여러분 토라는 읽어보셨죠? 안 읽어보셨다구요? 여러분은 토라를 조금이라도 읽어보셨을 겁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구약성경의 도입부 첫 다섯 권. 곧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가 썼다고 하여 이를 모세오경이라 부릅니다. 바로 이 모세오경이 토라입니다.    구약(舊約)의 약(約)은 ‘계약’을 뜻하는데, 히브리어로는 혈약(血約)을 의미합니다. ‘피로 약속한 영원불변의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구약을 경전으로 삼고 있는 종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경을 ‘구약’이라 부르는 걸 싫어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성경을 ‘타나크’(TANAKH)라 부릅니다. Torah(율법서), Neviim(예언서), Ketubim(성문서)의 첫 문자를 떼어 만든 이름으로 총 24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유대교는 히브리 원문이 남아 있지 않으면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기독교의 구약성경 보다 권수가 적습니다.    그럼 타나크는 토라 곧 율법서 말고도 19권이 더 있는데 나머지는 뭐냐구요? 유대인들은 나머지 부분은 토라를 보조하거나 해설하는 보조경전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토라만을 양피지에 손으로 필사하여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어 이를 갖고 예배를 봅니다.   토라에는 창조 이야기를 시작으로 출애굽과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의 유대인 역사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을 비롯해 유대민족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율법이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 토라에 실린 율법의 수는 613개입니다.    이 가운데 “하지 마라”가 365개로 일 년의 날 수와 같고, “하라”가 248개로 이는 인간의 뼈와 모든 장기의 수와 같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 우리가 일 년 내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의 지체를 가지고 열심히 해야 할 것들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 합니다.    토라는 특별하게 규제하는 것이 없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이런 저런 일은 하라’고 적혀 있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이런 저런 일은 하지 마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규제를 최소화하는 이른바 ‘네가티브 시스템’입니다.    토라는 ‘가르침’이란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이렇듯 토라는 유대민족이 어떻게 태동하여 왔는지를 알려주는 역사서이자 유대 민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율법서입니다.   그럼 탈무드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그의 백성들이 앞으로 지킬 십계명과 율법을 내려주며 삶의 작은 부분까지 아주 자세히 알려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이 초막절 절기 때에 모세에게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라는 '율법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뒤 하느님은 초막을 짓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서 율법의 말씀은 글로 쓴 토라에 기록되어 있고 초막 짓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장로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하나는 글로 쓰여 ‘토라’로 남겨졌고 또 다른 방대한 내용은 미처 글로 쓰이지 못하고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율법은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글로 쓰여 진 ‘성문율법’이요 또 다른 하나는 말로 전해져 내려온 ‘구전율법’입니다.    구전율법은 오랜 시간이 지나자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선대의 설명을 그대로 후대에 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기원전 6세기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왔을 때, 선지자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더 늦기 전에 구전율법들을 모아 책으로 편찬하기로 했습니다. 에스라는 유대인의 종교생활과 일상생활을 규율하는 구전율법을 모아, 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글로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작업은 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져 방대한 저작을 낳게 됩니다.   서기 210년경 랍비 ‘유다 하 나지’는 사람들을 모아 그간 선배 랍비들이 모아 오던 구전율법의 본격적인 편찬에 착수해 6부(농업, 종교절기, 결혼, 민법과 형법, 제물, 제식) 63편 520장으로 완성했습니다. 이로써 탄생한 것이 탈무드의 전신 ‘미쉬나’입니다.   가운데 부분이 미쉬나, 그 주변이 미쉬나를 해석한 게마라 그런데 미쉬나는 원론적 내용만 담고 있어,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미쉬나를 바탕으로 오랜 기간 토론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 뒤 300여 년 동안 많은 랍비들은 미쉬나에 대한 보충설명과 해석을 더 했습니다. 이 해석들을 모은 것이 ‘게마라’입니다.    이렇게 미쉬나와 그 주해 게마라를 한데 모은 것이 ‘탈무드’입니다. 사회의 모든 사상에 대해 구전으로 전해지던 율법을 모아, 해설을 덧붙여 집대성한 책입니다. 이렇게 탈무드는 원로 랍비들이 후손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 기원전 500년부터 약 1천 년 동안 현인들의 말과 글을 모아놓은 지혜서의 일종으로 유대 교육의 중심서입니다.    ‘탈무드’는 히브리어로 ‘위대한 배움’이라는 의미입니다. 탈무드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종교적 지침과 민족적 동질성을 지켜주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탈무드는 원래 이방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책이었습니다. 시중의 탈무드 책은 유대인의 삶과 생각을 규율하는 율법 자체가 나와 있지 않으며, 그저 유명한 랍비 이야기나 흔히 알려진 일화나 우화 같은 것들로 채워져 있는 일종의 우화집입니다. 이는 실제 탈무드의 양을 생각할 때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탈무드는 한 권의 책이 아니라 63권의 방대한 책입니다. 그 무게가 75 kg이나 나가는 엄청난 분량입니다. 참고로 미국에서 탈무드는 히브리어-영어 대역판 72권으로 나와 있는데 이게 300페이지 책 140권 분량입니다. 탈무드는 책이라기보다는 ‘학문’입니다. 그것도 ‘위대한’ 학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탈무드는 한 가지 정답만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읽는 이의 시각과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후 탈무드 교육을 통한 질문과 토론문화 곧 하브루타가 유대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교육방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질문과 토론문화를 통해 유대인들의 다양한 사고와 창의성이 발현되어 자기 분야에서 우뚝 솟는 업적을 남기는 유대인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탈무드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김병헌

최근 조선일보를 비롯한 주요 일간지에는 6월 27일 열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분과 회의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과 4.19혁명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 신청 대상에 선정됐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기사 중에는 위 문건을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기록물로 언급하며 아래와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사발을 엎어 그린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의 명단을 빙 둘러 적은 사발통문(沙鉢通文)과 농민군 해산을 권고하는 흥선대원군 효유문(興宣大院君 曉諭文) 등이 대표적이다. 동학자료들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이 추구한 평등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조선일보, 2017. 6. 28)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에 말한 사발통문은 사발통문이기 전에 통문조차 될 수 없는 잡기로 분류해야 할 문건이다. 사발통문은 통문 중에서도 주모자를 숨기기 위해 참여자의 명단을 사발처럼 둥근 원을 따라가며 서명한 것을 이른다. 사발통문 이전에 통문이라는 자격부터 갖추어야 하기에 거기에는 일정한 서식이 있다. 개인 간에 오가는 편지에서도 서식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통문의 서식은 서두에 通文이라고 제호처럼 쓰고, 줄을 바꾸어 右文爲通諭事段……(우문위통유사단……)이라는 문구로 시작하여 본론을 말한 다음, 모일 장소나 일시를 쓰고 ……千萬幸甚(……천만행심)이라는 글귀로 끝을 맺으며, 수신처·발신연월일·발신처 및 발신자 명단을 차례로 열기(列記)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를 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대체적인 서식은 이와 같으나 ‘通文’이라는 제목을 주로 쓰는 가운데, 檄文(격문)이나 敬通(경통) 등 다른 제목을 쓴 경우도 있다. 마지막의 발신 일자, 참여자 명단, 수신처 등은 순서가 바뀌기도 한다. 그렇다면 상기 문건이 왜 통문이 될 수 없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이 문건은 대략 내용에 따라 네 단락으로 구분된다. 이를 분석하면 아래와 같다.   제1단락은 1893년 11월, 20명의 동지가 서명하고 각 리의 이집강(里執綱)에게 통고한 문서로 여겨지나 ①제목과 ②본문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이 ③발신 연월일 이하만 있다. 편지를 예로 든다면 마지막의 발신 날짜와 발신자만 있고 앞의 편지 내용이 없는 것과 같다. 둥글게 돌아가며 쓴 이름 안에는 직경 5cm의 원이 있고 그 원을 따라 쓴 20명의 이름 중에는 크기가 약간 큰 전봉준의 이름도 보인다. 제목과 본문을 갖추고 있었다면 여기까지를 통문이라 할 수 있다.   제2단락은 ‘오른쪽과 같이 격문을 사방에 날려 보내니’라는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격문, 즉 앞의 통문을 배포한 다음 일어난 민심의 동향을 적고 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虐政)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어찌할 도리 없이 속만 부글부글 끓이면서 난리라도 터져 나라가 망해야만 한다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던 차에, 동학교도들이 통문을 돌리고 봉기(蜂起)할 것이라는 소식이 돌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호응하는 장면이다. 이 글에는 난리가 나서 나라가 망하든지 말든지 해야지 그렇지 않고 그냥 이대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백성들의 원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제3단락은 통문을 돌리고 난 다음 동요하는 민심 사이에서 동학교도로 이루어진 도인들이 송두호의 집에 모여 차후 진행해야 할 대책, 즉 선후책(善後策)을 논의하는 과정과 그 논의에서 결정된 4개 조항을 적고 있다. 그런데, 정읍시에서는 고부면 고부주산길 4(구 송두호의 집, 신중리 562-1)를 ‘사발통문을 작성한 집’이라 하여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이 문건을 통해 당시 통문이 배포되었다는 점과 통문 배포 후 송두호의 집에 모여 선후책을 논의했다는 점 외에 통문이 누구의 집에서 작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송두호의 집은 선후책을 논의한 곳이지 통문을 작성한 곳이 아니다.     제4단락은 선후책 4개 조항을 결정한 후 이를 실행할 지도부를 구성하는 과정을 적은 것으로 판단되나 나머지 부분이 잘려나가 더 이상의 내용 파악은 불가하다.   이 문건은 통문 배포와 이후 송두호 집에 모여 4개 조항의 선후책을 의결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집행부를 구성하는 등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기록한 잡기다. 이 문건의 작성자는 아마도 이러한 과정에 직접 참여하거나 자세히 알고 있던 사람일 것으로 짐작된다. 만약, 발송 연월일 앞에 통문이라는 제목과 본문이 있었더라면 당시 배포된 진본은 아닐지라도 그것만 따로 떼어내 사발통문이라 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발신 날짜, 발신자, 수신자만 남아 있는데다가 나머지 통문을 배포한 후 벌어진 상황이 같은 면에 기록되어 있어 통문이라 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이 문건은 2015년 12월, 전라북도에서 ‘사발통문은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역사자료로, 1893년 11월, 전봉준을 비롯한 20명이 거사 계획을 세우고 그 내용을 사방에 알리기 위해 작성한 문서’라는 사유를 들어 문화재(전북도 고시 제2015-337호)로 지정하였다.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 필자는 상기 분석 자료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으로 보내 통문이 될 수 없다는 취지로 이의를 제기한 바가 있다. 하지만 필자의 이의 제기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로 지정된 후에는 기념재단을 직접 방문하여 전북도청과 기념재단 관계자를 만나 사발통문은커녕 통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피력하였다. 이에 두 관계자는 필자의 주장에 동의하고 추후 문화재 심의위원과 논의하여 그 결과를 알려주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이후 연락은 없었으며 지난달 세계기록유산 후보에 선정되었다는 사실을 보도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이없는 일이다.   잡기에 지나지 않는 문건을 사발통문으로 둔갑시킨 황당한 일은 교과서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현행 교과서 중 교학사와 금성출판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교과서는 해당 문건 사진과 함께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 사발통문으로 소개하고 있다.   ▲ 천재교육 한국사 교과서 197쪽   이에 대해 필자는 이 문건을 사발통문으로 소개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필자의 지적에 대한 출판사의 답변과 처리 결과는 아래 표와 같다.   교학사 수록하지 않음 금성출판 수록하지 않음 동아출판 학계의 일반적인 논의에 따른 것임 리베르 집필자의 답변 거부 미래엔 필자의 주장이 타당하고 보임 - 미수정 비상교육 검토 약속 - 미수정 지학사 집필자의 답변 거부 천재교육 사발통문 → 사발통문 필사본으로 수정  비슷한 질의에 대해 가장 황당한 답변을 한 곳은 국사편찬위원회다. 답변 중 일부를 소개한다.   ‘조선시대 생산된 통문에 일정한 양식이 있다는 것을 본인은 들어본 바 없다. 또한 통문에 일률적으로 右文爲通諭事라고 언급되었다는 것도 금시초문일 따름이다.’   ‘질의자는 통문이라면 전봉준의 글씨를 크게 쓰지 않았다고 단정하시고 있으나 그 근거는 매우 박약하다. 전봉준의 글씨가 크게 쓰여 졌다고 하나 그것은 상당히 주관적 판단에 불과한 것이며 글씨의 크고 작음은 붓글씨를 쓸 때 각자의 버릇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집강(執綱) 좌하(座下) 이하의 문구는 난리를 일으키게 된 배경과 불특정 다수가 이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 그리고 어떻게 난리를 진행시킬 것인가가 기재되어 있는 셈이다. 대개 연구자들은 이 점에 주목하였기 때문에 당연하게 이 문건을 고부 농민봉기를 촉발시킨 통문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국편의 답변을 보노라면 답변자는 이 문건을 읽어보지 않았거나 읽었더라도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답변자는 고문서에 대한 신중한 접근 자세가 느껴지지 않는다. 고문서는 글씨의 크기뿐만 아니라 점 하나까지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하여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서술조차 확인하지 않고 ‘금시초문’이라는 말을 쉽게 쓰고 있다. 국편 질의 때마다 느끼는 실망감을 또 한 번 경험하였다.     이 외에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사발통문이라는 항목에서 ‘그 대표적인 예로 동학군의 통문 제1호라고 할 수 있는 사발통문을 들 수 있다.’고 하여 근거도 없이 통문 제1ㅌ호라 하는가 하면, ‘그 내용은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동학 간부 20여명이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宋斗浩)의 집에 모여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이하 악리(惡吏)들을 제거하며, 이어 전주감영을 함락시키고 서울[京師]로 직향(直向)할 것을 결의한 것이다.’라고 하여 사실 관계와 전혀 맞지 않은 서술을 하였다. 그런가 하면 통문이나 언론 등의 항목에서는 이 문건 사진을 사발통문이란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모두 수정해야할 부분이다.   필자의 주장은 위 문건이 본래의 사발통문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사발통문이기 전에 통문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모두들 사발통문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백과사전에 싣고, 교과서에 실어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문화재로 등록하는가 하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기념관 관련자, 심의위원, 교과서 집필자, 백과사전 집필자는 모두 해당 분야 전공자일 것이다. 전공자라면 위 문건을 한 번만 읽어봐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읽고도 판단이 안 된다면 전공자라 할 수 없다.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류근일

보수진영이 철저히 망하자 이제는 보수 가치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고, 자유한국당도 혁신위원회라는 걸 만들어 새로운 보수정당으로 거듭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보수란 어떤 것인가? 사람마다 대답이 다를 것이다. 일부는 보수가 보수를 벗어나 중도 쪽으로 좌(左)클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만들고 발전시킨 세력은 사실은 처음부터 보수인 적이 없었다. 늘 진보적이고 변혁적이었다. 공산주의-좌파 민족주의와 대립하다 보니 우파로 자리매김 당했고, 그렇게 되다보니 보수라고 불리게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한국 자유-민주-공화 세력으로선 보수라고 낙인찍히는 게 억울할 수도 있다.    한국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원류(源流)를 조선왕조 말기의 문명개화 운동에 둘 경우 그 선각자들에겐 당시의 조선왕조 또는 조선사회는 변혁의 대상, 개혁의 대상이지 온존(溫存) 시켜야 할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의 근대의식은 물론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예컨대 이승만 박사는 조선왕조의 정치 사형수였다. 김구 선생도 동학군 즉 혁명가였다. 그들은 시체 말로 하면 당시의 변혁운동권 즉 진보였던 셈이다. 일제 치하에서도 그들은 반일(反日) 혁명가 즉 진보 인물들이었지, 보수 인사가 아니었다.  1948년의 대한민국도 우리 역사상 최초의 자유-민주-인권-공화-개인-개방-시장 원리에 기초한 근대적 국민국가의 본격 탄생이었다. 이건 보수가 아니라 진보다. 왕조국가-봉건사회-유교 원리주의-중화주의-쇄국주의-사농공상(士農工商)-신분제-양반지주 지배를 타파하고 서양이 선도한 근대국민국로 나아갔다는 것은 ‘진보적’을 넘어 엄청난 혁명적 사태였다. 게다가 그 직후엔 이승만 대통령의 성공적인 농지개혁이 있었다. 이것도 대단한 사회혁명이었다.  1960년대~1980년대의 산업화는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와 천지개벽 같은 변혁이었다. 이처럼 대한민국 자유-민주-공화 세력은 시종 모더니티(modernity, 근대성) 혁명의 길을 따라 끊임없이 ‘진보’를 이룩해 온 비(非)보수 혁신세력이었다.  이에 비한다면 대한민국적 근대화를 서구에 종속되는 '식민지 근대화'라고 배척한 좌파 민족주의자들과 주체사상 파는 겉으로는 ‘진보’를 자처하면서도 콘텐츠에 있어서는 근대화-산업화-개방-자유시장에 반대한 수구꼴통이었다. 현대판 척사위정(斥邪衛正) 파였던 셈이다. 이들은 1980년대 후반엔 한국의 ‘식민지 반봉건사회’가 망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막상 망가진 건 북한 ‘주체’ 체제였고, 대한민국은 선진국 문턱까지 도달했다.  근대화라고 해서 물론 다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인간 소외(疏外), 양극화, 환경파괴, 대량살상무기, 타락한 이성의 산물인 좌-우 극단의 전체주의 같은 비극이 파생되었다. 이래서 오늘날엔 이런 부작용을 치유하기 위한 성찰적 철학, 사회과학, 정책학들이 대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정적인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선각자들은 북한 김씨 일족의 천황제 파시즘에 비해 월등히 우수한 변혁노선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맞다. 그들이 걸은 길은 수구나 보수라기보다는 변혁적이고 진보적이고 혁신적이며 끊임없는 변신의 길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 자유-민주-공화 진영은 자부심을 가지고 천명해야한다. 우리는 참 진보세력이라고.    오늘의 한국 자유민주 진영의 재기 노력은 바로 이런 진보적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재발견과 긍지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대한민국 자유-민주-공화 세력은 밀리고 쫓기고 몰리고 추궁당할 과거의 세력이 아니다. 그들은 박차고, 구(舊)를 깨고, 혁신하고, 변동하고, 창출하고, 성취한 미래의 선취(先取)자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자임해야 한다.  그럼에도 오늘의 국면에서 한국 자유-민주-공화 진영은 왜 이렇게 참담한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는가? 지도층이 공부를 하지 않았고, 나태했고, 이상과 기상(氣像)을 잃었고, 후대를 양상-교육하지 않았으며, 문약(文弱)에 빠졌고, 위기의식이 없었고, 주적(主敵)을 망각했고, 그에 대한 투철한 투쟁의식을 상실했고, 시류(時流)에 영합하고 비겁했으며,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도층의 타락과 더불어 대중사회(mass society)도 함께 타락해 갔다.    따라서 대한민국 자유-민주-공화 진영 재활의 길은 선배 세대가 대한민국 네이션 빌딩 과정에서 보인 탁월한 방향선택과 변혁적-진취적 발상 자체는 계승하면서 그것을 오늘의 시대적 요구에 맞게 좌파보다 앞서(그러나 좌파보다 현명하게) 재조정하는 작업과 함께, 우리가 그 동안 방기했던 시퍼런 윤리적-정신적-미학적 기상과 서슬을 갖추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결론은 자명하다. 한반도의 싸움은 정태(靜態)적이고 전(前)근대적이고 수구적인 전통사회를 마치 ‘민족적’인 양 설정하는 쇄국적 반(反)근대문명 세력에 대한, 대한민국적 근대문명 세력의 투쟁이다. 이 투쟁이 오늘의 담당세대가 잘못한 탓으로 궤도에서 탈선했다. 정신을 가다듬어 과오를 반성하고 다시 본 궤도에 올라타야 한다. 그리하여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의 문명개화를 향한 100년래의 변혁투쟁을 다시 이어가야 한다. 이런 화두만 서면 그 다음부터는 실마리가 하나하나 풀릴지 않을까?

FUN 더보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