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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짠돌이가 되었나?’, 젊은이들의 ‘짠테크’ 열풍

서울 서대문구에 살고 있는 직장인 김모씨(34·미혼)는 요즘 점심 도시락을 챙겨 출근을 한다. 회사에선 매달 20만원 정도의 식사 지원비를 받고 있지만 사무실이 있는 서울 여의도 인근의 식당가에서 점심을 해결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기 때문이다. 점심 식사와 커피 한 잔 값으로 2만원 가까이 지출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도시락을 싸서 출근을 한 뒤로 식사비는 물론 커피값도 줄이게 됐다. 이제 식사 지원비 중 일부를 모아 적금에 넣고 있다. 아직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김씨는 앞으로 1~2년 정도 뒤에 독립을 하는 게 목표다.      ‘사회초년생 1년7개월, 28살 3600만원 저축했어요.’      지난 11월 21일 재테크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게시글의 제목이다. 이 글을 올린 직장인 A씨는 ‘급여는 세후 242만원, 저축은 154.4만원(월급의 66%), 고정지출은 40만원(월급의 16%), 용돈 50만원(월급의 18%)’과 같이 자신의 소비내역을 공개하며 “사회초년생 때 허리띠를 졸라매야 소비습관이 쌓이고 그게 저축왕이 되는 지름길인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짠테크 온라인 커뮤니티 인기      해당 커뮤니티에는 이후 ‘28살 1억5000 모았습니다’ ‘사회초년생 2000만원 달성’ 등 A씨의 게시글과 유사한 내용이 담긴 글들이 속속 올라왔다. ‘30살 1억5000 후기’라는 글을 올린 B씨(31·미혼)는 자신이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악착같이 돈을 모으게 된 이유에 대해 ‘돈 없어서 무시당하는 것, 나이 들어서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이 싫어서’라고 설명한다.      이들이 목표자산 금액을 정하고 그 금액만큼의 자산 불리기에 성공하게 된 비결은 간단하다. 돈을 안 쓰거나 ‘선저축 후지출’을 하는 것. 즉 돈을 꼭 써야 할 상황에 대비해 항상 저축을 하는 것이다.      무심코 나가는 사소한 지출을 줄이는 대신 소액을 꾸준히 저축하는 ‘짠테크(짜다+재테크)’ 열풍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불고 있다. 주로 20~30대 직장인들이 저축과 절약으로 무장한 ‘짠테크’ 열풍의 주역이다. 이들은 소비지상주의에 반기를 들며 ‘무조건적인 소비가 마케팅의 산물’이라고 본다. 또 ‘티끌 모아 티끌’이라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뚜벅뚜벅 저축의 길로 나아간다.      ‘젊은 짠돌이’들이 많아지면서 짠테크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대표적인 것이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월급쟁이 재테크 연구’(회원수 38만명), ‘짠돌이 부자되기’(회원수 15만7000명)와 다음(Daum)의 ‘짠돌이’(회원수 74만9000명) 등이다.      이들 커뮤니티에는 매일 자신만의 절약과 재테크 비법을 공개하는 게시글이 올라온다. 냉장고에 들어있는 음식으로 식사를 해결하거나(냉장고 파먹기), 앱테크(앱+재테크)로 번 수익을 저금하거나, 싸게 구입한 쿠폰으로 영화감상 등 문화생활을 즐기는 식이다. 또 생활용품이나 쿠폰 등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이벤트 행사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금리가 높은 적금을 소개해주는 등 재테크 정보도 공유한다. 이 외에도 앞서 소개했듯이 20~30대 사회초년생들이 ‘허리띠’를 바짝 조여 목표자산 금액을 달성한 후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 KB국민은행이 선보인 ‘KB스마트폰 적금’과 카카오뱅크의 ‘26주 적금’(오른쪽). 모두 짠테크족을 겨냥한 상품들이다. photo 상품이용 캡처화면   짠테크족 겨냥 금융상품 러시      짠테크족이 늘면서 덩달아 바빠진 곳은 바로 금융권이다. 시중은행에서는 예적금을 선호하는 짠테크족을 겨냥한 상품을 잇따라 출시하고 있다. 이들은 긴 기간 가입해야 했던 기존의 정기적금 대신에, 가입기간을 짧게 줄이고 무심코 나가는 커피값과 교통비 등 쌈짓돈을 모을 수 있는 적금 상품으로 짠테크족 공략에 나섰다.       최근 신한은행은 ‘작심 3일도 여러 번 반복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콘셉트의 ‘쏠(SOL) 편한 작심 3일 적금’을 출시했다. 매월 자동이체를 통해 1~3년 만기까지 일정 금액을 적립하는 일반 적금 형태에서 벗어나 요일별·소액 자동이체·6개월 만기로 상품을 설계했다. 이 적금의 금리는 기본 연 1.9%, 최대 연 2.2%다. 월 저축한도는 최대 50만원까지다.      지난 6월 카카오뱅크가 내놓은 ‘26주 적금’ 상품은 출시한 지 4개월 만에 50만좌를 돌파했다. 1000원, 2000원, 3000원, 5000원, 1만원 가운데 하나를 가입 첫 주 납입금액으로 선택하면 매주 해당 금액만큼 증액해 적금할 수 있다. 가령 첫 주에 1000원을 입금했다면 매주 적금액이 1000원씩 늘어나 마지막엔 2만6000원을 납입하는 식이다. ‘26주 적금’은 연 1.80%(자동이체 시 0.20%포인트 우대)의 금리가 적용된다.      우리은행은 ‘위비 짠테크 적금’을 통해 1년 총 52주간 매주 또는 매일 저축액을 늘려갈 경우 최대 연 2.75%의 금리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은행 모바일 앱에서 52주 짠플랜, 매일매일 캘린더플랜 등의 적립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52주 짠플랜을 선택하면 최초 이체금액 1000원으로 시작해 52주간 1000원씩 납입액을 늘려 1년 뒤에는 138만원을 모을 수 있다.      보험업계도 마찬가지다. 기왕에 가입하는 보험이라면 한 푼이라도 싸게 알찬 보장을 받으려는 ‘짠돌이’가 늘면서 사이버마케팅(CM) 채널이 인기몰이 중이다.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5월 기준 사이버마케팅(CM) 채널 원수보험료는 총 1조4438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 넘게 증가한 수치다. 원수보험료는 보험사가 대리점 등을 통해 보험계약을 체결하고 보험계약자로부터 받은 보험료를 말한다.      전통적인 설계사 채널을 통해 판매되는 일반 보험과 달리 CM 채널을 통한 다이렉트 보험은 비대면 채널을 활용하기 때문에 간편하고 빠르게 가입이 가능하다. 또한 설계사가 받는 수수료나 지점 임대료처럼 대면 채널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을 줄여 일반 보험보다 보험료가 저렴하다.      비대면 채널을 통한 다이렉트 보험 가입자가 늘면서 보험사들도 관련 상품을 속속 선보이고 있다. DB손해보험은 지난 11월 15일 다이렉트 홈페이지와 모바일에서 가입할 수 있는 인터넷 전용 미니 암보험 ‘프로미라이프 다이렉트 참좋은암보험(CM)’을 출시했다. 이 상품은 인터넷 전용으로 판매수수료가 없고, 암 보장 관련 담보로만 구성돼 있다. 본인이 원하는 부위별 암 보장에 대해 선택 가입할 수 있어 기존 암보험 대비 보험료를 대폭 낮춘 것이 특징이다.      KB손해보험은 지난 9월 다이렉트 신상품 3종(유학생·치아·주택화재보험)을 선보이며 다이렉트 상품 라인업을 대대적으로 확대했다. 또 기존에 PC에서만 가입할 수 있었던 ‘KB다이렉트 이륜자동차보험’을 모바일 채널에서도 가입할 수 있게 했다.      안정적인 직장에서 근무하게 돼도 짠돌이들의 고군분투는 계속된다. 수년째 취업준비생이었던 대학원생 신모(27)씨는 2019년 초 입사를 앞두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번역 아르바이트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신씨에게 당장 갚아야 할 학자금대출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신씨는 “앞으로 회사에서 일한다고 해도 지금보다 더 많이 벌 것 같진 않다”며 “그동안의 적금을 유지하려면 예비 저축액을 더 많이 모아야 할 것 같다. 회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알바를 더 구해서 최대한 많이 저축을 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허리띠를 졸라매는 젊은이가 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20~30대가 짠테크 열풍을 몰고 온 이유 중 하나로 불안정한 소득수준이 문제라는 분석도 나온다. 20대의 소득 자체가 크지 않다 보니 자연스레 ‘짠돌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사실 20대의 소득 자체가 워낙 적다 보니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다. 이미 20대와 50대의 소득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는 현상이 포착되고 있다”고 밝혔다. 또 “20대의 경우 윗세대에 비해 일자리의 질이 좋지 않다”며 “20대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게 돼도 버는 돈을 집 한 채 구하는 데 다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20~30대가 직장에 들어가 자신의 소득수준을 높이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상당하다. 구인·구직 매칭플랫폼 ‘사람인’이 지난 11월 27일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직장인들이 연봉 5000만원을 받기까지 입사 후 평균 11.3년의 시간이 소요된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824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기업 규모별로는 대기업이 평균 7.4년으로 가장 짧았고, 중견기업과 중소기업이 각각 10.2년과 11.7년으로 조사됐다. 연봉 5000만원 달성에 소요되는 시간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신입사원 때의 연봉격차가 주 요인으로 보인다. 실제로 전체 조사대상 기업의 신입사원 평균 연봉은 2593만원이었는데 대기업은 3730만원에 달했다. 중견기업과 중소기업은 각각 2981만원과 2462만원으로 집계됐다.         저성장이 몰고 온 현상      이제 짠테크 열풍을 마냥 지켜보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짠테크가 저성장 국면에 들어가면서 생겨난 현상이기에 중·장기적으로는 국가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짠테크 열풍은 저성장 국면에 본격적으로 접어들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젊은 세대들이 소득이 충분치 않고 노후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면서 앞으로 노력하면 더 좋아진다는 희망마저 놓아버리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의 인구구조상 부양해야 할 사람은 늘고 일하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어 당분간 저성장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 교수는 소비위축 문화와 함께 이 같은 저성장이 계속될 경우 젊은 세대의 근로의욕마저 저하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하 교수는 “이렇게 저성장이 이어지고 집값 상승, 세금 증가와 같이 젊은 세대가 윗세대를 부양하기 위해 짊어져야 할 짐이 늘어난다면 이들의 근로의욕마저 저하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이미 미국에선 20·30대 직장인 사이에 바짝 모아서 조기은퇴를 꿈꾸는 ‘파이어(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운동이 퍼지고 있다. 젊은이들이 경제적으로 모든 면에서 윗세대에 뒤처지는 상황에서 금융위기 이후의 불안감까지 겪으며 나타난 현상인데 한국 역시 주시해야 할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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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광용

  《삼국사기》가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지만, 광개토대왕 비문은 고구려 당대의 기록이므로 문자화된 것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사료(史料)라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건국자가 ‘주몽(朱蒙)’으로 되어 있으나, 광개토대왕 능비에는 ‘추모(鄒牟)’라고 나와 있다.    당시 부여나 고구려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추모’라고 발음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중국 사서의 것을 한자어로 고쳐 쓰다 보니 ‘주몽’이라고 기록한 것을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그대로 옮겨다 놓았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주몽’은 고구려 시대의 발음 그대로 ‘추모’라 쓰는 것이 옳다. 여기서도 그 원칙을 살려 ‘추모’라고 쓰기로 한다.    《조선상고사》를 쓴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도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위서(魏書)》에는 추모를 주몽이라고 쓰고, 주몽은 부여 말로 활 잘 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지금 만주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리무얼’이라 하니 주몽은 곧 ‘주리무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비문에는 주몽을 ‘추모’라 하였다. 문무왕(文武王) 조서(詔書)에는 ‘중모(中牟)’라고 하고 ‘주몽’이라 하지 않았다.〉    고구려의 경우 천제(天帝) 해모수(解慕漱)의 아들 추모가 건국했다고 역사 기록에 나온다. 백제는 고구려에서 파생된 국가이므로 그 핏줄 역시 천제와 닿아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알에서 태어났는데, 그 알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므로 역시 천제의 아들이다.    건국신화(建國神話)는 당시 나라를 세운 영웅을 ‘신화’라는 포장술로 재구성해, 백성들로 하여금 통치자를 우러러보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를 통해 볼 때, 나라를 건국하는 일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 천명(天命)에 의한 대업(大業)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천제의 아들과 그를 따르는 몇몇 무리들만으로 건국을 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나라를 건국하기 위한 절대적 조건은 우선 지지기반을 가진 일정 지역과 거기에 사는 백성들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나라를 일으키기 쉽지 않다. 즉 고구려는 군사력을 가진 추모와 경제력을 가진 소서노(召西奴)가 ‘정략결혼(政略結婚)’으로 세력을 규합해 세운 나라인 것이다.       주몽 神話의 시작    고구려를 건국하기 전 추모는, 동부여의 왕자 대소(帶素)가 자신을 해치려고 하자 오이(烏伊)·마리(摩離)·협보(陜父) 등과 함께 남쪽으로 도망쳐 온 처량한 신세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휘하에 일부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추격하는 대소의 군대에 비하면 그 세력은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했다.    그런데 추모의 무리는 대소의 기병들에게 쫓기던 도중 모둔곡에서 재사(再思)·무골(武骨)·묵거(默居) 등 3명의 현인(賢人)을 만나 도움을 얻었고, 마침내 비류수(沸流水) 가에 머물러 초막을 짓고 살았다.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사실상 이것이 ‘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우는 시발점이 되었다.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일단 세력을 규합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추모는 세 명의 무사와 세 명의 현인들에게 각기 재능에 따라 중요한 직책을 주고 세력 규합을 위한 여러 가지 전략을 짜 나갔다. 당시는 부족 국가 형태였기 때문에 세력을 규합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것이 강한 힘을 가진 인물, 즉 영웅의 출현이었다. 영웅이 나타나면 그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어 있다. 따라서 무사와 현인들은 우선 추모를 영웅으로 만드는 일에 주력했을 것이다.    먼저 재사·무골·묵거는 지역의 현인을 자처하고 있었으므로, 비류수 인방을 돌아다니며 추모의 남다른 재주와 인물의 뛰어난 점을 백성들에게 인식시키는 데 주력했다고 추측된다. 이를테면 신화의 내용처럼, 추모가 태어날 때부터 신비로운 인물이고 활을 잘 쏘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을 것이다. 어쩌면 추모의 이야기가 신화화되기 시작한 것은 이 세 사람의 현인들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인근 마을 사람들은 추모가 진짜 영웅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 비류수 가의 초막으로 몰려들었고, 이때 오이·마리·협보 등은 추모에게 활쏘기 시범을 보이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영웅임을 믿게 만드는 임무를 맡았을 것이다. 실제로 사냥을 나가 추모는 활로 백발백중 사냥감을 명중시켜 영웅의 면모를 보여주었고, 그날 잡아온 노루와 사슴 등으로 축제를 벌임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수하로 끌어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침내 추모가 영웅이란 소문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비류수 서쪽에 있는 마을의 족장인 연타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 마을은 졸본천(卒本川)을 끼고 있었는데, 비류수와 마찬가지로 압록강의 지류에 속했다. 《위서》에서는 이곳을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도 했는데, 서노 마을 족장이 사는 작은 성을 이르는 말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졸본주(卒本州)’로도 나오며, 이곳을 현도군의 경계 지역이라고 했다.      주몽과 소서노의 결혼  고구려의 첫 도읍지로 알려진 중국 지안의 오녀산성(졸본성). 소서노는 졸본 토착족장의 딸이었다. 사진=조선DB  졸본에 있는 이 부족 마을은 원래 부여족이어서 ‘졸본부여(卒本扶餘)’라고도 불렸다. 당시 이 마을 족장 연타발(延陀渤)에게는 ‘소서노’라는 둘째딸이 있었는데, 결혼한 지 몇 년 안 되어 남편이 죽는 바람에 과부가 되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둘째딸을 안타깝게 생각한 연타발은, 추모가 영웅이란 소문을 듣고 소서노의 배필로 삼고자 했다. 무엇보다 구미가 당기는 것은 추모의 활 쏘는 재주와 뛰어난 지략이었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만만치 않은 추세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졸본부여 근처에는 비류국(沸流國)이 있었는데, 그 나라 왕 송양(松讓)이 거느린 군사력은 졸본부여보다 강했다. 졸본부여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연타발로서는 그 세력이 늘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추모를 사위로 삼게 되면 송양을 견제하는 데 유리할뿐더러, 단시일 내에 인근에서 가장 세력이 큰 부족국가로 부상할 수 있다는 계산까지 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연타발은 사람을 보내 추모에게 자신의 둘째딸 소서노와 결혼해 주지 않겠냐는 의사를 타진해 보았다. 이때 추모 측의 참모진 사이에서는 많은 의견이 오갔을 것이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이미 추모가 동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와 결혼한 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다음의 문제는 소서노가 한 번 결혼한 적이 있는 과부인 데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들까지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단 추모의 세력은 재사·무골·묵거 세 현인의 도움으로 여러 고을을 아우르는 데 성공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수하로 끌어들여 군세(軍勢)를 어느 정도 확보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비류수 인근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부족과 부족 간의 결합이야말로 피 흘리지 않고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결국 추모는 연타발의 둘째사위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하여 추모와 소서노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 결혼은 추모의 군사력과 소서노의 경제력이 결합된 ‘정략결혼’이었던 것이다.    단재의 《조선상고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졸본부여에 이르니 이곳의 소서노라는 미인이 아버지 연타발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서, 해부루왕의 서손(庶孫) 우태(優台)의 아내가 되어 비류(沸流)·온조(溫祚) 두 아들을 낳고 우태가 죽어 과부가 되었는데, 나이 37살이었다. 추모를 보자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였는데, 추모는 그 재산을 가지고 뛰어난 장수 부분노(扶芬奴) 등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거두어 나라를 경영하여, 흘승골(紇升骨)의 산 위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가우리’라 하였다.〉    나라 이름 ‘가우리’는 이두자(吏讀字)로 ‘고구려(高句麗)’를 일컫는다. 단재의 기사에는 소서노가 37세 과부였다고 하는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백제 본기 기록을 분석해 보면 30세가량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 추모의 나이 22세였으므로 소서노가 8년 연상이 되는 셈이다. 이처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과부인 데다 아들이 둘이나 딸려 있는데도 추모가 결혼을 결심한 것은, 당시 연타발과 소서노가 가지고 있는 세력기반과 재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서노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나오지 않고 백제 본기에 약간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소서노가 당시 남자들 못지않은 배짱과 용기를 가진 여장부였다고 여겨진다. 만약 소서노가 없었다면 추모는 고구려를 건국하는 데 있어 더 많은 고난을 겪고, 그것을 이겨내려면 더 오랜 시일이 걸렸을 것이다.    고구려 건국의 두 주인공은 바로 추모와 소서노였다. 추모가 지략과 무술을 겸비한 뛰어난 인물로 고구려 건국을 주도했다면, 소서노는 그 뒤에서 여러 가지로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었다. 즉 추모는 소서노와 결혼을 하면서 기존 졸본부여의 세력으로 정치적 입지를 다졌으며, 연타발 집안의 재력으로 군사력을 강화해 송양왕의 비류국까지 부용국(附庸國)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조강지처에게 밀린 소서노  풍납토성 발굴 현장. 소서노 사후 온조가 하북 위례성에서 옮겨가 건설한 하남 위례성으로 비정된다. 사진=조선DB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소서노의 두 남편과 두 아들이 나온다. 두 남편은 전 남편인 우태와 재혼한 남편인 추모이다. 두 아들은 비류와 온조를 말한다. 그런데 두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애매모호하게 나와 있다. 백제 본기에 보면 앞에서는 추모와 소서노 사이에서 비류와 온조가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고, 뒤에 가서는 또 다른 일설로 소서노가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다고 나온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는 ‘혹은 추모가 졸본에 와서 건너편 고을(越郡)의 여자를 취(娶)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추모가 소서노가 아닌 다른 여자와 외도를 한 듯한 느낌이 드는 내용이다. 이처럼 사서의 오류가 여러 군데 보여 그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소서노가 고구려 건국에 내조의 공이 많았기 때문에, 의붓아버지 추모는 비류와 온조를 마치 친아들처럼 대우하였다고 한다. 비류와 온조가 소서노의 전 남편 우태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추모의 첫째부인 예씨가 낳은 아들 유류(儒留·유리)가 고구려로 찾아왔을 때, 그 아들을 태자로 삼으면서 확실해진다. 만약 비류와 온조가 추모와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면, 태자가 될 우선권은 유류보다 비류에게 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추모는 첫째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 유류를 태자로 내세웠다. 이는 비류와 온조가 추모의 피를 이어받지 않았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케 하는 가장 확실한 단서다.    해모수에게 버림받았던 추모의 어머니 유화부인도 비련(悲戀)의 여인이지만, 그의 둘째부인인 소서노도 비록 여장부이긴 하나 비련의 여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추모가 첫째부인의 아들 유류를 태자로 내세우자, 소서노는 격분했다. 그는 자신이 낳은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으로 내려가 새로운 나라 ‘백제’를 세우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조선상고사》에서 단재는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를 버리고 남으로 내려온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유류가 어머니 예씨와 함께 동부여에서 찾아오니, 예씨가 원후(元后)가 되고 소서노가 소후(小后)가 되었다. 또한 유류가 태자가 되고 비류·온조 두 사람의 신분이 덤받이 자식이 됨이 드러났다. 그래서 비류와 온조가 의논하여 “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우리 어머니에게 있는데, 이제 어머니는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대왕이 계신 때도 이러하니, 하물며 대왕께서 돌아가신 뒤에 유류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대왕이 살아 계신 때에 미리 어머니를 모시고 딴 곳으로 가서 딴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겠다” 하여 그 뜻을 소서노에게 고했다. 이때 소서노는 추모왕에게 청하여 많은 금·은·주보(珠寶)를 나누어 가졌으며, 비류·온조 두 아들과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8명을 데리고 낙랑국을 지나 마한으로 들어갔다.〉      백제 건국의 어머니    이러한 이야기는 단재가 어떤 고대의 사서를 참고해 기록한 것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생략되어 있는 부분이다.    아무튼 이러한 단재의 기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소서노가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벗어나 남쪽으로 내려올 때 추모와 담판을 지어 ‘재산분할’을 주장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소서노는 추모와 결혼할 당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파혼할 때 당당하게 그 권리를 주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려면 많은 재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를 건국할 때 소서노가 아들인 비류나 온조보다 더 적극적으로 기여를 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소서노가 ‘백제의 시조’라고 주장하면서 《삼국사기》의 오류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심지어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소서노가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장본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소서노가 재위 13년에 죽으니, 말하자면 소서노는 조선 사상 유일한 여성 창업자일 뿐만 아니라, 곧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다. 소서노가 죽은 뒤에 비류·온조 두 사람이 의논하여 “서북의 낙랑과 예가 날로 침략해 오는데 어머니 같은 성덕(聖德)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새 자리를 보아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에 형제가 오간·마려 등과 함께 부아악(負兒岳)-지금의 한양 북악(北岳)에 올라가 서울이 될 만한 자리를 살폈는데, 비류는 미추홀을 잡고, 온조는 하남 위례홀을 잡아 형제의 의견이 충돌되었다.〉    단재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기록된 온조 재위 13년까지를 소서노 통치기간으로 보고 있다. 즉 소서노가 죽고 나서 아들 온조가 그 뒤를 이었으므로, 실제로 본기의 온조 14년을 사실상 온조 원년으로 삼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보면 소서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모(王母)가 돌아가니 나이 61세였다.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동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노하여 오므로 편할 날이 적다. 하물며 불길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스스로 편안할 수 없는 형세라, 반드시 나라 도성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나아가 한수(漢水)의 남쪽을 순관(巡觀)하였는데, 땅이 기름져서 마땅히 거기에 도읍을 정하고 영구히 안락할 수 있는 방책을 도모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기사를 보면 온조가 어머니 소서노를 ‘왕모’나 ‘국모’로 칭하고 있다. 또한 이때에 이르러서야 온조는 나라 도성을 옮길 계획을 발표한다. 이는 그 전에 소서노가 전면에 나서서 나라 정치를 좌지우지했으며, 여장부로서 군주의 역할을 해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해 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근거로 유추할 때, 단재가 주장한 ‘백제의 시조가 소서노여대왕(召西奴女大王)이며, 하북(河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했다’는 기록은 강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國母’가 된 소서노    하북의 위례성에서 소서노가 나라를 다스릴 당시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은 그 위세에 눌려 감히 갈라서지 못했다. 그러나 소서노가 죽은 후 두 아들은 그 백성을 나누어 나라를 분립했다.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지금의 인천)에 도읍을 정했는데, 이를 ‘비류백제’라 한다. 온조는 하남 위례홀(慰禮忽)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했다. 백제 건국 후 13년간 소서노가 다스리던 이때 비로소 동·서 두 갈래로 갈라져 나간 것이다.     온조는 위례홀로 국도를 옮긴 지 3년이 되는 해 4월에 사당을 세웠는데, 바로 이때부터 국모인 어머니 소서노의 제사를 모셨다. 국모신앙은 원시시대 모계(母系)를 존중하던 유풍(遺風)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추모의 어머니 유화부인(柳花夫人)을 모시는 국모신앙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백제와는 또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유화부인을 농사의 신(神)으로 떠받드는 한편 나라를 건국한 추모의 어머니라서 ‘시조모(始祖母)’ 내지는 ‘국모’로 추앙했다. 유화부인은 추모가 동부여에서 탈출할 때 여러 곡식을 주었는데, 보리 씨앗을 빼 놓아 비둘기를 이용해 전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유화부인은 맥류경작(麥類耕作)과 관련하여 농업신으로 숭앙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뒤 고구려 건국 시조모로서 부여신(扶餘神)으로 떠받들게 되었다.    그러나 소서노를 국모로 모시는 백제에서는 그 성격이 좀 다르다. 직접 나라를 건국한 여성으로서의 국모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재도 백제의 시조를 온조가 아닌 소서노로 보았다고 여겨진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서 특별히 ‘왕모’나 ‘국모’로 호칭하면서 죽음에 대한 기록까지 소개한 것을 보면, 소서노가 백제 건국의 주역이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류근일

제대로 보는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국민이라면 지금상황을 “나라 망하는 길로 질주하고 있다”고 규정하는 데 토를 달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 망하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다. 막으려면 싸워야 한다. 저 사람들이 하는 것을 못하도록 저지하고 뒤집는 게 곧 싸우는 것이다. 그러려면 싸움의 플랜을 공유해야 한다.    우선 싸움의 순서에 관한 계획을 공유해야 한다. 당장 코앞의 긴급투쟁 과제, 중기과제, 장기과제로 나누어볼 수 있다. 당장의 과제, 예컨대 김정은 서울 입성(入城)을 ‘백두칭송-위인 방문’이란 개선(凱旋) 형식으로 만들려는 적대 진영의 의도를 분쇄해야 한다. 이 밖에도 당장의 투쟁과제는 또 있을 것이다. 협의해서 정할 일이다.    중기적 과제는 2020년의 총선이다. 그 선거에서 개헌저지선을 웃도는 승리를 이룰 수 있어야만 적대 진영의 국체변혁 기도를 막을 수 있다. 적대 잔영이 개헌 선을 넘어서면 마음먹기 따라서는 개헌을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민중 민주주의’로 바꾸고, 민중민주주의 제도로서 지역별 기능별 직장별 부문별 ‘민중위원회’ 같은 것을 창설해 그것이 기존 의회와 행정부 기능을 대폭 위임받아 직접민주주주의 또는 만중직접참여란 이름의 꼼뮌(commune)적 통치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체제적으로 북한과의 공통영역을 점차 넓혀가려 할 것이다. 사법부에서도 외부 운동권이 사법행정과 재판과정에 감 놓아라 배놓아라 할 장치를 마련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한반도 유일합버성과 영토조항도 바꾸려 할 것이다. 어울러 남한 8도를 연방국가로 만들어 향후의 남-북 연방제 또는 연합제로 가는 징검다리를 만들 것이다. 경제는 국가개입 강화, 대기업 경영권 결정과정 참여 또는 장악, 토지와 금융자산을 비롯한 사유재산권 대폭 박탈과 제한, ‘부자 증세’를 빙자한 강제적 ‘따와이’ 방식의 분배, ‘민족경재의 균형발전’란 이름의 막대한 대북 퍼주기를 강제하려 할 것이다. 동맹관계를 ‘우리민족끼리’로 대치할 수도 있다.    장기적으로 적대 진영은 2022년의 대통령 선거에 임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정권재창출을 도모할 것이다. 이에 자유민주주의 잔영이 잘못 대응하면 대한민국 소멸의 날은 급속히 앞당겨질 수 있다.    대한민국 자유민주 진영은 이상과 같은 험난한 싸움을 능히 수행할 수 있을까?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는다.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 완수 후에 자유민주주의 진영 국민에게 닥칠 운명은 외국인들의 관광거리로서도 볼 만할 것이다. 한 번 그렇게 살아보면,해봤자 말짱 소용없는 때늦은 후회와 각성과 깨침이 있을 것이다.    이쯤 됐을 무렵 때 월스트리트 저널 특파원은 서울발 기사에서 이렇게 묘사할지도 모른다. 한국인들은 한 때 너무 분수에 넘치는 삶을 나태하게 살았다. 지금의 그들의 처지가 오히려 그들에게 더 적합한 수준일지도 모른다. 사실상 이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으니(김정은)‘ 팬클럽 회원이 되어 있었다.”    이게 바라는 바인가? 아니라면 살 궁리를 헤야 한다. 우선 자유보수가 원내와 원외의 두 전선으로 나뉘어 있으면서도 서로 긴밀한 협업을 해야 한다. 원내외의 자유보수는 지금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아 통합을 억지로 할 방도는 없다. 지금 당장의 싸움을 위해서는 여러 단체가 각기 따로 있어도 공동투쟁은 할 수 있어야 한다. 김정은 서울 개선 저지투쟁을 하는 데는 친박도 응할 수 있고 비박도 응할 수 있는 것 아닌가?    2020년의 총선 투쟁 때는 후보 단일화를 안 하면 자유보수는 그야말로 처참한 공멸을 할 것이다. 이런 걸 죽어 싸다고 한다. 망국공신으로  흑역사(黑歷史)에 이름이 기리 남을 것이다. 대대손손 교과서에 실려 욕을 보게 해야 한다. 당을 합치지 못하면 후보단일화라도 헤야 한다. 불응하는 자에겐 법에 걸리지 않는 절묘한 빙식으로 사회생활애서 철저히 따돌려야 한다.    2022년의 대선투쟁에서는 총선에서 개헌저지선을 확득했을 경우엔 한 번 붙을 만하다. 그러나 총선에서 대패했을 경우엔 대선은 치르나마나 아닐까?    이런 전략을 숙의하기 위해 40~50대가 모여 청사진을 짰으면 한다. 짜서 두루 의견을 묻고 보완한 다음 그것을 서명을 통해 모두가 존중할 헌장(憲章)으로 삼아야 한다.    말은 거창하나 일손이 없구나. 이게 쓸 데 없는 독백이 되지 않기를 기원한다. 거기 누구 젊은 사람 없수? 아, 좀 나와서 이런 거라도 들여다보며 논의들 좀 하소. 하 답답해서 씨부린 것이니, 참고들 하시구려...콜록 콜록 콜록,,,또 기침이네...난 그만 들어가 볼라우...추우면 웬 몸이 이리 쑤시는지...늙으면 죽어야..해음 해음...아이구 숨차.  

조정육

오랜만에 학계 사람들을 만났다. 다섯 명 모두 대학에서 교수를 하거나 연구소에 근무하는 사람들이었다. 반주를 곁들인 저녁식사를 하면서 서로의 근황에 대한 안부가 오고 간 뒤 얘기는 자연스럽게 사회 이슈로 넘어갔다. 그때부터 식사자리는 정부를 규탄하는 성토대회장으로 돌변했다. 모두들 투사라도 된 듯한 목소리로 현 정부 정책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부동산 문제부터 남북한 정책까지, 최저임금 문제부터 예멘 난민 문제까지 주제는 다양했고 분석은 예리했다.      한번 달아오른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지금 상황은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더 심각한데 정부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내가 뽑은 대통령이 이럴 줄 몰랐다” “어떻게 노무현 정부 때 실패했던 정책을 똑같이 되풀이하느냐” “상위 1%의 부자를 잡기 위해 나머지 99%의 국민을 볼모로 잡고 있다” 등의 격앙된 목소리가 식사시간 내내 이어졌다. 하나의 이슈가 거론될 때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우리가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같은 지식인들이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란 결론에 도달했고 내일이라도 당장 행동에 옮기자는 얘기까지 나왔다. 시국선언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다음 날이었다. 아침이 되자마자 나는 어제 가장 목소리를 높였던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잘 들어갔느냐는 인사와 함께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까를 물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말이 그렇다’는 얘기지 우리가 당장 무엇을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대답이었다. 시국선언은 못 하더라도 글이라도 써서 정부가 국민들의 뜻을 알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더니 더 참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글을 써 봤자 받아줄 매체도 없고, 정부가 귀를 닫고 있는데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했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전화를 걸어봤지만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서 학교 재단이나 연구소 소장 눈 밖에 나면 좋을 게 없다는 뜻이었다. 누군가는 ‘찍히면’ 학술연구재단의 지원금을 받을 수 없다고 했고, 누군가는 외부 용역이 끊길 것을 걱정했다. 그들 모두 전날 밤의 얘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결국 그날의 비분강개함은 허약한 지식인들이 사회에 대한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데 그쳤고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날의 모임이 계기가 되어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식인의 정의, 지식인의 역할, 지식인의 책무 등등 지식인에 대한 논쟁은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 그만큼 한 사회를 지탱하는 데 지식인의 존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그런 논쟁을 정리하기보다는 역사 속에서 서로 다르게 살아간 세 사람의 예를 통해 지식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채용신, ‘황현상(像)’, 비단에 색, 95×66㎝, 구례 매천사    나라가 망하자 자결한 황현(黃玹)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하나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나는 위로 황천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한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이 유서(遺書)는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 1910년 경술국치에 맞서 자결로 생을 마감하기 전에 남긴 글이다. 그는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지는 않았다. 과거제도의 부패상을 목격하고 출세를 포기한 후 고향인 전남 구례로 낙향하여 제자들을 길렀다.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가 없다’는 얘기는 그가 나라의 녹봉을 받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 그가 망국의 날을 맞아 한·일 강제병합 체결 16일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선비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선비 된 자의 의무를 그런 식으로 실천했다. 그는 자결하기에 앞서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겼는데 그중 세 번째 시에는 나라 잃은 지식인의 고뇌가 절절하게 담겨 있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1848 ~1941)이 그린 ‘황현상(黃玹像)’에는 우국지사의 꼿꼿함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조선시대 마지막 초상화가인 채용신은 인물을 잘 그려 고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해 ‘최익현상(崔益鉉像)’ ‘전우상(田愚像)’ ‘운낭자상(雲娘子像)’ 등 수많은 초상화를 남겼다. ‘황현상’은 채용신이 전신(傳神)의 천재라는 명성에 걸맞게 얼굴의 피부결을 극세필로 그린 육리문(肉理文)이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다. 터럭 하나까지도 틀리게 않게 그리는 핍진(逼眞)함이 탁월한 수작이다. 초상화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대변한다. 40대 이후의 얼굴에 대해서는 본인 스스로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도 그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황현상’과 마주하는 순간 그의 강렬한 눈빛을 받아내기가 힘들 만큼 움찔하게 되는 것은, 입을 꼭 다문 채 말 없는 말로 우리에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가’라고.      절명시는 대체로 암울한 시대에 쓰였다. 성삼문(成三問·1418~1456)과 이개(李塏·1417~1456)도 세조의 단종 폐위에 항거해 절명시를 썼고, 개혁을 추구하다 38세에 사약을 받은 조광조(趙光祖·1482~1519)도 절명시를 남겼다. 이들이 모두 왕의 뜻에 반해 의로움을 실천하다 강제로 죽임을 당해야 했다면 황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이 차이점이라 하겠다. 항거의 형태가 꼭 자결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황현이 무장투쟁을 할 수 있는 무인(武人)이 아니라 평범한 지식인이자 선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절명이야말로 최고의 결단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나라의 녹을 먹고서도 모자라 자진해서 나라를 팔아먹겠다고 설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던 시대였다.      지금은 황현의 시대처럼 나라를 잃은 식민지 상태가 아니다. 그때만큼 절박한 상황은 아니라 해도 여전히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예를 들면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 난민 문제가 불거졌을 때, 지식인들은 난민 수용을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서로 피켓 들고 시위하는 모습을 방관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그 사건을 계기로 해서 난민 연구자들은 역사적으로 난민이 발생한 원인과 세계의 난민 현황을 다룬 글을 정리해서 발표해야 하고, 다른 나라의 난민 대체 사례 등을 첨가하여 우리는 어떤 식으로 난민대책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어야 한다.       연구자들과 지식인들이 나 몰라라 하고 입을 닫으니 황색언론과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사람들은 판단능력이 흐려져 포퓰리즘에 휩쓸리게 된다. 지식인들이 여전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을 하기 위해서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스티브 풀러는 ‘지식인: 현대사회에서 지식인으로 살아남기’에서 “무슨 생각이든, 어떤 매체를 통해서든 기꺼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려고 노력하라”고 조언한다. 꼭 유명한 매체가 아니라도, 또한 정부에서 귀를 닫고 있어 말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다는 회의가 들어도 지식인은 자신의 소신을 발표할 의무가 있다. 이것이 우리 시대에 지식인이 목숨을 바쳐야 할 시대적 소명의식이고 의무감이다. 황현이 쓴 유서와 절명시도 유명한 매체가 아니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는가.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단순히 술자리의 안주로 젓가락질만 하다 끝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공(功)을 이루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    ▲ 김홍도, ‘동강조어’ 고사인물도 8폭, 종이에 연한 색, 111.9×52.6㎝, 간송미술관 엄광(嚴光·기원전 37년~서기 41년)은 후한(後漢) 때의 인물이다. 그는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기원전 6년~서기 57년)와 동문수학한 친구였는데 유수가 황제로 즉위하자 이름을 바꾸고 은거(隱居)해버렸다. 광무제가 엄광을 찾아내어 조정으로 불렀으나 오지 않다가 삼고초려 끝에 겨우 나왔다. 광무제는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 회포를 나누다 함께 잠을 자게 되었는데 잠결에 엄광이 광무제의 배에 다리를 올려놓고 잤다. 다음 날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객성이 어좌(御座)를 범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광무제가 웃으면서 “짐이 엄광과 더불어 잤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였다. 광무제는 엄광이 조정에 머물러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엄광은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부춘산(富春山)으로 들어가 농사짓고 낚시질하며 숨어 살았다. 사람들은 엄광이 낚시질한 곳을 ‘엄릉여울(嚴陵瀨)’이라고 불렀다. ‘후한서(後漢書)’ 권83 ‘일민열전(逸民列傳) 엄광조’에 나오는 내용이다.      후대의 시인과 화가들은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의연하게 살다간 엄광의 삶을 ‘동강수조(桐江垂釣)’ ‘동강조어(桐江釣魚)’ ‘엄릉거조(嚴陵去釣)’ 등의 제목으로 작품화했다. 작품 제목에 ‘동강(桐江)’이 들어간 이유는, 엄광이 낚시질하던 엄릉여울이 절강성 동려현(桐廬縣)에 있었기 때문이다. 후한의 황보밀(皇甫謐·215~282), 남송(南宋)의 대복고(戴復古·1167~?) 등을 비롯한 여러 시인들이 엄광을 찬탄하는 시를 남겼다. 조선의 김홍도(金弘道·1745~1806)는 엄광이 낚시하는 장면을 소재로 ‘동강조어(東江釣魚)’라는 그림을 그렸다. ‘동강(桐江)’을 동음(同音)인 ‘동강(東江)’으로 표기한 것이 흥미롭다. ‘동강조어’는 그림 중간을 가위질하여 둘로 나눠도 될 만큼 화면의 중심에 넓은 공간을 배치했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춰지기를 원했던 엄광의 심정을 대변하고자 했을까.      엄광처럼 은거하는 사람을 ‘은자(隱者)’라고 한다. 은자는 ‘은사(隱士)’ 또는 ‘유인(幽人)’ ‘일민(逸民)’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이름을 감추고 숨어 사는 사람을 뜻한다. 이들은 죄를 지었거나 능력이 없어서 숨어 사는 것이 아니라 어지러운 속세(塵世)를 피하기 위해 깊숙한 곳으로 숨는다. 은자는 흔히 옛 그림에서 어부(漁夫)나 초부(樵夫) 등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물고기와 낚싯대를 든 어부와 허리춤에 도끼를 찬 나무꾼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그린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가 바로 은자들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어부와 초부는 생계를 위해 물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은자가 어부와 초부라는 신분으로 위장한 ‘가어옹(假漁翁)’이고 ‘가초옹(假樵翁)’이다. 무술영화에서 무공이 뛰어난 고단자들이 거지 행색을 하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콘셉트이다.      어부라고 해서 물론 전부 은자는 아니다. 어부 중에는 강태공(姜太公)도 있다.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을 알아봐줄 귀인을 기다리며 위수(渭水)에서 낚시질하다 나이 70에 문왕(文王)을 도와 주(周)나라를 세우는 ‘브레인’ 역할을 했다. 같은 그림이라도 함부로 예단하지 말고 맥락을 잘 살펴봐야 한다. 엄광과 강태공 모두 어부는 어부로되 그들이 지향하는 세계는 정반대였다. 강태공이 현세적이었다면 엄광은 도가적(道家的)이었다. 노자(老子)가 “공(功)을 이루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라고 얘기했듯 도가는 은자의 삶을 지향한다. 고시(古詩)에 ‘맑은 물에 귀 씻어 인간사 아니 듣고, 푸른 소나무 벗 삼고 사슴과 한 무리’라고 한 것처럼 은자의 최상의 즐거움은 유유자적함이다. 유유자적함은 티끌 세상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청복(淸福)인 까닭에 속세를 등져도 일말의 미련도 갖지 않는다. 은자가 강호자연에서 사는 모습은 ‘뻐꾸기 은사’와는 전혀 다르다.      뻐꾸기 은사는 강호에 숨어 산다면서 말로만 은둔할 뿐 속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이비’를 지칭한다. 그들의 목적은 은둔이 아니라 숨어 사는 고고한 선비라는 ‘청명(淸名)’을 얻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대로 소문이 잘 나지 않자 스스로 소문을 내게 된다. 이것은 꼬마들이 술래잡기를 할 때 술래가 숨은 아이를 오랫동안 찾지 못하면 숨은 아이가 ‘뻐꾹’ 소리를 낸 것을 비유한 말이다. 즉 내가 지금 여기 숨어 있으니 술래는 빨리 내가 숨어 있는 곳으로 오라는 소리다. 그와 같이 뻐꾸기 은사는 말로는 은둔한다고 하면서 행여 세상이 자신을 몰라줄까봐 안달이 난 모습이 마치 스스로 ‘뻐꾹’ 하고 외치는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허명(虛名)에 집착한 자들을 질타한 신랄한 풍자다.      엄광과 같은 ‘강호은둔학파’에 속한 사람 중 가장 큰 형님뻘에 속한 사람으로 허유(許由)와 소부(巢父)를 들 수 있다.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요(堯) 임금 시절의 얘기다. 허유는 요(堯) 임금이 천하를 자신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자 기산(箕山)에 숨어버렸다. 다시 요 임금이 구주(九州)라도 맡아달라고 하자 이번에는 영수(潁水)에 가서 더러워진 귀를 씻었다. 마침 소부가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려 영수에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귀를 씻는 이유를 물었다. 허유의 사연을 들은 소부는 갑자기 송아지를 이끌고 강물을 거슬러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 허유에게 소부가 한마디 했다. “그대가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내 어찌 송아지에게 먹일 수 있겠소.” 은자입네 하면서 소문을 퍼트린 허유의 속마음을 그대로 꿰뚫어본 말이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강호 은둔자의 절대고수라고 할 수 있다.      엄광이 물러나겠다고 하니 억지로 붙잡지 않고 보내준 광무제도 대단한 사람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광무제 같은 사람도 찾기 힘들다. 허명에 사로잡혀 뻐꾸기 소리를 내는 가짜 은자들도 문제지만, 누군가 이름이 조금 알려졌다 하면 공부를 할 수 있게 가만 내버려두지를 않는 사회 분위기도 문제다. 공부할 사람은 공부할 수 있게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 ‘나도 이렇게 유명한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깍두기로 끼워넣으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은자를 은자로 살아가게 놓아두어야 광무제가 될 수 있다. 지식인이 글을 쓰고 강의하는 것은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지 유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학교수는 수업시간 외에는 판판이 놀아도 되는 ‘놀고 먹는’ 직업이 아니다. 놀고 먹는 직업으로 대학교수를 하는 사람은 이미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다. 유명인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모임에 안 나온다고 비난하는 대신 논문과 책이 안 나올 때 욕을 해야 한다. 그래야 학자나 교수들이 직무유기하는 대신 자신이 하는 일에 책임감을 느낀다.      은자는 출사(出仕)하지 않고 강호에 틀어박혀 몸을 맑게 한다. 시쳇말로 더러운 물에 발을 담그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은자와 뜻을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은자의 대척점에 공자(孔子·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가 있다. 기원전 491년이었다.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섭(葉) 지역을 지나 채(蔡)나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공자가 고국인 노(魯)나라를 떠나 주유열국(周遊列國)을 시작한 지 6년째 되는 해였다. 황하(黃河)를 건널 수 있는 나루터를 찾다 밭을 갈고 있는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을 만났다. 공자는 제자 자로(子路)를 시켜 그들에게 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게 하였다. 그러자 장저와 걸익은 자로에게 나루터를 알려주는 대신 엉뚱한 말을 했다. “도도한 흙탕물이 바로 천하의 형국인데, 누구와 더불어 개혁할 수 있겠는가. 그대도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지 말고, 세상을 피한 선비를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렇게 말하고는 나루터를 알려주지는 않고 계속해서 밭을 갈았다.      이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자로문진(子路問津)’이다. ‘자로문진’은 ‘자로가 나루터를 묻다’란 뜻으로 조선 후기에 활동한 평양 출신 화가 김진여(金振汝)가 그린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1700)에 들어 있다. ‘공자성적도’는 공자의 생애를 여러 장의 그림으로 그린 화전(畵傳)으로 중국·한국·일본에서 지속적으로 그려졌다. ‘자로문진’은 ‘논어(論語)’ 미자(微子) 편에 나오는 내용인데 ‘공자성적도’의 한 장면으로 그려진 것은 물론 독립적인 주제로 그려질 만큼 인기 있는 소재였다.          도가 없으니까 은둔할 수 없다는 공자      표면적으로 보면 지나가던 사람이 나루터를 묻는 그림이지만 깊이 들어가보면 그 의미가 사뭇 깊다. 장저와 걸익으로 대표되는 도가(道家)와, 공자와 제자들로 상징되는 유가(儒家)가 맞부딪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장저와 걸익은 은자다. 그들은 ‘도도한 흙탕물이 천하의 형국’이라서 그런 세상을 피해 이름을 숨기며 농사를 짓고 살았다. 농부는 어부와 초부에 이어 세 번째 유형의 은자다. 여기서 ‘사람을 피한 선비’는 공자를, ‘세상을 피한 선비’는 걸익 자신을 지칭한다. 그들의 눈에 공자는 벼슬하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가 나루터를 가르쳐주지 않은 것은 ‘난세에 은거하지 않고 도를 행하겠다고 천하를 주유하는 공자’가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논어’와 ‘사기세가(史記世家)’를 보면 장저와 걸익뿐 아니라 여러 명의 은자들이 공자를 비난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공자는 무엇 때문에 유랑생활을 계속했을까. 나루터를 가르쳐주는 대신 동문서답을 한 은자에게 공자가 한숨 쉬며 대답한 말에 그 해답이 들어 있다. “새나 짐승과 더불어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사람 무리와 어울리지 않으면, 누구와 어울리랴. 세상에 도가 서 있다면, 내가 굳이 바꾸려 하겠는가.” 아무리 세상이 혼탁해도 결코 세상을 피해 몸을 숨기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주희(朱熹·1130~1200)는 ‘논어집주(論語集注)’에서 ‘천하가 이미 태평성세라면 굳이 개혁할 필요도 없는데, 천하에 도가 없기 때문에 도로써 개혁하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호(程顥·1032~1085)는 ‘성인은 감히 천하를 망각하는 마음을 지닐 수 없는지라, 그 말씀이 이와 같다’고 했고, 장재(張載·1020~1077)는 ‘성인은 어질어 천하를 무도하다고 단정하고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즉 은자는 천하에 도가 없으니까 은둔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공자는 도가 없으므로 은둔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공자는 제자 자공(子貢)이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궤에 넣어 보관해두시겠습니까? 좋은 상인을 찾아 파시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좋은 상인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공자는 천하에 도모하지 못할 시절이란 없다고 생각했다. 공자는 벼슬하기를 바라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임관(任官)에 의한 부귀는 공자의 목적이 아니었다. 공자의 목적은 오직 ‘제인(濟人)’, 난세에 태어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벼슬을 해도 되면 하고, 도에 의거하지 않을 경우에는 즉시 그만두었다. 55세에 길을 나선 공자는 도를 행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주유열국을 계속했고, 14년 후 68세가 되어서야 노나라에 귀국했다. 공자의 뒤를 이은 맹자(孟子·기원전 372년경~기원전 289년경)도 ‘현실정치에 참여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듯 유가(儒家)들은 모두 출사(出仕)에 적극적이었다.      누구는 은자로 살아 존경을 받았고 누군가는 은자로 살아 손가락질을 받았다. 유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은자냐 유가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 김진여, ‘자로문진’ 공자성적도, 1700년, 비단에 색, 32×57㎝, 전주박물관    지식인은 비판정신과 책임감을 지닌 자      몇 해 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란 책이 출판되었다. 뒤이어 종편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 방송되었다. ‘지대넓얕’과 ‘알쓸신잡’ 모두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지대넓얕’의 서론에 보면 ‘교양과 인문학으로서의 넓고 얕은 지식이 우리를 심오한 어른들의 대화 놀이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고 되어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교양과 인문학에 대해 목말라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문제는 우리 시대의 지식인들조차 교양과 인문학 차원의 지식 수준에 멈추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나가고 미래를 준비해야 할 지식인들이 자신의 전문지식을 사회에 환원시키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도 모자랄 판에 ‘지대넓얕’을 아는 것에 만족한다는 사실은 매우 슬픈 현실이다. 노암 촘스키는 ‘지식인의 책무’에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적합한 대중에게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진실을 찾아내 알리는 것이 지식인에게 주어진 도덕적 과제’라고 정의하면서 대중에게 진실을 알리는 이유는 교화의 목적도 있지만 ‘인간적 의미를 갖는 행동을 촉구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지식인이 ‘전문지식을 보유하고 담론에 참여하며 담론을 형성하고 주도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준비하고 숙성시켜야 하겠는가.      상황이 이러할진대 ‘지대넓얕’을 비싼 가격에 팔아보겠다고 선거 때마다 선거운동 캠프로 달려가 줄을 서는 지식인들이 수백 명씩 되는 상황은 더더욱 슬픈 현실이다. 자신의 학문세계가 얄팍하니 행여 정치판이라도 기웃거려 ‘아웃사이더’의 열등감을 만회해보겠다는 심산이 아닐까. 예전에 어느 모임에서 내가 허유와 소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어떤 교수가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소부가 송아지를 끌고 가버린 이유가 혹시, 요 임금이 자기는 ‘콜’하지 않고 허유만 캐스팅하려고 하니까 부아가 치밀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지식인들은 이제 더 이상 ‘지대넓얕’으로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행위를 그만두어야 한다. 그 대신 부당한 현실에 침묵하는 대신 자신의 전문지식을 살려 비판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여림심연(如臨深淵)’하며 ‘여리박빙(如履薄氷)’해야 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나오는 말인데 ‘심연에 임하여 살얼음을 밟는 것처럼 전전긍긍하라’는 뜻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안다고 해서, 가방끈이 조금 더 길다고 해서 우쭐대거나 거드름 피우는 대신 자신의 이론이 맞는지, 오류는 없는지, 끊임없이 묻고 검증하고 확인해야 한다. 그것이 지식인의 본분이고 지식인이 있어야 할 환지본처(還至本處)다.      세계 역사를 살펴볼 때 히틀러나 스탈린을 비롯한 모든 독재자들 곁에는 그들의 이론을 뒷받침해준 어용지식인들이 있었다. 지식인이 환지본처를 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결과다. 물론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지식인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술자리에서만 목소리를 높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유행가 가사의 주인공처럼 사는 ‘뻐꾸기 지식인’ 대신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자신의 삶으로 녹여내기 위해 실천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그나마 우리 사회가 삐꺼덕거리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다.      나 또한 지식인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느냐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조선 중기의 문신 간이(簡易) 최립(崔岦·1539~1612)은 ‘김수재가 화답한 시에 회답하다(回金秀才和章)’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다 함께 목욕하며 발가벗었다 욕을 하고/ 바보에게 꿈 이야기 해준 것도 진실로 믿는 세상/ 작은 재주에 천착하며 자랑하지 않으면/ 필시 조장하는 송나라 사람들뿐인데/ 나 역시 잘하는 게 무엇이 있으리요/ 단지 그들과 같은 것이 부끄러울 뿐이로세’.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나부터 반성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상근

파리 케브헝리박물관, 서아프리카 유물의 반환요청에 직면하고 있다. 사진 문화유산회복재단 ■ 유럽을 흔드는 프랑스정부의 아프리카 문화재 반환   프랑스, 마크롱 정부가 들어 선 이후 문화재 반환에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2017년 11월 프랑스 식민지였던 부르키나파소를 방문, 약탈문화재의 반환을 약속하였다. 이후 과거 식민지였던 세네갈, 베냉, 카메룬 등의 약탈문화재보고서를 채택하고 베냉국의 문화재 26점의 즉각 반환을 결정했다. 반환의 핵심적 이유는 “합법적 취득이 증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반환에 걸림돌이 되는 문화재법의 개정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프랑스는 외국의 문화재라도 국내에 반입되면 무조건 우리 문화재라는 문화재법이 있다. 이로 인해 약탈, 도난 등 불법적 취득을 용인하여왔다. 아프리카 유물이 상당수 보관되어 있는 케브헝리 박물관은 약 4만 6천점이 반환 대상이라는 보고이다.    프랑스에는 한국기원 문화재가 국립기메박물관, 국립도서관, 동양문명대학교도서관 등에 1,586건 2,894점(2015년 기준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발표)이 있다. 문화유산회복재단은 2018년 10월 24일부터 26일까지 국립기메박물관, 파리천문대, 케브헝리박물관, 동양문명대학교도서관을 방문, 한국기원 문화재를 조사하였다. 조사결과 정부 조사로 파악되지 않은 상당수의 문화재가 있어 이에 대한 심층적인 조사와 연구를 위해 소장 박물관 측에 협조를 요청하였고, 긍정적인 입장을 확인하였다.   미국정부는 1998년 워싱턴 회의에서 채택한 “출토 및 과거내력 공포 의무”를 이행하면서 과거 도난 사실 등 불법성이 인정되면 원산지로 반환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공포 의무를 가진 곳은 소장자이다. 따라서 소장자는 소장품의 정당한 취득을 소명해야 한다. 최근에 반환된 호조태환권, 조선왕실의 어보, 대구 동화사 '지장시왕도' 모두 과거 도난 사실이 확인되어 반환되었다.      도쿄박물관 소장 '말탄 사람'.오구라 컬렉션. 사진 문화유산회복재단 ■ 취득 경위 등 과거 내력 발표 안하는 일본   일본에는 한국기원문화재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발표로는 약 7만4천여 점, 반면 일본 학계의 조사로는 30만점 이상이라는 보고가 있다. 중국기원 문화재는 약 360만점이다. 한국기원문화재 중 150여점은 국보나 중요미술품으로 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중 상당수는 취득사유 불명(不明)이다. 즉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사유도 가지가지이다. “하도 오래된 일” “기증자가 밝히지 않아서” 등등   이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일본보수정치권의 인식이다. 단적인 예가 65년 한일협정 당시 한국문화재에 대한 이들의 생각이다. “일본에 있는 한국 문화재는 정당하게 이동하였으나, 한국이 동란으로 소실된 사정을 이해하여 요청에 의해 기증한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식민지배는 정당했고 그로 인한 피해 사실은 철저히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한국의 협상단은 이에 맞서 불법성을 따지고 ‘반환’을 요청하였으나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경제 보상 우선’으로 좌절되었다. 결국 식민지배의 불법성은 인정되지 않았고, 한국 정부는 ‘독립축하금’과 1/3수준의 유물을 ‘인도’받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 북한과 일본 수교과정에서 문화재 반환 이슈    하지만 기회는 있다. 일본은 미수교국인 북한을 상대로 과거 피해에 대한 사과하고 배상해야한다. 그 중에는 문화재반환 문제가 있다. 65년 한국협상단은 평양 출토유물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북한 소재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북한은 수교과정에서 한반도 전역의 문화재 반환을 요구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도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오구라 컬렉션’이다. 1,100여점으로 구성된 컬렉션은 한반도 전역의 출토품과 조선왕실의 유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왕실 도서관인 궁내청 서릉부에 있는 고문서도 포함되어야 한다. 이들 문서는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직적으로 약탈한 것들이다. 왜구가 개성에서 약탈한 고려불화와 쇠북도 포함될 수 있다.    일본은 공공기관 소장보다 개인 소장품이 많다. 약 90%에 달한다는 발표도 있다. 때문에 철저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또 ‘최종적, 불가역적’ 협약이 아닌 ‘지속적, 협력적’ 협약을 맺어야 한다. 역사는 물건 처분하듯이 한 번에 청산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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